강남-누가복음 20장 43절 (과부의 위치) 240206a-이근호 목사
자, 오늘 누가복음 20장 42절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주님의 주 되심은 반드시 하나님의 원수와 관련해서 주님이 등장합니다. 원수가 없는데 주님이 그냥 등장하는 법은 없고 또 주님이 등장했다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고 그 원수에 대해서 이미 승리자로 판가름 될 때 그 주님이 주님 되시는 거예요.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상대할 수 있느냐. 인간이 하나님과 상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건방진 생각인지 몰라요. 인간이 인간도 상대 못하잖아요. 우리가 타인을 상대한다는 것은 허겁지겁 우리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상대를 내 마음대로 다룰 수도 없고 그 상대가 있음으로서 내가 사는데 힘겨울 때가 한 두 가지가 아니지요.
더 나아가서 인간은 타인과 상대 못한다. 더 나아가서 뭐냐? 인간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다. 인간은 자기도 상대 못해요. 자기성질을 자기가 다룰 수가 없습니다. 상대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내 뜻대로 굴복이 되는걸 상대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냥 만나고 고집대로 헤어지는걸 상대한다고 하지 않아요. 그는 그 갈 길가고 나는 나 갈 길 가면 상대가 안 되잖아요. 뭔가 있어야죠. 만남을 통해서 뭔가 새로운 결실을 맺던지 뭐가 있어야 제대로 상대했다 또는 관계성을 맺었다 할 수 있는데 인간이 타인과 상대를 못하고 자신의 성질도 어찌 못하는 인간이 감히, 감히 하나님을 상대할 수가 있습니까? 자기 성질도 하나 주체 못하면서.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모르고 자기 단도리하는 여기에 몰입해가지고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는 것으로 상대하는 걸로 쳐주세요. 하나님 이렇게 바르게 사는데 열심히 한 걸로 해주세요. 하나님 이뻐해주세요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은 인간입니다. 다윗은 인간인데 인간이 어떻게 주님과 상대를 합니까? 안되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율법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상대할 수 있다고 하나님이 허락을 해줬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과 상대합니까? 원수와 상대해요. 인간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고 원수와 상대합니다. 인간하고 상대해서 이겨서 주님이 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원수와 상대해서 이기면 주님이 주님으로 그제서야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은 뭐냐? 주님이 상대할 대상 자체가 안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원수와 상대해서 주님이 되신다면 주님이 여전하게 자기 활동을 한다는 말은 인간을 상대하지는 않지만 이 하나님의 원수가 현재 누구와 더불어 함께 있다는 뜻이에요? 현재 하나님의 원수가 인간을 꽉 잡고 있다는 뜻이에요. 인간을 꽉 잡고 있으니까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짓을 인간을 통해서 스스로 내뱉고 내비치고 있는 거예요. 드러내고 있는 거예요. 꼭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그 짓을 인간이 그대로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다는 것은 원수를 이기고 거기 등극했다는 건데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사도행전 2장 베드로 설교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인 것을 찾을 필요가 있어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2장 27절 누가 한번 읽어보실까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아멘. 감사합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다윗이 이야기한 거예요. 다윗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면은 자기가 음부의 버림을 당하고 썩음을 당하는 그러한 위치에 인간이 놓여있다는 겁니다. 무덤에 가고 썩는 것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가 죽는 것을 내가 손댈 수 없어요. 내가 하나님 상대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의 원수도 상대 못해 인간은. 왜? 일방적으로 원수가 당해서 우리는 죽어서 무덤에 내려가고 우리의 육신은 썩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육신이 썩고 그리고 무덤에 내려간다는 것은 너 마귀한테 졌다는 이야기에요 결국. 살아볼라고 살아볼라고 나답게 살아볼라고 애썼는데 결국 죽는 순간에 다 날라갔잖아요. “뭐야 너. 인생 뭐 살았어? 한번 꺼내 봐. 인생 마지막 모습을 한번 보자.” “죽었어,” “그 다음에?” “썩었어.” “기껏 그거야? 그게 다야? 다였어? 어쩔 수 없네.” 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이 인간조차도 상대 못하는 이유가 거기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사랑은 감정의 문제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힘 주시면 제가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는데 힘에 관한 문제죠. 1. 감정문제. 하나님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겠습니다. 감정문제. 감정이 원수를 이겨요? 내가 열심히 하나님 사랑하면 우리 시체가 안 썩습니까? 안 아픕니까? 택도 없는 소리죠. 2. 힘. 그 다음에 하나님 힘을 주옵소서. 힘주시죠. 힘주시는데 그 힘의 끝은 뭐였습니까? 무덤이잖아요. 이게 지금 다윗이 고백한 거예요. 다윗이. 다윗이 인간을 대표해서 고백하는 거예요. 그럼 감정도 아니다. 사랑해도 안 되고 살라고 힘 줘도 안 된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위치입니다. 3. 위치. 우리가 원수한테 완전히 패배해서 썩고 죽는 그 위치까지 메시아가 오는 거예요. 메시아가 그곳까지 가는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 다윗이 예언한 겁니다. 홀로 나를 남겨두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홀로. 인생 나 혼자 살았지만 내가 죽고 썩는 그 자리까지 주의 말씀이 찾아와요. 시편에 나오는 이 주의 말씀이 끝까지 찾아와서 말씀을 말씀대로 이루시는 그 작업, 그 업무를 주께서 하시는데 그 이유가 뭐냐? 바로 그 자리에 주의 원수가 우리를 압제하는 방식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의 원수를 상대하지 않으면 주가 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원수를 상대해야 돼요. 우리는 원수에 대해서도 상대할 수도 없어요. 마귀한테 꾀어서 범죄했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를 이기지를 못합니다. 그냥 곱게 죽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까지 밀어붙이는 뜻으로 말씀을 주신 겁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 17절에서 23절,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인간의 열매는 마지막에 무덤입니다. 이게 인간이 평생 살아왔던 마지막 열매는 결국 헥헥 하다가 죽는 게 마지막 열매입니다. 기껏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백날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 도와준 힘으로 살았지만 마지막 열매는 시신이 되는 것. 다윗이 고백한 그것, 그게 모든 인간의 열매입니다. 죽는 열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그 나쁜 열매, 하나님의 원수의 압제를 당하는 나쁜 열매를 예수님이 합세해서 그 위치까지 오셔서 말씀대로 좋은 열매로 간주하셔서 천국으로 데려가겠다는 겁니다. 말씀대로 되니까. 하여튼 나쁜 열매는 다 짤려요. 나쁜 열매가 좋은 열매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좋은 열매에요. 그래서 어디 갔는가? 아까 누가복음 말씀처럼 하늘에 앉았어요.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좋은 열매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좋은 열매가 이 땅에 온 경로를 보자는 겁니다. 그 열매가 어디까지 내려왔느냐 하는 거예요. 그냥 땅까지만 오고 나 볼 일 다 봤다 간다 이렇게 했는가? 그 분이 부활한 자리가 위치가 어디냐 이 말이죠. 어디에서 주님의 우편에 앉을 때까지 어떤 위치에서 그 자리까지 쑥 하고 골인했느냐 하는 겁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10장 5절에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율법에 의하면 본인의 의의 열매가 있을 경우에만 천국에 갑니다. 율법에 의해서만. 그런데 여기에 율법 말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거든요 3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어떻게 나타났느냐? 6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무슨 수로 하늘에 올라갑니까. 열매도 없으면서.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라고 이야기한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움직임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우리는 이 지상에서 자기 의만 열심히 모으지만 그 자기 의는 하나님의 원수에 의해서 이거는 실패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6절에 보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목숨 잃으면 무슨 소용 있느냐” 라고 했거든요. 이 온 천하 어디에도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보낼 수 있는 의는 없습니다. 이미 온 천하가 마귀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이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해서 사람의 일은 악마의 일을 계속해서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악마의 일만 계속해서 나타나는 그러한 악마의 대변자 역할이 인간이라고 아주 단정 지으시고 그 사람은 온 천하를 돌아다녀도 자기를 건질만한 것은 인간에게는 나올 수가 없다를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로마서 방금 10장 8절에 보면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주로 시인하죠. 여기 주가 뭐냐 하면은 인간이 해내지 못한 것을 이미 주께서 다 이루었어요. 어디까지 이뤘느냐? 인간이 가볼 수도 없는 하늘, 인간이 가볼 수도 없는 그 지옥 그 사이를 이미 다 주께서 다 거쳐서 모든 것을 그 자기 위치에 부합되는 사람과 더불어 말씀과 연관된 사람이죠. 그 사람들에 이미 구원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시편 71편 20절에 오늘 많이 괴롭혀서 죄송합니다. 성경 전체가 어떻게 말씀으로 연관되는지를 볼려면 이걸 봐야 돼요. 여기 보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해버렸다는 거예요. 일을 처리해버린 거예요. 네가 음부에 간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네가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걱정 말아요 그대여. 지옥 간다 할지라도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니까 지옥 가도 걱정 안하는 사람 있었어요. 사도 바울. 내가 그리스도한테 짤릴지라도 나는 걱정 안한다. 걱정 안한다는 겁니다. 이 음부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음부를 다녀간 것은 그 죽음의 세계까지 하나님의 원수가 이미 거기 지배하고 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뭐냐 하면은 눈에 보이는 땅의 생각밖에 하지 못하거든요. 좀 지루할 것 같아서 다른 구절은 찾는걸 좀 삼가겠습니다.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사야 41장 26절 48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세요. 하나님이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듣도 보도 못한 말씀을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어요. 네가 듣도 보도 못한 말씀을 한다. 그 듣도 보도 못한 말씀이 뭐냐 하면은 내가 하늘 끝에 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고 바다 끝에 갈지라도 주께서 거기에 계시는 방식으로 주께서 모든 것을 섭렵하는 작업에 나서게 된다는 이야기에요. 주께서 앞으로 그렇게 해주신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위치라는 것이 마귀의 힘에 의해서 꼼짝마라 하는 그런 입장에 있어요. 인간이 설치고 나대고 뭘 해도 인간이 처해있는 위치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상대할 수 없습니다. 뭘 해도 하나님께서는 뭐 감정, 힘,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상대 안 해주십니다.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상당히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말씀을 믿으란 말은 믿는다는 말은 설치시는 것은 주께서 다 설치시기 때문에 그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는 거예요. 그게 믿음이에요. 제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구원받습니다가 아니라 제가 뭘 해도 소용없도록 주께서 일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다시 한번 정리하면 하나님은 우리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그럼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하나님은 마귀하고 상대하신다. 그건 창세기 15절의 약속이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과 상대합니다. 인간은 들러리고요. 인간은 소용없지요. 그냥 현재 마귀의 종으로 살다가 그냥 우왕좌왕하다가 뭐 믿습니다 하고 뭐 사랑합니다 뭐 열심히 하지만 그렇게 해도 어디까지나 자기 감정으로 돌아오죠. 자기 위치를 자기 혼자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또 진리를 찾겠다고 나서봅니다. 바다 끝에 한번 가보는 거예요. 그러나 거기 주님이 계시고 하늘 끝에 가도 주님이 계시고 그런데 구약에서는 문제가 자기 자신과 작별하지 못한다는 거에요. 신약에 와서 믿음으로 나는 아무것도 한 것 없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이러면 어떻게 돼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작별, 이별한 거죠. 자기와 헤어진 겁니다. 이걸 문장으로 하면 우리는 주님으로 살지 나는 나로 사는 게 아닌 거예요. 그런데 이 문장에서 이걸 한번 지워보겠어요. 주님으로부터 지워 버리고 아니다 지워버리면 뭐가 됩니까? 나는 나로 산다가 되지요. 나는 나로 산다가 돼요. 그러면 아까 다윗이 고백한 자기 마지막 모습, 죽어서 썩는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 혼자 살면요 그건 나중 문제고 이래요. 나중 문제라는 거예요.
자, 이렇게 되면 이게 뭐냐 하면은 내가 꾸리는 내가 장만하는 뭐가 되느냐? 나의 위치가 돼요. 나의 위치. 나의 위치를 계속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살기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고민과 근심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내가 살기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고민거리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일순간에 싹 하고 없어져버리죠. 다 없어진 거예요. 내 위치를 이쁘게 장식해서 살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고민거리 걱정거리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지요. 있을 수가 없어요. 내 안에서 말씀이 살고 나는 나와 결별한다. 내가 나를 결별하는 그 일과 현상과 말씀이 사는 현상이 서로 연동되어 있어요. 같이 움직인다고요 같이. 내 안에서 말씀이 살아버리면 더는 날 위해서 산다는 것이 성립이 안돼요.
자, 그 나라와 의를 구한다. 이게 뭐냐 하면은 나와 작별하면 이게 돼요. 나와 헤어지면 그 나라와 의가 되는 겁니다. 자기와 헤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백날 그 나라와 의를 구해봐야 이거는 거짓말입니다. 이거는 그 나라와 의가 안돼요. 다윗의 이야기의 뜻은 이거예요.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이 내 인생을 장악했다 이겁니다. 말씀 또는 예언. 주님이 내게 주신 예언이 내 인생을 장악했다. 장악했는데 어디까지 장악하느냐? 끝까지 내가 나로 작별하는 것. 강제로 작별하는 게 뭘까요? 내가 화장터에 들어가는 게 이게 강제 격리조치에요. 숨이 끊어지는 것. 숨이 끊어져서 화장터에서 몇 천 도의 불속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말씀이 주님께서 주님의 능력이 바로 거기서 우리로 하여금 건져내시는 거예요.
아모스 9장 2절에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말씀이죠.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라” 시편 139편 8절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라고 되어있어요. 도대체 이런 자세로 인생을 산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나의 위치는 이미 무덤으로 확정되었다는 뜻이에요. 내가 죽기 전부터 이미 죽었다는 뜻입니다. 결국은 나는 주님께서 음부에서 나를 건진다는 주님의 작업을 나를 통해서 증명해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필히 죽어서 썩으셔야 됩니다. 좀 이렇게 불 뜨겁더라도 참으세요. 우리가 죽어서 썩는다 할지라도 그게 자기 과업이에요. 자기 숙제고 그래야 마땅한 거예요.
물론 죽는 방법 여러 가지 있습니다. 오토바이 타고 가는데 강아지 안고 음주운전 차에 치여 죽는 그런 방법도 있고요 뭐 우리가 고를 건 안돼요. 고를 건 아니지만 아파트에서 온 식구 뛰어내려 죽는 그런 방법도 있고요 여러 가지 있잖아요. 낚시하다가 바닷물에 떨어져 죽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제가 문제 하나 낼게요. 현재 한국에서 1년 동안 우회전 차량에 치어서 죽은 사람이 180명이거든요. 180명. 그 사람은 왜 죽었게요? 그 사람 왜 죽었지요? 1번 화물차가 신호등 못 봤다. 2번 횡단보도 신호가 너무 짧았다. 3번 건널 때 좀 보고 건너지 그냥 막 건넜다. 4번 죽을 때 돼서 죽었다. 5번 건너기 전부터 이미 죽었다. 이태원에 놀러가가지고 귀신 잔치하는데 엎어져가지고 밀려서 죽었다. 그거 예방 조치하면 그 사람 삽니까? 안 살지요. 인간은 자기 목숨가지고 거래가 안 됩니다. 자기 목숨도 자기 손에 달린 게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 진짜 자기의 진면목을 무덤에서 찾았어요. 그리고 썩어있는 자기 모습에서 발견한 겁니다. 아주 넉넉하게 낮아져요. 넉넉하게. 넉넉하게 낮췄어요. 나 지금 간다. 어디로? 무덤에서 썩는 쪽으로 나는 가고 있다. 왜? 말씀이 나를 거기로 이끌기 때문에. 이런 자세였습니다.
따라서 이 성경 모든 말씀은 우리 인간의 일은 하나도 여기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킬 말씀은 단 한 개도 없어요. 못 지키고 주님이 너는 이 말씀을 못 지키지 내가 다 지켜서 내가 너와 함께 위치를 하게 되면 그 위치가 하늘나라 우편에 앉는다 라는 그 말씀으로 성경은 가득 차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하도 안 죽으니까 이래도 안 죽네 하면서 계속 말씀 주는 거예요.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알면 어떻게 됩니까? 죽어라 너! 오른 눈이 범죄하거든 빼버려라. 그럼 어떻게 됩니까? 애꾸눈. 애꾸눈도 범죄하는데 둘 다 다 빼버리고. 이 소자한테 네가 죄를 지으면 너는 연자 맷돌을 목에 걸어거지고 바다 속에 빠질거야. 그 말씀을 보고 안돼! 이러고 있잖아요. 안돼 라는 말 하면 안돼요. 원래 그래야 돼요. 원래 물에 빠져야 돼요. 빠져도 괜찮아요. 어떻게? 사람 앞에서 인자를 인정한다면 빠져도 괜찮아요.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쭉. 쭉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상대 못하는데 그럼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상대하느냐? 그게 히브리서 13장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20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상대했는가가 나와 있어요.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께서 그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뭐를 보고 이끌어내셨어요? 피는 피인데 무슨 피? 언약의 피. 계약의 피죠. 언약의 피를 보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다는 말은 주의 자리에 앉았거든요. 주의 자리. 주의 자리가 원래 하나님의 능력의 자리가 누가 차지 됐습니까? 예수님 차지죠. 하나님 아버지가 주의 자리에 있을 때 이 지상에 죽은 예수님의 무덤에 있을 때 언약의 피로서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올라가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주의 자리에 올라가게 하신 거예요. 올라가게 하셔서 우리에게 뭘 줍니까? 다 이루었다 하는 예수님의 내 살과 내 피. 피를 보내주시는 겁니다. 피를 보내주는데 죽은 자가 그걸 알 리가 없지요. 알 리가 없으니까 세트로 봐요. 세트로. 뭘 세트로 보냐 하면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는 겁니다. 성령님은 뭐만 앞장세워요? 언약의 피로 다 이루었다만 앞장세우는 거예요. 언약의 피로.
그러면 지금까지 모든 신약 구약 모든 성경해석이 어디에 다 모입니까? 그 언약의 피안에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다가 되는 거예요. 누가 알려줘요? 성령이 와서 알려주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감정 아니지요. 힘 아니지요. 위치입니다. 위치. 언약의 피가 능력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은 우리에게 힘을 주지 않아요. 언약의 피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싼 악마를 깨부시는 그 힘이죠. 중요합니다. 인간은 그동안 홀로사는 게 아니고 무엇과 함께 인간의 위치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원수의 위치에요. 하나님의 원수의 위치. 원수는 영원한 음부에 들어갑니다. 심판에 들어가지요. 음부에 있으니까 악마를 못 빠져나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음부까지 들어오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께서 힘 주시면 믿겠습니다. 힘 줘도 소용없어요. 힘은 이 껍데기 악마를 뚫고 들어오는 이 주님의 힘에서 이거는 뭐 그냥 멈춰있는 우리를 데리고 나가는 거예요 여기서. 뭐로? 데리고 나가면서 뭐만 생각하면 돼요? 피로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거예요. 하나님의 의로 데려가는 거예요. 자꾸 악마가 우리보고 너의 의로 가 거룩해 맨날 이것가지고 닦달내고 맨날 협박 공갈하니까 그때 주님의 의로 뽑아나가는 거에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우리는 어떤 신세냐 하면은 그냥 세간살이에요. 주인은 악마고 우리는 세간살이인데 담 타 넘고 주님이 오셔가지고 악마를 꼼짝마라 해 놓고 그 다음에 도둑질하듯이 우리를 악마의 품에서 데리고 나가는 방법을 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작용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너무 간단하니까 못 믿겠어요? 너무 간단하니까?
요한계시록 1장 18잘에 보면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열쇠 나오지요. 무슨 열쇠입니까?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갇혀있었다 이 말이에요. 자물쇠로 꽁꽁 포로 잡혀있었다. 그동안 교도소 안에 갇혀있었다. 갇혀있는 열쇠를 열고 우리를 거기서 끄집어낸 거예요. 주님께서. 끄집어낸 것도 주님의 의고 모든 하신 것도 주님의 공로고 그 모든 실체는 뭐냐? 십자가 피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걸 뭐만 자랑해요? 나는 오로지 십자가 피만 자랑한다. 십자가 피만 자랑한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서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이건 뭡니까? 자기와 자기와의 작별이죠. 나와 이별한 거예요. 그 성령의 선물을 여기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 주실 때 그 십자가의 피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절 13절에서 뭐냐? 믿음, 소망, 사랑 그 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 요한일서 4장에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화목제물로 주셨으니” 이것을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아까 1번 감정. 아니지요. 2번 힘. 아니지요. 3번 위치였죠. 위치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감정이 나오고 위치에서 힘이 나오는 거에요. 예수님의 감정, 사랑이 나오고 힘이 나오는 겁니다. 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항상 근거가 내가 나와 작별하는 내용으로 되어있어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그 사랑을 보게 되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찾지 않는다. 요청하지 않는다. 구하지 않는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거예요.
그럼 그동안 자기의 유익은 내가 나와 이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게 힘이 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살아버리면 그 나라와 의는 나로 가리게 되고 그게 바로 마귀가 나한테 계속 시켜왔던 거예요. 어쨌든 간에 살아야지. 다윗은 무덤에 있다는데 마귀는 자꾸 살 동안은 살아야지. 자꾸 살아야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살려고 하니까 자기 유익을 구해야 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할려고 하니까 세상의 모든 번뇌와 고민과 걱정과 근심 모든 것은 전부 다 쓰레기같은 전부 다 자기한테 쏟아지는 거에요. 쓰레기 막 쏟아지는 거에요. 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사람이 없는데. 마귀도 상대 못하는데 사람이 할 수 있어요? 안되지요. 그래서 이렇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관계는 내가 살고자 한다. 그럼 주님의 피는 인간의 모든 관계 a,b,c, 모든 관계를 피로써 이걸 잘라버려요. 이걸 잘라버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붙여버리죠. 주님의 사랑으로 붙인다. 주님 주시는 자식, 주님 주시는 남편, 주님 주신 아내. 남편한테 복종하기를 교회가 주께 하듯 하라. 이거 뭡니까? 내 사랑 내 유익, 나 살고자 하는 것 잘라버리고 주님 주신 남편으로서 섬기고 복종하는 거에요.
이런 사랑을 모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결혼 왜 해요? 남편 살릴라고 결혼합니까? 자기 살라고 하잖아요. 이왕 사는거 행복하고 외롭지 않고 행복할려고 살잖아요. 주께서 가만 두겠어요 안두겠어요? 내가 들어가면 그건 예언이 아닙니다. 내가 들어가면 말씀이 아니에요. 그걸 잘라버리지요. 자른다고요. 그걸 떼버려요. 뗄려면 너 가! 가 아니라 내가 나보고 너 가! 내가 나와의 관계를 자르도록 주께서는 이 성령으로 주의 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지요. 너는 너 자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거예요. 성경말씀에 보면 우리는 못된 열매에 불과합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하면은 내가 나의 모든 것을 털어내는 그 방법이 뭐냐?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나에게서 털어내는 방법이 뭐냐? 오늘 본문 봅시다. 누가복음 44절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그런 말씀 나오지요. 나의 모두 털어내는 방법은 주님께서 이미 다 이루었잖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책망하는 투로 질책하는 투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왜냐하면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추 털었다고 털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아직까지 죽기 전이잖아요. 죽기 전이니까 계속해서 기도 이만큼 했으니까 응답되겠지 뭐 이렇게 바르게 사니까 이정도면 복음 아는 거지 계속해서 내 안으로 축적이 되고 괜찮은 나를 조립을 해요 우리가. 괜찮은 나를. 나를 무시하지 마라 뭐 어떻고 그러니까 나와 작별했는데 무슨 일 터져버리면 조금도 작별하지 않았음이 다 들통나버려요. 나는 복음 안다. 아내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경에 보니까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이 자기의 목숨 바치라 하더라. 아 주여 그동안 아내를 목숨같이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남편 노릇 못해서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내에게 목숨 바쳐 사랑하겠습니다 하고 집에 왔는데 여보 오늘 명품 하나 뽑았다 이렇게 하고 있거든요. 죽어라!!!!! 예상 못한 것이 훅 들어와요. 훅 들어와요. 도저히 예상 못한 게 훅 들어온다고요. 그리고 아내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지 이렇게 하고 있는데 여보 오늘 병원에 갔는데 못 고친데. 못 고친데. 뭐? 여기 고장나고 여기 고장났어. 당신 직장 그만두고 나 병 수발해야 될 판이야. 내가 당신한테 미안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이야기하는데 우리 갈라서. 왜?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드라마를 봐도 너무 많이 봤나. 당신은 남은 생애를 좋은 사람 만나 살아. 나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나 이미 망가졌어. 나 못 고쳐. 유전병은 못 고쳐 이렇게 나올 때 이건 도와달라는 이야기인지 뭐.
이번 수련회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내가 미안하다 하는데 네가 왜 먼저 나한테 미안하단 소리를 한다. 가만 있어봐. 내가 추스릴 시간을 달라. 나한테 뭔가 내가 추스린다는 자체가 벌써 뭡니까? 자기와 작별 안 했어요. 작별 안 된 상태입니다. 작별했겠지요. 했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계속해서 말씀으로 몰아넣게 해서는 작별 안 될 수밖에 없는 일이 계속 터져 나옵니다. 계속 터져 나와요. 그야말로 우리 자리는 죽어서 썩는 자리가 우리 자리지 그 외에 그럴싸한 내 모습을 연상하거나 상상하거나 고독한 미식가처럼 바바리 입고 안경 쓰고 이 멋있는 이 모습 화장터에 넣어. 바바리고 뭐고 다 불에 타. 우리의 어떤 모습도 전부 다 판타지입니다.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20장 43절 (과부의 위치) 240206b-이근호 목사
그 다음에 20장 45절에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자, 이 말씀의 특징은 이것부터 먼저 아시면 이 문제는 쉽게 풀이됩니다. 과부는 헌금하는 자가 아니고 과부는 헌금의 수혜자예요. 헌금의 혜택을 받아야 될 사람이에요. 과부 자체가 일종의 헌금함이라고 보면 돼요. 헌금함. 자, 여기서 구약의 율법에 나오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그 수혜자의 삼종세트에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플러스 어떤 분.
이 분은 뭐냐 하면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더불어 함께 계셔요. 사람들은 율법으로 헌금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헌금을 하거든요. 헌금할 때 하나님은 보이는 이 사람을 경유해서 나한테 헌금하라는 거에요. 이 사람을. 이들을 통해서 나한테 헌금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고아와 과부의 생산 또는 출현은 바로 뭐냐 하면은 출애굽 정신의 유효성을 말하거든요. 출애굽 정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뜻에서 그 시대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계속해서 만들어져요. 갑자기 남편이 죽는다든지 갑자기 아버지 엄마가 다 죽는다든지. 그리고 모든 것이 거덜 나서 이주민으로 온다든지 하는 이스라엘 속에 유대인이면서도 나그네 신세로 거지 신세로 들어온다든지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은 출애굽 정신에 대해서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그 선언같은 겁니다.
방금 이야기가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나옵니다. 21절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부르짖음이 나오지요. 이 부르짖음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동기로 보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심한 고역과 심한 노동을 할 때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거든요. 그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여호와께서 출동하시면서 모세와 아론을 출동시켰고 그들에게 율법을 준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건져내겠다는 겁니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 되게 했던 그 삶의 정황 자체에서 그들을 건져내는 동시에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학대하는 그들에 대해서 내가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겠다.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고아와 과부 나그네 이 삼종세트의 뭐냐 하면은 이 땅에서 아무도 그들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일가친척이고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무도 없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출처, 통로는 다 끊긴 거죠. ㉮사람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지 못하는 지경에서 ㉯사람들에게 학대당하는 두 가지 요소.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받지 못한다. 모든 것이 다 힘들게 살고 그 힘듦에 대해서 어떤 도움을 받지 못하고 다 끊어졌다. 이 두 가지 요소를 갖추고 메시야가 와요. 예수님이 오신다고요.
예수님에 대해서 누가 도와줬어요? 아무도 안 도와줬어요. 예수님은 이 땅에 일가친척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어요.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고아고 내가 과부고 내가 나그네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래야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쪽으로 이 세상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고 거기에 대해서 정당한 심판을 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출애굽기 좀 더 봅시다. 22장 24절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고아가 아니고 과부가 아니고 나그네 아닌 사람의 허점이 뭐냐 하면은 고아와 과부의 입장을 생각 못하는 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취약점이라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부자의 가장 단점은 뭐냐?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지를 그 아슬아슬함을 본인이 체험을 안 했으니까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다시 누가복음 오늘 본문을 봅시다. 그 체험이 못된 사람이 또 있어요. 그 서기관들 지도자죠. 법을 다루는 사람이 지도자인데요. 지도자가 하는 말이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되어있지요. 서기관들이 건성으로 길게 기도하면서 노리는 것은 과부의 가산을 탐내는 이유가 어떻게 하든지 저들은 고아와 과부 안 될라고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는 입장이에요. 나는 저들처럼 팔자 더러운 인생은 살기 싫다 뭐 이런 거죠. 누구 인생 조질 일 있나. 내가 왜 뭐가 부족해서 내가 망가진 인생을 살겠어. 나는 그런 인생 살기 싫어. 그러면 그들이 인생 살려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과부의 가산을 탐을 내고 그걸 법적으로 법이니까 법적으로 약한 자니까 모르지요. 그걸 빼앗는 겁니다. 서기관들뿐만 아니고 지도자들 다 그렇지요.
자, 여기서 우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왜 하나님께서 이런 불의를 보고 왜 가만히 있느냐? 왜 하나님께서 가만 두시느냐? 서기관들 목을 치던지 하지 왜 가만 두시느냐. 이 서기관들 못된 사람이 있어야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생성될 게 아니겠습니까. 듣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 기분 되게 나쁘지만. 네가 있음으로서 세상 심판할 수 있는 근거 마련이기 때문에 너 좀 참아라. 팔자려니 하고 생각해라. 내가 값아줄께. 문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자기 신세에 대해서 이걸 흔쾌히 하나님의 뜻으로 안 받아들인다는 게 문제에요. 나도 언젠가 떵떵 거리며 살겠다는 그런 의도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어요. 가난하다 한마디로 그 당시에 최빈곤층이잖아요. 최빈곤층의 소망은 이것보다 빈곤할 수 없을까? 이걸 소망하지 않아요. 대를 이어서 내 자식은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이런 거지 자식 불러놓고 자식아 우리 가난하지. 어머니 너무 가난해요. 다 내 덕인 줄 알아라 이것아. 뭐 이렇게 자식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있어요. 어디? 21장.
21장 가난한 이 과부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하고 작별하는 것을 그렇게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겁니다. 마지막 생활비에요. 이것 다 내면 드디어 나는 더 이상 나한테 낼 게 없어요. 내가 낼 게 없으니까 더 이상 내 멱살 잡고 닦달낼 게 없어요. 다 털었으니까. 사렙다 과부 비슷하게 엘리야 시대 때. 마지막 남은 밀가루 그거 먹고 죽겠다고 아들하고 같이 먹고 죽겠다 하는데 그걸 낼름, 마지막 아름다운 최후의 파티도 그걸 낼름 엘리아가 뺏어 먹잖아요. 그걸 뺏어 먹어요. 아 독하지요. 제대로 죽어라 이 말이지 제대로. 죽는 척 죽는 폼 하지 말고 죽을려면 제대로 죽어라. 이거 과부 제대로 죽는 거예요. 그 서기관들이 활동을 어디서 주로 활동을 하느냐. 랍비들 서기관들 어디서 활동하는가? 그 당시에 성전이 있어요. 성전 구조가 이건데 성전 중간부터 그리면 이렇게 돼요. 여기 지성소 플러스 성소. 바깥뜰에 물두멍 있고 제단이 이렇게 있어요. 계단 8개 있고요 이 바깥에 행각이 있어요. 행각. 이쪽이 바로 뭐냐 하면은 이게 이스라엘의 뜰이에요. 이스라엘의 뜰. 이스라엘의 뜰이 됩니다. 뜰이 있고 계단이 있고 이걸 더 늘려서 이게 뭐냐 하면은 여인의 뜰이에요. 여인의 뜰. 남자 여자 다 갈 수 있는데 여자는 여기 까지만 가는 거예요. 여기 여인의 뜰에 보면 이렇게 행각이란 게 있어요. 행각은 뭐냐 하면은 복도식 칸막이 방들이 여기 있어요. 여기에 시니어 랍비들, 고참 랍비들이 여기 있고 여기 솔로몬 행각이 있어요. 솔로몬 행각에서 오순절 성령이 일어났던 그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 뜰이 되요. 한 뜰이 되는데 이 뜰 바깥에 이방인의 뜰이 있어요. 이방인의 뜰. 여기 있고 진짜 바깥에 있고. 여기 여인의 뜰에 13개의 헌금함이 여기에 마련되어 있어요. 13개 있습니다. 이런 법을 누가 정하느냐 하면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다 정해요.
13개의 헌금함에 번호가 매겨져 있어요.
■1번은 초태생의 처음 난 초태생의 속전을 거기에다가 헌금함에 넣습니다. 초태생의 속전.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 할 때 바로 여기 여인의 뜰까지 가서 우리 아들 장자 태어났습니다 헌금하는 그 헌금함.
■2번째가 산모의 정결. 레위기 12장에 보면 남자를 낳으면 33일 여자를 낳으면 66일 동안 더러워지고 거기에 번제로 양이나 비둘기를 드리는데 양, 비둘기 번거롭잖아요. 그걸 헌금으로 바꿔서 헌금하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3번과 4번 헌금은 번제, 속죄제. 비둘기를 대용해서 드리는 헌금을 3번 4번 헌금함에 집어넣습니다.
■5번은 제단에서 사용되는 목재, 땔감을 구입비용을 5번 헌금함에 넣어요.
■6번은 분향단에 사용되는 헌금을 거기에 넣습니다.
■7번 헌금함은 성전의 금잔을 제조하고 또 새로 바꾸는데 필요한 비용을 7번 헌금함.
■8번 헌금함은 속죄제 제물을 드리고 그 남아있는 비용을 거기에다가 드리는 것.
■9번 헌금함은 속건제 제물을 드리고 남은 비용을 넣고
■10번 헌금함은 비둘기 제물을 드리고 남은 돈을 거기에 넣어요.
■11번은 나실인, 자원해서 맹세하는 것, 나실인 내 몸을 드리겠습니다 하는 그때 서원하면서 넣는 비용.
■12번은 문둥병자가 정결한 후에 넣는 돈. 문둥병자 정결한 게 이 모퉁이에 보면 문둥병 이렇게 예식하는 게 있어요. 물 뿌리고.
■13번 하는 게 바로 오늘 과부가 드리는 감사헌금에 있는 겁니다. 그 헌금함은 어떻게 생겼는가? 그 헌금함은 뿔처럼 생겼어요. 뿔. 헌금함이 이상하지요. 오늘날 교회 헌금함이 아니고 입구는 좁고 도착지점은 넓어요. 한번 던진 헌금 도로 못 빼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법을 했던 이 자들이 13개를 해 놓고 뭐를 감시하겠어요? 헌금이 제대로 탁탁 들어가는지를 지켜보는 역할이 그들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일이 자기들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 재산을 착복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그들은 상상도 못해요. 신명기 14장 한번 봅시다.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29절에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일으키든지 어떻게 해서 어떤 집안을 작살을 내요. 박살을 내버린다고요. 다른 집안은 아빠 엄마 하하 호호 행복하게 웃으면서 크리스마스 잘 보내고 하는데 그 집안은 모든 게 작살나가지고 세상적인 어떤 기쁨이라든지 남이 누리고 있는 즐거움을 못 누리는 그러한 집구석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럴 때 그 당사자가 얼마나 자기 인생을 혐오하고 좌절하겠습니까. 이거 뭐야 이거 내 인생. 왜 나는 남들처럼 살지도 못해. 이거 뭐야. 나만 왜 이 지경이야. 얼마나 자기 인생을 서러워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과 차이 나잖아요. 그것도 나쁘게 차이 나잖아요.
그런데 여기 신명기 16장 11절에 보면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함께’라고 되어있죠. 함께. 함께. 사람이 재정적으로 차이가 나게 되면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함께’가 안 되지요. 노는 바닥 수준이 다른데 무슨 ‘함께’가 되겠어요. 수준이 다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 하나하나가 이상하게 우리가 못 지키는 말씀을 줘요. 그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에. 그냥 건전하게 살면 건전한 줄 알고 있어요. 내 인생의 어떤 인기 같은 것, 내 인생에 흠을 내는 것이 끼어들지 않기를 바래요. 내 인생에. 내 인생의 가치가 힘드니까. 친척이 있는데 다른 친척 다 잘 사는데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다 망해버리는 친척이 있다면 우리는 그 친척을 설에 와서 형님 제가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하면 온 사람 내보낼 수는 없고 가서 떡국이나 먹고 가라. 말썽부리지 말고. 뭐 얼마면 돼? 돈 얼마 뜯으러 왔어? 좀 노골적인 사람은 속으로 그렇게 이야기할 거고. 맛있는 거 좀 내놔라. 고스톱 친다고 하하 호호 난리고 끼어주지도 않고. 학폭이 따로 있습니까 그게 학폭이지. 배제시켜버리죠. ‘함께’가 안 되는 거예요.
12절에 보면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렇게 되어있다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앞장 세워서 너희들 여전히 출애굽 정신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이 날라가버렸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자, 출애굽 정신이 뭐냐? 그렇다면 출애굽 정신이 뭐냐? 14절에 보면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함께 나오지요. 출애굽 정신은 이겁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이게 출애굽 정신이에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것처럼. 출애굽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거기서 애굽에서 빠져나올 힘도 없었고 재주도 없었고 단합도 안됐을 뿐더러 애굽에서 나온다는 자체가 인간의 아이디어가 결코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그 과부는 내가 헌금하면 마지막 생활되는 것은 이거는 본인의 의지가 아니에요. 출애굽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나는 나의 의지에 의해 사는 게 아니다. 이 정신입니다. 나는 내 뜻에 의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다.
이걸 달리하면 사는 게 기적이다. 여기 앞에 하나 더 붙이면 더 좋지요. 출애굽 정신 안에서 사는 게 기적이다. 그냥 사는 건 기적이 아니에요. 출애굽 정신 안에서 사는 게 기적이에요. 출애굽 정신이라는 그 위치, 아까 첫째 시간에 위치 이야기했지요. 그 위치 안에서 사는 거예요. 그걸 신약에서는 예수 안에 사는 겁니다. 내가 홀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보호를 받고 용서를 받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게 이게 기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대구강의에서 했듯이 사랑이라는 것은 전제가 뭐라고요? 누굴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요? 사랑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내놓을 게 없으니까. 개코도 내놓을 게 없으니까. 심지어 내놓을 게 없기 때문에 사랑을 안 해도 할 수 없어요. 왜? 내가 뭐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맹탕 고아와 과부 신세로 애굽에서 나왔잖아요. 그 정신이에요 그 정신. 따라서 그 정신 모일 때에 땅 좀 있고 잘 산다. 위에 진짜 진면목은 네 옆에 있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진짜 네 모습이지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전혀 내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신명기 8장 한번 봅시다. 8장 12절에서 14절까지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할 때 우리 인간은 생각해요. 옛날에 참 고마워했었습니다. 다 지나간 옛날 이야기입니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그 옛날이 옛날이 아니고 지금 똑같은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똑같은 하나님이. 건져내주셨다 끝이 아니고 건지고 건지고 건지고 계속 건져주시는 거에요. 옆에 누굴 두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두고 계속 건져내는 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뭐냐?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데 네 마음이 교만하여”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배불리 먹고 집을 짓고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되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가 뭐에요? 너는 나를 버릴 수밖에 없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네가 어렵게 사니까 하나님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렇게 하지 내가 그 말에 안 속아 넘어가. 네가 잘돼 봐. 잘되고 야 농사 너무 잘됐다. 창고 크게 짓자. 자기가 자기하고 작별을 안 해요. 이별은 안 해요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한 20년은 간다. 보험 5개 넣어놨지. 펀드 7개쯤 넣어놨지. 걱정하지마라 할 때 출애굽 정신이 뭐냐? 오늘밤에 2시47분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네가 모아둔 저것이 다 누구 것이 되겠는가? 이 어리석은 자여. 출애굽 정신을 모르는 자가 어리석은 자에요. 철학박사, 의학박사 뭐 문학박사고 물리학박사라도 어리석은 자예요. 오늘 밤을 모르면 오늘 밤에 데려가면 모든 것이 무효가 된다는 것. 그래서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어요? 다윗의 자기 본 모습은 뭐라고요? 무덤에 내려가서 내 시신이 썩는다. 그게 네 모습이다. 이게 바로 ‘함께’입니다.
그 다음에 신명기 26장 12절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십일조를 줄 때에 마음 자세가 땅이 없어서 생산물이 전혀 없다는 그 상태가 나의 본디 나의 위치였다는 거예요 내가. 땅이 없으니까 생산물이 없으니까 레위인도 자기 땅이 없어요. 고아와 과부 나그네 역시 자기 땅이 없고요. 그러니까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도와주라는 의미가 아니고 위치를 바꾸라는 거예요. 땅 없어 자력으로 살수 없는 저 모습에서 누가 함께 있다? 하나님이 함께 있다면 그러면 가진 게 있어서 나 혼자 사는 내 쪽은 하나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 안 계신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고아와 과부 나그네 찾아가가지고 도와주세요 뽀빠이! 하듯이 도와주세요 하면서 내 가진 것을 주는 거예요. 이거 내 것 아니고 당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말은 다 줬다는 뜻이에요. 다 주고 난 뒤에 제발 10분의 9만 좀 주세요. 이게 십일조거든요. 다 주고 난 뒤에 10분의 9는 받는 거예요. 그러면 9배나 더 받네. 맏물의 위치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있다면 우리는 10분의 1을 가졌어도 맏물에 종속된 입장에 있습니다. 종속이에요 종속.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는 예수님이 맏아들 되는 거예요. 맏이라고 하는 것은 맏이 있고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 맏이에 철저하게 종속되는 겁니다. 그 맏이에게 일어났던 그 맏이가 얻게 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같이 공유하게 되어있어요. 합체하는 겁니다. 철저하게 주님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오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것 가운데 가장 아무것도 없는 게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십일조예요. 예수님이. 예수님이 십일조이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는 10분의 9를 얻어먹고 있는 거예요. 구제가 아닙니다.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반대로 도와주세요 하면서 내는 거예요. 도와주면서도. 지금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여러분 궁금해 미칠 거예요. 요즘 고아와 과부 나그네가 어디 있습니까? 할 거예요. 없어요.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이 신명기 문항을 옛날에 바리새인들이 이걸 했거든요. 바리새인들이 할 때 법적으로 했어요. 법적으로 하니까 소위 삥 뜯는 거죠. 삥 뜯는 것.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우리가 아니면 너 굶어죽어 라고 하는 그것이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인간은. 누가 누구를 도와주면 하나의 상위 위치, 그 받는 사람은 자기보다 서열상 낮은 위치가 되어버려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래서 문제 되는 거예요.
구제할 때 뭘 불지 말라고 합니까?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지요. 아까 헌금함이 어떻게 생겼어요? 나팔이죠. 나 구제했다. 옛날에는 십일조 모아서 구제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고아와 과부 나그네 그 사람들이 어디에 종속되겠어요? 반대로. 자기한테 구제비 주는 그 바리새인 사두개인 말을 듣겠어요? 안 듣겠어요? 들을 수밖에 없지요. 안 그러면 자기 굶어죽으니까. 그러니까 제대로 된 구제도 없을 뿐더러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도 없어요. 왜? 돈 있는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으니까. 주님만 쳐다보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이 시대에 없어요. 그래서 이 바리새인 지나고 난 뒤에 유럽이 기독교 국가가 됐잖아요. 기독교 국가는 18세기 산업문명 이 구제를 누가 하느냐 하면은 전에는 교회에서 했어요. 십일조를 걷어서 했는데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중세 때 성직자들이 아까 삥 뜯는 것처럼 그렇게 한 거예요. 그 삥 뜯은 거 가지고 토지를 사버리니까 그걸 봉건주의라고 합니다. 모든 토지가 피라미드 형식으로 되어 가지고 토지 가진 사람이 대장질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중세 지나고 난 뒤에 페스트 일어나고 십자군 운동 이후에는 성경 계약이 날라가버리고 인간 대 인간의 계약으로 나가요. 존 워커의 사회계약설입니다. 뭐냐 하면은 그게 민주주의의 시초지요. 인간의 일은 인간이 알아서 의논하고 산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옛날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에서 민주주의 제도 했던 그 방식을 도입하는 거예요. 그럼 구제는 누가 하느냐? 국가가 맡아서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스웨덴 북유럽에서 최초로 시도한 바로 복지정책입니다. 복지정책에서 이걸 시도하는 거예요. 최저생계비. 시급. 상향 조정. 고아와 과부를 없애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시대에 고아와 과부가 없는 거예요. 없어요. 21장에 나오는 과부. 마지막 생활비를 무슨 용도로? 내가 나와 작별하는 용도로 사용해버리는 거예요. 왜? 그것이 바로 나는 사람 보고 사는 게 아니고 주님 말씀 보고 산다는 것. 그 말씀과 이 과부는 자기 마지막 생활비를 바꿔치기한 겁니다. 그게 구약에도 나오지요. 룻 나오지요. 룻. 시어머니가 며느리 보고 시켰어요. 남자 꼬실 때 그렇게 꼬시는 거 아니다 이렇게 꼬시는 거다. 잘 때 밑에서 이불 살살살 해서 올라가라. 거부할 남자 아무도 없다. 그래서 까꿍 이렇게 해라. 까꿍. 누구세요?!!! 룻이 하는 말이 나 율법인데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한 그 조건이 충족된 율법이에요. 그러니까 가만 있어봐라 생각 좀 해보고. 우리 율법이 있으니까. 나보다 선순위가 있으니까 물어보고 포기한다하면 내가 너의 집안에 돈 다 물러주고 너 내 아내 되어라. 그래서 룻이 결혼했잖아요. 그 율법의 정신에서 뭐가 나오느냐? 다윗 언약이 나와요. 그러니까 룻이 그 집안을 살린 거죠. 엘리멜렉 집안을 살린 거죠. 이것은 뭐냐 하면은 그 시대가 사사시대였어요. 율법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는 시대에 주님의 율법 언약의 지속성은 인간은 멈춰도 주님은 멈추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 누구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 자기 의지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때 사정이 룻의 사정을 그렇게 몰아세운 거예요. 몰아세운 거예요. 그리고 그 룻이 이삭을 줍는데 하필 그 밭이 보아스 밭이란 말이죠. 하필이면. 그것도 율법이 살아있다는 뜻이죠. 아 이게 율법은 안 지키지만 율법은 살아있어요. 오늘날 시대에 말씀은 안 지키지만 말씀은 살아있어요. 세상에 어떤 보화보다도 이 말씀과 자기 자신을 바꿀 줄 아는 사람, 이게 바로 21장에 있는 이 과부입니다.
그 다음에 신명기 27장을 봅시다. 19절. 아까 구제하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당연히 줘야 돼요. 왜? 하나님이 거기 계시니까. 신명기 27장 19절에 보게 되면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 말씀이 성취가 될려면 쉬지도 않고 객이나 고아나 과부가 계속해서 발생 돼야 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이 궁금한 게 고아나 과부나 객은 왜 생깁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골고루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다 잘 살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왜 고아와 과부 불행으로 뒤집어씌운 그런 가정이 왜 태어나는가? 그 점을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이거는 어려운 게 아니에요. 제가 수백 번 이야기한 겁니다. 율법과 더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지요. 율법과 더불어 나왔습니다. 나와서 시내산에서 율법 줬잖아요. 그렇다면 어느 것이 주가 되느냐 하면은 율법이 주가 되고 이스라엘은 율법에 종속되는 겁니다. 율법이 주가 되고 이스라엘이 종속됐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어떤 조건이냐 하면은 땅이 없어야 돼요. 땅이 없다. 애굽에서 나올 때도 땅이 없었고 광야에 지날 때도 땅이 없었지요. 그러니까 남들 보면 거지떼들이에요. 광야 지날 때. 사람들은 우르르 가긴 가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애굽에서 가지고 온 가축이나 패물 같은 게 있는데 그런 것들도 어디에 냈습니까? 성막 짓고 하는데 다 내놨잖아요.
이거는 하나의 뭐냐 하면은 모험이에요 모험. 모험이고 일종의 투자 정도가 아닙니다. 투자는 수익을 기대하죠. 투자가 아니고 이거는 그냥 투기에요 투기. 다 던져버리는 거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하나님만 계시면 주의 이름만 계시면 우리는 없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없어도 괜찮다. 그래서 이 상태를 유지하면서 어디를 가느냐? 약속의 땅에 가요. 약속의 땅. 그런데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가서 개판 됐습니다. 뭐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약속의 땅 같으면 약속의 땅을 바라봐야 되는데 약속은 떼버리고 뭘 봤습니까? 땅을 본 거예요. 땅을 보니까 자기의 근본 된 토지가 마련되는데 땅을 뭐라고 하느냐? 기업 또는 상속분이라고 합니다. 레위기 25장 한번 봅시다. 레위기 25장 55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약속의 땅에서 계약조건이 뭐냐 하면은 땅 소유자가 누굽니까? 여호와가 땅 소유자에요. 땅 소유자고 거기 품꾼은 누구에요? 품꾼은 누구냐 하면은 이스라엘이죠.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포도원 비유 있습니다.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겼는데 농부들이 상속자가 오니까 죽여버리고 이거는 자기 땅 된다 했지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의 특징은 천국을 가도 내 땅 없어요. 천국 가도 내 땅이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천국 갈려면 내 소유가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에요. 내 것이 없다는 것이 벌써 실습이 돼야 돼요. 실습이 돼야 된다고요. 내 것이 없는 거예요. 내 것이 없고 품꾼이 되니까 주님께서는 거기서 농사를 짓게 합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농사를 짓게 되면 자동적으로 농사 짓게 됩니까? 아니면 아무리 열심히 농사지어도 농사가 안 되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아무리 해도 농사가 안 되게 되어있어요. 왜냐하면 땅 자체가 창세기 3장에 아무리 그들이 수고를 해도 저주가 있기 때문에. 그러면 저주를 커버를 해줘야 되요. 제거를 해줘야 된다고요. 그게 뭐냐 하면은 그들 가운데 성막이 있어요. 성막 가운데서 땅 없는 레위인들이 제대로 제사 언약을 유지가 되게 되면 땅을 슬금슬금 갈아도 고구마 이만큼, 대충했는데 포도가 들지를 못할 정도로. 그런데 내가 한 노동이 대가가 아니라 신기함이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럴 때 약속의 땅의 백성들은 땅에 초점을 하지 말고 약속이 계속해서 유효하게 지속되는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돼요. 이 약속은 뭐냐 하면은 신기함입니다. ‘신기함’. 이걸 신기함을 이렇게 표현하면 제일 좋지요. 나는 진즉에 죽어야 하는데 왜 살지? 자기 사는걸 오히려 의무시할 때 이 사람에게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신기함이 포함되어 있지요. 그런데 여기 약속의 땅이잖아요. 이 말을 고쳐야 돼요. 나는 왜 말씀을 못 버리고 살지? 하나님의 약속을 나는 왜 못 버려. 세상 사람들 성경 이거 던져버립니다. 불신 집안에 예수 믿으면 성경책 여러 권 찢어져요. 불쏘시개 막 들어가든지. 성질 드러운 형이 막 네가 취직은 안하고! 이러면서 시집도 안가고 이거 쳐다보면 시집 보내주나! 막 이래가지고. 나는 솔로나 나가라. 핍박하지요.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니고 우리도 그래야 돼요. 우리가.
그런데 신기한 게 뭐냐 하면은 말씀이 읽혀져. 전에는 말씀 보면 잠이 왔는데 전에는 말씀을 읽었잖아요. 이제는 말씀이 들어와요. 말씀의 위치가 책에 있는 게 아니고 위치가 내 속에 위치하고 있어요. 말씀이 자꾸 내 속에 위치하고 있는 거예요. 졸지에 나는 이제는 돈 있는 고아요 집 있는 고아요 한달 수입 2천만원 되는 나그네. 내가 너무 거창하게 했나. 돈은 많고 집도 넓고 다 좋은데 나그네예요. 이 땅의 나그네고 주님 없이는 못 살고 주께서 계속 신기함을 주는 겁니다. 아버지 돌아가셨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뭐? 아버지 돌아가셔서 나는 어떻게 살지! 이게 아니고 아버지가 문제가 아니라 이 말씀이 있다면 가족들 섭섭한 이야기지만 아버지고 뭐고 누구고간에 이 말씀이 있다면 그거는 말씀이 말씀 되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런 나로 하여금 말씀 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로 살기로 작심하게 하시고 이렇게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애가 성적이 내려간다. 전에는 죽어라고 패고 했다만은 공부 뭐 슬슬해라 뭐 2등할 수도 있지 뭐 이런 거예요. 대충 2등 계속 유지해 이런 식으로. 대충대충.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 거예요.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은 전혀 신비롭지 않아요. 그건 남들 다 하는 거예요. 돈 있어서 하는 건 남들 다 하는 겁니다. 돈 없어 그런 거 말고 다른 플러스 알파. 여분의 것. 그게 뭐냐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약속이에요.
자, 끝으로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이 땅을 좋아할 수밖에 없지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약속의 땅에 갔을 때에 그들은 이것이 황폐했고 그들은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약속 더하기 약속의 땅 더하기 플러스 여기 사람 있잖아요. 사람은 있다? 없다?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었던 거예요. 신약에 보면 약속의 땅에 부합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시체 돼야 되고 썩어야 마땅합니다. 주께서는 신약에 다 이루심으로 구약에 약속한 것을 여기에다가 채우지요. 채워서 약속 때문에 너는 이곳에 와 있다. 이 약속의 땅이 바로 천국입니다. 과부는 이걸 알았던 거예요. 과부로 헌금하는 자가 아니라 실은 뭡니까? 헌금을 받아야 될 사람이에요. 받아야 될 사람을 서기관이 삥땅을 다 해버렸지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과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심판 받을 마지막 모습이라는 겁니다. 누가 나 안 도와준다고 섭섭해하지 마시고 본인이나 잘하세요. 우리 자신으로 주님이 말씀과 함께 있어서 출애굽 정신을 유지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예수님처럼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말씀, 돈 되는 것도 아니고 팔자 피는 것도 아닌 그 말씀이 우리의 생명인 것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