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0장 27절 (몸의 용도) 231219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0장27절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라고 되어있습니다. 왜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만약에 사두개인이 여기 있다면, 왜 당신들은 부활이 없다고 여깁니까? 라고 하면 그 사두개인이 이렇게 이야기할거예요. “그럼 부활이 있어요?” “부활이 있습니까?” 되물을 거예요. 지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이죠? 지기 전이기 때문에 부활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부활이 없지요. 부활이 없는데 부활 이야기를 사두개인이 거론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한다는 말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을 의식해서 하는 말이에요. 바리새인은 부활이 있다고 얘기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바리새인이 왜 부활이 있다고 했을까?’ ‘저 미친 거 아니야?’ 이렇게 돼야 돼요. 이 사두개인의 존재,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 존재는 우리들로 하여금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두개인이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세오경만 믿기 때문에 그래요. 모세오경. 모세가 직접 시내 산에서 받은 것에는 부활이 없다, 부활이란 없어요. 직접 받은 거에는. 나중에 부활 나오는 것은 에스겔 또는 다니엘 부활 나오죠, 시편에도 나오고. 그러나 모세오경은 부활이라는 게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랑 동행하는 거죠, 동행하는 게 있어요. 에녹은 죽지 않고 갔다 이렇게 되어있죠. 죽지 않고 간 거예요. 죽어서 부활된 게 아니고. 동행하면서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초반부터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두개인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여러분 들어보고 어느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옳아 보이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인간 이야기가 쭈욱 계속 돼서 인간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이게 천국까지 간다. 이게 1번, 그럼 천국에 무슨 이야기 있겠습니까? 인간 이야기가 그대로 살아있죠. 부활은 뭐냐 하면 인간 이야기가 되다가 인간이 죽었어요. 죽었다 이 말이죠. 부활이란 말은 죽었다가 살아나잖아요. 여기에 누가 개입하느냐, 하나님이 개입해요. 그러면 인간은 죽었으니까 인간 이야기가 여기서 끊어지겠죠. 끊어지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받아준다. 이게 바리새인의 주장입니다. 바리새인의 주장이에요.
자, 그러면 예수님은 사두개인의 말을 따라요? 바리새인의 말을 따라요? 아니면 독자적입니까? 당연히 독자적이에요. 사두개인이 인간 이야기부터 시작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 율법을 개한테 줬어요? 원숭이한테 줬습니까? 짐승한테 줬습니까? 누구한테 줬어요? 인간에게 줬지요. 인간에게 율법을 줬다는 말은 계속 인간 이야기가 이어져야 덩달아 뭐도 살아있다? 율법도 같이 살아있는 거예요. 율법을 지키는 인간 이야기가 이어져야 율법 지킨 인간들이 천국에 들어간다라는 것이 너무나 합리적이고 논리에 타당한 이야기이고 상식에 맞는 이야기죠. 바리새인은 율법을 줬다, 잘 지켰다, 일단 죽자. 그 다음에 율법 잘 지키면 천국, 못 지키면 지옥 간다, 뭐 나쁜 부활이 된다. 바리새인은 요 주장이에요.
그러면 사두개인이 봤을 때 부활이 있다는 바리새인의 이 주장은 아주 불허한, 위험한 사고방식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 보고 율법을 줬는데 인간은 죽어서 내 몰라라 하는 게 이게 말이 되냐 이 말이죠.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법을 줬는데 ‘나 죽었으니까 이제 고만 닦달내세요’ 이래버리면 율법이 머쓱해져버려요. 율법이. 그래서 율법 이야기는 뭐로 달라져야 된다? 얼마나 잘 지켰냐 하는 인간 이야기로 율법이 인간 이야기로 바뀌어져야 이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에 부합하다, 이게 사두개인의 주장이에요. 바리새인은 그 점을 인정해요. 하지만 인간이 죽는 건 맞잖아? 죽고 난 뒤에 바리새인들은 착하게 율법 지킨 사람은 괜찮은 죽음, 행복한 죽음, 부활로 다시 살아나야 된다. 그게 왜? 그게 모세오경엔 안 나오지만 다른 데에 나오니까 다른 계시도 보충하는 것이 이게 우리가 널리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는 게 되지 않냐.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겁니다.
자, 둘 다 문제가 뭐냐 하면은, 여러분한테 물어봐야 소용없고 제가 일방적으로 하겠습니다. 둘 다 문제점이 뭡니까? 묻고 싶은데 안 물을게요. 뭐냐 하면은 ‘인간은 잊지 못한다.’ 인간 자신을 잊지 못해요. 예수님은 율법과 자기를 매칭시키면서 인간 이야기를 끊어내고요, 무슨 이야기로 바꾸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이야기로 바꾸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로 바꾸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동의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로 바뀌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로 바뀌는 이유가 뭐냐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야기로 안 바뀌고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로 바뀌느냐, 인간이 자꾸 하나님을 거론하게 되면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그 생각 속에 하나님을 믿는 자기 자신을 잊을 수가 없어요. 못내 못 잊어요 자신을. 사람이 제일 사는 게 힘든 이유가 뭔지 알아요? 본인을 잊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본인을 못 잊어요. 이게 피부 트라우마까지 막 생긴다니까, 인간은 본인을 못 잊기 때문에 모든 건강 문제나 이 사회에 있으면서 막 입술 터지고 그래요. 신기한 얘기지만 사실입니다.
제가 어느 노래 가사를 들려드릴 테니까 이게 얼마나 실제인지 꾸며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란 사실을 한번, 노래 가사 속에 있어요.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보세요. 상대방이 물어도 답변을 안 해. 전화해서 잘 있었냐 하는데, 답변이 없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럴 때 뭡니까? 메마른 나의 입술, 갑자기 자기가 왜 입술 가에 습도가 낮아져서. 메마른 나의 입술. 그래서 직접 만났어요. ‘차가운 네 눈길에 얼어붙은 내 발자국’ 상대방이 뭐라 해서 그냥 차갑게 봤는데 갑자기 여기가 동상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는 내 발자국. 그래놓고 아무 소리 안하고 돌아서거든요. ‘돌아서는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내가 원하지 않는데, ‘안녕 안녕’은 해줘야 되는데 그 상대방은 ‘목 메인 그 한마디’ 그리고 마지막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양희은 노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가사에요. 기타치고 싶어 지금. 양희은 노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가사에요.
이걸 가지고 히스테리라 하는 겁니다. 손도 안 댔는데 내 육체가 반응을 나타내요. 이유가 뭘까요? 그 사람을 아는 나의 기억이 들어있는 나를 내가 기억하기 때문에 이런 사단이 난겁니다. 인간은 혼자 자기 것만 기억하는 게 아니고 자기 것 관련된 모든 타인이 이미 내 안에 내 몸의 컨디션을 조종하고 있어요. 나를 못 잊는다는 말은 그동안 나한테 인생에 관여했던 모든 사람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자식이죠, 자식.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 바치라 합니까? 네 자식 바치라 하죠. 오늘 본문에 나올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 우리 부활이 아니고, 지금 바리새인의 문제점은 자기를 못내 못 잊어서 본인이 부활된다고 율법을 계속해서 율법책의 성경 해석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인간 부활은 없습니다. 인간 부활은 없어요. 모든 인간이 바리새인이든 사두개인이든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을 잊었어요. 심지어 십자가 달릴 때 열 두 제자도 예수님을 잊기로 했어요. 예수를 잊는다는 말은 나는 때려 죽여도 나는 나 자신을 잊을 마음이 없다는 뜻이에요. 잊을 마음이 없다. 그래서 부활은 누구 이야기냐, 십자가 부활은 누구 이야기입니까? 어느 인간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건에 해당 돼요. 그게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부활 아니에요. 부활의 첫 열매는 죽었다가 살아난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예수님 때 죽었다 살아난, 야이로의 딸 같은 그런 사람이 부활의 첫 열매 아니에요.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첫 열매가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는 어느 인간도 생각 못한 부활입니다. 누구냐? 예수님이 첫 번째 부활이에요. 첫 번째 부활. 인간이 생각하는 부활은 내가 부활된다 잖아요. 주님의 부활은 내가 부활된다가 아닙니다. 부활의 세계가 오는 거예요. 부활의 세계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세계가 등장하는 게 부활이에요. 나의 부활은 잊으세요. 부활의 세계 속에 들어가면 그게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의 세계 속에서 온 능력이 예수님을 죽은 가운데서 살려낸 그 능력이 부활의 세계를 이루는데 그 능력을 성령의 힘이라고 해요. 그 동일한 성령이 찾아 와요. 우리 성도에게 찾아오게 되면 성도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영이 너희 속에 있으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기억나지 않는 나를, 여전히 나는 기억나지 않아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는 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기억하는 조건 하에 예수님 앞에서의 십자가 앞에서의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함께 기억하게 만들어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는 걸 기억하게 만들어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은 성령 오기 전까지는 상상도 내가 그 정도였는가 할 정도로 상상도 못 할 나였습니다. 맨날 ‘나는 죽으면 안돼’ ‘난 죽으면 안돼’ 맨날 이러고 있어요. 나는 죽으면 안돼 이 말은 ‘내 기억을 나는 안 놓칠거야’ 이런 뜻이에요. 그동안 산다고 얼마나 노고가 많았습니까, 수고했습니다. 근데 그 내가 산다고 했던 모든 관계, 여동생하고 관계 이 모든 관계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복수할거야”, 이러고 있다니까. 복수할거야. 로마서 14장에 ‘복수는 네가 하는 게 아니다’ 복수는 아예 네가 할 자격이 안돼요. 복수할 권한이 없어요.
한번 적어볼께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계속 주시니까 인간은 이거를 뭐로 삼았냐 ‘권리’로 여기는 거예요. 웃기죠? 당연히 받아야 될 권리처럼 생각한다고요. 은혜가 징벌이란 사실을 상상도 못했죠. 은혜 주고 값을 요구합니다. 그걸 후불제라 합니다. 후불제예요. 우리가 치룰 값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에 대해서 치룰 만한 값을 준비할 수도 없고 제공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부활의 나라 못가요. 그래서 부활 이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있어요. 그 피로 값 주고 우리로 하여금 내 중심의 세계로 생각했던 그 죄인 중에 괴수 된 모든 것을 값을 치러줘요. 내 중심으로 생각했던 나를 못내 못 잊어하는 내 중심의 세계. 어떤 문장에 보면 이런 적절한 문장이 있어요. ‘인간은 각자 자기 섬을 갖고 있다.’ 자기 섬.
섬 특징이 뭡니까? 섬은 바다에 떠있는 섬이잖아요. 아무도 내 섬에 못 와요. 바다에 오면 총 막 쏠 거예요 아마. 노량대전이에요. 예수님 들어오면 막 쏴버려요. 각자의 섬으로 스스로 각자 섬이 있어요. 여러분 이걸 자유라 합니까? 폐쇄입니까? 폐쇄된 거예요. 언뜻 보면 자유처럼 보이지만 자발적 폐쇄에요. 자발적 감옥, 자발적 투옥, 감옥에 갇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은 각자 자기 섬을 갖고 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뭐냐, ‘인간은 각자 한 편의 영화’, 관객도 없고 무대도 없는 영화, 인간은 한 편의 영화다. 누구 영화? 나의 영화를 찍고 있어요. 나의 영화. 자기 혼자, 관객이 없어요. 자기가 혼자 자기 관객이 되는 자기가 연출, 본인 주연 해가지고 한 편의 영화 찍고 죽으면 그 영화 날라가죠. 영화 찍는다. 요 가사는 어디에 나오냐면 카더가든의 명동콜링 노래입니다. 크리스마스 때 눈 올 때 들으면 좋은데 명동콜링 노래에요. 그 노래 나와요. 이게 가사에요. 관객도 없고 한 편의 영화 같다 “달링~” 이렇게 시작해요.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인간이 알지 못하는 부활을 준비했다면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그 부활은 어떻게 해서 부활이란 개념을 형성하는가 부활이 있다 하는 쪽, 없다 하는 쪽 “다 드루와 드루와” “부활이 없다 하는 쪽도 드루와”, 그게 오늘 본문 27절입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는 논조를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서 예수님께 대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이 죄악된 거는 충분히 자기 몸에 반영을 해줘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가 살아요. 죄 때문에 죽어야 되거든요. 죄 때문에. 죄라는 것은 인간의 윤리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있는 섬, 영화 그들이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하나의 독립된 월드, 세계로 반영해서 필요로 했던 개념들이 있어요. “그 체계. 드루와. 갖고 와. 그 체계 갖고 와.”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공격하고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매일같이 공격하는 그것을 미리 선배 격이라 볼 수 있어요. 성경이 그런 점에서 굉장히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을 미리 주님 앞에 질문을 던지는 셈이 되었어요.
자,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조목조목 따져서 부활이 없는 이유를 알겠지 라고 하는 그 논조는 제가 설명하기 전에 먼저 결론부터 내립니다. 사두개인들의 주장은 부활이 없는 이유는 뭐냐면 ‘부활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는 겁니다. 부활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줬다면, 그 율법을 조립해서 늘 인간은 율법을 조립해가지고 우리 인간이 이해되는 언어를 가지고 율법을 충족시키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줬으니까 우리 선에서 일을 해야 그게 실천에 옮기잖아요. 실천에 옮길 만한 필요한 개념들을 개발하고 그걸 짜집고 연결시켜서 모든 행동을 해도 그 언어의 시스템 안에서 말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복 받고 구원 받는 최고의 민족이 된다 라는 것이 사두개인입니다. 그럼 거기에 동원되는 언어는 이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다 갖추어놨어요. 인간 언어가 필요한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부활에 대해서는 모르고, 내가 자기가 부활된다고 우기는 거예요. 살아있을 때에 율법 잘 지키면 인간은 죽으니까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이 부활해주겠지. 그게 사두개인이 보기에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그러면 죽어버리면 율법의 노선이 이게 인간 이야기가 끊어지니까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두개인의 주장은 뭐냐, 부활이 없다가 뭐냐? 하나님께서 살아계실 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예요. 에녹처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뭘 보지 않고?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있죠. 이제는 하나님과 늘 함께 있는 그 상태, 죽으면 흙 되겠죠. 흙 되더라도 인간 세계에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 그거 자체로 복이 아니냐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냐 부활이 있는 게 아니고 뭐겠어요? 비록 몸은 죽어도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있겠다 그게 사두개인 주장이에요. 지금 몸의 부활 이야기는 굳이 왜 몸이 부활해? 영혼이 함께 있으면 되지. 이제 사두개인에 다 넘어갔다 이제. 이게 너무나 이게 알기 쉬운 거예요.
인간은 혼과 육으로 되어있고, 살아있으면서 정신적으로 마음적으로 잘 지키면 영혼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으면 되잖아요. 에녹처럼, 모세처럼, 아브라함처럼. 함께 있잖아요. 그럼 되지요. 왜 굳이 이 몸이 다시 부활될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몸이 부활될 이유를. 바리새인은 그것도 모르고 성경에 있으니까 있지 이러하는 거고, 이 내막도 몰라요. 설명할 언어가 없다는, 이 사두개인 말이 맞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할 언어가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언어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 부활, 영생, 예수, 생명책 어떤 것도 부활의 능력이 안 됩니다. 언어 헬라어 히브리어 백날 해봐도 그건 아니에요. 따라서 사두개인 말대로 부활은 없습니다. 율법대로 없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설명할 언어를 개발했겠죠? 부활을 설명할 언어를 개발했습니다. 그 언어가 뭐냐 하면 인물이에요. ‘인물’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것은 뭐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에요.
이걸 가지고 이 인물을 뭐냐 하면 ‘언약 사람’, 언약을 품고 있는 사람의 등장, 언약을 품고 있는 사람이 되려면 조건이 뭐냐 하면 사탄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아는 사람만이 언약을 아는 사람이 돼요. 사탄을 품은 사람이 누구냐면 베드로입니다. 마태복음 16장23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 보고 하는 말이 “사탄아 물러가라” 했지요. 근데 베드로는 본인에 사탄이 들어갔다는 것을 인정해요? 못해요? 인정 못합니다. 평소대로 자기 견해대로 상식대로 이야기했을 뿐이에요. ‘사탄아 들어오라’ 해가지고 ‘사바사바사바’ 해서 볼펜 들고 이렇게 안 했어요. 뭐 강심술하고 이런 거 안 했어요. 그냥 살았어요. 그냥 살았는데 귀신이나 사탄은요 내 허락 맡고 들어오지 않아요. 그냥 갖고 놀아요 그냥. 그냥 들어온다구요. 사탄이 있는 건 언제 아느냐 사탄이 나갈 때 알아요. 사탕이 아니고 사탄. 사탄이 나갈 때 알아요. 그게 뭐냐면 ‘터치’ 하는 거예요. 성령 들어오고 사탄 나가고. 바톤 터치하는 거.
성령이 들어오면 ‘아 그동안 내가 마귀가 시키는 대로 말을 했다’는 사실, 그게 뭐냐면 자기를 부정 못하는 거예요. 나를 잊지 말아라. 나를 잊을 수가 없어요. 나를 안 잊으면 골치 아프고, 나를 내쫓지는 못하고, 진퇴양난이에요. 그냥 있으면 골치 아프고 나의 지나온 과거가 생각이 나가지고 힘들어 죽고, 내 안에 과거가 남아있으니까 나와 엮인 뭐 여동생 있고 모조리 다 있어요. 내가 나를 감당을 못해요. 감당하지 못합니다. “목사님 저 잠이 안와요” 잠이 안 오는 이유는 네 안에 네가 들어있으니 잠이 안 온다. 맨날 마이 스토리, 나의 이야기, 내 인생 내 이야기에요. 심지어 꿈속에도 내 이야기에요. 꿈속에도 내 이야기. 예수님께서는 우리 속에 성령을 줬는데 성령은 부활의 영이에요.
자, 부활의 영의 특징을 정말 알기 쉽게 말씀드립니다. 부활의 영의 특징은 ‘내가 감당 못할 영’. 부활의 영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영이라 하는데 이거 상세하게 이야기하는 게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산 밑에 있는 백성들이 모세의 영광을 감당했습니까? 감당 못했습니까? 감당 못했죠. 감당 못하니까 모세가 말을 못하니까 그 빛나는 광채 때문에 말을 못하니까 모세가 신광타월, 송월타월 그 수건을 이렇게 얼굴에 덮었죠. 이거는 뭡니까? 감당을 할 수가 없다 이거에요. 성령이 내게 오게 되면 내 인생을 내가 감당하는 것을 이제는 손을 들어 포기를 해줘야 돼요. 인생을. 물 건너 간 거예요. 내 섬에 북한 미사일 떨어진 거예요. 내 영화 스크린 찢어진 거예요. 내 섬 자체가 박살난 거예요.
이게 바로 부활의 영,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온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은 뭡니까?’ 우리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다른 게 아니고 내가 ‘언약맨’이 된다는 거예요. 내가 언약의 사람이 된 거예요. 졸지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계열이 되어버려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특징이 뭐냐 하면은 우리 속에 죽음에서도 이겨낸 영이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기서 그들은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살아있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살아있는 이삭의 하나님, 살아있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그 다음 차례는 누구 차례에요? 성령 받은 사람의 차례에요. 다시 말해서 너 살아 있다가 아니라 네 속에 내가 살아있다고 증거하는 거예요. 내 속에 주님이 살아있으니까 주님의 살아있음을 내가 값을 치른다든지 어떤 호응을 한다든지 “주님께 제가 협조해드리겠습니다.” 이런 것 다 주제 넘는 일이에요. 주님께서 우리 협조 받아서 일 안합니다. 일방적으로 일하죠.
마치 사탄이 베드로에게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다룬 것처럼, 주님도 우리에게 올 땐 일방적으로 다뤄요.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자 특징이 뭐냐 하면은요. 내가 살아있으면,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여기서 몇 명 등장해요? 너 등장하고 나 등장하잖아요. 내가 혼자 그걸, 너의 침묵을 감당할라고 하니까 입술만 바짝 바짝 타는 거예요. ‘차가운 네 눈길에 얼어붙은 내 발자국’. 모든 관리 내 인생 관리를 누가 해요? 내가 혼자 담당하고 내가 책임져야 돼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성령이 오게 되면 책임자가 내가 아니고 누구로 바뀌어요? 나 아니고 누구로 바뀝니까? 내 속에 다른 분이 바뀌었죠? 다른 분이 책임지죠. 그게 뭐냐 하면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선물인데요. 믿음 소망 사랑은 내가 누구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함께 있을 때 그때 성령의 기쁨이 어느 정도인지는, 들려주세요. 이거는 말로 설명이 잘 안돼요. 자, 이거는 영어인데 음악을 들어가면서 제가 바로바로 이야기할께요. 먼저 이야기할 것은 홀로 있지 않고 누구와 같이 있을 때에 어떤 감정이 드는지.
‘I bless the day I found you’ (당신을 만난 날은 축복 받은 날이요)
‘I want to stand around you’ (당신 곁에 머물고 싶어요)
‘And so I beg you Let it be me’ (그러니 당신 곁에 머물게 하세요)
‘Don’t take this heaven from one’ (이 하나 밖에 없는 천국을 빼앗지 말아주세요)
‘If you must cling to someone’ (설령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간다고 해도)
‘Let it be me’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머물게 해주세요)
‘Each time we meet love’ (우리가 사랑을 만날 때마다)
‘I find complete love’ (나는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발견했어요)
‘Without your sweet love’ (당신의 달콤한 사랑이 없었다면)
‘What would life be?’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So never leave me lonely’ (그러니 날 외롭게 두지 마세요)
‘Tell me you’ll love me only’ (오직 나만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and that’s you’ll always’ (언제나 내 곁에 떠나지 않을 거라고)
‘Let it be me’ (말해주세요)
자, 보세요. 사랑은 미친 거예요. 왜 미친 거냐면 자기는 완전히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아무 중요하지 않아요. 뭐가 중요해요? 내 곁에 당신이 있는 게 중요해요. 이게 바로 성령을 주신 믿음 소망 사랑이에요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없이 성령의 사랑이 없이 “목사님 어떤 말씀 지켜야 구원받습니까? 뭘 어떻게 실천해야 구원받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어요. 본인을 아무리 실천에 옮기고 아무리 애써도 결국은 뭘 못 잊어요? 나 자신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나 자신을.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나를 못 잊어요. 50년 40년 동안 교회 봉사하고 헌금했습니다 이것만 기억나니까, 근데 여기에 ‘Let it be me’ 1960년대 나온 노래에요. Everly Brothers가 부른 2중주, 남자 2중주 노랜데.
‘나 당신을 만난 날은 축복 받은 날이에요’ ‘당신 곁에 머물고 싶어요’ ‘그러니 당신 곁에 머물게 해주세요’ 이건 완전히 미친 거예요. 어떻게 자기를 타인에게 빼앗깁니까? 이 하나밖에 없는 천국을 빼앗지 말라, 천국에 이미 다 왔어 다 왔어. 사랑 왔으면 천국에 다 온 거예요. 지금 불신자들의 문제점은 누가 자기를 안 빼앗아가서 문제예요. 홀랑 다 빼앗기고 싶은데 아무도 자기 것을 빼앗질 않아요. 그러니까 자기 홀로 자기라는 섬에 수감생활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이에요. 사두개인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사랑이 없잖아요? 아무것도 받은 게 없어요. 없으니까 뭐로 버팁니까?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걸로 버티는데 그게 뭐냐? 신명기 25장5절 가지고 들이대는 겁니다.
신명기 25장5절 뭐냐 하면은 한번 찾아봅시다. 누가 한번 큰 소리로 읽어보세요.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절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아멘. 어떤 맏이하고 아내, 줄줄이 시동생 있다. 둘 사이에 그 집안에 대를 잇기 위해서 맏이가 자녀를 낳아야하는데 맏이하고 아내 사이에 아들이 없습니다. 25절, 아들이 없어요. 그러면 이 잘못은 어디 있습니까? 아들이 없는 잘못은 어디 있죠? 아들이 없다는 것은 이게 이스라엘이거든요.
잘 들으셔야 돼요. 이스라엘 내부에 자식이 계속 이어져야 땅을 상속받아요. 그 땅은 누구 땅이냐? 하나님 땅이에요. 하나님의 상속분이 계속 사람과 만나서 이어져야 그게 나중에 약속의 땅이 완성이 되는데 그 땅은 있는데 그 땅에 살 거주민들이 대를 이어 지파마다 상속분이 있거든요. 기업인데 그걸 받을 아들이 없을 때에 이 둘 중에 누가 문젭니까? 자식이 없을 때에. 율법이 뭐라 합니까? 누구에게 문제가 있어요? 이 여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여자가 죽음입니다. 여자가 가는 곳에 다 죽여요. 다 죽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한 죽음이 있어줘야 이스라엘이 나중에 여자의 후손이 등장해요. 메시야가 등장한다고요. 메시야가.
다시 오늘 누가복음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 20장41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시편 110편 이야기 언급하시고,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하는 말씀 있죠. 이스라엘은 죽음이 관통해야 이스라엘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와요. 근데 그 관통은, 형수는 바늘이고 형수 바늘 뒤에 실인데 그 실이 죽음의 실이에요. 계속해서 죽음이 이스라엘을 파고 들어가야 돼요. 죽음이 관통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이 메시야가 죽은 데서 나온 메시야여야 돼요. 죽은 데서.
그럼 이 말은 기존에 이스라엘은 뭐로 되어있다? 육신으로 되어있고 육신의 자식은 하늘나라에 인정을 못 받습니다. 그런 자식은 하나님이 율법으로 거부해버려요. 율법에 의해 태어난 자식이어야 돼요. 율법에 의해 태어난 자식. 그러면 율법이 율법 되려면 뭡니까? 맏이가 아들이 없어야 되니까 맏이가 아들 없는 본인은 어디 앉아있습니까? 아들에게 있는 게 아니고 형수한테 여자 쪽에 있어요. 왜? 메시야는 누구의 자손이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이거든요. 여자의 후손이에요. 창세기 35장에 유다가 다말 보고 “네 때문에 우리 집안 거덜 나겠다”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 맞아요. 다만, 거덜 나야 한다는 것이 언약맨이에요 언약. 하나님의 언약은 쉬워요. 하나님의 언약은 죽었다가 인간의 육은 죽고 영으로 다시 나야 이게 언약맨이 될 수 있다고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어야 돼요. 그럼 아브람은 죽어야 돼요. 이삭도 자기가 생각한 아들에게 밀어준 이삭은 이삭이 아니에요. 야곱을 통해서 아버지가 갱신돼요. ‘아 내가 잘못 되었구나 내가 엉뚱한 맏이한테 밀어줬구나’ 이것이 내가 알던 내가 아니어야 돼요. 야곱이 거짓말함으로써 이삭이 자기가 아는 이삭이 아니에요.
여러분 거울 볼 때 자기 모습대로 보이는 거울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자기를 찌그러지게 보이는 거울을 원하십니까? 어느 쪽일까요? 자기가 못나게 보이는 거울일까요? 자기가 잘 생겨 보이는 거울, 어느 거울을 원합니까? 인간은 잘 생긴 거울을 원하죠? 율법은 못 생긴 거울이에요. 그래서 율법을 안 본다 해요. 성경 말씀을 안 들으려 해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인간들이 납득되는 성경 해석을 보는 거예요. 왜 자기 이야기가 중간에 찌그러지면 안 되니까 나는 건전하니까 끝까지 나는 나를 괜찮은 나를 잊지를 못해요. Don’t forget. 전혀 잊지를 못해요. 항상 괜찮은 나를 우상시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모든 인간이 악마와 만나서 이 악마 속에 있으니까 이것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대한 대안은 뭐냐 하나님의 조치는 율법으로 쑤시고 들어가는 거죠. “죽어라 인간아” 가정의 대표는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남자이죠. 그러니까 아들을 낳아야 돼요. 딸은 나중에 시집가게 되면 땅 자체가 약속의 땅에 토지 상속분이 없어지니까요. 그 집에 가니까. 아들 몫이거든요. 아들이 없다는 주님의 땅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말은 주님의 언약에 상속자가 못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낳아야 되는데 아들을 못 낳았다는 말은 결국은 무슨 뜻이냐면 우리 인간은 여호와의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율법이 그 시대에 계속해서 일러주고 가르쳐주고 있는 거예요. “아들 없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그게 내 뜻이었어. 너는 상속될 자격이 없어” “그럼 어떻게 해요?” “율법이 네게 알려줄 거야” “무슨 율법이요?” “신명기 25장 5절과 6절” “그게 뭔데요?” 시동생하고 결혼해가지고 시동생은 자식이라 말하지 못하고 자식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말하지 못하고, 삼촌 해야 돼요. 콩가루 집안 되어버려요. 자기는 아버지가 뻔히 있는데 큰아버지가 자기 아버지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왜? 그게 바로 자식 내 중심 아니고 아버지 중심 아니고 약속의 땅 중심이기 때문에, 언약의 땅 중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의 땅은 율법대로 사는 율법맨, 율법대로 사는 사람만 이스라엘 자격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형수는 율법대로 들은 얘기에서 자식을 못 낳는 겁니다. 그런데 사두개인은 이 되물어가지고 뭐만 생각하냐 수평적인 지리적인 약속의 땅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이야기가 안 죽고 계속 유지되고 있는 상황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 천국이라 생각하고 그 상황을 계속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그 몸이 다시 살아난다면 어떤 모순에 빠지는가를 바리새인들이 논리를 설명합니다. 형수가 애 없어서 시동생, 또 없어가지고 시동생, 둘째 셋째 지하 7층까지 해가지고 했다. 했을 때 ‘나중에 몸의 부활이 없는데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나중에 일곱이 다 아내를 취했으니 부활 중에 그것이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하고 출제의원 되는 본인들이 답을 제안을 해 놨어요.
딱 출제 질문이 뭡니까? 군소리하지 말고 첫째나 둘째나 셋째나 넷째 그 중에 하나만 고르라는 거예요. 예수님 보고. 왜 본인이 출제 냈으니까. 이 사두개인 출제는 바리새인들에게 얼마나 써먹었으면 바리새인은 거기에 대해서 우물쭈물 아무도 답변을 못했죠. 바리새인들이 답변 못한 거, 우리 차례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답변해야 되잖아요. 예수님 답변 보지 마시고요.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정답 말씀드릴께요. ‘인간 시간은 없다’ 이걸 가지고 뭐냐 ‘천사와 동등이다’ 천사와 동등이다. 시간은 인간 이야기의 도로가 아닙니다. 주님 이야기의 도로, 통로지요. 우리 이야기하라고 우리에게 시간이 주어진 게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10분 쉬고 다음 시간에 이야기하겠습니다.
강남-누가복음 20장 27절 (몸의 용도) 231219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시간이 세 종류의 시간이 있어요. 하나는 부활을 위한 창조, 시간 창조가 있습니다.
㉮부활을 위한 시간 창조가 있고 그 다음은
㉯사라지기 위한 시간이 있고 그 다음에
㉰죽이기 위한 시간이 있어요.
살아있는 시간을 아이온이라고 하는데 이건 복잡하니까 안하고요 뭐냐 하면은 이렇게 구분하면 됩니다. 인간이 하나의 개인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통 흔히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부활을 위한 시간은 복음을 위한 시간이고
사리지기 위한 시간은 종교 시간이고
죽이기 위한 시간은 과학, 철학 시간인데 이렇게 구분하면 되는데
보통 인간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만 있고 현재 되자마자 즉각적으로 미래와 과거로 흩어지는 시간. 매일같이 현재만 있어요. 매일같이 현재. 오늘이 12월 19일이죠. 18일은 과거가 되고 20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미래가 되겠지요. 그런데 내일 20일이 되면 20일은 현재고 오늘은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산꼭대기에 올라가게 되면 항상 이렇게 갈라지는 것, 지금 이전의 것은 과거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미래. 이게 보통 인간들이 시간이라고 하는 거예요.
종교 시간은 뭐냐 하면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통합했다고 치고 한 덩어리로 생각하는 시간, 이게 종교의 시간이에요. 종교의 시간. 그래서 불교 같은 경우에는 이 시간에서 탈출을 시도합니다. 시간에 갇히면 계속해서 이 세상에 생로병사 고생만 하잖아요 고생만. 고생만 하기 때문에 제일 좋은 방법은 시간 자체에서 벗어나면 되겠지요. 그들은 그걸 해탈이라고 하는 거예요. 해탈. 참 아주 사기를 치고 있어요. 내가 보기에 바보 같애. 왜 바보냐 하면은 해탈 또는 탈출 그리고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할 때 할 때 아무리 용어를 갖다가 붙여도 자기 자신은 어떻게 됩니까? 잊을 수가 없잖아요. 자기는 매이기는 마찬가지인거에요. 자기한테 매이기는. 아무리 신학교에서 신학교수가 되고 아무리 해도 뭡니까? 본인이 사라지지를 않아요. 본인이. 본인이~~~~그 사람도 사라지지를 않아요. 해탈하는 것. 불교의 해탈 기독교의 구원이나 따지고 보면 아까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이나 전부 다 뭡니까? 누구 이득 챙기는 거예요? 자기 이득 챙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말한 것처럼 자기 혼자 살아가는 거죠. 이 땅의 특징이 모든 취미 활동이 전부 다 무슨 취미냐 하면은 자기 혼자 재미있는 취미들이에요. 전부 다. 탁구를 치든지 난을 치든지 안 그러면 축구를 하든지 등산을 하든지 따지고 보면 바둑을 하고 장기를 두고 전부 다 요트를 하든지 전부 다 자기 즐거운 거죠. 자기 즐거운 것. 돈 벌어서 나중에 유럽여행가야지. 유럽 여행가면 누구하고 갑니까? 자기 혼자 즐겁지요. 어떤 노력해도 심지어 취미 중에 하나가 복음 연구하기, 교회 바꾸기도 포함 돼요. 백날 해봐야 내가 나하고 노는 거에요. 자기 이야기 인간 이야기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이 말이죠.
죽이기 위한 시간은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현재만 있다는 이 시간이 바로 과학, 철학에서 말하는 시간입니다. 이 점을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상대성 원리라 하는 거예요. 상대성 원리는 공간 따로 시간 따로 있는 것을 공간+시간을 같이 해서 이것을 시공간이라고 같이 다뤄버려요. 시공간을 같이 다뤄버리면 절대적인 것은 뭐냐? 빛의 속도, 속도를 절대화 시켜놓고 꽉 묶어놓고 나머지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위치에 따라서 시간도 달라진다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물질이니까 물질에 중력이 작용하게 되면 시공간이 이렇게 벌어지는 거예요. 벌어지게 되면 이쪽은 산이고 여기는 산 지면이라면 산에서 지내는 것이 지면에서 지내는 것보다 빨리 늙어요. 먼저 늙어요. 산 위에 시계 놓고 산 밑에 시계 놨을 때 어느 것이 빨리 갈까요? 산 위의 시계가 빨리 가요. 같은 시계인데 빨리 가요.우주선에서 1초 2초 3초 4초 5초 6초 7초 이렇게 7초 가지만 달리는 우주선에서 7초 가지면 여기 멈춰 있는 집에서 보면 1초 2초 해서 이게 10초가 되요. 10초가 된다고요. 그러니까 달리면 젊게 되고 집구석에 앉아있으면 늙어요. 왜? 더 많은 시간이 동일한 간격에 더 많은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더 빨리 늙고 움직이면 운동하고 하면 그 시간이 짧아서 그 만큼 우리가 젊게 되는 거예요. 이게 과학적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뭐냐? 오직 측정하고 있는 나, 내 위치에 따라서 시간조차도 달라지는 거예요. 절대로 자기 이야기가 뺄 수가 없어요. 인간은 자기 이야기 뺄 수가 없어요. 종교 이야기는 시작과 처음 나중 전체를 다 보고 난 뒤에 이 시간이 끝나고 난 뒤에 무슨 세계 있느냐 이게 종교에서 나온 아이온 전체 시간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하는 시간 복음적 시간은 뭐냐 하면은 부활을 위한 새로운 창조에요. 새로운 창조. 자, 새로운 창조란 누구 시간이냐 하면은 예수님 자신의 시간이에요. 그걸 아까 언약의 시간, 예수님 자신의 시간이에요. 예수님의 자신의 시간은 철저하게 누구를 배제합니까? 인간은 배제해버려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만 죽었어요? 또 누가 죽었어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어떻게 됩니까? 모든 사람이 죽은 거예요. 이걸 달리하면 이미 모든 사람이 죽었어요. 죽은 것을 십자가에서 확인시켜주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인간은 살아도 이미 죽은 것이다. 죽은 인간이 시간을 논해? 그런다고 사냐? 죽은 인간이 종교를 논해? 해탈? 인간은 죽어야 돼. 죽는 게 운명인데 뭘 죽은 자가 어떻게 사는 방법 없겠습니까? 그 자체가 그만한 권리가 인간에게 없다는 겁니다.
그걸 누가 이야기하는가? 율법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대를 끊어놓기 위해서 대를 잇는 인물의 등장이에요. 대를 끊어놓기 위해서. 집안에 여자 하나 잘못 들이면 난리 나는 거예요. 사실은 잘 들어온 거죠. 집안에 여자 들어와서 대를 끊어놓는 거예요. 기존의 아담에 속한 대를 죽은 걸로 그것도 이미 죽은 걸로 예수님 시간으로 봤을 때 이미 죽은 걸로 간주해버립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은 죽은 육신의 족보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부활의 족보가 나오는 방법을 사용해요. 율법이 작동해서 이게 부활의 노선으로 따로 빠져나와요.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로 룻기. 엘리멜렉이 자식 없이(?) 죽었어요. 아들도(말론,기룐)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자, 약속의 땅에 있는 엘리멜렉의 땅은 누가 상속할 것인가. 누가 상속할 것인가. 정답은 다윗이 상속하고요 더 정답은 다윗 속에 있는 예수님이 상속해요. 예수님이 날라오는 율법을 온 몸으로 받고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영, 무슨 영? 부활의 영으로서 천국을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 쪽에서 날라오는 율법이 있어요.
아까 했지만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1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자, 이 말을 다시 풀이하면 질문의 취지가 뭐냐 하면은 다윗이 먼저 태어났느냐 아니면 다윗의 자손이 먼저 이 땅에 태어났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러면 먼저 태어난 것은 다윗이 먼저 태어났으니까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은 다윗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중에 태어난 다윗의 자손이 다윗을 다윗 있게 하는 주가 되겠느냐 라고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답변 못하지요. 왜 답변 못하는가? 인간은 기껏 인간이 이해하는 나중에 늙으면 죽는다는 그 시간과 그걸 대비해서 하나님의 시간, 시작과 끝 창조와 마지막의 그 모든 시간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시간이 거꾸로 우리 시간 속에 진짜 부활의 시간이 거꾸로 차고 들어온다는 사실을 이거는 인간에게 이해 못하죠. 인간은 이해 못합니다. 인간은 감당 못하지요. 성령이 온다는 것은 인간이 감당 못하는 것 내가 감당 못하는 것을 감당케 해주시기 위해 성령이 오신 거예요.
인간은 주의 말씀을 인간 힘으로 감당 못하는 이유는 아까 조건이 뭐냐 하면은 어떤 경우라도 잃어버리기 싫어서 그래요. 나 잃고 하나님이 잘한다는 것은 용납 못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물을 테니까 답변을 해보세요. 기본적으로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지은 것을 벌한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과연 타당한 이야기입니까? 인간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벌한다 할 때 이게 옳은 이야기냐 말이죠. 이게 왜 질문거리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왜 하나님 당신이 뭔데 왜 우리를 벌해. 왜 하나님이 뭔데 우리를 벌하느냐 이 말이죠. 우리가 죄가 있다 안 있다를 왜 하나님 당신이 왜 그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 죄 지어도 내가 알아서 죄 짓고 안 지어도 내가 알아서 안 짓는데 왜 외부 존재가 왜 내 죄에 대해서 거론하느냐 이 말이죠. 평소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왔습니까? 여러분 죄 지면 남들에게 내 죄 벌하라고 남 찾아간 적 있어요? 없지요. 그렇잖아요.
지금 제가 뭘 문제 삼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사법체제 자체가 정당하냐를 문제 삼는 거에요. 하나님의 사법체제. 하나님의 사법체제가 과연 정당하냐 이 말이죠. 정당하냐. 카프카라는 독일의 문학가가 일찍이 폐병 걸려 죽었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어떤 사람이 자기를 호출해가지고 재판 받으러 오라고 하는 거예요. 재판 받으러 갔는데 문이 안 열려요. 아무리 기다려도 재판 받을 기회조차 안 줘요. 거기서 묻는 것은 이거에요. 작가가 묻는 것은 어느 평론가도 그 이야기를 몰라요 지금. 카프카가 뭘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은 판사 네가 뭔데 나를 왜 재판하느냐 말이죠. 이게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 아닙니까. 차마 말은 못하고 안 끄집어내서 그렇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아니 하나님이라도 네가 뭔데 왜 내 문제에 왜 네가 관여하느냐 이 말이죠. 사법체제를 만들어도 내가 만들어요 내가. 그런데 일방적으로 당신이 사법체제 만들어놓고 일부러 우리를 강제로 거기에다가 그 시스템을 뒤집어 씌우냐 이 말이죠. 우리는 무슨 죄냐. 오히려 죄 지은 자가 누구에요? 인간을 함부로 한 누가 죄 지었어요? 하나님이 함부로 한 게 그게 죄 아닙니까? 인간은 그냥 약하디 약한 인간은 그냥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는데.
자, 이러한 반발을 우리가 진즉에 생각을 했어야 됩니다. 해야 되는데 좋게 생각해서 이런 생각 못한 것은 전부 성령을 받아서 그런 거 같아요. 그런데 진짜 불신자는요 야야 우리 집 3대째 기독교다 교회 나가야지 하면 교회 안 나가요. 바빠서 못 나가요. 지금 고3이라서 안 나가요. 내 종교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가장 근원적인 말하고 싶은 건 그거에요. 하나님이 뭔데 나를 벌주느냐. 벌주겠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역겹다는 거예요. 감히 어떻게 나를 지적해요. 아주 강력한 반발이 우리 속에 있는 겁니다. 우리 안에. 여러분들은 성령 받았으니까 그걸 극복을 했지요. 여러분 인간이 타인을 원하는 이유는 자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기 위해서 타인을 사귀어요. 나한테 문제없으면 혼자 섬에 들어가서 살면 돼요. 그런데 꼭 문제 있을 땐 교회 나와요. 목사님 저 문제 있는데요 이 문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거는 남 이용해서 지금 아닌 더 나아진 나로 더 향상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오은영 박사가 그래서 장사가 잘 돼요. 사자머리.
인간은 혼자 놀아요. 어떤 취미도. 혼자 노는데 교회 간다 이건 뭐냐? 역시 혼자 노는데 극복하는 오락을 하는데 힘이 안 되니까 하나님 좀 도와달라는 내가 스스로 신이 되는데 하나님 좀 도와달라고 교회 나가는 겁니다. 사람이 왜 직업을 갖는가? 직업 갖는 이유가요 남이 필요한걸 제공하고 거기서 내가 돈을 얻음으로써 나의 가치를 남들이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그래서 뭔가 내 속에 뭔가 있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좋은 직장으로 내가 극복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 안에 뭐가 있느냐? 두려움과 공포가 있어요. 왜 두려운지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모르는데 이게 외부의 하나님의 사법체제에 대해서 이게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반발심으로 나오게 되요. 반발심으로. 그리고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마지막 죽고 난 뒤에 불지옥 심판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납득이 되도록 설명을 해보라는 거예요 나한테. 신이 있다면 납득이 되게 설명을 해봐라. 설명해봐라. 속 시원하게 한번 설명해봐라. 그 누구도 이걸 설명한 사람이 없어요.
이 주장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 속에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있는데 이것을 말 몇 마디에 이것이 깔끔하게 날라가고 하나도 없고 두려움과 공포가 없는 상태가 뭐냐 그걸 신이라고 합니다. 나를 절대적인 자유자로 만들어서 어떤 공포도 없고 어떤 두려움도 없는 말 몇 마디 해가지고 이걸 없애준다면 난 당신을 나의 타인으로 관계할 수 있는 타인으로 인정해줄게. 이야기 해봐. 이야기 해봐. 이야기 해봐.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나를 심판할 이런 점 때문에 심판할 이유가 있다 이야기 해봐. 그러면 흔히 하는 말이 하나님이 너를 창조했기 때문에. 그러면 창조했으면 책임져야지. 무슨 그런 아버지가 있노. 아버지가 되가지고 자식이 이렇게 힘들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지옥불이 뭐냐. 이거 이야기한 게 여호와의 증인. 여호와의 증인은 지옥이 없습니다. 너무 사랑의 하나님이 사랑이 과잉이라서 없어요.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이기 때문에 지옥 이야기 왜 하느냐 겁줄라고 하는 이야기고 없어요.
창조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창조는 본인이 해놓고 우리가 죄 짓는다고 자식 보고 죄 값 받으라고 윽박지르는 그런 폭력적인 억압적인 신이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냐 설명해 보라 이렇게 나와요. 거기에 대해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대비를 했습니까? 이렇게 대비를 했습니다. 우리의 눈이 신을 보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이미 우리는 율법을 받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잘 통하는 아는 관계가 되어있어서 그러한 공포와 두려움은 우리에게는 이미 없다고 주장해요. 이걸 가지고 네 자로 하면 택한 민족.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다는 거예요. 자, 이 대목에서 어디서 잘못 됐는가? 우리의 눈이 신을 보고 있다죠. 주께서 막아버려요. 네가 보고 있는 것은 마귀를 보고 있다. 너희 아비는 악마다. 인간은 신을 봅니다. 그런데 그 신이 악마에요. 주께서 찾아온 것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정답은 바로 주님께서 귀머거리와 소경 앉은뱅이 이 사람들을 치료를 했어요. 요한복음 9장 보면 나오지요. 소경 나오지요. 치료했을 때 소경이 자기가 치료받고 난 뒤에 비로소 자기가 소경인 것을 알아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시간 자체가 예수님을 위한 시간이에요. 이건 성경에 나옵니다.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지 나를 위한 내 몸 그런 몸은 없어요. 나를 위한 내 마음 그런 마음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마음을 주시고 심지어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심은 것 인간이 죄 짓는 것 그 죄까지도 누구를 위한 죄다?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죄였어요. 그래서 소경은 비로소 소경에서 눈 뜨고 난 뒤에 멀쩡하다 한 게 아니고 비로소 소경에서 눈을 뜸으로써 내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소경이 되는 거예요. 즐거운 소경, 눈 뜬 소경. 나는 주님을 몰랐더랬습니다. 내가 소경 노릇을 제대로 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내가 귀머거리였었습니다. 내가 귀머거리가 되면 될수록 누구만 드러난다? 주님만 드러내는 거예요. 주님만 드러내는 거예요.
인간들은 축구 전반전 보고 축구 끝난 줄 알아요. 후반전이 있어요. 십자가 부활이 있어요. 전반전에 1:0 말레이시아 축구대표가 졌어요. 그런데 후반전에 4:3으로 역전해서 영웅 난리도 아니에요 지금. 완전히 김판곤이 말레이시아의 히딩크예요. 말레이시아 히딩크 됐어요 김판곤 감독이. 축구는 전반전 있고 15분 휴식 있고 후반전 있어요. 후반전 끝나야 끝난 거예요. 전반전에 인간들 십자가 밑에 다 가둬놓고 후반전은 누가 활동한다? 주께서 활동해서 결국 두 개 다 합쳐버리면 시작도 끝도 다 누굴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위해서. 이걸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주께서 이 세상에 피조물로 만든 거에요. 피조물로. 전반전은 두려움과 공포 갖고 있던 우리의 사고방식이 다시 말해서 하나님 네가 뭔데 감히 나를 지적해. 죄 문제 이런 거 내가 알아서 선악 이런 거 내가 아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나서는 고집 부리는 그것 그게 사두개인 바리새인이잖아요.
그 사두개인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죽음의 보편화, 율법이 주어진 것은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율법이 옴으로써 이미 선악과 따먹고 저주 아래 있는 자를 더욱 더 저주 되게 확인해주는 거예요. 누구에게만? 이스라엘에게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율법 주어졌으니까.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죽은 자의 보편화. 모든 인간이 다 죽어있다는 겁니다. 모든 게 죽어있는 거예요. 죽어있을 때 그냥 죽어있는 게 아니지요. 죽는 이유까지 너희들이 죽은 자라는 이유까지 율법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죽는 이유를 인간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방식이 바로 저주 받아야 마땅한 이유가 되는 겁니다. 말씀을 지켜야 된다. 말씀을 지키려면 우리의 행함이 따라야 되고 우리의 이야기가 내가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내가 작년에 헌금 얼마하고 십일조 얼마하고 이번 달에 교인 몇 명 데려오고 이런 걸 다 목사 섬기고 이런 걸 다 잊으면 안 되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 쪽에서 율법으로 심판하기 전에 율법을 우리가 소지를 해요. 율법을 소지하게 되면 내가 율법을 가지고 율법의 시행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주님의 사법체제는 날라가버리고 내가 나를 위한 나의 사법체제가 구성이 돼요. 항상 나는 의인이고 나는 선한 사람 쪽으로 판결을 내리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잘못한 건 없고 어쩔 수 없었고 남 탓이고 환경에 의해서 그렇게 해서 한 거다.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둘 다 마찬가지에요. 둘 다. 율법을 이처럼 신경을 쓰는 사람이 우리 외에 또 있겠느냐. 우리가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며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다.
주님께서 하는 말이 너희에게는 부활이 누락되었다. 나 예수한테는 부활이 있는데 너희들은 부활이 없잖아. 너희들은 부활이 없다는 거예요. 사두개인은 부활을 아예 없애버렸지요. 부활이 필요 없지요. 자기들의 착하다는 것을 증명할 그 율법적 신학체제에서는 굳이 부활이라는 게 몸의 부활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요. 영혼으로 주님과 함께 있으면 되니까. 굳이 몸의 부활이 필요 없다고요. 내 몸은 이 땅에 살다 늙어죽는 걸로 용도 다 끝났으니까. 그 다음에 영혼만 살아있다고 보면 되지요. 그러면 주님은 이야기하지요. 그러면 내 몸의 용도는 너한테 어디에 있지요? 내 몸의 용도. 네 몸 말고 내 몸. 내 몸은 너희 속에 어디 있느냐 묻는 거예요. 없지요. 없으니까 그들은 더 이상 자기 이야기 끄집어내면 안 되지요. 없으면.
아까 처음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죽음에서의 부활이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이에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죽은 자들의 특징은 부활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 단독으로 부활된 거예요. 차별해야지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됐다는 말은 이것은 모든 죄에서부터 벗어난 유일한 분이에요. 유일한 분이 영광스런 몸을 입었잖아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몸은 뭐냐? 죽은 자들 몸 말고 부활한 그 몸만 하나님께서 받아준다 이 말이죠. 그 몸만. 이거 설명은 제가 굳이 이야기 안 해도 고린도전서 15장에 한껏 들어있어요. 흙에 속한 몸 따로 있고 하늘에 속한 영 따로 있고. 아담에 속한 몸 따로 있고 그건 끝났고 두 번째 아담에 속한 몸 마지막 아담 부활은 또 따로 있고 모든 것은 따로 있어요. 그게 성령이 아니면 왜 못 믿는가? 자꾸 자기가 자기 이야기를 멈출 수가 없어요. 자기 이야기를 자기가 스스로 끊어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 보면 34절에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왜 장가 가고 시집 가는 겁니까? 혼인은 뭘 위한 혼인입니까? 죽은 자를 생산하기 위한 혼인이에요. 속 시원하지요. 죽은 자만 계속 생산하라고 혼인하는 거예요. 그래야 죽음이 보편화되니까. 퍼져나가니까. 죽음이 퍼져나오니까. 그래서 율법은 뭐냐? 대를 끊기 위한 대 잇기. 대를 끊어버림으로서 대를 잇는 거예요. 노선을 바꾸는 거예요. 노선을. 아까 룻 이야기 잠깐 했지만 룻은 이방 여인이에요. 땅이 없는 자예요. 땅이 없는 자가 얻을 수 없는 집안에 땅 없는 자가 합류가 돼요.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대를 이을 수 없는, 땅을 얻을 수 없는 그 집안에 아예 그 약속의 땅의 바깥의 인물인 이방여인이 들어온다고요. 이방여인이 들어오면서 뭘 갖고 들어오느냐? 율법을 갖고 들어와요. 율법을. 율법이 뭐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는 출애굽기의 취지가 그대로 아직도 살아있는 법. 처음 이스라엘 아니었다가 이스라엘 될 때 그때 적용되는 그 법을 이 이방여인이 이스라엘 속에 오면서 아직도 살아있는 거예요. 그 출애굽 법이. 고엘 법. 고엘 법이라고 하는 것은 후견인 법. 없는 사람 누가 대신해서 그 사람 채워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편입시키는 거예요. 편입시키는 것. 자격 아닌데 편입시켜주는 거예요. 조건이 있어요. 원래 처음 들어올 때 원리를 계속 갖고 있느냐의 여부예요.
룻은 이방여인이에요. 그리고 룻은 말하기를 나는 어머니를 떠날 수 없습니다. 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나의 하나님이 어머니의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뭐냐? 어머니 죽는 곳에 나도 같이 죽겠습니다. 그 룻이 누구하고 결혼했지요? 보아스하고 했지요. 재벌 아닙니까. 옛날 토지 많으면 재벌이죠. 그 재벌이 나오미의 죽었던 재산까지 다 찾아줬습니다. 심지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증조할머니가 룻이에요. 자자손손 끝에 보면 다윗이 태어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국이 시작이 돼요.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원래 취지는 율법을 무시당하면서 당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진짜 율법의 진수가 나오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소경이 소경으로 죽어 마땅한데 소경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서 눈을 뜨게 만듦으로써 정작 내가 눈을 떴다가 아니라 눈을 뜨게 하신 분과 함께 있는 거예요.
‘Let it be me’ 아까 가사를 빨리 지나갔지만 사실은 완전히 자기 개인 생각이 날라가버렸어요. 사랑 앞에 뭡니까. 이거는 본인 때문에 삽니까? 옆에 있는 사람 때문에 살아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4장 7절. 이게 은사 아닙니까. 은사. 성령의 은사거든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주님 저 없어도 괜찮아요 주님 계시면 됩니다.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은 주님이 살아있지 나는 이미 죽었어요. 자,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죽은 씨앗을 남기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장가도 가고 시집간다 따라서 사두개인들아 너희들은 죽은 율법을 적용시켰다. 죽은 자에게. 죽은 집안이 어떻게 되고 앞으로 하면 어떻게 되느냐. 죽을 수밖에 없고 저주받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율법 해석이 현재에 있는 이 몸, 이 몸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려는 그 사고방식이 저주받을 사고방식이에요. 이 몸은 잊으세요. 붙들어도 늙어죽으면 나중에 화장터에 하나의 재가 되면 없어집니다. 안녕이에요 안녕.
그러면 부활 때 어떻게 되느냐? 35절에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라고 되어있지요. 천국에는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일곱 시동생 만나고 남편 만나고 형수도 있다면 그때는 오! 김 천사 박 천사 천사가 되어있지 여보! 이런 건 없어요. 남성 여성도 없어요. 그냥 여보 할 것도 없어요. 그리고 둘이 만나도 둘이 개인적으로 못 만나요. 어디를 경유해서 어느 자리에서 만나느냐 하면은 주님 보좌 앞에서 만나요. 주님 보좌 앞에서. 어디 김 천사 노래 한번 불러보지 찬송. 그 다음에 나 부를게 이러고. 날개로 가리고 영원히 찬양하지요. 이 말은 뭐냐? 우리가 못 올 곳에 왔다는 거예요. 소경이 눈을 떴다? 그러면 내가 눈 뜰 인간이 아닌데 왜 눈이 떴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 보라고. 주님 말씀 들으라고 귀 들리고 주님 말씀 보라고 눈 뜬 거예요. 눈 뜬 나 보라고 한 거 아니고. 이런 이야기하면 목사님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Let it be me’ 사랑을 하세요. 사랑을 하라고. 미쳐버리라고. 자꾸 자기 사랑하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요령 부릴 생각하지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 이야기해야 됩니까?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 다음에 또 어려운 게 또 있네요. 37절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로 들리지만 예수님 이야기로 전환시키면 굉장히 쉽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공통적인 분이 계세요 그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각자 안에 다 들어있어요. 아브라함이 사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뭐냐? 껍질이죠. 내 안에 주님 살아계시다 이거 증거하라고 아브라함 인생 관여했고 이삭 인생 관여했고 야곱 인생 관여한 거예요. 천국이란 이 세상이 감당 못할 세계에요. 감당 못할 세계입니다. 그럼 천국이 이 세상이 감당 못할 세계라면 천국에 들어갈 백성들이 본인이 감당 못할 자가 천국의 백성인 나에요. 내가 나를 감당 못해요.
우째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본인이 본인 일을 감당 못해요. 우째 내가 비트코인 이런걸 투자했지 이런 거 말고, 내가 미쳤지 이런걸 왜 했지 이런 거 말고. 어떻게 내가 내 인생이 있는데 어떻게 나 살려는 것이 우선인데 어떤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나만 이용해서 극복하려는 이런 것보다도 “그냥 냅둬 그냥 살다 죽을래” 왜 이런 자유함이 왜 생기느냐 이 말이에요. 배짱인지 오기인지 도대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내가 생각하는 그 행동을 왜 내 의지에서 안 나오고 있느냐. 이거는 나란 인간이 날 감당 못하는 이유는 천국 백성은 내가 감당 못해요. 백성도 감당 못해야 돼요. 내가 감당하면 안돼요. 내가 내 관리 하에 두면 안 됩니다. 제가 서울강의하면서 마리아 이야기했잖아요. 마리아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누구한테 이야기해도 알아주겠어요? 성령에 의해서 임신했다 그게 신문에도 안 나와요 그거는. 유투브 나와도 욕 디게 얻어먹어요. 말이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법체제에 대해서만 시비 걸지 난데없이 성령이 오시고 난데없이 이디오피아 내시가 난데없이 이사야 54장 펴가지고 이분 누구에요? 이분 누굽니까? 성경에 어떤 특정 은혜를 가지고 이 분이 누굽니까? 관심을 드러내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에요? 내가 감당 못할 이야기에요. 내 이야기는 내 이익만 들어있어야 돼요. 그런데 내 이익과 별개의 다른 분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통해서 이게 퍼져 나온다는 것, 사도 바울은 그걸 향기라고 했지만 이 복음의 향기가 나오는데 내가 담을 수도 없어요. 막 퍼져 나오는데. 미친 게 분명해요. 그런데 그 미친걸 고치기 싫어. 성경을 본다는 것은 도저히 말 할 수 없는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를 보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110편, 시편에 친히 이야기하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라고 했는데. 하나 하나 하면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주가 한 분인 주가 둘로 갈라지는 이야기예요. 숨어계시는 주님과 나타난 주님으로 갈라져요. 숨어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나타난 주님은 아들. 이 둘 사이에 이야기가 율법 이야기에요. 율법은 우리가 끼어들면 안돼요. 율법은 끼어들면 내 이야기가 계속 유지가 돼요. 나 율법 지켰나 못 지켰나. 아이고 못 지켜서 벌 받았구나 지켜서 복 받았구나 내 이야기가 자꾸 끼어들기 때문에 자꾸 빼야 돼요. 그래서 주께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게 되면 이루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원수가 예수님을 붙잡지 못할 때 원수는 예수님 발 아래 밟혔다. 이미 게임 오버 게임 끝난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는 무덤에 가둬둘 수 없고 악마는 예수님을 고발할 수도 없고 악마의 권세, 저주의 권세, 죽음의 권세가 예수님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게임 끝난 거예요. 게임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게임은 누구 게임이에요? 예수님 혼자 한 게임이에요. 자기만의 투쟁입니다. 주의 이름만의 투쟁이에요.
따라서 자기만의 투쟁이기 때문에 여기서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시간으로 남은 시간이 모든 과거 시간을 다시 여기서 주님을 경유하게 만들어요. 주가 선배격인 다윗의 시대에 이미 미래의 주님이 관여한 걸로 되어있어요. 관여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껍질로 만들었고 다윗은 자기 이야기를 못하고 예수님이 오실 이야기를 시편 110편에서 한 겁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어요.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해야 되느냐? 다윗이야기 자리에다가 여러분 자신을 집어넣으세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다윗은 껍질을 누가 쌌다? 이렇게 해도 되고 또는 다윗이 껍질이라면 안에 예수님이 다윗 속에 있다 이렇게 해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라는 우리 껍질 속에 이미 다 이루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미 다 이루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럼 바깥의 우리는 뭡니까? 미완료가 주는 즐거움이 있어요. 미완료가 주는 즐거움. 뭘 해도 이것은 안 받는다는 것. 내가 뭘 해도 안 받는다는 즐거움과 기쁨과 가벼움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겁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했지요. 그리고 저주했잖아요. 그것이 베드로로 하여금 악마 쪽으로 가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했다 할지라도. 왜냐하면 베드로를 그렇게 하게 한 것은 베드로가 성령 받고 알아요. 이것도 주께서 계획한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45절부터 신학 따로 행동 따로 인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제사장들은 아무리 신학을 논하고 논해도 자기 내부에 있는 자기 이야기를 타인을 통해서 자기가 더욱더 확장하고 대단해지려고 하는 그 탐욕은 버리질 못하죠. 47절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서기관들만 벌 받는가? 아니지요. 서기관들을 부러워 못 견디는 사람들이 일반 사람이잖아요. 나도 언제 저렇게 부자 되느냐 하는 거예요. 아까 살아있다는 것은 아브라함 속에 주님이 살아계시고 다윗 속에 주님이 살아 계시고 야곱 속에 주님이 살아계신 거예요. 그래서 야곱 같은 경우에는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싸우려고 할 때에 갑자기 습격을 당하는 거예요. 습격을. 습격 압니까? 예상 못했는데 밤중에 새벽될 때 습격을 당했어요.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한테 습격당한 것을 천만다행으로 고맙게 여기기 바랍니다. 고맙게 여기기 바랍니다. 고맙게 여겨요. 내 인생 벌써 망했어요. 이왕 망한 거 뭐 세상 눈치 볼 거 뭐 있어요. 이왕 망한 거. 갖다버릴 옛날 옷인데 옛날 옷 좀 더러우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버릴 옷이거든요. 옷치고 약간 아파요. 약간 아픈데. 남 이용해서 내가 더 나아지려고 극복할 생각하지마시고 이미 극복은 이루어졌습니다. 극복. 다 이루어진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잘될라고 들은 이야기가 얼마나 그것이 죄악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이 함께 성령을 주심으로서 더 이상 나의 이야기가 없음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