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2장 18절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 240319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2장 16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렇게 되어있죠. 22장 그 대목을 일단 봤고요. 21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21장 22절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25절 보게 되면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절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이 대목들을 이 구절들을 보면서 예수님 다시 오는데 굉장히 요란스럽지요. 요란스러운데 어째서 예수님 오시는 것이 요란스럽냐 하면은 다 부순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부셔버려요. 인간들의 용어로 사용한다면 잔혹한 광경. 다 부수고 잔인하게 다 죽여버리고. 왜? 왜 그렇게 폭력적이에요? 우리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폭력적인 것 같아요. 이 둘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하느냐. 이 세상의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하느냐. 딱 두 자로 이야기하면 적합할 것 같아요. 뭐냐 하면은 ‘청소’. 마지막을 청소를 해버려요. 청소, 소지 전부 다 제거. 다 부수고 다 없애버리니까. 자, 이점에 대해서 왜 그래야 되는데 이유를 알아야 돼요. 왜.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과격하게 모든 것을 아주 작심하시고 다 부수려고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부숴줘야 인간이 자기 사는 이 세상에서 탈출이 실패로 끝나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극렬하게 살아가요. 치열하게 살아간다고요 이 세상을. 왜? 왜 사는데요? 왜 사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극렬하게 살아간다.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인간들이 쉬지도 않고 애쓰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 다 하나님께서는 그걸 실패로 만들어버려요. 다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돔과 고모라예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그 죄가 하늘까지 상달되어서 하나님께서 천사 둘을 보내어서 소돔과 고모라 도시 자체를 아예 작살냈잖아요. 그럼 이 소돔과 고모라를 하나님께서 사정없이 잔인하게 멸망시킬 취지에 대해서 하나의 기념탑처럼 오랫동안 남아오면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게 있어요. 그게 바로 롯의 처입니다. 롯의 처는 모양은 롯의 처인데 소금기둥이 되었잖아요. 이 말은 내 몸이 영적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내 몸이. 하나님께서는 육을 버리고 영적인 사람으로 전환시키려고 하는데 인간은 자기 몸을 보호하는 모든 방식은 결코 영적이 아니에요. 육적이에요. 제가 tv중에서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극한직업이에요. 극한직업을 제가 보는 이유가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결코 유명한 사람이 아니에요. 유명해지려고 애쓰는 사람도 아니에요.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줘요. 그 사람들은 왜 힘든 일을 하느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기 몸을. 극한직업인데 제가 일방적으로 극한직업 1,2,3을 뽑아봤습니다.
극한직업 가운데서 많은 직업을 봤으니까 저 중에서 제일 힘든 게 뭔가 나름대로 정한 것이 첫째가 새우잡이에요. 새우잡이. 왜냐하면 몸의 균형이 안 맞아요. 파도에 흔들려서. 새우잡이 배는 큰 배로 하는 게 아니에요. 작은 배로 하는데 파도 칠 때마다 몸이 가눌 수가 없습니다. 안정적이어야 일을 하든가 하는데 흔들려가지고 그러면서도 그 작업은 다 해야 되고 두 번째가 뭐냐 하면은 염전입니다. 염전은 이거는 인간의 개인적인 의사결정, 판단 완전히 인정 못 받습니다. 날 좋으면 무조건 나가야 되고 비 오면 무조건 그만 둬야 돼요. 철저하게 자연에 예속된 직업이 염전입니다. 날 좋으면 무조건 밀대로 밀어야 돼요. 자연에 종속돼요. 새우잡이는 균형이 안 맞아요. 세 번째 이것이 그 외에 모든 극한직업의 가장 힘든 것, 바로 주물공장입니다. 제가 보기에 주물공장입니다. 특징이 뭐냐 하면은 실내 기온이 60도입니다. 그리고 몸무게가 50kg. 주물 금속이 50kg이상 나갑니다. 그래서 백화점 서빙하고 차원이 달라요. 완전히 다릅니다. 실내기온이 60도에요. 온 실내가 벌게요. 철을 녹여서. 이걸 부을 때 불꽃 막 튀잖아요. 손 다 데이죠. 장갑 껴도 소용없지. 이 세 가지 외 기타 각종 서열로 쭉 나옵니다. 쭉 나와 있지요. 제일 끝부분에 거저 먹는 거 주식투자입니다. 아침에 늦게 나와도 괜찮고 뭐. 약간의 간담 서늘하고 조마조마한 건 있지만. 어디 뭐 노동을 하라 합니까 땅 파라 합니까. 투자 했다가 빼고 투자 했다가 빼고 그런 거지. 하나 걸리기만 해봐라.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모든 직장인들의 로망은 이겁니다. 주식투자 로망이죠. 희망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극한직업 속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극렬하게 투쟁하듯 살아가는데 이걸 왜 하나님은 다 부수느냐. 이걸 다 작살내는 이유가 뭐냐? 누가복음 22장 봤죠. 싸그리 다 죽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누가복음 21장 보고 누가복음 22장 봐 버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전부 다 작살내겠다는 그것도 마지막 날에 지구상의 임한 모든 사람에게 다 하나님의 저주를 임하겠다는 그 취지도 모르면서 누가복음 22장에 예수님의 포도주를 마시라 이래가지고 뭐 괜찮은 선물 주시네. 22장 20절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렇게 하게 되면 아이고 주께서 그냥 준다는데 먹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아까 후딱 지나가듯이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왜 세상을 멸망하는가? 영적이 아니라서 멸망하는 거예요. 육적이라서 그런 거예요. 육적이라서. 육적으로 자기를 보호하고 지키고 극렬하게 살라고 애쓰는 것, 그거 하나님에게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육이야? 영이야? 이걸 묻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주께서 육이야 영이야 묻기 때문에 또는 그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길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도 육과 영이 뭔지를 알고 있어야 되겠지요. 안 그러면 우리는 극한직업에 속합니다. 기도원에 새벽기도도 극한직업에 속해요. 자기 몸을 보호하는 주여 주여! 목 다 쉬고 그것도 극한직업이잖아요. 부흥사들도 극한직업이에요. 그런데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청소. 모든 것을 주께서는 청소하는 거예요. 그럼 청소하면 이런 뜻이에요. 육적인 것을 나는 청소하겠다. 누가? 영적인 것이 와서 육적인 것을 말끔하게 청소하는 것. 그게 주님의 일관된 일입니다.
자, 그러면 육적이 뭔지 영적이 뭔지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요. 엄마의 육신은 육입니까? 영입니까? 엄마의 육신은 육이죠. 어머니는 뭐냐?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그런 육신이 있습니까? 없지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이것을 상징적 대상이라고 합니다. 이건 현실적 대상이에요. 현실적 대상. 손으로 하면 만져지는 것. 현실적으로 만져지지요. 그런데 어머니는?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한다. 손에 만져집니까? 안 만져지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머니의 육신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어머니를 살린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 처리에요. 육신을 죽임으로서 그 육신이 보여줘야 될 영을 살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멸망하는 것에 대해서 섭섭하게 생각하면 안돼요. 청소하는 것에 대해서 섭섭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의 육을 자기가 보호하려고 했단 말이죠. 육신을 보호하는 거예요. 영은 모르죠. 영은 모르고 내 육신이니까 어쨌든 간에 내가 밥 먹고 살아야하지 않겠느냐. 배 아프면 침 맞고 이렇게 해야 되지 않느냐. 그래서 성경에서 이런 점이 어려운데요. 마리아가 임신을 했어요. 임신을 해서 아기 예수가 출생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출생. 자, 아기 예수님은 영입니까? 육입니까? 영이죠. 예수님은 청소 대상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오히려 세상을 청소하고 심판하죠. 그런데 마리아는 뭐에요? 육이죠. 지금 마리아가 놀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물론 천사가 왔지만 어떻게 마리아의 육은 임신이 안 되는 육이었어요. 왜? 남자를 모르기 때문에. 남자를 모른다 이건 육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육은 육으로만 이해하는데 육으로 이해하는 게 뭐냐? 남자가 동침해야 자식이 생긴다 하는 것은 인간들이 자기 몸을 보호하면서 다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덜렁 임신이 된 거예요. 그러면 여기 아기 예수님이 출생을 했단 말이죠. 이건 다 아는 이야기죠. 그렇죠?
그러면 마리아의 자리에다가 우리 성도의 육신을 집어넣어봅시다. 성도의 육신을 이렇게 집어넣게 되면 성도의 육신 안에서 뭐가 잉태되어야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나와줘야 이게 뭐냐 하면은 영의 일이에요. 영의 일이고 동시에 청소의 대상이 안 됩니다. 왜? 영이기 때문에. 영이라고 하는 것이 육에 대해서 신비롭게 결합되는 형식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다 그래요. 예수님이 내가 하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라고 했거든요. 주님은 영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받아들이는 인간은 전부 다 육적으로 받아들여요. 어머니가 맛있는 밥을 해주는 것은 어머니의 역할이지 어머니 육신 음식 솜씨 자랑할라고 밥해주는 게 아니란 말이죠.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이죠. 사랑. 그런데 사랑이 눈에 안 보이잖아요. 요리하는 엄마는 보이지만 사랑은 안 보이죠.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께서 음식을 요리를 잘한다. 자기 자식한테 정성 들여 음식을 잘한다. 그걸 안 아파트 옆집에 있는 아저씨와 애들이 그 엄마를 납치해가지고 우리 집에 와서 요리해주세요. 돈 500 드리겠습니다 이러면 뭐가 됩니까? 그게 어머니입니까? 아니면 요리 잘하는 육신입니까? 요리 잘하는 육신이죠. 어머니가 탈락했죠. 어머니의 정성 사랑 다 탈락한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요 마리아 몸에서 임신해서 아기 예수 출생했다 이 자체를 이걸 기본 원리로 삼아서 이것 가지고 마지막 모든 걸 청소하면서 이것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0절에서 21절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무화과나무 이건 육이죠. 실제로 손에 만져지는 육이죠. 그런데 그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았어요. 저주를 받아가지고 바짝 말라비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멀쩡했던 무화과나무를 예수님께서 열매 없네? 내가 너를 저주한다. 한 마디 툭 던졌는데 그때부터 무화과나무가 반응을 나타내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저주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는 거예요. 반응을. 그러면 무화과나무는 육이에요? 영이에요? 무화과나무에 무엇이 결합되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결합되니까 이것이 육적으로서 해석이 해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이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하니까 예수님께서 그것 보고 놀래? 그러면 네가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도대체 얼마나 완력이 대단하고 힘이 어느 정도 쎄야 산을 듭니까. 터무니없지요. 산 들리는 게 터무니 없다고요. 그러면 이 세상에 마지막 지구상의 모든 유황불 던져서 다 멸망하는 것은 이거는 터무니 없는 거예요? 제가 물으면 여러분들은 입을 다물겠지요. 속으로는 역시 터무니없지. 멀쩡한데 뭐 아무리 하늘을 봐도 멸망할 낌새 없고 폭죽놀이 할 때 말고 불 안보이잖아요. 우리가 믿을만한 소스를 제공해야지 아무것도 없는데서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면 된다 너무나 터무니 없는 거고 우리로 하여금 뭔가 인식하고 지식에 동참할 수 있는 낌새라도 뭔가 발판이라도 뭔가 제시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인간 입장에서.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멸망 대상이기 때문에 그런 거 필요 없다는 거예요. 멸망할 자가 멸망하면 되지 네가 왜 알아야 되느냐는 겁니다.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 임신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아기를 낳는다는 뜻이에요. 예수님께서 아기를 낳는다. 이것은 지난 오후예배 때 여자를 누가 낳았습니까? 여자를 누가 낳았지요? 아담이 낳았지요. 그렇죠? 아담이 여자를 낳았잖아요. 그러고 하는 말이 뭡니까?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다. 두 사람인데 하나가 되고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게 영적이에요. 이게 영적입니다. 어떻게 남자가 여자를 낳습니까? 물론 여러분 정답을 알지요. 주께서 갈빗대로 그렇게 해서 그렇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주님께 관여하게 되면 주께서 하셨다 그걸 제가 묻는 게 아니고 왜 하셔야 되는가? 왜 아담이 여자를 굳이 만들어야 되는 이유가 뭐냐를 제가 묻는 거예요. 왜 굳이 하나님께서 할 일도 많은데 왜 여자 만드는 일에 왜 남자를 만드냐는 말이죠. 더 나아가서 처음부터 남자 여자 두 사람 만들지 왜 처음부터 왜 순서가 남자부터 만들고 1단계, 2단계는 뭡니까? 그 남자에서 여자 생기고. 그럼 이거는 뭐냐 하면은 처음부터 남자, 여자 만든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뜻이거든요. 사람 만들고 남자 만들고 여자 만드는 것은 주의 뜻이 아니에요. 주의 뜻은 두 사람인데 뭐가 된다?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아담을 통해서 알려주기 위한 의도로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참 내가 누구를 낳는다는 것이 기가 찰 일이죠. 마리아가 예수님 임신했잖아요. 이건 기가 찰 일 아닙니까?
그래서 아까 극한직업을 다시 한번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극한직업을 하셨다. 이건 뭐냐? 노동으로 자신의 육을 살린다. 예수님 이것만 한 것 아니고 새로운 백성을 임신시켜서 해산하는 거예요. 만들어내는 일을 했어요. 누가? 예수님이. 누구를요? 백성을 만들어내요.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서 나옵니까? 인간이 인간을 자식 낳으면 백성 됩니까? 안됩니까? 안돼요. 그건 육에서 나서 육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영은 뭐냐? 영적 사람은 누가 낳아야 돼요? 예수님이 해산을 해줘야 그게 영적 사람이 돼요.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하나님인데요 이게 되려면 인간이 알고 있는 육은 노동을 통해서 뭘 보호해요? 인간이 하는 일은 자기가 자기 육신을 보호하는 일 그것 외에는 못해요. 인간에게는 영적이 안 나옵니다. 자기 몸 보호하는 게 전부에요. 그래서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저주 받으니까 그들이 자기가 평소에 자기를 챙길 때 저주 안 받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뭐냐? 나쁜 짓했기 때문에 저주 받는다. 따라서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가 나를 지키려면 나쁜 짓 적게 하고 착한 일하면 착한 일이 나를 지킬 수 있는 방식이 되고 방법이 된다 이런 쪽으로 자기 인생을 단단하게 구축하려고 했는데 주님께서 그걸 아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해버리니까 그것도 무화과나무 저주할 때 무화과나무가 나쁜 짓했습니까? 무화과나무가 주님 가는데 갑자기 가지로 주님 막 조르고 했습니까? 명치 누르고 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오히려 짜증을 내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짜증을 내요. 왜 과일이 없냐. 내가 목마른데 왜 과일이 없냐. 과일이 없는 이유가 있죠. 뭡니까? 아직 과일 맺힐 때가 안됐어요. 맺힐 때가 안됐다고요. 사과 과수원에 가가지고 왜 수박이 없지? 너 저주받아라. 너무나 터무니 없는 거잖아요. 터무니없는 것. 그러면 무화과나무 저주받는 것 그게 터무니없는 거예요? 이 세상이 모조리 멸망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모조리 다 죽는 것이 무화과나무 정도가 아니라 다 죽어버려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집니다. 다 사라져요. 이유는 뭐냐? 영적인 것을 두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이거는 영적이 아니야 영적인 것은 따로 있어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세상은 다 청소 대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잉태해야 영입니다. 그 외에는 전부 다 육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3장 6절 초반에 나올 때 가장 중요한 구절에 해당됩니다. 13장 6절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이게 무화과나무 농장입니까? 포도나무 농장입니까? 포도나무 농장이죠. 포도나무 농장인데 무화과나무를 심었더니만 무화과나무가 소출이 나지를 않았다. 이게 비유에요.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도 육이고 포도나무도 육이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게 농사 잘 지어라 다음에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잘 심어라 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해야 될 영적인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누가복음 22장 1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라고 되어있지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지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지만 무화과나무 저주하는 그 의도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를 대비시키기 위해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거예요.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나무 식으로 영적인 것을 보여줄 수가 있고 포도나무는 포도나무 식으로 영적인 것을 보여줄 수가 있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제가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겁니다. 어떻게 육적인 것을 가지고 영적인 것을 전환시킬 수 있는 그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거기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초점을 맞춰야 되는 거예요. 육적인데 어떻게 영적이 되는지를. 이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누가복음 21장에도 나오는데요. 21장 29절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무화과나무가 식물이라서 때가 되면 싹이 나고 여름이 가까이 오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이렇게 보시면 돼요. 이스라엘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무슨 나무로 일단 거기에다가 결합을 시키느냐 하면은 무화과나무로 결합을 시켜요. 이스라엘을. 그런데 아까 우리가 본 것처럼 13장 6절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정성 들여서 무화과나무에서 소출 얻기를 했는데 3년 동안 했는데 소출이 어떻게 돼요? 하나도 없어요. 이게 비유거든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은 육을 통해서 그들이 영적인 것을 뽑아내는데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지금 주님께서는. 육이 영으로 전환돼야 되는데 전환되지 못하고 실패한 거예요.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제를 바꿔야 돼요. 중요한 게 뭐냐 하면은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육인데 육으로 그냥 이해해주면 되지 왜 그걸로 화를 내는가. 그게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번식하시러 오셨어요. 해산하러 왔다고요. 해산이 안 되니까 주님께서는 육적인 것밖에 없으니까 영적인 것이 없으니까 육적인 것을 제거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 22장 이 대목이 두 번째로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를 심어가지고 열매 없다고 작살내는 이야기하고 두 번째는 뭐냐? 마태복음 22장에 혼인잔치 비유 이 대목에서 뭐를 유념해서 봐야하느냐 하면은 7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건 뭐 혼인잔치가 잔혹사 같애. 임금이 자기 아들 혼인잔치 하는 날을 뭐로 봐요? 임금 아래 있는 그 마을 사람들 모조리 작살내는 날로 정해논 거예요. 지금 임금은 내 아들이 혼인식을 결혼식을 하는 겁니다. 신랑은 아들이고 신부는 또 있겠지요. 어쨌거나 임금이 추진하고 있는 그 최종 목적은 혼인잔치에요. 혼인잔치. 혼인잔치 임금이 하게 되면 육적인 사람들은 너 해 누가 말려? 하라고. 너는 혼인잔치하고 우리는 우리 볼일 보면 되잖아. 그런데 왜 강요하느냐 이 말이죠. 혼인잔치에 참여 안 했다고 이건 뭐 다 죽여버려요. 군대를 보내어 종들을 죽였지요. 그러니까 6절에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그러니까 앞뒤가 우리 인간적인 입장에서 앞뒤가 지금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임금은 아들 혼인잔치에 참석해라. 뭐 그때 시간 나면 참석하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또 뭐가 문제냐 하면은 내가 바빠서 못 간다 하면 되는데 왜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느냐. 왜 죽입니까? 인간들도 문제가 있네. 그렇죠? 아저씨 임금님 혼인잔치인데 좀 참석해주세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못갑니다. 이러면 끝날 문제를 가지고 너 이리와. 오늘 죽었어. 오늘 내 손에 한번 죽어봐라. 왜 오바하고 있어요? 왜 과도한 반응을 나타내느냐 말이죠.
그 다음에 마태복음 22장 12절 13절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임금 혼인잔치 참석 안했다고 지금 바깥 어두운 데 지옥 보내는 거예요. 그렇다면 혼인잔치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걸었다는 뜻이거든요. 혼인잔치에. 지금 제가 혼인잔치를 왜 끄집어내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21장에서 세상을 작살내는 이유가 불분명해요. 세상을 작살내는 이유가. 그때 지구상에 모든 인간에게 덮쳐서 불바다 만든다는 이러한 과격한 주님의 그 태도, 그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태도이기에 완전히 이 세상의 육적인 것을 다 멸망시키려고 작심을 하셨는가. 도대체 우리가 뭐가 잘못됐길래 왜 그렇게 하나님은 화를 내시는 거예요. 이점을 좀 더 추적해보겠습니다. 이사야 61장, 62장 보게 되면 이렇게 긴 이야기했던 것이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요. 이사야 61장 10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62장에 나옵니다. 3절에서 5절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라고 되어있지요.
창세기 2장 나오는 아담이 여자를 만드는 그 원칙을 하나님께서는 포기했습니까? 끝까지 갑니까? 끝까지 가는 거예요. 그게 영이니까. 예수님이 자식을 낳아야 영이에요. 그런데 이사야 61장 62장에 보면 뭐냐 하면은 이 세상이 멸망돼야 될 이유가 나오는데 그게 뭐냐? 이사야 61장에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라고 되어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혼인잔치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준비한 사모, 그게 뭐죠? 하나님의 거룩과 의죠. 하여튼 하나님은 혼인잔치를 위해서 영혼부터 준비해놓고 인류의 모든 역사를 하나님 자신의 혼인을 위해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 신부에게 뭘 줍니까?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신 하나님의 의를 주죠. 그 의가 인간들이 극한직업을 하고 있는 인간들이 의를 만들어 냅니까? 만들어내요? 소금이나 만들고 새우나 잡지 만들어냅니까? 못 만들어내는 거예요. 못 만들어내니까 이것은 뭐냐? 이것은 종한테 맡겨가지고 네가 내 혼인잔치를 아주 초를 치는구나 해가지고 바깥 지옥에 집어넣는다 이 이야기에요. 그리고 누가복음 21장에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 지구상의 모든 것들은 아주 작살을 내는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포도나무에 심은 무화과나무로 비유하는 겁니다. 그럼 무화과나무를 3년 동안 했는데 열매 없다고 작살내버리면 그러면 원래부터 무슨 나무입니까? 농장이? 포도나무 농장이죠. 포도나무 농장이기 때문에 육적인 것을 잘라내고 열매 없는 것을 잘라낼 때 본격적으로 주님께서는 본인이 포도나무가 되고 성도를 포도나무의 열매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장에. 그러니까 이 포도나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은 육적인 것, 무화과나무. 그런데 그 무화과나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저주 받아야 돼요.
첫째 시간을 끝내가면서 중요한 것을 정리합시다.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이유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이유가 뭐죠? 무조건이죠. 무조건인데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예수님과 무화과나무가 해야 될 열매와 그 순간에 매치가 연결이 안 됐잖아요. 예수님 목마를 때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안 줬지요. 예수님이 화가 났지요. 저주한 거예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이유는 따지고 보면 무조건이고 예수님과의 관련성입니다. 그런데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은 자, 이번에 포도나무, 포도나무에 열매가 되는 사람들은 왜 포도나무 열매가 되어서 천국가지요? 왜 영적인 사람이 되지요? 이거 그대로에요.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무조건인데 내용은 뭐다?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기에 포도나무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으려면 예수님에 의해서 잉태돼야 돼요. 예수님에게 해산되는 사람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포도나무에 난 것을 다시는 먹지 아니한다 이 말은 포도나무라는 그러한 식물을 가지고 뭘 뽑아내는가? 영적인 것을 뽑아내요. 그런데 영적인 것을 뽑아낼 때 누가 관련했습니까? 예수님과 연관되어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 예수님의 그 포도주, 그리고 떡은? 이건 뭡니까? 예수님 자신이 포도나무라는 뜻이에요. 자신이.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배경은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을 전제로 해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겁니다. 다른 이방민족이야 볼 것도 없고요.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 구약에도 사실은 이러한 징후가 구약에도 많이 보입니다. 여리고성이 멸망했잖아요. 여리고성이 멸망했는데 그때 기생 라합은 망명했습니다 미리. 그런데 여리고성 무너질 때 기생 라합이 미리 빼돌려졌습니까? 아니면 무너진 그 현장에 기생 라합이 있었던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모든 게 무너질 때에 기생 라합도 그때 그 순간 같이 있었어요. 그런데 기생 라합이 망명이 되고 구원이 된 이유가 뭐가 관련성이 있지요.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투입했을 때 기생 라합이 그와 관련성을 맺었잖아요.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를 가졌을 때 기생 라합은 이 무너짐에 대해서 여리고성의 무너짐에 대해서 본인이 섭섭하게 여겼습니까? 아니면 이거는 하나님의 마땅한 일관된 이건 차질이 없는 추진력이라고 보는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자기가 태어난 그 고향 여리고 성이 멸망당하는 것에 대해서 섭섭하게 여기고 아쉽다 그렇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이거는 뭐 마땅히 무너질 것이 마땅히 무너졌지 라고 생각하지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 말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답변할 필요는 없고요. 우리는 세상을 그렇게 보느냐 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도 그렇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지만 성도는 난폭해야 돼요. 굉장히 난폭해야 돼요. 온순한 성도는 성도가 아닙니다. 그건 도 닦는 사람이에요. 도인이에요. 대단히 이 세상은 필히 무너져야 된다 거기에 대해서 희열과 즐거움을 갖고 있어야 돼요. 집이 4층 집에 살고 있는데 갑자기 지진이 나가지고 무너질 때 희열을 느낍니까?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어떻게 누가복음 21장이 딱 들어맞지?! 이렇게 나옵니까? 진작 재개발할 때 돈 챙겨서 다른 데 갈걸. 늦어가지고 이거 뭐야 나 못 살잖아. 또 자기 육을 자기가 보호하죠. 뭐 이런 극한직업이 다 있어 이러면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건성으로 본거에요. 주님의 안목이 아니고 간사하게 주님한테 좀 빌빌대고 좀 아양 떨면 다는 안 부수겠지. 약간은 남겨두겠지. 어디 꼼수를 씁니까. 우리 손자가 유치원에서 영어를 배우는데요 옥토푸스 뭐 이렇게 영어로 단어를 해요. 하나가 모르는 게 있었어요. 뭐냐? 계란을 몰랐던 겁니다. 궤~~란~~. 속을 뻔했어요. 궤~~란. 뭐지 이 영어는? 스펠링이 어떻게 되지? 몰랐던 거예요. 성경을 볼 때에 영적으로 봐야 되는데 궤~~란 이러고 있단 말이죠. 육적인 종교성으로 보는 거예요. 종교성으로. 도 닦듯이. 착실하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면 하나님께서 봐주시겠지. 내가 네 것은 안 건드릴께 뭐 이런 식으로. 그게 누가복음 21장에 전체로 다 깨지잖아요. 주님은 자기 할 일이 있어요. 자신이 생산하는 이 포도나무 자식을 주께서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22장 18절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 240319b-이근호 목사
세상 멸망의 새로운 출처는 포도나무입니다. 포도나무가 안 등장했으면 세상은 멸망할 이유가 없어요. 포도나무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그동안 있었던 모든 관계는 간선도로에 있습니다. 간선도로에 있고 중심도로가 있죠. 중심도로라 하는 것은 중앙된 것과 바로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것을 중심도로라 하고, 간선도로는 연결되는 이 선과 이 옆으로 가는 것을 간선도로라 하죠. 주님께서는 포도나무로 왔는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그러면 주님과의 관련성은 이 중심도로와 되야 해요. 그런데 이 포도나무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뭐가 된다? 멸망의 이유가 밝혀졌어요. 모든 것이 예수님 빼놓고는 다 뭐였다? 다 육이였어요. 영은 없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혼자서 아기를 낳는다’ 마치 아담 같이요. 아기를 혼자서 낳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포도나무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은 뭐냐? 우리가 할건 없네. 우리는 어떡해야 되는가,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중심 간선적인 중심 도로를 연결해야 되는가?
성경은 멸망과 관련해서 이 점을 이야기합니다. “너의 시간은 다 썼다” 너를 위한 시간은 일체 남아있지 않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남아있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시간을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이 말은 뭐냐 우리가 사용할 시간이 다 썼다는 말은 뭐냐면, 다 소멸했다는 말은 ‘앞으로 잘 할께요.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 앞으로 바르게 살께요. 앞으론 태만하지 않고 순종하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는 말이 예수님한테는 해당이 되지를 않습니다. 일체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 내용이 마태복음 13장 36절에서 43절까지 제가 후딱 읽어드릴께요.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인자입니다. 예수님이 씨를 뿌리는 거예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그러면 예수님만 뿌립니까? 또 누가 뿌려요? 악마도 세상에게 씨를 뿌리지요. 가라지이긴 하지만.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마태복음 13장 36절에서 43절까지 보면 우리가 해야 될 게 아직도 남아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막 씨 뿌립니까? 내가 막 씨 뿌리고 내가 막 거름 주고 물 뿌리고 그래요? 그렇지 않지요? 왜 주님은 우리의 시간을 다 빼앗아가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시간이 일체 남아있지 않으냐?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태어나가지고 12살부터 33살까지 예수님의 흔적이 성경에 없어요. 그냥 뭐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고 이래가지고 끝나버렸어요. 12살부터 33살 때까지.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때 아무 활동을 안했다 이 말이거든요. 활동을 안 한 그 시기 동안에 세상에서는 무엇이 마구마구 번창했겠어요. 무화과나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번창한 거예요. 주께서는 팔짱 끼고 지켜본 겁니다. 딱 지켜본거에요. 왜냐하면 포도나무의 시작은 반드시 무화과나무의 멸망과 연계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너희 육적인 무화과나무, 막 해 해. 내가 다 작살내줄 테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선 드디어 30세 되는 그 해에 활동을 나서버리니까 그때부터 예수님은 뭐만 지적하면 돼요? 너희들이 과연 무화과나무로서 열매 맺었냐? 그 이야기만 계속 하면 되는거죠. 그 이야기만. 예레미야도 그렇고 이사야도 그렇고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로 봐요. 무화과나무 농장. 하기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왔기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죠.
예수님께서는 딱 30세까지 시작해서 어디로 가느냐 포도나무와 관련된 일을 하세요. 포도나무와 관련된 일. 십자가 죽으심으로 가는 길을 주께서는 시동을 이제 거는 거예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는 일에 시동을 겁니다. 왜? 다른 사람은 다 육적이니까 예수님 혼자 영적이에요. 성령이 혼자만 임해서 다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 30세 때까지는 다른 사람 성령 받은 사람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만 영이요 나머지는 다 뭐다?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다 육이 되는 거예요. 영의 극대화가 뭐냐? 저주받을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지적하지 아니하면 영은 극대화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만은 성도는 굉장히 난폭해야 돼요. 대충 뭐 봐주고 이런 거 하면 안돼요. 난폭해야 돼요. 그렇다면 여기서 간선도로라는 것은 육이고 중심도로는 영이라 할 수 있죠. 이 영과 오늘날 성도들은 어떤 식으로 관련성이 연결되어 있는가? “마치 ~와 같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전서에 나와요. 7장 29절에서 32절까지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됐습니다.
영어로 하면 ‘as if’ 마치 ~없는 것처럼,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왜? 주님하고 영적으로 중심도로하고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나로써 종결되는 게 아니에요.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마치 내가 내 아닌 것처럼. 그니까 나는 예수다 하면 안 되죠. 우리는 예수님에 속한 것처럼. 그걸 가지고 성경에 뭐라 하냐면 가족이라 해요. 패밀리. 가족의 중심은 아버지에요. 아버지가 없으면 가족이 생길 수가 없으니까 이름을 대표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이고 그 뒤에 줄줄이 자식들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넷플릭스 우리 나라의 높은 여자 간부가 하는 말이 “넷플릭스 우리 회사는 절대로 우리는 가족이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해요. 보통 회사들이 티낸다고 ‘우리는 가족 같애’ 이렇게 하는데 그럼 가족 아니고 뭐냐 “우리는 우수한 인재들만 뽑아있는 팀원입니다. 팀” 자, 팀은 뭐가 안되느냐 하면 임신도 안되고 애기를 낳지도 못해요. 팀이니까 독자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니까 출산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가족으로 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누가 내 형제며 누가 내 모친인가” 육은 우수한 팀이고 영은 뭐가 되고? 가족이 되는 거예요. 마치 ~인 것처럼. ~인것처럼 이 말은 우리가 주님한테 잘렸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 육이잖아요. 육신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용도로 수단으로 매개로 우리를 우리와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게.
더 쉽게 해보겠습니다. 영국에서 체코까지 가는 호화 여객기차가 있다고 해봅시다. 영국 런던에서 체코 프라하까지 가요. 가는데 중간에 어딜 가냐 하면 도버 해협이 있는데 거기에 해저 터널을 갑니다. 가는데 기차가 가는 게 아니에요. 뭐가 가냐 하면은 거기 일등석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버스에 태웁니다. 리무진 버스에 버스를 태우니까 손님들이 ‘아 우리는 버스 타고 도버 해협 영국에서 프랑스 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버스 타니까 버스가 가질 않아요. 버스가 해저 터널을 막 달린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버스는 가만 있어요. 가만 있는데 속도가 나요. 버스를 기차가 운반시키고 있던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 끝까지 우리가 할 수 있고 우리가 더 추가해야 될 일들을 끝까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우리의 그 토큰은 다 썼어요. 없어요. 내가 나를 위해 쓴 잔고는 아예 없어요. 바짝 말랐어요. 우리는 육이니까. 육에서 영으로 맡겨야 되거든요.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해서 내 신세를 호전시켜볼까 내 인생을 바꿔볼까 그런 생각은 뭐냐 하면 아직도 내가 쓸 그러한 시간이 남아있다고 할 때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럼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문제적인 문제들, 골치 아픈 것들 그걸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그건 간단하지요. 그것도 누구 일이냐 주의 일이에요. 자기의 형편을 호전시키기 위해서 ‘주님이여 내가 어떻게 봉사하면 이 난처한 형편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버스 탔는데 왜 벗어나요? 버스 벗어나면 이 물에 빠져요. 예수 안이 있는 그대로 영국에서 프랑스로 이동시켜주는거에요. 멸망 받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동하는데 지가 막 버스 내려가지고 돌아다니면 안 되죠.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들이닥친 어떤 일도 이거는 주님의 일이지 절대로 우리에게 맡겨진 우리가 해야 될 남아있는 일들은 없어요. 일절 없습니다. 우리가 포도원 갈고 우리가 포도주스 만들어 가지고 먹고 이럴 필요 없어요.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우리 인간은 다시 먹을 수가 없어요. 천국이 올 때까지라는 말은 이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다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다는 그 뜻이에요. 우리 그 외손녀가 있는데요. 외손녀가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에요. 자기 같은 반에 맘에 드는 남학생이 있었나봐요. 그래서 자기 할머니한테 ‘나 쟤랑 결혼할거야’ 그랬는데 할머니가 ‘결혼? 돈 없으면 결혼 못 하는데?’ 그렇게 하니까 외손녀 하는 말이 ‘나 돈 벌잖아’ ‘뭐’ 할머니한테 과외 받으면 공부 끝나면 500원 이상 줘요. 그러니까 외손녀의 관심은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야 결혼하는가가 문제가 아니고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결혼은 무조건 성사되어야 돼요. 그러면 돈은 매일 500원 버니까 결혼 하면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목적이 뭡니까? 중심도로에요. 예수님께서 나에게 어떤 현상들을 영적 일들을 계속 일으키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영적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 육적인 것을 박살내면서 그것을 지적하면서 영적인 것이 그 현장에 드러나는 겁니다. “나 이렇게 못 산다. 이래가지고 죽는 게 낫지. 이래가지고 어떻게 살아” 라고 할 때에 바로 그러한 육적인 것을 우리 입으로 그대로 폭로되도록 조치를 하지요. 폭로 되도록 해놓고 성령이 오게 되면 ‘네가 바로 네 생각 이 중심노선도 모르고’. 이 간선이라는 말을 제가 왜 했냐면요. 이 중앙 광장하고 나하고 연결되어있는데 이 선이 전부다 중심이 예수그리스도하고 연결이 되어있는데 사람들은 이건 안 보이고 다른 사람들하과의 관계, 비교 이 간선에 굉장히 관심이 있는 거예요. 베네치아 중앙 광장 있지만 옆 길 골목들 많잖아요. 중앙으로 바로 가면 되는데 자꾸 옆에 길을 새요. 거미줄 같은 옆에 이 간선도로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거예요. 이강인하고 손흥민하고 친하게 지내는 게 좋아. 이강인하고 손흥민하고 둘 다 죽으면 나중에 다 멸망당하는데 지옥 가는데. 육적이 없으면 영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육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 자체가 육이에요. 우리 육을 포도나무에 나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무화과나무에 불과하고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면서 그러면서 오직 예수님만이 마셨던 그 포도나무의 것, 그것이 얼마나 유효하게 우리에게 나타나는지 보란 말이죠. 그것이 뭡니까? 이사야 보니까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돼요. 왜? 무화과나무는 죄를 지어서 저주받는 게 아닙니다. 육이기 때문에 저주받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이에요. 내가 인생이 힘든 것은 육이다. 육이니까 이거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우리는 힘들어야 돼. “호호호” “히히히” 미친 거죠. 나 인생 완전 조졌어. “아유 기뻐” 이런 거. 육을 육 되게 하는 병행구조 같이 나란히 영이 나오는 거예요.
자, 누가복음 22장 진도 나가봅시다. 오늘 이 강의를 보면서 24절 한번 봅시다. “또 저희 가운데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일어난지라” 했지요? 이게 뭡니까? 간선도로에요. 간선도로의 특징은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못 알아들어요. 왜? 영적이니까 성령 안 받았기 때문에. 인간 대 인간으로 자꾸 비교하는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유념해야 할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 비교한다고 내가 남하고 비교하는 게 아니고 나는 먼저 나 자신과 비교해요. 내가 되고 싶은 것과 현실의 자기 꼬락서리하고 비교한다고요. 그래서 또 준비한 게 있지요. 옛날부터 지금 여러분 받으시는 이 가수에 대해서 꼭 내가 언급하고 싶었어요. 옛날부터. 잠시 노래 먼저 듣고 하겠습니다.
‘Why me Lord, what have I ever doneTo deserve even one Of the pleasures I've known Tell me Lord, what did I ever doThat was worth loving You Or the kindness You've shown
Lord help me Jesus, I've wasted it So help me Jesus, I know what I am’
자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아 이게 아쉽네. 자 여기 ‘why me Lord’ 왜 하필이면 접니까 주님 이라는 노래를 채택을 한 이유가 인간은 먼저 자기와 자기를 멱살 쥐어요. 다른 사람 멱살 쥐면 안되지요.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되게 못 마땅해요. 왕짜증 왕짜증. 그걸 왕짜증이라 하는데 ‘체증’ 얹혔다. 뚫리질 않아요 내 인생이. 이게 확 뚫려야 되는데 이 ‘체증’되어있어요. 꽉 찼어요. 그러니까 이게 본능이 뭐냐 하면은 주님이여 내 문제 어떻게 손 써야 되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why me Lord. 왜 저한테 이런 불상사가 왜 일어납니까? 해가지고 그 내용 보면 임재범하고 똑같아요. 그 내용이 보면 자기 딴에 할 회개는 다 해요. 얻어맞기 전에 회개는 다 하는데 주님에 대해서 극 존칭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이 하신 일 ‘my soul in your hand’ 내 영혼은 당신 손에 있습니다. 하자 없도록 누가 봐도 나를 지적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복음적인 내용을 다 하는데 결국 뭐냐 하면은 ‘Lord help me Jesus’ 예수님 도와주세요. 이게 말이 돼요? 예수님 왜 우리를 도와줘야 되죠? 멸망 대상인데. 중간 중간에 나와요. Lord help me Jesus 예수님 도와주세요. 난 그동안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도와주세요.
이게 뭐냐면 중심도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간선입니다. 간선. 왜? 자기를 자기가 멱살 잡고 스스로 자기를 학대하고 있어요. 인생 꼬라지 이래 살아야 되겠어? 남들 저렇게 살 때 너 뭐 했어? 자기가 질문하고 답을 자기가 해요. 자기가 한다고요. 카이스트에 어느 교수가 이런 문제를 냈습니다. 문제가 뭐냐면 ‘네가 문제를 내라’ 이게 문제에요. 괴짜 교수인데 지금은 카이스트 총장이 됐어요. 네가 문제를 내봐라. 그러니까 인간은 매일 생각이 뭐냐면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에게 출제하는 삶이 육적인 인간들의 24시간입니다. 이래 해볼까? 저래 해볼까? 이러면 내 삶의 형편이 편해질까? 나아질까 다른 사람이 나보고 욕을 적게 할까? 남들 보기에 그럴싸해 보일까? 매일 생각하는 게 그거에요. 첫째 시간에 우리가 누가복음을 보면서 뭘 느꼈습니까? 난폭해야 된다는 거죠. 기생 라합처럼 난폭해야 돼요. 무너지는 것이 기정사실이고 무너지는 것에 대해서 박수 쳐야 돼요. 근데 지금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1972년 이 사람은 자기한테 박수를 못 칩니다. 감사도 없어요. 지금 짜증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이런 식이라면 이게 지금 주님 중심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사는가? 또 준비한 게 있는데. 이것도 짧게 음악부터 먼저 듣고 가실께요.
‘And I love you so The people ask me how How I've lived till now I tell them I don't know
I guess they understand How lonely life has been But life began again The day you took my hand’
이게 페리 코모의 노래인데요. 여기 보면 아까 크리스토퍼슨은 누구하고 따지고 있어요? 직접 하나님과 따지고 있지요. 근데 이 ‘and I love you so’ 이거는 이토록, 이토록 당신을 사랑한다. 뭡니까? 자기 자신이 날라가버리고 모든 공로와 모든 은혜를 상대에게 다 넘기지요. 당신이 내 손을 잡아주었을 때 내 인생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자기 우수함, 자기 괜찮음, 자기 대단함 이게 이 사람은 없지요 왜? 자기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중간에 해석을 보면 ‘삶의 교훈은 믿음이에요. 일단 한 페이지를 읽어졌을 때 사랑만이 남을 뿐 나머지는 모든 것이 쓸모없게 되죠. 나는 그것을 믿어요’ 이 성경 보세요. 성경 전체가 뭐라고요? 무조건 뭐하는 겁니까? 무조건 사랑하는 거예요. 성경 전체를 우리가 뭘 행하고가 아닙니다. 우리가 뭘 지키는 책이 아니고 그냥 성경 전체가 보게 되면 ‘일단 한 페이지만 읽어졌을 때 사랑만이 남을 뿐 나머지는 모든 것이 쓸모없이 되고 말죠’ 가사가 보통 가사가 아니죠. 아까 그 크리스토퍼슨은 주님한테 대드는 거고요. 여기 ‘이토록 저를 사랑합니다’ 이거는 대드는 게 아니고 그냥 반대로 틈만 나면 갖다 앵기는 거예요. 틈만 나면 나를 ‘주님 하셨죠 주님이 하셨죠’ 자꾸 주님한테 모든 것을 인계하고 넘겨주는 거예요. 왜? 그쪽에 사랑 있으니까.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로마서 13장에 보면 율법에 뭐 하지 마라 있지만 모든 완성은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완성입니다.
자, 그렇게 해서 누가복음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 22장 24절에 “그 중에 누가 크냐” 다툼이 일어나죠. 이게 뭐냐? 중심노선이 아니고 뭡니까? 간선, 중심도로가 아니고 간선도로. 다른 사람하고 누가 세냐 멱살 잡고 싸움하는 거 그런 태도입니다. 그러면 중심도로와 간선도로의 둘 사이에 어떤 구분이 있느냐. 간선도로는 본인이 살아있어요. 늘 본인이 중심이고 살아있어요. 근데 중심도로는 내가 남자든 내가 여자든 내가 돈이 있든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그것은 ‘as if’ 마치 ~같기 때문에. 내가 나에 대해서 규정할 이유가 없어요. 근데 간선도로 식으로 교회 다닌 사람은 맨날 목사한테 묻기를 “저 예정되었어요? 저 선택되었습니까? 저 구원 받았어요?” 맨날 묻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규정하는 거예요. 이 정도 하면 믿음이라고 쳐주십니까? 교회를 45년 다녀도 맨날 하는 생각이 그거에요. 이 정도 하면 충분하겠죠 구원받는데. 주님께서 ‘네 산을 한번 들어봐라’라고 이야기할거에요. 26절 봅시다. 지금 26절부터 나오는 이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저녁 후에 내 피로 세운 언약이 그 중심도로 그 광장 있잖아요. 광장이 as if의 원리에 의해서 자기 백성들을 잉태하니까 번식하니까 번식된 자기 안에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흘러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중심도로를 할 때 그 때 주께서 이야기하신 거 그거를 뭐라 했습니까? 육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육 맞아요 육인데 육을 통해서 뭐를 보여준다? 영을 보여주는 거예요.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자 이거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더 웨일’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정말 돈 안들은 영화, 뚱뚱한 사람이 자기 딸하고 대화하면서 영화 끝나는 아주 지루하기 짝이 없는데. 지루하면서도 의미 있는 게 여기에 등장하는 장면이 뭐냐 전도하는 사람이 몸무게가 140 이상 나가는 뚱뚱한 사람, 지 몸도 못 움직이는 사람에게 전도하러 갔어요. 당신은 곧 죽는데 죽기 전에 복음이나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라고 이렇게 하니까 그 주인공 뚱뚱한 남자가 먼저 선수 칩니다. 성경 나 두 번이나 읽었다. 그러니까 전도하는 사람이 두 번 읽으니까 무슨 내용이 있던가요? 그게 아주 신기하고 반가워서 이야기하니까 그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누가복음 이야기하는 과정 속에 있어요. “하나님께서 75억 명의 인구를 만들어놓고 어떻게 14만4천만 달랑 구원을 받냐” 뭐 이런 불합리가 어디있느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75억 명 비교해보세요. 75억하고 14만4천하고 도대체 몇 대 몇이에요? 엄청나지요. 7천5만 대 1이에요. 합격 비율이. 그러니까 그 뚱뚱한 주인공이 전도하는 사람을 조롱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거예요. 성경을 봤는데 왜 어떻게 인구를 이만큼 만들어놓고 14만4천만 건지냐 할 때 여러분들은 지금 그 사람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전도한 사람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전도했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자기 구원’이에요. 당신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하러 왔거든요. 할 때 그 상대방이 뭐라 하냐면 75억 놔두고 왜 14만 이렇게 답변했을 때에 전도자가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여러분 한번 답변해보세요. 여러분이 전도자라고 하고. 전도해본적도 별로 없겠지만 한다고 치고. 이런 반박이 예상된다고 하면 뭐라고 여러분 마음의 준비를 해야 돼요? 성경을 두 번이나 봤다는 거에요. 어떻게 반박할수 있어요? 성경을 창세기부터 끝까지 보더라도 뭐만 중점해서 보는 겁니까? 나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춰서 봤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던 거, 하나님은 육적인 것을 어떻게 한다? 전부 다 죽여버리지요. 다 죽여버린다고요. 왜 그걸 죽이는 작업과 동시에 영이 등장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포도주가 등장, 포도주의 의미가 등장하거든요. 그러면 오늘 본문 제자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고 이야기했다고요.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고 하는 것은 어떤 관점이냐 하면 우리는 예수님 만났기 때문에 이제 천국 가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고 우리는 열두 지파 다스리면 되고 이 생각만 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걸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런데 열두 지파를 다스릴 때에 어떤 자세로 다스려야 된다고 되어있습니까? 25,26,27 어떤 자세로? 섬기는 자로 다스려야 되겠지요? 그럼 이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합니까? 아 섬기면 뭐된다? 열두 지파 두목이 되는구나 다스리는구나 이렇게 되겠지요. 그게 문제에요 그게. 여기서 섬기는 자는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 단 한 분밖에 없어요. 왜? 예수님만이 사랑이이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거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잔혹한 멸망 이야기, 혼인 잔치 이야기를 다 한 겁니다.
31절 한번 봅시다. 제가 진도를 약간 빨리 나가는 이유는 이제 중요한 것은 성경 내용이 아니고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간선도로가 아니고 중심도로와 연결해서 봐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홀로 자기 가족을 나눈다는 것, 잉태하고 해산한다는 것 번식한다는 것, 인간은 아무리 해도 영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해석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31절에 나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음이라” 제가 대구강의에서 이 비슷한 대목에 대해서 언급을 해드렸잖아요. 베드로의 말하는 언어에 문제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문제점이 있느냐 하면은 뭘 빠뜨렸어요. 뭘 빠뜨렸다 했습니까? 베드로가 이 말 할 때 33절에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준비되었습니다 할 때에 지금 방금 예수님이 이야기한 가운데서 어떤 단어 한 개를 빠뜨리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의 31절에는 무슨 단어가 나왔느냐 하면 사탄이 나와요, 악마가 나온다고요 악마가. 악마 언급했는데 지금 베드로는 33절에 뭐라 합니까? 악마가 등장할 자리를 누가 메꿔요? 내가 하겠습니다 하고 자기가 메꾸는 거예요. 이게 육이에요. 나에게서는 영이 안 나옵니다. 영은요 예수님이 사탄과의 결단을 내려서 그 결과로서 우리에게 영이 쏟아 주는 겁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는 지금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사탄의 그 권력과 권세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빠져나올수가 없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빠져나올 수가 없다면 어떻게 빠져나올수 있습니까 라고 여러분은 그렇게 질문을 할 수 있겠죠? 그런 질문이 성립이 안 됩니다. 그렇게 첫째 시간에 얘기해도 우리는 아직도 자기 구원 문제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질문 자체를 보게 되면 못 빠져나오는데 어떻게 빠져나옵니까? 이게 앞뒤가 안 맞아.안 빠져나와도 되는데 왜 빠져나올라 하죠? 왜? 마귀 떠난 괜찮은 사람 되고 싶어서요? 사도 바울도 사탄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빠져나올 생각 안 했어요.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예수님만이 영육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사탄이 우리와 함께 결부되고 활동을 해줘야 그때마다 예수님만이 영이라는 거 예수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이 그제사 그게 밝혀지는 거예요. 시몬이 “주여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길 내가 준비했습니다” 31절에서 사탄이 너를 지금 청구했다는 이야기 들었는데 지금 베드로는 사탄이고 뭐고 보이지도 않고 주님과 자기 사이에 간선도로를 깔아놨어요. 중심도로가 아니고 간선도로에요. 좋게 지냅시다 이런 뜻이죠. 제가 할 도리를 다 하고 제 정성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다해 주를 섬기겠습니다 됐습니까? 그런 인식 자체가 결국은 주님을 영광 돌리는 게 아니고 자기 구원에 환장한 사람이에요. 자기 구원에 환장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주시면 좋겠습니다. 포도나무는요 죄에 상관없이 의인되는 거예요. 죄 상관없어요. 따라서 죄 상관없이 의인되기 때문에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우리는 늘 죄가 나올 수밖에 없고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는 이 자신감 이 객기 오지랖 우린 매일같이 이게 나오는 거예요. 고맙다 베드로. 베드로의 말이 우리의 심령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뭘 열심히 좀 했고 주님이 그만큼 사랑했으면 나도 보답을 해야지 이런 되지도 않는 그런 우쭐댐, 촐랑댐.
그래서 34절을 봅시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했잖아요. 자, 여기서 왜 하필이면 닭이냐하는 거에요. 주님이 의도가 있어요. 이 뭐냐하면 나중에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잖아요. 그 부인할 때 닭이 베드로에게 시비 걸었습니까? 아니면 옆에 있는 어떤 작은 소녀가 시비를 걸었어요? 소녀죠? 나에게 시비 거는 것은 닭이 아닙니다. 같은 인간이 시비 걸어요. 너 나사렛 예수하고 한 패지? 너도 잡혀야지. 아저씨 여기 같은 편 있어요. 라고 할 때에 강남강의 뭐 첫째 시간 둘째 시간 다 들어도 소용없어요. 아니야 아니야 SNS 반박문 내고요 난리도 아니에요. 내가 그런 거 말한 적이 없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온갖것 다 해요. 요새 공천 한번 보세요. 막 인사하고 절하고 내가 5.18에 대해서 잘못 오해했습니다 막 이러고 난리도 아니라니까요. 근데 그 지적한 게 닭입니까? 닭이에요? 주님은 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뭐보다 못하다? 닭 아래 있다. 닭 아래 있어요. 네가 그렇게 무시하고 아무 것도 아닌 그렇게 아이큐가 낮은 그 닭보다 못한 인간들을 너는 굉장히 의식하면서 네가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 닭보다도 못한 인간이에요. 닭이 뭐 베드로한테 지적하지 않았어요. 그냥 울었어요. 꼬끼오 그냥 울었는데 그 반응이 대단합니다. 통곡을 해요. 통곡합니다. 특히 닭 같은 경우는 울면 그 목 졸라가지고 닭도리탕 해먹으면 끝납니다. 아무것도 아닌거에요.
너는 내가 이 예수님 보기에 너 같은 인간은 정말 닭보다 못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의 모든 의식과 그들이 말한 것에 대해서 네가 그렇게 신경쓸 정도로 너는 육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겠지요. 마귀가 어디 보입니까? 닭은 보이지만 마귀는 안 보이잖아요. 닭을 통해서 영적인 것을 끄집어내시는 주님. 무화과나무에서 영적인 것을 끄집어내지요 포도나무에서 영적인 것을 끄집어내지요. 왜? 주님은 마귀하고 싸우는 거예요. 우리 상대하는 게 아닙니다. 열심히 할께요. 바르게 할께요. 최선을 다 할께요. 그런 이야기는 전부 다 자기 구원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 헛소리하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안 하면 내 구원 없다 그건 끝난 거죠 뭐. 그러니까 구원이 없는 거예요. 그 소리하니까 구원이 없는 거예요. 기생 라합이 뭘 그리 걱정했어요? 기생 라합은 뭘 들었습니까? 누가 쳐들어온다? 하나님이 쳐들어오신다 들었잖아요. 그러면 기생 라합의 남은 해야 될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자기 시간을 뭐가 덮칩니까 먹구름 허리케인 덮치듯이 주님의 시간이 매일같이 내 시간을 덮쳐버리면 지금 내 시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덮쳐진 주님의 태풍 구름 속에 우리가 놓여있으면서 신바람이 이박사지요. 아 이런 식으로 내가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지는군요. 잘 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대하면서 성경 보는 관점이나 자세 바탕 토대 전혀 없이 그저 자기 구원에 환장한 채로 성경을 봤으니 바로 우리가 베드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홀로 다 하셔서 그게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줬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