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틈 속의 시온

아빠와 함께 2023. 12. 13. 08:34

20231211a 부산강의 : [시편]64(48:11)-틈 속의 시온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48편입니다. 거기 2절 끝에 보면,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시온 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온 산에 대해서 이해할 때는 간단하게 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인물에서 공간에서 다시 인물로 바뀝니다(인물→공간→인물). 미지의 어떤 분이 특정 공간을 설정해요. 그 공간이 날아가 버리고 또 하나의 인물로 바뀌어져 나갑니다.

여기에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요. 보이지 않는 인물과 특정 공간을 지정하게 되면 이 공간에 모여든 사람이 있을 거예요.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을 언급하면서, ‘내가 너희를 그 공간에 모이게 했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잘 알듯이 임마누엘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밖에 없고 하나님은 여기서 보이지 않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임마누엘, 이사야에 나오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기존의 이스라엘을 둘로 나눠요. 기존의 이스라엘과 그다음에 새로운 이스라엘 둘로 나눠지는데요. 임마누엘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통해서 구현이 되는 겁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은 새로운 이스라엘과 겹쳐져 있는데 한쪽이 제거가 돼요.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이 제거되면서 숨겨진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 이스라엘이 제거될 때 얼마나 발악하겠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할 때는 언제고 우리를 제거하는 건 뭐냐? 아주 뭐 버티기가 대단합니다. ‘주께서 우릴 버리기 위해서 선택하셨나이까’ 이래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간단해요. 적어볼게요. 중요한 거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기 위해서 선택하셨습니까, 라고 이스라엘이 항변할 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해요.

너는 처음부터 버려졌던 자다. 에스겔에 보면 갓난아이로 벌거벗었다. 너는 돌볼 사람이 없었다. 돌볼 사람이 없어서 거둬줬는데 그동안 너는 거두어준 양부모는 버리고 네가 엉뚱한 곳에서 부모를 찾았고 네가 커서 남편 찾았잖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런 일들이 어디서 일어나는가? 공간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이 공간이 오늘 본문에서는 ‘시온’이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면 시온도 어떻게 되느냐 하면 두 종류여야 돼요. 기존의 공간의 시온과 그다음에 새로운 공간의 시온이 아니고 새로운 인물이 시온이 되는 거예요. 기존의 시온이라 하는 것은 특정 공간, 예루살렘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인물은 신약에 오면, 이게 ‘예수 안’이 돼요. 마치 예수님 자체가 공간인 것처럼 되는 겁니다.

오늘 시편 48편에서 시온이 등장할 때 시온이란 개념이 구약에 있는 개념이란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구약은 지리적으로 평면적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겁니다. 애굽이란 지역도 지구상이 한 지점이고, 그리고 약속의 땅이란 것도 한 지점이고. 애굽에서 약속의 땅까지의 여정, 그게 구약의 제1편이고 제2편은 뭐냐? 거기서 추방되어서 완전히 소실되는 것, 그게 구약의 제이편입니다.

그러면 1편, 2편의 서론부분은 뭐냐?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생기기까지 그전에 어떤 개인과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던가를 설명하는 것, 그게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언약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언약은 그 바탕을 뭐로 했느냐하면 전 인류가 심판받았다는 심판 바탕 위에서 그들에게 찾아오지요. 전체를 물로 심판했던 그 바탕이 인류가 하나님의 일이 시작되는 무대, 스테이지가 되는 거예요. 무대가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8장에 보면, 네가 날 때부터 악하게 되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처음부터 악했다고 시작하는 겁니다. 오류를 품고 출생하는 거예요. 오류를 품고 출생하는 것은 오류 없는 출생과 대비가 됩니다. 오류 없는 출생은 누구도 인정하느냐 하면 하늘의 별도 인정해요. 동방박사 이야기입니다. 다른 것은 소실되어도 이번의 출생은 영원하다는 것은 마태복음 2장에서 동방박사가 와서 하지요.

그 이유는 인간들의 모든 출생은 말씀의 구심점에서 제거된다. 오류 없는 출생, 이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예언이 그 아기 예수 출생에 대해서 집중돼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므온이란 그 사람이 아기 예수를 안고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준다고 했지요. 모든 근심걱정 다 날아가 버렸어요. 왜냐하면 아기 예수를 받는 순간 예수님에 집중되었던 모든 예언과 완성이 그걸 안고 있는 자기와 더불어 임마누엘이 되면서 예수님께 일어났던 모든 일이 자기에게 공유되기 때문에 자기 모든 인생의 시름과 걱정이 다 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그 시므온이란 사람이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교체가 일어나요.

내 목표와 내 뜻과

주님의 목표와 뜻과 거기서 완전히 바꿔치기가 되는 겁니다.

이걸 ‘당근마켓’이라고 이야기해요. 푼돈 주고 대박 상품을 구입하게 된 거예요. 이런 횡재가 없는 겁니다. 나라는 인생은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지옥 가야, 저주받아야 될 인생이 천국에 가는 인생으로 바꾸게 되니까 이건 말로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어요. 감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모든 예언과 말씀이 어디다 집중한단 말입니까? 주님께 집중할 때 그 말씀이 어디를 경유해 거쳐 옵니다. 그 걸쳐오는 게 시편 48편이에요. 이스라엘 역사를 경유해서 오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평면적이고 수평적인 실제로 인간들이 거주했던 거주지를 경유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 말씀이 오면서 인간들의 공간개념과 인간이 그 공간 속에서, 땅이죠. 땅에서 인간이 살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는 예수 안과 차별되는지, 예수 안에서 영생 얻어야 되는데 인간들은 땅 위에서 영생을 얻고자 시도한 거예요. 누가? 이스라엘이. 여기가 좋사오니, 이랬다 이 말이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겪는 그것을 아기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마누엘 되는 성도에게 전수됨으로서 우리가 옛날 구약의 실패담을 즐겁게 똑같이 재현하게 되는 겁니다. 똑같이 재현하게 돼 있어요. ‘아아, 이스라엘이 이런 오류와 이런 실수를 줄기차게 해왔구나.’ 처음부터 다시 늦게 오셨기 때문에, 세 번째 다시 해야죠.

지금 무슨 이야기했느냐면 공간과 인물이 차이점에 대해서 제가 설명해드린 겁니다. 인간은 공간 속에서 자기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해요. 이걸 누가 했느냐? 구약 이스라엘이 시도했잖아요. 그런데 그게 다 허무함으로 무상으로 끝나버려요. 그걸 대표하는 공간이 뭡니까? 시온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살았던 건 뭐냐? 애굽에서 살았죠. 애굽에서 시온까지, 애굽에서 약속의 땅까지 평면적인 그들은 여정을 밟고 옵니다.

밟아오면서 그들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 인간이기에 품고 태어난 오류를 보여줘요. 도대체 오류니까 인간 입장에선 뭐냐? 인간의 한계를 거기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오류를 드러내면서 약속의 땅에 오는데 결국 우리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 모습을 보면서 이게 오늘날에 우리에게 재현되잖아요. 결국 인간을 통해서 드러내는 오류의 핵심은 이겁니다.

하나님과 같이 살자는 거냐, 말자는 거냐? 그걸 분명히 하나님께선 드러내요. 인간들은 하나님과 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내가 잘되고 싶어요. 내가 잘되고 싶은데 하나님은 그냥 후원해주면 된다는 생각이에요. 이게 초장부터 어렵게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걸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죄 있는 아담과 죄 없는 아담, 무죄한 아담이죠. 선악과 따먹기 전의 아담 사이에 뭐가 있느냐? 이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사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틈이 있지요. 이스라엘 사람들, 아담의 후손이죠. 이스라엘 사람들 통해서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죄 없는 아담과 죄 있는 아담 이야기를 모세를 통해서 들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두 가지 경우만 생각하는 거예요. 옛날 죄 없을 때와 죄 있을 때만 생각해요. 그럼 하나님은 무엇을 발굴하느냐 하면 그 둘 사이에 뭐가 있다는 거예요. 그 틈 사이에 뭐가 있다는 거예요. 인간으로선 상상도 못한 이야기죠. 틈 사이에 끼어있는 그 무엇을 끄집어내는 방법은 죄 있는 아담이 이스라엘이 뭐를 바라보느냐 하면 죄 없기를 바라봐요.

이렇게 자극을 하게 되면 이 자극에 율법이 게재됩니다. 율법은 딱 두 가지만 생각해요. ‘복 받은 나’가 되려면 죄가 없어야 되고, 만약에 죄가 있으면 나는 저주받는다. 딱 두 가지 경우만 생각하게 돼 있죠. 율법을 줘서 그렇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딱 두 개밖에 생각하지 못한다는 그걸 확실히 역사라는 지평 위에 그냥 드러내는 거예요. ‘너 둘밖에 모르지? 너 율법에 민감하잖아?’

율법에 민감하다는 말은 인간들의 관심사가 누구한테 완전히 몰입돼 있다는 거예요? 내가 잘 되는 나냐, 내가 망해버린 나냐? 딱 두 종류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은. 그럼 뭐가 빠진 거예요? 하나님 생각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음을 율법을 통해서 폭로시켜놓은 겁니다. 잘 되도 내가 잘 되고, 못 되면 내가 고민이 되고. 인간은 단지 그것밖에 없어요. 둘 사이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러한 예가 나와요. 민수기에 보면 나옵니다. 애굽에서 약속의 땅에 가면서 그 여정에서 그런 일들이 생깁니다. 민수기 14장 6절에 보면, 그 틈 사이에 뭐가 있는지 그 대목에 보면 나와요. 민수기 14장에 보면 정탐꾼 보내고 난 뒤에 결과를 놓고 그들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이왕 어려운 것 해봅시다.

인간은 주관적 사고, 사유라 하지요. 주관적 생각과 객관적 생각, 두 종류밖에 할 줄 몰라요.

주관적 생각이란 인간은 결과를 제거하고 과정만 남기는 것이 주관적 사유고,

객관적 사유는 결과만 남기는 것, 이게 객관적 사유에요, 생각입니다. ‘뭘 해서 잘 되면 다 됐지.’ 객관적 결과만 취득하는 거예요. 챙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 내가 잘할 게요?” “말로만 하지 말고 결과를 내, 결과를. 성과를 내라고, 성과를. 성과가 네 실력을 반영하는 거야. 말 앞세우는 인간치고 되는 인간이 없어.” 이런 것. 이게 바로 엄마가 딸보고, “성과를 내라고. 내가 너한테 투자한 것 생각하면 성과를 내라고. 그래 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성과를 내.” “엄마 그 남자가 뭘 어떻게 했는데 최종 나와서 하는 말이 ‘나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나는 그 남자 선택했는데 그 남자는 내 이름 안 받아줬다.” “그런 소리하지 말고 성과를 내. 그 남자 데리고 와.”

그런데 주관적은 뭐냐 하면 “엄마, 내 생각 들어봐.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하는 것은 주관적 생각이에요. 인간은 두 가지 생각으로 주관적으로 시작해서 과정으로 해서 어떤 결과를 얻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애썼는데(주관적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의 애씀에 대해서 호응해서 그것을 고려해서 천국에 합격이란 결과를 저한테 주시면 그 하나님을 내가 믿겠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인간은 이 두 생각밖에 없어요.

이것이 민수기에 방금 했던 14장 6절의 내용이에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태까지 홍해 건너서 이년 동안, 1년 이상 고생고생하면서 사막을 통해서 왔는데 이제 와서 열두 정탐꾼을 보냈더니만 뭡니까? 자기 애쓴 건 있는데 결과는 꽝인 거예요. 이거는 도저히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자기들은 상상했지요. 자기 고생한 것 생각하면 힘든 사막을 통과한 걸 생각하면 두 가지 결과를 생각했지요. 하나는 약속의 땅이 텅텅 비어있거나, 두 번째는 약속의 땅이 있지만 허름한 고함 한 번 지르면 땅을 다 내놓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민족들이 살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정탐을 해보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건 사실이었지만 이미 거기엔 주인이 따로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주인이 너무 셌다는 것, 우리가 도저히 이거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열두 정탐꾼 말 듣고 대성통곡한 것은, ‘인생 헛살았다’에요. 아무 낙이 없이 어떤 결과 하나 보고 살았는데 이미 장소는 떠났어요. 애굽은 떠났어요. 떠났으면 결과를 성과를 내야 되는데 성과 자체가 완전히 절망적이에요.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이 유도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 불평을 유도한 거예요. 이게 틈, 사이입니다. 이게 틈이었어요.

죄 지은 아담과 죄 안 지은 아담 사이에서 인간은 죄 짓지 않았을 때의 낙원을 인간은 소망하면서 살아왔는데 그 틈 사이에서 너로 인하여 하나님 쪽에서 공격을 당하고 피해를 본다는 생각은 인간 속에는 없었어요. 내 생각에 몰두해보니까 내 생각 몰두 자체가 타인에 대한 피해로 이어짐을 인간들은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좀 더 분석해볼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주관은 뭐로 돼 있는가? 주관은 응시로 돼 있어요. 꾸준히 쳐다봄, 집중해서 쏘아봄, 이게 응시에요.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마크 트웨인의 소설에 보면 톰 소여가 장난꾸러기거든요. 뭘 하느냐 하면 내가 저 관 속에 매장돼 있다면, 매장되어 죽는다면 나는 과연 죽을까, 안 죽을까?

내 시신이 관 속에 들어가 매장되어 묻혔다고 했을 때에 과연 내 주관은 같이 묻힐까요, 안 묻힐까요? 내 몸은 없어져도 무엇은 남아있다? 나의 응시는 남아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비록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죽는 순간까지 응시할 수 있는 불멸의 존재로서 내가 살아 있는 그 자아가 현재 아직 안 죽고 있는 내 몸과 결합돼 있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어떤 안목에 있는 하면 인간 주제에 내 죽음조차도 응시할 수 있다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이미 신이에요. 그럼 내 육신은 뭐냐? 신이 육화된 거예요. 말씀이 육신 되듯이 나라는 내가 알 수 없는 나조차도 죽고 난 뒤까지 고려하고 있어요. 이게 종교 아닙니까. 종교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척하지만 누가 전지전능해요? 내가 전지전능한 거예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누가 더 위에 있다? 내 응시가 내 시선이 더 위에 있다는 뜻이에요. 종교가 얼마나 못돼 먹었는지 아시겠지요. 얼마나 악마적이라는 사실을 알겠지요, 종교라는 게. 인간의 주관의 집대성이 종교라는 것. 신은 위대하다고? 누가 더 위대해요? 신이 위대하다는 자기 자신이 더 위대하지요.

따라서 이걸 누가 아느냐? 하나님이 아시고 이런 인간에 대해서 뭐라고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시느냐 하면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질투’ 나는 너를 미워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희들을 애굽에서 건져낸 것은 ‘미워하기 위해서’에요. 주님이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나는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건이 있어요. ‘내 사랑에 네가 흠집 내지 마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니까.

여기서 누가 신명기 29장 20절 찾아보세요.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질투’ 다음에 무슨 단어가 붙어있지요? ‘질투의 불’ 마지막에 불 심판받잖아요. 소돔과 고모라에 불 심판하듯이 마지막엔 전 지구가 불태워집니다. 이건 뭐냐 하면 주께서 인간에 대한 질투를 끝까지 포기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랑한다는 조건 하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의 질투를 네가 이해하는 조건 하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질투할 요소가 인간에게 있다, 없다? 있다는 거예요. 그럼 인간은 누굴 사랑합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거예요. 자기가 이미 죄를 범한 아담은 자기가 신처럼 되었으니까. 모든 지식을 내가 아는 것으로 확보된 내 지식으로 나는 어디까지 돌파하겠다? 천국까지 합격을 하겠다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인간은.

내가 죄 있는 건 맞는데 이 죄를 뭐로 극복하면 돼요? 성경 지식으로 이게 확보가 되면 죄 있는 나도 어디 갈 수 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자기가 포기를 못해요. 왜? 그 지식의 소유자인 나를 내가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게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성경공부 왜 합니까, 큐티 왜 하지요? 뭘 확보하기 위해서? 지식을 확보하기 위해서.

부부간에 남편은 복음 알고 아내는 복음 모르면 아내를 개무시하는 빌미로 삼지요. ‘진리도 모르는 게 어디서?’ 다른 말로 번역하면 전체를 알지도 못하면서 네 개인만 주장하느냐, 이렇게 해서 누르는 하나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눌림을 받으니까 뿔따구나지요. 그럼 어떻게 대처해야 돼요? ‘나도 너만큼 안다’ 이렇게 대처해야 됩니까, ‘그래 나 등신이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어떻게 대처해야 지혜로운 겁니까?

이렇게 하면 돼요. ‘나는 성경을 보니까 갈수록 내가 등신인 걸 알았다.’ 아는 것보다 계속 모르는 것이 왜 자꾸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그게 새로움이에요. 이미 출생부터 우리는 오류를 갖고 있는데 오류에 대해서 우리의 주관이 너무 강해서 성과 내는데 너무 급급해서 오류를 감추는 식으로 우리가 위선적으로 살아온 거예요. 들춰내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그들의 예상한 성과대로 안 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곡을 합니다. 그때 누가 등장하느냐? 특이성이 등장해요. 그게 틈 사이에 등장한 인물, 갈렙과 여호수아에요. 왜 그들은 광야에서 똑같은 경험을 했으면서 동일한 경험인데 왜 다른 결론을 내놓느냐 이 말이죠. 왜 다 같이 열두 명 같이 간 정탐꾼이잖아요. 10:2에요. 갔는데 왜 다른 사람이 대세가 뭐냐 하면, 이건 죽어도 못 들어간다. 이기지 못한다가 대세란 말이죠.

그런데 왜 갈렙과 여호수아는 다른 소리를 내느냐? 그 다른 소리를 낸 자에게 주님께서는 약속의 땅에 너희 둘만 들어갈 수 있다. 심지어 모세도 못 들어가요. 너희 둘만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열 명의 정탐꾼이 봤을 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열 명의 정탐꾼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거예요, 못 나오는 겁니까? 못 나오는 거죠.

여기서 내린 결론은 뭐냐? 약속의 땅은 못 들어간다. 이게 바로 틈새에서 나온 거예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천국은 없다가 돼요. 천국은 없는 거예요. 오류를 갖고 태어난 인간에게 천국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천국은 없으니까 인간은 천국 대신 유토피아를 교회에서 이야기합니다.

유토피아의 특징은 뭐냐? 내가 호강하는 세계에요. 내가 행복해지는 세계에요. 이게 유토피아에요. 여호와증인이 나눠주는 전도지 봤지요. 글만 있는 게 아니라 그림도 나와 있잖아요. 완전히 골프장이에요. 푸른 잔디에 완전히 남진의 <님과 함께>의 실현체에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그것도 유럽식 빌라. ‘사랑하는 님과 함께’ 천년만년 살겠다는 거예요.

<유토피아> 원 뜻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데 토머스 모어가 16세기에 지은 책이에요. 인간이 제시하는 것, 현실과 이상 사이에 중간과정을 거쳐서 이상세계에 들어가자. 그게 중간과정, 인간 쪽에서 일종의 제한이죠. ‘유토피아를 허락해주소서, 신이시여’에요. 그런데 유토피아는 임마누엘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을 추방하고 난 뒤에 자기들끼리 살겠다는 세계가 유토피아입니다. 왜? 유토피아는 어떤 누구도 나에 대해서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유토피아를 소망하는, 유토피아로 나가는 과정 속에서 뭐가 없는가 하면은 바로 이게 없어요. 틈이 없어요. 나와 그 이상세계, 내가 꿈꾸는 이상세계에 틈이 없어요. 틈이 없다는 말은 단절되지 않았습니다. 끊어짐이 없어요. 끊어짐이 없고 계속 매끄럽게 이어져가고 있어요. 늘 성화하고 늘 바르게 살고 이어져오고 있어요. 지난 것은 다 헛수고 아니고 유의미한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고 자꾸 자기를 간증 집회하듯이 간증을 만들어내요. 이어지죠.

그런데 이것이 왜 악마의 늪이고 사기냐 하면 예수님 자체의 단절이 있어요. 예수님마저도 하나님 나라에 가려면 단절되어야 돼요. 끊어져야 돼요. 예수님 자신이 저주를 받아야 돼요. 갈라디아서 3장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저주받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0장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그다음에 뭐합니까? “목숨을 버리노라” 이게 무슨 뜻이냐 말이죠.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친하게 지내면 그게 되잖아요. 그게 임마누엘 아닙니까, 그게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제자들이 베드로가 예수님 죽는 것을 왜 극히 그럴 리 없다고 아주 단호하게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같이 있는 거예요. 그들이 알고 있는 구약의 임마누엘은 같이 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같이 안 있고 헤어져서 사단난 걸 너무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셨다면 진짜 메시아가 오셨다면 이젠 헤어짐이 없어야 돼요. 안 헤어져야 돼요.

그리고 안 헤어지겠다고 열두 제자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모든 재산을 바치고 모든 가정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다녔습니다, 라고 베드로부터 열두 제자가 다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어요. “제가 모든 걸 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끝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주님 가신 곳이라면 제 목숨도 내놓겠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안 떨어지겠다, 안 떨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주께서 하는 말이, “그러니까 너는 나와 떨어져야 돼. 안 떨어지겠다는 것이 너의 최종적인 결심이라면, 그렇다면 너는 나와 헤어져야 된다.” 그 안 떨어져야 연속된, 틈이 없이 우리가 갖고 있던 결심과 의지로 붙어있어야 된다는 여기에 대해서 주님의 말씀은 아주 단호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생각은 모르고 인간들이 기껏 아는 인간들의 의견을 나한테 풀고 있다.’ 내놓고 있다.

그럼 이건 뭐냐 하면 악마의 특징은 인간들의 납득될 만한 말만 쏟아내고 있는 거예요. 사탄의 말의 특징은 뭐냐? 그 틈이 없이 이어짐, 이렇게 저렇게 하면 이런 성과가 된다는 이어짐으로 문장을 낼 때 그게 어떤 성경구절을 도배를 해고 갖다 대도 그건 악마의 말입니다. 끊어짐이 없으니까, 틈이 없으니까.

제가 문장을 쓸 테니까 뭐가 문제인지 여러분들이 알아 맞춰보세요.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곰도 죽는다.
고로 소크라테스는 곰이다.

이 문장의 문제점이 뭐예요? 연결되는 듯이 연결 안 되는 거고, 연결 안 되는 것 같은데 연결되고 그렇지요. 졸지에 소크라테스는 곰 됐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인간에겐 말이 안 되지요. 왜 말이 안 되는가? 소크라테스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걸 ‘사자’로 바꿉시다.

사자는 죽는다.
곰도 죽는다.
따라서 사자는 곰이다.

이것이 인간의 종種 말고 유類의 상태에서는 이게 진리에요. ‘모든 동물은 죽는다’에선 이게 맞는 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자 대신 인간을 집어넣으니까 인간은 화가 나는 거예요. 여기에 ‘죽는다’에 대해서 인간들은 뭘 고집하느냐 하면 곰이 죽는 것과 인간 죽는 것에 차별을 두는 거예요. 이거는 다른 죽음이라고 본인이 스스로 설정을 한 거예요. 다른 죽음이라고.

그런데 인간들은 다른 죽음이라 하는데 여기 죽음에 누가 끼어들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끼어들어버렸어요. 예수님이 끼어들어서 여기서 플러스알파, 인간들이 모르는 죽음 속에 인간이 모르는 것을 추가해서 죽음에 끼어들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말씀에 의한 저주, 저주성에 합류를 해버려요. 그러면 인간은 죽으면 없어진다 하잖아요. 그러나 저주가 포함되면 인간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저주가 저주되기 위해서 인간은 죽어야 된다는 사실이 영원토록 남는 게 돼요.

사는 게 저준데 살 때 저주는 진짜 지옥의 삶과는 족히 비교가 안 돼요. 이제 본격적으로 저주받는 삶이 기다리고 있어요. 지옥 가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부자가 지옥에서 더욱더 고통스러운 이유는,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잘 나갔다는 사실이에요, 부자로서. 본인을 몰랐어요. 본인이 죽는 것만 알았지 내가 지금 부자로 사는 자체가 뭐가 된다? 저주 삶이라는 것을 생각을 못한 거예요.

왜냐하면 시간적으로 아직 안 죽어봤으니까 살아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뒤를 모르니까 미래를 모르니까 자기는 현재가 전체인 줄 알았어요. 자기 생각에 단절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부자, 부자, 부자, 아이고 살아 있을 때 호강했으니까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미리 자기가 자기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저주로 골인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이건 누가 아느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알 때 말씀 속에 이게 담겨있는 거예요.

그래서 거지 나사로 비유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했습니다. 거지가 살아서 동생들에게 나타난다고 동생들이 천국 가는 게 아니고, 네 코앞에 있는 모세와 선지자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누가 뭐래도 그는 저주받게 돼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살아생전에 인간의 모든 진리 파악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기 때문에요.

죽었던 거지 나사로가 살아서 나오면, ‘그래서 뭐라던데? 천국이 있어? 지옥이 있어? 내가 믿을게.’ 이렇게 돼버리면 눈에 보이는 그것, 내가 눈으로 봐서 관찰해서 결론을 내린 그 자체가 틈이 안 생겨요. 그게 지식의 종합이 돼버려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우리의 미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미리 알려줬거든요.

미리 알려줘도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의 사적인 개인적인 슬픔이지 나는 안 슬프다는 거예요. 이게 가는 방향이 그쪽인데 저주 방향인데 인간은 자기는 차 운전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내 의지로 절벽에 부딪칠 일은 없다는 거예요. 지금 운전을 잘하기 때문에 그 저주가 있으면 피해가는 식으로 나는 인생을 꾸려가고 있으니까 자신만만하다는 겁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민수기 14장 6절에서 이런 이야기합니다.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라고 돼 있지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같은 이스라엘 사이에 틈을 내버려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다들 주장하는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 중에 누구는 기뻐하고 누구는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결정권이 먼저 앞선다는 거예요. 참, 정말 이거는 틈 자체를 이미 갈렙과 여호수아는 넘어서고 있습니다.

내 결정이 뭐가 중요하냐 이 말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 게 뭐가 중요하냔 말이죠. 하나님이 선물로 준 믿음이 중요하지 내가 ‘주님 믿습니다’ 하는 것은 전부 다 노림수가 있고 음흉한 자기의 욕망이 거기에 섞여있는 거예요. 섞여있는 게 아니고 전부지요. “예수 믿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걸 버리고 따랐습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했잖아요. ‘사탄아, 물러가라’ 했잖아요.

주님의 사랑이란 딴 게 아니고 계속해서 우리의 주관과 객관이 지금 어떤 선을 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들춰내는 그게 큰 사랑이에요. 이걸 주관과 객관은 이렇게 묘사되거든요.

인간이 알 수 없는 틈, 단절점, 죄 지은 아담과 죄 있는 아담 사이의 내막을 몰라요. 왜 선악과 따먹고 죽는지 저주받는지를 몰라요. 선악과 따먹은 걸로 인하여 생명나무는 왜 못 따먹는 존재가 됐는지 그 생명나무가 뭐기에 우린 왜 못 따먹고 생명나무 있는 데서 추방됐는지 그 내막은 하나도 몰라요. 중요한 것은 내가 이제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챙겨야 된다는 그 사실만 있는 거예요.

이게 블랙홀, 어두운 구멍이라면 인간의 객관은 조르르 와서 이 상황 보고, ‘천국 여기 있네. 됐다. 이제 다시 내 하던 대로 하면 되겠네’ 이게 인간의 객관성이라면 주관성은? ‘어, 천국이네. 천국 들어가야지.’ 천국 주변을 뺑뺑이 도는 거예요. 들어가질 않아요. 계속해서 여기 블랙홀에는 십자가 있고 부활 있다. 자기 아이까지 교회 와서, ‘얘야. 이게 십자가다. 이 십자가가 우릴 구원해.’

본인은 십자가 들어가지도 않아. 계속 가르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우리가 옛날에 이런 기적을 받았어.’ 헬라인들은, ‘우리가 어떤 정보, 지식을 갖고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어.’ 이 속에 들어가질 못해요. 왜 못 들어가느냐 하면 일단 내가 산 채로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이게 인간의 생각이에요.

믿음, 소망, 사랑이 뭐냐? 살아 있는 내 믿음, 살아 있는 내 소망, 살아 있는 내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믿음, 소망, 사랑을 거론하지만 진짜 포기 못하는 것은 뭐냐? 결국은 내가 구원받는 성과를 내가 유지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정탐꾼 몇 명입니까? 열 명이죠. 열 명의 생각이죠.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걸 완전히 관점을 뒤집어요. 그 틈을 건너버렸어요.

뭐냐 하면 약속의 땅의 주인이 누구냐? 애굽에서 끄집어낸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약속의 땅에 간다고 하는 말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자. 이해하게 되면 약속의 땅의 주도권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우리한테 있는 게 하나님께 있지요. 그럼 하나님께 약속의 주도권이 있다면 그 약속이 유효하게 작동한다면 그 약속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홍해 건널 때까지 이끌려왔잖아. 이끌려온 이 에너지에 계속 이끌리자, 이 주장이에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앞에 뭐가 있든 장대한 민족이 있든 상관없이 그냥 이끌리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열 정탐꾼은 뭐냐? 탐색하고 조사하자는 거예요. 과연 이 길이 단단한지, 이 다리가 무너지지 않는지.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런 인간들 보고 옷을 찢으면서 말하기를 그러니까 너희들이 좋아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기쁨은 따로 있다는 거예요. 네가 좋아하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우리 사이에 틈을 내버려요. 들어가자는 쪽과 못 들어간다는 쪽과 그 틈을 우리 인생의 틈, 다시 말해서 우리 인생에 균열을 내시는 하나님이에요. 균열을 발생시켜요. 옷을 입었잖아요. 그러면 옛날 조선시대 때 첫날밤에 창호지에 구멍 뚫리는 소리 나지요. 그때 하녀들 쳐다보고 한다고요.

그러면 촛불 확 끄고 제일 먼저 하는 게 뭡니까? 여자는 단단히 옷고름을 쥐고, ‘네가 밤새도록 풀 수 있는지 보자’ 남자는 어떤 난제를 푸는 것처럼 퍼즐을 푸는 것처럼 벌벌 떨면서 풀다가 밤새는 거예요. 평생 처녀로 살아왔던 그 고귀한 완전체를 어떻게 합니까? 균열을 내는 거죠. 이리보자, 뒤태를 보자? 우선 풀어야 돼요. 요샌 반대가 되어 지가 먼저 풀고……. 내숭도 지겨워.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우리 속에 우리가 꽁꽁 닫아놓은 저주받아야 될 나, 지옥 가야될 나를 십자가가 와서 풀어주는 거예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이 좋은 이야기 아쉽게 10분 쉬고

 

 

20231211b 부산강의 : [시편]64(48:11)-틈 속의 시온
(강의:이근호 목사)


사람들이 틈이란 것을 왜 싫어하느냐 하면 틈이 오기 전까지 계속 자기 자신을 견고하게 유지해왔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파괴되고 깨지게 되면 내가 수고한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인간은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가 노력한 만큼 뭘 한 것이 있어야 되는데 ‘결국 나락에 떨어지기 위해서 이만큼 노력했는가’ 이런 논리밖에 안 됐어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갖고 있는 지혜나 지식이 어디서 부딪치느냐? 십자가에서 부딪치는 거예요. 십자가가 의도적이에요. 인간의 모든 기적 체험과 간증과 그리고 성경 지식 모든 것을 완전히 무산시켜버립니다. 박살내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 사건에서 우리를 부수고 ‘하나님, 속이 참 시원하겠어. 하나님, 참 좋겠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우릴 상대로 박살내니까 참 신나겠습니다’ 비아냥거리겠지만 주님께서 우리 속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저주를 찾아내는 거죠.

옷섶을 헤치고 첫날밤에 끄집어내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던 저주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왜 끄집어내는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은 저주 속에서만 나타나게 돼 있어요. 저주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 첫날밤 이야기가 적절한 이유가 시편 48편 11절에 나옵니다. “주의 판단을 인하여 시온산은 기뻐하고”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뭐죠? “유다의 딸들” 주님께서는 유다의 딸을 처녀로 만드는 거예요.

처녀로 만들 때 뭐냐 하면 신랑이 요구하는 여인이에요. 주님께서는 혼인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보내시고 그 아들의 신붓감을 찾는 작업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게. 신부와 신랑이 결합할 때는 반드시 뭐가 구비되느냐? 사랑이 구비된다고, 사랑이. 사랑이 사랑답기 위해서는 신랑의 사랑이 신부에게 거부당하거나 거절당하면 이건 혼인 자체가 성립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오면서 열 정탐꾼처럼 반항하는 이유가 뭐냐?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을 요소가 돼요. 저주거리가 돼요. 그러니까 가슴을 헤치고 균열이 돼야 우리 안에 우리를 사랑 안 해야 되는데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든 악마적인 저주성, 나만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질투, 그게 저주거리거든요. 저주거리를 주께서 끄집어내주는 거예요. 옷섶을 헤칠 수밖에 없어요. 이게 너를 망쳤다는 거예요.

이사야 62장 4절에 보면,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라 하며 네 땅을 쁄라(나와 혼인한 여자, 내 신부다. 그래야 혼인잔치가 되니까요)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하나님께선 계획이 있었던 겁니다. 혼인하고 싶은 거예요. 여자의 후손 아들을 주고 아들을 홀로 살지 않고 배필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아들은 완전한 완성된 두 번째 아담, 정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진짜 인간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사랑을 위해서 인간은 균열을 맞이할 수밖에 없어요.

다시 민수기 14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민수기 14장 10절에 보면, 아까 갈렙과 여호수아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당겨주심이 있다면 우리는 그 땅에 갈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그러면 아주 건장한 토착민들을 설정한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그거는 우리의 밥이 되라고 한 거예요. 아예 밥 치고 포식할 수 있는,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10절에 보세요. 온 회중이 그들의 의견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돌로 치려한다. 바로 이게 틈이에요. 이게 틈에서 나오는 진리에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누가 친다? 이제까지 함께 했던 이스라엘이 친다는 것은 갈렙과 여호수아를 치는 게 아니고 함께 계신 누굴 친다? 하나님을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돌 맞아 죽는 이 사건이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지 않으면 혼인이 성립이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 가려면 나의 사랑에 대한 주님의 단호한 불같은 질투심을 우리가 받아줘야 돼요. 받아준다는 것은 우리가 나도 모르는 내 마음속에 있는 그 괴물적인 요소를 주님의 손에 의해서 공개되도록 해야 되죠.

다시 시편 48편에 돌아와서, 시온이 있는데 이 시온이 둘로 나눠지지요. 처음의 시온은 공간이었다. 두 번째는 인물이었다. 두 번째 공간에 있을 때는 인간의 자기 사랑. 자기 사랑인데 인물이 되면 신랑, 나로 하여금 나의 모든 본색을 그대로 까발려주시는 손길이 찾아온 그 신랑에 대해서 아가에선 이걸 ‘예루살렘의 딸들아’ 해요. 예루살렘의 딸들아, 이들이 뭐냐? 신랑과 신부가 혼인하는데 증인이 되는 거예요.

이 대목을 아가에서 찾아보면 실감나실 거예요. 아가서 3장 11절을 보겠습니다.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솔로몬이라는 신랑과 술람미 여인 둘이 혼인할 때 예루살렘의 딸들은, 시온의 여자들은 어떤 역할입니까? 들러리 역할하면서 그 결혼에 대해서 기쁨으로 증인으로 참여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아가서 5장 8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이것 신부될 사람이 친구들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내가 그 남자 너무 사랑해서 병이 낫다. 그 남자 좀 오라고 해. 나 상사병 걸렸어. 보고 싶어 미치겠어.’ 이런 거예요. 보고 싶다, 사랑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제가 영어로 방언으로 써볼게요. 아주 고급스런 영어는 아니고요. 내 수준에 맞게 영어로 써보겠습니다.

Take my hand
Take my whole life, too
For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이게 뭐냐 하면 ‘내 손을 가져가세요.’ 내 손을 가져간다는 의미가, ‘나의 인생 전부를 가져가세요, 역시.’ 왜 그렇게 하고 싶으냐? ‘왜냐하면 당신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당신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 사랑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엘비스 프레슬리가 불렀던 노래 가사에요.

사랑이란 것은 이왕 들킨 것, 이왕 죄인 중의 괴수된 것 다 가져가세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나도 모르는 내 최후의 모습을 까발려준 당신에게 나의 전부를 다 드리겠습니다. 이게 로마서 14장에 나오죠(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사나죽으나 이제는 누구의 것이다? 주의 것이다.

이걸 세상에서는 세 자로 이야기해요. ‘광신도’ 갈렙과 여호수아는 광신도에요. 어떻게 자기 생각이 없어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이야기해요. “맞아. 그들은 우리보다 힘이 세. 맞다. 그들은 무기가 강해.” 그다음에 그러므로 못 들어간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는 거예요.

이걸 신약적으로 표현한다면 요한복음 8장에 “맞아. 나 간음한 여인이야. 맞아. 나는 로마서 1장에 나오는 그 죄의 항목들, 안 걸리는 게 없어.” 몇 개는 걸리고 몇 개는 안 걸리는 게 아니라 전부 다. 우리의 잠재성을 다 까발리니까. 율법 앞에서 저주 안 받을 거리가 없어. 다 저주거리에요.

맞아. 그렇기 때문에 못 간다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뭐다? ‘나는 비로소 사랑을 알았다’는 거예요. 그동안 나는 내 사랑만 알았는데 줄곧 내 사랑에 미쳐 살았는데 이제는 나는 내 사랑이 이게 바로 저주의 이유가 되었다는 것을 밝혀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지요. 이렇게 보면 우리가 여기서 정리할 수 있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죽음을 겨냥해서 찾아온다는 거예요. 왜 우리의 죽음을 겨냥하느냐? 인간이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다해도 무엇은 못 다뤄요? 인간의 죽음은 다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죽기 직전까지 행하기 때문에. 죽음이 올 때까지는 온갖 짓들을 다하고 온갖 하고 싶은 것 다해도 막상 죽음이 오게 되면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저지 할 수가 없습니다.

아가서 8장 4절과 6절은 바로 그걸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가서 8장 3절에 보면,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찌니라”

내가 지금 남편과 하나가 된 이것에 대해서 너희들이 방해하지 말라. 이것 때문에 나도 존재하고 남편도 존재하고 이것 때문에 너희들도 존재한다는 거예요. 그 공간이 무슨 공간? 예루살렘 공간이에요. 이게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 안에 있는 상황, 상태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6절에 보면,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불같은 사랑이란 말은 모든 것을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기억된 것을 다 태우듯이 찾아오는 사랑. 나의 모든 것을 다 태운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을 다 태운다는 그 순간이 어떤 순간입니까? 바로 죽음의 순간이죠.

사랑이 바로 나를 진짜 나를 죽여 버리는 거예요. 내가 목숨 자살한다고 해서 내 사랑이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 자살하는 이유는, 나는 죽어도 내 응시는 살아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자살하잖아요. 그런데 응시하는 나마저 죽여 버리는 것은 내가 나의 주인공이 아니라 내 속에 품고 있었던 옛 아담의 죄가 그동안 나를 조종해왔다는 것, 엉터리 내가 그동안 진짜 나인 것처럼 주인 행세했다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들키는 거예요.

그 사람 앞으로 뭘 자랑하겠어요? 돈 자랑하겠어요, 지 신앙 자랑하겠어요? 오직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6장에서. 너희들 뭐 자랑할래? 나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십자가 안에서 사도는 이런 이야기를 외치고 싶었던 거예요. 그것도 신나게 외치고 싶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이미 죽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두렵지 않고 부끄럽지 않은 거예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주께서 뭐가 주어지지 않는가? 나의 행동에 대해서 나에게 묻지 않는 거예요. 과거에 어떤 행동을 했던 앞으로 미래에 어떤 행동을 하던 묻지 않는 것, 이걸 너희에게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말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네 대신 내가 사니까. 네 행동에 대해서 내가 책임 묻을 이유 없다는 거예요.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아직도 네가 살아 있다는 것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건 용납 안 되죠.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남편한테 신혼여행 가서 안길 때 아까 아가에 나오지요. 남자가 오른손으로 안잖아요. 그때는 여러분들이 프로레슬링이라 생각하고 빨리 항복을 해야 돼요. ‘이게 내 사랑에 질식돼봐야 내 사랑이 얼마나 너를 놓지 않으리라는 그걸 보여주마. 이리 와’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제시하는 여자의 조건은 하나밖에 없어요. ‘다른 여자 안 볼 거지?’

이게 뭐냐 하면 처녀 시온이에요. 그런데 이 처녀란 말을 이사야에 보면 그걸 누구한테 사용하느냐? 이사야 47장에 보면 바벨론한테 사용해요. 이런 게 좀 어려워요. 47장 1절에 보면,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이렇게 돼 있거든요. 5절에 봐도, “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했는데 어떤 점이 어려우냐 하면 이스라엘을, 이사야니까 미래 이야기, 미래에 하나님이 자기 신부로서 쁄라, 헵시바란 이름을 부여하는 거예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간단하게 이렇게 하면 됩니다. 이름 안에 기능이 축약, 보통 세상에선 이름을 존재로 보잖아요. 존재는 해체돼야 돼요. 해체돼야 그 이름 안에 품고 있던 기능적 내용이 풀려나오는 것, 이걸 인생이라 하는 거예요. 인간에게 이름은 하나밖에 준 게 없어요. ‘아담’이에요. 그 내용이 흙이에요.

그러면 산다는 기능은 뭡니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흙이었다는 사실을 전개하는 과정이 인생입니다. 점차 후패해져가고 쇠퇴해지는 이거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에요. 그러면 불신자 같으면, ‘그래 늙어죽을 것 마음껏 먹고 마시고 놀자’ 이렇게 되지만 신랑의 영이 찾아온 하나님의 신부로서 성도라면, ‘나는 흙이 되어야만 하는가, 또 흙이 되도록 인간을 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게 했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점차 알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산다는 것이 비로소 신랑에 의해서 의미가 새롭게 생기는 거죠. 그럼 왜 인생을 살아야 되는가? 교체하기 위해서. 내 인생을 주께서 오시면서 어디까지가 내 인생이라고 우겼던 거고 그것을 어떻게 주님께서 미리 자기 인생으로 답습했는가를, ‘미리’에요, 미리. 묻지도 않고 허무한 내 인생을 허무하게 보이는 자기 인생을 살게 하신 거예요.

그게 흙이 되는 것만 아니라 더 나가야 돼요. 그게 뭐냐? 저주받는 데에요. 그런데 바벨론 딸은 뭐냐? 그걸 몰라요. 열심히 사는데 왜 사는지 왜 죽는지 왜 태어났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그게 왜 딸이냐? 딸이란 개념은 비-자립적 존재입니다. 주는 대로만 받고 사는 존재. 비-자립적, 비독립적인 걸 딸이라고 이야기해요.

왜냐하면 딸은 뭔가 빈자리가 있어요. 나로 충족되지 않고 나를 옆에서 뭔가 도와줘야 될 어떤 낭군이 올 거라는 기대감 가지고 있어요. 그게 여자로 창조할 때 아담부터 먼저 있고 그다음에 여자로 태어난 거예요. 그 빈자리를 내다보는 그런 여자의 모습을 개로 표현한다면 셰퍼드, 한 번 물면 안 놓는. 안 물린 척하면서 자기가 물기를 원하고 있는 이중심리가 작동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니요/안 돼요’로 시작해서 동굴 속에서 메아리치면 ‘돼요, 돼요, 돼요’ 그런데 뒤에 하나 더 남아있어요. ‘이제 물었다. 이제는 너 죽고 나 살자.’

바벨론이 딸이에요. 그렇다면 그동안 시온의 딸이 누구한데 잡혀갑니까? 유다나라가 누구한테 잡혀가요? 바벨론에 잡혀가지요. 그러면 왜 잡혀가느냐 하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우상 섬기는 게 뭐가 나쁜데? 십계명에 보면 4계명에 나오지요.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의 질투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신랑이 될 수 없는 같이 할 수 없는 세상에다 포로가 되도록 만드는 작업을 먼저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이 세상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도 따지고 보면 주께서 의도하신 거예요. 세상 즐거움과 거기에 탐닉하는 것도 주의 뜻이에요.

바벨론에 포로 잡혔다는 말은 자발적으로 바벨론 사람 되기를 원한 게 아니고 포로 잡힌 거죠. 이거는 못 빠져나옵니다. 바벨론 사람 된 것, 이 세상사람 된 걸 우리의 의식과 노력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 바벨론 쪽에 포로 잡혀갔다가 그다음에 나오면서 생겨나오는 게 뭐냐? 내 딸 시온이 돼요. 바벨론 갔다가 나오면서 내 딸 시온이 된다고요. 그러면 바벨론 갔다는 말은 이미 그 나라 바벨론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바벨론 딸에서 어떻게 시온 딸로 다시 구분되는가? 구분되면서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공간에서 뭐로 바뀌느냐? 분화가 돼요. 인물로 드디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시온 땅이라는 것은 약속의 땅이라고 현재 팔레스타인 땅이라 하거든요. 팔레스타인 땅이 언제부터냐 하면, A.D.70년에 그 땅에 유대인들이 있었거든요. 그 땅에 계속해서 로마에 항전하니까 로마가 화가 나서 유대인들을 전부 다 다른 나라로 흩어지게 했어요.

유대인들 없어진 땅에 누가 살겠어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면서 그 땅에 유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땅으로 21세기까지 온 거예요. 주인이 바뀌었으니까. 따라서 이스라엘 땅은 없어요. 약속의 땅은 없습니다. 이 공간이란 게 없는 거예요. 그리고 공간이 생기려면 공간에 인물이 생기려면 이 없는 땅에 누가 와야 돼요? 누가 오셔서 그 땅은 그 땅이 아니야. 그거는 기능이 다 마감되었어. 끝났어. 너희들 흩어버리기 위해서 너희들은 약속의 땅에 천국에 가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다 들통 내는 기능이 완료되기 때문에 그 땅은 그 땅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땅이 그 땅이 아니라면 예수님 오신 땅은 무슨 땅이냐? 바벨론 땅이 되겠지요. 저주받은 우상의 땅에 주께서 오신 거예요. 유대교라는 이름의 저주의 땅에 오신 거예요. 여러분 잘 이해하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예루살렘의 딸이라고 할 때는 예수님으로 따라 나와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따로 분리되는 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신약에 나와요. 요한복음 12장 15절, 지금 시편 48편 내용은 뭐냐 하면 시온에 대해서 어떻게 신약에 예언되고 있는가를 미리 구약에 시편 48편에서 언급한 겁니다.

요한복음 12장 12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구원자 오신다는 뜻)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여기 이스라엘 나오지요.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바” 무엇의 딸아? “시온의 딸아”라고 시온의 딸이 누구로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새롭게 같이 증인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아까 예루살렘 딸 이야기했잖아요. 아가서에서.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라고 돼 있어요.

그러면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호산나 했지만 이스라엘의 대부분이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 보고 조롱하고 비웃었지요. 원래 조롱받으라고 주께서는 나귀도 아닙니다. 나귀를 탄 게 아니에요. 나귀새끼를 탔어요. 이건 예수님 몸무게 감당 못하고 찔뚝찔뚝 거리는 어린나귀에요. 아무것도 아닌 나귀, 누가 타기만 해도 부담되는 그런 나귀. 마치 돈키호테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당연히 권세 있는 자들은 조롱을 퍼붓게 마련이고, 그걸 주께서는 유도했고 그렇게 해서 드디어 스스로 자진해서 조롱거리가 되면서 어디 가느냐? 사람들의 조롱을 극한까지 몰아가면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 되지요. 죽고 난 뒤에 부활하시고 예수님 어디 가십니까? 드디어 승천해요. 승천했다는 말이 지상의 공간을 떠난다는 겁니다. 공간 개념이 떠나는 거예요.

그러면 시온의 딸은 어디 있습니까? 왕이 위로 올라가면 시온도 어디로 이동을 해야 돼요? 위로 올라가야 되지요. 그게 갈라디아서 4장 26장에 예루살렘은 어디에 있다? 하늘에 있는 거예요. 하늘에 있는 우리 어머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히브리서 12장 22절에 보면,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죠. 방금 12장 이야기죠. 이 12장 앞에 히브리서 11장을 활주로로 생각하시면 아주 쉽습니다. 비행기는 경운기가 아닙니다. 땅에만 돌아다니면 비행기가 아니지요. ‘위잉’하고 활주로에서 이게 11장입니다. 드디어 12장 되면 위로 올라가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12장에 하늘로 위로 가니까 쉬운데 11장이 어려워요. 왜냐하면 11장에서 위잉 할 때 땅의 요소와 하늘의 요소가 중첩돼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힘든 거예요.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실상’이란 말을 언급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이란 뜻입니다. 모든 것은 인간의 망상입니다. 허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응시에서 나오는 거예요.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출생했지, 내가 죽고 난 뒤에 그걸 미리 상상한다는 것은, ‘내가 죽고 태어나서 어디 천국 갈 거야’ 이렇게 주고받고 환상이에요. 내 중심이니까. 내 응시의 균열이나 틈이 발생되지 않은 게 환상입니다. 이게 완전히 예수님과 교체가 돼야 되는데 교체가 되지 못하고 계속 가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었으니까 구원받는다.’ 계속해서 내가 주인공으로 계속 가고 있는 거예요. 진짜 오함마로 맞아봐야 정신 차리죠.

여러분, 다음 두 가지 생각해보세요. 차이점을 해봅시다. ‘교회 다닌다. 교회 간다’와 ‘계추 간다’ ‘계추’ 뭔 뜻인지 모릅니까? 경상도 말이거든요. 모임을 계추라 해요. 지워야 되겠다. 단어 자체가 너무 심한 방언이라. 남성들의 친목모임. 여자 계추라 하면 찜질방 가고 노래방 가고 하잖아요, 점심 먹고. 계추란 말 몰라요? 아아~ 계추 간다는 건 놀러간다는 거예요.

교회가 계추 같이 가버리면 종교는 오락이 돼요. 오락은 자기 균열이라든지 나를 헤치고 저주를 찾아내고 이런 것 필요 없어요. ‘에헴’하고 가는 거예요, 전부 다. 자기를 즐기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게 환상이라니까요. 그런 세계에 믿음은 뭐라고요? 그게 환상인 것을 환상을 환상이라고 고발하는 뭐로 온다? 실상으로서 믿음의 활주로에 군데군데 믿음의 사람들을 출몰시킨 겁니다.

아벨, 죽었지요. 노아, 심판이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뭡니까? 나그네였지요. 무슨 징후들이에요, 무슨 증상입니까? 이 세상 전체가 허상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실상이 나타난 것은 허상에 섞이기 위함이 아니라 허상을 허상으로 폭로시키기 위해서 실상이 오는 겁니다.

또 계속 보게 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뭡니까? 보지 못하는 것, 보이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보이니까 현혹되기 쉽고, 그게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재료가 되는 거예요.

부부 싸움할 때 싸우는 이유가 뭡니까? 이게 눈에 보이니까 싸우는 거예요. ‘아이고,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 그렇거든요. 둘 다 허상이면서. 그걸 실상으로 설명하게 되면 허상 둘이 만난 것은 우리 자신이 결혼을 해야 내가 허상인 것을 아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거기에 여러 가지 많이 나옵니다만,

11장 24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이래 돼 있지요. 같은 뜻인데 우리가 말을 잠시 바꿔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라고 했잖아요. ‘믿음’이란 말을 빼버리고 모세가 ‘허상’이라면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아니라 오히려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도리어 더 싫어하며,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하고, 그다음에 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단호하게 그걸 거부하고, 애굽의 모든 보화를 가장 큰 재물로 여겼으며, 상 주는 건 가봐야 안다, 이런 식이겠지요.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는 내가 잘못됐다가 아니라 사는 환경 자체가 허상으로 꾸며진 세계의 나는 그 일부로서 허상의 전부를 보여주는 거예요. 일부로서 뭘 보여준다? 전부를 보여주었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알게 되었다는 말은 이게 바로 믿음이에요. 허상 속의 실상이 찾아왔으니까 이걸 알게 된 거예요.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가를. 이게 활주로에요. 활주로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다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드디어 우리의 소속이 땅이 아니고 하늘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게 13장에 보면 나옵니다. 히브리서 13장 14절에 보면,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눈에 보이는데 없데요. 왜? 저게 내 집이 아니니까. 이 세상이 내 게 아니니까. 없음을 확인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자.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다. 전부 다 환상이에요. 화투 48장 펴놓고 그러니까 윤락가 여자들이 낮엔 심심하기 때문에 화투를 친다는 거예요. 오늘 손님이 올지 안 올지 해볼 때. 화투를 쫙 깔아놓고 패를 뒤집잖아요.

바로 그 역할을 우리가 하는 거예요. 내일은 또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 모레는 교회 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해봤자 뭐예요? 없음, 이건 허상이에요. 허상들만 경험하는, 끊임없이. 오늘은 카페를 내가 해볼까? 몇 년 뒤에 치킨 집을 내볼까? 해봤자 허상들이에요. ‘아아 없구나. 여기에 내 영원한 집은 이 땅에는 없구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게 중첩된 사람들의 특징이죠.

그런데 그걸로 옮겨가는 방법이 히브리서 13장 11절, 12절에 나옵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어디에 나갑니까? 성문 밖에 나간다는 말은 완성되었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더 이상 내 구원에 할 게 남아있다, 안 남아있다? 없어요. 왜냐? 예수님이 다 이미 모든 성전에 있는 예언의 율법에 대한 제사법을 이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가신 곳이 어딘지 따라가면 돼요. 그게 뭐냐? 성문 밖으로 가는 거예요. 다 이루심을 이미 적시고 나오는 거예요. 아까 블랙홀 있죠. 못 들어가는 게 들어갔다가 나오는 거예요. 들어갔다가 이 블랙홀의 확장으로서 주께서 우리 남은 생애를 살게 하는 겁니다.

어떤 특정 장소가 아니라 우리 성도의 존재 자체가 예수 안이라는 장소를 보여주는 징후로서 작용한다, 성도의 삶이.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이 물었어요. ‘하늘나라가 어디 있느냐?’ 사람들이 공간을 생각하니까 ‘너희 안에 있다’ 예수님에게 있는 거예요. 그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고 성령 주심으로서 오늘날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 주와 함께 있습니다.

그걸 우리 마음에 있다 하면 곤란해요. 마음에 있다 하면 워치만 니 돼버려요. 혼과 영, 이상한 철학이 막, 워치만 니 삼분설은 철학입니다. 이분설도 철학이지만 철학이니까 그건 하나의 지식 확보용이에요. 소용없어요.

어디 안에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요. 주님은 우리 안에 있고. 그걸 뭐 마음이라고 굳이 한다면 틀린 건 아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 혼과 영과 이런 이상한 것 때문에 혼선이 되기 때문에 마음보다도 그냥 쉽게 예수 안에 있다. 더 어려운 말로 십자가 안에 있다. 더 어려운 말로 성령 안에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언약 완성 안에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시온이 뭐가 됐다? 인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이사야에서도 같이 예언돼 있는데 시온이 되는 어떤 조건들이 거기서 나와요. 말씀 보면 참 전부 다 어렵고 설명할 게 많이 나오는데 돼요. 일단 읽어볼게요.

이사야 2장 2절,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고 돼 있는데 이 대목에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말일’이에요. 마지막 때에요.

인간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흘러가도 무의미함을 끝장낼 때 분명히 자전거 페달을 계속 밟았는데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그 자전거는 뭐냐? 헬스클럽 안의 자전거에요. 밟았는데 운동은 됐는데 나가질 않아요. 분명히 자전거 밟으면 앞으로 나가야 되는데 헬스장에서 자전거 밟아서 나가버리면 4층에서 창문 뚫고 나가면 죽지요. 고정돼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마지막 때 십자가 질 때 마지막 종말이 시작된 거예요. 종말이에요. 종말에는 일체 인간의 어떤 시도와 노력이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원동력이에요. 십자가를 확대시키는 기간이 마지막 때 기간입니다. 내 개인적인 내 노력이 내 인생을 바꿔주는 게 아니에요. 그냥 화투 패 뒤집는 것밖에 안 돼요. 실없이 이 짓하다가, 저 짓하다가 계속해서 환상만 맞을 뿐이지 마지막 때는 예수님 십자가로서 이미 시간은 끝났어요. 자전거 헛돌리지 마세요. 그럼 안 하면 어떠냐? 안 해도 마찬가지에요.

그럼 관심사가 뭐냐? 그 시온에서 뭐가 나오느냐? 말씀이 나와요. 말씀이 이리저리 퍼져나가는 겁니다. 시온에서. 그럼 시온이 장소에서 공간에서 뭐로 바뀐다? 인물로 바뀌면 이미 승천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지상에 뭐가 주어지는가? 하나님의 복음이 주어지고 말씀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것도 그 말씀에 우리가 지켜야 되고 할 게 없어요. 이미 주님 홀로 다 이뤘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주신 말씀이에요. 아까 공부했으니까 복습해봅시다. 이름은 뭐라고요? 함축된 기능이죠. 예수님의 기능이 말씀 속에 왔다는 말은, 우리가 여기 있으면 죄인이 여기 있다면 주의 말씀이 기능이 여기 왔다는 말은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주께서 잡아당기는 거예요. 완성된 말씀의 노선을 따라서 다 이룬 거예요.

‘운전면허 여섯 번 쳤는데 다 떨어졌다.’ 그게 주께서 계시한 거예요. ‘열심히 뭘 좀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허리가 아파서 일어나질 못한다.’ 뭡니까? 주의 다 이루심의 일과 중에 스케줄 중에 하나 포함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하지만 여러분의 행위에 대해서 여러분이 책임지지 마세요. 십자가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래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참 나쁜 짓해놓고 핑계 하난 거창하다. 핑계 멋있게 포장했네’ 이러잖아요. 그게 그 사람이 어디 속했느냐 하면 아까 주관에 속했어요. 하나님의 십자가에 들어가지도 않고, ‘십자가 다 지셨네. 그럼 이제 뭘 해도 괜찮겠네.’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주관에서 주관으로 돌아가는 것은 안에 뭐가 없었다? 자기 내부에 뭐가 발생되지 않았다?

균열이 발생되지 않고 틈이 발생되지 않으니까 지식으로 십자가 알고 이젠 뭘 해도 정죄함이 없고 용서가 되니까 ‘이제 내 마음대로 할 거야’ 할 때 그 사람의 치중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의 정당성, 그걸 자기 의라 하는 거예요. 아예 자기 인생을 망가뜨리면서 사는 것도 자기 의라고 핑계대고 싶은 거예요.

반대로 객관성은 뭡니까? 열심히 성화하려고 노력해요. 들어가지도 않아. 베데스다 못가에 들어가지도 않고 계속 뺑뺑이 돌면서 주께서 뭔가 보상을 해줄 거야. 내가 열심히 살았으니 해줄 거야. 뺑뺑이 돌면서 십자가 못 들어가요. 왜 못 들어가느냐 하면 나는 다치면 안 되니까요. 그다음에 삼대 째 신앙인이고 우리 아버지가 장로고, 온갖 것 그 기억이 다치면 안 돼요. 내가 내 것을 지키고 싶어요, 결사적으로. 내가 균열되고 깨지면 안 돼요.

구약 이스라엘은 못 나서 그렇고 나는 잘났으니까 하나님을 배신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열심히 해서 결국 남는 것은 뭐냐? 나는 완전치는 않지만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런 일의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 동시대에 바리새인이죠. 주님께선 딱 집어 이야기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무슨 뜻입니까? ‘니 잘렸어.’

그들의 수고한 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5장 35절에 보면 나옵니다. 마지막이니까 누가 5장 34절부터 35절까지 크게 읽어보세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니가 땅을 알아, 하늘을 알아, 니가 예루살렘을 알아?’

맹세한다는 말은 뭔 뜻이에요? 바로 이거에요. 맹세한다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어딜 가겠다? 천국에 합류하겠다고 노력하는 이 모든 것, 이게 바로 불경스러운 거예요. 주의 말씀은 주님이 혼자 이루는데 합세하겠다고 덤벼드는 그것이 얼마나 주에 대한 모독이냔 말이죠. 이걸 산상설교에 집어넣은 거예요. 맹세를 해? 그게 뭐냐?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주께서 다 이루심의 일부를 우리한테 접촉시키기 위해서 벌어진 사태에요. 다 이루셨으니까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것은 뭐냐? 범사에 감사하는 것, 모든 일에 감사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내 멋대로 된다가 아니라 그러니까 나는 뭘 해도 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이걸 어떻게 우리가 알겠어요.

주께서 신랑이 되어서 ‘이리 오너라. 보자’ 해서 우리가 꽁꽁 숨겨두었던 우리의 저주 안에 있었던 악마의 저주성을 우리한테 폭로시키는 그 작업의 반복을 우리 남은 평생을 통해서 이뤄낼 때 그걸 뜯어낼 때마다 우린 감사 외에는 나올 게 없습니다.

기도하겠어요.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비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시편 48편의 내 딸 시온아, 내 딸 시온에 말씀으로 덤벼들어서 어떻게 딸도 아닌 우리를 딸로 만들어주시는지 바벨론의 딸에 불과한 것을 어떻게 시온 딸로 만들어주는지 그 신랑의 죽으심의 사랑을 우리가 늘 품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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