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주님의 폭력성

아빠와 함께 2023. 11. 15. 19:43

20231113a 부산강의 : [시편]63(47:5)-주님의 폭력성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47편 해봅시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찌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손바닥을 칠만큼 하나님이 좋다. 어떤 경우에 손바닥을 칠만큼 하나님이 좋으냐? 그것은 시편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신 경우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는데 지상에 내려옵니다. 지상에 내려오면 임금, 또는 왕으로 오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지상에 임금, 왕으로 오실 때에 여기서 필히 일어나는 것은 뭐냐? 폭력이 동원돼요. 곱게 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는데 폭력이 일어난다는 것은, 폭력이라 하는 것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잖아요. 보이지 않는 분이 왕으로 오신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해서 인간 속에 함께 있으면서도 안 보이는 방식으로 지상에 왕으로 군림한 게 있어요. 안 보이는 방식인데. 지상에 임금, 왕이 있지만 그 배후에 왕이 또 있는 거예요.

인간들의 지도자 그 배후에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배후자 있습니다. 배후세력이 있어요. 모든 인간보다 왕보다 더 세죠. 인간세계에 왕 중의 왕이 따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기 오고, 여기서 누가 오느냐 하면 지상의 왕. 지상의 왕은 신약성경에선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이게 나옵니다. 에베소서 2장에도 나오고요. 이 세상에 신이, 그 대목을 봅시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뭐라고 돼 있는지.

고린도후서 4장에 이 세상 신이 하는 일이 있어요. 그냥 가만 놀고 있는 신은 아닙니다. 나름 바빠요. 바쁜데 여기에,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세상 신이 행위의 주체자가 돼요. 행위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란 뜻이에요. 중요합니다. 인간이 행동하고 뭘 해도 자기가 행동하는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아니고 인간의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주체는 따로 있는 겁니다.

따로 있어서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러나 교회나 성당이나 안 믿는 노인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면 그들은, ‘나 그런 것 믿기 싫어. 관심 없어. 나 그쪽 취미가 아니야. 골치 아파.’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온다 할지라도 그 반응을 무시하시고 그 배후를 생각해보세요. ‘나는 다 알고 있어.’ 복음에 관심 없다는 것은 그 개인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든지 간에 그 배후에 작용하는 힘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한다.”에요.

그러면 여기서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질문을 던진다면 인간의 마음은 누가 주관한다는 거예요? ‘이 세상 신’ 인간의 마음은 내가 주관하는 게 아닙니다.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내가 주관하는 게 아닙니다.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그것을 고민하는 이유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실수를 줄이고 오류를 줄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철저하게 자기가 실수를 줄이고 싶은 것은 이건 상식적으로 중요한 참 좋은 건데요. 실수와 오류에 탄식하고 후회하고 그것을 가슴 치면서 탄식하는 이유는 울지 않고 살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서 울지 않으면서 살고 싶은 거예요. 웃으면서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여기서 제가 법칙 하나 드리겠습니다. 웃으면서 사는 사람 지옥 가고, 울면서 사는 사람 천국 가요. 왜 그러냐 하면 운다는 것은 실수하고 실패를 연속했다는 거예요. 실수의 연속이 천국으로 이끌고, 성공의 연속이 지옥으로 이끄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라고. 온 세상 전체가 어떻게 하면 완벽한 인생이 될까, 노심초사하는 가운데서 철저하게 세상 신에 노예가 돼 갑니다. 마귀의 종이 돼 가는 거예요. 복음을 거부하고 복음 대신에 괜찮은 나를 영접하려고 해요. 복음이 뭐냐 하면, 성도는 알고 있죠. 실수와 오류를 없애버리면 이게 웃음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실수, 오류를 안 하려고 하는 사람 속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피가 없어요. 그 마음속에 피가 없기 때문에 실수, 오류를 줄이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라는 것은 인간이 협상할 대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다 이루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그게 표준으로 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온이 있거든요. 47편에 시온과 관련된 이야기가 계속 나오거든요. 아브라함 나오고, 4절에 야곱의 영화라고 돼 있고, 9절에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오늘 핵심 단어로 이렇게 됩니다. 성도는 상속된 존재에요. 상속이라는 것은 성경용어로 바꾸면 기업으로 물려받은 존재. 기업으로 물려받았다는 것은 그 특이한 씨앗이 아브라함언약, 야곱언약을 통해서 성공이 계속해서 이어져오고 있다는 거예요. 그 증거물이 뭐냐? 성도의 출현이에요. 그러니 성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도, 천국 백성은 없어요. 없는데 생겼으니까 이게 폭력인 거예요. 성도의 존재 자체가 폭력이에요.

‘너 뭐냐, 너 누구냐?’ 이게 폭력이라니까요. “왜 우리와 다른데? 뭐야? 너 어디서 온 거야?” “우리 집에서 왔는데, 버스 타고 왔는데.” “너희 집이 어디야?” ‘너희 집이 어디야’란 이 말은 뭐냐 하면 ‘소속’이 어디냐는 거예요. 소속의 반대말은 ‘자아’에요. 자아를 우리말로 하면 ‘나’에요. ‘나는 이렇다’ 에요. 모든 인간의 특징은 ‘나는 이렇다’를 잘 구축하기 위해서 오류와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아라 하는 것은 오늘 여러분들이 어려워도 할 수 없다. 어려워도 밀어붙이는 겁니다. 여기까지 아시겠지요. 자아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 자아는 고정된 의미에서 나와요. 고정된 의미가 자아를 형성하는 겁니다. 고정된 의미는 실제가 아니고 본인 상상의 세계에요. 고정된 의미는 그럼 어디서 나왔느냐? 타인과의 비교에서. 남 가진 것과 비교에서 나온 겁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유비’라 해요. 이거는 비교해서 비스무리, 유사성.

교회 처음 나왔을 때에 찬송 부르거나 분위기 파악할 때 곁눈질하잖아요. 옆 사람들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기도하는지, 예배드릴 때 언제 시점에 타이밍 맞춰 일어서야 될지. 그게 뭐냐 하면 유사성으로 하여금 교회 처음 와서 모호한 자아가 굳히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비스무리 섞여서 섞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여러분, 질문할게요. 파리에 가면 에펠탑 있지요. 에펠탑 근처에 기념물 있는데 기념물 된 에펠탑과 진짜 에펠탑의 차이는 뭡니까? 어떤 관계지요? 그걸 유비관계. 유사한 관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어린애가 태어나서 자아가 빨리 구축하는 방법은 주변에 만나는 식구들로부터 유사성을 빨리 갖추는 거예요. 유사성을 갖추는 방법은 뭐냐 하면 그 부모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되면 비슷하게 되면 칭찬이 따르고 상도 받고, 만약에 틀리게 되면 이거 누구 자식이야, 하고 맴매 막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미 자아의 구성은 환경에서 되는 거예요. 그 환경이 어떤 환경이냐? 환경이 단일화되지 않지요. 그걸 연합 환경이라 해요. 환경이 하이브리드에요. 환경이 여러 가지 잡것들이 다 섞여있는 환경이에요. 연합 환경, 이걸 성경적 용어로 바꾸면 이렇게 합니다. ‘이 세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잡것들의 세대. 여기 눈치 봐야 되고 누구 눈치 봐야 되고. 자기가 소속된 단체의 눈치를 봐야 되는 겁니다.

사두개인은 사두개인들의 눈치를 보고요. 사두개인은 고위 제사장, 고위 귀족들 집합체에요. 그다음에 바리새인은 바리새인들끼리 하나의 연합체를 이룹니다. 바리새인들은 중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바리새인이라 해요. 저 밑에는 하층이고. 중간 계층이라 숫자가 많다는 게 아니고, 율법에 대해서 따로 어떤 계파를 만드는 거예요. 그다음에 서기관들은 바리새인에 속해요. 장로들은 어디 속하느냐? 사두개인에 속하고.

그러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장로들의 연합체를 이뤄서 뭘 했습니까? 무슨 일을 도모했지요? 예수님을 죽였지요. 이건 뭡니까? 폭력을 가했지요. 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육신이 되신 하나님에게 폭력을 가하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그들에게 폭력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민중들이 일어나고 호산나 이야기하니까 자기들의 안정성에 대한 위협 인물로 본 겁니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지상에 와서 임금이 된다는 말은 그냥 올 수 없어요. 폭력사태가 유발됩니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거죠. 예수님이 죽는 사건이 일어나는 거죠. 그럴 때 지상의 입장에서 보세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 편은 몇 명이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그것이 복음의 핵심요소로 등장합니다. 아무도 없다는 것.

예수님의 단독행위에요. 이 단독행위의 내용을 집약한 걸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이에요. 내 이름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은, 내 이름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이름이 끼어들 수 있다, 없다? 끼어들 수 없어요. 그래서 아무도 구원받지를 못하는 거예요. 오직 예수님만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한다는 것은 전부 다 사기에 해당됩니다. 반드시 옮겨져야 돼요. 내가 구원받지 못해요.

주의 이름은 주님의 존재를 이야기하거든요. 하늘에서 온 존재. 내 이름은 어디 존재? 이 연합 환경 속에 있는 거기서 할당한 이름이에요. 부모가 나한테 지어준 이름은 구원받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나의 구원이란 건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디 있느냐? 구원은 예수님의 이름에 구원이 있어요. 그래서 나의 이름이 뭐로 바뀌어야 구원이 된다? 주의 이름으로 바뀌면서 폭력이 일어나야 돼요. 내가 나에 대한 폭력이 일어나야 된다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거거든요.

내가 성공적인 존재가 되게 되면 이거는 주의 이름에 대한 폭력을 가하게 되는 거예요. 배후의 세상 신이 작동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자꾸 내 이름이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내가 잘 된다는 것은 어린아이 때는 본인만 잘 되면 돼요. 집에 부도나고 이사 가도 그 어린애는 자기가 놀던 장난감을 포기를 못합니다. 부모가, “우리 망해서 이사 가는데 그 장난감 좀 버리고 가지?” “싫어.” “어떻게 너는 집안도 모르고 너밖에 모르느냐?” 그게 어린애니까.

어린애가 커가면서 뭘 아느냐? 소속을 아는 거예요. ‘아 우리 집안 망했다는 건 곧 내가 망했다는 것이구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잡다한 연합 환경에 자기 자신을 거기다가 집어던지지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내가 속해 있는 조직이 잘 되는 것이 나한테 잘 되는 것이란 인식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바로 서서히 인간은 이 세상과 한 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자아가 뭐로 바뀌느냐? 자아가 주체로 바뀌는 거예요. 내가 속해 있는 그 단체, 조직에 대해서 인정받는 것을 주체라 해요. 나 혼자 상상하는 것을 ‘자아’라 하고, 내 주변의 타인들이 나를 뭐라고 하는데 있어서 고개 숙이는 걸 ‘주체’라 합니다. 누가 와서 내 이름을 불러줄 때 ‘예’하고 달려갈 때 그것이 바로 예라고 굴복할 때 그 사람의 소속입니다.

‘신분증 봅시다. 어디 근무하세요?’ 그것이 나를 살려요. 우린 거기에 익숙해지고 거기에 친숙해지고 그것에 길들여진 거예요. 평생을 살면서. 너는 어디 가도 우리 집안 망신시키지 말라고 어릴 때부터 배우는 거예요. 집안이 우릴 구원합니까? 아니지요. 당신 어디 소속이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정통), 그게 우릴 구원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너 종교가 무엇인가? 종교 알아서 뭐 하는데? 종교가 구원하는 게 아니네요. 왜냐하면 종교 자체가 마귀가 만든 거예요. 신천지뿐만 아니고 구천지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사람이 나의 주체 안에 자아가 들어있거든요. 자아를 살리기 위해서 주체가 되기로 마음먹었단 말이죠. 전에 어릴 땐 철딱서니 없어서 나만 고집부리다가 ‘이게 고집부릴 일이 아니구나. 남한테 굴복해야 돈 한 푼이라고 챙기는 거구나.’

시편 47편을 여러분 보시면서 대조 돼야 돼요. 뭐와 대조 되느냐 하면 시편 47편 여기 있다 칩시다. 이게 시편 47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냥 ‘말씀이다. 배워야 공부해야지. 공부하면 나한테 은혜 되고 구원받겠지’ 이렇게 다가서면 안 돼요. 시편 47편을 다가설 때는 반드시 어떤 게 전제돼야 하느냐 하면, ‘나는 돈 없이는 못 산다’ 바로 이 존재성을 가지고 시편 47편을 봐야 돼요.

그러면 시편 47편 1절을 보면서,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면서 즐겁게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라’ 할 때 진정 자기에게 물어봐야 돼요. 하나님 알아서 손바닥 쳤는지, 돈 생겨서 쳤는지 어느 게 손뼉 소리가 크던가요? 돈 생길 때 이거는……. 그래서 어제 주일 날 설교했잖아요. 인간은 자기를 용의자로 세우지 않고 성경 해석한다고요. 자기를 법정에 세우지 않고 성경 해석한다고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올 때 피를 머금고 폭력을 이미 유도하고 유발하는 조건으로 오셨거든요. 왜냐? 보이지 않는 마귀가 있으니까요. 하나님도 안 보여요, 인간에. 안 보이는데 ‘나 보일게 너도 보여라’ 이렇게 된 거예요. 주님이 육신이 됨으로써 보이는 하나님이 되어버린 거예요. 보이는 하나님과 보이는 악마들 사이에서 폭력, 피가 터지는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그래서 시편 47편은 이게 말씀으로 가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에요. 가만 머물러 있다고 여긴 것이 바로 원어연구해서 진리 파악했다는 그 작자들이 말씀이 가만있는 줄 알고 있어요. 마치 횟감 해놓고, ‘기다려 봐. 회 쳐서 맛있게 요리해줄게.’ 이런 게 아니거든요. 그 도마 위에 있는 고기가 나를 때린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횟감 고기한테 귀때기 맞아본 적 있습니까? ‘이게 어디 칼 들고, 갈치 맛을 볼래?’ 하고 갈치가 나를 때린다 이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시편47편이 바로 우리가 무슨 은혜가 들어있는지 찾아오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대들지요. ‘시험 들지 말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네가 방해하고 있잖아’라는 음성이 시편 47편에서 먼저 선방 때리면서 나타나는 거예요. 네가 평소에 말씀 보겠다는 의도가 뭐냐? 또 방해하려고? 네가 말씀 볼 때마다 방해하고 있어. 네 존재 자체가 복음을 가로막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것을 말씀을 통해서 파악하면 되는 거예요.

궁극적으로 전쟁은 뭐냐? 투쟁이란 것은 예수님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싸움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그 약속을 망치로 깨보면 그 안의 시럽이 들어있어서 그것이 온 세상에 시간이 전개됨에 따라서 같이 펼쳐지죠. 그러니까 모든 시대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투쟁사에요. 인류사가.

그런 걸 잘 보여주는 게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그중에 바로 사사기 같은 경우에 사사기의 특징은 하나님의 전쟁의 심오함을 보여주는 데, 사사기 여러분 다 아시죠. 사사기에 적이 없어요. 적이 보이질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적이 있어요. 아직까지 토착민들이 안 쫓겨나서 이스라엘 가는데 달려들고 이런 게 있어요. 그러나 사사기는 이미 적들이 그 동네에 없어요. 없는데 이스라엘이 적들을 초청해요. 같이 놀자고.

‘이제 약속의 땅이 우리 동네거든. 와서 한바탕 놀아보세.’ 판소리하는 사람도 오고 추임새 넣는 사람도 오고 고수도 와서, ‘어허 한바탕 놀아보는 데’ 하고 마당놀이를 만들어버려요. 왜? 여호와가 심심하거든요. 여호와에 대해서 박수 치고 감사할 게 없어요. 잡다함을 그리워하는 겁니다. 애굽에 있던 그 본성이 그리워서 여기다가 잡다함이 왔는데 이방인을 불러놓고 보니까 그들이 이스라엘을 구박하는 거예요. 구박하는 그 틈새에서 ‘여호와 살려주세요’ 하는 식으로 비는 것의 연속이 바로 사사기에요.

그렇다면 사사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뭐냐 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없는데 무엇이 오는가? 구원이 없는데 틈이 생기면 틈에서 나온다. 틈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원래 하나님이 지정한 언약의 본질이 있잖아요. 언약백성은 이러해야 된다. 언약백성과 자아가 복음을 방해하고 유혹받은 내가 세상 것에서 주체가 되고자 하는 그 마당놀이 사이에서 그 틈이 벌어지면서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복음이 나오는 전쟁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고 이스라엘 백성은 틈을 제시하는 하나의 도구로 쓰여지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가 구원받는다는 말은 성도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과 하나가 되어 설치다가 성도기 때문에 조패는 거예요. 성도기 때문에 조팰 때 성도는 수시로 잊어버리는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호소를 하게 돼 있어요. 거기서 십자가 복음이 성도의 삶을 통해서 분출되게 돼 있어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아주 적절한 예가 되지요. 물어보는 식으로 볼게요. 사마리아 여인이 집에 물이 떨어져서 근처 우물가에 물 길러 왔습니다. 묻습니다. 나쁜 짓입니까, 옳은 짓입니까? 이게 나쁜 짓도 아니고 옳은 짓도 아니고 일상의 정상적인 거죠. 정상적이라 하는 것은 틈이 매워져 있는 틈이 없는 거예요. 왜? 남들 다 그래 사니까. 우리는 서로 모방하고 베끼는 식으로 사는 삶이기 때문에 저쪽에 문제없으면 나도 문제없고 비스무리하면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먼저 틈을 내기 위해서 시비조로 하지요. “그 물 먹는다고 네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게 아니야. 또 목마를 거야.” 시비 건 거예요. 그러니까 그 여자도 가만있지 않지요. “무슨 그런 물이 있습니까? 또 길러 오고, 길러 오고. 이게 인생사지. 한 번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그런 물이 어디 있습니까?” 주께서 “내가 그런 우물 만들어줘?” 이렇게 된 거예요. “아이고, 고맙지요.”

“고마워? 그럼 네 목마른 것 이야기해줄게. 지난 날 남자 다섯 명 있었잖아.” 과거사를 확 들춰내죠. 여기서 추정인데 일단 그 여자는 예뻤다는 게 사실로 드러나야 돼요. 그러니까 그 말은 뭐냐? 여자는 뭐한 여자다? ‘나는 핫한 여자다.’ 예쁜 여자라는 자아를 감추고 물 길러 오는 주체자로 살아온 거예요. 자아와 주체를 겸하는 데 그 사이에 틈을 내버린 거예요.

남편을 데려오라 하니까 숨기는 방법은 거짓말이죠. “남편이 없나이다.” 주께서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말이, “네가 바른 말을 했구나.” 이게 더 무서운 말이에요. “그래 맞아. 다섯 명은 다 지나간 남자들이었고 지금 사귀는 것은 여섯 번째잖아.” 여자가 찔렸지요. 찔리니까 반응적으로 예수님을 자기의 타자로 보는 거예요.

인간은 타자의 평가에 오류와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움찔하면서 빨리 메우는 거예요. 그렇다면 내가 행동이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내 죄는 우리 동네에서는 그리심 산에 주님께 예배드리면 죄 사함이 됩니다, 라고 자기 종교성을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기존의 종교라 하는 것은 자기의 허물을 자기 방식으로 메움으로써 내 구원을 챙기겠다는 거예요. 남이 뭐라 하던 나는 무조건 천국 가야겠다, 라고 시도하는 게 종교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된다는 데 어느 쪽이 나를 구원하는 방식이냐고 묻지요. 주께서는 삐, 구원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구원이 없다. 인간 어디에도 구원이 없는 거예요. ‘구원이 없다’잖아요. 구원이 없을 때 주께서 ‘없다’를 언약의 분으로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아로 오셔서 구원이 없는 인간에게 메시아와 만나면 여기서 뭐냐 하면 그 사람 자체를 ‘너 구원 없어. 저리 가’가 아니라 그 여인 마음에다 틈을 내어서 없는데 틈이 찢어지면서 예수님의 성과가 여기서 분출되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어디서 일어난다?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기쁨이고 슬픔이고 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47편에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찌어다” 한다고 해서 교회에서 이걸 인위적으로 흉내 내서 손바닥 불나게 치고, 기쁨으로 웃읍시다, 해서 웃으면서 정신 치료한다는 미친 사람 비슷한 것 있잖아요. 아하하하하, 돈 주고 가서 인간의 스트레스 풀고 우울증 치료한다는 그런 데서.

그게 바로 유비에요. 유사, 가짜란 뜻이에요. 진짜가 아니고. 진짜는 모르겠고 그냥 서로서로 베낀 모형에 불과한 거예요. 이건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게 아닙니다. 모방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모방은 교육이죠. 모방은 세뇌시키는 거예요. 가스라이팅하는 겁니다. 모방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불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게 아니고 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건 백 프로 가짜인 거예요. 성령이 불 때는 임의로 부는 거예요. 바람을 누가 잡아요.

인간이 자기가 뭘 잡아서 하겠다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단독행위기 때문에.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어떻게 나라는 것, 자아, 다시 말해서 내 이름. 내 이름이 뭐로 바뀐다? 주의 이름으로 바뀌는가? 지금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이것 안 바뀌면, 웃으면서 지옥 가야지요 뭐. 시편에 보면 웃으면서 지옥 가는 사람들 나와 있어요. 어떻게 평생을 살면서 환란도 없느냐. 죽을 때로 건강하고. 그래서 내가 미끄러질 뻔했다. 시험 들어서.

시험이란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시험에 의도가 있어요. 시험하는 악마의 의도가 뭐냐 하면 의도가 복음을 방해하는 거예요. 아까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왔지요. 복음의 광채를 방해하는 거예요. 어떤 방식으로든 방해하는 이게 시험든 거예요. 방해하는 방법은 자아에 대해서 관심 두는 거예요. 집중하는 것. ‘내 눈을 바라봐. 내 눈을 바라봐.’ 공중부양까지 하면서 허경영이. 계속해서 집중하게 하는 거예요.

집중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집중한다? 아니에요. 집중하는 나를 집중하게 돼 있어요. 이게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교육방식이에요. 그걸 교회도 써먹잖아요. ‘주님을 바라봐.’ 뭡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게 아니에요. 주님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계속 스스로 가짜를 만드는 거예요. 거기에 뭐가 동원되는가? 성경 구절들이 동원되는 거예요. 손바닥 치고 박수 치고. ‘나 구원받겠다.’ 십만 명 모아놓고 지는 헬기 타고 내려오고, 이만희는.

그것 한 마디로 귀신 들렸거든요. 집단 십만 명이. 그것보다 숫자 더 많은 귀신들린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무슬림들이에요. ‘신은 위대하다.’ 미친 거예요. 신이 뭘 위대해요? 신은 초라해요.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분이 신이에요. 왜? 우리 속에 우리 마음에 마귀가 들어있기 때문에 마귀가 있는 신은 위대한 신이에요.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어요. 이사야 53장에. 심지어 제자들도 귀히 여기지 않고 가룟 유다도 귀히 여기지 않았어요. 불가능성이에요, 이거는. 내가 예수 믿는 것은 불가능성, 기적입니다.

기적이란 예수 믿는 것이 기적이다. 맞는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좀 더 내용을 깊이 하기 위해서 풀어보면, 나를 고려하지 않는 게 기적이에요. 내 실수나 내 잘못에 대해서 내가 평가하고 나에 대해서 탓하지 않는 게 기적이에요. 더 나아가면 남을 생각하지 않는 게 기적이에요.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남이 만들었기 때문에, 남의 잔소리가 만들었기 때문에, 남의 따가운 시선이 나를 나 되게 했기 때문에. 나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기적이죠.

그러면 남한테 신경 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그냥 하던 일이나 하세요. 이게 움직임입니다.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그냥 내게 주어진 움직임이, 내가 지시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환경에 따라서 하게 했단 말이죠. 이게 돈을 버는 일인지 놀러가는 일인지 상관없어요. 크루즈 여행인지 골프 치는 일인지 관계없어요. 어떤 일인지 간에 무엇을 하든지 주께 영광으로 하라.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금지하고 이걸 안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시킨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게 뭐가 되던 주께 영광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잘해야지’가 아니라 하는 일 자체가 감사가 되는 거예요. 완벽이 아니에요. 완벽이 아니고 실수가 아니고 완벽, 실수 차원이 아니고 그냥 감사되는 일, 고마운 일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이 마음을 누가 장악하는가?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장악하면 되지요. 그게 바로 언약이 들어오면 되는데 우리 마음속에 누가 있다 했습니까? 마귀가 있지요. 여기서 폭력사태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 마귀가 들어있다는 뜻이 뭐냐 하면 ‘내가 곧 왕이다’란 뜻이에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소비자가 왕이란 것과 같은 건데 내가 곧 왕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가 왕이에요. 왕인데 예수님과 우연히 우물가에서 만나지 않는 한 자기는 이것이 곧 자기라고 생각한 거죠.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내가 구원받지 못할 존재란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구원받지 못할 이 존재를 주께선 그대로 가져가서 뭐냐? 구원된 존재로 전환시키면서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구원받지 못한 존재를 버리는 게 아니에요. 이게 다 주님이 하신 일을 위해서 쓸모 있게 사용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나의 육신의 재설정, 설정을 다시 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없어지지 않잖아? 아니죠. 구원받지 못한 존재의 특징은 나, 자아 중심이에요. 그런데 구원받고 난 뒤에 재설정된 주님이 다루는 육신은 ‘나’가 아니고 ‘소속’이 되죠. 누구 소속에? 새로운 나의 소속. 그 새로운 나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주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바뀐 주의 이름에 소속된 나가 돼요. 전에는 소속이 내가 나한테 소속됐어요. 우린 마귀를 알 수 없으니까, 내가 왕이니까. ‘내가 왕이 될 상인가요?’

내가 왕이니까 나한테 소속되는 거예요. 모든 의미는 결국 나한테 돌아와요. 이게 얼마나 옳은지 그른지, 가치 있느냐, 가치 없느냐의 판단은 ‘내게 이익이냐, 아니냐’로 모든 것이 종결돼요. 의미가 거기서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뭐냐? 자아는 고정된 의미라는 거예요. 모든 의미는 나한테 와야 의미가 생기기 때문에 고정된 의미에요. 그걸 상상의 세계라 하는 거예요.

언약이 상속돼야 된다는 그것이 47편 계속 봅시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2절) 그 임금이 어떤 임금이냐? 8절에 봅시다.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아까 시온이 여기 나온다 했지요. 시온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를 시온으로 적어놓은 거예요. 거룩한 보좌를 지금 성경에서 뭐라고 한다 했어요? 시온이라 했어요. 시온을 다른 말로 예루살렘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무한이 이 안에 공간으로 축소되는 겁니다. 축소를 다른 말로 하면 집약되는 거예요. 이제부터 좀 어려운 것 나갑니다. 47편 6절, 여호와께서 뭐 중에 올라가신다? 5절에,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 가시도다” ‘나팔 소리’요. 지금 언약은 상속되는 거예요. 근데 그 나팔 소리까지 상속되는 겁니다. 나팔 소리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출애굽기 19장 19절에 시내 산에서 나타난 거예요.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그게 어디까지 상속되느냐 하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예수님 재림하실 때 나팔 소리와 동반해서 나오게 돼 있어요(1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예수님 재림 왜 하십니까? 이걸 여러분들이 예수님 재림하신다는 이걸 마땅히 기뻐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잖아요. 의식적으로. 그런데 정말 예수님이 다시 오는 걸 기뻐할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 땅이 망해도 진짜 희망이 일체 여지가 없이 망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내가 올게’라는 말을 손바닥 치고 기뻐할 사람은 망했다, 망했다, 완전히 망했다.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망한 자에게만 재림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좀 살만하면 ‘재림, 오셔야지요’ 해놓고, ‘근데 굳이 오실 이유가 없는데? 한 달 뒤에 딸 결혼식 있는데 앞으로 열흘 후에 와버리면 결혼식은 어떻게 되는데? 진짜 깽판 놓을 거예요, 내 딸 결혼식을?’

주님 나타남 외에 다른 기쁨의 요소가 다 사라진 자, 상실된 자에게만 기쁨이 그 사람 마음속에 재림이 살아 있는 겁니다. 어떤 희망이란 게 남아 있으면 안 돼요. 그러면 희망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는가? 희망이란 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상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 쪽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불가능성이기 때문에 자꾸 거기다가 기대를 걸면 안 돼요.

여기서 시온이 예루살렘이 되는데 왜 예루살렘과 시온이 연관성이 있느냐? 시편 76편에 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제가 평소에 전에부터 의미 있게 둔 구절이에요. 시편 76편 2절, “그 장막이 또한” 어디에 있음이라? 살렘에 있다 했지요. 이 살렘이 지상에 없는 처소입니다. 그럼 어디 있느냐? 창세기 14장에 보면 멜기세덱이 살던 동네에요.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멜기세덱 존재 자체가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있는 존재가 멜기세덱이에요. 이게 굉장히 어려워서 히브리서 6장에 보면요 그냥 초보들은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모르게 돼 있다고 된 거예요. 단단한 것을 먹어야 멜기세덱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멜기세덱이란 게 너무 어렵기 때문에. 멜기세덱은 없어요.

없는데 있다는 걸 어떻게 하는가? 거기서 맹세가 나와요. 히브리서 6장, 7장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맹세는 특징이 뭐냐 하면 사람을 배제하는 맹세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맹세하는 걸 거기서 맹세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는데 그건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해서만 거짓말 안 해요. 인간을 배제하는 거예요.

왜 인간을 배제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는 전부 다 거짓말로 들리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선악과와 생명나무 어떻게 됐어요? 이미 벌어져 있지요, 관계가 끊어져 있지요. 끊어진 상태에서 한쪽이 이야기하면 한쪽은 거짓말로 들리는 거예요. ‘선악으로 우리가 납득되는 이야기를 해 달라.’ 이게 인간들이 신에게 하는 요구조건이에요.

‘신은 위대하시다’ 이런 거죠. 신은 초라한데. 이게 왜냐하면 생명나무는 생소한 거예요. 누구한데? 선악을 아는 모든 이에게 윤리, 도덕과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에게 지혜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 생명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어느 정도 생소하냐? 10분 후에.

 

 

20231113b 부산강의 : [시편]63(47:5)-주님의 폭력성
(강의:이근호 목사)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사로잡힌, 여기 보면 올라가실 때에 열방을 치리하시고, 이렇게 돼 있는데 주께서 올라갈 때는 궤도 마련돼야 돼요. 위에서 내려와서 성과를 다 이룰 때에 여기서 궤도, 그러니까 케이블카 비슷한 것, 궤도 마련돼야 올라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 가는 길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늘나라 있다고 올라가는 길 있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 가는 갈이 따로 있어야 돼요. 그 길은 단독행위에요. 주님의 단독행위지 우리가 거기 섞이면 안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 길을 어떻게 마련하는가? 친히 주님께서 시내 산에 오셨는데 거기 나팔 소리가 들렸단 말이죠. 출애굽기 19장 19절에(“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그 나팔 누가 불어요? 아무 분 사람이 없다니까요. 이스라엘에서 나팔 소리라 하는 것은 전쟁 중이다, 전쟁하러 왔다. 이것은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하나는 머리를 치고 하나는 발꿈치를 물고. 이것은 이미 평화상태가 아니에요. 나만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면 되지, 지금 그 문제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어떤 평화라는 게 없어요.

사람은 평화롭게 살고 싶지요. 조용하고 싶은데 인간에게 어떤 경우라도 협상 대상이 아니고 흥정 대상이 아닌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 내부에 뭐가 있느냐? ‘죽음의 힘’이 작동하고 있어요. 이거는 인간이 흥정하거나 취소시킬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의 죽음이란 게. 그런데 인간이 죽게 된 이유가 성경에 보면,

인간이 알지 못하는 죄 때문에 죽음이 와요. 근데

인간이 알고 있는 죄는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게 아니고 바르게 인도하잖아요, 선악으로. 덜 죽게 인도하고 안 죽게 인도하고 건강하게 인도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그러면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 죄 자체가 그 죄가 아닌 거예요. 가짜 죄에요. 인간의 죄는 뭐냐? 반성이 가능한 죄에요. 반성이 가능하고, 인간의 죄는 자기의 행위에 의해서 수정이 가능하고, 회개하면 용서가 가능한 죄를 인간은 죄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전부 다 가짜에요. 인간은 반성하고 회개하고 뭘 해도 없어질 죄는 가짜 죄에요. 이거는 마귀가 연막해서 만든 가짜 죄에요.

사람이 반성을 하고 회개를 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죄가 미워지는 게 아니고 그 죄에 대해서 그걸 극복해서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런 죄를 짓지 않는 자기 자신이 우상화 돼버립니다. 이거는 뭘 피하다 뭘 만난 게 돼요. 죄를 피하다가 큰 죄를 만난 거예요. 누가 공짜로 집에 상추와 파를 줬다. 오늘 식사는 돈이 적게 들겠구나. 천만의 말씀. 상추 있고 파 있으면 고기를 사요. 비용이 더 들어요. 싼 저녁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예 못 나면, 못날 조건을 갖췄다면 예를 들면 문둥병, 세리 창기 이럴 같으면 자기 포기가 되는데 이건 뭐 율법 알고 바리새인에다가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가능성 있고 남을 도와줄 수 있고, 남을 불쌍히 여기고 이러면 이거는 갈수록 가관이에요. 아프리카에서 우물파기부터 시작해서 참…, 북한에 선교하기, 북한의 인권문제 쓸데없이…, 니 개 인권이나 찾아라. 북한은 좋다고 김정은 보고 눈물 흘리고 있는데 거기다 무슨 인권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이건 상식적으로 알아야 되는데, 인간성이라 하는 것은 정신 차린다고 인간성 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만드느냐 하면 환경이 만들어요. 환경이 뭐냐 하면 어버이 수령이 환경이잖아요. 그러면 그 자체가 ‘어버이 수령이 있으니 이 세상 우리 북조선인민보다 행복한 인민들 없으리라’ 이러고 살고 있다니까요.

저 가자지역 그 사람들은 ‘신은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 하지요. 북한에 가면 누가 위대한 줄 알아요? 김정은이 위대해요. 행복한데 왜 우리가 신경 써요. 본인이 행복한데 약간 배는 고프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 아니에요. 종교단체에요. 이만희라는 보혜사로 행복하다는 데 뭘 전도해요. 세상에 이런 천국은 없어라, 이러고 있는데.

인간의 죄라는 것은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이 잘 되면 이건 선이 되고, 그 조직이 흠집이 생기면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업이 잘 되려면 사원들 아주 모욕감을 줘서 신입사원 훈련할 때 ‘이번 실적이 얼마야, 실적이 얼마야. 복창해’ 고함지르게 하고 땅에 기게 만들어요. 중국기업에 그런 게 있어요. 땅에 기어서 모욕감을 줘서 용기를 가지고 물건 하나 더 팔아먹게 하는 것, 왜 그런 짓합니까? 조직이 살아야 내가 사니까.

목사가 교회 신경 쓰는 것, 조직 조폭입니다. 왜? 교회라는 조직이 십자가를 대신하기 때문에. 왜 목사가 문제 되느냐 하면 자기를 잊을 수 없어요. 자기 의미를 자기가 포기 못해요. 그러니까 진짜 무서운 것은 회개를 못해서 무서운 게 아니고 그 회개할 죄가 근원적인 죄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무서워요. 회개했다, 반성했다는 나의 의를 어떻게 처리할 건데요? 기도원에 가서 사흘 동안 금식해서 은혜 받은 나를 처리할 건데요? 은혜 받은 내가 죄 아닙니까, 그게 우상 아니에요?

우리가 뭘 자꾸 놓치느냐 하면 울지 않으려고 살면 뭐가 없어지냐 하면 감사가 사라진다. 눈물 안 흘리고 살려고 하면 자꾸 감사가 없어져요. 내가 괜찮은 시절, 행복했던 시절 빨리 그걸 보상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신에게 기도하든지 헌금하든지 해서 빨리 눈물 그만 흘리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눈물을 흘려야 친히 눈물을 닦아주는 동네가 따로 있어요. 요한계시록 21장에, 그때는 눈물이 없다. 왜? 악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는. 그 세계는 위에서부터 내려오게 돼 있어요. 이제부터 골치 아픕니다.

주께서 폭력을 유발해서 동반하면서 내려왔다가 올라가면서 여기 궤도, 길, 천국 가는 경로가 밝혀졌지요. 그 경로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인간의 이름을 아담의 이름을 뭐로 바꾸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바꾸는 거예요. 바꾸면서 올라갔다가 내려가면서 제가 아까 소속이 바뀐다 했지요. 소속이 바뀐다는 말은 전에는 내가 소유였던 것이 내가 내 소유를 포기하게 만들어요. 이게 자기 부인이에요.

나는 내 소유가 아닌 거예요. 죽어도 내 소유가 아니고 살아도 내 소유가 아니에요. 사나죽으나 소유가 따로 있어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이름을 위해서 먹을 걸 줬고 오늘도 살아온 거예요. 그래서 어제 오후의 기도제목이 뭐냐 하면 이 순간이 주께서 주시는 마지막 혜택이라고 여겨라. 오늘 하루가 주께서 주는 마지막 배려인 줄 알아라. 봐주는 거예요. 마지막 배려로 생각하라. 늘 거저주시는 배려로 살았지 내 행동 똑바로 해서 얻은 게 아니에요.

이 경로,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것, 그 장소가 이게 힘이 있어야 돼요. 힘이 있어야 뚫을 수 있어요. 그 힘이 바로 시온입니다. 시온이 있는데 그 시온이 하늘에 있는 시온과 연락이 닿게 돼요. 축약이니까 무한이 특정 장소에 압축이 돼 있으니까. 하늘의 모든 무한이 압축돼 있어요. 그걸 어려운 말로 신약성경에선 예수 안, 또 다른 말로 하면 성령 안,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안, 다른 말로 하면 언약 안이라고 돼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구원할 때는 반드시 붙는 게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고, 예수 안에서 구원받고, 예수 안에서 너는 이미 죽었고, 예수 안에서 네가 사는 거예요. 내 안에서 부활이란 게 없어요. 내 안에서 죽는 건 없어요. 예수 안이라는 그 환경, 저 사람과 나와 함께 있다는 것, 주님이 보좌로 앉아 계시는 그 환경의 효과, 환경의 효력으로서 이미 우리는 죽었다가 산 게 된 거예요.

그리고 지상에 나타날 때는 죽어가는 육신으로 그대로 재설정되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는 것이 전혀 구애 받으면 안 되지요. 왜? 우리의 생명은 따로 챙겨놓았으니까. 생명은 뭐냐? 예수님의 단독행위로 얻은 생명이에요. 예수의 살과 피. 우리 피 아닙니다. 우리 살 아니에요. 예수의 살과 피로서 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망가져도 그거는 망가지게 하시는 주님 소관이지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닌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 와서 물 안 길고 양동이를 버려뒀다는 거예요. 아마 시어머니 있었으면 혼났을 거예요. “너 도대체 왜 거기 갔어?” “누굴 만났어요?” “만나고 자시고 네 자유지만 물은 떠와야 우리가 먹고 살지?” “저는 이미 살았어요.” “미쳤구나.” “물 안 먹어도 살아요.” “이게 뭐야? 네가 시내 산의 모세야?” 모세도 안 먹고 살았잖아요. “예, 그래요.”

우리는 죽어도 살은 거예요. 살아도 살은 거고. 그러면 밥은 먹지 말지 밥은 왜 먹느냐? 그거는 우리가 보여줄 것은 경로를 보여주니까 이렇게 살던 우리가 구원받았으니까 이렇게 살던 그 일을 열심히 해야지요. 돈 벌어야지요. 어떻게 살아도 생명이 아니고 지옥 갈 몸인 것을 이 땅에 남은 육신으로 주께서 활용케 하시는 거예요. ‘이게 돈 맛이구나.’ 만끽해야 돼요. ‘이런 맛에 골프 치는구나.’ ‘크루즈여행 이렇게 가는구나.’ 벌벌 주여 이것 영광을 가리고. 영광 가리고 자시고 간에 네가 존재한 자체가 내 영광이라면 살아 있어야 돼요. 자살하면 안 돼요.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돼요. ‘절 자체가 속세다.’ 이 땅에 거룩한 공간은 없습니다. 이미 올라갔으니까. 지금 올라갔다는 말은, 내가 일체의 희망, 너희들 것은 내가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올라갔거든요. 올라갈 때 교회 자체가 더러운 곳이다, 이 말이에요. 절로 표현하면. 절에서 뭐라 합니까? 속세를 떠나라. 뭘 떠나요. 절이 속세인데 뭘. 절이 속세잖아요. 속세가 따로 있는 줄 알아요? 인간이 가는 곳이 다 속세고, 성도가 있는 곳이 바로 주의 이름이 함께 있는 두세 사람이라도 그게 천국이에요.

그렇게 되려면 이게 ‘성령 안’ 이렇게 되거든요. 이게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것이 성공리에 작업이 완수가 돼야 돼요. 이것 완수 안 되면 그냥 시도해보는 거예요. ‘이것 옳네. 옳지만 열심히 해보자.’ 이걸 개혁주의 신앙이라 하는 거예요. 개혁주의 신앙은 자꾸 미뤄요. ‘한 번 해보지 뭐.’ 열심히 하면 뭐 되겠지. 없어요. 개혁주의 신앙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유대교 신앙이에요. ‘메시아가 오실 거다.’ 왔는데 오실 거라고. 주께서 재림하실 거라고. 그 재림한 분이 이미 오셨는데? 재림하실 분이 오셨어요. 오신 분이 재림하지요. 오신 분 안 믿으면 재림도 그분이 아닌 거예요. 이 땅에 오신 분.

그러면 오실 때 뭐로 왔는가? 폭력으로 왔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지요. 이 대목에서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오실 분이 장소를 정해서 오셨어요. 장소를 정한 게 아니고 장소를 만들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시온이에요. 시온은 뭐라 했습니까? 축약이죠. 그러면 이 시온은 시내 산에서 주께서 율법을 줬습니다. 시내 산에 오셨다는 자체가 이미 충분히 내려온 거예요. 특정 공간에 오셨다는 것. 주님께서 시내 산 말고 다른 곳에 계신 게 아니고 시내 산에 계신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모세를 불러 특정 장소에 오라 해요. ‘네가 아무 때나 가. 만나줄게.’ 이게 아니고 ‘특정 장소=특정 인물’을 의미하는 거예요. 나중에 이게 언약적으로 발전하면 특정 장소란 특정 인물을 의미하는 거예요. 특정 장소에서는 아직까지 시공간이 유효하다는 뜻이고, 특정 인물 되면 시간과 공간은 이미 불로 싸질렀기 때문에 특정 공간, 특별 은혜 받은 그런 것 없다는 거예요. 특정 인물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그러면 특정 장소에서 특정 인물이 되려면 특정 장소는 충분하게 다 활용이 돼야 돼요.

자꾸 내가 너무 어려워서 주저하게 되는데 진도 나갑시다. 어려워도 여러분 참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여기에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거예요. 누가?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선물을 주시는데 사로잡힌 자가 왜 필요한데요?

여기 사로잡고 사로잡혔다는 것의 중심처가 있어요. 중심 되는 장소가 있어요. 사로잡았다는 말은 뭔 뜻이냐? 뭐하는 중이다? 전쟁 중이죠. 전쟁 수행이 성공리에 작업을 마쳤을 때에 등장하는 도성이 뭐냐 하면 시온 성이에요. 왜냐하면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 중에서 마지막 남은 도성이 있어요. 최후의 전쟁, 그 도성 이기면 다 이긴 거예요. 그게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접수하면 다윗은 진정 이 땅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는 거예요. 원래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 없어요. 왕이 없는데 왕을 주셨다는 말은 왕이 없을 때는 각자가 율법을 지켜야 했던 시절이에요. 왕을 주셨다는 말은 각자가 율법을 지키는 데 모조리 실패했다는 것을 근거로 한 집약된 인물이 왕이에요.

왕 하나 율법 살면 백성들이 율법을 위반해도 구원이 되는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율법은 많아요. 그야말로 율법을 지키려면 인간의 힘으로선 유한한 인간이 못 지킵니다. 왜? 율법의 내용은 출제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무한자에요. 그래서 율법을 못 지키는 이유가, 우리는 유한하고 출제자 의도는 무한하고. 뭐 지켰습니다, 하면 그것도 지킨 거냐? “거짓말하지 말라 해서 거짓말 안 했습니다.” “네 자체가 거짓이야. 네가 인생을 덜 살았구나.” 한번 맞아봐야 십계명 지켰는데 아말렉이 왜 쳐들어오는지 이유를 알아야 돼요. 십계명 다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아람나라가 왜 쳐들어옵니까?

다시 말해서 십계명 다 지키면 영생 주는 것 맞잖아요, 라고 우겼던 사람 있었지요. 마태복음 19장에 누굽니까? 철딱서니 되게 없는 부자 청년. 젊을 때 부자 좀 된 모양이라. 자기 걱정하니까 율법,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기 때문에 영생 얻을 줄 생각하고, ‘영생 주실 거죠?’ 이게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다는 그 자체가 그들은 아직 계명이 뭔 줄 모르는 거예요.

계명은 율법은 한 인물로 축약되는 겁니다. 그 인물을 사랑하는 자가 모든 율법을 지킨 게 이룬 게 돼요. 로마서 13장.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겁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아요. 옛날에는 율법 안 지키면 저주받아요. 이제는 율법 대신 한 인물이 율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예수님을 사랑 못해요. 왜냐하면 자아 때문에. 자아가 방해하거든요. 이미 선점해서 사랑하는 대상이 난데 이걸 무슨 수로 뺍니까? 이걸 빼면 사람도 같이 빠지게 돼 있어요. 나 없는데 사랑만 달랑 남는다? 그런 일은 없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끝까지 마지막으로 뒤에 감추어놓고 있는 숨겨진 내용이 있어요.

사랑은 날 사랑이 기본이고, 날 사랑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게 순차가 순서가 그래 돼 있어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사랑이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겁니다. 왜 부부가 싸우는지 알겠지요? 결혼했다고 한 몸이라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없어요. 일단 내 사랑에 네가 고개 숙이고 기어들어오라, 이게 부부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어디서 감히 남편이 나한테 대들어? 이게 어디서 그런 교육을 받았어. 그런 수가 있네. 남편인데? 니 남편이지? 남편인데 아내한테 대들어? 요새 많이 풀어줬더니 간땡이가 많이 부었구나.’ 옛날에는 ‘여자가 하늘같은 남편한테 대들어? 이게 어디서 토, 토, 토, 토를 달아?’ ‘임춘애가 라면 먹고 금메달 딴 것 알지? 어디서 토를 달아? 내가 임춘애라면 임춘애야.’ 송광호가 한 대사 아닙니까(<넘버3>). ‘내가 현정화라면 현정화야.’ ‘남편은 따라야 돼. 성경에 뭐라고 돼 있어? 남편에 복종하라 돼 있지.’

하여튼 아까 성경 지킨다는 자체가 뭐라고요? 죄가 되는 거예요. 자기 사랑 그대로 있으면서 뭘 지킵니까. 성경을 방해하지요. 성경 인용 자체가 방해하는 거예요. 이미 시험 든 상태거든요. 이사야 2장 봅시다. 도대체 인간은 못하는 거예요. 인간은 못하는데 주께서 어떻게 하는지 보자는 거예요. 전쟁을 벌이는데 어떤 식으로 하느냐? 누가 읽어보세요. 이사야 2장 2절부터 좀 깁니다. 2절과 3절 읽어보세요.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오케이 됐습니다. 율법이 어디서 나온다 했습니까? 시온에서 나오지요. 그러나 우리가 알기는 율법은 시내 산에서 나와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 받았어요. 근데 갑자기 시온 산이 왜 등장하느냐 말이죠. 그 시온은 시내 산을 제치고 이 세상의 어떤 산보다 더 높은 산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수고스럽지만 한 군데 더 봅시다. 시편 68편 15절, 16절 한 번 더 읽어주세요.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시기하여’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시온 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면 이 세상의 사람들 가만히 그냥 행복하게 살도록 하지 않고 깐족깐족 건드려요. 건드려서 그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벌어집니까? 폭력사태가 일어나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들이 뭐가 연상돼요?

어떤 특정 인물이 이 땅에 와서 그분이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게 아니고 그분이 내뱉는 모든 말이 소위 최고로 율법을 잘 지키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경건하고 가장 성스럽게 살았다는 자를 어떻게 한다? 시기 나게 만들고 건드리고 질투하게 만드는 작업을 누군가 했지요. 누가 했습니까? 예수님이죠.

‘너희들은 하나님나라에 가고자 하지? 나는 하나님이다.’ 어떻게 됩니까? 이건 높낮이가 비교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높낮이가 비교가 안 됩니다. ‘너는 시도하잖아. 뭔가 될까 싶어서 구원될까 싶어서.’ 그러나 나는 이 땅에 하나님으로 왔다는 말은 결국은 차이가 되는 거예요. 하나는 시도하는 것과 이미 되어진 사이에, 완료와 미완료 사이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완료와 미완료 사이에 조금만 보태면 되는 게 아니고 이것은 전면적으로 뭘 하느냐? 이걸 부정해버려요. 그래야 이들이 달려들거든요. 인간들은 미완료+시간, 추가 시간 더하면 뭐 된다? 완료된다는 희망을 안고 있는 게 인간이에요. 이들은 뭐하게 만들었다? 시기 나게 만든 거예요. ‘니들은 희망 없다. 겸손해도 안 돼.’ ‘나는 부족합니다.’ 부족해도 안 돼요. 아예 안 돼. 왜? 너라는 인물 자체가 나의 인물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나를 대체할 수 없지만 나는 너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게 주의 복음입니다.

법 없는 왕이 왕 없는 법을 대체해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 율법 외에 한 의,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율법을 준 거예요.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지적질하기 위해 준 거예요. 저주받기 위해서. 로마서 3장에. 인간이 율법을 알고 있잖아요. 율법으로 뭐합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바리새인처럼 그 나라에 가고자 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단 말이죠. 커트라인을 넘어서려고 아주 애를 쓰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처럼.

마태복음에 빛과 소금 되라 하잖아요. 그 소리 듣고 가만있을 사람 누가 있습니까? 빛과 소금되기 위해서 나는 나이트클럽의 조명이 되란다, 이런 것 없잖아요. 그 소리 듣고 가만있을 인간이 없어요. 시도를 하게 돼 있다니까. 어제보다 더 향상된 나의 품격, 그 성화작업으로 지금까지 교회를 운영해 왔던 것이 한국교회입니다. 성화를 미끼로 해서 전부 다 닦달 내는 거예요. 그걸 목사가 목회라 해요.

교회 가면 목양실 있지요. 목양실 뭐하는 겁니까? 신부들 삐딱하게 앉아서 상담하는. 들어보고 요 점이 모자라니 그것 좀 보충하시면 주께 영광됩니다, 구원받습니다. 처방전내리는 그것으로 종교단체가 운영해 왔던 거예요. ‘당신은 당신 신경 쓰지 말고 다 이루었습니다.’ 그런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그럼 십일조와 무슨 관계있습니까, 이러면 성가대 복장은 무슨 돈으로 사고? 교회 형광등은 전기료 누가 내고?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는 거죠.

완료가 완료되고자 하는 자를 부정하는 거예요. 인간이 법을 알고 있는데 법 없는 왕이 오셔서, 그러니까 예수님은 전혀 법이 없어요. 로마서 4장에 지킬 행함이 없다니까. 행함을 인정하지 않아요. 아무 일한 것도 없이 의로움을 받았다는 겁니다. 누가? 아브라함이. 그때부터 아브라함이 그 소리 듣고 아브라함 행동은 개판 돼버렸어요. 이건 뭐 이스마엘 낳아버리고요. 그게 상속된 존재에요. 그래야 주님의 궤도를 타고 올라갈 수 있어요. 내가 나를 놔버려야. 왕 없는 법,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율법의 저주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사기에서 각기 보기에 왕이 없으니까 어떻게 한다? 지 마음 내키는 대로 자기 소견 했더라. 소견대로 행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레위 지파에서 자기 첩이 죽었다고 해서 그걸 열두 토막 내는 그 행위, 그게 바로 자기 소견대로, 주님의 지시가 없는 지 성질대로 한 거예요. 남들 보기엔 정의롭지요. 그게 정의란 이름의 폭력입니다. 인간은 정의를 논할 자격도 안 돼요. 그 정의란 것은 자기의 체면과 위신과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한 폭력행사에 불과한 겁니다. 핑계에 불과한 거예요

따라서 주께서 이미 완료가 됐잖아요. 완료되고 난 뒤에 전쟁을 하는 거예요. 전쟁을 하면서 무엇에 유념하느냐 하면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이렇게 돼 있어요. 에베소서 4장에, 또 시편 68편 18절,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높은 곳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높은 곳은 아니지요. 인간들을 질투 나게 만든 하나님이 없던 산을 만드신 거예요. 그 산이 시내 산이다, 시온 산이다? 시온 산입니다. 시내 산은 율법을 줬기 때문에 인간은 각자 율법을 지켜야 될 의무감에 짓눌려 있어요. 최선을 다해 보지요.

최선을 다하는 데 인간의 문제는 아말렉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마음의 내부에서 물 없고 양식 없다고 원망하는 그 원망된 마음과 율법의 만남 거기서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겠습니까? 뭐 물이라도 주고 양식이라도 주고 율법 지키라 하지 양식도 물도 안 주고…. ‘야, 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런 마음이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나오는 거예요. 인간 속에 이스라엘 속에 애굽이 떨어져나간 게 아니고 애굽이 그대로 있었던 거예요.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율법을 지킨다? 이게 말이 됩니까? 주어진 것은 불 뱀이 주어지지요.

주님께서는 그들을 물게 한 그들을 물어서 아프게 해서 죽을 때 그냥 죽지 않아요. 불 뱀 물리면 너무나 아프게 해서 죽였던 지긋지긋한 불 뱀을 그걸 놋 뱀으로 만들어서 또 보게 한 거예요. ‘봐라. 너 죽어 마땅하지?’ 그게 불 뱀이잖아요. 그 불 뱀은 요한복음 3장에서 그게 바로 십자가에요(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것 봐. 예수님 죽었잖아. 실은 네가 죽어야 돼.’ 고통스럽게. 그걸 그대로 우리에게 새겨주는 겁니다.

여기 시편 68편 18절에 높은 산이 있는 이유가, 그 높은 산이 되기 위해서 지상에 있는 모든 산들과 전쟁을 벌여야 높은 산이 마련돼요. 높은 산이 되게 되면 그 밑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천천이란 말은 하나님의 무기는 천사다 이 말이죠. 천사까지 동원한 거예요. 여러분 천사하면 항상 야곱을 생각하면 됩니다. 야곱이 누굴 만났어요? 마하나임, 천사의 군대를 만났잖아요.

그러면 야곱은 하나의 들러리고 실제로 야곱과 그 후손, 야곱의 후손이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을 실제적으로 지키는 것은 누굽니까? 천사들의 활동이죠. 천사들의 활동은 뭐와 대비되는가?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과 극히 대비가 돼요. 못난 것들로 승리케 하는 거예요. 못났다는 말은 율법대로 산 사람은 없는 자를 구원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획기적인 프로젝트입니다. 인간들의 머리로는 상상도 못한 거예요.

왜 인간은 그걸 상상 못하느냐? 인간은 이미 선악에 대해서 민감한 마음을 갖고 있어서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벌 받는다는 그 이데올로기에 악마의 이념에 빠져있기 때문에 자꾸 양심에 가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스로 조마조마하고 콩닥콩닥하고 자기 자신을 닦달 내는 거예요. 가만두질 않고 자꾸 자기를 학대하는 거예요. ‘똑바로 해, 인간아. 너 때문에 내가 구원 못 받겠다. 네가 과거에 그런 망나니짓을 왜 했어? 그때 제대로 선택하고 결정했으면 지금의 너는 잘 먹고 잘 살았잖아.’ 하고 누가 지적해요? 내 속의 내가 나를 너무나 냉혹하게 지적합니다.

그걸 보고 주님께서는 어처구니가 없어요. 이건 용서하신 자의 용서는 완전히 면상을 까고 모독한 거예요. “용서했다니까.” “내가 용서가 안 됩니다.” “이게 어디서 음성 높이고?” “내가 용서가 안 되는데.” “한 번 더 맞을래? 내가 용서했다니까.” “내가 용서가 안 되는데요.” “너, 나하고 싸우려하지?”

주께서 올라간다는 말은 모든 산들은 내려간다는 뜻이에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지금 지옥으로 깔아 앉는 그 토대 위해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늪에 빠지면서 웃으면서 지옥 가고 있습니다. 왜? 올라가는 것이 눈에 안 보이니까. 그중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는 게 상속된 존재에요. 주께서 전쟁해서 악마에 잡힌 중에서 전리품으로 챙긴 자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에요. 왜? 모세 율법에 그들은 모조리 다 복 못 받고 저주받을 자로 확정이 됐기 때문에.

악마한테 저주의 죽음의 사탄의 율법에 사로잡힌 자를 주께서 친히 율법을 입으시고 그들 속에 들어가서 승리하셔서 그들을 전리품으로 데려오는 거예요. 그중에 누가 들어 있느냐? 열두 제자에서 가룟 유다 빼놓고 열한 제자도 포함된 겁니다. 그들을 그냥 방치해두면 그들은 주를 사랑하지 못하고 저주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뭘 보냈느냐? 성령을 보낸 걸 사로잡힌 것을 선물이라 한 거예요. 다시 에베소서 4장 8절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사로잡힌 자와 정반대되는 성격을 준 거예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았다는 말을 그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리에 작업을 마친 그분의 마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줌으로서 그 선물을 받은 자의 특징은 뭐냐? ‘우리는 마귀한테 사로잡혔던 자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령이에요. 기도하다가 뜨겁다, 그게 성령이 아니고요. 남을 용서하면, 이게 성령이 아니고 바르게살기, 이게 성령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죄인은 죄인이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된다? 골라가면서 직장 구하고 골라 가면서 사는 게 아니고 죄인 된다면 어떤 인생이라도 내가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몸이 아프든지 시집을 못 가든지 중소기업에 취업해서 한 오년 동안 따박따박 월급 나오다가 오년 뒤에는 소식 없이 체불해도 노동부에 진정해도 소용없고, 부도내고 사장은 해외 도피하는 그런 사태 얼마나 많습니까?

더러운 세상, 같이 더러운 걸 몰랐어요. 죄인이기 때문에 단지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경우라고 흔쾌히 수용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왜? 그게 선물이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의 복이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서글픈 환경이 선물이에요. ‘주여 이러다 죽겠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럼 지금까지 살아온 건 뭔데? 네 덕이었어? 선물 아니었었어?’ 새벽마다 문간에 새벽배송 오듯이 하루치의 목숨을 우리에게 늘 선물로 주고 있었던 거예요.

따라서 무엇을 먹든지 입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입는다는 말은 여기서 이백만원 이상의 원피스도 포함되는. 무엇을 타든지 간에 괜찮아요. 주께서 주신 선물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기도 많이 해서 얻은 선물로 여기지 마시고.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죄인이기 때문에 어떤 누구에 대해서 같은 죄인에 대해서 말발에 대해서 기죽을 필요가 없지요. 그게 유령들의 만남이에요. 둘 다 유령이라. 귀신이 귀신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약간의 예쁜 귀신은 있지요. 예쁜 귀신도 귀신이고, 키 작은 귀신, 키 큰 귀신이고 일단은 귀신은 귀신이에요. 문제는 주님께 사로잡혔느냐, 아니면 혼자서 나대고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사로잡혔다는 말은 전쟁에 의해서 성사된 통로가 마련된 거예요. 이게 뭐냐?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다른 길은 없나니.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시편 47편 8절에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그다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9절) 방패, 방패가 어디 쓰는 물건입니까? 뭐할 때? 전쟁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쟁은 끝까지 전쟁 중에 있습니다. 이 땅에선 승리했기 때문에 승리한 전쟁이 주어지고 있어요. 그게 바로 재림이십니다. 다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제는 완전히 파멸하기 위해서 그때는 왕으로 등극해요. 왕으로 나타납니다. 등극할 때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무슨 소리가 들린다? 나팔 소리가 들린다.

끝으로 나팔 소리 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6장 20절요.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뭘 붑니까? 나팔 소리. 그러니까 이게 히브리서에 나오는 모형이고 은유고 비유인 거예요. 하늘에서 위에서 하는 나팔 소리, 주님이 전쟁 중이라는 것을 그대로 베껴서 지상의 전쟁을 수행하는 자들이 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역할을 한 겁니다. 백성이기 때문에 나팔을 부는 거예요. 나팔 소리의 의미를 무슨 뜻인지 아는 거예요. 전쟁 중이란 사실, 나팔은 전쟁 중이란 거예요.

그 전쟁 중에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는 데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기생 라합이에요. 그래서 기생 라합은 주님의 전쟁의 전리품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이 그 말이거든요. 이스라엘 백성 제쳐놓고 기생 라합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게 되지요.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기생 라합의 남편 이름이 뭐냐 하면 살몬이에요.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다.

그러니 사로잡힘을 모르는 자 중심으로 이 땅에서 주께서 전쟁 중인 것을 내가 증거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로잡힌 자는 그럼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냐? 아니 이미 성공리에 마쳤어요. 성공리에 마쳤다는 증거가 뭐냐? 피입니다. 모든 것을 용서받은 피. 그래서 했잖아요. 안에 피가 있지 아니하면 자꾸 딴 성공을 사적인 성공을 꿍꿍이를 기대한다고요.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실패입니다. 그 실패를 즐겨야 돼요. 무슨 일을 해도 예를 들면 어디 투자를 했는데 백 배 이익이었다. 그거 실패거든요. 운동 좀 하니까 아픈 게 없어졌다. 실패한 거예요. 세상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실패 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피에 고마워하라고. 단독행위에 고마워하라고 우리의 인생을 실패와 실패의 연속인데 그 실패를 통해서 박수 치고 감사하면서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모든 일을 끝냈습니다’라고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한 게 아니라 주께서 이런 식으로 일했음을 왜 우리는 평소에 그걸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놓치고 있었습니까? 사적인 일에 몰두해서 자신의 성공을 꿈꾸니까 그것이 복음을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늘 자신을 돌아보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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