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태어난 언약

아빠와 함께 2024. 3. 14. 18:22

20240311a 부산강의 : [시편]66(50:8)-태어난 언약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50편 하겠습니다.

시편 50편 전체 내용을 말씀드리면, 첫째는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활동인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자기 백성 모집하는 활동을 시편 50편에서 죽하고 있어요. 시편 50편을 보든 안 보든 내 소관 아니고 여러분 소관이니까 다 읽어 와야 돼요.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모집이 된 자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모집책으로 바꿔요. 모집이 된 자로 하여금 모집책이 되게 하는 거예요. 점조직으로 분열되게 하는 거예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이 멈추지 않는 작업 중에서 새로운 존재가 나오는데 그 존재가 악인의 등장, 악인의 출현되는 겁니다. 모집책이 모집하면서 백성들만 모집하는 게 아니고 백성들 하면서 주님의 멈추지 않는 작업이 분류작업이에요. 분류 작업을 하면서 악인이 출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1번, 2번, 3번의 진행을 시편 50편에서 나열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악인에 대해서 나 중심의 악인은 악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 아닙니다. 악인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에 의해서 모집책이 되면서 비로소 악인이 등장해요. 그러면 이 악인은 나의 악인입니까, 하나님의 악인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하나님의 악인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악인을 누가 방해하느냐? 내가 내 선입관으로 저 인간은 나쁜 인간이라고 규정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작업에 방해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분류작업을 할 때 시편 50편은 하나님이 분류작업을 하는 거예요. 모집책을 통해서 하는데 분류작업을 건방지게 내가 또 따로 해요. 하나님의 분류작업을 내가 따로 하니까 여기서 엄청난 오류가 발생 돼요.

내가 나를 분류하게 되면, 여러분 물어봅니다, 초반부터. 나는 천국 갈 사람으로 분류할까요, 지옥 갈 사람으로 분류할까요? 자기를 천국 갈 사람으로 분류하지요. 이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배후에 악마가 있어요, 마귀가 있어요. 마귀는 인간에게 네가 신이라 했거든요. ‘내가 신으로 만들어줄게. 어떤 도움과 어떤 후원을 다해서라도 너는 절대적 존재로 만들어주겠다.’ 신은 절대적 존재를 말합니다.

절대적 존재의 특징은 뭐냐? 하자가 없어요. 오류가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입장에서 오류가 없으니까 이걸 자기 의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 속의 괴물을 인간 속의 마귀는 어떤 모습이냐 하면 모든 걸 포기해도 포기 못하는 모습,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기 의에요. 자기 의의 특징이 뭐냐? 괴물이고 마귀의 특징이 뭐냐?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성경적 근거가 없으니까 이걸 세 자로 하면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무조건. 내가 하는 생각, 행동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의로워요. 아니 무조건 의로워야 돼요. 이걸 지난 번 부산강의에서 이걸 판타지라 했지요, 환상. 환상의 끝은 뭐가 나타난다? 나는 무조건 옳다. 나는 무조건 정당한 존재가 딱 들어있어요. 판타지, 환상이죠.

환상의 특징은 중간에 내가 있고, 내가 나의 어려운 말로 외연이라 하는데, ‘외연’이란 말 잘 안 쓰지요. 바깥에 자기 영향력을 확장시켜서 생긴 그 관계망을 외연이라 합니다. 바깥에 있는 껍질, 안에 호두알이 들어있지만 바깥은 호두껍데기가 있지요. 땅콩 있으니까 땅콩껍질이 있지요. 사탕 있으면 사탕껍질 있지요. 포장지를 바깥으로 계속해서 확장시키는 그걸 외연, 바깥에 있는 그러한 장막 같은 걸 외연이라 하는 겁니다.

나라고 하는 인간이 외연이 되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을 ‘사회’라고 이야기하고요, 이걸 ‘세상’이라고 이야기라고 하고요, 이걸 ‘자연세계라고 하는 겁니다. 자연세계를 탐구하는 걸 뭐라고요? 과학. 과학은 어디서 나왔다? 판타지에요. 과학은 환상에서 나온 거예요. 과학은 정답이 아니고 환상입니다. 뉴턴이 발견한 것은 환상이고,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것은 환상이에요.

과학이란 환상, 내가 보기엔 미신인데요. 과학이란 미신은 무엇과 관련돼 있느냐 하면 참 이건 너무 중요해서 크게 강조하고 싶어요. 과학이란 환상은 무엇과 관련 있는가? 나에게 무엇이 이익이냐? 나의 생존에, 내가 여기 살아가는데 어떤 이익을 줄 것인가가 환상을 유발하게 돼 있습니다.

성경을 일독했습니다. 창세기부터 일독을 했어요. 일독하고 난 뒤에 느낌이 뭐냐 하면 이 성경이 내 생존에 어떤 이익을 줄 것인가? 누구에게? 나에게. 이것 뭡니까? 환상이죠. 그 안에는 뭐가 들어있습니까? 나의 절대적 존재가, 나는 어떤 경우라고 하자 없고, 오류 없고 나에게는 어떤 경우라도 실수가 없다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이거는 철학자 칸트가 발견한 건데 인간은 실수를 할 때 그다음에 뭘 하느냐 하면 실수+‘반성’을 해요. 그러면 실수는 실수지만 반성을 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실수와 반성이 만나서 이것이 나의 의가 돼요. 부흥회하면 뭘 하죠? 내 죄를 자복하죠. 내 잘못 끄집어내고 부흥회하고 남는 결과는 자기 의로움이에요.

이게 뭘 유발한다?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 전부 다 환상을 유발하는 거예요. 이것은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합니다. 왜? 모든 인간이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간다,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 인간의 잘난 맛의 극단적인 것, 최정점에 있었던 민족이 누구냐? 유대민족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와 접촉해서 죽었습니까? 유대민족과 접촉해서 죽었지요.

그 유대민족의 중심처가 여기 2절에 나옵니다. “온전히 아름다운” 그다음에 지명, 공간 나오지요. “시온” 감람산 근처에 산이 세 개 있어요. 첫째 감람산 하나 있고, 중간에는 성전 산이라 하고, 성전 산 동쪽에 시온 산이 있어요. 예루살렘은 세 가지의 산으로 구성돼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라마단(رمضان)이란 이슬람교도들이 기도하는 제일 큰 절기를 맞이해서 이스라엘 군대가 성전 산에 들어갑니다. 어느 정도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 숫자 외에는 이스라엘 군이 총 들고 자기 성전 산 사원에 오는 것을 배척하지요. 데모하면 안 되니까. 현재 이스라엘이 장악하고 있어요.

예루살렘이 여기 있으면 동쪽에 감람산, 성전 산, 이쪽에 시온 산 합해서 예루살렘이라 합니다. 가본 사람들은 알아요. 감람산이 유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한 것. 감람산 위에는 예수님이 승천했다고 해서 승천교회가 있고, 밑에 내려가면 올리브나무가 있어요. 그 밑에 겟세마네 교회가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맨 시온 산이 성벽 안에 들어있어요.

강의했으니까 물어보겠습니다. 시온 산은 공간입니까, 공간이 아닙니까? 공간이죠. 공간은 어디에 속하느냐? 자연에 속합니까, 속하지 않습니까? 자연에 속하지요. 자연은 시간과 공간으로 돼 있어요. 그러면 시온 산을 볼 때 여기 시온 산이고 예루살렘이라 할 때 그게 환상일까요, 실제입니까? 환상이에요. (그러니까 늦게 오신 거예요.) 여기 시온 산이 있다? 환상이에요.

거울 보면 내 모습이 비추지요. 그 내 모습이 나일까요, 아닐까요? 나라고 할 때 그게 환상일까요, 실제일까요? 그게 환상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인간은 자기 환상을 자기 능력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제 낮 설교한 것 잠깐 예를 들어볼게요. 사울 왕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내요. 여기서 사울 왕이 완전히 오류를 발견합니다.

사울 왕이 사무엘을 부를 때 사무엘은 죽었고 죽음 사이에 있고, 자기는 신접한 여인과 더불어 산 자에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 자체가 자기는 만지면 있잖아요. 살아 있는 것 맞잖아요, 숨 쉬잖아요. 살아 있다는 게 환상인 줄 몰랐던 거예요.

사울과 신접한 여인이 어느 쪽이냐 하면 죽은 자의 쪽이에요. 사무엘 쪽은 산 자의 쪽입니다. 그게 히브리서 12장에 나오거든요. 왜냐 하면 사무엘은 무엇과 함께 있느냐 하면 언약의 완성과 함께 있어요. 하나님의 계시와 함께 있고 사울과 신접한 여인은 계시에 잘린 쪽, 반대쪽에 있어요. 죽은 자의 세계지요. 결국은 자기 무덤이 될 거예요.

예루살렘을 오늘 이야기할 텐데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2절, 제가 읽겠어요.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이죠. 묻습니다. 시온 산이 지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습니까? 지금 모세 있는 데 아니에요. 모세는 공간이고 공간은 인간의 이익과 관련돼서 뭐가 됐습니까? 환상으로 이해되는 거예요.

그러면 실제 시온 산은 어디 있습니까? 하늘에 있고 거기에 누가 있습니까? 거기에 천만 천사들이 함께 있지요. 여기에 시온 산에 살아계신 하나님도 계시고 천사도 있고,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23절)이 함께 있는 곳, 그걸 다른 표현을 인간이 할 수 없어요. 그걸 실제가 아니고 ‘실재’ 영어로는 똑같아요, reality.

실제는 허상과 가상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진짜배기는 뭐냐 할 때 실제로 있느냐? 실제로 일어났어? 실제로 그 사람이 살아 있단 말인가? 이런 거예요. 드라마에서 남편이 실종됐는데 나중에 12년 뒤에 ‘우리 남편이 실제로 살아 있어’ 할 때는 ‘실제’에요.

내 눈에 안 보이지만 실제로 있는 건 실제고, ‘실재’란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찾을 수 없는 것,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언어로 온전하게 합치 되게 표현할 수 없는 세계, 이게 실재 세계에요. 영어로는 그냥 reality. 인간은 오류의 세계기 때문에 이미 범죄 한 세계기 때문에 real이 아니에요. 이걸 다른 말로 쉬운 말로 하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할 때 그 진리, truth라 할 수 있는데 real. 진리는 이 땅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은 멸망해야 돼요.

그런데 언어로 표현 못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뭐로 표현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났던 개념과 결부된 언어들이 있어요. 시온 산, 예루살렘, 천사 전부 다 뭡니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인간들의 언어로 통용되는 개념을 실어버린 언어들이에요. 그런데 그 언어들 단어 만 개 외우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죠. 아닌 거예요.

그래서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강남강의인지 설교 때인지 기억이 없어요. 고린도전서 2장 4절 누가 읽어보세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보세요. 언어가 수단이어야 되는데 수단이면서 수단을 그 다리를 발로 차버리는 겁니다. 내가 전하는 것은 인간의 말로 효과 있게 전할 수 있다, 없다? 이게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뭐냐? 말 말고 다른 무엇? 그것이 바로 2장 13절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돼 있지요. 괄호 열고 여러분들이 그 뒤의 말을 집어넣어 보세요. 사람의 말로 설교라든지 강의라도 안 된다, 괄호 열고 여러분들이 빈 칸에 집어넣으세요. 정답은 모른다 치고 뭘 집어넣겠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구원은 하나님이 찾아와야 되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말발 밖에 없어요. 많이 듣고 많이 배우고 많이 익히고 소용없습니다. 그게 방해로 작용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인간은 나한테 무엇이 이익이냐가 요지부동 변하지 않는 무조건이에요. 성경 봤다, ‘나에게 이익은?’ 기도했다, ‘나에게 이익은?’ 전도했다, ‘나에게 돌아올 이익은?’ 본인이 본인을 삭제를 못해요. 잘라낼 수가 없어요.

이것은 왜 그러냐 하면 마귀가 이미 우리를 자기 것으로 삼았기 때문에 내가 죽고 싶어도 마귀 허락 없이는 자살도 안 돼요. 가룟 유다가 사탄이 들어갔으니까 자살한 거예요. “할까요, 말까요?” “죽어!” “예예.” 이걸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살고 죽는 것도 인간 마음대로 안 된다. 평소에 다 아는 거고요.

구체적으로 말해서 마귀의 허락 없이는 죽고 살고도 안 되는 거예요. 이걸 누가 아느냐? 하나님이 아시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은 우릴 살려주느냐? 우리를 살려주지 않습니다. 판타지를 왜 살려줘요?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주는 게 아닙니다. 뭘 살려주느냐? 하나님이 살려주는 건 언약입니다. 우리 속의 언약을 살려줘요. 우리를 죽이고 우리 안에서 말씀을 끄집어내죠.

흉측한 예지만 드라큐라가, ‘오 사람이구나’ 하고 사람이 좋아서 사랑하는 게 아니고 사람의 간을 빼먹는 것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껍데기로 땅콩껍질로 갖다버리고 우리 안에서 본인이 언약을 집어넣고 그 집어넣은 언약을 되찾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러면 언약을 되찾는 게 뭐냐 하면 이걸 신약에 와서는 성령을 집어넣고 성령을 되찾으면 죽은 자를 살리는 그 힘, 능력이 있으면 우리도 죽은 자에서 산다고 했어요.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안 믿어? 좋아, 좋아. 나를 부정해? 괜찮아. 나를 부정하고 나를 안 믿는 것은 내가 일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장차올 성령을 모독하게 되면 오는 세대까지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 했어요.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을 예수님이 인간에게 무시당할 쪽으로 오신 것은 우리 속에서 우리의 오류, 우리의 죄를 예수님의 자신의 죽음과 결부시켜서 파악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네가 나를,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무시해요. 왜? 자기가 이미 절대적 신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더 중요하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가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 없다? 아무도 없어요. 베드로도 따라가다 놓쳤어요. 끊어졌어요. 끊어졌는데 베드로가 구원받은 것은 무엇 때문에 구원받느냐 하면 성령이 오셔서 구원받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요 성령이 와서 구원받은 거예요.

똑같은 절차를 사도 바울이 합니다. ‘예수 믿으세요?’ 무슨 뜻입니까? 못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으세요. 구원을 받습니다. 로마서 10장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절) 아무도 없어요. 없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 믿으세요. 구원받는다’ 해놓고 성령이 말씀과 더불어 해버리면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이게 맞는 말이고, 그 증거가 뭐냐? 시편 50편에 있는 모집책으로 강제로 뽑힌 자가 누구다? 바로 나였다는, 나라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기 시도한 것이 아니고 시편 50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주께서 선방 때린 거예요. 찾아와버린 거예요. 찾아왔을 때 그다음에 성도의 뜻은 뭐냐? 왜 내 행함으로 구원 못 받았지? 내가 성경 달달 외우는 것으로 이게 왜 하나님은 안 받아주지? 하나님은 나의 어떤 것도 안 받아주는 이유가 뭐지? 이것을 이미 구원받은 기쁨으로 파악하는 거예요.

시편 50편이 그냥 농담 삼아 던져보는 일이 아니고 이게 반드시 이루어져야 될 일이구나. 여기 시온 나오지요, 여기에 하나님 나오고 인간 나오지요. 이게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뭐냐 하면 하나의 히브리서에 보면 그게 비유에요. 실재가 아니에요. 역사는 실제는 맞는데 실재는 아니에요. reality는 맞는데 real은 아니에요. 진리를 모방한 건 맞는데 진리 자체는 아니에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실제에요. reality 맞아요. 하지만 real은 아니에요. 진짜 real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관계를 맺어줘야 돼요. 너는 내 백성이고, 할 때 그게 real이에요. reality가 아니고 real이라니까요. 이게 실재에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어디까지 맴돌아요? 환상이냐, 실재냐 그 범위 내에서 맴돌아요.

환상은 언어로 이해되는 것, 언어로 파악되는 것. reality 실제는 언어 말고 바깥 세상에 있는 그 무엇, 이게 실제인데 그래도 그걸 안다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환상에서 빼낼 수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두 계열을 다 안다고 하면 그걸 종교라 하는 거예요. 그걸 기독교라 하는 거예요. 기독교는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냥 인간의 탐색, 탐구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이룰 수 있고 어디까지 이룰 수 없음을 누가 판단해요? 본인이 내리거든요. 그거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유대교라고요. 나는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모른다는 것은 그래봤자 무엇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아는 지식이 나한테 어떤 이익을 제공할 수 있겠느냐, 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게 못 벗어나요. 이것 자기 의, 자기 이익 셉니다. 이것 세요.

여기서 질문 하나 들어갑니다. real 실재로 성령 받고 난 뒤에 자기 이익 없어집니까, 안 없어집니까? 안 없어져요. 충분히 이용하지요. ‘네가 이랬던 자였었어. 그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거예요. 성령 받아도 자기 이익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육신이 가만 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 몸을 통해서 영광을 받겠다는 주의 뜻은 좌절되지 않는가? 여기서 주님께서 뭘 하느냐? 역사를 절단 내버립니다. 역사 절단 이야기하겠습니다. 역사 절단 이야기, 역사를 두 동강내요. 잘라버리는 거예요. 절단해야 새로움이 나온다. 역사를 자르지 않는 것, 이걸 반성이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해야지, 이런 것. 회개, 반성이에요. 내가 두 번 다시 하면 손모가지를 자른다. 내 눈을 빼버린다, 이런 것.

역사를 자르지 않으면 과거의 추억과 과거의 기억을 개조를 하고 개선하고 보정하고 질이 좋은 것으로 전환시켜 계속 내 것으로 붙드는 경향이 있어요. 자아의 질을 높이는 데 역사적 반성만한 것이 없다. 나라는 질을 나라는 성질을 보다 향상시키는 데 역사적 반성 외에 적절한 게 없습니다. 그러면 나의 자아의 질을 유지한다는 것은, 마귀가 심어놓은 내가 신이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역사적 반성할 때 역사적 반성에 들어가는 것 중에서 최고의 역사적 반성은 뭐냐? 성경공부 외에는 더 뛰어난 게 없겠지요. 성경공부, 말씀 듣기, 설교 듣기, 최고지요, 이거는. 하나님이여 관계회복 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다시 소통하는 관계가 되겠습니까? 맨날 기도가 그런 기도. 그러면 살아계신 하나님 같으면 답변도 안 해, 그런 시시한 것. 만약 한다면 그렇게 해서 너한테 돌아올 이익은 뭐냐, 이렇게 묻죠. 그렇게 해서 네가 얻고자 하는 게 뭐냐 말이죠. 주고받는 게 인간관계인데.

그러면 하나님께 모든 것 버리고 헌신하고 선교사 하겠다고 전부 다 진짜 재산 다 버린 선교사의 최초 누구냐 하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열두 제자에요. 자기 목숨까지 다 바친다고 했어도 삼 년 만에 다 떠났잖아요. 소명감이 가득 찬 그들보다 더 선교적인 게 어디 있어요?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언어로 들었단 말이죠. 자기가 환상인 것도 모르고 그렇게 해서 주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진다고 착각한 거예요.

주님은 나의 기억을 추억을 끊어버리는 거예요. 기억을 끊어줘야 새로움이 나와요. 옛날에 전설에 이차돈이란 중이 헤모글로빈이 있어서 벌건 게 나왔는데 이 사람은 치즈가 들어있는지 허연 게 나왔다는 거예요. 이건 뭐 모차렐라 치즌가. 말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내 역사주의가 방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걸 절단하면 절단면이 나오겠지요.

절단면에서 과거보다 나은 새로움이 아니고 그 새로움조차도 옛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상상도 못한 새로움이 주님의 성령으로서 우리를 잘라버립니다.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느냐? 반 토막 난 나, 온전한 나가 아니지요. 문제 있는 나가 될 때 그 나에서 쏘아지는 게 뭐냐?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자비와 형제우애, 성령의 열매가 나오는 거예요.

다시 사울 이야기해봅시다. 사울과 신접한 여인, <파묘>지요. 무당. 신접한 여인이 누굴 불러내느냐 하면 사무엘을 불러내요. 이게 코미디에요. 왜 그러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무엘은 지금 누구와 함께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시 완성과 함께 있어요. 그럼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이쪽이 산 자에요. 그리고 이쪽은 관계가 끊어졌거든요. 그럼 이쪽은 뭐냐? 죽은 자들이에요. 죽은 자들의 동맹, 연합, 계모임. 죽은 자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있어요. 신접한 여인이 사울 왕이 희망이 좌절되니까.

끊어졌다는 말은, 역사는 흐르잖아요. 잘라버렸으니까 뭐가 날아갔습니까? 기대와 희망이 잘려진 거예요. 그런데 기대와 희망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의 이익은요, 나에게 돌아올 이익은 뭡니까가 기대와 희망이란 고상한 단어 안에 포장돼 있습니다. 어제 낮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람이 분노하는 게 남에게 분노하는 게 아니고 자기에게 믿음 없음을 제대로 못 감추고 남한테 들켰다는 자기한테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왜 너는 철저하지 못해, 이 바보야.’ 그래서 분노가 일어나면 마귀 일이고, 감사가 되면 무슨 일입니까? 성령의 일이에요. 사울이 분노를 일으킵니다.

자기는 확인받기 위해서, 왜냐하면 사무엘은 계시를 갖고 있으니까 계시 앞에서 과연 이스라엘은 역사가 희망과 기대를 갖고 이어지겠는가를 궁금해서 왔는데 사무엘이 하는 이야기가 이걸 사자성어로 뭐라 하느냐 하면 ‘확인사살’이에요. ‘너는 뭘 해도 안 돼. 끝났어. 빠이빠이, 부르지 마라.’ 가버려요.

왜 이렇게 죽어야 되는가? 사울 본인 자꾸 자기가 살았다고 자기 자신에 대해선 무조건, 무조건 나는 괜찮은 존재라고 단정 짓고 그다음에 뭘 받습니까? 성경이고 복음이고 완전히 뒤집어씌운 거예요. 복음에 공부한 두께가 많으면 자기에게 뭔가 질적으로 향상되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삼겹살에 비계 많으면 그게 향상된 좋은 상품의 삼겹살입니까? 아니지요. 잘라내야 되지요.

어린애가 돼야 되는데 어린애가 아니고 점점 더 고상스러운 어른이 되는 게 신앙생활의 목표처럼 그렇게 간주된 겁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어느 자리에다 하느냐 하면 환상이 시작된 그 자리를 되돌려줘요. 되돌려주면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할 때 비로소 거기서 시편 50편의 말씀처럼, 일번 초반에 나온 단어가 뭐라고 했습니까? 멈추지 않는 것, 새로움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처럼 새로움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왜? 주의 일은 멈춘다, 안 멈춘다? 멈추지 않아요. 주님 혼자 바빠요. 자를 때에 주님께서 여전히 일하시는구나. 그걸 예수님도 이야기했어요.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예수님은 멈추지 않아요. 세상 끝 날까지 멈추질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역사를 다듬다보니까 나중에 나이 한 오십, 육십 되어 어지럽다 이러면서 ‘요새 갱년기인가? 힘이 빠져. 아이고, 이제 내 할 일은 집에서 들어 눕는 것밖에 없네.’ 자기 일밖에 모르니까 나이 많으니까 자기 일 멈추면 주의 일도 멈춘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자기 일 멈췄는데.

주의 일은 새로움인데 그동안 새로움을 누가 계발했냐 하면 본인이 계발한다하니까 그게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너무 힘든 기간이 너~~~무 길어요. 자기가 한 것에 만족스러운 기대와 희망을 갖는 그 힘든 일이 너무 길기 때문에 어린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자꾸 자기가 어른스럽다고 우기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50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시편 50편에서 첫 번째는 쉬지 않고 일한다. 멈추지 않고 일해요. 멈추지 않고 어떻게 하느냐? 자기가 원하는 백성을 친히 모집해요. 그러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거기에 방해되는 건 뭡니까? 내가 하나님의 백성 되겠다는 노림수가 있겠지요. 자기 일이 있겠지요. 그게 자기 유익이니까. 존재 했으면 천당까지 가야 존재의 소기의 목적을 이루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뭘 하느냐 하면, 율법으로 뭘 하느냐? 제사를 드려요. 어디에서? 특정 장소에서, 예루살렘에서. 주께서 이걸 폐기시켜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율법대로 예루살렘에서 제사 드렸습니다. 제물 드렸습니다.’ 시편 50편에서 하는 말이, ‘니 제물 어디 있는데? 네 게 어디 있어?’ ‘니가 번제를 드렸다고? 번제 드리면서 실수를 했다고? 나는 니 번제에 대해서 일체 내가 거기서 책임을 묻지 않겠다.’

8절,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야아, 이 말 딱 듣는 순간 여러분 어떤 생각 들어옵니까? ‘나 헌금 안 할래. 헌금의 부담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애 피아노 사줘야지. 학원비 대야지. 교회 간식비나 드려야지.’ 간식비나 하면 되지. 목사 사모 잘 버는데 내가 책임질 것 없고, 이것 하나 안 하나 구원받는데 뭐 하려고 헌금 하느냐 말이죠. 결국 어떤 성경을 봐도 마지막 노림수는 뭐냐? 내게 무엇이 이익이냐? 어떤 구절이 나한테 이익을 가져다주느냐? 내 생존에 손해나지 않는 방법을 모색하는 겁니다.

여기서 바로 제물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겠다는 것은, 여기 있는 네가 하나님께 제물 바쳐서 들어오는 이 길을 내가 절단시키겠다, 끊어버리겠다는 거예요. 너는 구원의 대상이 안 된다는 거예요. 너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로 구원의 대상이 안 돼요.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께서 번제, 제물, 또는 제사장 이것을 통해서 이 말씀이 율법이 인격화 되는 그 시대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끌고 갑니다.

말씀이 인물로 등장하는 그날까지,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날까지 주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라는, 인간들이 다 아는 역사라는 실제, 환상에서 실제, 인간의 언어로 설명되고 실제로 거기 있네, 라고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그 역사를 주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면서 그걸 비유로 만들어버려요. 하나의 모형으로 만들어버려요. 역사인데 이게 모형이 돼버리고, 인간이 존재하는데 이게 하나의 비유가 돼버려요. 판타지가 돼버려요. 모형이 되게 만드는 거예요. 실재는 없어요. 실재는 없다고요.

유대인들의 특징은 뭐냐? 그냥 기다림이에요.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 돌아가신 이유를 이제 알겠지요. 기다림을 없애버렸어요. 너희는 메시아를 기다리잖아요. ‘여기 왔네, 까꿍.’ 메시아가 와버렸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 총동원 다해 말씀 구약, 그때는 성경이죠. 예수님 놓고 대조해보는 거예요.

예수님 맞나, 안 맞나 대조해보니까 이리 봐도 메시아 아니고, 저리 봐도 메시아 아니에요. 왜? 주님이 피해갔으니까. 인간이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쉽게 말해서 인간 속에 악마가 요청하는 메시아 관을 다 피해간 거예요. 악마가 요청한 메시아 관은 뭐냐? 이스라엘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받는다는 그 메시아 관이에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그러면 합격.’

세 가지를 보면 돼요. 율법을 압축해서 그들이 만든 게 세 가지입니다. 안식일, 할례, 그다음에 성전. 기원전 167년에 안티오코스4세가 등장했어요. 다니엘에 예언된 사람이에요. 안티오코스4세가 뭐를 가지고 유대인들을 공격했느냐 하면 이 세 가지입니다. 성전에다 돼지를 제물로 바쳤어요. 강제로 법적으로 안식일을 못 지키게 만들고, 모든 유대인 남자들 할례를 금지시켰습니다.

그전에 안티오코스3세 기원전 323년경에 누가 왔냐? 알렉산더 대왕이 유대를 방문할 때 야두아라는 대제사장이 있었어요. 야두아 대제사장이 알렉산더 대왕을 마중 나갔어요. 그때 알렉산더가 뻣뻣하게 나온 게 아닙니다. 작은 나라 유대 제사장에게 절을 했습니다. 절을 하면서 내가 이 성전에 제물을 드리고 유대인의 여호와 신에게 신명을 바치겠다고 나왔어요.

그 이유가 뭐냐? 다니엘서에 보면 뭐라고 예언돼 있느냐 하면 바사 나라가 헬라 나라한테 정복당한다는 예언이 나왔어요. 그걸 보고 알렉산더는 깜짝 놀랐어요. 진짜 여호와 신이다. 그럼 내가 이 신에게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앞으로 내 장래는 어떻게 되는가? 장래를 위해서는 내가 이 신에게 굴복하는 자세, 신이 보호하고 인도하심에 내가 굴복하겠다는 겁니다.

어떻게 알렉산더 신자 됐습니까, 신자 아닙니까? 모집책이에요, 아니에요? 알렉산더에게 뭐가 빠졌습니까? 하나님을 내 이익과 내 장래와 희망과 기대와 결부시켰지요. 자기 이익을 포기 못한 거예요. 자기가 이익 받아야 되죠? 그것은 내 존재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절대적으로 무조건 옳기 때문에, 자기 존재가.

알렉산더가 그러고 난 뒤에 11년 만에 죽어요. 죽고 난 뒤에 나라가 20명의 장군이 예선전, 준결승을 거쳐서 최종 4명의 장군이 남았어요. 남아서 땅 갈라먹기를 했어요. 현재 이라크, 이란 이쪽은 셀류쿠스 가문, 톨레미 가문은 이집트와 그 당시 예루살렘, 그때 그것을 접수했다 이 말이죠. 네 명이.

그런데 이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선배 되는 왕 알렉산더의 유지를 따라서 여호와를 건드리면 자기한테 이익이 오지 않는다는 미신 같은 게 작용해서 유대나라는 세금을 경감해주고, 그다음에 그들의 전통적인 유대교의 신앙은 보장해주는 쪽이었어요. 유대교는 마카오 왕조 때생겼는데 그건 알 필요 없고요. 어쨌든 일단은 괜찮았어요.

그런데 특이한 자가 안티오코스4세가, 3세는 너무 잘해줬어요. 근데 4세가 와서 요것 봐라 해서 네가 세나 내가 세나 시비를 걸면서 의도적으로 박살내버렸어요. 톨레미와 셀류쿠스가 서로 유대 땅을 밀고 당기는 것이 다니엘 11장에 다 나와요. 나오다가 나중에 로마 때 와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예 예루살렘 불타버리고, 6월 9일. 유다나라가 바벨론한테 잡힐 때도 6월 9일이었습니다. B.C.586, 6월 9일. 나중에 티토스한테 A.D.70 망할 때도 6월 9일이에요. 6월 9일에 액운이 이상한지….

그러면서 여호와 신, 우리는 제우스 신을 믿는 거예요. 제우스 신당을 첨가시켰어요. 그때 유대나라가 반란을 일으켜서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전쟁에서 셀류쿠스 주둔군이 물러나고 약간의 독립성을 보장받지요.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이 말라기가 끝나고 마태복음 오기 전에 예수님 오시기 전에 계시가 끊어졌지요. 계시가 끊어졌을 때는 뭐로 채운다? 인간의 역사로 억지로 가짜 실로 이어보는 거예요. 계시가 아닌데 역사를 계시로 대체해서 하는 거예요. 역사로 이어본다는 것은 무엇에 대한 부정 못 하겠다? 역시 후손들 혈육, 아브라함 혈육을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포기 못하면서 신약성경까지 이어져온 겁니다. 뭐로? 역사로 이어졌지요. 결국 역사, 계시가 없는 B.C.330부터 예수님 탄생 이전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난 것은 역사 안에 뭐가 그만큼 성장돼 왔겠어요? 바로 유대주의가 성장, 여기서 자라나기 시작한 겁니다. 유대주의는 뭐가 빠졌다? 계시가 빠진 거예요.

계시가 빠지고 뭐가 들어갔는가? 구약에 대한 모든 인간들의 해석이 그 빠진 자리를 다 채웁니다. 우리가 율법 지키면 우리는 택한 민족 된다고 채운 거예요. 그 해석적 전통을 채우는 겁니다.

이것이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괴물을 최종적으로 끄집어내기 위한 함정이고 덫이라는 사실을 인간들이 몰랐던 겁니다. 내가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말씀이 내 속의 괴물을 들춰내는 엑스레이 기계 같은 것이라는 것, CT 촬영기라는 사실을 인간들은 까맣게 모른 거예요.

말씀 앞에서 비로소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을 인간은 할 능력이 없지요. 그때 어떻게 하느냐? 사울에게 누가 찾아왔지요? 예수님 찾아왔지요. 딱 하는 이야기가, ‘너는 나를 그동안 핍박했다’ 그런데 사울은 뭐냐? 나는 바리새인 중이 바리새인이고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에요.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가 주님 만나니까 뭐로 바뀌었습니까? 핍박하는 자로 바뀌었지요. 비늘 떨어지면서 내가 알고 있던 우주관, 세계관, 메시아관, 구원관, 하나님관은 모조리 비늘과 함께 다 떨어져요. 그것이 바로 나 자체가 환상 덩어리였다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240311b 부산강의 : [시편]66(50:8)-태어난 언약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입니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시50:8)라는 것은 책망 대상도 안 된다는 거예요. 너는 책망 대상도 안 돼. 왜냐하면 일은 주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기 때문에 주님의 전쟁은 마귀와의 전쟁이에요. 여자의 후손은 누구와 싸운다? 뱀의 후손과 싸우는 겁니다. 인간이 왜 껴요.

그런데 인간은 안 빠지려 해요. 왜? 배후에서 악마가 인간을 조종하기 때문에.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해야지, 내 구원은 내 책임이지’ 자꾸 이런 생각을 갖고 있고, 주님은 니 구원은 니 책임이 아니고 니 소관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고. 참 우리의 자아가 못됐다가 아니라 참 끈질겨요, 끈질겨. 맨날 복음 들어도 집에 가면 또 베개에 눈물 적시면서 ‘나 이래서 구원받겠나’ 이러고 있다고. 베개를 없애버리든지…. 본인 소관이 아닌데, 본인 소관이 아니에요.

뭐부터 고쳐야 하냐면 ‘내가 태어났다’는 없어요. 성경에는 내가 태어난 게 아니에요. 언약이 태어난 거예요, 이 땅에. 말씀이 육신 된 거예요. 우리는 이용물이에요. 말씀에 이용할 이용물이지 내가 껍데기가 태어났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껍데기 속에 말씀이 들어온 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내가 태어났다는 것은 누구 주장이냐 하면 이게 악마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나로부터 말미암아 나로부터 가서 어디로 돌아간다? 나의 이익으로 귀환되는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난 천당 갔다.’ 완전히 지가 천하장사 이만기에요. ‘난 이렇게 고생하고 훌륭해서 천하장사 떴다.’ 이게 악마인데 고상한 말로 씁시다. 보편적으로 쓰는 말로 이걸 개인주의라고 합니다. 다 같은 이야기에요.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내 구원을 위해서 교회 오는 것, 전부 다 어디서 나오느냐? 개인주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언약으로 태어난 거예요. 그러면 언약으로 태어날 때 환경은 뭐냐, 바탕은 뭐냐? 개인주의 바탕 위에 언약이 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시편 50편 이전에 제사 드려라, 번제 드려라, 계속 헌물 바쳐라, 속죄일, 유월절, 맥추절 지키라 한 이유가 바탕을 먼저 까는 겁니다. 집 지을 때 콘크리트 해야지. 기초공사 해놓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악마가 주님한테 말려든 거예요. 주님이 악마를 활용하는 겁니다.

천사는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자기 부정이 안 돼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냐? ‘아버지여 어찌 날 버리시나이까’가 돼요. 이게 된다고요. 예수님은 자기 부정이 돼요. 악마가 천사지요. 천사도 천사고 악마도 천사에요. 그래서 천사보다 예수님이 더 뛰어나요. 천사는 시키는 대로 하니까. 근데 예수님은 자기 부정을 해요.

이 잔을 그냥 마셔야 됩니까, 하고 그러한 고민과 갈등을 유발한 것이 예수님이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못해요. 예수님의 영이 임했다는 말은 드디어 자기 부정이 즐겁게 된다는 뜻이에요. ‘나 아니고’가 된다는 말이에요. ‘나 아니고’가 된다면 그 사람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이룬 사람이에요.

모든 성경 말씀은, ‘너 죽어야 돼’ 그 이야기가 밑에 있거든요. 이러니까 너는 죽어야 돼. 오른 눈 빼야 되고, 오른손 잘라야 되고, 너는 연자 맷돌로 추락해야 돼. 그걸 요구하는 게 성경이고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말씀을 주께서 하게 하셔서 주님의 자기 부정, 십자가죠. 주님의 자기 부정에 참여하게 하신 것은 순전히 성령의 능력이죠. ‘나 아니고’ 왜 아니냐고 물으면 나는 죄만 지었기 때문에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15장 21절, 중요하니까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음이 들어왔으니” 됐습니다. 끝났어요.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죽음이 들어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하는 모든 죄, 모든 일도 주님의 일에 포함돼 있단 뜻이에요. 내가 죄 짓는 것도 주님의 허락 하에 죄를 지은 거예요. 왜냐? 죄를 지어야 하기 때문에. 이게 도발적인 사고입니다. 획기적인 사고에요. 이게 없으면 우리에게 새로움이 안 나와요.

우리는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우리 육신이 마귀가 시키는 대로 죄를 허겁지겁 덮는데 우리의 스트레스가 다 거기서 나온 거예요. 죄 지으면서 안 지은 척하는 데 너무 많은 기력을 소모하고 있어요. ‘제발 들키지 말라. 너 쪼다 될래. 네가 공든 탑 무너질래? 네가 수갑 채우고 검찰청 한 번 나가 볼래? 그게 부끄러우면 저 북한산 소나무 밑에 자살할래?’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면 사진 막 찍히고요.

죄 짓는 것이 내 힘으로 짓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메가폰 쥐고, 메가폰 쥐면 목소리가 달라요. ‘너는 완전히 포위됐다’ 이런 거예요. ‘너는 완전히 포위됐다, 포위됐다. 항복하라’ 이럴 때 나오는 현상이에요. 그냥 손들고 나오면 되는 겁니다. 동굴 속에 있지 말고 나오면 되는 거예요. 그걸 성경에선 회개라 하는 거예요. 회개는 내가 못해요. 강제로 헬리콥터 열 대 떠서 번쩍번쩍 하면서 드론 막 띄워서 ‘빠져나갈 때가 없다, 너는 끝났어’ 이런 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값없이 손드는 것밖에 없어요. 값없이 항복하는 겁니다. 세상에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궁금했던 것, ‘네 자신을 알라’가 어떤 인간도 이게 막달은 것은 결국은 내가 누구지 모른다는 데서 평생의 짐이 되는 거예요. 내 진짜 모습은 누구냐? 그런데 성령이 와서 십자가 앞장세워버리니까 심지어 내가 태어난 것부터 죽는 것까지 그 일정이, 그 스케줄 하나가 다 주의 일이라는 사실이에요. 우리는 하나의 기초공사 깔아놓은 거예요.

고린도전서 15장 21절 다시 봅시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뭐로 이뤄진다? 죽은 자의 부활도 누구 때문에? 사람으로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사람은 무엇과 뭘 보여줘야 돼요? ‘사망+부활’ 그 두 가지를 보여줘야 유일한 사람, 인자입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선 진짜 말씀대로 사람을 보내주신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아주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부활을 모르면 그것은 세상을 모르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것이 다 헛된 것이다, 이 말이거든요. 이걸 오늘 본문과 예루살렘과 관련해서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은 부활 안에 있다, 진짜 예루살렘은. 그러면 처음부터 부활 안의 예루살렘이 아니고, 처음의 예루살렘은 어디에 있는가? 죽음 안에, 인간 안에 예루살렘을 만들어놨지요. 그게 이스라엘이란 사람 나라 속에 예루살렘을 공간적으로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럼 진짜 부활 안의 예루살렘이 되려면 공식이 있지요. 예루살렘이란 공간이다? 아니지요. ‘예루살렘=공간+사람’ 사람을 구분하게 되면 사람을 둘로 나누면 예루살렘은 공간+엉터리/가짜 사람 또 예루살렘은 공간+진짜 사람(인자), 예루살렘은 공간을 통해서 가짜 사람을 먼저 만나고 그다음에 진짜 사람, 예수를 만남으로서 아까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 진짜 천사들과도 함께 사는 영원한 예루살렘에 성도들이 총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계속 이야기를 이어보겠습니다. 자, 시편 50편을 초반부터 제가 요약을 해드렸어요.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활동, 심지어 그 활동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인간들은 죄를 지어야 된다. 그래야 말씀에 부합돼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번제 드리라 해서 번제 드리고, 제물 드렸는데 그게 뭐가 된다? 그 제사가 반드시 죄가 돼야 돼요. 그리고 시편 50편에 와서 내가 네 제물을 인하여 책망하지 않겠다. 그 뒤에 이유가 나오지요. 그 이유가 이렇게 돼 있어요.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8절) 네가 나한테 번제를 이동하기 전부터 네 번제는 내 것으로서 네 안에 있었다는 거예요.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 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9~11절)라고 돼 있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공식은, 자연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은 참된 인격 또는 인간과 함께 발견해야 제대로 자연에 대한 이해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인간들은 자연을 객관적으로 보지요. 나는 여기 있고 자연은 여기 있는데 창세기 3장에서 땅으로 쫓겨난 인간은 자연을 통해서 자연 그대로 보지 않고 저 자연을 내 이익을 위해서 내 생존을 위해서 얼마나 유용할 수 있겠느냐, 거기에 몰두한 겁니다.

그걸 처음으로 몰두한 종족이 있었으니 그 종족이 가인의 종족이에요. 하나님께서 가인의 종족을 퍼뜨린 이유를 아시겠지요. 밑밥을 쫙 깔아놓는 거예요. 자연에 대해서 인간과 어떤 관련성을 쥐고 있는가? 쫙 깔아놓습니다. 그래서 원래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자연은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자연이 도중에 가인이 투입되어서 가인은 누굴 위해서? 인간 자체, 인간세계 자체를 위해서 자연을 자기 것으로 돌린 겁니다. 배후에 누가 그렇게 작당을 했겠어요? 악마가 그렇게 작당한 거예요. 왜냐하면 악마는 이미 땅에서 쫓겨났으니까.

악마는 자연을 전부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조종해서 인간을 통해서 역사를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이 두 가지로 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신으로 등극시켰지요. 이걸 아까 개인주의. 집안에 식구 네 명 있으면 신이 넷이에요. 각자 신이 다 있어요. 그래서 요새는 집을 구할 때 방 세 개 정도는, 자기 방 다 있어야 돼. 컴퓨터 세 대 다 있어야 되고, 휴대폰 다 있어야 되고. 그러니까 악마의 세계의 노골화, 드디어 노골적으로 구체화 되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악마는 자연을 전부, 인간을 역사를 점유하고 신으로 등극시킵니다. 이게 개인주의가 되는 거죠. 이걸 누가 했느냐 하면 바로 가인에게 악마가 들어가서 하는데 이런 것에 장애물이 누구냐 하면 바로 아벨이었어요. 아시다시피 아벨이었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가인은 아벨을 동생을 죽였는데 안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아벨의 특징은 하나님께 관계가 성립된 걸 확인하는 순간 이 땅에서 죽은 자가 돼버린 사실. 그러니까 아벨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에요. 왜? 하나님과 관계가 정립이 돼버리면 하나님이 계획한 순수노선에 참여한 게 돼요. 뭐냐 하면 죽음 그다음에 뭐가 있다? 부활이 있으니까 아벨은 땡 잡은 거죠.

그런데 죽을 때 자살해서 들어가는 게 아니고 누구로부터 공격받았어요? 악마, 뱀의 후손으로부터 공격받아서 주님 품 안으로 쏙 들어갔기 때문에(오늘 제목을 ‘쏙’이라 할까) 이건 가만있는데 받아주는 것도 주님 알아서 받아줬고 도저히 범죄 한 인간, 차단된 생명나무 갈 수 있는 노선을 주님께서 중간에 제사라는 제물이라는 매개, 그것도 어린양을 잡은 게 아니에요.

어린양을 잡고 뭘 뽑아냈느냐? 기름을 뽑아낸 거예요. 그래서 어린양과 기름을 따로 분리시킨 겁니다. 기름 부음의 제물만이 인간을 다시 하나님과 합체할 수 있어요. 인간보다 기름 부음이 나중에 오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보다 기름 부음을 먼저 자기 백성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선 창세전부터 계획한 바 있기 때문에 그분이 바로 메시아가 기름 부은 자에요.

기름부와 몸통부를 나눠놓고 주께서는 몸통을 죽이되 그 몸통의 죽음을 통해서 기름 부음의 의도가 부활되게 만들어버렸어요, 그 기능이. 죽었기 때문에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만들었어요. 여기에 누가 속아서 말려들었는가? 악마, 가인. 속았어요, 속았어. 주님의 작전에 전력에 속아 넘어간 거예요, 이 악마가.

자기 딴에 지혜가 있었어요. 인간 쪽에선 지혜가 있지요. 그런데 기묘자요 모사요 하나님께 먼저 드려서 응답받는 식으로 받을 자가 누가 있느냐? 이거는 누구도 측량치 못할 지혜, 그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지혜가 건너올 수 없는 끊어진 그 바깥의 지혜,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전략이죠. 죽여서 살려내는 전략. 어느 인간도 선 듯 나설 수 없는 그 지혜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침투하게 되면 인간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천국 가는 길이 되지요, 비로소.

그래서 사도 바울의 마지막 소원은 그거였습니다. “죽여주옵소서. 통촉하옵소서. 어서 죽여주옵소서.” 주님께서 “누구 마음대로? 더 살아야 돼.” “아니 되옵니다.” “더 살아야 돼.” “아니 되옵니다. 죽어야 됩니다.” “아니야. 너는 백성이지만 동시에 백성을 모집하는 모집책이야.” 모집책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시편 50편에 나와요.

하늘과 땅,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은 누구 것이다? 이게 나의 것이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제물은 나의 것이다, 시편에 이렇게 돼 있잖아요. 화살표 반대로 바꿉시다. 나의 것으로 뭐가 심어져있다? 제물로서 소와 양과 염소를 주께서 박아 넣은 거예요. 그러면 제물은 하나의 모형인데 이 자리에 백성으로 대체해봅시다. 대입해봅시다.

그러면 나는 주님께 간다? 아니지요. 주님의 것으로 인간 모습 속에 박아 넣은 거예요. 성도로서 모집책으로 박아 넣은 겁니다. 박아 넣으면 내가 태어났다? 아니지요, 아니지요. 언약이 태어난 거예요. 언약을 위해서 내가 태어난 거예요. 내가 죄를 지었다? 아니지요. 주께서 죄 짓게 하신 거예요.

왜? 아담의 역할은 죄 짓는 거니까요. 아담이 죄를 지어야 선악과 따먹어야 뭐가 돼요? 사망이 오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주특기는 사망에서 부활이에요. 사망에서 부활로 옮겨가는 거예요. 사망에서 생명, 두 개의 구역을 따로 만들어놓고 이걸 누가 이겨낼 수 있는가? 그러면 사망에 해당되는 자는 생명으로 못 뛰어넘게 하기 위해 나온 전형적인 모델이 누구냐 하면 악마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취지에 지지 않습니다. 끝까지 이용할 대로 다 우려먹지요. 홍자 아닙니까, 홍자. 곰탕처럼 우려내는 트롯의 음색처럼 주께서는, 악마가 피조물이에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뭐라 돼 있지요? 모든 세상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도 다 누굴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이용물이 되는 겁니다.

철저하게 악마를 이용해서 네 담당은 뭐냐? 사람을 죽이는 담당이에요. 가룟 유다를 자살로 몰아넣는 담당이에요. 문제는 아무도 안 죽는다는 거예요. 그때 악마와 지옥 간 사람들은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지요. 속았어요, 속았어. 죽는다 해놓고는 안 죽이는 겁니다. 마지막 부활 때 예수님 대할 때 모든 사람을 무덤에서 다 불러내요.

‘죽으면 좋지요, 사람이.’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꽉 죽어버릴까? 죽으면 내가 이 스트레스 덜 받고. 눈을 그냥 감는 게 아니고 어떻게 감아요? 꽈악 감는 거예요. 내 이런 꼴 보려면 차라리 눈을 꽈악 감고. 눈을 꽉 감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스카치테이프로 붙이면 돼요. 눈이 안 떠져. 그냥 모든 걸 잊어버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눈을 감을 때 잊어버리는 것이 뭘 잊어버리느냐? 자아입니다. 문제는 죽음 자체가 있기는 있는데 이게 죽음 자체를 묘사하고 표현하기 위한 인간 분류가 따로 이루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악인이에요. 악인들의 역할은 저주가 무엇이며 죽음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위해서 주께서 따로 분류시킨 거예요. 그들의 역할은 개인주의입니다. 도무지 자아가 이게 부서지질 않아요.

제가 어제 오후 강의 때 갈아버린다 했는데 갈리질 않아요, 자아가. 자아가 갈려져야 말씀이 파편이 되거든요. 히브리서 4장에 보면 말씀의 역할은 뭐냐? 가는 역할이에요. 골수와 힘줄이 쇠해서 완전히 우리로 하여금 벌거벗은 것으로 나오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그럼 모든 인간은 율법 앞에서 벌거벗음이죠. 자, 두 가지 있습니다. 벌거벗음에 대해서 ‘고맙습니다, 주님’하는 쪽이 있고, ‘부끄럽다’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으로 부끄럽지 않아요. 어떤 농부가 있는데 돈 하나도 없어요. 왜? 땅 사는데 다 투자해서 완전히 거지처럼 한 푼도 없어요. 한 푼도 없는데 늘 싱글벙글이에요. 왜냐하면 보물이 들어있는 땅을 샀기 때문에. ‘니들이 알아, 이 맛을.’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성질이 나더라도 성질 막 나거든요. 어떻게 친명, 비명 나오고 종북 단체가 비례 되고(정치적 발언하면 안 되는데 큰일 났네. 자칫하면 국민의 힘이 천당 가는 줄 알고 오해하겠다.) 하더라도 그게 구원과 무슨 관련이 있어요. 마귀들의 장난을 주께서 마귀를 이용한 건데요. 전부 다 이걸 어제 오후 설교에 인간의 게임이라 했어요.

악마는 인간의 게임을 만들어놓고 그 게임에다 집어넣었어요. 누가 돈 많으냐, 누가 건강하냐, 누가 오래 사느냐, 누가 자식이 잘 풀렸느냐, 이것으로 매일같이 게임하는 재미로 겨우겨우 하루하루를 보내게 만들었어요. 누가 사고가 적게 일어나느냐, 이런 걸로. 인간과 인간을 비교해서 게임하는 거예요. 이미 가인과 아벨 사이에 일어났지요. 게임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인간의 게임에다 하나님의 게임을 겹쳐놨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게임을 집어넣었어요.

그러니까 가인은 안 지기 위해서 아벨을 죽여 버렸지요. 왜? 살아 있는 한 자기는 게임에 졌으니까. 그런데 그게 덫이고 함정이었어요. 그 게임장에 관객들이 있었습니다. 누구냐 하면 땅이에요. 땅이 뭘 받았어요? 피를 받고 하나님께 고자질을 한 거예요. 땅이 cctv니까. ‘그 사람 못 됐습니다, 저 사람 착했습니다’를 묻는 게 아니에요. 그 게임은 마귀가 인간이 만든 자기 의의 게임이고,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까, 연결 안 되었습니다’에 대한 고자질이에요.

‘저 사람은 영광스럽게 부활될 사람입니다. 아니면 저주스럽게 부활될 사람입니다’를 분류하는데 모든 피조물이 땅까지 다 총동원령이 내려진 거예요. 죽어도 영광스럽게 부활될 것이냐, 치욕스럽게 부활될 것이냐? 다른 말로 하면 그 인간은 살아도 끝까지 부끄러운 존재냐, 아니면 그 사람에겐 더 이상 부끄럼이 없는 존재냐의 게임을 하나님께서 만든 겁니다.

거지 나사로 참 부끄럽지요. 그런데 거지 나사로의 특징이 뭐냐? 거지인데도 별로 부끄럼이 없어요. 왜? 계속 시그널이 오기 때문에, 아브라함부터 연락이 되고 있기 때문에 부자가 도와주면 고맙습니다, 하고 부자를 철저하게 이용할 뿐이에요. 또 떨어지는 부스러기 없습니까, 하고 있고. 개가 와서 막 핥고 하지요. 개도 주인을 닮아서 거지를 진짜 개무시하고.

그래서 거지는 뭐냐 하면 자꾸 시간만 보는 거예요. 전반전 로스타임 너무 많이 준다. 90분 지났는데, 5분 남았지. 계속 불 때만 기다리면 뭡니까? 본격적으로 판타지세계는 끝났습니다. 영화 끝났습니다, 박수 한 번 치고. 이제 본격적으로 리얼한 세계, 아브라함 품에서 영원히 살지요. 그런데 아직도 부자는 착각에 빠져서 지가 부자인 줄 알고 지옥에 가서도 생수 한 병 보내달라고, 아직도 세상 버릇을 못 버려서 계속 환상 속에 있어요.

무슨 환상이냐? 인간이 만든 게임, 정치, 경제, 사회, 교회, 숫자 경쟁하는 것, 헌금 경쟁하는 것, 이 게임이 전부인 줄 알고 그 게임에 인간들이 완전히 세뇌 당했어요. 태어날 때부터. 뭘 몰라서 그래요? 인간의 할 일은 사명은 뭐냐? 죄 짓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설교가 뭡니까? ‘자, 이게 죄니까 오늘도 세상에 나가 열심히 다 같이 이 죄를 지읍시다.’

죄 짓는 아이디어를 제공해주는 거예요. 뭐 은혜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어요. 안 그래도 죄 짓고 싶어 환장했는데 교회가 협조를 해주니까. 죄의 날개를 달아버려요. 그게 신이 나야 되는데 신이 안 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게 지옥 가는 사람들은 뭐를 놓친 거예요? 내 죄를 감추는 것을 얻기 위해서 교회 왔는데 그게 빠지니까 바르게 살자, 뭐 이래야 되거든요. 바르게 살아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이렇게 해줘야 자기가 계속해서 가면을 만들 수가 있어요.

가면 이중, 삼중 나중엔 가면이 너무 많아 진짜 자기를 잃어버려요. 계속 가면을 두껍게 삼겹살처럼 쌓아야 되는데 그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때 다른 교회를 찾아가지요. 나를 위장할 수 있는 다른 교회. 왜냐하면 그게 마귀의 사주를 받는 인간은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성령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죄밖에 나올 게 없는 인간을 부활에 이르게 하느냐? 마태복음 26장 29절 읽어보세요.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야 포도나무 나와요, 포도나무. 이스라엘 약속의 땅의 생산물, 포도나무에요.

포도나무를 인격화시키는 이야기가 민수기 6장에 벌써 나옵니다. 나실인. 나실인은 특징이 뭐냐? 약속의 땅에서 생산되는 포도 열매가 나중에 약속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그게 인격화로 변하는 중간과정을 묘사해주는 임무가 나실인이에요. 포도나무가 이 땅에서 생존하고 내가 살기 위해서 식량으로 사용될 것인가? No. 그건 아니다. 포도나무가 인격화되는 진척과정을 약간이나마 시간 측정으로 등장하는 이게 시계지요. 인간시계로 등장하는 이게 나실인이에요.

포도나무와 관련성을 끊어버리고 포도나무는 우리를 구원하는 용도지 지금 당장 먹을 식량 용도가 아님을 분류하는 채각채각 흘러가는 시간을 나실인의 머리카락의 길이로 측정하는 거예요. 그게 나실인입니다. 그래서 6개월이면 6개월, 1년이면 1년 딱 시간 정해놓고 서원해서 1년간 그렇게 하겠습니다.

포도와 관련된 것 끊어버리면 약속의 땅의 포도나무가 뭐로 이어지는가? 생명을 보장해줘요. 그래서 나실인은 무엇과 또 손을 떼야 하느냐 하면 죽은 시체와 결별해야 돼요. 자기도 죽어가면서 아니야 나는 살았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살았기 때문에 죽은 것은 더러워. 이건 과거지사야. 나는 지금은 시체가 시체로 쌓여있는 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생명을 그 기간만큼은 보여주는 시계로 작용하는 게 나실인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를 표현하는 게 머리카락이기 때문에 함부로 삭도로 머리카락을 베지 마라. 그래서 세 가지 조건이에요. 머리카락 베지 말기, 그다음에 죽음과는 관계없는 일, 그리고 포도나무가 식용이 아니고 장차 인격화되는, 그 세 가지를 다하게 되면 그 인간은 하나의 인물은 그 당시의 양과 염소로 표현되는 그 제물에 감히 인간에서 자라난 머리카락이 섞여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그걸 합류해서 응답을 해서 관계를 이어버리죠. 제사를 응답해버려요. 그게 바로 나실인입니다.

그 나실인의 숨어있는 주인공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죠.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게 포도지요. 포도가 으깨졌을 때 색깔이 어떤 색이죠? 붉은 색이죠. 여기서 붉음이 나옵니다. 여기서 피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26장 이 이야기가 어느 대목에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먹은 것이 바로 나실인 일과 관련된 포도에서 나온 것을 먹었다. 너희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포도나무를 먹고 왔다면 이제는 깨물면 생명이 나오는 포도를 너희가 먹었다.

그게 뭐냐? 나실인이 제물이 된 그 피, 그 피를 네가 방금 생명으로 먹게 되었다. 이게 완성이다. 따라서 하늘나라 올 때까지 다시는 이런 모형적이고 비유적인 것은 내 피가 모든 것을 완성시켜서 필요치 않다. 이게 포도나무에요.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아담의 역할은 뭐다? 죄 짓는 거죠. 죄 지으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죽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 인생의 한도지요. 그러나 이게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에요. 죄로 끝나는 게 백성이 아닙니다. 백성은 어디서 살아야 돼요? 시온에서 살아야 돼요. 시온은 누가 사는 곳이다? 천사가 사는 곳이에요. 마태복음 22장인가에 나오지요. 사람이 죽으면 뭐가 된다? 천사 같이 된다 했지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30절)

천국에서 천사 같이 돼요. 인간의 목적은 뭐냐? 천사 되는 게 아니고 천사가 사는 그 동네 사람이 되는 거예요. 천사와 같이. 천사 연애합니까? 천사가 결혼해요? 천사가 결혼하게 되면 복잡해요. 또 삼각관계 어떻고 사진 찍어서 이 여자, 네가 무슨 짓하고 돌아다녔냐 해서 사진 날아오고 해요. 지긋지긋한 인간세계의 갈등은 어차피 그게 판타지잖아요. 판타지는 이제 걷어내야 될 것 아닙니까. 언제까지 환상 속에 있을 겁니까. 깔끔하게 리얼 세계에 들어가야지요.

천사와 같이 된다는 말은, 천사의 특징은 죄가 없어요. 그러나 죄 없는 쪽이, 의가 있고 무지가 있다면 누가 더 셉니까? 의가 더 세지요. 천사도 성도한테는 종이 되는 이유가, 성도가 천사보다 계급이 더 높은 이유가 이들은 무지하지만 성도는 뭐가 됩니까? 의인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황당한지 내 평생 한 게 뭐냐 하면 죄 짓는 거였어요. 죄 짓는 건데 죄 짓고 뭐 됐다? 의 된 거예요.

이게 고린도후서 5장 끝부분에 나옵니다. 이게 우리가 인간이 지키는 게 아니에요. 놀라운 선물이에요. 고린도후서 5장 1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찾았습니까? 자, 우리의 할 일은 뭐였다? 죄가 있어야 돼요.

어느 것 하나 죄가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백 프로 죄밖에 없어요. 죄 안 짓는 것이 죄에요. 더 큰 죄에요. 뭐가 덮였어. 뚜껑을 덮었어. 마귀가 시켜서 ‘이거는 죄 아닐 거야. 자식 잘 키운 건 죄 아니고, 주께 찬양은 죄 아닐 거야. 설교 잘하는 것은 죄 아닐 거야.’ 그건 마귀 같은 소리거든요. 인간은 죄 외에는 나올 게 없어요.

해놓고 그다음에 뭐냐 하면 그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않을 때 ‘저희’가 날아가요. 말씀으로 저희를 갈아버렸어요. 예수 안에는 저희가 없어요. 천사와 같아서 저희가 없어요. 이 자아라는 것 이게 없다고요. 자아 대신 뭐가 있어요? 육신만 있을 뿐이죠. 죄 짓는 육신만 있지. 죄 짓는 육신을 악마가 이걸 뭐로 만들었습니까? 신이라는 자아를 만들어 내놨잖아요. 참 악마 나빠. 너무너무 나빠요.

고린도전서 8장 4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이 대목 우상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이 말은 나를 위한 신은,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이게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우상 섬기고, ‘나는 나를 위한 신을 우상을 섬겼구나. 이건 너무 나빠’ 이러지 말라니까. 아무 것도 아닌데 뭘 나빠요. 그것 안 섬겨도 나쁜데 가만있어도 나쁜데 뭘 또 내가 조상섬기고 제사 지내고, 그걸 나쁘다는 자체는 그것 안 했으면 괜찮았다, 이런 이야기밖에 안 되잖아요.

죄가 있어줘야 이게 의의 재료가 돼요. 엄마가 잡채하려고 집에서 손 봐서 이것저것 잡채 재료가 오죽 많습니까. 그걸 잡채로 먹어야 되는데 부엌에 와서 재료 하나둘씩 미리 먹어버리면 어느 세월에 잡채를 만듭니까? 주께서 의를 위해서 죄를 지으라 했는데 죄를 가져와서 ‘내가 이것 잘못됐습니다, 회개합니다, 반성합니다’ 그러면 그거는 무죄가 되지요, 무죄가. 무죄는 통과하지 못해요.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천국에서 아예 받지를 않아요. 천국의 천사가 심사할 때 성령이 있으냐, 없느냐 그걸 봐요. 하나님이 주신 예수 안에서 의가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대신하여 빠지면 안 되지요)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의인 되는 게 아니고 우리라는 자아를 악마가 만든 자아가 재료가 되어서 거기서 뭘 구성한다? 하나님의 자기 의를 구성해버리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의가 여기 있네, 라고 하는 거예요. ‘너 훌륭했잖아.’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게 의가 되는 거예요.

그럼 나는 어디 있습니까, 하면 나는 예수 안의 나가 따로 돼 있지요. 예수 안의 나. 영광된 부활을 지칭하는 나는 따로 있어요. 흙에 속한 자아는 마귀가 만든 거고요. 예수님의 영광된 육신, 부활의 육신으로 만든 그 안의 나는 이거는 주님이 만드신 거예요. 나가 없는 게 아니고 나가 있는데 환경에 따라서 다른 나로 불러지는 겁니다. 이걸 이름이라 하는 거예요.

이름은 분류작업에 그래요. 시편 50편에 마지막에 악인이 하나님께서 제사도 내가 드리고, 제물도 내 것이고 하면서 내 것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따로 만들면서 비로소 그때 등장하는 게 있어요. 그전에는 없어요. 그전에는 인간 내 위주의 악인이 있을 뿐이지 진짜 악인은 없었는데 악인이 등장합니다. 이 악인은 등장하면서 이름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의인 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자기 이름에 대해서 계속 꽂혀서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 이름은 뭐냐? 이름은 소유를 말합니다. 내 이름이 있다는 말은, 내 육신이 내 이름으로 한다는 말은 내가 살인한다는 말은 이 육신은 내 것이다, 내 것. 그러면 내게 이름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내게 이름이 있다는 말은 세상을 둘로 나눈다는 거예요.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으로 나누는 거예요. 왜? 여기 내 것에 내 이름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 이름을 포기를 못하게 되면 내 이름을 위한 우주가 있어요.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일은 내 우주 만드는데 평생을 거기다 다 몸을 바치는 거예요. 물론 내 우주 안에는 내 자식들, 남의 자식 아니라 내 자식 잘되길 바라는 것, 내 가족 잘되길 바라는 것. 이게 내 것이거든요. 내 가족, 내 자식, 내 남편, 아내 내 것이잖아요. 내 것에 우주가 있고요.

그러면 나머지는 내 것 아닌 것의 전부에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인간이 만든 게임에서 전쟁이 벌어지지요, 배후에서 악마가. 남의 것을 와서 무엇을 확장한다? 내 것의 외연, 바깥의 범주를 확장하는 데 악마가 시키는 대로 우리는 모든 정력을 거기다 투자를 하는 겁니다. 이거는 육신의 힘이 소모될 때까지 이런 짓을 하고 있어요.

이 이야기 듣고 나는 안 해야지, 하면 안 돼요. 우리가 해야 될 일이에요, 이게. 실컷 강의 다 듣고 ‘예. 저는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이건 영광을 가립니다.’ 언제는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까? 우리가 이것밖에 안 하는데 이것을 주께서 없애주거든요. 지금 우리 소원은 육신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아직까지 우리의 역할이 남아있기 때문에 죄 질 일이 남아있기 때문에 계속 살려주시는 거예요.

‘니가 죄 맛을 알아? 더 살아, 인간아.’ 더 살아서 진짜 내 모습은 죄 덩어리 외에는 내가 아닌 것을 이제 죽을 때까지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럼 치매 걸리면 어떻게 돼요? 치매 걸리면 본색이 괴물 나오는 거죠. 괴물 나와서 자기의 과거 이야기만…. 맨날 술 먹는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나 말이야, 맨 자기 과거 이야기하잖아요.

내 것, 이 전체를 바로 가인의 공간이에요. 이게 언약이 없는, 그러니까 주의 이름의 공간이 아니에요. 악마의 이름이죠. 악마의 이름은 없어요. 내 이름이 악마의 이름이에요. 왜? 악마가 나를 신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악마의 이름을 대체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 오신다고 이름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인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이름은 주의 이름이 돼요. 이 땅에서 그냥 인자지요. 그러나 부활하고 난 뒤에는 우리 주님이 되시는 겁니다. 우리 여호와가 되시는 거예요. 주님이 되시는 거예요. 그전에도 주님이지만 주님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시는 거예요. 그 일을 위해서 포도나무를 이제는 내 피가 묻은 포도나무를 완성을 했잖아요.

그러면 남아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주께서 쉬지 않고, 아까 뭐라 표현했더라? 멈추지 않고, 이게 참 좋네요.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자기 일에 열중했지요. 두 번째는 거기에서 뭐냐? 백성을 일방적으로 모집했지요. ‘네 제사, 제물 필요 없어. 내가 찾아갈 거야.’ 왜냐하면 내가 제사장이고, 내가 제물로 율법을 이뤄서 너는 거저 구원받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백성이 모집되지요. 모집이 모집책으로 변화시켜요. 모집책으로 변화하면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모집했기 때문에 모집책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내 이름이 뭐로 바뀌느냐? 주의 이름으로 살게 되는 거예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바뀌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나의 추억, 기억, 죄 짓는 모든 것이 뭐가 되느냐? 내가 죄 지었다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죄가 나오게 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참 이거는 뻔뻔한 건지, 얼굴 두꺼운 건지, 하다하다 극단이네. 해석을 완전히 거기까지 꽂히나? 뭐 이런 식으로 너무 과하고 심한 게 아니냐. 너 그렇게 이야기하면 죄인들이 죄 지으면 어떻게 해, 이러거든요.

그 말 들으면 기분 나빠요. 원래부터 죄 짓고 있었는데 마치 주님 때문에 죄 지었다고 핑계될 거리를 찾은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가룟 유다한테 감사하세요. 너는 너 할 일해라, 이 말이죠. 죄의 마지막은 예수님 팔아먹으면서 인간의 이름에서 무슨 이름을 지우는 겁니까? 주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 악마가 가장 노리는 거예요.

노릴 때 뭘 하느냐? 어제 오전에 했지만 모든 성경말씀은 뭐다? 거짓말이다. 신앙생활 교회 장로 오십 년 다니고 목사 백날해도 나중에 머리맡에 베개 베고 자면서 이게 거짓말 아닌가? 이게 거짓말일 수 있잖아, 거짓말일 수 있다고. 내가 괜히 성경말씀에 주눅 들면서까지 내가 조마조마하면서 인생을 살 필요 없잖아. 남 봐. 성경 모르고 교회 안 다니고 절에 가도 잘만 살고 자식 다 풀렸잖아. 내가 안 해도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굳이 안 해도 되는데 대대로 3대째 기독교 집안해서 세뇌 당해서 지금 엉뚱한 할 필요도 없는 선택과목을 필수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는지.

본인이 그렇게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마지막 다 온 거예요. 바닥 긁었어. 마지막 그거에요. 드디어 악마와 마지막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친 거예요. 악마의 모습으로 드러난 순간이에요. 중요한 것은 그때 성령님의 역할이죠. 네가 바닥을 쳐야 십자가 앞에서 네가 강도가 되는 거예요. 강도의 자리가 내 자리였던 겁니다.

지금껏 내가 강도된 것은 누구의 은혜다? 내가 강도된 것은, 잡혀서 사형된 것은 주님의 복입니다. 내가 사형 당한 것이 주의 복입니다. 이게 사람의 말이 아니에요. 성령의 능력이에요. 예수님 죄인으로 죽었지요, 사형 당했지요. 사도 바울 그 죽은 예수 전한다고 로마에서 사형 당했지요.

이게 얼마나 성도로서 이 땅이 아름다운 wonderful world 살만한 세상입니까? 얼마나 좋은 세상을 마련해준 거예요. 자기 힘으로 못 죽는 세계를 아벨처럼 악마의 종에 의해서 죽게 하고, 그 가인의 모습과 아벨의 모습을 양면성을 이중성을 이 육신을 통해서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을 태어나게 하면서 껍데기는 우리의 육신이었던 겁니다. 사나죽으나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주의 증인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았습니다. 마귀에게 속고 살아왔는데 그게 진실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주님의 전략인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모든 일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하고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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