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재물의 효능

아빠와 함께 2024. 2. 22. 08:30

20240220a 부산강의 : [시편]65(49:12)-재물의 효능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49편 할 차례입니다.

“만민들아” 만민이라 하는 것은 말씀이 모든 인간들에게 해당되겠지요. “세상의 거민들아” 마찬가지입니다. 다 해당됩니다.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찌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 하면 5절, 6절을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죄악이 나를 둘러 포위를 해서 꼼짝 마라, 하는 그때에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환란, 와! 와! 핍박, 오라는 거예요. 환란과 핍박을 피해서 도망하는 게 아니에요. 내 안에 있는 진리가 바깥에도 진리답게 작용해요. 복음을 안다는 사람이 나는 진리를 안다는 사람이 바깥세상에는 내 안에 들은 진리가 작용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하고 있어요. 그건 진리 없으니까 나는 도망쳐서 복음 안에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거는 진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무탈하기를, 진리 덕분에 내가 편안히 살기를 원하는 꼼수 같은, 인생에 꼼수 같은 겁니다.

진리가 내 안에도 진리라면 내 바깥에도 진리이겠어요, 아니겠어요? 진리겠지요. 천국에서 진리라면 지옥에도 뭡니까? 진리가 되는 거예요. 진리에 마음을 둬야 되는데 진리, 진리 언급하면 자기 편한 인생에다가 꽂혀서 어떻게 하면 요령껏 사는 것에 꽂히니까 진리 아는 나는 진리 모르는 더러운 세상에서 더럽힐 것 뭐 있나, 하고 나 혼자 몸 하나 피하면 되지, 하고 도망치는 인생을 살아요,

시편 49편 초반부터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하고 있지요. 인간의 심보를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심보는 도망칠 준비, 같은 말이죠. 내뺄 준비. 또 같은 말이에요. 도피할 준비. 이걸 다 압축해서 이야기하면 따로 나를 챙길 여지, 공간 마련에 열중. 도망칠 준비, 내뺄 준비, 도피할 준비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온다? 그러면 후딱 나를 다른 장소로 옮겨서 나라는 것을 곱게 보호할 아지트를 만드는 것을 염두에 두고 교회 다닙니다. 교회 다니고 말씀 공부하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환란 때여 오라가 아니라 ‘제발 환란, 나 좀 따라다니지 마라’ 이런 취지에요. 여러분들에게 해당 안 되겠지만, 안 됐으면 좋겠어요. 결국 이 전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일종의 비겁, 다른 말로 하면 자신감이 없다. 어떤 자신감? 하나님을 일관되게 의지할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자신감이 없으니까 이걸 신약에 와서 이야기하면, 신약에선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믿음이 없다.’

믿음이 없으니까 자꾸 뭐냐 하면, 믿음이 없으니까 진리가 없으니까 자꾸 진리 찾고 믿음 찾고 복음 찾는 거예요. 자신감이 없어요. 자신감이 없으니까 믿음, 소망, 사랑을 수입을 자꾸 하고 싶은 거예요. 매일같이. 코스트코 가서. 교회 가서 계속 믿음, 소망 말씀 가지고 잔뜩 담아서 집에 쟁여놓는 거예요. 왜? 믿음이 없으니까. 자기가 자기를 지킬 자신감이 없으니까.

결국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신종 뭐 같아요? 부적 같은 거예요. 예배는 뭐냐 하면 일종에 푸닥거리하는 것.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자기를 어떤 식으로 지킬 것인지 신경을 쓰니까 마귀가 이걸 모를 리가, 알지요. 동네 일곱 귀신 불러다가 투입을 명합니다. 아예 드론으로 더 나약한 모습을 보이니까 귀신같은 것 다 불러서 하는 거예요. 그럼 어쩔 줄 몰라서 성경공부 더 자주 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자신감이 없고, 결국 말씀 공부를 부적처럼 사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49편 5절에 보면 오라는 거예요. 와, 오라. 왜 그러냐 하면 진리는 내가 환란 피해서만 진리가 아니라 환란 속에 뭐가 드러나기 때문에? 환란과 더불어서 내가 골라잡은 진리가 아니고 진짜 참된 진리는 환란과 더불어서 오게 돼 있어. 환란 들어오면 누가 깨집니까? 내가 깨지지요. 그게 진리에요. 내가 깨지는 게 진리에요. 왜? 그 뒤에 나옵니다.

12절에 다 같이 시작.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내가 아담으로 말미암아 벌써 우리에게 전수된 마음은 짐승의 마음입니다. 그동안 이 짐승의 마음을 누가 그렇게 받아주고 위로하고 격려해 왔느냐 하면 진리가 아닌 마귀가 그 짓해 온 거예요. 잘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 ‘너 원래 착하잖아. 지금부터 예수 믿고 더 반듯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구원 보장해준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에 대해서 내가 나를 포기 못하도록 부추여주고 격려해줘 온 것이 마귀였어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반대로 나간 겁니다. 너 같은 인간은 환란 속에 들어가 봐야 진짜 네 모습이,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예레미야에도 나오니까(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정말 썩고, 썩고 더러운 것이 바로 너라는 사실, 이게 바로 영어로 하면 truth, 이게 진리에요.

그동안 우리가 헛살아 온 것은 썩은 것을 붙잡으려고, 썩은 것을 포장하고 위장하려 했고, 썩은 것을 못 놓는 것, 썩었음에도 불구에도 여기에다 기대와 희망을 걸고 살아온 것, 그러니까 이건 마귀는 좋아하고 뭐는 점점 멀어집니까? 진리와 복음은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시편 49편에서 어디로 이어지느냐 하면 환란과 6절과 연관시키는 데 요 연결고리를 제가 될 수 있는 한 자세히 설명해 줄게요. 왜 그러냐 하면 환란과 그다음에 나오는 6절,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한다, 라는 이 대목 있잖아요. 이 대목이 현재 오늘날 우리의 삶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대변해주고 있는가? 환란의 최후의 대처방법은 ①복음이다, ②돈이다. 몇 번이겠습니까? 바로 인간은 마음이 부패하고 짐승 같아서 처음에는 복음으로 말씀으로 교회 다니고 성령 받아 버틸 대로 버티지만 결국은 마지막에 믿을 것은 돈밖에 믿을 게 없는 겁니다. 돈이 마지막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니까 마음이 부패하고 돈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이 사실을 돈을 추구하고 돈만 의지하는 이 사실을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이걸 어디다가 집어넣느냐? 진리 범주에다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나 복음 알았으니까 돈으로부터 자유로워’ 이런 것, 어디서 거짓말하고 있어. 진짜 진리는 나를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돈, 돈밖에 없어요. 돈도 한국 돈 말고 딸라. 달러 아니면 금이든지.

인간의 마음이 짐승이고 썩었다, 부패했다 이런 말을 할 때 사람들은 어디 흉악한 나쁜 범죄자, 흉악범의 마음가짐, 교도소 가 있는 사람, 술 먹고 자기 마누라 개 패듯 패는 그런 것들만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자기를 고상하고 굉장히 고상하고, 고상하고 건전한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서 힘들여 교회 나왔기 때문에 이 고귀한 그동안 수십 년 동안 교회 다니면서 지켜왔던 바비 인형 같은 이 고운 마음을 내가 아무리 성경 말씀에 이걸 짐승 같다고? 나 인정 못하겠다.

내가 얼마나 나를 정화시킨다고나 할까요. 탈색, 또는 묵은 때를 제거하는 데 게으르지 않은 삶, 조금만 죄 지었으면 몇 배나 회개하면서 반짝반짝 빛나게 금을 연단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단련한 이것이 곧 짐승이란 모습에 우리는 얼른 동의하기 힘들지요. 그래서 인간은 적을 찾는 거예요. 나보다 못한 인간 발견해서 공격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누가 빛난다? 내 자신이 저보다 낫다는 데서 어떤 신앙생활의 힘을 동력을 거기서 뽑아내려는 심보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성경, 그런 것 일체 안 봐줍니다.

지금까지 한 것 다시 정리해봅시다. 인간은 도망친다, 피한다, 도피한다, 숨는다. 그리고 내가 혹시 환란에서 다칠 가능성 있을 때 내 영혼이 마음에 상처 있을 때 내 마음이 복음과 떨어져있다 싶으면 얼른 다른 곳에서 내 영혼을 맡기고 찾아가서 기어이 끝까지 내 영혼은 내가 책임지고 지키려는 심보, 그것 왜 그렇습니까?

나를 지키려는, 앞에 하나 붙이면 좋지요. 나를 건전하게 지키려는 심보, 평생 갑니다. 문제는 이게 나를 건전하게 지킬만한 가치가 있느냐를 누가 이야기했어요? 성령이 이야기했습니까? 이거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아요. 따라서 여기서 나오는 중요한 결론은 ‘나는 나를 모른다’에요. 하나님은 내가 아는 것보다 나를 더 많이 알고 있어요. 나는 나를 몰라요.

나를 모르지만 스타트, 개시 점은 뭐냐? 나는 건전하다. 이걸 개시 점으로 시작해서 교회를 다니든 복음을 듣든 그다음부터는 내가 나를 지키는 쪽이라면 그걸 찾아서 계속 찾아다니는 거예요.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나를 고상하게 지켜내기, 그것 딱 하나밖에 없어요. 당연히 진리 아닙니다. 그것을 신약에 와서는 이런 모습이 마귀적이란 걸 모르지요.

사도 바울은 이걸 뭐로 보느냐? 이걸 ‘저항’, 어떤 저항? 내부 저항. 무엇에 대한? 진리, 이미 확인된 십자가 복음의 진리에 대한 내부 저항이 꼭 이런 모습으로 그 최종의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누굴 만나도 속으로 이야기해요. ‘너 나보다 건전해? 너 나보다 더 순수해? 내가 더 순수해.’ 벌이나 받아라. 거기서 경쟁해서 상대적으로 더 순수하다는 데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으로 아직도 숨 쉬고 살만한 용기를 인간들은 갖고자 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정의는 살았고, 정의가 불의를 이길 때 세상은 아직도 살만하다고 하고 싶은 겁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보통 드라마 보면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 하지요. 선은 결국 이깁니다. 아무리 나를 학대해도 쓰레기 같은 남편, 쓰레기는 쓰레기와 결혼해야지. 너 내 남편과 결혼해. 나는 재벌3세와 결혼하고. 대리만족이죠. 바로 내 인생이 저리 됐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대리만족을 해줘야 드라마 시청률 올라가지요. 안 그러면 드라마 볼 이유가 없잖아요.

근데 여기서 연결고리에서 약간은 난해한 건 아닌데 복잡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어떻게 진리 대신 돈이냐? 진리 대신 돈이냐 하는 것을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한계효용의 법칙’ 인간의 욕망은 똑같은 물건을 골라도 첫 번째 물건, 두 번째 물건 할 때마다 그 구매욕망이 뚝뚝 떨어지게 돼 있어요. 하나를 구입할 때마다 뚝뚝 떨어지는 것, 그걸 ‘한계’라 해요. utility ‘효능’ 만족도가 떨어지게 돼 있어요.

예를 들면 어떤 가게에 콜라를 파는데 코카콜라 하나에 천 원이에요. 그런데 바로 옆에 콜라 두 병에 천 원. 같은 가게에요. 콜라 세 개에 천 원. 똑같은 천 원인데 하나, 둘, 셋. 셋을 사겠지요. 근데 조건이 붙어요. 조건은 뭐냐? 이 자리에서 다 먹고 가기. 콜라 하나가 주는 만족도가 100이라면 두 개는 20, 세 개면 마이너스 60 되지요. 이제는 억지로 먹기도 싫어. 120-60=60이니까 세 개 사면 60밖에 안 되고, 두 개 사면 120은 돼요. 하나는 100. 그러면 사람들은 어느 것을 사겠어요? 천 원 주고 두 개를 사는 거예요. 세 개 사면 앞의 콜라 먹는 기쁨까지 다 훼손돼요. 손실된다고요.

그러니까 이것이 심히 인간이 부패한 마음, 짐승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평소의 이런 자기 욕망의 만족도에서 분명하게 소비가 되고 생산 되는 이 경제 활동을 짐승 같은 세상이라고 누가 욕합니까? 욕할 수가 없어요. 자, 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세 병을 여기서 다 먹게 하지 말고 그냥 집에 가져가셔도 됩니다, 하면 사람들이 하나 사겠습니까, 둘 사겠습니까, 셋을 사겠습니까? 세 개 사겠지요. 집에 가서 하나 먹고 100, 그다음에 이틀 뒤에 먹으면 또 100, 그다음에 먹으면 또 100, 300 나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그 유명한 분산투자입니다. 하나에다 모든 돈을 투입하는 그 기쁨보다 하나가 투자됐을 때 손익을 계산해보면 약간 불안감을 다른 데다 투자하면 보충이 될 여지가 있으면 분산투자를 하는 거예요. 투자할 때도 분산투자지만 인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인생이 0살부터 100살까지 있다면 인생에서 젊을 때 돈 좀 번다고 차 몰고 까불지 말고 60부터 100세까지 수입이 없을 때 생각해서 지금 소비 같은 경우에 스스로 조절을 하는 거예요.

내가 60 이후에 직업이 없을 때 대비해서 100을 쓸 걸 60을 쓰면 여기도 동일하게 60내지는 50까지는 버틸 계산을 하잖아요. 이게 뭡니까? 이게 너무나 상식적인 이거는 인간치고 누구나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진짜 정신병자, 내가 나중에 돈 더 번다, 이렇게 미친 인간 말고 누구나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이렇게 하지요. 문제는 이게 바로 짐승 같은 생활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이 어려운 거예요. 우린 경제 활동 따로 하고, 교회 와서 말씀 들으면 되고, 또 집에 가서 경제 활동. 교회 오는 것도 착한 일, 경제 활동도 놀지 않고 열심히 했으니 착한 일, 내 만족도, 내 계산, 내 능력 계산해서 미래를 대비해서 지금 착실하게 힘들지만 돈 모은다는 게 세상에 하나님이 아니고 누구라도 이걸 나쁘다고 할 사람 없을 것이라고 착각들 하고 있어요.

여기서 이것이 마음이 부패하고 짐승 같은 인간이다. 성경에서 시편 49편이나 예레미야에서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계속 이야기할 때 결국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이런 식으로 요령 있고 합리적으로 경제 활동에서 인간이 스스로 그걸 포기할 수 있는 인간이 있습니까? 없지요. 바로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은 마음은 날 때부터 부패했기 때문에 성경에서 뭐래도 하나님이 뭐라 하든 알았습니다, 해놓고는 결국은 자기의 본색은 경제 활동을 통해서 재물 모으기를 통해서 모든 본심을 거기에 다 쏟아 붓게 돼 있어요, 인간은.

그래서 이거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다, 모른다? 몰라요. 이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지 내가 경제 활동에서 노력해서 밥 먹고 사는 것을 가지고 ‘너 누가 시키더냐?’ 누가 시킬 문제가 아니고 내가 우러나서 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자연스러운 것은 죄 아닙니까? 자연스러우면 그게 진리에요?

성경은 말합니다. 그 자연스러운 것이 내 속에 있는 부패한 마음, 짐승 같은 마음, 죄 있는 마음이 그게 자연스러움이 경제 활동이란 이름으로 흘러넘쳐 나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인은 없고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럼 그걸 왜 이야기하느냐? 사람들은 내 자연스러운 것은 나쁘지 않고 그냥 내 자연스러움을 가지고 새로운 하나님의 깊은 말씀 들으면 그 두 개를 합치면 이 내가 천국 갈 수 있다고 이렇게 우기는 겁니다.

그렇게 우기니까 환란이 오니까 어떻게 합니까? 환란이 올 때 내빼기 바쁜 거예요. 누구 챙기고? 자기 자신을 챙기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 내가 너 챙겨줄게.’ 여러분들이 이 문장을 꼭 필히 잊지 말아야 돼요. ‘내가 나의 어미다.’ 영원한 어미에요.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엄마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나의 엄마에요. 아무리 내가 못 됐고 무슨 짓을 해도 다독거려주는 것은 누구밖에 없다? 내 자신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 나를 내가 부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부정 못해요. 엄마를 부정해버리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데요?

이 엄마가 누구냐? 어릴 때는 누가 키워줘야 돼요. 갓난애가 경제 활동 못합니다. 경제 활동하는 엄마가 자식을 키우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나요. 반면에 동물들은 완숙된 상태로 나오지만 인간은 미숙한 채로 태어나요. 태어나서 계속해서 스무 살 될 때까지 두뇌가 완성되는 것이 의학에서는 28살, 25살 하고 있는데 그게 정확한 건 아니지만 하여튼 이십 대 돼야 두뇌가, 특히 생각하는 피질이 완성이 된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 여기서 엄마가 자식을 키워주잖아요. 엄마가 자식을 키울 때 개 키우듯이 키우지는 않아요. 밥 주고 사료 주고 키웠다고 하지 않습니다. 뭘 하느냐? 말을 해요. 약간 더 신경 쓰이지요. 어렵지요. 엄마의 말이 내 안에서 나의 주체가 됩니다. 인간은 몸이 있고 몸이 자라면 자아가 돼요. 자아는 나에요.

나에서 그다음에 뭐로 나가야 되느냐 하면 이게 주체가 돼야 돼요. 주체란 쉬운 말로 내가 나의 주인공이다. 내 몸이든지 내 머리카락 다 내 거란 거예요. 자아는 뭐냐? 나는 난데 이 정도밖에 아니라면, 주체는 적극적이에요. 그 나를 자아를 누가 케어해야 돼요? 내가 책임져야 돼. 주체. 그런데 이 주체 되면서 개입한 게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엄마로 표현된 부모의 언어가 자아 속에 들어오게 되면 여기 자아 안에 엄마의 욕망, 아빠의 욕망이 내 안에서 주체를 만들어내요.

커서는 엄마, 아빠한테 잔소리 안 듣지요. 잔소리 안 듣지만 주입된 것은 다 엄마, 아빠 것이에요. 그래서 가정교육을 철저히 받은 아이는 집에서만 아니라 어디 친척집이나 바깥에 가도 그냥 신 벗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신발 나란히 하고, 문 열고 턱 들어오는 게 아니고 뒤돌아서 문 닫고.

비 온다. 우산 쓰고 버스 탔다. 배운 집 아이들은 우산 펼친 채 있는 게 아니고 돌돌 말아서 빗방울이 다른 승객한테 튀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게 태어날 때부터 DNA가 그런 거예요. 얼마나 잔소리를 해댔겠습니까. ‘너는 너만 생각하면 안 돼.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 돼야 돼.’ 엄마가 그렇게 한다면 그 엄마는 누구한테 배웠겠어요? 자기 친정엄마한테 배웠겠지요. 이 주체.

그러니까 자아가 엄마의 욕망, 아빠의 잔소리 있으면 인간은 어떤 모습이냐 하면, 이게 마음이라면 마음을 엄마, 아빠가 늘 꼭 감싸 안은 쪽이에요.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 지시를 통해서 나오는 게 바로 사탄이 인간에게 준 게 나와요. 그게 무슨 체계겠어요? 선악체계. 네가 이렇게 하게 되면 너는 사람 보기에 착한 주체가 되고, 사람 보기에 착한 주체란 말은 그 다른 대타자, 다른 타인, 전능하신 하나님 보시기에도 너는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이 논리에 대해서 사람들은 의심을 할 수가 없어요. 왜? 요모조모 따져도 바른 소리, 바른 소리, 바른 소리의 연결로 된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 점이 뭔가 틀어졌다, 의심해야 된다, 라는 생각이 1도 아무것도 없어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나는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바른 사람이라고 밀어붙이지요.

이 주체로 말미암아 인간은 뭐냐 하면 자립형 인간으로 이제 사회에 나갑니다. 자아에서 엄마가 너는 착하고 너는 반듯한 사람이라고 나가야 되는데, 그래서 주체라 했지요. 나가야 되는데 엄마, 아빠는 내가 착하다 했는데 막상 사회에 나가니까 사회에서 기다리는 것은 뭐냐 하면 사회는 무슨 세계입니까? 누가 요령 있게 돈 많이 벌었느냐, 로 그 사람의 신용도를 결정하는 세상이거든요.

‘나 교회 다닙니다. 믿음 좋습니다.’ 이것 보고 은행 대출 안 해주지요. 당신 아파트 얼마짜리인데 이것 보고 대출 해주든지 하잖아요.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인격 자질 이런 것 고려하지 않고 현재 갖고 있는 소유 재물이 얼마냐에 따라 그 사람이 믿을 사람인지 못 믿을 사람인지 결정하는 게 사회입니다.

그런데 얘가 밖에 나갔다 엄마한테 도로 뛰어들어 와버렸어요. 왜? 나는 착한데 사회가 이 착한 나를 인정을 안 해줘버리네요. 여기서 뭡니까? 균열이 일어나요. 그러면 이 사실을 엄마, 아빠가 미리 간파하고 있지요. 그러면 제대로 된 가정에선 어떻게 됩니까? 바르게 살아라. 그다음에 결과가 뭐냐? 순진한 가정에선 바르게 사는 것이 그 인간의 최종 목적이었잖아요.

그러나 현실적인 가정에선 뭐냐 하면 바르게 살아라.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줘서 너로 하여금 부자 되게 해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바르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부자 되는 그것이 행복이며 거기에 수단으로 바르게 사는 거죠. 그럼 여기서 이 둘 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엄마의 욕망, 아빠의 욕망이 주체가 돼버리면 얘 가정으로 도로 튀어들어 오는 게 아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뭐만 벌면 돼요? 돈만 벌면 엄마, 아빠뿐만 아니라 형제들도 나를 사람 취급해준다는 드디어 사회 사람이 돼요. 사회에 훌륭한 신용 있는 사회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빠른 시간에 인정받기 위해서 욕망이 오버했어요. 욕망이 너무 과해서 속도를 너무 내서 사업 벌이다가 망했습니다. 망했을 때 얘가 가정으로 들어올까요, 교회로 들어올까요? 어떻습니까? 일단 교회 들어오고 그다음에 가정 들어오죠. ‘아빠 대출 좀 해줘’ 그건 나중 문제고, 일단은 신이시여 내 인생을 어떻게 전능하신, 전능해야 돼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인생 좀 여전처럼 만회해달라고. 남들이 그동안 나를 사람으로 인정해준 수준만큼 높여달라고 교회 와서 기도하겠지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이게 이 세상 교회에요. 선악체제에요.

인간은 처음부터 범죄인이었다는 것을 어느 인간도 동의 안 하려 해요. 저항이 있어요. 선악체계만큼 이것마저 버린다면 나는 진짜 짐승 같은 인간이 되는 게 싫다는 거예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 이 자체마저 버리면 허하다는 거예요. 이것으로 내가 자아를 구성하고 주체를 구성했는데 선악체제 말고 이것 다 바닥나고 날아가 버리면 도대체 내가 나를 구축한 기초 자체가 날아가 버려서 내가 나답지 않은 허망한 또는 허무한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무섭다는 거예요.

성경은 바로 뭘 하느냐 하면 환란이라는 것이 내가 스스로 버릴 수 없는 선악체제를 환란이 와서 그것까지 깨버리는 거예요. 창호지, 우리나라 한지로 만든 창호지는 굉장히 얇아요. 손가락에 침 발라 누르면 구멍 납니다. 대구강의에도 언급했는데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있다면, 인간이라 하지 말고 자아, 사회에 나가면 주체, 주체란 쉬운 말로 내가 주인공이다. 내 인생에 내가 주인공이에요. 내 책임자가 나란 말이죠. 어른 됐는데 뭐 누구 때문에 그러지 말고 책임자가 나란 말이죠. 죽든 말든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나가고 가꾸어나가는 책임자란 말이죠. 책임자인데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안 되거든요. 이 말 자체도 잘못된 거예요.

세상 일이 왜 내 마음대로 돼야 돼요? 인간은 도대체 이유 같은 것은 완전히 없고요 무조건 내가 잘 돼야 돼요. 그것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그게 욕망입니다. 욕망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게 욕망이에요. 내가 욕망을 다스리는 게 아니에요. 욕망이 나를 통치하고 있어요. 충동, 욕망이 정신없이 나를 몰아세우고 있어요. 그러니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붕 떠있어요.

그래서 자아와 주체 사이를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라면, 깊이 상세한 건 아니지만 자아가 주체로 나아갈 때 여기서 환상을 만듭니다. 엄마, 기다려봐. ‘내가 사회에 나가서 이 정도 돈 벌어 엄마 호강시켜줄게.’ 이게 뭐예요? 사회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노력하면 되겠지.’ 노력하면 되겠지, 가정법 ~if지요. 뭐하면 뭐 되겠지, 환상입니다.

이러면 여러분들 불만이 있을 거예요. 그러면 인생 그것마저 환상이라면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는데, 이렇게 저한테 달려들고 싶을 거예요. 인생은 우연으로 살아요. 우연의 마주침으로 살아요. 사업을 하던 뭘 하든 간에 노력한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일본 표준말로 아다리라 합니다. 아다리 된 거예요. 행운입니다. 행운은 우연일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헛된 말이 있잖아요. 인생에 기회가 세 번 온다고. 그중에 하나 잡으면 된다고. 한 순간에 붕 뜨는 수가 있단 말이죠. 사업 망해서 짜증나서 술 먹고 나이트클럽에서 블루스 추다가 남자 만나서 잘 됐다, 이런 것. 인생은 어떻다? 한 방에 훅 갈 수 있지만 한 방 붕 뜰 수가 있어요. 우연히 남자 잘 만나서 신입사원이 커피 들고 가다고 재벌3세와 마주쳐서 그 회사 인수하는 것 있잖아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마주침이에요. 어떤 변수가 와서 마주칠지 몰라요. 사거리 교통량이 심한데 갈 때에 차를 타고 가든지 걷든지 어떤 차가 이쪽에서 박을지 모르는데 받히면 방향이 바뀌지요. 그게 내 인생이에요, 지금까지. 이래 받혀서 저리 튕기고, 저리 튕겼는데 받히고. 이게 바로 내 인생이란 겁니다. 거기서 무슨 규칙이 있고 질서가 있어요. 인간은 확률적이고 우연적 존재에요. 필연적 존재가 아니고. 그러면 환상은 뭐냐? 환상은 자꾸 나를 필연적 법칙을 세워서 이 법칙의 마지막 골인 지점은 내가 남보다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을 늘 꿈꾸고 있어요. 환타지, 우리말로 하면 꿈이죠.

 

노래 가사를 하나 또 챙겨왔어요.


<꿈에>(조덕배)

꿈에 어제 꿈에 보았던
이름 모를 너를 나는 못 잊어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지난 꿈 스쳐간 여인이여
이 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바로 그 모습
떠오르는 모습 잊었었던 사랑
어느 해 만났던 여인이여
어느 가을 만났던 사랑이여
난 눈을 뜨면 꿈에서 깰까 봐
난 눈 못 뜨고 그대를 보네
물거품처럼 깨져버린 내 꿈이여
오늘밤에 그대여 와요


그러니까 늘 인간은 환상 속에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앞은 시시한 거고 중요한 것은, ‘물거품처럼 깨져버린 내 꿈이여’ 이겁니다. 물거품처럼 깨져버린 내 꿈이니까 그걸 다시 보기 위해서 ‘오늘밤에 그대여 와요’ 눈을 뜨면 사라진 사람, 하지만 꿈꾸면 나타나는 사람, 이게 인생이에요.

인생이 꿈을 꾸는 게 아니고 인생 자체가 꿈이에요. 이 자아가, 주체가 꿈이에요. 근데 인간은 몸은 꿈은 아니지만 몸에서 피어나는 자아와 주체는 꿈같은 겁니다. 허망한 거예요. 그 허망이 뭐로 채워져 있다? 나를 내 몸을 내가 지키는 식으로 채워져 있으니까 이 꿈의 내용은 돈이에요. 돈이라고요. 경제활동이에요. 굉장히 건전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고 하나님 아니라 누가 와도 그건 나쁘다 못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경제활동.

근데 방금 뭐라 했습니까? 그 경제활동조차도 뭐였다? 우연이다, 우연. 그냥 마주침이고 부딪침이에요. 당구공 같아요. 참 이십 대에 눈이 삐었지. 뭐 저런 남자를 만나서. 지금 다시 이십 대로 가보세요. 맨 그 남자 선택하게 돼 있어요. 내가 다른 남자 만났으면 이 고생 안 하지. 그런데 다시 그때로 돌아가 보세요. 그때는 선택지가 그것밖에 안 돼요. 왜? 내 결정은 나의 결정이 아니고 환상이 환상을 선택하는 식으로 인생이 꾸려져 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 인생 전체가 꿈같아요. 자욱한 안개 같습니다. 야고보서 4장에 있는 말씀. 나 홀로 걸어가는 자욱한 안개 같은 것. 그러니까 안개 같은 게 슬프다든지 허망하다가 아니라 그게 바로 진리라는 거예요. 그게 진리였어요. 그러니까 진리를 누가 방해했어요. 내 환상이 방해한 겁니다.

이제 환상은 어디서 오는가? 환상은 언어에서 와요. 언어는 뭐냐? 기존에 있는 의미체계입니다. 이 세상에 의미가 없는데 꿈인데 마귀는 인간에게 이 세상이 의미가 있다고 온갖 의미를 다 집어넣게 돼요. 한국의 축구팀은 4강에 떨어지면 안 되고, 의미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비트코인 있으면 오만 원 이상 올라가야 되고, 투자했으니까. 내가 투자한 영풍제지는 막 올라가야 돼요. 그게 세상에 주가조작의 대상이 되고 폭락할 줄은…….

이 모든 것은 홍콩ELS(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 망했어요, 망했어. 홍콩 펀드 망할 줄 누가 알았어요? 시진핑도 몰랐어요. 아무도 몰랐어요. 왜? 우연이니까. 그럼 올랐다 칩시다. 그래서 갑자기 열 배 올라서 우린 또 요령 부린다고 아까 분산투자했지요. ‘투자 계산하면 안 돼. 땅 사야 돼.’ 땅 샀는데 땅 값이 내려갔다. 어떻게 할 거예요? 안 되겠지요.

그런데 의미체제 전체가 부동산 하락이에요. 안 판다, 안 판다 했는데 계속 의미체제 전체가 내려갈 때는 팔자. ‘대출이자 안 나온다 팔자.’ 이건 내가 선택한 거예요, 의미체계가 나한테 강용한 인생입니까? 강요했지요. 사람이 어리석은 것이 자기 자신의 단편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 자기중심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남은 허망해도 누구는 진실하다? 나는 나한테 이게 꿈이 아니고 실제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실제조차 진리를 방해하고 저항하는 데서 실제지 진짜 진리는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진리를 방해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이게 신약에 오면 누굴 방해하는 겁니까? 나의 중심이 예수님 중심을 방해하고 있어요. 비 진리로 작동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이걸 가지고 수상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이 사실을 왜 이제야 알았지 좀 진즉에 알았으면, 하고 그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돼요. 그러면 진즉에 알면 나한테 이익 되는 건 뭐냐? 다시는 뭐가 안 돼요? 다시는 도피하거나 숨거나 도망치는 게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49편 5절에 환란이 나를 어떻게 한다? 나를 에워싸는 거예요. 환란 없는 곳으로 도망할 수 있는 인간 입장이 아닙니다. 환란이 올 때 다만 우리는 그 환란 안에서 어떠한 대처를 하느냐? 그다음에 6절에 나오는 게 뭐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거예요. 부자만 그런 게 아니고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인간이 결국 자기가 진리가 아닌 티를 내는 것이 내 돈 가지고 그야말로 밥 먹고 살자, 라는 식으로 그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것을 성경은 시편 49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1강의 결론은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모든 것은 말씀대로 돌아간다. 시편 49편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요. 네가 아무리 건전한 척해도 돈 없을 때 보자. 돈 없을 때도 건전한지 보자. 먹을 것 없을 때 건전한지 보자.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탄에 시험받을 때 성령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쫄쫄 굶겨놓고 만나게 했어요. 거의 죽은 자로 만나게 해줬어요.

그렇다면 10분 쉬고 두 번째 하겠는데, 두 번째 시간에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부자라는 것, 재물이라는 것 그 자체가 과연 나쁜 것일까? 약간의 희망 같은 것?? 진정 그게 그렇게 나쁘단 말이냐, 이런 것. 과연 그럴까? 10분 뒤에 봅시다

 

 

20240220b 부산강의 : [시편]65(49:12)-재물의 효능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49편 8절에 보면,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생명이 어느 수준이냐 하면 목숨 연명 수준, 생존 수준이 아니고 생명 수준은 어느 정도 돼야 되느냐 하면 시체가 되어 무덤에 있어도 되살려내야 제대로 목숨이 아니고 생명을 건졌다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돈은 재물은 그게 실패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많은 돈이 있더라도 이미 죽어버린 자를 다시 부활시킬 능력은 돈은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필히 생명이 되려면 어디 가야 된다? 죽어야 마땅하고요, 무덤에 가야 마땅하고. 무덤에 왜 가야 되느냐? 무덤에 가서 평소에 인간은 자기의 환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돈을 모았잖아요.

그 돈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자기 영향력을 끼친다고 자부했는데 돈이 있어도 죽어버렸을 때 죽은 자를 살아 있을 때 그렇데 유세 떨던 그 돈이 죽은 자를 부활할 수 있느냐 말이죠. 안 되지요. 그러면 돈은 진리다, 진리 아니었었다? 진리 아니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죽여 버립니다.

인간이 환란을 통해서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 일에 실패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 일의 실패, 말씀의 실패 아니라면 우리는 내가 죽는 것을 내 인생의 실패로 여겨야 돼요, 말아야 돼요? 죽는 게 실패가 아닙니다. 죽는 것을 실패로 간주하는 것은 누가 일하느냐? 마귀가 그렇게 우리한테 겁박을 주고 협박을 주고 난리도 아니지요.

이거는 부모의 고상한 윤리도덕이고 교훈도 소용없어요. ‘너는 무조건 밥 먹고 살아야 돼.’ 엄마 교훈이 그거잖아요. ‘너 어쨌든 간에 죽어도 괜찮다.’ 이런 교훈을 자식한테 한 사람 있어요, 없어요? ‘죽어도 괜찮아. 주께서 부활해줄 거야.’ 그걸 평소에 설날에 덕담하신 분 손들어보세요. 이걸 덕담한 사람 있어요. ‘올해는 그냥 죽자. 우리 올해는 같이 죽자. 새해 덕담이다.’ 시편 49편이 담기지 않은 덕담을 한 거예요.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시편 49편 8절의 말씀이 담기지 않은 것.

12절 아까도 봤지만 다시 보면,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인간이 아무리 존귀해도 마지막 꼬리부분 딱 잡는 것은 죽음이 인간의 모든 존귀함을 무시하게 만들고 소용없게 만들었어요. 인간의 죽음이. 장구치 못함이여, 오래 살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도 그냥 짐승이 아니고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게 뭐가 있느냐.

14절에 보면,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성경 말씀에 빈틈이 없습니다. 자꾸 살아 있는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너 죽을 거야. 너 죽는 인간이야’ 죽는 인간에 대해서 인간은 죽는다는 걸 전제로 해서 말씀이 찾아오지요. 그래서 ‘난 말씀 알았어. 이제는 말씀이 뭔 뜻인지 알았어.’ 확정된 조건은 어떤 조건입니까? 내가 멸망하는 죽을 수밖에 없는 그것도 인간이 아니고 짐승 같을 때 비로소 말씀의 내용이 눈에 확 들어오는 거죠.

나를 지적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진리로 다가오는 모습이 이 모습이구나.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말씀을 줘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말씀이 아예 육신이 돼버립니다. 육신 돼도 못 알아들어요. 그러니까 마지막에 뭐냐? 죽는 육신, 말씀대로 죽은 육신, ‘다 이루었다’의 모습이 바로 십자가에 그것도 누구한테 맞아죽습니까? 인간들, 그것도 하나님 믿는다는 인간들에게 맞아죽는 최후의 모습이 가장 진솔 된 말씀의 진리성이 진실성이 십자가 죽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잘난 체하던 제자들 그렇게 잘난 체하고 대단한 척해도 십자가 사건의 현장에 아무도 없고 도망치기 바빴고, 나중에 여자 제자들이 예수님 시체 잘 있는가 싶어서 그때 찾아오지요.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의 한계성이에요.

13절에 보면,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 14절 끝에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뭐 됩니까? 음부에서 소멸돼버려요. 세상에서 타인과 잘난 체하는 것.

아까 강의를 약간 해보면, 이 세상이 의미체계라 했지요. 복습입니다. 의미체계가 어디서 나왔다? 선악체계에서 나왔다. 죽어도 못 버려요. 왜? 자기 자신이 선악 중에서 악에 속하지 않고 선에 속하려면 내가 선하다는 것을 증거해야 되니까 이 선악체계가 인간의 본심에 박혀있는 겁니다. ‘이래서 나는 욕 안 얻어먹어도 돼. 이래서 나는 아미 죽으면 천국 갈 거야.’ 이 선악체계.

그러면 인간들이 예수 믿는 것은 어디 속합니까? 악합니까, 선합니까? 예수 믿는 것을 선하게 여기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구원한다는 걸 믿는 착한 나를 구원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수백 번 이야기해도 들을 때마다 진짜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이왕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 더 어렵게 하자.

발화 내용과 발화 행위내용이 같지 않다는 겁니다. 말을 내뱉는 걸 발화라 합니다. 말하는 내용과 말하는 행위내용이 다르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나는 지금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라고 어떤 말을 하게 되면 이게 모순되지요. 나는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발화 내용의 난데 내가 이야기해. ‘내가 거짓말합니다’ 한 그 말은 이쪽의 발화 행위내용에서는 거짓말쟁이가 아니고 착한 사람이 겸손한 사람으로 비추지요.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이래도 저래도 이 모든 발화 내용이나 발화 행위내용이나 지금 나는 아직 안 죽었다는 걸 증명하는 거예요. 살아 있으니까 말하잖아요. 살아 있으니까 말하고 살아 있어서 말하는 그것이 결국은 모든 것에 모순될 수밖에 없는 한계 속에 인간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천 번을 이야기해도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줍니다. 왜?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발언이 나왔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진짜로, 찐찐찐 진짜로 믿습니다.’ 백날 해봤자 그건 전제가 뭡니까? 나는 안 죽었어. 왜?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할 정도로 나는 살아 있단 말이야.’ 이걸 자기가 스스로 부정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떤 말을 해도 그것을 하나님께선 안 받아줍니다. 그래서 성경에선 뭐냐 하면 마태복음 10장 20절, 이 말씀도 정말 모순되지요. “말하는 이는 네가 아니고 네 속의 성령이니라.”

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네 속의 성령이 말한다. 근데 그것을 받아 챙길 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거야. 그렇지 앞으로 이 이야기해야지.’ 그 이야기하면 안 돼요. 왜? 그 이야기를 하려면 말씀이 그렇게 되려면 내 전제가 뭐냐?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 조건 하에 그 말이 유효한 거예요. 하나님이 받아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 둘을 합쳐본다고요. 내 속에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성령인데 이거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내 말이 내 말이 아니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누가? 내가. 그 마지막에 ‘내가’ 들어가서 문제된 거예요.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게 뭐냐 하면 의미 세계, 의미체계에 자기가 보태는 거예요. 자기가 끼어드는 거예요. 의미체제는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나는 악하지 않고 뭐다? 나는 선한 쪽에 속했다는 선악체계가 계속 유효하게 가동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람은 말에 있는 게 아니고 행위에 있다고. 행함이 아니고 행위에 있는 거예요. 그 사람에 삐져나오는 어떤 행위에 있다. 그 행위를 성경에선 자기를 부정하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자기를 부인하라.

자, 그렇다면 구약 때 인간은 재물을 의지하는 것이 본성에 해당되기 때문에 고칠 순 없고 중요한 것은 이 재물이 어떤 식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를 가로막게 했는가에 관한 말씀들이 특히 잠언에 많이 나옵니다. 여기서 잠언서 봅시다. 열댓 개 찾을 거예요. 그냥 들으시면 됩니다.

잠언 18장 23절,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제가 물어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부자 되길 원합니까, 가난한 자 되길 원합니까? (부자) 왜 부자 되길 원합니까? 지시할 수 있기 때문에, 명령하기 때문에. 비굴하게 구질구질하게 인생 안 사는 자식을 어미인 내가 보고 싶고, 아빠인 내가 보고 싶은 거예요.

“우리 집안에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은 내 타입이 아니야. 너는 어디 가도 당당해야 돼.” “엄마, 어떻게 하면 당당해?” “돈을 벌면 돼. 이게 세상이야.” 그게 세상이에요. 그러니까 잠언 18장 23절에 나오잖아요. 그게 세상이니까. 이걸 굳이 잠언 찾아서 몇 절에 있는가가 아니라 이건 우리 본성으로 어릴 때부터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세상 살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렇게 돼요. 이게 세상이에요.

왜 조선시대 때 상놈이 양반한테 빌빌거렸습니까? 토지를 10~20퍼센트의 양반들이 갖고 있었고 상놈은 거기 빌어먹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 빌어먹는가? 양반들만 언어체계, 의미체계를 갖고 있어요. 양반들만 글을 보고 읽을 수 있어요. 상놈들은 자기의 가치를 지닌 언어를 알려면 누구한테 가야 돼요? ‘대감님, 이게 무슨 뜻입니까?’ 글자를 모른다는 것은 그 시대의 의미체계에서 소외된 거예요. 배제된 거예요. 사람도 아니에요.

그러면 조선시대 때 80~90퍼센트 상놈들에게 왜 글을 안 가르쳐줬는가? 조선시대는 사대부의 세계기 때문에 그래요. <경국대전>인가에 나와요. 사대부의 세계. 왕도 꽃잎에다 차타서 죽여 버려요. 왜? 사대부의 세계기 때문에. <밤에 피는 꽃> 마지막 회에 나온 대사에요. 좌의정이 마지막 한 말이 뭐냐?

그러니까 조선시대는 나름대로 민주주의인데 그 민주주의가 언어를 아는 자들의 민주주의에요. 그게 유교사상입니다. 왕 중심이 아니고 사대부의 세계에요. 경국대전에 정도전이 그걸 헌법처럼 만들어놓은 거예요. 일종의 의회, 유대인 같으면 회당주의. 71명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제사장 중심으로 유대나라가 돌아가는 거예요. 왜? 언어를 아니까. 하나님의 율법해석을 그들이 장악하고 있으니까요. 일종의 노회지요. 토지를 갖고 있으니까 돈이 그들에게 있으니까 돈 힘으로 하는 거예요.

잠언 22장 7절,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여러분, 부자가 부자 되는 방법은 뭐냐? 언어체계, 의미체계, 지식체계를 독점하면 부자 됩니다. 그 정보에 가까이 접근한 사람은 부자 되고, 돈 되는 정보에서 멀어져버리면 육체노동으로 그저 하루 먹고 하루 살 것만 챙기는 거예요. 잉여 재산이 추가되질 않습니다.

옛날 농경시대의 국가는 제일 되는 업무가 치수, 물을 다스려야 되고 해야 달을 다스려서 제 때에 농사지을 때 씨 뿌리고 거두고 하는 그것을 천문학적인 지식 정보에 가까이 접근해야 돼요. 그들을 관리로 채용해서 그 관리가 백성들에게 관개사업이라든지 이런데 동원시켜서 물 관리부터 수산관리 잘해줘야 농사 수확이 크게 증산돼요.

그러면 그 관리를 차지한 사람은 수학, 천문학 이런 걸 기본적으로 알아야 되고요.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행정, 경리 이런 것 다 알아야 돼요. 그게 뭐로 구성돼 있습니까? 문자로 돼 있잖아요. 그 문자로 돼 있으면 그걸 굳히면 법, 율법이 돼요. 그러면 나라 행정에서 뭔가 바꾼다 할 때는 정보를 누가 압니까? 상놈들은 몰라요. 양반들끼리 알아요. 따라서 알기 때문에 뭔가 바꿀 때 거기서 엄청난 이익이 올 것 아닙니까. 그 이익은 누가 독점해요? 법을 아는 사람이 독점하는 거예요. 세상 그렇게 돌아가는 거예요.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너 착하냐고 묻는 게 아니고 너 뭐 할 줄 아는데? 이 언어체계 작동하는 데 네가 거기에 그런 기능을 갖고 있는지 묻는 겁니다. 해외경제활동 몇 가지 언어를 했는가, 인공지능 할 줄 아는가, 컴퓨터 얼마나 다루는가? 그것 다 할 줄 알아야 월급이 많아요. 안 그러면 새우 잡이나 염전에 가서 밀고 해야 된다고요.

제일 힘든 작업이 새우 잡이와 염전 미는 거거든요. 그 많은 이만 가지의 직업 중에서도. 새우 잡이는 균형이 맞춰야, 고기잡이 너무 힘들어요. 요새 건설도 뭐 배워야 알아야 단가가 높아요. 시급이 높다고요. 그게 세상이에요. 그러니까 부자가 가난한 자를 주관하지 않을 수 없어요. 나라꼴이 안 돌아가니까요. 돈이 나쁘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돈이 왜 나빠요.

잠언 28장 11절,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겨도 명철한 가난한 자는 그를 살펴 아느니라” 제가 아까 첫째 강의에 뭐라 했습니까? 그렇게 똑똑해도 부자 왜 못 되는데? 운빨이죠. 줄을 서시오, 했는데 줄을 잘못 섰어. 이 총선에. 국민의 힘에 서야 될 걸 이준석에 서는 경우. 이재명에 설 것을 이낙연에 서버리면 이건 자칫하면, 그게 된다면 말이 아니고 저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다 똑똑해요. 그런데 줄을 잘못 선 거예요.

사십 대 국회의원 되려하는데 그 부모는 팔십 대다. 나중에 떨어지면 부모가 자식한테 얼마나 닦달 내겠습니까. ‘내가 뭐라 하드나. 국민의 힘 공천 받으라 안 했나.’ 부산에서, 대구에서. 이준석 하지 말고, 뭐 이런 식으로. 나라를 개혁해야. 나라 개혁 같은 소리하고 있네. 개혁은 돈이……. 그게 우리가 놓여있는 세상입니다. 가난하지만 똑똑한 사람은 부자가 운발인 것을 안다 이 말이죠. 성경 말씀에.

그런데 성경에 보면 잠언 23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이런 말씀이 골치 아픈 거예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찌어다” 어쩌라고요? 뭐냐 하면,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5절) 이 말씀을 보고도 우리는 허무하든 날아가든 일단 부자는 되고 싶은 거예요. 그게 우리의 심보에요.

거기에서 말씀에 대해서 우리 안에 뭐가 있다? 저항 세력이 있는 거예요. 부자가 돼야 여러 사람들을 아랫것들을 명령하는 즐거움이 있거든요. 남한테 비굴하지 않고 나도 뭔가 대장처럼 왕처럼 살고 싶은 그런 마음 있잖아요. 그게 바로 우리를 키웠던 어미, 아빠 소원이기도 하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속에 무슨 욕망이 있다? 대물림 받은 욕망이 있다고. 이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여기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시편 49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하나님께선 시편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째로 죽이려고 한다. 왜? 사람은 부자 되기를 멈추지 않기 때문에. 지금 가난해도 소망은 부자 되는 거예요. 멈추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통째로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시편에서 죽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면 선지서에서는 이걸 어떻게 합니까? 현실화시키겠지요. 그러니까 부자는 운빨이라 했잖아요. ‘환경에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관여 못한다.’ 환경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도 관여 못하니까 인생은 운이에요. 그냥 마주침이에요. 그것도 우연한 마주침이에요.

내 인생을 내 노력으로 바꾼다, 못 바꾼다? 못 바꿉니다. 노력하는 것도 운이고, 노력했는데 노력한 대로 예상 되는 것도 운이고, 노력한 대로 안 되는 것도 운이에요. 모든 게 운이고 운명입니다. 이 환경은 누구 소관입니까? 환경은 바로 말씀 소관이고 하나님 소관이에요. 잘난 자나 못난 사람, 부자나 가난한 사람 이 환경은 못 바꿉니다. 그런데 이미 환경은 결과가 고정돼 있어요, 확정돼 있어요. 뭐하기로? ‘죽어라, 인간들아. 모조리.’

그러니까 말씀은 뭐냐? 죽을 때 죽더라도 죽기 전에 뭘 알면 돼요? 내가 죽는다는 것이 그게 바로 내가 못 받아들이고 있었던 그동안 이게 진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나는 생명이 없어요. 생존이에요. 생존은 돈으로 유지되는 거예요. 그러나 생명은 돈 가지고 돈이 한계가 있어요. 돈이 나를 구원할 속전이 되지 못한다고 아까 말씀에 나와 있지요.

그래서 선지서 미가 6장 12절, 이스라엘 망할 때 주어지는 거예요. 망한 걸 가속화시키는 말씀들이 선지자의 말씀 속에 막 나오는 겁니다. 미가 보기 전에 아까 첫 번째 했던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 내가 이야기한 게 있지요. 인간의 본능은 환란이 왔을 때 친절하게 설명하면, 나한테 불리한 조건이 왔을 때 환경이죠. 인간은 가만있다, 내뺀다? 벌써 내뺄 때부터 수상하죠.

뭐하기 싫다? 그냥 가만있다가 죽기는 싫다는 거예요. 내 목숨은 내가 지키고 싶다는 겁니다. 지키는 방법은 내빼는 거예요, 피하는 거예요, 숨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마저 안 되면 나를 보존할 수 있는 비상 아지트를 따로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이 계속 오는 거예요. 말씀이 계속 오니까 이 나는 말씀을 계속해서 안 듣고 귀 막고 도망치면서 가는 거예요.

신약의 스데반 집사가 왜 죽었습니까? 스데반 집사가, 대구강의에도 했지만 예수님 서신 걸 봤잖아요. 그때 그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그냥 던졌습니까, 귀를 막고 던졌습니까? 귀를 막은 거예요. 자아에게 들려지는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그 사실을 귀를 막는 거예요. 그 유대인들이. 오늘날 다 그래요. 돌까지 던지지 않고 귀까지 안 막지만 그냥 복음 있다면 다 도망치고 봐요. 복음 있다면 피해서 우회해서 딴 길로 새요.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 취지는 뭐냐? 어쨌든 간에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살고 싶어요. 복음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오늘 니 죽어도 손해 아니다. 니 죽어 마땅하다.’ 이걸 자꾸 반복해서 이야기하니까 내 본성과 틀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말씀이 그 창호지 되는 우리의 자아를 고막이죠. 고막을 뚫고 들어오면 돼요.

고막을 뚫고 들어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내가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게 아니고 가만있어도 내 안에 무슨 세계가 돼요? 말씀이 세계가 되면서 내가 너를 진리와 더불어 죽게 해줄게. 살진 않아요. 부자 되진 않습니다. 진리와 더불어 죽을 때 죽더라도 진리와 함께 죽도록 해줄게. 로마서 6장, 고린도전서 2장, 갈라디아서 2장. 나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이제는 함께 살았고. 로마서 6장, 고린도후서 4장. 내가 날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짐은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의 편지 내용이 그런 구조로 완전히 범벅이가 돼 있어요. 적체가 돼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 시편 49편입니다. 구약이에요. 구약이니까 말씀이 환경이 너를 죽인다, 뭐 그 정도까지 가요. 왜? 아직 십자가는 아니니까. 구약이니까 옛날 언약에 속하니까 다 이루었다는 아니니까 미진한 부분이 있어요.

미가 6장 12절 봅시다.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거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궤사하도다” 자, 드디어 이스라엘이 망하는데 여러분들이 망할 때 무게중심이 아래쪽에 있으면 안 넘어지겠지요. 무게중심이 만약에 위쪽에 있다면 그것은 뭐가 됐든 어떤 도형이든 무너지기 쉽지요. 부자가 다 위쪽에 가 있다고요. 왜 이스라엘에 부자가 많았었느냐?

이스라엘이 농경시대인데 주변에 있는 이방나라들이 농업한 나라가 아니고 잘 사는 나라의 특징은 두로와 시돈같이 무역을 했어요. 무역을 한다는 말을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나는 것으로 먹고 살자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 수출할 게 있어야 돼요. 그래야 무역이 돼요. 그러면 우리나라에 다른 나라가 요구하는 것을 대량생산하겠지요. 그래야 수출이 되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무역을 한다는 말은 그 나라와 교역이 되려면 수교가 돼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그 나라 종교가 유대나라 이스라엘 나라에 허용이 돼요, 안 돼요? 허용이 돼야 되지요. 허용을 해줘야 돈 많은 바이어들이 우리나라 와서 팔짱 끼고, ‘보자. 이 나라에 내가 팔아먹을 게 뭐 있나? 이것 올리브 괜찮네. 이것 확 밀어버리고 포도 재배하세요. 밭떼기로 사줄게.’ 외국 돈 많은 바이어들이. 이윤을 남겨야 되니까.

그 방법을 누가 배웠느냐? 유대나라 이스라엘이 배운 거예요. 배운 것은 그 나라 왔다 갔다 하면서 무슨 종교? 우상들을 계속 수입하는 거예요. 폐쇄적 나라가 되면 안 되고 율법중심이 되면 안 되고 유도리가 있어야 돼요, 유도리가. 다른 나라에서 동성애 다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동성애 반대하면 유도리가 안 되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리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이 나라가 되려면 돈이 있어야 돼요, 돈이. 돈 없으면 백성들이 못 먹고 지도자는 잘리는 거예요. 돈을 벌어주는 자가 최고의 지도자에요. 모두 다 한 통속이에요. 다 죽기 싫어요. 왜 미가라는 선지자가 나라 망할 때 이렇게 예언한지 알지요. 부자가 망한다.

그러면 가난한 농사만 짓다가 값 쳐줄 테니까 농지 파세요. 여기서 팔아버리니까 뭐가 됩니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이 양산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 쥐고 나오는 생산물로는 국가 재성에 보탬이 안 돼요. 똑똑 엘리트 같은 그러한 장사꾼들이 법을 마음대로 조작해야 돼요. 거기에 누가 결탁했는가? 장사꾼들이 재판관과 선지자와 제사장에게 뭘 줬겠어요? 그 당시는 율법으로 재판했으니까 뇌물을 줬겠지요. 그게 미가에 나오거든요.

미가 3장 10절에,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친다 했지요. 제사장, 선지자, 두령들이 돈 받고 그렇게 했던 그 이유는 뭡니까? 이 약속의 땅에서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면 그게 진리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고? 아니면 아니라는 대안을 제시해봐라. 대안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여러분, 이 세상에 하나님이 우리를 태어나게 한 이유는 간단해요. 우리를 죽이려고 태어나게 한 거예요. 그냥 사는 게 아니고 마음껏 죄 짓고 그 죄 값으로 죽이려고 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의인은 없어요. 간단해요. 그러면 그건 그렇다 치고 오늘날은, 요한계시록 봅시다. 3장 17절, 이게 라오디게아 교회한테 한 거예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왜 알지 못하지요? 뭐가 뭘 막았어요? 돈이 내 본질을 막은 겁니다. 그다음에 요한계시록 13장 16~18절. 요한계시록 끝에 가면 더욱더 함축적이면서도 더욱더 심오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동안 인간들 세계에서 알지 못하던 단어가 팍팍 튀어나와요. 인간을 더욱더 깊이 있게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개념들이 나와요.

요한계시록 13장 16~18절,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사람의 세계의 한계, 이 세상 인간세계의 한계 그거는 뭐냐? 경제로 이야기하는 매매로 인간의 진수를 표현해준다는. 그 세상이 의미체계의 세계에요. 의미체계에서 인간은 뭐가 된다? 자아에서 사회에 나가면 주체가 돼요. 주체는 뭐냐? 사회에서 세상에서 남들이 알아주는 주인공 노릇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럴 때 나는 주인공인 것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7절, 이건 누가 크게 읽어봐야 돼요.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아리마대 그다음에 뭐라 돼 있어요? 부자? 부자 요셉? 부자가 괴물 아닙니까?

그다음에 이사야 53장 9절을 읽어보세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부자와 함께 되었다? 예수님이 무덤에 갇혔는데 그 무덤 소유자가 가난한 자에요, 부자에요? 부자지요.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신약의 의미가 가난한 자, 부자 따지지 않고 예수님 모신 곳이 뭐가 된다? 이게 진리가 돼버렸어요. 부자인 것, 가난한 것 따지지 않고. 갑자기 희망이 확 올라오지요. 부자인데 나를 위한 부자, 이거는 지옥 가고요. 부자는 천국 못 갑니다.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 못하니까. 그런데 예수님 모신 부자는 어디 간다? 천국 간다. 크게 써야 돼. 이 기쁜 소식을. 예수님 모신 부자는 예수님 때문에 천국 가는 거예요. 이러니까 내가 꼭 사기꾼 같다. 그렇게 부자 욕해놓고.

예수님 모신 부자는 천국 갑니다. 돈 많고 적고의 의미체제가 예수님 중심체제로 다 바뀐 거예요. 예수님이 생명이니까. 가난해도 죄로 죽고요, 부자도 죄로 죽고. 이제는 선과 악을 논하지 말라. 돈 없어서 선하고 돈 있어서 악하다는 의미체계는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무효화 돼요. 다 날아갑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천당 간다, 그런 것 없어요. 심령이 가난해야 돼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혼자서 도 닦는다고 자연인 된다고 심령이 가난한 게 아니고 누굴 모셔야 돼요? 예수님 모셔야 돼요. 왜 그러냐? 예수님은 우리 보고 너는 죽어 마땅함을 제대로 지적해주시는 분, 그것도 말로만 아니라 친히 자기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피가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써 나는 처음부터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구나.

그래서 부자 되는 것도 부자라는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원래부터 내 본성이 부패하고 짐승 같아서 부자만이 내 인생에 위로가 된다 싶어서 이건 내가 말릴 수가 없어요. 내가 어떻게 통제도 안 돼. 그냥 돈 갖고 싶고, 돈 쓰고 싶어. 그러한 인간이었음을 창호지 뚫리고 난 뒤에 다시 보니까 나는 나만 챙기고 나만 지키고 나만 도망친 인간인 것을 누가 와서, ‘이것 잡았어’ 해서 예수님께서 잡는 거예요.

부자에게 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부자 되려는 경향성을 지녔다는 것을 아울러 보여주는 겁니다. 부자 되는 것이 천국 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고, 가난한 것이 천국 가는데 유리하게 작용하지도 않아요. 제자들이 말하기를 부자가 천국 가기 힘드니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 같다 하니까 하는 말이, ‘그럼 누가 구원받습니까’ 걱정이 막 되잖아요.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

결론이 뭐냐? 이거에요. 혼자 살지 말고 같이 사는 것, 이걸 성경에서는 사도 바울 편지에서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또 특별히 준비한 게 있습니다. 노래 한 번 들어봅시다. 가사를 들어보세요. 춤까지 추진 마시고.


[Let be me there](올리비아 뉴튼 존, 1948.9.26~2022.8.8)

Wherever you go, wherever you may wander in your life
그대가 어딜 가더라도 그대의 삶 가운데서 방황할 때도
Surely you know I always wanna be there
내가 언제나 함께 있다는 것을 꼭 알아 두세요
Holding your hand and standing by to catch you when you fall
그대 손을 잡을 것이고 그대가 쓰러질 때 잡아줄 수 있도록 곁에 서 있을 게요
Seeing you through in everything you do
그대 하는 일들을 모두 챙겨보면서 말이에요
Let me be there in your morning, let me be there in you night
아침에도 내가 그대 곁에 있도록 해 주시고, 저녁에도 내가 그대 곁에 있도록 해 주세요
Let me change whatever’s wrong and make it right
잘못된 건 무엇이든 바꾸어 바로잡게 해 주세요(잘못된 건 무조건 주님이 바꿔주시고)
Let me take you through that wonderland that only two can share
단 둘만 함께 나눌 수 있는 동화의 나라로 그대를 데려가게 해 줘요
All I ask you is let me be there
내가 원하는 건 그대 곁에 있는 것 뿐
<간주>
Watching you grow and going through the changes in your life
그대가 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대 삶의 변화를 함께 걷는 것
That’s how I know I always wanna be there
바로 이런 것으로 알게 됐어요, 나 언제나 그대 곁에 있고 싶다는 것을
Whenever you feel, you need a friend to lean on, here I am
기대고 싶은 친구가 필요하다 느껴지면, 내가 여기 있어요
Whenever you call, you know I'll be there
그대가 언제나 나를 부르면, 난 언제나 그대 곁에 있다는 걸 알잖아요
Let me be there in your morning, let me be there in you night
아침에도 내가 그대 곁에 있도록 해 주시고, 저녁에도 내가 그대 곁에 있도록 해 주세요
Let me change whatever’s wrong and make it right
잘못된 건 무엇이든 바꾸어 바로잡게 해 주세요
Let me take you through that wonderland that only two can share
단 둘만 함께 나눌 수 있는 동화의 나라로 그대를 데려가게 해 줘요
All I ask you is let me be there
내가 원하는 건 그대 곁에 있는 것 뿐
Let me be there in your morning, let me be there in you night
아침에도 내가 그대 곁에 있도록 해 주시고, 저녁에도 내가 그대 곁에 있도록 해 주세요
Let me change whatever’s wrong and make it right
잘못된 건 무엇이든 바꾸어 바로잡게 해 주세요
Let me take you through that wonderland that only two can share
단 둘만 함께 나눌 수 있는 동화의 나라로 그대를 데려가게 해 줘요
All I ask you is let me be there
내가 원하는 건 그대 곁에 있는 것 뿐
All I ask you is let me be there
내가 원하는 건 그대 곁에 있는 것 뿐


여러분, 복음이라는 게 마지막에 사도 바울의 편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혼자서 안 돼요. 근데 이 세상이 뭡니까? 자식 교육이든 아내, 모든 것은 혼자 살려는 거예요. 혼자서 내가 예수 잘 믿으면 주께서 칭찬하겠지. 이것 함께 사는 것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를 포기를 해줘야 되는데 계속 제 믿음 어때요, 제 사랑 어떻습니까? 자꾸 지 자랑하고, 자길 내세우고. 그동안 헌금을 얼마나 하고 봉사는 얼마, 맨날 이런 식이라.

나를 삭제할 줄 몰라요. 그냥 우리 평생에 나이 많아도 지 손자, 지 새끼, 지 가정 결국 돌아서 뭐가 나옵니까, 누가 잘 되기? 나 잘 되기. 나 짐승 되기 싫어. 나 나쁜 사람 되기 싫어. 선악체계. 사랑의 의미체계가 안 보이는 거예요.

누가복음 1장 51~53절 그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아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했지요. 돈과 관계없어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을 마리아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이런 예언의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51~53절,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자, 질문합니다. 어디서입니까? 이 세상에서입니까, 예수 안에서입니까? 이 예언이 완성되는 것이 예수 안이에요, 이 세상이에요? 이 세상이 아니고 예수 안이죠. 세상적으로 부자를 공수(空手)로 보는 게 아니에요. 예수 안에 들어가면, 방금 노래 들었는데 다 까먹었다. 하는 이 노래 보세요.

이 노래의 가사는 어떤 세상입니까? 돈 보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뭐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대 곁에 있는 것만 해도 더 이상 세상 부러울 게 없지요. 그 세계가 바로 예수 안이에요. 그분이 나를 제대로 알고 내가 얼마나 혼자서 살아선 안 되는 존재인 것을 일깨워주시고. 잘못된 것은 바르게 바꾸게 해주시고. All I ask you is let me be there 내가 원하는 건 그대 곁에 있는 것뿐, 주님 곁에 있는 것뿐, 예수 안에 있는 것뿐이에요.

신약에 가서 성령을 통해서 예수 안에 있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아셔야 돼요. 구약 때 이스라엘이 신약의 요 사실을 알기 위해서 그들은 무려 이천 년 역사를 힘들게 보내왔다는 사실. 그 역사 가운데 누가 있느냐? 발람이 있거든. 발람 선지가가 이게 이스라엘 선지자가 아니에요. 모압 선지자에요.

그런데 그 선지자조차도 이스라엘을 못 건드리게 만들었습니다. 저주를 했는데 저주가 아니고 복이 돼버려요. 그래서 모압 왕이 발락이 뇌물 줘서 내가 돈 줄 때는, 이 세상은 돈의 세계니까. 저주하라고 돈 줬는데 어떻게 너는 축복을 하느냐? 발람이 하는 이야기가 이게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참 이게 중요한 거죠. 이게 참 신비로워요.

복의 원천에 대해서는 내 마음대로 안 돼요. 그런데 그 발람이 돈을 더 받고 뭘 했느냐 하면 저주의 원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선 악마로 하여금 관여하도록 허락을 했어요. 그래서 민수기 25장에서 그들은 발람의 꾀로 해서 이방신을 섬기니까 복이 뭐로 바뀌었어요? 복 받는 민족에서 저주받는 민족으로 전환되고 말았어요.

이 말은 합치면 뭐냐 하면 왜 복에서 눈 돌렸느냐 이 말이에요. 복의 원천이 이미 돼 있는데 세상 뭐라고 유혹합니까? ‘니가 잘 돼야지.’ 예수님만 잘 되면 되는데 갑자기 뭐가 유혹하느냐 하면, ‘니 인생 니가 챙겨야지. 니 인생 니가 챙겨야 돼. 니가 간수해야 돼. 아무도 간수 안 해줘. 니 인생 니가 만드는 거야.’라는 말이 쑥 들어오니까 그다음부터는 그냥 복에서 저주로 내려앉지요.

그렇게 복과 저주가 유도리가 있는 시대가 구약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성령이 구약처럼 우리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성경에 나오는 아까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네가 부자지만 사실은 벌거벗었다, 하는 그 이야기를 바깥에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서 이야기해줄 때마다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 맞군요, 하고 늘 고마워하고 감사하면서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또다시 우리는 춤추면서 부르게 하시는 거예요.

주님 곁에 있음을 늘 있는 건 아니고 성령께서 건드려줄 때마다 주님 있으면 그걸로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주와 함께 있으면 천국입니다, 라는 말을 또다시 회복시켜주시는 이것이 시편 49편의 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모든 게 돌아가는데 우리는 그걸 지식으론 알지만 내 인생에 대해서는 내가 손대야 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이 변함없는 잘못된 생각을 주께서 저희에게 성령을 통해서 가르쳐주셔서 세상이 주의 뜻대로 되어 짐을 이제는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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