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자기 환멸

아빠와 함께 2023. 10. 11. 07:24

20231009a 부산강의 : [시편]62(46:10)-자기 환멸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46편,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그렇게 시작하지요.

여기 ‘피난처’는 전쟁 중이다, 한참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피난처, 전쟁 중, 여기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구원이라는 것, 다른 말로 구출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인식해요. 새삼스럽다는 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안락하게 살기를 원하거든요. 전쟁이 없기를 원하고 평화를 원하는데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 살다가 일방적으로 포로 잡힌 생활하다가, 노예 생활하다가 나왔잖아요.

그들에게는 전쟁 개념이 없습니다. 전쟁 개념은 나의 것이 있을 때 전쟁 개념이 생기는 거예요. 나의 것. 그러나 포로 잡혀있는 그런 처지에서는 노예가 뭐냐 하면 자기 것이 없어요. 자기 것이 없을 때는 무슨 개념도 없느냐 하면 구원 개념도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냥 현실에 속해서 살면 되지 좀 이렇게 힘들더라도 그게 전부에요. 내 것이 있을 때 비로소 여기서 필사적인 투쟁 의지가 발생되는 거예요. 내 것이 있을 때.

마르크스란 사람 이름 들어봤지요. 공산당혁명 선언한 사람. 마르크스가 공산당을 주장할 때 사유재산을 주장했어요. 사유재산의 대상이 누구냐 하면 자본가들입니다. 자본가와 대치되는 개념이 뭐냐 하면 노동자 계급이에요.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의 특징은 사유재산으로 봤을 때 자본가는 사유재산에 이미 들어온 사람이고, 노동자는 자기 사유재산이 있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사람은 노동을 팔아서 그때그때 먹고 살아야 되는 존재거든요. 초창기 산업혁명 때 그랬었어요.

산업혁명 이전에는 농사, 토지에 의해서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토지는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 기독교 성직자들과 귀족들과 왕, 기사 계급이 갖고 있었잖아요. 수도원도 갖고 있었고. 그런데 그 사회는 봉건사회라서 삼각형 위치에서 그냥 이 질서 자체가 신이 주신 질서기 때문에 그냥 참고 살면 돼요. 굳이 내 사유재산을 할 이유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돈 대신에 뭐냐 하면 신앙이었어요. 세상 대신에 뭘 갖는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함을 갖는 거예요. 그걸로 그냥 유지되는 것이 중세사회였습니다.

중세봉건사회가 14세기, 15세기 실정에 이르면서 그 뒤에 군주, 임금님, 왕이 지배하는 나라로 전쟁이 있는데 그거는 서민들의 전쟁이 아니고 왕의 전쟁이에요. 왕들의 전쟁이라고요. 자기들의 게임이었어요. 그런데 마르크스가 산업혁명을 통해서 인간이 두 종류로 나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하나는 재산이 있는 자와 재산 없는 자.

그러니까 재산 있는 자는 자본가가 되고, 왜 그러냐 하면, 왜 자본가가 재산 있는 자가 되느냐 하면 재산 있다고 자본가 되는 건 아닌데 자본가의 특징은 자기 재산을 그냥 그 자리에 고정적으로 유지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재산은 더욱더 늘이는 전쟁을 다른 자본가와 함께 전쟁 벌이는 자였어요.

‘있는 돈으로 살지’가 아니라 전쟁에 나서는 데 자본가들의 전쟁을 뭐라 하느냐 하면 이게 유럽 자본가고요. 뒤에서 유럽 자본가가 저희들끼리 자본을 서로 대치하니까 빼앗아야 물러나니까 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자본은 어디서 얻느냐 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얻는 겁니다. 이게 제국주의시대, 침략주의시대에요. 유럽의 자본가들이 벌인 전쟁입니다. 그 당시 국가는 자본가들에 의해서 운영되었기 때문에 국가가 나설 수밖에 없고요.

그 전쟁이 있기 전에 19세기, 20세기에 들어가면 1차, 2차 대전이 일어나잖아요. 그 전에 마르크는 뭐냐 하면 자본가의 전쟁에 노동자들이 이용당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아 궐기하라. 너희들도 너희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런데 사유재산을 왜 못 가졌느냐? 자본가가 빼앗아 갔잖아. 이제는 어떤 전쟁을 벌이느냐? ‘내 돈 내놓으라는 전쟁을 벌여야 된다.’ 이게 노동자고 이게 바로 노조지요. 노조가 되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것, 전쟁 이야기했어요, 제가. 전쟁 이야기할 때 거기서 등장하는 게 뭐냐 하면 종교 성향을 띠어요. 전쟁을 하게 되면 거기서 전쟁에 가담한 종교적인 성향을 띠게 되는데 그 종교적 성향을 대변해주는 게 구원이에요. 구원, 구출이죠. 그러면 자본가의 전쟁에서 구출은 무슨 개념입니까? 가난으로부터의 구원이죠. 언제까지? ‘이 가난은 내 시대에서 끝내야 된다. 내 자식까지 가난을 대물림할 수는 없다’ 이거에요.

옛날에 중세 때는 좋은 것은 상위 층에서 다 누렸잖아요. 지금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 구출은 뭐냐 하면 가난에선 벗어났는데 벗어났으면 방향이 목적지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가난에서 어디로 목적하느냐 하면, ‘상위 층에서 누리는 것 우리도 누리자’ 그게 도착지점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물어봅니다. 그들이 진정 자본가 돈에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죠. 자본가 돈을 탐내지요. 탐내는 그게 현실화되는 거죠. 분명히 종교적인데 그 종교가 누구를 풍족하게 만드는 종교냐 하면 내 몸뚱이를 풍족하게 가난에서 부유하게 사는 내 몸으로의 구원을 의미하지요. 현대 이 사회가.

귀족들의 누리던 넓은 침대를 우리 집에도 들이고, 귀족들이 누리던 고급차가 우리 집까지 들어오는 거예요. 10대, 20대, 30대 그들이 지금은 그들이지만 40대, 50대 사람들이 20대 때 구원이란 바로 잘 사는 사람들이 누리던 학교 도시락 반찬에 소시지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염원해서 그들은 살아왔고 40대에 먹잖아요. 그런데 지금 10대, 20대의 구원은 뭐냐 하면 돈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찾는 거예요. 자기의 자유를. 내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일체 간섭 없는 걸 구원이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방금 길게 이야기한 모든 구원의 초점은 어디 있습니까? 여기 붉은 걸로 써놨지요. 내 몸의 절대성. 그러면 오늘날 종교도 그렇고 다 마찬가지지만 내 몸 하나 절대성인데 옛날 사람들은 안 아프면 된다 하는데, 그게 아니고 지금 내가 원하는 노래, 내가 원하는 춤, 내가 원하는 시간 보냄,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간섭 없기, 이걸로 들어가는 거예요, 인간의 몸은.

자, 그러면 비교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비교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있습니다. 그리고 10대, 20대 몸이 있습니다. 걔들은 왜 이렇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느냐 하면 지금 10대, 20대들은 날 때부터 이미 집안에 화장실이 두 군데 있어요. 이거 미치는 거예요. 화장실이 집 바깥에 마당에 있는 게 아니고 내 화장실이 있어요. 그리고 자기 집이 있고, 자기 방이 있고, 자기 침대가 있어요. 자기 인형을 놓을 수 있는 침대가 있고요.

이거 놀랍지 않습니까? 자기 침대가 있다는 거요, 자기 방이 있다는 거요. 문 콕 닫으면 자기세계에요. 어떻게 자기세계가 보장이 되죠? 그리고 부모가 자식한테 명령을 하면 안 돼요. 119 신고하기 때문에. ‘얘야 내 생각은 이런데 네 생각은 어떠냐?’ 의견을 물어요, 요새. 돈 버는 쪽이 돈 쓰는 쪽에게 의견을 묻는 게 이게 무슨 사회입니까?

돈 벌어줬으면 그 자체가 왕초, 왕인데 어떻게 왕이 돈을 빌어먹어야 될 신하한테 의견을 묻습니까? 그게 말이 돼요? 그것도 말도 못 놔요. ‘아드님’ 이러고. 미치겠어. ‘우리 공주님’ 이러고 있다고.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특히 공주가 키우는 개나 고양이에게 털만 건드려도 난리 나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의가 나와요, 예수님의 이름이 나와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오고, 특히 예수님의 의, 이름,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몸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몸에서 이게 왜 나옵니까? 예수님의 구원하고 오늘날 우리 몸의 구원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의와 이름과 그것이 왜 나옵니까? 나오는 이유는 제가 아까 초반에 이야기했어요.

전쟁 중에 있기 때문에 나와요. 누구와의 전쟁이죠? 보이지 않는 존재, 유령, 귀신 뭐 다 돼요.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전쟁 중입니다. 따라서 본격적인 예수님의 능력은 예수님 자체가 보이는 세상에서 나사렛 예수, 실제로 나사렛 동네 예수에서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들어가야 돼요. 그러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보이는 세계에서 죽었다가 어디로 들어가십니까? 보이지 않는 영역, 부활의 영역, 성령 안으로 들어가 버린 거예요.

그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뭘 있느냐? 그동안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통치하고 왕으로 지배했던 악마가 일으키는 현상들을 주님께선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성령으로 이 보이는 세계에 주시는 겁니다. 보이는 세계에 예수님만 오신 게 아니에요. 보이는 세계에 예수님과 더불어서 성령께서 함께 계셨거든요.

이제 예수님은 빠지고 성령께서 예수님만 왔던 세계에 오순절 날 성령을 통해서 보이는 세계에 보이지 않는 영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에 보이지 않는 존재 악마에 메여있던 인간들을 주님의 의와 주님의 이름과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부활 능력은 십자가에서 나오니까,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들로 하여금 실질적으로 뭐해주느냐? 구원과 구출을 해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가 뭐냐 하면 이 인식을 가져요. 어떤 인식이냐 하면 영적 전쟁 중이라는 인식을 가진 자만이 이게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뭡니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싸움이 아니죠. 정치적 이재명, 윤석열의 싸움이 아니지요. 김건희 논문, 그것과 싸움이 아니지요. 메달 따는 것과 군에 안 가는 것과 아무 관계없어요. 우리의 싸움은 우리의 씨름은 유도, 레슬링 그것 아닙니다. 축구, 야구 아니에요. 안세영 배드민턴, 신유빈 탁구 이 싸움이 아니에요. 우크라이나 전쟁,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그 전쟁이 아니에요. 우리의 싸움은.

인간 전쟁은 힘의 우열로 결정 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게 되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디에 보내느냐 하면 힘의 열세를 만들어서 힘을 작게 만들어서 월등한 나라를 받치는 부딪치는 마주치는 마찰시키는 전쟁을 벌이는 거예요. 그 전쟁을 이름하여 무슨 전쟁이냐 하면 이걸 ‘붙이심의 전쟁’이에요.

이 붙이심의 전쟁을 오늘날 현대어로 바꾼다면 예수님의 몸과 누구의 몸? 우리의 몸뚱이, 우리의 육신과의 전쟁이죠. 우리는 아무리 교회 나와서 기도를 해도 내 육신으로부터의 구원을 원하지 않아요. 오히려 내 육신을 보존하는 전쟁을 타인의 육신과 더불어 전쟁을 벌이는데 힘이 모자란다고 기도하러 왔다고요. 빌고 기도하고 난리도 아니죠. ‘저 사람은 건강하고 난 왜 아프냐?’ 이런 것. ‘저 사람은 왜 잘 사는데 나는 못 사느냐?’

여러분 아픈 이유는 간단해요. 일을 많이 해서 그래요. 그럼 자본가가 왜 아프냐? 그건 신경을 쓰는 일을 많이 해서 그래요. 마르크스가 몰랐던 것은 일이라 하는 것은 시간 타임으로 일의 강도가 결정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 중국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이론에 의하면 의사보다, 교수보다 노동력이 집중돼 있는 광부들이나 그것으로 노동시간을 결정하자 하는데 그 사람들은 너무 몰라요.

자본가가 노동 강도가 더 심해요. 그건 어떻게 아느냐 하면 개인사업체 하는 사람들 회사에서 잔업 시킨다고 기분 나빠서 사표내고 자기 커피카페 차리고 파리바게트 해놨는데 지 노동시간은 16시간이 넘어요. 편의점은 24시간 넘습니다. 노동 강도가 너 세요. 자영업이 더 세다니까요. 수입은 더 적고요. 그래서 얻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자율성, 그것 하나 챙겼지요.

이 몸이라는 것은, 방금 이야기한 몸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데 우리 몸은 자기 의가 나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싸우는데 이거는 자기 이름을 걸고 싸워요. 여기는 십자가 죽음을 이긴 부활의 능력이 나오는데 이거는 악마의 능력, 죽음에 매인 하면 할수록 점점 죽는 능력 밖에 안 나와요. 그런데 인간이 알고 있는 구원은 그런 몸뚱이지만 이것을, 어려운 거예요. 뭐냐 하면 타인 또는 타자와의 경쟁에서 상대적 승리하면 이걸 구원이라고 이야기해요. 상대적 승리를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60년대에 그런 일이 있거든요. “너희 집에 필리핀 파출부 몇 명 써?” “두 명 써.” “나는 세 명 써.” 이런 걸 이겼다, 졌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과연 이 이야기가 맞는지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제부터 성경 찾는 시간 한 10분 보내겠습니다. 이참에 성경 안 보는 것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시편 106편 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구원의 주체가 바뀌네요. 나 구원 없어요.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나 구원, 기존에 교회에서 말하는 자기 구원은 애초부터 삐이익,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은 하나의 연극무대고요, 이 연극무대는 나를 구원하기 위한 무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하기 위한 환경으로서의 구원이에요.

우리는 이 세상이 내 구원이 위해서 있는 세상이 주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세상이에요. 왜냐하면 주님 자신에겐 누구 이름이 있습니까? 주님 자신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건지기 위한 구원 외에는 일체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나의 구원은 없어요. 나는 이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내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천 년 동안 기독교는 뭐냐, 천주교는 뭐냐? 구라 친 거죠. 사기 친 겁니다. 하도 인간은 마귀에 의해서 자기 몸뚱이밖에 모르고 지 몸 편한 것을 구원이라고 이해하거든요. 그걸 흔히 말해서 복 받는 걸 구원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자기 몸뚱이가 복 받는 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스라엘에게 복이 온다고 이야기했잖아. 구약에 나오잖아. 그거는 이스라엘이라는 존재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께서 인원수를 체크는 대상이에요. 이스라엘 빼놓고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이스라엘도 사람이라 보지 않고 체크해서 체크에 해당되는 사람만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왜? 창세기 3장에서 모든 인간은 흙이니까. 하나님께서 분리했기 때문에 우리가 대들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언약이 주어진 민족과 그 외의 민족을 구분했거든요.

그러면 언약이 없다는 말은, 시편에 나와요. 언약이 없는 자는 저주를 퍼부으소서. 왜? 이미 복이냐, 저주냐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협의해서 결의한 게 아니고 창세기 12장에 보면 복과 저주의 기준점을 제시했습니다. 내가 언약을 주노니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만 복이 오고 아브라함에게 저주하는 자는,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겐 저주가 주어진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뭐 잘나서 그러냐? 아브라함이 잘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아브라함이 주가 아니고 아브라함은 하나의 언약의 객체에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자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노아도 마찬가지에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언약도 안 보여요.

언약이 안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언약과 하나님이 선택한 아브라함, 선택한 노아가 만나니까 거기서 하나님의 언약이 노아의 삶,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구체화돼 가는 거예요. 그럴 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이 그와 함께 있다, 또는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 있다, 또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신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조차도 사람을 차별하는 거예요. 그 사람 차별에 무장돼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은 뭐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노아의 하나님이 동행하고 에녹에 동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동행하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또 하지요. 이스라엘이 뭐 잘났다고 하나님이 동행하느냐, 왜 특혜를 받느냐? 이스라엘 나라가 없는 나라에요. 이스라엘 나라는 혈육으로 된 나라가 아닙니다. 혈육으로 된 나라는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으로 된 나라에요. 지금 이스라엘은 오해하고 있지만.

그것이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지요. 이사야에도 나오고요. 잉태치 못한 자가 복이 있어요. 결정타입니다. 잉태치 못하면 뭐가 없어요? 몸이 없지요. 육신이 없지요. 육신이 없는 자가 복이 있고, 이 말은 육신이 있는 자는 모조리 다 저주다, 이 말입니다. 아담이 행한 범죄를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저주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갖고 있는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어떤 공통점을 찾아서 신의 뜻을 구성하려고 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말씀으로 시작해야 되지 눈에 보이는 인간들 은혜 받은 그런 것 끌어 모아서 하나님의 뜻이 이럴 거다, 라고 하는 그거는 안 됩니다. 그게 왜 안 되느냐 하면 우리 몸뚱이에서 자기 의가 나오지요. 이 자기 의가 결핍성을 지녔어요.

모든 인간의 자기 의는 결핍돼 있습니다. 채우질 못해요. 온전한 의로. 아니 하나님께서 이게 결핍돼 있다고 유도를 해주셨어요. 뭐냐 하면 자기 의와 뭐와 만남? 율법의 만남이에요. 로마서 3장에서, 자기 의와 율법이 만나면 어떻게 되느냐? 이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가 돼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19절). 한 동안 입 막고 있었잖아요, 전 국민이 코로나 때문에. 입은 막았는데 자기 의는 왜 안 막겠어요? 분명히 성경에…….

자기를 지적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마스크를 벗어버리고 성경 가운데서 자기가 원하고자 하는 데에 대해서 성경말씀을 거기에 달달 외우지요. 바짝 신경 쓴 거예요. 그러면 성경말씀 가운데서 자기 의의 결핍을 유도하고 그걸 지적하는 말씀들이 어떤 말씀이 있겠습니까? 그게 방금 이야기한 율법, 하나님의 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을 더욱더 죄인 되게 하려 함이라, 이런 말씀.

그리고 또 대표적인 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자기 영광을 위함이라. 자기 챙기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그리고 그 유대인들은 너무나 철저하게 육신적이었고, 그 육신적인 이유가 지 아비가 악마기 때문에 그렇다. 악마의 자식이기 때문에 자기 육신만 챙기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을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소경이다. 예수님이 관여한 사람만 눈을 뜬 사람이고 예수님이 관여하지 않는 사람은 모조리 다 소경이다. 그리고 소경도 소경이고, 눈 뜬 사람도 소경이에요. 육신적으로.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소경을 실로암 못가에 씻기면서 단계를 두 단계를 줍니다. 하나는 육신에서 눈 뜨는 것과 그다음에 자기로부터 눈 떠서 누가 나를 치료했다는 사실까지, 그게 두 번째 단계에요.

예수님을 알아본 게 눈 뜬 거예요. 따라서 처음부터 눈이 감긴 장님이라도 바로 눈 뜬 코스 안 밟고 바로 예수 알아버려요. 그 사람은 장님이라도 눈 뜬 사람 돼요. 단계 다 밟을 필요 없어요. 바쁜데 언제 단계를 다 밟아요. 바로 예수 알면 되지요. 유대인들은 생각했어요. 가난한 것은 주의 저주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에서 오병이어 해주니까 바로 기대했던 메시아다. 모세는 기도해서 하늘에서 먹을 걸 만나를 주셨듯이 그 모세가 예언하기를 나 같은 선지자가 내 뒤에 온다고 했으니까 유대인들은 그걸 기다린 거예요. ‘드디어 그분이 오셨다! 메시아가 오셨다!’ 우리가 진짜 내 몸뚱이가 안락하게 풍요할 수 있는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셨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찾는 것은, 네가 육을 왜 찾느냐? 네가 배부른 까닭이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배부르기 위해서 왔다면 너희들은 모조리 다 가짜라는 뜻이에요. 교회 배불리고 돈 벌기 위해 왔다면 모조리 다 가짜라는 거예요. 다른 코스 있잖아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네가 가난에서 벗어날 생각하지 말고 바로 예수님 알면 이것이 바로 결핍된 나의 의에서 결핍이니까 고장 났잖아요. 고장 난 것을 왜 그렇게 거기 집착하느냐 말이죠.

이 고장 난 인간의 자기 의는요 타인의 의와 비교해서 남보다 착하면 신께서 복 주고 저 사람보다 못하면 저 사람보다 더 못 산다, 이런 선악적인 논리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자기 의를 주장한 겁니다. 인간의 몸은 가만있는 게 아니에요. 계속해서 나오는 게 자기 의가 나오는 겁니다. 자기 의란 뭔 뜻이냐 하면 못난 나가 의가 유지되면 잘난 나가 돼요. 나는 그대로 있어요. 못난 나가 잘난 나, 그러니까 못났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타인과 비교해서 아는 거예요.

요 근래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뭐로 이해했느냐 하면 스승으로 이했다고요. 나의 구세주로 이해한 게 아니고 스승이에요. 랍비라고 했다고요. 왜 제자들이 스승을 찾느냐 하면 스승 없던 시절보다 스승 있는 시절이 남들에게 타인에게 보여줄 게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교회 가기 전에는 무식하고 짐승 같이 살았지만 교회 나오고 난 뒤에는 내가 점잖은 훌륭한 인격자로 거듭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교회 나간 거예요. 뭐는 여전해요? 나는 끔쩍도 안 했어요. 내가 끔쩍도 안 하면 여기서 자기 의, 자기 이름 계속 나오는 거예요. 성경 찾기 10분만 한다고 했는데 더 해야 되겠다.

아까 시편 106편 8절 이야기했습니다. 인간 구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구원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 자기만을 건지기 위한 구원이었다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 자기만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뚱이만 구원하는 거죠. 근데 그 몸뚱이가 확장된다면? 예수님의 몸이 하나의 새로운 몸의 머리 부분을 차지한다면 예수님의 몸은 뭐가 필요하다? 몸통이 필요하겠지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에서 왕 제도가 보여주는 겁니다. 왕과 백성이 머리와 몸통 관계에 있어요. 따라서 백성이 사적으로 아무리 열심히 한들 복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백성이 아무리 부족하고 못나도 저주받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대표자 관계거든요. 하나님과 대표자 관계에 다윗언약에서는 왕만 들어가요. 이걸 왕 계약, 다윗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왜 왕에서 그러한 권한을 주었느냐? 왕이 레위 지파를 통솔할 수 있게 되었어요. 다윗언약 이후에. 레위 지파가 성전관리하고 유지하는 데에요. 그렇다면 왕은 성전관리의 총책임자가 돼버리는 겁니다. 성전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날 생각이 있다는 뜻이에요. 어디서 만나는가? 성전에서 만나지요. 왜?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니까요.

성전의 한 가운데는 비어있어요. 그 빈자리에 대제사장도 일 년에 한 번만 들어가야 돼요. 이 말은 인간이 못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그 장소에 누가 상주하고 있습니까? 주의 이름이 상주하겠지요. 이게 성전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하나님 만난 사람 있는데 누구지요? 이사야.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어디 가서 하나님 만났습니까? 성전에서 만났지요. 그때 이사야가 느낀 것은 뭡니까? 자기의 백성들과 동일한 입장인 걸 느꼈지요.

다윗언약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왕이지요. 그럼 백성은? 백성이 잘나고 못나고 아무 상관없어요. 왕이 중요한 거예요. 그럼 이사야에서 성전에서 고백한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망하는 백성 중에 한 사람이라고 본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고백하기를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것은, 망하지 않는 복이 오는 왕이 누구다? 성전의 주인공이신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란 뜻이에요.

그 보이지 않는 왕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직접 사람으로 오실 때가 있어요. 왕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올 때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 약속이 에스겔 37장에 나옵니다. 37장 24절 누가 읽어보세요.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됐습니다.

왕이 주어지는 데 그 앞에 보면 하나님이 다윗이 된다, 하나님이 왕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직접 왕으로 오시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그걸 메시아로 봤고요 메시아 오게 되면 모든 게 끝났지요. 왜? 인간이 부족하냐, 안 부족하냐를 묻지 않고 어디한테 묻는 거예요? 제대로 된 왕, 그리고 그분이 나라를 만들어요. 왕이 오셔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거든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뭐가 있느냐 하면 그 나라와 의, 그러면 모든 게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모든 게 끝나요. 세례 요한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회개하라 그분이 오셨다는 거예요. 끝나는 거예요. 시간을 더 이상 진척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한테 간접적으로 묻게 돼요. 자기는 옥에 갇혔으니까. 오실 그분이 그분입니까, 라고 물은 거예요. 왜 시간이 자꾸 지연되느냐는 거예요. 하늘에서 불 심판이 왜 안 떨어지느냐?

이거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이 메시아 맞아?” “맞아.” “그렇다면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 왜 구름 타고 안 왔어?” 왜 구름 타고 안 왔느냐, 이 말입니다. 주께서 하는 말씀이, “올 건데?” 인자가 구름 타고 온다고 돼 있어요. 그 말은 아직도 예수님이 해야 될 텀이 있어요. ‘다 이루었다’까지는 아니에요. 그럼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어디서 외치는 겁니까?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에요. 부활은 ‘다 이루었다’에 의한 환경, 새로운 공간 조성이에요.

여러분 자석이 있으면 주변에 쇳조각이 끌리잖아요. 자석을 수건으로 덮었다고 봅시다. 그런데 동서남북에서 쇳조각이 본자리에 있지 않고 슬슬 끌려온다면 그 가운데 뭐가 있다고 짐작됩니까? 자석이 있다는 게 짐작되지요. 부활은 그 끌리는 장, 필드 그게 부활이에요. 그럼 중간에 부활을 끌어당기는 자기 백성을 끌어당기는 이스라엘을 끌어당기는 그 중심에 뭐가 있습니까? 십자가입니다.

끌려온 사람이 부활 보고 끌려온 게 아니에요. 십자가 보고 끌려오는 거예요. 왜? 십자가는 미련한 거니까. 십자가는 비밀이니까. 그리고 십자가에는 누구 상처가 있느냐? 내 상처가 있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이 있어요. 주님의 몸에 일어난 거예요. 그런데 주의 몸이 뭐냐? 이 땅에 육신의 모습으로 왔지만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분이에요. 잉태의 주체자가 성령이에요. 마리아가 아니고. 마리아는 그냥 배태한 거고, 환경이고.

육신이 말씀된 게 아니에요. 말씀이 육신된 거예요. 따라서 그 몸은 이사야 7장 14절 말씀을 완성한 겁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요. 이게 참 아는 이야기지만 놀랍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고 무섭다는 표현이 적절해요. 왜냐하면 처녀에요. 처녀가 아들을 낳았지요. 여기서 뭐가 나옵니까? 이게 바로 단락이에요. 단절, 끊어짐.

다시 말해서 끊어짐, 단락은 뭐냐 하면 인간이 어떤 신을 생각하든 모든 신은 우상이란 뜻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육신부터 상상하게 돼 있어요. 인간은 육신이죠. 육신은 육신의 생각을 접을 수가 없어요. 이게 인간의 한계고, 이게 문제점이고, 마귀는 그 점을 노렸던 겁니다. ‘네가 백날 교회 다니고 은혜 받았다 해도 너는 네 자신에서 못 벗어나잖아, 이 바보야. 너는 절대로 너 자신에서 못 벗어난다고.’

이걸 누가 아느냐? 악마가 알고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예외 된 존재를 악마가 알아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바른 소리를 했어요. ‘예수여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과 나 끊어졌잖아요.’ 끊어져있단 말이죠. 끊어졌는데 교회는 왜 그렇게 예수 찾는 사람이 많은지. 전부 다 안 끊어졌어. 뭔가 백 퍼 가짜 예수지요.

주님과 끊어졌음을 아는 자가 성도인데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과 끊어졌음을 안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죽기 전이기 때문에 나는 뭘 갖고 있다? 이 몸을 갖고 있는 한 나는 이 몸이 만들어내는 자기 의, 자아 있잖아요. 자기 의는 분해돼요. ‘자기 의=자기+의’잖아요. 자기가 뭐냐? 자아지요, 자아. 인간은 자기 자아를 버릴 수가 없어요. 못 버립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상황을 한꺼번에 알게 됐어요. 눈 떴으니까 소경이 아니니까. 눈 떴으니까 내가 나를 못 버리고 나한테 끊어진 상태임을 아는 자가 성도고 이게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육신을 쳐서 자기를 부인한다? 이거는 절도 그런 건 안 한다만 불교에나 하라, 불교에서. 나를 쳐서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믿습니다. 그건 절에 가서 해. 물론 교회란 절을 만들었지만. 밑에도 있어요, 절이.

인간은 자기를 부인할 없기 때문에 주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십자가 질 수 없기 때문에 네 몸과 내 몸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다 떠나버린 겁니다. 몸이 달라요, 몸이. 몸이 다르다고요.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우리의 몸은 비로소 내 몸이 왜 다른지 이유를 알았지요. 내 몸은 바로 육신의 죄에서 잉태되었다는 그 자체가 죄에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성령이 오고 난 뒤에.

그러니까 죄에서 나오니까 그 죄는 뭐다? 자기 의, 자기중심. 자기 의를 보니까 말씀 하나 비교하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결핍이 생긴다잖아요. 결핍이 생기니까 그 결핍성을 채우기 위해서 열심히 교회 나오고 말씀 듣고 성경 보고 기도하고 선교하고 전도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자기 결핍성 때문에. 결핍성이 뭐냐 하면 주님의 이름을 위한 교훈이 아니라 내가 나를 살리는 하나의 방식으로써 시도하는 겁니다.

그럼 여러분은 그 시도를 멈췄습니까, 합니까? 하지요. 해야지요. 왜? 주께서 말씀에 의하면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기 때문에.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그러면 죄인 되는 노릇을 죽을 때까지 해야지요. 이것 자기 죄인 되는 노력은 세상에 이렇게 쉬울 수가 없어요. 하던 대로 살면 그게 죄가 되지요.

교회 가서 하던 대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던 대로 하면 모조리 죄가 되고, 강의하고 설교하면 이게 죄가 되니까 세상에 이것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쉬운 일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은 성령 없는 사람은 쉬운 일 놔두고 어려운 일한다고 결핍을 채워서 자기 의를 온전케 하려 하는, 세상에 그것 참.

이러한 일을 세상에 나온 가수들도 약간 이런 현상을 무식한 가수 말고 유식하다고 자처하는 가수들도 작곡 작사해서 이런 식으로 세상을 풍자하고 세상의 결핍을 말한 가수가 있어요. 사이먼 앤 가펑클, 두 사람 뚜엣이에요. 그 사람들이 불렀던 거기에 ‘prophets’예언자란 단어가 나와요.

그 예언자가 소리를 주는데 무엇과 대비하느냐?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소리, 인간이 들어서 소통이 되는 언어들과 달리 ‘침묵의 소리’ 마치 보이지 않는 소리끼리 서로 통한다는 시편 19편 같은 느낌, 그러한 가사가 있는데 그건 두 번째 시작할 때 제가 말씀드리겠고 첫째 시간에는 딴 데 봅시다.

시편 54편 1절 봅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이름을 구원해요. 이 땅에 이름으로 오신 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와서 이스라엘과 동행했다 했지요. 그냥 방치하면 안 되잖아요. 건져내야 될 것 아닙니까. 건져냈을 때에, 그러니까 인간들이 자기 이름밖에 모르는, 출생된 자는 자기 이름밖에 몰라요. 자기 몸뚱이밖에 모른다고요. 참 이걸 설명을 여러 번 했지만 하고 싶은데….

인간은 몸만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의가 있음으로서 자기가 있어요. 자아가 있다고요. 자아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고 몸은 보이는 부분이에요. 이게 둘이 인간 속에 있잖아요. 주님께서 오셔서 귀싸대기 때려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어디를 노리느냐 하면 육신을 때리는 게 아니고 육신에서 삐져나온 자기 의를 때리면서 율법이 자기 의를 때리면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을 구원하거든요.

그렇게 할 때 주님이 이미 이스라엘 속에 함께 있단 말이죠. 아까 말씀대로 주의 이름을 위하여 구원합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이 있어요. 주의 이름이 주의 의가 되려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야 돼요. 그 만드는 과정에 혜택 받은 자, 선택된 자가 있어요. 이 자의 특징이 뭐냐? 자기 이름을 버리고 누구 이름을 따른다? 주의 이름을 따른다. 그게 바로 시편 54편 1절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시편 44편 5절 누가 읽어보세요.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주의 이름으로 밟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20편 7절에 보면, 이것만 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러면 여기에 병거, 말, 이게 무력이죠. 힘의 우열로 결정되는 것이 인간 전쟁이죠.

인간 전쟁에서 그들이 아니고 이것, 그들이 갖고 있는 인간의 몸에서 나온 힘이 아니고 주의 이름, 그럼 주의 이름은 뭐냐? 인간의 힘을 빼는 것, 인간이 스스로 힘을 축적하는 모든 시도를 저지하고 거부하고 공격하는 그 능력이 뭐냐? 부활의 능력이고 십자가 능력이고 주의 이름이 발현되는 능력인 겁니다. 10분 쉽시다.

 

 

20231009b 부산강의 : [시편]62(46:10)-자기 환멸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시편 46편 7절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뭐냐? ‘야곱’이죠. 철저하게 인간과 인간을 구분합니다. 7절에 야곱의 하나님, 다른 하나님 아닙니다. 야곱,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에요. 아니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챙기지 딴 건 챙기지 않습니다. 이게 창세전부터 예정돼 있어서 그래요. 개나 소나 전부 다 구원하라 하면 안 돼요.

언약이 통하지 않고 복음이 통하지 않으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놓은 자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도하는 것도 굉장히 편해요. 한 구찌 하려고 하는 그건 보험회사에서나 하는 거고요. 그런 게 없어요. 언약으로만 해서 언약에 대해서 반응을 살펴서 언약에 대해서 거부하면 그거는 내 백성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내일 회개하고 어떻게, 그건 내일 문제고요.

그럼 언약이 뭐냐? 10절에 나오지요. ‘가만히 있는 것’ 이게 출애굽할 때 원리였거든요. 모세가 홍해 앞에 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어. 거기서 나온 유명한 노래 있지요.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줄게~ 내 안에 둥지를 틀어봐’ 우리 남진 장군님께서 하신 노래, <둥지> 상당히 복음적 노래 같아. (찬송가 778장^^) 가만히 있다는 것은, 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가 관련된 문제에요. 몸뚱이 내가 있고 이 몸은 일어나는 어떤 일도 다 내 몸과 관련돼 있어요.

어제 우리교회 예배 전에 이야기하는데 어떤 권사님 이야기했어요. ‘나는 정치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해요. 제가 울산강의 때 했잖아요. 아스팔트 누가 깔았습니까? 아스팔트 안 깔면 타이어 다 나갑니다. 차타면 알듯이. 의료보험 누가 만들었어요? 국가가 해준 거잖아요. 분리수거 누가 하는데요? 국가가 해주는 거예요.

사람들이 아무 정치 상관없다? 그래서 권사님한테 이야기했지요. 만약에 우크라이나 국민이라면, 이스라엘 국민이라면 아무 상관없을까요? 여자들 납치해서 인질 만든데, 하마스가. 평온하니까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평온하니까 자기 것만 생각하면 돼. 그런데 반송까지 인민군이 쳐들어와 보세요? 난리도 아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전쟁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모든 것이 나로 되돌아가요. 이 몸이 있으니까요. 몸의 속성이 그러니까. 그리고 복을 받기 위해서 자기 의를 증강시켜요. 자기 의를 추가시킨다고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한 게 생각이 나는데요. 하나님과 뭐하려 하느냐 하면 거래해요, 거래.

어떻게 거래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시키는 것 다 해줄 테니까 나 구원 안 해주기만 해봐라.’ 이 식이에요. ‘이케요, 저케요’ 하면서 다 해주는 거예요. ‘하나님 시키는 대로 십자가 믿어줄게. 피? 믿습니다. 언약 믿고 다 합니다. 이래도 날 구원 안 하기만 해봐.’ 이런 식이에요. 결국 그 목적이 주의 이름은 온데간데없고 자기 이름을 위한 주의 이름이 돼버렸어요. 최종적인 그게 나 구원이에요. 중간에 들어가는 게 십자가 들어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왜 망한 줄 알아요? 그래서 망했어요. 그게 그런 짓을 한 선배가 있어요. 이스라엘이 선배였어요. 그래서 망한 거예요. 이스라엘 위한 하나님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서를 그 식으로 해석을 한 겁니다. 모든 성경해석을 나를 위해서 성경 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해버린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 좋지요. 찬양, 다 좋아요. 예배, 경배, 심지어 순교 다 해요. 하지만 결국은 마지막 그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래서 주님께서는, ‘언약 앞에 언약의 상대자는 네가 아니다. 너는 입 다물고 가만있어.’ 현재 일어나는 모든 상대자는 네가 아니고 네 속에 있는 주의 이름이에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이해 못합니다. 너 말고 네 속에 있는 것, 네 속에 있는 주의 이름이에요. 이게 옛날 다윗언약은 왕이지요. 그 왕이 직접 들어온 걸 새 언약이라 합니다.

주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는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환멸과 기대를 멈추는 방법을 사용해요.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이 언약을 집어넣을 때 피와 살이 찢어지지 않으면 언약이 안 들어와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언약 안 들어오거든요. 피와 살이 들어오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 자체가 거부하는 태도를 가져줘야 그 둘 사이에 예수님 쪽에서 피 흘리고 살 찢기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강제조치지요.

우리는 우리밖에 모르는데 우리 자신에게 주님의 십자가 오게 되면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전부 다 그것을 거부하게 돼 있지요. 좋은 예수님은 거부하지 않아요. 나를 천하의 마귀로 만드는 그 복음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든 고개를 설레설레 젓지요. 진짜 예수에 대해서는 환멸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게 1단계에요.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그 뒤에는 뭐냐? 내 자신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게 만들어요.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해서 다시는 나를 위한다는 것이 이 세상 이 우주가 대자연의 어느 것도 나를 위해 일어난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지요. 내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이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반대로 나를 철저하게 짓밟고 죽이는 일을 하는 거죠.

그러면 이 ‘가만있어’를 성경 구약에서 이걸 무슨 전쟁이냐 하면 불이시는 전쟁입니다. 아까 했지요. 인간세계는 힘의 우열로 전쟁한다 했지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만히 있어, 내가 너한테 와서 부딪히게 만들어서 그쪽이 깨어지게 만드는 전재이에요. 대표적인 게 무슨 전쟁이냐 하면 바로 기생 라합 전쟁.

기생 라합이 생각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붙이시는 전쟁,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존재 자체가 이미 승자 쪽이라는 것을 인정한 거예요,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한 게 아니고 이스라엘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승리한 결과물이란 사실, 결과적인 민족이란 걸 깨닫고 주께서는 결과적인 걸 갖고 몰고 다니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걸 발견한 거예요.

그러니까 기생 라합이 그걸 알고 대든다든지 자기 쪽에서 할 건 없지요. 다만 그 찬스에 대해서 감사했지요. 이미 승자가 된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왔잖아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겁니다. ‘내 당신 편에 설게’ 끝난 거죠. 배신자죠. 다시 말해서 그동안 나를 키워왔고 밥 먹여 살린 나를 나 있게 했던 내 조국을 내가 기꺼이 배신합니다. 왜? 우리 여리고성 민족 중심의 인식이 아니고 여호와의 인식으로 봤을 때는 우리는 멸망당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구약 성경 초반에 중요한 사건 네 개가 나오거든요. 그 네 개를 나열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것, 그다음에 가인의 살인사건, 그다음에 노아의 홍수심판, 네 번째는 뭘까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를 아셔야 네 번째 의미가 나오는 겁니다.

낙원추방으로 인하여 여기서 뭐가 있느냐 하면 힘든 노동과 보너스 출산의 고통. 힘든 노동은 누구 담당입니까? 남자 담당. 출산의 고통은 여자 담당. 여자와 남자가 이렇게 따로 분리된 채 각자 자기 역할이 주어집니다. 하나가 될 수 없어요.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했노라고 다가오면 여자는 출산의 고통이 심화돼요. 이거는 남자가 도와줄 수 없어요. 여자는 말합니다. ‘너 때문에 내가 더 힘들다. 다가오지 마. 넌 그 자리에 있어. 네 할 거나 해.’

니 할 게 뭡니까? 돈 벌기. ‘너 할 거나 하고 얘 과외 시키고, 피아노과외, 영어과외 시키는 돈만 대.’ ‘얘 키우는 게 뭐 힘들어. 같이 밥 먹고 누워 자고 살만 찌고.’ ‘그럼 너 바꿔해 볼래? 네가 얘 키워볼래?’ 그럼 남자들은 출산휴가 반납할게. 남자도 출산휴가 있잖아요. 반납하고 싶어요. 너무 힘들어서. 아이 키우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취미가 있어야.

두 번째가 살인사건인데 살인충동의 지배. 가인이 살인 취미가 있는 사람아 아니에요. 가인은 악이 가인에게 덮치고 덮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걸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는 가인 내부에서 선악적으로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의지보다 더 강한 의지가 안에 새롭게 발생된 거예요. 이 바르게 살아야 되고 도덕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충동도 거부할 수 없는 충동도 이겨내지 못하는 더 센 게 들어온 사건, 그 사건으로 인류역사는 살인충동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게 창세기 4장의 중요한 거죠.

노아의 홍수는 뭐냐 하면 일관성 있는 전멸. 하나님께서 일관성 있는 전멸, 이유 있는 전멸 다 죽여 버려요. 노아까지, 노아식구까지 다 죽여 버려요. 노아식구가 자기 땅에서 살았습니까? 남들은 물에 잠겼는데 지는 자기 땅에서 구경했습니까, 어떻습니까? 자기가 살던 동네도 어디에 잠겼어요? 물에 잠겼지요. 물은 뭐냐 하면 심판의 매개에요. 물로써 심판한 거예요.

그럼 어떻습니까? 노아도 심지어 하나님과 동행했던 당대의 의인이고 은혜 입은 그들도 결국은 노아의 모든 것도 싹쓸이 심판의 대상이 돼버린 겁니다. 노아가 방주 탔을 때 신났다 싶지요. 사방을 둘러보세요. 뭐밖에 없어요? 물밖에 없어요. ‘저 바다에 누워~’ 노래 부를 그게 안 됩니다. 전부 다 바다에요. 자기가 희망이란 게 없어요. 이거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요. 산 채로 죽음을 구경하고 있는 거예요. 심판을 구경하고 있는 겁니다. 일관성 있는 심판.

그래서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사람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 뭐냐? 일관성 있는 전체 멸망을 인정 안 해요. 전에는 물이었잖아요. 지금은 뭐로? 불로. 하나님께선 다 죽이고 시작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복음도 인정 안 해요. 복음도 왜곡된 복음을 찾아다녀요. 내가 죽어야 된다는 걸 절대로 인정 안 해요.

심지어 마귀가 자기를 매일 하루하루 늙어 죽어가게 만드는 데도 기어이 살아남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 나오느냐? 왜 내가 자꾸 죽기 싫어하느냐? 이미 추방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추방, 살인, 그다음에 전멸 이것이 창세기에 중요한 테마로서 흘러들어오고 있어요.

네 번째가 뭐냐? 바벨탑이에요. 바벨탑의 뜻은 뭐냐 하면 인간이 노골적으로 신이 되고자 하는 거예요. 구체화, 노골적이 되는 거예요. 이 노골화란 뜻이 뭐냐? 앞으로 정치사회를 구성하는 핵심개념, 이념이 돼요. 왜냐하면 국가가 사회 되려면 누가 모여야 돼요? 사람들이 모여야 되죠. 모일 때 다 바벨탑에서 잘린 자들이 모여요. 하나님께서 흩어지게 한 자들이 모였다고요.

모일 때 생각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대체로 같은 말을 쓰는 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어요. 이게 바로 악마성이에요. 내가 신이 되고자 하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말을 서로 소통한다는 것은 네가 갖고 있는 악마성과 내가 갖고 있는 악마성을 서로 유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유통하는 것 잘 알지요. 이 사회가 유통의 사회에요. 이마트. 이마트 뭐예요? 유통이잖아요. 물건 파는 데잖아요. 거기서 물건 사잖아요. 시장에서 안 사고 대형마트에서 사잖아요. 마트 운영하는 사람이 뭘 원하는지 보는 거죠. 여기서 사람들이 유통을 잘하기 위해서 언어를 만드는 거예요. 신조어를 만들고, 광고를 띄우고. 그게 바로 현재 물질문명사회. 그걸 고발하는 노래가 바로 그 가사 내용이 여러분이 잘 안 봤겠지만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나의 오랜 어두움이 왔네
왜냐하면 잠자는 동안 몰래 들어온
환영이 내 의식 속에 씨앗을 뿌려놓았네
나의 뇌리에 그 환영이
침묵의 소리 안에 아직도 머물러 있네.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이렇게 시작되는 거예요. I've come to talk with you again, Because a vision softly creeping, 낮게 조용하게 기어온다 말이죠.

끝없는 꿈속에서 좁은 자갈길 나는 홀로 걸었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추위와 습기에 옷깃을 세웠지
밤하늘에 가로지르는 네온사인 불빛에 눈이 부시던 그때
그리고 벌거벗은 불빛 속에서
만 명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심이 없는 소리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부르지도 않는 노래를 만들고 있었지
그리고 아무도 이 침묵의 소리를 깨려고 하지 않았네
그때 침묵의 소리는 말합니다.

침묵의 소리를 깨우려고 한 사람이 없단 말이죠. 왜? 세상 물질문명에 정신 팔려서. 그때 하는 게 ‘바보들아’ 바보들아, 하는 영문이 이렇습니다. 'Fools' said I, You do not know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내가 말한다. 지금 침묵의 소리와 대화하는 이 예언자가 말하는 거예요.

바보들아, 침묵의 소리는 암세포처럼
자라나는 거라고 내가 말해주었지.
한 수 알려주려고 내 말 들어보라고
도와줄 수 있는 내 팔 잡으라고
그러나 내 말은 소리 없는 빗물처럼 떨어지고
침묵의 우물 속에서 메아리쳤다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물질문명, 여기선 네온이에요, 네온. 네온사인의 네온 있잖아요. 영어로 neon.

네온사인에 절을 하고 기도했지

물질문명이라 했는데 여기는 신이에요. 신에게 절을 하고 기도했다.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네온, 물질문명에.

그리고 경고등이 켜졌지, 신조어로 말이야
그 경고등은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예언자의 말씀이 지하철의 벽과
허름한 아파트의 복도에 쓰여져 있다
침묵의 소리가 속삭이고 있다고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보세요. 이 내용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이러한 하나님의 일관성, 아까 창세기의 바벨탑까지 이야기했지요. 여기서부터 이제 중요한 것 들어갑니다. 지금도 중요했지만 뭐냐 하면 전쟁이잖아요. 여기 시편 46편 다시 보면 9절, 저가 땅 끝까지 뭘 쉬게 한다 했습니까?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전쟁을 멈추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라. 이 전쟁 내가 한다는 거죠. 붙이시는 전쟁이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11절) 그다음에 어떤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 돼 있는데 다시 한 번 강의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전쟁, 누구하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전쟁을 지금 누구와 한다는 겁니까? 야곱은 가만있어야 돼요. 야곱이 아는 전쟁이 아니고 야곱의 하나님이 아는 전쟁이에요. 전쟁 적이 누구냐 말이죠. 신약부터 먼저 봅시다.

아까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지요. 무슨 사건? 살인사건. 그다음에 전멸되는 것, 그다음에 드디어 노골적인 악마성이 온 땅에 그들 악마성만이 퍼져있는 것, 퍼지지요. 그러면 신약에 와서 이 모든 내용이 어디 함축이 되고 모아지느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에 모아집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의 이름으로 오셨거든요.

그럼 주님의 전쟁 무기는 뭡니까? 활도 칼도 아니고 뭐다? 십자가에요. 십자가의 능력이 되는 거예요. 물론 모든 사람에게 어리석은 거죠. 어떻게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 모든 전쟁을 마감하느냐. 아까 바벨탑까지 이야기했지요. 지금 십자가 이야기했지요. 중간에 뭐가 있었습니까? 중간에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이죠. 자, 이스라엘이 왜 멸망하느냐 말이죠.

분명히 앞에서 이스라엘이 만들어지고 이스라엘이 함께 약속의 땅까지 들어가 놓고 쫓겨났잖아요. 쫓겨나기 위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과 약속의 땅에 살만한 이스라엘과 이게 차이가 났다는 거예요. 이게 합치되지 않았다.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모세로부터 받고 율법을 지킨다고 했잖아요.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말씀을 보고 말씀 지킨다고 애를 썼잖아요. 그게 십자가 정신과 일치된다, 안 된다? 안 됐지요. 그 원인에 대해서 인간의 몸에 문제 있다 했잖아요. 그죠? 그렇다면 중간에 이스라엘이 왜 멸망하는가? 왜 멸망하느냐 하면 앞에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올 때까지 적을 누굴 세웠느냐? 이스라엘 외의 적을 한 거예요. 이방나라 적들이 있지요.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사무엘상 17장을 보겠습니다. 17장 45절, 누가 크게 읽어볼까요.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지금 다윗언약 이전이에요. 소년 다윗입니다.

그럼 다윗언약의 솔로몬 때가 절정, 이스라엘이 최고의 이스라엘답게 인정받는 나라였어요. 솔로몬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 칭찬받았잖아요. 네가 수명 느는 것과 재산 같은 것, 원수 죽는 것 기도하지 않고 말씀대로 백성들 다스리게만 해 달라, 그게 바로 내게 합한 내가 하늘나라 다룰 때 말씀으로 다룬다는 걸 솔로몬이 보여준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중간과정이요. 아직 이스라엘까지 낭패가 오진 않았어요. 여기서 뭐냐 하면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그 이후에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둘로 쪼개졌어요. 그러면 누가 누굴 모욕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누굴 모욕한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전쟁의 내부성이에요. 전쟁이 내부성으로 확전돼요. 바깥 전쟁에서 어느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 전쟁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게 신약에 오게 되면 옛날 이스라엘을 제대로 회복하겠다고 유대교 나라가 만들어졌잖아요. 그런데 십자가 누구한테 죽었습니까? 우리는 다시는 조상의 과오, 오류를 되풀이하지 말자고 다짐에 다짐을 했던 그들에 의해서 메시아가 죽었잖아요. 하나님이 죽었잖아요.

그러면 전쟁의 내부성이 이스라엘 자체를 부셔버렸지요. 이스라엘 자체를 흩어지게 했지요. 그렇다면 신약에 와선 뭐냐? 전쟁이 각자각자 개인의 마음을 와해시키는 거예요.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심지어 열두 제자의 마음속에 그게 와해되고, 십자가를 사도 바울을 그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로마서 7장에 사도 바울이 이해하는 십자가는 뭐냐? ‘나는 내 안의 악마를 보았다.’ 악마를 바깥에서 본 게 아니고 내 돈 사기 처먹은 사람이 악마가 아니라 내 안에서 악마를 본 거예요. 발견한 겁니다. 죄가 나의 선한 의지를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를 죄의 노예로 만들었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는 편안한 거예요. 노예기 때문에 편안한 거예요.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편안한 거예요.

여러분도 복음을 전해보고 저도 복음을 전해보고 여러 가지 하지만 듣는 반응, 태도, 결과가 어떤지를 내가 크게 쓰겠습니다. 복음 실컷 전했다 합시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한 두 시간 동안 점심 사줘가면서 복음 전한 게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이게 뭐냐 하면 ‘나는 나대로 마음의 평화와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그런 것 신경 안 써도 내 나름대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뭡니까? 전쟁 중이 아니다. 나는 내 안에 투쟁이 없고 전쟁 중이 아니다. 갈등도 없다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여전히 나의 의는 유지되고 있다. 함부로 날 평하지 말라, 함부로 날 비판하지 말라. 내가 내 나름대로는 잘 살고 있다는 거예요. 이런 소리 듣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미 예상하고 있어야 돼요. 이것만 예상하면 안 돼요. 이게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이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묻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뭐가 잘못됐습니까? 네 자. 앞에 ‘전’ 뒤에 ‘전’ 하여튼 누구한테 이렇게 퀴즈 내는 것 제일 미워. 지 혼자 아는 이야기를 남을 기죽이려고. 그래서 문제 내놓고 방금 후회했습니다. 정답 빨리 이야기해야 돼. ‘전면전멸’ 지금 이걸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노아 물 심판 인정 안 하고, 지구가 불탄다는 걸 인정 안 하고 내 몸만 편하면 된다는 거예요. ‘복음 없어도 우리 교회 부흥되면 끝나는 거 아니에요? 우리 교회 헌금 잘 나오고 숫자 늘어나면 되잖아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너 지금 교회 평안하고 교회 분위기 좋은데 십자가로 초치냐?’ 이래 나오는 거예요.

이미 여러분들 이것 실감했을 거예요. 어디서? 추석 때. 추석 때 경험했잖아요. 자기를 씹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이재명 씹고, 윤석열 씹지 누가 자기를 씹어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알아. 십자가 뭔지 다 알아. 내 많이 먹었다 고만 해라.’ 많이 먹었다. 다 알아요. 아는데 지금은 그렇게 절박하지 않다는, 지금은 내 패턴대로 사는 게 편하다는 거예요. 내 나름대로 평화와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이거 우짜면 좋아요?

자, 우리는 여기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적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하나 체크해보야 돼요. 체크해서 평소에 나오는 어떤 태도, 말 같은 것이 예수님의 적으로 적이 유통되는 예수님에 대항하는 반발하는 자들의 대화 중에서 나오는 정신세계가 이런 거구나, 라는 것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이 세상에서 각자 자기 패턴대로 나만 편하면 되지요. 전쟁 나면 어떻게 하나? 전쟁 나면 이민 가면 되지요. 한국에 인민군 왔다? 부산에서 일본 가기 좋아요. 시모노세키 관부연락선 타고 그냥 가면 돼요. 내빼면 돼요. 뭐가 걱정이에요. 문제는 돈이야. 돈 없으면 오도 가도 못하지만 돈 있는 사람은 다 벙커 만들든지 안 그러면 미국에 아는 사람 있어서 초청해서 도망가든지 하면 되지요. 미국에 전쟁 나면 남미로 가든지 브라질, 안 그러면 뉴질랜드 가면 되지 뭐. 뉴질랜드 가면 어떻게 되느냐? 늙어 죽겠지 뭐.

힌트를 드리겠어요, 힌트. 예수님의 적은 누구였습니까? 유대교였어요. 유대교가 믿는 게 [탈무드]였어요. 그러면 예수님을 거부하는 정신은 무슨 정신이다? 탈무드 정신이에요. 탈무드 정신이 뭐냐 하면 첫째, 극히 현실주의.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하도 많이 쫓겨나서 무엇이 필요한가? 쫓겨날 때를 대비해서 가장 중요한 게 있으면 된다. 그게 돈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탈무드 속에는 돈을 버는 요령들이 가득 차 있어요. 돈을 버는 요령이 뭐냐? ‘이것은 남이 하기 싫은 정신적으로 지저분한 일을 하라.’ 이거였습니다. 육체적으로 말고 정신적으로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해라. 그리고 한 자리에 머물지 마라. 그래서 유대인들이 주로 항구도시에 많이 집결돼 있어요. 미국의 뉴욕에는 백만 명의 유대인이 있습니다. 런던, 파리. 파리는 항구도시는 아니지만 그런 데 많이 있었어요.

항구도시의 특징이 뭐냐 하면 돈이 모여 있는 곳이에요. 돈이 모이고 이거는 빨리 빨리 떠나야 되게 때문에 농경생활하면 안 돼요. 농사짓고 이러면 안 돼요. 뭘 했느냐? 장사해야 돈이 생기지 농사해선 돈이 안 생기는 거예요. 이걸 쫓겨다녀봐서 아는 거예요. 돈을 벌기 위해서 정신적으로 하기 싫은 것, 그러니까 천한 직업, 틈새시장을 노리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탈무드 속에는, 탈무드가 언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갔잖아요. 이스라엘 추방됐지요. 이건 제 생각인데요. 이번 겨울수련회에는 첫째 시간, 둘째 시간에 어디를 하느냐 하면 말라기 끝나잖아요. 신약 오지요. 그 틈새에 비어있는 역사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거기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고 에베소서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거예요. 왜 그걸 생각하느냐 하면 역사란 누워있는 바벨탑이기 때문에. 시간이 누워있는 바벨탑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현재 유대나라를 있게 만든 그 역사 속에 살아 있는 하나님이란 인식으로 구약성경을 그렇게 이해하는 겁니다. 구약성경을 역사를 이해하되 현재 유대나라는 정당하게 생길 수밖에 없고 이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과거의 자기 역사를 해석하는 거예요. 그거 들어보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거나 오늘날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거나 똑같네.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한다, 라고 하는 것은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고 아는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먼저 염두에 두고 지난 고등학교, 중학교, 내가 20대, 30대를 전부 다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해버리는 거예요. 해석은 지나오고 난 뒤에 지금을 긍정하기 위해서 해석을 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현재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옳다는 것을 하기 위해서.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옳다는 거예요. 모든 해석이 다 그래요. 그걸 유대인들이 보여준 겁니다.

그래서 유대나라는 어떤 경우라도 옳아요. 옳기 때문에 로마가 유대를 공격한다? 그러면 벌은 누가 받아요? 로마가 받지요. 왜? 자기는 옳기 때문에. 이런 해석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이 뭐가 된다? 적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방금 한 유대나라의 의식하고 오늘날 우리 의식하고 뭐 차이 납니까? 차이 안 나지요.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하나님의 적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내부의 적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남들 나쁘다가 아니라 네가 나쁘다는 겁니다. 이건 좀 약간 어렵지만 참아야 돼요. 내가 있으면 여기 육신이 있다 했지요. 아까 자아가 있지요. 자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뭘 찾느냐 하면 나는 누구다, 해선 자아를 몰라요. 비교되는 타자, 남과 비교하면서 자아의 가치, 의미를 정하는 겁니다.

부산강의에서 여러 번 했는데 다시 이야기해서 배우자 중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보통 남자가 먼저 죽으니까 남편이 죽었다, 아내는 산 게 아니에요. 왜? 자기 잘남을 증명해줄 사람이 죽어버렸으니까 없어졌으니까.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죽은 자가 아니고 죽은 자를 보낸 남은 자가 애통해요.

그런데 이것도 잘못이에요. 죽을 때 애통하는 것은 크게 자기 인생에서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죽을 때 한 순간에 죽는 게 아닙니다. 살아온 내내 누적이 돼 죽잖아요. 그러면 죽을 때 애통한다는 것은 살아 있을 때는 애통 안 하고 있었다는 자기 오류를 지금 고백한 게 돼요. 살아 있음이 애통한 죽음을 순간을 맞이했다면 살아 있는 살아 있음을 애통해야지요. 왜 그건 애통 안 합니까? 왜 죽을 때 애통하느냐 말이죠. 그거 반칙이잖아요. 논리적으로.

그래서 인간은 자아가 가치 있고 의미 있기 위해서는 남보다 낫다는, ~낫다, ~더 가치 있다, ~더 옳다 할 수 있는 비교대상을 끌어당겨 와야 내가 규정이 된다고, 내가 규정이 되는 거예요. 정치라 하는 것은 야당이 없으면 정치가 안 돼요. ‘저쪽보다 우리가 낫잖아.’ 이게 돼야 정치가 돼요. ‘어느 쪽에 표 찍을래?’ 공산당에 무슨 표가 필요해요. 당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래서 공산당은 외세를 이야기하죠. 적이 자기한테 바깥에 미제제국주의를 언급하는 거예요. 그래야 안에 결속이 되니까.

모든 인간은 왜 모였다 하면 추석 때 명절 때 모이면 남 말하느냐? 남 말해야 상대적으로 자기가 정당화되고 가치 있고 의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 씹을 타인이 없으면 주로 씹히는 것이 연예인들이에요. ‘최진실 딸 그거 문제 있더라.’ 니 딸이나 잘 키우세요. 유대인들은 이방민족이 있음으로 상대적으로 결속이 돼요. 우리는 우월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고 율법이 있다. 전부 다 뭐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과거의 율법해석을 다른 나라와 비교한 차이성으로 구약을 율법을 해석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유대인들 나쁘다 하지 마세요. 기존 교회 목사들 어떻게 설교하는지 보세요. 그 교회 참석한 사람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서 뭘 합니까? 우리는 신천지 아니라는 거예요. 신천지나 니나 똑같아. 우리는 여호와증인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보수정통이라는 거예요. 유대교는 안 그랬어요? 유대교는 진짜 열한 지파 다 잘려도 유다 지파만 하나님께서 남기기로 작정했다는 거예요. 작정했지? 메시아 죽이라 작정했지요.

인간은 모든 말 속에 타인에 대한 견제가 담겨있는 말만 하게 돼요. 왜냐하면 나는 모르니까 저보다 낫다, 저보다 옳다, 저보다 나는 더 행복하다, 이런 걸로 반대테제로 자기를 규정하려고 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떻게 오시느냐 하면 ‘내가 네 반대돼 줄게’ 그렇게 오셨지요. 왜냐하면 불로 나중에 전멸시키는 일이 남아있기 때문에, 불로 다 태워버리는 일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일을 위해서 모든 인간으로부터 원수로 자청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성도는 그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이제는 알게 된 거죠.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구나. 로마서 5장에 나오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순데 예수님의 나로 인해서 생긴 희생,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뭐가 되었다? 의로 확산되어 들어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를 가진 게 아니고, 가져버리면 가진 내가 또 우월이 돼요. ‘가진 게 너 없지? 나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의 의가 내 인생 속에 주님의 희생이 확산, 퍼져 들어온 거예요. 스펀지 물 빨아들이듯이 내 일상 속에서 십자가와 관련된 모든 상황들이 퍼져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티비 보는 것도 죄고, 모든 죄 아닌 게 없고, 밤에 꿈꾼 것도 다 죄가 된다는 사실이 감사와 고마움이 되는 겁니다. 이걸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생각한 나와 주님이 생각한 나, 두 개의 나가 있어서 내가 생각한 나를 지워주는 데서 범사에 감사가 나온다고 이야기했어요. 두 개의 자아가 있는데 내가 고집하는 나를 주께서 제거해주는 데서 오는 고마움,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지요. 그래야 뭐가 남아요? 주의 의로 확산된 내가 주의 안에 마련돼 있는 내가 가려지지 않고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유대교 탈무드에 나오는 내용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리면서 어떻게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과 생각이 똑같은지 실감하시기 바랍니다. ‘부자 되는 방법은 내일 할 일을 오늘 먼저 해치우고, 오늘 먹어야 될 일을 내일 먹으면 된다.’ 뭐냐 하면 ‘밥 먹고 합시다’ 하지 말고 먼저 일을 해치워버리면 밥은 나중에 먹어도 된다는 거예요. 그만큼 유대인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돈은 빌려주지 않더라도 책은 빌려주어라’ 왜? 지식이 돈 되기 때문에. ‘부자에게는 자식은 없고 상속인만 있다.’ 자식이라도 믿지 말라. 자식이 다 노리는 게 있다. 그건 내 돈이다. ‘가난한 자에게는 적이 없지만 부자는 친구가 없다.’ 이게 뭐냐 하면 한국교회가 다들 잘 살 그다음부터는 친구가 없어요. 혼자 살아요. 혼자 사는 게 제일 편해요.

그다음에 ‘바닥에 엎드려있으면 넘어질 일이 없다.’ 항상 사람 앞에서 넘어진 자로 살아라. 결국 그것이 돈이 된다. ‘한쪽 다리를 잃으면 다른 쪽 다리가 있음을 감사하고, 두 다리 다 잃으면 목이 남아있는 걸 감사하라.’ 목 없으면 감사도 날아가기 때문에.

이건 뭐냐 하면 결국은 아까 처음에 했듯이 유대교의 사상은 자기에 대한 절박함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에 대한 절박함을 가진 자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은, 주님은 어떤 절박함이었습니까? 나로 인하여 모든 말씀이 완성되는 절박함이 있었지요. 두 절박함의 만남과 충돌이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지요. ‘나는 나에게 절박하구나.’ 그런데 그게 바로 ‘내가 몰랐던 죄구나’ 이것이 성령께서 오시면 알게 됩니다. 왜? 성령은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사냥 앞쪽으론 가지 말고 말 뒤쪽으론 가지 말라.’ 왜? ‘사냥 앞으로 가면 뿔에 받히고 뒤로 가면 발꿈치에 차인다.’ ‘너무 끝에 서지 말고 너무 앞에 서지 말라.’ 사회는 중간에 서면 최고다. 그래야 안 다친다. ‘손님과 생선은 사흘 뒤면 악취가 난다.’ 이거는 남의 집에 오래 있지 말고, 손님 오래 있거든 나가라 해라. 냄새난다.

그다음에 중요한 건 뭐냐? ‘남들이 웃고 있을 때 울지 말고, 울고 있을 때 웃지 말라.’ 이게 뭐냐 하면 유대인들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비결이 나옵니다. 표정관리. 그래서 유대인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 나와요. ‘표정은 나의 가장 가까운 밀고자다.’ ‘승자는 눈길을 밟고 가지만 패자는 눈 녹기만 기다린다. 세상을 겁내지 말고 돌진하라. 그게 너의 길이 된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생존과 생계에 대한 절박함,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나타남으로서 죄 중에 가장 교묘하고,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얍삽한 죄의 절정으로서 하나님은 유대교 속에 오신 거예요. 왜?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갔잖아요. 포로 잡혀가면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실은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 내가 설치지 않으면 이 땅에서 못 산다.

그래서 사두개인에게는 뭐냐? 부활이 없어요. 오직 현실주의자. 그 현실주의자가 예수님을 죽였다면 우리 내부에 아무리 교회 다니고 복음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끝까지 현실주의자로 살아가고 있지 않는지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그걸 들춰내시는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만있으라 하지만 가만있을 수 없는 내가 나에게 지시를 내려야 마음 편한 어느덧 우리가 하나님의 대적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음을 이제야 눈을 뜨고 발견할 수 있게 해주신 주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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