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부적

아빠와 함께 2023. 9. 13. 09:40

20230911a 부산강의 : [시편]61(45:10)-부적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45편,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라고 시작이 되지요. 왕이 너무 좋아서 술술 나온다 이 말이에요. 내가 도저히 멈출 수 없다. 왕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는 자체가, 나는 너무 기분 좋아서 왕에 대해서 설명하는 자체가 너무나 영광스럽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냐? 자기 자신을 잊을 정도로. 쉽게 말해서 왕이 계시고 그 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그 위치에 있다는 것이 더는 다른 소원이 없을 정도로 최상의 기쁨을 나는 갖고 있다는 그런 뜻이에요.

2절에 보면,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이 왕의 위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왕이 있다는 것은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 하나님 여기 있어’라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왕을 주었으니까 왕을 분석하고 왕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무엇을 이해하는 거예요?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게 돼요. 왜냐하면 왕은 하나님이 하는 일을 그냥 그대로 인수인계 받은 자로서 이스라엘에게 등장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일반백성들로 하여금 바로 하나님과 연결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과 연락을 취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언약에 의하면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락이 안 돼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과 인간은 떨어져있기 때문에 연락이 안 됩니다. 연락이 되려면 언약으로만 연락이 되는데 언약도 이 백성이 언약을 다루거나 언약을 사용해서 연락이 되질 않아요. 언약은 하나님과 왕 사이에 맺은 언약, 이 언약을 성경에선 뭐냐 하면 이걸 다윗언약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윗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왕을 통해서만 일하고 일반인한테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자기선언이에요. 이 이야기가 새삼스럽지 않는 이유가, 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나왔지요. 왜 많은 사람들에게 모세만 시내 산에서 불러 내세우는 이유가 뭘까요? 그냥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만나면 될 텐데 왜 모세만, 여호수아도 아니에요. 여호수아는 산 중턱에서 머물러요.

모세만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 위로 향하여 생각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진짜 하나님의 모습과 다른 정도가 아니고 대치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틀리는 정도로 아니고 정반대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좀 지식이 모자란다. 그러면 아는 부분은 놔두고 모자란 부분을 채워나가면 점차점차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잖아요. 그런 정도가 아니고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본성은 이게 대립이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을 열심히 알아서 구원받는 건 없어요.

뭘 알아야 되는가? 부모로부터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대립이 된다는 것을 눈치 채야 되지요. 우리 자신이. 반대가 돼 있는 겁니다, 반대가. 그러면 시내 산에서 모세가 올라갔다고 내려오면서 받아놓은 게 뭐냐? 그냥 빈손으로 온 게 아니죠. 뭘 갖고 왔습니까? 그냥 관람하고 내려온 게 아니고 모세는 뭘 보고 들었습니까? 율법을 보고 들었지요. 그러면 방금 제가 하는 이야기를 여기다가 담자 이 말이죠.

율법의 내용은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본성은 대립된다. 다른 말로 하면 충돌된다는 내용이 무슨 내용이 되겠습니까? 율법의 내용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나오지요. 율법을 준 이유가 뭐냐?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저주받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우리는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야금야금 알아 가면, 야금야금 아니고 알음알음, 알음알음 알아 가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있으리라. ‘옳고 옳은 것만 계속 누적을 시키고 중첩을 시키면 하나님께 도달되리라’라는 생각이 순진한 우리의 생각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툭툭 던져준 그 율법과 말씀이 이거는 알음알음 점점 더 하늘나라에 가까이 가게 하는 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 우리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났다.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해서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느냐? 하나님에 좋은 쪽이 뭐냐? 인간을 저주해서 하나님이 뭘 그렇게 기뻐하느냐? 그 인간, 인자 같은 것 밟아서 시편 8편에 나오는 말씀, 그 아무것도 아닌 인자를 밟아서 주께서 얻고자 한 게 뭐냐? 그것이 바로 오늘 시편 45편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거예요.

하나님이 진노할만해서 진노하신다는 것. 하나님이 무턱대고 인간보고 진노하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진노할만해서 진노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진노해야 될 이유가 현재 우리 몸에 장착돼 있지요. 우리 마음에. 장착돼 있으니까 진노할 것 아닙니까. 그럼 우리 마음속에 내 속에 뭐가 있는데? 나는 내가 있는 데 나는 그냥 순수한 데 난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데 나는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데 왜 나보고 진노하지?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악마가 들어있어요.

여기 오늘 45편 3절을 보겠습니다.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그다음에 5절에 보면,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인간을 통치하고 다스리느냐, 라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의 움직임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움직이느냐를 보여주는 거예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왕에 대한 계약이에요. 다윗언약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왕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화살을 갖고 있고 날카로운 칼을 갖고 있는 거예요. 칼, 화살 무슨 용도입니까? 무나 깎아먹는 칼이에요? 왜 있습니까? 이 지상에 하나님의 원수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살기 바빠서 자기체면 지키기 바빠서 하나님의 원수가 이 땅에 있다는 것은 우리는 전혀 관심사도 아니에요. 나만 편하고 나만 행복하고 나만 살기 좋으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래놓고 ‘하나님, 저 어때서요’ 이래 나온다고요. 하나님은 원수를 향하여 공격하는 데 소위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이 말이죠. 나는 나만 편안하고 나만 안정되면 상관없다는 겁니다.

7절에 보면,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라고 돼 있어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히브리서에 예수님을 보낼 때 이런 취지로 보냈다는 게 나옵니다. 히브리서 1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히브리서 1장 9절에 보면,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라고 돼 있지요.

그러면 시편 45편에 나오는 왕은 누굽니까? 제가 히브리서까지 소개했으니까 아시겠지요. 누구에요? 예수님이죠. 히브리서에선 예수님을 두고 기름 부은 자 메시아라고 했으니까 기름 부었다는 말은 동류보다 더 뛰어나단 뜻이에요. 하나님의 통치로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가 바로 장차 오신다는 겁니다. 숨어있는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으로 오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오실 때 뭐 하러 오신다 했습니까? 하나님의 대적을 쳐부수기 위해서 오시지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와 한 통속이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이 칠 때 원수를 찾아낼 때 어딜 찾아내겠습니까? 노인정에 가서 이 원수야 하겠어요, 안 그러면 북한에 가서 원수야 하겠어요? 그 원수를 찾아내는 발췌하는 그 장소가 어디겠어요? 바로 우리 마음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관심 없으니까.

‘하나님의 원수, 당신이 하세요. 나는 관여 안 하렵니다’라는 자체가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나는 내 원수만 아니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는 일절 나는 생각을 끊어버리겠다는 거예요. 아침에 출근했다. 하나님의 원수 찾으려 출근합니까? 어때요, 무엇 때문에 출근합니까? 할머니가 되어 손자 본다. 손자 안에 하나님의 원수 찾기 위해서 손자 봅니까?

모든 목적이 내 행복과 내 안위와 내 생존을 위해서 그냥 질주하고 거기에 매진하는 것, 그게 바로 그런 나를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우린 하질 않고 있어요. 말씀을 안 봐서도 그렇지만 말씀 봐도 마찬가지에요. 도대체 우리의 정신머리가 나한테만 꽂혀있어요. 하루 스물네 시간. 심지어 스물네 시간이 말이 맞는 이유가 밤에도, 심지어 내 의식에 없는 꿈에도 나한테 꽂혀있어요. 내가 얼마나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가, 거기에만 몰입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여기 시인은 여기 신앙인은, 성신 받은 신앙인이죠. 성경을 썼으니까. 지금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왕, 심판주 되심을 내 입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이거는 감사하고 영광스럽다고 시작하는 거예요. 말이 막 술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1절에 필객이, 전문적인 글쓰기의 붓과 같이 내 말은 그냥 미끄러지듯이 쏟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멈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시편 45편에서 하나님의 왕 되심을 하나님의 영광되시는 심판주가 갖고 있는, 심판주로 지니고 있을 그 위엄, 영화로움, 압도적인 권위성 이 모델을 시편 이 사람은 어디서 찾는가 하면 솔로몬에서 찾습니다. 솔로몬 왕이 지니고 있는 영광은 압도적이에요. 동류들 보다 다른 왕들 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겁니다. 그 화려함이.

솔로몬 왕은 어디 속하느냐 하면 다윗언약에 속합니다. 솔로몬의 아버지가 누구냐? 솔로몬의 아버지는 다윗이 아닙니다. 솔로몬의 아버지는 다윗언약이에요. 논리가 좀 비약됐습니까? 솔로몬의 아버지가 다윗언약이에요. 다윗의 육신으로서 다윗과 밧세바를 통해서 솔로몬이 나왔지만 여기서 육신을 제쳐야 돼. 육신 노선을 제쳐야 돼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10절에 나옵니다.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찌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찌라“ 네가 육신적으로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 아버지 잘나서 내가 잘났다. 우리 아버지 없었으면 내가 없다, 라는 그 노선 있잖아요. 육적인 노선, 할아버지가 아버지 낳고, 아버지가 아들 낳는 그 노선 알지요. 이 신체 노선. 그 노선에서 벗어나야 돼요. 그 집구석, 집안 노선에서 벗어나야 돼요. 이게 언약의 위력이에요.

어제 낮 설교에 누가복음 18장에 나왔잖아요. 영생? 너 영생 원해? 그렇다면 네 형제, 네 가족 다 포기할 수 있느냐? 주님이 계속 그렇게 묻는 겁니다. 전토 그런 건 물론이고 땅, 기본이고 가장 끊을 수 없는 것 네 가족으로부터 네가 떨쳐 나올 수 있느냐? 네 육신으로부터. 더 간단하게 말해서 너는 네 육신을 포기할 수가 있느냐는 거예요. 네가 지닌 육신은 누가 준 거예요? 육신의 부모가 준 거잖아요. 육신의 부모가 준 게 있다 이 말이죠.

인간은요 부모의 육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요. 아무리 애써도 아무리 집 나가고 도박하고 술 먹고 그러한 아버지를 부정해도 자기가 갖고 있는 육신의 반이 누구 것입니까? 누구한테 물려받은 거예요? 50퍼센트를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예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피부가 안 좋아요. 저도 피부가 안 좋아요.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내 안에 아버지가 피부로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내 피부에서 내친다? 결론은 빤하지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주님께서 왕이 되셔서 나를 죽여 버리면 되지요. 나는 내가 죽을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자살한다고 죽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나라는 것이 육신의 부모가 있는 그 바탕 위에 내가 형성되니까 나는 포기 못합니다. 포기 못하면 이것은 그냥 다윗으로 살지 다윗언약 속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에 못 들어간다. 이게 원래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인간도 구원이란 것 없고요, 어떤 인간도 영생이란 없어요. 왜냐하면 창세기 33장 22절에 선악과는 따먹었어요. 선악과는 따먹었어도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데 주위를 해야 돼요. 거기에 주목해야 돼요.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누가 부추겼어요, 배후에서? 악마가 부추긴 거예요.

그래서 악마는 인간아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실행에 옳기라는 거예요. 악마의 이야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 할 수 없는 건 안 되니까 할 수 있는 건 행하라, 멈추지 말고.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뭐냐? 처음에 인간이 했던 건 뭡니까? 선악과 따먹은 거예요. 근데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주님께선 뭐냐 하면 최초의 율법이죠. 하지 마라가 율법입니다.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그때부터 뭐가 됐습니까? 원수가 되었지요. 원수에게 돌아갈 몫은 뭐냐? ‘영생은 없다’에요. 천국 복음은 없다. 천국의 낙원은 없다. 이게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단호한 조치입니다. 그게 인간만 본 게 아니고 인간 배후의 뭐도 봅니까? 영원한 원수인 마귀도 같이 너는 생명 없어. 그걸 지옥이라 하는 거예요. 지옥에는 생명나무가 없어요. 이것 처음 들은 것 아니죠? 아시지요.

이 세상에는 생명나무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더 오래 살려고 해요? 우리 마음속에 뭐가 뒤틀려있는 거예요? 왜 생명나무 없어도 인간들은 나만 여기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우기는 그 우김이 도대체 누가 가르쳐준 거예요? 나는 생명나무 없어도 다시 말해서 나는 진리고 길이고 예수님 없이도 나는 나 혼자 살 수 있다고 우기는, 그것도 방법도 뭡니까? 내 행함으로 내가 살 수 있다고 우기는 그 방식은 누구한테 물려받은 겁니까?

그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거잖아요. 부모 없이는 내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주님께선 그걸 아시고 부모를 내치라는 거예요. 자식 낳았다고 좋아하지 말고 자식이 내 죄를 물려받은 거예요. 행함이 이렇게 문제되는 거예요. 로마서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구약을 전제로 생각해야 돼요. 이렇게 문제가 큰 겁니다.

인간은 자기 행한 건 생각하지 않고 뭘 생각하느냐 하면 ‘상실’을 생각해요. 상실이란 뜻은 뭐냐? 잃어버림. 처음에 인간은 이 땅에서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에 살던 곳이 이 땅이 아니에요. 어디서 살았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살았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쫓겨나는 방식으로 이 땅에 살거든요. 쫓겨났다는 거예요. 배제당한 거예요. 거부당해서 사는 거잖아요.

그러면 처음 인간이 살았던 그 에덴동산의 그러한 모습이 아담의 육신에 새겨져 있어요. 그 아담에 육신에 새겨져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까지 육신에 대대로 이어져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아담은 알지요. 에덴동산 아는데 그 아담 이후의 모든 후손들은 에덴동산을 구경하지 못했지만 무엇은 이어받았어요?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여기 쫓겨났다는 상실된 육신, 나중에 흙이 되는 육신이요.

대구에 화장터가 있거든요. 그게 포화상태에요. 부산도 마찬가지에요. 그걸 다시 이전하는 데 이전하는 데 반대하고, 그래서 또 지하로 만들어서 새롭게 더 설비를 확장시킨다 하는데 확장해봐야 또 언제까지, 꽉 찰 거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이 아무리 대구시내에 남구에 살든 동구에 살든 어디에 살든 인간이 가는 곳은 어딥니까? 딱 정해져 있지요. 화장터에요. 흙이니 흙이에요. 친구들 다 모입니다. 귀신 되어서. 나 너하고 안 본다. 안 보는 것 없어요. 본인 안 봐도 만나요. 전부 다 귀신 되어서 만나고. 어딜 가?

인간은 단독으로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자리는 단독적인 자기가 아니고 쫓겨난 자리에요. 쫓겨난 자리에서 천리만리 도망쳐봐야 갇혀있는 상태에요. 전부 다 똑같은 처지에요. 나 교회 안 나온다고요? 안 나오면 어디 갈 건데? 집에 있다. 집이나 교회나 그게 그거에요. 어차피 생명나무 없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추격대를 보내서 계속 추적하는 것은 나 너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고집이 있어요. 그 고집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유월절 보세요. 천사가 와서 다 죽여 버리잖아요. 맏아들. 어디를 내뺍니까? 북한에 올라갑니까? 천사가 김정은 무서워하겠다. 없어요. 어떤 곳도 피할 데 없습니다. 심지어 요한계시록에 재림하실 때 산아 바위야 덮어라. 나를 숨겨다오. 못 숨깁니다. 지진이 일어나도 안 숨겨져요. 빼도 박도 못하는 확정된 운명이에요.

상실된 그 육신을 우리가 물려받았습니다. 상실되었으니까 그 잃어버린 것이 뭐냐 하면 공백으로 마음 한 구석에 빈 구멍으로 남아있어요. 우리 몸속에. 그 빈 구멍을 채우기 위해서 남들이 갖고 있는 매료성, 매료성이란 것은 매혹적인 것, 세상적인 어떤 유혹거리, 남들이 다이아몬드 있으면 다이아 갖고 싶고 좋은 집 있으면 갖고 싶지요. 남들이 갖고 있는 그 매료성에 욕구를 얻어서 이 빈 마음을 허전한 마음을 메우려고 시도하는 데, 이것 실패입니다.

어느 자식은 이번에 판사 됐단다. ‘그래? 우리 애는 뭘 했으면 좋겠나?’ 그런 소리 들으면 남이 판사가 됐다는 것이 나한테 매력거리가 되면서 갑자기 허한 마음이 더 구멍이 넓어져요. ‘이놈의 자식은 지금 뭐하는지 몰라. 또 게임할 거야’ 이런 식으로 가만있는 데 남한테 뭔 소리 들으면 갑자기 원망이 가지요. 왜냐하면 자식이 내 마음속에 세상에서 들었던 매혹에 충족하면 약간이나마 내 허한 공백이 메워지거든요. 내 속에 있는 마음에 바람 들어오는 구멍이 약간은 메워진다고요. 위로를 받는단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나이가 젊으나 늙으나 싸대는 것은 그 허한 것을 메우기 위해서 오늘도 어디 가서 메우느냐, 노인정 가서 노래교실에서 박수 치면서 메우느냐. 자기의 허함을 상실된 것을 메우는 데 시간과 세월을 그런 데에 소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나이 많아서 이걸 느끼고 어릴 때는 모르느냐? 어릴 때는 그 공백을 부모의 욕망이 다 채워줬기 때문에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부모가 내 몸만 생산한 게 아니고 부모의 욕망이 오늘날 나를 만든 거예요. 요구사항이.

그러니까 자식에게 공부시켜주면서 부모가,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공짜 없다.’ ‘이만큼 공부시켜줬으면 네가 다달이 생활비 내라.’ 말은 차마 우사스러워 못하지만 생활비 주면 세상에 자식 하나 잘 키웠다고 동네방네 자랑질 한다고요. 지가 부모사랑을 아네. 요새 이런 자식 어디 있노. 동네방네 자랑이 아니고, 하면서 자랑 다 해버려요. ‘이런 자식 봤나? 나와 봐.’ 전부 다 자랑질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식이 상실된 부모의 상실을 메우는 그러니까 부모의 상실을 메우기 위한 도구로서 부모 밑에서 얻어먹고 있었던 걔가 ‘내가 언제까지 부모의 상실만 메울 순 없다. 내 상실은 내가 알아서 메운다’라는 것을 어디서부터 아느냐 하면 친구하고 유튜브 하고 채팅하면서 알게 되는 거예요. 부모하고 해봐야 자기의 상실을 메우기 위해서 나에게 늘 정신적인 압박을 가하더라.

그런데 내 친구 보니까 벌써 부모를 떠나서 자아성을 획득하더라. 정신적 자립성, 또는 독자성, 또는 독립성 이걸 서서히 크면서 찾기 시작합니다. 부모는 닭 쫓던 개 신세 된 거예요. ‘키워주니 지 혼자 큰 줄 알고 말이야’ 궁시렁궁시렁 하면서. ‘지 잘나서 큰 줄 아는 모양이지? 내가 너 키우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알아?’

엄마 생일이라고 봉투 주면 오만 원짜리 들어있는 줄 알았는데 수표가 들어있네. ‘그래 네가 아는구나.’ 갑자기 분노를 누그러뜨리지요. 사랑은 돈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돈 말고 말로 하는 것 소용없어요. 봉투 보고, 자식 잘 키웠네. 네가 돈도 없는데 뭐 하려고 나까지 신경 쓰노. 신경 쓰지 말까요? 말이 그렇단 거지.

자립성, 독자성, 독립성, 이것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부모의 이름에 의해서 살다가 내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자립성을 성취하는 거예요. 내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날마다 나에게 격려하는 거예요. 전에는 부모가 나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생각하다가 지금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내가 이런 자세로 이런 모습으로 세상에 사회에 타인에게 나설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남에게 내가 내 이름을 보인다는 것은 남에게 보여줄 거리를 얼마나 많이 챙기고 있는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자리를 따로 확보하는 거예요. 내 구역을, 내 영역을. 내 구역을 따로 확보해서 그 안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자립한다는 말은, 내가 나의 평가자요, 내가 나의 심판주요, 내가 나의 구원주로서 살아가는 것 이게 자립성이에요.

그러니까 어린아이가 부모와 있을 때 부모는 에덴동산을 쫓겨나서 원수가 되었구나. 따먹지 말라는 걸 따먹어서 원수가 되었구나. 하지만 저 어린 자식은 뭘 알겠느냐, 이래 하지요. 그 어린 자식이 점차 크면서 어떻게 돼요?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기만의 절대적인 자아성을 구축하면서 제2의, 제3의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작은 원수가 큰 원수가 돼 가는 거예요.

이 자립성을 갖는다는 말은 자체 안에서 의와 사랑을 충당하는 거예요. 외부의 것이 필요 없고 자체 안에서 정의로움과 사랑을 내가 날 사랑하면 되니까. 이걸 충당하는 식으로 자립성을 확보합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돼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데 하나님도 간섭하지 마소, 이래 나온다 말이죠.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상실을 자체적으로 맨홀 뚜껑으로 그걸 어떻게 합니까? 덮어버리죠. 덮는 거예요. 상실됨이 없도록.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하겠습니다.

인간은 타인에 의해서 자기를 구체화시킨다. 구체화란 뭔 뜻인지 아시죠. 모호하게 알던 자기가 계속 친구를 만나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확정될 수 있는 그 작업에 나섭니다. 확정될 때 사회에 나가서 나는 이렇다, 라고 명함깨나 꼭 명함 아니라도 뭔가 나는 이렇다고 규정지어서 보여줄 수 있도록 내부적으로 다지고 또 다지는 거예요. 자기 다짐 작업을 내부적으로 하게 되는 겁니다. 여기까진 뭔 뜻인지 여러분 아시겠지요.

여기서 아까 한 것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솔로몬 아버지는 다윗이 아니고 다윗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이거는 뭐냐 하면 솔로몬의 육신의 아버지가 누구냐? 다윗이거든요. 그러면 솔로몬의 아버지가 다윗언약 되려면 다윗언약 쪽에서 들어있는 어떤 분이 누구를 가위표해야 돼요, 누구를 제거해야 됩니까? 다윗을 제거하고 다윗을 통해서 다윗의 육신을 파이프로 통해서 다윗언약 되신 분이 원했던 왕이 다윗을 통해서 경유해서 솔로몬이 나오는 거죠.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들이 보게 되면 8절에 보겠습니다.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음악부터 옷차림부터해서 왕궁의 모든 시설, 그리고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금이 뭐예요? 최고로 귀한 금속이잖아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섰다. 이게 다윗 시대의 정황입니까, 솔로몬 시대의 정황이에요? 솔로몬이 누렸던 그거에요.

근데 이 솔로몬이 누리면서 이게 다 내 덕이라 했습니까, 뭐라 했습니까? 내 덕이 아니고 누구 덕이다? 아버지의 하나님 덕이죠. 진도 빨리 나갈 필요 없기 때문에 한 구절 찾아보겠습니다. 잠언 1장 1절,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이라 돼 있지요. 솔로몬이 자기가 쓰면서 앞에 누굴 거론하고 있습니까? 다윗이죠, 다윗. 그리고 전도서 한 번 봅시다. 전도서 1장 1절 봅시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지금 솔로몬은 자기가 입은 부귀영화와 모든 영광과 그것은 어디에다 그걸 부여받았나 하면 아버지 다윗과 다윗에게 왕이 되게 하신 다윗언약의 주인공, 하나님이죠. 하나님에게서 제공받는 부귀영화와 지혜를 현재 어디에 도달하고 있다? 지금 나, 솔로몬 나에게 도착한 거예요. 그런데 아까 다윗언약은 솔로몬의 아버지가 다윗언약이 되기 위해선 다윗은 어떻게 돼요? 다윗을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무슨 죄를 범하지요? 간음죄 범하지요. 또 무슨 죄 범하지요? 살인죄 범하지요. 율법에 의하면 간음죄 하나만으로도 돌로 쳐죽어야 되고요, 살인죄는 바위로 던져 죽어야 돼요.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죽어 마땅한 인간으로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이새의 아들 다윗 안에 하나님의 적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흐르고 있는 그 다윗을 죽이는 방법은 율법을 주는 거예요. 율법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게 되는 겁니다. 그 율법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고 하나님의 진노가 담겨있어요. 요즘 사람들 성경을 볼 이유가 없지요. 스스로 신인데 스스로 자기가 완전한 데 성경 왜 봅니까? 인간은 요즘 사람이나 옛날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스스로 내 안에서 절대자로 살아가는 거예요.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인생이 되기 위해서.

교회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제도 설교도 했습니다만 ‘하나님이 존재한다’ 그것 안다고 복음이 아니에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그 남자, 어떤 남자입니까? 사람들에게 얻어맞은 그 남자가 하나님이이에요. 그러면 어떤 교회가 있다 합시다. 그 교회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고 이야기를 하고,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왕으로 계신다고 하지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왕 되심을 진짜 전하는 목사라면 뭘 전해야 돼요? 사람들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된 인간들에 의해서 된 통으로 얻어터진 맞아죽었던 분을 내세우는 설교자가 그 교회에 뭐가 있는 겁니까? 진짜 하나님이 왕 되심을 모시고 있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교회에 온 교인들은 뭐냐 하면 자기가 맞아죽은,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맞아죽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기가 파괴되고 싶어서 오는 사람들이 진짜 교회에요. 내가 파괴되고 싶어서.

‘나 좀 박살내 주시옵소서. 이거 인간 안 되는 노선입니다.’ 왜? ‘부모로부터 온 육신 자체가 본성 자체가 나만 위하여 살아가는 이 본성, 이게 하나님의 원수인데 이 원수 된 인간 어떻게 손 좀 봐주세요. 어떻게 나를 부정하고 나를 박살내는 그런 말씀을 주시옵소서.’ 이게 바로 왕이 살아있는 진짜 교회지요. 내가 부서지도록. 더 이상 나를 꼴 보기 싫은 사람 만드는 것, 나에 대해서 관심 두지 않는 것, 오늘 본문처럼 나를 부수는 그분이 바로 나의 왕인 것을 즐겁게 감사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고마워하는 그 교회가 참된 교회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깨어지기를 소원하는 사람들. 왜냐? 하도 악마가 지독하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악마의 왕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파괴한다면 우린 거기서 뭘 발견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선 진정 진노의 하나님 맞습니다. 하나님의 화살과 하나님의 칼은 날카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칼로 나를 정수리를 내리치시옵소서.

원래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할 때 뱀이 공격하는 것은 예수님의 발꿈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뱀을 칠 때 뭘 쳐버립니까? 정수리를 아작내는 박살내버리죠. 뱀의 머리를 칠 것이다. 그 뱀의 머리를 치는 그 자리에 자기의 머리를 들이미는 사람, 그게 교회 아닙니까. 그게 교회잖아요.

이건 뺀질이도 아니고, ‘나 좀 알아줘. 목사님 저 좀 알아주세요. 저 사랑해주세요. 바른 인간 되게 해 달라.’ 바른 인간해서 천국 도착 못해요. 다윗을 제거하고 다윗언약의 자식이 돼야 돼요, 우리가. 그러면 이 파괴과정은 필수과정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누구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나는 평소에 누구 챙기는 식으로 산다? 나는 나를 챙기는 식으로 내가 부모로부터도 자립하는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다윗이 그냥 생각이 있어서 ‘하나님 나 쳐주세요’ 이렇게 했던가요, 다윗이 어떻게 해서 솔로몬이란 것이 자기 몸에 생겼습니까? 충돌이죠, 충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언약의 백성으로 만드는 방법은 우리의 본성을 우리가 알아서 고치는 게 아니고 마주침이에요. 충돌이에요.

다윗은 누구와 충돌했습니까? 다윗은 밧세바와 충돌된 게 아니에요. 밧세바는 좋아요. 밧세바는 예쁘고 잘 빠지고 피부도 고와보이고 탐스럽기도 하고 보암직도 하지요. 그러나 밧세바를 건드린 순간 누구와 충돌을 일으켰습니까? 밧세바가 누구 아내였지요. 우리야와 충돌했잖아요. 그 충돌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기획하신 거예요. 다윗을 다윗언약 쪽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그러니 오늘 시편 썼던 이 신앙인은 주께서 그런 조치를 해준 것에 대해서 무한한 감사를 드리는 거예요. 내가 그냥 있었으면 이거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꺼떡꺼떡 지옥 가는 거예요. 주께서 마주치게 하는 거예요. 그 우리야가 누구한테 맞아죽었습니까? 다윗에게 맞아죽었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한테 맞아죽었어요? 우리한테 맞아죽었지요. 우리 앞길에 내 손에 맞아죽은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그 길이 영생의 길이에요. 내 앞길에. <여고괴담> 학교 복도에 귀신 등장하듯이 내 앞길에 나만 아는 나로 그걸 충돌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반복해서 등장할 때 그 사람이 현재 지옥 가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천국 가고 있는 사람이에요. 10분 쉽시다.

 

 

20230911b 부산강의 : [시편]61(45:10)-부적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내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절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종속적이잖아요. 내가 왜 누구의 종이 돼, 미쳤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을 차단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건 뭐냐? 자기 독립성이에요. 자기 독립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죄로 흘러왔던지 어떻게 하나님의 조상의 진노로 왔던지 다 차단시키고 나라는 인간은 나부터 새로 시작하겠다는 거예요.

조상 때부터 흘러내려오는 죄, 진노, 율법, 이름, 하나님의 말씀 다 끊어버리고 내 인생 내가 처음부터 그 기초를 나에 대한 사랑과 나에 대한 열정, 내가 성공하겠다는 야심, 그걸 철근콘크리트로 해서 철근까지 넣어가면서 나로부터 새롭게 나라는 것을 내가 나를 작품화 만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악마가 성공한 거예요. 우리 존재 자체가 악마가 성공했다는 악마가 하나님을 이겼다는 하나의 전리품으로써 악마로부터 다뤄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인간들은 뭐냐? ‘악마도 저리 가. 악마고 예수고 하나님이고 나는 나부터 시작할 거야.’ 이게 오늘날 학교교육이잖아요. 그리고 부모들은 학교교육에서 집에 오면 부모가 이걸 양육시켜요.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철저하게 자기를 싸 발라도 그렇게 할수록 중간에 뭐냐 하면 메워질 수 없는 내 세상에 대한 욕망으로 다 우물을 흙으로 메우듯이 아무리 메우고 메워도 우물의 폭은 점점 더 커지거든요. 하고 싶은 건 다 했어, 이 땅에. 다 했는데 왜 허전하지요, 왜 허전할까요?

조상 때부터 온 죄 있는 육신을 내 선에서 온전히 처리가 안 돼요. 태어나기 전에 내가 관여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는 나에게 관여 못한다.’ 내가 ‘이런 나 만들어주세요’ 끼어들 수 있는 나는 존재하지 않았죠. 그러니까 나는 뭐냐? 나 말고 다른 타인의 힘, 또는 외부의 힘에 의해서 출생된 거죠. 자, 외부의 힘은 어떤 힘이냐?

이 외부의 힘을 알려면, 외부의 힘에 의해서 늦게 우리가 출생했기 때문에 이거는 외부의 힘에 대한 분석은 내 소관 아니고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아버지 태어나기 전, 우리 할아버지 태어나기 전, 전, 전, 전, 그 전에 인간이 있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그게 외부의 힘을 분석할 수 있어요.

그 외부의 힘, 인간이 있기 전에 외부의 힘이 인간세계에 그냥 쏟아져 들어온 겁니다. 들어오면서 인간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뭐가 들어왔느냐? 두 번째 시간이죠. 약간 어렵게 갑니다. 외부의 힘, 이 정체 이게 어디서 등장하느냐 하면 바로 신약에서 등장합니다. 신약시대에. 신약시대는 어떻게 바뀌는지 보세요.

구약에서는 인간이 있는데 죽는다, 이렇잖아요. 인간이 있었는데 죽었더라, 죽었더라, 창세기 5장에 나오지요. 인간이 있는데 죽었다고 돼 있지요. 그러면 죽음이란 의미는 인간 내부에 인간이 살지 못하는 걸 죽음이라 하잖아요. 이건 구약입니다. 신약에는 어떻게 바뀌는가? 죽음이 인간을 다루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신약성경이 얼마나 어려워요. 어렵기 때문에 구약을 통해서 신약을 봐야 돼요. 구약은 실존적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천국도 너무나 현실적이에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에요. 풍족한 육신에 먹을 게 있고 안정적인 토지가 있다면, 적당하게 일하고 적당하게 놀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인간은 그게 복이다, 행복이다. 이게 구약이잖아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이 땅 자체가 불로 타버려요.

그러니까 신약을 해석할 때는 구약을 경유해서 우리가 원하고 인간이 원하고 노렸던 것이 완전히 이건 하나님에 대해서 무산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산되는 거예요. 인간의 상실과 낙원에 대한 상실, 인간이 땅에서 일하지 않고도 넉넉하게 살았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동경 그것이 이스라엘한테는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서 구현이 돼요.

약속의 땅이 아닌 장소에서 아무리 농사 해봐야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지 아니하면 헛수고에요.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약간의 노동만, 노동 자체도 복으로 보는 거예요. 노는 것보다 낫거든요. 약간만 해도 하나님께서 막대한 막강한 생산물을 줄 정도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는 정상적이다, 그걸 보여주는 게 약속의 땅입니다. 일종의 연극무대지요.

인간은 언약을 지키면 율법을 지키면 복을 얻을 수 있다. 이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아가야 될 조건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지키면 복을 얻는데 언약을 지킨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거에요.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그 당시 율법이 있잖아요.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율법을 지시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벌써 인간은 외부에서 죽음이 주어졌어요. 죽음이 주어진 것은 인간이 아무리 애쓰고 노동해봐야 인간은 죽음을 못 이겨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면,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면 이 죽음마저도 사라지고 뭐가 되느냐? 영원한 복을 얻는 거예요. 죽어도 부활되는 거예요. 구약에도 죽어도 부활된다는 것 많이 나와요. 더 놀라운 사실은 구약에서는 살아 있는 상태에서 언약을 지키면 안 죽고 영원복락을 누리게 돼 있다고 돼 있어요. 죽은 자는 하나님께서 찬송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구약이 점차 선지서에 가게 되면 죽음이 등장해요. ‘죽지만 죽는 걸 끝이라 여기지 마라. 네가 죽어도 다시 살려줄게.’ 에스겔 37장도 그렇고 다니엘 12장도 마찬가지고. 그때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 했어요. 조건이 있어요. 뭡니까? 외부의 지시에 따라야 돼요. 율법의 지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 돼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로마서 3장 10절에서 12절에 보면,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의인은 없나니 한 명도 없어요. 다 같이 치우쳐서 죄를 범했고 하나님을 거부했어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의 이야기죠.

왜 그렇게 됐는가? 그러면 젖과 꿀이 흐르는 솔로몬 때는 좋았지요. 솔로몬 때 좋았을 때 모든 사람이 지시를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솔로몬 때에 모든 백성들이 주님의 지시를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그들이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지시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둘 중에 하난데…. 안 받았지요.

안 받았는데 왜 그런 복을 누립니까? 그게 다윗언약이에요. 왕 하나 잘하면 남은 덤으로 다 혜택을 입게 돼 있어요. 그게 다윗언약이에요. 모세언약은 모든 인간이 율법을 다 지켜야 돼요. 근데 이게 율법 지키는 담당자가 왕으로 하나로 집약돼 있는 것이 다윗언약입니다. 그게 왕이에요. 기름 부은 왕이에요. 예수님을 뭐라고 하지요? 우리의 왕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가 아니에요. 왕 한 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줍니다.

누가 이것 읽어보세요. 이사야 65장 17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기억되지 아니하지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고통스러운 게 뭐냐 하면은 내가 봐도 내가 실수 한 것도 많고 마음 씀씀이가 영 말씀하고 안 맞을 때 내가 벌을 받는 것도 문제지만 내가 성도로서 이게 개차반이고 시궁창 인생이지 이게 내가 주의 백성으로 할 인간도 아니다, 라고 이런 죄책감 있잖아요.

이 죄책감 있을 때 여러분 어떻게 해결합니까? 갑자기 성경 더 보고 하면서 알랑방귀를 뀌지요. 잘 보이려고. 나한테 벌 내린 것도 감당 안 되지만 나 때문에 내 자식들이나 내 가족에 우환 벌어지면 나 때문에 남까지 피해주니까 그건 도저히 못 참겠다. 책임성 강한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나를 치시지 내 자식을 칩니까? 이런 온갖 드라마가 생각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뭐라 돼 있느냐 하면 그런 죄를 뭐한다? 기억하지 않는다. 주님은 기억하지 않는데 우리가 왜 기억합니까? 사람이 죄를 주님이 기억하지 않음을 놓쳐버리면 인간에게 그다음부터 뭘 찾게 돼 있느냐 하면 이걸 찾게 돼 있어요. 이거는 중요하기 때문에 크게 쓰겠습니다.

인간이 주님의 약속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죄를 생각하고 그걸 깊이 있게 자꾸 거기에 빠져들고 몰입해서 자책한다고 반성한다고 했을 때에 반드시 인간이 찾고 있는 게 있어요. 두 자인데 크게 쓰겠습니다. ‘부적’입니다. 이 부적이 교회 다니기, 그리고 성경 보기, 이게 부적이에요. 수련회 참석하기, 이게 부적입니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부적이 없는 시대가 없어요. 지금은 교회 다니기가 부적을 대체하고 있는 거예요. “주여, 이번 주에 제가 바쁘지만 교회 나가 줬잖아요, 줬잖아요.” 이건 뭐냐 하면 자기 죄를 기억하고 있다는 거예요. 주님은 기억하지 않는데 우리는 마귀 들려서 동네 마귀 다 와서 귀신 다 와서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구약에는 외부의 율법을 지켜야 돼요. 신약에는 기억하지 않음을 우리 속에 담아야 돼요. 주께서 기억하지 않음을. 그러면 우리 속에 보물이 있어요. 이거는 내가 나의 행함으로 얻어진 보물이 아니에요. 주님의 행하심, 얻어맞은 예수님이란 그 남자가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에요. 기억하지 않는다. 한 대 얻어터질 때마다 기억하지 않는다. 주님이 얻어맞을 때마다 내 너 기억하지 않을 게.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마다 기억하지 않게 하옵소서.

선악체계를 알고 있는 인간으로선 도저히 상상도 안 되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누구 앞에서? 악마의 세계 앞에서. 로마서 8장에서 사탄은 뭐하는지 알아요? 맨날 우리를 정죄해요. 얼레리꼴레리 나 네 행세 다 알고 있다. 네가 5년 전에, 10년 전에, 20년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는데 정신 안 차려? 지금이라도 인간 돼야지. 맨날 동네 귀신들이 들어와서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지금이라고 새사람 돼야지?’ 맨날 그 짓하고 있어요. 어디 가서 듣습니까? 이걸 교회 가서 들어요. 교회가 부적이니까. 666 이것 하지 말라고, 베리칩 하지 말라고, 행동 똑바로 하라고. 세상에서 귀신 소리 듣고 교회 가서 교회 귀신 소리 다 듣고. 그렇게 해서 자기 의를 포기 못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의로움을.

그래서 하나님의 벌이 좀 없다 싶으면 자기 안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 자기 내부에 판돈이 모여요. 판돈이 모이게 되면 교회 한 번 빠져도 생활에 지장이 없어. 왜? 판돈이 넉넉하기 때문에. 그런데 판돈이 날아간다, 통장이 뭔가 주식했는데 날아갔다? 후딱 교회 가서 빕니다. ‘잘못했습니다. 두 달 동안 교회 안 나온 것 잘못했습니다.’ 싹싹 비는 거예요. 왜? 판돈을 잃었으니까.

판돈은 뭐냐? 내 인생 주인공이 누구다? 내가 주인공이에요. 내가 주인공인데 내 행세할 자금이 부족하거든요. 내 자랑할 자금이 부족하니까 하나님께 비는 거예요. 이게 바로 부적 같은 교회. 이래서 교회는 뭐냐? 교회는 이 세상에서 망하지 않습니다. 부적이 있기 때문에. 아쉽고 어렵고 욕심 생긴 사람 다 오게 돼 있어요. 교회가 주님을 가로막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원수고요.

그래서 신약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합니다. 이런 게 참 어려운데요. 어렵더라도 해야지요. 이것도 크게 쓰겠습니다. ‘노선 바꾸기’에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언제까지 그렇게 농락당할래. 마귀의 무기는 선악체계에요. “하나님이 너보고 똑바로 살라했지, 착하게 살라했지, 바르게 살라했지. 너 왜 그렇게 못 살아?” 이게 마귀의 필살기에요. “너 김 집사한테 말을 왜 그따위로 해. 김 집사가 사람이 좋아서 그냥 웃고 넘어갔지만 네가 김 집사 생각해봐?” 심했네. 왜 심했느냐 말이죠.

어제 낮 설교에 이랬어요. 낮 설교 잠깐 해볼게요. 영생은 누굴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면 영생이에요. 그런데 요한복음 12장 25절(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에 자기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영생 없어요. 그럼 둘을 합쳐봅시다.

예수님을 아는데 어떻게 다가서고, 어떻게 안다? 자기를 미워하면서 다가설 수 있어야 그래야 영생이에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자기를 미워합니까? 평생을 자길 위해 살아간 주제에. 시간, 간을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를 왜 미워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미워하는 티를 내요.

그게 뭐냐 하면 주의 복음과 말씀을 믿어주는 거예요. 야아 못됐다, 못됐어. 주님이 요구하는 대로 해줘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요구할 때 ‘나 주의 말씀대로 미워했습니다’를 카드를 내줘버리는 거예요. 카드를 내주면서 뭘 숨기는 거예요? 진짜 잃어버리기 싫은 것, 진짜 사랑하는 것, 나를 안에다가 그 깊은 금고에다 더 깊은 금고에다 넣어놔요. 안 들키도록. 기도해주고 헌금해주고 예배참석해주는 걸로 끝까지 자기를 포기 안 하는 겁니다. ‘주님이여 이만큼 낮아졌으면 됐습니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하고 기도하고 헌금해주는 이걸 주님 사랑하기.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나를 계속 사랑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이 인간이란 마귀 요거 셉니다, 세. 어지간히 해서 마귀 안 빠져나갑니다. 이런 식으로 변장을 한다니까. 내가 나를 지키는 부적이에요. 김 부적, 박 부적, 최 부적. 내가 나를 지키는 부적이에요.

어떻게 하는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를 갖고 있는 거예요. 내가 교회 5년 다닐 때, 10년 다닐 때, 20년 다닐 때 그게 역사스토리, 하나의 서사구조가 이뤄져요. 하나의 이야기가 있어요, 줄거리가. “주여 내가 이 정도로 했습니다. 주님 5년 전에 은혜 줬잖아요. 은혜 지금 간직하고 있습니다. 10년 전에 기도원에 기도할 때 큰 혜택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가정이 확 피었습니다.” 이런 걸 가지고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지 않는 사랑할만한 이유로서 하나의 재료로 집어넣는 거예요. 하나의 열차가 돼요.

아이고, 이 마귀를 못 이기는 게 당연하지요. 마귀 따라서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오늘날도 마귀 못 이기는 것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 못 이기는 것을 한 방에 박살낸 게 뭐냐?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너 지금 왜 그리 바쁘노?” “주의 말씀 지키기 바쁩니다. 영광 돌리기 위해서.” “그러지 마. 네가 무슨 짓을 하던 내가 기억하지 않을 게.” 그러면요? 예수님이 행하신 것만 기억하세요. 이것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고 하고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 행한 것만 생각하는 것,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를 부인하면 되잖아요. 인간은 자기를 부인 못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부인해야 된다면서 왜 부인 못한다 하느냐? 충돌이에요. 끊임없이 충돌하는 거예요. 성도가 가는 영생의 길은 좁은 길인데 좁은 길을 갈 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 되도 않게 남한테 욕 얻어먹어요. 말도 안 돼요. 사람이 좁은 길을 갈 때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이 뭐냐 하면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이 뭐냐 하면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는 게 외로움이에요. 이 이야기하면 길지만 짧게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늘 확인하는 방법으로 살아가거든요. 확인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어린아이가 혼자 놀 때 장난감이 뭐냐 하면 실타래 던지고 잡아당기고, 실타래 던지고 잡아당기고 그런 것 해봤지요. 문방구에서 팔아요. 고무줄 있어서 고무줄 던졌다가 도로 자기로 회수하는 거예요. 애들 시간 보내기 괜찮아요. 갔다가 오는 것 재미있다고요.

인간은 어떻게 사느냐? 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누구한테 말을 건네요. 말을 건네면서 속으로 ‘그래, 그래 나 훌륭하다 그 말이요. 알았어. 내 회수할게.’ 누가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내가 살 기쁨이 있다고요. 남편에 아침에 출근하고 여자 낮에 뭐합니까? ‘설거지 했지? 우리 짧게 하자, 짧게.’ 9시부터 전화해서 짧게 한 게 11시 반. 이제 끊어야겠다. 점심해야지.

왜 말을 합니까? 외롭지 않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외롭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주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해요? 전화를 걸어주는 타인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나이 많아서 남편 죽고 아내 죽고 자식 연락 안 오고. 자식 연락 안 오는데 왜 그렇게 외로움을 느껴요? 자식이 있어줘야 내가 부모라는 인식이 유지가 되잖아요. 내가 유지가 된다고요.

인간은 주님 없이는 살아도 내 없이는 못 삽니다. 그런데 내가 살리는 방법은 말하는 거예요. 끊임없이. 그러니까 교회가 어떠니저떠니하지 말고 나와서 이바구를 떠세요. 부부가 제일 괴로운 게 말 안 하는 거고요. 그게 여자의 무기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살 때 주고받고, 주고받고 베개 집어던지고, 그것 재미있는 거예요. 내 성질 받아주는 자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그 인간 베개 피하다가 모서리에 부딪쳐 죽어보세요. 그다음부터는 말할 남편이 없잖아요.

인간의 교묘함의 극치는 뭐냐? 예수님의 죽으심에 애도를 표하면서 자립하는 방식. 애도가 뭐지요? 슬픔을 표현하면서 그 방식으로 스스로 자기가 나는 나로 인하여 살려고 하는 방식, 이게 인간의 교묘함의 극치, 마귀의 극치입니다. ‘십자가 죽으신 예수님 얼마나 불쌍하노. 내 죄를 위해서 돌아가시다니. 난 매일같이 애도할 거야’ 그게 십자가 믿는 겁니까? 아니지요.

지금 이게 전부 다 뭐냐 하면 혼자 노는 게임이거든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혼자서 도 닦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끊임없이 충돌하는 거예요. 끊임없이 마찰과 충돌해야 이게 힘이라 하는 것은 충돌할 때 생기거든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서. 상대도 깨지지만 누구도 깨져요? 내가 깨지지요. 우리는 원래 백 번 깨져도 싸요. 그러나 깨지는 순간 우리는 상대에게 뭘 느끼느냐 하면 미움을 느껴요.

어제 낮 설교하면서 상당히 도발적인 과학적인 근거도 없는 소리한 것 같아서 좀 미안한데 뭐냐 하면 사람이 아픈 이유는 지독하게 미운 사람이 있어서 아프다고 했거든요. 왜 제가 함부로 그런 이야기하는 이유가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는 방어기제가 있어요. 방어하는 본능이 있어요. 그런데 미운 사람이 있으면 갑자기 근육들이 눈동자부터 시선부터가 경직돼요.

교회 앉아 있는데 평소에 안 나오는데 내가 가장 미운 사람이 와서 자리 넓은데 많거든요. 떡하니 옆에 앉는다고. 한 번 해보겠다는 거예요, 뭐예요? 옆에 온다고요. 옆에 가까이 있으니까 내가 행동 하나하나가 숨소리까지 그 사람의 시선의 표적이 되겠지요. 죽이고 싶은 거예요. 딴 데 앉을 데 없느냐, 왜 내 옆에 오냐? 평소에 나한테 감정 많다 이거지. 뭘 얻겠다고 나한테 붙어서 전에 못다 한 감정 나한테 오늘마저 풀겠다는 거야, 뭐야. 진짜 한 번 해보겠다는 거야, 뭐야.

할 때 몸이 아파요, 내가. 상대가 그런 생각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는데 그런 상상만 해도 내 몸이 소화불량, 위경련, 관절, 스트레스, 암 걸리지요. 나중에 변비에 대장암까지. 시력약화, 심지어 청각까지. 뭐하고 했는데 안 들려. 온 전체가 세포가 단합하는 그 순간 적이 왔을 때 방어본능에 의해서 단합해서 세포가 제대로 가동이 안 돼요. 작동이 안 돼요. ‘에이 더러워서 오늘 집에 간다.’ 내가 견딜 수 없어요. 피하지요.

보기만 보아도 미운 것을 어떻게 해소합니까? 해소 됩니까? 아니 이유가 없다니까. 보기만 보아도 미운 걸. 자, 왜 미울까요? 여기 봅시다. 12절에,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이게 솔로몬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인데 솔로몬이 다윗언약의 자식이라는 조건 하에 장차 오실 메시아를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13절,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했지요.

누가요? 누가 이렇게 금 옷을 입는다 했습니까? 왕의 딸이죠. 왕의 딸이에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솔로몬의 딸이잖아요. 지금 솔로몬의 딸로 확장시켜서 모든 하나님의 성도로 확장시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솔로몬의 딸은 다윗언약에 의해서 솔로몬 우리 아버지 덕분에 공짜로 혜택을 입었으니까. 금 옷을 입었으니까. 이래 봅시다. 그래서 구약 해석도 만만한 게 아니에요. 쉬운 게 아닙니다.

언약이 쭉쭉 올라가다 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 야곱언약 올라가잖아요. 모세언약 가지요. 그다음에 지금 어디에 극상입니까? 다윗언약까지 왔잖아요. 다윗언약에선 더 이상 언약이 없어요. 바로 신약의 새 언약까지 이어진다고요. 그러면 이 다윗언약의 최후의 완성된 상태가 다윗언약의 자식이 누굽니까? 솔로몬이라 했지요. 아버지가 우리야에요. 희생된 자에요. 여러분 어렵더라도 좀 참으세요.

a-topos, a 다음에 끊는 게 좋아요. 아토포스가 뭔 뜻이냐 하면 ‘여기에 장소가 없음’이에요. 아토포스입니다. ‘아포토스’하면 이건 정유라가 돼요. 정유라 누군지 모르지요. 부모 빽으로 출세하려했던 정치권의 딸이지요. 시험문제 정답이 아토포스인데 아포토스도 맞다 한 거예요. 특혜 줘서. 그런 게 있습니다. **https://news.tf.co.kr/read/ptoday/1671309.htm

아토포스 a(없음), topos(장소) 아무것도 없는데 증상은 나한테 흘러들어온 것, 그건 뭐냐 하면 아토피, 근지러워. 근지러운데 이유를 모르겠어요. 어디에 근지러운지 모르겠어요. 뭔가 간지러운데 왜 간지러운지 모르겠어요. 정작 간지러움은 증상이에요. 긁으면 해결됩니까? 안 되지요. 긁으면 더 간지러워요. 그러면 죽도록 긁으면 나중에 진짜 아프지요. 그게 반복이 되는 겁니다. 장소 없음.

어렵더라도 잘 들으세요. 다윗언약에 의해서 발생된 게 뭐냐 하면 성전입니다. 새 언약 올 때까지 성전이 아토포스, 지상에 없는 장소로 성전이 이동해버려요. 어디에 실려서? 성신에 실려서. 이게 에스겔에 나옵니다. 그럼 이 땅의 성전은 가짜지요. 가짜니까 주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바벨론 나라가 와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어떻게 됩니까? 불태워버리죠. 스가랴에 보면 뭐냐 나오느냐 하면 이거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도 사람의 행함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뭐가 만들어진다? 성전이 만들어진다는 예언을 스가랴를 통해서 합니다.

그러면 다윗언약의 집대성, 다윗언약에 주어졌던 솔로몬 같은 모든 영광, 아니 솔로몬보다 더 월등한 그 영광성은 어디에 있어야 주어지는 겁니까, 어디에 합류해야? 성전에 합류해야 되지요. 그렇다면 이거는 시편 84편에서 나는 참새도 제 집을 짓고 제비도 보금자리를 얻지요. 나는 뭐로만 족하다? 성전의 문지기로 있어도 족하다는 그 내용, 그 내용을 여러분 이해하시겠습니까? 내가 있음에 복을 주는 게 아니고 내가 어디에 합류하면 복을 얻는다? 성전이 있는 곳에 합류함에 복을 얻는 거예요. 세상의 성전은 날아가 버리니까, 세상에 성전은 없으니까.

그럼 나 위주가 아니고 주님은 어디 위주다? 개인적인 나 위주가 아니고 성전 위주였어요. 성전은 뭐냐 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했지만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을 성전이라 합니다. 주의 이름이 있는 곳. 슬슬 사도행전 2장에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무엇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무엇을 얻으리라? 구원을 얻으리라.

분명히 구원은 없어요.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 없습니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런데 누가 왔다는 말입니까? 하늘에 있는 성전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하나의 UFO처럼 오신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오느냐 하면 얻어맞는 모습으로, 인간에게 미움 받는 모습으로 오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가는 길을 뭐로 막아요? 우리가 가는 길을 성전이 막는 거예요. 십자가가 막으면 그 사람은 지금 영생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십자가가 안 막아요. 그러면 그건 맛이 간 거예요. 인생 끝났어요. 그거는 지옥은 당연한 겁니다.

사람들은 부적을 원하지 우리 인간에게 맞아죽은 분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에게 맞아죽은 분을 만약에 우리가 원한다면 그것은 뭐냐? 내가 있어도 그것은 무의미하다는 고백일 뿐이거든요. 내가 무의미한 게 아니고 의미 있다면 나한테 칭찬해주고 내가 잘했다고 격려해주는 나한테 의미를 더욱더 실어주는 그 사람을 메시아라고 믿게 돼 있어요. 완전히 가짜지만.

그런데 예수님은 사도 바울 한 것처럼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겠다는 말은, 십자가는 뭐냐? 모든 인간한테 버림받은 자에요. 모든 인간에게 싫어버린바 된 자에요. 그분이 내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것은 우리는 땡 잡은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해도 죄 밖에 지을 게 없구나. 그런데 문제는 주께선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찾아온다는 겁니다. 계속 이야기해봅시다.

다윗언약 이후에 솔로몬 이후에 성전이 만들어졌는데 솔로몬이 성전 만들 때 3년 6개월 걸렸는데 준비기간 6개월에 짓는 것 3년, 그 성전을 솔로몬이 지었을 때 하나님이 여기에 나타났습니까, 안 나타났습니까? 나타났어요. 나타나서 조건을 줘요. 무슨 조건이냐 하면, “네가 이 땅에서 죄를 짓거나 전쟁에 패하거나 몸이 아프거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내가 너를 다시 치유해주고 죄를 용서해줄 게” 이렇게 했어요. 이 말은 뭐냐? 이 효과 나타나면 성전이 그들과 함께 있을 경우에만 그래요.

요나가 물고기 속에 있으면서 어느 쪽을 보고 기도했습니까? 어느 쪽인지 몰라요. 나침반 있은 것도 아니니까. 그냥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더니만 요나가 죽음에서 나왔잖아요. 이 말은 내 위주입니까, 성전 위주입니까? 성전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는 거예요. 성전에만 의미 있고 나는 의미가 없어야 돼요. 자칫하면 내가 의미 있어버리면 성전 의미를 내가 훼손하고 가리고 방해하는 존재가 되니까 안 되거든요. 성전은 주의 이름이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해서 간다고요.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하면 자기를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현재 지키기 위해서 이런 성경 내용을 자기 앞으로 차곡차곡 복음지식으로 성경지식으로 가득하게 해놓고 안에는 자기가 멀쩡하게 있는 겁니다. 자기가 안 다치게 자기를 지키는 방식으로. 그러면 봅시다. 주님께서 다윗 해서 여기에 성전이 날아가요. 솔로몬 이후에 성전이 날아갑니다. 이게 성경 어디에 나오느냐? 이게 나라가 둘로 나눠져요.

‘나라가 둘로 나누어진다.’ 이것을 스가랴나 에스겔에선 이게 뭐냐 하면 이것을 막대기가 둘로 분질러졌다는 거예요. 원래 하나의 막대기인데 둘로 작살났어요. 그러면 그게 온전한 막대기입니까, 온전하지 않습니까? 온전하지 않지요. 이게 뭐냐 하면 결국 이스라엘 내부에서 단절을 느끼는 거예요.

방법은 그러면 다시 오실 다윗, 다시 오실 메시아는 뭐부터 해야 되느냐 하면 남북으로 갈라진 끊어진 막대기를 하나로 이어야 되겠지요. 그게 에스겔 37장에 나옵니다. 요셉과 유다를 하나로 이어진다는 거예요. 지금 제가 왕의 신부가 뭐냐를 설명하면서 계속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19절,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한 막대기가 되게 하지요. 자, 묻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지파에서 왔지요? 요셉 지파입니까, 어딥니까? 유다 지파지요. 유다 지파에 붙게 돼 있어요. 지남철처럼 자석에 붙게 돼 있는 거예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유다 지파로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는 일은 예수님 혼자 십자가 지고 혼자만 구원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있잖아요, 열두 지파. 열두 지파를 유다 지파 중심으로 예수님 자기 지파 중심으로 다 흩어진 자기 백성을 끌어 모으는 작업을 해야 돼요. 작업을 할 때는 그들의 죄를 기억치 않아야 돼요.

만약에 그들의 죄를 다시 지적해버리면 그 사람들은 율법으로 해서 ‘알았습니다. 내 죄는 내가 알아서 착하게 살게요’ 이렇게 돼버리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언약, 내 살과 내 피를 준 의미가 없어져요. 그럼 누가 좋아요? 마귀만 좋아해요. ‘그래 예수 믿었으니까 바르게 살아야지.’ 이거는 마귀만 좋아하는 거라고요. 주는 예수님의 피는 모든 걸 다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릴 위해서 드릴 제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이새의 아들로 난 유다 지파로 오신 메시아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기 유다 지파에 다른 지파를 끌어 모아서 하나의 나라를 만드는 거예요. 그 유다 지파로 오신 분이 왕으로 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왕의 딸이 되는 거예요. 누가? 성도가. 솔로몬 때 솔로몬이 부인들이 많았잖아요. 공주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공주가 무슨 착한 일한다고 금 옷을 입고 돌아다니겠습니까? 이거 누구 덕분이에요? 솔로몬 덕분이죠. 솔로몬은 누구 덕분입니까? 다윗언약의 덕분이죠.

그 솔로몬과 다윗언약의 아름다운 완성의 모습은 장차 오실 진짜 다윗의 자손, 솔로몬이 다윗의 자손이잖아요. 그건 육신이고 진짜 다윗의 자손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을 위해서, 이런 것도 참 어렵다만. 다윗이 먼저 있고 솔로몬 있잖아요. 신약은 그게 아니고 예수님 먼저 있고 다윗이 나중에 있는 거예요. 모르겠다. 알든 말든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이걸 이해해야 돼요.

상처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주님이 계신 거예요. 우리 상처 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상처를 말하는 거예요. 주님의 상처가 먼저고 주님은 그것 때문에 오신 거예요. 십자가의 약속이 먼저 있고 그것 때문에 주께서 오신 거예요. ‘주님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안 믿어서 십자가 졌다.’ 이게 아니고 십자가를 원래 계획했어요. 그게 에베소서 1장에 나옵니다. 이번 수련회 에베소서에요. 아예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엄청나게 장벽이 있지만 해봐야지요. 초장부터 예정론 아닙니까.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우릴 예정했다.

그러니까 지금껏 우리들이 안일하게 교회 다닌 것은 부적 하나 달려고 온 거예요. 부적 하나 그려볼까요. 2층 올라오다보니까 밑에 부적 하나 붙어있어요. 여러분 봤지요. 부적 왜 붙입니까? 누굴 보호하기 위해서 붙입니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불이지요. 그거나 내 보호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거나 둘 다 부적인데.

우리는 왕의 자녀에요. 나를 따로 독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고요. 지금까지 내가 된 것은 뭐다? 하나님의 은혜다. 예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 자체가 예수님의 작품이고 선물이에요. 사나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우리가. 내 걱정을 내가 왜 합니까? 자꾸 내 걱정하니까 지나가는 동네 귀신들 다 달라붙는 거예요. 일곱 귀신 다 들어오는 거예요.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했는데 아까 처음에 강의했지만 시편 45편의 신앙인은 지금 자기가 기뻐요. 왜? 지 잘나서 기쁩니까, 아니면 자기가 왕을 묘사해서 기뻐하는 겁니까? 왕을 묘사하는 게 너무 좋아서 기뻐한다 했어요. 그게 바로 왕을 증거하는 증인의 역할 아닙니까. 16절 봅시다.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누리고 있는 왕의 세계, 통치, 통치력, 세계 다스림, 천국이 지옥을 다스림, 그 다스림에 누가 합류한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도 같이 합류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너희들이 누가 높으냐고 따지지 말고 너희들이 열두 고을을 차지하고 너희들이 나처럼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루살렘의 문들이 열두 사도의 문들로 짜여 있잖아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의 출입문 역할을 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구원받은 것처럼 구원받는 자가 너희가 문이 되어서 너희를 통해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그들 생활공간에서 천국의 문이 되는 거예요. 왜? 자기가 작살났기 때문에, 날마다 작살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마귀에 속해서 자기를 위해서 사는데 우리는 주님께서 그걸 방치하시고 십자가로 가로막아서 너는 너를 위해서 네가 있는 게 아니고 왕을 위해서 있다는 것, 그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 세상에 천국으로 가는 우리의 문이 되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쓰면 되지요. 자기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귀한 잡니다.

끝으로 이 말씀드리면 어제 제가 빌립보서 본문을 인용했잖아요(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기억나십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되는 이유가,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 위해서. 내가 주님의 존귀에 방해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물론 우리가 하면 안 되지만 성령께서 그렇게 해주실 거예요. 충돌을 통해서. 우리 성질 다 나오게 만들고.

제 아는 어떤 분이 맨날 피해의식에 빠져있는 사람이에요. ‘남들이 자꾸 나를 힘들게 한다.’ 연세가 거의 팔십 가까이 되신 분인데, ‘평생 동안 나는 자식에게 사람대우 못 받고 그렇지만 나는 자식에게 할 도리 다 했다. 일찍이 남편 죽고 난 뒤에 나 혼자 살면서 자식 뒷바라지한다고 힘들었다.’ 그걸 동네방네 이야길 다 해서 다들 그런 줄 알아요. 자식만 욕 얻어먹게 된 거예요. 전부 다 ‘못된 자식, 세상에 부모가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도 어떻게 자식이 되어 저 밖에 모르느냐.’ 말이죠. 그다음부터 자식의 잘못된 것 찾아내기에 주위 사람들 혈안이 되죠.

나중에 보니까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자식이 좀 잘해줘도 그걸 당연한 걸로 여기는 거예요. ‘더더 내가 너한테 해준 것보다 모자라 더 해줘야 돼.’ 왜 나이 많은데 그 놈의 자존감, 자존심은 이게 왜 강화되는지. 대구강의에서 했잖아요. 할머니들이 순진한 게 아니고 순진한 척하고 있다고. 남편 죽고 혼자 사니까 갑자기 자기 방어태세가 더욱더 철갑이 철 방어체계가 더 강화된 거예요.

본인이 몰라요. 자기가 점점 더 미쳐가고 있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맨날 이게 레퍼토리라. 누구 만나서 했던 소리 또 하고, 자식 키우면서 고생한 것 또 하고, 또 하고. 이게 동정인지 어떤 자기 것 챙기려 하는 영업 멘트인지 스스로 자립하는 수완인지 이것도 한두 번이지 남는 것은 뭐냐? 독한 생존의 투쟁의지, 완전히 히틀러에요. 투쟁의 의미만 쇠뭉치로 밀도 높은 단단한 중량감 있는 내 것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는 그 지독한 의지=인간. 더했다간 욕 얻어먹겠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우리 자신을 얼마나 독하고 나밖에 모르는지를 우린 상상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묻지도 않으시고 십자가 피를 흘렸는데 그 피가 왜 소중한지를 저희들 날마다 부딪히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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