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6강-2010여름수련회

아빠와 함께 2014. 1. 3. 17:15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100802레위기6강종말의종말f

 
6강


언약갱신을 하면서 모세가 산위에 갔을 때 산 밑에서 언약을 깨어 버려서 언약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갱신된 언약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중심으로 편성됩니다. 모세 중심으로 편성된다는 것은 대제사장이 개입되는데 그러면서 여기에서 분리가 일어납니다. 제사장과 일반 회중들 , 일반 백성들과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분리가 일어나면서 하나님과 제사장 사이에 거룩이라는 절차를 통과하지 않으면 언약갱신이 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과 대제사장과의 관계가 그대로 제사장과 백성들 사이의 관계로 이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대로.

조금 전 이야기 한 것처럼 인간이 직접 신을 만날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런 위치가 못됩니다.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길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데 그 숨겨놓으신 길이 무엇인고 하면 언약이 갱신된 길이고, 거기서 중간에 누굴 만나는고 하면 제사장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진짜 언약을 아는 사람은 제사장에 대해서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저분이 등장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는 구나, 우리를 구원하실 의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그분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이 제사장 누구에게 지시 받으면 처음에는 고맙습니다, 하겠습니다 하다가 자꾸 지시 받으면 너는 뭐고 이렇게 나오죠. 대표적인 것이 고라 자손이 반역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출애굽에서 나왔는데 우리도 다 레위지파인데 너는 뭐냐 이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피와 기름으로 언약을 카파르로 덮어 주었는데 덮어준 것을 치워버리니까 땅 밑에서 저주가 올라오고 향단에서 불이 나와서 그 고라 자손을 불태워 버립니다.

여러분들이 호텔 방에 샤워하는 곳이 있죠.
여러 군데서 물이 쏟아져 나오죠.
그런데 민수기 이쪽에서 불이 나옵니다.
불이 지금도 사방에서, 하늘에서 땅에서 쏟아져도 마땅한데 뭐 때문에 불에 타지 않습니까?

주께서 건질 자를 건지겠다는 의지가 아직도 남아 있기에 아직도 불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홍수가 일어났을 때 홍수가 일어나지 않는 장치가 인간들이 착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장치가 내장되었기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노아 언약이라고 합니다.

노아언약이 장착된 사람을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하고 노아 언약이 장착되지 않는 쪽을 저주 받았다고 합니다. 또 분리가 일어나요.

함과 가나안, 그리고 샘과 야벳이 같은 장막으로 분리됩니다.
그 장막이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물로 저주해도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은혜를 인하여 주님의 물의 저주를 막아 놓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선인이든지 악인이든지 나쁜 자, 좋은 자 관계없이 전부다 공짜로 햇빛주고 공짜로 비추면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 그들이 살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지옥가도 하나님께 핑계치 못합니다.
받은 은혜가 많기 때문에, 군소리 못합니다.

그런데 물로 할 때에는, 언약이 갱신되기 전까지는 물만 차단하면 됩니다. 그리고 다음에 심판하실 때 또 물로 심판이 오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물로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마저 인간들이 언약을 깨어 버리니까 마지막 갱신하는 것이 새언약이며 그 언약은 불로써 심판하기 위해 불을 차단하기 위해 새언약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주변 사방이 지옥의 불로써 둘러싸였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 십자가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 거기서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라고 불교 중에게 이야기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맞아요? 당신이 감정적인 사람이요 이성적인 사람이요라고 물을 겁니다. 합리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충동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까라고 역공격 당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 위해 때가 되매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에 저는 예수님을 겨냥하신 성경말씀을 모두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괜히 믿음도 없으면서 복음 아는 척하다가는 그런 역공 받아버리면, 맞아 내가 착각할 수 있을지도 몰라, 맞아 맞아. 주일날 교회 와서 들을 때에는 그것이 맞는가 하다가 문 열고 나오면 세상이 맞는가 하다가.

벌써 육대 일이잖아요. 일요일 시간은 하나 밖에 없지만 저쪽은 육이잖아요. 갑자기 많은 쪽으로 휩쓸려서 이제는 말씀이고 뭐고 돈 버는데 정신이 없어가지고 죽을 때 한번 올게요 하면서 확 끊어 버리죠.

지금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제사장 이야기인데. 제사장이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는 죽어 마땅한데 오 저분은 살아있네! 당신은 왜 살았어요라고 우리가 제사장에게 물으면, 제사장은 내가 당신도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델입니다라고 하죠. 예수님 왜 부활했어요라고 물으면, 당신들의 부활에 내가 부활의 첫 열매고 그 다음 차례는 여러분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그러면 대제사장과 우리가 철저하게 구별되어야 하고 차이가 나야 되죠.
그 차이나는 것이 레위기에서는 먹는 것 갖고 합니다.
아주 하나님이 치사하죠. 먹는 것 가지고 시비 거는 것 치사하죠.

원래 제사는 번제죠. 번제에서는 대제사장이든 누구든 아무도 못 먹습니다.
강줄기에 두꺼운 줄기로 온 번제는 아무도 못 먹는 제사인데, 갈라진 제사에서는 번제 외에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에서는 제사장과 아론과 그 가족만이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제자장이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제사장 너는 이 땅에 살아도 괜찮아 라고 인정해 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안 되는데 제사장 살아있다고 인정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제사장마다 먹을 것 다 먹고 챙기고 있으니, 그러면 제사장이 어떻게 해서 이 땅에서 살아도 되는지 인정받았어요 라고 하면, 하나님과 제사장의 관계에 있어서 속죄제, 번죄, 화목제, 그러한 속된 것이 거룩으로 넘어오는 절차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겠죠. 그러면 그 소리를 듣고 일반 회중들은 오직 우리 제사장이 살아 있어야 우리가 산다. 제사장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그것이 갱신된 모세 언약의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농사짓는 일에 관심 두겠어요 제사장 일에 관심 두겠습니까?
제사장일에 관심 두겠죠.
그러면 곡식에서 난 첫 열매, 양의 첫 새끼는 누구에게 드리겠습니까?
제사장에게 드려야 하겠죠.

하나님께 드린다고 위로 던져 봐도 중력의 법칙에 의해 땅에 떨어져 버리죠.
여러분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1번 건물높은 은행 제일 꼭대기 금고에 둔다. 이것은 무너지면 땅에 내려앉습니다.
2번 교회갖다 바친다.
3번 목사님 용돈 쓰라고 드린다.
4번 그냥 자신이 간직한다.

몇 번입니까?

4번이죠 뭐

있어도 내 것 아니고 하나님 것이라 한다면 그 자체가 땅에 쌓아둔 것이 하늘에 쌓아 둔 것으로 교체가 됩니다.

극동방송에 생방송한번 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네가 이렇게 하라는 것은, 산상설교의 특징을 아셔야 해요. 그렇게 해 봐야 네가 안 된다. 그래서 네 자체에 문제 있다는 것을 알아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라는 말씀은, 만날 왼손을 뒤에 감추고, 붕대 감고 안보이게 하고, 그것도 모지라 전기톱 갖고 잘라버려 보아도.
인간의 두뇌는 왼손 의식이 남아 있으니 두뇌까지도 잘라 내어야 합니다.
죽어라 이야기입니다.

산상설교는 너에게 문제 있는 거야. 산상설교 후 내려오니 문둥병자를 만납니다.
레위기에서 문둥병자는 곧 저주받은 자요, 저주받은 자는 거룩한 곳에 들어 올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언약이 갱신되었기 때문에 축복받아 들어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상이 문둥병입니다.

그 당시 율법시대에서 문둥병은 저주 받은 것으로 사람 취급도 안했습니다. 접촉하면 저주가 접촉되기 때문에 레위기에 의해서, 계속 진영밖에 있어야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구회말 투아웃 투 쓰리에서 역전시켜 버렸어요. 거룩한 분이 찾아가시는 겁니다. 항상 영업원이 찾아가야 돼요. 기다리지 말고 , 찾아가는 영업, 만났죠.

아브라함 언약은 법이 없죠. 그냥 나를 덮쳤죠. 주님이 갖고 있는, 품고 있는 취지가 문둥병자에게 덮친 것입니다. 주님의 덮치심은 옛날에 있던 모든 율법, 레위기의 성취인 것을 네가 그냥 무상으로 깨끗하게 된 것을 가지고, 레위기에 입각해서 그 재물을 현직 제사장에게 갖다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온 것은 십자가 지기 위해 오셨다고 하십니다. 십자가 의미가 무엇인가. "네가 지은 죄를 마지막 갱신 언약으로 내가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내가 왔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다.

나는 지금 혼인잔치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신랑이 있어 같이 기뻐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자신을 치면서 마치 그것이 율법의 정신인양 곡해하고 있구나. 신랑이 함께 있음으로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

율법 갖고 노는 인간들은, 법 갖고 따지는 인간들은 옛 술을 옛 부대에 담는 것이고 신랑과 함께 있는 것은 새 술을 새 부대에 새로 담는 것이다. 내가 줄 수 있는 포도주는 내 피다. 이것으로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다 이루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일어나는 코스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피로 산 교회입니다.

제사장들은 그 다음부터는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제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참 하나님의 거룩한 제물을 먹는 인간도 탄생하고 참 희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으면 제사장이 다시 이야기합니다. 언약이 갱신되었기 때문에 내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러면 제사장이 먹는 모든 제물은 그 자체가 속죄 과정 끝남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어 양에게 안수하고 잡으며, 제사장에게 내 죄를 어떻게 해 주세요 라고 하면, 알았어요. 가세요라고 하면 또 묻습니다. 어떻게 진행됩니까? 제사장은 알았다니까. 기다리라니까. 그러면 또 묻습니다. 내 것은 . 그러면 제사장이 알았다니까 라고 합니다. 나중에 다 끝나고 난 뒤 입을 다시면서 아따 그 뒷다리 맛있다.

어떻게 저의 죄가 사해졌습니까? 물으면
제사장은 네 라고 합니다.
또 묻습니다. 무얼로요?
제사장이 대답합니다. 고기 씹고 있잖아요.

제사장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평민, 족장, 온 회중, 제사장 중에서 제사장과 온 회중에 대한 고기는 제사장도 못 먹습니다. 왜냐하면 그 피가 성소에 뿌려야 하기 때문에. 제사장에게 거룩을 안겨주는 그 장치에 대한 것이 우선이기에, 나머지는 성소 갈 필요 없이 제단으로 끝나는 것은 제사장이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일반 평민들과 족장이 드린 속죄제는 고기가 맛있다 하면서 그것으로 마감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10장에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 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가로되 이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뇨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그 피를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였으니 그 제육은 너희가 나의 명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할 것이니라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화께서 선히 여기셨으리요”16-19

이것이 레위기 해석에서 중요합니다. 사건을 두고 논쟁을 할 때 그 논쟁 충돌과정 속에서 숨어있는 레위기의 진정한 뜻이 비로소 비춰주는 계기가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하나님께서 법 지킨다고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법은 위반을 통해서 비로소 법의 진가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제사가 끝나고 난 뒤. 찌지직 번쩍 번쩍하면서 그 제사의 파급효과가 전 진영에 퍼지게 되면 그다음 나오는 것이 분리입니다.  속됨과 거룩은 오로지 뭐가 거룩인가. 제사장의 취지가 남아 있으면 거룩한 것이고, 제사장의 취지가 남아 있지 않으면 속된 것이고 라는 새로운 시대의 언약의 관점이 개입되는 시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음식을 할 때 굽이 갈라진 것과 갈라지지 않은 것(레위기 11장) , 굽이 갈라지지 않은 대표적인 동물이 무엇이 있죠?

돼지.

그리고 하늘에서만 놀든지, 아니면 땅에서만 놀든지, 이건 땅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어중간한 것. 네가 하늘에서 놀아, 땅에서 놀아. 하늘에서 노는 것이 모습은 왜 짐승같냐?

분명한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 짐승들, 전부다 속된, 더러운 짐승들입니다.

더럽다 해서 바이러스, 세균이 몇 마리 묻었는가를 조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갱신된 언약.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죄를 속해 주는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죄를 덮어 줌으로서 동거하게 만드는 원칙을, 유치하게 동물과 음식 가려 먹기를 통해서 그것을 전달하십니다. 또한 이것을 이스라엘 생활 전체 속에 확신시키려고 하신다 이말입니다.

이제 이해되시죠?

또 어떤 박사처럼 돼지고기 몸에 안 좋고 강의해 가지고 옛날 어떤 사태가 벌어 졌습니까?
이상구 박사죠. 안식교 교인이 레위기를 그렇게 해석해 가지고.

돼지고기 먹으면 건강에 안 좋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건강학 적으로 이미 레위기에 그걸 심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죽어 빨리 천당 가고 싶은데 그런 이야기는 살고 싶은 사람에게 이야기 하라 말이죠. 사도바울의 소망은 죽어서 주님과 빨리 거하고 싶은 것인데.
그런데 다 통했어요.

살 빼려고 하는 사람 다 통해서요. 살 빠져서 죽으니 살 쪄서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건강하기 때문에 복 받은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할 제사장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장소에서 기거하느냐 그 원리를 아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구원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15절에 나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 살게 하심이라. 얼마나 기능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능적으로 보십니다.
너는 어떤 사명을 갖고 있느냐? 어떤 쓸모 짝이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레위기 11장2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오늘날짜 첫 강의에 한 것을 그대로 적용시켜 봅시다.
여러분 이 세상에 먹을 짐승 있고 먹지 못할 짐승 있습니다라고 제사장이 이야기하면. 당신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우리가 이런 짓을 왜 해야 됩니까? 이것이 사람과 관련되었는지 하나님과 관련되었는지 이야기해 보세요 라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이 이것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지 라고 하면,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골라 먹고 함부로 먹지마라 해야 하나님이 하나님다운지를 당신 입으로 한번 설명 해 봐라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그냥 쉐마쉐마(너희는 들으라 들으라) 하지 말고 왜 하나님께서 이런 지시를 내려야만 진짜하나님이 하나님다우신지를, 그 하늘의 속뜻을 당신이 한번 설명해 보아라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바로 하나님은 구별하는 힘으로 작용하실 때 그 힘이 하나님의 거룩한 힘이다라고 해야겠지요.

너희들은 다른 이방인들과 같이 자기 몸을 위해 먹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님의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를 보여주는 그런 사명으로 살아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3-8절을 보면 “짐승 중에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리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음으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음으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은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새김질은 다시 또 내어오는 것 이중이죠. 그냥 속 들어가 버리면 언약 갱신의 흔적이 짐승에게 없다는 것이죠.

그전에는 이런 것이 없었죠. 그러니 계속에서 이것이 주어진 것은 이미 우리가 언약에 깨어진 입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쪽에서 우리 죄책까지 다 담당해서 처리해서 언약을 다시 수정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음식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너희의 정체성을 똑바로 하란 말입니다. 정체성이 분명한 것을 먹어야 합니다.
오징어 같은 것 먹지 말고. 오징어라면 바다에 살아요. 그렇다면 지느러미가 있던지 해야 하는데 괴물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정체성이 모호한 것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약의 갱신 과정 속에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이 무시당할 때, 이런 율법도 무시당할 때 , 그렇게 무시한 죄책까지도 책임지는 그것을 흡수 통합하는 새로운 언약이 와버리면 그때는 개고기를 먹든지 게살을 먹든지 뭘 먹든지 상관없어요.

이렇게 죽어 마땅한 죄인이 아직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감사함으로 먹으면 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은혜로서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법이 없어요. 십자가 때문에 법이 날아가 버렸어요. 우리가 지킬 법은 없는데 우리는 법에 온팡 싸여 있죠.

그래서 우리는 무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율법 폐기론자가 아닙니다. 온통 율법 아닌 곳이 없으면서 우리는 유유자적, 신나요. 골라먹는 재미, 어기는 재미. 이것 또 오해됩니다. 어기는 재미라고 하면.

절기를 보면서 절기 안 지키는 이유를 아는 즐거움, 월삭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안 지키는 이유를 아는 즐거움.
더욱더 충격적인 것인 십일조 있음을 알면서도 십일조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아는 즐거움.

여러분 십일조 하지 마세요.
그냥 십 퍼센트는 내세요. 그것은 십일조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에 결정한 것이고.
십 퍼센트는 내시되 십일조는 하지 마세요.
부탁해요.

법이 이런 줄 알면서도 그걸 가뿐히 제끼는 즐거움, 이것이 복음 아는 즐거움이 아닙니까?
제끼는 것을 증거하면 안 되고, 주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알아가는 것이 되어야 되죠.

11장은 넘어가겠습니다.

12장2-5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일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가는 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육일을 지나야 하리라”

부정한 것과 성결되는 기간이 차이가 납니까 안 납니까? 차이가 나죠. 칠일동안 부정하지만 칠일 끝나면 정결케 되는 것이 아니고 삼십 삼일을 지나야 되죠.

교제에 그것이 나와 있습니다.
교제를 너무 안 보아 먼지 쌓였지요?

4번 거룩의 적용. 씨와 땅을 위해.
레위기 10장10절을 보면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여기서
그러면서 거룩함과 속됨이 짝이 이루고 더러운 것과 정결한 것이 짝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더러움은 속된 것에 해당되고. 속된 것에서 거룩으로 넘어가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런 절차를 통해서 언약이 갱신되어야 될 이유가 여기에 담겨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용서하면 될 텐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 아무개 너 용서한다 이러면 될 터인데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러한 귀찮은 복잡한 과정을 왜 겪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주어 보았자 우리 선에서 항상 언약을 깨뜨릴 수밖에 없고 우리 행함으로 절대로 구원될 수 없는 그러한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갈수록 까발리고 확인시켜 가면서 상대적으로 누구의 공로가 높아집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의 효력이 높아져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가 되게 하시는 목적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일반 철학, 학문, 과학, 종교에서는 모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부적 같은 것. 피 바르면 하는 것 같은 부두교, 서인도 제도에 있는 흑인들이 하는 종교. 우카타카 해서 염소피를 뿌리면 속해진다는 겁니다.

그런 유사형식들이 많아요. 그래서 레위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레위기 모든 내용은 사실은 그 당시 지방에서 일어난 일을 빼낀 것이라 해석을 해서 박사학위 따서 신학교 확 퍼뜨립니다. 믿음 없는 것들은 외국 나가도 표가 나요. 박사학위 소용없어요.

자기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한 것을 모르는 이상.

진짜 저주받은 사람이 맞는다면 박사하기 받아 보았자 저주 면피용임을 뻔히 알잖아요.
한번 해 봅시다. 박사학위 받으면 더 저주스럽습니까 안 받는 것이 더 저주스럽습니까?
받게 되면 자꾸 저주가 감해 지는 느낌이 안 듭니까?
그러면 자기한테 손해잖아요.

확실하게 저주스러워야지. 저주 맞는데 박사학위는 받았어요. 이상하잖아요. 안 맞잖아요. 더러운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자 여기서 한번 봅시다.

이미 여자가 생리하는 것부터 해가지고, 남자가 태어나는 것 부터해서, 남자나 여자의 몸에서 뭐가 흘러나옵니다. 유출, 액체가 흘러나옵니다.

액체 중에서 피가 나오죠. 그러면 인간 속에 있는 피가 나온다는 말은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내안에 있는 내용물이 내안에 그냥 있지 않고 바깥으로 그냥 흘러나오는 것을 죽음으로 봅니다.

생명이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생명이 밖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게 창세기 9장에 나옵니다.

노아언약 이후에 네가 땅에 피를 흘리는 너를 죽인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일 때 뭐합니까?
죽일 때 가스실에 튀깁니까?

뭘 내요. 피를 내지요. 인간의 생명이 밖으로 나와야 피 흘려야 죽음으로 보는 이유는 인간자체 죽음을 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 언약 속에 있는 하나님의 피 흘리심이 이런 과정, 피 흘리심을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서 인간의 죽음이 사용, 해석되어지고 이해되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어도 자기 마음대로 못 죽어요.

인간의 죽는 모습이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죽으시는 모습을 미리 앞서서 보여주는 식으로 피조물이 주님의 용도로 사용되어 져야 합니다.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어요. 인간은.

전부다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다 차용되는 겁니다. 농락당하는 겁니다. 그리고 농락당하는 것을 즐겨야 됩니다. 주여 마음껏 농락해 주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하나님이 아니니까요. 저는 똘마니고 우리 주인님은 따로 계십니다. 주께서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고 까라하면 까겠습니다. 이런 분을 만났을 때는 우리의 죽음조차도 주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준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피에 있다 해서 피의 이동 경로를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양 잡고 뭐 잡을 때 반드시 어디서 잡아야 합니까?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에서 잡아야 합니다. 먹는 고기든 , 사태 살이든 국거리든,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에서 도살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냥 식용으로 먹는 것이 아니고 이것조차도 거룩한 백성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살려주는가를 보여주는 용도로서 우리 일상의 사소한 일까지 거기서 관여를 받고 간섭을 받고 지시를 받고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성소에서 일어난 일이 찌지직 하고 그 모든 영향력이 전 생활까지 파급되는 겁니다.

파급되면서 첫 번째 나온 것이 음식문제, 두 번째 나온 것이 여자의 해산문제입니다.

유출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장기적 유출, 단기적 유출이 있습니다.
장기적 유출은 혈우병 걸린 여인
단기적 유출은 생리 같은 것.

어찌되었던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유출하는 것은 인간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이 밖으로 나왔다는 겁니다.

밖으로 나왔으니 네가 생리하지 마라 말이야 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와야 될 것은 나옴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생리를 했으니까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라고 나오면 안 됩니다. 오히려 아하 나는 여자의 몸으로 저주받았음을 증거해야 되는 존재구나를 알아라는 말입니다.

출생자체가 처벌이니까.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처벌받는 자로 태어났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불교신자가 알겠습니까?
자기가 뭐 결혼도 안했으니 여자를 알 수가 있습니까?

중들이 어떻게 알겠습니다. 맨날 목탁이나 두드리고 있지.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것을 보고 남성들은 참 여성은 안됐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 된 것이 아니에요. 남성들은 여성을 통해서 아이고 좋아라 저렇게 온몸 버릴 것이 없이 몽땅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도구가 되는 구나 부럽다해야 하죠.

나도 여자가 될까. 하리수 되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잠언서를 보면 아내가 있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파견한 아내로 봐라. 네 아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여인이다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것도 여자 나름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잠언서에서는 음녀라 합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을 음녀라 합니다.

뒤에 찌지직하고 성소의 거룩이 진영 전체로 퍼지게 되면  제사장의 결혼 문제가 나옵니다.
제사장은 절대로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지 말고 창녀와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언약이 갱신된 입장에서는 뭐로 집중합니까?

제사장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는 것, 그 정신을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첫 열매, 십일조는 제사장에게 모여져야 됩니다.

이 이야기를 그대로 오늘날 교회에 적용시키면, 가장 좋은 것은 어떻게 해야 진짜 드린 것이 된다고 했던가요? 그냥 

그냥 갖고 있어요.

목사 주지 말고 그냥 갖고 있어요. 문제는 주어 보았자 인간성 안 바뀌면 백날 해 보아야 주었다고 생색내기 때문에 안 좋아요. 그냥 주여 내가 못난 놈이라 하며 갖고 있으면 그것이 하늘에 갖다 바친 것이고 제사장에게 바친 것이 됩니다. 지금은 마지막 갱신된 언약에서 제사장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영원한 제사장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히브리서입니다.

성경해석 참 쉽죠. 무조건 갱신되면. 갱신 될 때마다 숨어 있는 우리의 죄가 드러나는 즐거움이 있어야 됩니다.

그 즐거움도 오래 하며 지루하지만. 곧 끝낼께요.

문제가 되는 것은 남자가 했을 때에는 칠일 동안 부정하고, 정결케 되려면 33일이 필요합니다. 한 달 좀 넘습니다.

남자들이 날짜 계산이 민감한 것은 다 군대 때문입니다. 군대 때문에 날짜하나하나에 굉장히 민감하게 작용합니다. 카렌다에 줄 짝 쳐놓고 하는데.

여자를 낳았을 때에는 14일 동안 부정하고 정결케 되려면 66일 이 지나야 깨끗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몸에서 피 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쳐 주겠다는 말입니다.

자 남자는 7일이고 여자는 14일이다. 이게 의미하는 것이 뭡니까?

14일(두 배로 )이 걸렸다는 말은 희생의 양이 그만큼 집중해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갱신되어서 오는 하나님이 품어 있는 긍휼과 자비가 남자보다 여성 쪽에 집중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그 만큼 여성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다치기 쉽고, 유혹받기도 쉽고, 하와가 먼저 유혹받았잖아요. 그만큼 악마가 뒷발꿈치는 치는 것처럼 악마는 항상 약점을 치고 들어오는데 아담에게 약점은 아담 본인이 아니고 아담에게서 돌출된 여자가 남자의 약점으로서 붙어 있습니다.

괜히 결혼해서 10월9일 날 약점하나 붙이는데.
그런데 약점을 약점이라고 보담아 줄 수 있는 책무를 남자가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남자를 죽여서 여자를 살리라는 원칙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교회를 살리는 것처럼. 내 하나 몸 바쳐서 여자 살리라는 겁니다.

이런 남자 기다리다가 아직도 결혼 못한 여자 한두 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교회 와서 남편감 찾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점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측은하게 이야기 합니다.
결혼한 양반들 제수 옴 붙었어요. 할 수 없지 뭐. 그것을 견뎌 내라고 합니다.

여기 결혼 하지 않으신 분 손 한번 바짝 들어 보세요. 솔로로 오신 분. 감사합니다. 온전히 주를 위해 삽니다. 솔로교 원주 교주가 사도바울입니다.

두 번 다시 사랑 안 해, 애인 따인 필요 없는 사람. 이게 사도바울입니다.

강자가 약한 자를 감당하는 노선이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하는 노선이 아니고 강자가 도리어 약자를 돌보는 노선이 바로 어디까지 이어지는고 하면 남자에서 위로 그리스도, 그리스도위로 하나님까지 . 그런 노선 새로운 경부선, ktx 철도가 놓이듯이 놓이는 겁니다. 섬김을 통해서 죽을 자가 산다는 원칙이 레위 언약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땅도 집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없는 자의 여유, 없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당시 제사장(요사이 목사가 아니고)입니다. 그 제사장의 계열이 무엇인냐. 집도 아비도 어미도 없는 멜기세덱의 반열을 좇아서 진짜 하늘에서 오신 주님이십니다.

하늘에 살기 때문에 땅에 것이 필요 없는 분이 우리로 하여금 땅의 것을 포기하도록 하게 하시는 메시야가 되십니다.

네가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우리를 유도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됩니다. 그러나 억지로 가게 되면 절에 가게 되니까 절에는 가지마세요.

무소유 하는 법정이 되지 말고 성령이 오게 되면 현재 가진 것이 있더라도 주님께서 일시적으로 위탁한 것이고 맡긴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 가진 것 가지고 얼마나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 여건에 있는 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재산을 주신 겁니다.

그런 확인 쫌 저에게 많이 주면 좋겠어요.
재산 주면 이렇게 망한다는 그런 맛이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어요.

그냥 사도바울과 같이 예수님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지갑을 가지지 말고 전대도 가지지 말고 지팡이 들고 가라 이런 식으로 말고 말입니다.

흔히 그저 성경 읽고 난 뒤에 교인들이 노림수가 있잖아요. 아리마대 요셉 부자였더라. 그 대목에 줄을 쫙 긋잖아요. 그래 부자 되어 섬기면 되지. 밑줄 쫘 긋고 별표 막 때리잖아요.

부자 되고 섬길 수 있으면 이왕에 부자 되어 섬기겠다는 쪽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약한 자에게 희생이 늘 집중됩니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희생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래부터 분리시키는 차고 올라오는 정신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14장1절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믿음이 강한자야 제발 강하다고 힘 자랑 말고 약한 자를 용납하라. 이미 우리가 그런 절차를 겪지 않았느냐. 그들이 어떤 차원에서 자기 믿음 좋다고 주장하는지 그 쪽 시절로 돌아가서 이해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성장통이니까 . 성장하려면 아픔이 있으니까 그런 것은 이해해 주어야죠.

13장에는 관찰입니다. 14장은 처리입니다.

그렇다면 13,14장에 관찰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표징이 되는 것은 16장 나오는 대속제일의 제사가 표징이 됩니다.

차이점은 대속죄일은 수송아지 잡지만 여기서는 새를 잡습니다.

진 밖에 있는 문둥병, 하나님의 언약밖에 있는 문둥병, 속되고 거룩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문둥병자가, 일 단계는 진 밖에서 성결하고, 그 다음 진 안에서 성결해야 되고, 마지막으로 회막에서 성결해야 됩니다.

1단계, 2단계 3단계를 거치는 과정이 대속죄일 날 제사과정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이것은 대속죄일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그러한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유치하게 , 문둥병자가 실제로 나아서 부정한 것이 사라지고 다시 깨끗하게 원상태로 돌아오는 평상시같이 진 안에서 살 수 있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다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보여주시는데 문둥병자와의 차이는 산새를 잡는 반면에 대속죄일은 수송아지를 잡습니다.

그런데 소를 잡고 하는데 특징은 문둥병자가 하나님의 제사대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제사 중에 개입되는 분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개입 됩니다.

대속죄일에 가담한 제사장들이 갖고 있는, 그들이 받은 거룩이 그대로 일반인에게 이어지면 ,문둥병자는 그냥 하나님께 가지 못하고 제사장이 받았던 갱신된 언약의 효과를 경과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레위기14장4-9절입니다.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 찌며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칠일을 거할 것이요 칠 일 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산새 한 마리의 피를 문둥병자에게 뿌리고 살아 있는 새의 날갯죽지에 피를 발라 가라. 가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줌 카메라 갖고 따라 가야죠. 아사셀 염소가 광야 지평선으로 사라지면 우리도 같이 카메라들고 그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자기 구원받았다고 거룩한 진영으로 자족하지 말고요. 히브리서 13장13절에는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는 곳이 어디죠. 마지막 문제.
가는 곳이 어디죠. 거룩의 능력이 십자가에서 나왔죠. 놋뱀 든 것처럼.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모아 십자가 지시고 죽으신 주님이 아사셀 염소요 주님이 죽었던 새로서 그 안에 두 마리 새가 다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될 주님과 부활하실 주님이.

2010-08-10 22:32:40  녹취 : 정석훈

'레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강-2010여름수련회  (0) 2014.01.03
7강-2010여름수련회  (0) 2014.01.03
5강-2010여름수련회  (0) 2014.01.03
4강-2010여름수련회  (0) 2014.01.03
3강-2010여룸수련회  (0) 2014.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