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8강-2010여름수련회

아빠와 함께 2014. 1. 3. 17:17

2010 여름수련회(레위기) 8강


언약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언약이 없으면 자력으로 살고 언약이 있으면 언약의 힘으로 삽니다. 언약의 힘으로 산다는 말은 언약을 내려 주신,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나 자비를 주셨던 하나님의 그 자비로 산다고 이야기했지요. 따라서 언약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언약과 언약 아닌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레위기 23장에 보면 그 차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서 ‘일(날)’을 빼면 뭐가 되죠? ‘안식’입니다. 안식일이 계속 중첩이 되면 이걸 ‘희년’이라고 합니다. ‘기쁜 날’이라는 겁니다. 누구한테 기쁜 날인가 하면, 아무에게나 기쁜 날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자, 다 빼앗긴 자. 하지만 언약이 있기에 희망으로 사는 자.

이 희년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때는 너희가 땅도 없고 고아였고 과부였고 나그네였고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이 실제로 이스라엘 내에서 계속 발생하는 겁니다. ‘사랑의 하나님 같으면 그런 힘든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배려해 주시면 안 됩니까?’ 라고 생각한다면 또 존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능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전쟁으로 가장이 죽었다면, 아버지를 당시는 농경시대이기 때문에 토지를 개간하고 하는 것은 성인 남자가 할 몫이지 여자나 아이가 일을 하면 별 소득이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생활비를 충당 못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받은 땅을 팔게 되고, 그러다 팔게 없으면 몸까지 팔아야 됩니다. 몸을 판다는 것은 결국 노예가 된다는 겁니다.

노예는 무거운 채무의 빚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이 가장 기뻐하겠습니까?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사람이 최고로 기뻐할 거예요. 이자를 200% 내야 하는 사람들. 돈 200만원 빌렸는데 이자로 400만원 내야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은 빚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겠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다는 말은 내가 즐기고 만족할 것이 남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는 거예요. 내 것이 없는 거예요. 나의 것이 없다는 식으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온 겁니다. 그들에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것은 애굽 사람들이 줘서 가지고 나온 거예요.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는 노예였어요. 노예는 자기의 것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사람이 홍해를 건너서 나올 때, 그 시점에 개입된 은혜의 사건이 녹녹하게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살아있는 한 자비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살아있는 겁니다.

안식일의 핵심은 뭔가? 노동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너의 힘으로 살지 말라.’는 거지요. 바꿔 말하면, ‘살려고 하지 말라.’ 이것은 ‘나만 믿고 죽어라.’는 말입니다. 안식일은 죽는 날입니다. 그런데 누가 대신 죽느냐? 안식일에 제사를 풍성히 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언약의 힘으로 산다는 것은, 애굽 사람같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산다는 그 개념 자체가 바뀌어야 된다는 겁니다.

돈으로 밥 먹고 산다는 개념은 언약 없어도 누구나 알고 있는 개념인데, 이러면 특별한 존재가 되지 못해요. 육신을 살리기 위해서 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상식적인 이야기는 복음과 관계없어요. 북한의 김정일도 그렇게 삽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거든요. 그렇다면 구별된다는 것, 차이 난다는 것,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 언약이 있다는 것, 여호와가 동행하다는 그 효과가 미미하거든요.

여호와가 동행한다는 것이 뭐냐? 동행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차이가 나야 돼요. 그 차이는? 1) 착하게 살기. 2) 이웃 돕기. 3) 겸손하기. 4) 교회 충성하기. 이런 것들입니까? 아닙니다. 내 목숨의 기능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나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기능적으로 살아야지 날 위해 바칠 목숨으로 산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무관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믿어지는지 여기 앉아있는 어린 학생들에게 묻고 싶어요. 왜냐하면, 학생들(혹은 어린이들)은 자기 육신에 대해서 솔직해요.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자기 하고 싶은 것을 숨길 수 없는 그런 때입니다.

갓난아이가 엄마 젖을 빨기 전에 “어머니, 제가 지금 어머니 젖을 빨아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묻고 먹지를 않아요. 자기가 먹고 싶으면 아무 때나 젖을 빨잖아요. 얼마나 예의가 없습니까. 이런 아이들이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본래의 욕정은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서 아닌 척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사는 요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요령조차 통하지 않는 유일한 날이 안식일입니다. 광야에서는 금요일에 이틀 분량의 만나를 주셨어요. 토요일은 안식일이기 때문에 만나가 없습니다. 토요일에 나가봤자 허탕입니다. 아무리 하늘을 쳐다봐도 만나 안 내려옵니다. 하나님은 빈틈이 없어요. 예수님이 바다를 향해서 ‘잠잠하라’고 하시니까 잠잠해 졌잖아요.

안식일에 노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산다는 개념이 언약에서 새롭게 뽑아져 나온 겁니다. 그러면 그 산다는 개념이 어디서 산다는 것인가? 이 땅에서 산다는 말이 아니고 안식할 때 산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하는 산다는 것이고, 이 땅에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심장 뛰는 것을 사는 것이라고 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환경 자체가 안식 상태를 누리게 될 때 이것을 사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 안식 상태에 가려면 여기 안식일을 통해서 그 다음에 안식년까지 구체화 되고, 여기서 안식년이 7년 인데, 7년 곱하고 7년 하면 49년인데, 49년 안식년이 있고 그 다음에 50년이 희년입니다.

그래서 48년째는 희귀하게도 3배의 곡식이 땅에서 생산됩니다. 평소에는 포도가 50송이 달렸다면 48년째는 150송이가 달리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년, 희년을 지킨 적이 없어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줄까요? 일곱 번까지 할까요?’ 할 때, 예수님 대답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느 인간도 이렇게 용서한 자가 없다는 겁니다.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490번 용서하려고 애쓸 거예요. 490번 용서하면 용서 되는 겁니까?

철학자 들뢰즈는 말하기를, 인간의 잠재되어 있는 모든 능력은 양적이 아니라 질적이라고 했습니다. 거북이와 토끼가 달리기를 할 때 같은 수준으로 나오면 토끼가 거북이를 앞지르는 것이 설명이 안 돼요. 왜냐하면 토끼가 달려가면 거북이도 조금은 앞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하지만 토끼가 한 근육을 움직일 때는 온 우주가 함께 변화되기 때문에 다른 판단 구조에 의해서 그만의 독특한 질이 나오고, 거북이는 거북이 나름의 질이 있기 때문에 서로 다양한 질이 섞여서 앞서 간다는 겁니다. 즉 남들보기에는 토끼가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거북이나 토끼는 각자 '이겼다'는 개념이 그들의 질적 생활 속에는 들어있지 않는 겁니다. 인간들이 괜히 시합붙인 것에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는 나처럼 해야 돼!’ 라고 한다면, 그 사람 고유의 어릴 때의 기억과 성장과정 이 모든 것이 합세해서 지금의 그가 되었는데, 이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나는 너같이 그렇게 안했다.’ 그것은 ‘너니까 그렇지.’ 이건 인간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거예요.

하지만 하늘나라의 안식에서는 그것이 됩니다. 왜? 애굽에서 나올 때 그때 그 정신을 놓쳐버리면 그 동일한 안식의 삶, 안식으로 산다는 것, 안식 누리며 산다는 그 질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6일 노동하고 1일 쉴 때, 놀면서도 항상 뭘 생각하는가 하면, 어서 내 힘으로 밥벌이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리워하는 거예요.

주일날 가계 문 닫으면서 완전히 닫는 것이 아니고 조금 열어놓는 거예요. 옛날 제가 어린 시절에 우리 어머니가 담배가계를 했는데 명절에는 가계 문을 닫아요. 그런데 어머니가 완전히 문을 닫는 것이 아니고 조금 열어둬요. 밖에서 누가 ‘담배 있습니까?’ 하고 외치면, 제가 얼른 나가서 담배를 팔았던 기억이 있어요.

안식일이 어디 있어요. 남들 쉴 때 나가서 일하면 두 배의 돈을 받는데. 보통 휴일이나 연장근무 하면 배로 시급을 계산하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돈 벌 좋은 기회입니까. 공연히 주일 지킨다고 일 안하면 누가 돈 줍니까?

이 안식일을 통해서 희생이 추가적으로 주어집니다. 우리가 노동 안 하는 대신 하나님이 더 많이 노동하십니다. 하나님의 노동을 보란 말이지요. ‘네 노동 밖에 생각 못하는 철없는 너를 기어이 천국에 넣어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큰 아픔과 희생을 치렀는가’를. 희생 제물에 동원된 제물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할 것은 평일 6일이 아니라, 진짜 우리가 이방 민족과 다른 점은 우리에게 안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날이 있다는 점. 그것이 바로 안식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반대가 되어야 되지요. ‘안식일이 얼른 끝났으면’ 이 아니라 ‘어서 안식일이 왔으면’ 이렇게 되어야지요. 백수는 늘 안식일이지만, 그런 안식일 말고 ‘진짜 하나님이 하시는 일 때문에 저는 살았어요. 예수님 때문에 저는 살았단 말이에요.’라고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 철없는 인간을 강제로라도 복음을 알려줄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을 열어주는 것, 그 틈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나 신약시대에도 안식일이 있습니까? 주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는데, 안식일이 신약시대에는 주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주일보다 다른 6일이 더 좋다는 뜻이에요. ‘어서 주일이 지났으면’ 하는 그 속셈 때문에 그런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성경에는 그런 것이 아니고 매일 모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매일 모이면 장사는 언제 하고, 돈 벌이는 언제 합니까? 그래서 이렇게 되면 교회도 장사가 안 되겠다 싶어서 ‘여러분, 봐줄게요. 하루만 오세요.’ 해서 성경에 근거를 억지로 찾아서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습니다. 주일 하루만 교회에 나오시면 됩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면 매일 교회 나와야 됩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텐데, 여러분 집이 교회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마18:20).”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교회와도 교회가 아니에요. 왜냐? 식사당번 한다고 예배 시간에 들락날락하고 있고 ---

안식을 누린다고 할 때는 뭔가 포기하는 게 있어야 돼요. 포기함으로써 대 제사장이 바꿔치기 합니다. 죽어야 될 인간이 멀쩡하게 살아서 제물의 고기를 먹습니다. 화목제는 앞가슴 살, 뒷다리 등 좋은 고기는 제사장이 먹고, 나머지 부분은 화목제를 드린 사람이 먹습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니하스는 제사도 드리지 않았는데 맛있는 고기를 먹었어요.

원래 제사는 속죄제, 속건제 드리고, 그 다음에 번제, 소제 드리고, 마지막으로 화목제를 드립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니하스는 고기가 먹고 싶어서 그냥 고기의 맛있는 부분을 먹었어요. 그뿐 아니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했어요. 이런 사실을 알고도 아버지(엘리 제사장)란 사람이 하는 소리가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삼상2:24).” 이러고 있어요.

성경에 보면 이런 짓을 한 자는 죽이라고 했어요. 이런 불량한 아들은 마을 장로들에게 부탁해서 죽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엘리는 자식이라고 감싸 돌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네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의 제사장 기능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가 기능을 가로막은 거예요. 살아야 된다는 것 때문에 해야 될 것이 날아가 버린 겁니다. ‘어떻게 사느냐’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놓쳐버린 거예요. 놓칠 때 하나님은 사무엘과 바꿔치기 합니다.

다시 복잡한 부분을 해 봅시다. 7 곱하기 7을 하면 49가 되는데, 48년째는 3배의 생산물을 주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약속이 과연 실제로 이루어지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마음으로 다가가기에는 그 세월이 인간의 개인적 한계를 넘어섭니다. 후대에서 그것을 실험하려면 그 후대 자손의 경험담은 개인적으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따라서 약속을 시험해서 믿으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 인간이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례에 순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느 9:34-35 참조) 하지만 하여튼 하나님의 약속은 그렇다는 겁니다.

안식일의 확장이 안식년 그리고 희년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법을 주기를, 애굽에서 처음 나올 때의 그 정신을 가지려면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거저 주셔서 받았으니 그저 주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나온 하나님의 안식 차원에서의 계명이 뭔가 하면, ‘고엘’입니다. ‘후견자’ 개념이 나옵니다.

안식일이 무슨 개념인가 하면, ‘속죄’ 값을 치르는 개념이라면, 속죄 개념이 점점 더 안식일 을 따라서 무슨 개념으로 바뀌는가 하면 ‘고엘’ 개념, ‘후견자’ 개념입니다. 후견자가 되려면 내 힘으로 천국 갈 수 있다든지, 내 힘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것이 완전히 박살난 상태가 되어야 해요. ‘나는 절대 내 행함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라는 것이 유지될 때 비로소 우리 눈에 띄는 것이 뭐냐 하면, ‘든든한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이렇게 됩니다.

이 ‘고엘’을 욥기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의 구속자’라고 합니다.(욥 19:25) ‘고엘’이 원래 어떤 기능을 해야 되는가 하면, 무르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무른다’는 말이 순 우리말인데 어려운 표현이에요. 예를 들면 이런 뜻입니다. 가장이 전쟁에서 죽어서 여자와 어린 자식들만 남았고 그 후 가산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생산물도 줄고, 사기꾼들이 와서 사기를 쳐서 남은 재산 다 빼앗기고 자식마저 종으로 팔렸을 때.

이런 상태가 될 때 주변이 있는 유력한 친척이 와서 잃은 땅, 또는 몸값을 치르고 다시 원 주인의 소유로 되돌려 놓는 것이 무르는 것입니다. 이 때 ‘고맙습니다. 고엘.’ 이렇게 됩니다. ‘나에게 이런 후견자가 있다니. 내 사정을 알아주시는 군요.’ 이게 ‘고엘’의 기능입니다.

이게 뭐냐? 대속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대속자.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대속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는 거예요.

우리 기도가 능력이 있습니까, 주님의 기도가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고엘’의 입장에서 기도해 주시는 거예요.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제가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주를 따르겠습니다.” 라고 할 때, 주님은 “마귀가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했다(눅22:31).”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내가 ‘고엘’로 너를 안 지키면 네는 천국 못가!” 이겁니다.

천국에 우리 자리를 마련하시는 것은 ‘고엘’되시는 예수님이 마련하십니다. 일단 천국에 자리가 마련되고 나면 다시 와서 그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셨어요. 그냥 덜렁 들어가면 우리 자리가 없어요. 좌석이 없습니다. 주께서 좌석을 마련해 줄 때 ‘내가 천국에 앉는 것은 우리 후견자 예수님 덕분’이란 것을 알고 갑니다.

이러한 생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처음부터 희년이 아니고 안식일부터 시작됩니다. 안식일에서 ‘일(日)’을 빼면 ‘안식’이죠. 우리에게는 안식이 남아 있으니 안식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만큼은 제발 네가 네 힘으로 살겠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접어라는 겁니다. 안식의 나라에 가는 것은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고엘’적인 언약에 의해서 간다는 것을 그 때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통해서 주시는 겁니다.

안식일의 법칙 중 하나가 레위기 23장 32절에 보면, ‘스스로 괴롭게 하라.’고 해요. 이 말은 ‘나 같은 철없는 인간을 대신해서 희생하시는 그 희생 제물의 희생 속에서 하나님의 괴로움에 동참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까불고 촐랑대지 말란 말이지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누가 내 대신 고통을 당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집이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로 세운 집이 교회입니다. ‘피’가 들어가야 돼요.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정은 피를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철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천국 가시거든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어린양의 발 앞에 면류관을 드려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만날 내 힘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모여 목사가 설교할 때는, 언약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과 십자가를 아는 사람의 삶을 대비하도록 양쪽을 다 이야기해야 합니다. 언약 없는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 안하면 복음을 듣고도 언약 없는 사람과 똑같이 행세를 합니다. 양쪽을 다 말해서 언약 없는 쪽으로 건너갈 마음이 안 생기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목사님 말씀대로 십자가 바라보며 기도했으니까 이제 복 주시겠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그냥 돈 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은 십자가를 빌미로 해서 돈 노리고. 이렇게 되면 둘 다 똑같은 거예요. 저쪽은 남을 등쳐서 자기 이익 챙기고, 이쪽은 예수님 이용해서 자기 이익 챙기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는 점에서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목사가 설교할 때는 반드시 개혁주의 적인 설교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왜 이단인지를 이야기해서 개혁주의, 즉 칸트 철학에서 나온 설교가 복음을 잘 못 이해할 때, 자기의 노림수는 교묘하게 숨기는 방편으로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데 이것이 개혁주의 역사적 성경해석인 것을 밝혀야 합니다. 신학교 때 배운 것이 모두 '개혁주의신학'입니다. 이 신학을 배우는 순간부터 신학생들은 그 내용은 일반인들에게 교육시켜 불신자를 신자로 만들 근거는 마련되어 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따라서 목사가 개혁주의 신학을 알고 그것을 전하면서 스스로 그것이 바로 이단의 절정이며 비복음적임을 더불어 알려주면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는 것은 본인부터 이미 은밀한 십자가 복음을 접했다고 고백하는 바가 됩니다.

복음적인 설교는 우리의 죄악을 고발하는 겁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불쌍히 여겨 안식을 주시는 그분의 은총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설교시간 만큼이라도 들려줘야 합니다.

안식일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식일은 일곱 번째 날입니다. 1, 2, 3, 4, 5, 6 다음에 7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기억하려면 뭘 기억해야 됩니까?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날이 기억될 때 그 다음 이레째 날이 기억됩니다.

그렇다면 하나, 둘, 셋 날짜를 기억한다는 것은 항상 뭘 염두에 두는가 하면 ‘일곱 번째 날이 언제지?’ 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인간에게 요구한 시간 개념입니다. 그러면 7 다음에 8일 아니고 다시 1이 됩니다. 이런 시간 개념에서 일곱 번째 날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사건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에 행하시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1, 2, 3, 4, 5, 6일에 있는 사건은 여기서 빛을 잃어버립니다. 일곱째 날 사건이 중요하지 안식일 아닌 내가 주인공이 되는 날은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건성으로 지켜요. 1, 2, 3, 4, 5, 6(큰 소리로) 7(작은 소리로) 이렇게 되면, 작은 7의 사건은 어느 기세에 눌리는가 하면 1~6의 기세에 눌립니다. 이런 시간 개념은 안식의 사건이 나를 살린다는 개념에 동참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평일(1~6)을 좋아하는 이 사건 개념을 안식일이 중요한 것으로 뒤바꾸기 위해서 어떤 사건, 구원 사건이 벌어지면 그 구원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이 날을 정해버리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농사짓는 날에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 날을 안식일로, 이 날을 괴롭게 하라는 그 날로 부각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 당시 농사짓는 시절에 씨를 뿌리고 싹이 나고 자라고 이 모든 것을 내가 노동해서 얻은 대가로 보지 않고, 내 노동력 결과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동행함으로 주어진 언약 사건으로 각인 될 것이란 말이지요. 이 말은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삽니다.’ 이렇게 되지요.

그렇다면 1, 2, 3, 4, 5, 6에서 나왔던 인간적인 시간 개념에서 사건 위주가 되면 안식 사건에 의해서 1, 2, 3, 4, 5, 6도 새로운 시간 개념으로 바뀝니다. 1, 2, 3, 4, 5, 6이 아니라 매일매일 그 사건의 지시를 받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사건은 하나님이 찾아오시게 되면 그때부터는 내가 시간을 읽는 안목 자체가 사건 위조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해서 죄인이 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구원 받았는지’ 이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리스트 위에 남은 인생을 쫙 깔아버립니다. 그렇다면 일기를 쓰면서, 하나님의 사건이 왔기 때문에 나를 통해서 쓰여지는 일기에 내 인생은 없고 과거, 현재, 미래까지 소급해서 주께서 이끄시는 삶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라고 했어요. 예레미야는 더 나갑니다. “내가 태중에서 택함을 받았다.” 에베소서는 더 나갑니다. “창세전에 택함 받았다.”

이처럼 새로운 시간관이 주어지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새로운 시간관이 주어질 때 어느 날도 안식일이 아닌 날이 없게 됩니다. 그것을 처음 신명기 십계명에서는 안식일을 천지를 칠일 만에 창조 했다고 창조 사건을 이 안식일을 복되게 하는 창조 사건에 집어넣었는데, 이 창조 사건이 어떻게 그 내용이 확대되는가 하면,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희를 건졌기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모세 언약이 되는 거예요. 그 다음 모세 언약에서 갱신되면서 애굽에서 종 되었던 자를 끄집어낸 안식의 의미가 우리는 이 안식일도 제대로 못 지키는 인간이라는 자기의 죄책감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안식일에 기대를 걸지요. 그러면 그 안식일은 나중에 안식의 땅으로 인도하는 동기가 됩니다.

거기에 나타나는 것이 뭔가? 만나입니다. 이 만나가 어디에서 끊깁니까? 관광버스를 타고 신나게 흔들며 춤을 추는데 그 춤이 언제 끊기는가 하면 톨게이트에서 끊깁니다. 만나가 계속해서 내린다는 말은 만나는 어느 스케줄에 따라 움직입니까? 1, 2, 3, 4, 5, 6, 7따라 갑니다. 사람은 안식일을 안 지켜도 만나는 지킵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인줄도 모르고 만나 얻겠다고 들에 나갔다가 못 얻고 돌아오는데, 만나는 6일째 이틀분의 양이 내려오고 안식일에는 내려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너희들이 갈 길은 세상 길이 아니라 이쪽 길이야.’ 이것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매일 만나만 먹으니까 질려서 다른 음식을 달라고 요청하지요. 그런데 만나는 맛으로 먹는 음식이 아닙니다. 만나는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뜻입니다. 생뚱맞다는 것이지요. 왜 우리가 원하는 양식이 아닌 다른 양식을 주는가? 그것은 양식을 통해서 장차 올 안식으로 이끌기 위한, 안식이 담겨 있는 양식을 거기다 담는 거예요.

이것이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예수님이 “내가 바로 만나다.”라고 하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주님, 이런 일이 왜 일어납니까?” 주님께서 “그게 만나다.” 우리가 너무 세상일에 욕심을 부리니까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주께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계속해서 그런 만나가 주어질 때, 여러분들은 얼른 성경 말씀을 기억하고 ‘인생은 풀이고, 안개고,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내게 주신 사건은 주님의 채찍, 혹은 징계로 나에게 주신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지요. 감사한 마음이 3초 가다가 또 사건이 터지고.

사람들은 항상 자기 위주의 사건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평소에 주신 만나를 그냥 던져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주께서 주셨는데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을 생각은 안 하고, 내가 원하는 것만 자꾸 달라고 보채요. “하나님, 주세요!”라고 하면, 주님은 “줬잖아!” 라고 하세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25층 아파트에 층층이 벨 눌러 물어보세요. 전부 “Why me?”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비극이!) 이 소리 안 나오는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건을 주시면 그 사건에 속한 순간 그것이 바로 안식일인 동시에 안식 상태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말씀이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말씀, 십자가의 말씀을 들어야 해요. 십자가 복음에 빠지면 교회 올 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지고 왔다가 복음 듣는 순간은 모든 수고와 짐을 다 잊어버려요.

내가 쓸데없는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염려하고 탄식하고 허탈해 하고 아내와 싸우고 --- 복음을 듣고 보니까 정말 사소한 문제인데, 공연히 남을 원망하고 아내와 다퉜어요. 그래서 “여보, 미안해! 내가 화내서 당신도 화가 많이 났지?” 아내도 은혜를 받아서 “아니요. 내가 잘못했어요.” 이렇게 되지요.

안식은 온전히 하나님이 구속하신 사건에만 관심 두고 다른 문제들은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에게 합류하게 하시는 준비된 환경입니다.
 
 
2010-08-11 09:12:53 녹취 : 서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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