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7강-2010여름수련회

아빠와 함께 2014. 1. 3. 17:16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100802레위기7강종말의종말)


제 7강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우리가 죄를 지을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말이 안 되지요. 키가 큰 키다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키가 30센티 밖에 안 되는 갓난쟁이가 키가 2미터가 넘는 키다리한테 삿대질해가면서 ‘너 나한테 뺨 맞을래?’ 하면 그 키다리가 ‘그럼 한번 때려봐.’ 그러면 폴짝 폴짝 뛰면서 때리려고 해도 손이 닿지를 않지요.

그러면 뺨 때리는 것이 실패하지요. 하나님이 키다리고 인간이 짧은 다리라면 인간이 어떻게 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한테 죄를 지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한테 죄짓는다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보이는 사람한테는 밀치고 당기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그것이 되는데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다,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는 것 같아요.

‘내가 사람한테 죄짓는지는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한테 죄짓는 일은 없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이것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예수님께서 ‘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공부하면서 어떻게 작은 어린애한테 한 것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살아계신 예수님의 뺨을 치는 것과 동일한가, 그 말이죠.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았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너는 나를 핍박했다.’고 간주해버려요. 보세요. 어떤 관계로서 그렇게 얽혀 있으면, 예수님 관계가 어떤 관계이기에 하늘까지 도달되는지, 하늘과 땅이 꽉 차서 이쪽을 건드렸는데 삑, 하고 위에서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대체 어떤 얼개로서, 어떤 구조로서 그렇게 되었기에 하나님t한테 죄짓는 것이 어떻게 인간에게 가능한가?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레위기에서 나옵니다. 레위기는 ‘대제사장책임제’입니다. 대제사장이 이야기한 이것이 책임제가 되어서 이 아래 철제구조물이 있는 것처럼 이 밑의 구조물을 건드리면 하나님이 반응을 나타내는 그런 거대한 구조물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철없는 사람은 ‘나는 작은 것 하나, 그저 제사법 하나 무시했을 뿐인데 저 위의 하나님께서 분을 낸다든지, 나가 죽으라고 한다든지, 내 백성에게 끊어진다든지, 이렇게 하나님이 오버하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엄청나게 징벌의 조항들이 레위기에 쏟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세상 보는 것 하고 막상 하나님이 설치해 놓은 그 구조하고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먼저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만든 그 구조, 대제사장 책임제의 결정적인 것이 대 속죄일 제사입니다. 교재의 6번에 ‘대 속죄일 제사’가 나오지요. 속죄제라는 것은 고의로 저지른 것에 대해서는 속죄되지 않습니다.

고의가 아닌데 철이 없다든지 무심코 지은 죄에 대해서는 속죄가 가능해요.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나님의 철골구조를 건드렸구나.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뺨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구나. 얼른 양을 잡아서 속죄를 해야지.’라고 하는 것은 백성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대제사장 본인도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고 전체 회중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한다는 내용들이 쭉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희생제물을 드릴 때 희생제물중에서 기름과 피를 따로 빼서 어디에 바르는가하면 성소의 기구에 발라요. 일종의 하나님의 발등상, 하나님의 발목부분에 바르면서 ‘내 대신 책임져야 될 거룩한 양과 소와 염소가 지금 동원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이시지요?’하고 하나님의 발등상 그 자리에 촉촉하게 피를 뿌리고 하나님께서 속죄를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드라큐라처럼 피에 굶주린 분이 아닙니다. 루마니아의 성에서 밤마다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나타나는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속죄를 통해서, 죄를 지움을 통해서 어디에 참여하느냐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대제사장책임제라는 제도를 가지고 이 땅에 버티고 있다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갱신된 언약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줄여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언약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구조의 하나의 배치로서 존재하는 겁니다.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작품화 되는 거지요. 그것을 대제사장중심제에 편입되고 배속되고 예속되는 거예요.

고의로 안했을 경우에는 속죄가 되지만 고의로 했을 경우에는 백날 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러면 그 인간은 어떻게 되느냐? 대제사장이 고의로 행한 인간을 대신해서 7월 10일 하루에 전 백성들을 일괄처리를 해주는 거예요.

8월 15일에 노 건평이 나온 것처럼 특별 사면조치가 이뤄져요. 특별사면조치가 일어나면 ‘그러면 이제는 우리 죄가 용서받았겠네.’라고 하시는데 특별사면조치가 일어나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 취지가 아니고 ‘너는 이제 좋든 싫든 이 대제사장책임제속의 하나의 부속품으로 가담이 된다.’는 겁니다.

마치 유월절에 죽음의 사자가 집을 방문하고 떠났을 때 한 숨 푹 쉬면서 ‘참 큰일 날 뻔 했다. 우리 맏이 죽을 뻔 했다.’ 하는데 이미 죽음의 사자가 다녀간 순간 이미 맏이는 죽었어요. ‘아니 피 발라서 살았잖아요.’ 하는데 그 피 발라서 살았어도 그 맏이는 더 이상 그 집안의 맏이가 아닙니다.

어디에 소속되느냐 하면 죽음의 사자가 다녀갔던 그 여호와의 소속으로 맏이가 이동하고 말았어요. 이래도 잃고 저래도 잃고 장자를 잃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녀간 뒤에 애꿎은 장남만 잃었으니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도 남는 장사가 아니네요.’ 하는데 남는 장사가 있어요. 그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빼앗아 간 장남에 의해서 계속해서 그 가족은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각 가정에서는 장자책임제인 셈입니다.

그것이 언약갱신으로 확대되면 대제사장책임제가 되는 겁니다. 이제 대제사장이 우리 집의 장남이라. 우리 집의 모든 구원, 모든 거룩을 책임지는 겁니다. 집의 장남은 거룩을 책임 안 져요. 가장은 일 년에 세 차례씩 절기 때 성전에 가서 제사장한테 교육받아야 돼요. 꼭 가야산수련회에 오는 것 같이, 세미나에 참석해서 공부하듯이 제사장한테 가야 됩니다.

교육받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네가 가정에 돌아가거든 이마와 손목에 신명기의 말씀을 둘둘 감아서 시도 때도 없이 자식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자식에게 일어났던 유월절 사건들, 홍해사건들을 자꾸 기억토록 해서 나는 언약의 하나님인 것을, 언약대로 시행하는 고집스런 하나님인 것을 자세히 가르쳐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해야 돼요. 부모가 소지하고 있는 과거의 정보가 있기 때문에, 부모가 과거에 있었던 그 계시를 소유했다는 이유 때문에 자식은 그 부모가 대대로 전수받은, 부모로부터 다음 부모가 계속해서 전수받은 그 부모의 언약을 대대로 기억해야 되는 겁니다. 만약에 부모를 무시하고 저주해버리면 그것은 부모가 그 부모를 있게 한 그 언약의 자비의 혜택을 자식 대에서 ‘나는 독자적으로 살겠습니다.’ 하고 거부하는 셈이 돼요.

그러면 그 자식은 이 법, 대제사장 책임제에 의해서 그 자식은 죽여야 됩니다. 신명기에 보면 그 자식이 부모 말을 안 듣잖아요. 괜찮아요. 그러면 그 자식을 마을 이장님에게 보내면 돼요. 그 부모는 빠지고 마을회관에서 다른 부모가 그 자식을 때려죽입니다. 그러면 그친 부모는 다른 부모와 이장님과 악수 먹으면서 ‘내 자식을 잘 처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거예요. 꼭 미친 사람 같아요. 그것이 성경에 나온다니까요.

성경을 안보니까 자기자식을 위하는 것이 의로운 일인 줄 착각하지만 성경을 폈다 하면 무슨 탈이 나요. ‘무슨 이런 책이 다 있나? 정말 이상한 책이네.’ 상상을 초월하고 상상을 능가합니다. 그만큼 대제사장 책임제라는 것이 하나님이 친히 만든 철제구조물이 되어서 여기에 우리가 배속되고 배치되게 되면 ‘나’라는 존재의 가치는 누구한테 이양되느냐 하면 대제사장의 존재의 가치에 이양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되고 사회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되고 이웃에게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대제사장들이 하는 그 행세를 봐라. 그들이 하는 것이 모델케이스다.’는 말입니다. 그들처럼 하는 것이 그들이 하나님과 계약 안에서 만났던 그 거룩의 퍼짐, 확산, 확장이 되는 거예요.

‘너희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다.’ 하는 것은 이러한 관계를 말합니다. 이것이 그대로 계약이 갱신되면서 오늘날 이 제사장 자리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이 계시지요. 이 예수님 제사장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한 장소에 태어나서 한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베들레헴에 눌러 살래. 난 크리스마스만 되면 좋아.’ 이런 식으로 한 것이 아니거든요.

계속 정기적으로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가져오라는 식으로 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분은 이동했어요. 애굽에 내려갔다가 다시 나사렛으로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가셨거든요. 이 경로, 출생 - 애굽 - 나사렛 -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에서 로켓 올라가듯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면 이 경로가 뭐냐 하면 대제사장 안에 있는 그 구조물에 배치되어 있는 사람들이 따라서 같이 올라가야 되는 거예요. 구정 때 홍콩이나 중국에서 무슨 놀이 합니까? 용같이 만들어서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서 폭죽을 터뜨려가면서 용춤을 추는 놀이를 하지요. 그 용의 구조물을 만들 때 용의 머리 부분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어서 땀 뻘뻘 흘리면서 하고 있고 그 뒤에 몇 사람들이 또 들어가지요.

그들이 용이 같이 되려면 머리 부분에서 움직일 때 오른쪽 왼쪽 같이 따라줘야 되지 않습니까? 머리는 이쪽으로 가는데 꼬리는 저쪽으로 가면 그 용은 두 쪽이 나 버립니다. 뒤쪽 용꼬리 부분에 들어가는 사람은 자기의 자존심이나 자기의 정체성 같은 것은 예수님한테 다 넘겨야 돼요. 그것 때문에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하는 겁니다.

주식투자 해놓고 그것 때문에 주님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내가 가야 될 그 길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기에 너희는 내 뒤만 따라오면 돼.’라는 겁니다. 그러면 안 따라가면 어떻게 되느냐? 안 따라가도 머리되신 예수님에게서 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그 성령을 마시는 거예요. 성령을 마시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옵니다. ‘한 성령을 마셨는데 마신 자 마다 마약 중독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마시자마자 ‘주여’라고 하는 거예요. ‘누구든지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주여, 라고 부를 자가 없다.’는 말이지요. 주여, 라고 부르다 보니까 무슨 생각이 안 납니까? 내 자존심에 의해서 상대방에게 다가서는 방식이 생각이 안 나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이라 하는 것은 주님을 바라볼 때 저절로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라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쳐다보는 구석이 저 구석이기에 이쪽이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레위기 18장에 보면 엄청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대목은 여기 미성년자들이 있기 때문에 참 보기가 힘들어요. 이 성경이 19금이라 강의하기 참 민망해요.

레위기 18장에 보면 역시 대제사장 구조물 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6절부터 보면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 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찌니라.” ‘어미의 하체는 아비의 하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여기서 이방의 풍습을 좆지 말라고 했거든요. 이방나라하고 이스라엘 차이점이 뭐냐? 한쪽은 언약이 없고 한쪽은 언약이 있다 그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이 애굽과 다른 점은 하나님이 동행해서 밟아온 코스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신 거예요. 이스라엘이 광야 거쳐서 시내 산 거쳐서 십계명 받는 이런 모든 코스가 있어요.

그 코스를 두자로 이야기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되겠지요. 그런데 애굽에서는 뭐가 없습니까? 언약이 없지요. 애굽에서는 언약이 없기에 쳐다볼 것이 항상 자기자존심, 자기욕망 그런 것을 쳐다보겠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이 무엇을 낳았습니까? 대제사장책임제라는 정치형태를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들은 어떻게 살고 하나님을 직접 만났던 그분은 이렇게 산다, 이렇게 관심사를 그쪽에 간 사람만이, 언약에 관심 두는 사람만이 애굽사람들이 관심 두는 곳에는 관심 둘 필요가 없겠지요. ‘엄마 하체가 누구 것이더라? 이모 하체가 누구 것이더라?’ 이런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니까요.

낯 뜨거워서 못 보겠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봅시다. 8절에 보면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 합니다. 아비가 참 여러 명이 되는 모양이죠. 그 다음 9절에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비의 딸이나 네 어미의 딸이나 집에서나 타처에서 출생하였음을 물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치 말찌니라 너는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너의 하체니라.”

도대체 우리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꼭 범하라고 유도하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성교육을 안 시키면 성범죄가 안 일어나는데 성교육을 시키면 성범죄가 범람해요. 이것이 로마서 7장에서 ‘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될 필요도 없는데 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잠자고 있는 우리 내부의 죄의 법이 아주 음흉한 눈을 슥 뜨기 시작하지요.

‘아, 뭐 이런 것이 다 있나. 이런 것도 한 번 해 볼까?’ 호기심을 자극해서 이것을 누를 수가 없어요. ‘괜히 성경공부는 해가지고.’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율법이 가입된 것은 죄를 더 짓게 만들려고 한 거예요. 대제사장책임제 아래, 여기에 불려 들어온 이 사람들이 애굽에 살던 사람들이에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이 태어나서 어디로 이동하셨다고요? 애굽에 갔지요. 애굽에 갔다가 어디로 갔습니까? 빛이 없는 어둠의 동네로 가요. 나사렛 사람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빛이 있는 동네라고 하는 곳은 예루살렘 밖에 없으니까. 애굽에 갔다가 예루살렘에 간 것이 아니고, 성전으로 간 것이 아니고 빛이 없는 동네 이방동네인 나사렛으로 갑니다.

나사렛동네에 가서 그 어둠의 동네에서 자비와 기적을 베풉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있는 자칭 빛의 자녀들이 ‘너 어느 신학교 나왔어? 네가 누구 허락을 받고 전도해?’라고 시비를 걸고 나오지요. 그러면 때가 되매 주께서 예루살렘에 가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경상도 말로 뒤비뿝(뒤집어 엎다)니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신부가 성전에서 손에 기구를 들고 흔들면서 향을 피우고 있으면 ‘신부님 미안합니다.’ 하고 상을 엎어버립니다. 상을 뒤집어 버리면 그 다음에 나온 반응은 어느 것입니까? 예수님이 상을 뒤집으면 1) 상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2) 너 누구야? 몇 번입니까? 상을 뒤집을 때는 ‘당최 네가 누구야? 네가 뭐 길래 하나님만이 만질 수 있는 것을 네가 뒤집는가?’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내가 하나님이거든.’

‘내가 언약대로 나타난 그 메시아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모세율법에 의하면 너는 맞아 죽어야 돼. 사형되어야 합당하다.’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모세 율법이 너희들을 심판할 것이다.’ 모세 율법에 대해서 그들은 나름대로 안다는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지경까지 이른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경로, 적어보면 애굽으로 갔다가 다음에 나사렛으로 갑니다. 이것은 버림받은 동네입니다. 항상 선지자가 버림받아요. 선지자는 항상 자기고향에서 배척받고 버림받는 거예요. 버림받다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예루살렘 자체를 파괴하지요. 에스겔과 예레미야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파괴되어야 하니까 파괴합니다.

그러면 결국 뭐냐 하면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비언약적요소를 예수님의 언약적요소로서 자꾸 대비를 시키는 거예요. 대비를 시켜버리면 여기서 어떤 해석이 나오느냐 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애굽이라는 그것이 애굽을 몰고 가고 옴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개념의 애굽 개념을 가시는 곳마다 주님께서 심어주게 됩니다.

그렇게 심어줘야 예수님의 죽으심은 세상 자체가 예루살렘도 마찬가지고 세상 자체가 처음부터 애굽이었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은 인간자체에서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줘서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방금 나왔던 이것은 대제사장책임제 하에서 이 가족들은 거룩한 씨가 되어야 하는데 이 거룩한 씨는 그냥 씨만 되는 것이 아니고 땅과 같이 결부해서 씨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 ‘거룩한 땅에 거주할 수 있는 거룩한 씨를 생산하는 것은 대제사장책임제밖에 없다.’라는 겁니다.

레위기 18장 끝에 봅시다. 아주 난처한 것 보지 말고 28절에 가서 다 뗍시다. 다 같이 28절부터 읽어볼까요?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그러니까 백성에서 끊어지고 안 끊어지고는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그 땅에서 살 수 없으면 그 백성에서 끊어진 거예요.

그런데 그 땅은 언약이 있는 땅입니까, 없는 땅입니까? 언약이 있는 땅이에요. 이미 대제사장 책임제로 확정되어 있는 땅입니다. 아파트 열쇠도 없으면서 아파트 분양받으면 곤란하잖아요. 아파트에 살려면 열쇠가 있어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땅 언약의 땅은 그 언약의 땅에 부합되는 그 씨가 어떤 씨가 되어야 되겠습니까?

언약에 합한 그런 씨가 될 때 그 땅에서 버틸 수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 저 어떻습니까?’ 하게 되면 ‘네가 딛고 선 땅이 어떤 땅이냐, 그걸 되묻고 싶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이 땅은 주님께서 피를 흘리신 땅입니다.’ 그러면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을 보니 네가 바로 하나님의 땅에 합당하게 살 수 있는 약속 맨, 언약의 사람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체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것이 있어요. ‘이모의 하체는 이모부의 하체다.’라는 것이 나와요. 이것은 여자의 하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남자의 하체가 들어옵니다. 그러면 남자가 언약의 땅에서 할 도리가 뭐냐, 하체관리 하는 것, 씨 관리하는 거지요.

남편 있는 여자를 건드리려고 하면 ‘어디서 건드려. 이것은 내 하체인데.’ 하고 남자의 하체가 들어온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언약이 없는 애굽사람 같으면 ‘그 여자는 네 아내지만 나는 그 여자와 관계하고 싶다.’ 하고 자기 맘대로 자기 욕정에 의해서 하겠지만 언약이 있는 사람 같으면 ‘어이, 남자! 우리 남자끼리 이야기해보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자의 모든 하체는 남자의 하체가 대변하니까 ‘여자는 빠지고 우리 남자끼리 해보자.’ 남성끼리의 결합이 유지되면서 대제사장 책임제가 확립되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남자는 쓸데없이 욕정만 채우려고 하지 말고 정신 좀 차리고 이 땅이 어떤 땅인지를 좀 가늠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땅이 신약에서는 어느 땅이 되겠습니까? 교회? 집? 가정? 어느 땅이 되겠어요?

하늘나라지요. 이 땅에 신약이 되면 땅은 대제사장과 함께 이동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대제사장인데 지금 예수님이 어디가 계십니까? 땅이 어디 땅이에요? 애굽에 갔던 분이 예루살렘을 파괴하시고 어디로 갔습니까?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예수님에 의해서 조성된 그 약속의 땅은 예수님과 동반해서 하늘로 같이 올라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서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 우리의 생명이 하늘에 있지 땅에 있지 않다.’고 하지요. 빌립보서 3장 20절에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정치에 관심 없어야 됩니까?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관심 없이 그저 하늘만 바라보면서 하늘만 가기를 고대해야 됩니까? 공부도 하지 말고 그냥 도사처럼 만물상처럼 바위위에 앉아서 하늘만 쳐다보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만물상 올라가도 그 땅이 맨 땅이거든요. 주께서 올라오라고 할 때까지 그냥 이 땅에서 사시면 주께서 가신 그 길대로 그 코스대로 주께서 성령 주셔서 밟게 하실 겁니다. 하여튼 고생은 무지 안하려고 해요. 고생은 하나도 안하고 편하게 살다가 천당 가려는 그 약은 수를 쓰는지 몰라! 주님 가신 코스를 밟아 가야 돼요.

그러면 여기 땅에서 씨로 가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떨어져 나가냐 하면 바로 혈육이 떨어져 나가지요. 구약 때 혈육, 구약 때 혈육이 떨어져 나가면 무엇도 떨어져 나갑니까? 하체도 떨어져 나가요. 구약에서는 아주 유치하게,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낮아진 모습으로 ‘애굽 사람과는 달라야 된다.’고 해서 비교대상이 애굽사람이고 ‘우리는 언약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때의 비교할 언약은 기껏해야 모세언약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세언약 가졌다? 애굽사람들아, 너희는 이런 것이 없지?’ 이러거든요. 그러면 대제사장 책임제 하에서의 대제사장은 애굽에서 벗어난 모세언약상태에서의 그 정도 수준이기 때문에 유치한 모습으로 그렇게 하지만 언약이 갱신되고 또 갱신되어서 완전히 갱신된 신약시대에는 아주 시원하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 아주 속이 시원해요. ‘자식을 어떻게 할까요?’ ‘자식을 하나님께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런 식으로 되는 거예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치 않다.’ (마 10:37)그런 식으로 아주 속 시원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말 들어도 우리는 속이 안 시원하잖아요. 안시원한 것은 뭐냐 하면 아직도 이 코스대로 밟아야 되거든요. 나중에 한 95살쯤 되어서 자식이고 뭐고 다 떠나고 혼자 죽게 되면 ‘할아버지, 자식은?’ ‘자식이고 뭐고 지금 죽는 마당에 자식 생각하게 됐나? 난 속 시원하게 떠난다.’하면서 그때는 마지막으로 속 시원하게 떠날 거예요.

그 전에 죽기 전까지는 여전히 이렇게 얽매이고 저렇게 얽매이고, 용돈 달라고 하면 줘야 되고 바가지 긁으면 그것 다 들어줘야 되고, 온갖 것 다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런 옛 코스를 밟아서 새 코스의 완성에 도달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그 소리를 들을 때 제자들이 참 좋아했을 겁니다.

그 소리를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예수님이 기도할 때인데 그 다음의 소리가 그들을 실망케 하지요. ‘내가 너희를 아직은 안 데려간다.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 데려가지는 않는다.(요 17:14-15) 왜? 세상이 실컷 너희들을 미워하도록, 너희는 나의 그물의 하부구조로서 이 지상에 계속해서 남겨둬야 된다. 단 내가 너희에게 부탁하나 할게. 너희를 건드리는 놈들은 너희가 미워서가 아니라 내가 미워서 너희를 건드리는 줄 알아라.’라는 그러한 언약관계 속에서 요한복음 14장 15장은 전개되는 겁니다.

구조를 생각하게 되면 뭐든지 잘 보여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이러한 하체이야기는 애굽과는 달리 새로운 씨를 맺을 때는 그 땅에 합당한, 언약에 합당한 씨만이 그 땅에서 살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언제? 유치했던 시절에. 가나안땅이라는 제한적인 것을 가지고 하님나라를 설명한 그 때 그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레위기 19장을 봅시다. 19장 18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와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원수를 갚지 말고’ 하는데 9절에 보면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요.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렇다면 이 말은 쉽게 말해서 땅 주인이 누구란 말입니까? 땅에서 노동하는 내가 땅 주인이 아니고 누가 땅 주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 주인이 되잖아요. 땅주인과 임대차 계약을 하게 되면 뭘 해야 됩니까? 생산물을 바쳐야 되잖아요. 바치면 하늘에 냅다 던져야 됩니까? ‘하나님, 갑니다~!’ 하고 첫 열매를 하늘로 던져버립니까?

그러면 누구한테 바치는 거예요? 하나님의 첫 열매를 누구한테 바치지요? 제사장한테 바치지요. 그러니까 이것 또한 뭡니까? 대제사장책임제하에서 대제사장을 앞장세우면서 그 배후에 누가 계시다?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시건방지게도 내가 있는 곳에 너희가 들어왔느니라. 내가 있는 곳에 감히 겁도 없이 들어왔느니라. 따라서 너희들도 이 배치 속에 있다면, 하나의 부속품이라면 대제사장이 어떻게 사는가를 따라서 그대로 너희도 따라줘야 이 땅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즉 대제사장은 가장 가난한 자 중에 가난한 자로서 존재위상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그저 거지처럼 얻어어야 될 처지에 놓여 있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장차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거지로 나타나시겠다는 뜻입니다. 육적 거지와 영적 거지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참 겁나고 무서운 일이지요. 여기서 골치 아픈 것이 있어요. 여기서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 이렇게 할 때에 이 문제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열매를 남길 때 그 열매가 어느 정도인지 그 표준 되는 수치를 제시하지 않았고, 모서리에서 얼마만큼을 남겨야 되는지, 2센티를 떼고 거두는지 3센티를 떼고 거두는지 그런 것이 없어요.

그냥 ‘이것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남겨두고 이것만 따겠다.’ 하는 그런 것은 누가 정하는 겁니까? 대략적인 것만 제시했지 구체적으로 실행될 때 필요한 세칙 같은 것은 누가 해요? 본인이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거예요. 그것도 잘 모를 때는 제사장한테 물어서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러한 과정 속에서 뭐만 기억되느냐 하면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나라에서 끊어지면 안 돼.’라고 생각하겠지요.

바로 그것, 그런 해석이 법을 보고 나서의 인간들의 약점이고 잘못된 해석인 거예요. 그 잘못된 해석이 바로 18절에 나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하나님이 사람보고 ‘너는 이웃을 돌보라.’고 하면 이웃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을 돌보고 있는 자기 폼 낸다고 누구 입장을 먼저 생각하느냐 하면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거예요.

‘얼마를 도와주면 됩니까?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세요.’ ‘아플 때 도와줘라.’ ‘아플 때가 열이 37.5도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아니면 열이 38.5도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어느 날 보니 열이 37.5도인데 38도 되기를 기다렸는데 그것은 이웃사랑이 맞습니까, 아닙니까?’ 꼭 이런 식으로 자기 의로움과 정당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술 취하지 말라.’고 하니까 ‘참이슬을 몇도 짜리를 먹어야 술 취하는 것에 해당이 되는지, 술이 센 사람은 몇 잔 먹어도 안취하는데 어떤 사람은 반잔 먹어도 술이 취하는데 그 반잔이 술에 취하는 것에 해당됩니까, 안됩니까?’ 하지요. 술이 취한다는 것이 혈중알콜농도 몇 퍼센트인지, 측정기로 훅 불어서 측정해야 되는지, 그런 세칙 같은 것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 세칙이 발달한데고 고려신학교 측 교단입니다. 역지사지라고 남의 입장을 생각해야 되는데 내가 이만큼 최선을 다해서 법을 지키고 있다는 자기 의로움을 챙기는 식으로 하게 되면 이것은 뭡니까?

모든 희생이 가득 들어 있는 대제사장의 그 취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거예요. 대제사장은 그렇게 생각 안하고 희생정신으로 나가는데 저 밑바닥에 있는 이 부속품들은 뭘 하라고 하니까 억지로 하기는 하는데 덜 손해 보는 쪽으로, 그저 남들 보기에는 이웃사랑 하는 티만 내고 덜 손해 보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헌금을 얼마나 하면 됩니까?’ 이렇게 했을 때에, 예를 들어 속건제 같은 경우에는 20퍼센트를 보상해야 되거든요. TV를 깨버리면 그 동일한 TV를 사주고 거기에 동글이 청소기를 하나 더 보태줘야 하는 거예요. 이런 구성은 늘 오는 구성이 아닙니다. 런칭제품 때 이런 것이 오는데 꼭 20퍼센트를 더해줘서 ‘내가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힌 것이 되어서 내가 대제사장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당신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습니다.’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하라는 말이지요. 속죄제의 일종인 속건제는 인간들의 육과 결함된 속죄제가 됩니다. 혜택이 육적인 차원으로까지 실질적이고도 결합되어진다는 겁니다. 이사야 53:10에서 예수님의 희생을 속건제로 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면 복잡해요. 십일조를 갑근세 떼고 십일조냐 포함해서 십일조냐, 집을 팔았는데 세금 떼고 소개비 다 떼고 그 수입의 십일조냐, 아니면 그 전체의 십일조냐, 굉장히 계산이 바빠요.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런 식으로 하려면 때려치워라.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줘도 안 받는다.’ 그 말이죠.

‘돈이 네 금고에 있어도 네 것이 아니고 교회에 내도 네 것이 아니고 항상 네 것이 아닌데 그것을 가지고 이것을 포함시켜서 낼까, 빼고 낼까.’ 꼭 식당에 가서 계산할 때 신발 끈 묶고 있는 척 하는 사람처럼. ‘이웃을 사랑하라.’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양으로 측정이 안 되고 법으로도 측정이 안돼요.

이웃을 사랑하려면 ‘나는 이웃을 사랑 안하는 죄인 맞습니다.’를 드러내는 것과 병행해서 그 바깥으로 사랑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나는 당신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라는 것을 그 이웃이 들으면 그것이 사랑으로 받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웃사랑이 되려면 내가 저쪽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고 어디를 거쳐 와야 돼요.

뭘 거쳐 오느냐, 대제사장이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희생했는가? 제사장은 아무 재산도 없어요. 재산도 없는 그 제사장을 거쳐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 재산도 없으면서 오직 내놓을 것은 자신의 목숨밖에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대제사장제도에서 이웃사랑의 대표적인 것으로 나오는 것이 도피성입니다. 인생이 살고 죽는 문제가 자신의 혼자 문제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대제사장이 살고 죽고와 결부되어 있음을 보이려는 제도입니다.

도피성은 고의성이 아닌 하나님의 의해서 발생된 살인 사건에 대해서 죽은 자의 친족들의 불타는 복수심을 피하도록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벌어진 사건인데 죽은 자 쪽의 사람들은 ‘그렇든 저렇든 네가 내 동생 죽였지.’ 하고 비언약적인 사적인 복수심이 가담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자도 용서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세에 하나님의 사랑은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하나님은 이미 너희의 살인죄까지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에서 하나님께로 들어오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로 들어오라.’고 하면 하늘로 올라갈까요? ‘하나님께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은 대제사장제도에서는 대제사장이 살림 사는 그 동네로 들어가는 거예요. 거기로 들어가면 이 대제사장과 같이 살다가 이 살인자는 대제사장이 죽었을 때 바깥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죄가 없고 대제사장이 살아 있는데 나온다면 대제사장을 잠시 이용했다는 그런 죄목으로 맞아죽어도 싼 거예요.

그러니까 고의가 아닌 죄를 지었던 이 사람은 대제사장을 만나서 틱틱거리면 안돼요. ‘대제사장님, 내가 여기 올 사람이 아닌데 우연히 조깅하다가 신발이 벗겨져서 날아갔는데 그게 담을 넘더니 담 밑에서 시금치 다듬던 할머니의 뒤통수를 때려서 그 할머니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난 재수가 더럽게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할머니 가족들은 합의금으로 1억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어쩌면 좋습니까?’라고 하지요.

그때 이 제사장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신발이 벗겨져서 하필이면 그것이 네 바퀴 반을 돌아서 하필이면 그 신발이 떨어지는 그 자리에 있던 할머니의 머리에, 그것도 하필이면 급소에 맞아서, 그것도 그 할머니가 작년에 수술한 자리인데 하필 거기에 맞아서 할머니를 즉사하게 한 것은 너를 가지고 대제사장 덕분에 죽을 네가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너를 활용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는 너의 자존심 생각하지 말고 이 언약체제하에서는 네가 담당할 기능이 무엇인지 보여주라.’는 것인데 그 기능은 하나밖에 없어요. ‘대제사장은 항상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 바로 대제사장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라. 나에게 오라. 모든 죄를 사해주마.’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주고 자비를 베풀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인데 그 자비와 은혜는 조건이 있어요. 그 자비와 은혜 때문에 우리가 약속의 땅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믿는 조건하에 거기에 참여되는 겁니다. 첫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언약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지킬 법이 없어요.

그냥 덮친 거예요. 그 할머니에게 신발이 날아들어서 덮친 것이고 나에게는 그 할머니를 죽인 죄인이라는 그 난데없는 사태가 덮친 것입니다. 덮치는 순간 우리는 그동안 잊어버렸던 대제사장의 존재의 중요함을, 그것이 나보다 더 중요해요, 나보다 더 중요한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 나는 그분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도 마땅하다는 것을, 이런 관계, 이런 체계, 이런 구조물을, 다시 한 번 우리의 생명인 것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세상이라는 것,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레위기로 꽉 차 있다고. 어디 한 곳도 레위기를 벗어난 적이 없다. 항상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19장 14절에 보면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 이것이 무슨 놀부 심보도 아니고…….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빠지지요. 그러면 까르르, 하고 재미있잖아요.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아볼까 하는 그 순간 무엇을 잊어버립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지요. 언약을 잊어버리는 순간 뭐가 생각나요?

‘오늘 심심한데 나한테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물론 소경한테는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엎어지고 자빠지고 코피가 나니까. 그런데 ‘남이야 재미가 있든 없든 내가 오늘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그 순간 그 사람은 독자적인 자기중심의 세상 관을 잠시나마 발휘하고 있는 거예요. 아까 식사하면서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결국 법이라 하는 것은 평생토록 살아 있을 동안 우리의 죄를 드러낸다는 것을 제가 이야기하면서 그 옆에 어린애가 있길래 제가 그랬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이 애가 다른 애보다 더 귀엽지요?’ ‘귀엽지요.’ 그러니까 그게 귀여우면 나의 보물이 될 것이고 남들 보기에 귀한 보물이 충돌해서 내 아이와 부딪힌다면 남의 귀한 보물보다 내 귀한 애가 다쳤는지 먼저 살핀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없이는 우리의 독자적인 최선을 다한다는 이것은 하나님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약속과 어울리지 않는 애굽시절, 언약이 없던 시절의 그 풍속을 우리가 육신이 있는 한 계속 가져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얼른 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입혀주시는 예수님의 새 몸을 입었으면 좋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맘대로 안 되잖아요. 다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그날이 지금 다가오고 있다는 거예요. 연세 많은 분들은 제대날짜가 가깝고 젊은 사람들은 강의시간에 졸기 바쁘고 전혀 현실감도 떨어집니다.

연세가 한 80쯤 되어 기력이 다 떨어지면 진짜 이것은 현실중의 현실이어서 막 손에 잡힐 듯합니다. 손에 막 잡힐 듯해서 이제 내 차례다, 하고 있는데 갑자기 뒷줄에 서 있던 스무 살짜리 애가 죽어서 새치기 해버리면 ‘이게 뭐야? 순서조차 우리 의도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 연세 많은 분들이 힘들어도 교회 나와 줘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 소망을 현실로 보지 않아요.

죽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만 하늘나라가 소망으로 오는 겁니다. 그래서 개척교회 목사가 교인수가 적을 때 소망이 가깝고 교인수가 많으면 그것은 언약이고 뭐고 그 교회 붙들고 살려고 할 겁니다.

그 다음에 19장 35절부터 봅시다.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심이 십자가와 언약에 관심 없으면 심심해서라도 ‘오늘도 장사하는데 누굴 속여 볼까?’라고 하게 되어 있어요. 육신에 죄에 대해서 아주 민감합니다.

여기 장사하시는 분들 계시지요. 제가 어느 날 설교시간에 이런 예화를 들어서 누구한테 욕 되게 얻어먹었어요. 칠성시장에 장사하는 사람이 장사는 안하고 성경책을 펼쳐놓고 보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장사하는데 성경을 왜 보고 있습니까? 장사를 하지.’ 이랬더니 ‘그게 얼마나 고상한 일인데, 성경책 보는 것을 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성경에 열중하라고 했으면 그 같은 시간에 장사하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성경책 보는 것은 하나님 일이고 장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내가 골라잡은 하나님의 일을 자기가 일방적으로 선택해서 그런 거예요. 손님이 오는 것도 이웃이 오는 것이고 그것이 레위기 안에 포함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집에서 보시고 실습은 바깥에 나가서 하세요. 실습시간에 이론책 보면 안 되잖아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항상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항상 딴 짓 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성령께서 가만두지 않고 주님께서 가신 그 코스, ‘주님께서 너 같은 그런 경험을 다 했거든.

그래서 하나님이 네 사정을 다 안다고. 네 모든 괴로움을 체휼하시고 네 모든 괴로움에 동참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럴 때는 방향을 이렇게 틀어야 해.’ 하고 징계를 내리시면서 주님 가신 그 길로 가게 하면 하늘나라가 지상에서 돈 몇 푼 버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한 2초 동안은 깨닫게 해요.

그래서 돈을 초월해서 손님을 맞이하면 ‘오늘 이 주인이 웬일이야? 물건 하나 사줄까?’ 이렇게 나오지만 언약에는 관심도 없이 사람 하나 꾀이려고 바짝 붙으면 ‘내 이럴 줄 알았지……, 다른 데 좀 둘러보고 오지요.’ 하고 가버립니다. 손님이 하나 오더라도 이웃이 오고 나그네가 왔다고 생각하세요.

목사한테 교인이 하나 오더라도 나그네가 왔다고 생각해야지 그것을 붙잡으려고 세 시간동안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해버리면 나중에 질려서 두 번 다시 안 옵니다. 의도가 너무 티 났어! 의도가 너무 티 났어! 항상 그 손님 없더라도 구원받는다는 그 언약을 여러분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0-08-11 09:08:28  녹취 : 오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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