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3강-2010여룸수련회

아빠와 함께 2014. 1. 3. 17:10

2010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레위기[종말의 종말] 3강

(강의 : 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성경 레위기 1장 1절,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이렇게 돼있습니다.

성당에서 신부가 향단을 조롱박처럼 만들어서 툭툭 던지는 식으로 하는 성당 기능을 보시죠. 그럴 때 개구쟁이 심정으로 슬며시 성당 제일 앞쪽에 일반인이 못 올라가는 신부 혼자 올라가는데 올라가보는 거예요. ‘아저씨, 지금 뭐 하세요?’ 물어보자 이 말이죠. 다른 말로 ‘이 짓 왜 합니까? 이런 짓 왜 해요?’

레위기를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이 지시하니까 따라야 된다는 그런 의식을 저도 그렇고 치워버리고 ‘하나님이 저한테 무슨 짓을 시켰습니까? 꼭 이 짓을 해야 하나님답습니까?’ 질문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이런 짓을 내려야 하나님다운 이유가 뭐냐고 물어봐야 돼요. 성당에서 신부가 할 때 보통 성당에 있는 신자들은 감히 거룩한 장소에 들어갈 생각을 안 하는데 개구쟁이 같은 심정으로 올라가보자 이 말이죠.

‘이게 무슨 짓입니까?’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장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려치우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런 느낌이 아니고 진정으로 묻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이거는 성당 신부도 목사도 마찬가지지만, ‘당신이 하는 그 짓이 인간과 관련돼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관련돼있습니까?’ 어느 쪽이냐 이 말이죠.

당신이 향 초롱 만들어서 미사하기 전에 향 피우는 정기적으로 하는 짓이 사람과 관련돼있는 것이냐, 하나님과 관련돼있느냐고 신기하게 묻고 싶은 거예요. 그럴 때 신부가 하는 말이 ‘이거는 전통입니다. 관행이고, 관습이다.’라고 말 나오면 더 이상 물을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쓸데없는 짓이니까. 이거는 전통과 관행과 관습이라 하는 것은 이게 ‘문화’거든요. 문화는 껍데기입니다. 껍데기니까 불교도 괜찮고 기독교도 괜찮아요. 어차피 껍데기니까.

사람이 성장과정과 타고난 자기 종교적인 조상들로부터 오는 문화라는 자체를 옳다, 그르다 나무랄 수 있는 입장이 못 돼요. 어떤 특정 문화가 있어서 다른 문화를 폄하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이 말이죠. 어차피 문화니까. 예를 들어서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보고 ‘당신 왜 키 작아?’라고 폄하할 수 있는 자격이 못 돼요. 어차피 문화니까 그것으로 시비 걸지 말자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신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짓은 하나님과 관련된 짓입니다.’라고 한다면 그때는 시비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짓을 하라했을 때 ‘이 짓 아니면 하나님 안 됩니까?’ 하는 거예요. 질문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짓을 시켰습니까?’라는 질문보다 더 센 질문이 뭐냐 하면, ‘이런 짓을 시키지 않으면 왜 하나님이 하나님답지 못한 이유를 당신이 아느냐?’고 묻는 거예요. 질문자체가 어려워 죽겠다, 정말~

기독교, 천주교 문화기 때문에 어차피 의미 없는 거예요. 기독교 가정에서 교회 가는 것, 천주교 가정에서 성당 가는 것 어차피 문화니까 문화는 서로 교류해도 괜찮아요. 어차피 껍데기니까. 목욕탕에 가서 각자 비듬 내놓고 비듬 자랑하는 것과 똑같은 거고, 각질 꺼내놓고 네 각질이 더 예쁘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과 관련 있다면 심각한 문제거든요. 하나님과 관련 있는데 만약에 우리가 거기에 동참 못하면 하나님에 잘린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왜 하나님이 이 짓을 시켰는지, 왜 그래야만 하나님 되는지를 우리는 궁금한 거예요. 그러면 신부가 하는 말은, ‘그런 것은 하나님께 물어보세요.’

그 말은 당신도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시켰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시킨 이유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형식적인 문자를 흉내 내는 것은 하나님 일을 했다고 우길 수 있는 근거가 될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께서 법을 시키면 그 법을 자기 안에 있는 법이 일부러 다시 마중 나와서 조작해냅니다. 왜 인간은 법을 조작하느냐 하면, 조작해야 자기가 가는 길이 정당화되고, 이 정당화된 것으로 천국까지 들이미는 카드로 사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거예요. 예수 믿어라 해서 예수 믿었는데, 십자가 피를 믿어라 해서 믿어서 왔는데 뭐가 잘못됐느냐 하는 거예요. 왜 십자가 피를 믿었다 해야 진짜 하나님다운지를 그 하나님을 아느냐 이 말이죠. 그 하나님 심정을 아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이 아니고 왜 십자가로 구원받게 하시는지 그래야만 진짜 하나님인 줄 네가 아냐 이 말입니다.

모르고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시키는 취지의 십자가가 아니고 네가 조작해낸 네 나름대로의 십자가고, 언약이고, 네 나름대로의 부활이고. 그러면 그건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과 관련 없이 바로 기독교라는 관행과 관습, 전통이란 껍데기로 들어가죠. 평생 동안 교회 다녔으니까 어쩌라고? 그게 어쨌는데? 그럼 자기 하나의 문화죠. 그 사람이 만약에서 절에서 태어났으면 똑같은 이야기를 할 거란 말이죠.

우리가 지금 레위기를 시작하면서 레위기의 주석과 모든 논문을 보세요. 이 문제를 거론 안 합니다. 성경 나름대로 문법적 해석해서 시키는 대로 살자 이러는 거예요.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런 것은 물어볼 생각도 안 하고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현재 나온 레위기에 관련된 책이 다 그래요. 안 그런 책을 못 봤습니다. 도서관에서 찾아보니까. 한심스러워요. 개척교회 하기 싫어서 미국 유학해서 이런 식으로 레위기로 박사학위 땄다고. 그게 무슨 의미인데? 믿음 있으면 학위 안합니다. 개척교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법을 줄 때 온전하게 받지 못해요. 이 뜻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한 걸 요약하면, 이런 이야기했죠. 우리가 레위기를 들어다보면, 우리가 들여다 볼 때는 선악과란 돋보기로 들여다 볼 때 저쪽에서는 십자가란 돋보기로 들여다보면서 ‘너, 뭐 아나?’ ‘지키라 하니까 뭐 해보는 겁니다.’ ‘아이고, 지켜봐라.’

그럼 우리는 우리 안에 법을 동원시켜서 구성해요. ‘이건 지킨 것 맞지요?’ ‘딩동. 이건 됐고.’ ‘이렇게 지키면 레위기 2장 지킨 게 되고.’ ‘딩동 됐고.’ ‘이거는 송아지 잡고, 수양 두 마리 잡은 것은 제사장 위임식에 가져온 것, 이것도 지켰고.’ 주님께서 쭉 보면서 ‘모든 말씀은 내게 대해서 증거하는 건데 어떻게 네가 지켰다고 하느냐?’

선악적인 몸으로 생명나무 몸을 사고가 안 맞게 돼있어요. 왜? 처음부터 격리돼야 됩니다. 그렇다면 레위기는 우리가 온전치 못한 거예요. 여기서 온전치 못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선 지키라고 하셨는가? 여러분 이거 한번 생각해봅시다. 말썽이 생기는 것이 우리가 동물이나, 기계라든지 도구, 피아노 이것하고 이야기할 때 말썽 생깁니까? 그런데 언제 말썽 생깁니까? 꼭 사람하고 이야기할 때 말썽 생기는 거예요.

하나 코 골면 나머진 밖에 나가요. 사람 때문에 말썽 생기는 거예요. 말썽꾸러기한테 법을 왜 줍니까? 왜 주느냐 말이죠. 그것은 인간이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감당하는 척을 하는 내부적인 조작된 단계에 있는 거예요. 감당도 못하면서도 근처라도 가보자는 그래서 의로움을 유발해보고자 하는 게 인간에 들어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자기 껍데기가 생산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문제 삼는 것은 레위기 보면 알겠지만. 생리혈, 여자가 생리했다. 남자가 정액을 바깥에 쏟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부정하다는 거예요. 여자가 임신했다고 더럽다는 거예요. 뉘앙스가 어떤 뉘앙스입니까? 여자가 생리하고 싶어 합니까? 참 답답한 하나님이에요. 몽정을 하고 싶다고 합니까? 우리가 감당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 했다고 더럽다 하니까 결국 사람은 사는 게 처벌이에요. 출생=처벌. 태어난 것이 처벌이에요. 기분 더러워요, 정말. 뭔가 태어나서 착한 일이나 나쁜 짓을 해서 벌 받으면 우리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서 착한 일도 나쁜 일도 하기 전에 이미 태어나자마자 ‘여기 죄수 한 명이요’ 하고 카운트, 계산한 거예요.

생리했다고 더럽다고. 그래서 제가 인간의 법적인 조작, 그러니까 생리한 것이 더러우니까 왜 더러운가? 생리 피가 땅을 적혔으니까 더럽다. 우리에서 끄집어내는 아이디어, 법적인 조치는 간단해요. 2층을 만들어서 땅과 직접 접촉을 안하면 어떨까요? 생리 피를 2층에서 처리하면 2층이니까 아래층하고 직접 접촉이 안 되잖아요. 그럼 2층에서 처리하면 그건 안 더럽습니까?

레위기에 보면, 2층에서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희년에 있어서 가옥은 부동산에 속한 것이 아니고 동산에 속합니다. 땅만 부동산에 속하고 그 외에는 동산에 속해요. 돈 같은 재물에 속하기 때문에 희년이 되어서 다시 돌려받을 수 없어요. 2층집 지어봐야, 3층집 지어봐야, 20층짜리 아파트에서 생리해봐야 하나님 보시기에는 땅에 피 흘린 걸로 간주해서 역시 더러운 짓을, 부정한 짓을 한 걸로 칩니다.

세상에 레위기 보기 전에 생리한 것이 죄인 줄 누가 알았겠어요? 몽정한 것이 정액을 쏟아낸 것이 처벌 받을 일인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도무지 하나님께서 따지고 싶은 것은 너는 이 땅에서 태어나서 사는 것 자체가 벌 받는 징벌의 기간이라는 거에요. 잘하나, 잘 못하나 상관없어요. ‘태어나셨습니까? 벌 받으세요.’라는 거예요. 난데없이 정말 생뚱맞아요.

병 주고 약주지 말고 아예 병 안 생기는 게 훨씬 좋지 않습니까? 근데 하나님께선 우리로 하여금 근원적으로 이 처벌에서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란 거예요. 그럼 원숭이는? 원숭이도 마찬가지고. 개는? 개도 마찬가지로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이 세상에서 의로운 분은 없네요?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레위기 해석은 레위기에서 균열이 일어나는 곳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진짜 레위기의 번제의 의미 속으로 들어가려면 레위기에서 뭔가 저주받은 모습으로 쫓겨나는 아사셀 염소 같은 그 뒤를 추적하는 거예요. ‘저주받았다. 이런 짓을 해선 안 된다.’라는 쪽을 기피하지 말고 도리어 깊숙이 파고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쉽게 합시다. 이스라엘 진영, 텐트촌이 있는데 여기에 진 바깥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레위기 13장, 14장에 문둥병이 나옵니다. 이쪽에서는 산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레위기를 생각하면 우리가 문둥병자를 보았을 때,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저 사람은 저주받았구나. 안 됐다. 인생 저렇게 망가지네’ 하면서 측은해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상당히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입니다. 문둥병자는 우리를 대신해서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자입니다. 레위기 13장에 보면, 성막에 있는 제사장에게 확인시켜서 ‘아무개 이 사람 아직도 문둥병인지, 아닌지 알아봐라.’ 이 사람은 나가지 말고 입구에서 ‘아저씨 이리와 보소. 아직도 흔적이 더 있네. 좀 더 있다 오시지.’ ‘아저씨는 나았네.’ 하고 여기서 통보해주면 제사장이 그 사람 데려오라 해서 1단계, 2단계, 3단계의 정결규정이 나옵니다.

분리시킨 성속의 공간을 어떻게 이 문둥병자가 분리의 공간을 통과해서 거룩한 존재로 달라지느냐를 하나님이 제시한 제사법을 통해서 다같이 보라는 겁니다. 첫 단계는 진 바깥에서 절차입니다. 환자가 완전히 나았는지 여부를 살피는 절차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진 안에서의 절차입니다. 세번째 단계는 화막 안에서는 드리는 절차입니다. 이로서 진 안과 밖이라는 분리와 회막 밖와 안이라는 분리를 이 문둥병자는 겪는 겁니다. 그 과정은 7월 10일날 드리는 대속죄일 제사와 유사합니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제사장은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가 필요합니다. 새 두마리 중에 한마리는 흐르는 물과 함께 질그릇에 담아둡니다. 다른 한 마리는 새는 죽여서 피를 짜냅니다. 그 피를 문둥병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게 7번 뿌립니다. 그리고 그 다음 살아있는 새를 공중으로 날려보냅니다.

두번째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제물이 아닙니다. 7일 동안 문둥병자 되었던 그 사람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씻는 일입니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제물로서 어린 수양과 1년된 어린 암양과 고운 밀가룩 7리터와 기름 섞인 소제물과 기름 0.3리터입니다. 어린 수양은 속건제로 드리면서 피를 받아내어서 제사장이 문둥둥병 들린 자의 오른쩍 귀부리와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기름을 가지고 문둥병들렸던 자의 오른쪽 귓볼과 오른편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이것은 곧 피 위에 기름을 바르는 것으로서, 기름 위에 피 바르는 속죄제사의 절차와 대조가 됩니다. 

그러니 이 진 밖의 나온 사람은 참 안 됐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진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사실은 문둥병자가 돼야 마땅한데 어떤 특별한 혜택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문둥병 걸린 사람의 절차를 통해서 깨달아야 돼요. 이게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 기적, 즉 모세가 손 집어넣으니까 문둥병 되고, 다시 집어넣으니까 성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이고, 저 사람 안 됐다.’ 안 된 게 아니고 그걸 모르는 네가 안 된 거예요.

그 사람이 문둥병자가 다시 성한 사람 되면서 이 성하게 된 것이 어떤 하나님의 레위기의 절차에 의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가 그걸 보게 되면, 그 절차가 우리는 문둥병 걸리는 그러한 사태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지금 공짜로 주어진 거예요. 그런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예전에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은혜의 두께가 이 정도로 두껍게 깔려있어서 문둥병에 안 걸린 겁니다.

사람에게 있어 자신을 갖추기 위해 동원하는 시간성이란 우리에게 전혀 두께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60년 산다면 59년 11개월 동안 살아도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갓 태어난 애나 60년 산 사람이나 똑같은 입장이에요. 60년 산 게 어디 있습니까? 없잖아요. 없다니까요. 어제 살았잖아요. 어제 날아가 버렸어요.

사람이 두께란 게 없단 말이죠. 만날 하루밖에 없어요. 이게 무슨 상황이냐 하면, ‘할아버지 70년 동안 살았으니 이제 음식 그만 드세요.’라는 말이 성립이 안 돼요. 69년 산 것 다 날아가 버렸으니까 오늘 밥은 먹어야 돼요. ‘그만큼 먹었으면 그만 먹지 왜 자꾸 아침 먹나?’ 없다니까. 그래서 네 살 먹은 손자하고 칠십 먹은 할아버지하고 맛있는 반찬 두고 다투는 것 보면 가관이라니까요. 똑같은 입장이에요. 자기 며느리 보고 있을 때는 ‘애야 먹어라’ 하다가 가고 나면 ‘이 못된 것.’ 하고 뺏어 먹는다고. 애는 뭐라고 하겠어요? ‘예에, 예에, 예.’

진 밖과 진 안을 분리시키는 내부에서 올라오는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이쪽이 거룩이 아니고 진 밖이 더러운 게 아니라 거룩과 이것을 쪼개는 거예요. 쪼갬으로 말미암아 ‘나는 거룩하다’가 아니고 ‘나는 거룩을 입었다’가 되는 겁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거룩한 인간이야. 한 평생 거룩하게 살았어.’ 이게 아니라

나는 계속 올라오는 거룩을 입지 않으면 진 밖의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왜 출생 자체가 처벌이니까. 마땅히 처벌 받아야 되는데 이 처벌을 안 받고 있는 것 보니까 처벌을 커버하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조치가 나한테 드리고 있구나를 깨닫는 것이 레위기의 진수입니다. 그게 아브라함 언약과 통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지난 시간에 마지막에 이어서 계속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임재 했을 때 천사가 자기 몸을 가린다 했지요. 이사야는 그 앞에서 자기가 스스로 가릴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 참 중요해요. 억수로 중요합니다. ‘예수님 피로 나를 가리면 구원받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조치가 인간은 못 합니다. 예수의 피를 자기가 발라보세요. 자기가 바른 피는 인정 안 해줘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몰라요.

선교단체에서 쉽게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것 아닙니다. 출생 자체부터 나란 인간은 처벌 받게 돼있다 그걸 인정하게 하시는 것, 나는 진 밖에 나가야 되겠다는 자체가 내부에서 올라온 거룩의 결과에요. 그 자체가 이미 이스라엘 속에 있는 겁니다. 지금 어떻게 하면 좀더 쉽게 하려고 제가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도 못하는 그것을 이사야는 대책이 없이 그냥 나자빠지는 거예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또 주의해야 됩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거는 실상을 보니 나는 죽었다. 죽은 놈이 죽었다고 하는데 뭐 잘하는 짓이고, 훌륭한 짓입니까?

어디 트릭 씁니까? 판사 앞에서 ‘너, 사형.’ 하니가 ‘맞습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사형 받아 마땅합니다.’라는 말을 내뱉는 언어 중에 어떤 트릭이 있느냐 하면, 판사가 ‘너는 네 죄를 아는 겸손한 죄인이구나. 내가 기특해서 용서해줄게.’라는 트릭을 계산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이런 트릭이 통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하니까 진중권 씨가 ‘오냐. 침 뱉어줄게.’ 했어요.

이사야는 천사도 감히 감당 못하는 그 영광을 보고 난 뒤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내가 망한 백성 중에 하나다.’ 그 다음에 숯불로 지져주고 말고는 하나님 소관이지. 그 다음에 숯불로 지져줄 때가 됐는데 왜 아직 안 오지? 이런 것을 이사야 기다릴 자격이 못 됩니다. 그러한 노림수를 가지면 안 돼요.

식구가 셋입니까? 그러면 세 식구 전부다 처벌받는 기능이에요. 네 식구라면 네 식구 처벌받는 거예요. 보조금 나온다고 애 하나 더 낳았어요. 그러면 한 명이 더 처벌받는 거예요.

왜 그런 문둥병을 진 밖에 내놓습니까? 진 안에 있는 사람도 동일하게 문둥병이며 너희들이 미처 모르는 하나님의 혜택을 입고 있는데 그 혜택은 바로 이 진 밖과 진 안을 거룩과 속된 것을 구분하게 하시는 그 위력이 거룩에서 나온 겁니다.

이 거룩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해야 될 일, 십자가와 가심과 그리고 부활을 겪어야 하나님의 종말에서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거예요. 주가 되시는 절차와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것이 분출되게 되면 거기서 저주받는 것과 사랑받는 자가 갈라지는 거예요. 지옥과 천국이 갈라지는 겁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시비 걸 것 없고 땅에서 뭐가 올라왔어요. 주님의 놀라운 애초부터 예수님의 주 되심, 천국, 지옥도 그분의 권한에 있다는 것, 죄 사함의 권세가 내게 있다는 것, 그 모든 권한자가 독특하게 등장, 완전하게 권세를 드러냈다는 그걸 증명해주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이 교재 봅시다. 여기 보면 교재 큰 Ⅱ번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불가마 이야기 나오죠. [마치 불가마 속에서 자신이 만든 흙토기를 맹렬히 태운다고 해서 토기장이가 섭섭해 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옥과 저주의 맹렬한 불로 태우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성품에 손상이 가는 일이 없다.]고 했지요.

이것 알기 위해서 불가마에 태우는 여러분 상상할 수 있지요. 불가마 맹렬하게 태울 때에 ‘아이고 뜨거워라’ 할 때에 ‘내가 실수했구나.’ 이런 토기장이가 없어요. 이게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토기장이가 저주받을 것과 천국 갈 것을 임의로 정하는데 토기가 불타면서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다시 할게요. 말썽이라 하는 것은 기계하고 물건하고는 말썽이 일어나지 않아요. 꼭 말썽쟁이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말썽을 일으켜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동물이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집에 갔다고 동물이 문다고 그거 핍박 아니에요. 개 안에는 개만 들어있지만 인간 속에는 악마가 들어있어요. 그게 말썽꾸러기라 말썽을 일으킨다니까. 그 말썽은 불가마 속에 태워봐야 집어넣어봐야 본색이 드러나요. 부자의 본색은 지옥에 갔을 때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나사로 불러내고 할 때 그게 본색이에요.

그래서 여기 보면 난타이야기 나오는데 마치 드럼 북 위에 물을 붓고 막대기를 맹렬하게 난타하면 그 표면의 물방울이 튀죠. 튀듯이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처음부터 만들어놨는가? 예수님의 주 되심을 보여주는 말썽이 튀는 말썽덩어리가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을 뭐라 합니까? 너는 안개니라. 모든 영광은 풀의 꽃같이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함이라.

제가 어제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여러분 과거는 현재가 조작한 겁니다. 과거는 실제 있는 게 아니고 지금 오늘 새로 편집하게 되면 2년 전 것이 새로 편집됩니다. 웃깁니다. 드라마 들어가고 오바 막 들어가고. 세상에 고2때 17대 1로 안 싸워 본 사람 누가 있어요?

전부다 과거라 하는 것은 현재의 그림자에요. 과거가 그때 그 시절 그때 그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조작한 것들이에요. 시간이라 하는 것은 항상 우리 위주로 사는데 거기에 만약에 만약이 아니고 예수님이 풍덩 잠기니까 그때 17대 1로 싸웠던 모든 것도 사실은 나의 역사가 아니었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주님의 역사인데 이끄실 때 방법이 나는 이 땅에서 죽어야 되고 다시 살아야 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민족의 역사를 전부다 진실로 다 괭이로 호미로 파서 완전히 흙을 뒤집어놓는 거예요.

모든 역사는 다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인간의 시계라 하는 것은 조작된 시간이 진짜 역사는 예수님의 역사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모든 역사는 이미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래서 로마서 10장 9절에 보면, 예수님이 죽었다고 산 걸 네가 입으로 시인하고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매 의인이 된다. 신약에 보면, 네가 예수님 십자가 부활을 믿으면 네가 의인이 되고 구원을 받으리라. 거기에 무슨 지킬 법이 어디 있습니까? 무슨 법이 있어요. 그것은 모자라고 레위기 지켜라. 이런 게 없어요. 지킬 법이 없어요.

그럼 뭐만 있느냐? 나의 역사는 나의 역사가 아니고 말씀의 역사이고 예수님이 주도한 역사구나. ‘예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놀이개로 나를 일부러 처벌받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셔서 주 되심을 드러냈구나.’라는 것이 믿어지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그 사람을 장악하고 이끌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 말입니다. 두유언더스탠?

이제 중요한 지금까지 서론이고. 이사야가 하나님의 천사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 못해서, 하여튼 우리는 레위기 감당이 안 됩니다. 가리듯이 이사야는 그냥 포기해버리죠. ‘난 망했다. 완전히 망했다.’ 화로다, 저주다 이 말이에요. 진작 저주받을 인간을 자꾸 저주 안 받겠다고 시도한 자체가 나쁜 짓인 걸 깨닫게 된 겁니다.

그럴 때 이사야가 알게 된 것은 뭐냐? 왜 저주받을 인간을 가만 놔두지 죽어서 저주받게 하고 죽은 자들고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절에 가면 절에 가도 나중에 죽게 되면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성당 가도 성당 가서 죽으면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어차피 모든 인간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기 때문에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오니 가만 방치하지 왜 먼저 찾아오느냐? 미리 아신 자를 왜 부르시고 찾아오시느냐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가린다는 거예요. 천사가 가리듯이 가려주신다. 그 엄청난 거룩, 엄청난 영광을 하나님께서 중간에 가려주시는 거예요. 모세가 수건을 쓰듯이 자유로운 성령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허용이 될 수 있듯이 가려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 가려주는 역할조차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찾아오는 취지가 거기 담겨있어요.

이번 강의 시간에 제일 중요한 성경구절 하나 찾을 테니까 이거는 성경 있으신 분은 같이 찾으시고 없으신 분은 옆 사람 보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33장 21절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덮었다가’ 다시 떼면 하나님의 앞면을 보지 못하고 뒷면을 보는 거예요.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외에 다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신 자체가 이미 가리개를 장만하고 찾아온 거예요. 그냥 가리개 없으면 화로다 망하게 되어 대책이 없습니다. 가리개 속으로 자기 백성을 초청해서 예수님의 주 되심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한 베옷을 입으라고 그리스도 옷을 입을 사람들을 마지막 혼인잔치에 초청하기 위해서 이렇게 가리개를 주시는데 그것이 덮는다, 속죄라는 의미입니다. 덮어주고 가려주는 거예요.

가려줌 안에서 우리는 가려주신 은혜를 알게 되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임금의 혼인잔치 때에 임금의 아들의 결혼식을 축하. ‘니 결혼식 치우고. 내 아들 결혼식에 와.’ ‘소를 샀는데 밭을 샀는데 거래 매매해야 되고.’ ‘무조건 아들 결혼식에 와. 안 오면 너는 징벌이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미경 씨와 신직수 씨 10월 9일에 결혼한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주시죠. 앉으세요. 박수친 걸로 부조는 다 됐습니다. 거기다 생방송 됐으니 전 세계가 다 알게 됐고. 지금까지의 인생이 혼자 처벌받는 인생이었다면 이제는 같이 처벌받아보세요.

레위기 모든 시작은 덮어주는 것과 안 덮었을 때 생생한 증거를 계속 대비시키는 겁니다. 진짜 주님 아니면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예수님의 주 되심만 높이기 위해서 레위기가 있는 겁니다. 덮어주는 그걸 속죄라 하는데 그 속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참 친절하게도 눈에 보이는 속죄의 자리를 주셨다.

그럼 눈에 보이는 속죄자리가 뚜껑인데 언약궤 위의 뚜껑이 속죄소인데 7월 10일에 대제사장이 한번 방울 달고 들어가고, 밖에서는 죽나, 안 죽나 알 수 있도록. 이 뚜껑의 속죄소가 사실은 세 번 들어가요. 송아지 피 가지고 들어가고 염소 피 가지고 들어가고 해서 두 번 들어가는데 향단 앞에 제단에 피 뿌리면서 한 번들어가고 세 번 들어가요.

속죄소란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담겨있어야 돼요. 그러면 이것이 중앙 있다면 여기서 삐지지직, 삐지지직 이러한 관계성이 퍼지는 게 레위기에요.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이것이 수평으로 온 것이 아니고 수직으로 올라가는데 여기에 뭐가 있느냐? 산 할아버지 있어요. 이게 무슨 산이죠? 시내산이죠.

시내산에서 출애굽기 33장 21절의 모세가 대표로 받았던 그 덮어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40일씩 있었던 것이 가능했던 영광에 있던 그 상황을 시내산에 있는 모든 정황을 내려오면서 사람들의 유치한 인식이지만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의 저주와 축복을 기구로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친절한 하나님께서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한 특별 배려로 하나님도 같이 인간과 더불어 유치해지신 겁니다. 유치해졌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보면, 그런 게 필요 없는 거예요. 그걸 유치하다지만 시편에 보면 그걸 주님의 낮아지심입니다.

덮어주는 우리의 모든 저주스런 너무나 무서운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커버해주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쉬운 방식으로 낮아지는 방식으로 오셔서 우리보고 그것을 지키라고 하면서 우리 속에 있는 ‘이래서 저주받아 마땅하구나. 유치한 것조차도 우리 일방적으로 오해해서 지킬 정도로 우리는 이렇게 유치하구나.’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레위기는 전재됩니다. 낮아지심이죠.

그래서 빌립보서 2장에 보면, 그는 하나님과 동등 되나 동등 됨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자진해서 포기하시고 사람으로 오실 때 사람보다 오히려 사람이 가기 싫은 더 낮은 곳으로 가서 아버지한테 복종하신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야기 끝나지 않았죠.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서 모든 입으로 무릎을 꿇고 주를 찬양하게 하신다고 돼있어요.

그런 경로를 이해하도록 성경 온 사람이 바로 주님의 어린양의 잔치에 참여하는 초대장을 받은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도 바울이 나는 삼층천에 올라갔다는데 1층에 올라갈 때는 아직도 10월 9일에 결혼식 하는 게 생각나고. 그런데 둘이 2층에 올라가면, ‘가만있어 봐. 우리가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데.’ 3층에 올라가면, ‘아가씨. 누구세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삼층천에 올라가니까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왜냐? 너무 황홀하니까. ‘네가 맥주 맛을 알아.’ 하듯이 네가 이 생생한 모세가 40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아도 얼굴이 영광만 빛나서 도저히 밑에 사람들이 감당이 안 되서 수건으로 덮었잖아요.

연세 많은 분들이 교회 안 나오시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 속에서 뿜어 나오는 그 부끄러움을 늙어간다는 자체가 너무 수치스러워서 차마 교회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 장로님이 이미 삼층천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해라 이렇게 하시지만 일층에 사는 사람들은, ‘내가 가면 젊은 집사가 어떻게 생각하겠느뇨? 내가 가면 밥 한 그릇 챙겨주는 게 얼마나 부담스럽겠노? 내가 이 나이에 신앙생활 오래했는데 젊은 사람들에게 짐이 돼야 되겠는가?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교회 안 나가고 집에서 인터넷이나 듣고 조용하게 산 속에서 동화나 듣다가 주님에 가면 안 되겠나?’ 이런 생각한다니까요.

인간이 자기 부끄러움이 감당이 안 돼요. 그런데 이런데 와서 ‘노장로님. 그렇게 너무 섭섭해 생각하지 마세요. 그동안 팔십까지 살았으면 많이 살았습니다.’ 하지만 노장로님에게는 79년 11개월 30일 다 날아갔어요. 없다니까, 없어. 팔십 산다고 해서 넉넉하다는 생각 안 갖고 있어요. 왜? 없는데 뭐. 똑같은 입장이에요. 그래서 ‘있을 때 잘 해.’란 말이 있잖아요. ‘청년들이여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그날이 오기 전에 너를 심판하는 하나님을 생각하라.’ 이 말이죠.

덮어주매 은혜는 그만큼 우리는 처벌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전제로 항상 깔려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율법이, 레위기가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함이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가 왜 처벌 대상인지, 왜 생리가 처벌이고, 왜 몽정이 처벌인지 이걸 우리 입장이 아니고 삼층천의 하나님의 입장에서 다시 나를 바라보게 되면 그동안 내 의와 내 정당함을 주장한 것이 나의 역사, 나 중심의 역사관에 입각한, 나 중심의 시간과 공간관에 입각과 일방적인 오류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이 네 몸 자체가 선악적인 몸이기 때문에.

왜 선악과에서 생명나무가 떨어진 이유를 모르고 주면 될 건데 이렇게 합니다. ‘어디를 넘봐. 이 선악을 아는 놈아.’ 선악을 아는 일 때문에 갈라졌거든요.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은 제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보다도 자기 위주로 왔으니까 이거는 뚝 떼놓고 저주 대상으로 밀칠 수밖에 없죠.

그러면 이제 남은 문제가 간단합니다. 덮어주는 것, 가려주는 것. 그러면 커튼 치는 걸로 가리면 안 됩니까? 분리를 시키는 거예요. 계속 분리를 시키는 거예요. 16장에 보면 아사셀 염소라는 게 나옵니다. 제가 여러번 이야기하는데 또 들어보세요.

레위기를 해석하려면 레위기에서 멀쩡한 경우를 보고 해석하면 그거는 실패합니다. 하지 마시고 뭔가 탈라스, 어떤 말썽을 일으켜서 추방된다든지, 쫓겨 간다든지, 저주스런 몰골을 하는 그 뒤를 추적해서 그들의 운명에 합세해버렸어요. 저주받는 그 장소가 축복을 받는 유일한 장소가 되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 건너고 난 뒤에 제단이 언약궤로 제사를 드리려하는데 산이 두 개에요. 하나면 좋겠는데. 한쪽은 축복 산이고, 한쪽은 저주 산입니다. 헷갈리죠. 어느 산 밑에다 제단 쌓느냐? 어느 산이게요? 그리심 산이냐, 에발 산이냐? 축복 산이 좋겠습니까, 저주 산이 좋겠습니까? 십자가마을 사람은 다 알아요. 저주 산에다 제단을 쌓으니까 맞은편에서 ‘복 받으라’는 소리가 날아오죠.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저주받은 자로 만든 그 장소가 축복의 장소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그러느냐? 처음에 성당 신부에게 당신 왜 그런 짓을 하느냐와 똑같은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저주받는 자리에게 축복 받게 하느냐 하면, 이것이 우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주 되심의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워서 우리에게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우리의 모습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주 되심의 경로를 보여주는 그것으로 이미 계속해서 우리를 활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저주받으면 부도 몇 번 나야 돼요? 우리가 저주받은 모습이란 것은 부도 안 난 기업과 부도난 기업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진짜배기 저주의 모습이 오는데 그 십자가의 모습을 담는 그것이 바로 속죄제나 속건제나 번제나 소제나 화목제에 투입되는 그 제물들의 운명이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에서 제물과 예수님이 일치된다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세 시간이 넘었어요. 히브리서 간단하게 언급한 거예요. ‘내가 제물이다.’ 이 간단한 이야기가 이 배후에 아직 멀었습니다. 더 있습니다만 간단하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이러한 환경이 이미 조성돼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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