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여름수련회(레위기) 4강
불교에 심취한 사람들, ‘종교를 넘어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교 사람들입니다. 불경이나 동양의 장자, 노자 이런 책들을 보게 되면 특징이 하나 있어요. 그것이 뭔가 하면 누가 자기를 저주하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무소유로 살고, 자기를 채찍하고 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칩니다. 자기가 자기를 치는 것은 쾌락의 일종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취미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돈만 생기면 구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요. ‘기부천사’라고 세상에서 칭찬하지요. 이것은 마약과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해보세요.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이런 사람들은 돈 벌어서 기부하는 재미로 살아요.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안하기 때문에 그들의 기분을 모르는데, 한 번 맛들이면 대마초보다 더 중독성이 강할 걸요? 자기가 자기를 치는데서 오는 희열. 이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지옥이란 곳은 자기가 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친다는 점에서 기분 나쁜 곳입니다. 기온이 섭씨 36도로 올라가는데, 체격이 큰 어떤 사람이 우발적으로 내 옆자리에 앉아서 땀을 흘리면서 나를 적신다면 이게 지옥입니다. 감당이 안 됩니다.
지옥이 감당이 안 되는 것처럼 그저 주시는 사랑과 자비도 감당이 안 됩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기 위해 기도하라고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3장에서 말씀하셨지요. 그게 우리의 기도 제목입니다. 제가 늘 이 말을 반복하는데, 그런데 제 강의 끝나고 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목사님 강의 듣고 나니까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해요. 정말 답답해요. 강의 시간에 저주를 안 받아서 그래요.
저주의 자리가 곧 축복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십자가로 달려간다.’고 합니다. 십자가로 달려가야 거기에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십자가의 길로 달려가는데, 그 이유는 내가 저주 받는 자 될 때 ‘저주 받는 자 맞아’ 라고 통보해 주는 그분의 성령의 능력이 저주의 차원을 어떻게 뚫었는가를 유일하게 보여주는 그분의 노선이 경과된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법이요.’ 이런 것은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은, 말썽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이지만 그 핍박의 도움으로 길과 진리와 생명을 드러내고 확산하는 기능으로 너를 농락했다는 겁니다. 주님은 인간을 가지고 놉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가 인간에게는 큰소리치지만 예수님께는 큰소리 못 칩니다.
결국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는 법의 차원에게 이야기 된 것이 아니고, ‘네가 뭘 해도 소용없다. 저 위에서 너를 조종하고 있고 인도하고 이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로마서 9장 33절에 보면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어디에 부딪혔는가 하면 25톤 트럭에 부딪힌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부딪혔어요. 십자가에 부딪힌 사람의 특징이 뭔가 하면, 나의 행함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레위기에서는 희생 제물의 기름과 피인데, 여기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런 상상을 합니다. ‘살아 있는 내가 저기를 통과하면 살아 있는 내가 된다.’라는, 앞에 있는 나와 뒤의 나가 동일한 나로 보일 거예요. 그런데 막상 십자가에 부딪히면 이렇게 구상하는 것이 바로 내가 기껏 할 수 있는 행함이란 사실을 여기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부딪히면 이러한 시나리오는 찢어집니다. 이따위 생각이 바로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저주되게 하고, 진짜 예수님을 핍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그림 말고 진짜 십자가에 부딪힌 사람은 이 그림이 이렇게 달라지겠지요. 휴지가 산산조각 나는 것처럼 다 부서집니다. 그리고 이 한 조각조각에서 불꽃이 팍팍 튑니다. 저주의 전류가 흐릅니다.
이것을 알려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인데, 그분의 손에 못자국과 허리에 창자국이, 즉 예수님의 피가 이 모든 것을 능히 용납하실 거예요. 왜 이렇게 하셨는가 하면, 여기서 더 이상 인간의 행함과 자랑이 안 나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이것을 미리 예측해서 알아버리면 이것은 행함이 되고 맙니다. 미리 당겨서 알면 예수 믿는 것이 행함에 속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까지 상상해서 예수 믿는 행함을 보인 것인지, 아니면 진짜 부딪힐 돌에 부딪혀서 산산조각이 났는지를 아는 방법을 갈라디아서에서는 뭐라고 했는가 하면, 육신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로 분별한다는 겁니다.
육신의 열매는 시기, 질투, 분 냄 이런 것이고, 성령의 열매는 온유, 화평, 자비, 양선 이런 식으로 나누지요. 이렇게 되는 원인이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보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했어요. ‘못 박게 해 주세요.’ 이것이 아니라 이미 못 박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이렇게 행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옵니까?’ 라고 따질 수 없고, 내 행위와 상관없이 지금 살아가는 것이 저주를 커버해 주시는 주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제가 ‘70이레’ 논문을 발표할 때, 옆에 있던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갈릴레오가 재판을 받고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무슨 소리를 했습니까?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어요. 내 옆에 있던 교수가 마지막으로 이런 소리 했어요. “그래도 나는 전통적인 역사적 해석을 고수한다.” 이렇게 끝을 냈습니다. 왜? 자기가 그것을 연구했기 때문에. 이게 바로 육체의 열매입니다.
진짜 그 교수가 부딪힐 돌에 부딪혀서 깨진 사람이라면, “내가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개혁주의 역사적 해석도 아니고 세상의 그 어떤 신학도 아니며, 오직 나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나왔을 것이고, 그렇게 나왔으면 오 목사님도 그런 식으로 화를 내지 않았겠지요?
“그래도 나는 개혁주의 역사적 전통적 해석을 믿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믿음의 대상이 어떻게 인간의 작업이 들어갑니까? 그런 사람이 신학교 교수를 하니까 듣는 학생들은 무엇으로 자신을 커버하겠습니까? 그런 신학의 누더기로 자기를 덮고, 신학 공부를 안 한 평신도들에게 그런 지식으로 기를 죽이고 한단 말이지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을 것이고 앞으로도 많이 만날 거예요.
자, 이제부터는 좀 복잡한 구조로 들어갑니다.
다시 한 번 강물 이야기를 하겠는데, 깊은 물이 흘러오던 강물이 하류에서 삼각주를 만나 양쪽으로 나뉘면서 강물에 떠내려 오던 것들이 모래톱에 걸리면서 그 내용물들이 드러나지요.
제사라는 것은 덮어줌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인데, 모든 죄를 덮어주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은 책임을 덮어주시는 분(본인)이 대신 담당하는 조건 하에 덮어줍니다.
‘사죄’와 ‘속죄’가 다릅니다. ‘사죄’는 그냥 용서하는 것이고, ‘속죄’는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값을 치르지 않고 그냥 용서한다면 이것은 굉장히 간편합니다. A가 B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했다면, B가 ‘돈 좀 빌려주세요.’라고 하는데, 계속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서 결코 돈을 빌려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말로만 사랑한다고 했지 손톱만큼도 상대를 위해서 손해 보는 짓은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저주받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네가 내 나라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너는 모르지만 ‘네가 주저 받아야 돼.’ 라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네가 손해가 아니라 너의 그 저주까지 감당해야 될 내 희생의 양이 그만큼 더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사죄’가 되기 위해서는 ‘속죄’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제사는 속죄부터 시작됩니다. 희생부터 하고 그 다음에 그 결과를 사죄라는 방식으로 주께서 내놓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열매만 따먹으면 됩니까? 달랑 사죄의 열매만 따먹으면 안 되지요. 왜? 사죄 받았습니까? 그러면 어디로 가야 됩니까? 주님의 속죄의 현장까지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아, 이렇게 당했구나!’
‘이렇게 당했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말로 때울 수도 있어요. 부흥사들이 “주여, 저는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이런 식으로 말로 때울 수 있단 말이지요. 이들은 ‘부족합니다’라는 말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부족하다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여자는 생리를 하고 남자는 설정을 하듯이, 부족한 것이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주께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은 창녀, 어떤 사람은 세리, 어떤 사람은 거지로 만듭니다.
창녀는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주께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일단 만들어 놓으면 창녀 짓이 취미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깡패로 만들어요. 어떤 사람은 거지로 만들어요. 거지 정도는 괜찮은 겁니다. 나사로는 거지 정도가 아니라 병자였습니다. 상처를 개들이 핥았다고 하잖아요.
이런 식으로 만들어서 깊이 내려가면 갈수록 우리 입장에서는 더 이상 내가 나를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하지요.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하면, 더 이상 내가 나의 구원에 대해서 감당 못하고 손을 떼는 지점까지 몰아세웁니다.
주님: 제발 손 떼라.
우리: 그래도 기도라도 좀 더 해보겠습니다.
주님: 기도고 뭐고 손 떼라니까.
우리: 기도 안 하면 다른 사람들이 방종한다고 합니다.
주님: 방종한다는 소리 듣기 싫어하는 것을 보니까 너는 아직도 자존심이 남아있네.
주님은 우리가 완전히 손 뗄 때까지 몰아세웁니다. 남들이 볼 때 “차라리 죽지. 왜 사니?” 라고 할 정도로 “내가 네같이 된다면 나는 벌써 자살했다.” 라고 할 정도로 우리를 낮추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런 것을 겁내지 마세요. 왜냐? 다양성입니다. 이런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모두 다 창녀는 아니고, 다 세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창녀나 세리가 너희들 보다 먼저 천국 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누구나 문둥병자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주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문둥병이 걸리지 않았어도 ‘저는 진작 문둥병 되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면서 느긋하게 진 안에 사는 거예요.
‘하나님,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마세요. 여기서 더 내려가면 도저히 못 참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올지 나도 모릅니다.’ 두근두근 거리면서 스스로 알아서 손드는 식으로 --
‘하나님, 이제 그만 하세요. 이 정도 힘든 것도 죽을 지경입니다.’ 이렇게 자꾸 빼는 식으로 나오지요. 그래서 우리교회 왔다가 다른 교회로 가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여기에 있다가는 어디까지 망가질지 도저히 예측이 안 되기 때문에 겁이 나는 거예요. 감당할 수 없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우리 속에서 피어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과 부활하심의 경로는 우리가 손 댈 입장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내 인생은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칩니다. 그러니까 화병이 걸리지요.
‘왜 하필 나입니까?’ 다른 사람은 안 그런데 왜 나는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가? 문둥병자가 문둥병에 걸려서 진 밖으로 쫓겨나면서 이런 소리 하겠지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라고.
만약 여러분들이 25층 아파트에 사신다면 1층부터 25층까지 벨을 눌러서 조사해 보세요.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라는 이런 불평이 없는 가정이 있는지. 모든 가정에서 전부 이런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가 불러서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바로 이러한 ‘사죄’와 ‘속죄’의 취지를 가지고 주님께서 레위기를 통해서 알려 주십니다. 여기에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중요한 부분을 다시 언급하면, 성당에서 신부가 향단에서 향을 뿌릴 때 “당신은 왜 이런 짓을 합니까?” “하나님이 시켜서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짓을 시키지 않으면 하나님답지 못합니까?”
왜 하나님께서 레위기를 주셔야 하나님 되고 그것 안 주면 하나님 안 되는 이유가 뭐냔 말이지요. 그냥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나타나면 될 텐데 왜 레위기를 주셔야 되는가? 그 이유를 이번 강의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유는 관심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아들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장차 오실 아들이 바로 레위기에 있는 이러한 고난의 길을 가셔서 만유의 주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힘쓰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 되기 위해서.
그러면 예수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제사가 나오는데, 제일 먼저 나오는 제사가 번제이고, 그 다음 소제, 그리고 속죄제, 속건제 마지막에 화목제가 나옵니다. 이것은 바로 강물이 흘러오다가 삼각주에 걸려서 강 속에 숨어 있는 내용물이 드러나고 강물이 갈라지지요.
앞에 있는 제사는 이런 요소들이 전부 하나로 모아져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모아진 것이 부채 살처럼 갈라지니까 다양성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해석을 할 때 갈라진 채로 그냥 방치하면 안 되겠지요. 여기(소제,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에서 어떤 의미가 나오던 이것을 다시 하나로 모아줘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다섯 가지 제사를 하나로 모아야 되는데, 그렇게 모아주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메시아가 몇 명입니까? 한 명이죠. 배속에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등 어떤 다양한 것이 있더라도 종근당에서 나온 구충제 1알만 먹으면 다 끝나지요. 율법의 이것 지키고, 저것 지키고 할 것 없이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묶이는 겁니다.
모든 것은 분리시키고 다시 한 번 연합을 시킵니다. 분리했다가 연합시키는데, 분리시키는 것도 연합시키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의 위력입니다. 분리되었다가 연합되는 그 과정에 다섯 가지 제사가 등장하는 겁니다. 연합은 바로 로마서 6장에 나오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 이 연합을 다른 말로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는 물 뿌리는 것이 아니고 ‘너는 이제 홀몸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강의 초두에 말씀 드렸는데, 불교 신자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누가 자기를 저주해 줄 사람이 없어요. 요즘 절에서 국가 예산으로 ‘템플 스테이(Temple stay):절에서 수행자의 일상을 체험하며 마음의 휴식과 전통문화를 배우는 프로그램)’를 하는데, 백날을 해도 내가 저주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일러주지 않아요.
중들도 저주를 말하지 않지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마을 말고 저주를 말하는 교회는 극히 드물어요.
그러면 ‘저주 받으면 나만 손해 아닙니까?’ 라고 하는데, 우리는 애초부터 손해냐 이익이냐를 따질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논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정상적인 몸이 아니라서 그렇지요. ‘그러면 제대로 된 몸은 뭡니까?’ 그래서 주님은 생명나무 몸(마지막 아담)과 기존의 아담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모든 성경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가 빼앗아버려요. 성경을 보면서 ‘아, 말씀 지키자!’ 라고 하니까, 주님은 ‘줘, 이건 내가 지킬 거야.’하고 빼앗아버려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레위기를 주시면서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봤지요.’ 하고 치웁니다. ‘좀 오래 들고 계시지.’ ‘오래 봐서 뭣 하려고. 지키려고?’
오래 보면서 지키겠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 말씀은 누가 지킵니까? 예수님이 지킬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여주니까 선악과 따먹은 몸을 가지고 감당도 못할 저주스런 모습으로 이것을 지키려고 하니까 나오는 게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밖에 안 나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쉐마!(들으라) 쉐마!(들으라)’ 하면서 지키라고 하는 거예요.
만약 어떤 사람이 교회에 갔는데, 목사님이 레위기를 쭉 읽어주고, ‘제사는 이렇게 드리고 양을 잡고 소 잡고, 이것은 향단에 뿌리고 이것은 제단에 뿌리고 --’ 이런 내용을 쭉 설명하면 교인들은 받아 적으면서 ‘이것도 지키고 저것도 지키고 참 바쁘겠다.’고 하는데, 목사가 하는 말이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이 지킬 수가 없고 우리 주님께서 다 지켜서 여러분께 다 지켰다고 통보하기 위해서 레위기를 주셨습니다.” 라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1) 기분 나쁘다. 2) 기분 좋다. 몇 번일까요? 1번입니다.
왜냐? 사람은 법이 없으면 내 자존심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법을 내가 조작해 내야 비로소 내 나름대로의 의가 그 법과 더불어 표현이 돼요. 사람들은 그 재미로 삽니다. 남은 죽어도 나는 죽으면 안 됩니다. 이런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메드멕스]라는 영화를 보면, 첫 장면에 람보같은 인간이 다 찢어진 런닝을 입고 탄띠를 차고 총을 들고 있습니다. “인류는 모두 핵폭탄으로 다 죽었다.” 이런 말을 해요. 그러면 ‘너는 왜 안 죽었는데?’ 다 죽었는데 당신은 왜 안 죽었냔 말이지요.
컴퓨터 게임에서 마지막 장면이 이것 아닙니까. 남은 다 죽는데 자기는 왜 안 죽습니까? 자신은 끝까지 살아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영웅이란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아니 내가 그렇다는데 네가 말이 많아.’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죽어서는 안 돼.’ 라는 생각. 이게 우리가 만든 법에 의해서 조작하는데, 그 법은 내가 지킬만한 것만 성경에서 뽑아내서 ‘나는 이것도 지키고, 이것도 지켰습니다.’라고 내세우는 겁니다. 성경에 아이스크림 가게입니까? 골라먹는 재미를 찾게.
주께서 분리를 시키는데, 분리시킬 때는 속된 것과 거룩을 나눕니다. 모든 제사는 항상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의 차이를 보입니다. 거룩의 작용으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분리를 시키는데, 원래는 수직적인 분리입니다. 시내산에서 구름이 분리를 시킵니다. 구름 위에 하나님과 모세가 있고, 구름 아래 백성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안 것이 뭐냐 하면, 언약이 깨어지면 속죄할 수 있는 제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6-27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여기에 보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했어요.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말은 속죄 제사가 적용되는 범위를 속죄제 자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속죄 제사를 남기는 그 위층이 따로 있지요. 속죄라는 것은 속죄해야 될 우리와 악수하고, “양을 왜 데리고 왔습니까?” “당신 속죄해 주려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우리와 거래하는 줄 알았더니만 그 위층에서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죄를 범하면 아래층에 있는 속죄라는 것이 백날해도 하나마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의 이 이야기는 결국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속죄가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윗층을 위해서 속죄가 있다는 말입니까? 속죄제를 통해서 정작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속죄제를 베푸신 그 윗분을 제대로 알라고 우리에게 속죄제가 주어진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언약을 깨트리면 그것을 속죄하는 제사는 없고, 그 언약 자체가 갱신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언약 자체가 갱신되려면 그냥 갱신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깨트린 자들의 모든 죄를 밑에서 속죄하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하나님 자기들끼리 속죄하는 기능을 마쳐놓고, 그것을 속죄제라는 방법으로 추후에 통보해 주는 방법밖에 없지요. 말이 어렵습니까?
우리가 속죄제를 깨버리면 속죄제를 깬 것으로 우리는 생각했고, 뭔가 속죄제에 대해서 실수한 것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윗선에 까지 올라가요. 제가 속죄제를 제대로 못한 것은 그 속죄제를 주시고자 했던 그 바탕이 되는 정신이 함량 미달로 모자라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 문제 처리를 우리한테 맡기는 것이 아니고 윗선에서 처리한다니까요.
그러면 또다시 우리의 구원 문제는 예수 믿는 우리한테 구원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제 예수 믿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게 하신 그 예수님에게 구원의 권한이 이미 넘어가 있습니다. 그걸 믿는 사람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에요.
윗선에서 처리한다는 언약의 갱신이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 어떤 죄를 짓게 되면 그 죄에 대한 처리를 죄 지은 사람이 못합니다. 그러면 죄 지은 사람이 징벌 받으면 되는가? 징벌 받는다고 해서 죄가 처리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지옥 가면 됩니까? 지옥 간다고 그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서 한 20년 고생하면 그 다음에 천국에 넣어주는 게 아닙니다.
지옥은 자기 죄 처리하는 곳이 아니고 천국에 간 사람의 그 모든 복락이 천국 간 사람들의 잘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더욱 더 깨닫게 하기 위해서 반대조치로 그들은 지옥에서 살아야 되는 겁니다. 에서는 태어날 가치도 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등장을 해야 했어요. 왜? 에서 지옥 가라고? 아니에요. 야곱은 긍휼을 받을 수 없는 입장에서 긍휼을 입었다는 긍휼의 위력이 바로 저주의 위력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을 위해서 에서가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낳기 전에 이스마엘을 낳게 하신 이유는, 이스마엘이 있음으로 이삭의 가치가 돋보이는 거예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만들어놓고 왜 멸망시키는가 하면, 그 아브라함 자손이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이 따로 있다는 것, 백부장 같은 아브라함 자손이 따로 있다는 것, 예수님이 선택한 사람이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브라함 자손은 망해야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게 지옥 가는 사람 때문에 우리가 천당 가는 겁니다. 이것을 시소 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맞은편에 걸터앉은 어떤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져주어야 나는 천당으로 올라갑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비유를 하겠습니까? 모든게 상대방 운명과 연결된 운명 고리 속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관게처럼 말입니다. 탕자와 아버지를 꾸준히 모신 큰 아들 관계처럼 말입니다. 잃어버린 양과 안 잃어버린 양처럼 말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을 누가 좀 모독해 줘!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 얻는다고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으면 어떤 나쁜 놈도 천당 간다고 할 때, 그 복음을 모독하는 자가 있어야 그 덕분에 우리가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그 때 ‘고맙다. 친구야!’ 라고 하면서 올라가면 됩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그게 무서워서 이방인과 교류하고 무역하고 했어요. 이스라엘은 농사 짓고 목축하면서 살았는데 이렇게 해서는 겨우 자급자족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주위의 이방 나라들은 무역을 해서 막대한 자본을 누적한 거예요. 바벨론, 암몬, 두로 이런 나라들은 무역을 하지 않으면 자본을 축적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자급자족하면 되는데 괜히 이방 나라의 부가 그리워서 그들과 교류를 했어요. 돈이 많으면 질 좋은 무기를 생산하거나 구입할 수 있습니다. 이방 나라에 좋은 무기가 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의 전력은 점점 더 약해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을 따라가야 되겠지요. 따라가려면 그들과 무역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나라들의 하청업자가 되어서 그들의 이윤에 조금이나마 참여해야겠지요.
즉 이스라엘이 외부의 자본에 힘입어서 막대한 돈을 쓰는 부류가 발생했고, 그 외국의 하청업체의 하청업체가 되어서 노동력만 제공하는 계층이 생기겠지요. 이사야 5장 8절에서는 이것을 “가옥에 가옥을 연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이렇게 된 거예요. 선지자는 ‘제발 언약으로 돌아가자!’고 하니까, 그들이 하는 말이 ‘제사 지냈잖아요.’ 라고 대꾸해요.
언약 정신을 모르면 제사 지내도 소용없습니다. 아모스도 그렇고 미가 6장 7절에 보면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라고 했고, 이사야 1장 11절에서는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했어요.
시편 50편 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너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다. 제발 제사 드린다고 큰소리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산에 있어도 다 하나님의 것인데 뭘 죽여서 하나님께 드린단 말입니까.
공연히 산에 있는 것들을 공간 이동해서 성막에 가져와서 ‘하나님께 받쳤습니다. 복 주세요.’ 이러지 말란 말이지요. 집에 있어나 산에 있으나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언약 정신을 잃어버리고 그냥 죄 짓고 속죄하는 기능만 계속 반복했던 거지요. 오늘날 교회가 꼭 이 꼴입니다. 예배 참석하고, 헌금 하고, 전도하고 ---
종교 따로, 생활 따로. 왜 그런가? 이방 나라가 부러운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렇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아래층에 있는 인간이 깬다고 해서 언약이 깨어질까보냐?’ 이 말입니다. 이걸 로마인 백부장이 눈치를 챈 거예요.
인간은 법을 어기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안 어길 경우에만 언약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김을 통해서 미처 몰랐던 다른 큰 성공이 우리에게 덮친다는 사실을 로마인 백부장은 알아 챈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제사하고 안식일 지키고 구제했지만 백부장은 예수님을 주로 인정했습니다. 어떻게? ‘나도 중대장인데 내가 부하에게 명령하면 그들이 내 명령에 따릅니다. 나는 주님의 부하입니다. 내게 명령만 하세요. 그러면 나는 따르겠습니다.’ 이 백부장의 말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9).”고 했어요.
예수님이 ‘나는 개들에게 내 떡을 줄 수 없다.’고 하시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은 뭐라고 합니까?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 여인이 부스러기를 먹었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의 취지에 이 여인이 합세한 거예요.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언약이 산 밑에서 깨어지면 위에서 갱신을 하는데, 갱신을 할 때 밑에서 지은 죄를 책임을 지고 갱신을 합니다. 거기에 동원된 자가 바로 모세입니다. 그래서 모세 언약의 특징은, 이미 인간들이 언약을 깼다. ‘우리 잘 해보자.’가 아니라 이미 언약을 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깨뜨린 그 죄까지 친히 담당할 그 내용을 담고 속죄제, 속건제, 번제, 소제, 화목제가 전부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갱신을 했다는 것을 통보하는 상대자가 백성이 아니고 누가 되지요? 모세지요. 모세의 집안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레위 지파로 제사를 담당하지요.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모세에게 종속되는 동시에 제사장에게 종속 되지요. 그래서 항상 무슨 일이 벌어지면 자기가 하나님을 찾으면 안 돼요.
레위기를 보면서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해요. ‘왜 제사장을 의지하는데? 본인이 성전에 가서 직접 제사 드리면 되지?’ 이것이 됩니까? 안 됩니다. 비록 번거롭고 귀찮지만 반드시 제사장을 통해야 합니다. 죽어야 될 인간이 제사장을 경과하면 안 죽어도 되는 사람으로, 용서 받은 속죄된 사람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위해서 대제사장, 제사장이 제사의 일을 전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었어요. 누굽니까? 고라 자손들입니다.(민수기 16장) 이 사람들은 뭘 따졌는가 하면, ‘우리가 출애굽 할 때 이러지 않았다. 모세를 중심으로 다 모든 것을 해쳐먹는 이런 불공정한 일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서 축복할 때 열 두 지파 다 축복했지 너희들만 축복한 것이 아니잖아?’ 라고 따질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누가 모세에게 시비를 걸어?’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한다고 누가 시비를 걸었습니까? 모세의 누가 미리암이지요. 문둥이 같은 인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문둥병 안 걸리게 하셨는데 그들은 자기가 잘나서 건강한 줄 알고 까불다가 문둥병에 걸려서 진 밖으로 쫓겨났지요.
모세는 누구보다 온유한 자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 줄 압니까? 직접 하나님 형상을 본 사람은 온유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내가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람에게 은혜도 모르는 인간이 와서 법을 따지고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어요.
언약을 갱신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거예요. 고라가 주장했던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이런 주장들이 왜 나오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새 언약 속에서 그런 죄마저 용서하기로 이미 하나님과 이야기가 끝났다는 언약 갱신의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 정당하다고 여기고 시위와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광야를 통과할 때에 진 끝에서부터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힘들어서 못살겠다.’ 라고 할 때, 불뱀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물었지요. 이 해석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간단합니다. 레위기와 똑같아요. 불순종하는 인간들 때문에 불뱀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기에 그 인간들을 조사해 봐야 합니다. 항상 성경에서 죽이고, 망하고, 저주받고, 쫓겨나고 이런 쪽을 조사를 해봐야지 진짜 하나님의 취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세 언약의 특징은 인간들이 이미 언약을 깨뜨렸죠. 언약을 이미 깨뜨렸는데 이 언약을 갱신하려면 누가 담당해야 합니까? 하나님 측에서 속죄를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희생이 담겨야 하는데, 하나님의 희생이 담기려면 다섯 가지의 제사로 갈라지면서 각각의 죄가 드러나겠지요. 이 죄를 다양하게 세밀화 시키는 방향으로 그것들을 제사 속에 담는 겁니다.
‘이러한 희생이 없으면 네가 지은 죄는 처리가 안 돼.’ 라는 것을 철저히 알려주시려고 죄의 마지막까지 속속들이 피가 들어갑니다. 문둥병이 걸렸다가 나은 자가 진 안으로 돌아올 때 1차, 2차, 3차에 걸쳐서 속죄의 예식을 치르는데, 문둥병이 나으면 먼지 피를 발라요. 피를 바른 후에 기름을 발라서 진 안으로 들어와 살도록 해요. 그런데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속죄제를 드리는데,
대속죄일의 제사는 기름 바르고 피를 발라요. 그러니까 이것은 문둥병같은 인간들을, 말썽꾸러기 대표자 문둥이는 피 바른데다가 기름을 발라서 ‘너는 정상이다.’ 라고 하는 반면에, 그러한 화합이 있기 전에 대속죄일은 기름발린 그 거룩한 제물이 피를 쏟아내는 그 작업을 제사장들이 담당합니다. 성소가 담당해서 ‘성소님이 했었지요. 성막님이 했었지요. 휘장이 했지요.’ 하고 피를 뿌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막 자체가 뭔가 하면, 사람 아닌 놈을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 구원받지 못할 자를 구원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희생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희생을 실제로 우리들에게 적용하기 위해서 기름으로 한 통속으로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피 바르고, 피 바른데다 또 기름을 발라서 ‘너는 기름부음 받은 분의 피 때문에, 그 피로 인하여 네가 기름 바른 분과 합세해서 거룩한 공간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전체적인 제사의 취지입니다.
'레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6강-2010여름수련회 (0) | 2014.01.03 |
---|---|
5강-2010여름수련회 (0) | 2014.01.03 |
3강-2010여룸수련회 (0) | 2014.01.03 |
2강-2010여름수련회 (0) | 2014.01.03 |
1강-2010여름수련회 (0) | 2014.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