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그러나 이제

아빠와 함께 2023. 7. 12. 08:23

20230710a 부산강의 : [시편]60(44:9)-그러나 이제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44편입니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 교훈이란 뜻인데 성가대 찬양대장으로 한 노래에 대한 가사가 시편 44편이다, 이렇게 소개돼 있습니다. 고라 자손이 민수기 16장에 보면 거의 말살당해요. 모세한테 대들었던 겁니다. 여기 44편 2절에 보면,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주께서 열방을 쫓아내신다는.

열방, 많은 나라지요. 많은 나라가 이 지구상을 덮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 또는 많은 민족. 많은 민족이 있는데 여기에 점선으로 여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없습니다. 없고 그냥 히브리 족속만 있어요. 이 족속은 나라가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혈통적 공동체, 이렇게 보면 돼요. 그래서 히브리 족속이 굳이 나라가 될 수 없는데, 굳이 나라가 된다는 것은 히브리 족속이 나라가 되면서 많은 나라가 덮여 있는 이걸 뚫고 나오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뚫는 것,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냥 구원받는 게 아니고 땅 밑에서 뚫고 나오는 거예요. 없는 것에서 생겨서 그게 뚫고 나오는 거예요. 뚫고 나오면 경로가 있겠지요. 이 경로에서 뚫고 나오면서 주변에 뭐가 보이겠습니까? 많은 나라들은 어떤 식으로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가가 보이겠지요. 그러면 이 다른 나라는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이 안 돼요. 그러면 그들이 뚫고 나오면서 구원은 뭐를 발견하느냐 하면 차이를 발견해요.

사실 옛날 교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요즘 교인들의 특징이 신앙생활 안 하고 싶어 환장했다. 어떻게 하면 신앙이란 것 뚝 떼어낼 수 있는가? 그래서 여러분 말고 신앙생활 안 하고 싶어 환장한 요즘 교인들은 저는 이걸 뭐라고 표현하고 싶냐 하면 자기 몸이나 옷에 붙어있는 검댕이로 보는 거예요. 깨끗한 옷에 시커먼 것 붙어있으면 빨리 떨어내고 싶지요. 빨리 주일 예배 마치고 떨어내고 싶은 거예요.

월요일 되면 말쑥해야 되니까. 그렇다고 교회 안 나올 순 없으니까. 안 나오면 미래가 장담을 못하니까 자칫하면 지옥 가는 수가 있기 때문에 이게 아주 무게 있게 공포스럽게 다가오니까 걸쳐놓는 겁니다. 주일 오후 되면 검댕이 빨리 떼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검댕이 같은 거예요. 요즘 교인들, 여러분 말고. 왜 갑자기 강조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요즘 교인들이.

이거는 뭐냐 하면 깁스 푸는 날이 언제일까? 깁스 해놓으면 얼마나 근지러운데 긁지는 못하고요. 빨리 떨어내는 그 날을 학수고대하잖아요. 이 날이 뭐냐 하면 월요일 날, 깁스 떼는 게. 수갑 족쇄 채웠다고 족쇄 풀리는 날, 파스 떼는 날. 파스 떼면 속이 시원하게. 그거는 이 신앙생활이 인간에게 전혀 친근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교인들이 교회를 구성하는데 구원을 뭐라고요, 그걸 뭐라 한다? 이걸 뚫고나오는 거예요. 뚫고나오면서 교인들은 신앙생활 검댕이로 생각하고 깁스 푸는 날, 달라붙지 말아야 될 검댕이보다 더 심한 말이 있습니다. 해충입니다. 해충 달라붙은 이걸 어떻게 월요일 되면 떼고 좀 자유롭게 다시 나다움으로 돌아올 수 있는 그날을 하는 그런 것을 성도로 하여금 교회를 통해서 경험케 해요.

경험케 하면서 결국은 뭐를 느끼게 만드느냐 하면 이 차이, 그들과 나의 차이가 과연 있는가를 생각해보자는 거예요. 교인들은 주일 빨리 떠나고 싶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애들이 힘든 학교 마치고 어디 가고 싶다 했습니까? 집에 가고 싶어 했지요. 그럼 교인들은 예배 마치고 어디 가고 싶어 합니까? 집에 가고 싶은 거예요.

교회 오전, 오후 있으면 골치 아파요. 심신이 다 피곤해. 그 피곤한 이유가 본심을 발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피곤해요. 본심을 발산하지 못할 때 위선덩어리. 여자들 밖에 나갈 때 30분씩 하는 게 있어요. 메이크업이죠. 집에 와서 제일 먼저 하는 게 뭡니까? 메이크업 지우는 거예요. 덕지덕지한 것, 여름에 땀나고 하면 확 지우고 싶어요.

과연 그들과 차이가 나는가를 발견하면 히브리 민족이고 발견하지 못하면 열방이라는 거예요. 그 차이는 구원과 무엇의 차이냐 하면 심판의 차이에요. 이걸 시편 44편에 보면 줄곧 나와 있습니다. 4절부터 보면,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자, 중요한 것 나옵니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그렇게 돼 있지요. 그러면 여러분 물어봅니다. 활을 의지하고 칼을 의지하면서 자기를 지키는 자들이 누구죠? 바로 뚫고나오면서 맞닥뜨리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열방들, 많은 나라가 있다는 것은 그 많은 나라의 역사가 있고 전통이 있다는 거예요. 하루아침에 세운 게 아니에요. 오랜 역사 동안 수백, 수천 년 동안 쌓아온 거잖아요.

그들이 그 역사를 이끌어갈 수 있는 동력, 에너지, 힘, 그것 어디서 나온 겁니까? 자기의 칼이고 자기의 활이고 자기의 지혜고 같은 민족끼리 협력이고 협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믿을 것은 칼과 활과 우리의 단결력, 이것 외에는 믿을 게 없다고 이미 그들은 수백 년 역사 통해 이미 확정이 되고 확인이 된 거예요. 열방들이 거대한 제국을 이루고 나라를 이룰 때 장난치듯이 농담 삼아 이룬 게 아닙니다.

전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우리나라에 안중근 있다 하는데 참, 베트남이고 아프리카고 동남아시아에 있는 그리고 남미에 있는 숫한 열방들 나라들이 그 유럽의 나라 강대국으로부터 독립운동하면서 얼마나 많은 영웅들을 배출한지 몰라요. 우리는 안중근 의사만 이야기 듣지요. 베트남이 베트남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프랑스와 전쟁했던 가차 없이 자기 목숨 아낌없이 바쳤던 사람, 많은 영웅들이 있어요.

그 영웅들이 그 나라 제일 도심의 광장에 동상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한 번 가보세요. 모조리 전부 다 동상이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그 민족의 장렬해요. 그야말로 그 민족에서 고귀하고 장렬한, 특히 아프리카 같은 경우에도 굉장히 많습니다. 안중근 그 정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른 민족은 그보다 더 처절했습니다.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그런 일도 많았어요.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역사는 피의 역사다. 희생의 피가 없이는 오늘날 이러한 우리의 민족이 건사하고 지낼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 민족에 태어난 아이들은 교육받아야 된다. 무슨 교육? 과거에 우리 선조들이 이 땅을 물려주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힘썼는지 그 희생을 모르면 우리 민족 아니다. 모든 국가의 교육지침을 바로 그겁니다. 유구한 역사 밑에는 희생이 있고, 이 희생을 모독하는 자는 우리나라에서 떠나라. 그거는 우리 민족 아니다. 이런 것이 결집하게 만들어요.

재벌 하나 되는 게 장난입니까? 그 밑에 있는 재벌 2세, 3세는 희희낙락하고 있지만 항상 그들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정주영, 이병철, 그들의 희생과 사업을 맞이하는 타이밍, 거기에 대한 정칙적인 기회와 행운, 그것이 오늘날 우리 재벌을 이루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전두환이 빼앗아요. 국제그룹을 해체시켜요.

방금 이야기한 이방민족의 특징을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모든 인간은 아버지가 있고, 자손은 그 아버지의 이름에 소속되어서 아버지의 나라를 후대까지 이어가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모든 민족들은 태어난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편 44편에 보면 그 아버지의 이름 말고 다른 이름 나와요. 5절에.

시편 44편 5절에 히브리 민족은 아브라함의 이름입니까, 아니면 이삭의 이름이에요, 야곱의 이름이에요? 무슨 이름입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이름이고, 이삭의 하나님의 이름이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다른 민족은 조상은 죽었지만 죽은 조상이 남겨준 육신은 우리가 DNA를 계승해서 후손들이 사는 땅이니까 아버지가 물려준 땅에 우리가 살고 있다. 자신의 육신으로서 자기 나라의 존재의 정당성을 그렇게 합리화하는 거예요.

그런데 히브리 민족은 아브라함에게도 아브라함의 육신이 아니에요. 이삭에게도 이삭의 육신이 아니에요. 야곱에게도 야곱의 육신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아버지는 죽지만 아브라함은 죽지만 누구는 안 죽어요? 아브라함은 죽어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죽은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중에 뭐가 되느냐 하면 육신이 돼버려요.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걸 누가 극구 반대하느냐 하면 모든 나라, 민족들이 극구 반대해요. 왜 반대할까요? 그들이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론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가장 중요한 준재는 뭐냐? 돌아가신 아버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내가 중요해요, 내가 중요하다고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육신의 한계에요. 죽은 분은 죽었고 살아 있는 살아야지. 사는데 그냥 살면 안 되고 죽은 아버지의 공로로 희생으로 말을 하면서 내가 여기에 살아 있는 걸 정당화하는 거예요.

히브리 민족이 하나님이 함께 있다 했지요. 그러면 히브리 민족은 육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육신이 있지요. 육신이 있는데 이미 나타난 육신과 앞으로 육신으로 오실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의 육신 사이에 주께선 뭘 보여주고자 하느냐 하면 차이를 보여줘요.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구원을 뚫고나오는 건데 그냥 뚫고나오는 게 아니고 뚫고나온다는 것은 뚫을 대상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저들과 히브리 사이에 뭘 보여준다? 차이를 보여주잖아요. 그런데 그 차이가 히브리 민족을 뚫고나오면서 두리번거리면서 보는 차이만 있는 게 아니고 히브리 민족 내부의 모순을 유발시켜요. 누가? 하나님께서. 그 모순이 몇 절에 나오느냐 하면 여기 9절에 나옵니다. 9절의 두 단어를 오늘 강의제목으로 삼고 싶단 생각이 훅 들어와요, 제가.

9절 처음에 두 단어가 뭡니까? 뭐라고 돼 있어요? “그러나 이제는” 앞의 1절에서 8절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하나님, 과거에 우리를 도와주신 것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걸로 계속 하면 되죠. “하나님 우리 편이다. 하나님 우릴 도와주신다, 도와주신다.” 죽 갈 줄 알았지롱. 그렇게 갈 줄 알았어요. “역시 저 민족과 우리는 달라. 저 민족은 하나님 안 계시고 우리 민족은 하나님이 계셔. 역시 우리 집안은 4대째 기독교 집안이라서 모든 게 복을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가 없지. 역시 우리 가정은 불도 심한 저 앞집과는 달라.” 그렇게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9절 뭡니까? 그러나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그러나 now이제는, 이거는 하자가 없고 잘못이 없다고 철썩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해줘서 고맙습니다, 라는 이 신앙이 문제없는 걸로 여겼던 우리 자신이 그렇게 믿던 우리 자신에게 그게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우리 집하고 저 집과 차이를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래서 어떤 자긍심 같은 걸 가졌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 내부에 나하고 장차 육신으로 오실 예수님 생각과 내 생각이 주님 생각과 내 생각이 근원적으로 틀렸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시점이 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었었어요.

구원받아 좋다고 하는 이 육신, 그 육신은 마치 내가 맞이해야 할 이방나라가 자기 위주로 아버지 이름을 팔아먹는 그 육신과 다를 바 없어요. 똑같은 거예요. 열방 보고 욕할 게 아니고 바로 내가 나를 위해서 하나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게 심판의 대상인 멸망 대상과 똑같은 동일한 사고방식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육신이 제일 중요한 거예요. 육신이 제일 중요하니까 죽어선 어디 가선 안 된다? 내 육신을 내가 지켜야 되잖아요. 죽어선 천국 가기 위해서 주일날 어디 갑니까? 교회 나와 주는 거예요. 정기적으로. 하지만 월요일 되면 뭐합니까? 에이 씨, 아따 젊어서는 봉사 많이 했는데 늙어서 교회 한 번 오는데 힘들어 죽겠다.

검댕이, 깁스 푸는 날, 파스 떼는 날 교회 나오면서 다 떼는 거예요. 해충, 모기, 파리 이것 다 떼고 다시 솔직하게 내 자신을 위해서 나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싶다는 자기의 흥밋거리, 취미생활, 오락생활 거기에 몰입하는 거예요. 사는 의미 나 모르겠고, 인생이 뭔지 골치 아픈 것 모르겠고, 내가 날마다 고대하는 것이 얼마나 내가 즐겁게 재미있게 사느냐, 그게 전부에요.

젊은 사람들 평할 때 재미와 오락으로 평하면 백 프로 다 맞습니다. 젊은 사람들 행동 하나하나가 철학이니 의미 필요 없어요. 오직 무엇이 쾌락을 주느냐, 쾌감을 주느냐, 그것 딱 하나뿐입니다. 그들이 심오함을 찾아도 그 심오함도 자기한테 즐거움이에요. 즐겁지 않으면 심오함 파헤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즐거움을 가지고 즐거움에 대해서 기독교라는 제도, 교회제도가 구닥다리가 되는 거예요. 나를 힘들게 하는 짐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사탕 주고 초콜릿 줄 때 두 살 때까지 교회 따라 나와요. 점점 나이가 다운 됩니다. 두 살 때까지 나옵니다. 그다음부터는 더 큰 쾌락을 주지 아니하면 아빠, 엄마 따라 교회 안 가겠다고 흥정에 나서죠. “너, 주일학교 갔다 오면 점심 맛있는 것 해줄게.” 그것도 다섯 살 때까지 통하지요.

그다음엔 단위가 돈이 많이 드는 걸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걔들 다섯 살, 여섯 살 유치원 갔다 오면서 문방구에서 지금보다 더 쾌락을 주는 것들을 친구에 이끌려서 발견했기 때문에 그걸 보는 순간 자기 속의 잠자는 욕망은 깨어나지요. “내가 즐겼던 것은 즐기는 것도 아니구나. 시답지 않는 거구나. 저걸 가지면 더는 소원이 없겠네.”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나이가 많고 적고 관계없이 그 나이 대에 악함은 항상 거기서 분출되게 돼 있어요. 그 나이 대의 악함. 86살 된 노인네의 악함, 90살 된 사람이 노인정에 있으면, “여기 80 밑에 다 집합.” 자기는 86이니 앉아있고. 70대 오면, “어이 신참 이리와. 어, 지팡이 안 짚네? 다리가 계단 올라가는 거 봐. 야, 너 왕년에 좀 놀았네. 지팡이 안 짚고 계단을 올라야. 가서 보름달 하나 사와.”

샤니케잌에서 나온 50년 전통의 보름달과 크림빵 있잖아요. “요구르트 사와!” “형님, 돈은?” “돈은 네가 해야 돼.” 그러니까 노인정에 일진이 있어요. 그게 86된 사람의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여기 90 노인이 등장했어요. “누가 집합하라 했어?” “형님, 죄송합니다.” 이거는 나이 대뿐만 아니고 절에 가도 마찬가지에요.

“어제 반야심경 립싱크 한 거 나와. 립싱크로 한 거, 녹음기 틀어놓고 입만 벙긋한 거 나와.” “머리 깎을 때 면도날로 깎았어, 안전면도기로 깎았어? 우리는 때는 말이야 면도날로 피 날 정도로 깎았어. 요새 뭐야? 전기면도기로 깎고 말이야. 우리 땐 그런 것 없어. 그냥 부엌칼로 깎았어. 이것도 수양이다 하고. 어디 그런 게 있어. 요새 빠져가지고 말이야.”

이게 절에만 있는 게 교회도 있어요. “우리 총회장 안 나왔는데 밥 먹은 놈 나와.” 이런 게 여러분 기분 나쁜 게 아니에요. 어떤 쾌락을 주느냐 하면 자기에게 목표가 있는 쾌락을 제공해줘요. 나도 빨리 총회장 되어 내가 오기 전에 어떤 목사도 안 먹게, 그런 존재가 될 때 그걸 울산강의에서 광장 공포라 했어요.

다윗이 인구조사 하는 이야기거든요. 그때 요압이 다윗에게 조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백배나 더할 수 있습니다, 개길 때 왕은 다윗은 멈추지 않았어요. 왜 그러냐 하면 요압은 백성의 대표자에요. 요압은 숫자 헤아림에 포함이 되는 자에요. 왕은 그 숫자에 포함된다, 안 된다? 포함이 안 되지요. 숫자를 헤아리는 이유가 다윗으로 하여금 어떤 숫자도 내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쾌감을 얻기 위해서 숫자 헤아리는 거예요.

이게 어제 낮 설교에 연관시키면 주께선 그게 뭐냐? 맏이가 할 도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맏이는 죽어버려야 될 자에요. 여러분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유월절 날 양이 누구와 상대합니까? 이스라엘 둘째, 셋째, 누나 다 있어도 소용없지요. 누구를 상대합니까? 장자와 상대하는 거예요. 어린양의 피는 그 이스라엘에서 장자의 목을 떼어버리는 거예요. 장자의 모가지와 목숨과 어린양의 피와 맞바꿈으로써 비로소 뭐가 된다? 나라가 된다.

나는 멀쩡한데 아버지가 도와준다는 게 아니에요. 그건 아버지의 이름이에요. 그러나 주의 이름은 그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저희들은 죽은 자의 민족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죽은 자의 민족만이 산 자들을 차이를 뚫고 구원의 차이를 보이면서 구원에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의 유업, 상속이라고 해요. 상속은 오직 맏이한테만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러한 상속을 앉아서 성경 공부하듯이 교육해서 아느냐? 아닙니다. 이걸 주의 말씀, 주께서 강제로 이끌어요. 어디를 가느냐? 이방나라 속을 앞장서서 주님께서 뚫고 지나갑니다. 뚫고 지나갈 때 시편 44편 1절부터 8절까지의 그 오해, 오해지만 고라 입장에서 이거는 진실이고 진리라고 여겼던 거죠.

여기 3절에 봅시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3절에 이게 나왔지요. 이렇게 이야기한 고라 자손은 이걸 오답이라고 생각하겠어요, 정답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철썩 같이 정답이죠.

정답인데 정답으로 끝까지 계속 가야 되는데 9절에 뭡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다음에 뭡니까?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합니다. 앞뒤가 안 맞는다는 거예요, 앞뒤가. 정답, 정답, 정답, 진리, 진리, 진리로 잘 따라와서 교회생활 잘하고 신앙생활 잘했는데 왜 우리의 실생활은 마치 정답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사태가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야 됩니까, 주여? 이게 고라 자손의 시편 44편입니다.

지금 질문한 거예요, 고라 자손이. 답이 없으면 곤란하지요. 질문 해놓고 답이 없으면 곤란한데 반가운 소식은, 그리고 기쁜 소식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미 구원이 된 사람이에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될지를 몰라서 그래요. 교회 와서 복음을 제대로 들었으면 질문이 생겨야 돼요.

그런데 질문 없으면 빨리 월요일 와서 검댕이 떼기 바빠요. 다 아는 이야기, 옛날에 십오 년 전에 알았던 이야기, 그것 다 떼게 해요. 그것 모르는 사람 있나. 목사님이 뭘 설교했느냐 중요한 게 아니고 그 현장에서 내가 새로운 질문이 유발돼야 돼요. 질문. 내가 질문한다는 것은 말씀의 깊이에 의해서 내가 새롭게 규정받고 있다는 사실, 내 인생은 내가 주도가 아니라 주도하신 분이 따로 계셔서 나로 하여금 뚫고나오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뚫을 거리를 미리 맛보게 해주고 경험케 하는 일상이 월요일부터 화요일, 수요일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 질문을 네가 내뱉으면서 질문과 더불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상을 살아봐라. 그 안에 답이 있다는 거예요. 평소에 우리가 일상 속에 답이 있는데 답을 못 찾아내는 것은 내가 망하면 안 되는 그것이 주의 일을 그동안 꾸준히 방해해왔습니다. 내가 망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아까 다시 말씀드려서 이 많은 민족들이 지금 이 나라가 이렇게 강대국 된 것이 얼마나 희생과 피와 소모가 된지 알지 못해. 그래서 내가 사는 나라는 소중한 거야, 라고 할 때 그래서 이 나라 구원받습니까, 천국 갑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천국 못가는 이 나라 사고방식과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방식이 뭔가 차이가 나야 되는데 어디에서 차이를 발견합니까? 하나님 믿는 인간이나 안 믿는 인간이나 전부 다 나는 망해선 안 되고, 나는 건사돼야 돼, 이런 인식으로 평생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는데 무슨 차이가 납니까? 차이가 안 나도 괜찮아요. 물어나 봐야 될 것 아닙니까. 뭔가 나한테 하자 있다는 그걸 느껴야 되지 않습니까? 적어도 성도라면.

분명히 예수님께선 넓은 길로 가선 안 된다고 해놓고 그 넓은 길을 이렇게 규정해놨어요.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이 넓은 길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과 천국 가는 나하고 뭔가 차이가 나야 되잖아요. 예수님이 그들은 넓은 길로 가는 너는 어느 길로 간다? 좁은 길로 간다 하지만 좁은 길 간다하는 이것이 날마다 재미와 쾌락을 추구하는 우리한테 짜증나는 일인데 어떻게 해요? 거부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요?

여기서 고라 자손이란 데서 우리는 일종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라 자손 민수기 16장에 보면 모세한테 대들었지요. 너만 레위 지파냐, 우리도 레위 지파다. 이렇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를 특화시켰거든요. 그 당시는 왕이 없어요. 왕이 없을 때 열두 지파 가운데서 누가 앞서 중심이 돼야 되고, 앞선다는 말도 같은 말인데요, 앞선다는 말보다 누가 중심이 돼야 돼요. 중심핵이 돼야 된다고.

왜 그러냐 하면 중심핵에 하나님께서 그들만 대표해서 상대하기 때문에 중심핵이 되는 지파가 중요한 지파에요. 그 중심 지파가 레위 지파에요.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특화된 지파가 레위 지파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상관하지 못하고 레위 지파만 하나님과 상관할 수 있는 그런 특혜를 입은 지파에요.

그런데 다른 지파 보기에는 레위 지파 참 좋겠다하겠지요. 문제는 레위 지파 자체 내에 모순이 발견된 거예요. 파벌이 생긴 겁니다. 내란이 발생됐죠. 너만 레위 지파냐, 해서 대들었습니다. 대든 주동자가 누구냐? 고라 자손.

민수기 16장 31~35절 보면,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인을 소멸하였더라“

모여 있는 고라 자손은 땅이 꺼져 죽고 앞의 대표자들 250명은 향로에서 나온 불로 죽고. 이래 죽고 저래 죽고. 여기에 보면 고라에 속한 모든 자손들은 다 죽었더라. 씨가 말랐어요.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어요. 고라 자손이 이렇게 생각을 안 했어요.

뭐냐? 우리가 모세한테 대들면 땅이 꺼져서 우리 있는 자리가 싱크홀 일어나서 우리는 꺼지고 뻥하니 뚫린 게 아니고 꺼지고 그동안 준비된 흙이 우리를 덮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자로 만든다. 이걸 알고 모세한테 대들었습니까,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우리에게 선악지식을 이미 확보한 인간들이 죄를 지을 때 뭘 계산하느냐 하면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미리 내가 받을 벌칙을 추리해요. 우리가.

내가 오늘 교회 와서 집사님과 말다툼했다. 그럼 주께서 준비한 벌은 어떤 벌인가? 그날 밤에 모기한테 쏘이는 벌……. 그래서 인간은 어떤 말이나 행동할 때 어떤 벌칙도 감당할 각오를 해서 하는 거예요. 참 이거 중요합니다. 두 가지, 이 차이를 보세요. 죽음을 각오하는 것과 죽기를 원하는 것, 어떤 차이가 있느냐? 죽기를 각오하는 것 뒤에 생략된 게 있어요. 기어이 살아보자. 죽기를 각오하고 기어이 살겠다는 걸 포기하지 않은 채 죽기 살기로 살아보자. 죽기를 원하는 것은 그냥 죽는 거예요.

자, 물어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죽기를 각오하고 설교했습니까, 죽기를 원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그냥 죽기를 원한 거예요. 스데반 집사가 한 게 아니고 성령이 그렇게 했지요. 이것 하게 되면 나한테 어떤 수모를 당할지 계산을 한 게 아니고 성령에 충만해서 그런 게 보이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누구보고 했느냐 하면 주님보고 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에게는 앞에 돌 던지는 사람이 살아 있는 게 아니고 그거는 폐차고요, 죽은 자들이고. 스데반 집사는 말할 수 있는 대화상대는 오직 자기와 함께 자기를 고대하고 있는 주님만 진정 살아 있는 존재에요. 자기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은 죽어있는 존재에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가 죽기 전에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스데반 집사의 살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말씀과 복음과 성령이 살아 있지요. 스데반 집사는 껍데기고.

그래서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뭐라 했어요? “저들은 지금 이 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여. 저들을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들은 몰라서 그런 짓합니다. 본인도 모르고 주님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특히 그들은 본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그들은 자기가 죽었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뭐냐? 죽기 살기로 살아요. 이게 특징이에요. 이게 둘 사이의 차이입니다.

신앙은 뭘 보여준다? 구원은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죽기 살기로 사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살아요?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죽고 사는 게 내 문제가 아니고 그거는 주님 소관이죠. 목숨을 언제까지 연장할 것은 주님 소관이에요. 가끔 뉴스에 보면 남 도와주고 바르게 살고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음주운전 차량에 받혀 죽어버린 게 있지요.

남의 그 어려운 심장, 세계적인 대 기술을 갖고 있는 의사가 그것도 출근시간 아끼기 위해서 자전거 타고 가다가 우회전하는 트럭에 받혀서 죽었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애도하는지 몰라요. 그 우수한 기술 가진, 아주 저질의 인간은 안 죽이고 왜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을 그렇게 죽이는가? 그러한 의문점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그런 질문 자체가 뭐냐? 그 사람은 기어이 살겠다는 전제로 죽기 살기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설교할 때 했지요. 나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와 경우를 찾으세요. 성도는 이래 되는 이유가, 내가 죽기 살기로 살고 싶다가 나한테 짐이 되고 힘이 되고 피곤하게 만드는 요소인 것을 성도는 알아요. 말씀에는 골로새서 3장 3절에는 이미 죽었다고 돼 있는데 내 육신은 성경과 배치되면서 주의 일과 방해되면서 기어이 살겠다고 육신이 자꾸 배고프고 오늘 점심은 뭘 먹나, 오늘도 밀면인가, 더 맛있는 것 없을까?

계속해서 이 육신은 나를 힘들게 해요. 나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남자는 여자를, 그다음은 여러분들이 하세요. ‘귀찮게 해’요. 나는 죽기 살기로 더 살고 싶은데 옆에 있는 사람이 자꾸 나를 나 사는데 방해물이 되고 힘들게 하는 거예요. 이게 성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면 성도와 주님과의 관계는? 성도 자체가 누구를 방해한다, 힘들게 한다? 주님을 힘들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컴퓨터게임을 해서 상대한테 질 때 짜증나지요, 화가 나지요. 그런데 그 시간에 수단과 우크라이나에서는 군인들이 죽습니다. 자, 어느 것이 더 심각한 문제에요? 내 게임에 지는 이것이 심각합니까, 아니면 남수단 내전과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군인들이 국가의 총알받이로 나서서 아무 의미도 없는 총탄 맞고 죽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심각합니까? 게임에 졌다고 해서 오늘 기분 나빠서 도저히 못 견딘다, 이게 심각한 거예요. 얼마나 인간들은 개인위주인지 개인주의인지 스케일을 넓힐 생각이 없어요. 나한테 쾌락을 주지 못할 스케일은 넓힐 생각을 안 하려고 합니다. 왜? 남들은 나를 귀찮게 하기 때문에.

그러면 목사님은 돈 많아서 유니세프에 헌금하고 기부하고 아프리카 우물 파는데 전화로 오천 원씩 넣으란 말인가? 제 말은 그게 아니고 심각함의 심각함 가장 심각함이 뭐냐를 물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우크라이나 전쟁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어요? 뭡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죽었다는 그 사실이 살았다는 거예요. 주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이 사실이 지금 살아 있기 때문에 지금 그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심각하냐 하면 내가 이미 십자가 앞에 끌려 나와서 죽은 존재인 것을 확인하면서도 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검댕이 떼듯이 떼고 또 돈 버는데 어디고, 뭘 하면 몇 푼이라도 더 벌까? 여기에 돈 버는 게 나쁜 게 아니고 돈 벌지 않으면 내가 나답지 못하다는 어떤 불안감과 두려움이 발생된다는 이 사실.

그만큼 우리가 십자가를 모독하고 있으면서도 교회 다녔다고 성도라고 자부하고 있는 이 괴리, 이 모순점, 이것이 오늘 고라 자손이, 이 모순이 없으란 말이 아니고요, 완벽하게 살란 말이 아니고 질문은 해봐야 된다 말이에요. 누구처럼? 고라 자손처럼 질문을 해봐야 돼요. 고라 자손은 다 망했어요. 그런데 그 시를 남겨두었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역대상 26장에 나옵니다.

역대상 26장에 인사이동이 있는 데요. 사람을 공무원 임명을 하는데 26장 1~3절 보면, “문지기의 반차가 이러하니라 고라 족속 아삽의 자손 중에 고레의 아들 므셀레먀와 므셀레먀의 아들들 맏아들 스가랴와 둘째 여디야엘과 세째 스바댜와 네째 야드니엘과 다섯째 엘람과 여섯째 여호하난과 일곱째 엘여호에내며” 이렇게 해서 읽어보기도 단어가 힘들지요. 아나운서라도 잘 못해요, 이거는.

자, 그런 명단 나올 때 딱 넘어가잖아요. 여기서 그들이 문지기라는. 자, 다윗언약 입장에서 문지기가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에요. 그럼 이 문지기는 세상 나라의 성을 지키는 것, 성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까, 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까? 임금의 대궐 지키는 수문장이 중요합니까, 성전 지키는 문지기가 중요합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문지기가 중요하지요. 이 차이에요, 이 차이. 세상 나라에서는 성과 궁궐은 힘의 에너지가 나오는 국가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은 에너지는 바로 성에서 나와요. castle 롯데캐슬 있잖아요. 롯데캐슬에서 나온다고.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디서 나오는가? 성전에서 나옵니다. 그 성전 문지기의 파트너가 누구냐? 오벳에돔이에요. 여러분 오벳에둠하면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바로 언약궤가 머물 곳이 없어서, 오벳에돔이란 뜻은 에돔의 종이란 뜻입니다. 이방민족이죠, 에돔. 이스라엘이 아니고 야곱의 형, 에서의 족보에 집안 민족이죠. 그 집에 있었더니만 하나님께서 석 달 동안 복을 줬다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혈육 핏줄이 중요한 게 아니고 누가 너와 함께 있느냐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이냐를 평하겠다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230710b 부산강의 : [시편]60(44:9)-그러나 이제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첫째 시간 끝에 인간은 항상 선악구조 때문에 나쁜 일을 해도 그걸 조종해요. 어지간한 벌칙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벌칙을 감수한다 치고 내가 죄를 짓되 벌칙은 내가 마땅히 감수하겠다는 조건 하에 인간들은 어떤 완벽을 추구하는 겁니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그 징벌도 내가 받음으로서 그게 죄로 미끄러지지 않고 여전히 의의 영토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과시하고 싶은 거예요. 선악체계에서. 그래서 바리새인에게는 고난주간이 있는 겁니다.

내가 그것을 사도 바울의 로마서, 갈라디아서 편지에 의하면 내가 행한 모든 행함에 대해서 보상을 받는 것으로 나의 의가 어떤 경우라도 확인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행한 것이 비록 악이라고 나중에 드러나더라도 내가 처벌을 달게 받겠다고 돼버리면 이거는 악이 아니고 악에서 의로, 선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거예요. 언제든지 악이 들어가도 선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것 회개, 반성이죠.

회개, 반성을 할 각오로서 내가 살아가게 되면 어떤 악이라도 다시 어느 구역으로 올 수 있느냐 하면 선과 악 중에서 악은 선으로 오기 때문에 나의 행한 것은 항상 의라는 보상으로 주어지게 돼 있다, 이래 주장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마귀가 이래 주장하지요. 그런데 지금 고라 자손이 그걸 알면 질문을 안 해요. ‘그러나 이제는’ 말 안 해요. 그 정도는 인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 원칙이 깨어져버렸다는 거예요. 이게 다인 줄 알았는데 선악지식을 아는 인간들은 뭐든지 선과 악에 균형 맞추면서 항상 선한 쪽으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을 내다보는 게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 자기가 살 수 있는 희망을 갖는 구조인데 그 구조가 깨어져버린다는 거예요. 그 구조가 깨어져버렸어요. 그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전부를 총동원해도 지금 상황은 설명이 안 되고 해명될 수 없는 지경으로 주께서 보내셔버린, 주께서 왜 이스라엘을 이끄십니까, 이래 되는 거예요.

회개해도 소용없고, 반성해도 소용없는, 그러면 그 세계는 알 수 없는 세계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게 고라 자손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고라 자손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고라 자손이 씨가 말랐어요. 다 죽었어요. 그때, 민수기 16장에서.

다 죽었는데 주께서 거룩한 성전의 문지기로 세워준 겁니다. 레위 지파가 해야 될 일을 유지시켜준 거예요. 연결시켜준 겁니다. 오벳에돔과 더불어서. 그 사람들은 이방민족에도 불구하고 언약궤를 모셨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지속적인 일과 떨어지지 않고 그 안에 편입되어서 일할 수 있게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고라 자손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야곱의 정신이 씨가 말린,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 했으니까 씨가 말린 고라 자손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말짱 망해버렸는데 이런 시편 44편을 언급했고 그것이 성경으로 남아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야곱의 정신, 처음의 히브리 민족을 이스라엘 되게 했던 그 정신이 씨가 말려버린 고라 자손, 모세에게 대들었던 그 자손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 이것은 이런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나로 표현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쉽게 생각할 겁니다. 주머니 속의 송곳. 추울 때 주머니에 넣었는데 아파. 왜 아프냐? 가장 편안한 자리라 생각하고 손 넣었는데 거기에 뭐가 기다렸습니까? 송곳이 기다린 거예요. 이 말은 외부적으로 이방만족과 우리 이스라엘의 차이점만 생각했던 이스라엘이 고라 자손의 이런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이게 외부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내부문제로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이어가는 거예요.

언약이 바깥에서 와서 뭘 관통한다? 이방민족 쳤다. 아까 우리가 1절에서 8절까지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동안 이방민족을 쳐서 우리의 활도 아니고 우리의 칼도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쳐서 너무 고맙습니다, 라는 우린 그걸 놀라운 기적으로 여깁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증거로 봅니다. 했는데 그러나 이제잖아요.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어디로 갑니까? 이스라엘 지켜줌으로 스톱이 되는 게 아니고 멈추지 않는 주님의 언약이, 주님의 언약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될 때까지, 그것도 육신이 그냥 육신이 아니고 어떤 육신? 죄 있는 육신 될 때까지. 하나님이 죄 있는 육신 될 필요 없잖아요. 육신 자체가 피조물이고 거기다가 죄 있는 육신을 가질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있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이 알고 있는 선악의 지식, 그걸 능가하는 거예요. 인간이 기껏 아는 선악, 인간은 선악과만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 너머를 알아요, 몰라요? 생명나무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그리고 알 필요도 없고. 그런데 생명이 어디로 들어온다? 선악과 지식 속으로 드디어 침투해 들어오는 거예요.

바깥이 내부로 함몰한다. 내가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헬스클럽에 가면 그런 것 있지요. 운동기구 중에 하나인데 손잡이 들고 있는 것 있지요. 캐틀벨. 바깥에 있는 손잡이 이거는 쇳덩어리 안의 내부에 있잖아요. 한 번 상상을 해보는 거예요. 바깥에 있는 것을 안에다 집어넣는 겁니다. 이게 물컹물컹하다 치고 찰흙으로 만들어서 얼마든지 이게 조작에 의해서 집어넣었다 치면 어떻게 되느냐? 그림이 이렇게 되지요. 바깥에 있는 손잡이 구멍만 남기고 안은 편평해지겠지요. 외부가 내부로 들어가 버린 거예요.

고라 자손이 질문하기를 주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지켜주기 위해서 바깥에서 지켜주는 걸로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거는 이방민족들이 각자 우상들이 있잖아요. 그 우상들이, 신은 인간보다 더 훨씬 커요. 크기 때문에 인간은 작잖아요. 큰 것이 작은 것에 들어올 이유도 없고 들어올 필요 없다 생각하는 거예요. 바깥에서 보호하면 되니까. 교회 나올 때 다 사람들이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하나님 크신 분이잖아요. 하나님이 작은 내 속에 크신 분이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또 들어와선 안 돼요. 왜? 워낙 자기가 쓰레기통, 더러우니까.

바깥에서 지켜주고 훈계나 하고 잔소리만 하면 되지 굳이 안까지 들어올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안에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왔다는 흔적만 두 개 남지요. 두 개만. 그러면 바깥에 손잡이가 안에 들어왔다면 바깥에 있는 기능이 안에서도 그냥 멈출까요, 작동할까요? 안에 들어오면 작동하지요. 그게 뭐냐? 말씀이 하나님이 사람 속에 들어온 거예요. 이제 사람들은 죽었어.

제가 어제 낮에 설교했잖아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다 하니까 왜 그리 상상들을 많이 하는지. 자비롭고 어질고 사랑이 많고. 하나님은 나쁜 놈들은 심판하고 착한 사람은 구원해주고. 상상들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그 멀리 있던 하나님이 직접 유대사회에 들어왔을 때 그 당시 직접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 만났던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뭐였습니까? 그 거리가 멀리 있으니까 좋은 이야기는 다 했는데 막상 가까이가 아니라 함께 있을 때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단호했습니다. 죽여 없애버리는 것.

이 말은 왔을 때 십자가에 죽였잖아요. 그러면 그걸 다시 한 번 뒤로 비디오 장면을 뒤로 돌리는 거예요. 뒤로 돌리면 멀리 있던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오해했다는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서로가 서로한테 거울상으로 반사되듯이 그냥 타자를 통해서 나 자신을 알게 된 거예요. 정작 하나님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역사와 전통으로 내려왔던 신학이나 철학, 학문 그런 것으로 주워들어서 그걸로 나를 구성한 거예요. 그러니까 신학이란 게 얼마나 거짓말인지 아시겠지요.

주님이 속에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왔으니까 속에서는 난리가 난 거예요. 빨리 어떻게 합니까? 토해내지요. 바깥에 빨리 토해내야 돼요. 어울릴 수 없는 자가 들어왔으니까 내 생활이란 게 없잖아요. 나보다 못된 인간 그렇게 많은데 하필이면 나한테 암이 걸리고 이런, 하나님 나한테 왜 그랬어요? 저한테 왜 그럽니까? 그때 이십대에 예쁘다고 선보겠다고 의사, 판사 줄을 섰는데 주님 나한테 왜 그랬어요? 아무 볼 것도 없는 남자와 결혼해서 빼도 박도 못하고, 주님 나한테 왜 그랬어요? 이게 뭐예요, 내 인생. 무르고 싶다, 정말.

주님은 우리의 송곳으로 우리 안에 들어온 거예요. 나를 찌르는. 여러분들 그런 것 생각해보세요. 아주 청순한 십대 소녀가 항상 예쁜 것 좋아하고 꾸미기 좋아하고 분홍색 좋아하는 애들이 머리 하고 투피스에 허리를 짤룩 들어가고 십대는 아무리 밥 먹고 허리 안 나와요. 원피스 짧게 하고 밑에 치마는 무릎을 살짝 덮는, 그리고 귀여운 척하면서 춤추다가 지뢰 밟아보세요.

우크라이나 전쟁 가서 춤추다가 러시아 지뢰 밟으면 그 원피스, 투피스 다 찢어져버리는 거예요. 뭐가 돼요? 예쁜 것, 귀여운 것 다 어디 갔어요? 라라라라랄랄라 하다 지뢰 밟아 발, 다리 수술하고 그 귀여운 것 다 날아갔지요. 여기 14절에 그 흔드는 것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후입니다. 그건 9절이죠. 14절을 보고 있다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고라 자손 주도 하의 이스라엘에게.

여기 11절 보면,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그냥 값어치도 없이 그냥 노예로 팔려나갔다 이 말이죠.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우린 값없이 취급당했다 이 말이거든요.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그다음에 뭐냐 하면,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14절)

머리 흔든다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아니야, 아니야.”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저들과 같지 않아서 참 다행이야, 라고 이방민족들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이고, 우리가 생각해도 참 안 됐다. 불쌍해도 저렇게 불쌍하냐. 집안 망해도 저렇게 망하느냐.” 이순신 장군이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아직도 배가 몇 척 있다? 열두 척. 열두 척도 없어요. 일어설 기미가 다 부셔졌어요, 없어요. 뭐 딛고 일어설 게 아무것도 없어요. 지팡이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때는 뭐냐? 손가락 흔드는 거예요. 아니지. 인생 저래 사는 게 아니지. 저렇게 되면 안 되지, 라고 이방민족들이 즐거워하는 거예요. 천만다행이라고 못 된 가정을 보면서 반대급부의 자신의 다행스러움을 하루하루의 즐거움을 찾는 거예요. 이걸 뭐라 했어요? 주머니 속의 송곳을 맞이한 겁니다.

전에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1절부터 8절까지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함께 있어 이방민족들을 심판하시고 우리 민족은 이기고 그들은 칼과 활 있었지만 우리 민족에 패배해서 너무나 신나요. 너무 좋아요. 좋아요, 막 누르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 너무 좋아요, 사랑해요.” 이랬던 그들이 이제는 뭐냐 하면 악재를 만난 거예요. 신났지요. 신났는데 그 주머니 속의 뭐가 찌르는 거예요.

바깥에 계셔야 될 도와주실 주님이 막상 우리한테 근접해서 우리 속까지 들어오니까 우린 그때부터 어떠한 전환이 일어나느냐 하면 주님의 혜택을 입는 쪽에서 주님이 당하는 수난과 함께 당해야 될 그래서 한 패밀리, 한 자족이 되고 같이 희생당해야 될 민족으로 주님의 일에 합류되는 지경에 이른 겁니다. 나는 놀고 희생은 주님만 하시면 고맙다 이야기해주겠습니다, 라는 그렇게 꼼수를 부리던 우리가 이제는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걸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관객이요 관람객이라면 쳐다보면 되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에 박수치면 되니까.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선수로 뛴다. 그냥 결과만 보고 100:0 박수만 치고 감사하면 되는데 나로 하여금 선수로 뛰게 만들었어요. 이건 아주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전에는 내 편과 네 편, 이렇게 이방민족과 경계였는데 그러나 이제는 경계가 아니고 지평이다. 경계라 하는 것은 그냥 가만있어서 이쪽만 바라보면 되는데 지평이라 하는 것은 지평선이 나올 때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지평선은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리 가도 지평선 거기 있지요. 주와 함께 주의 가신 길을 가게 만들어버려요. 아아, 주와 함께.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구약입니다. 지금 구약하고 있어요. 괜히 또 마음에 부담되어, 지금 구약입니다, 구약.

구약 이스라엘이에요. 신약 아닙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우리 사람 취급 안 해요. 지금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택한 민족이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 죽을 때까지 계속 끌고 가시는 거예요. 그 안에 살아가는 거예요. 동행해서 가는 겁니다. 그게 주와 함께 주님 홀로 죄 있는 육신의 길로 가는 게 아니에요. 자기 백성을 끌고 고라 자손을 끌고 가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이건 제가 읽을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읽어야 돼요. 16절, 17절 누가 읽어보세요.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여기 보세요. 이게 방금했던 16절, 17절이 누구 이야기처럼 들립니까, 신약에 와서? 바로 십자가 지기 위해서 예수님이 평소에 했던 예수님 자기 보이스, 자기 목소리잖아요.

집단화돼 있던 이스라엘이 하나의 개인으로 응축되는 거예요. 주머니 속에 송곳 있다 했지요. 나중에 주머니의 공기를 압축시키니까 뭐만 남습니까? 송곳만 남은 거예요. 예수 믿고 내 인생 따로 있고 주님 인생 따로 있는데 주님께서 바람을 확 빼니까 내 인생은 폭이 줄어지고 먹든지 마시든지 전부 다 누구 인생만, 누구 스토리, 누구 이야기만 나와요? 하루하루가 주님 자신의 이야기, 다 이루었다는 이야기만 나와요. 주님 이야기만 응축되는 겁니다.

그런데 고라 자손은 아직도 이걸 몰라요. 이걸 몰라서 대든다기보다도 뭐라고 자꾸 뭔가 모순되니까 이게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일과 자기에게 일어났던 이스라엘에 일어났던 일이 이거는 약간 틀린 게 아니고 완벽하게 반대가 되니까 그 갭을 줄일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선악지식들이 동원됩니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내가 어디서 그렇게 못됐습니까? 제가 잘못한 것에 대해 처벌을 감수한다고 했잖아요. 집사와 싸웠으면 그날 밤에 모기한테 쏘이는 것 다 하겠는데 이건 아니잖아요, 주님. 지금 나한테 주어지는 고생은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까지 내가 악하게 산 기억이 없습니다, 주여.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시44편17절,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는 주님 언약을 배반한 적이 없는데 왜 결과는 마치 주님을 배반한 것처럼 왜 이런 결과가 주어졌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에 답변은 간단하지요. 네가 아니라 네 속에 들어온 주님이 언약을 위반한 자에 대한 지옥의 처벌을 받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너무 한가해요. 한가하고 주님은 너무 바빠요. 우리는 희희낙락 인생 즐기기에 바빴지요. 주님은 언약을 위반한 자가 당해야 될 처벌을 십자가까지 받기 위해서 애썼고 그것을, 아까 그림을 다시 봐야 돼요. 아까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이라 했잖아요. 신약에서는 그냥 불신자가 덮고 있다. 지옥 백성들이 이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땅에서 죽었기 때문에 없어요. 없는 우리를 주께서 다시 이 땅에 구원시켜놓고, 아까 방향이 위에서 뚫고 올라가잖아요. 이건 내려가는 거예요. 내려가면서 어제도 다 이뤘고 오늘도 다 이뤘고, 내가 이룬 게 아니고 주께서 다 이뤘음을 확인 차에서 지옥 백성 뚫고 지나가면서 여기서 차이를 발생시키는 겁니다. 불신자와 차이가 아니라 나를 포함해서 인간과 예수님과의 차이를 보여주는 거예요. 나 아니요 주의 은혜입니다,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구약의 고라 자손 같은 경우에는 내가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이 없습니다. 내가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니고 아무 잘못했지만 이 정도까지 내가 이런 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 갭이 뭡니까, 그 차이를 어떻게 좁힐 수 있습니까, 하는 게 구약의 예언이지요. 구약 성도들이 그런 걸 했다면 신약 성도는 구약 사람들이 몰랐던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뭐냐 하면 자신의 과거를 우리 육신의 미래로 만들어내요. 우리가 내년의 삶이 우리 육신이 지니고 있던 우리의 과거 삶이에요. 내가 살았다 치고 행할 수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인생 98세까지 겪어보시렵니까? 98세까지, 너무 욕보여 미안합니다. 또 72세 하면 얼마 안 남았네, 해서 겁나고. 95세로 우리 정리합시다.
나의 과거를 내 선에서 지나간 과거가 아니고 나의 미래가 나의 과거로 만드는 것이 주님의 기억이에요. 주께서는 거쳐 왔고 우리는 안 살았기 때문에 못 거친 것을 주님의 기억 안에 담긴 게 뭐냐를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면서 그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됩니다. 해답은 끝났어요. 다 이루었다. 네가 무슨 욕을 먹고 뭘 당해도 다 이룬 거예요.

그래서 어제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 2절 본문에 보면 나와요. 네가 하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디모데후서 4장에 이런 말씀 나와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이 거쳤던 이 지옥세계에서 네가 어떠한 모욕과 수모를 감수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걸 감수해야 돼요. 너 죽고 나 살자, 이래 나오지 마시고 하여튼 죽은 인간이 별짓을 다하고 있군, 이렇게 생각해야 된다고요.

타인을 죽은 자로 본다면 더 이상 우리가 타인에게 주눅들 일은 없습니다. “딩동, 계십니까? 가스검침 왔습니다.” 가스검침은 산 사람이 오지 말고 죽은 귀신이 가스검침 왔다고 보면 돼요. 죽은 자가 이 동네를 설치고, 죽은 자가 US오픈 마지막 라운드 치고, 모든 게 죽은 자들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죽은 자들의 대통령하고 있고, 죽은 자들이 오염수 태평양에 방류하고 있고. 모든 것이 죽은 자들이 서울~양평 고속도로 취소시키고 있고요.

그것 때문에 흥분하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들의 게임 판에 놀아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그걸 겪게 하는 거예요. 이거는 내가 얼마나 고생 더 했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가를 보게 합니다. 아아, 참 주님께서 심각하게 고생하셨구나, 발견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걸 할 수밖에 없는데요. 여기 18절에 보면,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니까 고라 자손은 자기반성에 나서요.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게 있을 거야. 욥의 친구들처럼. 잘못한 게 있는데 아무리 해도 내 잘못과 지금 주어진 우리의 삶의 환경과 이게 매치가 안 돼요. 남들은 회개하라고 반성하라고 닦달 내는데 반성하고 회개할 게 있어야지요. 내가 아는 방식은 아니에요.

여기서 뭔가 해답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해답을 지금 제시해드리겠습니다.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환경이 달라서 그래요. 주님이 계신 나라 천국하고 우리가 사는 지옥의 환경이 달라서 그래요. 지옥에는 선악체계에요. 끝까지 선악체계를 고집한 자가 악마거든요. 악마는 선악체계에 의해서 벌 받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선악체계 완성자가 주님입니다. 주님이 선악체계 완성자거든요.

그런데 악마와 그 속한 인간들은 선악체계로 완전하지 못했어요. 주께서 지옥에 대해서 소개한 대목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지금 난해한 게 남아있어서 그래요. 지옥이 나오는 데요 마태복음 5장 25절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그다음에 뭡니까? 26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옥, 나오지 못한다, 이 둘을 합하면 지옥 돼요.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 17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돼 있거든요. 그러면 인간의 입장이나 악마 입장이나 하나님 보기에는 완전하게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다 지옥 갑니다.

참 우리 자신을 알아야 되는 데요. 우리 자신을 이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합시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은 이미 죽은 것으로 확정 났다. 이게 바로 나에요. 나는 이미 죽은 것으로 확정 났어요. 죄 값으로 이미 죽은 것으로 확정 났다고요. 살려고 한다는 자체가 이거는 터무니없어요.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에 살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요. 자신의 말씀 성취를 다 드러내는 그 날이 온다는 거예요. 뭘 했고, 뭘 했고, 뭘 했고 이것을 온전히 공개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6장 39절, 40절에 나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인데 아버지의 뜻은 내가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려내려 함이라, 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교회에서 서로서로 보잖아요. 네가 택한 백성이야, 아니면 내가 택한 백성이야? 당신은 아닌 것 같은데, 하잖아요. 그러나 그런 것은 인간은 몰라요.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그 뒤의 말씀이 뭐냐? 마지막 날에 주님이 다 살려내요. 하자 없이 오류 없이 빠짐없이 다 살려낸다고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는 것이 내 일이 되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이게 내가 구원받는 것이 철저하게 처음과 중간과 끝도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마지막 날에 본인이 한 마무리 된 모든 성과를 주께서 놓치지 않고 다 끄집어내는 겁니다. 같은 이야기가 히브리서 9장에 나오지요. 사람에게 죽는 것은 이미 확정된 것이고(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뭐 과격하니, 너무 단호하니, 이상하니 이렇게 하는데 히브리서 9장 이야기잖아요. 이미 사람이 죽는 것은 결정 난 것이고 그다음에 그 이후에는 뭐가 있으리니?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주가 누굽니까? 인간이 관여됩니까? “판사님, 이야기할 것 있습니다.” 그런 말을 피고가 말할 게 없어요.

피고는요 주께서 창세전에 정한대로 집어서 구원받기 때문에, “저 할 말 있는데요. 제가 이런 일을 했습니다.” 자꾸 그 입 다물라. 왜? 우리는 망해야 마땅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주께서 이미 심판이 있으리니,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마지막 때에 재림 날에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오신다는 거예요. 주님으로 시작한 자기 성과를 자기가 건져가겠다는 거예요. 자기 업적을, 자기 과제물을.

드라마 보면 그런 게 가끔 나오는데 실제 사회에서 그런 게 있어요. 위에 높은 상사가 어떤 과제를 줍니다. “이번 바이어 오는데 프레젠테이션, 네가 설명을 해서 바이어 마음에 들도록 해서 이번 구매 따네. 구매자의 마음에 흡족하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성과 내는 거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자 대리가 그냥 버티는 식으로 능력도 없으면서 지 어려운 살림살이 챙기기 위해서 그냥 회사에서 갑질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할 줄도 능력도 없으면서.

그런데 새로운 신입사원이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지한테 시켰는데 신입이한테 다 시키는 거예요. 지가 엄마 아프다고 가버리고 신입이 밤새도록 해서 다 했어요. 그다음 날 프레젠테이션 설명회 하는데 지가 마치 한 것처럼 설명해서 사장님도 흡족해서, 저 과 능력 있다고 했을 때에 드라마니까 그렇고 실제로도 그런 일 많아요.

그런데 “김 대리 네가 했어, 아니면 신입사원이 했어?”라고 물을 때 제가 했지요, 라고 나올 때 그 신입이 사실은 회장님 아들이라. 바닥부터 직장생활이 어떤가를 재벌 상속자가 바닥부터 생활하는 거예요. 그분이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에요. 드라마에서 예수님 찾아내야 돼.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님은 우리의 궤휼을 아시고 우리가 어떤 존재고 어떤 성질이고 어떤 인간인지를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거예요. 주께서 모르는 게 없기 때문에 나보고 기도하라 하신 거예요. 네 애로사항 다 겪었다는 겁니다. 주님은 이거는 모를 거야, 그런 게 없다는 거예요. 왜? 겪었으니까 바닥부터 했으니까. 사람의 종으로 시작해서 죽기까지 종으로 해서 나중에 만유의 주가 되셨잖아요. 빌립보서 2장에.

드라마도 그런 드라마 없지요. 상속자가 말단 사원이 된 거예요.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주님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아무도 가지 않는. 인간은 말단에서 대리되면 성공했다고 치지요. 주님의 성공은 뭐냐? 아무도 가지 않은 십자가에 죽은 것이 주님의 방향이었어요. 주의 하신 일입니다. 가다보면 스쳐지나가요. 내 가는 쪽은 이쪽이고 주님 가는 곳은 저쪽이고. 저 사람은 왜 저기 가지? 이상하게 의아해하죠. 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길로 가지? 왜 죽는 길로 가지?

지금 고라 자손의 질문이 그거에요. 바르게. 바르게. 바르게 매일같이 바르게 언약을 지키고, 말씀 지키고. 그런데 주어진 상황은 엉망진창, 주여 왜 그렇습니까? 외부에 있던 주의 이름이 어디로 왔습니까? 내부로 왔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이 정도까지 아셨으니까 어려워도 여러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시 44편, 44편 3절을 다시 봅시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해서 여기 5절에 보면,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그다음에 무엇으로 밟으리라 돼 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돼 있지요. 이게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출애굽기 15장은 난리도 아니었지요. 홍해 건너고 보니까 홍해 바다 근처에 뭐가 떠내려 왔습니까? 애굽 군사들의 갑옷과 수레가 떠내려 온 거예요. 그걸 쳐다보고 미리암이 모세 누나가 가만있을 수 없었어요. 너무 좋아서 찬양을 시작한 거예요. 그 찬양 가사가 바로 이 가사와 똑같아요.

주의 오른손의 능력으로 주께서 친히 용사가 되사 우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된 거예요. 방금 뭘 지켜줬다고요? 우리. 누가요? 주의 이름이. 그 방식은? 오른손의 능력으로. 이때 우리, 주의 이름, 오른손의 능력은 출애굽기 15장의 상황에서 기껏 인간들이 아는 한계는 여기 우리가 그 당시 이스라엘로 볼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마지막에 말씀이 육신이 될 때까지 어떤 경로가 있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경로가 주변을 뚫고 지나온 거예요. 뚫고 지나올 때 여기 뚫리는 자들이 누구라 했습니까? 주변에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이스라엘이 아닌 흔히 있는 역사적인 인간의 보통 열방들이죠. 이방나라죠. 그냥 세상들이죠. 세상에서 히브리인들이 뚫고 올 때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 될 때 그 이스라엘이 히브리 자기 나라인 줄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의 이름이 도와줬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잘못이었어요. 이게 나중에 말씀이 육신이 될 때 왜 잘못인지 아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주님이 아니에요. 주님은 주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그냥 채택한 거예요.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지 사나 죽으나 우리의 것이 아니에요. 방금 이 이야기 들으면 목사님 그렇게 흥분할 필요 없고 다 아는 이야기인데 뭐 흥밋거리입니까. 하나도 어렵지 않고 쉬운데요, 이렇게 하지요. 이게 쉬운 이야기 아니에요. 얼른 들으면 쉽게 들리지만 쉬운 이야기 아닙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나무가 있지요. 나무 둥치를 자르면 이게 있지요. 이걸 나이가 드는 테, 나이테가 있지요. 나이테 제일 바깥이 뭡니까? 이걸 표피라 해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세요. 이 나이테 특징이 나와 너와 이게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처음에 나무 심을 때 이래 왔지요. 그러면 나이테를 해보면 봄, 여름, 가을, 겨울 해서 견고한 재질과 약한 재질에 따라서 틀어져서 테가 생기잖아요.

표피는 어떻게 됩니까? 표피는 외부로 자꾸 밀려나가죠. 나가 있고 네가 있는 게 아니고 같이 나와 너 구분이 안 되고 나라고 여긴 곳에 타자, 너라고 하는 주님이 들어와 버리면 나는 바깥에서 계속 밀리고 내 안에 부풀어져요. 처음에 할 때는 나, 너가 있어요. 이스라엘에는. 이스라엘은 나고 하나님은 너가 되셔서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오해였던 겁니다. 주의 이름이 바깥에서 도와준다는 거예요. 아까 했지요.

바깥에 있는 것이 안으로 들어온다고요. 주의 오른손의 능력이 살아 있는 우리를 도와준 게 오른손의 능력이라 본 거죠.
그러나 주님이 되면 능력이 뭐냐 하면 마귀와 죽음과, 마귀나 사탄과 죄와 율법에서 우리를 끄집어내는 능력이 주의 능력이에요. 이것은 나, 너를 붕괴시키는 능력이에요. 나, 너 따로 있다는 것에서부터 끄집어내주는 능력이 오른손의 능력이고 주의 능력입니다. 하나 됨을 너는 왜 자꾸 주님을 너와 나 둘로 나누느냐 이 말입니다.

주님은 창세전부터 하나였는데 너는 왜 자꾸 주님이 날 도와준다고 나를 왜 자꾸 그걸 지키려고 하느냐 이 말이죠. 하나인데.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아버지와 나와 하나인 것처럼 너희들도 나와 하나가 된다. 아가서에 나오잖아요. 솔로몬의 아가서. 처음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다가갈 때 술람미 여인이 자꾸 오해하는 거예요.

“너는 내 스타일 아니라고. 나 당신 안 좋아해. 왜 자꾸 오는 거야. 나, 흑인 여자야. 볼품없어. 오빠 농장에서 일했거든요. 오빠 농장에서 일해서 햇빛에 얼굴 시커매. 당신은 왕이잖아. 신분 차이가 나는데 너, 나 갖고 놀라고 했지? 당신과 나 어떤 사이인데 왜 자꾸 다가오는 거야.”

처음에는 술람미 여인이 기피했어요. 그런데 솔로몬은, “내가 너한테 다가가고 싶어 다가가는 게 아니야. 네 속에 나 있다.” 네 속에 나 있다,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다, 정말. “네 속에 나 있다. 나는 나를 찾아가는 거야. 너 찾아가는 게 아니야. 너는 표피야.” 네 안에 들어온 나를 찾고 싶은 거예요. 그게 뭘 이겼다? 아가서 8장에 죽음을 이긴 뭐다? 사랑. 사랑은 율법을 이겨요.

율법을 줌으로써 우리 형편이 네가 처한 형편이 율법에 갇혔다는 거예요. 죄에 갇혀있는 거예요. 저주에 갇혀있는 거예요. 율법 줘가면서 사랑이 율법보다 세다는 것을 계속해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그냥 찾아다니는 거예요. 놓치지 않아요. 세상에 스토커도 그런 스토커는 없습니다. 집안에 옷 벗고 있는데 찾아가요. 그러니까 여자가 말하기를, 옷 벗었으니까 오지 말라 하는 기라.

그런데 솔로몬은 그렇게 네가 문을 못 열어준다면 이거나 먹어라 해서 몰약을 줘요. 사람이 아프고 늙어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좀 예쁘다, 낫다 하지만 주님 십자가와 비교해보세요.

우린 십자가 생각 없습니다. 숯검정처럼 다 떼고 싶어요. 복음이고 십자가 복음 다 떼고 싶어요. 나는 나이고 싶어. 남한테 멀쩡한 내가 되고 싶어. 이거 병든 거예요. 병든 자에게 뭐가 필요하지요? 의사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의사가 갑질을 안 해. 전혀 우릴 고칠 그런 믿음이 안 가요. 그 정도로 우리는 독하게 선악체제에 갇혀있습니다. 마귀에 갇혀있어요. 그런데 주께서 찾아오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그러나 이제는’ 내게 문제 있음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 왜 주님께서 저를 떠나지 않는 겁니까? 십자가 다 이루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걸 이룬 게 아니고 주께서 이루고 싶은 것을 나를 재질로 사용해서 죄인으로 사용해서 주의 다 이루심이 얼마나 놀라운 작품이 되는가를 주께선 우리를 자기의 신부로 맞이해서 혼인잔치까지 끌고 가십니다.

그래서 시편 44편에 26절,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그다음에 뭡니까? “우리를 구원하소서” 처음에는 주의 이름으로 하다가 마지막에 주의 이름이 우리에게 결국 제시될 건 뭐냐? 주님의 사랑, 끈질긴 사랑, 그 사랑이 아가서 8장의 말씀처럼 죽음보다 더 센 사랑, 더 이상 우리가 죽음에 기죽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과의 차이가 뭔지를 보이게 하옵소서. 우리가 보이는 게 아니고 우리 안의 주께서 늘 보여주면서 우리의 지나온 주님의 과거가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다 이루었다 십자가의 복음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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