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0721a 고린도후서4장 11절(몸과 유령)-이 근호 목사
p.251 중간에 보면 개혁주의적 성경신학자들의 성경해석에 대한 문제점을 언급했습니다. p.251 위에서 7번째 줄에 보면【그 역사관은 최종 묵시성취에 있어 인간들의 이러한 애씀이 죄악된 것으로 가담된 채 이루어짐을 알지 못하고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 애쓴 그것을 성경 자체가 죄로 규정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성경에 덤벼든다 이 말입니다.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문제점이. 여기 이 논문발표가 개혁주의 성경모임에서 했거든요. 이거 보니까 그들이 화를 낼 만하네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자기 구원됨’(나 구원받았음), ‘나도 예수를 증거하는 증인 맞다’를 우기면서 증빙 자료를 외부에 알리는 주체의 본성적 특징을 감안하지 않고서는 십자가 사건이 언약적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언약과 주체 문제를 연결하지 아니하기에 복음에서 송출되는 ‘죽은 분’의 시간 잠식 능력을, 그들은 아직 살아있는 몸을 가진 자신의 몸을 규정하는 용도로 시간을 설정했고, 그 시간 위에 ‘하나님 나라’를 실으려고 한 것이다.】
문장이 굉장히 어려운데요. 여기서 뭐를 봐야 하느냐 하면 ‘죽은 분의 시간 잠식 능력’이라 하는 거요. 죽은 분의 시간 잠식 능력. 예수님이죠. 예수님께서 인간의 시간을 잠식한다. 또는 갉아먹는다. 없애버린다. 그러한 능력이 죽은 분에게 있단 말이죠.
없앤다. 누가? 주님이 없앤다. 뭐를 없애느냐? 모든 있는 것을 없애는 분, 없이하시는 분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예수님을 볼 때 자기가 여기 있음을 계속 있음으로 이어보려고 누구의 힘을 찾고자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라는 분의 힘에 부탁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할 때 무엇을 도와달라고 하는 것인가 하면, 구원받게 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죠. Help me잖아요. 나를 살려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주님의 일은 살려주는 게 아니고 반대로 죽여주시죠. 그러니까 이건 개혁주의 신학하고 맞질 않는 거예요.
특히 여기 p.251 위에서 4번째 줄에,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Nicolaas Ridderbos, 1909-2007 네덜란드 신학자)를 제가 의도적으로 언급했어요. 한국의 신학생들이 다 리델보스의 책을 보고 있으니까요. 리델보스 이 사람이 성경을 해석하는 걸 보면 예수님께 부탁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준다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구원받게 해 달라’ 이것을 죄로 규정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게 왜 죄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취지와 정반대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은 이 땅을 이용해서 이 세상을 이용해서 죽으러 오셨는데 메시아를 고대하는 인간들은, 특히 예수님 제자들도 그렇죠, 예수님 만나서 자기가 힘들 게 사는 인생 형편 한번 낫게 해보자, 멀쩡하게 한번 살아보자는 식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하소연과 호소를 하고 있단 말이죠. 그 해석이.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항상 이게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어야 해요. [아니야! 그게 아니야!] 아니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거 아니야!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이게 깔려있어요.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아니야 그거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를 예수님이 극단적으로 밀어붙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인간들의 무지함이 나타나요. ‘아니야, 그게 아니야’라고 하니까 인간들은 ‘뭐가 아닌데요?’ 이래요. 이게 인간들의 무지함이에요.
주님께서 ‘아니야’라고 하면 ‘아, 내가 아니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는데 ‘내가 어떤 시도를 하고 어떤 기대를 하고 어떤 희망을 갖는다 할지라도 나는 이미 아니야.’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는데, ‘뭐가 아닌데요?’. 주님이 아니라 하는 것을 내가 앎으로써 그걸 통해서 내가 구원받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하는 아이디어를 또 포기 못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정리할 것도 없어요. 굉장히 간단해요. [예수님은 ‘내가 있다’ 하는 이것을 없애버리려 하신다.] ‘인간 내가 있다’ 이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인간은 없다’가 돼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없애는 이유, 인간은 없는 이유가 있어요. 인간은 어느새 ‘내가 있다’가 돼요. ‘내가 있다’로 행세하는데 창세기 6장에 보면 이걸 육체라 합니다. 육체 (창 6:3). he also is flesh. he is mortal. 인간은 처음에 흙이었죠. 흙이었다 하는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창 3:19) By the sweat of your face You shall eat bread, Till you return to the ground, Because from it you were taken; For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shall return.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중간에 또 슬슬 바람을 넣는 악마가 인간 속에 개입을 했죠. 인간과 단짝이 되었으니까 개입하는 거예요. 악마가 개입해서, 흙이 계속 흙으로 살면 되는데 ‘누굴 낳고 죽었더라’ 이러면 되는데 갑자기 이게 육체가 되어버린 거예요. 인간이 육체로 행세하는 겁니다. 육체란 표현은 하나님 쪽에서 했지만 사실은 육체가 아니고 그들은 자기가 인간 또는 사람으로 행세하는 겁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벨은 자기를 대신해서 양을 바쳤어요. 자기를 대신해서 양을 바쳤습니다. 아벨은 자기가 흙인 것을 알죠. ‘내 자신은 이 정도밖에 안 됩니다’를 자기를 대체하는 양이 가차 없이 하나님 앞에 죽을 때, 하나님이 양을 잡아 죽일 때, ‘그 양의 모습이 바로 현재 내 모습입니다’ 이렇게 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가인은 자기 농사짓는 것을 갖다 바쳤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그걸 안 받는 이유를 창세기 4장에서는 안 나타내요. 그냥 ‘농사지은 건데 하나님 쪽에서 안 받았다. 아벨의 양은 받았다. 아벨 제사는 받고 가인은 받지 않았다.’ 이걸로 딱 되는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벨을 받은 이유가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에 받았다는 거예요. 믿음으로.
아벨이 여기 있는데 하나님 계시잖아요. 하나님 계실 때 아벨의 믿음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계시면, 나 같은 것은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존재하신다.’를 드러내기 위해선 내가 같이 있어버리면 안돼요. 나는 없어져야 ‘하나님만이 계시다’가 확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드러나는 방법은 뭐냐? 자기 죽음으로 합세하는 방법밖에 없죠. 그게 자기의 인생이라고 보는 겁니다. 합류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합류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 앞에서 ‘나는 절대로 살아있는 존재가 아닙니다’를 고백하고 표현하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 굉장히 쉬워요. 이것은 쉽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렇게 되어 가요, 모든 일들이.
감자요리에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감자요리 중 제일 맛있는 게 맥도날드 가면 감자튀김이 있고 또는 감자찜 해먹고 또 감자에 멸치 국물내서 감자조림해서 먹고. 감자요리가 다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감자를 위함입니까? 감자를 위함이 아니고 먹는 사람을 위함이죠.
똑같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물로 죽이고 제자한테 얻어맞아 죽이고 제자 학부모한테 욕 얻어먹었다고 자살해서 죽고. 오송 지하도가다 죽이고 음주운전 차에 받쳐 죽고 갑자기 병들어 죽고.
튀김 해먹고 조림 해먹고 하듯이 인간이 갈 길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흙이 되어야 돼요. 나중에 흙 되는 건 소용없어요. 앞에 뭐라고 했어요? 너는 뭐다? 너는 흙이니 흙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뭐가 잘못됐어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는데 그게 뭐 하나님께 큰 하자 있습니까? 문제 있어요? 흙이니 주께선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뭐하느냐? 에어컨 필터나 청소하면 되죠. 필터 청소하나 안 하나 청소하는 그 순간도 어디로 가고 있어요? 흙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흙으로.
도대체 우리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큰 착각을 하고 있어요. 죽기 위해서 태어나서 죽는 게 그것도 하나님 책임입니까? 아니죠. 죽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 그건 내가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인간이 마귀에 속해가지고 도대체 자기 자신이 육체가 되니까 인간이나 사람인 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범을 보여줬습니다. 예수님이 뭐로 오셨습니까? 육체로 오셨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버림받은 이유는 단 한가지에요. 육체, 죄의 몸이 되셨기 때문에 저주받는 겁니다.
그런데 죄의 몸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갖고 있는 게 죄의 몸이 아니고 동일한 몸을 우리도 갖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죄의 몸 때문에 아버지께 저주받는다면 동일한 아담의 몸을 갖고 있는 우리는 뻔하죠. 깊이 생각할 것도 없어요.
주님이 먼저 저주받는 몸이라는 것을 알려줬으면 우리도 그걸 보고, 아, 내가 저주받는 몸을 갖고 있으니까 그럼 주의 뜻에 의하면 우리 육체로 인하여 저주 받잖아요. 그러면 저주받으면 되는 거예요. 이것도 쉽죠? 지금 제가 쉬운 이야기만 한 거예요. 쉬운 이야기만.
그런데 주님께서 이 쉬운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거기에 대해서 막 반발이 일어나는 거예요, 반발이. 그래서 주님께서 ‘아니야! 그거 아니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뭐가 아닌데요? 몰라. 뭐가 아닌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고 그다음 이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이 땅에서 사라졌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또 오해하느냐 하면, 맨날 오해밖에 안해요 하여튼,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도로 갔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잠시’ 다녀갔다, 이렇게 생각해요. 잠시 다녀갔다.
그게 그들의 엄청난 오해입니다. 어떤 점에서 오해냐 하면… 이게 마태복음 가게 되면 잠시 다녀간 게 아니에요. [어디든지 계시지만 어디에도 없다]가 돼요. 어디에도 다 계시는데 어디에도 없어요. 이 문장에서 동일한 것과 다른 게 있어요. 동일한 것은 ‘어디에도’, ‘어디든지’ 이건 같은 뜻이에요. 그런데 ‘계시다’는 것은 있음이고 ‘없다’는 것은 없음이죠.
동일한 공간인데 동일한 공간이 서로 다른 공간이 돼서 겹쳐져버린 겁니다. 한쪽 공간을 공간1, 다른 쪽 공간을 공간2라 본다면, 공간1은 주님이 어디든지 계시는 공간. 공간2는 어디에도 주님이 없는 공간. 예수님이 다녀감으로 말미암아 이 두 공간이 합체돼서 현재 하나의 공간이 되었어요. 하나의 공간이 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합체된) 하나의 공간을 감당할 수 있지만 인간은 두 개의 공간에 동시에 자기 존재가 기거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어요, 인간은. 이제부터 차츰 차츰 어려워집니다. 이건 어려운 축에도 안 들어가요. 이제 진짜 어려운 게 들어갑니다.
‘있다/ 없다’가 되잖아요. 인간은 하나의 공간만 점유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우리한테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인간은 공간1과 공간2 가운데 어느 쪽을 받아들입니까? ‘주님은 어디에도 계시다’는 공간(공간1)을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은 여기 없다’의 공간(공간2)을 받아들여요. 주님은 여기 없다.
주님이 떠나갔으니까 여기엔 없고 내가 사는 곳에는 ‘주님이 없음’이 돼요. 내가 사는 곳에는. 그럼 주님은 어디 있냐? ‘주님은 다른 나라, 천국에 가서 사신다’가 돼요. 지금 이 논리에 있어서 여러분들은 눈치 챘겠지만 ‘있다/없다’ 개념이 내가 ‘살아있다’ 그다음 반대말은 내가 ‘죽었다’가 되겠죠.
내가 죽으면 예수님 공간에 합류하겠지만 현재 이 공간은 내가 아직 안 죽었으니까 살아있는 공간에는 주님이 없는 게 돼요. 주님이 안 계신 게 돼요. 그래서 인간이 하나의 공간을 추구한다는 것은 조건이 있었어요.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조건 하에 나는 여기 이 공간에 머물겠다. 내가 살아있는 공간.
만약에 내가 살아있는 이 공간에 죽은 자가 나타난다면 이건 바로 ‘유령’이 되겠죠. 유령이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유령이라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어요. 예수님께서 밤에 물 위를 걸어올 때 제자들이 “유령이다!”. 다른 말로 풀이하면, 나는 실체가 있는데 저쪽은 실체가 없다.
그걸 좀더 풀이하게 되면, 실체인 나는 물 위를 못 걷는데 수증기 같이 실체가 없기에 물 위를 걸을 수 있잖아. 빠른 시간 내에 인간은 그걸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가는 것이 살아있음의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나와 맞지 아니하면 유령 내지는 귀신으로 보는 거예요. 누가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빈 무덤에 있던 천사도 그런 이야기했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산 자를 왜 죽은 자에게서 찾느냐] 했어요. 마태복음 8장 한번 봅시다. 다 아시는 이야기이지만 어디와 매치되느냐에 따라서 또 의미가 달라질 수 있어요. 마태복음 8장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인간이 있는 공간에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인간 본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는 지금 안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직도 살아있다고 본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도 마찬가지에요. 아직 살아있다고 본 거예요. 죽은 사람은 아버지가 죽었지, 자기는 아직 안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서 장례 치러야 되니까 장례 치르고 난 뒤에 예수님 따라가겠습니다, 한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은 제자들 보기에 자기가 살아있는 방식으로 예수님도 살아있다고 같이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불쑥 뭐냐 하면,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너희 아버지 죽은 것은 당연히 죽은 거고 그걸 장례 치르는 인간들도 내가 보기엔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로 보는 겁니다.
그럼 누가 살았어요? 다들 죽어있는 세상 같으면 누가 살았어요? 예수님은 살아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유령 같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유령은 유령 자기 동네에 살지, 사람들이 살아있는 이 동네에 왜 유령이 나타나느냐 하는 거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어디에도 없다 하는 것은 평소에도 늘 그런 말씀하셨어요. “아무도 나를 찾을 수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도 나오는 말씀이에요. [아무도 나를 찾을 수가 없다].
아무도 나를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은, 나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 이유는요? 너희들이 다 같이 죽은 공간에 있기 때문에. 죽은 공간에.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말은 예수님‘만’ 살아있어야 돼요. 나머지는 죽은 자이어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만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냥 육에 속하기 때문에 당연히 죽은 거예요. 흙이에요. 흙으로 돌아가야 돼요. 이건 어렵지 않아요. 이건 마땅한 겁니다. 뭐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돼요. 죽었다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안돼요. 죽은 자란 말이죠.
죽은 자가 예수님을 찾을 수 없는 이유가, 이 사람들이 왜 죽었냐 하면 보통 죄 때문에 죽었다 하잖아요. 그런데 더 명확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요. ‘죄 때문에 죽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내가 죄를 많이 지었구나’ 이렇게 오해하기 때문에 죄 때문에 죽었다는 말 대신 더 명확히 해서 ‘죽음의 힘에 갇혀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죽음의 힘에 갇혀있단 말이죠. 인간은 죽음의 힘을 못 이겨요. 이미 선악과 따먹을 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정녕 죽으리라 했으면 그 힘을 우리가 무시하면 안돼요. 에이, 괜한 소리 한다. 괜한 소리가 아니고 그 자체가 현실이에요. 다른 현실을 생각하면 안돼요.
우리가 그럼 열심히 운동하는 건 뭐냐? 하나의 죽어가는 모습이죠. 요새 매일우유 자주 이야기하는데 [매일의 삶은 죽음의 연속]이에요.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그냥 제자리 뛰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죽음으로 가는 죽음의 연속이 매일의 삶이에요.
하루치 살 때마다 그만큼 팍삭까지는 아니지만 조금씩 조금씩 삵아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냉장고에 음식 담으면 ‘아이고, 싱싱하다’ 하지만 한 달 두게 되면 역시 먹기에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노인네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침에 샤워하고 또 뭐 인터넷 보면 노인들 귓속까지 씻어야 냄새 안 난다고 아무리 씻고 해도…… 우리교회 장로님은 십년 전부터 향수를 몸에 갖다 부어요. 부인되시는 권사님이 얼마나 챙겨주시는지 몰라요. 본인은 본인을 모르는 거예요. 저도 이제 거기에 진입했습니다. 제 아내가 집중 관리해요.
이건 누구 잘못이 아니고 버림받은 육신에서 자동적으로 죽음의 냄새가 피어나는 겁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한다. 죽은 자들은 아무도 산 자를 찾을 수 없어요. 어떤 누구도.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이해가 되실 거예요. 차이점을 제가 조금씩 만들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죄 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죽음의 힘에 갇혀있다는 거예요. 그럼 죄는 뭐냐? 조금씩 차이점을 만들어가니까 여기서 자꾸 응용문제가 계속 나와요, 논리가. 죽음의 힘에 갇혀 있을 때 죄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살고 싶어하는 게 다 죄죠. 자기 분수를 모르는 거예요.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럼 산다는 것이 뭐냐? 산다는 것은 자기가 포기되지 않는 것.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럼 왜 자기가 포기되지 않는가? 착각을 한 거예요. 내가 죽음에 갇혀있다는 것을 도저히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못 받아들이고 멀쩡하게 내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살아있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현재 나를 살아있다고 인식, 알게 하는 것을 인식이라 합니다, 나를 인식하는 이 공간을 못 벗어나는 게 바로 주님께서 규정한 죽음, 죽었다 보는 거예요. 죽음의 세계에 갇혀 있으니까 그걸 죽은 자라고 보는 거예요. 주님은 공간으로 보는 거예요. 공간으로.
너희 아버지가 남보다 죄 많이 지어서 죽었다, 이게 아니고 너희 아버지가 남보다 더 나쁜 짓해서 죽었다는 게 아니고 너희 아버지가 생각하는 그 공간 자체가 죽음을 생산하는, 죽음을 발생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네 아버지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너는 누구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은 하나의 공간 그 자체에 대해서 포기하고 나오라는 이야기에요. 너 자신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살던 공간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레위기 7장 1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찌니” 화목제물에 관한 겁니다. 7장 16절부터 보게 되면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찌니” 18절,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제사를 지냈다. 그럼 제사를 지냈으면 그걸로 끝이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화목제물의 제사가 아직 안 끝났어요. 그 희생의 고기를 삼일까지만 먹고 그다음에 먹지 않아야 제사가 마감됩니다. 종결됩니다.
만나는 뭡니까? 만나는 몇 일분이에요? 딱 하루분이죠. 내일 만나를 미리 저축하면 안되죠. 저축이나 저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장한다, 저축한다는 말은 그 의미가 무슨 뜻이냐 하면 ‘오늘 내가 만나먹고 살았다’는 거예요. 이런 게 참 어려워요.
‘나는 이 광야에서 이 사막에서 만나먹고 살았다.’ 이 의식 자체가 이게 잘못된 거예요. [만나가 죽을 죄인과 결합되어 하루치의 만나가 살아있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만나가 살아있는 거예요. 말씀이 살아있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왜 그러느냐 하면 주님께는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인데 특별혜택을 주는 거예요. 만나와 결합하면 하루치는 살려줄게. 주님께서는 지금 배려를 해주시는 거예요, 배려를. 만나. 말씀 살리는 게 목적이지, 우리 살리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말씀만 살아나면 끝이에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요한복음 5장 28절,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어떤 인간도 예수님이 키워놓은 그 무덤 안에서 벗어날 자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이제 네 무덤은 없다는 거예요. 전부 다 누구 무덤인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죽으신 예수님의 무덤에 모든 인간이 다 있는 겁니다. 주님의 자기 무덤으로 인간세계를 가둬놓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 말인지……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기이히 여길 말씀을 해놓고 기이히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것은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을 이용하든 부처님을 이용하든 하나님을 이용하든 내가 살게 해주면 좋은, 착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주님의 관심은 처음이고 끝이고 산 분은, 살았다고 할 분은, 생명이라고 하는 분은 예수님만 생명이에요. 우리는 생명이 아니어야 돼요. 우리가 생명 되면 안돼요. 우리가 생명을 소지해서도 안돼요. 내가 생명 소지해서 내가 생명 되면 안돼요. 오롯이 주님만 생명이어야 해요.
생명나무는 우리어야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만 생명나무 되어야 돼요. 주님은 우리를 그냥 이용할 뿐이지. 여전히 우리는 생명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이유만 있고 살 이유는 없어요. 살 이유를 우리 스스로의 행동이나 선택과 결정에서 찾지 마세요. 그런 건 없습니다.
이제 진짜 어려운 거 들어갑니다. 어렵다 해놓고 들어보면 뭐 어렵지도 않고, 또 어렵다 해놓고 어렵지 않고……. 그게 뭐냐 하면 ‘누락’입니다. 누락.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떠났습니다. 공간2라 했죠. 공간2의 특징은 인간들이 현재 살아있다고 여기는 그 공간. 공간2.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주님께서 여기에 왔다가 사라졌다. 따라서 예수님 왔다가 사라진다고 해서 숫자 하나 줄었을 뿐이지, 공간2는 멀쩡하다고 생각하겠죠. 멀쩡하게. 이 공간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주님께서 공간1, 주께서 계시는 공간이 같이 합체되어버리면 같이 중첩되어버리면 공간2의 인간들은 뭔가 빠졌어요. 뭔가. 뭔가 빠져버린 상태. 뭔가 빠져버린 겁니다. 뭐를 빠트렸는지 모르겠는데 뭔가 빠졌어요.
이 빠졌다는 말을 hole, 구멍이라 보는데 하나님께서 이 구멍을 드러내고 살리기 위해서 모든 인간을, 인간이라 합시다, 인간도 아니지만, 모든 육체를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자비의 그릇, 하나는 진노의 그릇. 그릇의 모양을 한번 보세요. 그릇의 모양은 안이 텅 비어있음을 의미합니다. 텅 비어있음.
그래서 죽음에 있는, 공간2에서 살고 내가 살았다고 여기는 자에게 공간1이 공간2에 침투해서 온다면 나는 나로 인하여 꽉 차있다는 이것을 누락시키고 빠트리게 만들어요. 긁어내든지 하는데. [내 안에서 내 것을 철수 또는 철거하는 작업]으로 성령이 오시게 돼요.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공간1과 공간2가 같이 합체를 하는 거예요. 합체를 해버리면 내 안에 내 것으로 있던 것을 철거해 가죠. 철수하는 겁니다. 철거하고 철수하는데 그냥 내가 했던 노력과 그런 것만 철수하느냐? 아닙니다. 더 철거해버려요.
바로 나의 ‘있음’까지 없애버립니다. 목사님, 이걸 죽음이라 하지 않습니까? 나의 죽음도 철거해버려요. 나의 죽음도. 자칫해서 나의 죽음 이거 철거 안 되면 자기부인에 대한 개념이 ‘나는 다 비우고 비웠습니다’ 해서 비워놓은 어떤 바탕, 껍데기는 뭐 있는 것처럼 되는데 주께서는 그것도 다 없애버려요. 그것도 없애버린다고요. 가져가버려요.
이러한 하나님의 철거에 대해서 그걸 느꼈던 자가 있어요. 영적 존재가 있어요. 예수님 열두 제자 가운데 영적 존재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 바로 가룟 유다밖에 없었어요. 가룟 유다가 스승인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뭘 노린다는 것을 눈치 챈 거예요. ‘내가 주님께 모든 걸 바치고 드렸습니다.’ 아니, 그걸로 멈추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는.
주께서 끝까지 거덜내는 게 있어요. 내 존재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쳐들어오시는 이유는 바로 아까 제사법, 레위기 7장 나오죠, 제사법에 준한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제사법에 준해서 일관돼요, 이것은. 중간에 뭐 아이디어 꺼내고 이런 거 없어요. 애초부터 율법줄 때부터 있던 원래 계획 그대로 실천할 뿐이에요.
이 전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방금 내 존재 자체를 없앤다는 이 말을 크게 쓰겠습니다. [나의 고유의 것을 없앤다.] 나의 고유의 것, 나 너를 구분할 수 있는, 이것은 네 거고 이것은 내 것이라는 마지막 남은 내 것, 너는 너 존재고 나는 내 존재라 하는 그 존재마저 거둬 가버리면 네 것과 내 것이 없어지겠죠. 나의 고유한 것을 없애버리죠. 나의 고유한 것이 없는 상태가 두 자로 ‘유령’이에요. 유령. 자기 고유한 것이 없어요.
성경 구약에서는 이 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지금 유령 이것은 신약적 개념이고요. 신약에서 말하는 개념이고.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 대표적 유령 아닙니까. 스데반 집사가 대표적인 유령이잖아요. 돌에 맞아죽으면서도 자기 것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죠. 스데반 집사는 자기 고유의 것이 없어요. 자기 몸은 없고 다 주님의 몸이에요. 여기 p.251에【날마다 우리는 죽은 몸으로 변모시키는 묵시적 완성도로서의 성령의 능력】밑에서 10번째 줄에도 나오죠.
구약 잠시 한번 돌아보겠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가 기거할 자리, 땅 마련이에요. 내 자리를 마련하고 땅을 마련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산다는 특징이 이거에요. 인간이 21세기에 산다는 것은 내 거처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사는 겁니다. 내 땅이 있는 거예요. 특히 구약에서 땅이 있는 것, 자리가 있는 이것을 생명, 목숨 유지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이 제일 소원하는 것 중 하나, 다급하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내 고유함을 지킬 수 있는 내 거처가 마련되는 것이 젊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에요. 잔소리 듣기 싫어서 용감하게 뛰쳐나왔는데, 뛰쳐나와서 간 곳이 뭐 전세 사기에 걸리고. 그러니까 사람들은 빨리 돈 벌어서 내 집 마련하는 거예요. 내 집, 내 거처가 마련되면, 내 땅이 마련되면 나는 그 땅에서 ‘산다’가 성립돼요. 나는 산다, 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이 거처를 없애버려요. 이 거처는 공간2에서 나왔기 때문에. 공간2에서 여러분 각자 주소 다 있죠? 주민등록 다 되어있죠? 자기 자리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자리가 주님의 무덤 속이에요. 이미 죽음이 작렬하는 거예요. 이 무덤 속에서는 예수님이 사람에게 맞아죽은 자리에요, 이 자리가.
사람들은 자기가 얻어맞고 교사가 제자한테 얻어맞는 것만 생각하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얻어맞은 거 생각합니까? 그거 생각해요? 교인들도 생각 안해요. 성도는 생각하는데 교인들은 생각 안해요. 예수님 눈이 밤탱이된 거 생각합니까? 그거 누가 때렸어요? 사람들이 때렸잖아요. 그 사람들이 어느 동네 사람입니까? 우리 같은 마을 사람이에요. 같은 마을. 이걸 고상한 말로 동향인이라 해요. 같은 다정한 이웃이 예수님 때려죽인 거예요.
사람은 자기 욕 얻어먹는 것만 굉장히 예민하죠. 예수님 욕 얻어먹는 것은 남의 일이에요. 왜 그런가? 아직 자기의 거처가 있다 이 말이거든요. 예수님 욕 얻어먹든 말든 나는 내 몸 하나 누일 자리 있으면 됐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든 말든 나는 살았다는 거예요. 거처 있을 때는 산 거예요. 그걸 나만의 고유한 것이라 해요.
요즘 20,30대 여자 분들이 결혼하면서 소망이 있어요. 결혼하면서 소망이 혼자 사는 거예요. 애초부터 결혼할 때부터 같이 살 마음이 없어요. ‘나를 위한다는 조건하에 살아줄게’가 되었지, ‘같이 산다’는 인간에게는 성립 안됩니다. ‘나부터 살리고’가 되지, 같이 사는 건 없어요. 이혼한다는 말은 아니고 살기는 사는데 나만 위하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각 방 쓰고. 방 2개 이상 돼야 돼요. 하여튼 살긴 사는데 ‘나만 위해주는 조건 하에 너하고 같이 살아줄게’ 이거에요. 그 소망이.
그러니까 결혼하고 난 뒤에 나빠서가 아니라 결혼하기 전부터 아주 일관성이 있어요. 오직 나만을 위하여. 고유의 나만을 위해서. 그걸 잃어버리면 내가 죽는 자가 돼요. 내 것을 잃어버리면 죽은 자가 돼요.
그러나 주님은 성도를 유령으로 만들어놨어요. 이 인간 공간에서, 어떠해도 너만의 것과 너의 자리를 하나님께서는 없애버립니다. 이유가 뭐냐? 몸이 더 이상, 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네. 예수님의 몸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30721b 고린도후서4장 11절(몸과 유령)-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아무도 예수님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아무도, 단 한명 가룟 유다 빼놓고는, except 가룟 유다, 아무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죠.
이건 예수님께서도 이야기한 거예요. 너희들은 나를 찾을 수 없다. 왜 그러느냐 하면 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공간. 사람들은 아버지를, 인간 사는 공간 말고 하늘에 사는 공간에 따로 있다고 본 거예요. 그 하나님이 사는 공간이 굳이 인간 공간에 찾아올 필요가 없다고 본 거예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이 사람 사는 데 올 이유가 없다니까요.
옛날 이스라엘 같으면 왔죠. 모세 시내산. 그때 사람들은 혼쭐났잖아요. 다 같이 벌벌 떨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중재자로 나서가지고 모세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나님과 교류하는 방식을 모세 언약이라고 그렇게 사람들은 알고 있었죠. 유대인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모세 언약은 어디까지나 구약 때고 신약에는 종말의 마지막에는 직접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신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던 거예요. 세례하면서. 그런데 세례 가운데, 죄인들 빨리 세례 해야 깨끗한 하나님 심판 앞에 그동안 지은 죄를 씻어가지고 심판대 앞에 설 수가 있는데 그 준비하는 과정 속에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이 끼어들 때, 세례 요한은 황당했죠. 왜 이러십니까? 여기는 죄인들만 오는 곳입니다, 주님. 죄 없는 분은 여기 오면 안돼요.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몰랐던 겁니다.
모른다는 말, 알지 못했다는 것을 저는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찾을 수 없다. ‘찾을 수 없다’로 바꿔야 돼요. 그러면 오늘날 성도의 특징은 [본인이 본인을 찾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기존에 교육받고 기존에 내가 있었던 체제 이 공간에서 사람들이 살았다 하는 공간에서 줄곧 수십 년 살았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이기 때문에, 뭘 하려고 해도 내가 시발점이 돼서 내가 개시점이 돼서 일하면 뭔가 된다 이 말이죠. 콩나물국을 끓이든 뭐든 내가 시작하면 어떤 결과물을 낼 수 있다 이 말이죠.
왜? 내가 살아있으니까. 죽은 자 같으면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살아있으니까 뭔가 조물딱 대고 뭘 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은 아직 안 죽고 살아있다는 증거다 이 말이죠. 그럼 죽은 자는? 관 속에 있는 사람이 죽은 자죠. 다른 사람은? 살아있죠. 과거 관 속에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은 죽고 아직 무덤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살았다고 보는 공간이 이 인간들의 공간이에요.
그런데 성도의 특징은 몸이 바뀌어요. 흙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뀌어요. 이 앞에 있는 그리스도는 인간 공간에서 추방된 자에요. 인간 공간에서 추방된 자의 몸으로 바뀌어요. 인간세계에서 추방된 그분의 몸으로 바뀌어요. 인간세계에서 계실 때 유령 취급받던 그분의 몸으로 바뀌어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이 땅에서? 거울 앞에 비치는 몸 있죠. 몸인데 그게 바로 기존에 내가 알던 나죠. 그런데 내가 알던 나는 새로운 공간, 주님 계신 공간의 나는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그 공간의 나를 내가 죽어가는 내 몸으로 찾아낼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발견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걸 [나는 이미 나에게 귀신이다. 이미 나는 나에게 죽은 자이다.] 귀신, 죽은 자가 사도 바울에서는 예수 안이라는 공간에서의 자기 정체성, 자아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인간들이 사는 공간에서의 언어,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까, 안 됩니까? 표현이 안돼요. 안되니까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나는 삼층천에 올라간 나를, 그 사람을, 자기가 자기보고 그 사람이래요, 나는 그것, it을 표현할 길이 없네. 진짜 나를, 이 I가 it를 표현할 수 없어요. I 같은 내가 it 같은 나를, 내가 표현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설명해야 될 이유가, 분명히 제자들과 예수님이 함께 있었잖아요. 함께 있어서 제자들이 나름대로 예수님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주님과 우리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자부한 거예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몸과 자기 몸이 영원히 줄곧 같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가룟 유다 빼놓고는.
가룟 유다는 알았죠. 예수님의 몸과 자기 몸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걸. 가룟 유다는 사탄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걸 알았던 겁니다. 주님이 자기 몸의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기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이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어요. 내가 죽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유발된 사태라고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겁니다.
자기는 옛날에 고유한 자기를 버리기 싫은 거예요. 자기는 예수님 때문에 이 땅에서 귀신취급받기 싫은 겁니다. 누구는 귀신취급받기 좋아합니까? 아무도 안 좋아하는데. 그걸 가룟 유다는 미리 예민하게 알았던 겁니다. 주님께서 장차 성령 보내서 멀쩡한 우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미리 알았던 거예요. 사탄이 들어가서 미리 안 거예요.
여러분, 사탄, 악마죠, 악마는 좀 덜 무서운데 사탄이라 하니까 갑자기 무서워지죠. 사탄의 특징은 이거에요. 사탄의 특징은 항상 바른 말만 한다는 겁니다. 항상 그래요. 바른 말만 해요. 납득되는 바른 말만 해요. 바른 말만 하거든 그 목사는 사탄의 종이라 보면 돼요. 악마의 종.
왜냐하면 바른 말만 한다는 것은 듣는 사람이 바른 말한다고 납득되는 말만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 납득되는 요인들은 자기 고유의 것을 굳이 버릴 이유가 없어요. ‘야, 저 사람 설교만 잘 듣고 지식만 쌓으면 구원받겠다.’ 하는 자기가 자기한테 희망을 가질 수 있어요. 이게 사탄이에요. 악마에요.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설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 말 알아듣는 것처럼 했는데 갈수록 그 간격이 틈이 점점 더 벌어졌어요. 도대체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무슨 말하는지를. 주께서는, ‘너 가짜라는 뜻이야. 죽을 몸 지니고 흙이 될 몸이기 때문에 못 알아듣는 게 마땅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거에요. 인간이 세상을 표현할 때, 어려운 말로 이걸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이라 하는데 이건 너무 어려운 말이고, 세상을 표현할 때에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일대일 대응하는 식으로 표현해요. 1:1 대응.
코끼리 있잖아요. 그러면 코가 긴 코끼리. 코끼리를 찾아보면 무엇과 만나는가? 코끼리 동물그림과 ‘코끼리’란 글자가 일대일로 딱 만나는 거예요. 여기 뭐 사자 그림하고 코끼리가 만날 순 없잖아요. 사람들은 드디어 언어에 대해서 깊이 있게 연구를 많이 했어요. 인간의 언어에 대해서. 이걸 기호학 또는 언어학이라 해서 같이 쓰는데요.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첨부파일에 강의 시간 중 나오는 그림 캡쳐가 있습니다
위에 비오는 날 우산 쓴 신사 그림은 기호에 속하는데 기호 중에서 이것을 상징이라 해요. 상징, symbol. 상징은 어느 민족, 누구나 봐도 비가 온다는 것을 보여주죠. 우산 쓰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걸 우리말로 ‘비’라고 한다면 외국 사람은 ‘비’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작대기로 보이지, 이게 비라고 하는 건 몰라요.
‘비’ 이게 기호고 우산 쓰고 있는 사람 그림은 상징이에요, 상징. 그래서 사람들은 기호 또는 같은 말로 언어, 기호라는 것은 그 사회의 약속된 체계로 보는 거예요. 그 사회에 약속된 체계라 하면 어디서 누구한테 배우느냐? 인간은 누구한테 배우는 게 아니고……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잖아요. 장난감을 갖고 놀 때에 아이들이 창의성을 발휘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장난감을 사용하는 사용자가 돼요. 창의성이 아니고 사용자로서 사용하는데 애들이 장난감으로 여러 가지 소꿉놀이하는 그것은 장차 어른세계를 미리 여기서 흉내내는 거예요. 교육의 기초는 뭐라고 했습니까? 모방이에요. 모방하고 흉내내는 거예요. 인간은 창의가 있다, 없다? 없어요. 그 사회 안에서 그냥 계속해서 대를 이어 반복하는 거예요.
그 사회를 무슨 사회라고 했습니까, 첫째 시간에? 공간2. 인간들이 기거하는데 인간들이 기거하는 공간2의 특징은? 나는 죽어있는 게 아니고 나는 살아있다. 이유가 뭐라고 했어요? 그 안에 자기의 거처가 있기 때문에. 거처가 있어야 애를 놓죠.
예수님은 나올 거처가 없었어요. 마리아하고 요셉이 애를 낳을 거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디서 나왔습니까? 인간의 거처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어디서 나왔습니까? 말구유에서 나왔죠. 소인지 말인지 양인지 그건 잘 구분 안됩니다만 어쨌든 짐승의 구유에서 태어나잖아요. 이 땅을, 이 공간 자체를 태어날 때부터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도 부정해버렸어요. 성전에 올라가서.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하니까 “누구세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인데 누구세요?” 이런 식으로. “너를 사흘 동안 찾았다.”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줄 몰랐습니까?” 이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은 내 아버지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못합니까? 왜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못합니까? “아버지여” “왜?” “당신이 아버지 아닌 것을 왜 모르십니까?” 이거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인간의 언어로 예수님을 파악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언어로 파악할 수가 없어요.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언어로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통제 불가에요. 인간사회에서는 통제 불가합니다. 미친 자죠. 분노유발자 이런 거. 통제 불가인데 성경에서는 이 통제 불가를 자유인이라 합니다. 이게 자유에요. 율법과 이제 혼인관계 청산하고 성령과 함께 혼인한 사람. 로마서 7장에. 이걸 자유인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통제 가능하고 통제되었던 존재를 주님이 뭐로 바꾸느냐 하면 통제 불가한 존재로 바꿔버려요. 요한복음 5장에서 그 베데스다 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가 평소에 안식일 안 지키려고 환장한 사람입니까? 아니죠. 아니에요. 자기는 자기 병만 나으면 돼요.
그 사람 소원은 남북통일도 아니고 그 사람 소원은 38년 된 고질병이 낫는 게 소원이에요. 그것 때문에 베데스다 못가를 반복적으로 38년 동안인가 그건 확실히 모르지만 하여튼 근처를 어슬렁거리면서 자기가 1번 타자로 뛰어들길 기다렸던 겁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공간, 새로운 공간 이런 건 관심도 없고 내 병 하나 낫는 거예요.
왜 병 낫기를 원했습니까? 본인이 죽어가고 있잖아요. 아파 죽어가고 있잖아요. 죽어가고 있다는 말은, 내가 안 아프기만 하면 나는 정상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가. 그 사람이 평소에 착한 일해서 병 나은 게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께서 인간의 대표자를 뽑은 거예요.
인간의 대표자를 뽑았는데, 그 사람의 소원은 내 병에서부터 자유에요. 탈출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38년 된 병자가 예측하지도 못하고 예상하지도 못하고 원하지도 않는 탈출을 해버리게 했어요. 어디서 탈출했습니까? 안식일에서 탈출했죠.
안식일은 율법의 총화에요. 율법의 모든 집대성은 안식일에 있어요. 안식일을 잘 지키면 나머지는 다 지킨 걸로 쳐주는 사회가 유대사회였습니다. 그 안식일 자체를 의도적으로 위배하게 만들었어요. 누가? 주님이.
주님은 참 못됐어. 내가 원하는 내 병만… 전에는 팔이 안 올라갔는데 이제는 더 위로 올라가잖아요, 오십견 나아가지고. 내 소원은 팔이 이만큼 올라가는 거예요. 내가 유령되는 게 소원이 아니에요. 유령되면 미쳤다는 소리 듣는데 그걸 어떻게 소원하겠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사람 병을 고쳐주는 게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병을 고쳐준 적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병든 몸을 자기가 인수했죠. 병을 고쳐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그 병을 담당했죠.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네가 죽어가느냐? 나도 죽어간다. 인간 쪽에서 먼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주님께서 먼저 그 사람을 자신의 노선에다 그걸 껴안아버렸죠. 그걸 ‘선택’이라 합니다. 선택해서 껴안아서, 예수님이 저주받으면서 이 땅 이 세상에서 유령되게 한 것처럼 자기 몸속에 이미 들어와버린 그 사람을 함께 껴안고 유령시켜버렸습니다.
함께 껴안는 것을 성경에서는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물만 찍어 바르고 물에만 들어갔을 뿐이지요. 예수님은 그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이 물세례 속에 뛰어들어서…… 수요일에 그런 얘기했죠. 같이 물세례 속에 뛰어든 그분의 마지막 세례, 십자가 불세례, 심판세례에서 연속성을 가지지, 나머지 물세례에서는 성령세례가 연속되지 않아요. 예수님이 물세례 가서 모든 시작의 세례와 마지막 끝세례까지 예수님만이 연속적으로 완수할 수 있어요. 완주를 할 수 있다고요, 마지막에.
하여튼 간에 여러분들이 첫째 시간에 한 거 잊지 마세요. 하나님의 소원은 뭐라고요?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왜? 이미 약속을 했잖아요. 이걸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 점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일체 어떤 변동이 없습니다. 요지부동 확고합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확고한 거예요. 그 죽는 이유는 이 공간, 우리가 행동 똑바로 안해서가 아니라 이 공간(공간2)에서 태어났다는 자체가 이미 죽음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거죠.
그러면 이 공간의 접점에서 새로운 법이, 새로운 풍선 공간이 주님에 의해서 몰려오는 거예요, 같이. 주께서 이 공간 속을 몰고 오는 거예요. 이 공간(공간1)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창세 전 이미 ‘언약적 구조화’ 된 거예요. 언약적 구조에요. 갑자기 구조 또 나왔죠. 여기는 구조에요, 구조. 구조가 우리를 구조하는 거예요.
그런데 기존 공간2 여기는 내 위주에요. 나 위주에요. 나밖에 몰라요. 구조가 포크레인처럼 꽉 집는다는 생각을 못하고 인생은 내가 나한테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는 거예요. 내 인생 책임자가 나밖에 없는 거예요. 이런 생각만이 이 세상에서는 바른 소리이고 이 바른 소리를 매일 같이 쉬지 않고 누가 제공합니까? 사탄이 제공하는 거예요. 악마가 제공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이 사탄을 모르잖아요. [누가 나의 욕망이 되게 하는 말을 주는지 인간은 모른다.] 누가 나로 하여금 내가 하는 행동이 항상 옳다고 그렇게 부추기는 자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내가 어떤 욕망을 해도 그 욕망은 나한테 정당하다고 합당하다는 것. 선생님을 쥐어 패도 그렇게 팬 애는 자기가 정당해요. 누가 나를 이렇게 했는지, 그 욕망의 원천을 인간은 찾고자 합니다. 이게 인간의 욕망의 본질입니다.
[타자의 욕망이 나의 주체다.] 혼자 자기 쳐다보는 인간은 없습니다. 자연인? 나만 산다, 산속에? 예천에 물난리 날 때 죽었습니다. 타자의 욕망이에요. 인간은 자기 혼자한테는 욕망이라는 게 없어요. 욕망이 생기려면 꼭 누군가 내 앞에 등장해야 돼요, 누군가.
타자의 욕망이 나를 만들어요. 나라는 주체를 만들어요. 그래서 이 나라는 주체는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용물이 없습니다. 이 주체는 실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라는 주체를 만드는 것은 구조기 때문에. 사탄의 세계가 구조적으로 인간을 다루어서 사탄의 말이 인간에게 미끼가 되어가지고, 사탄은 가룟 유다한테 ‘너는 너다우라’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계속 줘요. 너는 너다워야 돼. 너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야.
자, 우리나라 해병대 출신들이 하는 말 있죠. 해병대 특징은 뭐를 잡는다? 귀신 잡는 해병이다. 귀신은 잡아 족쳐야 되고 그 귀신을 잡는 해병대는 물에 빠져도 절대로 죽지 않아야 되죠. 그런데 이 해병대도 구명조끼한테는 못 이기죠.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는 목적은 뭐냐? 나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예요. 그럼 행복이란 뭐냐? 아무리 가난하고 아무리 병들고 간암 말기 4기라도 나를 잃지 아니하면 그 나름대로 소박하나마 내가 산 이유, 보람, 그리고 행복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이게 누구의 작품이라고요? 이게 사탄의 작품이에요. 이 사탄의 모임, 이것이 오늘날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교회죠. 사탄의 모임. 그 누구도 유령되기를 싫어합니다. 그 누구도. 아까 유령이 뭐라 했습니까? 내 본연의 것이 없어지는 것. 내 것이라는 게 아예 없어지는 것. 그래서 이 교회, 사탄의 교회 특징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는 거죠. 처음 운 뗄 때부터 처음 교회 올 때부터,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해요.
그러면 그 반대말, 진짜 그리스도의 몸의 세계,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 성령의 선으로서의 교회는 뭐냐? [텅 빈 것으로 꽉 차있는 세계]. 이거 뭐 선문선답 비슷한데요. 텅 비어있는 것으로 꽉 차있다. 아까 처음에 했잖아요. 주님은 어디 계신다고 했습니까? 모든 곳에 계시죠. 그런데 아무데도 없죠.
공간이 두 개로 나누어졌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애들아, 공간 2개다.’라는 식으로 말했잖아요. 오늘날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 사람들보고 ‘공간은 2개입니다.’ 그게 골로새서 3장 3절에 나옵니다. 나는 땅에서는 죽었고 내 생명은 하늘에 있다. 벌써 공간이 2개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사도 바울에게 물었을 수도 있어요. “누구냐, 너?” “나? 나는 죽었고. 너 나 볼 때 죽은 자로 봐야 돼.” “너 살아있잖아.” “내가 산 게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야.” “미쳤구나.” 대화 소통이 안돼요. 언어적 소통이 안되죠.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이미 상징과 기호 이야기한 것처럼 이 세상의 공간에서 정해진 거예요. 공간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공간에서 만들어져서 만들어진 그 말, 언어가 말이잖아요, [말에 의해서 또는 언어에 의해서 인간들은 말의 내용을 제시할 책임을 갖는다]. 누구한테?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한 분들에게 제공할 책임을 가져요. 그래야 사탄의 구조가 유효하니까요. 계속 유지가 되니까요. 그래야 이 공간2 인간들의 공간이 계속 지속될 수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말을 하는데 예를 들어서 아까 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논다고 했죠. 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뭐까지 발전하느냐 하면 장난감 가지고 노는 것보다 말을 하는 게 더 효과 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인간이 말을 할 때부터.
인간은 장난감 갖고 놀 때는 장난감하고 이야기하죠. 하지만 말을 하면서 그다음부터는 직접 엄마나 아빠한테 말을 하죠. 말할 때 요구를 하게 돼요. 예를 들어서 젖 떼고 우유 먹을 때 우유가 먹고 싶으면 ‘우유 타줘’라고 말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릴 때도 말했죠. 앙탈을 부리고 우는 게 말이에요. 어쨌든 간에 장난감보고 그러진 않잖아요. 장난감 갖고 놀던 애가 말을 하면서 요구를 하게 돼요.
요구를 하게 되는데 이 요구를 하면 엄마가 우유를 주죠. 우유를 줍니다. 우유를 줄 때 애가 측정을 해봐요. 내가 요구하는 것과 엄마가 요구를 들어주는 것과 딱 측정해보니까 이게 일치되지 않아요. 맞질 않아요. 여기서 결핍을 느끼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로 등장했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말로서 우유 달라고, 처음에는 우유 달라고 하다가 크면 뭐 달라고 해요? 돈 달라 하죠. 그래서 아이가 괴물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한 아이가 아니고 괴물이 돼가요. 돈 달라는 이걸로 계속 끝까지 가죠.
그런데 ‘우유를 주세요’라고 했을 때 우유를 줬거든요. 안 준 게 아니고 분명히 줬어요. 줬는데 내가 우유 달라했을 때 느꼈던 그 욕망의 양과 직접 우유를 마실 때 욕망의 양이 같질 않아요. 미흡해요. 부족을 느끼고 결핍을 느낀다고요. 그러면 애가 결핍을 느끼니까 여기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TV틀어서 동화 들려달란 말이야’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 욕망의 미흡함을 뭐로 옮깁니까? 우유도 먹고 그다음에 TV트는 것으로 마저 채울 수 있으리라고 자기가 해보는 거예요.
말을 표시하는 형식을 기표라 하는데 될 수 있는 대로 이런 전문적인 용어를 안쓰려 해서 형식이라 합시다. 말의 형식을 s라고 하고, s1이라 하면 이게 모자라죠. 그럼 s2를 또 원하는 거예요. 그럴 때 s1→s2 중간에 인간은 내 주체가 깨어지면서($) ‘나는 엄마의 욕망에 종속된 존재이구나’라는 것을 자기가 느끼기 시작합니다. 엄마가 있다는 자체가, 내가 내 욕망을 요청 요구하면서도 그게 충족되지 않도록 엄마가 내 앞에 존재해 있는 거예요. 타자가. 타인이.
남이 있다는 것은 그 남이 있음으로써 내 욕망은 자극받지만 그 자극 받은대로 상대가 다 채워지지 않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엄마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엄마하고 나 사이에 형성된 구조 자체가 뭔가 빠져있어요. 뭔가 결핍되어 있어요. 뭔가 모자라요. 뭐가 모자라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 원인을 알고 싶어요?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 곧 나죠, 내가 산다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 비-현실이에요. 현실은 욕망만 살아있어요. 욕망이 나보다 더 우세한 거예요. 그럼 나는 뭐냐? 나는 욕망의 노예죠.
이번에 요한복음 <타자의 마을>책이 나왔는데요. 수련회 때 펼쳐 보일 거예요. 그 책 표지에 지영씨가 거울을 해놨어요. 그 안에 내용 보면 1강에 백설공주 이야기가 나와요. 거울아 거울아, 그걸 감안해서 거울을 그려놨어요. 그런데 거기서 누가 말을 하느냐 하면 ‘거울아 거울아’ 말을 던지니까 그 거울이 이야기하죠.
내가 있고 타인이 있다, 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오해였다는 겁니다. 나도 없고 타인도 없고 있는 것은 욕망밖에 없는데 욕망이 욕망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만들어냈고 타인을 만들어내서 둘이 만나도록 주선을 한 거예요. 나도 욕망의 노예이고 엄마, 아빠도 둘다 노예에요. 욕망이 살아있는 거예요.
그 욕망을 나는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이건 내 욕망이고 엄마가 주니까 엄마가 나보다 크니까 나는 지금 우유가 없잖아요. 돈을 갖겠다는 것은 나는 타인으로부터 독립해서 나만의 자기가 살아있음을 자기 스스로 거처 만들어서, 거처 만드는 걸 뭐라고 했습니까? ‘살아있다’ 이렇게 되죠, 살아있다 하고 싶은데 그럼 돈만 있으면 뭐해요? ‘부자네. 아니 세상에, 벤츠 타고 다니네.’ 하고 뭔가 이야기해줄 타인이 있어야 내가 벤츠 탈 마음이 있죠.
조선시대 때는 고관들이 뭐 탔습니까? 가마타고 돌아다녔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가마 못 탔는데. 그런데 조선시대 있는 사람이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에 와서 가마타고 에헴, 하면 그 앞에 벤츠 탄 사람이 창문 열어서 ‘이거 뭐야? 우리 민속촌 왔어?’ 할 거 아니냔 말이죠. 그러면 가마 탄 그 여자분 둘이, 아씨 두리안 드라마 연속극에 나오는 사람 둘이 이렇게 대사를 쳐요. 고급 신형차를 보고 ‘신종 가마인가?’
아직까지 욕망이 무르익질 않았어요. 현대의 욕망에 아직 물들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뭘 고집해요? 내가 옛날 가마 탔을 때 호강했다는 그 호강이 전부인 줄 안 거예요.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신종 가마인가?
인간은 자기보다 못난 것은 타인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쫓아다닌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이 타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게 없는 걸 가졌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제자니까 따라다녔잖아요.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어떤 연속성, 내가 얻고자 하는 그 노선에 예수님이 앞서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처럼. 앞서간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사탄이 들어가 영적 존재가 되니까 이게 길이 다르다는 사실을 미리 간파한 거예요, 미리.
그래서 가룟 유다가 자살했잖아요.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살했다고 보지 않아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네가 잘 살았는데 안타깝게 죽는다, 가 아니라 태어난 것부터 안타까운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태어날 때부터가 안타깝다면 가룟 유다 두 살 때 돌 사진도 안타까운 거예요. 세 살 때도 안타까운 거예요. 네 살 때도 안타까운 거예요.
가룟 유다는 아무리 인생을 살아도 달라질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제자리 뛰기 한 거예요. 오늘날 세상하고 똑같아요. 오래 산다고 인간되는 거 아닙니다. 똑같아요. 그럼 인생을 왜 사느냐? 인간은 바뀌지 않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왜 나이 들어도 인간 안 되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계속 지연시켜보는 거예요.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사람 안 되는 걸.
왜냐하면 욕망의 노예니까요. 욕망만 살아있고 우리는 살아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욕망의 귀신이에요. 이래도 유령이고 저래도 유령이에요. 다시 말해서 악마가 거짓말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너를 잘 안다고 치고 너를 지키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게 악마가 한 거짓말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는데 자꾸 지키라는 거예요. 자꾸 지키고 잃어버리지 말고 버티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우리가 곧이 들어야 돼요. 나보고 살아남으라고 버티라고 하는 게 아니고 네가 품고 있는 욕망을 네가 없애지 말란 뜻이에요. 사탄이. 악마가.
창조 없습니다. 인간에겐 창조 없어요. 누구로부터 쓰여지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후손으로 쓰여지느냐, 여자의 후손으로 쓰여지느냐 그뿐이에요. 인간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주체적 존재 아닙니다. 주체적 존재라 하는 것은 이미 깨졌죠. 찢어졌어요, 인간의 주체적 존재라 하는 것은.
나라는 걸 인간은 모르고 찾을 수도 없어요. 그런데 악마는 거짓말해서 거울 속에 비친 네가 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꾸 남들에게 하소연하고 도와 달라, 살려주세요, 물에 빠졌습니다 해봐도 이건 본인이 본인이라는 동굴 안에서 외치는 자기 안의 메아리에요. 자기 소리가 자기에게 되돌아올 뿐이지, 타인에게 먹히지를 않습니다.
오늘 제목은 이겁니다. <몸과 귀신>. 몸과 귀신의 관계. 주께서는 인간의 몸을 다 부정합니다. 인간의 몸을 몸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 용어로 하면 이걸 육이라 했어요. 그전에는 뭐였습니까? 창세기에서 그냥 흙이죠. 이게 악마가 있으니까 육이 되어버렸죠. 몸은 아닙니다.
몸은 누구만 몸이냐? 예수 그리스도만 몸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날 때 사람들이 ‘어? 우리하고 똑같이 생긴 몸이네.’ 아니죠. 아니죠. 똑같이 생긴 몸이 아닙니다. 예수님 몸은 다른 공간,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몸이었어요. 비록 몸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지만 그 안의 관계는 언약관계에요.
따라서 언약관계가 끊어지면, 하나님과의 축복의 관계가 끊어지면 그것은 저주의 관계밖에 안돼요. 그래서 우리가 죽어서 흙이 되고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지극히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이제 남은 시간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그러면 새로운 공간2,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있는 공간, 그 공간에서 통하는 언어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완료되고 완성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제 강의도 마무리 지으면서 또 어려운 거 하나 해야죠.
말을 둘로 나눕니다. 벤베니스트(에밀 벤베니스트, Émile Benveniste, 1902-1976 프랑스 언어학자)라는 언어학자가 말을 둘로 나눴어요. ①말 내용의 주체와 ②말 행위자의 주체로 나눴습니다. 어렵죠. 말 내용의 주체와 말 행위의 주체로 나눴습니다.
예를 들어서 위의 ①번 ‘나는 밥이 먹고 싶다’ 여기 ‘나’는 주인공 아닙니까, 주체. 여기서 말(발화(發話): parole, 소리를 내어 말한 형식적 언어행위)의 내용은 ‘나는 밥이 먹고 싶다’ 이것이 말의 전체 내용이고 거기서 말한 주체가 나에요. ‘나는 밥이 먹고 싶다’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내가 이야기할 때 이게 말하는 행위의 주체가 돼요.
그래서 ②번이 뭐냐 하면 말한 행위의 주체거든요. 이거는 영원히 몰라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모르는데 그냥 발악하듯이 말을 해보는 거예요. ‘배고프단 말입니다.’ ‘누가요?’ ‘내가. 내가요!’ ‘네가 누군데?’ ‘그건 모르고 배고프단 말이야!’
계속 말을 해요. 누구한테 합니까? 강아지한테 합니까, 해보고 이야기합니까, 별보고 합니까, 누구보고 해요? 나의 욕망을 채워줄 타인보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타인이 없으면 내가 살 수가 없어요. 인간은 진리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타인을 원해요. 밥 없이는 사흘 굶어도 전화 안하고는 전화통화 안 붙들고는 사흘을 못 넘겨요.
옛날 개그 콘서트에 있잖아요. 경상도 남자. 남자가 퇴근해서 ‘밥 묵자.’ 밥 먹자는 건 ‘밥 먹자’가 아닙니다. 나 밥 먹을 테니까 너하고 대화할 의사 없다, 그런 뜻이거든요. 밥 묵자. ‘아는? 자나?’ 애는 자냐고 묻는 것도 애가 어떤지 궁금한 게 아니고 애 자는 문제에 대해서 먼저 말 걸지 마, 이런 뜻이에요.
그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는 자기가 자기 고유의 것을 잃어버리기 싫죠. 그러나 실제로 보면 가족은 대화를 잃어버리면 그건 친구보다 더 못하죠. 대화를 안하면 서로가 서로를 이미 시체로 보는 거죠. 죽은 자로 보는 거죠. 둘다 믿음 좋아가지고 인간언어로 소통이 안 될 그런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성도도 복음으로 이야기해버리면 있던 친구 다 떠나죠. 떠나가네~ 다 떠나버리죠.
그래서 인간은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말 통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전화를 누구한테 해요? 남편보고 해요? 아내보고 해요? 안합니다. 누구보고? 딸내미보고. ‘야야, 애들 잘 크나? 뭐 김장 좀 해서 담아줄까? 애는 저희 반에서 몇 등 하는데?’ 이런 거. ‘김서방 요새 잘해주지?’
왜 궁금한데요? 왜 궁금합니까? 자식이 내 욕망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욕망의 실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자식 없으면 내가 없어요. 죽은 해병대 군인이 시험관 10번해서 낳은 자식이랍니다. 십 년 동안 시험관 10번 했는데 걔가 죽었어요. 시험관 얼마나 아프기도 하고 돈도 들고. 아기를 왜 갖고 싶어 했어요? 타인이 없으면 내가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악마의 욕망의 노예이기 때문에.
악마는 그런 식으로 인간을 갖고 놀았어요, 지금껏. 귀신 되기 싫으면 내 말 들어라. 주님은 어떻습니까? 나만 믿고 귀신 되자. 내가 너 안에 살게. 너는 껍데기만 껍질만 제공하라.
이게 바로 오늘 p.251에 고린도후서 4장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맙게도 우리 주님이 우리를 타인으로 간주해요. 타자로 받아들인 거예요.
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언약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웃이 필요한 거예요. 사랑하는 이웃. 그래서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된 겁니다. 생명 얻은 겁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내 사랑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 주께서 우리를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자기 몸이기 때문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뭘 하셨는지 또한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를 대비적으로 깨닫게 해주셔서 성경 말씀 하나하나가 내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 손에서 다 이루어진 채로 성령으로 적용돼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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