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0623a 열왕기상18장 18절(압축 삭제 대체)-이 근호 목사
p.250 위에서 3번째 줄에【…금 신상을 엎어놓으면 역사가 되고, 다시 세워놓으면 모든 역사를 커버하는 묵시적 사건으로서의 ‘금 신상 만들기 사건’으로 자리 잡는 것처럼…】엎어놓으면 역사가 되고 세워놓으면 사건이 되고.
그러면 역사라 하는 것은 사건의 그림자, 사건의 투영체라 볼 수 있죠. 전봇대가 사건이라면 지면에 비치는 전봇대 그림자는 역사가 되는 겁니다. 이 두 가지를 다니엘이 다 알고 있는 거예요.
p.250 밑에서 2번째 줄에, 그것을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완료-미완료’ 혹은 ‘이미-아직’】 이게 말이 안 되죠. 완료됐으면 완료이고 미완료됐으면 완료가 아닌데. ‘이미’라는 것은 아직이 남아있지 않아야 되고 ‘아직’이라는 것은 이미라는 말을 쓸 수 없는데, 표현을 이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미-아직, 완료-미완료’ 이것을, 신학에서 이런 표현을 해서 성경내용을 모두 다 커버하려 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은 유대인들이 벌써 이걸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말은 이런 것을 표현하고 이렇게 알고 있는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살해당했다 이 말입니다. 알면 뭐합니까? 메시아를 못 알아봤는데.
도대체 어느 정도 알아야 메시아를 알아보는 레벨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도대체 어느 정도로 성경지식이 풍부하고 많아야 그게 가능할까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식의 총화, 총체, 전부 다를 동원한다고 해서 이게 알아지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수준 차? 아니죠. 노선 차죠. 수준이 높고 낮아서가 아니에요. 수준에 대해서는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창기는 저주받았다. 장애자들, 가난한 자들. 하나의 율법에 의하면 신명기 율법에 의하면 그들이 가난한 이유는 말씀을 못 지켰기 때문에 저주받아서 가난하다고 본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부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고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뜻이고 복을 받기 위해서 말씀에 충실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복은 성적순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말씀을 많이 지킨 쪽이 복을 받아 부자 되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받아서 인생 자체가 완전히 처절하게 돼버리죠.
그래서 [예수님의 살인사건 십자가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큰 유혹이요, 실은 이것이 최후의 유혹]이에요. 최후의 유혹이에요, 바르게 살겠다는 것. 노림수가 있었던 거죠. 바르게 살겠다는 뭔가 노림수가 있는 거예요. 바르게 살게 되면 내가 원하는 풍부한 풍족한 삶은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나님이 하는 일에 앞뒤가 맞는다는 겁니다. 모순점이 없이.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역사와 묵시, 두 개의 반듯한 시간 안목을 가진 자가 다니엘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다니엘이 역사와 묵시 둘 다를 겸비하고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지은 책으로 ‘묵시문학’이라는 게 있었어요.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와 왜 끝나야 되는가에 대해서 기록된 내용들이에요. ‘세상 끝나니까 조금만 참자’ 그게 묵시문학의 핵심이고 주제입니다. ‘조금만 참으면 우리 구원된다’ 이게 묵시문학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사람들은 ‘네가 뭔데 너희들만 구원되고 왜 다른 사람은 멸망하느냐? 기준이 뭐냐?’ 그렇게 묻게 되겠죠. 기준은 뭐냐 하면 ‘망하는 너희들이 우리를 건드렸잖아’ 이게 기준이에요. 멸망하는 쪽이 구원받는 우리를 건드렸기 때문에 멸망한다는 거예요. 그게 뭐 많이 위로가 되겠죠.
그런데 그러한 묵시문학 또는 묵시적으로 세상을 평가하면서 인간은 빠뜨린 게 있어요. 그 빠뜨린 질문을 제가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내가 왜 살아있어야 하는가?]하는 질문을 빠뜨리고 있어요. 살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것은 이해되겠는데 그게 질문의 첫 출발지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살아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어야 돼요. ‘내가 왜 살아있지?’ 이 말은 뭐냐? [내가 안 살아도 되잖아?] 라는 질문을 사람들은 자주 자주 놓쳐버려요. ‘안 살아도 되잖아? 내가 왜 살아있어야 돼?’ 이게 같은 질문이거든요.
아까 묵시문학 이야기할 때 적들이 나를 건드려서 그들은 망한다고 되어있죠. 그럼 방금 이 두 질문, 같은 내용입니다만 ‘왜 살아있어야 돼? 안 살아도 되잖아?’ 라고 내가 나한테 질문을 던져버리면 묵시문학 자체가 우리하고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본인이 죽겠다는데 뭐… 죽겠다는데 상대방이 나를 죽이는 게 고맙죠. ‘네가 나를 건드려?’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지금 ‘내가 왜 살아있어야 돼?’ 이 질문이 안 나온다는 뜻이에요.
‘왜 살아있어야 돼?’ 여기서 내가 살아있다고 이야기했는데 보통 철학에서는 살아있다는 말 안하고 ‘여기 있음이 무엇이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저는 ‘있음이 무엇이냐?’ 이것은 ‘왜 살아있어야 돼?’ 이 질문을 가린다고 보는 거예요. 있음이 무엇이냐고 저는 질문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요. 없음이 무엇이며 있음이 무엇이냐. 있음이라 하는 것은 없음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해서 있게 되었다. 이게 철학자들 입에서 줄줄 나오잖아요.
그러면 중간에 뭐가 누락되고 빠져버렸어요? 여전히 ‘나는 안 살아도 되잖아.’라는 살지 말아야 된다는 의지가 빠져 있잖아요. 그런 질문을 궁금해한다는 자체가 그 바닥에 이거라도 알아서 나는 기어이 살고 싶어라, 딱 그걸 감추고 있는 거예요.
금 신상을 엎어놓으면 역사가 되고 세워놓으면 이게 묵시가 되는 거예요. 다니엘은 이 둘 다를 알았어요, 금 신상을 통해서. 본인이 해석했으니까요. 본인이 해석했잖아요. 그때 그 다니엘에 대한 하나님의 지칭이 인자(人子)였어요. 인자야.
다니엘보고 “인자야” 부르는 것은 주님이 다니엘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똑같은 거죠. ‘너 나지, 그렇지?’ 이런 뜻이에요. 주님이 주님의 자기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거예요.
인자야. 이름 부르고 그 이름이 해야 될 일은, 보이지 않는 묵시가 나타나려면 역사로밖에 나타날 수 없죠. 그래서 지난 설교 때 히브리서 11장 3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렇다면 명석한 여러분들은 아실 거예요. 보인다=나타난다죠. ‘보인다’는 하나의 정지된 거고 ‘나타난다’는 것은 운동성을 포함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보인다’와 ‘나타난다’ 둘 다를 같다고 보면 여기에 대한 결론은 뭐냐? 아니다. 보인다=나타난다=아니다. 독일말로 Nein. No. 부정이죠. 아니다. 아니다,니까 이건 환타지가 되죠. 망상, 환상. 망상이 망상을 바라보고 있는 거죠.
남편이라는 망상과 아내라는 망상, 둘이 결혼식을 하면서 “옆에 있는 남편을 한평생 사랑할 수 있습니까?”하고 망상적인 주례자가 질문을 하고 “예”라고 이야기하죠. 남자도 예, 여자도 예,라고 하죠.
[아이는 말을 하면서 자기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 아이는 말을 하면서 자기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어른들이 요구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자기와 상관없어요. 어른들의 욕망이죠, 어른들이 요구하는 말을 자기가 내뱉는 겁니다. 이 아이가 자라면 뭐가 됩니까? 어른 되죠. 어른은 말을 하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요. 인간은 낮에 전화 1시간 반 하면서 “뭐 아직 할 말은 있지만 우리 여기서 끊자.”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래, 들어가라.”하고 끊었어요. 그동안 무슨 말했습니까? 자기가 무슨 말했는지를 몰라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자기가 무슨 말하는지 모른다는 말은, 앞에다 하나 붙이면 돼요. [말의 능력이 아이를 말하게 해버렸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기존 세계에 떠도는 말 또는 부모의 요구가 아이로 하여금 숙달되게 하고 부모가 기뻐하는 말이 무엇인지 단어를 익혀놨다가 부모가 요구할 때 부모가 준 말을 부모에게 되돌려주는 겁니다.
이게 아이의 말이라면 어른도 마찬가지죠.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결혼해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남편보고 오빠라고 했을 때, 평소에 ‘오빠 오빠’하다가 명절날 시댁에 가면 시부모가 막 나무라죠. “결혼했을 때는 그렇게 하면 안돼. 여보라고 하든지 해야 돼.”라고 지적을 하죠. 그다음 명절에 갔을 때는 ‘오빠’가 빠지고 ‘여보’가 되는 거예요.
그 공동체가 원하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내가 그 공동체에 소속감, 정서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굳이 충돌할 필요 없잖아요. 만약에 충돌하게 되면 자기 형편에 살기가 힘들단 말이죠. 왜냐하면 김장김치 안주니까. 삐쳐서.
그래서 이런 질문을 인간이 못하는 이유가 인간을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런 겁니다. [인간은 망한다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 자기가 망하는 걸 희망하지 않기 때문에 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뭔지 몰라요. 사람들이 ‘망했다 망했다’ 하는 것은 자기가 현상유지하려고 하는데 그게 약간 실패하거나 미진했을 때 ‘망했어 망했어’ 하잖아요. 그런데 진짜 망한 걸 몰라요. 현상유지에서 약간 후퇴한 걸 망했다 하지, 아직까지 망함의 끝을 몰라요.
솔직히 말해서 인간은 이 땅에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못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뜸들이지 않고 사태를 그냥 시원하게 제가 노출하면 이렇습니다. 묵시에 대해서 그림자라고 했는데 [묵시의 주인공 앞에서 묵시로부터 나온 역사의 모든 인물들은 그냥 시체들]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실 때에 그들을 살아있는 시체로 만들어버렸어요. 묵시의 주인공은 언약의 주인공이에요. 그러면 묵시의 주인공에게 그 밑에 있는 이스라엘은 뭐냐? 이미 죽은 자들이에요. 죽은 자들을 묵시가 움직이게 만들어요,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그래서 말씀 안 지키면 망했다,가 아니라 이미 망했다는 그 내용을 그들의 고백을 통해서 ‘누가 망하게 했고 그 망한 자는 누구냐?’ 양쪽 내용을 다 함유해서 보여주게 되면 그게 바로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니엘보고 인자라 했어요. 인자가 있고 그 위에는 인자 같은 이가 있어요. 묵시(언약)의 주인공은 인자 같은 이가 되고 그 밑에 이미 죽은 자들은 인자가 돼요. 인자라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대표자 또는 대변자. 선지자니까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것은 이 땅에서 언약대로 죽으라고 보내신 거예요. 그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이 말은 주님의 모든 활동의 완성은 이 땅에서 인자가 죽으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10장에도 누가 나를 죽이는 게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 했어요. (요 10:18) 죽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죽기 위해서. 그런데 그 죽음은 일반 인간들이 죽는 죽음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죽어야 돼요. 언약에 의해서.
그러면 언약의 완성이라 하는 것은 언약의 대상자 되시는 분이 죽는 것이 언약의 완성입니다. 그래야 살과 피가 나오기 때문에. 지금까지 쭉 설명한 것처럼 인간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지금 p.250 위에서 8번째 줄에 나오는【그렇게 되면 세 개의 층, 즉 제일 아래층에 자리 잡은 7이레라는 층은,……】쭉 나오죠. 그 내용을 설명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야 될 게 굉장히 많습니다. p.250 8번째 줄에 바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제가 그림 하나 그리겠습니다. (*맨 위 이미지 참고) 언약의 묵시적 주인공(S)이 역사적 인물($) 하나 등장시킵니다.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 대변자, 선지자. 그러니까 묵시가 역사적 인물로 역사 속에 보내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역사 속에 시간따라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쭉 살겠죠.
그러면 그들이 제대로 어떻게 사는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감시하는 게 아니라 같이 따라갑니다, 언약적으로. 휘감아버리죠. 동행이죠. 언약의 동행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내내 동행을 하죠. 한순간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자기 작품을 자기가 떠날 수 없습니다. 쭉 같이 가는 거예요. 이게 구약입니다.
자, 신약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구약에서는 S와 $ 이 둘이 역사라 했잖아요. 신약에서 십자가는 역사가 아니고 사건이 돼요. 사건이 되는 겁니다. 사건은 종합인 동시에 모든 것의 완료가 돼요. 완성이 되는 거예요. 사건 안에 묵시+역사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 세례 요한은 사람들 보기에는 혼자 있어요. 눈에 보이기에 혼자 있잖아요. 그런데 세례 요한 본인은 자꾸 누구를 불러요. 누굴 부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그리스도]를 이렇게 같이 묶어버리면 합작. 주님의 죽으심에 같이 죽어버렸죠. 그분은 흥해야 되고 나는 잘려야 된다는 거예요.
요한 앞에 뭐가 붙습니까? ‘세례’ 요한. 합작. 연합. 세례라 하는 것은 연합하는 겁니다. 결합되어 있다. 합작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신약이고 세례 요한까지가 구약이고. 구약과 신약이 죽음을 통해서 같이 예수님 안에서 완료가 되고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이것은 십자가니까 이게 사건이 되죠.
이 사건이 그다음 남은 역사에 퍼져버리면 그 남은 역사를 종말의 기간이라 합니다. 종말의 절차. 종말의 절차에서는 노선이 중요한 거예요. 이미 완성되었느냐, 아니면 완성됨을 향하고 있느냐. 그 인식의 차이. 이미 사건이 이렇게 종말이 돼버리면 기존의 역사라 하는 것은 더 이상 종말 속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이미 십자가로 다 끝났기 때문에.
예를 들면 401번 버스와 급행 1번 버스가 있는데 401번 타고 갑니다. 401번 타고 가다가 그다음에 좀 빨리 가야겠다 싶어서 중간에 내려 급행 탔어요. 노선변경이죠. 노선변경이면 401번은 어떻게 됩니까? 안 갑니까, 자기대로 가겠어요? 나 내려줬다고 운행중지입니까? 아니죠. 그냥 자기대로 가는 거죠.
급행 1번을 빨간색으로 한다면 급행 1번은 하나의 사건의 반복이 되고, 401번은 역사의 이어짐이 되죠. 역사의 이어짐이 되니까 이어져봤자 이것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역사가 이어져봤자 의미가 없어요. 의미는 어느 쪽에 이미 옮겨졌습니까? 모든 의미는 급행 1번으로, 사건 안으로 다 옮겨져 있는 거예요. 사건 안으로.
그러면 사건에 올라탔던 사람은 같이 버스가 당분간은 같은 길로 갈 거잖아요. 노선은 바뀌었지만 당분간은 바뀔 때까지 갈 거 아니겠습니까. 갈 때 이 401번 버스에 대해서는 무의미함을 아는 거예요. 저건 의미 없는 거예요. 저거는 꼴아박는 거예요. 이미 저것은 망하는 역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신약에 와서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질문이 뭐냐 하면 “나는 다 끝났는데 왜 아직 살아있지? 왜 나 아직 안 망하고 있지?”라는 질문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쪽이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부부끼리 이야기하다가 “여보, 이번 달에 수입이 350 들어왔어.” 그럴 때 “그런데 왜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지? 왜 우리가 아직도 돈이 필요하지? 주님, 이거는 뭔가 잘못됐잖아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더 밥 먹고 살라는 이야기인데 왜 굳이 우리가 살아야 합니까?” 아까 그 질문, 일반 사람들은 누락하는 그 질문을 성도는 하게 되는 거예요. 왜 살아있어야 합니까?
그래서 이 순서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묵시에서 역사로 갈 때 세 가지 순서에요. 압축되고 그다음에 삭제되고 그다음에 대체돼요. [압축→삭제→대체] 압축이 되고 삭제가 되고 대체되는 방법으로 다른 노선, 노선이 달라야 돼요. 노선이 다른 것을 설교시간에 제가 방향이 다르다 했죠. 방향이.
아까 질문 다시 하겠습니다. “바르게 사는 것이 가장 큰 유혹이고 최후의 유혹이다.”라고 할 때 “왜 그래요?”라고 누가 반박을 하면 여러분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바르게 사는 것이 엄청난 악마의 유혹이라 할 때, 그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이미 우리 죄로 망했잖아요. 망했는데 아직도 잘 살아야 된다는 미련을 갖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잖아요, 이유가.
그런데 사건 안에 십자가 안에 안 들어온 사람한테는 다시 말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려고 깝쭉대는 사람한테는 뭐가 가장 큰 매력이고 미끼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바르게 살면 구원해주십니까?’가 아직도 그 사람한테 유효한 거예요. 악마의 시험이 아직도 유효한 거예요. 기존 노선에 살던 내가 삭제 안 된 거예요.
압축을 해서 삭제해버리는 겁니다. 압축이라 하는 것은 모든 역사를 압축해버리면 역사의 끝이 되잖아요. 역사가 너는 다 안 살아도 나이 적어도 다 살았다 치고 역사의 끝 공간에다가 우리의 노선을 변경하는 그게 사건이에요. ‘내가 산다’가 아니라 ‘내가 사건이다’가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의 사건이 되는 거예요.
이번 달에 350만원 들어왔다고 하면 “그거 사건이네!” 사건의 특징은 우연성, 우발성이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요청하지 않는 사태가 일어나는 걸 사건이라 합니다. 내가 요청하지 않은 사태. 그거 사건이네. 이 지옥에서 뭘 더하란 말입니까, 주님이여. 빨리 제대나 시켜주지, 뭐 할라고 지옥에서 살게 하십니까.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그걸 이제 풀어나가야 돼요. 왜냐하면 다니엘은 묵시에 속한 인물이잖아요. 묵시적인 걸 아니까. 다른 사람은 역사만 알지만 다니엘은 묵시 속에서 인자라고 불리우면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미리 알았죠. 그러면 다니엘 인자 안에 뭐가 압축되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 백성이 압축되어 있는 거예요.
압축되어 있으니까 성공적으로 이 역사 속에서 이미 삭제된 사람으로 있는 거예요. 이 역사 속에서 죽어야 죽는 게 아니고 살아있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이 역사에서 삭제된 거예요. 삭제되었다는 구절은 골로새서 3장 3절에 나옵니다. 이거 너무 찾아서 나도 식상해요. 저도 식상한데 그래도 여러분만큼 실력 없는 사람을 위해서 또 배려를 해주셔야죠.
실력 없기는 제가 실력 없습니다. 수요설교 하는데 끝나고 난 뒤에 유 집사님이, “목사님, 40주야(晝夜)가 어떻게 40주간입니까?” 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 또 다른 집사님이, “어릴 때부터 알았습니다. 40일간 동안 비 왔다고.” 그러니까 어릴 때 주일학교 때부터 알았던 40일을… 내가 그 본문을 읽었거든요. 창세기 7장을 읽으면서 왜 제 눈에 40주‘야’가 40주‘간’으로 바뀌었는지… 주야가 주간으로 바뀐 거예요. 그게 나이가 많아서 그래요. 솔로몬 성전을 7년 동안 지었고 자기 왕궁 짓는데 13년 걸렸거든요. 그런데 솔로몬 성전을 3년 만에 지었다고…. 그게 내가 외워놓을 때 3, 7로 외워놓은 거예요. 7, 13인데 7과 3으로 끝에만 기억해놓으니까 그냥 되어버린 거예요.
뭐 그렇게 해도 다 끝난 상태인데… 맨날 오류야. 맨날 오류고 맨날 틀려도 그것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럼 죽은 티를 좀 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아, 이래서 짓이겨 밟혀 죽어야 되는구나. 주일학교 애들도 아는 거예요. 40일간 비 왔다는 거.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죠. 그런데 그때 ‘야’자가 ‘간’자로 왜 바뀌었는지….
압축을 하면서 삭제하는데요. 압축한다는 것은 누군가 대신하려면 우리가 역사적으로 미진한 것이 오늘 있고 내일 또 내가 있으면 압축이 안돼요. 우린 압축을 해도 과거에서 현재까지만 압축이 되지, 내일 모레까지 압축이 안돼요. 살아봐야 압축을 하죠. 그러니까 한꺼번에, 모레 한달 뒤 십년 뒤 백년 뒤 안 살아도 한꺼번에 압축되는 요건이 있어줘야 돼요. 그런 조건이 있어야 된다고요.
압축됨을 잘 표현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압축을 어떻게 시키는가? 이렇게 시키죠. 누가복음 1장에 나오죠. 누가복음 1장 69절에 보면 사가랴가 그냥 자기 말이 아니고 성령에 충만해서 하는 말이,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지금 사가랴가 성령에 충만해서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66절에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이가 누굽니까? 세례 요한이죠.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심이러라”) 세례 요한이 앞으로 어떻게 살까, 는 아무 의미 없어요. 세례 요한은 말씀에 의해서 압축되어 있어요.
압축이란 말은 쉽게 말해서 세례 요한이 앞으로 자기 의지로 활동으로 어떻게 하겠냐 그런 것을 전부다 제거한단 말이죠. 네가 어떻게 살 것이란 것은 네 행동 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고 그전에 이미 확정된 거예요. 파일을 압축한다는 말은 모퉁이는 적어도 거기서 새록새록 새롭게 이미 거기에 담긴 내용이 나오는 겁니다. 레코드판처럼 나오는 거예요. 레코드판이 있지만 거기서 노래가 보입니까? 안보이죠. 그런데 다이아몬드 박힌 뾰족한 촉을 놓게 되면 거기서 파장이 바뀌면서 음파가 돼서 나오잖아요. 그래서 소리가 들리잖아요. 그게 안에 압축된 거죠.
그러니까 성도는 본인의 인생 내가 어떻게 반듯하게 살고 국민학교 때 내신 성적 얼마고 어느 대학 나오고 결혼 누구랑 하고 아무 소용없어요. 주께서 뽑아낼 것은 뭐만 뽑아내느냐 하면 예언된 것만 뽑아내요. 예언된 것. 그게 누구여야 된다고요?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어야 돼요.
그 마지막 이스라엘 선지자가 누구냐? 세례 요한이잖아요. 이스라엘 세례 요한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이 왜 죽어야 되느냐’도 맞는 말이지만 ‘내가 왜 예수님 때문에 죽어야 되는가’도 같은 말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성도의 묵시적 삶은 어떻게 될 수 있어요? [예수님이 왜 죽어야 하는가]죠.
‘예수님이 왜 살아나야 하는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왜 죽어야 하는가’에요. 예수님 혼자 살아나버리면 구원이고 뭐고 없어요. 천국 없어요. 우리 아무도 천국 백성 안 됩니다. 예수님 혼자 잘나서 혼자 죽고 혼자 부활해버리면 천국에 덩그러니 혼자만 가요. 그렇잖아요. 예수님 부활하셨다. 좋겠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우리가 합류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에 합류가 되어야 돼요.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삶은 반복적인 삶은, 이제 사건이니까 반복이 돼요, 삶은 뭐만 나오겠어요?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오겠죠.
그래서 죄가 나오지 않는 자는 성도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는 죄짓는 게 목적이에요. 본인이 의도해서 짓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압축파일을 푸는 거예요. 너희들이 이런 죄가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과 짝을 이뤄서 그 죄를 위해서 이렇게 죽었다.
죽었다는 점에서 둘 다 같은 합작이 되어있는 거예요. 합작을 뭐라 했습니까? 세례. 세례된 상태에서 새로운 이스라엘 속에서 인자되시는 분이 죽으신 이유를 그 주변에 있는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연관해서 계속 사건적으로 반복해서 증거되게 뽑아 나오게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우리 과거의 모든 역사적인 것은 삭제되고 그다음에 완벽한 완전한 이스라엘로 대체가 되는 겁니다. 대체가. 바뀌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방금 이 말에 의해서 여러 가지의 실생활을 묘사할 수 있는 원칙들이 여기서 마구마구 무한대로 많이 쏟아져 나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인정하신다면 [매순간 우리는 최후를 맞이한다]. 그렇죠? 비슷한 말로 [지금의 나의 자리는 최후의 장소다]. 나의 최후의 장소가 되겠습니다. 이걸 더 응용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응용이 될 수 있어요.
또 응용이 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쭈쭈바 신세다]. 여름에 쭈쭈바 튜브로 되어있는 얼음과자 먹을 때 반 먹고 버립니까? 아니죠. 쪽쪽 다 뽑아내죠. 쪽쪽바. 그러니까 쭈쭈바가 쪽쪽바에요. 쪽쪽 다 뽑아내는 거예요. 내가 한 평생 살아왔던 모든, 애쓰고 노력하고 건사했다고 여겼던 것, 내 실적, 업적이라고 여겼던 것을 바깥의 힘이 바깥의 하나님의 완성의 힘이 십자가의 효과가 내 안에 있는 것을 완전히 쪽쪽 다 뽑아내는 거예요.
이 논리를 더 진전시켜버리면 성도는 내가 내 안에 담을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한 적이 없다. 내 안에 나만의 것, 나만의 가치 있는 것, 나만이 자랑질할 수 있는 것, 나만의 의미 있는 것을 누가 용납 안한다고요? 주께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죠. 주께서 주신 것이 내게 담길 걸 주신 것이 아니고 내가 담지 말고 뽑아낼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강남강의에선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구약에 시편 보면 굉장히 많이 나와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를 지키는 분이시다. 왜 그러냐 하면 강남강의에서 간단히 언급했어요. 자기 것이 들어있으니까 자기 것 지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내 것 되라고 주신 적이 없어요. 주께서 주셔놓고 그걸 뽑아내는 거예요. 주님의 언약 완성을 집어 넣어놓고 쭈쭈바 먹듯이 뽑아내는 겁니다.
그거 뽑아낼 때 기어이 그건 내 겁니다, 하고 달라붙은 거 있잖아요. 그렇게 달라붙는 그 성격과 그 성질, 그게 알라딘 램프 안에 들어있는 괴물이에요. 제가 어릴 때 알라딘 이야기 듣고 신기한 게 있었습니다. 그 덩치 큰 괴물이 작은 호리병 램프 안에 어떻게 공간적으로 들어가 있느냐. 그게 말이 되냐. 이제는 이해하죠. 우리 안에 마귀 들었다는 것을 이제는 이해하는데 영적으로 이해가 되는 거거든요.
우리 안에는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인물로 미래에 대해서 희망과 소망을 갖도록 만든, 그리고 네가 바르게 살아야 구원받는다 하는 이 모든 악마적인 것이 너 자신이 호리병처럼 돼서 램프처럼 돼서 거기서 네가 그런 게 아니고 네 안에 마귀가 괴물이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괴물을 매일같이 뽑아내는 거예요. 나와, 나와! 나온나. 이렇게 하죠. 나오라 하는 거죠.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은 제 설교를 듣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더러 있어요. 이근호 목사 설교 들으면 자기가 피폐해진다는 거예요. 맞아요, 맞아! 피폐했다고 기뻐하는 게 아니고 피폐했다고 분노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나다움을 내세울 게 남아있지 않잖아. 그럼 나는 못살아.’하는 그게 바로 악마의 소리에요. 악마는 아직 안 기어 나왔어. 마지막에 버티고 있는 거예요.
제가 여기 알루미늄 호일을 준비했는데요. 호일이 편평하죠. 그런데 호일을 구기면 구겨지죠. 어느 게 볼품 있습니까? 펴진 게 예쁘잖아요. 빛이 나는 사람 아닙니까, 김호중 노래에 나오는. 그런데 구겨진 건 이게 뭐야, 이게. 내 인생 이거 완전히 구겨졌어요.
더 구겨라. 안에 내용물이 하나도 없어. 세리와 창기입니다. 강도에요. 안에 있는 거 어떻게 되었나? 주님이 다 가져갔어요. 어디 필요해서? 주님 자신의 십자가의 공로, 행함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데에 필요해서 우리의 죄를 가져간 거예요. 이렇게 구겨지는 겁니다. 주께서는 성도를 이렇게 만듭니다.
그런데 피폐하다고 분노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설교를 잘 들었어요. 들었는데 반짝반짝 펴진 호일이고 싶어. 나도 신자이고 나도 복음 아는 성도라고 광고, 선전하고 싶은 거예요. 세례 요한 되기 싫어요. 목 잘린 세례 요한 절대로 되기 싫어요. 사도 바울처럼 유명하고 싶고 스데반처럼 유명하고 싶어요. 그러나 실제로 누구를 구원하고 안하고는 주의 일이지, 우리는 쪼그라들 일만 남아 있어요.
아직 멀었어요, 이 정도 구겨지려면. 더 쪼그라들어야 돼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보세요. 이 마지막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들이 죄인 중에 괴수가 되잖아요. 하나님마저 죽였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구겨진 호일처럼 아무것도 없게 하는 겁니다. 주의 일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주의 일답게 드러나는 하나의 시작점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30623b 열왕기상18장 18절(압축 삭제 대체)-이 근호 목사
p.250 위에서 9번째 줄에【그렇게 되면 세 개의 층, 즉 제일 아래층에 자리 잡은 7이레라는 층은 비록 ‘성전 재건축’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품고 있으나, 그 역사 자체가 1이레 층의 입장에서 보면 ‘(묵시적) 사건’이라고 규정할만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7이레가 지닌 역사는 인류 전체 역사를 대변해주는 묵시적 의미 층으로 작용하게 된다.】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죠.
무슨 뜻인지 감은 잡는데 여기서 필히 집어넣어야 될 게 있어요. 집어넣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묵시와 역사의 만남에서 반드시 심판이 작용한다는 것을 빠뜨리면 안돼요. 심판이 작용한다.
7이레+62이레+1이레=70이레잖아요. 그럴 때 7이레 안에 성전 재건축이 들어가요. 그러면 62이레는 7이레에 재건축한 성전에 대해서 무슨 일이 시행된다는 말입니까? 뭐가 작용하죠? 심판이 작용하죠. 7이레+62이레+1이레=70이레 이렇게 돼버리면 역사가 돼서 심판이 없어요. 뭐 성전 부서지면 또 만들면 되지, 이렇게 된다니까요.
그게 아니고 이걸 삼각형으로 보자 이 말입니다. 제일 위에 1이레, 그다음 중간에 62이레, 마지막에 7이레가 되면서 이 세 층을 가름하는 하나의 차단막, 여기서 심판작용이 수입되는 겁니다. 7에서부터 62, 62에서 1로 올라올 때 여기서 두 개의 심판을 거치는 거예요.
첫 번째 심판은 이스라엘에 대한 이방민족에 의한 심판이에요. 성전 재건축할 때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자재를 조달해서 지었습니까, 아니면 이방나라가 도와줬습니까? 성전 지으라는 지시까지 주도권을 누가 쥐었습니까? 이방민족의 바사나라 고레스 왕이 쥐었잖아요. 그렇죠? 그 전에 바벨론 국가는 성전을 부수는 역할, 그 바벨론 이후에 바사나라 특히 고레스는 성전을 재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 그것을 이사야서에서는 메시아로 본 거예요. 메시아로, 고레스 왕을. (사 44:28-)
그렇다면 성전을 짓게 했다, 이것은… 이방민족 그다음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이스라엘이 있는데 이스라엘을 누가 포위했다는 말입니까? 이방민족이 포위한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갇혀있죠. 빠져나올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함께 있는 성전을 지으라고 이야기했어요. 성전을 지으라고. 이 말은 이스라엘 속에 여전히 묵시적 사건 요소가 함께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가 망했지만 여기는 뭐가 둘러싸였다? 하나님의 언약이 칭칭 감겨 함께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역사의 끝을 향하여 가는 거예요. 거기서 성전을 지으라고 한 거예요.
성전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함께하는 장소가 성전이에요. 성전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렸다는 말이고 성전을 만들라는 것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전 만들라 하는 것을 이방 민족한테 시킨 거예요. 이 말은 너희들이 이방 민족에게 잡힐 수밖에 없는, 이방 민족에 소속된, 이방 민족과 한 덩어리된 것으로 인하여 성전이 깨어졌다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시겠죠. 이제 좀 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다시 오늘날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 인생이 힘든 이유가 뭐냐? 누가 괴롭히기 때문에] 그래요. 괴로운데 왜 힘들죠? 괴롭히는데 왜 힘이 드냐 이 말이죠. 질문 자체가 억지 같은 느낌이 드는데 아니 누가 괴롭히는데 그게 왜 힘듭니까?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죠. 그럼 힘들지 않은 경우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여건이 다 충족될 때 비로소 내가 힘들지 않죠.
여기서 우리가 저렇게 (이방 민족에 포위당한 이스라엘이) 끄집어내질 때 삼각형의 제일 위층인 1이레가 ½+½로 바뀌는데요. 나중에 이렇게 분화가 돼요. 원래 1은 최종 숫자기 때문에 ½로 나눠지는 건 없습니다. 1이면 1이지, 반 반이라 하는 것은 벌써 2, 3, 4, 5, 6,…의 원칙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해요.
1이 ½+½이 된다는 것은 1의 내부성이에요. 1의 내부성이고 이것은 분석적입니다. 1 내부를 분석하는 거예요. 1 내부를 분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1에 의해 작용하는 이 1이레를 62이레, 7이레 여기다 다 적용시킬 수 있어요. 제일 위에 있는 성질이 아래층에 있는 묵시층에도 동일하게 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다 70이레에 한통속으로 묶여있기 때문에 그게 성립이 돼요.
분석적이란 말을 제가 표현한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이해하고 묵시와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히 유대교를 분석해야 돼요. 유대교를 분석해야 됩니다. 우리는 그냥 막연하게 유대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우리가 알 필요 없고, 이렇게 되면 안돼요. 알 필요 없고,가 아닙니다. 분석해야 돼요. 파헤쳐야 돼요. 유대교에 대해서 파헤쳐야 돼요.
그런데 유대교는 유대교를 파헤쳤습니까, 파헤치지 않았습니까? 파헤칠 수가 없어요. 그게 마태복음 7장의 원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은 유대인들이 분석하고 평가를 했는데 예외가 있어요. 유대인 자신들은 분석하고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산상설교에 포함되어 있어요. 산상설교는 모세의 율법적 기능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의 자리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한 이유가 뭐냐?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근원적으로 괴롭히는 거예요. 왜 주님이 우리를 괴롭히느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감추기 급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외부의 압박에 대해서 첫째는 외면하고 도피하는 경향이 있고 또 하나는 거부하는 경향이 있어요. 도피하는 경우를 가지고 히스테리, 신경증이라 하고 거부하는 것은 정신병이라 하는 거예요.
정신병자의 특징은 어떤 외부의 지시와 명령을 완전히 부정해버려요. ‘나는 나폴레옹이다.’ ‘그거 아닌데?’ ‘내가 나폴레옹이라면 나폴레옹이야.’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거 정신병이에요. 히스테리 신경증 환자는 ‘너는 바르게 살아야 돼.’ ‘그래, 바르게 살아야 돼, 바르게 살아야 돼. 그런데 바르게 살 자신이 없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거에요. ‘아, 바르게 사는 걸 내가 잊어버려야 돼. 피해야 돼.’ 거부하는 게 아니고 피한다는 말은 바르게 사는 것에 끝까지 종속되어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둘 다의 특징이 있어요. 신경증과 정신병 둘 다의 특징이 있는데 둘 다 공통점이 범사에 감사가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지를 않아요. 하나는 바들바들 떨고 있고 한쪽은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어요. 하나는 버들버들 떨고 있고 한쪽은 ‘나는 내 식대로 산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산상설교 하실 때 생명의 길은 유대교 속에 있다는 거예요. 생명의 길이 유대교 속에 있다. 쉬운 예를 들면 숲속에 잡풀이 무성하죠. 숲속에는 잡풀이 무성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가보면 거기에 길이 나 있어요. 잡풀만 있었는데 길이 나 있다고요. 왜 길이 나 있죠? 누가 밟았어요. 누가 밟은 거예요.
길은 어디에 있느냐? 밟힐 때 있는 겁니다. 유대교를 밟아줄 때 주께서는 산상설교로 유대교를 밟아준 거예요. ‘왜 너는 너 자신을 분석 못하고 왜 너 자신을 근원적으로 비판 못하느냐?’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이게.
왜 그들은 예수님 말을 안 듣느냐? 신경증자이거나 안 그러면 정신병자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여, 왜 우리를 괴롭힙니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열왕기상 18장 16절에 보면,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17절,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이랬어요. 엘리야에 대해서 뭐라고 묘사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다. 18절에 엘리야가 말하기를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이렇게 돼있어요.
결국은 들어보니까 무슨 싸움입니까? ‘엘리야야, 왜 우리를 괴롭히느냐?’ 이런 거예요. 우리 식으로 한다면 ‘하나님이여, 왜 우리를 괴롭힙니까?’ 하는 거예요. 신경증 환자 아니면 정신병 환자에요.
주께서 감사하라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복음을 전했는데 그게 감사와 기쁨으로 들리는 게 아니고 뭐로 들립니까? 나를 괴롭히는 걸로 듣고 있는 거예요. 괴롭히는 것치고요. 바로 왕을 가장 괴롭힌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모세. 모세는 누가 보냈어요? 하나님이 보냈죠.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괴롭히고 괴롭힘을 당하는 대상과의 만남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여기에 대해서 악마의 속셈은 그거에요. 하나님이여, 선악과 가지고 그렇게 우리한테 장난치는 거 아닙니다. 일단 따먹어버려. 더 이상 네가 하나님 앞에 괴롭힘을 당할 이유 없어. 선악과 따먹어버리면 이젠 하나님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너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립적으로 살 수 있어.
그게 악마의 마음이거든요. 알라딘 램프 안에 악마가 들어 있잖아요, 우리 몸에. 그러니까 주께서 이야기할 것은 네 속에 악마 있다는 거죠. 악마가 들어있음을 전제로 해서 주께서는 말씀을 전하고 거기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당신이 뭔데 우리를 괴롭히러 왔습니까? 무덤 속에 있는 그 귀신처럼. 당신은 그렇게 평생 괴롭혀도 아직 멀었습니까? 왜 자꾸 따라다니면서 괴롭힙니까? 라는 식으로 반항을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삼각형 다시 봅시다. 역사로서는 아래층부터 7이레→62이레→1이레 이렇게 올라가잖아요. 묵시적 의미는 맨 위 1이레부터→62이레→7이레로 내려오면서 괴롭힙니다. 묵시가 역사적 인물들을 괴롭혀요. 역사 속의 인물들을 괴롭힙니다. 괴롭힐 때 인간은 괴롭습니다, 하고 가만있을 존재들이 아니에요. 속에 마귀가 있기 때문에.
자, 방금 제가 마귀이야기 했잖아요. 마귀의 목적은 ‘네가 신처럼 돼라’에요. 네가 누구한테 괴롭힘을 당할 필요도 없고 당해줘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네가 우뚝 서서 자립하라는 거죠. 감사가 자립과 equal(=)돼요? 감사와 자립이 같은 말입니까? 반대말입니까?
자립은 자기가 자신에게 감사하는 거죠. 그러나 성경에서 감사는 누가 했습니까? 나 말고, 나는 제치고, 나는 아니야, 나는 아니고 다른 분이 감사의 대상이지, 나는 아니야. 감사의 대상은 따로 있어요. 지금 이 관계가 감사잖아요. 어떤 유명한 분이 이야기한 것처럼,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지금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게 혼자 사는 겁니까, 아니면 누구의 지시받고 삽니까?
지시받고 사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괴로운 거예요? 뭐 주님이 가라 하면, 아이씨. 또 오라 하면, 아이 정말… 언제까지 주님한테 가스 라이팅 당하고. 언제까지 시달려야 되는데? 언제 저를 풀어줄 거예요, 주님? 언제 내가 독자적으로 나만의 소박한 삶을 만끽할 수 있습니까? 그때가 언제입니까? 천국 가서 그렇습니까? 이러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말하시는 성도라 하는 것은
■1 ‘네가 주님한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는가? 어떤 점에서 당했는가?’를 우리에게서 찾는 거예요.
■2 찾을 때 자기가 다 홀쭉하게 된다 할지라도 ‘지금에 있는 나를 기꺼이 폐기처분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동안 내 걸 내 거라고 여겼던 그 지긋지긋한 자기의 예속관계, 철저한 자기에 대한 집착을 이제는 그만두게 된 기쁨, 그걸 자유라고 하거든요. 그 기쁜 자, 그 사람이 바로 성도에요.
<명량>이라는 이순신 장군이야기 영화에서 사람들이 제일 듣고 싶은 대사가 그거거든요. “장군님, 아직도 배가 열두 척 남아 있습니다.” 안돼~! 아직 열두 척 남아 있으면 안되죠. 우리에게 배가 남아 있으면 안돼요! 왜군한테 다 불타버려야 돼요.
인간의 시작은 망상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망상이라 하는데 보통 정신분석학자들은 그걸 다른 말로 상상이라 해요. 상상. 상상이란 이미지를 우리말로 번역한 건데 이미지의 세계에요,
㉮어린 애들의 세계는. 어린 애는 이미지 속에 자기가 하나의 이미지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애가 자아가 생기고 자립을 할 때는 ‘저건 이미지야. 거울에 비친 내 이미지지. 내가 그 이미지가 아니야.’하고 더 이상 그 이미지를 붙잡지 않는 데서부터 자립해요, 인간은. 독립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모호한 이미지 세계에서 갑자기 절대적인 나라는 것이 따로 거기서 구성이 돼버렸어요. 구성이 되니까 그다음부터는 더 이상 이미지에 놀아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가 되면서 인간은 자아가 발생됩니다.-상상계
물론 그걸 부모가 용납하지 않죠. 짐승처럼 제 맘대로 되면 안되니까. 그때부터 계속해서 ‘너 말이야. 너 말이야.’ 너라고 지칭할 수 있는 대상자로 굳어졌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너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부모의, 아버지 이름의 압박감, 억압이라 하는데 그냥 쉬운 말로 압박감을 갖게 되면서 내 자신이 누군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구의 심볼(symbol)이며 누구의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이걸 상징계라고 이야기해요.
㉰‘너는 이런 사람이어야 돼’라고 누가 지시해줘야 비로소 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상상계에 처음 나올 때는 자아가 되지만 상징계에서는 이걸 자아라 하지 않고 주체라 이야기합니다. 주체는 외부에서 지시와 연결되기 때문에 본인이 책임감을 갖게 돼요. 책임감.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했죠. 자아가 형성되기 전에 어린아이는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내가 만약 어린 애다.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는 어린 애다. 그런데 어린 애인 내가 누구 다른 애를 때리잖아요. 때리면 뭐가 우당당 쾅, 하고 앙, 우니까 그때 부모가 무슨 일 있지 싶어서 올 거잖아요. 그러면 때린 내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엄마, 쟤가 나한테 맞았어.”라고 이야기해요. 맞은 애가 울잖아요. 같이 울어버려요.
동화가 돼버린 거예요. 나로 따로 분화가 안 되는 겁니다. 한 몸이 되어버려요. 한 몸이 되는 거예요. 맞아 우는 애도 나고 때린 자도 나고. 이것이 성경 에베소서 1장 22절에 나옵니다. “그는 우리의 머리고 우리는 그의 몸이다” 예수님이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한 몸으로 한 겁니다.
뭐 배 열두 척 그거 필요 없어요. 어떤 것도 나한테 필요한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다 누구한테 필요한가? 그 나라 의를 구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에요. 그 나라 의를 구하는 데에. 주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고 우리는 공유된 겁니다. 그걸 세례라고 이야기하죠. 아까 누가복음에 세례 요한의 출생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자, 이것을 구약적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이레 삼각형은 안 지울게요. 구약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시내산이 있는데 시내산 위에 구름이 끼어있죠. 구름이 끼어있어요. 한자에 전운(戰雲)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이 운(雲)이 구름이에요. cloud. 구름 같은 거예요. 분위기. 전쟁할 분위기가 있다. 낌새가 있다. 전쟁할 분위기가 있다.
시내산에 구름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이것을 쉐키나(shekinah), 하나님의 영광이라 해요. 구름은 그냥 걷히면 그만인데 걷히는 게 아니에요. 구름이 어떤 생산을 해요. 어떤 결과물을 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이에요. 이 말은 위에 있던 구름이 언약을 모세보고 받아가라 하는 거예요. 율법을 받으라 했어요. 율법 안에 하나님의 전쟁의 구름, 영광의 심판의 모든 요소가 율법 안에 압축되어 있어요. 압축은 제거용이고 그다음에 더 나아가서 대체용이에요. 율법 안에 압축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애굽에 사는 히브리인들, 그냥 애굽사람이라 할 수 있어요, 히브리인이지만 애굽에 살기 때문에 애굽적 인식이 있는 사람 이 어중이 떠중이를 율법 안의 압축으로 같이 압축된 이스라엘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주님의 의지가 있어요.
하면서 율법에 위반된 것은 주께서 율법에 의해서 제거해버리죠. 불평하는 자, 원망하는 자, 진 끝에서부터 투덜거리면서 차라리 애굽으로 사는 게 낫지? 그치? 이런 거. 꼭 학급에 뒤에 있는 큰 애들, 껄렁거리면서 허세 부리고 있는 애들 있잖아요. 가위가지고 잘라버려요. 전부 퇴학이야. 집에 가. 오지 마, 오지 마. 그렇게 학교 오기 싫으면 오지 마. 하는 식으로 주님께선 너넨 애굽으로 돌아가든지 마음대로 해. 가버려.
애굽에서 나왔다는 자체를 이미 주께서는 그들을 죽은 자로 만들었어요. 홀쭉하게 다 빼앗긴 거예요. 이제는 율법의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저주받느냐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시 돌아갈 곳이 없어요. 하나님이 붙들고 있으니까. 구름이 와서 여기에서 내려옵니다. 그럼 밑에는 속됨이죠. 시내산이 있는 구름 쪽은 거룩이죠. 뭔가 번개가 번쩍 치듯이. 번개친다는 말은 심판의 대상이라는 거예요. 심판의 대상.
이 삼각형을 산으로 보자 이 말이에요. 맨 위 1이레에서부터 밑으로 내려오는 거예요. 62→7 내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처럼 성전을 지으라 이 말이죠. 성전을 지으면 내가 아주 제대로 부셔줄게. 성전 지어라. 내가 부셔줄게.
그래서 너희들이 성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가 망했던 이유를, 그 내력을 너희들이 압축해서 받아들인 자가 남은 자에요. 남은 자가 그다음 62이레를 통과할 수 있는 거예요. 이 두 개의 칸막이가 심판입니다. 저주입니다. 묵시는 역사와 만나서 우리를 심판하는 겁니다.
이제 유대인이 어떻게 반발하고 반항하는가? 유대인의 반발이 없으면 십자가 사건이 안 터졌으니까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예수님을 싫어하고 살려도 되는데 굳이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주님께서 굳이 죽이도록 유도했기 때문에 그래요. 유대인들은 “가소. 가소. 가소”’ 하는데 길을 막고 “나를 죽이지 않으면 너희들이 못 간다.”하니까 “가라니까, 너 훌륭한 거 아니까. 오 메시아. 자칭 참칭해서 유대인의 왕, 잘해보소.” 피하면 또 가로막고. 이거는 안 죽이면 안되는 쪽으로 주께서 유대인들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아까 그 아합이 엘리야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사람. 그러니까 엘리야가 뭐라고 대꾸했어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은 당신들이라 했죠. 이스라엘이라는 개념 자체가 갑자기 하나에서 둘로 분열된 거예요.
7이레에서 62이레로 오면서 [인간이 이해하는 모든 개념은 분열된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아까 그림에서 나왔던 S→ $, 주체인데 분열이 된 주체. 묵시(사건)냐 아니면 존재냐.
존재로 홀로 살래, 아니면 너를 사건으로 만드시는 다른 큰 존재에 의해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올래, 이런 거에요.
이스라엘은 이 S가 분열된 걸 몰랐어요. 모르고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준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큰 S에다가 자기는 작은 s라고 (S→ s) 겸손을 떨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한 거예요. 이런 대목은 시편이나 이사야 43장에 많이 나오죠.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가 지켜주마.
그런 구절들을 교회에서 얼마나 많이 활용합니까? 특히 20대 청년들 교회 오게 되면 상투적인 멘트가 뭡니까?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지켜줄게.’ 누가 들어도 이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거예요. ‘내가 너를 분열시켜줄게’ 그 뜻이거든요. 내가 너 쪼개줄게. 두 토막으로 쪼개줄게. 꿈, 희망? 아예 꿈, 희망 완전히 작살내줄게. 홀쭉하게 만들어줘봐? 가진 거 다 날리게 해줘봐? 이래서 결국 청년들이 교회 봉사한다고 피폐해가지고 교회에 다 바치고 기껏 간다는 게 필리핀 선교 가고.
그건 분열이 아니고 나와 없는 나, 있었던 나와 없는 나의 분열이죠. 인간과 인자의 분열입니다. 주님께 속한 자의 분열이에요. 이것을 나중에 사후적으로 일이 끝나고 난 뒤에 다시 이스라엘을 보게 하는 겁니다. 따라서 S→ $로 갈 때 여기 심판을 경유해요. 구원은 없습니다. 심판 뿐이에요. 구원은 없습니다.
왜 구원은 없느냐하면 주님께서는 작은 s를 구원 안해요. 구원은 S가 큰 S를 (S→S), 본인이 본인을 구원하죠. 그게 뭐냐? 나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나 스스로 있는 자를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카페에 손님이 한 50명 있잖아요. 그러면 전화와요. “야, 지금 손님 몇 명인데?” “나 혼자 있어.” 나 혼자 있어. “49명 소리 들리고 다른 사람 많은 것 같은데?” “그건 다 나를 위함이야.” 나의 나됨을 그들은 몰라. 나의 나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폐기되어야 될 49명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아예 없는 게 아니고 있는 이유는, 그런 과정에 포함된 자는 나중에 주의 백성으로서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사람으로서 그 카페에 같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의 일이 아니다]를 아는 사람이에요.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눈이 아프고 그래도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의 일이 아니에요. 그게 주의 일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항상 주님을 경유해서 오기 때문에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가 본인 일이 아니고 ‘가라 오라’ 하는 주의 일속에 본인이 거기 소환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백부장이 가라 오라 할 때 본인이 나선 게 아니고 자기는 자기만의 일이 있고 자기만의 갈 일이 있고 올 일이 있는데 주께서는 그걸 압축하고 나를 제거해버리고 그다음에 뭡니까? 제거하고 끝나면 안되죠. 주의 종으로 대체해버렸으니까 ‘가고 오고하는 이게 나의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의 일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모든 것은 경유하는 거예요.
이것은 물탱크를 거쳐 오는 거예요. 7이레에 있던 것, 62이레에 있던 것은 전부다 1이레를 거쳐서 다시 부여받는 겁니다. 압축하면서 제거되고 압축되면서 제거되고. 그러니까 압축이라 하는 말은 ‘나는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에서 많은 일을 나에다가 집어넣고 나를 제거해버린단 말이죠. 모든 일은 내가 했습니다, 하는 나 자체를 죽여버리는 거예요. 심판해버리는 거예요.
심판하고 그다음 단계로 올라가죠. 성전 지어라.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성전 짓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숙원사업이었습니까, 아니면 선지자가 하라 해서 했습니까? 뭡니까? 하라 해서 했어요. 숙원사업은 선지자만 이해하는 거예요. 선지자는 이미 묵시와 역사가 함께 있기 때문에 선지자는 이해해요. 그러나 다른 사람은 억지로 하면서 어떻게 하면 성전을 안 지을까 핑계거리만 찾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산발랏 그런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너희들 그렇게 억지로 하는 건 일 안돼. 내가 안 된다 했지?”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자, 주께서 이렇게 올라가면서 우리 인간들, 나 중심의 인간을 어린아이로 만드는 거예요. 분화되기 전의 어린아이로 만들어버립니다. 하지만 제가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야기한 것이고 본인 당사자들은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럽겠습니까? 극렬한 저항인데 그 극렬한 저항을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왜 저를 괴롭힙니까. 왜 괴롭힙니까.
보통 교인들은 밤에 잘 때, 감사의 기도하라 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교회에서 양육 받잖아요. 그래서 이불 펴놓고 마지막 잘 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감사케 하시고’ 하는 건 다 빈 말이고 속셈은 ‘주여, 오늘 하루도 왜 그리 괴롭히십니까.’ 왜 그리 괴롭히십니까. 괴롭힘 받는다는 이 억울함과 분노, 이것이 감사로 바뀌지 않으면 오늘 잠 안 자겠습니다. 뭐 있던데? 뭐 있었어. 그 요령이 있었는데… 그걸 깜빡 잊어버린 거예요.
분노가 감사로 바뀌는 요령이 있었는데 그게 설교시간에 늘 나왔잖아요. 다른 건 안 그러는데 그건 왜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요? 뭐 있던데… 요렇게 하면 분노가 감사로 바뀌는 무슨 비법이 잊던데… 아휴. 이 약을 잡수시면 식후 30분에 두 번씩 먹으면 됩니다, 뭐 이런 거 처방전이 있잖아요. 있거든요. 알고 싶어요, 또다시? 뭐 해줘봐야 잊어버리는 거 알지만 그래도 아직도 우리가 살아있다는 게 어딥니까. 죽기 전에 빨리 알아들어야죠.
분노가 기쁨으로 바뀌는, 또 서너 가지 하면 다 잊어버리니까 소용없고 둘만 할게요.
첫째는, 내가 현재 있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왜? 이게 중요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까 호일 있었죠. 호일이 왜 분노하냐 하면 이게 잘 안펴져서 분노하거든요. 주께서는 구겨버려요. 그러니까 자기가 형편없는 존재라고 생각 안 드니까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두 번째, 주님의 지시에 의해 존재하기에 그 어떤 일도 내가 상관하면 안되고요. 내가 책임지면 안돼요. 이럴 때 기쁨과 감사가 나와요. 이번 일은 내가 어떻게 수습하지? 그러지 마세요. 수습하면 안돼요. 이미 끝난 거예요. 이미 쭈구리 돼서 끝났는데 무슨 수습을 해요? 내 인생을 왜 수습해요, 내 인생을?
왜 분노하는 줄 알아요? 수습하려 하니까 분노하는 거예요. 자꾸 수습을 하고 정리를 하려 하니까 분노하는 거예요. 우리는 정리할 자격도 없고 정리할 권한도 없어요. 주께서 사건화 시켜서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는 거니까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니고 특히 내가 책임질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지어라. 부숴라. 성전 지을 때 그들이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런데 그게 박살날 때 이방 민족에 의해 박살나거든요. 옛날 이스라엘에게 솔로몬 성전이 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이방 민족에 의해 박살나는가? 하나님을 아는 민족이 왜 하나님을 모르는 무식하고 개 같은 민족에게 가슴 아프게 굴욕적으로 너무나 굴욕적인 대우를 받으며 처참하게 뭉개지는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죄지어서 그렇다고… 죄지은 게 아니고 원래가 뭉개져도 상관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동안 허풍이 있었던 거예요, 허풍.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고. 자,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냐 하면요. 유대인 분석이거든요. 서서히 여러분 감잡힙니까? 유대인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주께서 유대인에게 맞아죽음으로써 그게 유대인에게 마지막 남은 복입니다. 지금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마저 죽이게 함으로써 네가 어떤 하나님 없는 민족에게 밟히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네가 감사하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유대인들이 ‘어찌할꼬’ 하죠. (행 2:37) 주 예수를 믿으라. 너로 하여금 그렇게 진짜 망가졌고 이미 시신이 되었던 너를 하나님이 와서 알려주는 것 외에 더 큰 축복이 어디 있느냐.
끝으로 이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대항했어요. 대항한 이유가 있어요. 그들은 이 묵시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 역사를 통해서 묵시에 간다고 생각해요. 역사를 통해서 묵시에 이른다고 본 거예요. 그들은 이미-아직, 완료-미완료를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나? 바로 안식일, 절기 기념.
순환되는 시간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는 점점 더 발전해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대로 따라가게 되면 그 역사의 완성에 자기들은 참여되는 거룩한 진짜 백성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오늘 강의 마무리에 와 있어요. 이제 왔으니까 여러분들이 이해했는가 물어봐야죠. 이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방금 유대인의 잘못은 뭐에요? 실컷 들었는데 그만 응용문제에 꽉 막혀버립니까?
그들이 삭제되어야 될 대상인 것을 그들은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신앙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신학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지혜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은 원래 그걸 모르게 되어 있어요. 마치 오늘날 우리처럼. ‘내가 왜 안 죽지?’ 라는 질문을 절대로 안 하고 ‘왜 아직도 안 망하지?’ 라는 질문을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담의 죄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바로 죄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분노하거나 불평할 권한 자체가 아예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모든 범사에 대해서 주께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또 이렇게 하면 또 걱정되는 것은, 제가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왜 안 망합니까? 내가 왜 아직 살아야 됩니까?’ 그 질문을 알려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알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거 안다고 해서 안 망하는 게 아니고 그거 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결국 마지막 1이레 시점에서는 더 이상 칸막이가 존재하지 않아요. 여기는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자기 운명이고 예수님의 아픔이 자기 아픔이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만 있으면 되지, 자기가 쟁반에 모가지 날라가는 거 그거는 뭐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니까요. 내가 죽는 일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불신자가 보면 완전히 미친 거예요, 정말. 자기가 죽는데 왜 자기가 상관할 일이 아니냐. 우리가 내가 죽는데 차 오는데 박아라 할 사람 없어요. 피하죠. 뭐냐 하면 압축→그다음에… 우리 죄가 압축돼서 차 올 때 ‘죽어야 돼, 죽어야 돼.’ 하다가 ‘어? 차온다. 피해라!’ 이거 뭡니까? 나는 죽어야 돼. 이게 십자가 안의 정답이야. 하는 그 정답하고 내가 죽는 것하고는 하나의 지식이고 하나의 이론에 지나지 않죠.
압축은 주께서 압축시키고, 너는 죄덩어리라고 압축시키고. 호일이 구겨지는 것은 이론이고 지식이고 우리의 삶은 아침마다 이미지에 담아요. 나 어때? 어때? 정말 우리는 우리가 감당 못합니다. 우리는 본능대로 해요. 죄된 압축된 본능대로 해요. 날마다 압축해서 삭제하고 대체되는 이 뺑뺑이 도는 이것으로 반복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사적인 반복이지만 큰 반복, 이스라엘 전체 반복은 너희가 성전 만드는데 망쳤잖아. 내가 성전 삭제시켜줄게. 그런데 다시 1이레에 의해서 내가 대체해줄게. 예수님 자신이 인자이기 때문에 여기서 묵시와 역사가 같이 만납니다. 1이레를 통해서 처절하게 역사의 끝이 되고 부활을 통해서 묵시의 세계가 죽고 부활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완성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철딱서니 없지만 우리도 못지 않습니다. 저 철없는 인간들을 통해서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 사건만 완성했음을, 나중에 십자가를 믿는 유대인들은 비로소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자기 일이 아니고 주께서 죄인을 가지고 활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면서 구원받죠. 그걸 성령 연합, 성령으로 확장, 성령 세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유대인을 분석하면서 그들이나 우리나 진배없고 똑같다는 사실이 어쩜 그게 감사와 기쁨이 되는지요. 십자가 예수님 죽인 자가 그들이 아니라 오늘날 일상을 사는 우리 자신인 것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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