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하나님에 대한 원한

아빠와 함께 2023. 10. 29. 09:10

광주강의20231027a 창세기3장 15절(하나님에 대한 원한)-이 근호 목사


p.254【Ⅲ. 결론】부분 해봅시다.【다니엘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무너져 내리는 역사적 베일의 현장에 서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이건 누구도 부정 못하는, 진짜 누가 봐도 이건 사실 그대로다’ 라는 것을 제가 세 가지로 한번 뽑아봤습니다. 뽑아놓고 그것이 성경과 어떻게 차이 나는가를 보겠습니다. 이건 성경 없이 확실한 것. 이건 사실 아니야, 라고 부정할 수 없는 것 세 가지.

[모든 인간은 죽는다.] 모든 인간은 죽어요. 그 모든 인간 속에 누구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나’가 포함되어 있죠. 두 번째 확실한 것은,

[인간은 언제 죽을지 본인이 정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해서 인간은 정할 수 없어요. 이것을, 인간은 죽음의 종 혹은 죽음의 노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살고 싶어 해요. 그러나 차 한대에 받치면 죽잖아요. 언제 죽을지를 몰라요. 이것도 분명한 사실이죠. 세 번째 분명한 사실은,

[인간들은 남들을 쳐다보고 산다.] 그들의 영향력과 관계망을 형성한다. 그러니까 독불장군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렇죠? 이거 부정 못하죠.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이걸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면, 인간의 결국, 마지막은 죽음이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죽기 위해 지금이 있다.] 이거 부정 못하죠. ‘나 이거 안 믿을래.’가 돼요? ①번, ②번, ③번 어떤 경우라도 이것은 나하고는 상관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안되죠. 이 죽음 문제.

이야기해보세요. 이게 사실 아닌 거예요, 사실이에요? 사실이죠. 죽음이 인간을 지배하는 거 맞죠? 지금 우리 나이가 96세라면 어떻겠어요? 내 10년 뒤 계획을 세우겠습니까? 소용없죠. 왜? 사실이니까. 그러면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는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어느 쪽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이걸 정상으로 여기는 사람 봤습니까? 막 죽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 봤어요? 없죠. 그리고 ‘나는 남들 안 쳐다보고 산 속에 갈 거야’ 이게 돼요, 안돼요? 그러면 다 벗고 다니죠, 길에. 안되잖아요. 벌써 남의 시선과 영향력을 입고 남과의 어떤 관계망을 이미 형성하고 있죠. 어릴 때부터 그렇잖아요, 어릴 때부터. 어릴 때부터 도움도 받지만 간섭도 받잖아요. 잔소리 듣잖아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딱 내가 원하는 나다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은 본인이 정상이고 싶어 해요. 멀쩡하고 내 마음에 드는 내가 되고 싶어 해요. 그런데 죽는데요? 그리고 멀쩡하다고 우기는데 어떤 일이 있을 줄 모르고요. 또 점점 나이 들면 몸이 어떻게 됩니까? 아프죠. 몸 아픈 것을 ‘아, 정상이야. 그래, 난 몸 아프기를 소원했어. 몸 아픈 것, 눈썹이 길어서 내 눈 찌르는 걸, 난 이게 되고 싶었어. 난 이걸 정상이라고 봐.’ 그렇지 않죠. 폐암 걸리고 또 대상포진 걸리기를 학수고대 기도하고 그랬어요? ‘나 대상포진 안 걸리고 싶어.’라고 약간의 불안감을 갖고 있죠.

그 전부를 합쳐버리면 뭡니까, 이게? 비정상이죠. 그러면 이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는,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은 뭡니까? 여러분들이 이게 비정상인데 언제까지 비정상으로 살 거예요? 이걸 한꺼번에 정상적인 내 모습으로 돌리는 방법, 여러분 있습니까? (자살) 그렇죠. 해답은 벌써 나왔어요. 자살입니다. 자살하면 돼요.

사람들은 자살이 나쁘다고 이야기했어요. 자살은 나쁘다. 그럼 ①번, ②번, ③번 가운데 어느 관점에서 자살이 나쁘다는 겁니까? ①번입니까, ②번입니까, ③번입니까? 어느 관점에서 자살이 나쁘다는 평가를 받아요? ③번이죠. 다른 사람은 살려고 노력하는데 너는 왜 자살하느냐? 벌써 본인 스스로 자살하고 싶어도 이미 ③번, 인간들의 시선과 자기와 관계되어 있는 가족들, 이 사람들이 자살이 나쁘다고 이미 규정했죠.

그러니까 자살한다는 것은 ‘나 나쁜 사람 될게.’ 각오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쁜 사람 될게’라고 마음먹는 것이 자기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자기를 비정상으로 생각하는 겁니까?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본인이 생각하는 정상은 또 어떤 자아가 정상인 거예요? 어떤 자아가?

방금 제기된 문제가, 성경을 10년, 20년 아무리 봐도, 20년, 30년 믿었다, 복음 안 지 50년 되었다 해도 이것은 우리 속에 같이 잠복되어서 같이 살아가고 있어요. ①번, ②번, ③번에 의하면 우리는 비정상이에요. 그러면 복음을 공부한다, 또는 성경을 본다, 신앙생활 세계에 발을 들여놔볼까, 이건 뭐에요? 비정상을 뭐로 전환시키려고 애쓰는 겁니까? 정상인 걸로, 정상적인 사람 한번 돼볼까, 라고 이렇게 시도하는 겁니다.

그러면 잠시 성경에 발을 한번 들였다고 봅시다. 성경 속에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고 할 때 성경은 진리를 뭐로 봅니까? 예수님으로 보죠. 예수님. 진리를 예수님으로 보는 거예요. 나 진리에요, 아니에요? 나는 진리 아니죠.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이겁니다. [성경은 죽은 자를 상대로 주신 책이다.] 성경은 죽은 자를 상대로 주신 책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은 어떤 사람에게 들리냐 하면, 자살하고 온 사람에게 들립니다. 자살하고 오너라.

이 땅에서 인간은 아까 ①번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죽죠. 그럼 평소에 하루 일과는 죽을 준비하는 거죠. 그래서 성경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죽을 준비하니까 안 들어오는 거예요. 성경은 이미 죽은 자를 상대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아무리 연구해도 안 들어오는 이유가 안 죽으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왜 안 죽으려고 하느냐 하면, 내가 비정상인 건 맞는데 언젠가 내가 원하는 나다움, 어떤 정상이 있지 않을까 하고 자꾸 희망을 거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죽은 자를 상대로 주신 책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뭐냐?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삶이란, 이미 자살(죽음)한 자의 뒤치다꺼리.] 이미 자살된 상태에서 뒤치다꺼리하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인간은 늙어죽든 차에 받쳐 죽든 어떻게든 죽잖아요. 그렇죠? 죽게 되면 지나온 과거는 버려야 될 거죠. 이미 자기가 죽었으니까.

자, 2052년에 죽었다 칩시다. 태어나기를 1970년에 태어났다면 살아있던 기간이 있어도 2052년에 결국은 죽잖아요, 결국은. 결국이에요, 결국. 버티든 뭐든 모르겠어요. 하여튼 결국은 죽잖아요. 죽게 되면 1970년부터 2052년까지… 많이도 살았어, 하여튼. 몇 살이야 도대체. 82살. 82살 살아온 것은 쓰레기에요, 쓰레기 아니에요? 쓰레기죠. 쓰레기다 이 말이죠.

성경은 아직 우리가 2052년 안되었지만 2052년이든 2100년이 됐든 상관없이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고, 지금 우리가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은 쓰레기로 뒤치다꺼리할 부분만 늘어날 뿐이에요. 쓰레기로 뒤치다꺼리할 부분이 계속 증가할 뿐이라는 그 사실을 보게 하는 겁니다.

지금 제 말 잘 이해했는지 다음 질문을 통해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질문: 내가 죽었습니까, 내가 죽어가고 있습니까? 어느 쪽이에요? 1번이에요, 2번이에요? 사실은 둘 다 같은 말이에요. 내가 죽어간다는 말은 결국 죽을 때 되면 ‘아, 나 죽기 15년 전에도 내가 죽은 것 맞구나.’를 확인하는 게 죽는 순간이에요.

그럼 주님의 방법은 뭐냐? 어떤 인간도 죄인이기 때문에 멀쩡한 인간은 없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경을 볼 때 그 사람을, 네가 100살을 살든 200살을 살든 죽은 자로 간주하고 성경을 주시는 겁니다. 죽은 자로 간주하고.

여러분 집에서 분리수거하거나 쓰레기치울 때 귀찮죠. 귀찮지만 죽을 일입니까, 그게? 쓰레기치울 때 아파트 같으면 분리수거하는 데 내놓거나 빌라 같으면 길에 내놓는 게 참 귀찮은 일이죠. 쓰레기차 올 시간 맞춰 내놔야 되니까. 안 그러면 그 전날 내놓던지. 그런데 그 전날 내놓으면 옆집에서 자기 쓰레기통 없다고 그 위에 덤으로 얹어놔요. 우린 많이 겪고 있으니까, 지금도. 어쨌든 음식 쓰레기든 뭐든 할 때, 이게 죽을 일입니까, 아니면 귀찮은 일이에요? 귀찮은 일이죠.

그 귀찮은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키는 거예요. 신자, 불신자 관계없어요. 이거는 신자, 불신자와 아무 상관없어요. 아이고, 신자니까 그런 생각한다. 신자니까 그런 생각하는 게 아니고 성경이야기 떼버리고 무엇이 사실인가를 보자는 거예요. 무엇이 사실인가. 무엇이 사실입니까? 이게 사실이잖아요.

지금 이 논리가 어려운 거예요? 뭐 생뚱맞은 겁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죽어가고 있는 것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죽었기 때문에. 왜 이제 와서 자살하려고 해요? 이미 죽었는데 무슨 자살을 해요.

쓰레기 나왔으니까 쓰레기 한번 봅시다. 자, 쓰레기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일상입니다. 일상생활. [첫 번째, 성경의 언어는 이미 죽은 자를 향한 언어]죠.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은 쓰레기를 분석하는 거예요. 하루하루 일상의 생활을 분석하는 겁니다. 그러면 [두 번째, 인간의 언어는 타자(남)]이죠. 남들과 소통하거나 소통 안 해도 괜찮아요, 내 의사표시를 위하여 쓰는 언어죠.

그래서 인간의 언어는 쓰레기가 되는 거예요. 이 안에 무슨 요소가 빠졌습니까? ‘나는 이미 죽었다’가 빠졌죠. ‘죽어 갈 것이다’가 빠진 게 아니고 ‘나는 이미 죽었다’가 빠진 거예요. 그래서 쓰레기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가 이미 죽은 시점에서 볼 때 그동안 남들 맞춰주려고 남들을 납득시키고 설득시키고 남 앞에 너는 나쁜 짓을 했다는 소리를 안 듣기 위해서 어떤 변명 또는 자기 정당성, 자기 합리화를 해왔던 거죠.

그걸 더 어려운 용어로 하면, 강남강의에서 했던 용어인데, 정합성(整合性, matching, mutual consistency). 정합성은 딱딱 아귀가 맞는 논리를 정합성이라 합니다. 딱딱 맞는 거예요. 키트를 사서 조립할 때 모든 구성물이 딱 들어맞는 것. ‘내가 너희들 보기에 나 이렇게 해서 앞뒤가 딱딱 맞아.’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들어맞는 언어를 사용하는 거죠.

왜 그런 짓합니까? 이것은 자기가 죽음과 연관해서 비정상인 것을, 죽을 때까지는 비정상이기 싫고 자기 자신이 정상이고 싶은 거예요. 이게 정상이에요? 내가 정상인 것을 확인해주고 정상인 것을 증명해줄 누가 필요한 거예요? 타인이 필요한 거예요, 타인이. 인간은 그래서 남들 속에서 못 빠져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 타인 가운데 자식도 있고 부모도 있고 남편도 있고 아내도 있고 가족들이 있겠죠.

그들이 내 주변을 비추죠. 디스코 팡팡처럼. 인천에 놀이동산 가서 앉아있으면 빙글빙글 돌든지 한다는 거죠. 회전목마 비슷하게. 회전목마는 회전목마 본인이 돌지만, 그렇지 않고 남들이 내 주변을 도는 거예요. 출몰이죠.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친구하자 친구 안하자,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 출몰되는 여러 가지 타인들이 내 주위를 홀연히 출몰했다가 꺼지거나 사라지다가 없으면 또 등장하거나 하는 이런 것. 이 모든 것 속에 그 타자들과 상대해서 내 언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언어를 사용해서 뭐하려고 하는데요? 뭐하는데요? 시험 끝나니까 애들이 독서실 안와요? 애들 오면 안 죽습니까? 일상생활 속에서, 이건 성경을 떠나서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에요. 이러다가 나 죽는다는, 지금 이 순간도 죽음으로 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빼버리고 남들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시험 끝나니까 애들 안 와서 살기가 힘들다고. 합기도가 훨씬 나았는데, 이런 거.

자, 이렇게 하니까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뭐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죽은 자로 보는 데에 비해서 모든 인간의 특징은 타인의 언어를 사용해서 자기를 방어하면서 자기가 정상인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보세요. 바울되기 전에 사울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바울되기 전 사울이 뭐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아니면 누구를 공격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을 공격했던 사람이죠. 예수는 이단이라고. 예수 믿는 자를 공격했던 사람이었어요. 예수를 죽이는 것은 정합성, 이 타자의 집단에서 옳은 결정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도록 주도한 본인은 지금 정상적인 자아상을 구현하고 있는 거예요. 사형당한 예수님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스데반 집사를 돌로 죽이도록 부추기고 추진하는 그 책임자로서의 자기 행동은 너무나 정상이라고 본 거예요. 스데반 집사뿐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이 있었잖아요. 이건 아주 싹쓸이 씨를 말려야 돼요. 하마스 씨 말리듯이 완전히 씨를 말려버려야 되죠. 정상이죠. 아무 하자 없어요.

그런데 누가 찾아왔죠? 예수님 찾아올 때, 나중에 사도가 된 사울은 지옥 갔습니까? 어때요? 지옥 갔어요? 답변해보세요. 지옥 갔습니까? 영생 얻었죠. 바로 그 과정 아니면 천국에 못 갑니다.

제가 어제 버스 타는데 메시지를 받았어요. 메시지를 보낸 분이 누군지는 몰라요. 그런데 그 질문이 오늘 강의와 관련되어 있고 너무 중요한 질문이라서 제가 그분의 질문을 그대로 한번 써보겠어요. 제가 제 의견 이야기할 테니까 여러분부터 먼저 답변해보세요. 질문은 이겁니다. ‘목사님, [주님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천국 갑니까?]’ 이 질문이에요. 버스 안이기 때문에 답변을 못해서 아양교 앞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답변을 해드렸습니다. 자, 여러분들이 이 질문을 받았다면 이 밑에 답변을 한번 해보세요.

여러분, 지금 타자입니다. 남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남과의 관계망, 대화 이외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할 줄 몰라요. 뭐라고 답변해야 되겠습니까? 성의 있게 답변을 해줄 때 뭐라고 답변을 할 것인가? 질문한 성의에 따라서 성의 있게 답변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시간 가니까 제가 보낸 답변을 말씀드릴게요.

[주님의 사랑이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을 이깁니다. 그런데 그 전투장(쟁투장)이 당신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점에서 아까 제가 말한 사도가 된 사울 있잖아요. 또 하나 예를 들면, 베드로 있잖아요.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제가 죽기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 하다가 나중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극혐했죠. 극히 혐오하듯이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었어요. 세 번씩이나 저주한다는 진심을 이야기했다고요. 난 당신을 저주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지옥 갔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경우를 겪지 않는 것이 지옥 갈 확률이 높은 게 아니겠어요?

지금 이 사람이 정말 지옥 간다면 이런 질문을 저한테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사님, 목사님 설교에 보니까 천국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이야기에요, 저주받으니까 천국 못 갑니까?’ 본인이 본인을 측정하고 판단한 거예요.

이게 보통 복잡한 문제가 아니에요. 본인이 본인을 측정한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판단하고 측정한 겁니다. 이 말은 내가 알아서 내 안이 어떤 이질적인 것과 전투를 벌이는 그런 장(場), 영토 되는 것을 없애버리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정서적인 안정을 원해요. 투쟁 없이, 갈등 없이 심리적으로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경말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전 16:22)는 그 말씀이 들어온 순간, 우리 마음은… 평소에 사랑이라는 단어 있잖아요. 사랑이라는 단어는 같은 이웃이나 남이나 타인들과 주고받던 우리의 언어사용이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쓰는 단어는 남들과의 소통, 연결하기 위해서 관계 맺기 위해서 쓰는 단어라고요.

그래서 내가 답변하기를 이렇게 해놓고, 우리가 쓰는 사랑 말고 기이한, 어떤 특이한 사랑 개념이 우리 속에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그 말씀과 동반해서 그 사랑이 들어와요. 그럼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하면, 마지막에 쓴 것이, 나의 죄를 들추어내는 그것이 바로 사랑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답변 보냈어요. 그 뒤에 한 10초 지나서 ‘감사합니다.’ 답이 왔어요. 우리는 자기를 자꾸 정상화시키기 때문에 뭔가 내 것이 아닌, 또 내가 알고 있던 남 것이 아닌 이질적인 게 들어오면 그걸 쫓아낼 생각해요. 쫓아낼 생각한다고요. 자기가 자기관리하고 싶어서 쫓아내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쫓겨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들어와 버리죠. 베드로가 예수님 배신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아이, 진작 헤어질 걸.’ 이랬습니까? 안 그러면 울었습니까?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엄청나게 울었어요.

왜 웁니까? 그동안 자기가 알던 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동안 베드로와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여느 사람과 같이 남이라고 생각했어요. 여러 남들 중에 하나로 본 겁니다. 내가 있으면 주변에 회전차가 도는 것처럼 나는 거기서 선택, 결정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탁탁 집어서. 마치 쟁반이 돌아가는 초밥 집처럼 내가 먹고 싶은 걸 딱딱 골라잡으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게 할 때 어떤 인간도, 예수님은 죽은 자를 상대한 언어거든요, 누구든지 예수님 말씀은 이미 죽어버린 자를 상대한다는 그 생각을 못하고 예수님 말씀도 내가 더 정상적이고 우수한 인간되는 데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후딱 집은 거예요.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후딱 집었는데 그게 안 되거든요. 나하고 맞질 않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후딱 집었으니까 도로 던져 놔버리는 거예요. 던지면서 어떻게 했다고요, 베드로가? 엉엉 울었죠. 엉엉 울었어요.

사도가 된 바울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이런 말하죠. “나는 내 속에 악마를 보았다.” 내 속에 죄를 보았다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원초적인 죄니까. 내가 죄 지으려고 해서 지은 죄가 아니고요. 내가 지은 죄는 내가 기억하고 있죠. 그 죄 말고 원초적인 죄.

다윗은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 남편을 죽였잖아요. 그건 다윗이 알고 있는 죄에요. 다윗이 아는 것은 자기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것은 나쁜 거고 이거는 죄고 이건 의야, 그런 식으로 아는 것 말고 이질적인 것, 낯선 걸 알았어요.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내가 듣도 보도 못한, 내가 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무리 목숨 연장해도 나는 이미 주님 보시기에, 죽을 목숨이 아니고 이미 죽은 목숨이 되는 거예요, 죽은 목숨.

제가 이러면 또 그럴 거예요. ‘죽은 목숨인데 왜 자꾸 삽니까?’ 이렇게 할 거예요.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죽었어요. 인간은 이미 죽었다. 그런데 왜 자꾸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느냐? 그것은 인간의 상처가 살아있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상처가 살아있어요.

창세기 3장 15절에서, 물어봅니다. 약속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죠. 그중에 상처 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두 존재가운데 누가 상처 났죠? 예수님입니까, 마귀입니까, 둘 다입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울 때, 상처 난 존재가 둘 다입니까, 어느 한 쪽이에요? 어느 쪽입니까? 둘 다잖아요. 둘 다. 우린 예수님의 상처만 보면 안돼요. 바로 악마도 상처 입은 거예요.

악마는 머리가 날아갔어요. 머리 날아간 괴물 됐어요. 머리 날아가니까 몸체만 꿈틀거려요. 몸체는 살아있는데 얼굴부분이 날아갔어요. 그래서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가 하늘나라, 시내산 위에 갔는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안 만났습니까? 시내산에서 만났죠. 만났는데 어느 부위는 못 봤습니까? 얼굴부위는 못 봤어요. 얼굴부위는 못 봤다고요.(출 33:20)

얼굴부위는 못 봤던 모세의 후계자가, 우리가 지금 교재로 삼고 있는 ‘70이레’ 앞의 제목이 뭐였죠? 이 논문 제목이 뭡니까? ‘다니엘 70이레’죠. 다니엘이 어느 계통이냐 하면, 모세가 선지자거든요, 다니엘이 선지자잖아요. 선지자의 특징은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얼굴부위가 점점 더 선지자에게 알려지는데, 다니엘에게서는 인자(人子)같은 영광스러운 얼굴이에요. 영광스러운 얼굴. 희미하게나마 인자의 모습, 인간 모습을 본 거예요. 그러나 모세는 그것도 못 봤어요. 아직까지 계시가 더 확장 안 되었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모세나 다니엘이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현재 자기 자체를 정상으로 봤습니까, 비정상으로 봤습니까? 비정상이죠. 비정상인 거예요. 자기가 이미 죽은 자인 걸 알죠. 왜? 온전하지 않으니까 죽는 거예요. 하나님이 만든 그대로가 아닌 온전치 않은 인간이니까. 그런데 모세, 다니엘은, 또 베드로, 사울 나중에 사도 바울은 온전치 않은 이유를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일반인들은 뭡니까? 온전치 않으면서 어디를 봅니까? 자꾸 주변에 회전하는 초밥처럼 또 이 사람 만나고 또 저 사람 만나고 자꾸 같은 죽은 자가 죽은 자끼리의 언어를 수입하는 거예요. 똑같이 죽은 자면서도.

나는 사람들에게 실망했다고요?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다른 사람도 다 이야기해요. 쟁반초밥 하나 먹는데 초밥 맛이 좀 나쁘다고요? 남들도 너를 쟁반초밥으로 생각한다고요. 해답 없습니다. 다 같이 쓰레기인데 쓰레기에서 무슨 해답이 나와요.

우리는 타인의 언어로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타인의 언어, 남들의 언어로. 남들의 요구조건으로. 남들이 나를 보는 인상, 시선, 그리고 욕망, 그걸로 가득 차 있어요. 거기서 탈출하는 방법은 뭐밖에 없다 했습니까, 아까? 자살.

그럼 세상 사람들은 자살이 나쁘다 하죠. 그건 세상 사람들의 견해이고 성경은 많이 좀 많이 매정해요. 골로새서 1장 16절,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했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졌다고요? 예수님이죠. 고린도후서 5장 14절, 예수님이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은 죽었다. 그 두 성경구절을 통해서 다른 융통성 있는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모든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함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주님 앞에서 이미 죽어버렸다. 다 죽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만약 자살을 하잖아요. 죽은 자에게 자살도 없지만 하여튼 자살을 했다 치고 자살했을 때 주께서 이렇게 합니다. 그것도 내 뜻이었다. 모든 만물은, 일어난 모든 일은 주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걸 누가 알았습니까? 그게 골로새서에 나와 있죠. 사도 바울이 안 거예요.

“내가 죄인 중의 괴수이다”라는 말을 하고 “나는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하죠. 이미 죽었다고. 그럼 살아있는 것은? 죽은 자가 귀신 돼서 자기 집에 가가지고 살아있을 때 썼던 유품 있잖아요, 이건 한 5만원 받겠다, 그 뒤치다꺼리 정리하는 기간이 인생이라 하는 겁니다. 그걸 영어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My way. 이게 마이 웨이에요. 합기도를 하든 뭘 하든 이게 마이 웨이입니다. 뒤치다꺼리.

그러니까 자살을 해도 그것마저 주의 뜻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걸 누가 알았다고요? 주님의 종, 의의 종인 사도 바울이 이걸 안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과거에 스데반 집사 죽은 데에 가담했으니까 살인죄잖아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 잡아 죽였으니까 살인죄에 해당되죠.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런 게 있습니까? 없어요. 참 뻔뻔해요.

다윗이 밧세바의 남편 죽인 것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가지고 끙끙 앓다가 더 이상 못 견디겠다 하고 자기도 자살했습니까? 아니죠. 뭡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내가 한 게 아니고 죄가 했다는 거예요. 터무니없는 언어사용이죠. 터무니없는 언어사용. 우리가 살아오면서 타인과의 소통되는 단어에 전혀 안 섞이는 단어죠. 섞일 수 없는 단어죠.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죽어가는 자를 살려주려고 상대를 살리려고 주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를 확인 사살하는 겁니다. 자살을 생각하지 마라. 이미 죽었는데 무슨 자살이 있느냐. 이미 죽었잖아, 이미. 안 죽어? 그 말을 거부해? 그럼 안 죽나? 몸이 안 아파요?

구원받는 사람치고 자기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없죠. 죽는다는 말은 더는 내가 살릴 요량이 없다.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나한테는 전무하다. 전혀 없음을 아는 거예요. 이게 복 아닙니까?

왜 그러냐 하면요.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상처가 있는데 이 상처가 독해요. 마귀상처거든요. 마귀가 주님 앞에 된통 당했거든요. 이건 악마의 원한이에요. 악마의 원한. 악마의 원한이 인간 개인 각 사람 앞에 하나씩, 국화빵 만들 때 전부다 앙금 하나씩 넣는 것처럼 한 사람당 악마의 원한이 다 들어있어요. 초등학교 키 크다고요? 4학년? 5학년? 손녀? 우리 집 손녀, 손자? 모조리 원한이에요. 마귀의 원한이 있다고요.

그러니까 그 원한은 누구를 가리키게 되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야. 신에 대한 원한이죠. 그러니까 마귀와 예수님과 원수 관계이고 인간은 들러리입니다. 계속 들러리에요.

그런데 그 들러리를 주께서 폐기처리하지 않고 그 들러리 속에서 인간이 갖고 있던 악마의 상처와 그다음에 주님 자신이 갖고 있는 상처, 창자국과 못자국이 있어야 돼요, 사도 요한이 그걸 보고 주님이라고 했잖아요, 그 상처가 있어야 될 이유가 그 상처가 있어야 인간 개개인에게 있는 악마의 상처로 악마가 나를 죽이려고 했고 실제로 죽였다는 사실을, 죽인 그 당사자로서의 구세주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앎,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이라는 타인과 통하는 언어의 주제입니다. 그 십자가를 가지고 나의 모든 죄를 파헤치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목사님,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천국 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 그 질문에 다시 한 번 답변해봅시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도 천국을 갈 수 있습니까?

제 답변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천국 못 간다는 그 말씀과 더불어서 그 말씀이 속에서 마주쳤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랑이라는 단어를 썼던 그 죄,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 하늘나라에 통하지도 않는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 평소에 네가 너를 사랑했고 평소에 네가 남을 이용해서 써먹던 그 사랑이라는 단어, 그 사랑은 내(주)가 아예 안 받는 거예요.

인간이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주님이 인간을 사랑했으니까, 사랑이란 단어가 이미 죽은 자를 향하여 쓰는 단어는 주님이 쓰는 단어이고 지금 자기가 이상적인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타인에게 써먹던 사랑 단어는 주께선 받아주지도 않는 단어에요.

그 단어 사이에 투쟁장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주께서 사용하셔서 기어이 누가 이긴다? 기어이 주님이 이기는 겁니다. 눈물 흘리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성경 이해하는 것은 다 헛방이라는 사실을 속 시원하게 다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속은 자만이 속지 않은 자인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속여 왔고 자신에게 속아왔습니까.

마귀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주님으로부터 상처받은 탓을 남 탓으로 돌려버려요.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만 상대한다고요? 눈에 보이는 다른 타인들과 상대하죠. 성경 떠나서 이게 맞죠. 부모, 자식, 남편, 아내 다 상대하잖아요. 그들로부터 내가 구성됐습니다. 그들의 입장에 맞춰주려고 애쓰면서 어느새 나는 내가 된 거예요. 다음 시간 초반에 복사해놓은 것 할 거예요.

남들은 다 눈에 보이죠. 실선입니다. 그런데 여기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점선)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 세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마귀, 천사,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그럼 ‘나 이제 그딴 소리 안 듣는다니까.’ 이렇게 되죠.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건요?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나 죽었다가 부활한 것도 안 믿어.’

그렇다면 그럼 안 믿는 당신은 안 믿는 당신을 정상이라고 봅니까, 비정상이라고 봅니까? 정상이라면 자살할 필요 없죠. 비정상이니까 자살하는 거죠. 그러면 해답은? 없죠. 해답 없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31027b 창세기3장 15절(하나님에 대한 원한)-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이름은 안 밝혔으니까 내용은 공개해도 괜찮지 싶어요. 어떤 분이 이렇게 보내왔어요. ‘목사님, 질문이 있어 문자드립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원하는 자를 살린다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원하는 자는 천국에 보낼 수 있나요? 예수님이 원하는 자만 천국 가는데 그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천국에 보낼 수 있나요?’ 이 질문이었어요.

제 답변은, ‘예수님의 말씀이 찾아오게 되면 내가 그 말씀을 지키겠다고 지킬 수 있는 의지가 발동합니다. 내가 그 말씀을 지켜보겠다고, 그래서 비정상에서 정상이 되겠다는 나의 잠자던 의지가 발동함과 동시에 주님께서도 기어이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치열한 투쟁을 벌이면서 우리 내부가 투쟁의 장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능력이 이기시게 되면 그 결과로 낯선 감사가 나옵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낯선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답변 감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원하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천국에 가게 되나요?’ 아까 한 질문과 같아요. ‘그 사랑하지 않음을 주께서 이기십니다. 새로운 사랑으로 격상시킵니다. 내가 사랑한 그 사랑 말고 의외의 사랑, 나의 죄를 들추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끝났어요.

이 분도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아봐도 내가 원하는 나를 정상적인 상태로 돌리고 그런 상태로 되기 위해서는 참 내가 투쟁해야 된다는 걸 느끼죠. 힘들다는 것을 느끼잖아요. 그럴 때 교회의 힘을 빌리고 성경말씀 연구하고 탐색하면 내가 만족스러운 정상인이 된다고 생각하죠. 그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은 분명히 있을 거고 그 사람이 천국 갈 때 어느 인간도 마찬가지로 어느 인간도 눈에 보이는 남들하고 인간이 서로 사용하는 언어, 단어, 성 말씀에 이런 말씀 있잖아, 이런 거 전부 다 일방적으로 다 쓰면서 살아왔잖아요. 유대인들이 그랬잖아요. 성경말씀, 율법을 다 동원해서 결국 그들이 한 짓은 메시아 죽인 짓을 했단 말이죠.

다 그럴 때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중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제가 복사해온 가사 해석을 보게 되면… 이 해석도 흔히 찾은 해석 아니고 여러 군데를 들추어내고 조사해서 찾아낸 거예요.

Neil Diamond (1972)

She was morning, and I was night time
그녀가 아침이라면 난 밤이에요
I one day woke up To find her lying beside my bed
내가 어느 날 깨어보니 그녀가 내 침대 옆에 누워있었어요
I softly said "Come take me"
난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내 품 안으로 와요.”라고
For I've been lonely in need of someone
왜냐면 난 외로워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외로워 누군가가 필요했다, 외롭다는 말은 그동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타인의 언어가 갈급했다. 나는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타인의 이야기가 내 빈 자리를 메꾸지 않으면 나는 살아갈 수 없는 것으로 타인에게 길들여진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말을 보세요.

As though I'd done someone wrong somewhere
내가 어딘가에서 누구에게 잘못한 것 같아요

이게 뭐냐 하면, 갑자기 낯선 여인이 와서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내가 어딘가에서 누구에게 잘못한 것 같아요. 참, 인간들 보세요. 자, 한번 봅시다. 인간, 나의 구성요소가 뭐라고요? 내가 어떤 격자구조로 있고 이런 나를 쪼갠다면 내 건 하나도 없고 전부다 조각조각 남들에 의해서 구성된 거죠. 남들 눈치 보면서 살아오며 구성된 거잖아요. 내 것 있습니까? 없죠. 내가 이런 행동하면 저 사람이 날 어떻게 평가할까, 대번 훅 들어오죠. 훅. 훅 들어오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선악구조 이야기지만, 잘했다/ 잘못했다 이것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기존 타인들의 평가에 의하면 잘한 거고 기존 타인들의 평가에 의하면 잘못한 걸로 자기가 타인에 의해서 놀아나고 있다는 그 티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게 인생입니다. 나 어때? 나 어때? 잘했지? 나 뭐 큰 잘못한 거 같아, 이런 거요.

그런데 내가 어딘가에서 누구에게 잘못한 것 같다는 말은 내가 무슨 잘못했다고 기존에 내가 판단하는 잘못은 아니고 내가 뭔가 행동을 했는데 이거는 내가 내릴 판단 아님에도 불구하고 뭔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은 오는 거예요. 느낌 아니까.

But I don't know where
하지만 어디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I don't know where
정말 모르겠어요
Come lately
최근에 일어난 일인데도

보세요. 그 여인과의 관계가 최근에 일어난 일인데도 잘못된 낌새는 오는데 이게 왜 잘못됐는지를 모르겠어요. 그런데 해보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새로운 거예요. 그래서,

You are the sun, I am the moon
당신이 태양이라면, 난 달이고
You are the words, I am the tune
당신이 노랫말이면, 난 선율입니다
Play me
나를 연주해주세요

play, 연주라는 말을 했지만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나를 조련해달라는 그런 뜻이죠.

Song she sang to me
그녀가 내게 불렀던 노래
(그녀가 없었다면 알지 못할 노래)
Song she brang to me
그녀가 내게 가져왔던 노래
Words that rang in me,
내 마음 속에 울렸던 노랫말
Rhyme that sprang from me
그리고 내 가슴 속에서 솟아났던 음률이
warmed the night
그 밤을 따뜻하게 했고

그다음 제일 중요한 핵심이에요.

And what was right became me
바로 그것들이 내가 되었어요

그것이 바로 내가 된 거예요. 인간은 타인이 없으면 내가 조성되지 않습니다.

(You are the sun, I am the moon
당신이 태양이라면, 난 달이고
You are the words, I am the tune
당신이 노랫말이면, 난 선율입니다
Play me
나를 연주해주세요)

And so it was that I came to travel
Upon a road that was thorned and narrow
그렇게 나는 좁은 가시밭길에서 여행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것이 너무나 낯선 것이기 때문에 기존에 자기가 성장하면서 살아왔던 그 환경과는 전혀 색다른 환경 속에 있으니까 이게 좁은 가시밭길이 되겠죠.

Another place, another grace would save me
다른 곳에서 다른 은혜를 입었더라면 난 구원을 받았을 텐데

You are the sun, I am the moon
당신이 태양이라면, 난 달이고
You are the words, I am the tune
당신이 노랫말이면, 난 선율입니다
Play me
나를 연주해주세요

지금 성경으로 돌아와 볼 때 문제점, 왜 인간은 비정상이 정상이 될 수 없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문제점은 딱 하나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너 개인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집단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게 핵심이에요.

타자, 왜 자꾸 남들 앞에 외롭지 않으려 하고 남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고 남들로부터 조언을 들으려 하고 그게 안 되면 자살하려 하고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개인에게 준 적이 없어요. 개인으로 개인 구원을 받겠다, 아까 문자로 질문한 것도 그거잖아요. 우리 집단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주었습니까, 라고 질문하지 않아요. 개인부터 출발했어요. 내가 사랑하지 않아도 내가 구원받습니까.

주님께서는 나에게 사랑을 주는 게 아니고 우리에게 사랑을 줬죠. 이걸 도대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이유가 뭐냐? 이제부터 그 이유에 대해 들어갑니다. 어렵지만 여러분들이 그만큼 많이 했으니까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악마는 일자(一子). 유일자로 신으로 등장해요. 그래서 이 세상 신이에요.

신(神)의 특징은 다수를 낳습니다. 하나가 다수를 낳을 때 분신을 해요. 어떻게? 자기의 속성, 자기의 원한을 개개인에 다 심어놓고 퍼뜨려버리는 거예요. 악마가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 하면 아담이 있거든요. 아담이 있고 하와(이브)가 있잖아요. 그 둘 사이에 생식기능이 있어요.

그러면 아담과 하와에게 악마가 자기 마음을 심어놓으면 인간의 생식기능에 의해서 계속해서 악마의 예수님에 대한 원한, 사탄은 예수님에 대한 원한이죠, 에서가 야곱에 대한 원한이 있잖아요, 가인이 아벨에 대한 원한이 있잖아요, 전부다 그게 악이에요. 예수님처럼 메시아가 되지 못한 원한을 악마가 갖고 있어요. 최고 등급의 천사니까.

이런 이야기를 나 이제 더는 안 들을란다, 나하고 상관없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지금 나는 그 성경이야기가 나한테 안 맞고 나는 안 듣겠다고 해버리면 여기 출발을 어디서 했어요? 나는. 이 세상에서 나라고 하는 것은 악마만 쓰고요. 전체를 합해서 나라는 것은 예수님만 쓸 수 있어요. 골로새서 1장 16절, 이 세상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었다.

그런데 악마는 예수님을 시기해서 자기가 일자, 유일자가 되는 거예요. 인간 안에다 ‘네가 최고이고 네가 최종적이다. 너는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결정권을 네가 갖고 있다. 힘들거든 죽어버려라.’라는 것까지 다 집어넣었다고요, 이게.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정상화되는 건 아니죠. 여전히 비정상이 되죠.

출발이 ‘나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가 인간을 속일 때, 악마의 마음이 아니면 자기 마음을 가진 인간들이 떼로 예수님에게 하나님에게 대들 수가 없어요. 자기 마음과 동일해야 그들은 하나님께 대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엔 두 종류가 있죠.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께 대드는 자, 교회 안 다니면서 대드는 자, 이 세상에는 오직 한 종류밖에 없습니다. 대드는 자밖에 없어요. 내 인생 이렇게 조져놓은 모든 탓은 누구 탓입니까? 하나님 탓이다. 이게 원한이죠. 분노죠. 분노에 대한 마귀의 대처는 뭡니까?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하고 제켜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께 질문 들어갑니다. 그럼 다니엘은 어떤 사람이에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일방적 답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질문은 반칙질문이라 내가 답하겠습니다. 다니엘은 벌써 자살한 사람이죠. 자살했는데 자기가 스스로 죽은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해서에요. 예수님이 스스로 죽잖아요. 요한복음 10장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예수님은 죽여서 죽은 게 아니고 죽음의 길을 스스로 알아서 간 사람이에요.

다니엘도 자기가 원해서가 아니라 계시에 의해서 죽음으로 몰아넣어진 거예요.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가죠. 그가 살고 싶었습니까? 다니엘은 그 자체를 주께서 나한테 맡기신 뒤치다꺼리 정도로 알았던 거예요. 다니엘 세 친구도 마찬가지고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인간이 아무리해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것은 인간들이 서로 합의할 필요도 없어요. 합의할 것도 없어요.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들이 합의한 게 있어요. 죽었다가 부활된다, 그것은 막자. 우리가 막자.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우리 세계에서 소통되지 않게 하자.

그러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뭡니까? 그래, 부활이 있어. 비정상인 내가 갑자기 정상이 될 수 있는 찬스가 온 것 같죠. 그다음에 나온 말은 뭡니까? “내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에요. 악마가 집어넣어준 최종적인 인식은 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악마가 집어넣어준 인식은 인식대로 갖고 있으면서 성경말씀에 합치하려고 노력하죠. 그런데 그게 됩니까?

여기 p.255 중간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이로서 유대인들은 언약의 노선을 잘못 읽은 것으로 판정 났다. 자신들이 ‘독사의 자식’인 줄 몰랐다.】성경에 나오잖아요. 독사의 자식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들은 자기를 ‘아브라함 자손’인 줄 안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이다, 그 자체가 그들은 사실이에요.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인 거예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조그만 소녀가 임금님 앞에서 고기를 씹고 난 뒤에 “무슨 맛이 나더냐?” 임금이 물으니까 “홍시 맛이 납니다.” “왜 고기를 씹었는데 홍시 맛이 나느냐?”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 하는데 뭐 어쩌라고요.”

아브라함 자손이 아브라함 자손이라 하는 이게 뭐가 나쁘냐는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금 진리이고 옳고 그 대목에 대해서는 정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뭐였습니까? 독사의 자식이죠.

그럼 유대인들이 악마를 좋아했습니까, 제일 싫어했습니까? 제일 싫어했죠. 주님이 그 제일 싫어한 모습으로 왔다니까요. 그들이 제일 배타시하는, 귀신의 자식으로 왔다니까요. 마태복음 12장에. (마12:24)

다시 p.254 봅시다.【다니엘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무너져 내리는 역사적 베일의 현장에 서 있다.】그냥 역사인데 시간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역사가 있어요, 없어요? 있죠. 있는 걸 있다 하는데 그게 뭐가 잘못이냐? 역사가 하나의 커튼처럼 내려앉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몰랐죠. 알 수가 없죠. 역사가 내려앉으면 뭐도 같이 내려앉느냐 하면 우리가 그동안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역사성도 같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건 용납이 안 되죠.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은 코앞에 있는 것밖에 몰라요. 내가 여기 있고 나는 살아있고 언젠가는 죽겠지. 하지만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며 내 인생 계획을 어떻게 잡으며 나는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사회, 그 사회로부터 느낌적으로 뭔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살아가고 싶은 그것이 우리 안에 꽉 들어차있어요.

남한테 싫은 소리 듣는 거 싫고요. 남한테 나쁜 사람 되는 것 싫고요. 대신 남한테 칭찬받고 남으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 되는데 기존 사회에서 어떤 류가 그런 사람 되는 겁니까? 조건 들어보면 승마 선수에다가 재벌3세에다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남자가 여자 되고 여자가 남자 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 재산은 몇 억대 아니고 수 조원대. 강남 고급 아파트 사는 거.

그런 사람이 등장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이 높은 위치에 있다고, 밑에 있다고 여기는 자기가 스스로 서열을 매긴 거예요. 나 지금 어디쯤 있는가. 독사의 자식이죠. 성경대로 독사의 자식이죠. 물어봐요. “네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럼 그 사람은 “하나의 인생으로서 이렇게 사는 게 이게 사는 보람이잖아.”라고 하죠.

정답은 그겁니다. 복수하려고 하는 거예요. 누구한테? 하나님께 복수하려고 하는 거예요. 나를 비정상으로 만들어서, 항상 정상인 나를 상상하게 만들고 그걸 추구하게 만들고 거기에 결핍을 느끼고 뭔가 노력하게 만들고 이도저도 안되면 자살해버리려 하는, 그렇게 만든 그 신 앞에 보란 듯이 내 인생을 내가 이렇게 내 마음대로 처신할 수 있다는 본때를 보이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니까 예루살렘 아줌마들이 막 울었어요. 그럴 때 예수님이 그 여인들보고 한 이야기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라.”(눅 23:28) 나를 위해 울지 말라는 말은 아까 골로새서 1장 16절, 세상의 모든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다 계획 잡힌 대로 갈 뿐이에요.

그런데 그 아줌마들은 예수님 너무 안됐다고 우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기존에 살아오면서 형성되었던, 어떤 때는 슬프고 어떤 때는 기쁘다는 것이 이미 자기 안에 형성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 형성된 감정 있잖아요. 감정 또는 정서. 그 감정, 정서가 지향하는 방향이 어디입니까? 하나님 앞에 본때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께 복수하는 거예요, 집단적으로.

고린도전서 7장 23절을 볼까요. 다 같이 읽어봅시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그동안 사람들의 종으로 살아왔다는 거예요. 사람들의 종으로. 그런데 다들 사람들의 종이기 때문에 별 이상한 걸 못 느꼈던 거예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들 의식하며 살아가는 게 너무 당연한 거고 정상적이라 여겼지,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니 뭐야 이게. 그럼 어떻게 살라고.

고린도전서 6장을 보겠습니다. 6장 2절,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우리가 천사를 판단한다고요? 나 자신이라 하면 안 되고 우리라고 해야 돼요, 우리. 새로운 우리. 이걸 주님께서는 의의 종이라 했어요. 의의 종이란, 그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다는 말입니까? 의의 종의 반대말이 뭐죠? 죄의 종이죠.

그 죄의 종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악마가 있죠. 악마가 한 일이 뭐였습니까? 요한계시록 12장에 하늘나라 전쟁했죠. 지난 수요일 설교에 그거 했잖아요. 하늘나라에서 쫓겨서 땅에 내려왔잖아요. 땅에 내려온 악마의 체포조가 있었죠. 두 여인. 기능은 왕+제사장.

악마한테 악마를 향해서 자랑하는 겁니다. “악마야, 너 이런 거 없지? 악마 너 신이지? 그런데 네가 죽는 신이냐?” 악마는 택도 없죠. 죽는 신이라 하는 건 자기가 소멸하는 것이고 자기가 패배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나? 죽는 신이야.” 이걸 어떻게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있습니까.

인간은 안 죽는 게 아니에요. 낌새 알아요. 이렇게 골골하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러나 그러면서도 끝까지 뭘 거부합니까? 다시 산다는 것을 거부하죠. 그럴 리 없다는 거예요. 내가 아는 주변 사람들한테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없어요. 주님도 내가 산다는 말을 한 적 없어요. 우리가 살지.

지금 우리가 이 시간에 해야 될 일은 뭐죠? ‘나’가 어떻게 ‘우리’가 되는가 그걸 지금 하는 거예요. 교재 한번 봅시다. p.254,【Ⅲ. 결론】밑에 2번째 줄,【인간은 태어나면서 나름대로 삶의 형식을 창조해오고 있다. 그저 ‘자기 보존’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힘을 확장하려 한다.】보존 정도가 아니고 확장한다.

【여기에 조형력이 발동하면서 주변을 해석한다.】조형력이라는 것은 변신, 변신을 시도하는 거예요. 변신을 시도하면서 주변을 해석한다.【살아있는 유기체의 본능이며, 생명력의 분출이다.】생물학, 물리학에서 나온 이야기죠.

【이런 인간의 시선에 성경문자가 들어오면 주체적 해석이 발동한다.】이런 인간에게 성경문자가 온 거예요. 성경문자가 오면 인간은 자기 보존과 확장을 위해 무엇을 원하느냐 하면 내가 아직 계속해서 살아있을 때 기회 잡으려고 하겠죠. 그런데 내가 살아있다는 말은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p.254 밑에서 3번째 줄,【여기에 시간성이 요청된다. 시간이 언젠가는 모든 것을 정화시키게 된다는 일념에서 미래는 항상 ‘희망의 홀컵’으로 삼는다.】

내가 원하는 내가 시간 끝 날에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중간에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 못하고 언젠가 내가 될 수 있는 수준만큼 되었다가 된 그 상태에서 뭔가 끊어짐이 절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끊어져버리면 지금 나와 새로운 나와 연결 지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럼 안 끊어지기 위해서 내가 예수를 믿는 방법밖에 없어요. 누가 믿어요? 내가. 내가 뭘 믿어요? 예수님을. 그러면 내가 믿었던 예수님이 나중에 나를 구원할 것이라는, 자기가 스스로 만든 계약을 자기가 구상해내는 겁니다. 말씀 믿으면 구원받겠지. 예수 믿으면 구원받겠지. 중간에 뭐가 빠졌죠? 철석같이 믿는, 예수 믿는 내가 주님 앞에 그것이 마귀적인 태도라는 규정 하에 거부당한다는 사실을 빠뜨렸죠.

자, 그러면 어쩌면 좋아요. 아까 제가 힌트를 드렸습니다. ‘나’는 누구만 이야기한다고요? 예수님만 이야기하죠. 그런데 여기 또 나라고 등장한 게 누가 있죠? 악마죠.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에 나와 나 사이에 누가 나인가, 한판 전쟁을 벌였는데 예수님도 상처받고 마귀도 상처받고. 마귀는 대가리가 날아가고 예수님은 발꿈치가 다 상하고.

어쨌든 이 역사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두 위대한 대표적 세력의 피 터지는 피 흘리는 현장입니다. 이게 집단적으로 봐야 알아요. 개인적으로 봐서는 코앞에 있는, 아이고 배고프다, 고구마 먹을까, 매 일상이 자기 챙기는 것만 챙겨가지고 전체가 다 보이질 않아요. 집단화가 되어야 돼요. 집단화가.

그래서 p.255, 인간들은 말씀을 자기 구원으로 생각하는 거예요.【결국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이란, 번잡한 신학적 논의들을 ‘탁탁’ 털어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지나감’과 ‘소망’의 선로 위에 자기 몸을 누이는 구조가 되고 만다.】자기 몸 하나 딱 누워 있어요. 내가 아는 미래가 나를 구원한다는 거예요. 내가 아는 미래가.

그런데 세례 요한이 왔죠. p.255 중간에, 세례 요한이 뭐 들고 왔습니까?【그 나무뿌리는 도끼에 잘려나가야 한다.】이사야 6장에 나오죠. 이사야가 한 예언이 뭡니까?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했죠. 그 결과가 뭐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함의 결과는 바로 그루터기만 남기고 전부다 잘려나가죠. 이사야 6장 13절, 그루터기는 남아있죠. 그루터기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날아가는 거예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루터기만 남았다는 말은 시작도 안했다는 뜻이에요. 오히려 처음 것, 최초의 것이 노골적으로 노출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소망은 어딥니까? 소망 자체가 날아가는 것, 바로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소망을 날려버립니다. 소망을. 희망이 없어요.

그다음에 봅시다. 자신들이 독사의 자식인 줄 몰랐다는 것은 아까 했고요.【시간적 수평선만 쳐다보고 있었고, 그들의 묵시에 대한 생각은, 그 시간적 지평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 같은 것이다.】

‘You are the sun, I am the moon (당신이 태양이라면, 난 달이고)’ 그 노랜가요? 아까 그 노래에 의하면 여인이 태양이죠. 성경에서 여인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태양도 돌고 달도 돌고 그렇죠. 그러면 인간들 보기에는 태양은 그대로 있는데 달이 돌죠. 그저 당신 중심으로 살겠습니다. 갑자기 의의 종 되어버렸네요. 의의 종.

누구의 종이라 할 때, ‘나’라고 하는 것은 종이 쳐다보는 주인에게만 해당되죠. 일자는 많은 다수, 여러 명을 낳기 때문에 그래요. 아담이 범죄하므로 모든 사람이 죄인된 것처럼 한 분 예수님이 의인으로 오셔서 모든 사람이 의인되는 거예요.

이게 사실인가? 그거 나하고 상관없는데?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한 사람이 의인되어서 모든 사람이 의인되었다는 유일한 증거가 뭐냐? 예수님의 부활하심이에요. 그냥 부활하심이 아니고, 그냥 주무시다가 살아난 게 아니고, 아담에 의해서 살해당한 자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다 퍼부으면서 죽인 그 분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남으로써 짝이 생긴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보는 자신과 자기 바깥에, 그것도 자기가 죽여서 보는 그 분, 새로운 타자, 남의 시선으로 두 개의 축이 마련된 거예요. 그게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아류들의 투쟁장으로 이 세상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만 되는 거예요. 인간의 이름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개인적인 인간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오직 주께서 sign한 이름인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고 기도하는 것도 예수님의 sign이지, 내 사적인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좀 더 보겠습니다. 아까 고린도전서 6장 3절 그 대목을 설명하겠습니다. 성도를 보고 네가 세상도 판단하고 천사도 판단할 권한이 있다 했죠. 왜 갑자기 하나의 인간이 천사보다 더 위에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느냐? 그것은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우리가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한 분이고 예수님이 배태한, 예수님이 낳은 자들의 한 단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거예요.

그럼 예수님의 단체가 되게 되면 시간은 어떻게 되죠? 시간은 흘러가는 겁니까, 안 그러면 그 안에서의 시간은 이미 완성되고 멈춰있는 겁니까? 완성되고 멈춰있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의 시간 카운트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강의에서 그랬잖아요. 무엇이 사실인가? 사람은 언제 죽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요. 리커창을 누가 죽였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잖아요. 인간은 내일의 소망이 있으니까 항상 내일을 생각하는데 그 내일을 일방적으로 자를 권한은 주님한테 있는 거예요.

이 말은 개인은, ‘나는 나다. 나는 내 개인이다.’ 라는 것이 주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네 소속이 어디냐? 너 누구 종이야? 죄의 종이야, 의의 종이야? 묻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너는 어떤 사람이냐, 그 자체를 아예 안 물어요. 그리고 이것이 성경에 나온 내용이 아니고 이게 사실이에요. 사실.

그걸 어떻게 사실인지 보여주느냐 하면 바로 국가가 나오기 때문에. 짐승에 국가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70세 이상 되면 운전면허 갱신을 5년마다 해야 된다, 이거 누가 이야기합니까? 국가에서 한 거죠. 집사님, 운전면허증 있어요? 그거 알아서 한 겁니까? 아니죠.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떠냐 하면 ‘경적의 대상’이에요. 어떤 사람이 혼자 생각하면서 길을 가고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인도가 아니라 아스팔트로 걸을 때 그때 뒤에서 삑-하고 경적을 울리죠. 경적을 울려서 보니까 이 세상은 나 혼자 있는 게 아니고 타인들과 더불어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확인하죠. 어떤 철학자는 이걸 ‘호명(呼名)’이라 해요. 호명할 때 인간은 주체가 됩니다.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1990년,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가 이야기한 거예요. 호명할 때, 인간은 누가 불러줄 때 비로소 나는 자아에서 주체로 바뀌면서, 자아는 나 혼자 상상할 수 있지만 주체라 하는 것은 이 사회의 관계망 속에서 타인이 나를 불러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회 자체에 개인이 있는 겁니까, 집단이 있는 거예요? 집단이 있죠. 그 집단이 나를 위한 집단이에요, 집단을 위한 집단입니까? 집단을 위한 집단이죠. 나를 위해서 하게 되면 함부로 사람 찌르고 행패부리고 오토바이타고 시끄럽게 돌아다니고. 이런 건 용납이 안 되죠. 이미 인간은 홀로가 아니잖아요. 홀로가 아니라고요.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자기밖에 모르고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주께서 어떻게 구원하는가? 아까 힌트를 줬어요. 인간 속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인간 속에 악마의 정신이 있죠. 악마는 어떤 자세입니까? 벌써 당했죠. 예수님께 당했잖아요.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대들면서 원한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원한이 있음으로서 예수님은 그냥 이 땅에 곱게 사신 분이 아니고 그 악마의 상처로 인하여 주님도 상처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창세기 3장 15절을 중심으로 한 현실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된다는 말은 주님이 갖고 있던 상처 있잖아요. 아까 제가 메시지 답변한 것처럼 상처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줘요. 집어넣으면 이미 우리는 우리 상처에 예민해요. 우린 아픈 게 싫어요. 왜? 부끄러우니까. 남들은 멀쩡한데 혼자 아프니까 내가 안 그래도 비정상인데 비정상인 게 티 나는 게 더 싫어요. 싫으면 그냥 싫습니까? 복수하고 싶어요? 어느 누구든 복수하고 싶어요. 아까 그랬죠. 하나님 앞에 복수하는 방법? 내가 스스로 자살하는 게 하나님께 제일 크게 대드는 방법이라고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말씀이 우리를 이기거든요. 이기면 주님의 상처에 가까이 가도록 접근을 해줘요. 티눈 있죠? 티눈이 원래 아픈데 잘 안 보여요. 그런데 티눈 치료하는 약을 바르면 바깥이 허옇게 되면서 떨어지면서 티눈이 보이죠. 주님이 하는 모든 일은 그 주님의 상처가 보이는 쪽으로 일을 해요.

도마가 예수님 만날 때 한 것이 바로 그거였어요. 내 창자국 보아라. 내 못자국 보아라. 너는 네 상처에만 정신 팔려있지. 그러나 네가 너라고 하는 것은 마귀가 너한테 네가 절대적이라는 그 성질을 심어줬기 때문에 너밖에 모르지만 주님은 주님 나가 따로 있어요. 주님 상처가 따로 있다고요.

그래서 결론은 뭐냐? 내 상처와 주님 상처의 만남. 왜 만나야 되는가? 주님 상처는 누구 때문에 생긴 상처에요? 내가 무심코 하는 행동 하나가 전부다 주님에 대한 복수극이었어요. 나는 당신의 종이 되기 싫습니다. 나는 내가 주인이고 싶지, 그 외에는 어떤 누구의 종이 되기 싫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조차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말씀대로 그것이 다 이루어진 거라고. 우리는 반항할 대로 반항했는데 그것조차 주께서 다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거라는 거예요.

여기 p.256 봅시다. p.256 하기 전에 오늘로 이거 끝나는데요. 다음에 어느 책 할까요? 갑자기 물어서 그런데… 제가 일방적으로 정할까요, 다음에 어느 책 할지? 성경 말고 책으로 하겠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광고시간이었습니다.

p.256 중간에【관심사가 자신의 생존문제나 구원문제로 되돌아오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덮친 바 되어 자신의 거취 문제조차 문제가 안 될 지경인지를 묻게 한다.】자신의 거취 문제조차 문제가 안 된다. 내가 자살할까요, 더 살까요, 어떻게 할까요, 자체가 골로새서 1장 16절에 의하면 그게 문젯거리가 안 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이미 너희는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이게 사랑이잖아요.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 참 쉽죠. 간단하죠. 우리가 고민할 필요 없죠. 우리가 남 걱정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죠. 우리가 우리 자신 걱정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모두 주님 안에서 움직여지는 거예요.

이제 이 책 끝내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는 개인 개인하지만 사실은 개인이 아니고 집단생활해온 거예요. 우리 인간들끼리, 우리 잘난 인간들끼리.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죄의 종, 악마의 종이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 우리 인간들끼리 우리 인간들 생각들끼리가 무슨 결과를 낳았는가 그걸 먼저 전제로 하고 성경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들끼리 좋은 게 좋다는 게, 그 인간들끼리가 뭐냐 이 말이죠. 서로 돕는 사회, 서로 위로하는 사회, 이걸 교회에서는 서로 구원해주는 그런 사회 아닙니까. 이게 인간들끼리라니까요. 인간들끼리. 서로 돕고 위로하고 구원해주면 안 되는 이유가 이 ‘서로’속에 뭐가 포함이 안 되었어요? 죽음이 포함이 안돼서 그래요. 우리 죽어가고 있잖아. 그러니까 죽어가기 전에 열심히 주사도 맞고 열심히 해서 좋은 정보, 아이디어 있으면 같이 하자. 이게 우리 일상생활이잖아요. 그게 일상생활이고 그게 하나님에 대한 복수라고요. 대드는 거라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서로’를 이미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죽은 자가 죽은 자를 도우려고 시도했고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위로하려고 했고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서로 구원하려고 했다 이 말이죠. 네 주제나 파악하세요. 네 주제나. 너 이미 죽었어.

그러면 왜 사는가? 이미 죽은 자가 뒤치다꺼리하기 위해서 쓰레기 집어넣는 거 하라고 주께서 계속 살려두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주의 종, 예수님의 종, 의의 종이에요. ‘당신 누구요?’ 라고 묻지 마세요. ‘당신 누구 종입니까?’ 질문을 그렇게 바꾸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누구한테 분노하고 누구한테 화내고 복수하고 있는지 한번 점검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나 잘되고자 하는 모든 일이, 모든 것이 이미 죽었다가 살아나신 우리 주님을 죽게 만든 동기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광주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젖먹이의 출현  (1) 2023.12.24
고장난 인생  (0) 2023.12.09
시간 수축  (1) 2023.09.27
23.몸과 유령  (0) 2023.07.23
22.압축 삭제 대체  (0) 2023.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