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0526a 다니엘9장 27절(지옥으로 출근)-이 근호 목사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를 살해하는 행위다
오늘은 p.246 1이레에 관한 내용입니다. 1이레에 관한 내용이 다니엘 9장에 보면 나와 있죠. 25절에 보면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일곱 이레, 육십이 이레, 그럼 칠십 이레가 나와요. 다니엘 9장 24절에 나오거든요.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다니엘 9장 24절에 70이레 나와 있고 7+62이레 언급하고 있죠. 25절, 26절. (25절,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70=7+62+?. 7+62이레에 플러스한 것이 무엇인지 9장 26절에 나와 있습니다.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70이레를 먼저 설정해놓고 이걸 토막 낸 거예요. 7, 62, 그다음에 무엇이겠느냐? 사람들은 이걸, 그건 당연히 계산해보면 1이지. 그런데 1이 아니고 이게 ½+½이라는 거예요, 성경에. 제가 그렇게 주장하는 게 아니고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27절에 나와 있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27절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70이레라는 것이 ½+½로 나누어지는 여기에 모든 의미를 집중하기 위해서 70이레가 설정되어 있는 거예요. 70이레라는 큰 원, 안에 껍데기 7, 그다음 안에 또 껍데기 62이레, 그 안에 껍데기 1이레. 1이 뭐냐 하면 ½+½인 거죠. 그러면 이 1을 1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½+½이에요.
여기(½+½)서 나오는 그 의미가 최종적인 의미라면 최종적 의미에서 나오는 것이 이 벽, 62와 7사이에, 7과 전체 70 사이에 그 의미를, 1이레가 ½+½로 나누어지는 그 의미가 그 층을 형성하는 원인이 된다는 겁니다. 원인 제공.
그럼 여기서 ½과 ½을 더하니까 1이레가 되겠죠. 1이레가 되면 옆에 있는 70이 70이레니까 70×7년, 이레가 7이거든요, 이 7이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가 바로 여기서 드러나요. ½+½은 3.5+3.5가 되어야 되는데 이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마지막 1이레가 둘로 쪼개지면서 그것이 기준점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이레에 대한 해석의 기준점.
그러니까 이것이 인간의 신학이나 인간의 철학 같으면요, 거 골치 아프게 쓸데없이 인간들이 지혜 자랑하는 것, 우린 몰라도 된다, 그냥 넘어가자 하겠는데 성경에서 이렇게 분해하는 거예요. 따라오려고 하면 따라와 봐. 안 따라갈 수 없죠. 안 따라가면 도대체 왜 이렇게 되는지 모르니까 따라가야 되죠.
1초가 ½초+½초, 이게 안 된다는 거예요. 이레라는 것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에게 통용되는 그 시간 간격, 시각, 시간과 시간의 간격, 그 폭으로 이레를 해석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 기존의 인간들이, 하나님은 표현하기를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간으로 표현해놓고 그걸 보고 인간들은 내가 표현한 시각따라 따라오라고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인간들이 아는 어떤 사건과 사건 사이에 그 간격, 시간적 간격으로 시간을 해석해서는 No! 그건 안 된다고 선언해버릴 때,
인간은 주님의 이 이레 안에 있는 사건과 인간이 평소에 알고 있는 시간 생활과는 단절이 생기죠. 단절. 아,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 해석으로서는 여기 1이레에 일어나는 사건을 해석할 수가 없는 그런 요소를 갖고 있었구나. 그런 요소.
그러면 이 시간, 70이레의 시간은 시작을 어디서부터 하는가? 시작을 공간에서부터 하는 거예요. 공간에서의 변화를 시간이라 하는 겁니다. 시간은 변화 없으면 시간이 없어요. 변화가 있기 때문에 그 변화하는 모습의 앞뒤 차이를 가지고 시간이라 하는 거예요. 해가 지고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또 해가 뜨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한 날이라. 시간은 지상의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변화, 그 변화를 정리하고 분류하면서 시간이 형성되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에 있는 공간에서 인간들은 자연을 보면서 시간 간격을 잡았죠. 또 하나님이 그걸 허락했어요. 1, 2, 3, 4, 5, 6, 제7일은 안식일이니. 주께서 인간들이 시간 계산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다 아시고 일곱 번째 날에 너희는 일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라 했잖아요, 율법에. 그렇죠?
율법 자체가 인간 기존의 공간과 시간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표현했다 이 말이죠. 율법을 표현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 지킬 수 있는 걸로 여긴 거예요. 1, 2, 3, 4, 5, 6 노동하다가 제7일은 노동 쉬고 제사 드리면 그것이 안식일을 준수한 걸로 여긴 거예요.
인간들이, 인간들이라기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율법을 지킬 때 하나님이 이야기한 것을 들어보면 다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약간 진지하고 정신 바짝 차리면 지킬 수 있는 것 같아요. 아까 제가 예를 들었던 안식일 같은 경우에.
그런데 안식일도 십계명 제4계명에 있지만 그 십계명을 주시면서 십계명 제1계명을 보게 되면 이게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십계명이 못 된다는 것이 첫 번째 계명에 나와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여기에 ‘나’ 하나님이죠. 이 ‘신’은 신이죠. 신이라는 대상은 절대적 개념, 단독자에요. 총체적 유일자거든요. 최고 오직 한분밖에 없는데 한분밖에 없다고 할 때 표현하는 그 GOD, 신을 하나님 율법에서는 십계명에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두 개를 제시한 거예요. 두 개를. 그러니까 인간이 이 율법을 지키려면 신을 몇 개 알고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 제시한 것처럼 신을 두 개 알고 있어야 돼요.
그러나 인간에겐 신 자체가 둘을 용납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신은 최고 존재자가 신이에요. 그런데 최고 존재자가 ‘나 외에 다른 최고 존재자를 섬기지 말라’ 할 때, 최고 존재자에 문제 있음을 우리가 인정해줘야 되고 간파를 해야 돼요.
최고, 신, 신은 최고잖아요. 알라신을 믿는단 말이죠. 그럼 알라신을 믿고 있는 무슬림한테 ‘알라신 말고 다른 알라신을 섬기세요.’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알라신 말고 다른 알라신을 섬기기 바랍니다. 그럼 흔히 말하기를, “알라신 말고 여호와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면 무슬림이 훗, 웃죠. “그 여호와가 우리가 현재 이미 다 믿고 있는 알라신의 다른 버전이 여호와야.”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들은 끄떡도 없어요. 신은 최고 단독자니까요. 자리 하나를 최종 차지한 게 신이에요.
그러니까 십계명 줘도 사람들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뭐냐? [나, 여호와죠, 여호와는 필히 다른 신을 대동하신다] 다른 신을 유발해서 주께서는 다른 신이 어떤 신인지, 나와 왜 차이 나는 신인지를 드러내도록 앞으로 너희들을 이 율법가지고 인도하겠다는 뜻이에요.
여호와는 신이 두 개인데, 여호와 보기에 인간의 신은 두 종류인데, 자기와 또 다른 종류들. 인간 보기에 신은 몇 종류입니까? 한 종류밖에 없죠.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산에 올라가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섬겼습니까? 여호와를 섬겼죠. 여호와 섬기면서 내놓은 게 뭐냐 하면 금신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최고 신이 뭐냐? 여호와에요. 여호와 외에 다른 여호와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결국 뭡니까? ‘나 여호와 말고 다른 여호와를 섬기지 말라’ 이런 뜻인 거예요.
그러면 숨어있는 하나님이 나타나는 그 여호와 말고 인간들이 섬기고 싶어서 믿는 여호와는 누가 이 신을 믿게 했습니까? [인간의 신 섬김은 다른 사람이 강요한 것]이에요. 같이 있던 인간의 무리들이 같이 의견합치해서 강요한 거예요.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강요한 거예요. 너는 하나님을 섬겨야 돼. 이것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그걸 강요했고 나는 그 세계 속에 그 강요를 그냥 수긍하고 받아들이고. 왜?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결국 여기서 우리가 하는 것은 difference, 차이.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차이를 유발하십니다. 차이. 그 차이를 유발한다면, 한쪽이 기존의 인간 공간이라면 주님께서 공간을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기존에 인간이 살던 공간을 A공간이라 합시다. 그럼 주께서 준비한, 차이나니까, 차이가 져야 되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이니까, 기존 신을 믿던 그 공간, 신과 함께 있던 공간 말고 여호와는 인간이 알던 신과 차이나야 되니까 그들이 있던 공간과도 차이나겠죠? 이걸 B공간이라 합시다. A말고 B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 두 공간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아시는 이야기니까 편하게 들으세요.
A공간의 특징, 인간이 사는 공간의 특징은 ①자기부정이 안돼요. 자기부인이 안됩니다. 내가 신을 믿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자기부정이 안돼요. 자기부정이 안 되는 것은 다른 건 다 의심해도, 다른 것은 다 의심해요, 한방 갈까 양방 갈까, 다 의심해도 ②나는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①번, ②번 아시겠죠? ③번, 고로 그러므로 ∴나는 내가 신이다. 자기부정이 안돼요. 괜찮은 것은 다 수입해요. 예수도 괜찮고 십자가도 괜찮고 괜찮은 것은 다 수입해요.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자기부정이 안돼요.
여호와께서 친히 만든 공간, B공간은 다릅니다. 언약으로 만든 공간은 달라요. A공간을 지옥이라 합니다. 지옥의 특징은 자기부정이 안 됩니다. 자기부정이 안 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말은, 자기부정이 안 된다는 이 말을 다른 네 자로 하면 자기긍정이죠, 한없는 무한한 자기긍정. 자기에 대한 무한한 애착, 찬양, 이거겠죠. 행동과 말에서 자기긍정을 위해 타인부정에 나서겠죠. 계속해서 타인을 부정해야 나만 긍정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은 못 그리지만 그림 하나 그리겠습니다. 총 그림인데 타인을 향하여 비난하는 그것이, 빵! 하고 방아쇠를 당겨버리면 그 총알이 누구한테로 옵니까? 자기한테로 날아오는 거예요. 이게 지옥입니다. 지옥. 그런데 이 세상, A공간, 현공간이 전부다 지옥이에요. 남으로부터 인정받겠다는 것, 이걸 가지고 지옥생활이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가 목마르잖아요. 목마르면 목말라야죠. 그러나 이것은 나를 긍정했던 나는 아니에요. 나는 목이 안 말라야 돼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낙원에 가있는 아브라함보고는 심부름 못 시키고 거지 나사로가 보이니까 거지 나사로보고 보내라 하죠. 나는 목 안 마르고 싶은데 목마르니까 이게 자기긍정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잖아요. 그걸 충족시키기 위해서 나를 인정하기 위해서 말을 하죠. 아브라함에게 말과 행동을 하죠. 총을 쏘는 거예요. 빵! 하고.
남한테 인정받고자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총알은 나한테 날아오죠. 가장 극단적인 총알에 날아오는 극단적인 사태가 뭐냐? 자결, 자살입니다. 자살.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자살중이에요. 입만 떼면, 행동만 하면, 나 어때? 나 어때? 에요.
그래서 이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지만 여자의 자기긍정과 자기인정은 옷. 이거 전혀 근거 없어요. 사기입니다. 스타일. 남자는 술. 또는 차. 술, 차니까 합해보면 술 먹고 차 계약하기. 이러면 되겠죠. 안 그러면 술 먹고 축구보기. 온두라스 축구보기 이런 거. 스포츠 즐기기, 도박하기. 어떤 게임에 내가 정신적으로 투자함으로써 승률이 좋은 쪽에 투자를 함으로써 승리감이 나의 승리감으로 왔을 때 나는 한없는 나의 긍정이 충족되죠.
이게 뭐냐? 지옥에서 스트레스 받으며 사는 것을 없애는 보람이에요. 사는 보람이에요. 이게 바로 지옥입니다. 그래서 강남강의에서도 했지만 이 세상에 살다가 그냥 내려가는 게 지옥이에요.
그걸 쉽게 알려면 이걸로 알 수 있어요. 거제도에 가면 조선(造船), 배 만드는 데 있잖아요. 배를 처음 만들 때 바다에서 안 만들죠. 도크라는 데 해서, 일종의 도크지만 육지잖아요, 육지에서 만들면 나중에 선주 오고 선주 부인은 또 원피스 입고 와서 테이프 끊으면서 샴페인 하나 툭 터트리면 배가 미끄러져 나가죠. 어디 있던 겁니까, 건조할 때? 육지에 있던 거잖아요. 육지에서 완성되면 그대로 바다에 본격적으로 나가잖아요.
그러니까 이 땅은 지옥을 건조하는 조선소에요. 그게 나중에 그대로 미끄러지면 어디 갑니까? 본격적으로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의 특징을 말하라면 자기인정투쟁. 헤겔이 이야기한 겁니다. 자기인정투쟁. 인간의 모든 원천은 나를 타인들 앞에서 인정해달라는 거예요. 비록 타인이 없어진다 할지라도.
아버지가 연세 많아 돌아가신다할지라도 성공하면 아버지 묘소에 소주하고 오징어 들고 가서 아버지가 원했던 자식 여기 왔습니다, 당신도 절하세요, 하면서 약혼자나 결혼한 사람 붙들고 절하게 만들고 그러죠. 드라마에 나오잖아요. 뒤에 보면 한강 흐르고 있고. 경치 좋아요, 거기.
인간은 한시도 자기인정투쟁이 없는 순간이 없어요. 남한테 인정받는 순간, 그 사람은 지옥 가고자하는 지옥생활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A공간입니다. Plan 2가 있죠. Plan B가 또 있다고요. 이 계획, 인간이 아는 계획밖에 없습니다.
그럼 B공간은 뭐냐? B공간을 아주 단적으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는 게 여러분들 속 시원할 거예요. B공간은 [천국에서 기상하여 지옥으로 출근하고 저녁 때 천국으로 퇴근하여 잠자는 사람]. 잠을 자게 되면 의식이 없잖아요. 잠잔다, 잠잔다 한다고 잠자는 게 아니에요. 잠을 자게 되면 모든 자기 활동이 정지가 됩니다. 죽은 상태에 들어가죠.
그러니까 이 말은 반복하는 거예요.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잠은 천국에서 자고 아직까지 육신은 있으니까 일은 이 지옥으로 출근하는데 이걸 파견근무라 하는 거예요. 지옥에 파견근무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고 나사렛 예수님으로서 활동한 일터가 어딥니까? 지옥이죠. 지옥에서 자기 백성 건지는 일을 한 거예요.
이 일을 하실 때 이미 A공간에서 인간이 어떻게 산다는 것이 벌써 정해져 있잖아요. 정해져 있죠. 그러면 ①번은 ①’하면 되죠. 인간은 자기부정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A공간, 천국이죠, 천국에서는 뭘 하든지 간에 자기가 부인되고 부정되는 게 목표가 되죠.
이걸 함축하면 이렇습니다. 함축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 속에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데 굳이 사력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그걸 지키려고 하는 것], 이게 A공간입니다. 이게 바보 아니에요? 완전 바보거든요. 내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왜? 안개니까. 야고보서 4장 14절에. 안개 모아서 뭐할 건데요. 어디 뭐 안개 모아서 피부 관리할 거예요? 수증기 모아서 뭐할 거예요. 우리는 안개인데 안개일 뿐인 우리를 이게 뭐라고 그런 나를 남들보고 인정해달라고 투쟁, 결사적으로 투쟁을 벌이는 거예요.
주로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주로 게임, 바둑, 축구, 고스톱. 이건 노골적인 게임이지만 이 A공간 지옥에서 게임 아닌 순간이 있던가요? 게임 안하는 조직 있던가요? 없죠. 뭐든지… 의료계도 마찬가지잖아요, 의료계도. 간호사도 돈 벌게 해줘! 의사들은, 너는 내 밑에 있어야 돼. 이게 게임이라니까요. 게임이 있어야 돼요. 회사 가서 착실히 해서 월급 받으면 되지. 아니 아니요. 회사는 우리를 게임판에 집어넣습니다, 게임판에.
상대를 이겨야 되는데 상대를 이기면 기분은 좋은데 이긴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사랑과 전쟁이라는 가상 드라마에 보면 부부가 치열하게 싸우잖아요. 그런데 둘 다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둘 다 개뿔도 없어요. 둘 다 안개에요. 그러니까 솜사탕 요새 3천원 합니까? 솜사탕 하나씩 사들고 솜사탕과 솜사탕끼리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거예요. 솜사탕이 막 튀죠. 튀어나올 거예요. 헥헥 끝나고 보니까 솜사탕은 다 녹아버리고 작대기만 남아 있는데?
그러면 평생 동안 인생 뭐에요? 뭐하다 인생 늙었습니까? 뭐하다 늙었는지도 몰라. 주님께서는 A공간 여기의 변화를, 시간이죠, 여기서 70년을 끄집어냈어요. 그리고 B공간에서는 뭐가 됩니까? 70년이 곧 뭐가 되겠어요? 70이레가 되는 거예요. 70이레.
70년이라는 시간 개념에서 그 중간에는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무엇이 있죠,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무엇, 저주받을 죄인이 자기 인생관리, 자기 시간관리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그 시간이 주께서 준비한 천국이라는 B공간에서 이 시간이 먹히겠습니까, 안 먹히겠습니까? 안 먹히죠. 안 먹히면 차단해야 되겠죠. 시간적 용어로 차단하는 방법이 이레라는 거예요, 이레. 그걸 이레로 차단시키는 겁니다.
자기가 잡은 총의 총구가 휘어져 자기를 향하는 이 그림, 오늘 다 잊더라도 권총 하나는 옆구리에 차시기 바랍니다.
B공간은 아까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 했죠. 아무것도 아니고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고 또는 아예 없죠.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안개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B공간에서는 A공간을 품어버려요. A공간은, 인간은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시편 39편에도 나오고 많이 나오잖아요. 이사야 2장에도 나오고.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 2:22)
너는 호흡덩어리로 보는 거예요. 코에 호흡이 있으니까 호흡을 빼앗아 가면 나머지는…… 풍선이 바람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풍선은 탱탱하게 있는 것이 아니고 슈욱~ 주저앉죠. 개업할 때 열심히 전봇대 같은 풍선이 춤을 추잖아요. 나중에 개업식 끝나고 바람 빼면 주저앉아서 압축되듯이 그렇게 노발대발 고지식하고 고집 셌던 아버지, 호흡기 훅 빼니까 피융~ 요양병원에서 하나의 처리해야 될 처리대상이 되잖아요.
아무것도 없게 만들면서 없는 데서 있음이 아니고, 없는 데서 언약이 나와요. 없는 데서 언약이 나옵니다. 공간은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자, 여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공간이 있어요. A공간.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A공간, 그러니까 지옥이죠, 지옥이라 볼 수 있는데 없는 공간에 언약이 투입되면 언약 자체가 부풀어져서 언약 자체가 없는 데에 거기서 새로운 B공간이 출현됩니다.
그 예가 바로 노아 언약을 보면 알 수 있죠. 노아 당시 사람들이 살던 육지에 짐승들, 새들 다 어디 갔습니까? 없죠. 물로써 없애버렸어요. 물로써. 그러면 노아 심판이 끝나고 남아있는 게 뭐죠? 노아 심판이 끝나고 남아있는 것. 방주죠. 방주, 이거 누구 작품이에요? 하나님 작품이죠. 언약이니까.
A공간에서의 인간의 삶의 정신은 항상 나머지가 있어요. 7÷5=1하고 …뭐가 돼요? 나머지 2가 되겠죠. 7÷5=1…2, 2가 남죠, 2가. 2가 남잖아요.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해도 나 하나를 끝까지 긍정하기 위해서 나를 남기는 식으로 모든 일을 행동을 하게 되어 있어요. 어떤 경우라도.
다 해보고 결국은 이거 하나 남았네. 다 잃었어, 다 잃었어, 하지만… 다 잃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잃은 가운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내가 있잖아. 주저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는 거야. 결국 끝까지 챙기는 건 뭡니까? 남아있는 걸 챙기잖아요. 남아있는 걸. 이 말은 끝까지 자기부정이 된다, 안 된다? 자기부정이 안 되죠.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안 됩니다. 이게 될 수가 없어요. 될 수 없을 때 주께서 준비한 것은 심판이죠. 네가 아무것도 없다는 게 돼? 안돼요. 내가 해줄게. 내가 심판해줄게. 싹쓸이 다 심판해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이만큼 키웠던 내 것 있잖아요. 내 것이 다 날아가요.
노아 홍수 때 노아의 집도 날아갔다는 사실, 거주지가 날아갔다는 사실을 여러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노아의 논과 밭 다 날아갔어요. 그럼 노아 식구는 있잖아요. 노아 식구 없어요. 왜 없느냐? 노아 식구는 노아 식구 그 자체로 자기 안을 구성했습니다. 영어로 하면 in. in을 구성했어요. 그런데 끝나고 난 뒤에는 노아 자체의 in, 공간은 없고 방주, in 방주, 방주 안이 새로 생겼어요. 이 방주가 뭐냐 하면 신약의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촌집 같은 데에 보면 장독 있죠. 빤질빤질한 장독. 참기름으로 닦았는지 빤질빤질한 장독, 저 식물처럼 빤질빤질 장독이 있는데 이 장독을 사람들이 공간A, A공간에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하느냐 하면 종교 생활하거든요. 이 장독이 내 몸이라면 사람들은 여기에 깨끗한 물이 와서 장독을 씻어주길 바래요. 내 모든 죄를. 그러면 물이 동원되어버리면 장독은 더러운 게 씻겨내려 가겠죠. 그런데 닦아보면 이 장독은 여전히 내 것이 되겠죠.
그런데 신약에서 주님께서는 이 장독을 하나의 원수로 간주해서 물이 아니고 피로 씻어버려요. 피로 씻어버리면 더 이상 깨끗한 나는 성립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주 안에서 주님의 소유가 되었으니까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내가 값으로 샀으니 내 것이 되었다. 이 소유권이 주님의 것이 된 거예요.
나는 누구의 것이다? 내가 없어지는 건 아니고 내가 있는데, 장독은 있는데 이 소유권이 누구로 바뀌었습니까? 주님의 것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좋은 점이 뭐냐? 나에게 나의 행동에 어떤 책임감도 피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팔을 고치든 말든 책임 안 져요. 팔을 그냥 덜렁덜렁하든 책임질 필요 없어요. 이러다 죽을래, 해도 책임을 물을 수 없어요. 그래도 한 가족인데… 가족이고 뭐고 난 몰라. 어쨌든 책임감이 없어요. 내가 증거 할 것은 피 묻은 덜렁덜렁한 팔이다. 피가 묻혀있는 팔은 소유권이 넘어가요.
소유권이 넘어가게 되면 아까 A공간에서 우리 인간은 평소에 어떤 태도로 살아갔습니까? 남으로부터 인정받는다 했죠. 남으로부터 인정받을 대상 자체가 날아가버렸어요. 남으로부터 인정받을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유지되는 상태가 피 안에 예수 안에 십자가 안에 성령 안에 내 모습이에요.
지난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죠.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최초의 사건과 최후의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다. 최초의 사건, 다시 말해서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 그 사건. 로마서 9장에 보면,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고 어떤 선이나 어떤 악을 저지르기도 전에 (롬 9:11).
참… 사도 바울이 물론 예수님의 계시 받아 했겠지만 인간이 선악과 체제 안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한 거예요. 그들이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선악 너머의 세계에요. 아까 A공간은 무슨 세계입니까? A공간은 선악세계잖아요. 착해야 인정받으니까.
B공간은 선악 그 너머의 세계. 생명나무의 세계에요. 생명나무의 세계. 생명나무의 세계가 이 선악세계에는 있다, 없다? 없어요. 있어도 인간에게는 없는 게 돼요. 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니까. 멜기세덱이 뭡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피로써 죄 씻음 받는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선악체계가 없는 사람 같으면 이게 납득이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구나. 그냥 사랑이구나.’ 납득이 되는데 아직도 나한테 양심이라는 게 있고 아직도 나한테 시건이라는 게 있고 철이 났고 소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의젓한 어른 노릇하는 사람한테는 나의 의가 그리스도의 의를 계속 끈질기게 방해하고 있어요.
간단히 흔한 말로 나오는 게 복음알고 십자가알고 다 알았는데 저 또 뭐하면 됩니까? 아이고 머리야.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눅 18:11-12) 쉽게 말해서, 말씀대로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바리새인보고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네가 딱 죄인이다. 네가 바로 지옥에 딱 맞다. 지옥요건에 딱 합당하다.”
뭐냐 하면 결국 내 것은 있고 내 것에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효과를 주겠느냐를 계산하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하게 되면 나는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인정받을 수 있어요. 아까 인정투쟁 했죠. ‘하나님 저 어때요? 믿을 거 다 믿고 하라는 거 다 했으니까 저 어때요? 제가 오늘 죽어도 천국 가겠죠?’ 이러잖아요.
여러분, B공간에 있는 사람의 질문과 A공간에 있는 사람의 질문을 한번 비교해보겠습니다. 먼저 A공간, A공간의 사람은 이렇게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 나오죠. “내가 주를 위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복음을 전하고 주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나와요. (마 7:22)
그런데 B공간에 있는 사람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와요. “제가 언제 주를 위해서 했습니까?” (마 25:37-39) “제가 언제 주님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제가 언제 주님 돌아보았습니까? 저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맞죠.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기대를 한 게 아니고 주님 자신의 십자가 공간 안에 사랑의 공간 안에 강제로 주께서 편입시켰기 때문에. 자기가 놀던 공간의 가락과 전혀 엉뚱한 진리체제가 가동되고 있었던 거예요. 생뚱맞고 생소한 거예요. 낯설고 신선한 겁니다.
내가 알던 내가 아니라는 것을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내가 알던 나는 지옥 가는 나였고 내가 알지 못했던 나를 하나님께서 천국 보낸다는 사실을 B공간에서 비로소 방주 안에서 생각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방주는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노아 아이디어에요, 주님 아이디어입니까? 주님 아이디어에요. 우리의 구원은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주님 아이디어이고 예수님 자기 숙제에요. 내가 해야 될 내 숙제가 아닙니다. 이게 성경에 있어요.
그래서 B공간에 있는 사람, 쉽게 말해서 방주 안, 지금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이걸 비행기라 봅시다. B공간을 비행기라 하면, ‘아이고 복음 안에 사는 것도 이제 지겹다. 식상하다. 나도 세상에 한번 나가볼까?’ 하고 비행기 바닥을 한번 뜯어봐요. 드라이버로 뜯어본다고요. 뜯어보니까 그게 땅입니까, 공중입니까? ‘어? 벌써 떴네, 비행기가?’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천국 가는 비행기에 태웠는데 거기서 이제 내릴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게 너무 심심하다고. 복음 안의 세계가 너무 재미없다고.
주께서 가끔 뜯어서 보여줘요, 저 밑에를. 벌써 공중에 떴어요. 빼도 박도 못해요. 그러니까 주님과 함께 붕 뜬 거예요.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 땅에 있는 너는 이미 죽었고, 이 비행기 안에 그러니까 내 안에 너는 살고 있다. 이걸 보여주는 겁니다. 이미 죽었으니까.
지금 사는 데가 어디입니까? 천국이죠. 그럼 우린 육신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밤에는 천국 가고 주무시고 아침에 또 깨워줘요. 깨워줘서 오늘 또 지옥에서, 옛날 이야기지만 꼬맹이들 합기도 가르쳐야지, 그러면 아이, 몸이 찌뿌둥한데 또 해야 되느냐.
주님의 고난이 바로 그 고난이거든요. 자기 나라도 아닌데 33년 동안 이 땅에 사셔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기간이 약간 더 길어졌지만. 그만큼 철이 안 나서 더 길어진 거고요. 철나면 데려갈 거예요, 이제. 이제는 휴가내고 영원히 천국 가실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소원이 빨리 이 땅 지옥에서 활동 그만하는 거예요.
육신은 아까 누구 것이라 했습니까? 우리 것 아니잖아요.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 증거하라고 밤에는 우리 의식 날려가지고 아예 죽은 채로 자고 아침에 기상하게 되면 슬슬 또 지옥으로 차타고 기어나오는 거예요. 나와가지고 온갖 부딪치면서… 특히 학교 같은데 보면 애들 만나잖아요. 애들 전부다 손듭니다. 나 인정! 나 인정! 나 인정! 나 인정해달라고 손을 들죠. 특히 점심시간에 샘들, 선생님들 만나도 마찬가지고. 자기인정 해달라는 거예요. 내 아들 올해 어느 대학 들어가고. 전부다 자기인정이에요. 자기긍정. 이런 상태에요.
B공간에서 작용하는 시간 개념이 아까 뭐라 했죠? 이레. 그걸 바로 이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간은 뭐로 채운다? 시간으로 채운다. 새 시간 같으면 새 공간, B공간이죠. 옛날 우리가 아는 시간 같으면 A공간. 지옥입니다.
따라서 제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제가 B공간에 있습니까, 아니면 A공간에 있습니까?” 또 슬그머니 이제 내 장독을 물로 씻으려고 하겠죠. B공간에 있는 증명 방법은 이렇습니다. ‘주님이 뭘 하셨느냐’가 아니라 ‘악마가 지금 뭘 하고 있느냐’로 출발하는 거예요.
악마가 뭘 하고 있느냐? B공간의 존재, 하나님의 의의 공간, 오직 사랑, 생명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언약의 세계를 악마는 어떤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걸 막아보려고 하죠. 안 들리게 하고 안 보이게 하고. 못 보게 만들고 안 들리게 하고 그걸 못 느끼게 만드는 그게 악마가 활동하는 A공간입니다. A공간이 먼저거든요. 악마가 먼저 지배했으니까.
그다음 B공간에 나서는 이 방식에서 B공간에 속한 선지자가 A공간에 대해서 무슨 활동을 해야 되는가? 육신가지고 어떤 활동을 했는가? 그게 이사야 6장에 나옵니다. 이사야 6장을 봅시다. 악마가 평소에 인간을 어떻게 버려놨는지 뻔히 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하십니다.
6장 8절에서 10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철저하게 A공간에서 탈출이 불가하게 만들죠. A공간에서 주의 말씀 알아듣고 스스로 B공간 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이단입니다. 새삼스럽게 이단이라 할 것도 없이 다 이단이지만, 그건 이단이에요. 없어요. 왜냐하면 주의 적극적인 취지가 뭐냐 하면 눈이 감기게 하고 귀가 막히고 마음을 둔하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한 적극적 의지를 가지고 주께서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여기에 충실한 자들이 누구냐 하면 열두 제자였어요.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몰랐어요. 참 신기하죠. 왜 그러느냐 하면 성경을 주고 아무리 율법을 줘도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석을 하는데 그 해석 자체가 주님의 적극적인 동기와 매치가 돼요. 만나게 돼요.
알기 때문에 모르는 거고 들었다 하기 때문에 안 들리는 거고 봤기 때문에 못 보고 있는 거예요. 철저하게.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에 아무것도 아닌 걸 지키고 있거든요. 결사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을 맹목적으로 나의 가치와 의미를 지키는 거예요. 지킬 필요도 없는데. 그냥 무책임하게 살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조금만 더 하고 첫째 시간 쉽시다. 그렇다면 주님의 방법이 뭐냐? 주일 낮 설교에 했듯이 율법을 주는 겁니다. 율법을 주게 되면… [율법의 특징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는 채 얻어맞고 있고 벌 받고 있다].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실존주의 문학가, 1900년대 초기에 체코 문학가 카프카가 지었던 <소송(심판)>이라는 소설에 보면 요제프 K라는 주인공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고 소송당해요. 그래서 법원에 가도 법원도 만나주지 않아요. 그냥 피소되었다는 사실만 주지시키면서 집행자들이 쥐어패기만 하고 고문당하고 결국은 나중에 심장에 칼 찔려 죽어요, 채석장에서. 그 채석장 근처에 어떤 건물이 있는데 건물에서 어떤 인간이 쓰윽 문 열고 보면서 웃고 있는 거예요.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죄 지었다는 고발장만 받았는데 무슨 죄인지 모르는 거예요. 이게 현대인이라는 겁니다, 카프카가. 딱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인간상. 10분 쉽시다.
이근호 댓글
캡처된 권총그림의 : 모든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를 살해하는 행위다
광주강의20230526b 다니엘9장 27절(지옥으로 출근)-이 근호 목사
자연상수에 관한 도함수 그림을 독하게 캡처해 주시고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죽더라도 독하게 생각하고 정리하면서 죽어야 됨을 시사해주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와 이어져서 여기 칠판에 써놨죠. [위험한 상황 : 내 것이 생기는 상황] B공간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은 내가 죽는 상황 또는 가난한 상황, 그런 상황이 아니고 내 것이 생기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 한 예가 사렙다 과부, 엘리야가 찾아갔던 사렙다 과부 있잖아요. 그 과부를 찾아간 타이밍에 아들하고 과부가 마지막 남은 가루와 마지막 남은 기름가지고 이거 먹고 죽자고 했을 때에, 그때 죽는 순간에 그 기름과 밀가루가 누구 소유입니까? 과부 소유죠. 자기 거죠. 그런데 그걸 홀라당 엘리야가 빼앗아 먹었잖아요. 그럼 과부는 이제 정말 자기 것이 없이 되어버렸어요.
그리고 난 뒤에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에게 밀가루 통이 마르지 않고 기름이 다하지 않도록 계속 채워줬죠. 자, 그럴 때 그 밀가루와 기름은 누구 것입니까? 그 과부 가정은 자기 것이라고 여긴 거예요. 좋은 선지자 만나서 우리가 이제 더 잘 살게 되었다는 거예요. 가뭄 때문에 어려운 시기에 잘 살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장독을 빤질빤질하게 물로 씻은 셈이 되죠.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죽죠. 아들이 죽으니까 그렇게 엘리야에게 호의를 갖고 있던 과부가 길길이 뛰면서 정말 멱살 쥐고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달려들었잖아요. 당신을 안 만났으면 내 아들이 안 죽었을 건데 당신 만나서 멀쩡한 내 아들 죽게 되었다 할 때 엘리야가 죽은 아들 위에 세 번 엎드려 부르짖고 아들 살려냈잖아요. 그렇다면 그 과부 아들은 누구 것입니까, 이제는? 하나님 것이죠.
그러니까 B공간, 천국공간에서 제일 위험한 것은 뭐냐? 내 것이 생기는 상황이죠. 그러면 주께서 B공간을 B공간답게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 것이 생기는 이 위험한 상황에서 내 것이 생기는 것을 내 것을 제거해주는 것, 이게 복이 되는 겁니다. 내 것을 제거하는 것.
또 한 예를 들게요.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잖아요. 그 포도주는 누구 포도주입니까? 그 혼인잔치 주최 측의 포도주죠. 그 다음에 마리아가 예수님보고 포도주 떨어졌다 할 때 마리아가 요구한 포도주는 어느 쪽 포도주입니까? 이 혼주 쪽에 필요한 포도주, 우리 포도주가 필요하죠.
주께서 포도주를 줬습니까, 물 줬습니까? 물 줬죠. 물을 준 거예요. 물을 항아리에 담은 아이디어는 그 주최 측, 혼주 측 어느 누구의 아이디어에 그런 게 없어요. 물을 갖다 줬다 이 말이죠, 손님들에게. 물이나 먹으라고 물 갖다 준 거예요. 그렇게 먹었을 때, 그걸 퍼먹으니까 그게 포도주 되었죠. 그때 손님들이 한결같이 칭찬하기를, 이 포도주 어디서 구했냐 하는 거예요. 그럼 이 포도주는 어디서 구했어요? 예수님에게 나왔죠. 예수님에게서.
처음에 혼주 측 포도주로 시작했던 이야기가 예수님이 개입해서 어떻게 된다? 내 포도주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온 주님의 포도주로 그들을 먹인 거예요. 물이 뭐로 변했습니까? 포도주로 변한 거예요, 물이.
그런데 처음부터 주께서 포도주로 왜 안 줬습니까? 그냥 포도주를 주면 그들은 자기상실이라는 기회를 놓쳐버려요. 내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기회가 없어져버려요. ‘내게 필요한 것 주께서 더 주셨다’가 되어버립니다. 그건 A공간이에요. A공간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정도 됐죠. 그럼 세 번째 응용문제 들어갈 때 여러분이 맞춰보세요. 이건 여러분들이 맞추는 겁니다. 성경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 있죠. 자, 문제입니다. 문제: 여기 내 휴대폰이 있는데 커피 마시면서 휴대폰을 책상에 놔뒀다 합시다. 그런데 정신 좀 이상한 사람이 와서 “내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할 때, 여기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에요. 하나는 Yes. 하나는 No. 제 질문은 Yes뒤에 뭐가 붙고 No뒤에 뭐가 붙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출제자가 자기 마음대로에요. 답은 나 혼자 알고 있어요. 비겁한 거예요.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Yes.” 힌트는 뭡니까? 주께서는 어떤 사태를 만드는데 내 것이 생기는 상황을 제거하는 사태를 만들죠, 일상에서.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Yes.” 그다음에 뭡니까? “내 것이 아니니까.” 그러면 “No.”뒤에는 뭡니까? “가져가지 마세요. 왜냐하면 내 것이 아니니까.”
쓸데없이 동냥하고 돈 도와주고 하지 마세요. 유니세프 같은 거 돈 내지 말고. 내 돈입니까? 주의 돈인데 왜 함부로 써요? 왜 혼자 기분 내고 자기 착한 척해요. 이걸 충실히 했던 자가 사도행전 3장에 나옵니다. 어떤 거지가 사도 두 사람보고 “돈 주세요.” 하니까 그 사도가 정말 참 기쁜 소식을 이야기했죠. “나 돈 없다. 돈 없지만 내게 있는 걸 줄게. 주의 이름 줄게.” 참… 돈을 아끼는 방법도 여러 가지에요. 돈을 절약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죠. 네가 원하기 때문에 No!가 되는 거예요.
전에 서울 강의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어떤 같은 교회 집사님이 있는데 자기 애 이야기하면서 “우리 애가 지금 불치병에 걸렸는데 불치병 치료비 500만원인데 우리 집에 돈도 없고 나보다 빨리 천국가게 돼서 말로 다할 수 없이 너무 기뻐가지고 너한테 자랑하려고 한다. 치료비 없어서 곧 사흘 뒤에 죽는데 나 너무 기뻐.” 이거 무슨 뜻이에요, 이게? 뭐 돈 빌려달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사람 심리적 압박을 하면서 말을 합니까?
그러면 “아이고 당신 집에 경사 났네요.” 무슨 뜻입니까? 아래쪽에 No죠. 당신 그 소리해서 내 돈 넘볼 생각마라. No잖아요. 그런데 “불치병인 자식을 500만원 들여 살려놔야 당신 죄가 더 들추어질 것 같아. 그 애가 죽는 것보다도 살아있어서 당신을 더 괴롭힐 필요가 있어. 옛다 500만원. 애한테는 무작정 손해지만, 좀더 사니까 손해지만, 부모가 죄를 깨닫기 위해서 더 살 필요가 있다고 난 생각해. 가져가세요. 왜? 내 것 아니니까.”
모든 건 주의 것이에요. 주께서 쓰실 때 반드시 쓰시는 용도가 뭐냐 하면 우리는 어떤 내 것을 가질 자격도 없다는 것을 반드시 들추어내면서 그걸 쓰시는 거예요, 주께서.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 (고전 10:31) 주의 것이니까 주께서 쓰시는데 그 쓰시는 용도는 B공간에서는 나를 부인하는 식으로 부인하는 데에 필요한 비용으로 들어간다 이 말이에요.
변화산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의 영광을 보았죠. 아주 신났죠. 신났어. 그런데 변화산에 영광 본 것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에요. 왜냐하면 이걸 보고 갑자기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이 산 위에서 같이 살겠다고 제안을 했다는 것은 지금 주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자기부인할 수 있는 절차를 경유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축구시합을 하는데 결과는 2:2로 끝나는 것을 주께서 아셔요. 그런데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0:2로 만들어요. 20세 이하 월드컵 대회 이야기입니다. 어제 했어요. 0:2해놓고 뒤에 2골 넣게 했어요.
자, 0:2는 뭡니까? 졌어, 졌어. 끝났다, 끝났다. 갑자기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 편을 들면서 아까 공부했던, 인정받고 싶은 자기인정, 자기긍정, 역시 우리나라는 아~대한민국 최고야. A공간에서 사는 보람이 자기긍정에 있거든요. 내가 편든 우리 팀이 0:2로 지고 있으니까 끝났다, 졌다 했는데 나중에 자다 깨서 보게 되니까 2:2되었어요. 그나마도 다행이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
왜 0:2로 만드느냐? 주께서는 반대로 갑자기 베드로하고 붕 떴어요. 마치 예수님, 엘리야, 모세 그다음 옆에 누가 있다? 베드로가 마치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변화산 상황과 십자가 상황이 동일하게 위험한 상황이에요.
사실은 어느 상황이 효과적입니까?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앞에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0:2에요. 아니 0:5에요. 주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아시겠죠. 주께서 왜 우리 기도대로 안 해주시는지 이유를 알겠죠. 그것이 바로 이레입니다. 우리가 아는 어떤 시간도 아닌, 상상도 못한 새로운 시간이 이레에요.
그럼 이제부터는 이레가 무엇인가? 이레라는 시간, 7년의 의미가 뭐냐? 이걸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미리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자신이 투여한 양만큼 비례해서 변화를 나타낸다]
이게 원금+이자가 복리로 계산될 때에요. 1000만원 예금했는데 이자가 20%다, 그럼 200만원되죠. 그럼 그다음 1000만원에 200만원 이자 주는 게 아니에요. 1200만원에 2%가 추가되죠. 자기에게 투여한 양만큼 비례해서 변화된다는 겁니다.
[이레라는 시간은 그(이레) 시간에 해당되는 사건투입이 전제되고 그 전제된 사건에 비례해서 그다음 사건이 전개된다] 이게 이레입니다.
*두 번째 강의 15:20-24:40 오일러 상수(자연 상수, e)에 관한 내용은 첨부한 이미지 파일로 대체합니다.
오일러의 수(Euler's number) ℯ=2.71828…도 그렇고요. π 있잖아요. 3.14159… π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거 중요한 겁니다, 원의 둘레와 지름 사이의 비율이에요, 비율. 비율이 3.14159… 쭉 나오잖아요. 그처럼 비율이 1이 되는, 지수에 어떤 수를 넣어도 값(비례상수)이 1이 될 수밖에 없는 밑(ℯ)을 위하여 다른 규칙이 있다는 겁니다.
3.14159… ‘그 많은 숫자가운데 왜 3.14159…라는 숫자만이 원과 지름 사이의 비율을 나타내느냐?’라고 질문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지름과 원둘레 사이는 3.14입니다, 이게 아니고, 이 세상에 숫자가 많잖아요. 7도 있고 46도 있고 567000도 있는데 ‘왜 하필 3.14159가 그 많은 숫자가운데 왜 이 숫자가 지름과 원둘레 사이의 비율이 되느냐?’ 이것과 ‘그 많은 복리계산에서 2.71828이라는 이 특수상수만이 왜 동일한 비율로 변화율을 드러내느냐?’ 라는 거예요.
이게 상수에요, 상수. 어떤 함수나 변수 x, y 뭐든 관계없어요.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고요. 마치 π처럼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는 거예요. 방금 했던 오일러 수 ℯ라는 의미가… 밑이 2일 때와 8일 때 비례상수가 몇 배 차이라 했습니까? 3배 차이였죠. 2³=8이니까. 비례상수가 1이 되는 경우는 지수함수의 밑이 ℯ일 때인데, 비율로 8은 2의 3제곱이 되고 2는 8의 ⅓제곱이 되니까 값이 ⅓이 되는 딱딱 들어맞는 이런 규칙성을 갖고 있는 경우처럼 ℯ라는 수를 밑으로 사용했을 때 어떤 변수를 집어넣어도 비례상수는 1로 드러난다는 거예요.
π를 사용할 때는, 어떤 원이든 작은 원이든 큰 원이든 엄청난 원이든 간에 비율은 한결같이 3.14159…. 그래, 그게 맞지. 수학자는 ‘맞지’가 아니라 ‘왜 6, 7, 8, 2466, 4550 많은 숫자가 있는데 왜 3.14159가 비율을 나타내는 유일한 숫자로서 그게 들어가느냐?’ 그것을 문제 삼는 거예요.
수학자들도 참 골치 아픈 사람들이죠. 비율이 그렇게 된다, 그럼 끝날 걸가지고 문제 삼는 거예요. 왜 다른 숫자는 안 되고 3.14159만 되냐는 거예요. 그럼 관점이 뭡니까, 관점이? 우리가 편리하다는 관점이 아니라 숫자에 미친 거예요. 3.14159, 원이 작고 크고 다 다른데 왜 비율은 한결같이 딱 그렇게 3.14159냐 이 말입니다.
제가 수학이야기를 왜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이레라는 딱 하나의 시간 개념을 왜 집어넣느냐는 거예요. 그 많은 시간 개념이 있는데, 왜 이레인가? 그리고 그게 한결같죠. 언약에서 한결같이 적용시키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숫자 이야기를 한 결론입니다. π이야기와 오일러 수 이야기.
ℯ, 특수한 상수가 들어가버리면 비율이 똑같이 되는 거예요. ℯ가 들어가면 어떤 변수를 넣어도 1.0000이 나오니까. 그렇게 해서 수학자들이 ℯ를 집어넣어 계산을 하면 굉장히 편리해요. 도함수라는 말을 안 꺼내려고 했는데 도함수를 꼭 설명해야 돼요. 자기 자신을 쪼개면 쪼개지고 쪼개진 비율이, 처음에 쪼개졌던 비율과 어떻게 그렇게 1.0000. 똑같은가 하는 겁니다. (도함수(derivative): 특정 순간에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나타내는 순간 변화율)
작은 원, 큰 원, 작은 원, 큰 원, 그렇게 있더라도 원의 크기와 관계없이 어떻게 비율이, 비율입니다, 3.14159…이냐 이 말이죠. 무리수가 나오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수학자들은 복잡한 계산들을 아주 편리하게 수식을 세워서 수식대로 자기 논리를 전개시키거든요.
이 세상에 많은 초(秒,second)도 있고 날(日,day)도 있고 분(分,minute)도 있고 시(時,hour)도 있고 시간단위가 많잖아요. 왜 하필이면 이레냐 이 말이죠, 언약에서는. 이 이야기하려고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이야기를 끄집어낸 거예요. 규칙성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언약적 규칙성을 부여했는데 그게 시간적 표현이었다. 이레라는 시간적 표현을 가지고 집어넣었다.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주께서 이레를 집어넣고 집어넣은 그 자체를 이레로 또 거기다 처발라버리죠. 이레로. 그러면 이레의 핵심부분을 보자는 거예요. 그건 아까 우리 봤어요.
70이레로 시작해놓고, 원이 커요, 큰 원 안에 작은 원이 있는 거예요. 70이레 가운데서 조그만 원, 이 원이 1이레가 되겠죠. 1이레가 반으로 쪼개지는 거예요. 이미 쪼개졌다 할 때는 아까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시간적 개념은 더 이상 접근 불가에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해요. 도저히 이해가 안돼요. 어떻게 시간이 쪼개져요. 시간은 변화되는 것이지, 쪼개지는 게 아니잖아요. 시간은 쪼개지는 게 아니란 말이죠.
어떤 사람이 ‘영숙’이라고 부르니까, 사람들이 ‘영’은 어디가고 ‘숙’은 어디 갔냐고 묻는 거예요. 이게 말이 돼요? 영숙이가 한 사람 이름인데 아니야, 영이라는 사람이 있고 숙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신이라 하는 것은 전부다 통합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주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게 무슨 뜻이에요? “우리 다른 신 안 찾아요. 신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나를 못 알아본다, 그러니까. 쪼개지는 거? 내가 쪼개진 모습으로 올게. 내가. 너희들이 아는 신과 시내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내가 알려줄게.” 그게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게 언약의 시작이죠, 언약의 시작.
그렇다면 이 이레에서 인간들이 접근할 수 없는 시간의 원천이 여기서 시작될 때 ½+½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½에 뭘 했는가? 보면 알겠죠. 다니엘 9장 27절,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자, 언약의 핵심이 한 이레에 일어나는 겁니다.
He will confirm a covenant with many for one `seven.' In the middle of the `seven' he will put an end to sacrifice and offering. And on a wing of the temple he will set up an abomination that causes desolation, until the end that is decreed is poured out on him."(NIV)
And he shall confirm the covenant with many for one week: and in the midst of the week he shall cause the sacrifice and the oblation to cease, and for the overspreading of abominations he shall make it desolate, even until the consummation, and that determined shall be poured upon the desolate.(KJV)
"And he will make a firm covenant with the many for one week, but in the middle of the week he will put a stop to sacrifice and grain offering; and on the wing of abominations [will come] one who makes desolate, even until a complete destruction, one that is decreed, is poured out on the one who makes desolate."(NASB)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개역한글)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0:2죠. 온두라스와 한국팀, 0:2. 초반부터 인간의 모든 제사와 예물은 금지됐죠. 그럼 이건 뭡니까? 율법으로 의롭다 할 자는 없다, 가 되죠. 율법으로 의롭다 할 자는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선악체제 인식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죠. 제가 묻습니다. 여기서 사람이 중요합니까, 의로움이 중요합니까? 제가 묻는 겁니다. 뭐가 중요해요? 의로움이죠. 의로움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거죠.
아까 수학자들이 문제를 이렇게 했죠. 왜 많은 숫자가운데 3.14159만이 왜 원의 비율로 들어가는 숫자이어야 하는가, 할 때 그 수학자는 사람위주로 생각하는 겁니까, 사람보다 더 위에 있는 숫자위주로 생각하는 거예요? 숫자가 인간보다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숫자를 이용하면 되지, 가 아니라 숫자에 어떤 신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신비를 캐내는 우리는 종으로서 머슴으로서 수의 비밀을 캐내는 것이 진정한 수학자들의 마음자세죠. 종교입니다, 종교. 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거예요.
피카소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그림이 나를 그리게 한다.’ 이런 말을 했어요. 그림이 나를 그리게 한다. 그리고 ‘그림이 그리라면 난 어쩔 수 없어.’ 이런 말했거든요. 완전히 미술이 종교라니까요. 타인을 즐겁게 하는 것? 피카소는 없습니다. 타인을 즐겁게 할 생각이 피카소는 없어요. 그걸 모더니즘(modernism)이라 해요. 모더니즘이라 하는 것은 정통적으로 내려오던 모든 인간들의 예술 감각을 뒤엎는 게 모더니즘이에요.
바깥의 사물을 어떻게 정밀하게 그리느냐, 우리는 그런 미술 안한다. 나의 마음 속 혼란스러움, 불안하면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림이 모더니즘이에요.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절규(The Scream> 있잖아요. 두 손으로 얼굴 감싸 쥐고 비명 지르는. <나홀로 집에> 영화에 나오는 이런 거. 그림이야 뭐야? 애들 장난이야? 얼마나 욕 얻어먹었다고요, 그 당시에. 그러면서도 미술가들은 그걸 수집했어요. 돈 되지 싶어서.
인간은 이미 신을 믿는 게 아니에요. 인간에겐 인간을 종 부리듯 하는 신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게 수학이고 그게 예술이었어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뭐냐? 자기 가문, 족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죠. 자기 족보에요. 우리 집안이에요. 우리 집안을 빛내기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우리 집안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어요. 우리 가정.
그래서 사람들이 어릴 때 자기가 부모로부터 딸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천대받고 새엄마한테 얻어맞아서 가출했던 그 아줌마가, 내가 나중에 결혼해서 딸 낳으면 난 이렇게 안 키운다 해서 악착같이 20대부터 고물상해서 지금은 고물상 크게 해요, 남편 따라서. 아들 둘, 딸 하나 낳았습니다. 갑자기 인간극장 이야기를 여기서 왜 하고 있는가. 복수하는 거예요.
A공간에서 인간은 복수하는 겁니다. 내가 이미 신봉하는 신이 따로 있어요. 성경에서는 그게 마귀죠. 선악과를 먹으라고 한 마귀지만 인간은 마귀는 모르고 나는 나의 이상형이 있어요. 내가 신을 믿는 게 아니고 신이 나를 인도하고 믿게 하는 거예요. A공간에서도 종교는 똑같아요. 그게 마귀 종교이지만 어쨌든 간에 종교는 종교에요. 신봉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거예요. 헌신하는 재미로.
B공간에서는 주님 공간에서는 그 신과 싸웁니다. 싸워서 져요. 패배해버려요. 그 패배한 자리,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새로운 모퉁이 돌로 시작되는 겁니다. (행 4:11) 따라서 성령을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겪었던 절차를 똑같이 그걸 밟게 만들어요.
다시 다니엘 9장 27절을 보면,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1이레이니까 쪼개면 뭐가 돼요? 0.5되죠. 0.5이레니까 3.5년이죠. 3.5년 동안은 철저하게 율법이고 뭐고 모든 것이 주의 율법이 유린돼요. 유린되고 나머지 3.5는 비어있습니다. 3.5는 박살나고 박살난 3.5와 또 플러스 3.5가 있는 것이 아니고 3.5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여기 겹쳐져 있는 3.5가 있어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서 한때 두때 반때, 0.5. (계 12:14) 이걸 시각적으로 보자 이 말이에요. 더하지 말고. 더해도 되지만 시각적으로 펼쳐봅시다. 펼쳐진 것을 한꺼번에 합쳐버리면 뭐가 돼요? 3.5(년)=42달=1260일. 요한계시록의 한때 두때 반때의 비밀이 이렇게 풀리는 거예요.
이미 천국, B공간이 형성되어있기 때문에 A공간은 B공간의 영광을 위해서 철저하게 모든 것이 유린되어야 되고 파괴되어야 돼요. 지옥다워야 돼요. 그것도 아주 철두철미하게 지옥다워야 돼요.
그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 보세요. 사는 의미 없습니다. 사는 의미 없어요. 직장 들어가면 뛰쳐나와버려요. 상사가 나한테 갑질했다고. 왜 상사가 너한테 갑질하는데? 나 일 못한다고 나한테 갑질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에요? 아무 의미 없어요. 사는 자체가 아무 의미 없고 그때 그때 즉흥적이에요. 방탄소년단만 찾고 있으면 돼요. 보랏빛 옷만 입고 봉 흔들면 되는 거예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왜 의미가 없느냐? 계속 의미 없으니까 비어있는 그 갈급함, 결핍을 더 짜릿한 의미로 계속 채우는 일, 그래서 그게 의미 있다는 거예요. 채우는 것.
그러면 이 반 이레(3.5년) 기간의 실선이 있다면 뒷배경으로 반 이레(3.5년)가 점선으로 겹쳐있겠죠. B공간에 의해서 A공간이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거예요. 이것은 B공간이 B공간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율법을 지켜서 이 땅에서 고난을 겪는다고 B공간 넣어주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B공간에 들어간 사람은 뭐냐? 바로 A공간에 유린당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기상해서 출근하는 사람. 이걸 성경에서 ‘소자’라 합니다. “제가 언제 주님을 섬겼습니까?”하고 되묻는 사람들. 제가 언제 주님을 위해서 했습니까, 하고 되묻는다는 것은 나에 대한 관심사가 없죠. 나에 대한 생각이 없어져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말씀으로 이 두 겹친 공간을 주니까요. 그때 소자는, 소자가 성도죠, 성도는 무엇을 경험하는가? 이레를 경험합니다. π를 경험하고 오일러 수 ℯ를 경험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똑같은 법칙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똑같은 법칙으로.
그러니까 주님의 똑같은, 언약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확고한 원칙을 위해서 수시로 나에게 변화를 유발시키는데 변화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바로 이 소자, 성도한테 있는 겁니다.
만약에 성도의 일상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자기가 동일한 게 곧 언약이 동일한 걸로 착각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까불었다가 때로는 은혜 받았다가 때로는 분노하다가 날마다 매일같이 천장에 달린 등잔처럼 흔들리는 가운데서 변화하는 가운데서, 붙들어주는 변하지 않는 그 축과 우리 사이의 비례관계, 이레라는 비례관계, 그 관계 속에 언약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거예요. 이레 안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러면 실제로 이렇게 규칙이 되는지를 한번 봅시다. 확인해보면 되죠. 전체 흘러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가운데 하나님께서 땅을 안식하기 위해서 70년을 끄집어냈다 했죠. 70년인데 갑자기 다니엘 9장에 와서 70년이 뭐 됐어요? 70년이 아니고 70이레가 돼버렸죠. 70이레가 됨으로써 70년 지나면 71년, 72년, 73년 이렇게 우리는 다시 본국에 돌아간다는 희망은 이제 끝입니다. 없습니다. 만약에 70년 지나고 70년 후에 돌아가면 이것은 장독을 물로 씻은 거예요.
어렵게 이야기해서 인간은 율법의 연속성 안에서 구원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율법의 연속성은, 전에는 율법을 못 지켰지만 지금은 우리가 70년 동안 벌 받았기 때문에 벌섰기 때문에 반성했기 때문에 후로는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 이게 바로 바리새인이고 이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기 소유의 인간이 계속 살아있죠.
그러나 주님은 뭡니까? 율법을 끝내버려요. 율법의 연장선이 아니고 70년에서 70이레로 바뀌어버려요. 그러면 70년뿐만 아니고 그전에 있던 시간, 후에 있던 시간, 이 모든 시간은 하나님 언약적 시간으로서 탈락입니다. 탈락이에요. 인간은 기존의 시간 속에 A공간 속에 자기 몸을 어떤 식으로든 긍정하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갈색추억>입니다. 희미한 갈색등불 아래, 커피 잔 두고 앉아있다 보니까 갑자기 자기가 옛날에 사랑했던 남자가 생각난 거예요. 그것과 비슷한 노래가 <그 겨울의 찻집>인가 있죠. 조용필이 부른 노래 있잖아요. 그 가사도 그렇잖아요. 커피는 식어가는데 그 사람은 오질 않네.
<갈색추억 (2007)>
희미한 갈색등불 아래 싸늘히 식어 가는 커피잔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고 나만 홀로 남은 찻집
아무런 약속도 없는데 그 사람 올 리도 없는데
나도 몰래 또 다시 찾아온 지난 날 추억 속의 찻집
우리는 나란히 커피를 마시며 뜨거운 가슴 나누었는데
음악에 취해서 사랑에 취해서 끝없이 행복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대는 떠나고 갈색 등 불빛만 남아
외로운 찻잔에 싸늘한 찻잔에 희미한 갈색추억
<그 겨울의 찻집 (2014)>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에 그 찻집
마른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긴 밤이여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이게 뭡니까? 자기부정입니까, 아니면 시간 속에서 계속 자기가 살아있는 거예요? 자기가 살아있는 거예요, 시간 속에서.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디에 집어넣습니까? 이레 속에 집어넣습니까, 시간 속에 집어넣습니까? 0:2로 시작돼요, 0:2로. 그래야 주님이 함께 있는, 주님이 하시는 언약적 규칙성이 내 힘으로 안 되는 걸 주께서 하게 하심을 느끼게 하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시간 속에 살아서 축축한 과거에 늘 잠기게 해요. 특히 비오는 날이라든지 날씨 흐린 날, 시간이 정지됩니다. 흘러간 팝송이나 들으면서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죠. 눈물도 찔끔 나고.
그럴 때 복음 들었는데 ‘A공간! 가라, 지옥으로!’ 하면 ‘주님은 저를 왜 찾아오십니까?’ 이런 고백이 막 튀어나올 때, 그 사람은 겹쳐진 거예요. A공간, B공간이 하나의 육신을 중간에 두고 둘이 비어있는 거예요. 내가 몰랐던 나를 B공간 안목에서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이게 우리 육신이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다니엘이 아직도 고생해야 될 이유고요. 그러나 다니엘은 70년이 아니고 70이레를 알았죠.
우리가 육신으로 있는 이 시간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깨어져야 되고 우리 성도는 깨어질 때 같이 깨어지면서… ‘이 육신은 복음의 이름으로 온갖 핍박을 고난을 받아야 될 그 시간 속에 육신을 집어넣어놨구나.’ 하지만 우리는 저녁에는 천국으로 퇴근하고 아침에는 지옥으로 출근해서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에게 채우기 위해서 아직도 육신을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언약 속에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사오니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저희들, 알아듣지 못하는 육신과 예수님 영에 의해서 알아듣는 두 가지가 겸비되어 있는 생활을 하게 하여 주시고 반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이근호 댓글
자연상수에 관한 도함수 그림을 독하게 캡처해 주시고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죽더라도 독하게 생각하고 정리하면서 죽어야 됨을 시사해주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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