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시간 수축

아빠와 함께 2023. 9. 27. 03:38

광주강의20230922a 다니엘4장 23절(시간 수축)-이 근호 목사


p.251 밑에서 6번째 줄에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온 대목이 있습니다.【‘역사적 몸인 우리의 몸도 그리스도 안에서 묵시적 사건의 의미를 품은 몸이다’는 해석에 날마다 내어주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 이 글 내용들이 어려운 이유가 있어요. 용어 자체를 보면 ‘몸’이라는 용어를 나타내고 있고 그다음 ‘시간’을 둘로 나누어 이야기합니다. 역사와 묵시로 나누어서 시간을 표현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건’입니다. 이 세 개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몸과 시간과 사건.

몸과 시간과 사건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사건이 인간 몸에게 오고 몸이 시간을 나타내게 되면 몸은 두 종류가 돼요. 하나는 ‘역사적 몸’이 되고 또 하나는 ‘묵시적 몸’, 이렇게 몸, 시간, 사건 이 세 가지를 합쳐서 이런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묵시적 몸은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역사적 몸은 예수님 몸 빼고 모든 인간의 몸이 역사적 몸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나누었다는 말은 이것이 합체되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p.265 한번 봅시다. 후주(後週,endnote) 30번이요.【30) 관절은 ‘단절’과 ‘절단(=분절)’의 의미를 지닌다. ‘절단’은 역사의식을 쪼개어서 느부갓네살 왕의 경우처럼 도저히 예상 못할 돌발적인 사건이 그 쪼개진 틈을 통해 역사 지평 위로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분절’이란 그 방출된 계시가 역사적 의미들을 벼랑까지 밀어붙임으로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황들을 확대시켜 나가는 시도를 의미한다.】

거기에도 어려운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어요. 한번 적어보면, ‘관절’은 ‘단절’과 ‘절단(=분절)’이라고 나와 있어요. ‘절’이 1개, 2개, 3개, 4개 나와요. 끊어진다는 뜻이죠. 여기서 ‘절단’은 역사의식을 쪼개어서 느부갓네살 왕의 경우처럼 도저히 예상 못할 역사 속에 나타난 돌발적인 사건을 의미하고요.

‘단절’은, 사건이 일어났다. 한 몇 초 그 순간 지나가면 없어졌다. 이렇게 되죠, 불꽃놀이처럼. 와락 뭔가 일이 벌어졌다. 어? 사건 터졌네. 돌아보니까 조용해요. 이게 단절이고요.

절단과 분절에서 ‘분절’이라는 것은 사건이 터졌는데 그 사건이 뒤에 확장되는 거예요. 확장되면서 방출된, 터져 나온 계시가 역사적 의미들을 벼랑까지 밀어붙인다. 모든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거예요. 무의미하게 만들고 소멸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거예요.

관절은 단절과 절단이라 할 때 이것을 우리 몸에다 적용시켜봅시다. 몸에 적용시키면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잖아요. 없는 데서 태어났죠.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돌잔치하고 돌반지하고 다 사건이잖아요. 사건인데 태어난 그 몸이 우리를 어디까지 밀어붙입니까? 죽으라고 밀어붙이죠. 죽음에 막 밀어붙이는 거예요.

몸이 죽는 게 아니고 태어남이 나를 죽이는 겁니다. [태어난 사건이 나를 죽인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역사라는 것은 그냥 당하기만 하는 거죠. [역사는 당하기만 한다.] 역사를 초월한 묵시가 역사를 밀어붙이면 맨날 역사는 된통 터지고 소멸되고 소실되고 날라가고 그러한 얻어터지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전체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역사를 누가 괴롭히는가?] 인간의 몸은 역사에 포함되어 있죠. 그럼 같은 말입니다. [누가 나를 괴롭히는가?] 역사를 누가 괴롭히는가?=누가 나를 괴롭히는가.

역사의 반대말은 언약입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시원적이에요. 시원(始原)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근원적. 역사는 나타난 현상. 숨어있는 시원적인 것, 감추어진 원래적인 것이 현실을 괴롭히죠. 그러면 인간을 누가 괴롭힙니까? 인간의 근원이 인간을 괴롭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근원을 어디서 찾는가? 언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언약에서.

이런 것이 성경 다니엘 4장 16절, 23절에 잘 나오는데 성경 한번 봅시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몸과 사건과 그리고 시간, 이 세 가지가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보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먼저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해주시면 이해하는 데에 쉬워요. 시간 해석에 있어서 ‘첫째, 내가 시간을 이해한다 또는 해석한다. 두 번째, 주님께서 시간을 해석한다.’ 이렇게 둘로 나누시고 여기서 ‘내가 시간을 해석한다’, 내 인생이 힘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에 그래요.

시간을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인생이 왜 힘든가. 목사님 사는 게 왜 힘듭니까? 모든 기억 속에 있는 시간을 내 위주로 해석해서 힘든 거예요.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닌데 억지를 부리니까 힘든 거예요. 주님을 위한 시간인데 나를 위한 시간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왜냐하면 본인이 이 땅에 태어났으니까요. 태어났으니까 내 인생은 내가 생각해야 된다. 성경에서는, 아니야! 그건 시원적인 것에 있고 근원적인 것에 있어. 너는 그냥 태어났다는 결과물이고 네 몸이 태어난 게 아니고 태어남이 네 몸을 만든 거예요. 태어남이.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고생하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이걸 모른 거예요. 석가모니가 복음을 모르니까요. 복음을 알면 도 닦을 필요가 있겠어요? 생로병사 왜 이리 힘든가. 초월하자, 나 자신을. 아니, 인간은 초월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니엘 4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그다음 나온 단어가 뭐죠? “짐승의 마음”. 그러니까 시원적으로 볼 때 인간은 짐승에 해당되는 거예요. 23절을 봐도,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멸하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더라 하시오니”

현재 느부갓네살 왕은 짐승되어 있죠. 짐승, 그다음 일곱 때, 시간. 그것을 누가 하는가? 위에서 하죠. 언약. 사건 또는 언약, 언약 사건. 근원적인 언약, 결과적인 몸, 그 중간을 이어주는 것은 시간. 인간은 왜 이렇게 힘들고 사는 게 괴롭습니까? 그 몸과 언약과 연결되어 있는 시간, 이 세 가지에서 언약이 인간 몸의 상위(上位)에 있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70이레 하고 있잖아요. 70이레는 뭐냐 하면… 70=7+62+1이 되잖아요. 이걸 이렇게 수평적으로 하지 말고, 수직적으로 7 위에 62 위에 1. 그런데 62는 (자체로) 의미 없고 1과 7은 절단되어 있고 끊어져있다는 의미로 연결되는, 1에 7이 갈 수 없다는, 1과 7을 끊어지게 만드는 그러한 기간이 62이레인 거예요. 시간이에요, 시간. 1이레 되시는 몸, 하나님의 언약의 주인공, 그 사이에 62이레가 있다는 것을 수직적으로 설명하고 묘사하는 것이 70이레 내용입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인간은 왜 사는 게 힘드냐? 모든 시간에 일어났던 사건들, 시간은 사건의 연발이고 다발이거든요, 그 사건 다발을 누가 해석하고 누가 생각하느냐? 나에게로 쏠리도록 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반칙이에요. 뭐를 놓치고 있는가? 시원적이고 근원적인, 나 이전의 것을 완전히 모르는 채 오직 있다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모든 시간을 내 위주로 해석하는 겁니다.

오늘 강의제목을 이렇게 하겠습니다. ‘시간 수축’. 시간 수축입니다. 시간을 아주 짜부러뜨리는 거예요. 시간이 수축하는 이걸 인간들은 기억이라 하는 거예요. 시간을 수축해서 기억했다 이 말이죠. 참 인간이 얼마나 인생을 잘못되게 살아가는지…… 우리 따지고 보면 인생 참 엉터리로 살아가고 있어요.

시장에 가서 고구마를 샀다. 우리 인생 중에 이런 일 있잖아요. 그것도 그냥 고구마 아니고 밤고구마를 만 원어치 샀다. 이 사람이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시장에 가서 내가 돈 만원주고 고구마 사왔다’ 이것밖에 없죠. 이게 본인이 하는 기억이죠. 그 기억에 의해서 ‘나는 맛있게 먹었다’하면 이것도 하나의 사건이에요. 기억은 사건 다발이니까 ‘고구마 사서 쪄서 맛있게 먹었다’ 이거 있잖아요.

여기에 누가 끼어드는지는 다 제거했어요. 고구마 키우는 사람 다 제거했죠. 고구마 살 때 옆에 있는 다른 고구마 가게 다 삭제했어요. 내게 필요한 것, 사건, 내게 필요한 시간해석만 나한테 필요했던 거예요. 타인과 엮인 변수는 모조리 삭제해버리고 ‘내가 돈 주고 내가 고구마 사서 맛있게 먹었는데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데?’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고구마가 북한산이라면? 북한산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국가보안법에 걸리죠. 북한여행만 갔다 와도 예능 프로에서 잘리는데. 내가 가고 싶어 갔는데 왜 예능 프로에 안 넣어주느냐.

이게 바로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에요. 인간이 전부다 자기중심이잖아요. 자기중심이면 나라 꼴이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안되죠. 내 중심의 변수를 공익이라는 이유 때문에 강제로 자제시키고 그걸 통제하는 법적체제가 국가라는 겁니다.

아파트가 있고 거기 바로 앞에 조그마한 축구장을 만들어서 밝게 조명탄 설치하고 새벽 1시까지 영업을 하는데 조명탄 피워서 사람들한테 돈 받고 입장시켜서 사람들이 축구하고 있다. 그 축구장 주인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축구장 세우는 데에 자기 돈 투자했죠? 그럼 뽑아내야 될 거 아닙니까. 은행 융자도 받았으니까 그거 뽑아낼 때 내가 축구장 세워서 손님 받아 돈 버는데 내가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겠죠.

여기서 무슨 변수가 날라가버립니까? 불빛 공해, 그리고 축구할 때 그냥 마스크 쓰고 축구합니까? 한 골 넣어라, 넣어라! 난리도 아니에요. 새벽 1시까지 주변 사람들 잠도 못자요. 50데시벨이 넘어요. 오토바이 타고 길에서 달린다. 내 돈 주고 오토바이 사서 달리는데 뭐가 문제냐? 아파트 주민들이 잠을 못자요. 그래서 아파트 주민들의 소원이 있어요. 남북통일이 소원이 되어야 되는데 이 사람들 소원도 너무나 개인적이고 모두 자기 위주의 해석입니다. 소원이 뭐냐 하면, 장마가 길어졌으면 좋겠다. 장마가 길어지면 축구를 안 하니까.

다시 묻습니다. 인생이 왜 힘듭니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누구 중심으로 해석한다? 내 중심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뭘 빠뜨렸다? 시원적인 것, 근원적인 것. 하늘에서는 그런 나를 어떻게 보는가, 다 누락시킨 거예요. 다 빠뜨린 거예요. 몸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몸이 나니까 모든 의미가 내 몸에서 스톱이 된 거예요. 더 이상 진전이 없어요. 내 돈 주고 내가 했다, 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그게 뭐가 잘못됐는데? 모든 것이 나로 멈추고 마는 거예요.

보통 백성들은 나로 멈추고 싶어도 국가나 왕은 그걸 가만두지 않죠. “세금 내라.” “나는 내기 싫은데.” “왜 안내나?” “내가 내기 싫다는데.” “어이, 병사들 이거 잡아서 죽여버려.”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국가라는 것은 모든 것이 나한테 스톱되는 것을 국가가 용납안하잖아요.

그럼 국가에서 단 한 사람은 어떻게 돼요? 모든 하고 싶은 것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자기한테 실질적 실제적으로 모든 해석이 완료되는 지휘자, 그 한 명의 이름이 누구입니까? 왕이죠. 그 왕이 느부갓네살 왕이잖아요. 그런데 15절 보니까 왕이 뭐가 됐어요? 짐승이 됐죠. 사람 아니었습니다. 짐승이었습니다.

여기 22절에 보면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23절,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왕보다 더 높은 순찰자가 있어요. 순찰자. 초반부터 중요한 것 나옵니다. 순찰자.

순찰자의 대상은 수배자에요. 모든 인간은 지금 쫓기고 있어요. 왜 쫓기고 있느냐 하면, 내 다리 내놔라. 선악구조 다른 말로 하면 윤리 도덕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기고 있습니다. 도피중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남들 보기에 그럴싸하고 행복하다 하고 있지만 그러나 양심상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결국 심판받게 되는 심판의 대상으로 수배 중에 있어요. 수배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가다가 사진 찍는 것 같으면 고개 막 숙이죠. 모자 푹 덮어쓰고. 쫓기고 있는 인생, 그게 인생입니다. 순찰자가 있기 때문에. 그 순찰자가 우월절에 어떻게 했습니까? 맏이를 다 죽였죠. 하나님께서는 “너 걸리기만 해봐라.” 지금 벼르고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완벽에 이르지 못합니다. 완벽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선악적으로 완전하지를 못한 거예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본인도 모르게 자기의 시원자, 자기가 미처 모르는 근원자로부터 계속해서 쫓기고 후달리면서 인생을 사니까 인간들은 거기서 오는 공포심, 두려움을 메꾸기 위해서 계속해서 다른 즐거운 요소를 찾고, 이런 쫓기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다른 대책을 계속 강구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정신병 환자입니다.

그러면 인간세계에서 너도 나도 다 알면서도 쉬쉬하면서 입 다물고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네가 완전하지 않으면 네게 어떤 낭패가 있더라도 넌 할 말 없어.’라는 알 수 없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인간세계에서 해소하려는 그 해소 방법이 뭐냐? 그것은 자기 몸이 있으면 거기다 아우라, 신화적 아우라를 형성하는 겁니다.

이걸 바로 어릴 때 부모가 해줘야 돼요. 부모가 해줘야 돼요. 너는 훌륭해. 너는 잘 될 거야. 너는 착한 아이야. 너는 좋은 집안에 사는 거야. 네가 힘들어? 내가 끝까지 너를 지켜줄게. 이러한 신화에요. 신화를 노골적으로 말하면 허풍, 허세입니다. 허풍, 허세.

허풍, 허세가 아주 남발하는 예능프로가 있어요. ‘강철부대’. 군에 제대한 근육질 인간들 나와서 자기가 잘났대. 지기 싫어. 운동깨나 한다는 인간들 다 나와서. 허풍과 허세가 없으면 사람은 못 견뎌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세상의 냉혹함과 날것이 직접 만나버리면 이 사람은 여기서 몸둘 바를 모르고 좌절해서 자살로 이어집니다. 예민함이죠.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의 자기 보호막, 방어막이 있어야 돼요. 방어막은 누가 봐도 이건 거짓된 거예요. 거짓된 것으로 이렇게 포장을 해줘야 겨우겨우 숨을 쉴 수 있어요. 쫓기고 있으면서. 진실에 쫓기고 진리에 쫓기면서도 그래도 숨 쉬는 이유는 이 허풍과 허상적인 신화적 존재에요. ‘부모가 말했어. 너 나중에 잘 될 거라고.’ ‘또 사업 망했어.’ ‘걱정하지 마. 돌아가신 부모님께서는 언젠가 넌 성공할 애라고 했어. 태몽에서 그랬대.’ 이런 거짓말이죠. 거짓말, 환상이라니까요. 그 환상이라도 있어줘야 돼요.

그러면 세상에서 말한 정상적은 뭐냐? 이 허풍과 허상을 잘 둘러치는 사람이에요. 둘러치려면 냉혹한 이 세상에 대해서 그때그때마다 번역에 능해야 됩니다. 자기하고 아무 상관도 없지만 ‘다 나 좋으라고 있는 거야.’ 이런 거요. 국무총리 회의, 이거 다 나 좋으라고 있는 거야. 어떤 일이라도 괜찮아요. 번역을 그때그때, 계속해서 구라를 떨든지, 말도 안 되고 논리도 안 맞는 일이지만 ‘이 모든 것은 다 나 잘되라고 내가 희망에 점점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라고 신화적 존재로 계속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그걸 어디서 많이 하는가? 교회에서 많이 하죠. 교회에서 바로 예수님, 하나님, 삼위일체 다 동원해서 자기를 둘둘 감는 겁니다. 이 모임도 예외 없이 노래하나 들으셔야 되는데… 할 수 없어요. 도대체 노래를 어떻게 틀었는지 여러분 눈으로 보셨겠지만. 번역을 어떻게 하는가? 번역의 예를 한번 볼게요.

<いつくしみふかき (慈しみ深き)>
사랑 많으심 (깊은 사랑, 깊은 긍휼)

いつくしみふかき ともなるイエスは(이츠쿠시 미후카키 도모나루 예수와)
사랑 많으신 친구인 예수님은
つみとがうれいを とりさりたもう(츠미토카 우레이오 토리사리타모우)
죄, 허물, 근심을 이미 없애주시네
こころのなげきを つつまずのべて(코코로노 나게키오 츠츠마즈노베떼)
마음의 한탄을 쌓아놓지 말고 부르짖으면
などかはおろさぬ おえるおもにを(나토카와 오로사누 오에루오모니오)
짊어진 짐을 내리어 가볍게 하시네

됐습니다. 이 가사가 무슨 내용인지 아시겠습니까? 일본 찬송가에요. 예수라는 게 언뜻 들리죠. 그런데 딱 들어보면 <죄짐 맡은 우리 구주> 그 노래죠. 분명히 가사는 일본어인데……. 일본말 못해요. 노래제목도 모르겠어요, 일본말로 되어 있어서. 혹시 일본말…? 아, 미안합니다. 전문가를 놔두고. 녹취를 위해서 한번 오셔서 보셔야 돼요. 이걸 일본어로 읽으시고 해석 한번 해보세요. 잘됐네. 이 때를 위함이라. 제목 <いつくしみふかき (慈しみ深き)> 이츠쿠시 미후카키. 번역하면 뭡니까? ‘죄짐 맡은’ 그런 뜻이에요? ‘사랑하는 마음이 깊다’. 아! 아리가또. 감사합니다.

이 내용은 모르는데 딱 들으면 무엇이 회상되죠? 죄짐 맡은 우리 구주~ 회상되죠. 자기 위주로 옛날 들었던 기억 속에, 죄짐 맡은 우리 구주~. 노래를 들으면 분명히 가사 내용은 전혀 모르는데 들어보면 은혜가 되잖아요. 은혜가 되죠? 이게 뭐냐 하면 번역이에요. 자기가 자기의 신화를 만드는 거예요. 해석을 해서. 일방적 해석이에요. 이걸 안하면 정신병자 돼요, 이 현대사회에서.

거짓이라도, 하늘이 주는 그 냉혹한 수배자 신세에서 잠시 한숨 돌릴 수 있는 삶을 구현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게 종교죠. 그게 종교고 그게 국가고 우리 이 삶이에요. 몸과 사건과 시간. 또는 사건 자리에 언약을 집어넣으면 몸과 언약과 시간. 이렇게 역사는 언약한테 휘둘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짓이 아니고서는 숨도 못 쉬는 세계. 그런데 이 신화적 내용은 뭐로 채우느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으로 채우면서 그들은 이것을 진리라 얘기하고 진실이라고 사람들은 우기고 있는 겁니다. 실은 그 안에 자기 자신을 자기가 지키기 위한 신화적 조치를 하면서 그때그때 자기 정신을 건강하게 그냥 버텨나가는 방법이에요. 말씀보고 기도하고 교회 다니고 하나님 믿고 하면서 그냥 버티기에 나서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용 있습니까, 없습니까? 소용없죠.

자, 그렇다면 그다음 봅시다. 성경의 언약에서 유대인들이 왜 실패했는지 한번 보세요. 성경은 시원적이니까 이것은 아까 언약이라 했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언약이 역사를 구박합니다. 역사를 위에서 짓눌러버리죠. 거기에 대응해서 역사 속에 있는 나는 허풍으로 소위 유대교로 또는 말씀으로 자기를 칭칭 감으면서 이 수배자 신세에서 약간은 자기를 지켜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럼 성경의 시원적 언약에서 이스라엘 역사 망하고 난 뒤에 마구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개념들이 있어요. 그것이 성전, 예루살렘, 그리고 애굽, 약속의 땅, 이런 개념들이에요. 이런 개념들이 언약에서 쏟아집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이런 개념들을 허겁지겁 주워 담아요. 본인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개념들을 사용해왔던 겁니다.

그런데 선지서에 보면 이런 개념들은, 하늘의 UFO죠, 비행접시 외계인이 왔을 때 인간들을 저주하고 심판하기 위한 심판용이에요. 그들은 이런 말씀들, 율법으로 무장을 했는데 무장한 게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오히려 이렇게 공격할 때 유대인들이 행한 이 모든 것들이 ‘교만’이라고 규정해버립니다.

교만이라 하는 것은 까분다, 이런 뜻이 아니고 내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차용하고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는 것을 가지고 교만이라 해요. 교만. 왜 교만이냐 하면 이 성전, 예루살렘, 애굽, 약속의 땅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긍휼이 포함되어 있어요, 긍휼. 그런데 긍휼에 대해서 그들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지키겠다, 내가 나를 지키겠다는 교만이 이 긍휼을 차단시켜버린 거예요.

강남강의에서 소경이 고래고래 고함지르죠. 말려도 고함지르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하죠. (눅 18:38) 여기서 메시아도 등장해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했어요. 그러면 옆에 다른 사람이 “아이고, 당신도 우리와 같은 성도이군요.”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조용히 안 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긍휼을 찾는 사람을 통해 기성 종교인들이나 기성 신자라고 여기는 사람에게서 본의 아니게 교만이 터져 나와 버렸어요. 긍휼만 찾는 사람에게 (기성 종교인들의) 교만이 나와 버렸어요.

그 교만은 어디서 나오는가? 진리라 하는데 진리가 아니고 지식이었습니다. 지식은 선악과를 아는 그게 지식이에요. 선악과를 아는 지식으로 신화적 아우라로 자기를 단단히 무장했기 때문에 성전, 예루살렘, 애굽 어떤 걸 이야기해도 그들은 교만이라는 결과물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자, 교만한 자에 대해서 다니엘 4장에서 아까 여러분들 봤죠.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은 뭐냐? 이 짐승아. 짐승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야기해보니 별 어렵지는 않죠? 먼저 인간세계로 나누겠습니다. 인간세계에서의 현재 상실은 유년기 시대에요. 유년기 시대에 부모로부터 따뜻한 보호를 받지 못해서 인간은 뭔가 정신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따뜻한 보호를 받지 못해서. 부모가 바쁘다보니 이렇게 하잖아요. 이것은 인간세계에서 이런 이야기해요. 상실해서 그 상실을 매우기 위해서 인간은 결국 환상으로 자기 무장에 나서죠.

그런데 자기를 무장하는 게 왜 문제라 했습니까? 이것은 모든 언약적 사건이나 일어난 일을 누구 중심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나 지킬 요량으로 모든 걸 끌어당겼던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간증집회 같은 게 전부다 이런 거잖아요.

성경에서의 상실은, 인간의 상실은 유년기에서가 아니고 대자연 안에 있음이 이게 상실이라는 거예요. 이 위가 하늘나라, 낙원이라 하면 인간은 어디로 쫓겨났습니까? 토지, 이 땅으로 쫓겨났죠. 인간이 바라보는 데는, 하늘나라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인간이 보는 그 시선은 대자연이 한계에요. 그 바깥으로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이 대자연 안에서 막 이용하고 연구하고 탐구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이 모든 것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이 자체가 상실이에요. 상실입니다. 결함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다니엘 4장에 보면 이 세상에는 누구와 함께 사는가? 짐승들이 살고 있고 여기 식물, 동물 같이 있죠. 그러니까 이 상실된 세계에서 너는 왕이라 우기지만 왕이나 인간이나 짐승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전부다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겁니다. 이게 근원적이에요. 이게 시원적인 언약의 모습이에요, 이게.

결국 [대자연 이것은 집단적 재난]입니다. 태어나기를 벌써 버림받은 채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인간은 교만에서 자기가 탈피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는 데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누가 보여주는가? 느부갓네살이 왕으로서 대표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 기간이 있죠. 시간이 23절에 보면 몇 때입니까? 일곱 때.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7이라는 것은 막혀있는 거예요. 창조 때 7일 만에 창조했잖아요. 피조세계의 한계가 숫자 7로 표현된 거예요. 7이라는 것은 1로 소통이 되어야 될 텐데 이미 범죄함으로써 7이 7로써 막혀버린 거예요. 막혀있다는 말로 ‘너는 7에 예속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1로 나가는 것, 아까 7이레 위에는 1이레. 중간에 가로막고 있는 것은 62이레. 62이레는 파괴되는 기간이에요. 7이레에 만들었던, 인간이 대자연 속에서 만들었던 그 현상이 62이레를 통해서 이게 부서지고 파괴되는 거예요. 성전이 파괴되는 기간이 62이레에요. 깨어지는 거예요.

실컷 만들었는데 실컷 인생 살았는데 깨어지는 거예요. 깨어지는 이유도 몰라요. 그동안 내가 나를 보호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는데 이게 어떤 한도에 막혀서 깨져버린 겁니다. 누가 그렇게 했는지 모르죠. 열심히 살았는데. 1이레는 이런 인간을 심판하고 저주하죠. 수배자이기 때문에. 너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벌칙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럼 성도라는 자도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다 망하는 인간만 있는가, 성도도 있지 않겠는가?’ 하죠. 성도는 어떻게 있는가 하면 이렇게 있어요. [유괴당한 존재]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성도는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모든 해석은 이게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파헤쳐졌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연세계가 재난이잖아요. 재난세계에 살면서 어떻게든 간에 나를 지키기 위해서 거짓을 하든지, 물론 거짓밖에 나올 게 없지만, 허세와 허풍을 떠는데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의 영이거든요. 예수님의 죽으심의 사건을 가지고 우리를 다 파헤쳐버렸다는 거예요.

파헤쳐버리니까 날것 그대로 노출되죠. 날것이 그대로 노출되면서 파헤친 그 관계가 긍휼로서 파헤친 거예요. 교만할 건덕지가 없어요. 왜? 소경이니까. 귀머거리니까. 절뚝발이니까. 내가 나 위해서 산다는 이것이 모조리 다 거짓된 것이고.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걸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게, 완전히 이건 먼저 걸려들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강남 강의할 때 백설 공주 이야기했잖아요. 사람마다 자기 이미지를 머리에 다 관처럼 이고 간다 했죠.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 임하실 때 불꽃이 어떻게 오죠? 자기 머리위에 뭐로 옵니까? 심판의 불로 오죠. 심판의 불로.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나 너 안다는 거예요. 너는 너를 모르지만, 너는 아무리 애써도 너를 모르지만 나는 너 알고 왔다는 겁니다. 너를 알고 왔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키는 식으로 세상을 해석할 필요 없이 언약이 언약대로 해석을 제공하죠.

이 세상은 1이레, 주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의 새로운 해석이 주어지는 그러한 즐거운 일이 우리에게 있는 거예요. 굳이 거짓되게 환상을 내가 뒤집어쓸 이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 거예요. 들통 났는데 뭐. 뻔하게 다 알잖아요.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 긍휼로 찾아왔기 때문에 불쌍히 여김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찾아왔다는 말은 더 이상 내가 나를 ‘나 이런 인간인데’라고 말할 필요조차도 없는 거예요.

강남 강의에서 예정론을 제가 언급했는데 다시 한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정론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는가? 주께서 찾아온다.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그럼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가? 다리 꼬고 앉아서 ‘주여 언제 오실 겁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보통 예정론을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리비아 홍수 이야기를 했죠. 다리 꼬고 앉아있을 여유가 없어요. 다 재난 받아서 지금 지중해 홍수에 저주에 지금 휩쓸리고 있어요. 휩쓸리고 있는 것을 뒤에서 낚아채서 데려가는 식이지, ‘가만있는데 기다립니다.’ 이런 건 없어요. 우리는 안 기다리죠.

그러면 휩쓸리면서 뒤돌아보면 되지 않느냐? 휩쓸리면서 뒤돌아볼 수가 없어요. 왜? 교만해서! 줘도 안 받았어요. 지금도 십자가 피 이야기해도 안 듣습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아까 언약에서 나온 개념들, 율법 또는 성전, 예루살렘 등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은 이 세상의 축소판]이에요. 오늘 강의제목이 뭐라고 했습니까? ‘시간의 수축’이라 했죠. 압력을 받아 쫙 짜부라드는 거예요. 시간이 수축되면 이것은 사건이 되죠. 그런데 이 시간해석은 시간의 주인공으로 해석된 거예요. 시간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1이레에요. 1에서 아래쪽이 7이레. 이 세상의 역사를 보고 해석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시간을 수축해서 사건-그 사건은 십자가 사건-이 된다면, 아까에 의하면 이게 분절되면, 분절되었다는 말은 수축된 것을 그냥 아코디언처럼 펼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으로 봐서는 한 사건이지만 언약의 입장에서는 모든 역사를 끝까지 밀어 붙이는 거예요.

망해라 이 역사야, 하면서 분출된 마그마가 화산 근처의 모든 마을을 휩쓸고 내려가듯이 이미 십자가로서 분출된 유일한 시간 해석자가 모든 자기 위주의 시간 해석자들을 범죄자로 취급해서… 범죄자 맞거든요. 죄 지었잖아요. 지식 있다고 지식으로 자기를 지키겠다는 그 지식이 문제거든요, 선악을 아는 지식. 그걸 수배때려서 전부 다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갇혀있는 꼴이죠. 사방을 둘러봐도 거짓으로 환상을 조작해서 자기 인생 이야기하는 걸로 쫙 있으니까 이 안에 완전히 유괴된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누굴 구원합니까? 유괴된 자기 아들을 데리고 가는 거예요. 이 세상에 갇혀있는 자기 사람을 오셔서 구출할 때 이게 구원이잖아요.

그런데 처음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 나라가 들어갔죠. 이스라엘 나라가 들어갔을 때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너희 민족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이 세상에 어떤 나라가 있더라도 너희들은 내가 보호해줄게. 지켜줄게.’ 했잖아요. 그런데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는데요? 추방했다고요. 그건 약속의 땅에 있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 자비로움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위주로 해석한 거예요. 자기 행복위주로 해석해버린 거예요.

그것은 바로 애굽이라는 개념을 몰랐기 때문이에요. 애굽 개념과 약속의 땅 개념이 이 안에서 단절되어있다는 걸 모르고 애굽에서 나온 우리가 그대로 약속의 땅을 차지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땅이 단절되었으면 나에 대한 해석도 단절되어야 되겠죠.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30922b 다니엘4장 23절(시간 수축)-이 근호 목사


7이레라 하는 것은 7안에 7일 동안 창조된 그 안에서 자체적으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 그게 7이레죠. 그 7이레는 62이레로 말미암아 파괴되고요. 누가 파괴시키는가? 1 위에 계시는 분이 그걸 파괴시킵니다. 이것은 [우연이 언약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저 어릴 때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과자 중에 어떤 과자가 있느냐 하면, 우리 장로님이나 집사님은 아실 거예요, 습자지 과자 아시죠? 얇은 투명한 습자지처럼 생겨서 맛도 없는데 그냥 앙 먹으면 입안으로 이게 하늘하늘한 막으로 되어 있어서 살살 입에 녹아버리거든요. 그 녹는 맛에 먹어요. 다른 맛은 없어요. 막인데 입안에 들어가면 이게 짜부러들죠.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입 속으로.

역사가 이 대자연이 언약 안으로 습자지 과자처럼 이게 쩍쩍 들어붙어서 쭈글쭈글 거리면서 말려들어가는 거예요. 물이 배수구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찌그러지죠. 왜 그렇게 설명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거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자기 시간이 있잖아요.

p.263 중간에 봅시다. 글자 아주 작죠. 거기 보면【칸트에 있어서 자아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 체계의 제1원리를 점검하면서 제시된다.】이렇게 시작되는 것 찾았습니까? 딱 중간인데요. 여기서 칸트는 데카르트를 반박하기를 어떻게 반박하느냐 하면, 나라는 것은 나라고 생각해서 되는 게 아니고 어떤 형식으로 이야기된다.

【즉 “나는 존재한다.”라는 무(無)규정 사태를 “나는 생각한다.”라고 하는 규정에 곧바로 연결시키고 있지만, 두 가지가 연결되기 위해서는 무 규정적인 것이 규정 가능하게 되는 형식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무 규정적인 존재가 “나는 생각한다.”에 의해서 규정 가능하게 되는 형식이란 시간의 형식이다. 시간 속에서만 규정된다.】이 말이에요. 칸트가 주장하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이렇게 자꾸 혼자서 상상하지 말고 진짜 나라는 것은 시간 속에서 형식으로 규정이 되어야 그게 진짜 나라는 거예요. 나는 계속 변하기 때문에 그 변화추이를 시간 속에서 봐야 된다는 거예요. 20대 나, 30대 나, 40대 나, 어느 게 나입니까? 정답은 변화되는 그게 나죠. 그러면 ‘나라는 것은 내 속에 시간이 살아있어서 시간과 더불어서 나를 규정해야 된다’ 이게 칸트란 철학자의 이야기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뭡니까? 시간 자체가 빨려 들어가는데요, 시간 자체가. 시간 자체가 쭈그러들어버리는데요. 무너져버리는데. 그게 바로 우리가 보고자 하는 p.251 밑에서 9번째 줄에 고린도후서 4장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큰 뱀이 아가리를 벌리고 두더지가 한 마리 있다 하면 뱀이 두더지를 삼키고 가만있는 게 아니잖아요. 삼켜서 잡아당기죠. 그러면 빨려 들어가잖아요.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입에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시간까지 포함해서. 내가 나를 규정했던 시간, 나는 이렇다고 우겼던 그 시간, 칸트에 의해서 시간으로 규정받는, 나는 20대, 30대, 40대, 50대에 이렇게 살았다는 그것이 예수님의 입 속에서는 바스러지죠. 그게 다 깨어져버리는 겁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넘기움은 그렇게 부숴버리는 그 힘, 예수의 생명이 부서져가는 우리 몸을 통해서 나타나게 함이라. 이걸 설명하면 [역사보다 언약이 더 크다 (역사<<언약)]에요. 언약의 주인공이 역사의 주인공들에게 찾아와서 이 역사를 예수님의 자기 시간, 자기 몸속으로 전부다 빨아 당겨버리죠. 빨아 당기면 아까 인간은 뭐로 등장했습니까? 대자연 속의 하나의 짐승으로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뭡니까? 성도는 역사에 있었는데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 몸으로 빨려 들어갔죠. 빨려 들어가고 다시 성령을 통해서 토해지는 겁니다. 토해지는 거예요. 그러면 토해질 때, 성도의 빨려 들어간 그 몸이 토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몸으로서 토해져버립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거죠.

20대의 나는 이렇고, 가 아니라 20대에 주께서 일을 이렇게 했고 30대에 이렇게 했고 30대에 합기도하고 지금 50대엔 다른 거하고, 이렇게 모든 것이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뭐 또 주께서 죽게 하시면 주께서 죽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성도는 흡수당한 역사에서 되튕겨져나온 역사]가 되는 거예요. 되튕겨져나온 역사가 바로 언약 역사가 되죠. 기존 역사를 부정하기 위한, 새롭게 주께서 함께 동행하시면서 나타나는 언약 역사가 되는 겁니다.

언약, 다 이루심, 십자가에서 토해져 나오는, 십자가라는 화산 속에 숨어있던 화산의 마그마가 이 지표면에 등장해서 그게 산비탈 아래로 그냥 시속 120km 넘는 속도로 질주하듯이, 그것도 고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휩쓸고 내려가는 거예요. 휩쓸고. 이 범죄자들 기다려라. 내가 너 죽여버린다. 휩쓸고 흩어지게 하는 겁니다.

이 방식을 사실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주께서 보여줬어요. 어떻게 보여줬는가? 이스라엘 역사를 단출하게, 어떻게 간단하게 볼 수 있는가?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여기 애굽이 있잖아요. 애굽에서 그들이 나왔습니다. 약속의 땅까지 갔어요. 갔는데 이 도중에서 단절이 일어나죠. 홍해 건너온 사람 다 죽죠, 단 두 사람 빼놓고.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다 죽습니다. 그러면 다 죽었으니까 새롭게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 단절을 짊어지고 들어가는 거예요. 단절을 짊어지고.

그럼 약속의 땅의 백성들에게 뭐가 포함되었습니까? 애굽에서의 단절, 그리고 약속의 긍휼, 이 둘 다가 다 포함되고 있죠. 약속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두 개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흘러가고 있는 이 7이레의 시간 속에서 긍휼을 얻어야 되는데, 둘 다가 있으니까 애굽 요소가 강렬했던 거예요. 애굽 요소가.

자, 애굽의 특징은 강퍅,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아까 했던 교만이죠. 교만이 뭐라 했습니까? 제가 지난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했죠. 악이라는 것은 자기를 소환하는 것이라 했죠. 자기가 중심이니까. 이 세상의 중심, 이 시간의 중심은 나니까. 내가 왕년에 내가 뭐했다, 이게 악이에요. 누가 빨려 들어가는 것 없어요. 내가 어디 빨려 들어가고 이런 거 없어요. 나는 나에요. 내가 지금까지 버티면서 나는 나답게 산 거예요. 누가 나를 빨아 당기고 윙~해서 진공청소기로 빨아 당기는 이런 거 없어요.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그래서 항상 인간의 기억 속에는 내가 뭔가 열심히 했다는 기억만 있어요. 내가.

이 약속의 땅에서 두 가지 요소가 다 있으니까… 그래서 율법에는 둘 다 있어요. 안 지키면 저주받고 지키면 복 받는 둘 다 다 있다고요. 동전 있죠. 동전의 면이 몇 개입니까? 동전의 면이 두 개죠. 동전의 앞면이든 뒷면이든 그건 어떻게 정해도 관계없어요. 무조건 두 면이죠. 동전에서 놀라운 사실은 한 면에서 절대로 다른 면으로 갈 수 없다는 거예요. 딱 붙어있으니까요. 500원짜리 한번 보세요. 딱 붙어있으니까.

인간이 선악을 막대처럼 길게 생각해서 휴전선을 왔다갔다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니까요. 동전의 두면으로 생각해야 돼요, 선악을. 아무리 선해도 악으로 갈 수 없고 아무리 선해도 인간이 악이라는 것을 규정할 수 없고. 아무리 악해도 선을 규정할 수 없고. 인간은 둘 다 딱 붙어있어요. 그러니까 선악지식이 뭐냐 하면 아무리 선하고 싶어도 밑에 뭐가 받치고 있습니까? 악이 있는 이상 온전치 못한 선이 되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반쪽은 선이고 반쪽은 악이라면 그건 칼이나 가위가지고 반을 잘라버리면 되잖아요. 악을 잘라내면 되는데, 동전을 잘라 내버리면 동전 자체가 폭이 없기 때문에 자를 수가 없어요. 자석도 마찬가지에요. 자르면 이 자체가 다 같이 날라간다니까요. 선도 같이 날라가요.

그러니까 선악에 대해서 인간이 알면 안돼요. 인간이 감당할 수가 없어요, 선악에 대해서. 선악과 닮은 것이 율법이에요. 복과 저주가 양면 다 있기 때문에. 이것 지키면 선하고 이것 지키면 악한 것 없이 어떤 말씀이든 못 지키면 악이고 지키면 선이 되는 그 말씀만 준 겁니다. 율법을 그렇게 준 것은 인간은 자기 몸을 자기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로마서 7장 말씀에 나와 있듯이, 딱 붙어있는데 악이 선보다 더 우세하다는 그런 몸이 인간의 몸이라는 것을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되죠. 아, 주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구나. 율법을 주면서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고 당부했을 때 구약성경을 보는 사람은 다 생각하는 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당부하고 잔소리했는데 왜 그 시대 사람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왜 다른 신 바알을 섬겼을까? 정말 모를 일이다.’ 이렇게 하거든요.

인간 자체에 애굽적 요소가 안 떠나고 있는데 어떻게 온전히 여호와를 섬깁니까? 어려울 때야, 자기한테 기댈 것 없을 땐 여호와를 찾죠. 힘들 때. 사사기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약간은 좀 배부르다 싶으면 다시 여호와 안 찾아요. 그걸 제가 강의에서 했는데, 판돈 있으면 여호와 안 찾고 판돈 없으면 여호와 찾는 거예요. 돈 좀 있으면 엄마 안 찾아오고 돈 좀 없이 궁하면 엄마 찾아와서 ‘유통할 수 있는 돈 좀 있습니까?’ 묻고 하죠.

이게 교만입니다. 모든 세상해석은 내가 해석내린다는 것. 왜 그런 죄를 짓습니까? 어릴 때부터 우리는 이 대자연에서 상실되었기 때문에. 결핍이 있기 때문에. 결핍은 허상으로 매워야 숨이라도 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게 안 되는 사람이 소경된 자, 절뚝발이에요. 이제는 자기에 대해서 믿을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예수님 외에는 믿을만한 게 없어요. 귀신들린 딸을 가진 여인이나 38년 된 병자나. 백날 뭐 호숫가에 있어봐야 맨날 2등, 3등이지, 1등 안돼요.

베데스다 못의 특징이 뭐냐 하면 단회성이에요. 첫 번째 병 낫고 잔잔해져버려요. 꼭 십자가를 닮았어요. 제자들이 그 당시에 십자가 사건을 분명히 봤잖아요. 그런데 십자가 사건 지나가고 난 뒤에 또 사건 없지 않습니까. 없으니까 그들은 이제 고기 잡으러 가자해서 간 거예요.

그게 여전히 인간 시간 속에, 역사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묵시가 찾아와서 공격해서 사건을 만들지 아니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나 위주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째 시간에 한 건데 한번 물어봅시다. 사람 사는 게 왜 그리 힘듭니까? 모든 과거 시간을 내 위주로 했기 때문에. 내 몸 위주로 시간이 수축되어 있어요. 나한테 압축되어 있어요, 모든 시간이. 여러분들 일기 안 쓰잖아요. 일기 안 쓰죠? 일기 대신 가계부 쓰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인간은 평생 일기 씁니다. 머릿속에 일기장이 다 있어요.

그래서 구약성경은 이 인간들을 추방시켜버립니다. 추방시킬 때 그냥 추방시키는 게 아니고 율법의 의미를 드러내면서 추방시켜요. 네가 율법대로 살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요. ‘율법대로 살았습니다. 여호와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나올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자,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인데 한번 정리해봅시다. 약속의 땅 중심부에 뭐가 있죠? 예루살렘이 있죠. 시온. 예루살렘 중심부에 뭐가 있습니까? 성전이 있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을 불태우자 했습니까, 없애자 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한 적이 있습니까? 유대 사람들이 그렇게 했습니까? 아니죠. 그들은 여전히 성전이 있는 한 자기들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 백성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지켜줄 줄 알았죠. ‘나’가 있는데 하나님이 지킨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존재의 해석이 나로부터 나와서 나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시간 개념이 나 중심이니까.

그런데 성전을 누가 불태웁니까?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성전을 불태워버렸죠. 네가 이해하는 성전, 네가 이해하는 여호와, 네가 이해하는 율법, 네가 이해하는 약속의 땅 모조리 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고 우상숭배였다는 사실이에요. 그게 우상숭배였던 겁니다.

선지자에 의하면 바알 섬기듯이 여호와를 섬겼던 거예요. 여호와를 섬기고 바알 섬긴 게 아니고, 여호와 섬긴다 하면 바알은 못 섬기게 되어 있는데 여호와 섬기면서 바알 섬긴다는 말은 내부에 바알 섬기는 식으로 그동안 여호와 섬겨왔다는 것을 들통나게 만든 거예요.

성전 불타버리고 약속의 땅은 비워버리고 이스라엘 전체는 추방시켜버리고. 그러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류를 범하고 이렇게 잘못을 해야 비로소 언약의 진수가 본질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겁니다. 그들이 저주를 받아야 율법이 말하는 ‘복 준다’의 의미가 드러나요. 저주받은 자들이 발생되어야 돼요.

예수님은 진리 맞죠? 예수님은 진리죠. 어떤 때 예수님이 진리입니까? 보통 우리가 진리라 하는 것은 진리 된 사람, 영웅이잖아요, 영웅 된 사람은 계속 그 사람이 살아있어야 진리가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진리잖아요.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죽음 그다음을 인간은 해석 못하죠. 인간은 살아있는 것끼리 해석하기 때문에 죽은 자에 대해서 죽음 그 이후, 그 뒤로 넘어간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이게 대자연의 한계 아닙니까. 자꾸 죽는데 죽음 너머 대해서는 우리 인간의 해석이 막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비로소 복을 해석할 수 있어요. 죽고 난 뒤에 그 죽음이 찾아올 때 비로소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그때 드디어 우리에게 알려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올 때.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이 약속의 땅을 화산으로 만들어버리죠. 화산 보면 안에 마그마 있죠. 화산에 마그마. 이 마그마가 분출해버립니다. 분출해서 산비탈로 내리달리죠.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겁니다. 멸망. 저주받았다. 심판받았다. 이스라엘의 저주와 심판의 기준이 뭐냐 하면 율법이었습니다. 언약이었습니다. 언약이 이스라엘 멸망과 더불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 세계에 흩어지게 했어요. 산재(散在), 씨 뿌리듯이 확 흩어지게 만들었던 겁니다.

의도적인 거예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 세계적으로 뿌려진 거예요. 뿌려지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그냥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율법에 의해서 된통으로 당했던 자들이 이 세상에 뿌려졌다는 말은 일종의 들풀같이 퍼져나간 거예요. 불이 붙은 잡초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면 그 동네에 뭐가 붙겠습니까? 불이 붙겠죠. 하나님의 저주의 율법이 온 천하에 다 퍼지게 하는 방식을 주께서 사용하신 겁니다. 이게 구약의 흐름입니다.

율법의 진수, 언약의 진짜 본질, 그것은 멸망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뿌려지게 하는 겁니다. 처음에 다니엘은 이걸 몰랐어요. 예레미야에 보면 70년 만에 돌아온다 하니까 한 70년만 고생하고 그전에 다 죽겠지만 70년 이후에 태어난 우리 자손들은 다시 약속의 땅에서 살겠지. 성경에 문자로 기록되어 있으니까. 성경에 문자로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문제는 인간이 성경을 문자로 해석한다는 것은 자기해석이에요. 자기해석이라는 말은 첫 번째 강의에 나온 것처럼 자기 시간, 내 위주로 성경말씀을 해석한 겁니다. 내 위주로. 내 중심으로 되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우리는 나 중심 외에는 해석할 줄 몰라. 내 유용과 내 이익 아니면 아무 해석이 되질 않아요. 어떤 것도. 왜냐하면 본인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해석은 죽은 자의 몫인데 살아있는 내가 감히 성경해석을 해보겠다고 덤벼든 겁니다. 내 자신이.

그런데 산비탈로 내려온,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편 126편 한번 봅시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고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여기 5절에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이게 하나의 예언이거든요. 어떤 노래인지 여러분 가사 딱 보면 알죠. 사람이 추방되고 쫓겨났을 때 다시 애굽으로 가는 거예요. 애굽이 특정 나라 애굽이었는데 약속의 땅에 화산 터지고 난 뒤에는 어떤 나라가 애굽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벌 받아서 쫓겨난 모든 나라가 다 애굽이 되는 거예요. 새로운 언약적 해석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적용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편 137편을 한번 봅시다. 갑자기 보니 엠(Boney M.-를 부른 팝그룹) 생각나죠? 우리가 바벨론 강가에서 포로 잡혔어요. 유괴당한 거예요. 하지만 희망은 뭡니까?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준 약속에 의하면, 70년만 버티면, 우리는 그 당시 늙어죽겠지만, 70년만 버티면 다시 시온으로 모인다. 예루살렘으로 모인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 약속의 땅, 비록 우리는 거기서 못 살지만 그 땅은 항상 버젓하게 버틴다고 주께서 약속했다는 거예요. 시간이 살아있는 거예요. 70년이라는 기한이 되면 우리는 화산 밑으로 쫓겨났지만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한 겁니다.

처음에 다니엘도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다니엘이 70년에서 뭐로 바뀝니까? 70이레로 바뀌죠. 아무리 쫓겨나도 내 중심의 해석을 해버리면 백날 성경해석 기대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이 해석이 내 중심이 아니고 진짜 1이레, 주님 중심의 해석이 되려면 쫓겨나온 상태에서 무엇이 달라져야 되느냐 하면 ‘나는 죽었고’가 되어야 돼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산다.’ 이게 되어야 성경을 다시 내가 죽은 입장에서,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산 입장에서 성경해석을 다시 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성령의 해석이라 하죠. 죽은 자는 희망을 가지면 안 됩니다. 은근히 노려버리면 그건 교만이 되는 거예요.

p.251 봅시다. 위에서 4번째,【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를 비롯해서 개혁주의적인 성경신학자들이…】이렇게 했죠. 그러니까 이 논문 발표장이 개혁주의 논문발표장이잖아요. 그들이 분노 안할 수가 없죠. 리델보스는 신과 같은 존재인데, 개혁주의자들한테. 결국 이 말을 비난한다는 것은 개혁주의 자체의 오류를 제가 지적한 거예요. 그 오류가 뭐냐?【개혁주의적인 성경신학자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 오류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적 시간관에 준해서 이해해주려고 노력한 점에 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신학자들이 왜 노력합니까? 노력을 왜 합니까? 첫째 시간 나온 것을 바탕으로 여러분들이 충분히 해석되겠죠. 신학자들이 인간의 시간론을 긍정하는 쪽으로 왜 그렇게 노력을 해주는 거냐 이 말입니다. 인간은 허세와 허풍 없이는 자기의 상실을 메꿀 방법이 없기 때문에 허세, 허풍, 여기에 나타나는 신화, 환상이죠, 환상을 교회가 해줘야 그들이 교회에 손님으로 올 거고 교회의 목사들에게 신학적인 소스를 제공하는 건 신학자들 자기 몫이라는 거예요.

목사가 이렇게 설교하면 먹혀들어가서 사람들이 모인다는 거예요. 그 내용이 유명한 리델보스의 ‘이미 그리고 아직’이라는 거예요. 신학생들은 이거 다 알아요. 이미 하늘나라는 완료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남아있다. 미완료이다. 이 말이, 말이 됩니까?

인간 시간에서 평면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평면적 시간이란 없어요. 단선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 철도처럼 단선 위에 가기 때문에 단선으로 가다가 붕 뜨는 탈선은 반칙이에요. 환상이에요. 다 이루었으면 완료되면 미완료가 없어야 되고 미완료면 완료가 없어야 되죠.

결국 이것은 모순이에요. 모순은 무의미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에게 이런 모순이 나왔다는 말은 인간은 평소에 자기 천국 가고 자기 구원받는 데에 환장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석해놓고 자세히 설명하라 하면 설명안하잖아요. 안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의 힘으로 지혜로 이성으로 어떻게 성경의 그 심오한 비밀을 풀겠느냐? 못 푼다. 그냥 우리는 이렇게 남겨두자.’

남겨두자 하는 그 저의가 뭡니까? 성경은 그 정도, ‘신비다’ 하는 그 지식 있잖아요, 지식. 그 지식을 선악체계에 의해서 선한 것으로 고만 봐줘. 그냥 다 같이 그렇게 밀어붙이자. ‘가하시면 ‘예’하시기 바랍니다.’해서 그냥 밀어붙이자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뭐냐? 기어이 자기 자신은 살아있는 나를 죽은 자로 만들기 싫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리델보스가 한 일이고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일이에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니까 언약을 믿는다는 거예요. 그들은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기 p.251 중간에 보면,【주체의 본성적 특징을 감하지 않고서는 십자가 사건이 언약적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언약과 주체 문제를 연결하지 아니하기에 복음에서 송출되는 ‘죽은 분’의 시간 잠식 능력을, 그들은 아직 살아있는 몸을 가진 자신의 몸을 규정하는 용도로 시간을 설정했고, 그 시간 위에 ‘하나님 나라’를 실으려고 한 것이다.】

이제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살아있는 내 몸을 살려줘.’ 이 말입니다. 어떤 성경책 아이디어 주시면 제가 순전한 마음으로 열심히 믿을 테니까 제발 지금 살아있는 몸을 죽어서도 계속 영생 얻도록 살려달라는 거예요. 하늘나라 믿으라면 믿고 십자가 믿으라면 믿고 하여튼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그런데 주께서는 “죽어! 이 인간아. 이 짐승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 왜 주체문제를 거론해? 자꾸 예수님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예수님과 연관 시켜서 해야 돼요. 그래서 아까 한 것 다시 보겠습니다. 오늘 이해되는지 안 되는지 난 모르겠고, 그건 내가 알바 아니고요.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우리가 십자가를 알고 싶어도 십자가가 입을 벌려서 우리가 십자가 알고자 하는 그것을 주께서 자신의 죽음 안으로 집어넣어야 돼요. 이걸 삼킨다 했죠. 삼키고 진짜 성도는 뭐냐? 삼킨 것을,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 되어서 다시 토해지는 거예요. 이 토해진 사람에게 무엇이 짊어져있겠습니까? ‘나는 이미 죽었고’라는 사실이 짊어져 있으면서 토해진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이 ‘너는 왜 멀쩡한데 죽었다고 이야기하느냐?’ ‘나는 그전에 내 중심으로 시간을 해석했고 언약을 해석했고 하나님을 해석했다. 이게 하나님 앞에 절단이었고 단절이었다. 이게 죽은 거였다. 살아도 이건 산 것이 아니고 관계가 끊어졌으니까 죽음이었다.’라고 토해지면서 자기 육신을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죽었다는 사실을 담아서 자기 육신을 해석한 거예요. 20대에도 난 죽었는데 주님께서 살려냈기 때문에 살았고 30대에도 죽었는데 주님께서 일을 벌였고 50대에도 죽었는데 주께서 일을 벌였다. 항상 해석을 그렇게 해석해나가는 거예요. ‘죽은 분의 시간 잠식 능력’이라 되어있죠, 여기.

그래놓고 아까 고린도후서 4장 11절 이야기했잖아요.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되어 있죠. 여기 우리 산 자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죽음에 넘기웠습니까? 아니죠. 내가 내 자신을 위해서 죽겠다는 게 아니죠. 예수를 위해서잖아요.

마음을 낮추고 낮췄는데 누구를 위한 낮춤이에요? 나를 위한 낮춤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것은 주님께서 안 받아줘요. 주님을 위해서 낮춰야 되는데 우리 몸으로서는 주님을 위해서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우리는 낙원에서, 생명에서 떨어진 자이기 때문에 생각을 하든 뭘 하든 반드시 나에게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데쳐먹고 볶아먹고 찢어먹고 튀김해먹고. 자꾸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가 항상 생각하는 건 ‘이렇게 해서 나한테 좋은 이익은 무엇이냐?’ 맨날 자기 이익, 그것만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목사님도 거기에 증인이잖아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분노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들이 알고 분노한 게 아니고 모르고 분노한 것 같아요. 이게 무슨 내용인지 모르고 분노한 것 같아요.

p.252봅시다. 위에서 2번째,【이들 시나리오마다 ‘이미-아직’의 시차적 구성을 갖추어 놓고 있다.】배후에 시차적 구성이 있잖아요. 이미-아직, 그렇게 구성되어있단 말이죠. 그런데 이미-아직 시간을 수축해버리면 시간이 없어져버려요. 뭐가 되는가?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게 복음이에요. 십자가 사건. 마그마 덩어리. 예수님의 죽으심.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에서 그다음부터는 시간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시간은 언약 시간이에요.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시간이 이제 거기서부터 나오는 겁니다. 그 시간을 위해서 육신을 가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우리의 영이 아닌 도로 토해진 영을 받습니다. 육신은 늙어가는 육신이지만 그 영은 날마다 새롭게 주님을 위해서 토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육신의 삶이라 하는 것은 이 주변에 많은 사람을 의도적으로 접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강의한 것 한번 복습해봅시다. 이 세상에 있는 지옥 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산다 했습니까? 뭐하며 산다 했습니까? 허풍, 허세, 거짓, 가짜로 자기를 둘둘 말죠. 그런 사람을 자꾸 접하죠. 만나게 하는 거예요.

만나게 되면 우리 육신은 죄 있는 육신이잖아요. 따라서 그들의 육신을 바라보게 되면 옛날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일이 오지 않았지만 내일 되면 오늘이 옛날이 돼요. 그리고 그다음 날 되면 이 내일이 옛날이 돼요. 그러니까 우리의 육신은 하여튼 쓰레기통이 마련되어 있고요. 쓰레기통에서 아무리 세월 보내도 결국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 계속 쌓일 뿐이에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우리 인생은 그냥 무의미의 누적, 무의미한 쓰레기의 누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가벼운 이야기인지요. 굉장히 감사해요. 예를 들면, 아이고 ‘내가 늙어서 부모가 촌에 이렇게 혼자 있는데 자식되어가지고 안 찾아오나.’ 이렇게 하다가도 갑자기 성령이 임하면 ‘찾아오니 뭐하겠노. 도로 저희 집에 가겠지.’ 무슨 의미가 있나 이 말이죠. 어땠습니까? 안 찾아왔지만 찾아왔다고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현재가 되겠죠. 자식들이 왔다가 그냥 삽니까? 도로 가죠. 가게 되면 그게 또 과거의 연발이에요. 무의미의 연발이에요.

금요일 오후에 뭐 손자 데리고 안 오나? 이렇게 했는데 오니 뭐하겠노. 온 난장판 다 만들고 또 일요일 되면 할아버지 잘 계세요, 인사하고 가겠지. 아이고, 왔다가니 뭐하겠노. 아무 의미 없는 거. 그런데 그날이 내 목숨 마지막 날이라면? 마지막 날인 육신도 무의미하고 무의미한 나에게 찾아온 손자도 무의미하고 손자 데리고 온 딸내미도 무의미하고.

모두다 solitary men, 모두 다 고독한 사람들. 고독이에요, 고독. 고독입니다. 인간은 상실된 고독이에요. 이 고독을 인간이 처방하는 방법은 고독한 자기 자신에게 애도를 표현하는 겁니다. 3초간 묵념. 내 자신에게. 자기 불쌍함에 애도를 표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주님도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 이런 식이죠. 인간은 그런 권리 없습니다. 내가 나에게 애도를 표하고 나를 불쌍히 여긴 자체를 성경에서는 교만이라고 하는 거예요. 강퍅, 교만.

지금 오늘 이야기한 것이 결국 뭐냐 하면 이 몸이라는 거죠. 우리 몸에 그리고 시간, 그다음에 언약. 언약이 와서 충돌해야 내 몸에 실상과 정체가 폭로가 돼요. 그리고 시간은 두 개라 했죠. 하나는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시간이 있고 예수님 십자가로 다 축소되는 또는 예수님 몸으로 이미 수축되어버린 그 시간.

수축된 시간은 퍼지면서 십자가 복음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니까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죠. 십자가 사건만 터져 나오는 거예요. 압축된 시간이 확장되면서 십자가 사건이 되는 겁니다. 7이레 판 위에 1이레에서 그렇게 지휘, 통제가 이뤄지죠.

그러면 내 몸이 살아서 주님 만나보자. 안 됩니다. 그 사이에 62이레가 벽처럼 가로막아서 우리가 아는, 우리 손으로 지은 성전은 여기서 불타버립니다. 처음에 성전 불타버리고 우리 손으로 지었던 그 성전도 불타버리고. 이 말은 인간의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는 스가랴 4장 6절의 말씀 그대로에요.

스가랴, 이왕 나온 김에 잠깐 봅시다. 스가랴 1장 봅시다. 1장 1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방금 제가 강의한 내용 나오죠.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긍휼이 되어야 돼요. 시편 51편에 다윗한테도 이야기한 거예요.

이를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다. BC 586년에 망했으니까 70년 빼면 BC 516년에 성전이 재건됩니다. 왜 재건되었죠? 깨어지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사용합니다. 인간의 눈에 역사적으로 띄는 모든 하나님의 성전, 땅 의미 없어요. 왜 의미 없어야 되느냐?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온 이상 지상의 예루살렘은 의미 없고, 주께서 율법을 지킨 한 인간이 생각하는 율법은 의미 없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죽고 난 뒤에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은 의미 없습니다. 주님이 생각하는 인간도 의미 없어요. 죽어야 돼요.

모든 의미는 시간이 수축된, 모든 개념이 시간 수축과 함께 수축되어 있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새로운 의미가 여기서 발생되어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쉽게 이야기하면, ‘반드시 모든 의미는 일단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설명하시면 됩니다.

여기 p.252에 코흐(K. Koch), 판넨베르그(W. Pannenberg), 폰 라드(G. von Rad), 몰트만(Jűrgen Moltman) 쭉 이야기 나왔지만 여기 나온 단어들은 그냥 넘어갑시다. 그냥 넘어가고 p.253에 밑에서 10번째 줄에,【하나님의 세상 창조나 인간 창조보다 논리적으로 ‘예수 안에서의 예정하심’이 선행된다. (엡 1:9-10; 롬 9:11-12)】선행된다 했어요.

인간의 시간에서는 예수님은 창세기보다 뒤에 오신 분이잖아요. 창조가 먼저 있고 6천 몇 년 후에 예수님이 오셨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먼저 계신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먼저 계신 거예요.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에요. 그 분이 먼저 있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시간 개념을 스스로 포기하라는 뜻이에요. 네 시간을 이제는 접어버리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시간으로 우리가 접수하게 되면 매일같이 창세 전의 시간이 지금 우리에게 개입하고 있어요. 내 인생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거예요. 창세 전에 예정하심의 시간이.

그래서 이로써 최종 비밀은 어디서 뿜어져 나옵니까?【이로써 최종적 비밀은 ‘어린 양의 보좌’에서 뿜어져 나온다.】어린 양의 보좌가 바로 성전이고 그게 예루살렘이고 시온이고 그곳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그러니까 여기 그 밑에 보게 되면【그 묵시적 신분으로 인해 ‘처음이요 나중’으로서의 몸】이다.

처음이요 나중, 처음이요 나중, 처음이요 나중, 이게 수축되면 딱 한 사건 안에 처음도 나중도 같은 이 한 분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주께서 거기서 펄펄 일하시면 처음도 나오고 나중도 나오고 같이 결합해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나는 죽었지만 살았고 나는 죄인이지만 의인되었고 나는 지옥에 살지만 이미 천국에 있고. 이게 결합되었어요. 이게 같이 수축해서 함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개념을 떨어뜨릴 수 없이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앞면 보이고 저렇게 보면 뒷면 보이잖아요. 동전 같은 것이 오늘날 우리 성도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인이고 저렇게 보면 의인이고.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고 죽으실 분이지만 영원히 살아계실 분이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 양면성을 못 본 거예요. 인간이면서도 하나님이고, 그걸 못 본 겁니다. 그러니까 죽였잖아요.

왜 못 봤을까요? 이제 복습이다. 왜 못 봤을까요, 유대인들은? 아까 강의에 의하면 왜 못 봤습니까? 모든 해석을 누가 한다? 엄연히 살아있는, 나 구원받으려고 하는 이 몸, 펄펄 끓는 내가 상실된 그걸 마저 채워서 의인 되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선악체제, 거기에 정신팔려있는 내가 상대 예수님을 해석하니까 예수님이 그것밖에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지난 강남강의에서 사도에 대해서 언급했죠. 여기서 다시 언급하면, 사도 바울은 사도죠. 사도인데 사람들은 사도를 자기와 같은 인간인 줄 알고 있는 모양이에요. 쥐나 개나 뭐 이렇게 은혜 받으면 사도가 다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사도는요. 은혜 받아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사도 바울이 사도된 게 아니고 사도에 사도 바울이 채택된 겁니다. 그 자리가 자기가 노린 자리가 아니에요. 노리지도 않았어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 천당 가는 것, 우리가 원하지도 않았어요. 우리가 원하는 천국은요. 내가 구원받는 천국을 원하죠. 그러나 주께서 성령께서 주신 것은 뭐냐? 내가 원한 천국이 아니고 주께서 긍휼히 여겨서 주께서 원하시는 천국에다 우리를 집어넣었으니까 그때부터 구원 받은 우리는 예수님 이야기하고 강의 끝내야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양면성이 있어서 항상 시작은 나 잘났고 내가 우수하고 믿음 좋은 신앙인인 그것부터 출발하게 하더라도 창세 전에 힘이 되신 주의 복음이 작렬하여서 그게 바로 교만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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