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친구 만들기

아빠와 함께 2023. 4. 12. 07:12

20230410a 부산강의 : [시편]57(41:9)-친구 만들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41편 해봅시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1절) 복이란 걸 형성하기 위해서 주변에 먼저 빈약한 자가 설정돼야 되고, 복이란 빈약한 자가 설정되지 않으면 복이 오지 않는다. 그리고 왜 빈약한 자가 설정돼야, 먼저 있어야 복이 오느냐 하면 무슨 날이 있느냐 하면 재앙의 날이 있어요. 이 재앙의 날은 모든 인간을 죽이는 날이에요.1.  Psalm 41 For the director of music. A psalm of David. Blessed is he who has regard for the weak; the LORD delivers him in times of trouble.(NIV) 1.  Blessed is he that considereth the poor: the LORD will deliver him in time of trouble.(KJV) 1.  {For the choir director. A Psalm of David.} How blessed is he who considers the helpless; The LORD will deliver him in a day of trouble.(NASB)

그러니까 모든 인간을 죽이는 날을 하나님이 설정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이란 것은 없는데 빈약한 자를 등장시켜서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재앙의 날이 너희들을, 모든 인간을 죽이는 그 날이 있다는 것을 빈약한 자가 등장함으로써 발견하게 하는 거예요. 빈약한 자는 무엇을 향하고 있느냐 하면 재앙, 결국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죽이는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죽음을 주실 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죽이시는 환경이냐, 아니면 내가 알아서 죽는 죽음이냐? 죽음의 두 종류, 내가 알아서 죽는 죽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죽이신다, 이렇게 돼버리면 우리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죽어야 될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은 그걸 놓치지 않고 죽어야 될 이유 때문에 나는 필히 너를 죽이겠다. 나한테 죽음을 당해봐라. 이게 ①번이에요.

②번은 뭐냐 하면 내가 죽어야 될 이유를 모르겠는데 하나님이 죽이겠다고 하니까 죽는 결정을 기어이 내가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고집 세지요. 한 고집하지요. 죽을 때까지 반발하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반발하는 그 기간을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비록 죽는 순간이 온다 할지라도 살았다는 느낌은 한 번 가지고 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의 죽음에 대해서 내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살아 있으면서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잘못한 건 인정하겠지만 그게 죽을 이유만큼은 인정 못하겠다는 것. 하나님이 굳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죽이시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는 동의 못하겠다. 살 만큼 살다가 내가 늙어서 살 힘이 빠질 때 내가 알아서 죽을게요.” 자살한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자연에 맡길게요, 시간에 맡길게요.” 이런 식으로 버티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자, ②번에 해당되는 사람, 내가 알아서 죽겠다는 것, 대다수지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면 자진해서 빈약한 사람이 될까요, 안 될까요? 자진해서 빈약한 사람이 안 돼요. 자기는 빈약한 걸 제일 싫어해요. 이 세상에 강자로 살고 싶고 으스대고 싶고 남한테 꿀리지 않고 남한테 무시당하지 않는 존재, 빈약? 그건 나하고 상관없어. 나는 약한 가운데 일어서서, 이런 것 주장하고 싶은 거예요. 빈약이란 약하다는 뜻이에요. 약한 가운데서도 버티면서 살아왔었어. 이게 ②번에 해당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빈약한 자를 외면해버리고 기피하니까 빈약한 자가 기피돼버리면 뭐가 없어요?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빈약한 자가 등장해야 뭐가 생긴다고요? 복이 등장하지요. 빈약한 자를 내가 외면해버리면 그 사람한테는 뭐가 없습니까? 복이란 게 성립되지 않아요. 복이란 게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빈약한 자의 노선을 거부한 자는 결국은 뭐냐 하면 재앙의 날에,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죽이는 그 날에 재앙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더 깊이 있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재앙의 날에는 어떤 사람을 재앙에 하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복을 피해가는 사람이에요. 재앙의 날에 정당하게 하나님은 너희들을 저주하고 심판했다는 그 이유를 ②번 되는 자들은 그걸 미리 알려달라는 거고, 주님은 그걸 미리 알려 줄 필요 없이 네가 꼭 재앙 받아야 마땅한 사람인 줄 네가 평소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두고 봐. 장담한다. 거봐. 반항하는 꼴 봐. 그러니까 재앙 받아 마땅하지. 복이란 게 너한테 해당이 없다는 것이 합당하지, 라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이런 자들이 생깁니다. 이런 자들, ②번이 생기는 거예요.

빈약한 자를 발생시켜놓고 내가 알아서 내 인생 내가 멋지게 용감하게 멋있게 살다고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이 관계를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원수관계로 본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관계입니다. 11절에 나와요.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그러니까 시편 41편에 나오는 복이라는 개념, 그리고 재앙이라는 개념, 원수라는 개념 이것 인간들이 만들어냈어요, 안 만들어냈어요? 인간들이 이런 개념을 만들어냅니까? 복, 재앙, 원수 이건 인간들이 안 만들어져요.

내가 멋있게 사는 자체가 복인데 복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인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뭔가 스스로 자기를 비참하게 보는 거예요. 얼마나 복이 없으면 복을 달라하겠어요. 이런 느낌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아쉬운 사람들은 복을 원하지만 스스로 원하는 것을 가졌다는 사람들은 복을 원합니까, 안 원합니까? 복을 원하지 않지요. 복이란 뭐냐? 노동 개념이 빠져있는 게 복이에요. 불쌍해서 봐주는 게 복이라고요. 내 힘으로 얻는 것은 복이 아니에요. 성취지.

여기 10절에 보세요.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나를 긍휼히 여겨달라는 거죠. 긍휼히 여겨달라는 이러한 저자세, 현대인들은 특히 20대 젊은이들은 아주 싫어하는 거예요. 내 팔자, 내 미래는 타로 점으로 미리 당겨서 보면 돼요. 점 보면 되는 거예요. 점 본다는 것은 미래개척에 내가 관여한다는 거예요.

미래에 대해서는 그냥 멍청하게 있다가 주어지는 대로 살기 싫고 자존감이 있기 때문에 내 미래는 점을 봐서라도 당겨서 내가 단도리하고, 경상도 말로 단디, 대구은행에 가면 ‘단디’라는 카드 있어요. 내 인생은 내가 단단히 단속하고 관리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나한테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빈약한 자에 속하지 않지요. 인간은 누구든지 죽는다 하는 것은 세포의 끝이 닳아지는 것, 텔로미어라는데 그게 닳아지면서 회복이 불가능하니까 죽음에 이른다, 생물학에서 그걸 밝혀냈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의연하게 대처하면 될 것 아니냐. 내가 죽을 때를 기다릴 필요 없다. 살만큼 살다가 힘 빠지면 죽지, 뭐. 그게 인생의 가는 길 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내가 죽음의 공포 앞에 꿀릴 일 없지.” 이렇게 자신만만한 거예요.

그러니까 은혜라든지 복이라는 개념 같은 것은 인간세계에 이런 게 없지요. 인간세계에서 복, 빈약함, 재앙, 원수 이런 개념은 인간들이 원하지 않는 개념이에요. 시편 41편 자체가.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원수라는 것을 원수의 실체를 그대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모든 사람은 원수일 가능성이 많은데 그중에 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의 적에서 빠지게 되겠지요. 복을 받았다는 말은 재앙의 날에서도 빠지고 원수에서도 빠져버리죠.

그러니 복 받은 것은 일종에 인간세계의 모든 인간을 다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원수에서 빠지고 빈약한 이거는 뭐냐 하면 특혜입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특혜조치에요. 복 받는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에요. 이거는 기대하지 말아야 됩니다. 인간이 복 받는다는 것, 긍휼히 여김 받는다는 것, 긍휼을 기대한다는 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긍휼이란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빈약한 경우에요. 그런데 이 빈약은 모든 인간이 자기 알아서 챙기는 데 빈약을 스스로 요청한다든지 빈약하고 싶어 환장한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특혜와 관련돼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알아서 망하겠습니다’를 인생의 유일한 소원으로 삼는 사람 없습니다.

초등학생에서 “너 장차 뭐 될래?” “빈약한 사람 되겠습니다. 나 나중에 망하겠습니다.” 이걸 장래희망으로 쓰는 애가 있겠어요, 없겠습니까? 없지요. 그럼 애들의 장래희망은 어디서 골라잡느냐 하면 기존의 기성세대에서 자기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 중에서 뽑아서 장래희망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성세대의 후세대, 그 아비의 그 자식 대대로 재앙의 날에 전부 다 총 집결되는 이 원칙에서 피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세상이 악하다고. 참 지옥 같다고. 그런데 그거는 잘못된 거예요. 세상은 악하다, 이거는 잘못된 말이에요. 내가 악하다, 이게 옳은 말이에요. 내 자신이 악하지요. 내 자신 같은 것들이 모여서 세상이 악해지잖아요. 세상이 악하다면 그 속에 누가 포함돼 있습니까? 내가 당연히 포함되지요.

내가 세상은 악하다는 말은 나는 악하지 않고 나는 스스로 설 수 있는 자격을 구비하고 싶다는 것인데 이거는 시편 41편에 나오는 빈약한, 하나님에 의해서 유발된 빈약함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에요. 신약에 로마서 10장에서 이걸 자기 의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은 악해도 나 하나는 건질만한 것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제 오후설교에 잠간 언급을 했습니다. “네가 게 맛을 알아?” 진짜 맛은 알지 못하고 내 마지막 의가 떨어지는 맛, 내가 마지막 꼬깃꼬깃 꼬불쳐놓은 정말 세상은 지옥이 돼도 나는 이렇게 의젓했다고 내밀 수 있는 증거 있잖아요. 그 마지막, 남들은 몰라요. 자기만 아는 내가 사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야, 라고 버틸 수 있는 마지막 버팀이 떨어져나가는 그 맛, 네가 게 맛을 알아?

정말 이게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로 빈약한 자가 되는 이 코스는 무슨 코스냐? 복 받는 코스와 직결돼 있어요. 이게 시편 41편의 시작입니다. 빈약에 대해서 자존심 상하지 마세요. 빈약하게 되는 내력이 있어요. 이제부터 올 사람 다 왔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시편 41편은 말씀이 어떻게 구체화되는가? 지금부터 좀 난해합니다. 많이 난해해요. 그래서 제가 어렵지 않도록 쉽게 저도 애를 쓰겠습니다.

말씀이 어떻게 구체화되느냐 할 때 말씀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께로 나오지요. 일단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안 보인다는 것은 인간세계에선 없음이에요. 안 보이니까 없는 거예요. 인간세계에 없습니다. 말씀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어디에 치중하느냐? 보이는 데 치중해요. 보이는 것은 누가 보이느냐? 하나님의 반대, 인간들은 보입니다.

보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의견이나, 인간들의 주장이나, 인간들의 강압에 신경을 많이 써요. 인간은 있음이니까. 있는 인간들의 주장들, 의견들 이런 것들을 다 플러스 해보면 이게 바로 이 세상이 되는 겁니다. 의견들, 그런 것들이 왕왕왕 날아다니거든요. 다 의식하고 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없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말씀을 줬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있음의 세계에 어떻게 없음의 세계가 그게 구체화, 형상화 되고 나타날 수 있느냐는 문제에요.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단추를 다는 바느질하는 예를 들겠습니다. 단추가 있는데 보통 단추 구멍이 두 개지요. 실을 꿰어서 단추 구멍 한 쪽에 집어넣고 다시 다른 구멍을 통해 올라오지요. 그러면 이 단추는 어디에 부착되는가? 옷에 부착됩니다. 안 봤지만 옆에서 보니까 그래요.

그렇다면 다윗이라는 눈에 보이는 인간 다윗에다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꿰고 올라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으로 실로써 바느질해버리는 거예요. 통과하게 되면 다윗은 두 세계를 양면으로 보여주는 인생이 됩니다. 특수한 택함 받은 사람 돼요. 다윗은 신체를 갖고 있으니까 보이는 인간세계에 어쨌든 보이는 하나의 인간으로 이미 스며들게 된 거죠.

근데 다윗이 하나의 인물에 주의 말씀이 와서 빠져나옴으로서 다윗이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사태가 자기 인생에 들어오게 돼요. 그러면 ㉮단추가 옷에 부착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에게 딱 달라붙어 부착되는 거예요. 부착되는 게 그냥 달라붙는 정도가 아니고 이건 뭐냐 하면 ㉯환풍기 또는 통풍기 역할을 하는 겁니다. 누가? 다윗이.

왜냐하면 이쪽으로 와서 양면으로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한 인물 속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들어와서 빠져나오고, 들어와서 빠져나오고, 들어오는 기운 있고 빠져나오는 기운 있고 양쪽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본의 아니게 빈약한 사람 된 거예요. 다윗이 빈약한 걸 소원한 사람 아니에요. 그런데 다윗의 시에 41편 1절에 보면,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자기 자신에게 졸지에 빈약하고 싶지 않은데 빈약한 사태가 벌어진 거예요.

아마 세상 사람들이 그 당시 사람들이 다윗보고 너 빈약한 게 된 것이 다이어트 많이 해서 그렇다든지 자꾸 원인을 캔 거예요. 네가 빈약하고 시름시름 아픈 이유가 운동을 안 했다든지 비타민을 제대로 챙겨먹지 않았다든지 자꾸 이유를 대는데 다윗은 이유가 없어요. 이유는 없는데 이유가 어디서 왔는가? 단추 안에 실이 통과하지요. 하늘, 보이지 않는 쪽에서 온 실이 다윗을 통과하면서 다윗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났다? 빈약해진 현상이 일어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시들시들 아파 죽어가고 있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3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다윗이 쇠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약해지기 시작한 거예요. 그 약해진 걸 다윗이 뭐라고 계시하느냐 하면 내가 약한 것은 죄 때문에 약해졌다 하는 거예요. 그 뒤에 나오지요.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 범죄 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제가 여러분한테 질문을 하겠습니다. 다윗이 아픕니다. 어떤 사람이 아픈 게 아니고 다윗이 아파요. 다윗은 왜 아프냐 하면 자기 죄 때문에 아프다는 거예요. 죄 때문에 아프고 점점 죽어가고 있습니다. 점점 인간으로서 어디 가느냐? 죽음이란 것은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까 죽음에 도달하지 않잖아요. 도달하지 않았지만 방향이 그쪽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현재 그들이 가고 있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 이유를 몰라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쪽에서 말씀으로 실로 꿰어버리면 다윗이 통풍기/환풍기 역할 해서 대표로 해서 모든 인간은 죽는 이유가 죄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거는 쉬운데 그다음이 더 어려워요.

뭐냐 하면 다윗은 죄 때문에 죽음에 이릅니다.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게 어려워요. 네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하나님 말고 다른 사람이 다윗에서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첫 번째, 인간들은 다윗에게 말하기를 너의 죄 때문에 너는 죽는다, 벌 받는다, 쇠약하게 되었다, 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 예가 욥기 19장 13절에서 22절까지 나오는데 13절부터 제가 빨리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종들은 나를 외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하여야 하겠구나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 어린 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13~19절)

욥보고 하는 거예요. “네가 이런 심한 고난 손댈 수 없는 아픔을 병든 것은 생각해봐라, 욥아. 네가 무슨 죄 지었을 것 아니냐.” 인간들이 생각하는 건 뭐냐 하면 죄 지은 분량만큼, 정량적이에요. 죄 지은 분량만큼 그만큼 벌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마치 감기약처럼. 감기 약간 들면 한 알, 심하게 들면 두 알. 그것도 안 되면 하루에 한 번 먹지 말고 세 번. 식사 후 30분, 이런 식으로 정량제에요. 양을 정해서 이쪽 양과 이쪽 양을 균형을 맞추면서 처방하는 것인 인간들 지식의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다윗보고 네가 죽어가고 약해진 것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인간들이 그런 소리 한다는 것은 본인은 어떤 뜻이란 말이에요? 본인은 다윗처럼 안 아프고 있는 현 자기의 모습은 어떻단 말입니까? 완전하진 않겠지만 정량적으로 다윗보단 의롭다 하는 빌미가 다윗의 아픔으로 발생된 거예요.

이게 어려우면서 쉬운 게 왜냐하면 사람들이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사람들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게 참 안 됐다, 동정심, 불쌍하다. 그러면서도 나오는 감정은 뭐냐 하면 아직까지 내 손에 못 안 박혀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애가 셋이나 되는데 다 키우고 죽어야지. 곧 막내가 대학 들어가는 데 내가 아파 죽으면 안 되지.” 그런 생각이 훅 드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상대적으로 누구는 나보다 죄인이고 누구보다 나은 의인이다. 누굴 대상으로 하는 겁니까? 예수님을 향하여 그런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느냐 이 말이에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알면서 그런 대상으로 못 삼지요. 지보다 못된 인간이 벌 받아 아파서 죽는 것에 대해서는 흔쾌히 대상으로 삼잖아요.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셔. 못된 짓하다가 망하는 것 봐. 역시 내가 인생사는 원리원칙은 그만큼 합당해. 내가 지금 잘못된 인생사는 건 아니야. 왜? 나쁘면 저렇게 벌 받는 것 봐.”

그러니까 정의는 살아 있다 이 말이죠.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준다는 자기 원칙을 정당화하는 증거로 삼는 거예요. 못된 놈 집안 망하면. 그런데 그 원칙이 어디서 깨집니까? 어디서 깨지는지 본인은 알잖아요. 어디서 깨질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와 비교 안 된다는 걸 발견하잖아요. 그러니까 방법은 뭡니까? 십자가를 외면하는 방법이에요. 십자가를 외면해야 자기가 정당하다는 원칙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을 안 듣습니다. 복음을 안 듣고 교회 와서 누가 기도 오래하는가 붙고, 한 달 수입이 누가 많은지 비교해볼까, 이런 식으로 나와요. 교회 봉사 많은 한 사람과 적게 한 사람과 비교해서 봉사 많이 한 쪽이 만약에 잘 산다면 그 사람도 봉사할 가능성 있어요. 봉사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 옳은 것을 정량적으로 추가를 하게 되면 나는 내 인생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관리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왜 다윗을 아프게 했습니까? 왜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은 죄가 많아서 아프다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뭡니까? 정답은 하나님의 원수를 색출하는 방법에서 다윗을 미끼로 사용한 거예요. 모든 세상이 지옥 가도 마땅하다는 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는 미끼로 사용한 거예요. 모든 인간이 죽는 이유는 배후에 누가 있기 때문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악마의 정신은 뭐냐? 내가 신이다, 그게 악마의 정신이에요. 그래서 악마의 심성을, 악마가 죄거든요. 죄의 왕 노릇, 죄의 통제를 받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악마의 심성을 그대로 복제해서 갖고 있어요. 그게 뭐냐? 나는 신이다. 나는 정당하다. 그게 우상의 특징이다. 나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신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신이 인간에 일종의 라이벌입니다. 신에게 막 바치지요. 신에게 바치면서 인간은 다룹니다. 받아쳐먹었으면 뭔가 내놔라. 안 내놓으면 신 바꿀 거야. 내가 절에 갔는데 이제는 교회 갔다. 교회 신이여 받아먹었으면 내게 복 주는 게 당신의 정당성에 합당하다. 내가 알고 있는 신은 그런 신이야, 라고 교회 와서 그렇게 기도하고 부지런 떨고 난리 치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고 싶어서 환장하고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죽이고 싶어서 환장하신 거예요. 원수니까 미끼를 던져놓은 거예요. 죄 없는데 빈약하고 죄 없는데 죽어가고 죄 없는데 망해가는 버림받는 상실된 그런 사람을 던져놓았을 때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보고 오해하지 않을 인간이 아무도 없어요. 오해한다는 말은 예수님 앞에서 평소에 본인도 몰랐던 본색이 노출됐다 그 말이에요. 십자가 앞에서.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 하는 방법은 뭐냐?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돼요. 얼굴 돌리면 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귀 막으면 되는 거예요. 그거에요. 그리고 자기와 비교할 다른 인간들과 아옹다옹 다투면 되는 거예요. 누가 의로워서 누가 복을 많이 받았는가? 그것만 정량적으로 측정하면 되잖아요.

어떤 사람 교회 봉사해서 복 받았다는 그 이야기는 애써 부인하지만 결국은 부인 못해요.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통하는 원칙을 목사 입에서 그게 나와 버렸으니까. “목사님, 너무 기복 신앙적이야.” 욕은 하면서도 그 교회를 떠날 수가 없어요. 생각이 똑같거든요. “설교 너무 천박하게 한다. 요새 시대에 누가 그걸 믿나?” 본인이 믿어요. 누가 믿느냐고 욕하는 본인이 믿고 있다고.

그걸 목사가 심리적으로 간파하고 있으니까 욕하나마다 교회 부흥되면 그만이지.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라. 교회 부흥되면 지 월급 계속 들어오니까. 노후가 대책이 되니까. 그런 식으로 교회사업 밀어붙이는 거예요. 안 속는 척하면서 다 속아 넘어가고 있어요. 나는 배운 여자고 배운 남자라 해서 배운 여자 더 찾고 있어요.

두 번째가 뭐냐? 인간들이 욕하지요. 그런데 다윗은 뭐가 어려우냐 하면 그렇게 다윗은 스스로 죄 있고 나는 죽어 마땅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에 대해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저들을 고소해주세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방금 다윗 본인이, “나 죄 많습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사람이 그걸 듣고, “그래 너 죄 많으니까 죽어라.” 하니까 “하나님이여 저 원수를 용서하지 마옵소서.” 이렇게 나온 거예요. 이게 무슨 모순입니까?

본인이 본인 입으로 죄 이야기해서 다른 사람이, “그래 죄 많아 죽어 마땅해.” 한다면 다윗이, “주여,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원수. 저주해버리소서.” 이런 발언은 또 어디서 나온 발언입니까? 그것은 바로 다윗이 특혜 받은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말씀의 줄이 환풍기 역할, 들어왔다가 나왔다는 게 있는데 다윗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양면의 세계가 없어 기존의 자기세계만 유지하면서 나온 원칙으로 양면의 세계 둘 다를 보여주는 사람을 함부로 폄하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미끼로 사용한 거예요.

그래서 어제 주일 낮에 티켓 한 장과 두 장을 설명해드렸잖아요. 티켓 한 장 있는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든 간에 반드시 신을 찾게 돼 있어요. 왜? 평생을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잖아요. 누가? 모든 인간이. 누가? 깡패가, 조폭이. 누가? 사람을 때려죽인 연쇄살인범도 본인의 행동의 깊은 곳에 양심은 있고 그 양심은 선하고 착하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어떤 인간도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도 내가 전적으로 나쁘지 않다는 사고방식이 있어요.

그 인간은 그 티켓으로 이 땅에서 고생했지만 죽어선 천당 가려고 그 티켓으로 천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절에 가도 교회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교회를 저주해도 마음속에는 신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중이에요. 여러분 그 마음가짐을 파악해야 돼요. 모든 인간은 신을 찾고 있습니다. 찾는데 티켓 들고 있어요.

“주여, 저들은 악하지만 제가 불우한 가정에 태어났지만 나름 내가 착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은 주께서 다 알고 보고 계시지요? cctv 다 찍어놨지요. 주님 다 지켜보셨지요. 이 착함, 내가 나쁜 짓한 것 인정하겠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것 충분히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악하고 더러운 세상, 나를 힘들게 만든 인생, 이 세상 가운데서 나름 착함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 그 마음은 가상하게 보셔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게 인간의 모든 행동 속에 다 들어있어요. 티켓이 한 장입니다. 그 양심만 생각하면 스타일 죽이지요. 좋지요. 브이아이피로 모십니다, 나이트클럽에서. 티켓 들고. 소위 성도란 사람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착하고 싶은 이 마음을 본인이 주체할 수 없어요. 한 달에 한 번은 교회 나오잖아, 이 착함을. 안 나와도 되는데 한 달에 한 번은 나온다고, 이 착함을 내가 자기가 자기에게 감동을 해요. “언제부터 착하게 되었지, 교회를 다녔지?” 이런 식으로. 목사님 설교 들어오지도 않아요. 자기 착함에 자기가 황홀에 빠졌어요. 두 달, 석 달 만에 교회 나오면서 황홀에 빠져버린 그걸 어떻게 버립니까? 그걸 어떻게 내 힘으로 뽑아내요?

성도는 어떤 자가 성도냐? 그 티켓 들고 천당 가려고 오는데 그 지옥 문턱에서 입구에서 뺀찌로 빼버려요. “너 그쪽 아니야. 반대쪽이야.” 그러니까 인간의 능력으로서 방향을 틀 수 있다, 없다? 틀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특혜라고 한 거예요. 내가 지식으로 감 잡아서 복음이 뭐고, 세상이 뭐다 감 잡아서 방향이 틀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천국은 이런 곳이고, 지옥은 이런 곳이라고 아는 자체가 너무나 의로운 행동이기 때문에 그 의로운 행동을 본인이 뽑아낼 수가 없어요. 그동안 교회에서 배운 복음의 정보량이 얼만데 아주 대단하잖아요. 그걸 어떻게 죄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까?

다윗을 끌어오는 빈약이란 것은 이것 아셔야 돼요. 이유 없는 죽음이에요. 다윗에 왔다가 올라가면서 다윗이 아는 것은, 나는 이유 없이 그다음에 뭐다?이유 없이 죄인이고, 이유 없이 죄인 된 이유가 이유 없는 아무런 근거 없는 긍휼을 통과한 사람만 영생의 복을 받은 사람이란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시편 41편이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시편 전체가, 다윗 전체가 그래요. 다윗은 소년 다윗의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요. 소년 다윗이 골리앗 이겼을 때 골리앗 이기는 이유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유를 찾지 말라고 성년 다윗이 아니고 소년 다윗 때 골리앗을 어른 다윗을 붙여준 거예요. 다윗을 고백하지요. 이 전쟁은 내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저를 사용했을 뿐입니다. 이제 아까보다 더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게 돼서 시간을 보고 갈게요.

다윗이 골리앗 할 때 소년 다윗이 내세운 것은 아주 순진한 발상인 줄 모르지만 다윗이 아니니까 그런 평을 할 수 있는데 뭐냐 하면 골리앗을 싸움하기 전에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자부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저들은 할례 받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순진한 사고방식입니까? 아니 그걸 사울의 군인들 중에 또 사울 왕이 모를 리 있어요? 다 알고 있잖아요. 그게 지식이잖아요.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다 알고 있는데 하나님의 지식을 덮어버린 지식이 있어요. 뭐냐 하면 힘없이는 진다는 세상적인 지식이 이쪽 지식, 하나님의 지식을 깔보고 억눌러버린 거예요. 숨도 못 쉬게 눌러버린 거예요. 그러면 눌린 하나님이 가만있겠어요, 가만있지 않겠습니까? 가만있지 않겠지요. “에라, 이것들이 뭘 억지로 덮어?” 확 열어젖혀버리지요. 거기서 대비한 것, 준비한 것이 소년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형들이 있는데 다윗을 얕잡아봤어요. “전쟁하는 데야. 애들 가는 데 아니야. 후딱 집에 가, 집에 가.” 소년 다윗이 보더니만, “이것 게임도 안 되는데.” “네가 뭘 안다고?” “저들은 할례 받지 않고 우리는 할례 받았으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할례 받은 자가 없는 자를 이긴다 했으니까 이깁니다.” “우리 다 아는 소리하지 마. 저리 가.” “그럼 제가 나설게요.” 나선 거예요.

그럼 누구를 완전히, 어른들의 허상, 어른들의 허세를 실질적인 순진한 어린아이,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 못 가요. 어린아이가 어른들의 허상을 다 뒤집어버린 거예요. 어른들은 무엇이 쌓이고 쌓인 거예요.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해도 눈에 보이는 인간이 더 중요하고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발언이 이 세상 살아가는 데 유일한 생존의 힘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나 소년의 입장에서는 하나 거치고 와요. 우리가 저 골리앗처럼 죽어 마땅한 데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유가 뭐냐를 생각해보자 이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골리앗은 이미 허수아비에요. 그리고 블레셋 나라는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를 못 이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있는 민족으로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누가? 소년 다윗이요.

그 소년 다윗이 커서 뭐가 되겠어요? 어른 다윗이 되어 뭐가 됐습니까? 이게 이스라엘의 왕이거든요. 두 번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할 거예요. 왕은 안에 있는 내용은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두 번째에 하는데, 할례부터 먼저 언급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할례 언급하기 위해서 여러분 성경 찾아보겠습니다. 신약의 사도행전 8장 봅시다.

사도행전 8장 29절 보겠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그다음에 나머지는 시간 관계상 생략하고 34절, 38절 보겠습니다.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굽니까?” 이사야에 나오는 말씀을 이야기해주니까, “자기를 가리킵니까, 타인을 가리킵니까?” 그러니까 이사야 본인을 가리킵니까, 안 그러면 선지자가 자기 입을 통해서 나 말고 다른 분을 이야기합니까?

선지자는 단추 구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왔다가 나간 거예요. 나를 향하여 말씀이 왔다가, 세상 말이 아니죠. 하나님의 숨겨진 말씀이 왔다가 내 인생에 대해서 예상 밖의 내가 원치 않는 어떤 다른 현상을 유발하면서 빠져나갔는데 빠져나간 방향이 나를 사용한 하나님 쪽으로 빠져나갔단 말이죠.

그런데 빠져나간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어떤 분이 억울하게 죽는다는 것, 사지에 가는 어린양처럼 희생이 되었다는 그 내용이에요. 그 내용을 하고 난 뒤에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35절입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라고 이야기했어요. 세례입니다.

제가 아까 소년 다윗 이야기할 때 할례 이야기했지요. 자, 할례가 뭐냐, 세례가 뭐냐? 내가 혼자 살던 그 나를 두 동강 내버리는, 잘라버리는 거예요. 그럼 내가 뭐였다? 골리앗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세례에요. 할례 없는 자, 할례의 의미를 드러내가 위해서 나는 할례 없는 자로서 어디로 건너간다? 할례 있는 자로 건너가는 데 합류하는 거예요. 그 할례 계열에 합류하고 그 노선 변경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에서 이 일을 누가 시작했는가? 아까 8장 29절에 보니까 성령이 빌립더러 했지요. 그리고 끝부분 39절에 “둘이 물에서 올라갈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이렇게 돼 있지요. 내시는 홀연히 자기 길을 갔더라. 이거는 성령이 했다는 말은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한 거예요.

이것은 다윗이 빈약한 사람 된 것은 본인의 죄, 본인의 행동과 아무 상관없어요. 그냥 특혜 입고 선택 받은 거예요. 아무 상관없는 데 본인이 몰랐던 뭘 발견해요? 이거는 죄 지어서 죄가 아니고 죄에서 태어난 죄로 나는 죽어 마땅함을 다윗이 단추에 실 오듯이 말씀이 와서 꿰서 빠져나가면서 아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다윗을 보고 너는 아픈 것은 네 말대로 죄 지어서 아프다, 하는 자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들의 누구냐? 시편 41편에 보니까 그들이 친구에요. 그 친구가 누굽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돼요. 다시 시편 41편에 와보면 9절에,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차버렸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성령의 기능은 영어로 하겠습니다. Blocking, 장벽이죠. 이걸 가지고 제가 강의 처음에 있잖아요. 이게 뭐라고요? 숨겨진 복이 되는 거예요. 블로킹, 장벽을 세워버리는 거예요. 하나의 인간이 환풍기도 되고 통풍기도 되지만 동시에 그 인간이 세상에선 도저히 알 수 없는 블로킹, 장벽이 되는 거예요. 배구에서 블로킹 알지요. 딱 막는 것, 블로킹 기능을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에요. 성도가 누굴 전도하는 게 아닙니다. 블로킹을 드러내면 그게 하나님이 하신 전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잖아요. 일곱 교회가 나올 때 일곱 교회가 뭐냐 하면 블로킹이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아무도 귀 있는 자가 없어요. 달린 귀 소용없어요. 말씀이 통과해서 단추를 통해서 빠져나오지 아니하면 그거는 귀 있다고 하면 안 돼요. 성령 받은 빌립은 귀가 있지요.

그런데 내시는 빌립의 세계에 세례로 말미암아 자기 세계를 절단 내고 자기 세계를 공격한 거예요. 왜? 하나님이 자기를 원수로 보기 때문에. 원수로 봤던 그 조치, 신의 조치를 흔쾌히 내시는 받아들인 거예요. 성령의 역사로. 어린양이 나를 공격한다는 그 공격을 나는 공격받아 마땅함으로 받아들여버리니까 내시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빌립처럼, 다윗처럼 같이 들어와 버린 겁니다. 상주해버린 거예요. 10분 쉽시다.

 

 

20230410b 부산강의 : [시편]57(41:9)-친구 만들기
(강의:이근호 목사)


왜 다윗에게 친구가 배신하느냐, 친구가 욕하느냐? 욕하는 사이 같으면 친굽니다. 욕하는 사이 같으면 친구라는 말은 다윗의 확장, 다윗의 존재의 확장이 친구라고 볼 수 있어요.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곧 내가 네 안에 있고 너는 내 안에 있다는 관계에요. 떨어질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에 배신당한다는 것은 평소에 인간들은 탈출불가, 친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친구 안에 있는 나의 것으로부터 내가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친구로 지내기 위해서 서로서로 주고받은 게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을 떠난다는 것은 곧 나를 떠나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내가 나와 헤어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인간이 자기와 헤어진다는 말은 모순된 말이잖아요.

배신당했다. 배신당했다 이 말은 모르는 사람한테 배신당합니까? 그럴 리는 없어요. 배신이라는 것은 내 것을 충분히 저쪽에 다 넘겨줬는데 그쪽에서 관계를 끊어버릴 때 배신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다윗이 왜 친구한테 배신당했느냐? 여기에 대한 정답은 요한복음 15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은 주님을 배신한 친구그룹에 해당하는 자들에 국한된다. 그들에게만 국한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친구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주님이 사랑하는 대상이죠. 주님이 사랑하는 대상인데 주님을 배신한 그 그룹이 있어요. 그 그룹을 친구로 불러주는 거예요. 주님을 배신했다고 다 주님께서 사랑해주는 게 아니고 주께서 친구라고 불러줄 마음이 있는 자들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야 되느냐 하면 친구라고 불러준 그 대상에 의해서 예수님이 배신당해야 그게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제자들이 예수님이 친구라고 불러줄 주님이 사랑한 제자들은 결코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없어야 돼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이 세상 전부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걸 전제로 깔고 주께선 일방적으로 거기서 친구 될 사람과 안 될 사람을 선별해버려요. 이거는 일방적입니다. 예수님의 고유 권한이에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 가운데서 친구가 될 수 없는 자를 집어넣어버렸지요. 거기 가룟 유다를 집어넣어버려요. 선택을 했는데 친구 아닌 자를 선택해버려요. 친구 아닌 자를 선택하고 친구 될 자를 선택했는데 제자들 열둘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어느 쪽을 선택하고 어느 쪽을 선택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뜻은 뭐냐? 우리는 열두 제자기 때문에 의례히 하나님께서 다 제자로 천국 가기 해주신다는 생각을 한 제자도 알았고 가룟 유다도 그걸 알고 있었지요. 인간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 자기 위주로 계산하고 생각한다는 그걸 전제로 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전제를 비껴가면서 자기 백성을 뽑아내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라는 전제를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어요.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의 전제를 거부하는 거예요. 그들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를 거부해버립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말하는 그 배경에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하고 나온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그런 인간의 생각들을 전부 다 하나님께서 거부해버리죠. 한 번 적어볼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걸 강조하는 게 요한일서에 많이 나와요.

두 가지 해석이 있지요. 첫 번째,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해석 두 번째 견해를 지워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가 우리도 사랑할 수 있다. 아니야, 우리는 사랑 못해, 라고 두 개의 인간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씀이 들어옵니다. 이게 단추를 꿰는 실이에요.

들어옴으로서 우리는 뭘 아느냐? 하나님은 사랑할 수 없다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할 수 없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반드시 뭐냐 하면 미워해야 돼요. 인간은 사랑할 수 없다 정도가 아니고 미워하는 존재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가라. 실컷 모든 인간으로부터 미움 받으라고 보내신 거예요.

인간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 속에 하나님이든 누구든 간에 내가 사랑하고 싶으면 다 친구로 삼고 사랑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그래요. 그게 얼마나 마귀적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모르는 거예요. 그게 악마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동의하고 싶은 사람 없겠지만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 마찬가지만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합니다. 아가씨한테 총각이 할 수 있다. “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①번입니다. ②번 그쪽 상대방이 하는 말이, “나는 당신을 사랑할 의사가 결코 없습니다.” 이래 나왔어요. 까인 거죠. 까였어요. 자, 여러분한테 물어봅니다. 세 번째, 나는 괄호다, 뭡니까? 괄호 안에 뭐가 들어가겠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 사랑할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세 번째 안에 뭐가 들어가겠어요?

나의 사랑이 과연 내가 상대를 사랑한 것인지, 아니면 상대가 내 사랑을 받아준다는 조건이 붙어있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인지 보자는 거예요. 나는 어떻게 되는가? I hate you. 나는 당신을 미워할 거야, 나오지요. 이게 다윗의 아들 가운데서 암논이 자기 누이동생을 일방적으로 스토커해서 사랑하다가 강제 강간을 하지요. 나는 성폭행이란 단어 자체가 싫어요. 그냥 강간이에요. 왜 강간이란 좋은 말이 있는데 성폭행이 왜 들어가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그것도 인권인가.

했을 때 이름이 뭐죠? 다 잊어버렸다. 사무엘하 13장인가, 이렇게 하면서 하나씩 배우는 거죠. 다말이죠. 이복 여동생 이름이 다말이죠. 다말이 강간당했어요. 당하고 난 뒤에 이복 오빠가 해놓고는 자기가, “저리 가. 꼴 보기 싫어.” 성경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더 미워했다는 거예요(삼하13:15,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여기서 인간의 마음이 복잡해지는 겁니다. 어떤 점에 복잡하냐 하면 이복 오빠 암논이 뭘 미워한 거예요, 누굴 미워한 거예요? 자기한테 강간당하기 전의 누이동생을 미워한 거예요, 강간당한 누이동생을 미워한 겁니까? 자기가 강간하고 난 뒤에 여동생을 미워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네가 내 수치스러운 행동의 증거가 왜 너한테 있어. 내가 하지 말아야 될 행동이 담겨있는 증거가 되는 나는 너를 저주한다, 밉다. 미운 거예요.

인간은 상대를 사랑한 적도 없고 상대를 미워한 적도 없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선에 대해서 사랑했고, 자기 자신의 악에 대해서 본인이 본인을 미워하는 거예요. 왜? 본인이 신이니까, 선악 지식을 갖고 있는 신이니까. 자기가 자기를 평하는 거예요. 옳은 것은 자기가 사랑하고, 옳지 않은 것은 자기가 미워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문제 하나 설정돼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인간은 어떻게 하면 죄 짓지 않는가? 인간은 어떻게 하면 죄 짓지 않는 겁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 죄지요. 왜? 자기 자신을 사랑하니까. 다윗이 밧세바를 사랑했습니까? 아니지요. 밧세바가 마음에 들어서 사랑했잖아요.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있는데 리트머스 시험지 같아. 전부 다 막대기가 하나에요. 선과 악이 하나의 막대기에 같이 있단 말이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함을 선으로 받아줄 경우에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어떤 남자가 꿇어앉아서 프러포즈한다고 다이아몬드반지를 여자한테 내밀면서 나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이렇게 하는데 여자가 몸 좀 풀더니만 돌려차기 있잖아요. 돌려차기로 반지를 차서 다이아몬드반지가 한 15미터 떨어졌을 때 남자 마음이 뭡니까? 남자가 어떤 마음이 있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이건 뭐냐 하면 당신은 내 자존심을 발로 차버린 거예요. 그러면 찼다고 한다면 그 남자는 결국 여자를 사랑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남자는 자기 자존심을 사랑한 거예요. 사랑이란 게 미움이 결코 자기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그게 악마거든요. 그게 악마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하나님이 내 뜻대로 해주면 사랑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 안에 누구 내용이 잠식돼 있다? 내 뜻이 하나님 뜻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마치 러시아 인형처럼. 외형은 하나님인데 그 안에 누가 들어있다, 누가 주인 노릇하고 있다? 내 뜻이 주인 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사람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하죠. 교회가 마귀들의 집합체에요.

그렇게 분석한다고 문제 해결되는 게 아니고요. 어떻게 하면 범죄 하지 않을까요? 시편 41편과 관련해서 그럼 어떻게 하면 범죄 하지 않을까요? 정답은 이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골리앗이고, 내가 아무것도, 할례 없으면 인간 취급도 안 하니까 내가 할례 받기 전에 내가 세례 받기 전에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받아들이면 상대방이 두 바퀴 돌아서 내 프러포즈를 차게 되면 그걸 주의 뜻으로 반겨야지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걸 반겨야지요.

어느 누구도 남에게 우위에 설 자격 없고요. 어느 누구도 남을 통제하거나 지시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상대를 함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어떤 인간에게 하나님이 준 적이 없어요. 상대를 함부로 할 수 있는 권한. 이단옆차기로 차든지 뭘 한다하더라도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반발을 못해요.

그것을 바로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서 밝혔습니다. 요한복음 15장 대목을 봅시다. 친구에 관한 이야기니까. 요한복음 15장 9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하지요. 방금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주님이나 하나님이나 타인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주님의 사랑 안에 거둬들이는 거예요. 단추에 실 꿰듯이 그냥 거둬들이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할 수 없어요. 왜? 어떤 것도 자기가 자기 밖으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악마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악마가 회개하는 것 봤습니까? 없지요. 악마는 회개를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례 요한 보내서 회개하라 한 거예요. 회개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회개하라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다. 심판의 날 그냥 와도 되는데 심판의 정당성을 보여주지요. 회개하라, 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10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은 거기다 한 발 더 뜹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사랑이란 계명이 완성돼 있다. 따라서 너희들도 그렇게 그 계명을 지켜야 된다, 이렇게 돼요. 그러면 이거는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굳어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예수님 밖에 없거든요. 예수님만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사랑을 제자들에게 요청한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그 사랑이 있다, 없다? 없고, 그 사랑이 없으면 뭐가 안 되느냐? 너희들 사이에 친구 사이가 안 돼요. 각각 개별체로 분리돼버려요. 친구가 될 수 없어요. 이용대상이요. 아내는 남편을 이용하고 남편은 아내를 이용하는 거예요.

그것 하기 위해서 서로를 속이면서 결혼한 거예요. 결혼해놓고 그다음부터는 강제조치, 그 강제조치가 되는 경우가 뭐냐 하면 자식이 생길 때. 헤어지고 싶어도 무엇 때문에 못 헤어집니까? 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엄마는 자식 때문에 못 헤어지니까 자식 키운다고 자식에 매달려버려요. 잠도 못 자고. 그러니까 뭘 못 버려요? 돈을 못 버려요.

그러면 남편은 뭐냐? 이쪽에 자고 있는 남편은 돈 버는 기계여야 해요. 더도 하지 말고 돈만 벌어 와야 해요. 애는 내 애에요. 돈만 벌어 와야 해요. 만약에 남편 돈 못 벌지만 시아버지 돈 있다. 그러면 시아버지한테 순종하는 척하고 있어요, 며느리들이. 무조건 빼먹을 것 빼먹으면 되니까. 그런데 그 아들이 자식이 자기 남편을 너무 닮았다. 그러면 이제는 자식이란 정도 떨어져버려요.

이 세상이 어느 정도로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인 것을 하나님은 결혼제도를 통해서 자식 잉태를 통해서 그걸 확인해주는 거예요. 부부사이라도 자식 사이라도 모든 개념에는 뭐냐 하면 돈, 돈은 뭐냐 하면 내가 생존하기 위한 힘, 에너지거든요. 나만 사랑하기 위한 세상, 이게 악마가 모든 사람에게 다 집어넣은 인간의 본질이고 본심입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뽑았다는 거예요. 몇 명을? 열두 명을 뽑았어요. 하나를 열한 명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한 명을 마귀를 뽑았어요. 마귀를 뽑아서 마귀의 미래와 마귀의 갈 곳과 열한 명이 갈 곳이 예수님이 뽑아놓고 예수님께선 둘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쪽의 열한 명은 친구에요.

친구니까 여기는 무슨 내용이 포함되는 친구냐 하면, 시편 41편 9절의 말씀이란 실, 단추를 통과하는 시편 41편 9절에 있는 말씀을 거기다 담아버립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 대목이에요.

예수님께서 자기의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 기존의 친구라는 그 관계성을 주님께서 배신하는 방법으로 끊어냅니다. 너희들이 사랑하는 친구와 내 사랑하는 친구가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친구가 뭐냐? 요한복음 15장에 보니까 친구를 위해서, 13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자, 나왔지요. 친구에서 무슨 개념 나오지요? 사랑 개념 나오지요.

친구가 있어야 될 이유는, 친구라는 바탕이 있어줘야 거기서 없던 사랑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 친구에는 사랑이 없음이 확인돼야 되겠지요, 그렇지요? 인간들 열두 명 모아 놓고 무엇을 확인시킵니까? 사랑 없는 자, 사랑 없는 사이의 친구관계라는 것을 주께서는 증명하기 위해서 여기서 배신당하는 모습으로 주님께선 그들과 함께 있었던 거예요. 배신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뭘 믿어요? 내가 배신했던 분을 제가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내가 숨기고 있던 나의 진실을 오직 예수님만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나의 어두운 면, 좋은 면도 있다는 말이 아니고 전부 다 어두운 면이죠. 나의 어두움을 몽땅 다 갖고 계시기에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야 될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요한복음 12장 25절, 이거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뭐하는 자?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

그러면 아까 ①번, ②번, ③번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②번 이단옆차기 들어왔지요. 너하고 사랑하면 내가 죽을게, 단호한 거절. 단호함이 포함된 단호함이 명확한 거절. ③번, 나는 당신을 미워합니다. “네까짓 게 뭔데? 너 없으면 여자가 없어?” 이런 것 하잖아요. ④번, “나는 내 사랑을 거절한 당신, 그 당신을 미워한 나를 미워합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상대보고 미워하는 게 아니고 미움 받았다고 짜증내는 나 자신과 미워하면서 나와 결별에 나서지요. 나와 이별하는 거예요. 또 하나의 티켓을 얻은 거예요. 기존의 티켓 말고, 끝까지 내 사랑으로 고집하면서 천국 가고자 하는 그 사랑 말고. 내가 안 되는 이 미움이 주께서 나를 미워지게 해주신 그분을 드디어 사랑하게 된 거예요. 너는 미운 존재란 걸 재료로 한 사랑을 내가 받아들이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이라 하는 것은 의외의 나라고 생각지도 못한 나라죠. 왜냐하면 기존에 우리가 생각한 교회와 천국은 뭐냐? 거기에 내 사랑이 기본요소로 포함된 천국이에요. 나 잘되기 위한 천국이거든요. 내 복 받기 위한 내가 복을 얼마나 사모했습니까. 살아선 고생이지만 죽어서는 호강하자. 이 구호 하나 믿고 교회 갔잖아요. 성당 갔고, 절에 갔고. 이제는 바로 그것을 미워해줄 수 있는 교회, 참 그런 교회 있으면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나를 미워하고 그걸 저주해주는 교회, 그게 복음 아닙니까. 그게 복음이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 마지막 의가 떨어지는 맛을 네가 알아? 그 게 맛을 알아? 평생을 남을 이용해놓고 나는 사랑했다고 거짓말하는 우리, 나 호강하기 위해서 주변 친구를 끌어 모은. 내가 실패하지 않는 인생 되기 위해서 주변에 연락을 취한 거예요. 여자들 전화하면 한 시간 반씩. 남편 이야기 끝났는데, 이것 이야기하고 끝내자 해놓고 30분 더 끌어버려.

요한복음 15장 22절입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 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이제는 뭡니까? 인간이 자기 사랑에 빠져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몰랐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심지어 친구라고 하는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했을 때에 도대체 예수님을 알아본 인간이 누가 있었느냐? 아무도 없지요. 없다는 말은 바로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안다고 여긴 자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살해당함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그동안 몰랐고 모르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뭐가 되다? 관계가 끊어진 죄가 되는 거예요.

오늘 시편에서 다윗이 본의 아니게 비쩍비쩍 말라가고 아픈 것은 바로 내가 죄 때문입니다, 하는 그 죄를 같은 친구들은 이해할 수가 없지요. 다윗에게는 새로운 계시가 다가와서 그 보이지 않는 말씀이 인격이란 특정 인간이란 걸 이 세상 현실에 구체화돼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만 하신 게 아니고 말씀이 육신이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이 세상에 유일한 위기에요. 유일한 위기고, 멸망의 이유고, 심판의 근거가 하나님 쪽에서 장만한 겁니다. 이거는 종교가 아니에요. 있는 사실 자체, 팩트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령, 또는 주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우리 안에서 뭘 준다? 새로움을 준다. 여기서 새로움을 준다는 이것만 알면 안 되고 새로움의 반대가 뭐냐? 새로움이 전혀 새롭지 않은 게 뭐냐? 그 반대가 사색입니다. 철학적 탐구에요. 자기 도 닦는 거예요. 이건 전혀 새롭지 않아요. 이거는 자기가 오류를 줄이기 위한 조치에요. 오류를 실수를 줄이기 위한 조치가 사색입니다.

소주 한 병 먹고 뜨신 방에 이불 덮고 말씀을 생각하는 것, 큐티하는 것 이거는 새롭지 않습니다. 새로움이 되려고 지가 목표 산정해놓고 그 목표에 맞추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아주 발악을 하는 거예요, 발악을.

그러면 인간이 하는 한계가 사색에 불과한 데 어떻게 해서 사색에서 새로움으로 건너올 수가 있는가? 이걸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까 이야기하면 어떻게 사색하는 나는 근사하다, 멋있다, 내가 말씀을 상고하는 게 멋있다는 이것을 어떻게 새로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누구로부터 우위를 점령할 자격조차 ……. 이걸 어떻게 밝혀지는가? 거기에 대해서 어제 제 오후설교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오후설교 때 실로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실로가 나오는 구절이 창세기 49절에 10절에 나옵니다. 야곱이 마지막 죽기 전에 열두 아들에게 복을 내리면서 창세기 끝나버려요. 하나님께서 나한테 계시하기를 예언하기를, 다른 말로 하면 복을 주기를 너희들 열두 지파는 이렇게 다양하게 복이 파급된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 대목입니다. 창세기 49장에.

여기서 특이한 게 있어요. 이스라엘을 누가 통합할 것인가에 차이 나는 예언을 줬는데 이게 통합이면 하나여야 돼요, 둘이여야 돼요? 통합은 하나여야 되는데 이게 둘로 갈라져버렸어요. 요셉 지파와 유다 지파 둘로 복이 어떤 구심점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듯한 느낌을 줘요. 요셉 지파에는 뭘 주느냐? 목자를 줍니다. 유다 지파는 왕을 줘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 없다고 분명히 단정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왕이기 때문에 인간적 왕은 필요 없어요. 인격적인 인간으로서의 왕은 필요가 없습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왕을 달라할 때는 분명히 사무엘 통해서 예언하기를 너희들이 왕을 달라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왕 됨을 나는 거절한 걸로 간주하겠다, 이렇게 나왔어요,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왕을 달라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는 왕이 없는 이스라엘과 다른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그거는 파괴돼야 될 이스라엘이죠.

지금 제가 사색에서 어떻게 해서 새로움으로 바뀌는가? 지금 단어 하나 힌트 드렸습니다. 파괴되어야 될 대상에서 뭐가 나온다? 새로움은 파괴를 통해서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걸 실로에서 어떻게 보느냐? 요셉은 목자로 돼 있어요. 왕이 아니고 목자입니다. 목자는 양을 이렇게 모으는 거예요. 통합시키는 거예요. 목자인데 요셉 지파가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로 갈라진 것 아시죠.

어쨌든 간에 두 지파가 된 이유는, 요셉의 희생 때문에 야곱의 온 식구가 다 살았어요. 심지어 요셉의 아홉 형들은 요셉을 팔아먹었습니다. 팔아넘겼어요. 좀 없어질래, 없어주라는 거예요. 우리 앞에서 눈에 띠지 말고 좀 사라져줄래, 이랬어요. 사라진 희생물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두 배나 하나님께서 복을 준 거예요. 두 배나 줌으로서 우리가 저 요셉을 학대했다는 것을 대대로 각인되도록 새겨지도록 한 거예요.

십자가에 우리 마음속에 새겨져야 돼요. 여기 피아노에 십자가 네 개 있지요. 이거는 잘 안 들어갑니다. 우리 마음속에 십자가가 있어서 까불거리는 제가 주님을 죽였습니다, 라는 게 우리 속에 있어줘야 돼요. 그래서 두 배나 했다. 그 장소가 뭐냐? 실로에요. 통합됐지요. 여호수아의 정복 이후에 여호수아도 실로에서 언약궤에 있었고, 정복 후에는 실로에서 언약궤가 중심역할 한 거예요. 그러니까 통합된 거예요. 어디? 실로란 지역에 통합된 겁니다.

통합되고 난 뒤에 이들이 안정권에 들어갔거든요. 안정권에 들어가니까 여기서 뭐가 일어나는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변나라를 이스라엘에서 다 쫓아내지 않았어요. 쫓겨나서 저쪽에 가 있는 거예요. 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한 번 획득했다고 도우심이 그걸로 마감되는 게 아니고 그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언약관계가 유지되어야 주변이 너한테 굴복 당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계속 주변 나라를 주변에 얼쩡거리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약속의 땅에 잘 먹고 잘 사니까 어떻게 됐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들을 쫓아내고 우리만 특혜를 줬다는 이 관계를 잊어버린 거예요. 왜? 이스라엘의 잘못은 이스라엘이 누굴 사랑했다? 이스라엘을 사랑한 이게 잘못이었던 거예요. 내가 나를 사랑한 것, 나 이제 지난 5년 전에 은혜 받았어, 구원받았어, 이렇게 되면 누굴 사랑한 거예요? 주님 사랑한 게 아니고 구원받은 나를 사랑한 게 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주변에 사태를 일으키죠.

성도에게만 해당되지만 사건을 일으켜서 내 하는 뜻을 뜻대로 안 되게 말하죠. 그게 뭐냐? 나의 파괴, 나와 나의 이별을 반복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앗수르가 우상을 섬겼다. 우상을 섬겼는데 우상의 특징이 뭐냐? 그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게 없어요. 긍휼이란 실이 없어요. 단추를 꿰뚫는 실이 없습니다. 그냥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에요.

그러니까 인간 위주지요.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가치, 인간의 인권이죠. 이게 우상의 세계에요. 서로의 가치를 존중해주자. 민주주의 이런 것 전부 다 마귀적이에요. 헌법을 지키는 것이 주의 뜻이다. 아닙니다. 그게 마귀 생각이에요. 부활절 기념사에 누가 그런 소리했다고, 어디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헌법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라는. 그게 바로 차라리 성철 스님처럼 “사탄아, 환영합니다.” 그게 더 나아요. 저는 사탄을 숭배합니다, 죽은 성철 스님, 조계종 석가탄신일에 법어로 우리는 사탄마저 용납합시다, 하면서.

앗수르가 와서 완전히 실로, 북쪽을 다 작살냅니다. 작살낼 때 남쪽은 남겨둬요. 왜 남겨두는가? 이스라엘을 통합시키는 통합의 구심체가 요셉의 한도가 끝났어요. 목자의 시대가 끝나고 어디로 가느냐? 유다로 가요. 유다로 가는데 이걸 통합할 때 이게 어려운 거예요. 어제 설교시간에 설명이 다 못했습니다. 시간관계상. 유다의 왕이 오잖아요. 여기서 알아야 돼요.

유다에서 왕인데 왕이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왕이냐, 아니면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왕인지 알아야 돼요.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왕이 오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왕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창세기 49장 9절에 보면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9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축복할 때, 여기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해놓고 사자 새끼의 성격이 어때요? 뒤에 나오죠.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앗수르가 사자 같이 북쪽을 삼켰잖아요. 그러면 이것이 실로에 있던 언약궤가 어디로 이동하느냐? 예루살렘으로 이동합니다. 다윗에 의해서. 이동할 때 유다가 뭐 같다? 사자 같이 뭘 찢어버린다? 유다는 이스라엘을 보호하지만 유다자손은 예언된 진짜 유다에서 나오는 왕은, 유다는 왕 되면 안 돼요.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 없어요.

진짜 이스라엘 왕은 이스라엘을 앗수르가 찢어버리듯이 찢어버린 거예요. 얼마나 찢는지 예루살렘을 찢어버려요. 마치 옛날에 실로를 찢어버리듯이, 앗수르가. 실로란 지역 북쪽이 앗수르한테 찢길 때에 북쪽 왕들이, 남쪽 왕들도 마찬가지지만 어느 신을 믿었습니까? 앗수르가 믿던 신을 섬겼어요. 앗수르 신을 섬겼는데 앗수르 신을 믿던 그들이 앗수르에 의해서 찢기듯이 완전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오늘 시편대로 하게 되면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은 누구한테 심판 받습니까? 여호와한테 심판 받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로부터 지옥 보내집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지옥 보내지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러느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말씀이 그러니까 티켓 한 장, 내가 말씀 믿고 교회 가고 이러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나 말씀이 먼저 와서 나를 파괴시켜줘야 돼요. 그 말씀의 완성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앞에 우리가 설 때에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 어느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느냐 하면 주님이 나를 구원해도 그만이고 구원 안 해도 상관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야 돼요. 그게 십자가에요.

그래야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으로 전환되느냐 하면 그동안 내 인생 내가 주인 노릇했는데 이게 주님으로 인수인계됩니다. 그러니까 곱게 인수되지 않고 찢겨서 파괴되어서 인수된 거예요. 사나죽으나 이젠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주의할 것은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니까 나는 구원받았다고 하면 안 되지요.

그래서 그걸 어제 설명한다고 부활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마술사가 부활되는 것 이야기했지요. 살아 있는 채로 부활되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살아 있으면서 부활 생각하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 연기하고 있는 거예요. 죽는 척하면서 또는 죽을 뻔하는 건 부활이 아니에요. 완전히 내가 알던 나는 할례가 없는 그 자체, 세례 없는 그 자체가 살아 있어도 이건 산 게 아니고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요소가 없으니까, 주님의 실이 없으니까, 다윗을 꿰뚫는 실이 없으니까.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내가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여 성신을 나한테 거두지 마옵소서, 했어요. 자기가 죄인인 건 알겠는데 성신을 내게 거두지 마옵소서. 왜? 그게 하나님의 다윗 자손이기 때문에. 본인이 살고 싶어 하는 게 아니고 그게 약속 중에서 나를 친구로 삼았고 나를 사용하셔서 약속을 드러낸다는 그 약속은 저한테 거두지 마소서, 란 뜻이에요.

주께서 찾아온 복음이 저에게 떠나지 마소서, 하는 것은 떠난다는 말이 아니고 떠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주님을 버릴지라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것이 이사야 44장에 보면, 이스라엘아 여수룬아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왕이 없어야 될 이스라엘에 다윗을 줬다는 것은 다윗의 후손에 의해서 다윗을 배태한 이스라엘이 심판 받고 파괴된다는 겁니다. 그 다윗의 자손이 누구지요?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한테 배신당하고 죽으신 겁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날 위해 울지 말고 네 딸을 위해서 울어라. 내가 이스라엘을 대표로 작살내시는 바로 심판주다.

그럴 때 사도행전 2장 37절에서 베드로가 그런 설교하니까 유대인들이 이런 소리했어요. 어찌 할꼬, 했어요. 이 말이 세례의 내용이 됩니다. 나중에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 받으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어찌 할꼬, 란 것은 뭐를 떠난 거예요? 내가 할 도리 다했는데 이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은 내가 원천부터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비로소 발견했다는 거예요. 전부 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살아왔어요.

햇빛이나 공기나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이 그냥 은혜로 주신 걸로 살았는데 그걸 받는 쪽쪽 마귀 품성이 있어서 전부 다 애써서 인생 내가 주인공으로 살아왔다 그걸 다 전환시켜버린 거예요. 그런데 에티오피아 내시처럼 성령을 받아버리니까 참 이거는 진짜 말도 안 돼. 내가 왜 마귀 짓을 해도 그렇게 독하게 했지? 그것을 알게 됩니다.

끝으로 이야기할 것은 그렇다면 그걸로 구원받았으니까 어떻게 할까요? 시편 41편 때려치울까요, 이젠 안 봐도 됩니까? 아니죠. 내가 있던 내가 주인공 되는 그 자리에 나를 현실에 구체화하기 위해서 말씀이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내가 아직도 안 죽고 있는 이유는, 말씀이 나의 중심에 차있다는 것을 구체화시키는 거예요. 이 ‘구체화’가 중요해요.

구체화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없다, 보이지 않는다, 말씀도 안 보인다, 우리 인간들끼리 있다, 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여기 있잖아. 아무것도 아닌 채로 있잖아. 그 아무것도 아님이 시편 41편의 구현체로 완성체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오늘 시편 41편에 온전함이 등장합니다. 41편 봅시다.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41편 12절,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이것은 노력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다 애쓰면 구원에 도달한다는 말이 아니고 어제 낮 설교처럼 구원은 완전해져서 시작되는 거예요. 완전함이 내 중앙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노력하면 다 탈락이에요. 선악 지식으로 애쓰고 최선을 다했다, 나름대로 바쁜 시간 짜내서 교회 봉사했다, 다 탈락이에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아버지가 아들 아는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 아는 예수님처럼 완전하지 아니하면 다 탈락입니다.

그 완전을 뭐라고 하느냐? 그게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주님을 미워한 요소로서 사랑을 구성하기 위해서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끝으로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의 실질적인 구현체로서 실제적인 실체로서 우린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코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주님이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해 온 거죠. 그래놓고 요한일서에 보면 이걸 알게 한 것은 성령이 너에게 임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해버려요.

그러니까 인간의 지식으로 아는 사람은 뭔가 보이지 않는 천국 가고 싶은데 내 쪽에서 할 게 있어야 되는데 성령이 와야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했다는 내용이 있으니까 어느 것 하나 내 쪽에서 잡을 게 있다, 없다?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 마지막에 세상에 속한 사람 있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오신 것도 기적이지만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 성도가 발생된 것도 특혜요 기적으로 여기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주님의 약속을 드러내기 위한 조치이지 우리 이익을 위하지 않은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부산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악스러운 사태  (2) 2023.06.14
실패한 희생물  (1) 2023.05.17
두 개의 나  (1) 2023.03.15
3자 관계  (0) 2022.12.15
창조자의 리듬  (0) 2022.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