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경악스러운 사태

아빠와 함께 2023. 6. 14. 06:52

20230612a 부산강의 : [시편]59(43:2)-경악스러운 사태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43편 하겠습니다.

짧으니까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1~5절)

중요한 단어 열거하면 이렇습니다. “경건치 아니한 나라” 경건치 아니한 나라가 구성돼 있는데 거기에 불의한 자가 통치하고 있다. 그러면 이 신앙인은 지금 어느 나라에 있느냐 하면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있어요. 그런데 이 나라에서 고통을 당하는 겁니다. 불의한 자 때문에 고통, 압제를 당하는 거예요. 고통을 당할 때 신앙이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면 제단에 가요. 하나님의 제단에 갑니다.

그러면 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경건치 아니한 나라’ 따로 ‘제단’ 따로 이렇게 되지요. 고통이기 때문에 슬픈데 제단에 가서 해결합니다. 제단에 누가 기다리고 있느냐 하면 ‘극락의 하나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극락의 하나님이 기다린다 했으니까 이건 뭐냐 하면 고정적이죠, 고정적. 고정적인 분이 제단에 있어요. 극락의 제단, 또는 거룩한 산의 성산.

이렇게 극락의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여기서 이쪽으로 가는 방향이 경건치 않은 나라에서 소속되어서 고통과 슬픔을 당하고 해결책으로 제단에 가는데 거기에 극락의 하나님이 있다. 이런 방향은 어떤 신앙인의 마음속에 불안을 초래했습니다. 그런데 이 극락의 하나님을 알고 거꾸로 이렇게, 이렇게 과정을 통해서 경건의 제단에 갔을 때 (경건치 않은 나라의 생활을 할 때) 여기는 뭐냐 하면 어찌 기쁨이 돼요.

기쁨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찬송한다고 돼 있고요, 끝에. 그냥 찬송이 아니고 수금으로 찬송한다, 찬양한다고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 신앙인이 내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기쁨이 기쁨 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현상이 일어나야 돼요? 불안해야 되지요, 신앙인이. 불안해야 이게 기쁨으로 찬양으로 바뀌니까요.

그런데 이 불안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나라가 선제돼야 되는가? 경건치 아니한 나라가 선제 돼야 돼요. 경건치 않은 나라가 있어줘야 신앙인에게는 해결책이 뭐냐 하면 고통의 해결책이 제단을 찾는 거예요. 성산을 찾는 겁니다. 이게 신앙인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제단을 찾아요.

제단을 찾으면 제단에서 뭘 얻느냐? 고정된 하나님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마치 이거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어떤 사나이가 도시에 가서 돈을 흥청망청 막 날릴 때 주변의 친구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쟤 끝났어. 돈 떨어지면 끝나는 거야.”라고 누구나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그 돈 쓰는 사나이가 어느 날 돈 떨어지고 돼지 치는 데 아르바이트 하다가 그것도 너무 신세가 서글퍼서 어느 날 사라졌어요.

어디로 사라졌겠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서 어디로 사라졌지요? 아버지 집으로 가지요. 그게 바로 탕자 이야기라는 겁니다. 아버지 집으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 집은 이사 갔습니까, 고정됐습니까? 아버지의 집이 고정돼 있어요. 이사를 간 게 아니고 그 아버지 집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 탕자는 뭐냐 하면 원래 있던 자기 자리를 벗어나서 다시 아버지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 탕자 비유잖아요. 그럼 그런 이야기라면 원래 아버지 집에서 방금 잘 이해하셨겠지요.

그럼 탕자 비유 내용을 다시 하게 되면, 아버지 집에는 두 종류의 아들이 살고 있다는 뜻이 돼요. 하나는 뭐냐 하면 마음에 불안애서 집 나가고 다시 돌아오면서 전에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도저히 상상도 못하고 생각도 못한 찬송과 기쁨이 발생된 채로 돌아온 아들이 있고요. 집을 나가야 찬송이 되고 기쁨이 돼요, 집을 나가야. 여러분 집을 안 나가봤잖아요. 질문 자체가 문제가 있다. 문제가 있는 질문이에요. 여러분 집을 안 나갔는지, 아니면 아예 아버지 집에 애초부터 없었는지 그건 모르겠고요.

집을 나가야 찬송과 기쁨이 되는데 또 한 아들은 뭐냐? 집을 나갈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집을 나가지 않으니까 무엇이 생성되지 않는가? 찬송과 기쁨이 생성되지 않고 아버지의 고정됨의 의미를 그 큰아들한테는 이 고정이란 말이 뭔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나가봐야 아는데 안 나가봤기 때문이 이 고정이란 것이 뭔지 모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큰아들의 문제는 뭐냐? 아버지 집을 집이란 사실을 없애버리고 그게 누구 집이냐 하면 나의 집이 돼버린 거예요.

예수님께선 아버지 집에 서로 차이 나는 두 종류의 아들을 설정했으니까요. 나의 집을, 탕자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느냐? 여기서부터 뭐하느냐 하면 경건치 아니한 나라를 설명해야 되고, 하나님 보시기에 불의한 자가 어떤 자냐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자, 이걸 아셨으니까 불의한 자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징후를 또는 활동을 지우고 자기 PR, 자기 활동에 주목하는 자, 이게 불의한 자에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지우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하나님이 죽었고 하나님이 없다고 확정되었을 때 그다음에 나타날 인간의 행동은 어떤 행동이 나올까요? 하나님이 없고 아예 하나님이 애초부터 없었고 사라졌다고,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다고 그게 확신이 들 때 나오는 행동과 말은 그 초점이, 그 성향이 어떤 성향이겠어요? 자기 PR, 자기 자랑이 나오겠지요. 자기한테 관심 두겠지요.

시편 43편을 설명하기 위해서 현실이라는 게 있는데 현실은 아버지 집에 이렇게 집 나가서 기쁨으로 돌아온 자식과 원래부터 나는 아버지 집은 없고, 아버지 집이 있든 없든 내가 여기 기거하는 자기 집으로 여기는 두 종류의 완벽하게 차이 나는 둘 사이에 서로 소통이 될 일은 없어요. 완벽하게 차이 나는 두 종류의 아들을 설정하는 것, 왜 이게 자기 자랑하고 불의한 자 있어야 되느냐? 그래야 시편 43편이 현실화되기 때문에. 시편 43편이 현실화되려면 불의한 자가 있어줘야 돼요. 경건치 않은 나라가 있어줘야 된다고요.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니까 불의한 나라가, 경건치 않은 나라가 필수적으로 있어줘야 기쁨의 찬송으로 천국 간다는 사실을 그걸 놓쳐버리고 자기 편한 데로 자기가 편하게 사는데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어요. 경건치 않은 나라가 분명히 있어줘야 되는데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고 행복만 생각하니까 이 세상 자체가 시편 43편 데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시편 43편을 봐야 알지요. 사람이 성경을 안 보고도 자기를 안다고 우기는 거예요. 이건 아시니까 다 지웁니다. 칠판의 면적상.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강의가 전체적으로 여러분 이걸 알고 강의를 하겠습니다. 경건치 않은 나라부터 분명히 들어갑니다. 주님을 버린 대가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해요. 주님을 버린 대가로 나를 찾으려합니다. 어떤 나라가? 경건치 않은 나라에서. 주님을 버린 대가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소홀히 한 대가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뭐냐? 그때 얻어진 나는 어떠한 나냐, 에요. 내가 얻을 수 있는 나는 어떠한 나냐?

지금 이 사람은 뭐를 놓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놓친 게 아니에요. 뭘 놓쳤느냐 하면 경건치 않은 나라를 놓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버린 게 아니고 이 세상이 지옥이란 사실을 놓치고 있는 거예요. 지옥에서 출세해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건 뭐냐? 지옥, 천국은 하나님에서 나온 아이디어지 내가 만든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버리면 뭐도 날아간다? 지옥, 천국도 같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없애고 지옥, 천국을 없앰으로서 도대체 뭘 얻고자 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뭘 얻고자 하는지를 인간들은 불행하게도 몰라요. 에드거 앨런 포라는 미국 작가가 쓴 단편소설 <도둑맞은 편지>가 있습니다. 전에 여기서 잠시 소개한 적이 있는데 자기를 찾으려하다 보니 신경 쓸 수도 없지요.

<도둑맞은 편지>가 뭐냐 하면 이런 내용이에요. 왕비가 혼자 있는데 왕이 봐선 안 되는 비밀스런 편지 같은 걸 보고 있는데 그때 왕과 장관이 한꺼번에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왕비가 놀라서 허겁지겁 아무데나 툭 버리잖아요. 편지 읽다가 들어오니까 너무 놀라서 혹시 내가 읽는 편지에 남편 되는 왕이 주목할까 싶어서 난 몰라, 난 관심 없어, 하고 툭 던져놨단 말이죠. 그걸 장관이 간파해서 자기에게 있는 편지와 그 편지를 바꿔치기해버려요. 바꿔치기하니까 왕비가 불안하게 된 거예요. 뭔가 고통이 된 겁니다.

인간의 고통은 뭐냐 하면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감추는데 실패할 때 고통스러워요.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 주님이 귀하게 여기는 건 안중에 없어요. 내게 귀한 것을 내가 제대로 감추지 못할 때 우리는 고통이 찾아오는 겁니다.

예를 들면 회사 다니는 아가씨들이 아침에 버스 탈 때 보면 방금 머리 감았어. 축축한 머리로 버스 타고나서 화장하고, 늦잠 자서 출근시간 늦었다 이 말이거든요. 왜 아침에 출근할 때 머리를 감을까? 그거는 인간은 수치스러운 것은 감추고, 수치스러움을 감췄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돋보이고 싶은 부분을 빛을 내는 거예요. 그게 빛이 나는 사람이에요. 임영웅이. 빛을 내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고통스러우냐 하면 내가 감추고 싶은 그것을 그러니까 일찍 일어나서 말리고 오지 왜 회사 들어와서 하느냐고 회사 상사가 이야기한다면 지금 회사 상사가 뭐를 훅 치고 들어왔느냐 하면 내가 돋보이는 것을 통해서 감추고 싶은 것을, 오늘 늦잠 잤다는 것을 감추고 싶어 것을 감추는데 그 사람이 방해 놓는 거예요.

여기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만 고통에서 인간의 고통이 있어요. 인간의 슬픔이 있다고요. 인간의 고통은 어디서 나오느냐? 이게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서 제공된 것이라는 것이 시편 43편에서 언급하는 겁니다. 네가 평소에 불행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고 아픔을 느끼는 것은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네가 속해 있는 나라 자체가 불의하고 경건치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거기서 네가 배운 것은 그것밖에 배우지 않았다는 거예요.

나의 수치를 어떻게 하면 교묘하게 감출까? 감춘다는 말은 고정적이 아니고 늘 들킬 가능성이 있는 심적인 불안을 조성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네가 속에서 어떻게 불안하여 하는고. 참 이게 어려운 게요 이 세상은, 어렵지만 여러분 감당해야 돼요.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제단 있다는 말은, 아까 제단을 고정적이라 했지요. 그러면 이 세상이 지옥 간다는 것은 고정된 제단에 의해서 결정된 사항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지옥 가는 것은 확정된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 확정된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의 제단을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걸 확정됐다, 고정됐다고 생각하지 않고 뭔가 희망과 꿈과 기대를 자꾸 만들어내니까 나중에 낙이 있을 것이라는 비 고정적이니까 여기서 뭐냐 하면 꿈 때문에 불안감이 생기는 거예요. 확정되고 고정적이지 않는 자꾸 뭔가 시도하면 다른 걸로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자체가, 기대 갖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 기대 갖는 순간 내가 불안해서 못 살아요. “나, 이렇게 될 자는 아닌데…….”

그만큼 제단이 고정됐다는 말이 중요한 말이에요. 제단이 고정되면 짝을 이루는 이 세상은 경건치 않은 세상은 고정적으로 멸망하게 돼 있습니다. 한쪽이 고정이 되면 이쪽이 고정이 돼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지요.

그래서 왕비가 불안하니까 그다음에 뭔가 대책이 나오지요. 자기가 감추고 싶은 것을 확실하게 감추기 위해서는 빨리 도둑을 맞았으니까 그 편지를 가져간 장관의 집에서 자기 편지를 찾기 위해서 경찰 복장해서 장관 집에 가서 편지 찾으려했어요. 분명히 장관은 중요한 편지라는 감을 잡았기 때문에 분명히 깊숙한 곳에 했을 거라고 샅샅이 뒤져도 도대체 그 편지를 찾을 수 없어요. 그래서 안 돼서 뒤팡이라는 사설탐정에게 맡겼어요, 왕비가.

사설탐정은 머리가 좋아서 거리에 소동을 피워서 장관이 그걸 보는 사이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편지를 하나 갖고 온 거예요. 그게 진짜에요. 아무렇게나 놓여있다는 말은 숨김의 대상이 안 되는 거예요. 숨김의 안 되는 대상이 안 된다는 사실을 가지고 진짜 숨길 곳을 숨김의 대상이 아닌 것에 숨겨버린 거예요. 어렵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편지의 내용이 뭔지를 몰라요. 모르는데 이 세상의 주인공은 편지다. 인간은 자꾸 편지를,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편지가 위치하는 데 따라서 내가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는 것. 인간은 경건의 세계에서 이 편지가 중요하다고 소문난 여론에 의해서 풍문에 의해서 소문난 것들을 인간들은 자꾸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 편지가 저기 있다고 하면 우르르, 여기 있다 하면 우르르, 여기 명품 떴다 하면 우르르, 저기 고급차 있다고 하면 우르르.

뭔가 뭐가 중요한지를 확정되지 않은 채 거기에 뜨내기처럼 계속해서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 왜 중요하냐? 내 수치심을 커버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제대로 완벽하게 내가 대단한 존재란 걸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찾아 헤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아무도 몰라요. 편지 내용은 아무도 몰라요. 편지 가는 곳에 전부 다 우르르 다 따라가고 있어요.

사설탐정 고용돼 있고, 장관도 거기에 대해서 권세 행사하고 있고, 경찰국장은 거기에 따라서 같이 덩달아 열심히 찾고. 도대체 인간세계는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사셨습니까? 누가 카더라는 이야기는 있는데 그게 뭔지를 본 사람도 없고, 이것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걸 본 사람도 없고요, 그걸 갖고 있는 사람도 없고요, 떠도는 풍문에 의해서 헤매고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세계다? 경건치 않은 세계에요. 하나님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게 떠도는 소문이거든요.

누구 천당 가봤어요? 왜 천국을 가려고 하는가? 성경을 봐야, 봐도 모르지만. 성경에 보면 나의 수치를 드러내놓기 위함이 아니고 감추기 위함으로 천국 가는 거예요. 드러내놓는 게 아니고 감추기 위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어렵다면, 이 한 마디로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왜 망가지려 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복음적으로 이 땅에 왔을 때 경건치 않은 세계에 예수님이 망가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본인은 그걸 믿습니다, 하면서 왜 망가지지 않으려고 합니까? 망가지는 대신 예수님 믿음으로써 안 망가지려고 교회 나오는 거예요. 이건 뭐 십자가 안 믿는 사람이 모독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안다는 자가 십자가를 모독하고 있어요. 왜 망가지지 않으려고 하는가? 이제 그 이유를 본문을 통해서 풀어나가야 되겠지요.

그 이유는 딱 하나 있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의심하되 나는 나에 대해서 의심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슬픔이 있고 고통이 왔을 때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원을 찾든지 기도를 간절히 해요.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기도원에 간다는 것은 남한테는 속여요.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도한다고 속입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뭐냐 하면 나를 의심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도와주는지, 안 주는지 시험하고 의심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구약에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기도하느냐 하면 다른 나라가 와서 망가뜨릴 때 기도해요. 배부를 땐 기도 안 해요. 왜? 자기가 행복하고 넉넉하니까 자기 의심의 위기가 안 찾아오니까 하나님을 도입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뭔가 적들이 오게 되면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안 했어요. 적들이 올 때는 자기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요. 뇌물을 바치든지 곡물을 갖다 바치든지 이렇게 해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하다 안 되면 마지막에 하나님 도와주이소,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재미있는 사실은 뭐냐 하면 누가 주변의 나라를 공격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주변에 셰퍼드 열 몇 마리 풀어놨거든요. 이방민족을 확 풀어놨어요. 그래서 “물어, 물어” 이러면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 시키는 대로 이방민족은 이스라엘을 확 물어버려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뭘 느낍니까? 슬픔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겠지요.

그 고통이 뭐냐? 언약적 고통입니다. 나의 고통이 아니고 언약적 고통, 장차오실 예수님의 고통을 체험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언약이 실시되는 현상, 그 순간이에요. 하나님의 십자가가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나의 고통과 겸비해서 주님의 고통을 아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왜 고통이냐, 왜 아픔이냐? 딴 건 다 의심해도 내 몸이 아프고 내 마음에 불안한 것은 내가 속일 수가 없어요. 내가 유발한 사태가 아니거든요. 내가 만든 사태가 아니에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들의 방법은 뭐냐? 아까 말씀드렸지요. 자기의 고통이 왔으니까 굉장히 나는 나를 의심하지 않아요. 절대자에요. 의심하지 않는데 뭔가 흠집이 났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아픔만큼 보상 기대하는 거예요. 코로나 끝나고 난 뒤에 고급명품 쇼핑이 잘 됐지요. 왜? 보복 여행, 보복 쇼핑이 일어난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해가 쉬울 건데 어떤 미국의 유복한 가정에서 돈이 많은 가정에서 한국 사람인데 캐나다로 미국으로 자기 아들을 유학을 보냈어요. 엄마가 사업을 크게 했어요. 그래서 한 열여섯 살 때 유학을 가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 육칠 년 동안 돈이 안 왔어요. 왜냐하면 유학 보내고 난 뒤에 엄마 사업이 망해버렸어요. 망했으니까 자기는 빚쟁이한테 쫓기지요. 화장실도 없는 단칸방에 살면서 무슨 돈을 보냅니까?

얘는 청소년 때 자살하려했어요. 얘가 자살할 직전에 가만 생각해보니까 “내가 지금 죽어버리면 그동안 몇 년 동안 돈을 보내준 엄마가 얼마나 실망하겠는가? 사는 보람이 없지 않느냐.” 그래서 악착 같이 아르바이트 해서 거기서 버티고, 버티고 하는 거예요. 결국은 지가 버티면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보니까 식당 아르바이트 하는데 카운트테너의 노래가 들려와서, 내가 저 가수처럼 되련다. 해서 팁 받은 걸로 열심히 공부했더니만 나중에 음악대학 지원했는데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오라했어요. 그래서 성공해서 왔는데 엄마를 7년 동안 못 봤으니까 김포공항에서 엄마는 하염없이 그냥 울어요. 네가 이렇게 성공해서 오다니 대회 나가서 상을 타고.

자, 여기서 봅시다. 자식 키운 내가 이렇게 고생한 보람 있다 했거든요. 여기서 여러분 뭘 놓쳤는지 보세요. 사업을 잘했다. 그런데 그다음에 사업이 망했다 했지요. 지금 초점이 뭐냐 하면 내가 사업이 망해서 힘들게 살아도 자식은 번듯하게 잘 자라서 고맙다, 이거잖아요.

여기서 빠트린 게 뭐냐 하면 사업이 잘 되다가 파산함으로써 빚쟁이들이 연쇄적으로 빚쟁이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 마음의 고통을 피해를 입었는지 여기 이 이야기에 등장합니까, 등장하지 않습니까? 다 빠졌지요. 세상은 그런 거예요. 지 고생한 것, 지 성공한 것, 어려운 가운데서 극복한 것 그런 이야기만 하지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피해본 이야기는 완전히 다 날아가 버려요. 방금 한 이야기가 누구냐 하면 카운트테너의 이동규란 사람의 이야기에요. 잘 모르지요. 찾아보면 나와요. 비슷한 이야기를 또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머리 부분으로 국밥 만드는 것 하는데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회사는 네 시간 동안 고지 않습니다. 열두 시간 동안 고지 않습니다. 우리는 48시간 고아서, 도가니탕이에요. 우리는 48시간 고아서 도가니탕을 만들어낸다 했어요. 자, 여러분 인간이 하는 일이 이거에요. 48시간 고았으니까 이거는 괜찮은 품질 좋은 도가니탕이 되지요.

이것에 대해서 자기에 대해서 의심합니까, 의심하지 않습니까? 자기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지요. 이런 자기 PR, 자기를 의심치 않는 세계를 무슨 세계라고요? 경건치 않은 세계, 다른 말로 불의한 자가 되는. 이 사람 이거 48시간 고아서 망하려고 하는 것 아니잖아요. 어쨌든 간에 내가 안 망하는 쪽이 어느 쪽인지 탐구하고 연구하는 게 경건치 않은 세계에요.

자, 그러면 여기에 43편에 우리가 봐야 될 것은 1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 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 라 했으니까 경건치 아니한 나라를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그룹으로. 그룹 하면 집단, 단체, 모임 이렇게 되겠지요. 경건치 않은 그룹에서 조직체에서 조직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서 불의가 나오는 겁니다. 이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나라한테 최종적으로 망했지요? 남쪽, 북쪽인데 남쪽 나라가 마지막 망하는데 남쪽 나가가 어느 나라한테 망했습니까? 바벨론 나라한테 망했어요. 저는 빨리 묻고 빨리 답합니다. 여러분들이 또 모른다는 수치를……. 바벨론 나라가 믿던 신이 마르둑 신이에요. 마르둑 신의 신전을 유적지에서 해서 삼차원으로 그린 동영상을 보게 되면 마르둑 신의 신전의 특징은 안에 침대가 있고, 살림집으로 지어놨어요. 그리고 거기에 경건한 사람들이 마르둑 신의 사자들이 아침마다 뭘 하느냐? 싱싱한 과일을 마르둑 신 부엌에다 갖다 바칩니다. 그리고 처녀로 해서 거기서 살림 차리도록 해줘요.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 했어요? 이스라엘은 어느 나라한테 망했다고요? 바벨론에게 망했어요. 그런데 바벨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마르둑 신이 여호와 신을 이겼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신과 신 사이에 어느 것이 진짜 신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누가 힘세서 이기느냐 로 결정이 났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뭐냐, 예수님이 뭐냐? 그런 것을 의심하지 않으려면 내가 원하는 힘이 되는 것을 주게 되면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믿지 말라고 해도 믿어준다는 거예요. 이게 신이 뭐냐, 경건치 않은 세상에서.

시편 43편에서 지금 그것을 신앙인은 그걸 불의하다고 생각하고요 그걸 슬프다고 이야기해요.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자기중심입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인데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나한테 잘해주는 데 그게 왜 슬퍼요? 자 봅시다. 자기중심이죠. 그러면 그다음에 나는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지요. 그러면 내가 나를 의심하지 않으니까 나는 나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겠지요. 그죠? 나는 나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누굴 믿느냐? 하나님을 믿잖아요. 하나님 믿고 예수 믿잖아요. 그 하나님, 그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이라고 내가 의심하지 않는 거예요. 이게 바로 불의한 자에요. 이게 불의한 자라고요. 지금 사달이 어디서부터 사달 났느냐 하면 왜 나는 나를 의심 안 하고 있느냐 그게 사달이거든요.

왜 나를 진짜 하나님 앞에 내가 망해버려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안 받아들여요, 왜 수용을 못합니까? 왜 수용하면 안 되지요? 왜 나는 아프면 안 되고 건강해야 되고, 나는 왜 망하면 안 되고, 그런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뭡니까?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에 대해서 몰라요. 그 이유가 바로 그룹, 이 세상 자체가 경건치 않은 세계, 지옥이죠.
지옥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의 파생물로서 이 땅에 출생한 겁니다. 지옥 사람으로 태어난 거예요. 내가 맨날 노래 부르는 것 있잖아요. 지옥에서 태어나서 지옥에 누워~ 그냥 지옥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걸 성경에서 육이라 하지요. 그냥 지옥에서 태어난 거예요. 지옥에서 태어나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어떻다가 아니라 네가 속해 있는 나라가 왜 지옥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평생을 살게 만들어요.

평생을 살게 만들어서 우리가 마주하는 우리가 접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 그 티를 내게 만들었어요. 우리 속에 있는 관심사.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수치스러움을 더 깊숙이 감추기 위해서 보상으로 인하여 내가 힘들고 어려운 것에 대해서 자꾸 보상을 원하는 거예요.

다른 예를 들면 사람이 집에서 화투를 친다. 십 원짜리, 그걸 도박이라 하지 않지요. 화투를 치는데 집에서 남편과 치다가 슬슬 동네 노인정에 가서 친다. 백 원짜리. 갑자기 확 올랐습니다. 돈 내기 해야 재미가 있지 내기 안 하면 재미없어. 그래서 발전해서 산속에 텐트 치고 했다. 이천만 원짜리.

자, 사람은 처음에는 화투를 갖고 놀지요. 그런데 조금 보면 화투가 나를 갖고 놀아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은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환경에 주눅 드는 식으로 기거에 환경이 요구하는 쪽으로 변신되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욕망은 힘든 인생에 보상을 요구하기 때문에. 힘든 인생이란 고통의 세계잖아요. 이 세상 자체가 고통의 세계다.

고통의 세계니까 여기서 보상을 기대하면서 뭘 하느냐? 마르둑 신, 신 같은 것, 나한테 잘해주면 나는 신에게 잘할 용의가 돼 있다. 내가 원하는 걸 주면 하나님을 섭섭지 않게 해주겠다는 마음이 우리 속에 있어요.

그런데 시편 43편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 자체를 경건치 않은 세계라고 규정을 해버려요. 이 신앙인은. 규정을 하면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소속이 어딘지 보는 거예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이런 내용이 참 중요해요. 경건치 않은 세계에 여기에 어떤 고정된 위치를 갖고 있다, 자리를 갖고 있다 했지요.

이걸 무슨 자리라 했습니까? 이게 무슨 자리? 여기서 고정된 제단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신앙인은 두 개의 세계를 알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두 종류의 세계가 내 안에 구성돼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누구 이야기에요? 예수님 이야기에요.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언약적으로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 안에 있으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어요. 그러면 어디에? 세상 안에 있는 거예요.

세상 안에 있는 것과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 예수님 자기 안에 둘로 구성돼 있어요. 육의 요소를 갖고 있어야 주님이 지옥을 만들 자격이 있고요, 영의 요소가 있어야 주님이 천국을 만들 자격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옥의 증거자도 되고 동시에 천국의 증거자가 되는 겁니다. 두 개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가 되는 거예요. 그 예수님 이야기를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 시편 43편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봐야 된다. 그건 인간에겐 있을 수 없어요. 인간은 자기를 부정할 수 없어요. 자기를 부정하는 괜찮은 자기를 또다시 긍정하기 때문에 인간은 있을 수 없어요. 성경을 봐야 될 이유는, 내가 이 세상이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돼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게. 세상이 끝나고 시작대로 가는 이것이 내가 거기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는 거예요. 다만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그건 이 세상의 주관자에 의해서 그냥 주어질 뿐이에요. 내 인생을 내가 결정 안 해도 되는 거예요.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좋은 결정이 온다고 용쓰지 마세요. 그 자체가 아직도 자기가 주인공이에요. 아까 했잖아요. 내용 없는 편지가 주인공이고 날아다니는 편지를 쫓아다니는 나는 하나의 종이, 노예가 된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것에 따라가는 것, 경건치 않은 세계가 지옥이라면 인간은 지가 주인공이 아니고 지옥 자체가 주인공이에요, 이 땅에. 이 세상의 주인공은 지옥이에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니까요. 경건치 않은 어떤 불의한 게 있어요. 그 불의한 것은 이 세상에 진정한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이 등장해야 맞은편에서 와요.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지 않으면 뱀의 후손은 자기 정체를 노출하지 않습니다. 뱀은 자기의 정체를 노출하지 않아요.

이미 우리는 시편 43편 세계 속에서 빼도 박도 못하고 있습니다. 허우적댄다고 해결책 나오는 것 없습니다. 우리 현재 살아온 자체가 해결책이 되게 하세요. 그거는 주께서 되게 하십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하면 주께서 네가 주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렇다 하고, 지옥 갈 사람한테는 지옥 가려고 고생한 거예요. 똑같은 고생을 해도 평가가 이거는 오야 마음대로 에요. 우리 주님 마음대로 에요.

아버지 집에 아들 둘이 있는데 나중 되면 두 아들 같이 살아요. 한쪽은 천국백성으로 살고 하는 지옥백성으로 사는 거예요. 탕자가 돌아왔을 때는 자기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기쁨을 갖고 돌아온 거죠. 왜? 집을 나가봤으니까. 물론 여러분들이 가출하기를 추천을 해드리겠습니다만 가출하는 것도 주님의 허락이 있어야 가출이 되지요. 그렇지 않고 그냥 돌아다니는 것은 가출해봐야 지옥에서 떠돌아다니는 거예요.

인간의 삶이란 기존에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무한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고 바꿔보고, 바꿔보는데 계속 있는 것을 다른 있는 것으로 교체하면서 세월 다 보내고 있어요. “사업 망했지만 내 아들이 잘 됐잖아.” 그걸로 교체해보는 거예요. 그래서 뭐하려고? 힘든 인생에 보상 받아보려고. 그게 보상이 될 거라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경건치 않은 것으로 경건치 않은 것을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중요하니까. 주인공이 자기에요. 나 말고 다른 분이 이 세상에 주인공이란 것을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습니다.

 

10분 쉬면서 조금이라고 생각합시다.

 

 

20230612b 부산강의 : [시편]59(43:2)-경악스러운 사태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왜 나는 돈이 없는가?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돼요. 왜 나는 고통을 느끼는가? 이렇게 질문을 바꿀 수 있어야 이게 신앙인입니다. 정답은 나와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과거가 아니고 지금 현실에 작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내 고통은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고통을 평소에 돈으로 해결해 왔었다는 것이 자기 평소의 일상이었다는 것을 고만 털어놓은 거예요. 고통 하면 돈 있으면 해결되고, 또 고통 하면 돈 있으면 해결되고. 지금 내가 돈 없어 초라하지만 부자 되면 이 초라함을 충분히 보상하고 덮을 수 있는 사고방식이 그것밖에 없었던 거예요. 내 생각은 나를 떠난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나의 고통은 예수님이라는, 예수님은 남이잖아요. 내게 일어난 일이 남에게 벌써 확정된 고정된 일의 결과물로 연결돼 있다는 이거는 기절초풍할 놀라운 새로운 생각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시편 43편 2절에 나옵니다. 다 같이 읽어볼까요.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그다음에 뭡니까?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거 어디 나오는 대목이에요? 바로 마태복음 27장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46절) 그 대목이잖아요. 하나님하고는 모르는 사이가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은 자에요.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관계가 끊어질 리는 없다고 분명히 그렇게 알고 왔는데 끊어져버린 거예요.

이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경악스러운 사태’ 하나님이 이 경건치 않은 나라에 보내신 유일하게 경건한 분이 이 땅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이게 가장 경악스러운 사태에요. 이로 인하여 이 세상이 경건치 않은 나라에서 어떤 누구도 아버지로 가는 길은 드디어 끊어졌습니다. 없어요. 백날 신앙생활 해도 천국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왜? 이 세상은 통째로 끊어졌으니까요.

높은 크레인에다가 개 세 마리 있는 개집을 달아놓고 그 밧줄을 끊어보세요. 개 세 마리가 그대로 떨어지지요. 그 개집 안에 있는 세 마리 어느 누구도 착한 개, 말썽쟁이 개, 훌륭한 개 있어도 끊어졌다는 점에서는 무차별적이에요. 차이가 없습니다. 몽땅 다 인격이라든지 품위, 그런 게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그게 무슨 사태? 경악스러운 사태에요.

주님마저 아버지에게서 끊어진 세상 속에서 우리는 태어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믿는다고 해서 안 끊어져요? 세상 자체가 끊어졌는데 내가 예수 믿는다는 이 믿음을 주께서 끊어버렸는데 우리가 믿는다 하지만 주께서 칼로 끊어버렸는데 이게 어떻게 우리한테 경악스런 사태가 아니고 뭐겠어요? 끝난 거예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분명히 씁니다. 아무도, nobody.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구원될 자는 아무도 없다. 이걸 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구원될 개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걸 더하면 나는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분명히 해야 돼요. 나는 구원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나로부터 출발하는 항상 어디로 꼴아 박느냐? 지옥으로 가게 돼요.

그러면 주께서 예수님께서 평소에 하신 말씀은 뭐냐 하면 이 나를 부인하라 해요. 나를 부인해야 돼요. 나의 구원을 부인해야 돼요. 이건 뭐 부인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이미 끊어진 상태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부인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요, 부인 안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요.

나 자체를 재조명해야 되고 다시 한 번 말씀을 통해서 파악을 해야 돼요. 왜 이게 구원대상이 아닌지를. 방법은 예수님과 비교하면 되지요. 우리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이름이 있지요. 예수님에게는 뭐가 있습니까? 이름이 있어요. 주께서는 이름을 통해서 존재를 다루십니다. 야곱 구원받습니까?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구원받습니까? 구원받습니다.

자, 이스라엘 이름 어디서 나왔어요? 야곱을 지워야 나타난 이름이 이스라엘이에요. 야곱을 지워야. 야곱이란 이름은 누가 지었느냐? 출생할 때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에요. 육의 대상을 보고 이름을 지어준 그 이름, 육이 지어준 이름은 지워지고 하나님이 지어준, 육을 지워버리는 그 지움의 활동 자체에서 결과물로 나오는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란 이름이에요.

누가 그 일을 하셨는가? 새로운 이름을 가진 이스라엘이 야곱에게 그 일을 하셨지요. 그 이스라엘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이스라엘이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일은 우리가 요청하거나 우리가 기대하거나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요청해서 기대해서 주께서 일한 게 아니고 우리가 요청, 기대하기 전에 이미 애초부터 주께서 벌이신 일이에요. 예수님의 자기활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자기활동에서 비로소 없던 구원이 발생되는 거예요. 생성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활동에서. 그때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에요. 이름이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에요. 여기서 머리 좋은 사람은 생각하기를 주의 이름이 하는 일이 뭐라고요? 내 이름을 지우는 거예요.

내 이름을 어디서 나왔다고요? 부모님이 지어주고 주위에서 불러주는 이름이죠. 그 이름을 지운다는 말은 그냥 지우지 않지요. 주님의 활동 중에 내 이름을 지워주는 활동이 들어있기 때문에 내 이름이 지워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밥을 먹지 말라는 금식하란 말이 아니고 밥을 먹되 누구 이름으로 먹어라? 주의 이름으로 먹으면 돼요.

내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도 속물이에요. 어제 주일 낮 설교했지만. 내가 나한테 지시해서 하는 일은 이게 주의 일이라 할지라도 그건 더러운 일이 돼요. 속물이에요. 왜? 내 자존심과 명예와 연관돼 있기 때문에. 지워져야 될 내 이름이 어데 건방지게 주의 일하시는 현장에 거기다가 집어넣습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일이지 사나 죽은 것이 내 일이 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아까 경악스러운 사태를 일으켜요, 하나님께서. 그 경악스러운 사태를 오늘 시편 43편에서 신앙인은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이여, 저 알잖아요. 그런데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정답은 우리가 알고 있어요. 왜 잘 아는 사이고 친밀한 사이고 사랑하는 사인데 왜 버리십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버린 거예요. 택한 자기 때문에 버리는 거예요.

하나의 세계에 있는 게 아니고 두 개의 세계를 겹쳐서 보여주는 일을 하는 자에게 주께서는 버리고 되찾는 창세전에 있었던 아버지와의 계약을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버릴 때 버리고 찾을 때 찾으시는 그 역할을 위해서 과정을 드러내기 위해서 신앙인은 일찍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버림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탕자 이야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왜 아버지가 탕자가 집 나간다 할 때 돈 없어 자립 못한다 할 때 왜 아버지의 유산을 그냥 줘버립니까? 아들이 생각하는 아버지 유산은 돈이었어요. 아까 돈 이야기했지요. 돈은 뭐라고요? 왜 돈이 없느냐는 질문을 하느냐고요? 평소에 경건치 않은 세계에서 모든 문제 해결을 뭐로 해결한다? 돈, 자본으로 해결하는 거예요.

돈이 있을 때 행복이고 기쁨이고. 돈이 있다는 말은 더 이상 나를 안 잊어버려도 된다. 돈이 있으면 굳이 자기 부인을 할 이유가 없게 된다. 돈 있는데 자기를 부인해요? 돈 행사를 해야지. 돈이란 이 세상에서 힘이잖아요. 힘이 있는데 왜 자기를 부인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에게 하시는 일은 힘을 빼는 일을 해요. 힘을 뺀다는 건 돈을 없앤다는 말이에요. 돈 없으면 큰일 나지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I am noting이라고 하지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으로 계속 주께서 이런 존재가 되기 위해서 계속해서 일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어제 낮 설교에서는 뭐냐 하면 말씀으로 침을 놔서 우리 자아의 테두리가 있어요. 안에 휑하니 내용물이 하나도 없게 만드는 일을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나는 있는데 I am noting, 그러니까 나는 있어요. 나는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 나.

불교에서는 그 나마저 없애려고 아주 발광하는 데 그건 소용없고요. 나는 분명히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 나. 복음에서는 나가 없다가 아니라 내가 죄인이라고 이야기하지요. 내가 죄인입니다. 주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에요. 특히 부산강의에선 이 이야기를 지금 생각해도 식상하게 많이 한 것 같아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돈이 있으면 굳이 자기를 부인할 이유가 없게 되지요.

그럼 여기서 이 문장을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나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기 위해서 뭘 한다? 돈을 벌겠다는 뜻이에요. 내가 뭐가 못 나서 자기를 부인해? 돈 많이 벌어서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지 않으냐? 지금 이런 의식으로 가득 차있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자기가 선교하고 자기 몸을 희생물로 드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그게 무슨 자기 부인입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 부인은 자기 마누라도 부인 아니라는.

이 세상은 어떤 것도 내 것을, 나를 안 받는다는 게 자기 부인이에요. 하나님이 일체 나 자체를 안 받아요. 나한테는 구원이 없어요. 구원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왜? 나는 내 이름이 있잖아요. 아담의 계통이죠. 아담의 계통은 안 받습니다. 안 받는 방법은 뭐냐? 안 받으면서 하늘나라 백성을 만드는 방법은 아담 계통을 죽이는 방법 밖에 없지요.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라, 그 뒤에 뭘 지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게 그런 게 있었나, 할 정도지요. 그것으로 안 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로 끝났습니까? 또 있지요. 뒤에 뭐 있습니까? 나를 따르라. 예수님을 따라오란 말이죠. 예수님을 따라오라,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께서 그 말씀하기 전에 자기를 따르는 자가 있다고 여긴 사람이 열두 제자, 예수님이 선택해서 따르게 했거든요.

예수님이 선택해서 따른 자가 있었는데 그 제자가 누구냐 하면 베드로거든요.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사탄아 물러가라 했어요. 물러가라.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베드로+11명, 베드로 밴드지요. 물러가라 했습니다. 그 뒤에 뭐냐? 따라오라 했어요. 이것이 경악스런 사태가 벌어진 거예요. 다시 말해서 천국은, 천국에 네가 따라와야 될 이유가 뭐냐? 천국은 아무도 못 간다는 사실을 네가 알리기 위해서 따라와야 되는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천국은 가지 못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거예요. 아무도 가지 못한다는 것,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이 제자들 그 뒤에 예수님 십자가 질 때 어떻게 됐습니까? 주님이 따라오라 했지만 그들이 주님을 버리고, 우리가 이야기한 게 아니고 본인들이 이야기한 거예요. 내가 주를 버리고 떠났나이다. 본인들 입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자기들이 예수님을 버린 거예요. 자기가 자살한 게 아니고, 자살은 가룟 유다가 자살했고요. 제자들은 자살한 게 아니고 가룟 유다보고 무슨 극단적인 저런 짓을 하나. 우린 그냥 떠나면 되는데 너는 왜 죽느냐. 가룟 유다가 좀 별나다, 오지랖 넓다. 이런 생각했지요.

자기는 예수님과 같이 안 하면 그만이잖아요. 그 당시 세상의 그룹이 무서우니까. 아까 집단 그룹 했지요. 경건치 않은 세계가 무서운 거예요. 왜? 그쪽 출신이기 때문에. 본인들이 그쪽 출신이잖아요. 베드로는 어부 출신이다 맞는 말이지만, 마태는 세리 출신이다 맞는 말이지만 더 포괄적으로 이야기해서 경건치 않는 자의 출신이에요. 불의한 자들의 출신이에요. 그래서 천국 가면 누가 높으냐? 그런 이야기를 예수님 앞에서 거침없이 해댔던 겁니다.

그들은 결국 물러가라는 말씀대로 떠나갔었어요. 떠나갔는데 그들이 결국은 다시 예수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바로 뭐 되기 위해서? 증거자 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 증거자는 증거해야 될 내용이 주인공이 되고 증거자는 주인공에서 빠지게 돼 있어요.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다음에 뭡니까? “내 증인”이죠.

여기에 갑자기 우리는 증인으로 밀리면서 ‘나’가 있던 그 자리에 누가 들어오느냐? 예수님이 들어와요. 예수님의 증인으로 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증인으로 들어오면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는 고정된 제단이 되는 겁니다. 나는 어떻게 요사스럽게 아침 다르고 점심 다르고 저녁 다르고 매일같이 우리의 마음은 늘 다릅니다. 우리의 마음이 늘 다른 이유가 있어요. 우리 자신을 좀 알아야 되거든요.

우리 자신은 과거에 매여 삽니다. 이걸 현상학이란 철학자들이 이렇게 설명했어요. 이걸 강남강의도 했지만 아주 오래전에 있던 한 20년 전에 어떤 체험 있잖아요. 우리의 감각, 체험이라 눈, 코, 입, 귀에 들어온 감각, 그 체험이 하루 지나면 체험했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어요. 하루 5밀리, 한 달 지나면 5센티미터, 이 년 지나면 5미터 깊숙이 내려가요. 사라지지 않아요. 내려간다고요. 계속 내려가요.

그러니까 이게 만약에 1975년도라면, 1975년에 다들 존재했지요, 그 정도 나이는 되지요? 지금 2023년도에요. 이 체험들이 날아가지 않았다는 거예요. 어디 가느냐? 깊숙이 찾아낼 수 없는 깊숙한 곳에 있다는 겁니다. 깊숙한 곳에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느 골목에 돌아서다가 75년도의 동창생을 만난다든지 어떤 계기가 돼버리면 갑자기 만났던 그것이 알아봐요. 인간은 과거 속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알아봐요. 그날 밤에 꿈꾸면 동창생 또 튀어나왔어요. 꿈에.

꿈은 과거의 보관소입니다. 창고에요. 온갖 잡동사니 다 들어있어요. 아픈 기억, 즐거웠던 기억 상관없어요. 몽땅 다 모아져있어요. 이게 육의 특징입니다. 인간이 육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인간은 주님의 기억, 뱀의 기능, 주님의 기능에 의해서 인간은 죄의 종이 되어야 될 운명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는 다 모아놔요. 모아놓고 마지막에 주께서 심판하실 때 행위책대로 기억된 사람들은 그들이 기억하지 못한 것까지 기억해서 다 심판해버려요.

그러니까 통통거리는 우리 보관창고 통이 내 마음대로 통을 만드는 게 아니고 주께서 용접 잘해서 절대로 과거의 체험이 새지 않는 완전히 철판으로 만든 통, 가스통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가스통이 또 태어났군요.” 가스통이 또 태어난 거예요. 뭘 수집하기 위해서? 주께서 규정한 네가, 인간의 육 자체가 죄를 계발하라는 기능하는 공장으로서 네가 태어난 거예요.

따라서 그 만든 생산해낸 죄를 모아놓기 위해서 우리는 통통거리는 통, 가스통 같은 우리 인생을 만든 겁니다. 나라는 것은 그냥 붙여놓은 하나의 브랜드고요 딱지에 지나지 않고 나 떼버리면 나 있으나 없으나 이거는 신체, 우리의 기억, 자아의 기억, 이런 것은 세월이 가도 계속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꿈은 깊숙이 수직적으로 꿈속에 나타나잖아요. 그런데 이게 수직적 꿈이고요. 수평적 꿈을 따로 있어요. 수평적 꿈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미래라 합니다. 꿈속에나 나오는 이 기억다발이 지금의 나의 소망이 되는 거예요. 내가 소망이 되는 재료, 근거자료는 뭐냐? 내가 과거에 경험했던 것 가운데서 내가 선악적으로 아팠으니까 보상이 될 만한 것은 내 미래에 좀 등장해주고 출현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예수여. 이래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믿는 마르둑 신이에요. 예수여, 우상입니다. 나의 과거의 나를 지켜주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미래에 내가 원하는 걸 제공해주는 그런 예수, 그런 하나님 외에 인간은 어떤 신을 믿질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죽었다는 것을 경악스럽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내가 나를 보면서 내가 살았다고 여기는 그걸 더 경악스럽게 여겨야 돼요.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살아 있다? 죄가 살아 있었던 거예요. 말씀에 의하면 죄가 살아 있는데 자꾸 우리는 내가 살아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다고 여기면서 자꾸 활동을 하는데 그 활동은 뭐냐? 내가 죄가 아니고 의의 값으로 내 수치를 가려줄만한 걸 달라고 자꾸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그게 자식 잘 되는 거고, 밑에 있는 간판 가져올까요? 열 가지인가 했지요. 자식 잘 되고, 부부간에 갈등 있는 것, 이사 갈 때 뭔가 말썽 없는 것, 시름시름 앓는다, 왜 우리 아들이 취직이 안 될까, 왜 우리 딸은 결혼을 못할까, 그런 것 갖고 와. 우리 2층에서 다 해결해줄 테니까.

보상받기 위해서 계속해서 시간을 때우고 지연해보면서 악착같이 링거 맞아가면서 보약 먹어가면서 요양병원에 기어들어가서라도 나는 내가 한 맺힌 이 나의 고생을 달래줄 수 있는 어떤 새로운 기적을 주신다면 그 신이 어떤 신이든지 나는 믿어줄 용의가 돼 있습니다. 나중에 그것마저 안 되면 열심히 교회 나가 선교했기 때문에 천국이나 보내주세요. 천국이 지 보상하는 겁니까? 천국 가도 자기 부인이 안 된 상태에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자기 부인이 안 됐는데 무슨 천국 가요.

내 인생 꼬라지 보니까 참 한심스럽지만 내 아들, 손자만큼은 내 손으로 잘 키웠다는 어떤 보상? 그 손자가 날 이용하는 것도 모르고 손자 말대로 했더니만 나중에 손자 커서 하는 말이, “그때 할머니가 왜 남한테 날 안 나무랐느냐?” 밥 먹여줘, 다 키워줬는데 돌아온 것은 뭐냐 하면 원망 밖에 안 돌아와요. “내가 할머니 잘못 만나서 이 모양, 이 꼴 됐다고. 이 똑똑한 머리가지고 좋은 할머니 만났으면 뭐라고 될 건데…….” 뭐라도 뭐가 되겠어요? 마귀 종 되지 뭐가 되겠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경악스런 사태를 일으켜서 인간을 버려버립니다. 자, 인간을 버렸는데 어떻게 해서 희한한 현상이 시편 43편 끝부분에 왜 시인은 찬송합니까? 왜 그것도 악기를 동원해서 찬송하며 수금으로 찬송하며 하나님께 기쁨의 찬송을 드리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바로 이거에요. 하나님께서 천국에 나를 오는 것을 막아주셨기 때문에 찬양! 나 같은 것 천국 가면 나는 좋지만 천국이 배려버립니다.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출발점이 자기부터 아니라 천국 생각부터 먼저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바로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가 하는 고백이죠.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개를 못 들지요. 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뭐라고 하느냐? “나는 개입니다. 주여, 제발 저를 개로 취급해주시옵소서.” 간절히 부탁하고 있지요. 나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말고 개로 취급해서 하늘나라 식구들 식사하는 데 먹고 굴러가고 떨어지는 떡 조각 있지 않습니까. 그때는 식구도 아닌데 떡 쪼가리가 식구의 범주를 벗어나서 떨어질 때 그걸 좋다고 누가 주어먹겠어요? 개가 주어먹는 거예요.

“개라도 주의 주변을 안 떠나게 해주시면 더는 소원이 없나이다.” 그거에요. “저를 개라고 목줄해도 좋은데 주님 곁에 머물기만 해도 저는 어떤 소원이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 인식의 발상은 바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인식의 발상을 가리고 있는 어떤 나를 하나님께서 죽여주셔야 가능해요. 내가 살아 있는 한 이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방법은 뭐냐? 칼 들고 오늘밤이나 내일 죽이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짓말하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짓말만 하느냐? 우리 안에 악마가 거짓말하는 영이 선점하고 있기 때문에. 거짓말은 거짓말로 대응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해서 주님이 천국 오는 것은 내가 오는 것을 주님 쪽에서 막습니다. 내가 예수 안 믿음으로서 구원 못 받는 게 아니라 주께서 막아버려요.

나를 막고 악령이 있던 자리 있잖아요. 악령의 자리를 성령의 자리가 찾아와요. 찾아올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영, 예수님은 이미 악마를 이겼기 때문에 마음 놓고 담 타넘고 악령에 사로잡힌 그 가재도구를 자기가 훔쳐오는 그게 하나님의 의로움이에요. 도둑질이 의로움이라고, 마태복음 12장에. 왜? 우리가 사로잡혀 있거든요. 우리가 자율적인 내가 주께 믿음 있습니다, 이게 아니라 악마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렇다면

악령은 우리 인간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진리를 이야기해요. 거짓이 아니고 진리를 이야기해요. 

진리로 이야기하는데 놀랍게도 우리가 납득을 해요. 이게 진리라고. 그래서 한 통속이에요. 마귀와 우리가 한 통속이에요.

그런데 악령의 진리가 근거가 뭐냐 하면 선악체계에서 선악 지식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 다 우리한텐 진리로 도달됩니다.
“나쁘게 살면 어디 가요, 아동들?” “지옥 가요.” “착하게 살면 어디 가요?” “천국 가요.” 이걸 했던 자들이 뭐냐? 악마의 바로 밑의 하수인 바리새인들이 했던 거예요. “여호와는 어떤 하나님이에요?” “참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다른 신은?” “다 우상이에요.” 이걸 했던 사람이 누구냐?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 사울이 이것에 대해서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를 믿기 때문에 누굴 죽여야 됐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사울 입장에서 스데반 집사 죽을 때 주체자로 등장했던 사울이란 사람이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그는 진실을 행합니까, 거짓을 행합니까? 그때 그 마음은? 진실이었지요. 진실 하나에 자기의 명예고 뭐고 순교할 각오를 다 바치는 거예요. 그 진실에. 참 경악스러운 사태입니다. 이건 뭐 예수 믿는 사람이 사울 설득한다고 사울이 예수 믿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세상은 개판이면서도 왜 개판인지 몰라요. 개라 하면 욕하는 줄 알고 있어요.
내 성경지식으로 납득이 되는 복음은 거짓입니다. 앞에 출발점에 내가 들어가니까. 내 성경지식으로 납득이 되는 복음은 거짓이에요. 복음은 성경지식을 많이 확보한 나를 막아버린다. 그러니까 이 말을 왜 하냐 하면 성령에 사로잡힌 자와 악령에 사로잡힌 자를 구분하는 방법은 성령이 오게 되면 무엇을 문제 삼느냐 하면 네가 바로 예수님을 불필요하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그룹, 그 무리의 일원이라는 것을 우리한테 고발하지요.

요한복음 16장에 나온 말씀이지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는 것이 성령의 객관적 사역입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세 가지 나왔지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그다음에 심판에 대해서 그 당시 모든 사람 바리새인부터 모든 인간들은 여기에 대해서 죄와 의와 심판, 이 기준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어요. 그게 알고 있는 게 뭐냐 하면 선악에 의해서 알고 있어요. 선이 무엇이고 악이 뭐다는 걸 인간들은 알고 있어요.

놀라운 사실은 그 내용은 몰라요. 내용은 모르는데 선과 악은 반대편에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무엇이 선이냐? 그건 몰라요. 선이 뭔지 나한테 묻지 말라는 이유가 선과 악을 아는 자체가 자기는 선이라고 여기고, 이것에 의하면 나는 죽어선 안 된다, 죽으면 아까운 존재라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나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선악을 해서 제대로 실천을 하느냐, 마느냐 그 문제 떠나서 아는 것 자체가 죽어 마땅한 지옥 가는 마땅한 대상이 되는 겁니다. 보통 문제 아니지요.

어제 낮에도 이야기하지만 교회 다니고 지옥 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교회 안 다니고 지옥 가고. 어차피 도착지점은 중간에 어떻게 돌아가나, 휴게소 들려가나 관계없어요. 그냥 지옥 가는 건 지옥 가는 거예요. 나의 믿음은 하자가 없다. 나의 신앙도 하자가 없었다. 나는 나의 겸손과 나의 낮춤에 대해선 하자가 없었다. 그건 잘못이 아니었다. 계속 뭐하냐 하면 평가하지요.

그래서 제가 어제 낮 설교에 했잖아요. 평가하고 그다음에 측정하고, 그다음에 관찰하고, 그다음에 계산/셈하는 것, 자기를 평가하고, 자기를 측정하고, 자기를 관찰하고, 자기를 계산하고 이게 왜냐하면 자기한테 이익이 된다는 거예요. 그럼 묻지요. 뭐가 이익이 됩니까, 물으면 나에게 힘이 된다는 거예요. 뭐가 힘입니까, 물으면 나를 살려주기 때문에 나를 여기도 살고 죽어서도 천국에 살게 하니까 힘이 된다는 거예요. 왜 삽니까, 물으면 입을 그다음부터는 대화가 안 되지요.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왜 삽니까, 라는 질문과 왜 삽니까, 라는 질문을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왜 삽니까?” “악착같이 살아야지요.” 분노가 나오지요. “왜 삽니까?” “글쎄요. 주의 은혜인 모양입니다.” 똑같은 질문인데 하나는 찬양과 감사가 나오고, 한쪽은 분노가 나온은 거예요. “인간아, 인간아 와 사노?” 듣는 쪽이, “그래요. 나도 너무 기뻐 왜 사는지 너무 고마워 미치겠어요.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증거가 범사에 감사한다는 거, 기뻐한다는 거.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강조했는지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지금 이성적으로 어느 것이 정답이냐, 사도 바울의 신학이 뭐냐? 이게 문제가 아니에요. 평소에 범사에 내가 감사하는 것도 안 돼요. 이래야 돼요. 왜 감사가 되지? 오히려 본인이 본인에게 일어난 희한한 현상에 대해서 이거는 내가 홀로 있지 않기에 벌어진 상황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내가 홀로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평가할 이유 없고요. 내가 평가한다는 건 인정 안 하니까 내 이름을 지우니까. 내가 관찰하는 것 다 엉터리고요. 그다음에 내가 측정하는 것, 내가 한 달 수입 얼마고 지난 달 얼마냐, 측정하는 측량하는 그것 무슨 소용 있어요?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맨날 측량했잖아요. 누가복음 12장에서 부자가 창고에 눈금이 올라가니까 신난 거예요. 자기가 자기보고 위로한 거예요. “걱정하지 마. 평생 먹고 산다.” 그날 밤에 오전 2시 46분에 죽었어요. 그럴 때 그 싸우는 것이 네가 싸우는 그 싸움과 무슨 관계있는가?

방금 이야기한 것이 어렵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사물체를 다뤄요. 왜냐하면 사물체가 만만하기 때문에 다루거든요. 개 키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개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만만하기 때문에 키우는 거예요. 개는 자기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개나 고양이 키우는 겁니다.

그런데 사물체를 키움으로서 인간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인간이 사물에 불과하다는 걸 드러내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의 인공적인 기능이에요. 하나님이 창조를 했지만 창조주를 잊어버리고 창조주를 빼버리는 거예요. 어제 오후 설교 때 기도가 그거였던 거예요. 왜 자꾸 창조주를 빼느냐 말이죠. 자꾸 빼고 그 자리에 내가 뭘 할까를 집어넣어요. 본인이 본인을 만든 창조주라는 행세를 하는 것, 그것 마귀가 그 짓하지 누가 했겠어요?

그래서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는, 성도는 자기 안에서 마귀가 무슨 소리하는지 계속 듣게 되는 거고, 불신자는 이게 마귀가 없고 내가 한 거라고 정당화하는 그 차이점이에요. 주변이 조용할 때 비로소 내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주변이 고요할 때. 주의 성경말씀은 우리를 주변을 지워버려요. 네가 속해 있는 곳이 경건치 않은 세계에요. 오늘 말씀대로 경건치 않은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 아주 개 무시해버리죠. “내 꿈을 펼치고 있습니다, 주님이여.” 지가 주님 가르쳐. “내 희망이 아직 남아있는 곳입니다, 주여.” 이런 식으로. 아직 변화의 여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이곳에 십자가 사건을 일으킨 이상 변화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게 아까 이야기한 고정적인, 제단은 고정된 거예요. 그 제단에 누가 기다립니까? 나를 이 땅에서 잘라내 버린 분이 기다리죠.

잘라내실 때 주께서 나기 때문에 잘라내고 새로운 주님의 하늘나라까지 이 세상과 이중으로 알고 있는 그 사람을 주께서는 성령으로 자기 나라에다가 집어넣어버리죠.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을 집어넣죠. 아브람은 죽이고 아브라함을 살리죠.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야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바로 그 하나님이 이 땅에 말씀으로 오신 분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할 때 이거는 확정되고 고정되고 더 이상 변동의 여지는 없습니다. 왜 예수님으로 모든 것이 완료가 됐는지 알리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통해서 변화를 자꾸 유발시키지요. 마귀가 뿜뿜 마귀 생각이 막 튀어나오게 하고요. 그걸 전에 노폐물이라고 했지요. 노폐물의 특징이 있어요. 노폐물의 특징은 무차별적이다. 구분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목욕탕 가면 옷 벗고 나면 똑같지요. 기침할 때 똑같이 기침하고 하지요. 처음부터 인간은 원래 차이가 없어요. 다 육이고 육이에요. 왜? 육에서 낫기 때문에 똑같은 육이 번진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이상하게 자꾸 선악지식을 강조하는 거예요. 선악지식으로 네가 선악에 대해서 많이 아니까 너는 훌륭한 사람이고 천국 가고, 선악에 대해서 모호한 인간은 지옥 간다. 그런 식으로 자꾸 강조하는 데 사람이 선악에 대해서 예리해지는 것은 이미 배부를 만큼 잘 먹고 잘 산다. 여유가 좋다. 이런 뜻이거든요. 형편이 좀 숨쉴만하다 이런 뜻이에요, 이게.

일일 노동자가 철학을 생각합니까? 책 볼 시간이 언제 있어요? 바쁘고 힘들면 인간은 자기 생각만 합니다. 여유가 있으면 신을 생각해도 신을 생각하나 예수 생각해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소위 예수님 당시에 계급이 일곱 단계 있었거든요. 바리새인들이 일곱 단계를 정해놨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일곱 단계를 그대로 이용해요. 밑에서부터 올렸죠.

밑에 있는 쪽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I am nothing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이거는 그냥 예수만 찾아요. 물론 예수 찾는다고 구원받는 건 아니지만 단지 이용하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이용한 거예요. 위에서는 뭐냐 하면 이거는 여호와만 찾아요. 이 말은 그들이 아는 여호와와 예수님하고 반대되는 모습으로 오셨다는 거예요. 단절이죠. 황당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율법도 모르고 귀신 들린 자라고 한 거예요. 귀신 들린 입장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타해서 죽여 버릴 때에, 채찍 맞아 죽일 때에 그들의 자리는 정당화되는 겁니다. 바로 이 구조 전체를 오늘날 우리 안에 다 들어있어요. 왜? 마귀가 만들었기 때문에 다 들어있어요. 우리도 밑에서부터 저 높은 곳을 위를 바리새인 쪽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매일 삶이 그거에요.

그러나 이것이 한가하고 여유 있을 때는 이게 되는데 바쁘고 어떻게 갑자기 어떤 사건이 벌어질 때 교통사고 나 버리면 다시 주르르 꼴아 박아요. 꼴아 박아서 뭐 여유 있을 때는 사채업자들이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다가 집안에 사고 나면 사채업자고 뭐고 간에 제발 오백만 빌려주시면, 사채업자 없으면 이 세상에 구세주가 없다, 이런 식으로 막 나오는 거예요. 간이라도 떼어줄 테니 당장 오백만 있으면. 그걸 보고 여유 있는 사람은 비웃지요. 그 독한 인간과 거래하다니, 이래 되지요.

결국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매순간 어떤 순간도 우리가 내가 나서서 주의 일, 성령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계기는 전혀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데 이끄셨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I am nothing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주실 때 성령께서 하신 거예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린 맨날 선악으로 하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제까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오늘 되면 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뭐 된 줄 알고 있어요. 또 오늘치의 사태가 또 기다립니다. 숙제가 또 있어요. 물론 내 숙제가 아니고 주님 숙제입니다. 숙제가 뭐냐? 시편 43편처럼 되기, 버림받았다가 되찾는 기쁨으로 회복, 그걸 다시 발생하기 되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십자가는 고정돼 있다는 것을 기쁨의 근거가 되기,

나의 요동침과 나의 맨날 흔들리는 감정은 그거는 십자가의 고정성 앞에 그거는 아무것도 아닌 의미 없는 거라는 것을 알게 되기,

마귀한테 맨날 휩쓸리는 그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기,

내 행동이 내가 평가하기를 내가 잘했다, 못했다, 내가 손자를 막 때릴 줄 아는 이것도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기.
왜?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실제로 아무것도 안 되게, 실제로 암에서 나았다 다시 암 걸리는 거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왜?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게 걸린 그 암도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마귀가 왔다 머쓱하게 돌아서요. “아무것도 아닌 걸 건드렸구나.” “그래 아무것도 아닌 거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육이 있는 한 마귀가 자기 일하는 그 기능의 가치가 있어요. 그 가치를 제가 인정하라 했지요. 어제 낮 설교 때. 마귀 존재와 활동을 인정해주세요. 마귀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지 못해요. 날마다 안에 말썽꾸러기 있어줘야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나를 포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서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의 두 가지를 다 감각을 갖고 있는 예수님의 시체가 되는 성령 받았기에 육이 뭔지도 아는 그런 사람으로 주께서 친히 지금 일하고 있는 공간이 바로 우리 있는 신체고 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존재가 우선이 아니라 말씀이 우선이고 내가 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말씀이 말씀대로 다 완료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늘 우세가 되는 그런 삶이 되어서 예수님만 증거 되는 증거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부산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적  (0) 2023.09.13
그러나 이제  (0) 2023.07.12
실패한 희생물  (1) 2023.05.17
친구 만들기  (1) 2023.04.12
두 개의 나  (1) 2023.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