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15a 부산강의 : [시편]58(42:5)-실패한 희생물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42편 하겠습니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 교훈이란 뜻입니다, 교훈. [영장으로 한 노래], 성가대 대장이죠. 가사로서 노래를 하는 찬양했던 그 내용. 1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그렇게 시작합니다. 시편 42편은 절망을 나타낸다. 인간이 이렇게 있는데 고라 자손이라 돼 있지요. 인간이 있는데 여기서 뭐가 나타난단 말입니까? 절망이 나타나요.
절망이 나타날 때 인간은 여기서 의문점을 제시하는 거예요. “왜 내가 절망적이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시편 42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절망을 통해서 인간이 자기 자리를 자기의 출생지를 포기하는 절차가 된다는 거예요. 자기 인생에 자기가 알았던 모든 셈에 대해서 일체 미련을 갖지 않으려면 인간은 절망해야 돼요.
자, 절망의 반대말이 뭘까요?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되겠지요. 문제는 이 희망은 안 된다는 거예요. 희망은 기존에 내가 살아왔던 모든 것을 그냥 같이 동반해서 가져가요. 왜냐하면 이 희망은 이만큼 채워져 있는데 점선만큼,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발생된 게 희망이에요. 얼추 이만큼 했는데 아아 이것 모자라네. 이것마저 채우면 온전한 내가 되겠다고 할 때 그걸 뭐라고 합니까? 절망이라 합니까, 희망이라 합니까? 그게 희망이라 하지요. 성경에 나오는 단어대로 하면 소망이죠. 로마서 8장에 보면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는 이 말은 출생지를 하나님께서 하나 더 두는 거예요. 인간이 태어난 겁니다. 태어났을 때 출생지 자기가 알고 있잖아요. 보이지요. 보이는 걸 유형이라 합시다. 형태가 있다, 유형. 유형에서부터 유형적인 것이 연결, 연결, 연결 지어서 유형적인 천국을 어디서 시작한다? 눈에 보이고 나타나있는 데서부터 출발을 시작하는 이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유형부터 눈에 보이는 것부터 출발한 소망은 사다리 게임에서 지금 엉뚱한 데로 간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데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점선으로 하겠습니다. 점선으로 하니까 유형이 아니고 반대말로 무형이죠. 보이지 않는 노선에서, 노선에서, 노선에서, 보이지 않는 노선에서 등장하는 것은 보이는 유형적 천국이 여기서 등장하는 거예요. 출발점이 뭐냐 하면 무형이에요. 없는 데에요. 무형이니까 이것은 눈에 없으니까 인간에겐 없음이 되겠지요. 없음이 되는데 성경에서는 없음이라 하지 말고 말을 달리 해봅시다. 이걸 사라짐이라 합시다. 사라짐.
사라짐은 처음부터 없어진 게 아니고 나타났다가 홀연히 없어진 거죠. 제가 질문을 던질 테니까 속으로 답변을 해보세요. 예수님 부활하셔서 사람들 만났지요.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제자들 만났지요. 사도 바울 만났지요.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유형적으로 만났습니까, 무형적으로 만났어요? 그때는 유형적으로 만났지요. 사도되니까 사도들이니까.
그러면 “유형적 만남이 아니면 구원 못 받습니까?” 이게 제 질문입니다. 유형적 만남. 사도도 만났고, 사도 바울도 만났고, 열두 제자 다 만났는데 부활하신 주님 만났단 말이죠. 그렇게 눈이 보이도록 만났단 말이죠. 글로바란 제자도 누가복음 끝에는 만났지요. 주님께서. 그러면 눈에 보이는 만남 없으면 구원 못 받는 거예요? 구원받은 적 있지요.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주님 직접 안 만났는데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녀도 중요한 이 문제가 정립이 안 된 상태라면 곤란합니다. “초대교회 참 좋겠다. 부활하신 주님 만나고.” 그럼 우리는? 우린 끝났지 뭐. 직접 주님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 끝났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요한복음 1장 14절 생각해보세요. 예, 맞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지요. 이 육신이 오셨는데 유형, 눈에 보이는 채로 오셨는데 사라졌잖아요. 유형에서 무형 됐지요.
뭘 완성시키려 무형 됐습니까? 유형에서 무형으로 바뀌면서 말씀이 완성되었기에 사라진 거예요. 그럼 우리에게 남아있는 건 뭐예요? 말씀이죠. 그 말씀이 이 책에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나오지요. 이 책에서 더하거나 빼지 마라. 더하거나 빼버리면 내가 천국에서 지워버린다. 생명나무에서 지워버린다 할 때 주님이 집중적으로 구원시키기 위해서 주신 게 있단 말이죠. 그게 뭡니까? 사도를 통해서 만들어낸 성경이죠.
그래서 누가 읽어보세요. 로마서 10장 14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됐습니다. 듣지도 못한 것을 어떻게 믿으리오. 그 앞에 주 예수를 믿게 되면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고 돼 있잖아요. 로마서 10장에 나오지요. 자,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아요. 유형적인 부활한 주님을 안 만나도 예수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때는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를 믿어야 되는데 무슨 매개를 통해서, 어떤 중재를 통해서 믿어야 되는데 그게 뭐냐? 주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났는데 주님의 육신은 사라졌어요. 없어졌습니다.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말씀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인간들이 가르치느냐? 아니요. 그럼 이 말씀을 인간이 가르치지 않으면 뭐냐? 인간이 가르치는 게 아니고 인간이 전달하지요. 전달하는 사람은 자기가 대학 나와서 전달하느냐? 아니지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한 자를 누가 전하리오.
그 전한다는 것을 그걸 귀가 있잖아요. 그 전한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믿어버리면 유형적 부활의 주님을 안 만나더라도 어디 간단 말입니까? 구원을 얻으리라. 이 모든 시작이 어디서 나왔나?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예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사라졌지만 이 육신 자리에 계속 다른 육신들이 채워져요.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육신, 성도지요. 성령 받은 성도.
성령 받은 성도가 성령 꾹 쥐고 있고 말씀 쥐고 있으라고 성령 주고 말씀 준 게 아니고 전하라고 준 거예요. 그걸 보내심을 받은 사람 또는 사명자라 하지요. 보내심을 우리는 성도 하나가 예수님 이후에 하나의 중매자, 중개자로 이 땅에 성령을 통해서 등장했습니다. 예수님과 오늘 성도의 공통점이 있어요. 두 분 다 성령을 받았다는 거예요.
예수님 성령 받을 때 예수님 자기 마음대로 못했어요. 성령 마음대로 하셨습니다.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면 성도 본인 마음대로 못해요. 성령 인도함을 받아서 하는 겁니다. 성령 충만해서. 대표적인 것이 스데반 집사지요. 스데반 집사도 참 신기하지만 빌립 집사도 정말 신기해요. 왜냐하면 에티오피아 내시를 먼 사막에서 만나리라곤 본인의 머리론 상상도 못했습니다. 상상도 못했는데 성령께서 파견했어요. 보내심을 받은 거예요.
가보니까 저기서 먼지 일어나면서 마차 하나 오는데 진짜 이 만남은 너무 신기한 만남이에요. 자기는 주님 지시에 따라서 기다리고 있는데 저기서 뭐 오더란 말이죠, 마차가. “태워줄까요?” “예, 태워주세요.” 이야기하면서 그 내시가 자기가 봤던 이사야 본문의 내용이 해석이 안 되니까 어떻게 좀 해석해 달라. 이사야 본문에 나오는 이분, 그의 찔림은 우리 허물을 인함이요, 할 때 이분이 누구냐고 묻지요.
이분이 누구냐? 이미 사라진 분입니다. 주님이 누구십니까? 모든 말씀은, “주님은 누구십니까”를 향하여 집중하는 식으로 말씀이 모아지게 돼 있어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나와요.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자는 뭐를 얻었고? 영생을 얻었고. 그러니까 영생, 유형적인 부활하신 분을 만나지 않더라도 주님께선 자기 영인 성령을 통해서 자기 예수님에게 관심 두도록 집중하는 활동을 지금 성령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촘촘한 그물망으로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레이지에 걸려든 거예요. 성령의 그물망에 걸려든 겁니다.
걸려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어떻게 아느냐? 말씀에 관심 있도록 주변 상황이 그렇게 몰아넣었고, 그 말씀만 관심 있으면 이건 뭐 네비게이토 비슷하게 돼버렸지요. 말씀만 있으면 신학자 되지요. 그게 아니고 어디에 집중한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느냐’에 집중하다보면 특징이 있어요. 나에 대한 집중도가 확 떨어집니다. 나의 의, 나의 가치, 나의 의미 확 떨어져요.
어제 오후 예배하면서 기도제목을 제가 했지요. 기억나십니까, 기도제목이? 억지로 나의 의미를 챙기려고 하지 마라. 모든 의미는 주님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이지 나 이렇게 살았으니까 이런 의미 있다고 그걸 챙기지 말라는, 그게 기도제목이었어요. 인간은 자기 의미를 못 버립니다. 그 성령이 와서 버리도록 하는데 그 전에 인간이 자기 의미를 못 버리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 뭐냐 하면 오늘 시편 42편에 나오는 이게 뭐예요? 절망이에요, 절망.
절망은 시작이에요. 절망은 시작하는 거예요. 개시한 거예요. 주께서 주님 쪽으로 집중시키기 위해서 출발점이 절망입니다. 이상한 게 암인가? 나의 의미는 절대로 나의 힘으로 떨어낼 수가 없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성경에서 여러분들이 잘 압니다. 성경은 이런 걸 뭐라고 하느냐? 육이라고 해요, 육. 육에 대해서 설명 들어갑니다.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지만 정리 차원에서 설명할게요.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니까 그냥 편하게 들으시면 됩니다.
육은 어디서 나왔나? 혈통에서 나왔어요. 혈통은 뭐냐 하면 가족입니다. 육은 가족 사랑으로 똘똘 굳혀져서 주님의 사랑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이게 육이에요. 어제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지만 인간과 짐승의 공통점이 뭐냐? 지 새끼 키울 줄 안다는 것. 암컷, 수컷 만나서 열정적으로 애정 표현한 것, 짐승들도 다 할 줄 알아요. 그리고 자식 잘 키웠다고 해서 훌륭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짐승도……. 짐승보다 못하지, 사실은. 그걸 육이라고 해요.
특히 가족이란 말을 왜 집어넣느냐? 토대가 부모 없이 내가 없는 거예요. 그날이 무슨 날? 어버이 날. 어버이 없이 내가 없잖아요. 어버이를 만약에 내가 부정한다? 뭘 부정한다? 나를 부정한 게 돼요. 성경에 마태복음 9장에도 나와요.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 마침 타이밍 맞춰서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자기의 육의 티를 확 내버렸어요. 예수님 따르는 건 좋은데 우리 아버지 장례 치루고 따르면 안 되겠습니까, 할 때 주님께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결국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뭘 버리는 경로란 말이죠? 육을 버리는 거예요. 개인적 육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개인적 육이면 자살하면 그만이에요. “아이고, 뭐 살기 힘들면 나 혼자 죽어버리지. 번개탄 피워놓고.” 이러면 그만인데 인간이 본인은 버려도 버릴 수 없는 게 뭐냐 하면 부모 없이는 내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내 죽으면 내 자식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자식 낳아놓고 책임은 다 지어야지. 지 살기 힘들다고 같이 버려버리면 자식들이 누굴 원망하겠어요?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여기에 이 똘똘 뭉쳐있는 육, 여기서 인간은 탈출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육에 입각해서 신을 찾는 것, 하나님을 찾을 때 뭐 기도하고 헌신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다 누구를 위함입니까? 하나님으로 올라가는 척하지만 관심은 뭐냐 하면 내가 내 육을 버릴 수가 없어서 내가 하나님을 써먹기 위한 하나님을 믿게 돼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다 할 때 여기서 절망을 느끼고, 절망이란 제가 아까 했지요. 결핍을 느끼면서 신을 찾게 돼 있어요. 이것 이스라엘 통해서 보여줬습니다. 보여준 그 책이 무슨 책이냐 하면 [사사기]입니다. 사시기에 보면 반복이 돼 있지요. 편할 때 하나님 버리고 우상 섬기다가 아쉽다, 절망적이다 싶을 땐 하나님 찾지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육의 한계를 주위의 이방나라를 통해서 압박을 압력을 가해요.
그러면 그들은 조공을 바친다든지 그들과 화친을 한다든지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할 도리는 육에서 뽑아낼 건 모든 방법은 다 동원시켜요. 그때까지 구원자 사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선 팔짱 끼고 보는 거예요. 해봐, 해봐. 이게 이방민족 같으면 주께서 그렇게 안 다뤄요. 하나님의 약속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낼 필요가 있는 민족이라서 주변에서 압박을 가해요.
그러면 그들이 하다하다 안 되면 그다음에 뭘 찾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 약속을 찾아요. 약속이라 했는데 아까 로마서 10장에선 제가 뭐라 했습니까? 말씀이라 했지요. 로마서 같은, 구약 사사기는 아직 미완성 상태지만 말씀의 상태, 누구든지 말씀의 완성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했거든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네가 예수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란 말은 말씀 완성 상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말씀 완성 상태를 하려면 본인이 육으로 한 것은 거덜 나야 돼요. 육으로 할 도리 다 해본 겁니다. 어디 나옵니까? 사사기에 나오지요. 하나님 믿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겠습니다, 하나님 순종하겠습니다. 다 해봤는데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왜냐하면 말씀 완성은, 참 중요한 겁니다. 내가 여기 있다면 말씀 완성은 나에게 뭐가 되느냐 하면 타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몸과 다른 몸이에요. 육이 달라요.
인간은 육에서 못 빠져나오지요. 주님 방법은 뭐냐? 네 육으로 해보라가 아니라 네 육 말고, 네 몸 말고, 네 몸체 말고 다른 몸체에서 뭘 이뤘습니까? 말씀이 완성된 것을 어떻게 하라? 네가 믿어라 이 말이거든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나의 육 됨을 부정하라 인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너는 죽은 몸이라고 받아들이라 그 말이에요. 죽은 몸이 예수 믿고 십자가 믿고, 소용없어요. 죽은 몸인데요.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출발점이 내가 말씀을 소유하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말씀 완성 쪽에서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쪽에서 자기가 완성한 것을 이렇게 집어넣어준 겁니다. 그게 성령입니다. “밥 다 됐다. 음식 값 내가 치렀어.” 항상 완결, 완성, 마루리란 내용을 가지고 성경해석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이게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받게 되면 그게 완성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 없이는 구원을 못 받아요.
말씀이 완성된 채로 다가온다는 것, 지키라는 게 아니라 완성된 채로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그다음부터 육으로서 말씀을 실천하고 지키려는 그것이 얼마나 부정돼야 되는 것을 완성 차원에서 지적하고 고발하지요. 성령께서. 그래서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의 일은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책망하는 거예요. 반복적으로 책망해요.
그것이 스데반 집사나 빌립 집사 같은 경우에는 또렷하게 등장하지요. 사막에 놀러나 가볼까? 아니에요. 그냥 사막에 보내지요. 고넬료 만날 때 베드로가, “로마 군인 한 번 전도해볼까?” 아니지, 아니지요. 그냥 천사가 온 거예요. 그냥 보따리 하늘에서 내려오면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못하는 가운데서 환상 가운데서, “받아먹어라.” “못 먹습니다. 더러워서 못 먹습니다.” “받아먹어라.” “못 먹습니다.” 하여튼 베드로는 세 번씩 이야기해도 안 들어. “받아먹어라.” “못 먹습니다.” 딩동. 고넬료가 보낸 종이 와서 좀 모셔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뭐냐? 자신의 육적 계획이 완전히 부정당한 거예요. 누구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내가 전도해볼까, 가 아니라 나는 못 먹습니다, 라고 분명히 거부했잖아요. “거부했냐?”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시작해볼까?” 육을 완전히 차단시키는 겁니다. 타인이죠.
자, 여러분 아는 이야기해볼게요. 예수님과 제자들 몇 명이었습니까? 열두 명. 이 사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타인으로 생각했어요. 타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려먹을 것, 얻어낼 것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에게 뽑아낼 것,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떤 권능 같은 것 뽑아내고, 귀신이 하늘로 떨어집디다, 이런 것. 내가 저 초월적이고 하늘로 오신 메시아를 써먹을 대로 써먹어보자는 식으로 제자들은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은 뭐냐 하면 자기들이 구원, 천국 간 줄 알고 우리 가운데 하늘나라에 누가 높습니까? 이렇게 다투기까지 했어요. 그들이 예수님과 헤어질 것이라곤 상상도 못한 거예요. 이게 뭐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간격이 있었던 거예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내 육을 지키기 위해서 내 몸을 지키기 위해서 써먹을 생각 한 거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탐구하고 분석하고 내가 믿을 만한 내용으로 재정립하고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있음이 나한테 이득이 되는, 내 천국 가는데 이득이 되는 그런 존재로 분석했지요. 누가요? 제자들이요.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기와 한 몸으로 봤어요. 한 몸. 뭐가 빠졌습니까? 나한테 일어난 일이 곧 누구한테 일어날 일이다? 너희에게 적용될 일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대속, 속죄, 희생 이 말이 나오지요. 이 말은 예수님 하신 일이 얼마나 제자들이 쪼다 같고 바보등신 같고 무지했으면 주께서는 대신 죽으심, 대속, 희생, 속죄, 제물, 이 제자들에게 향하게 되려면 예수님 안에서 간격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예수님을 제자들을 자기 몸으로 봅니까, 타인으로 보는 거예요? 자기의 몸으로 보는 거예요.
이 몸으로 볼 때 예수님 몸 따로 있고 제자들 몸 따로 분명히 있어요. 둘이 있는데 그게 한 몸으로 본다는 것은 이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창세기 2장에서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할 때 그게 뭐냐 하면 이거는 결혼이고, 이거는 신랑과 신부 사이인데 이 신랑과 신부 사이를 흔히 하는 말로 뭐라고 합니까? 사랑이라고 하지요.
성경 요한복음 13장 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 아까 우리 공부한 대로 하면 예수님이 사라졌지요. 아예 없었던 게 아니고 있었는데 사라짐으로써 없음이 되는 거예요. 아예 없는 분이 아니고 다녀가니까. 그다음에 뭡니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어떻게 사랑해요? “끝까지 사랑”한다. 한 사람 빼놓고 끝까지 사랑하지요.
그리고 친구란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보기에 세상적 친구는 너, 나 따로 있고 친구지요. 그러나 15장에 보면 15장 14절에,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는데 여기 보면 친구가 친구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돼요? 그냥 말만 하면 친구 됩니까? 가장 좋은 친구는 목숨을 버리는 거죠. 그렇지요. 목숨을 버리지 아니하면 친구라 할 수 없어요.
이게 요한복음 15장 13절에 나오지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그 목숨 버리게 되면 이쪽 목숨과 저쪽 목숨이 하나가 이전이 되지요. 전달이 되지요. 뭐를 위하여 영어로 for, ~위하여 하면 그쪽에 내가 함께 어디로 갑니까? 그쪽에 도달하잖아요. 그게 한 몸이잖아요.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셈이 되지요. 이거는 주님 안에서 뭐가 없어요? 간격이 사라졌지요. 이게 바로 완성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자기 몸은 멀쩡하게 두고 예수님을 어떻게 이용해먹을까 생각했다는 것은 몸이 딴 몸이에요. 이거는 한 몸이 아니에요. 안 죽으려고 지 몸을 지키려고 하다보니까 예수님이 하신 대속, 희생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는데 이게 실제가 안 되네, 내 몸에서.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향기로 죽음이 발산돼야 될 텐데 죽으심을 안데. 알아서 뭐 하는데? 주님께서 자기 몸이 아니면 주께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마태복음 7장 보겠습니다. 7장 끝부분에. 특히 목회자한테 충격적인 말씀인데 목회자만 아니고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마태복음 7장 22절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너, 누구세요? 이 말은 그들이 예수를 안 전한 게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 한 몸으로 거두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이게 뭐냐? 성령 받기 전의 제자들 상태.
성령 받기 전에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 사랑은 육적인 사랑이죠. 강의 다시 해봅시다. 육은 뭐가 있다? 육은 유형적인 토대를 지니고 출발한 게 육이죠. 유형적인 것, 우리 아버지 누구시고, 우리 어머니 누구시고 있잖아요, 유형적 토대. 그런데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뭐냐 하면 제자들이 말하기를, “예수님 설교하시는데 미안하지만 뒤편에 예수님 동생들하고 엄마 와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자, 이런 관점이 뭐예요? 혈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 혈통을 천국에 집어넣으려하는 거예요. 교회에 교인들이 와서 예수 믿겠다고 손드는 건 뭐냐 하면 자기를 버리는 게 아니에요. 자기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이 혈통, 그리고 중보기도해서 내 배우자, 남편, 아내, 자식들까지 다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들이냐, 할 때 그 현장에 누가 있어요? 마리아 있었고 예수님의 배다른 형제 있었겠지요. 그들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이 의미가 있는 거예요. 너희들 보기에 예수님 모친, 예수님 형제 뻔히 아는데 주께서는 아니요, 라고 이야기하지요.
그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나는 예수 믿어서 구원받습니다, 라고 생각하고요 ‘아니요’를 집어넣으세요, 거기다가.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습니다, 이게 엉터리였구나. 이게 구라요 거짓말이었구나. 내가 죽지 아니하면 주와 예수 안에, ‘예수 안’이 나와요. 그 예수 안 반대말이 내 안, 나의 안이에요. 나의 안에서 살던 내가 어떻게 예수 안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까? 이거는 충분히 나의 안 쪽이 어디로 마감돼야 하느냐 하면 절망으로 마감돼야 해요. 절망으로 마감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동원했는데 절망적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 시편 42편 1절에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렇게 돼 있지요. 시작이 육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절망적이에요. 사슴은 시냇물을 왜 찾지요? 사슴의 구성성분이 78%는 물로 돼 있다는, 물을 투입하지 않으면 사슴이 살지 못하잖아요. 살지 못하면 목마르면 죽으면 되잖아요. 왜 찾아요? 사슴이 물을 왜 찾습니까? “아아 지금 내 몸에 물기가 없어졌구나. 그럼 죽자.” 이러면 되는데 왜 찾아요?
사슴이 물을 왜 찾습니까? (살기 위해서) 뭐를 살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잘 나왔어요. 뭘 살기 위해서? 사슴이 살기 위해서. 그러니까 나의 세계 내에서 내가 떠날 수 없는 모순이 발생되는 거예요. 나의 세계에서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 뽑은 거예요. 삼 년 동안 말씀 듣게 했습니다. 들으면 뭐합니까? 결국은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빠이빠이 인데요. 그 빠이빠이 시키는 사건이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너는 너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걸 요한복음 3장에선 뭐냐? 육에서 나온 것은 육으로 돌아가라, 인간아. 육이 영이 될 수 없겠습니까? 없다. 그러면 하늘나라는? 영에서부터 출발해야지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뭐가 돼요? 영이 되지요. 여기서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방금 그 말씀,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 목사님, 그 말씀 이해는 하겠는데, 그다음에 분석은 하겠는데 거기에 대해서 무슨 뜻인지 의의는 알겠는데 그다음에 뭘 느낍니까? 절망을 느끼지요.
왜 그 말을 아는 게 나한테 나의 육적 결핍을 마저 채우지는 못하는가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주의 말씀으로 자기 결핍을 채우는 용도로 쓸 수 없다는 걸 뜻하는 거예요. 주의 말씀으로 이단들 맨날 하는 게 뭐 있어요? 양육 받는 게 말씀공부 아닙니까. 말씀으로 뭘 한다? 나의 미진한 부분을 마저 채울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존재를 뻔히 알면서도 주께서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라. 이건 되지도 않는 이야기에요. 우리한테 먹히지도 않는 이야기에요. 우리는 성경을 골라서 지키니까 아는 거니까. 그러니까 성경말씀을 알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많이 아는 나를 점점 더 부인하기가 힘들어졌어요. 점점이 어른이 돼가요. 어린아이 같으면, 천국은 어린아이가 가는 곳이거든요. 어린아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니까.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 부자 청년, 마태복음 19장에서 그 사람 어떻게 됐어요? 주님과 계속 교제했습니까, 헤어졌습니까? 헤어질 때 어떻게 헤어졌어요? 기뻐서 헤어졌어요, 근심하며 헤어졌어요? 자기의 치부를 주께서 드론으로 미사일로 공격해버린 거예요. “너는 너 자신을 버릴 마음이 없지, 그지?” “예. 없습니다.” “잘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그걸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이 부자 걱정했겠어요, 본인 걱정했겠어요? 본인이 걱정된 거예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를 부자 청년 만나서 대화를 나눈 거예요. 차이점이 뭐냐 하면, “나는 누구입니까”를 인간은 일체 묻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자기한테 내가 누구냐고 물으려면 내가 나에게 타인이 되어야 하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나에게 남이 돼야 하니까.
우리가 유치원 운동회에 자기 자식이 뛸 때 관심 두잖아요. 남의 애 엎어지면 속으로 쾌재를 불러요. 이 찬스를 놓치지 마라, 아들아. 네가 앞서 가라. 우리는 내가 나에게 남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절망을 품고 있습니다. 절망을 품는다,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절망이 내재적이자. 안에 들어있다 이 말이에요.
자,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출생이 사고 났다. 내 출생한 게 사고 난 거예요.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우리를 안개라고 봐요. 안개란 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해만 뜨는 없어져요. 그것을 내용으로 해서 야고보서 4장 14절에 너희는 없어질 안개니라.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유형으로 네가 자꾸 느껴지지. 그러니까 너는 너를 못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대입해보라, 나에다가. 내가 유형이 아니고 무형일 수 있다는 거. 다시 말해서 나는 안개로서 교회 나오고, 안개로서 오늘 아침 밥 해먹고, 안개로서 운전했고, 안개로서 안개가 안개를 낳아서 애 교육시키고. 아이 둘 낳으면 안개1, 안개2. 요양병원 가 있는 시어머니는 안개3.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안개라는 그 말씀 있잖아요. 그 말씀 안에 우리가 빼도 박도 못하고 그 안에 소속돼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거예요. 전도서에 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게 뭐냐? 로마서 10장에 보면 그게 말씀이죠. 그 말씀 안에서 우리가 빠져나갈 수 없지요. 그걸 받아들이는 게 믿음이에요.
아까 제가 여러 번 강조했어요. 육에서 못 빠져나오지요. 그러면 육에서 못 빠져나오는 자아, 자아라는 게 없지만 하여튼 자아, 육에서 못 빠져나오는 이 범주보다도 그 범주로 포위당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럼 뭐냐? 육은 어디에 포함돼 있다? 말씀에 포함돼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말씀은 에베소서 1장 10절에 의해서 모든 말씀은 어떤 한 곳에 집중돼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뭐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통일되게 하심이라.
통일, 고정성입니다. 그럼 우리는? 유동성, 반대말. 주님은 고정성, 우리는 움직이는 것, 주님은 고정된 세계. 주님의 묵시적 시간은 스톱돼 있고 우리의 시간은 날마다 늘 변화되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죠. 날짜 계산하고 시간에 쫓기는데 쫓겨봐야 그 아지트에서 못 벗어나지요. 참호 또는 벙커, 아지트가 적당하겠네.
우리의 가정, 뭐 아지트. 고급아파트는 비싸지만 어쨌든 간에 어제 낮 설교한 것처럼 모든 인간들은 무덤 안에서 빌딩 짓는다는, 거대한 돔 안에서 빌딩을 짓고 살잖아요.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은 168층짜리 두바이에 있지요. 있어봐야 뭐합니까? 무덤 안에 있는데. 죽음 안에 있어요. 이걸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육을 버려야 된다? 아니에요. 육은 그냥 있으세요. 육은 그냥 버릴 필요 없이 우린 육에서 못 빠져나와요. 그냥 있으세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육을 그냥 간직하세요. 간직하시고 이걸 위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덮어짐에 대해서 감지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런 주님의 관점을 주는 거예요.
사라졌는데 함께 있고, 만약에 주님을 생각 못하고 성령을 안 받으면 내가 사라진다고 두려워하는 거예요. 죽음에 대해서 겁내고 두려워하는 거예요. 평생 동안 나를 위해 살았는데 내가 지금 몸이 아파서 사라지게 되면 그동안 살아온 정성과 애씀과 노력의 결과물은 어디서 내가 보상받지요? 여러분 잘 아는,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여러분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가 죽어 버렸는데 여러분이 어디 있어요.
안개잖아요, 안개. 안개를 받아들이면 돼요. 나 홀로~ 정훈희가 불렀던 <안개>. 그냥 안개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안개를 구성하는 하나의 작은 물방울 입자에요. 내가, 우리는. 그 안개가 유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크니까 키가 얼마나 됩니까, 몸무게는? 똥배 막 나오고. 안개 치고는 배 불룩한 안개. 안개인데 아침밥 안 해준다고 아내와 싸우고, 돈 벌어주는 데 왜 안 해주노? 싸우는 안개. 니가 해먹으라고 또 맞대응하는 안개.
남편이란 안개, 아내라는 안개, 자식이란 안개. 결혼하고 아이 둘 낳고 쳐들어와서 아이 키워달라는 자식이란 안개. 그래서 안개를 집어넣어서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안개를 집어넣어서. 헛되고 헛됨을 집어넣으시기 바랍니다. 따로 헛됨에서 못 빠져나오고 안개에서 못 빠져나와도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그걸 안개란 말씀이 우릴 두꺼운 이불로 덮어주니까.
그게 바로 내가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는 게 아니고 무형적인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토대가 말씀이란 토대에서 비로소 희망이 가시적 희망, 눈에 보이는 희망, 현실적 희망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주께서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우리보다 더 안개 같은 우리보다 더 확실하게 이 세상을 작동하고 활동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도마보고 하는 말이, 네가 보고 믿느냐, 유형으로 믿느냐? 보지 않고 무형으로 믿는 자가 더 복 되다 했어요. 그 보이지 않는 걸 믿는 게 뭐냐 하면 그 자리에 주의 말씀이 들어가는 겁니다. 이러면 아까 로마서와 정리가 됐지요.
자, 오늘 시편 42편에서 이 절망이 어떤 절차를 밟아서 말씀 완성으로 나아가는가? 시편 42편 여기 절망하지요. 절망하는데 11절 보세요. 분명히 1절에 절망했지요. 탄식했잖아요. 그런데 11절에 뭐라고 돼 있어요? 제일 끝에 뭐라고 돼 있어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보세요. 하나님을 찬송한다 하잖아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찬송할 수 있어요? 처음에는 절망하면서. 육에서 시작했는데, 자기 생각한 거예요. 누구냐? 고라거든요. 고라는 제사장입니다. 레위 지파지요. 레위 지파는 누굴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42편 중간에 보면 자기가 뭐했느냐 하면 4절에,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그다음에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절망적이죠)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낙망하고 절망하는 것, 이것은 하나의 고라 자손, 시를 지은 이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이 사람 선지자에요. 선지자에게 일어난 사항은 앞으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되풀이해서 하나의 절차의 매뉴얼로서 들어가기 때문에 시편은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230515b 부산강의 : [시편]58(42:5)-실패한 희생물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어떻게 해서 이 신앙인이 찬송하게 되었는가? 절망 가운데 찬송하였는가?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시편 42편 9절과 10절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라는 말을 절망적인 단정 지음, “하나님이 날 잊었어, 날 버렸어” 그렇게 말한 계기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공격을 당했기 때문인 거예요. 원수의 등장이죠.
그다음에 원수가 가만있으면 원수가 아니지요. 누굴 압제하는가? 신앙인을 압제하는 거예요. 신앙인이라 하는 것은 잘 아시다시피 사람은 사람인데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신앙인 되겠지요. 홀로 있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해도 앞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누굴 공격하게 돼 있어요? 저 사람이 나를 공격하는 걸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절망에서 찬송, 희망이라 했는데 성경대로 찬양하고 찬송하고 감사할 때는 반드시 필수요소로 뭐가 등장해야 되느냐 하면 원수가 등장해야 돼요. 하나님의 원수가. 그러면 이 말은 육에서 영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기서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해야 돼요. 문제는 나의 원수가 아니라는 거예요. 누구 원수? 하나님에 대해서 원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이게 나의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인 걸 알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원수를 자기를 공격하는 원수로 오해를 하게 돼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 얼마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아등바등 애쓰면서 살아왔는가를 완전히 표시를 다 내고 있는 거예요. 아까 했지요. 출생 자체가 사태고 사고라 했지요. 왜 사고냐? 우리가 출생한 게 하나님의 원수 노릇하라고 출생했거든요. 이것을 본인은 몰랐어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비로소 내 자체가 원수 편에 합세해서 함께 누굴 공격한다? 하나님을 공격하는 그 편에 같이 한 패가 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시편 42편은 누구 이야기다? 결국 이거는 예수님 이야기에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잖아요. 예수님 자기 이야기에요. 감히 이 시편으로 나한테 적용시킬 수 없어요. 내 자체가 원순데 뭐, “하나님 저를 지켜주옵소서. 하나님 잘 믿었는데 저 앞집에 원수가 와서 나를 괴롭히니까 저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이런 결핍은 소용없습니다. 주인공이 예수님으로 바뀌어서 이 말씀이 완성되는 것이지 내가 주인공 해서 내가 아쉬운 것을 주님이 들어주는 그런 내용은 아니에요.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지 우리가 될 수 없는 겁니다.
두 번째 시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원수가 뭐냐 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원수가 우리에게 나타나느냐? 원수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가? 제가 그림을 하나 그려보겠습니다. 손잡이 두 개, 문이 따로 있습니다. 자, 어느 쪽이 남자화장실이고, 어느 쪽이 여자화장실입니까? 똑같은데 어느 쪽이 남자화장실이고 어느 게 여자화장실이죠? (남자가 들어가는 곳이 남자화장실…) 이거는 사회에서 정하기 마련이죠. 이게 남자, 이게 여자라고 앞에 다는 이걸 사회적 기능이라 해요. 사회적 기능이 원수입니다.
육의 세계의 확산을 위해서 인간들이 만나서 의견을 모은 것이 사회에요. 바벨탑 있지요. 바벨탑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에요. 인간들은 흩어져도 흩어진 적이 없어요. 인간들이 흩어져서 지구의 어디에 살더라도 항상 그들은 마음은 한 결 같이 똑같이 하나님의 원수였고 지금도 원수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지 않고 이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이걸 사회라고 해요. 이 사회에서 우리가 출생했잖아요. 이 사회 안에서. 그러니까 출생 자체가 이게 사고가 일어난 거예요. 우리가 출생했으니까. 어느 게 남자냐, 여자냐? 그건 모르지요. 이쪽은 남자 선이라고 정하면 이게 바로 남자화장실, 여자화장실 정한 거예요. 인간이 정한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언어라고 합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뭐했습니까? 무엇이 육신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지요. 이 말씀은 인간의 사회 이전에 천지 창조할 때 천지 창조에 개입하신 그 말씀을 말하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요 그 이후에 인간의 범죄 한 상태에서 나타난 것은 그냥 말이에요. 말의 세계에서 인간들이 정하기 나름이죠. 질서를 위해서. 우리는 그 세계 속에서 사회적 기능 속에서 나름대로의 질서를 위해서 선과 악의 지식을 총동원시킨 겁니다.
자, 그렇다면 제가 어렵다 이야기했거든요. 어느 정도 어려운가? 지금 이 강의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걸 어렵게 해야 돼요. 원수가 뭔지를 알려면 어렵게 해야 돼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그냥 설명보다도 그냥 적어놓고 하겠습니다. 감옥의 의미는 두 종류로 나눈다. 내용과 표현으로 나눈다. 내용은 또 나누는데 형식과 기질로 나눈다. 표현도 형식과 기질로 나눈다. 지금 언어세계입니다. 인간이 만든 언어세계에요. 언어세계는 이렇게 구성돼 있는 거예요.
예를 들겠습니다. 감옥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감옥이란 개념, 의미가 있다면 내용은 유형적이에요. 표현은 무형적입니다. 내용은 형태가 있고 보이고, 무형은 형태가 있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거예요. 내용에 대해서 형식이 있는데 형식은 뭐냐 하면 수감된 자, 죄수들이죠. 죄수들이 눈에 보이는 형체의 내용으로서 죄수들이 형식을 갖추어져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식은 그냥 감옥이에요. 이게 죄수들. 죄수들의 집합. 이게 기질, 안에 속에 있는 내용. 무형적인 표현의 형식, 감옥과 관련해서 형식은 뭐냐 하면 형법이에요. 그 내용은 뭐냐? 비행 사실. 비행이란 날아다니는 게 아니고 나쁜 행동, 나쁜 범죄 이것이 기질이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해놓고 설명에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서 감옥의 의미가 뭐냐? 이게 인간과 인간끼리 통하는 언어지요. 인간은 말을 해야 통하지요. 음으으으 이래서 수화로 잘 안 되잖아요. 말을 해, 말. 말할 때 ‘감옥’이란 단어를 썼다. 개념을 사용한 거예요. 그 내용이 눈에 보이는 유형과 무형으로 나누는데 유형이 내용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걸 표현이라고 해요. 그 내용이 표현만 있는 게 아니고 내용 자체가 형식 따로, 그 안에 있는 속에 기질 따로 있는데 형식이 뭐냐? 그냥 감옥이에요. 대표해서 감옥이 되고, 기질은 뭐냐? 죄수들의 집합이에요.
만약에 감옥이 아니고 이게 대학이라면, 대학교하면 형식은 뭐냐? 대학교고, 기질은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집합체가 되겠지요. 이게 눈에 보이는 모습이잖아요. 캠퍼스 가보세요. 학생들 보이지요. 교수들 보이지요. 정문에 수위 보이잖아요. 그걸 사람들은 뭐라 합니까? 저거 대학교인 모양이라. 대학생 모임이죠. 대학이죠, 대학.
그런데 감옥에서 이들만 모여 있으면 됩니까? 이들을 집합시키는 게 뭐가 있어요? 형태는 없지만 무형적인 형식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들은 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까? 어디에 근거해소? 형법에 근거해서. 그러니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이게 다 들어있는 거예요. 법이 들어있는 거예요. 형법이. 형법이 있는데 그럼 형을 언도한다 하면 안에 속성이 있어야 되거든요. 속성이 뭐다? 나쁜 범죄 했을 때는 형법에 처하여 어디에 집어넣는다? 감옥에 집어넣는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곳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재판 받을 때 감옥입니까, 감옥 아닙니까? 그건 재판소지 감옥이 아니에요. 재판소는 형법도 있고 그것도 다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결과로 들어가는 곳은 감옥에 들어가는 거예요. 아까 대학교 같으면 형식은 뭡니까? 한국 교육부 형식이 되겠지요. 그 속성은? 속성은 수능 치르고 들어와야 돼요. 수능을 치르는 그 행동, 수능시험지는 있지만 그건 눈에 보이지만 수능을 치르는 것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회는 결국은 뭡니까? [눈에 보이는 것+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러면 여러분, 이제부터 쉬워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자, 아담의 몸이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있지요. 만져지지요. 선악과 손에 만져지니까 따먹었을 것 아닙니까. 목에 넘어갔지요. 이게 전부 다 뭡니까? 이 모든 것이 내용이 되겠지요. 그리고 누가 꾀었어요? 뱀이 꾀었지요. 뱀도 눈에 보이지요.
그런데 주께서는 너희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다가 주께서는 뭘 보느냐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네가 사용하는 이 사회 질서를 맺어주는 언어의 관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너희를 지배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선 뭘 이야기하느냐?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후손을 이야기합니다. 뱀의 후손이 누구겠습니까? 악마지요. 보이는 것은 뱀인데 보이는 것의 후손 같으면 역시 보여야 된다고 생각하지요. 안 보여요. 악마는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왜? 천사기 때문에 눈에 안 보여요.
보이지 않는 것이 뭘 지배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세계를 지배하는 거예요. 그걸 에베소서 같은 경우에 보면 이 세상 신이 인간을 지배한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도 이 세상 신이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거예요.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2절에는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악마라는 거예요.
[인간은 전체성을 소유할 수 없다.] 저게 뭔 뜻일까요? 인간은 세계를 온전히 주관할 수 없다. 이게 뭔 뜻일까요? 나는 세계 전체를 다 안다, 할 수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말하는 주관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건 지우겠습니다. 이게 세상 전체라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 가냐 하면 일부를 뜯어먹고 살아요.
“집사님, 어느 동네 삽니까? 부산 살아요.” “그러면 우크라이나 잘 압니까?” “그걸 왜 알아야지요? 내가 부산 출신이라니까. 우크라이나 출신 아니고 부산 출신이야, 부산 출신. 내가 그걸 왜 알아야 돼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지요. “실례지만 어디서 왔습니까?” “그러면 네팔은 어떤 나라인데요?” 내가 독일에서 왔다니까 네팔 이야긴 왜 해요.
인간의 자기 주관적 세계는 좁아요. 좁습니다. 좁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들어도 자기 이익 되는 것, 자기의 좁은 식견으로 전체를 믿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전체를 알아요? 몰라요. 모른다고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는데 또 예를 들고 싶습니다. 제 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데, 오늘 여기 와서 못 데려다줬어요.
가면서 자기 이야기를 끄집어내는데, 왜 아빠는 아이들 먹는 앙팡우유를 먹느냐는 거예요. 내가 그 이야기 듣고 그것과 세계 평화와 무슨 상관있어요? 아빠는 어른 우유 먹어야지 왜 아이들 먹는 우유를 먹는지 그게 납득이 안 된다는 거예요, 납득이. 납득 안 되지요. 아홉 살 애니까. 그럼 우리는? 육십 넘었든 칠십 넘었든 오십이 넘은 세상에 대해서 납득 됩니까? 부분을 뜯어먹고 살아. 태어났다, 죽을 때까지 이것밖에 몰라. 전체를 모른다니까, 전체를 몰라요.
여기서 뭐냐 하면 진리를 논하고 내가 성공을 논하고 실패를 논하는 거예요. 자기 세계밖에 모르면서. 문제는 전체를 다 알아야 되는데 자기 세계에 골몰하고 골똘하고, 내가 인생 망했다, 좋다, 잘 됐다, 뭐 없다 자기 계산한다고 자기 인생 이익 본 것 계산한다고 전체를 놓쳐요.
그럼 전체를 보는 방법은 뭐겠습니까?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 그 원칙을 가지고 부산 살면 이걸 박살내야지요. 때려봐야지요. 때려보면 부산 태생이란 내가 날아가 버렸지요. 부산 태생을 뭐로 바꾸느냐? 이렇게 바꿔요. 예수 안으로 바꿔버려요. 내가 부산 안에 살았다는 걸 예수 안으로 바꿔버려요.
그러면 예수 안으로 오면 어떻게 됩니까?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전체를 통일시키지요. 유일하게 전체를 주관할 수 있는 분은 누구밖에 없다? 예수를 믿는 거예요. 예수님이에요. 따라서 예수 안에 있으면 세상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 집중돼 있다는 발견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조차 주님의 권세가 작용해서 작동해서 예수 믿게 되었다는 걸 고백하지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세계와 내 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거예요. 신랑과 신부가 혼인하게 되면, 아가서에 나옵니다. 아가서에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안을 때 술람미 여인이 고백했어요. 그이의 오른팔로 나를 안았다. 그러니까 김밥 말 때 어떻게 말지요? 김으로 말아버리지요. 김으로 말아서 오른팔로 안아버리니까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이 뭐냐? 두 사람이 분명히 유형적으로 두 사람이지만 그거는 무형적으로 한 몸 같이 삽니다.
따라서 잠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과 떨어져있을 때 그때 솔로몬이 참지 못해서 술람미 여인 집에 가지요. 갔는데 술람미 여인이 들어오시면 안 돼요, 하고 손을 내미는데 문이 잠겨서 손이 문에 낀 거예요. 꼈는데 거기서 나 이것 가지러왔어요, 라고 하면서 그 남자가 손을 펼치니까 거기서 사랑의 몰약이, 몰약 하니까 동방박사가 예수님께서 드린 몰약이겠지요, 치료제. 치료제 이걸 받아주세요, 라고 그 치료제를 놓고 가지요.
그리고 난 뒤에 술람미 여인이, “괜히 문 닫았어, 괜히 문 닫았어.” 후회해서 그 뒤에 허겁지겁 자기 친구들하고 예루살렘을 순례하면서, “그이 못 봤나, 그이 못 봤나, 그 사람 못 봤어요?” 찾아다닌다는 것은 비록 몸은 떨어져있어도 마음은 연결돼 있지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우리 서로 사랑했어요~ 이 노래 알아요?
<잊지 말아요>, 백지영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우리 이제 헤어지네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차가운 바람이 손끝에 스치면
들려오는 그대 웃음소리
내 얼굴 비치던 그대 두 눈이
그리워 외로워 울고 또 울어요
입술이 굳어버려서
말하지 못했던 그 말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우리 이제 헤어지네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눈물이 입을 가려서
말하지 못했던 그 말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우리 이제 헤어지네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혹시 알고 있나요
뒤돌아서 가슴 쥐고
그댈 보내주던 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에요
그 사람을 사랑해줘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언젠가는 돌아와줘요
우리 서로 사랑했는데
우리 이제 헤어지네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미국 가도 같은 하늘이잖아요. 이게 전체성이에요. 전체성이 주관성 안에서는 비록 몸은 떨어져있어도 서로 I'm missing you, 그리워하는 점에 있어서는 같은 하늘 안에 있는 겁니다. 내 안에 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예수님을 끌어당긴 게 아니고 내가 예수 안에서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도 오히려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해 보는 거예요.
이 전체성이 성령을 통해서 한꺼번에 우리에게 덮치는 거예요, 밀려오는 거예요. 사랑이 덮치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동안 어느 안에 있었는가 알아야 돼요. 우리는 무형적인 것, 세상 안에 있다, 그거는 물리학자들이 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이고, 우리는 어디 안에 있었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뱀의 자손 안에 통제를 받고 지시를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걸 오늘 시편 42편에선 뭐라고 하느냐 하면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죠? 불안해한다. 불안,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낙망하는 게 눈에 안 보이지요. 그냥 똑같아요. 똑같은데 왠지 불안하고, 똑같은데 왠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이거 유형이 아니고 무형적인 기이한 사태가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 믿어라 해서 믿었고, 말씀 믿어라 해서 다 믿고 다 해요. 교회에서 시키는 것, 또는 성경말씀 시키는 것 다 하는데 내 영혼이 왜 그리 불안하고 두렵고 결핍을 느끼고 걱정이 늘어지는지, 왜 그래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그것은 내가 나를 놔주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 덕분에 내가 잘 되려하는 거예요. 내가 나 보기에 만족스런 내가 되고 싶은 거예요. 헤어져야 되는데 헤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오늘 시편 42편에서 하나님 원수가 오니까 비로소 내가 나를 놔줄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찬송이에요. 내가 나를 놔버리는 것. 내가 수입이 더 늘어나고 건강하게 된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출세하고 승진한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 인간관계는요 이거는 마르크스란 사람이 이야기했는데 이 말이 얼마나 이 세상에서 진리처럼 통하는지요.
마르크스가, “내가 보기에 화학자가 아무리 다이아몬드를 연구해도 거기서 교환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다.” 당연한 얘기죠. 화학자가 다이아몬드를 분석하면 탄소결합체에요. 단단한 탄소결합체. 다이아몬드는 지구 생성 초기에 제일 압력이 많은 곳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지구의 맨틀에만 들어 있다가 그게 마그마에 밀려서 올라와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는 거예요. 그 정도로 귀한 거예요. 그만한 다이아몬드 되기 위한 압력을 지표면에선 성립이 안 돼요. 더 압력이 센 곳에 가야 돼요. 화학자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탄소의 결합체.
그럼 탄소의 결합체와 교환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이게 시장에서 상품으로 얼마할지 그건 화학자의 자기 담당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교환가치가 시장경제 원리가 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이야기해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인간신체 눈에 보이지요. 만지면 만져지잖아요. 여러분 집에 가면 자식들, 시집 장가보내서 없겠지만 가끔 만나지요. 만날 때 그걸 인간신체 눈에 보인다고 그게 자식의 가치의 전부입니까? 자식의 가치는 노동시장에서 얼마나 교환의 가치가 있느냐 여부에요. 명절에 자식이 오니까 아직 노나? 이게 뭔 뜻이에요? “엄마 눈에 저 안 보입니까?” “잘 보인다. 잘 보이지. 엄마 아직 시력 살아있어.” “엄마, 내가 오늘 안 반갑습니까?” “니가 왔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왜 놀아? 내가 니 대학공부 시켰는데 왜 놀아?”
이게 뭔 뜻이에요? 나는 니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곁들인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자식이고 싶다는 거예요, 부모가. 딸이 왔는데 서른이 넘었는데 “엄마 잘 있었어? 밥 해줄까?” “그래 고맙다. 밥 해먹자. 그런데 니 남자 없나?” 이런 이야기를 왜 해요? “너 왜 시집도 안 가는데?” 그런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인간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산다고?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뱀의 자손, 악마의 지배에 완전히 선악적으로 세뇌 당했어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불안하고 낙담하고 낙망하는 거예요. 몸도 안 아프고 밥 세끼 잘 먹는데 불안해요.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지 못해요. 미래가 염려스러워요. 그건 뭡니까? 평소에 악마가 인간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티가 난 겁니다.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하는, 히브리서 2장 14, 15절 말씀, 그게 계속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회 기능은 결국 뭐냐? 한 번 적을게요. 사회 기능이란 인간의 수치와 불안감을 감추기 위한 시도 또는 노력, 이것이 바로 사회 기능입니다. 이걸 창세기 3장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치마, 주일 낮 설교에선 이걸 한 자로 했지요. 옷. 이게 이 사회에선 문명의 시작이에요. 모든 문명의 시작이에요. 불안과 근심과 수치, 특히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인간은 쉬지 않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고 AI 연구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불안과 장래에 대한 낙담을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에요.
그것을 해낼 때 그 사람은 시장에 나가서 고가에 팔리게 돼 있어요. “너 요새 한 달에 얼마 받는데?” 이게 뭐냐? 고가의 수입을 얻는다는 말은 악마가 만든 이 불안과 수치를 교묘하게 더욱더 안 들키게 감추는 개발한 거예요, 방식을 개발한 거예요.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어렵게 이야기해도 성경에서는 많은 인간들의 탐구를 웃으면서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욥기 6장 6절에 나와요.
“계란 흰자가 맛있냐?” 욥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 대목을 보겠습니다. 욥기 6장 6절에 보면,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4절에,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다시 말해서 흰자가 맛있냐는 이 말은 사람은 재미 없이는 못 산다. 흥밋거리 없이는 못 산다. 인간은 취미거리 없으면 사람은 사는 게 아니다, 이걸 말합니다. 욥이 하나님이 와서 육체적인 아픔도 아픔이지만 육체적 아픔 때문에 뭘 못하는 거예요? 사는 재미를 못 느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망쳤다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뭐냐? 실패적인 희생물. 이 세상에는 희생물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공적인 희생물이 있어요. 그다음에 실패적인 희생물, 두 종류가 있습니다. 성공적인 희생물을 영웅이라 해요. 안중근 의사, 영웅. 희생해서 그 결과가 인간사회를 유지시키고 존속시키고, 존속이란 건 끌어가는 거예요. 존속시키는 데 기여한 걸 성공적인 희생물이에요.
그러면 욥은 뭡니까? 성공적인 희생물입니까, 실패적인 희생물입니까? 실패적인 희생물이죠. 지가 고난 받고 희생했는데 아무 결과가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둘 중에 어느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욥이 실패적인 희생물이라면 예수님의 희생은 실패하기 위한 희생이죠. 실패한 희생이에요. 이게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십자가, 십자가해도 둘 중에 어느 십자가인지 잘 새겨들어야 돼요. 나를 잘 되게 하는 십자가인지 그래서 예수님을 영웅으로 띄우기 위한 희생물인지, 아니면 예수님마저 실패했는지 이 땅에서, 어느 쪽이에요? 예수님마저 실패해서 이 땅에서 이 세계를 버리고 탈출하지요. 사라져버렸어요. 그리고 남아있는 이 세상은 나중에 불 심판 받고 망해버립니다.
이 말이 어려우면 더 쉽게 말씀드릴게요. 세상이 물바다 된다. 세상이 물바다 된다는 소식을 들을 때 사람의 반응은, 제가 둘 중에 하나하지만 사실은 하나이지만, 일단 둘이라 하면 ①성공적인 희생물을 원한다. ②실패한 희생물 원한다. 세상이 물바다 된다, 종말이 온다, 마지막이다 둘 중에 어느 쪽을 인간은 원하겠습니까? 그분이 희생해서 우리가 살던 고향에서 계속 살기를 원하겠지요. 성공적인 희생물을 원한 거예요. 누가 희생하되 나는 그 덕분에 사는 것, 성공적인 희생물을 원하지요.
그러나 실제로 노아 홍수는 뭐였습니까? 실패한 희생물이었어요. 왜? 다 죽었으니까. 산이 있고 들이 있는데 노아가 여기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노아 여덟 식구가 앉아있었다. 물이 차오르는 데 점점 차올라서 노아 식구들 앉아있는 산꼭대기 빼놓고는 다 죽었다. 이러면 노아 입장에서는 뭡니까? 그 방주는 성공적인 희생물이죠.
그런데 노아는 어디 갔습니까? 노아 살던 집 어떻게 됐지요? 노아 살던 집, 물에 잠겼지요. 이것 성공한 거예요, 실패한 거예요? 자기 고향 영토, 부동산 다 물에 잠겼는데 성공한 겁니까, 실패한 겁니까? 실패했지요. 니 부동산도 니 지난 인생도 저주받아라. 이게 주님의 언약이잖아요. 이게 노아언약이잖아요. 노아가 산 것은요 심판에 합세해서 살았어요. 심판에 같이 가담해서 살은 거예요. 죽어 마땅함으로 들어간 거예요.
성공적인 희생물 내가 얻겠다는 자체가 내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라고 자인하면서 주께서는 언약 안에서 살은 거예요. 그 언약 안이 신약에 오면 무슨 안이 되는가? 예수 안이 되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 안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나오지요. 나는 십자가 안에 있고 세상은 십자가 밖에 있다. 자기가 십자가 안에 있데요. 나는 방주 안에, 심판 안에 있다는 겁니다.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성공한 인생 살라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이 세상 무형의 집에, 악마의 집에, 뱀의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망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증거, 전달하기 위해서 노아는 심판 속에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 거예요. 눈에 보이는 창조가 다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이미 악마가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약 안에 있는 자는 그걸 유일하게 알지요. 이 세상은 하나님께 속한 게 아니다. 그게 요한일서 2장에 나옵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
(개역한글)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NIV) 15. Do not love the world or anything in the world. If anyone loves the world, the love of the Father is not in him.16. For everything in the world -- 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 -- 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KJV) 15. Love not the world, neither the things that are in the world. If any man love the world, the love of the Father is not in him. 16. For all that is in the world, the lust of the flesh, and the lust of the eyes, and the pride of life, is not of the Father, but is of the world.
(NASB) 15. Do not love the world, nor the things in the world. If anyone loves the world, the love of the Father is not in him. 16. For all that is in the world, the lust of the flesh and the lust of the eyes and the boastful pride of life, is not from the Father, but is from the world.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하나님은 이 세상과 주님의 세계를 날카롭게 완전하게 대립시키고 구분시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세상으로부터 좇아 왔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 이 코스가 주님이 다녀간 코스에요.
지금부터 설명할 것은 시편 42편에서 어떻게 찬양으로 하나님께 찬송하게 됐는가? 그 불안과 그 두려움과 낙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것이 신앙인은 하나님의 계시를 아는 시인은 찬송으로 나아가게 되는, 낙망에서 어떻게 찬송되느냐 이 말입니다. 신약적으로 하면 낙망에서 어떻게 범사에 감사로 이어졌느냐, 이 말이거든요.
대구에서 부산까지 기차 타고 오면 물금역이 있어요. 낙동강 댐 물금역. 물금역에 딱 정시에 무궁화호가 정차를 해요. 정차할 그 타이밍에 여기 기차선로가 두 개 있는데 무궁화호가 대구에서 와서 부산으로 갑니다. 그러면 물금역에 정차하고 있어요. 그 타이밍에 부산서 대구 가는 새마을 기차가 같이 정차해 있어요. 바로 옆에 있어요. 창가에서 보면 풍경 하나도 안 보입니다. 기차 옆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여기서 뭐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에 속한 인간을 새로운 기차를 마련해서 빼돌리는 거예요. 교체지요. 여기 있는 자를 빼돌리는 거예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육신 안에 있는 나를 뭐로? 예수 안으로 빼돌리는 겁니다. 우리 힘으론 건너갈 수 없어요. 우리는 모든 의미를 내 쪽으로 돌리기 때문에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주님이 우리 쪽에 와서 동승을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일종에 노래 부를 때 뚜엣이에요. 이중창. 노래 두 사람 할 때 멜로디 파트가 있고 멜로디를 보조하는 화음 파트가 있겠지요. 이중창이 그렇잖아요. 멜로디 파트를 누가 차지하느냐? 예수님이 멜로디 파트를 차지합니다. 왜냐하면 전체를 다 아시니까. 우리는 보조지요.
뚜엣을 하는데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환자가 돼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망친 인간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우린 망한 채로 태어나요. 아까 야고보서 4장에서 뭐라 했습니까? 안개. 우리는 헛되고 헛된 안개, 없어져야 마땅한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이것은 환자인데 주님은 뭐냐 하면 환자와 짝이 되려면 의사가 돼요. 마태복음 9장에서 내가 온 것은 건강한 자에게 온 것이 아니요, 적어볼게요.
내가 온 것은 건강한 자를 위함이 아니다. 자, 묻습니다. 아픈 자가 주님 만나고 건강하게 되면 더 이상 예수님이 필요 있습니까, 필요 없습니까? 예수님이 한 번만 필요합니까, 계속 필요해요? 예수님은 계속 필요하겠지요. 계속 필요하기 위해선 뭡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환자이어야만 돼요. 계속 환자 되도록 하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까 그림 그렸습니다.
이 전체성에서 우리는 태어나면서 우리의 지식과 육신의 제한 때문에 좁은 것만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작은 것만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오느냐 하면 말씀을 가지고 오지요. 말씀은 다 완성됐다 했지요. 완성된 말씀이 오면서 우리의 생각의 폭을 점점 더 넓혀나가요. 넓혀나가면 지금의 내가 멀쩡하게 사는 것이 타인을 돌아보지 않고 타인의 힘듦과 아픔을 관련되어서 지금 내가 멀쩡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발견케 해요.
뭔 뜻이냐 하면 우주인이 우주비행사가 우주공간에 오래 있으면 뼈와 근육에 퇴화가 일어나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퇴화돼요. 이 말은 우리가 음식 먹고 단백질 소화시키면 건강하게 된다. 이거는 좁은 데서 나와요. 우주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좁은 데서 나왔어요.
하나의 나무가 있다. 하나의 나무를 우리는 한 그루라 하잖아요. 그런데 나무가 나무되기 위해서는 비와 토양과 영양분, 햇빛, 공기뿐만 아니고 다른 식물, 심지어 동물의 변, 동물까지 전부 다 한 그루 나무에 연관이 돼 있어요. 심지어 더 나가서 달과 별의 중력까지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한 그루의 우주에요.
하나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여러 가지 변수들이 이렇게 오늘날 우리 자신을 만들어낸 겁니다. 이걸 가지고 원격작용이라. 원격작용이 뭔 뜻인지 아시죠. 물리적인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어도 작용을 주고받는 걸 원격작용이라 합니다. 멀리서 작용하는 거요.
그래서 이 세상은 세 종류의 네트워크로 형성돼 있는데 하나는 중앙 집중 형, 두 번째는 탈 중앙 집중 형, 세 번째는 분산 형. 이 세상에 네트워크는 딱 세 종류밖에 없어요. 중앙 집중이라 하는 것은 하나 앞에 모든 것이 여기서 연관돼 있는 것.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멀리 있더라도 여기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오직 하나를 향하여 집중해 있는 걸 중앙 집중 형.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탈 중앙 집중 형이라 하는 것은 여기에 나름대로의 중앙 집중이 있지만 나름대로 중앙 집중을 갖추면서 이것도 중앙 집중을 소규모로 갖추면서 이것도 하나 중앙 집중을 갖추면서 이것들끼리 연결되는 것, 중앙 집중된 것끼리 연결되는 것.
세 번째, 분산 형은 이렇게 여러 가지 사람 있지만 서로서로에게 팔다리가 서로에게 무작위로 연결되는 거예요. 이게 분산 형이에요. 이 고리, 고리를 노드라 하는데 node. 네트워크에 노드가 있어서 다 연결되는 거예요. 전 세계 모든 사람은 일곱 노드만 단계만 하면 다 아는 사이가 된다는 그런 수학적 이론입니다.
자, 여러분 보세요. 이 세상은 어떻게 돼 있습니까? 셋 중에 어느 쪽이죠? 중앙 집중 형입니까, 아니면 탈 중앙 집중 형입니까, 안 그러면 분산 형입니까?
㉮이 세상은 분산 형이에요. 탈집중형 되지만 결국은 전체를 보게 되면 전부 다 한 곳에 모이도록 악마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네트워크 속에 들어와요.
㉰이 연결고리를 성령이 확대시켜요. 나만 잘하지, 나만 성경말씀 잘 지키면 되지가 아니라 그 모든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연결돼 있어요. 나만 취직 잘해서 돈 벌어서 교회 십일조하면 되지. 그런데 그 취직한 회사 자체가 다른 환경 오염시키는 회사면 어떻게 하겠어요? 환경오염으로 돈벌이해서 그것으로 교회 십일조했다. 성경에 보면 창녀가 번 돈은 교회 내지도 마라. 성전세 내지도 말라 했거든요. 근데 창녀 아닌 자가 어디 있어요? 전부 다 몸 팔아서 돈 버는데.
㉱확대시켜버리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조리 다 뱀의 자손, 악마에게 분산된 악마에게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하죠.
㉲성령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되돌려줍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나라는 장소가 우리 주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여호와지요. 언약과 육신이라는 나의 뱀의 자손을 만나고 활동하는 장으로써 영토로써 우릴 활용한 걸 알 때 우리는 기꺼이 내 영토가 주께서 주를 위해서 하는 활동에 내어줄 때 찬송하리로다. 그래서 시편은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내 세계 갖추지 못하게 내가 나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죄악과 연계돼 있고 같이 합세돼 있는가를 깨달아서 오직 주의 십자가 외에는 다 이루심 없이는 다른 복음이 없음을 날마다 더 깊이 깨닫는 감사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