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70이레 논문(반복)131219-32강a-이 근호 목사
247 페이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바다의 짐승, 원래 짐승은 땅에 사는데 왜 바다에서 올라왔다고 말하느냐 하면 바다에서 올라오게 되면 땅에 있는 시간에 느끼지 않습니다. 땅에 있는 모든 역사, 시간을 무시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바다는 땅의 역사, 시간 개념이 적용이 안 됩니다.
그래서 여기 땅에 올라온 짐승은 비록 땅에서 이렇게 활동을 하더라도 해석에 있어서는 시간을 초월해서 해석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당신 고향이 어디입니까?’ 하면 ‘나는 거제도입니다.’ ‘나는 제주도입니다.’ ‘나는 울릉도입니다.’ 할 수가 있잖아요. 당신 고향은 어디입니까? ‘나는 바다 속입니다.’ 이렇게 바다 속이 고향이라면 추석 때 어디로 가야 돼요? 바다 속으로 기어들어가야 되겠죠. 해초 헤치고 바다 밑바닥까지 가야 되거든요.
그럴 때 육지에서 놀던 모든 시간 개념 이런 것은 바다에는 적용이 안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다에서 온 짐승이라는 것은 이것은 너희들이 지금까지 땅에서 같은 유, 같은 나라들, 우리가 저 나라하고 외교적인 관계를 맺으면 잘할 거야, 우리가 힘들 때 도와줄 거야. 옆 사람이 바로 아파트 옆 사람 같으면 어려울 때 도와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북한의 간첩 같으면 안 도와주죠. 다른 영역에 속했기 때문에.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잘만 하면, 살살 빌면 도와줄 수 있는 같은 종류 국가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바벨론? 바다에서 올라왔는데? 이렇게 되는 거예요. 바다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바벨론 자기 본인들도 자기 좋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치는 게 아니고 이거는 어쩔 수 없이 쳐야 하기 때문에 친 거예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지만 인간들이 그동안 육지라는 그 범위 내에서만 한정돼서 세상을 봤다는 거예요. 설마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올 줄은 아무도 생각 못했죠. 같은 육지에 있는 나라끼리, 우리 이웃끼리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덜렁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고 바벨론을 지칭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너희들이 알고 있는 이웃나라 바벨론이 아니고 그냥 애굽 같은 그런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특수한 임무를 수행해야 될 나라가 바로 바벨론이죠.
그 뒤에 줄줄이 나오는 나라, 바벨론 다음에 메대 바사, 그 다음에 헬라 마케도니아, 그 다음에 로마, 이 모든 움직임이 다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 다니엘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에 준해서 그들은 꼼짝 말고 그대로 움직이게 돼 있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계시를 안다는 것은 이미 세상을 다 안 셈이 되거든요. 이미 세상을 다 안 셈입니다. 여기 이게 ‘비타 천 플러스’ 라는 게 동아제약에서 나왔네요. 별로 선전이 안 된 거니까 꼭 이단적인 느낌이 드네요. 이걸 봤을 때 우리가 아는 ‘비타 500’은 많이 아는데 이건 ‘비타 천 플러스‘ 하니까 뭔가 중국산인가 이런 생각도 든다 말이죠. 그래서 낯설죠.
그래서 앞으로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기 때문에 기존의 너희들이 다른 나라 사귀던 식으로 사귀면 먹히지를 않죠. 낯선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어디에 움직이는가?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오시는 그분을 위하여 그들은 움직여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짐승들은 누구를 기다려요. 이스라엘을 치려고 짐승들이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오실 분이 있어요. 인자 같은 분! 메시야! 드디어 바다와 하늘의 만남의 장소가 뭐냐 하면 엘젤리너스 커피점이란 게 있데요. 거기서 만나는 게 아니고, 유대 땅에서 만납니다. 성전에서 만나죠. 성전에서 바다와 땅은 빠지고 하늘의 만남! 바다와 하늘의 만남에서 최후의 전쟁이 드디어 진검승부에 들어가서 한번 붙어보자 이 말입니다.
붙는 무기가 뭐냐? 칼? ‘스타워즈‘라는 영화에 보면 손잡이는 보통인데 앞에는 번쩍번쩍하는 레이저? 광선 검 가지고 하죠. 어릴 때 애들이 많이 놀잖아요. 지금 바다에서 올라온 이 짐승과 하늘에서 내려온 짐승이 들고 있는 무기가 뭐냐 하는 겁니다. 무기가 이겁니다. 시간, 다른 말로 하면 이게 ’때‘에요. 과연 올 때냐? 아니면 안 올 때냐의 싸움 이예요. 그 때, 때의 싸움 이예요. 무기가 총도 아니고 흔히 영화에서 보는 원자폭탄도 아니고 많이 시시하죠.
무슨 ‘때’가 무기가 되느냐? 이렇게 하는데 여기 예수님께서는 이 ‘때’를 노리고 차고 들어옵니다. 때가 있다는 말은 이미 계획 잡혔다. 계획이 잡혀 있어요. 스케줄이 이미 딱 짜졌어요. 이제는 고 때가 되매 딱, 딱 오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들은 그 때를 희석시키면 되겠죠. 그런데 그 때를 희석시키려고 하는 고 행위 자체가 이미 그 스케줄에 의하면 반드시 고런 행위가 고 때에 포함이 되게 돼 있어요. 그러니 악마도 환장할 지경 이예요. 악마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그건 반드시 그렇게 하게끔 돼 있도록 돼 있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이 세상에 비타 500이 돼 있는데 비타 1000이 나오게 돼 있다 이 말이죠. 왜 그러느냐 하면 비타 500하고 지금 거래상 싸우게 돼서 미워서 그래서 동아제약은 이걸 만들었는데 비타 500에서는 그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이거 나오면 이게 나올 거라고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모든 것이 다 짜여 진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지을 때 바다에서 온 짐승은 저 성전을 부숴야 되거든요. 부숴버리는 그것이 주의 스케줄에 부수는 그것도 그 과목에 들어있어요. 둘째 시간에 부수는 거예요. 첫째 시간은 성전 세우는 시간, 둘째 시간은 성전 부수는 시간, 셋째 시간은 그 부서진 그 현장에서 다시 성전을.
제가 이야기하는 건 그거에요. 마귀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주님 왜 이러십니까? 주님 이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라고 할 수 없는 게 이게 스케줄 속에 포함됩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기는 게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가 죽잖아요. 목 베인 영혼이 죽잖아요. 죽을 때 우리 같으면 ‘예수 잘 믿는데 왜 죽이십니까? 결국 예수 잘 믿는 대가가 이겁니까? 이런 식으로 당한다면 누가 예수 믿겠습니까?’라고 우리는 불평할 수가 있는데, 성도가 뭐가 성도냐 하면 이게 자기가 죽는 것도 스케줄에 포함돼 있는 사실인 것을 제가 이렇게 눈치 채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게 성도에요. 내가 죽을 차례가 돼서 죽는 이것도 다 주님의 때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게 아니고 이걸 알아채게 하신 것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찬양한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러니까 마귀가 성도한테는 갊을 게 없어요. 죽여도 안 돼, 죽여도 감사하는데 뭐 더 이상 어쩌란 말입니까? 이걸 해도 ‘주께서 다 때가 되셔서 하신 것이라.’ 하고 죽여도 ‘죽을 때가 돼서 죽겠지.’ 하고 그래서 마귀가 어떻게 유혹할 게, 꼬일 건더기가 전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주님의 때를 안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그 때를 요약해 보면 70이레에요. 70이레 속에 다 포함돼 있습니다. 슬슬 그 보따리를 풀어봐야죠. 247 페이지, 70이레가 오늘 강의로서 끝나고 다음에는 252 페이지 하시죠.
247 페이지 위에서 여덟 번째 줄에 『이것은 성전 중심으로 짐승의 나라를 정복시키고 인자의 나라를 설 수 밖에 없음을』『여기 다니엘 11장에 보면 남, 북 앙들의 자기네들 싸움을 벌이지만 본의 아니게 그 가운데 끼인 성전은 짐승의 성질에 의해 피해를 입게 된다.』요게 70이레 가운데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62이레에 해당됩니다. 남, 북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짓밟고 지나가니까 그 와중에서 누가 깨집니까? 성전이 다 깨지는 거예요.
그런데 성전을 누구 도움으로 성전을 짓느냐 하면 짐승의 나라 도움으로 성전을 짓습니다. 성전을 세워지는 것이 짐승의 나라, 짐승이 어디 산다 했습니까? 짐승은 바다에 산다 했죠. 바다에 살기 때문에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그 해석에 있어서 지상의 역사로서는 해석이 안 됩니다. 지상의 시간적 의미로서는 해석이 안 돼요.
그러면 지상의 해석이 어떤 것이 있느냐, 물으신다면 236 페이지부터 237 페이지 138 페이지에 나오는 해석들이 바로 짐승이란 것의 의미는 모르고 같이 옆에 있는 지상의 그렇고 그런 같은 옆에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나온 해석이 이 해석입니다. 70이레를 묵시적 해석으로 하지 못하고 역사적 해석으로 내놓는 거예요. 이 신학자들의 면면을 보게 되면 최 만수, 최 영헌, 그 다음에 칼빈, 칼빈은 어디서 많이 들어봤죠? 카알, 류폴드, 그 다음에 몽고메리, 장군이름 아닙니다. 포르튀우스, 헹스텐베르그, 하젤, 에드워드 영, 최 영헌, 전부 다 주석 꾀나 썼고, 그 다음에 간하배, 합동 측의 유명한 외국인 신학자고, 이런 사람들이 낸 해석이 역사적 해석을 냈다 하면 이 밑에서 배운 모든 학생들도 기껏 아는 것이 이들이 모든 주석을 이렇게 해석하니까 모든 학생들도 이렇게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70이레는 과거사건 이예요? 지금 사건 이예요? 옛날 지나간 사건 이예요? 옛날 이미 한물 지나간 사건 이예요. 아무 상관없는 사건 돼 버리죠. 70이레가. 그러면 70이레 할 것도 490년 하면 쉬울 것 가지고 70이레가 되는 겁니다. 한 때는 다니엘이 그때는 유대나라가 바벨론과 싸웠다. 바벨론을 옆에 있는 현재 이란 지역이 바벨론이거든요. 그러면 이란이잖아요. 이란이 어디 바다에서 기어 올라옵니까? 카스피해에서 기어 나옵니까? 이란이 왜 나와요? 이란은 옛날부터 그 지역에 살았었어요. 바다에서 올라온 적이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성경을 믿고 싶어도 어지간히 황당해야 믿지, 아니 바벨론이 왜 바다에서 올라오고 알랙산더 대왕이 바다에서 왜 올라와요? 알랙산더 대왕은 별로 물도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수영도 잘 못하는 것 같은데 그게 왜 바다에서 올라옵니까? 지중해서 올라온 거예요?
해석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냥 ‘그냥 넘어갑시다.’ 그냥 넘어갈 게 있지, 하나님께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면 그 바다가 무슨 바다며, 왜 멀쩡한 나라, 육지에서 잘 되고 있는 나라, 옛날부터 육지에서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 문제를, 바다에서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입니다.
여러분, 귀신 씌워봤습니까? 귀신 씌듯이 성령이 씌지 않으면 아무도 하늘나라 볼 자가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성령의 내림을 받아야 돼요. 칼자루를 타든지 작두를 타든지 그런 식으로는 안 되겠지만 성령 받지 않으면 아무도 하늘나라 못 갑니다.
그래서 성령 받는다는 것은 이 육을 공격하잖아요. 요한복음에서 육의 반대가 뭡니까? 영이죠. 그런데 다니엘에서는 뭐냐 하면 땅이 육을 대표하고 하늘과 바다가 영의 세계를 대표합니다. 다니엘 없이 그냥 영이라 한다면 육은 육이고 영은 이걸 어렵게 말하면 비-구체적, 그냥 수증기 같은, 귀신같은 거가 나타나는 거라 생각하잖아요.
다니엘에서의 바벨론 메대 바사, 페르시야, 분명히 아리우스 3세 같은 경우는 이건 유명한 …전쟁해서 실제로 있어요.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이 실제로 있었잖아요. 알렉산더 대왕이 헬라 마케도니아 세웠거든요. 로마? 로마가 실제로 있었잖아요. 실제로 있는데 그걸 뭐로 간주하느냐 그걸 영으로 간주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아기 예수 태어났을 때 누가 있었습니까? 헤롯 대왕이 있었죠. 헤롯 대왕이 그냥 헤롯 대왕이잖아요. 북한의 김정은, 김일성이라 보면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짐승으로 보는 거예요. 본디오 빌라도, 분명히 그는 아저씨잖아요. 그런데 그게 짐승이라는 거예요. 가룟 유다, 그런 아저씨 있죠. 그런데 분명히 사단이 있는 거예요. 지금 사람들이 제일 안 되는 것이 어떻게 영과 육이 만나고 어떻게 헤어지고 하는 관계, 그 메카니즘, 어떤 논리적 관계, 어떤 과정 어떤 공정과정을 거쳐서 이렇게 일치가 되느냐, 그걸 사람들은 설명 안하고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 버려요.
그게 넘어가 버리니까 로마서 6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이거 신학교 갈 때 내가 신학 교수한테 물었어요. 물으니까 신학 교수가 답변 할 수가 있어요? 나중에 이유를 알았지, 신학 교수가 이런 걸 답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 하면 신학교를 쫓겨난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지만. 몰라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이게 무슨 말이냐 말이죠. 우리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우리가 왜 죽긴 왜 죽어요? 3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가 언제 적 그리스도인데“ 이 이야기를 하는 사도바울도 예수님 만난 적 있습니까? 실제로 땅에서 만나서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한 적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냥 다메섹에서 만났지. 실제로 만난 적 없다고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요? 키가 얼마쯤? 인물 훤하게 잘 생겼어요? 장 동건 만난 걸 예수님 만났다고 하는 건 아닙니까?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이 이렇게 우리는 얼렁뚱땅 그냥 넘어가 버리는 거예요. ‘믿자.’ 믿자는 것은 모르겠다는 뜻과 같은 말로 쓰여 지거든요. 모르니까 믿자, 하니까 믿는 걸로 때우자, 이런 식이다 말이죠. “합하여 세례 받아서 우리는 죽고” 우리가 언제 죽었는데? 또 다시 살았대요. 우리가 언제 살았는데요. 언제 부활됐습니까? 아직 우리 몸은 그대로인데 부활된 꼬라지 좋다. 추워서 벌벌 떠는 게 부활된 겁니까? 눈 오는데 미끄러져서 어깨도 다치고 이게 부활된 몸 이예요? 골병든 몸이지.
로마서 6장의 이걸 제가 순수한 마음으로 그때 신 성정 교수한테 이걸 질문했더니만 답변을 안 해줬어요. 솔직하게 ‘나는 모르겠다.’ 해야 되겠죠. 그런데 성경에 버젓이 나와 있습니다. 뿐만 아니고 바다에서 온 짐승, 그거 왜 꼭 바다라는 말을 왜 집어넣어야 됩니까? 바다라는 말이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이래서 여전히 누구나 답변을 못하죠.
심지어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브라함 왔다. 야곱 왔다. 하지 말고 바로 예수님이 오시면 될 건데 아브라함을 왜 보내고 이삭을 왜 보내고, 그냥 바로 선악과 따 먹자마자 예수님이 바로 가서 구원하면 그저 간편할 걸 가지고 뭣 때문에 앞에서 아브라함을 왜 보내고 엘리야를 왜 보내서 수모 당하게 합니까? 그냥 바로 오시지.
이런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길게 할 것 없이 돌직구로 해답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우리의 몸이 이게 육 이예요. 육체란 말이 아니고 이게 육이라 할 때는 이게 묵시적 개념 이예요. 우리는 우리 몸을 가지고 묵시적 육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냥 육체의 의미에서 육체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육체니까 그냥 과학적 관점으로 들어가면 60개조의 세포로 돼 있습니다. 세포로 돼 있으니까 맨날 생각하는 것은 무슨 음식을 안 먹으면 암에 적게 걸리고 어떻고 혈당 낮추려면 뭘 먹으면 되고 맨날 그거만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를 육이라 할 때는 이건 육신적 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묵시적 의미에서 육이라 했을 때는 이것은 뭐냐 하면 악마가 이미 우리를 통치하고 지배하고 죄가 지배하고 있는 그런 관계 속에 우리보고 육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를 육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를 상대를 안 해요. 우리를 뒤집어 씌운 마귀하고 상대한다니까요.
이게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냥 마귀 집에 아무 소리 못하고 놓여 있는데 어느 밤중에 도둑놈이 들어와서 주인 묶어놓고 우리를 그냥 데려가면서 ‘됐어. 이제는 출애굽이야. 구원받았어.’하고 데려가니까 우리는 눈 오는 추운 날에 벌벌 떨면서 옛날 주인을 그리워하면서 뒤돌아보면서 눈물지으며 ‘이상하다. 웬 주인 등장해서 날 납치해 가는데 보쌈해 가는데 내가 기분 좋기는 좋지만 그래도 정은 옛 정은 있어서, 왜 육체는 남아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님한테 구원을 이미 받은 상태이면서 계속 뭐를 흘려요. 뭐냐 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그렇게 그리워지는 겁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뭔가 티를 내고 싶어요. 이대로 조용히 죽기 싫어요. 뭔가 큰 건수 터뜨리고 노벨상 한번 받고 죽고 싶어요. 뭔가 큰 상품을 타고 죽고 싶어요. 뭔가 묵시적 의미의 죄를 흘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가지고 ‘밥 먹고 살다 보니까 그런 걸 가지고 묵시라고 고상한 말 걸치지 마라. 나 그거 모른다. 그냥 시장에 나가서 나물 팔고 그걸로 애 공부시키고 할 뿐이다.’ 그게 바로 마귀의 짓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육신을 살려고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그게 바로 묵시적 개념으로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하고 한 통속이 돼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약에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신약에서 무기가 뭐라 했죠? 무기가 시간이니까 ‘제가 언제 주님과 죽었고 언제 살아났습니까?’라고 묻는 질문은 성립이 안 됩니다. 왜, 우리가 말하는 언제, 몇 월 몇 시 몇 분 동안 이런 시간 개념은 묵시 적에서는 통하지 않아요.
그럼 통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반복성 이예요. 반복성! 매일같이 죽이시고 매일같이 살려내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 11절에 나오죠. 날마다 우리를 죽음에 넘기우고 날마다 우리를 살려내는 거예요. 우리 보기는 매일같이 반복된다 하지만 주님 보기에는 단번 이예요. 주님의 시간에 의하면 그 단번을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을 풀어내면 매일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매일 우유 받아먹을 때 ‘아주머니, 우유 넣어주세요.’ 이러면 되지, ‘매일 넣어주셔야 됩니다.’라고 이 소리 안 해도 매일 우유는 매일 들어오게 돼 있어요. 한 달 끊으면 하루 오고 ‘내일 또 와야 되는데.’ 이렇게 안 그래도 한 달 끊으면 계속 매일 우유 오게 돼 있어요. 물론 서울 우유 좋아하는 사람은 서울 우유 오게 돼 있고 오게 돼 있다 이 말이죠.
우리가 한 달 치 끊었습니까? 천년치,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이, 주께서 한번 끊으면 묵시적 시간 개념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이거는 매일같이 영원토록 반복해서 우리에게 계속 살려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묵시적 시간 개념을 만약에 잊어버리면 그때 들이닥치는 것은 악마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악마의 무기가 시간이거든요. 주님의 무기도 시간이고, 때다 말이죠. 악마가 우리에게 들이닥치면 ‘어제까지는 잘 믿었는데 내일 되면 내가 믿을지 안 믿을지 참 골치 아프다. 몇 년 뒤에 내가 침해 걸리면 내가 믿을지 골치 아프네.’ 여전히 우리가 육신에서 나온 시간 개념을 유지하게 되면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자꾸 오해를 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네 몸은 죽었고 이제는 네 몸이 아니고 묵시적으로 네 몸은 죽었고 묵시적으로 예수와 함께 있는 몸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었다. 혹은 네가 예수 안에 있다. 이렇게 해서 자꾸 뭘 지우느냐 하면 시간을 지워버려요. ‘너 복음 아느냐?’ ‘압니다.’ 그러면 네가 알고 있던 시간 개념을 자꾸 없애버리는 거예요. ‘이미 다 이루었다.‘ 하는 그것을 계속 적용시켜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간을 느끼는 것은 뭐냐, 교체하라는 거예요. 자꾸 시간을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과 묵시적 시간을 자꾸 바꾸어 나가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바꾸어 나가면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서 우리의 육신은 과거에 알던 것을 지금의 내가 알고 그리고 앞으로 또 좀 있으면 미래가 올 것이라 이렇게 생각하는데, 묵시적 개념은 뭐냐 하면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미래가 완성되었으니까 완성이 미래가 현재를 거쳐서 과거로 가버리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은혜를 조금 받았을 때는 ‘하나님, 이렇게 눈이 많이 오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더 받으면 ‘1년 전에 내가 시험에 떨어진 것을 감사합니다.’ 가 되고 은혜 더 받으면 ‘내가 이 씨 집안에서 태어난 걸 감사합니다.’가 되고 예레미야처럼 은혜 더 받으면 ‘주여, 태중에서부터 이렇게 택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되고 사도바울처럼 은혜 더 받으면 ‘창세전부터 저를 이렇게 택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미 미래가 우리가 과거라 생각하는 거기에 이미 가 있었던 거예요. 가 있게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육신의 시간인데 성령이 덮치니까 우리가 기껏 육신의 시간이라고 있었던 그것이 사실은 육신의 시간이라는 것은 마귀가 주는 오해였고 전부 다 묵시를 위한 우리의 몸이었고 그 몸에서 나오는 느끼는 모든 시간도 묵시를 증거 하라고,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주신 그러한 몸이라는 사실을 소급해서 우리는 다시 이 순간에 깨닫게 되는 겁니다. ‘참, 그때 내가 재수 잘했지. 재수 안 했으면 내가 예수 못 믿었어.’ 이런 거. ‘그때 후방 빼달라고 그렇게 했는데 후방에 빠졌으면 내가 예수 안 믿었는데 전방 갔기 때문에 예수 믿었지.’ 모든 걸 소급해서 감사할 게 점점 더 많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부사이라도 그냥 오늘 해준 것 ‘맛있다. 고맙다.’ 하지 마시고 소급해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네가 나한테 이렇게 시집 온 것은 내가 다시 한 번 두고, 두고 고맙다.’ ‘이 사람이 약을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그러느냐.’하고 나오겠지만. 항상 소급해서, 이 시간에 이만큼 성경 공부 하러 온다는 게 얼마나 큰 자유를 누립니까? 그러니까 감사하세요. 그러니까 감사 안 할 게 없어요. ‘당신이 나한테 그때 바가지 잘 긁었어.’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소급해서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에게는 하지 마세요. 개한테 진주 던지는 것이 아니에요. 괜히 했다가 약점 잡히죠. 귀한 복음을 함부로 남발하지 마세요.
다니엘에 있어서 기쁜 것은 다니엘이 70년이 돼도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것은 그 미래가 자기 몸에 덮치니까 자기 몸이 역사적 몸인 줄 알았는데 역사적 몸이 아니고 이게 바로 그리스도를 앞당겨 증거 하는 미래에 속한, 미래에서 온 코난, 미래에 속한 몸이다 말이죠. 그래서 나온 계시가 이레가 나와요. 시간이 나온 것이 아니고 70이레가 나와 버린 거예요. 미래를 품고 미래를 짊어지고 사는 사나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이미 자기가 미리 알아채게 된 거예요. 시험 치나 마라 100점이예요. 왜 자기가 알고 있는 그대로 (여기서 말조심해야 돼요.) 역사가 흘러가는 게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 묵시가 흘러가니까. 야, 이거 중요합니다. ‘목사님 미래를 아시면 우리 애가 이번에 대학원서 3군데 냈는데 되겠습니까?’ 이런 역사에 대해서 물어보면 마귀한테 들린 점쟁이한테 물어보고, 내가 아는 것은 묵시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주께서 구름타고 오십니다.’ 이런 거. 주께서 구름타고 오신다는 거예요.
이게 허황된 겁니까? 바벨론 제국이 없었습니까? 다니엘이 실제 인물이잖아요. 헤롯이 실제 인물이잖아요. 하지만 헤롯은 본인이 몰랐죠. 본인이 묵시에 포함됐다는 걸 모르고 다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으니까 자기 아들에게 물려줘야 될 자칫하면 백성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분에게 경배해 버리면 자기 족보가 세습제가 안 되잖아요. 그럼 사전에 아버지가 와서 이 자리를 탐할 수밖에 없는 그 인간을 사전에 애였을 때 제거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해서 베들레헴 2살밑에 애들을 다 죽이는 것, 이건 누가 생각해도 역사적 판단력이 되는 건데 성경은 그걸 뭐로 봅니까? 그건 아기 예수를 노리는 호세아 말씀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묵시적으로 움직였다고 보는 거예요. 그 사건만 그럴까요? 모든 사건이 다 이미 예수 오시고 난 뒤에 역사란 없고 모조리 전부 다 묵시만 남았다. 묵시적 안목 가지고 세상과 성경과 모든 세상을 다 해석하는 것이 이게 옳다. 그걸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그것을 한 자로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그게 뭐냐 하면 층! 몇 번 했지만 하도 강의가 어려우니까 층! 층은 아래층, 위층이 서로 교류되지 않습니다. 위쪽 층에 이미 있어버리면 마치 이 밑바닥이 유리가 있어서 저쪽에서는 노는 건 보이는데 이쪽에서는 안 보여요.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 역사에 묻혀 사는 사람들, 박 근혜는 이 묵시 세계를 몰라요. 왜, 지금 대통령 사퇴하라는 사람들, 이 골치 아픈 그것만 생각하지, 사퇴하나, 안 하나, 상관없는 그런 층을 생각한다면, 혹시 압니까? 성령 받아서 그런 소리 하려는지 내가 장담 못하겠는데, 어쨌든 위쪽 층에 있는 것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여기(아래층)서 죽인다, 살려줄까, 죽여줄까. 이렇게 까딱까딱 대지만 이 위에서는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는 말씀의 층이 성립되는 겁니다.
말씀의 층이기 때문에 위층에 있다는 걸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느냐 하면 아래층에 노는 수작이 다 눈에 보이죠. 수작이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나를 위하여” 여기서 출발해서 백날 가봤자 띵! 하고 도로 어디로 옵니까? 나를 위해서. 예수 믿고 주님을 위해 충성해도 백날 해봐야 결국은 ‘아이쿠,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 결국은 그럴 거잖아요. 평소에도 그렇고 항상 나! 그 나를 사수하기 위해서 그냥 거창하게 종교를 믿는 것뿐이지.
위층에서는 ‘나’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위층의 특징은 뭘 해도 도로 예수님한테로 도로 와 버려요. ‘나’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나에게 머물 수 없고 나보다 예수님이 먼저 있었다는 사실, 나보다 예수님! 나라는 육체보다 말씀이 먼저 있었다는, 그 말씀이 나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기 나중에 여기 있었고, 그렇게 되죠. 이 이야기 누가 했습니까? 세례자 요한이 이야기했죠.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앞선 것은 그분이 먼저 있음이라.“ 그분이 어디 있다 했습니까?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거 합니다. 그분이 어디 있다 했죠? 그분은 하나님의 품에 있는 독생자! 하나님의 품에 있죠. 하나님의 품에 있으니까 여기는 뭐가 날라 가 버리느냐,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개념 둘 다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바다가 올라왔다 하는데 바벨론 나라가 올라온 바다가 지중해입니까? 태평양입니까? 대서양입니까? 그런 바다 없죠. 따라서 그런 왜냐 하면 그건 짝을 이루거든요. 여기 인자의 나라가 시간과 공간적으로 다른 층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파악 못하는 것처럼, 인자의 나라에서 봤을 때 비로소 이 바벨론이나 메대 바사는 바다에 속했다. 바다라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그 지역이나 공간이나 그런 것은 아니에요. 바다는 짝을 이루는데 누가 나타나야? 인자가 나타날 때 비로소 바다의 짐승도 같이 나타나게 되고 인자가 사라지면 바다도 같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그냥 고만고만한 이웃나라, 힘센 이웃나라 바벨론, 칼싸움 잘하는 페르시아 나라, 그리고 용기 있는 알렉산더 나라, 그리고 화려한 문화와 문명을 자랑하는 로마의 제국,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그거에요. 지금도 비행기 타고 이태리나 로마 유적지 가보세요. 거기서 묵시를 발견합니까? 무슨 묵시를 발견해요? 유적지 보세요. 고린도 식, 도리아 식, 이오니아식, 석주들만 죽 남아있는데 옛날 도로 있잖아요. 그럼 그 앞에서 기념품 팔고 있고 나중에 내려오게 되면 피자집이 있고 파스타도 팔고 있고 거기 무슨 묵시가 있습니까? 우리와 똑같은 성정이 같은 사람들만 똑같은 신체 있는데 거기 무슨? ‘실례하지만 아저씨 바다에서 올라왔어요? 어느 바다에서 올라왔어요?’ 물으면 개떡 같은 소리 한다 이 말이죠.
하지만 묵시적인 존재로서 살아가게 되면 바다가 보이죠. 짝을 이루니까. 묵시는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바다를 바다답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하는 겁니다. 바다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바다의 특징은 기존의 있는 시간과 공간에 저촉 받지 않는다 말이죠. 왜냐, 바다, 하늘 다 묵시적 개념이기 때문에.
따라서 요한계시록에서 큰 성 바벨론 하게 되면 바벨론 어떤 특정 공간만 바벨론이 아니고 이 모든 이 세상 전체가, 월드컵 여는 모든 나라가 전부다 바벨론에 해당되는 겁니다. ‘당신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느냐?’ 그거는 인자의 나라가 등장하게 되면 세상 나라도 묵시적 개념으로서 바뀌게 되는 거예요. 이제 이해되시겠죠?
여기 세상 나라 있고 따로 인자의 나라나 따로 바다의 나라가 있는 게 아니고 현재 있는 바벨론 나라가, 우리가 보이는 바벨론 나라가 주님의 해석에 의해서 이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된다면, 내가 있는 이 책상이 곧 하늘나라가 되는 거예요. 하늘나라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하늘나라가 따로 있으려면 바벨론 있는 바다도 따로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 만든 창조세계는 이것뿐입니다. 이것뿐인데 해석 층이 3개가 있어요. 하나는 땅, 밑에는 바다, 저쪽에는 하늘, 해석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7이레, 62이레, 1이레, 해석을 그렇게 해버리는 겁니다. 해석을 이렇게 했지만 해석과 맞아 떨어지는 그 모든 것은 우리 육신을 갖고 있는, 역사적 입장에서 봐서는 그냥 아무리 봐도 보통 나라라. 마치 예수님이 식사하고 있을 때 현미경이나 돋보기 들고 와서 ‘예수님 관상보고 하나님 아들인지 아닌지 지금 검사하고 있습니다.’ 검사해 보면 예수님 주름 몇 개 보이고 그게 뭔데요? 아무리 봐도 이게 안 보이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9장에서 하신 것처럼 “네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소경이라 하니 본다.” 그걸 현미경을 들고 과학수사 CSI, 그게 와서 백날 조사해보면 소경이 눈 떴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 성경해석을 성경 펴놓고 눈 뜬 봉사라 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 알지 못하느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런 이야기가 현재 우리가 그냥 몸무게 달고 이거 똥배 재고 오늘도 좀 운동도 하는 이 몸을 두고 주께서 이런 묵시적 말씀의 층이 그냥 덮쳐지는 거예요. 덮쳐지게 되면 내가 나를 보는 것하고 주님이 나를 다루는 것하고 사용하는 거하고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룹니까? 그저 몸을 굴려야 그래야 하루라도 밥 빌어먹고 살겠니? 이래서 하루도 밥 먹고 살려고 몸을 굴리잖아요. 먹고 살려고. 그런데 주께서는 뭐냐 하면 주의 복음을 위해서 오늘도 살려주시는 거예요. 살려주시는 걸 모르고 우리는 스스로 힘으로 내가 나를 살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참새도 내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고 너희들 머리카락도 세시고 발걸음도 세신다 할 때 우리는 ‘농담하십니까?’ 이러는 거예요. ‘진짜 세신다면 해볼까요? 방금 몇 걸음 걸었습니까?’ 우리는 이런 장난을 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있는데 주께서는 뭐냐 하면 이렇게 장난치는 것까지 이미 포함이 돼 있어요. 주께서 장난치게 했기 때문에 장난친 거예요. 물론 한 번 더 장난치면 얻어맞지만.
하나님께 징계 받는다 하니까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징계를 여러 번 받으면 맷집이 생긴다는 거예요. 어지간히 받아도 이제는 끄떡없다 하는데. 감당할 이상의 징계를 주십니다. 맷집을 초과하는, 급수를 능가하는 맷집으로 하기 때문에. 사사기에 보세요. 사람들이 맨날 죄짓고 얻어맞고 후회해서 빌고 구원받고 난 뒤에 또 헤헤거리고 또 까불고 있죠. 그게 우리 모습입니다.
왜 묵시적 해석을 못하느냐 하면 맨날 옆에 있는 나라와 붙들어서 같이 재미가 좋으면 좋은데 묵시적 해석을 해야 될 텐데, 묵시적 해석을 못하고 역사적 해석밖에 못 해내는 게 우리의 육신, 그러니까 언제 이 육신에서 묵시로 옮겨갑니까? 이제는 내가 육신으로 할 도로 다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했는데 도저히 이제는 감당이 안 되는 것, 그때는 마지막에 ‘하나님, 어떻게 제 몸 바칩니다.’ 하는 그때에.
그때에 우리가 시시하게 봤던 사람을 데리고, 시시하게 봤던 사람, 시시하게 있던 숫자 가지고 300명 가지고 미디안 수만 명을 이기는 기드온 300용사, 스파르타 300명이 아니고 기드온 300명 가지고 승리케 하시잖아요. 무기 같지도 않은 무기, 그게 무슨 무기입니까? 나팔 불고 횃불 들고, 횃불도 조명용 이예요. 횃불도 던지는 게 아닙니다. 횃불도 자기를 비추는, 횃불이라 하는 것은 항아리에 횃불을 넣은 것은 그냥 번개 불처럼 그냥 비추는 거예요.
그러면 적의 군사들 왜 죽었죠? 누구 칼에 죽었습니까? 자기들 칼에 자기가 죽은 거예요. 그럼 그 이야기 듣고 우리 육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면 진작 하지, 진작 미리 알려주지, 진작.’ 진작 알려줘 버리면 내 육신이 묵시로 안 바뀌는데요. 그러면 그 승리는 의미가 없는 승리에요.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십자가 바라보라고 일어나는 사건이지, 내가 내 식대로 살아온 것처럼 어떤 힘을 모으라고 ‘이제는 주님 필요 없어. 모아진 힘 가지고 얼마든지 살 거야. 이만큼 돈 모아놨으니까 이제는 예수도 조금 있다 믿고…’ 그런 인간되라고 한 게 아니고 일용할 양식, 지금도 일용할 양식이라도 매일같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당장 굶어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한 사태가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조금 전에 어떤 분을 만났었는데 일찍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내도 돌아가셨는데 상당히 아직도 마음정리가 안 됐었어요.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런 걸 볼 때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자비를 베풀고 있는지, 그분도 물론 자비를 베풀지만, 우리는 이미 받은 자비에 대해서는 시큰둥하고 내가 원하는 것 달라고 또 시간 계산해서 ‘며칠 내에 주시렵니까?’ 또 시간 동원해서 며칠 내, 몇 달 내에 해주시려는지 닦달내고 이렇게 하는 육신의 모습 다시 한 번 우리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247 페이지 죽 내려가면 중간 밑에서 여덟 번째 줄에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농락당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었음을 알려주기 위해.』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있죠? 바다에 무슨 짐승이 삽니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물개 아니죠? 물개라 하는 것은 이미 육지에 있던 짐승이죠.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모양새가 어떻습니까? 그전에 육지에서 있었던 겁니까? 어떻습니까? 육지에서는 없는 건데 뭔가 육지 적 요소로서 기껏 잘라서 이 짐승에서 자르고 이 짐승에서 자르고 짐승, 짐승끼리 혼합된 모습이 아주 흉측한 모습의 짐승이죠.
그러니까 보통 바벨론 같으면 ‘야! 사자 같다.’ 하면 사자 같으면 우리가 이해되는데, 사자를 우리가 아니까. 이건 뭔가 혼합된 요소니까 그걸 해석을 못하죠. 바로 그 점입니다. 우리가 해석을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해석을 어디를 경유해야 돼요? 바로 우리와 똑같이 생긴 인자! 메시야가 올 때 바로 그분의 안목을 경유할 때 비로소 ‘아! 당신의 정체는 짐승이네.’하고 그제사 밝혀지는 거예요.
인간이 짐승이 이렇게 있다면 짐승을 바로 해석을 못하고 이 안에 뭘 경유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경유해서 할 때 비로소 이게 짐승이 짐승 됨이 보이거든요.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느냐는 거예요. 알아봅니까? 못 알아봅니까? 못 알아보잖아요. 우리가 못 알아본 상태에서 이렇게 아무리 짐승이라 해봐야 우리는 동의 못 합니다. ‘하나님, 짐승 아닙니다. 저 사람들 사람이고 저 사람들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페르샤라는 유명한 나라인데 주님 모르죠? 우리는 압니다. 페르샤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뭐라 해도 우리는 그냥 페르샤 제국이고 그리고 유명한 29살 먹은 알렉산더가 세운 헬라마케도니아 제국이고 로마라는 유명한 제국입니다. 얼마 전에도 여행 갔다 왔습니다. 잘 압니다. 짐승이라 하지 마세요.’라고 하다가.
그 사람이 성령이 임해서 예수님 관점으로 보니까 ‘야! 맞네. 야.’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그런 요소로서 너무 큰 나라 되니까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가 선망의 대상이 되는 나라에요. ’야! 나도 로마처럼 됐으면, 로마처럼.‘ 그래서 로마 망하고 난 뒤에 로마 이름 단 나라가 있어요. 유럽에서 내려온 게르만족은 로마를 저희들이 무너뜨리면서도 신성 로마제국이라 해서 오토 1세, 그 전에 독일 말로 칼 제국, 오토 1세, 그리고 칼 제국은 수도가 독일의 아헨, 거기가 신성 로마제국인데 그리고 그 뒤에 16세기에는 15세기에 동로마가 망하고 난 뒤에 몽땅 러시아가 가져갔어요. 러시아가 자기를 제 3의 로마라고 했습니다. 그 종교, 동방종교를 그대로 가져가서 그걸 러시아 정교회라고 합니다. 로마를 잊을 수가 없어요. 로마만 그리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묵시의 나라 인자의 나라와 결국은 맞설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은 그러한 세계관을 심어주는 나라, 그 로마가 확대해서 그 당시 근대 법치제도, 행정제도에 의해서 아프리카 저 빈민나라까지 전부 다 지금은 민주주의 제도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제도가 그리이스에서 나왔는데 이게 로마 공화정으로 돼요. 그래서 민주주의 제도나 자본주의 전부 다 로마의 속성입니다.
돈만 있으면 살만한 세상, 이것은 바로 복음이 필요치 않은 세상, 그래서 바 벨 론! 그래서 이게 짐승의 나라! 누구 눈에만 보입니까? 십자가를 경유한 자에게. 십자가에 죽으라 한 사람이 로마의 총독이었죠. 이름이 빌라도였죠. 로마가 예수님 죽음에 이방인의 대표로서 이미 개입을 했습니다. 그런 안목을 요구하는 거죠.
10분 쉬고 합시다.
가락-70이레 논문(반복)131219-32강b-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정말 중요한 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평소에 우리가 우리자신을 보던 그 안목 가지고 예수님을 이해하는 자체가 그게 예수님한테는 안 받아들여집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하나이다.’ 우리 같으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쉽게 나오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쪽에서 오버하셔요. “바요나 시몬아 네게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다.”라는 그 말을 베드로가 이해 못한 거예요. 그 말을. 자기는 쉽게 했는데 조금 있다가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사단이 왜 나옵니까? 사단은 묵시적이거든요. 사단이라는 것이 우리가 어디 있는 게 아니고 전부 다 사단은 해석 문제에요. 해석을 내가 알고 있는 관점 말고, 시선 말고, 다른 관점, 낯선 관점이 왔을 때 이게 사단도 보이고 인자도 보인다 말이죠. 우리는 그걸 볼 수 있는 눈을 못 가졌다 말이죠.
못 가진 이유가 뭐냐, 말씀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말씀을 백날 줘도 내 스스로는 내가 누군지 볼 줄 모르거든요. 내가 누군지를. 내 쪽에서 묵시를 만들고 내 쪽에서 천국을 만들고 현재 이 세상 말고 딴 세상을 만들어 놓으니까 그 만들은 세상은 이 공간의 연장에 불과하지, 그건 완전히 엉터리거든요. 하나의 환상이고 망상에 불과한 거예요.
그 망상을 뒤엎고 진짜로 천국이 올 때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모습으로 온 거예요. 진짜 no body, no body,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분이예요. 누가 믿었으리요. 제자들도 도망가 버렸는데, 베드로도 3번 부인했는데, 아무도 믿을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복음전하면서 기쁜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었음에도 이걸 믿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이건 소름끼칠 일 이예요.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믿느냐 이 말이죠. 막 때려주고 싶어요. 그걸 왜 믿어요?
우리가 ‘죄’에 대해서 봅시다. 죄는 우리가 나쁜 짓하는 게 죄잖아요. 이게 바로 마귀들 생각이라니까. 나쁜 짓하는 게 죄라는 이건 아직도 우리 몸이 선악과를 기억해요. 우리 몸이 선악과를 기억하니까 자꾸 나쁜 짓하는 걸 죄라 하는데, 죄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죄를 몰라요. 모르고 인자 되시는 분이 십자가 피를 흘릴 때 그 피를 볼 때 아! 뭔가 피를 흘리는 걸 보니까 그 피를 보고 있는 앞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피를 보거든요.
도마에게 뭘 보여줬습니까? 창자국과 못 자국을 보여줬잖아요. 창자국과 못 자국을 봤을 때 우리 같으면 ‘아이쿠, 예수님 창 찌를 때 아팠겠죠?’ 이렇게 이야기할 텐데 그게 아니고 ‘주여,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약 적으로 ‘구원하신 하나님 당사자 맞습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피를 보면서 그 피가 피라고 되기 위해서는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모두가 이유도 모르고 무조건 죄인 돼야 돼요. 우리가 죄인 되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가 묵시 층에 같이 소속돼 버려요.
그렇다면 예수의 피를 이해 못하는 모든 자가 이미 악마의 종이 되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걸 보니까 옛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모 당하던 수모를 우리가 같이 공감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옳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지금 우리가 이야기해봐야 알아듣는 사람 아무도 없죠. 그 이유가 뭐냐, 그들 나름대로 시간과 공간개념을 갖고 있었어요. 지금은 인류가 이렇지만 나중에 몇 년 뒤에는 잘 될 것이라든지, 지금은 이렇지만 ‘5년 뒤에는 예수 믿을게, 라든지 자기 나름대로 시간이 있고 내가 지금 여기 집에 있지만 교회 가면 은혜 받는다든지 어떤 공간에 가면 은혜 받고 은혜가 떨어지고 자꾸 공간과 시간에 의해서 도움을 받아서 어떤 영적 세계 시도하는 그 시도 때문에 예수님 돌아가셨거든요. 그 백날 해야 헛짓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헛짓이라도 헛짓이라고도 남아야 약간의 종교적인 위안이 되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안 하려고 하니까 섭섭하니까 뭔가 빌고 ‘주여’ 그냥 빌려니까 미안하니까 무릎 꿇고 그냥하면 미안하니까 손가락 구부리고, 그러다 찬송하니까 미안하니까 해병대 박수치면서 찬송하고 박수를 위에서 치면서 지어내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것이 무슨 짓입니까? 그거 아무 소용없는 짓이거든요. 회개해도 소용없는 짓이고, 회개 안 해도 소용없는 짓이고 헌금해도 십일조해도 소용없는 짓이고 헌금 안 해도 소용없는 짓 이예요. 주께서 그냥 죄 지으라고 사용할 뿐 이예요.
어제 수요일 날 설교 들었습니까? 거기 보면 신랑이 신부보고 죄지으라고 하죠? 네가 음녀가 돼 줘야 내가 신랑다운 거예요. 자기가 알고 있던 음녀 말고 신랑이 나타난 상태에서 음녀는 질이 다릅니다. 그건 뭐냐, 신랑이 없는 상태에서 음녀라 하는 것은 간통하고 바람피우는 걸 간음이라고 보지만 신랑이 있는 상태에서 음녀라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모든 것이 음란한 겁니다. 왜냐 하면 주변의 이웃나라에 있는 모든 이방종교가 공통점이 모두 자기를 위해서 신이 있기 때문에.
이 육신이 있는 한 자기를 위해서 안 살 수 없죠. 아무리 성령 받고 은혜를 받아도 자기를 위해서 살게 돼 있어요. 한번 돌을 던져볼까요? 던지면 피하죠. 돌이 날라 올 때 본능적으로 피하듯이 뭔가 왔을 때 본능적으로 자기부터 보호하는 이것이 우리 육신의 본능인데 자기를 위해서 안 살라니, 이게 말도 되지도 않는 이야기잖아요. 따라서 우리는 돌이 날라 올 때 맞지 말고 피하세요. 그리고 뭐 할 때 자기를 위해서 사세요. 그리고 말하세요. 뭐냐, ‘주여, 내가 음녀 맞습니다.’라고 하면 돼요. 참, 쉽죠?
내 본성에 의도적으로 이탈하지 마세요. 본능에 충실하세요. 본능에 충실하시면 그것이 바로 간음이란 사실을 새롭게 느껴지는 겁니다. 목이 마른데 ‘물 줘라.’ 하면 ‘저 먼저 먹고 가실게요.’하고 먼저 챙깁니다. 이거는 자식이 달라 해도 엄마가 물주는 법이 없고 엄마가 먼저 먹어요. 왜, 한번 주면 자식도 재미 삼아서 달래서 안 돼요. 버릇이 더럽게 들면 안 되거든요.
모든 것은 자식이고 뭐고 내 중심이다 말이죠. 그것을 돌이 날라 오면 피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모든 것은 항상 전쟁이 일어나면 보따리부터 싸는 거예요. 당연한 건데, 그 당연한 그것이 죄인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 앞에서 다시 한 번 우리는 피를 만나죠. ‘주여, 내가 묵시적인 기능인이군요.’ 묵시적인 기능인! 어떤 기능? 죄를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신랑 되신 예수님이 이 죄를 용서해줬다는 겁니다.
아까 어떤 분을 만나면서 이런 대화했어요. 저주가 있다는데 어떤 사람이 자꾸 저주가 있어서 저주를 풀어내라 하는데 ‘저주가 과연 아직도 있는 겁니까?’ 라고 질문을 하길래, 죄가 하나님의 원칙을 보세요. 사람이 뭐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원칙이 뭐냐, 죄가 있는 곳에 반드시 저주가 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떤 죄도 예수 믿든 안 믿든 어떤 죄도 죽을 때까지 죄 안 지을 수가 없어요. 반드시 저주는 오게 돼 있어요.
그런데 성도한테, 자기 백성한테는 뭐가 오느냐 하면, 죄 안 짓는 게 오는 것이 아니고 용서가 와요. 용서가 오게 되면 저주에서 자유케 되는 겁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것처럼 저주가 자유케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없이 하지 않고 용서를 주는 이유가 용서가 계속 주어져야 모든 것이 내 구원중심으로 원하는 세상이 아니고 예수님이 용서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데 우리는 거기에 긍정적으로 거기에 연관이 돼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어요. 우리 할 일이 뭐냐? 밥이나 먹고 떡이나 먹고 하는 게 할 일이 아니고, 주님이 용서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될 업무(할 일)가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죄를 계속해서 죄를 개발할 필요가 있어요. 죄를 계속 개발해야 돼요.
어제 수요 설교 들어보셨죠? 보니까 결혼하지 않은 7살 먹은 어린애가 무슨 간음죄를 짓느냐고 제가 물을 적 있죠? 간음죄라 하는 것이 보편타당성의 죄가 되려면 갓 태어난 애도 간음죄로 죽어야 돼요. 그것은 바로 갓 태어난 애도 육신에서 나왔기 때문에 오직 자기를 위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소식을 오직 자기 택한 새색시한테만 알려주고 다른 사람한테는 쉿! 비밀로 하는 겁니다. 이 사실을.
그래서 첫째 시간에 중요한 점은 뭐냐 하면 어디든지 시간과 공간 관계없이 어디든지 주께서 원하시면 어디든지 천국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어느 곳입니까?’라는 것은 역사적 질문이고, ‘언제입니까?’ 역사적 질문 이예요. 주님의 뜻은 어디든지 너희 안에 있느니라. 어디든지 천국 되게 하시는 겁니다. 언제 오실지도 주님 맘대로 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함이 이때이니까?” 라고 사도행전 1장에서 묻잖아요. 그런 것은 너희들이 “알 바 아니요.” 너희들의 시간 개념 가지고는 절대로 그런 것과 연결이 안 돼요. 연결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우리의 시간 개념과 묵시적 세계가 연결이 안 돼요.
248 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사도 바울이 예수님에게 신학적으로 한 수 배운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이 육이요, 악이 창궐하는 몸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몸은 주체나 자아가 손을 쓸 수가 없다.』요거 중요해요. 몸은 주체나 자아가 손을 쓸 수가 없어요.
지난주일 낮에 그런 설교 했잖아요. 짜증난다. ‘짜증난다.’ 가 바로 나이지, 내가 앞에다 짜증난다고 붙이면 안 된다 말이죠. 차라리 이렇게 붙이세요. 주께서 짜증나게 하신다. 누굴 향하여? 나를 향하여. 사랑할 때도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안 되고, 주께서 저 사람을 사랑하게끔 하셨다. 이렇게 하면 되죠. 왜냐 하면 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께서 사용하시는,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내가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 남의 물건 훔쳐 와도 도둑놈인데 주님 물건 내 맘대로 사용하는 것은 절도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주께서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주께서 화를 내시죠. 왜 남이 물건에 손대느냐. 말이죠. 안 되죠.
철도공사가 누구 것입니까? 철도공사 것이잖아요. 그런데 파업을 저희들이 왜 파업을 해요?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죠? 자기들은 시키는 대로 월급 받고 일하면 돼요. 철도공사 무너지면 저희들이 책임질 겁니까? 책임은 안지면서 파업은 왜 해요? 임자가 따로 있는데.
우리 몸의 책임자는 누구냐 하면 주님이잖아요. 주님이 죽이든 살리든 주님이 알아서 하는데 왜 우리가 화를 냅니까? 이게 굉장히 수상한 거예요. 뭔가 이질적인 요소가 스며들어온 겁니다.
주의 몸을 내 몸이라고 우기도록 뒤에서 부추기는 그 세력, 아주 못된 세력, 우리는 그동안 정이 흠뻑 들어서 마치 그쪽과 이야기가 잘 통하는 거예요. 특히 여자들 우는 것, 운다는 말은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어요. 누구하고? 이 몸의 주체는 주님인데 우리는 이 몸을 내가 주체라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주체라고 생각하니까 주체 뜻대로 안 되니까 우리는 눈물 흘리면서 그 헤어짐에 아쉬워하죠.
그동안 남의 몸을 이 몸이 자기 몸이라고 잘못은 자기가 저질러놓고 헤어지려하니까 헤어짐이 아쉬워서 엉엉 우는 거예요. ‘주여, 어쩌란 말입니까?’ 주님께서 ‘내가 너보고 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어쩌란 말이냐?’ 남의 몸을 자기 맘대로 사용해 놓고 이제 가져가려 하니까 ‘어쩌란 말입니까?’
249 페이지 『자아나 주체는 그저 자아의 주체성 조절만 수시로 해나갈 뿐이지 결코 죽고 썩을 몸을 썩지 않는 몸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몸 자체가 주저앉는데 아무리 고상한 자아, 경건한 자아, 순수한 자아, 자유로운 영혼, 자유로운 영혼하니까 그 친구 분 생각이 나에요. 그 친구 분 머리카락 안 희어집니까? 보세요.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해도 머리카락 희어지죠. 아마 조금 있으면 기억력 감퇴 오고 이빨도 안 좋아질 것이고, 왜 자기 맘대로 자기 몸 다루지, 이빨 안 좋아져도 안 되죠. 머리카락 안 희어지게 만들지, 기껏해야 염색밖에 더하겠어요? 염색하면 머리카락 소생합니까? 자기 몸 같으면 자기 뜻대로 왜 안 되는데? 솔직하게 내 주인 누군지 모르겠다. 솔직하게 이렇게 나오면 내가 약간 이쁜 맛은 있지. 뭐가 외계인이 어떻고….
분명히 우리 몸은 이 자아 것이 아닙니다. 이 자아는 추후 적으로 갖다 붙인 이미지에 불과하고 죄악 된 이미지가 자아고 실제로 이 몸은 주님의 것입니다. 정말 아담이 정말 주님을 주인이라고 여겼다면 ‘선악과 따먹지 마라.’ 했을 때 그걸 따먹을까 말까, 따먹을까 말까 갈등조차도 일어날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여기서 어떤 신학자들은 그걸 포인트로 잡았는데 이런 책이나 책상의 물건 같으면, 병 같으면 여기 있다가 굴리면 굴러 가잖아요. 이걸 ‘선악과 따먹지 마.’ 하면 안 가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거든요. 따먹었잖아요. 그게 바로 어떤 신학자는 그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다른 돌멩이나 병 같은 경우는 자유가 없어 시키는 대로 하지만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따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라고 한 거예요.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면서.
그게 일리 있는 이야깁니다. 이런 이야긴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키는 대로 따먹었다고 했을 때에 그것조차도 주님께서 의도했다는 생각까지 한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것은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고 해서 그걸 자유의지라고 하면 그건 범위가 너무 좁아요. 넓게 보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게 없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 팔아먹는 것도 이미 예수님이 알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어차피 자유의지를 발휘했다 하면 곤란하죠. 그리고 심지어 가룟유다가 자살하는 것까지, 땅 사는 돈까지 이미 예언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가룟유다도 영광인 줄 알아야지, 자기 인생이 성경에 예언돼 있으니 보통 영광이 아니죠.
묵시적 사건을 보는데 249 페이지 위에서 여덟 번째 줄에 『요한계시록의 7인, 7나팔, 7대접』이 나오죠. 7인, 7나팔, 7대접 나오니까 사람이 그렇게 숫자에 또 흔들리네. 숫자로 장난치고.
제가 우리교회에 설교 평해달라는 것 읽어보셨습니까? 삭개오 설교 가지고 평해놓은 거, 4자 가지고 설교시간에 장난치는 거 보세요. 그 사람들 자랑하려고 그걸 녹취해서 올려놨는데.
7인, 7나팔, 7대접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이걸 무엇입니까? 7인, 7나팔, 7대접을 할 때 사도요한이나 사도바울 같으면 ‘이것이 무엇입니까?’를 묻지를 않아요. ‘이것이 무엇입니까?’를 묻는 게 아니고 ‘이 일을 누가 하십니까?’‘를 묻죠. 이 인을 누가 떼십니까? 라고 물었죠. 참 중요한 질문 이예요.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알려만 주시면 우리가 떼겠습니다. 우리가 알아서 대비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지만.
‘누가 이 일을 일으킵니까?’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냥 덮쳐질 뿐입니다.’라고 수용하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주인 자리에서 물러가 있어야 돼요. 뭐든지 주인 자리에서 물러가 있고 주인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 있을 수 없고 주인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그럼 세상 모든 것이 예수님이 알아서 움직이는 겁니다. 움직인다면 7인, 7나팔, 7대접이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루신 것이 이 지상에 약속대로 벌어지면서 7인, 7나팔, 7대접, 7 숫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것은 바로 주님이 완벽하게 천지 창조할 그 능력으로 완벽하게 빈틈없이 진행한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빈틈없이 흩트림 없이 천지 창조 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7일 만에 창조했는데 모자랐습니까? 아주 만족했죠. 만족스러운 정도로 이렇게 한 거예요.
7이라는 것은 창조를 생각하세요. 7일 만에 완성한 것, 그 창조의 능력으로 다 하는 겁니다. 7인, 7나팔, 7대접, 7인이라 하는 것은 인은 도장이죠. 나팔은 빰빠라바빰~ 대접은 위에서 대접을 죽 붓는 것, 요 3가지는 전부 다 구약에 다 나오는 겁니다. 이건 다 전쟁용이라 보면 돼요. 찜이라는 것은 찜했다. 너는 표적이다. 너는 공격 표적이 되는 거예요. 너는 빼도 박도 못해. 나팔은 한창 전쟁이 치열하게 되는 거예요. 마지막 대접은 마무리, 심판의 철저함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7인이라 하는 것은 포장된 것에, 7인까지는 안 되지만 하나 인은 알 수 있어요. 청첩장 보내는데 봉투를 봉할 때 초를 녹여서 도장을 찍으면 딱 떼는 재미가 있잖아요. 그때 그게 인 이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인은 몇 개입니까? 1개떼고, 2개떼고, 3개떼고, 4개떼고…뗀다 말이죠. 이미 표적은 딱 고 안에 담겨 있어요. 누가 적이고 누가 공격의 대상인지 그 안에 담겨있어요. 사도요한이 뭐라고 웁니까? ‘누가 이 인을 뗍니까?’라고 돼 있죠.
지금 인을 하면서 이레라는 것은 시간 개념이죠.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시간(이레) 개념에서 어디까지 확대되느냐 하면 전 역역에 있어서의 이게 심판으로 확산됩니다. 7이레에 대한 천지창조에 속해 있는 그 안에 시간으로 모든 것이 시간화 되어있어요.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다 이 말이죠.
나 같으면 1부터 떼질 않아요. 7부터 떼요. 7, 6, 5, 4, 3, 2, 1, 더 멋있잖아요. 창조는 1, 2, 3, 4, 5, 6, 7, 그런데 나 같으면 7, 6, 5, 4, 3, 2, 1, 이렇게 하겠는데 왜 주님께서는 1, 2, 3, 4, 5, 6, 7, 이렇게 떼느냐 하면 구약에 이스라엘 역사의 안식일이 1, 2, 3, 4, 5, 6, 7, 1, 2, 3, 4, 5, 6, 7, 해서 천지 창조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증거를 보고 있으니까 우리가 안식일 지키는 우리 집단 보세요. 우리 집단을 통해서 우리 집단이 안식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도 이스라엘 통해서 계속 역사하고 있습니다. 라고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빼놓고 많은 지역이 넓어도 진짜 창조의 핵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독점해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건드리면 뭘 건드린 거냐? 이건 엔진 부분을 건드리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축복하면 축복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거예요. 운명은 그들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결정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안식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이 형식적으로 안식일을 드린다면, 이스라엘이 만약 말씀을 위반하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스라엘이 제대로 못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 내부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자생하도록 만들면서 이제는 이스라엘이 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고 내부에서 올라온 진짜 이스라엘과 가짜 이스라엘 싸움이 되겠죠. 고것이 구약입니다. 고 구약을 고대로 진짜 이스라엘과 가짜 이스라엘이 싸우는 그 작은 부분을 들고 고걸 그대로 신약에 와서 나머지 나라에 갖다 퍼부어버리면 그 퍼 불 때 나오는 모든 용어들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내부, 또는 이스라엘과 주변에 있던 나라에 있었던 용어들이 이 세상 넓게 다 동시에 덮어버리면 구약 때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심판했던 그 원리 그대로가 신약 시대에는 다른 이방민족에게 그대로 다 적용이 돼 버려요.
그러니까 대한민국, 필리핀, 노르웨이는 가만히 있다가 얻어맞는 게 돼요. ‘왜 때리십니까?’ ‘이스라엘을 봐라.’ ‘이스라엘하고 우리가 무슨 관계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엔진 부분이다.’ 이스라엘이 모델케이스에요. 이스라엘을 때릴 때 언약 적으로 치거든요. 모든 저주와 심판은 어디에 기준이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내려준 언약에 기준해서 축복도 주고 저주를 하는데 그게 먼저 맛본 나라가 이스라엘, 그 맛봤던 그걸 그대로 그 다음에는 외부에 확산시켜 버리고 모든 자에게 다 적용시켜 버리는 겁니다.
2학년 1반부터 6반까지 있다면 우리 학교 다닐 때도 그렇고 제가 교사할 때도 그랬는데 2학년 1반에는 첫째 시간이 영어고 그 다음 시간에는 2학년 2반이 영어고 그 다음에는 3반이 영어인데 2학년 1반에 제가 숙제검사를 하면 벌써 애들이 ‘오늘 영어시간에 숙제검사한다.’고 소문이 쫙 나요. 그러면 2학년 2반 숙제 검사 안 해 버려요. 그러면 2학년 3반부터 숙제검사 안 한다 하거든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숙제검사 해버려요.
이스라엘에 일어났던 그 일을 그들은 하나님이 무서움과 심판을 그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 그들은 교훈을 받았어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남의 일로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방나라 칠 때 이스라엘을 쳤던 구약의 특수한 용어들이 있어요. 인, 나팔, 대접, 그건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와 전쟁하면서 나팔 불고 했거든요. 그걸 그대로 여기다 이방나라에 적용시키면서 요한계시록을 그렇게 요걸 써버리니까 요한계시록 요거 해석은 반드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해야 되는데, 이 신천지는 그걸 그대로 사용하니까 풀릴 리가 있나?
구약으로 돌아가려면 구약 언약으로 돌아가야 돼요. 그 사람들은 언약을 모르거든요.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몰라요. 언약을 모르니까 성경을 자기가 알고 있는 용어하고 직접 들이대니까 여기서부터 장난치는 거예요. 숫자 가지고 장난치고 용어 가지고 장난치고, 세상에 이런 것을 가르치는 목자가 왔는데 우리가 그 목자를 버린 수가 있나? 해서 이만희를 숭배하고, 이런 것을 알려주는 목자는 (보혜사)성령이 아니고는 그런 목자 얻을 수 없단다. 그들이 오히려 원하고 있어요. 세상 어느 목사가 안 가르쳐주는 이 비밀을, 이런 비밀을 몰라서 우리는 지옥 갈 뻔 했는데 얼마나 고마우냐 이 말이거든요. 맞죠?
그저 한 단어, 단어, 이상하게 풀어 보이면 거기 완전히 빠져서, 빠지는 게 정상 이예요. 안 빠진 게 이상해. 빠져 나온 게 더 이상하고. 거기서 빠져나와서 기존교회에 가면 더 나빠요. 더 무시하니까. 그쪽은 말씀이고 언약이고 없어요. 오직 교회 부흥밖에 없어요. 오직 교회밖에 없는데 신천지는 교회보다도 말씀 이야기해주니까 야! 이거 기존교회서 안 가르쳐주는 말씀 이야기해주니까 진짜 목사다 해서 다 간 거예요.
언약입니다. 언약! 모든 게 언약 이예요. 언약의 우선 순번은 죄송합니다. 이스라엘 이예요. 우리나라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매를 먼저 맞고 그걸 보고 ‘야! 되게 무섭다.’ 해서 정신 차려서 우리가 그 빈자리 끼어들어가는 거예요.
그 뒤에 이스라엘 마지막 대목에 70이레가 등장한 겁니다. 계속 봅시다. 그래서 『7인, 7나팔, 7대접도 역시 역사 전체를 덮는 시간이 된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역사적 시간으로 기간을 정할 수 없는 사건들이 가득 담겨있어서』결국 어떤 사건은 아까 잊어버렸지만 다시 하겠습니다. 묵시적 사건은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이라 했습니까? 다른 말로 했는데? 반복!! 반복입니다. 1회성 사건의 반복! 늘 반복, 7인이 일어나고 7나팔이나 7대접이나 이런 거는 늘 반복하는 거예요. 왜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이 하루 같으니까.
또 일어나는 또 하나, 그러지 마세요. 그건 우리 역사적 시간 개념 속에서 해석하려니까 그런 오류를 범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 이 세상은 독 안에 든 쥐에요. 독 안에 들었기 때문에 냄비나 막걸리 통을 흔들면 막걸 리가 가라앉으면 자꾸 흔들잖아요. 그러면 막걸리 알맹이가 하는 말이 ‘아까도 흔들었는데 또 흔듭니까?’ 하거든요. 병 안에 들었으면 매일 늘 흔들어요. 아까 5년 전에 666이 네로로 끝났는데 네로를 풀이하면 666인데 네로 끝나고 666이 또 있어요. 막걸리거든요. 막걸리. 또 나와. 적그리스도 매일 나와요. 왜, 어느 때 어느 시점이 아니고, 그건 역사적 시점이고 사건은 반복된 사건입니다. 성경은 죽을 때까지 계속 영원할 때까지 성경은 계속 같이 가요. 나중에 새 하늘 새 땅 되면서 성경은 날라 가 버리지만. 이제는 이해되시죠?
7인, 7나팔, 7대접, 1이레는 묵시적 언어기 때문에 이거는 사건이 반복된다. 7이레, 성전 지었죠? 이게 역사적 해석을 해보면 우리는 7이레 관계없어요. 이미 성전이 지어졌기 때문에. 그러나 이게 묵시적으로 되면 매일같이 성전 짓고 매일같이 허물어지고 매일같이 십자가는 오고 그러죠.
매일같이 성전 짓는다는 게 뭘까요? 성전 짓는데 누구 도움으로 짓는다? ①번, 이웃나라에서 성전 지었다. ②번, 짐승의 나라에서 성전 지었다. 몇 번입니까? ②번이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적 안목으로 보면 이웃나라에서 지어준 거죠. 고레스 왕이 바벨론 이후에 메대 바사 나라에서 돈 다 대주고 에스라 느헤미야 다 도와줬잖아요. 다 도와줘도 그 다음 나라 헬라에서 다 뭉개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지어준 것도 짐승이고 부수는 것도 짐승이고.
그런데 이미 묵시적 안목을 안 본다 하면 이웃나라에서 지어졌고 이웃나라가 치고 이렇게 본 것은 이스라엘 본인 자체도 자기가 묵시적 존재를 파악 못하는 그런 안목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전 짓는 게 뭐냐? 누가 지었다고요? 이웃나라에서 지어준 거죠. 여러분들이 세상 살 때 여러분들 옷 누가 만들었습니까? 기독교 신자가 만들었어요?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거 물을 필요 없죠. 그건 짐승의 나라에서 만든 거예요. 짐승의 나라가 얼마나 옷도 잘 만들고 짐승의 나라가 노래 너무 잘해요. 짐승의 나라에서 K팝도 나오고 그래요. 짐승의 나라가 세금공제도 해준다? 짐승의 나라에서! 세상에 짐승의 나라 도움으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거예요. 짐승의 나라가 복을 갖다 주지, 딸까지 낳아줬지, 짐승의 나라 여호와증인 아줌마가 머리를 해줬는데 얼마나 이쁘게 해줬는지 기독교 신자는 개판으로 잘라놨는데 짐승의 나라에서는 왜 그렇게 이쁘게 해주는지, 우리는 한시라고 짐승의 나라에 속하지 않으면 이 땅에 살 수가 없습니다. 다 도움 받는 사람 이예요.
그런데 결국 상처받는 건 누가 상처받습니까? ‘역시 당신이 예수 십자가 왜 믿느냐? 그딴 걸 왜 믿느냐?’ 짐승의 나라에서 상처를 주네. 그리고 위로받는 것은 바로 짐승의 나라한테 피 흘림을 당한, 짐승의 나라한테 쫓김을 당한 우리 예수님이 마지막 우리의 소망되시고 우리의 구원자 되십니다. 지금 우리는 이걸 매일같이 반복되죠. 이걸 묵시적 시간개념으로 봐야 돼요.
5년 전에 믿었으니까 지금 잘 믿었다. 5년 전의 그런 거 생각하지 마세요. 창세전부터 우리는 택함 받은 겁니다. 5년 전부터라 하면 5년 전까지는 약 올린 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런 진작 믿게 하지, 이렇게 된다 말이죠. 창세전부터 안 믿는 짐승의 나라부터 양육 받아서, 애굽에서부터 양육 받아서, 애굽의 압박, 애굽의 엄마, 애굽의 아빠, 그리고 애굽의 할아버지, 지금도 제사 드리는 할아버지한테 가서 아빠, 엄마 제사 드리고 어릴 때는 같이 제사 드렸다가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안 드리고, 하지만 그 제사 음식이 그렇게 맛있어요. 고사리, 비빔밥, 짐승의 제사 음식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요. 이 몸이 제사를 기억해요. 우리는 짐승의 나라밖에 기억을 안 해요.
제가 언제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오후 예배드리는데 세상에 야구 올림픽 대회 결승전 하는 거예요. 우리교회는 참 편리한 점이 유아 실에 TV가 있어서 생중계가 다 돼요. 다 저쪽 보고 있어요. 야구 보면서. 우리는 아무리 예수 좋지만 더 우리에게 짐승이 각인 시킨 게 오게 되면 후딱 거기에 말려들어서 울다가 그것 때문에 웃다가 어떤 때는 울다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 70이레 이해됐죠? 반복입니다. 오늘 강의 제목을 반복으로 할까? 반복! 묵시는 무조건 반복 이예요. 늘 반복하니까 언제 오십니까? 어디가 하늘나라입니까? 묻지 마세요. 반복되는 현장이 곧 하늘나라입니다. 반복되면. 그걸 느껴지면 우리는 확인되는 거예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 영혼 안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안 밖이라는 것은 우리가 셈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돼요.
오늘 유튜브 동영상 한 거 이야기해봅시다. 세상이 뭐냐 하면 세상이 악하죠. 악한 세상인데 야고보서 4장에 보면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그 말씀 할 때 세상이 있고 세상이 우리 원수 되지 말고 친하지 말자, 이렇게 나오는데 이건 잘못된 해석이고요, 우리는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옷 다 벗어주고 가야 되는데 안 되거든요.
세상이라는 것은 일부러 주께서 만드십니다. 내가 수요일 날 설교할 때 간음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한다 했습니까? 간음죄는 누가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만들죠. 우리가 짓는 간음죄는 간음죄로 통하지도 않아요. 주께서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처럼.
세상은 하나님께 원수 되는 원리원칙이 적용되는 그걸 세상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하나님과 복음에 위반되면 교회가 뭡니까? 세상이고, 그 교회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짓이 되는 거예요.
안 믿는 자와 함께 있으니까 세상이다. 아닙니다. 안 믿는 자가 같이 있는데 놀러 갔는데 그들이 어떤 복음을 잘 들으면 그건 세상이 아니고 주의 천국이죠. 그러니까 기존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어떻게 됐다 하지 마시고 그거는 십자가 이전이고, 유대교라는 제한된 공간이고, 이미 세상이 전 세계로 퍼졌으면 이제는 달리 세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세상 되게끔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일으킨 그걸 통해서 세상과 그리고 천국이 그 순간에 표가 나요.
이제 요한계시록 보세요. 요한계시록의 밧모 섬이 세상입니까? 천국입니까? 분명히 밧모 섬은 세상이잖아요. 섬이니까. 그런데 계시가 떨어지니까 144,000을 지금 사도요한이 바라보고 있으니까 천국이죠. 이미 예루살렘을 보고 있으니까 천국이잖아요. 지금 우리 모습이 그 모습 이예요. 반복! 늘 잊지 마세요. 반복! 반복한다 해서 반복을 일부러 조장하지 마시고 그거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249 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70이레 마지막입니다. 7이레는 창조의 능력으로 성전을 지었다. 성전 이야기는 전번에 많이 했고 62이레는 1이레와 62이레 사이에서 깨진 성전이 짐승에 의해서 도로 짐승의 도움으로 성전이 세워졌다가 짐승에 의해서 다시 깨집니다. 이웃나라에서 깨면 안 돼요. 바다에서 온 짐승에 의해서 깨지는 겁니다. 바다라는 의미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뭐냐, 인자를 도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쪽은 바다라는 명칭을 갖고 들고 나오면 여기는 예수그리스도 인자가 되어서 들고 나오는 겁니다. 인자와 누구의 싸움? 인자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싸움에서 너희들은(우리) 좀 빠져줘. 우리가 싸워서 구원 못 받습니다. 우리는 빠져주고 우리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짐승의 나라를 이길 때는 우리는 더불어 구원받는 거예요.
이긴 게 뭐예요? 십자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게 이긴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죽으나 사나 뭐만 믿습니까? 십자가만 믿는 거예요. 책을 갖고 신방을 갔더니만 저보고 욕하기를 목사님은 항상 십자가밖에 이야기 안 합니다. 이게 칭찬하고 있는지…아무리 들어봐도 칭찬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십자가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묵시적으로 영적으로 세상을 볼 때 십자가만이 승리의 증표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콘스탄티누스 대제 그 사람은 십자가를 잘못 해석했어요. 십자가 깃발보고 누가 이겼다? 자기 로마가 이겼다는 거예요. 그건 아니에요. 로마가 바다의 짐승을 이겨야지, 로마를 이기면 안 되잖아요. 그렇잖습니까? 우리가 이기는 것은 승진하게 되고 월급 많이 타는 게 이기는 게 아니고 짐승을 이긴 거예요. 짐승을.
짐승을 이긴다 하는 것은 결국 짐승 중에 내가 포함되죠. 내가 세상 것에 모두 주눅 들 때 십자가가 주눅 들은 나를 이긴 거예요. 그래서 주일 낮에 설교했잖아요. 나와 나의 차이를 알아야 되겠죠. 세상에 속한 나와 주께 속한 나의 차이를 늘 발견해야 돼요. 그거는 반복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그 차이를 보게 하십니다. 우리의 승리는 뭐밖에 없다 했습니까? 오직 십자가밖에 없다.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는 이겼느니라. 요한복음에 나오죠.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였노라”
이거 설명하고 가겠습니다. 예수님이 이겼는데 왜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뭐죠? 예수님이 이겼는데, 예수님이 이겼으면 예수님만 기분 좋지 왜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됩니까? 우리는 풀 죽어서 있을 뿐인데, ‘예수님 좋겠다. 혼자 이겨서. 우리는 놔두고 예수님 혼자 잘 났대. 이렇게 될 수도 있잖아요. 요한복음에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두려워 말라.” 주님이 이긴 거하고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는 거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우리는 두려운데. 그 해답은 제자들보고 지금 지시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내가 그렇게 해줘도 잊어버리는데, 성경말씀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왜 주체가 누군데요? 주체가 주님인데 우리는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아예 돌아서지 말까? 돌아서면 주체가 또 ‘그럼 내가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까?’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주님이 말씀대로 하게 되면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벌벌 떨기는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는 게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벌벌 떠는 게 두려움이라 하지 말고 주께서 다 승리하게 되면 우리는 벌벌 떨더라도 그걸 두려워한다는 것으로 해석하지 말라 말이죠. 만약 그걸 두려워 떠는 것으로 해석해 버리면 주님이 주체가 안 되고 그 순간 내가 두려워 떠는 게 돼요.
주께서 함께 하시게 되면 우리는 두려워도 그게 두려움이 안 되게 돼 있습니다. 벌벌 떨더라도 ‘이건 두려움이 아니야.‘라고 해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이건 두려움이 아니야. 이건 두려움 아닌 거야. 아이쿠, 놀래라. 아니야, 이건 놀라는 게 아니야. 내가 놀란 게 아니야. 쉭, 이 소리는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야. 이건 내가 놀라는 게 아니야.‘ 맞아요. 내 말이 정답입니다. 내가 놀라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말씀대로 두려워 않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려면. 십자가가 왜 중요한지 아시겠죠?
그 다음에 1이레 봅시다. 1이레를 반으로 나눴습니다. 7을 반으로 나누면 뭐가 되죠? 3.5가 되죠. 3.5가 되면 이게 어떻게 돼요? 하루, 이틀, 사흘, 이게 3.5 아니에요. 그냥 하루, 이틀, 사흘이지, 3.5가 아니잖아요. 한 때, 두 때, 사흘의 반 때가 되면 그냥 반 때지, 왜, 시간이라 하는 것은 흘러가는 겁니다. 그런데 묵시 적이 되면 이게 플러스(+)가 가능해요. 하루(1) + 2 +1/2=3.5, 이게 된다고요. 3.5 이것이 나중에 뭐로 바뀌느냐 42달, 1290일, 이게 다니엘에 막 나오거든요. 왜 숫자 가지고 장난치느냐는 느낌이 들죠? 이게 스톱이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의 몸은 흘러가면 사라지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흔적 그 자체가 중요해요. 한 때, 두 때, 물론 한 때 두 때 세 때로 보지 않고 서수로 보죠. 첫째, 둘째, 셋째로 보잖아요. 그런데 서수가 주님께서 그 기수가 치면 1, 2, 두 개 반 개 이렇다 말이죠.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우리의 계산법을 묵시 적에서 의도적으로 그걸 차용하면서 우리의 해석을 차단시켜 버립니다. 우리의 해석은 다 엉터리기 때문에. 죄인이 육신에 속한 인간이 마귀에게 속한, 짐승에게 속한 인간이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우리는 짐승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666을 아무리 해도 144.000을 아무리 오묘하게 해도 그것으로 구원 못 받고 십자가로 승리했다. 십자가 승리의 효과로 구원받습니다.
원어 해석, 숫자 해석 여러분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점쟁이들이 전문 이예요. 뭐 타로 점, 그리고 사주팔자 보는 것, 그 얼마나 악마적입니까? 우리는 그걸 악마로 안 보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로 딱 승리한 채로 보세요. 아! 참 도처에 마귀! 도처에 모두다 마귀, 모두다 요물,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요물, 모든 게 요물, 요물 아닌 게 없어요.
우리는 매우 익숙하지만 우리는 십자가 알고 난 뒤에 그걸 낯설게, 익숙한 그것이 낯설게 느껴져야 돼요. 낯선 순간에 다시 익숙해져 돌아가겠죠. 시집가는데 한번 봅시다. 점 맞는지 궁합 한번 보고 장난인데 뭐. 장난인데 왜 봅니까? 그게 마음이 불안하다 이 말이거든요. 십자가로 승리했잖아요. 십자가로 승리하는데 시집가는데 궁합은 왜 봅니까? 지금 십자가 승리하고 궁합보는 거하고 연결이 안 돼서 그래요. 연결 안 되거든요.
그럼 왜 연결 안 될까요? 십자가 승리했다는 말은 내가 승리의 주체가 되면 안 된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알아서 노력해봤자 악마가 놔주질 안 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신 피 흘림으로서 우리에게 모든 아버지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풀어놨잖아요. 그렇다면. 딸이 결혼한다. 결혼하는데 결혼하는 주체가 누가 주체가 결혼시켜 줍니까? 주님께서 결혼케 하시기 때문에 결혼하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누가 빠져야 돼요? 혼주는 빠져야지. 혼주는 빠져야 된다고요. 안 빠지잖아요. 그동안 키운 게 있는데.
소급해서 봅시다. 부모가 키웠습니까? 주님께서 키우게 하셨습니까? 주께서 키우게 했죠. 고 3인데 수학이 뒤떨어져서 수학 학원에 보냈다. 그거 누가 보내게 하셨습니까? 십자가 달린 주께서 학원 보내게 하신 거예요. 애가 또 그 순간에 순종케 해서 한 달 다니다 말았지만 다닐 때는 순종했고 소급해서 보면 모든 것이 발걸음 머리카락까지 전부 다 모든 게 전부 다 주께서 알아서 빠지게 하셨다. 어떤 사람은 확 빠지게 했지만, 우면 산 산사태 나듯이 그렇게 빠지게 했지만. 다 그렇게 하신 거예요. 소급해서 보면.
묵시적 관점으로 볼 생각 안 하고 십자가로 구원받았으니까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아휴, 찝찝하다. 그래도 한번 봤으면’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보세요. 보고 난 뒤에 ‘내가 간음한 여인이다.’ 라고 고백하세요. 그러면 돼요. 일단 보고, 보는데 ‘딸 좋습니다. 예, 잘 만났습니다.’ 해서 기분 좋아라 하는 그걸 보고 슬퍼해야 되죠.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슬퍼할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분 좋을 때, 내가 원하는 팀이 이길 때, 홍명보 일본 이길 때. 이기고 난 뒤에 슬퍼해야 돼요. ‘기껏 이것 때문에 기도했나? 아이쿠, 참말 기도 할 거 없어서 이거 기도했나?’ 하죠.
애 대학 되거든 슬퍼하세요. ‘아이, 이거 합격해서 기분 좋아서 요 기쁨 얻으려고 주님 이용했구나.’ 하고 슬퍼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 슬퍼하기 전에 왠지 기도하고 싶어지는 걸 어이합니까? ‘주여 여기 떨어지면 그 애 방황합니다. 이러면 나 감당 못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싶어요.
그러니 도대체 우리 인간은 그야말로 주님께서 들었다 놨다 마귀로부터 맘대로 다루고 굴려줘야 그 틈 사이에 나와 나 사이에서 주님의 이레 효과가 우리에게 등장하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7이레, 1이레, 예수님 십자가 증거 하라고 우리를 요리 메치고 요리 메치고 우리는 인형으로 만든 기다란 키다리 아저씨인형처럼 이렇게 해서 메쳐서 울고 이쪽으로 메쳐서 울고 또 때기 쳐서 울고 또 엎어져서 울고 가만히 서있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천으로 만든 인형은 중심이 없기 때문에 항상 완전히 … 같아, 수리수리 마수리 해서 항상 건들거리다가 또 어느 점쟁이한테 가서 빌지 몰라요. 우리가 평생 우리가 그렇게 삽니다. 평생 그렇게 살아요.
다니엘도 그랬듯이 다윗도 그랬듯이 우리도 마찬가지 베드로도 마찬가지, 세로로 메치듯이 주께서 이렇게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메침을 당할 때 십자가로 우리는 ‘주여 이 힘없는 심지도 없고 아무 줏대도 없는 이것을 십자가로 맘껏 사용해 주옵소서. ’ 하는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어야 되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스케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닌데 세상을 볼 때 짐승이 보이고 우리 주님이 구원자로 느껴지고 이 웬 이적이, 큰 기적이 있었습니까? 이제 멸망 받을 세상에서 십자가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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