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70이레논문19-짐승에 의해서

아빠와 함께 2023. 7. 7. 17:00

가락-70이레 논문(짐승에 의해서)131205-31강a-이 근호 목사

오늘은 어려운 것이 많이 나오지만 찬찬히 따라오시면 고맙겠습니다. 244페이지에 첫 번째 등장한 게 에피쿠로스라는 철학 학파가 나오는데 에피쿠로스학파가 뭐냐 하면, 세상의 시간의 최소단위를 생각한 거예요. 시간을 최소단위로 쪼갰다 말이지요. 시간을 쪼갠다는 말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잖아요. 1시간을 60으로 나누면 분이 되겠지요. 1분을 60개로 나누면 뭐가 되지요? 초가 되지요.

수메르문명에서 비슷한 겁니다. 원래 시간을 쪼개는 것은 농사짓는데 필요해서 쪼갠 거예요. 농사짓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별이나 달 그리고 해를 관찰했고, 그런데 에피쿠로스학파는 시간의 최소단위를 쪼개서하는 말이 어떤 운동도 일어나지 않고 정지된다고 보는 거다. 이것은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참 이 사람들 어려운 시도를 했어요. 그게 뭐냐, 물질에서 영으로 어떻게 도약할 수 있는가, 그걸 시도한 겁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 했잖아요. 육에서 난 것은 육해도 인간들은 인간의 정신 사고는 어떻게든 육에서 영으로 한 번 점프를 해보겠다. 육에서 허무하게 육으로 끝나는 것은 아주 짜증스럽다는 거예요. 제대로 살았을 때에 영의 세계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야! 이게 영이구나! 맛보고 살아야 인생 진리를 알았다, 이렇게 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 영의 세계를 육으로서 만들어내려고 하는 겁니다. 참 우리 보기에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시도인데, 인간의 본성이라 하는 것은 육으로 만족하지 않고 영의 세계를 봐야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영의 세계를 보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육의 세계를 해가지고 육의 세계와 다른 것을 영의 세계로 하면 되겠지요.

육의 세계는 시간이 가요. 시간이 간다는 것은 모든 것이 변화 되니까 변화되는  그게 속이 타는 겁니다. 변화지 않는 스톱 되는 것, 시간이 멈춰버리면 변화지 않을 거잖아요. 시간가면 변화니까 시간이 스톱되면 변화지 않는 것이다. 그 변화지 않는 순간을 찰나를 노려서 변화지 않는 그 상태에서 도약을 시도하게 되면, 그게 아마 영적인 세계가 아닌가, 라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244페이지 중간에 보면, 어떻게 했느냐 하면, 시간단위를 대자연의 원자단위로 모눈형식으로 하는 겁니다. 모눈형식은 시간을 촘촘히 칸으로 지어놓으면 요 하나, 하나가 각 칸에 점유돼 가지고 요 순간은 뭐냐 하면, 요 안에서는 정지가 되지요. 시간이 정지가 되면 요거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육의 세계가 아니고 영의 세계가 된다. 순간에.

그럼 이걸 어떻게 시도할 수 있느냐, 의식과 정신집중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불교도 마찬가지고. 그냥 깨어있으면 자꾸 시간이 느껴지지만, 시간을 못 느낄 정도로 정신을 집중시켜 버리면 고 순간은 내가 지금 천년을 살았는지 백년을 살았는지 1초를 살았는지 그 시간 자체가 경계가 없어지지요. 모눈종이 요 안에 들어온 셈이 된다 말이지요.

그러면 시간이 정지돼 있으니까 자기는 신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내 안에 다 들어있으니 신이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다가 옆으로 가잖아요. 아, 정신 차려야지! 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요리로 옮겨가잖아요. 옮겨갈 때 이걸 뭐냐 하면, 새롭게 또 운동이 시작되는 거예요. 이걸 비켜남이라, 운동이 시작된다. 이리 되는 겁니다. 운동이 시작되면 어떤 것을 알 수 있느냐 하면, A라는 모눈종이에 있을 때는 어떤 낯선 세계인데, B라는 세계에 가면 질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되겠지요.

그러면 이걸 확대해서 보면, 오늘 12월 5일이지요. 12월 4일 날 해가 지고 12월 5일 날 아침에 해 뜨면 요거는 새날로 보는 겁니다. 새로운 날. 새로운 날로 보게 되면, 어제의 질과 다른 새로운 다른 질의 인생을 사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날로, 날로 하루, 하루가 새날이 되겠습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있잖아요. 마음가짐을 그렇게 살게 되면 하루, 하루 계속 새날이니까 그야말로 이것은 다시 한 번 가뿐한 마음으로 보람찬 하루일과를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정신의식으로 훈련시키면 된다는 겁니다.

이런 아이디어를 왜 끄집어낼까요?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각박하고 어려우니까 정신적으로 어떻게 잘 정리한 게 인간을 각성할 수 있는 좋은 어떤 이론 같은 게 있으면 그 이론을 내가 외운다든지 그걸 적용시킬 경우에는 매일같이 씩씩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고 또 과거는 잊어버리고 새로운 날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새날을 질적으로 더 성숙된 삶을 살지 않을까라는 그런 아이디어 때문에 에피쿠로스가 그렇게 하는 겁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보통 쾌락주의라고 번역하는데 늘 즐겁고 늘 행복하고 늘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그러한 방법론을 연구하는 학파, 그렇게 되니까 하루가 시작되었어요. 12월 5일, 그러면 시간이 찰칵 찰칵 가겠지요. 하지만 어제하고는 단절시키는 겁니다. 단절이니까 이걸 ‘불연속성’이라 할 수 있죠.

여기서 제가 에피쿠로스를 거론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70이레를 할 때, 70이레를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70이레를 그냥 역사적으로 보면 7+62+1 이잖아요. 어쨌든 간에 연결 지어 합쳐서 70이레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칼자국 냈다 했죠. 7따로, 62따로, 1따로 했지요. 그러면 이것은 질적으로 단절된 하나의 관절을 뒀다고 보면 됩니다. 무릎의 관절, 탁탁 끊어지는 것. 7의 질이 62로 갈 수 없고 62가 1로 갈 수 없는 3토막 내는 끊어진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이유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오늘 아침에 대구에서 떠나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어요. 우리교회 교인인데요. 전화하기를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하는 거예요. 큰일 났다는 말을 오래간만에 듣거든요. 복음 안에서 큰일이라는 게 없어요. 왜냐 하면 예수님 재림하면 큰일이고 예수님 재림이외에는 다른 큰일 없다 이 말이죠. 자기 죽는 것도 큰일 아니에요.

“큰일이라고 하는데 어떤 일입니까?” 이렇게 여유 있게 물으니까 “내 아내가 신천지에 빠졌습니다.” 하는 거예요. 신천지에 빠진 게 큰일인가! “신천지에 빠졌다고 누가 하던가요?” 상담원이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상담원이라는 게 누굽니까?” 신천지에 갔다가 나온 목사를 상담원이라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상담원이 기존 교단에 다시 돌아갔습니까? 따로 있습니까?” 그것은 모르겠다는 겁니다. 제가 “상담원 자체가 수상합니다.” 했어요.

왜냐 하면, 한국교회가 신천지보다 못해요. 모든 면에서. 그런데 신천지에서 빠져나오면 다시 기존교회 교단에 갔다하면 이건 더 나쁘게 됐어요. 그래서 진정시키고 ‘집사님, 걱정할 일도 아니고 큰일도 아닙니다.’ 했는데. 큰 일 났습니다. 한다는 말은 이미 자기 것이 있다는 거예요.  자기 것이 있으니까 그동안 자기 것 지킨다고 얼마나 불안, 불안 했겠습니까? 

자기 것이 있을 경우에는 복음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 게 없어지는 거예요. 여기 3가지에 7이레, 62이레, 1이레, 자기 게 없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다니엘 중 모든 계시는 자기 게 없어요. 다니엘도 인자에요. 이름도 다니엘이 아니고 인자에요. 우리보고 뭐라 합니까? 성도라 하고 또는 우리 이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보고 이스라엘이라 하거든요. 이 말은 우리끼리는 사적인 게 없어요. 복음 안에서는 사적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배정받은 모든 자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자리지 십자가 안의 자리지, 내 자리가 아니다 말이죠. 큰일이 터져야 큰일이 아니고 처음부터 큰일을 안고 살았어요. 처음부터 큰일 날 일을 품고 있다가 그게 공개된 셈이죠. 왜, 자기 것이 있으니까.

신명기 12장 5절 봅시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오직 너희 하나님이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그들의 약속의 땅에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이 상당히 중요한 대목인데. 약속의 땅이 뭐냐 하면, 누구 이름이 등기된 땅이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등기된 땅이에요. 약속의 땅이.

약속의 땅에 이게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래층은 뭐냐 하면, 이방민족이 처음에 있었던 원주민들, 이방민족이 살고 있는 땅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여호수아가 그 땅을 차지하면서 전쟁이 일어나잖아요. 전쟁이 일어날 때, 가나안 원 민족들이 남의 땅에 들어와서 전쟁을 일으켰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누가 도둑놈이고 누가 피해자에요?

땅의 주인이 누굽니까? 가나안 땅이잖아요. 이스라엘이 도둑질하러 온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가만히 자기 집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짐을 들고 들어와 보세요. 어떻게 합니까? 나가라고 해야지. 경찰신고 하던지 해야지. 같이 삽시다. 이런 게 없다 말이지요. 도둑놈인데 왜 같이 살아요? 안되잖아요. 기를 쓰고 내쫒아 보내야지요.  어디서 굴러온 민족들인지 모르지만. 내보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모압 땅에 가서 모압이 나가라고 했고, 압몬 땅에서 나가라 했고, 가나안 10족속이 나가라 했고, 누가 정당합니까? 가나안 땅 그 사람들이 정당하고 본토박이들이 정당하고 어디서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 빼고 간다고 애굽에서 땅도 없이 와가지고 자기네 땅이라고 내놓으라 하면 그런 억지도 그런 억지 없잖아요.

그러면 우리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누구 편을 들어야 되겠습니까? 도둑놈 편들어야 돼요? 주인 편들어야 돼요? 주인 편들어야 된다고요. 만약에 도둑놈 편 되면 그 사람이 도둑놈 되는 거예요. 층이 두 층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이 주께서 가나안 땅 싹 이사 다 비워놓고 이사 갈 때, 보통 전에 있던 주인이 자기 짐 다 가지고 가잖아요. 청소도 깨끗이 해놓고 들어가는 게 아니고 이미 살고 있는데 들어가요. 살고 있는데.

살고 있는 땅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것은 약속의 땅이라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약속을 모르는,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너희들은 저주 받아야 돼! 라고 추방시키고 안 나가니까 심판해버리고 저주해버리고 하는 겁니다. 그 여리고성 누가 지었습니까? 여리고 민족들이 지었잖아요. 누가 부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순 거예요. 남의 집을 자기들이 부순 거예요.

그런데 신명기12장 5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기 위해서 약속의 땅에 뒀다. 그럼 층이 두 층이 되는 겁니다. 하나는 같은 인간적인 안목에서 이 땅은 원래 사는 사람들이 주인이야, 라는 그런 역사적 안목의 질이 있을 거고, 그 위에 하나님의 약속이 우선이야, 원래부터 이 지구와 우주는 다 하나님의 건데 모든 땅이 자기 건데 그동안 가나안 민족한테는 잠시 살도록 그냥 배려했을 뿐이고, 이제는 천국 갈 진짜 백성이 오게 되면 자기가 알아서 기어야지, 알아서 그 땅을 비워둬야지, 아이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백성들이시옵니까? 그렇다면 어서 기다렸습니다. 이 땅을 드리오니 마음껏 사시고 우리는 알아서 거지꼴로 나가겠습니다. 이리 되어야 되는데 그럴 사람 아무도 없지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 집에 가서 야, 빌딩 좋다. 이거 이제부터 오늘부터 내 접수다. 하면 아이고, 그렇게 하세요.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없지요. 그런 경우 딱 한 경우 있어요.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가야 되는데 탈 나귀 없을 때, “아이고, 나귀 없는데요.” 하니까 “어디 가서 주께서 쓰신다 하면 해줄 거다.” “주께서 쓰시겠습니다.”“아이고, 준비됐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

또 시므온과 안나도 마찬가지지요. 아기예수 보려고 동방박사도 그렇고 그래서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일으킬 사건, 원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을 영접하는 자와 그걸 못 알아보는 사람들의 구분 지음, 분리 작업, 그것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신명기12장 5절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여호와는 자기 이름이죠. 자기 이름이라면 이스라엘은 이름이 사라져야 됩니다. 이스라엘인으로서 사적인 욕심을 채우다가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어요. 아간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사적으로 외투하고 금, 은 챙기다가 돌에 맞아 죽지요. 아까도 동영상 했습니다만,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께서 전쟁할 때에 이스라엘이 동참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먼저 하나님께 바친바 돼야 돼요. 이스라엘 자체가.

바칠 때는 자기 이름을 바치는 게 아니고 집단적으로 바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 이름으로 바쳐지는 거예요. 천국에서 우리가 예물 드린다, 할 때 성경에는 우리가 드리는 예물만 예물이 아니고 예물 드리는 우리 몸 자체가 예물이에요. 그게 로마서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제가 이방인들을 제물로 갖다 바칩니다. 했거든요.

성도란 “야, 이 귤은 내거다!” 하고 따로 내거라고 챙길 나의 것이 있으면 여기가 마귀의 표적이 돼요. 귤이 내거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감사합니다. 하면 마귀가 요걸 뺏어가요. 뺏어 가면 우리는 누구한테 섭섭해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섭섭해 하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큰 일 났습니다.” 하는 거예요. 아내가 신천지에 빠지면 결국은 나중에 극단적인 제일 나쁜 상황이 뭐냐, 이혼하는 상황이잖아요. 이혼하면 되잖아요.

이 가정이 누구 가정이다? 내 가정이 된다면 이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고 질적으로 이것은 내 땅이라 하는 게 있고 거기다가 하나님을 첨부시키려하는데 그런 하나님은 그냥 파스예요. 파스 아시죠? 붙였다가 필요 없거나 답답하면 떼어내면 되지요. 파스 붙이듯이 구원받을 수 없는 겁니다.

약속의 땅, 이것부터 정립이 되어야 되는데 정립하는 게 중요한데 누구도 이 이야기를 잘 안 하는데, 약속의 땅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 이름이 거하는 곳이에요. 그 이름이 거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개인이에요. 개인. 개인은 누구한테만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에게만 개인이 되고 나머지는 그냥 그한테 종속된 집단에 불과한 거예요. 약속의 땅의 특징이.

그래서 나중에 구원받을 때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지요. 몸은 누구입니까? 몸은 개인이에요. 예수님 개인이고 우리는 그의 몸에 달라붙어있는 지체라니까요. 지체. 그게 구약에 있는 바로 이스라엘과 하나님 이름과의 관계가 신약에서는 변동 없이 그대로 가는 거예요.

사적인 나의 것이 있으면 나중에 결국 잘못되면 큰 일 났습니다. 라는 그런 외침이 나올 수가 있어요. 큰 일 났다고. 지금 교회 머리 되신 예수님에게 무슨 이상 있습니까? 주님한테 아무 이상이 없으며 붙어있는 그 지체에도 아무 이상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지, 우리 사적인 행동 때문에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개인적인 행동이 우리한테 전체에 골고루 다 주워졌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십자가마을에 누가 질문했지요. 상급 차등 론. 그 상급 차등 론 없다 하는 것 우리가 알고 있지만, 다시 그걸 읽어보니까 또 기억나지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여성 두 명이 있는데 160Cm안 되면 모델로 채용 못합니다. 할 때 160이냐 160아래인가로 구분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159.9가 자기 누이동생이라면 어떻게 돼요? 합격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친척이냐 친척 아니냐로 또 구분되는 거예요. 160이냐 160아니냐 이 기준에다가 인간으로서 어떤 기준가지고 분류했다가 다른 기준으로 분류해버리면 또 다른 기준으로 또 다시 헤쳐모이는 거예요.

마치 천국에서 성경공부 많이 하면 천국 넣어준다고 했다가 귤 싫어하는 사람 지옥가라 이리 되면 또 귤 좋아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이 갖고 있는 속성 사적인 개인이 여겼던 속성을 일체 주께서는 천국 가는 기준으로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개인이 갖고 있는 재능 있잖아요. 흔히 말하는 달란트 이런 거. 일체 그것은 구원 받는 기준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그러면 구원받는 기준은 모든 개인에게 아무도 갖지 않는 기준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기준은 인간 말고 외부의 다른 인물이 등장해야 되겠지요. 그 분이 누굽니까?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주게 되면 그건 구원이고 거지 나사로가 됐던 부자가 됐던 상관없이 구원이고 예수님의 의가 없어버리면 아무리 착하게 살고 장로로 봉사로 아프리카 선교해도 그건 소용없고 지옥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수요설교에서 했는데요. ‘복음을 모르면 구원 못 받습니다.‘ 복음을 모르면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에는 관심 없고 특정 교단이라든지 특정 파, 신천지냐 아니면 대한예수교 합동 측이냐 어떤 파에 소속되면 어떤 집단에 소속되면 그것이 자기를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처럼 그러고 싶은 거예요.

왜냐 하면, 복음을 알게 되면 그 안에서 자기 것이라는 게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주님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이 말은 주님도 살았습니다. 나도 살았습니다. 이런 뜻이 아니고 주님 앞에서는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자체가 날아가 버리거든요. 파일이 날아가요. 나는 어릴 때부터 어느 학교 나오고 고등학교 나오고 어릴 때 얼마나 은혜 받았고, 그 파일자체가 삭제가 돼서 없어요. 파일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말이지요. 파일이 날라 가 버렸어요.

지난 시간에 한 것처럼 우리가 인생 살아온 그 모든 것은 주의 이름으로 약속의 땅이니까 주의 이름으로 배정받은 것이지 주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는 오해하기를 내가 가꾸어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평생을 노력하고 애쓰면서. 사람들이 자기하는 일에 애쓰면 애쓸수록 자기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더욱 더 강렬해져요. 점점 더 복음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점점 더.

남은 저만큼 갔는데 나는 무슨 꼴인가, 차라리 자살해버릴까, 남은 저만큼 갔는데 나는 이것밖에 못 갔으니까 인생 내가 왜 살았지? 소주나 까먹고 한강에 뛰어내릴까? 이리 하잖아요. 뭐든지 이렇게 복음 앞에서는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 전쟁 앞에서는 아간은 없어야 돼요. 아간은 용서가 안돼요. 그래서 아간 죽을 때는 여호수아가 몰래 죽이는 게 아니고 온 백성이 전부 다 돌 들고 아간에게 던져서 돌무덤이 생겨버렸어요. 이것이 아골 골짜기입니다. 전설의 고향 아골 골짜기입니다. 실제지만.

모든 사람이 던졌을 때에 뭐냐 하면, 어떻게 너는 네 생각만 하고 우리 주님 생각은 안하고 주님 앞에서 감히 자기 생각만 따로 하다니 이것은 이 전쟁에서 패배해야 된다. 왜? 우리 몸은 바쳐야 되는데 딴사람은 다 받쳤는데 저 혼자 안 바친 거예요. 안 바쳤기 때문에 좋은 물건은 자기가 챙길 수 있는 따로 자기 것을 만들 영역공간을 항상 염두에 두고 전쟁에 참여한 거예요. 아간이. 다른 사람은 주님만 보고 갔는데 자기는 가고 난 뒤에 난 뭘 뷔페에서 그릇에 음식 담듯이 따로 챙겨서 주님 덕분에 나도 이익 봤다는 딴 생각을 가지려고 한 거예요. 그걸 백성들로 하여금 돌로 쳐 죽이게 한 거예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참 뭔가 큰일까지 안 났지만 항상 큰일 날 수 있음을 걱정하는 사람은 또 돌로 쳐 죽임을 받아야 돼요. 아우~ 이런 일이라면 큰일 나는데. 이번 혼사 깨지면 큰일 나는데. 뭐 어떻고 큰일 난다는 이렇게 한다는 자체가 이미 마귀한테 지금 많이 시달리고 있는 거예요. 오늘 통화를 많이 했어요. 상담원에게 들은 게 있어서 이혼하게 되고 재산 다 날아가고 아주 조직적이고 이래가지고 해서 겁을 내는데 이야기 했어요. 아내가 거기 갔다고 이렇게 걱정부터 하지 말고 신천지가 뭐를 가르치며 무엇을 했기에 다른 데서는 만족을 못하고 거기에서 만족을 얻는지 이런 것을 남편 되는 본인도 같이 알아야 되지, 어쨌든 간에 목사님한테 거기에 가지 않고 여기에 남아있게 해 달라, 이렇게 해버리면 그러면 여기는 뭐예요? 여기가 천국이에요? 여기라는 게 사적인 공간이잖아요. 복음 모르면 구원 못 받는데 거기가나 여기 있으나 구원 못 받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름대로 결론내린 것은 문제해결은 단 하나밖에 없다. 복음이 들려지게 하는 것. 그동안 사는 게 바빠 가지고 복음에 신경 안 썼다가 복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과연 복음으로만 구원받지 내 것, 내가 복음을 안다는 이런 거 가지고 구원 못 받고 복음으로만 구원받지 그 앞에서 나는 사라져야 될 존재이고 나는 내 자신이 잊어져야 돼요. 내 자신이라는 게 내거라는 게 없어져야 돼요.

내게 있으면 자꾸 마귀가 시험 한다니까. 흔들어버리고. 곤고와 핍박과 기근, 이런 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잘 믿었는데 왜 이렇게 힘든 게 주어집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것 없애기! 이러한 새로운 성질, 이것이 70이레가 보여주는 취지입니다.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약속의 땅에는 밑에 아래층에 뭐가 있다. 가나안 땅이 있다. 그건 육신, 육에서 난 육이니까. 가나인 땅의 원주민들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이 땅은 누구 땅인데? 내 땅인데 어디서 굴러온 게 어디서 이 땅을 침범해 놓고 하나님이 주신 우리 여호와 이름이 계신 곳이라고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 이 땅은 우리가 살던 땅이다. 너희들이 죽던지 나가던지 해라. 고런 게 있고. 그게 뭔 뜻입니까? 여호와가 누군지 모르겠고 하여튼 이 땅은 내 것이라는 거예요. 내 것.

거기에 반해서 들어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는 내 땅으로 되고 싶지 않은데 우리 하나님께서 이끄시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원해서 차지한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는 나귀처럼. 주께서 나도 쓰시고 이 땅도 쓰겠다는데 잠시만요, 여러분들 나가 주실 게요. 다 내보내야 될 판인 거예요. 그 전쟁이 뭐냐, 여호수아 전쟁입니다. 그 전쟁이. 그 전쟁은 지금도 되지요. 지금도.

우리 인생은 이 가정과 이 돈은 다 내겁니다. 하고 그리고 주께서 하시는 것은 “니 거가 어디 있어. 내가 배정해주고 내가 준거지. 이건 처음부터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너한테 준거야.” 라고 주님이 턱하니 주인공으로 들어오는 것과 이 싸움이 매일 우리 일상의 싸움입니다.

제가 아침마다 늘 외우고 기도하는 게 있어요. 주기도문을 아침마다 하는데 주기도문 시작부터 끝까지 나의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땅에는 내가 내 스스로 나한테 먹일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에요. 주께서 먹여줘야 됩니다. 참새같이, 잡초같이. 키워주고 길러줘야 되지 내 것 가지고 먹고 살지 못합니다. 처음에 나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완전히 뭡니까? 내 이름, 내 명예, 내 자존심, 내 체면 이런 것은 주님 앞에 고려의 대상이 안 됩니다.

우리를 아예 없다고 여기고 시작하는데 왜 자꾸 우리는 나 여기 있잖아. 자기 있다는 것을 자꾸 내세웁니까? 주께서는 보지도 않는데. 뭐가 있다고? 아닙니다. 이리 되어야 되지. 누가 있다고? 아니 없습니다. 네 몸은 네 몸이 아니고 내 몸인데.

제가 쓴 글에 우리는 살 권리가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를 살리게 하는 것은 주님의 자기 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기 몸을 자기가 살리고 있는데 우리는 완전히 오해해가지고 내 몸을 주께서 살린다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내 몸을 주께서 살리는 게 아니고 내 몸은 없어요. 내 몸이 없고 주께서 자기 몸을 살려주는데 우리는 이 육신의 본성이 있어가지고 ‘아이고, 고마워라. 내 몸을 주께서 살리는구나!‘ 주께서 ’놀고 있네. 웃기고 있네.‘

그러다 갑자기 젊을 때 혈액 암 4기 걸려서 나중에 두뇌까지 전파돼가지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전 남편이 와서 돌볼 수도 있고. 오로라 이야기에요. 주님의 몸입니다. 빨간 티 건 파란 티 건 상관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입혀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고맙습니다, 하면 너 고맙습니다, 하는 말도 수상해. 복음에 대해서 알겠습니다, 할 건데 요런 거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면 확 뺏어가 버릴 긴데. ㅎ

참 성경이 이처럼 따지고 보면, 성경은 한 사람 이름만 남겨요. 주의 이름만 남겨지고 우리의 이름은 사실은 마귀가 쏙 들이민 이름이라니까요. 마귀가. 그래서 발로 주께서 차버려요.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기도할 자격이 안돼요. 뭐든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했거든요.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기도할 그런 자격조차 입장조차 안 되는 존재다 이 말이죠.

그런 뜻에서 70이레를 이제 봐야 됩니다. 70이레는 아래층과 위층이 있는데 아래층은 육신적인 시간관념, 가나안 원주민들이 갖고 있던 시간관념. 내가 노동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무조건 내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지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간단하게 시민대학에서 그동안 12강좌를 했는데 내일은 13강좌를 할 예정인데, 강의한 것을 간단하게 1분 동안 요약할 게요.

간단한 겁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처음부터 신을 섬겼어요. 왜냐 하면, 사냥감이 빨리 오라고. 알타미라 동굴 같은데 보면 신을 섬겼잖아요. 행운이 오기를 기대했던 겁니다. 사냥감 빨리 오라고. 그러니 신이라 하는 것은 나를 재수 좋게 하는 거예요. 이 신을 섬기다가 BC 6세기경부터 신이 제사로 너무 많이 가지고 가니까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제사를 너무 많이 하니까. 제사 많이 하면 귀찮잖아요. 며느리들이.

신을 제사하지 말고 제사 없이 신을 아예 알아버리면 어떨까? 신 자체를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규정을 한 거예요. 플라톤으로부터 해서 탈레스 이런 사람들 그러니 신은 제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신이 누구인가를 알기를 원한다고 바뀌어졌어요. 왜? 돈이 아까우니까. 다른 게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공부하고 헌금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처음에는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 때 아부하고 뇌물주면 복줄 줄 알았지요. 그런데 성경공부 좀 하고 나니까 아, 그동안 헛수고했구나! 목사도 십일조 안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십일조 하나. 알았으니까 아는 대신 돈을 안 내도 되거든요. 성경공부 열심히 하세요.

신을 알아버렸으니까 이제는 신이 로고스가 되는 거예요. 로고스.  이왕 한 거 더 들어가 봅시다. 로고스가 뭐냐 하면, 이게 이성이거든요. 이성은 구체적으로 언어입니다.  그러니까 이성, 말, 이거 가지고 철학체계를 잡아보면 그것은 우리가 신을 아는 게 되지요.

그 이성, 로고스는 인간 속에 있다고 본 겁니다. 이게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사도행전에 나오는 학파에요. 아덴 사람들아, 하면서 사도행전에 나오거든요. 이 사람들이 인간 속에 신성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본 거예요. 완전히 한국교회의 신학 같지요.

이성이 내 안에 있으니까 내 안에 있는 양심, 착함, 거룩을 개발해 나가면 돼요. 개발하게 되면, 육신은 이 땅에서 힘들게 고생하지만 죽고 난 뒤에 건전한 영혼은 하나님과 합류가 된다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기독교 들어오기 전에 벌써, 벌써.

그런데 여기에 드디어 AD1세기에 누가 들어 왔습니까? 기독교가 들어온 거예요. 기독교가 들어오니까 내 안에 로고스 있지요. 신성, 내 안에 신성, 이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로고스를 예수님이라고 본 거예요. 예수님을 봐가지고 삼위일체가 되는 겁니다. 로고스가 구체화된 인물이 예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은 내가 양심이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을 이제 섬기면 되겠지요. 그 예수님을 섬기면 되는데 교회에서 뭘 제공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남기신 게 있습니다.” 기념하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살과 떡 그리고 세례 받는 것 그것은 유대교에서 온 풍습을 그대로 해가지고 예수를 믿는다 했다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 속에 있는 로고스가 있으면 그걸 성령 받은 걸로 여겨서 이렇게 성령 받은 사람들의 집합체, 이 성령을 받았겠습니까? 안 받았지요. 안 받았으면서도 착하게 살면 성령 받은 걸로 간주해 주는 겁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그렇게 돼야 나라 전체가 모든 국민 전체가 전부 다 같은 신자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신자가 되면 전쟁할 때도 단결이 잘 되니까. 신의 이름으로. 깃발로. 나가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예수님의 십자가 가지고 이겼잖아요. 깃발가지고 이겼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로마 전체가 전부 다 기독교 신자가 된 거예요. 기독교 신자가 되니까 기독교신자를 자동적으로 아는 방법은 정리된 교리를 이야기해서 교리를 납득하면 다 신자가 되는 거예요.

그 처음에 나온 교리가 뭐냐 하면, 사도신경이에요. 사도신경 외우면 돼요. 외우면 신자 돼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외우면 되는 거예요. 외운 대로 반복하면 최고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믿나? 믿습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 로마제국 자체가 교회가 된 겁니다. 이게 천년왕국이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천년왕국. 이것이 드디어 이루어 진 거예요. 이루어졌는데 천년왕국이 오래 안가잖아요. 깨지니까 이제는 그런 신학가지고 버티지를 못해서 이제는 뭐냐, 실속 무기하고 전쟁 이런 거 제물 이런 게 필요하기 때문에. 신을 위로 보내버립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이미 정답 알았으니까. 하나님은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알았으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이 땅에서 삼위일체 그런 속성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그것이 이제는 신자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럼 삼위일체가 뭐냐 하면, 삼위일체가 지. 정. 의, 지식과 의지와 그리고 감정, 감정은 기도하는 것이고 의지라 하는 것은 착한 일이나 전도하는 것이고 지식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지적으로 아는 겁니다. 그 세 가지를 구비하게 되면 그 사람은 신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 밑에서 뭐가 생기는가 하면, 계급이 생기지요. 똑똑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정된 자리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엘리트라 똑똑한 사람이 되고. 기도도 못하고 이런 사람들은 밑에서 농부들, 지배를 받아야 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다가 점차로 무엇으로 가느냐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지가 있어? 그러면 우리의 의지가 곧 신의 의지겠네. 그럼 우리가 의지로서 세상을 개발하고 과학을 발달시키는 이것도 신의 의지네. 이러면 이제 하나님은 필요 없어. 하나님은 그저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시고 밑에 있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과학적으로 발달하게 되면 그게 뭐가 되겠어요? 신의 축복된 나라가 되겠지요.

그게 오늘날까지 온 거예요. 유럽에. 신을 인정 안하는 건 아닙니다. 해놓고 일은 누가 다해요? 인간의 노동으로 얻은 것은 신의 축복으로 보는 겁니다. 긍정철학에서 번 내 돈은 이건 신이 주신 축복이 되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존로크가 이야기한 유명한 게 있지요. 존로크가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감나무가 있는데 감이 떨어진다. 감이 떨어지는데 감이 떨어질 때, 새벽에 나와 감 주운 사람은 그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느냐, 오늘날 우리는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산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는데 주인 없으면 주운 사람이 주인 되잖아요. 옛날에는 안 그랬어요. 그 산에 감나무가 왜 있느냐, 하나님이 주신 거죠. 그러면 거기서 감 땄으면 누구한테 바쳐라 해요? 교회한테 바쳐야 돼요. 교회 십일조로 바쳐야 되지.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고 내 것이 되는 거예요. 이래서 생긴 것이 뭐냐 하면, 사유재산. 사유재산이 등장합니다. 사유재산이 등장하니까 사유재산을 투기하고 계속 굴려버리면 각 금융시장 내에서 사유재산 자본을 굴려버리면 이제는 노동에서 얻은 수입보다도 있는 돈 굴리는 것이 더 수입이 많을 때는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것이 훨씬 더 수익이 많다 이 말이죠.

놀고먹는 사람은 갈수록 부자 되고 빡세게 일하는 사람은 갈수록 시장원칙에 의해서 점점 단가가 떨어지니까 갈수록 가난해지는 거예요. 자본자체가 시장자체의 성격을 바꿔놓는 겁니다. 그냥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게 아니고 자본이 많이 투입 될수록 그 다음부터 인간의 노동의 단가는 떨어지게 돼있어요. 마르크스가 이걸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이 그걸로 번 걸 가지고 신의 축복으로 보는 거예요.

방금 긴긴 이야기했지만 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지평 가나안 땅의 있는 원주민들이 뭐라 했습니까? 내가 노동한 것은 누구 것이다? 내 것이다. 따라서 애굽에서 올라온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땅을 가질 자격이 없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현대인의 입장에서 누구 말이 맞아요? 가나안 원주민의 말이 맞지요.

내가 일군 땅을 왜 너희들이 와서 젖과 꿀이 흐른다고 일방적으로 남의 농사를 짓는 걸 가지고 그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에 포도송이가 커서 두 사람이 낑낑대고 왔잖아요. 그 포도송이 누가 기른 거예요? 그 원주민들이 기른 거잖아요. 원주민들이 기른 건데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길렀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원주님들은 가만히 있다가 땅 빼앗기고 다 빼앗기니까 그들은 단합해서 이주민들을 들어온 사람들을 전쟁을 벌였는데 하늘의 해도 멈추고 우박도 떨어져가지고 패배해 버렸지요.

우박 떨어지고 해 멈추는 건 좋은데 제일 밑에 있는 가나안의 원주민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현대인의 입장으로서는 많이 억울하다 말이죠. 도둑놈이 와서 남의 노동한 것을 다 갈취해 놓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으니까 너무 억울하잖아요. 뿐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아내가 둘이 있지요. 사라와 하갈이잖아요. 하갈이 애를 낳는데 애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을 낳을 때 남자가 누구지요? 아브라함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애기를 낳았다 말이지요. 자기는 그냥 몸만 빌려주고.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누가 학대합니까?

자기 여자 주인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지요. 원래 하갈은 사라의 몸종인데 자기 몸종을 자기 남편한테 애기 낳으라 해놓고 씨받이 줘놓고 자식 낳으니까 이제 와서 자식 낳으니까 구박을 할 때 세상에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래서 가출했지요. 굶어죽을 뻔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굴 저주해요? 이스마엘과 하갈을 저주하고 누굴 축복합니까? 사라를 축복하지요. 이 당황스러움. 우리의 윤리적, 도덕적인 것하고 너무 차이나죠.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 겁니까? 약속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선악과 따먹고 익히 아는 윤리 도덕과 전혀 상관없다는 겁니다. 노동해서 얻은 내 생산물이라 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약속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층에다 얹읍시다. 70이레 다음 시간부터 할 건데, 밑에는 철저하게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가를 충분하게 우리는 인정을 합시다. 내 것 만들기, 내 것은 내가 애쓰고 힘쓰고 노동해서 얻은 내 결실을 채워주는 그 아래층이 있고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는데 방해가 될지언정 전혀 보탬이 되지 못하는 사고방식, 이 사고방식은 위층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덮쳐짐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우리가 생각하는 이 자체는 저주받을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비유 나오지요. 아침에 온 사람과 저녁에 온 사람, 예수님이 마지막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 줌으로 말미암아 처음에 온 사람에게 삐지게 만들지요. 일부러 삐지게 만들어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면 우리 같으면 줄을 나중에 서겠습니까? 먼저 서겠습니까?  결국은 우리는 나중에 서가지고 공짜로 얻기를 원하는데 서로가 나중에 서려고 밀치고 당기는 그 인간들이 사실은 먼저 온 자들의 사고방식이에요.

왜, 1층과 2층을 다 용납을 해야 될 건데 우리는 2층을 알았다고 건방지게 1층이 2층의 흉내를 내고 있는 거예요. 이거 주의하고 굉장히 조심해야 돼요. 우리는 흉내 내지 말고 자기 성질대로 막사세요. 제발 모방하지 말고 그냥 사시면 2층이 지적합니다.

목사님, 큰일 났어요.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서 다시 한 번 복음이 대체 내가 그동안 복음을 믿은 거야, 아니면 어떤 복음 아는 교회를 믿은 거야, 분명히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안 주면 어떻게 하고요? 안 주면 그건 구원 못 받은 사람이고 나보고 할 문제가 아니고. 안 오면 할 수 없어요.

가나안 백성가운데 구원받은 사람 있습니다. 기생 라합이잖아요. 분명히 자기는 매국노에요. 북한 스파이를 신고도 안하고 신고는커녕 완전히 이적행위 했잖아요. 진보당 이석기입니까? 기생 라합이. 간첩 숨겨주고 간첩보고 하는 소리가 우리나라 망합니다. 이게 어디 간첩보고 할 소리에요? “간첩 보내 주신 당신 나라가 이 나라를 침범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 때 저를 생각해 주세요.” 이게 어떻게 세금내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 노래 부르고 월드컵의 16강을 기원하는 그 대한민국의 사람이라 할 수 있겠어요? 이거 매국노지요. 이게 우리의 입장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내 노동과 내거라고 내 사유재산이라고 하는 1층의 성질밖에 없는데 주께서 이 성질이 저주받을 성질이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새로운 성질이 덮치게 해주시는 겁니다. 이 은혜를 항상 우리는 증거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70이레라는 것은 바로 거기에 엎치고 덮치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 건데 두 번째 시간에 상세히 하겠습니다.

10분 쉬겠습니다.

 

 

가락-70이레 논문(짐승에 의해서)131205-31강b -이 근호 목사

바리새인, 사두개인은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예수님, 진짜 하나님이 오셨으니까 오셨을 때는 그들의 아비는 마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경 말씀대로 용서도 하고 심지어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구제도 하고 많이 했잖아요. 그 짓들이 전부 다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은 죄를 가중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용서하고 말고는 죄를 알아야 용서를 하는데 자기 죄도 모르는데 무슨 용서를 구해요? 있을 수 없죠.

그래서 이 주기도문은 오직 아버지와 아들 사이만 아는 내막을 십자가와 병행해서 같이 나란히 감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앞에서 어느 인간도 마땅히 용서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없고 십자가의 은혜를 받게 되게 되면 아! 우리가 십자가대로 해야 될 그런 입장도 못 되는데 이 십자가의 내막을 예수님이 대신 다 치러줬기 때문에 성취됐기 때문에 십자가에 따라오는 그 혜택, 내가 남한테 용서했더니만 주께서 용서해줬다는 그 혜택마저 십자가 안에 그게 선물로 보따리 속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해태 종합선물, 그 안에 모든 게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 하면서 어떤 면에서 우리는 용서 받았고 어떤 면에서 우리는 주께 영광을 돌려야 되는지 이유를 주기도문 외우면서 그걸 반복하면서 다시 한 번 아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 했죠?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달라 해서 밥 굶지는 않습니다. 왜, 우리는 일용할 양식 말고 내일 치까지 은행에 지금 잔고로 돼 있어요. 일용할 양식 달라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하루하루 의존하지 않아요. 일단 돈 있고 재산 있으면 주님보다도 내 돈 의지하다가 돈 떨어지면 그때 ‘주여 살려 달라.’고 하잖아요. 뭐 일용할 양식 하는 사람도 계시지만 힘들게 사는 분도 있지만 보통 여유 있게 살거든요.

그런데 보세요. 어떤 경우에도 주기도문을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못 지키니까 반복해야 돼요. 왜, 이런 것도 죄기 때문에 이런 죄에서 주께서 용서를 해주셨구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죠. 주기도문뿐만 아니고 오늘 하려고 하는 70이레도 마찬가지입니다.

245 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봅시다. 『‘죄에 대한 속죄의 은총’』이 마지막 1이레에 있습니다. 7+62+1에서 제일 마지막 1이 주어진 그게 뭐냐 하면 영원한 속죄가 되는, 속죄 앞에 뭐가 붙죠? 영원함이죠. 그러면 영원함이 되려면 우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누굴 용서하는 것은 그 사람이 돌아서서 나한테 또 해코지 하면 그 다음부터 용서가 안 됩니다. 베드로가 7번 용서하는 것도 본인 딴아 어지간히 참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흔 번의 7번 하라 하니까 이거는 차라리 이건 용서 안 하는 게 낫다. 왜냐 하면 489 번 용서 했는데 마지막 한 번에 화딱지 나서 용서 못하면 490번 다 날라 갑니다. 그게 소용없는 거거든요. 차라리 용서가 안 된다, 이런 말이 솔직하죠.

여기 ‘영원’이란 말은 우리 인간한테는 해당이 안 되고 영원한 속죄가 된다는 이것은 예수님이 와서, 메시야가 와서 해야 될 일이잖아요. 그러면 70이레는 누가 할 일입니까? 메시야가 할 일 이예요.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70이레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70이레(7이레+62이레+1이레)가 다 들어있다 이말 이예요. 다 들어있다는 말은 이것은 누구의 역사입니까? 이스라엘 역사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거북이 등짝처럼 짊어졌다고 보면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 것이 있고 자기 것을 지키면서 행복을 유지하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게 되면 자기만큼 행복하지 않은 사람을 보고 측은히 여기고 동정심을 나타내요. 오로라 공주란 드라마에 보면 젊은 나인데 암 4기에 걸렸을 때 굉장히 주변에서 동정을 많이 하거든요. 그 말은 자기는 건강하다는 뜻 이예요.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보고 뭐라 했습니까? ‘저 사람은 누구 죄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 말은 자기들은 ‘아휴, 다행이다.’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그 잘못된 생각은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갈 때 예루살렘 아줌마들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예수님 보고 울었어요. 그런 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너 날 보고 울었어? 운거야. 정말. 그럼 너희들은 괜찮다 이 말이지?’ 하긴 여자는 자기 것 밖에 몰라. ‘지금 날 보고 운단 말이지, 날 위해. 너 딸보고 울어라. 날 위해 울지 말고.’

지금 누가 누굴 동정하는 입장입니까? 남 동정할 잽입니까? 예루살렘이 곧 디도 군사에 의해서 완전히 처참하게 망가지는데. 성전이 다 깨져요. 62이레에요. 다 깨져요. 62 다음에 7 나오지만 층으로 보면 62가 계속 가는 겁니다. 어디까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인류의 멸망의 그 장면까지 62이레가 다 가요. 62이레 깨지면 1이레가 또 가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시루떡이라 했잖아요. 시루떡 기억납니까? 시루떡! 제일 밑에 7이레, 그 다음에 62이레, 1이레, 이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같이 가요. 황폐하면 계속 세상 끝 날까지 황폐해지고 성전 있으면 끝 날까지 성전 있고 1이레는 완성은 완성대로 같이 가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은 3층이 같이 돼요. “또 하늘을 보매” “또 하늘을 보매” 자주 나와요. 중간에 62이레는 완전히 이 세상을 폭격기를 가지고 폭격을 하고 폭격을 하기 전에 독수리가 공중에서 시위를 해서 ‘곧 폭격이 있습니다.’ 돌아다니고 한다 이 말이죠.

이 세 층이 겹쳐져 있는 겁니다. 겹쳐져 있는 것을 70이레를 통해서 층을 하나하나 뜯어내는 겁니다. CSI에요. 과학수사대라니까요. 철저하게 과학적인 증거에 의해서 범인을 찾는 그 장면을 할 때 핀셋을 가지고 죽었던 상처를 하나하나 뜯어내듯이 우리가 성경의 세 가지 층을 뜯어내는 작업을 지금 하는 거예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를 뜯어내는 겁니다. 뜯어내게 되면 뜯어낼 때 힌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셔서 부활 승천할 때까지 이 역사가 예수님 공생애에 응축이 돼서 다 들어있습니다.

귤이 있잖아요. 귤의 시간은 어디에 담겨있습니까? 귤안에 들어있어요. 한 개의 귤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던 거죠. 귤이 갖고 있는 기억이 이 안에 귤이 기억을 하고 있어요. 서리 맞은 거, 고생한 거, 동네에 가서 귤 따먹으려고 하다가 걸려서 도망가던 그것도 귤은 다 알고 있죠. 범인의 모습을.

귤이란 이 안을 들여다보면 사실 귤의 역사가 응축돼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안에 모든 인류의 역사가 응축돼 있습니다. 그 근거가 뭐냐 로마서 8장 3절 이예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주름진, 죄가 이렇게 겹쳐져 있는 거예요. 책을 한 권이지만 펼쳐보면 페이지 수가 나오잖아요. 겹쳐진 것을 하나, 하나가 펼쳐보면 죄의 역사가 나와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죄는 예수님한테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이 기적을 원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기적을 보여줄 마음이 없다. 했습니다. 기적 같은 소리하고 있네, 기적 안 행해 준다. 너희가 정 기적을 보여 달라면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이다.

요나의 기적이 뭡니까? 죽었다가 다시 나타난 거죠. 분명히 죽었다가 다시 나타났어요. 만약에 육지에서 보면 요나는 물속에 빠질 때 이미 죽었죠. 죽었고 며칠 지나도 사흘 지나도 안 나오죠. 사흘 지났는데 자기가 박 태환이도 아니고 숨을 쉰다고 사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분명히 죽은 자에요. 예수님이 지금 살아서 돌아다니는 건 죽은 자로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주께서 일일이 일하시는 거, 앉은뱅이를 낫게 하시고 사도바울을 로마에 보내고 하는 이런 것은 전부 이미 죽은 자로서 일하시는 거예요. 부활했다는 것은 산 자로 나타나지 않고 죽은 자로서 문 열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도마한테 보여준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이미 죽은 자로서 살아계신 분을 믿는 거니까 그 믿는 자도 이 땅에서 사실은 십자가 안에서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은 자요.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세상이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서로 보고 죽었대,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보고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화가 안 되는 것은 죽은 사람하고 대화가 안 되죠.

대화가 안 돼야 돼요. 대화가 안 될 때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을 알아먹어서도 안 되는 겁니다. 그걸 설득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요. 알아먹어서도 안 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만이 내 말을 알아듣는다고 요한복음 8장 47절에도 나오고, 요한일서 4장 6절에도 나오고. 요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이게 누구 이야깁니까? 예수님 이야기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귤이죠. 안에 뭐가 들어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으니까 이 안에 인간의 모든 죄는 이 안에 다 들어있죠. 그 육신 속에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이 얼마나 엉터리 하나님입니까?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독생자를 본 자가 있다? 없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는데 놀라운 사실 이예요.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자,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캥거루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칩시다. 캥거루라는 동물 자체가 안 보이고 없으면 캥거루 이름도 없겠죠. 어쨌든 캥거루가 있는데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칩시다. 그런데 정작 나타난 것은 뭐냐, 캥거루 뱃속에 있는 새끼가 이 땅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캥거루 새끼다.’ 라고 할 때 그 말을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는데 자기 아버지 아들이라고 하니까 당연히 못 믿죠. 왜 못 믿느냐, 그래야 육신이 온 것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육신이어야 돼요. 육신은 믿는다? 안 믿는다? 믿으면 육신이 아니죠. 믿으면 영이 되잖아요. 못 믿을 세상에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들은 독생자 하나님을 못 알아보게 돼 있어요. 그래야 세상이 어두움이 되니까. 어두움을 더욱 더 어두움이 되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순간부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라고 할 정도로 죄인 되는 거예요. 큰일이 없는데 뭔가 일 터짐으로 말미암아 큰일이 생겼다는 것은 결국 그동안에 뭘 믿었다? 복음 앞에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챙겼다는 것이 들통이 난 순간이죠. ‘나는 내 자식이  최고고 나는 내 가정이 최고지, 이것 지키려고 예수님을 살짝 이용했구나.‘ 하는 것이 들통 나 버린 거예요. 노출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라 하는 것은 노출된 그걸 탓하지 않고 바로 네가 앞으로 지을 모든 죄가 이 귤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70이레를 돌돌 감아버리면 노란색 페인트칠하면 귤 돼요. 뜯어보면 세 겹 나옵니다. 삽 겹 살.

그러니까 예수의 공생애가 인류의 전 역사고 그 역사는 뭐로 돼 있다? 세 층으로 돼 있고 이걸 누구한테 알려준다? 인자보고 이야기하죠. 다니엘 보고 뭐라 합니까? ‘인자야!‘ 라고 하죠. 그 인자라고 이름 붙여놓고 그 이름을 누가 가져갑니까? 예수님 본인이 ‘이거 내 이름이야.’ 하고 자기 이름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다니엘에게 주어졌던 70이레의 그 예언도 자기가 같이 가져가 버리죠. 가져가서 70이레를 보여주는 주체자로서의 뭘 살아간다? 공생애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70이레가 (이제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주어진 계시 바깥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70이레가 묵시기 때문에 바깥에 등장하는 나라가 무슨 나라? 짐승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70이레를 품고 구름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예수님 주변에는 뭐가 달려듭니까? 짐승들이, 마귀들이 달려들죠. ‘주께서 왜 이리 일찍 오셨습니까? 우리를 멸망하러 왔죠?’ 이런 소리 하든지 광야에 갔을 때는 이 돌더러 뭐 되게 하라? 떡 되게 하라, 이런 소리 한다든지, 또 제자들이 예수님 능력 받아서 행하니까 ‘예수님, 예수님.’ ‘왜?’ ‘지금 하늘에서 귀신들이 떨어지는 걸 봤습니다.’ ‘그래, 놀라지 마라.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좋아해라.’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가신 곳에 미처 몰랐던 짐승의 속내, 귀신들이 마구 등장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하늘나라라는 것은 누구 집에 들어가서 집 주인을 묶어놓고 세간을 들고 가는 강도와 같이 내가 도둑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 어디 묶여 있느냐? 마귀한테 묶여있다. 주인을 묶어 놨기 때문에 너희들을 데리고 내가 이 마귀세계에서 너희를 벗어나게 하는 그 작업 자체가 하늘나라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70이레라는 것이 이레 자체가 지난번에 했지만 묵시적 시간 개념입니다. 70이레가 490년이 아니라고 했죠? 역사적 개념으로 다시 바꾸면 안 돼요. 이레를 살려놔야 돼요. 7이라는 게 뭐라 했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천지를 창조하심, 완성하신 거예요. 완성의 모습이 70이레로 펼쳐진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완성! 완성이 되려면 여기 교재에 보면 뭐라 했습니까? ‘영원한 속죄’ 그러니까 창조의 완성이 영원한 속죄죠. 영원한 속죄니까 영원하다는 것은 우리 인간 소관이 아니니까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문제고, 속죄, 죄를 용서하는 것도 주께서 하실 문제인데 남아있는 건 뭐예요? 죄가 남아있죠. ‘속‘은 메시야가 하니까 ’죄‘가 있죠.

그러니까 70이레를 통해서 인류자체가 죄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기능을 하실 분이 메시야로 앞으로 오실 겁니다. 그 기능을 하실 메시야라 하면서 미리 앞당겨서 여기 참여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유다나라고 그 유다나라는 70이레 있는 스케줄 따라 그것을 그대로 시행함으로써 인류 전체가 ‘죄’다 하는 것을 밝히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인류가 죄인데 그 죄의 절정이 뭐냐? 그것은 바로 메시야를 살해하는 것. 예수님을 살해하는 것, 피조물이 하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죄는 다 보여준 거예요.

처음부터 보여줬어요. 처음부터 아담이 손대면 톡! 손대면 안돼요.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것이 선악과나무인 줄 알았지만 선악과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이 십자가에서 아는 거예요. 선악과를 훼손하는 그것이 처음도 죄였고 결국은 그 죄의 궁극적인 죄도 예수님을 죽이는 걸로 그것이 선악과 따먹은 것이 하나의 나무지만 나중에 실내용을 보니까 메시야를 죽이는 그 성질이 악마로부터 주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악마는 메시야를 죽이고, 죽었던 메시야를 다시 살림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누가 죽을 차례입니까? 누가 죽을 차례에요? 누가 영원히 심판받을 차례죠? 마귀와 마귀의 속성, 마귀에 속한 자들을 영원한 형벌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이라는 곳은 필수적으로 있어야 될 자리입니다.

제가 대구 강의하면서 김 중우 집사님이 질문한 4가지 유형을 언급했잖아요. 하나님 나라 중심이냐, 구원 중심이냐, 언약 중심이냐, 예수님 중심이냐, 각자, 각자 봤을 때 성경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느냐, 그걸 내가 강의했거든요. 다 직장 가시니까 못 들었겠지만 들었어요? 거기 죽 나열된 가운데 보면 이 전체가 잘 이야기 돼 있습니다.

거기 보면 언약 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나무는 귀중히 여기고 사람은 내치는 그런 하나님, 왜냐 하면 나무 한 그루 보호하려고 사람보고 ‘나가 놀아라.’ 쫓아내 버렸잖아요. 그 생명나무는 나무인데 그 나무가 뭐라고 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내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그래서 해석이 안 되죠.

하나님 나라 중심은 뭐냐, 임마누엘이거든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는 회복된다고 생각해요. 통일교도 아닌데 회복이란 말을 많이 써요. 아마 신천지도 많이 쓸 걸요. 그러나 회복이 아니고, 회복될 것 같으면 나무 하나보다 취급 못하는 인간을 내치시는 그 취지가 하나님 나라 사상으로서는 나올 수가 없죠. 그저 하나님과 함께 있음, 임마누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약만을 위하여 인간을 그냥 내치시는 분이예요.

영원한 속죄를 위해서 죄의 역할을 이스라엘이 지금 하게 되는 겁니다. 아담이 마귀의 사주를 받고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이스라엘은 누구의 사주를 받고 메시야를 죽입니까?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짐승의 사주를 받고 메시야를 죽이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레라는 묵시적 시간 개념에서 인간은 한 발자국도 이레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은 다시 도망가지를 못해요. 맨 범인은 그 자리에 있었어요. 선악과 따먹은 그 자리, 선악과 훼손된 그 자리 범인이 있었던 거예요.

그 비밀이 범인이 새끼치고 해서 인류가 수백억 인류가 되더라도 전부 다 한 아담입니다. 동일한 범죄를 저질렀어요. 그 범죄가 뭐냐, 예수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 지금도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예수는 죽어 마땅하다. 하나님은 인간 손에 죽어도 하나님은 할 말 없다는 거. 왜 ‘나, 이 고귀한 나, 이러한 인간을 힘들게 만들다니, 하나님 네가 한번 당해봐.‘ 그러한 심보로서 오늘도 아침에 눈을 뜹니다. ’하나님, 너 한번 당해봐. 너 오늘 죽여 버린다.‘는 그런 심보로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보람찬 하루 일과를 이렇게 힘차게 나대면서 ’하나님 너 죽어봐라.‘ 그걸 달리 말하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잘난 나를 보라.‘ 그런 뜻이 되겠고 ‘내가 당신을 의도적으로 안 믿을 때 안 믿는 이 용기를 당신은 날 향해 찬양하라. 의도적으로 당신을 의지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당신을 믿지 않는 이 대범함에 대해서 하나님도 감탄해야 된다. 이런 자부심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속죄를 위해서 우리는 영원한 죄인이 돼야 되겠죠. 그 일을 누가 도와주느냐? 고마운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주변의 마귀가 도와줍니다.

마귀가 어떻게 도와주는지를 245 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보겠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기한을 72이레로 정했죠? 기한하니까 역사적 시간 개념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중간에 이레가 있으니까 이건 역사적으로 어떤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자체가 이제는 끝나버린 거예요. 묵시 세계로 넘어가는 거예요.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여기 영속이란 말은 영원한 속죄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246 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줄에 『다니엘 9장 7절에 보면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치는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이나 먼 곳에 있는 자들이 다 주께서 쫓아내신 각국에서 수치를 당하였사오니』수치를 당하죠. 수치를 당하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수치를 당하신 분이 누구죠?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그 수치에 비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한 수치는 수치도 아니죠. 하지만 이스라엘이 당한 수치는 장차 메시야가 당할 수치를 미리 앞당겨서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수치를 당하는 그걸 가지고 신경 쓰지 말고 누가 수치를 줍니까? 그걸 생각해야 돼요. 주변의 짐승이 수치를 주겠죠. 수욕과 치욕을 당하고 모독과 멸시를 받고 그렇게 구박을 주는 것은, 이 세상의 주인공들이 자기들이라고 그렇게 우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럼 물어봅시다. 수치를 당하면 구원받습니까? 구원받았기에 수치를 당하는 겁니까? 구원받았기에 수치를 당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에도 나와요. 세상에서 나쁜 짓해서 고난 받지 말고 주의 의와 복음으로 고난 받으라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12절에도 "내 복음과 의로 고난을 받으면 오히려 기뻐하라 선지자들도 이와같은 수치와 모멸과 고난과 핍박을 받았느니라“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받고 싶어 되는 게 아니라 구원받는 구조가 우리한테 내려와요. 덮친다니까요. 새가 이렇게 앉아있으면 새장을 만들 때 새가 새장은 이렇게 만들고 파란색, 노란색 이렇게 주문해서 만듭니까? 그냥 앉아있으면 덮치는 거예요. 덮칠 때 이게 성도라면 수치와 고난도 같이 덮쳐 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이게 장차 올 메시야의 상황이기 때문에. 구약의 선지자라면 구약의 선지자한테 장차오실 메시아의 고난이 덮쳐 와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 같은 경우에 “아버지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다윗은 아무 이유도 모르는 체 15년 동안 군만두 먹듯이, 아무 이유도 모르는 체 사울한테 쫓겨 다니잖아요. 개그 콘서트 보면 나오데요. 15년 동안 아무 이유도 모르는 체 여자가 안 생긴다고.

다윗은 정말 아무 이유도 모르는 체 그냥 고난이 와요. 예레미야도 그렇고 엘리야도 그렇고 오늘날 성도도 그렇고, 왜 고난 받습니까? 물어보면 성령이 왔으니까 고난 받지. 그러면 성령이 안 오면? 주의 이름으로 고난 받는 것도 없습니다.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을 때 오히려 기뻐하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도바울의 생애를 보세요. 사도바울의 생애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고난입니다. 사도가 되고 난 뒤에. 며칠 새고 이틀 세고 사흘 지나서 고난 받는 게 아니고 매일 아침에 눈만 뜨면 매일같이 고난 이예요. 전 인생이 다 고난 이예요.

주께서 날마다 죽음에 넘기우면 우리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살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주께서 우리들을 이 마지막 때 쓰레기 취급하신 것은 우리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살게 하심이라. 우리를 마지막 때 쓰레기로 미말에 아무 무가치한 쓰레기 취급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사도바울을.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고난이 이렇게 덮치는 거예요. 덮칠 때 이 구조가 바로 70이레라는 겁니다. 70이레를 다시 이야기하면 성전 세웠다. 그 다음에 부서졌다. 그 다음에 성전 부서지고 그 부서진 그 자리에서 메시야가 오셔서 영원한 속죄를 위한 제사가 예수님, 메시야에서 제사가 완성된다. 이거잖아요.

그럼 이제부터 관절을 해봅시다. 246 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이것은 바로 1이레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성읍과 성소가 훼파하려니와) 단 무엇이 같은 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훼파케 하신다는 점에서 다니엘이 기도 가운데 깨달은 것과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부응해서 정리해주신 창조의 단위로서의 70이레가 보조를 맞추어서 연결된다. 그렇다면 가운에 있는 62이레는 별 의미가 없다. 즉 62이레는 7이레와 1이레의 간격을 나타내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70이레는 두 개의 관절을 가진다. 기간을 말하기 위한 절단점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사건의 층이 같은 유로 유지되면서 흐른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적 단위를 동원해서 그렇게 합리적으로 배치해 놓은 것이다.』

어렵죠? 질적으로 다른 사건의 층, 제일 밑에 7이레, 그 위에 62이레, 그리고 1이레, 질 적으로 다른 층이 같은 유로 이게 죽 흘러간다는 거예요. 창조적 단위, 천지 창조가 뭡니까? 천지 창조를 마치고 다 이룬 거죠? 만족하죠. 만족스러운 그 시간 단위를 동원해서 이것이 만족스러운 상태, 상태에서 이 7, 62, 1이레를 이제는 다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70이레 참 어렵네요. 굉장히 어렵죠. 이렇게 관절을 두 가지로 끊어야 되는데 이 어려운 이유가 장차 올 메시야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왔지만 성전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교신의 장소, 통하는 곳입니다.

이걸 요한복음 2장에서는 아버지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딴 데 기도하면 된다? 안 된다? 안 된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라는 거예요. 다윗 언약에 의하면.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솔로몬이 성전 짓고 난 뒤에 다른 곳에 기도하면 안 돼요. 심지어 다른 곳에 있더라도 방향은 어느 쪽으로 틀어야 된다? 성전 있는 곳으로 틀어야 돼요. 그걸 한 사람이 요나에요. 요나는 신기해요. 요나가 바닷물 속에 들어가서 성전이 어느 쪽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대충 잡아서 마음속으로 성전 있는 곳을 향하여 기도하니까 응답이 된 거예요.

성전은 유일하게 UFO와 통하는 UFO본부? 센터, 지지직~ 지지직~ 만화보면 지지직~ 번개가 치는 곳. 산이 있는데 갑자기 번개가 칠 때 여기 구석에 본부가 있어요. 그게 성전 이예요. 하나님과 유일하게 교류하는 성전,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 하는 곳.

그 성전이 예수님 시대에는 성전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때는 예수님 몸이 성전이죠. 지금도 몸이 성전이지만. 예수님 가신 곳에 지지직~ 아버지의 뜻은 떨어지는 거예요. “아버지여, 오늘은 뭐할까요?“ ”이거 해라.“ 그러면 예수님이 그거 하시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 가신 곳이 ”아버지여 무슨 이야기할까요?“ ”이 이야기해라.“ ”알겠습니다. 이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곧 아버지의 말씀 이예요. 예수님이 가신 곳이 곧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이 상당히 우리한테는 당황스러운 것이 예수님이 가신 곳, 공간, 특정 장소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만약에 예루살렘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기 위해서 비행기 타고 예수님 근처 가야 돼요. 근체에 가면 제자들이 ‘오지 마세요. 안 됩니다.’ 그러다가 집사님이 어떤 여인처럼 예수님 옷 만져서 병이 나았다고 이럴 수도 있습니다마는 뭐 갱년기가 낫다든지.

어쨌든 간에 제자들이 보디가드처럼 못 오게 했을 때 그러면 구원받는 것이 어떻게 돼요? 제한적이죠. 그러면 성전을 이렇게 하지 말고 드론, 무인비행선, SF 영화 보면 많이 나오죠. 성전이 뜨면 어느 공간에 매이지 않고 우주 전체에 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한꺼번에 빛을 받을 수 있잖아요.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여기서 부활 승천하셔서 그냥 있으면 안 오죠. 뭐가 와야 되죠? 성령이 와야 되죠.

어떤 경우는 한창 마차 타고 이럇, 하고 이디오피아 내시가 타고 가는데 ‘게 섰거라.’ 하고 왔다란 말이죠. ‘누구십니까?’ 하니까 ‘나는 빌립 집사인데 성령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마침 성경 이사야 53장 펴놓고 '이거 뭡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창세기부터 죽 다 살펴 주니까 그때부터 믿었어요. 성령을 받고 믿고 성령 세례 받고 그래서 세례 받았잖아요. 결국 이 작업을 누가 했어요. 드론, 주께서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 서로가 만나게 하는 거예요. 고넬료와 베드로를 만나도록 주선을 시킨 겁니다. 빛이 나와서 만나서 세례 주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은 머리고 우리는 몸의 지체가 되는 거죠.

교회 있어요? 없어요? 교회 있잖아요. 교회 있는데 무슨 남의 교인을 뺏어간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무슨 빼앗기는 교회가 있고 빼앗는 교회가 있습니까? 무슨 그런 교회가 다 있어요? 전혀 예수님을 안 믿는 거예요. 자기들의 영업장으로 만든 것만 믿고, 안 믿는 거예요. 영업장 하니까 바다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경찰 덮치면 피하여 도망하는 거. 교회는 한 군데밖에 없습니다. 제가 수십 번 이야기했는데 교회는 한 군데밖에 없어요. 자꾸 여러 군데 생기면 교인 뺏어가는 일이 생겨요.

예수님께서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 했거든요. 그렇다면 옛날 예수님께서 특정 어느 공간이었던 그 성전이 주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내려 줘버리면 성령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증거 하고 예수의 모습을 살고 할 때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옛날 예수님이 성전 움직이는 그거와 동일하게 되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예수님의 종들에 의해서.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받은 신분이 얼마나 귀한 신분 이예요? 돈 몇 푼주고 바꾼다든지 돈 몇 푼에 고개 숙일 신분이 아닙니다. 이 신분은 엄청난 신분 이예요. 인간적으로 어떻게 설득이 안 되고 표현이 안 되고 일을 놓으실 정도로 엄청난 신분을 우리가 배정받은 거예요. 성도라는 것.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이 진짜 예수를 믿을 것 같으면 이 사람에게 절해라.’ 이렇게 할 때 그거 따라 할 필요 없어요. 절 한다고 그들에게 나쁜 게 아니거든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뭐냐, 이럴 경우에는 ‘네가 신자 맞다.‘고 이미 기준을 누가 만들었어요? 저쪽에서 만든 기준을 성도는 항상 벗어나요. 네가 어떤 기준을 해도 내가 그 기준을 따를 필요가 없는 이유는 성도라는 것은 내가 따라 했다고 해서 성도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걸 항상 능가하는 거거든요.

주께서 성도되게 한 것을 인간적인 표현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어요. 이 성전, 이 성전이 뭘 하느냐, 핍박, 고난을 받습니다. 이게 뭐냐 62이레에요. 핍박을 받아야 됩니다. 왜, 그래야 짐승의 정체가 드러나니까.

기원 전 3천 년 전에 현재 이라크 땅인데 수메르는 최초의 국가에 해당되거든요. 거기서 신상을 만드는데 미술사에 보면 나오는데 신을 섬기는 자를 조각한 게 있는데 재밌는 게 외계인 같아요. 얼굴이 있다면 눈을 엄청 크게 했어요. 왜 이렇게 하느냐, 신을 볼 때는 우리의 눈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전달된다고 이렇게 한 거예요. 그 당시에 수메르 문명에서는 다 이런 식으로 조각을 만들고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봤다 이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성도가 있다고 한다면, 이거 따라 했겠어요? 안 따라했겠어요? 안 따라 했죠. 눈 크게 한다고 해서, 남들 보기는 잘 믿는 것 같지만, 남들 보기에 잘 믿는 것 같은데 우리가 거기에 같이 따라갈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따라 하던 안 하든 간에 우리 신분은 주께서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빼고 자시고 취소시키고 이걸 탈락시키고 할 어떤 능력도 없어요. 성령이 준 것을 무슨 수로 안 하겠다고 ‘나 안 해, 성도 안 해. 짜증나서 못해.’라고 버릴 수가 있습니까? 안 버립니다. 안 버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환난과 핍박과 곤고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이 우리에게 계속 찾아오는 거예요. ‘아이 씨, 이런 것 같으면 예수 안 믿으련다.’ 하는 소리가 입가에 나오더라고 심지어 입 밖으로 흘러나왔더라도 다시 3초 뒤에는 ‘아니구나. 죄송합니다. 아까 그 말 취소하겠습니다.’

이게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 당해도 너무 당했어요. 다니엘도 다 축구하고 싶고 다니엘도 다 노래방도 가고 싶어요. 그러나 다니엘은 다니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환장합니다. 사람이 남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하면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데 다니엘이 해야 될 일이 남들 다 해보다가 안 되니까 오는 일 있잖아요. 집사님 꿈꾼 걸 제가 알아맞혀 볼까요? 안 돼요. 왜, 남이 꿈꾼 걸 어떻게 알아맞춥니까? 다니엘 본인도 미칠 지경 이예요. 자기가 연습해서 노하우로 할 수 있는 것 같으면 아주 쉽게 하죠. ‘아이, 저거 5년 전에 한 거.’ 이렇게 되는데.

다니엘 하는 것은 전혀 못해본 거예요. 예를 들어서 사흘 동안 굶은 사자 앞에서 까불기, 이런 거, 사흘 동안 서울 대공원에서 배부른 곰한테도 맞아 죽는데 그것도 잘 안다는 사육사가, 사자한테도 얼마 전에는 맞아죽었죠? 이건 굶어서 뭐든지 나오면 뼈까지 으깨서 먹을 정도로 만반의 준비가 돼 있는 그 사자 앞에서 까불기. 약 올리기. 그거 다니엘이 해야 됐어요.

다니엘 세 친구는 더 황당합니다. 포항제철 제 1 용광로 속에 들어가기, 옆에서 붙드는 사람이 결국 타죽었다 말이죠. 인간의 세포는 단백질로 돼 있거든요. 온도 200도~500도만 되면 타든지 녹든지 합니다. 단백질 세포가 원래 그래요. 그런데 다니엘 세 친구의 단백질은 무슨 단백질로 돼 있는지 머리카락도 안타고 그을리지도 않아요. 머리카락이 쇠로 돼 있어요? 티타늄으로 돼 있는가? 인조인간 로봇인가? 왜 불이 안타는데?

불이 왜 안타는지 좋아하지 말고 당사자들한테 물어보세요.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나도 인간처럼 살고 싶다.’ 이런 소리가 나올 거예요. 왜 인간이 못하는 짓을 왜 내가 구태여 해야 됩니까? 이게 오늘날 성도입니다. 예수, 십자가 부인하면 그만 이예요. 그게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착한 일 하고 선교 헌금내고 봉사 많이 하고 구제 많이 해서 성과급 쌓아서 스펙 쌓아서 천당 가는 이게 얼마나 납득하기 쉬워요?

그런데 막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이것이 남한테 설득도 안 돼, 납득도 못 시켜, 온 식구들 전부 다 납득 안 된다고 삐져서 복음 전하는데 잠 오기만 하지, 듣지도 않아요. 그런데 도대체 나는 무슨 팔자가 이런 팔자가 다 있습니까? ‘착하게 하면 여러분 복 받습니다.‘ 이거 얼마나 좋은 거예요? ’착하게 해봐야 지옥 갑니다.’ 이 소리를 해야 된다는 이 자체가 무슨 운명이 이런 황당한 운명이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주일 낮 설교에 이런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식품회사나 운영하시지 이거, 언약, 예수, 구원, 중심 알아서 뭐하려고? 그분도 참 희한하다. 식품회사나 운영하지 이거 알아서 뭐하려고? 평신도가.

다니엘 입장이 오늘날 성도 입장이고 예수님도 이 길을 가는 겁니다. 삼겹살이 끼었어요. 성도된 사람은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되는데 고난 받기 때문에 어디를 쳐다봅니까? 고난 받기 때문에 어딜 쳐다봐요? 영원한 속죄를 바라보죠. 영원한 속죄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는 말 안 듣거든요. 우리에게 고난이 와야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라고 전화해야 그래도 알면 천만다행이에요. 아! 원래부터 큰일 날 일이 나한테는 ‘내 꺼는 없었구나.‘라는 것을 알아야 모든 것이 예수님이 주신 팔자라는 사실을, 내 인생을 예수님께서 살려주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인생을 주님이 살아가는데 우리는 자꾸 오해하기를 내 인생인 줄 알고 고맙다고 이야기하다가 된통 당하면 짜증냈다가 고맙다 하다가 짜증냈다가 이건 미친 널뛰는 것도 아니고 맨날 반복하다가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죠.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의 여기 247 페이지 위에서 여섯 번째 줄에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나라의 도움으로』뭘 세워준다? 성전 세워주죠. 짐승의 나라가 참 고맙죠. 짐승의 나라로 성전 세웠다가 그 세워줬던 짐승의 나라에 의해서 성전이 부서지고, 우리가 차타고 가다가 차타이어 펑크 났을 때 목사도 지나가고 장로도 지나가고 집사도 지나가는데 여호와증인이 도와줬을 때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여호와증인 믿을까요? 고마우니까. 아니에요.

내가 우산 없을 때 지나가는 몸배 바지 입은 보살이 와서 ‘여기 불자님 우산 받으세요.’ 목사인줄 모르고 불자인줄 알고 등산 갔는데 절에 온 줄 알고 이렇게 도와줄 때 얼마나 짐승이 고맙습니까? 세상의 모든 안 믿는 남편이 짐승이고 그 남편 때문에 밥 먹고 살고 이렇게 성경공부 참석하고 얼마나 짐승이 고마워요?

고마운 짐승이 또 핍박은 짐승이 하네. 그럴 때마다 이 짐승을 누가 파견해 주시는가? 1이레 되시는 바로 예수님의 영원한 속죄를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꼭 주님이 요물 같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우리로 하여금 하여튼 1이레, 예수님의 영원한 속죄는 이뤄졌고 그것을 너한테 아까 독수리 새장처럼 우리를 옴팍 뒤집어씌운 거예요. 이것을 우리 힘으로 어떻게 뺄 수가 없어요. 십자가 외는 네가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신 것 외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하는 그 말씀이 이렇게 실제로 내 인생이 될 줄이야. 오직 우리는 십자가외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갈라디아서 6장 14장의 그 말씀이 나의 일평생의 과제가 될 줄이야. 이거 어디 초등학교 때 미리 알았습니까? 대학 시험 칠 때 알았어요?

이거는 성령이 왔을 때 아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착한 일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나의 의로움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된다는 이 사실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이미 70이레 다니엘처럼 인자라는 이름을 호칭으로서 지금 주님한테 다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밑에 봅시다. 『이것은 그 성전 중심으로 짐승의 나라를 전복시키고』짐승의 나라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고 짐승의 나라로 하여금 성전 부수고 그 짐승의 나라보고 ‘너 성전 왜 부쉈어?’라고 책임 물으면서 짐승을 지옥으로 보냅니다. 불쌍한 짐승! 짐승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마귀가 무슨 죄가 있어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나쁜 천사들. 악마가 뭡니까? 타락한 천사 아닙니까? 하나님은 놀랍게도 타락한 천사까지 예수님을 주로 만드는데 철저하게 네지마시, 나사 못 하나까지 버리지 않고 말끔하게 다 이용하네요. 로봇청소기 같아. 돌아다니면서 빨대 같은 발로 다 쓸어 담아요.

하나같이 버릴 게 없이 전부 다 예수님한테는 모든 것이 ‘아니오,가 아니고 모든 것이 ‘예‘가 된다. 아멘이 되는 거예요. 마귀가 있더라도 세상 권세가 있더라도 어떤 것이라도 너에 대한 사랑을 끊을 수 없느니라. 주님 자신이 주신 사랑을 위해서 마귀가 항상 우리를 옆에서 설치도록 흔들어대도록 그렇게 조치해 놓고 그 마귀는 마귀도 마땅한 사람을 지옥에 보내시고 결국 승리한 것은 어린양, 어린양이 뭐냐,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당하신 양 이예요. 십자가 당하신 양 이예요. 결국은 천국 가도 무슨 보좌? 십자가 보좌만 남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외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없다? 없다. 그리고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지금 우리가 이걸 증거 하는 그런 팔자가 되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70이레 통해서 다니엘처럼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괴롭고 힘들고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할 때 참 난처하지만 그것마저 주님께서 주님 십자가 바라보라는 조치인 것을, 우리가 얼마나 못난 존재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서 죄인이라는 것을 얼마나 알라고 주신 하나님의 축복인 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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