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70이레 논문(계시 공백)131107-29강a -이 근호 목사
241 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초반부터 어려운 단어 나왔죠?『초월적인 타자(신)와 초월론적인 타자(본인의 욕망을 야기 시키는 미지의 타자)』‘론’이란 말 하나 더 들어간 거죠. 그래서 이게 어렵기 때문에 제가 해석 붙여놨죠. 초월적인 타자라 하는 것은 신을 의미하고 초월론적인 타자는 본인의 욕망을 야기 시키는 미지의 타자. 타자라 하는 것은 야구할 때 타자가 아니고 타인, 남, 이렇게 돼 있어요.
질문: 자기가 만들었다고 봐야 되는 건가요? 자기가 만들 게 아니고 자기에서 발생된 거죠. 자기가 안 만들어도 자기에서 나오게 돼 있어요. 인간은 자아라는 게 없고 자아가 없으면 타인도 없어요. 없는데 인간에게 있는 것은 뭐밖에 없느냐 하면 인간은 몸밖에 없어요. 몸만 있어요. 몸만 있는데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꿈속에서 인간의 몸은 항상 풋풋해요. 20대 같으면 20대 모습이고 내가 30대는 30대 모습이고 내가 꿈속에 10대를 보게 되면 10대의 내 어렸을 때의 모습이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꿈은 그야말로 개 꿈 아닙니까? 꿈은 꿈이라고요.
그런데 꿈 깨고 나면 내 몸은 자기의 나이에 합당하게 지금 늙어있지 않습니까? 늙어있는 정도가 아니고 내일되면 또 늙어요. 그리고 지금 있는 요 몸은 내일되면 또 잊어야 됩니다. 왜냐 하면 지나갔어요. 내일만큼 늙어야 돼요. 모래 되면 모래만큼 더 늙어빠진 몸으로 달랑 남고 그 대신 며칠 전에 있었던 젊은 몸은 사실은 이미 없어요. 사라진 거거든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몸이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어줘야 거기에 대해서 규명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존재다.’ 하고 딱 고 자리에 고 위치에 변함이 없이 딱 있어줘야 ‘나요? 이런 인간입니다.’ 하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데 내가 이 몸이 자꾸 변하니까 거기에 따라서 자아도 그때, 그때마다 자꾸 변신해요.
그럼 몸이 가는 곳에 허겁지겁 누가 따라가는가, 자아가 따라가는데 따라갈 때 그냥 자아는 가는 게 아니고, 타인! 남을 아우르면서 따라간다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몸만 있고 정신이라 하는 것은 몸에서 발생하는 몸의 작용의 효과음이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나 차가 지나가면 윙~ 하고 지나가죠. 그 효과음 나오잖아요. ‘뭐가 방금 지나갔어?’ 하면 차가 빨리 휙 지나가지만 바로 대번 하잖아요. 자아라는 것이 내 몸이 변화되는데 따라서 나오는 효과에요. 그래서 자아는 없어요. 자아란 없고 실체는 몸이 실체고 자아는 몸에서 피어나오는 하나의 그림자 같은 거, 그림자인데 이 자아가 골치를 아프게 하죠.
다시 한 번 보면 몸밖에 없는데 몸인데 몸에서 아우라처럼 번지는 게 나오는데 그게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시간의식이 나와요. 참 이게 평생을 사람을 못살게 들들들들 볶게 만드는 게 시간의식 이예요. 시간의식!
시간의식은 뭘 뜻하느냐 하면 지나간 것을 과거로 보고 그리고 지금을 현재라고 보고 아직 미지에 남은 이걸 미래라고 이렇게 의식합니다. 그러면 과거도 없고 사실은 현재라는 실체도 없어요. 몸만 있어요. 따지고 보면 몸이 여기 있다면 정답은 뭐냐, 내 몸이 있는 그 순간이 현재기 때문에 사실은 어제도 현재고 며칠 전에도 현재였고 내일 되면 또 현재밖에 없고 결국 남아있는 것은 현재만 존재하는데, 이상하게 인간들은 과거, 미래를 자꾸 이걸 생각하면서 스스로 고민에 빠지고 스스로 희열에 빠지고 그래요.
예를 들면 ‘아, 어제 그런 짓 안하는 건데.’ 이래요. 후회하려 하거든 어제 가서 어제 그 몸 가지고 후회해야 돼요. 그런데 이미 우리는 어디를 떠났습니까? 어제를 떠나버렸잖아요. 그럼 지금 어제는 있어요? 없어요? 어제 내 몸이 없기 때문에 어제 한 일도 없어요. 말장난이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어제 행동을 후회하려면 어제 몸보고 닦달내야 되는데 어제 몸이 날아가 버렸는데 누구보고 닦달 내는데? ‘너 왜 그렇게 했어?’ ‘뭐?’ ‘네가 했잖아.’ ‘언제 내가 했어?’ ‘어제 네가 했잖아.’ ‘그럼 어제 나한테 물어야지. 지금은 오늘 나잖아. 어제하고 다른 사람이라니까.’
몸이 변하기 때문에 동질성이 안 된다니까요. 동질성이 안 되는데 동질성을 맞추려면 여기 뭐가 동원돼야 되느냐 하면 시간이 동원돼야 동질성이 돼요. ‘맞습니다. 어제 내가 그가 지금 바로 납니다.’ 이렇게 시간이 동원돼야 이게 앞뒤가 맞아진다 이 말이죠. 이것이 하나의 철학적 이론으로 끝나면 ‘이렇게 생각해서 늙어죽으나 이거 생각 안 하고 늙어죽으나 마찬가지인데 문제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바로 요것을 활용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골치 아픈 겁니다.
이 이야기를 성경 해석하면서 이 이야기를 안 꺼내도 되는데 왜 꺼내야 되는가? 꺼낸 이유가 우리가 내 몸에서 나오는 이 자아성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게 되면 여기서 우리는 발작을 일으킵니다. 좋아서 일으킨 발작도 있을 것이고 화가 나서 일으킨 발작도 있을 것이고, 지옥이 있다 하면 ‘나 지옥 있는 하나님은 싫어.’라고 싫어하면서 발작을 일으키고 반대로 천국이 있다 하면 ‘딱 나네. 내가 가야 될 곳은 하나님이 진작 마련돼 있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 버리면 우리는 죽어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중간에 말씀을 주시는데 말씀을 주게 되면 인간들이 오해하면서 마중 나갑니다. 오해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곡해하면서 좋다고 마중을 나가죠.
아까 말씀한 친구는 ‘네가 누구냐?’라고 물어보세요. 왜냐 하면 자아가 없는데 ‘내가 누구다.’가 성립이 안 되거든요. ‘내가 누구다.’가 성립이 안 되는데 ‘내가 누구다.‘를 이야기할 때 그 말이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은 바로 내 몸에서 뭘 만드느냐 하면 자아를 만들어 내고 자아가 타인을 불러오게 돼 있어요. 그걸 지금 이야기하는 겁니다.
추월적인 타자와 초월론적인 타자란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자아는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고 분석하고 이해할 때는 반드시 타인이라는 것을 내가 불러와요. 왜 불러오느냐 하면 나라는 것은 남이 있기 때문에 내가 발언을 해요. 말!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하루 종일 가만있어요. 그런데 누가 딩동! 하면 ‘누구십니까?’라고 나오죠. ‘누구십니까?’ 라는 발언이 나왔잖아요. 왜 이런 말을 하죠? 내가 내 앞에 나 말고 다른 타인이 등장함으로써 그때부터 우리는 뭐가 발생한다? 언어가 나오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이 먼저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하죠.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아담은 나는 이러이러한 존재라는 말을 해요. 그리고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하나님께 뭘 합니까? 제사를 드리잖아요. 인간은 자기 자아를 느낄 때는 반드시 혼자서 자아를 느끼지 않고 누굴 데리고 와요. 타인을 데리고 와서 그 둘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누구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환자가 하나도 없다면 의사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환자가 없으면 의사도 없어요. 학생이 없으면 교사라는 말 자체가 없고 환자가 없으면 의사라는 말 자체가 없어요. 모든 인간의 직업은 타인을 의식해서 한 겁니다. ‘의사 돼.’ 뭔 뜻입니까? 앞으로 환자 있을 거야. 그런 뜻이거든요. 그럼 그 사람은 ‘나는 의사다.’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의사다.’ 할 때 이거는 환자라는 타인이 결정한 것이지, 본인은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니까요.
‘의사 말고 너 누구냐?’ ‘그건 모르지 내가.’ 그러면 모르죠. 그래서 환자가 없다면 나는 의사 아니죠. 그런데 내 자식을 데리고 왔다. ‘아, 나는 아버지네.’ 이렇게 되죠. 아버지라 할 때는 반드시 자식이 있을 경우에 아버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몸은 가만히 있는데 자꾸 뭔가 지어내. ‘나는 누구다. 나는 누구다.’ 몸은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몸은 자꾸 다른, 여기 말대로 하면 추월적인 타자, (신)에 의해서 몸이 늙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초월적인 타자를 뭐로 대체하느냐 하면 초월론적인 타자로 대체하면서 자아에 대한 가치를 사수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내가 육신을 잘 만들어 냈잖아요. 이거 만들어 내면서 너무 천대하지 말아주세요. 너무 모욕하기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것이 마음에 들어있는 거예요. ‘내가 누구다.’ 할 때 흥, 이렇게 비웃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게 있다고요. 나는 성의 있게 내가 누군지 아는데 애 먹었다 이 말이죠.
만약에 지금 간호학과에 다니는 다니는 여학생이 있다 합시다. ‘너 장치 뭐 될래?’ 하면 ‘나는 훌륭한 나이팅게일 같은 간호사가 되겠다.’ 하겠죠. 그런데 만약에 퇴학을 해버리면 제 기준에 의하면 몸이 어제 간호 대학 다녔는데 오늘 퇴학당하면 오늘 간호 대학 학생이 아니잖아요. 그럼 오지마라 하니까 안 다니면 되잖아요. 그런데 뭐가 달라버려요? 장차 나는 뭐다? 간호사가 돼야 된다는 꿈이 날라 가버렸죠.
오지도 않은 미래가 현재 내 몸에서 미래가 미리 걸치다 보니까 현재 있는 이 몸에 의해서 과거 현재 미래가 요동치고 자꾸 있는 겁니다. 지금 시청률이 20%라는 왕가네 가족들이라는 게 있죠. 나는 하나 보지도 않았어요. 휙 지나갈 때 보면 나오는데 거기 나오는 유명한 유행어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나 이래 봐도 이대 나온 여자야. 나 미스코리아 나갔던 여자야.’ 하거든요.
몸은 있는데 자꾸 과거 미스코리아 출전했고 이화여대 나왔다. 그걸 자꾸 걸치고 있는 겁니다. 이걸 걸치다 보니까 자기의 이화여대 나왔고 미스코리아 나왔던 사람이 아닌 격에 안 맞는 다른 타인을 만나버리면 여기서 어떻게 됩니까? 공격하게 돼 있어요. ‘나 이대 나온 여자처럼 왜 대우 안 해줘? 이래요. 그러니까 남은 결국 초월론적인 타자라 하는 것은 타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사수하기 위해서 내게 만족이 되는 내가 꿍치고 있는 이 나 됨에 대해서 보탬이 되는 타인 같으면 내가 관계를 맺고 내가 나 되고 싶은 욕망에 충족 못하면 ’나는 골라잡을 거야, 나는 너를 버릴 거야.’라는 것이 그게 인간이고, 잘 들어보세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매 맞고 죽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의 몸이 예수를 죽인 게 아니고 유대인의 몸이 예수님을 죽인 게 아니죠. 유대인의 자아가 죽인 겁니다. 이거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간의 자아가 죽였으니까, 하나님은 자아를 만든 게 아니에요. 몸을 만들었죠. 몸을 만들었는데 자아가 붙여졌잖아요. 그 자아가 어디서 나왔느냐? 악마에서 나왔습니다. 마귀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에 죽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만든 거 말고 덧붙여져 있는 검은 세력을 하나님께서는 나오도록 유도해 내시는 겁니다.
그 악마로 하여금 인간이 자아 성을 갖도록 함으로써 그때부터 창세기 3장에는 드디어 인간 대 하나님의 관계가 없고, 악마 대 하나님의 관계로 모든 현실이 그렇게 정립됩니다. 전에 언제 집사님이 구조라 이야기했죠? 그 구조란 말을 전체로 말하면 구조고, 내용으로 표현한다면 이걸 네트워크, 네트워크 알죠? 방송국에서 전파 보낼 때 지방하고 전부 다 TV송신하는 보이지는 않지만 전국에 완전히 송수신 네트워크가 형성되죠. 전체적으로는 구조라 할 수 있고 구조 안에 촘촘히 네트워크 형성되는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뱀의 후손 악마의 후손들이고,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관여 못하고 거기에 대항하는 구조가 오직 여자의 후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네트워크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영, 성령만 할뿐 이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싸우는데 누가 배제되는가? 인간이 배제돼요. 인간이 배제되는 상태를 주께서 채택을 하면서 인간의 역사가 되죠. 이거 말이 어렵네요. 사실은 인간의 갈등은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인간은 빠지는데 인간이 개입할 수도 없는 일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강제로 집어넣게 되면 그 집어넣은 인간이 말발이 튕겨 나와요. 뭐냐 하면 마귀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대드는 반항기가 팍팍 튀어나오죠.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주인은 따로 있고 우리보고 ‘짖어라, 짖어라.’ 하면 강아지가 ‘멍멍’ 하고 짖잖아요. 이쪽에서 막대기로 때리려 하면 ‘낑’ 하고 고개 숙이고 도망가고.
성경 전체를 이런 두 가지 흐름으로 풀게 되면 간단하긴 간단한데요, 사람들은 이걸 안 믿어요. 너무 간단하니까.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인간은 빠져. 그런데 듣는 인간 기분 되게 나쁘죠. 자기가 헌금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애쓴 사람보고 ‘빠져, 빠져.’ 이렇게 나오니까 그럼 자기 전도하고 헌금한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거든요. 구원받는 정도가 아니고 ‘구원 받게 해주세요.’라고 요구할 것도 안 돼요. ‘입 다물고 있어.’ 이래요. ‘저 구원해 주세요.’ 하면 ‘너 가만히 있어. 구원은 네 소관이 아니야.’
구원은 인간 소관 아닙니다. 예수님과 마귀하고 관련된 문제지, 인간 소관 아니에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선택했잖아요. 12제자 중에 제자의 취지를 드러내는 사람은 유일한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 “내가 너희를 택했다. 하지만 그중에 하나는 마귀니라.” 세상에 예수님이 마귀를 택했답니다. 의도적으로.
왜 마귀를 택했느냐? 마귀를 택함으로 말미암아 이번 싸움이 인간과의 싸움이 아니고 영적 싸움이라는 겁니다. 영적 싸움의 효과, 영적 싸움의 그 결실로 인하여 그게 구원 이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저 구원 해 달라.’고 하면 그 자체가 이미 자격이 안 돼요. ‘누구?’ ‘저요.’ ‘네가 뭔데 너를 구원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절 만들어 놨으니까 구원해야죠?’ 누가 배후에서 그런 소리 하라고 하죠? 마귀가 그렇게 하라고 했죠. ‘하나님이 만들어 났으면 책임을 져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누구의 발언 이예요? 마귀 발언 이예요. 그런데 인간은 마귀를 모르니까 그냥 자기 끌어 오르는 자기 소원이죠. 이 땅에서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이 땅에서 고생하는 사람 많잖아요. 다들 고생하지만. 너무 고생하니까 죽어서는 좀 편하게 살고 싶으니까.
아까 이야기하신 분도 교회 안 나가도 안 나가는 것보다 나가는 게 마음 편할 수도 있어요. 왜, 이 땅이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개판인데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는 그 요구는 있을 수 있다니까요. 그런데 그게 바로 뭐냐, 초월적 타자가 아니고 그게 바로 초월론적 타자 본성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초월론적이란 뭐냐 하면 자기의 형편을 생각해서 + 알파, 비어놓는 자리에요. 그 비어놓은 자리에 내가 못 다 이룬 한을 마저 채울 수 있는 위대한 힘, 초월론적입니다. 그리고 초월신은 몰라요. 왜냐 초월했다는 말은 넘어섰기 때문에 우리는 넘어섰는지 안 섰는지도 몰라요.
어제 수요 예배 때 제가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화장실에 갔는데 자물쇠가 고장 났어요. 5일 동안 갇혔어요. 5일 동안 굶어죽을 뻔했어요. 6일째 살아났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예를 들면서 무슨 이야기하던가요? 그 아주머니가 처음부터 그 화장실에서 출생하지는 않았잖아요. 화장실 바깥에서 출생해서 어른이 되고 난 뒤에 화장실에 들어갔다 이 말이죠. 그럼 화장실 고장 난 문을 통해서 어떻게 됩니까? 이쪽 현실도 알고 이쪽 현실도 경험했잖아요. 했으니까 화장실 문이 닫혀 있으니까 ‘살려 달라.’는 말이 되는 거예요.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함으로 말미암아 애굽도 알고 그리고 앞으로 애굽 말고 다른 나라도 들은 소식은 있고 그러니까 어려울 때마다 누구한테 합니까? ‘우리를 약속의 땅에 넣어준다고 했잖아요? 넣어주세요. 하나님.’ 하고 빌게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예수님이 죽어야 예수님이 살 수가 있어요. 주가 돼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안 죽고 귀신이 돼서 아무리 총 쏴도 안 죽고 이렇게 해서 건지면 그건 주가 안 돼요. 구원주가 안 돼요. 구원은 우리가 가질 권리가 없고 구원은 누구만 독점하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만 갖고 있어요. 예수님이 갖고 있는 구원을 우리가 나누어 줄 때 구원받지, 우리가 구원받아야 하는데 ‘오냐, 도와줄게.’ 이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을 주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을 구원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애초부터 받을 자격이 없어요. 없는데 우리가 아까 인간은 육신에서 자아가 났기 때문에 타인을 할 때는 초월론적으로 생각하니까 우리는 자꾸 구원자를 원하고 신을 원하고 부처를 원하고 착한 사람을 원하고 그리고 남을 칭찬해 줄 타인들을 원하고 혼자 살면 외롭고 더불어 살면 입 벌어지고 그런 겁니다.
옛날 환갑잔치 할 때 자식 열댓 명 와서 엎어지면 주위 사람이 뭐라 합니까? ‘아이고, 복 받았다.’ 하잖아요. 어느 분이 오심, 지금 241 페이지 초월적인 타자와 초월론 적인 타자의 차이점이 뭐냐,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월론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육신이 있는데 육신에서 자아를 만들게 되면 이 자아는 인간의 욕망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럼 채울 수 없다 하면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채울 수 없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인간의 시간 론에서 미래가 있는 거예요. 미래가 있다는 말은 다 마저 채우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내 맘에 드는 육신이 아니다 이 말이죠. 내 맘에 드는 몸이 아닌 거예요.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그 미지의 부분은 이렇게 공백으로 남겨둬야 되겠죠.
자, 인간이 있으면 이렇게 인간의 시간 과거 현재 미래 있잖아요. 현재 인간은 어디까지 살고 있습니까? 과거는 살았고 현재는 지금 살고 있고 미래는 아직 왔어요? 안 왔어요? 안 왔죠. 그러니까 과거 현재까지 요 부분이라면 미래는 요 부분만큼 이만큼 공터로 비어놓는 거예요. 여기에 뭐가 들어가는가? 여기에 타자, 다른 말로 하면 남, 타인이 들어가요. 요 타인이 들어갈 때 아무나 들어올 수 있습니까? 자기가 골라잡아요. 골라잡을 때 골라잡는 기준이 뭐냐 하면 과거에 내가 내 욕망에 미흡했던 것을 마저 보충하기 위해서 새로운 타인을 원해요.
요 타인은 과거에 내가 아까 보충이란 말을 사용했죠? 보충이란 말보다 더 실감나는 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보상, 인간이 하루하루 사는 이유가 뭐냐 하면 보상받기 위해서 삽니다. 보상이 안 될 때는 뭐냐 보상이 안 될 때는 그 비어 있는 만큼 복수를 해줘야 돼요. 그래서 인간은 뭐냐, 보상받기 위한다와 같은 말이 뭐냐 하면 사람은 눈만 뜨면 오늘도 복수 할 꺼리를 찾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게 정 없으면 강아지라도 발로 차야 돼요.
인간은 이 시간 론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인간의 시간이라 하는 것은 이거는 있다 했습니까? 없다 했습니까? 이거는 원래 몸에는 시간이 없어요. 왜 없느냐? 몸 자체가 이게 변하기 때문에 몸 자체가 어제 몸 다르고 오늘 몸 다르거든요.
참 이런 어려운 말까지 해야 되는가 한번 들어보세요. 이건 약간 더 어렵지만 들어보세요. 내가 강둑에 앉아 있다고 봅시다. 강둑에 앉아 있으면 뭐가 보이느냐, 흐르는 물이 보이죠. 강둑에 보면 꽃이 피어있죠. 강둑에 새가 와서 앉았다가 날았다가 하죠. 그걸 보고 내가 아름답다고 참 정겹다고 아름답게 느끼죠. 그럼 거기서 변하지 않는 것은 뭐가 있습니까? 없죠. 다 같이 변하죠. 나는 여기 있고 강물이 흐른다고 생각하는데 강물이 흐르는 게 아니고 강물이 흐르고 있는 내가 같이 흘러가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통속이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서로가 같은 장면을 공유하면서 살다 보니까 정답이 없어요. 정답이 없다고요.
지금 강둑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아! 아름답다. 하는데 저 뒤에서 ‘너 숙제 안 하나?’ 고함지르면 갑자기 새로운 소리가 들릴 때 갑자기 ‘참, 숙제 해야지.’ 하고 후다닥 그 꿈을 깨운다고요.
내가 만든 이 순간의 현실은 항상 이게 가상현실 이예요. 가상적인데 그런데 가상 없이는 우리는 하루도 가상을 안 만들고 보내는 시간이 없어요. 늘 가상을 만들어요. 그래서 인간은 초월론적으로 이렇게 나 이상 뭔가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어떤 분을 찾고 지금 이 고생하는 세상을 보상할 세계를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천국이고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분을 누구로 보느냐, 신으로 부르는데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초월론적 타인으로서의 신, 종교, 기독교, 삼위일체,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하나님과 전부 누가 만든 망상입니까? 내가 만든 망상에 지나지 않아요. 지옥과 천국도 마찬가지고.
지옥의 망상은 누가 가야 되느냐 하면 나한테 못 되게 군 놈은 다 가야 돼요. 만약에 내 사랑하는 자식이 가면 틀려, 나는 지옥까지 따라갈 거야. 항상 모든 천국 지옥도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 돼야 돼요. 그러니 이것은 전부 다 망상입니다.
이제 초월론적인 게 뭔지 알겠죠. 초월론적은 인간이 보상심리에 의해서, 인간의 보상심리가 어디서 나왔다? 인간의 육신은 그대로인데 육신에서 시간이 피어나오니까 자꾸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미래의 꿈과 비전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 자아라 하는 것은 없는데 자아는 누가 만든다? 요한복음 8장에서 자아는 누가 만든다 했습니까? 마귀가 만들죠. 너희 아비는 마귀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의 몸을 만들어 놨는데 마귀가 거기다 뭘 입혀놨습니까? ‘네 자아는 훌륭하지. 네 자아는 진짜 잘 살아야지.’ 마귀가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빠지고 우리 자아를 만들기 위해서 앞장 세웠던 그 악마와의 영적 투쟁이 되는 겁니다. 그게 초월론적입니다.
그리고 초월적 타자할 때 들어오셨는데 이제 설명해 드릴게요. 초월적 타자를 예를 들면서 제가 화장실에 갇힌 여자분 이야기했죠. 오늘 듣는 사람은 두 번 반복해서 듣는데 화장실에 5일 동안 갇힌 분이 6일 째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뭘 알았습니까? 화장실 바깥의 현실을 알았죠. 알았으니까 안에 갇혀 있을 때 갇혀 있다는 걸 아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6일 동안 갇힌 그분이 갇힌 게 아니고 그냥 화장실에서 태어나서 화장실에서 학교 다니고 밥 먹었다면 그 사람은 바깥에다 ‘살려주세요.’란 말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 사람은 그 안에서 뭘 하느냐 하면 냄새 나니까 뭘 하느냐 하면 초월적 신을 찾는 게 아니고 초월론 적을 찾는 거예요. ‘아마 내가 화장실에 살다가 내가 죽고 나면 좋은 나라 여기보다 더 좋은 화장실에 갈 걸.’ 그건 아까 뭐라 했습니까? 초월론적이라 했죠. 초월신이 아니죠.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의하면 갇혀 있죠. 그 대목 찾아보세요.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모든 걸 죄 아래 가두었다고 돼 있죠. 가두었다는 말이 뭔 뜻인지 모르는 사람 없을 거예요. 가두었다는 말은 빠져 나올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길을 잃어버렸으면 길 찾아 나오면 되는데, 죄 아래 갇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회개해도 죄에요. 죄에서 회개하란 말이 아니고 회개하는 그 자체가 뭐가 된다? 죄가 되고, ‘잘못했습니다. 제가 살인했습니다. 간음했습니다.’라고 반성하는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예요.
반성해도 죄고 반성 안 해도 죄고, 다윗이 ‘내가 죄인이다.’ 해도 죄고 다윗이 자기 죄를 모를 때도 죄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에요. 다윗이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고백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여전히 갇혀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는 본인, 반성하는 본인이 약속은 아니에요.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지, 하나님 앞에 눈물 찔찔 흘리는 내가 약속의 자녀는 아니에요. 약속은 오직 한 분,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주께서 건져주면 구원받고 안 건져주면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에게 약속이 들려 왔다고 한다면 약속이 왔을 때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죠. 우리로 하여금 초월적 신을 모르면서도 그걸 대체해서 우리는 초월론적인 신을 믿고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죠. 알려주면 우리가 벗어나느냐?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벗어나지는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어요. 그 자리에 있고 주님께서 죄에 갇힌 우리에게 주님의 형상을 새겨버리죠.
자, 예를 들면 요거 약간 천박한 예가 되지만 충분히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어릴 때 달고나 하는 것 해봤어요? 설탕에다 소다를 넣으면 부풀어지면 탁탁 치면 뚝 떨어지잖아요. 그걸 뭉개버리면 납작하게 되잖아요. 그 설탕이 밑에서 불을 때면 뜨거워요? 안 뜨거워요? 뜨겁죠. 그러면 우리가 설탕이라면 ‘살려주세요. 이 컵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국자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하잖아요. 주인이 벗어나게 해줍니까? 안 해줍니까? 벗어나기는커녕 소다를 넣고 거기다 새 모양, 별모양, 해서 자, 별 모양 떨어지게 하는 사람은 하나 더 준다, 하는데, 사실은 안 떨어지게 하는 사람 없어요. 다 떨어져요. 아예 문양을 새겨버리죠.
우리로 하여금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님의 모습을 새겨 버리면 그것이 곧 구원 이예요. 우리는 육신의 성깔, 전혀 죽을 때까지 못 버립니다. 아까 육신의 성깔 뭐라 했습니까? 다 잊어버렸다. 육신의 성깔이 뭐다? 보상심리가 있고 보상심리를 메우기 위해서 바깥에 튀어나올 때 행동은 복수의 기대를 가지고 하는 거죠.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늘 잔소리 듣던 아들이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아버지의 소원대로 사법고시 합격해서는 아버지 무덤에 가서 마른 오징어하고 진로소주 가지고 가서 울면서 ‘아버지여, 드디어 아버지 뜻대로 성공을 했는데 이렇게 돌아가시면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우는 것, 드라마 보면 많이 나오잖아요. 이게 뭡니까? 그동안 아버지한테 복수하려고 공부한 거예요. 그걸 아버지 이름으로, 인간은 아버지 이름으로 못 벗어납니다.
항상 인간의 자아는 순수하지 않아요. 주변에서 삽입된 거예요. 온 잔소리들이 다 모여서 내 자아가 된 겁니다. 따지고 보면 집안마다 고장마다 학벌마다 전부 다 그 노림수가 다 달라요. 전부 다 그 사람의 희망이 달라요. 왜, 세뇌를 그렇게 받았기 때문에.
그러나 놀라운 것은 성경에 보면 모든 육체는 다 풀의 꽃 같고 그 꽃은 다 떼버린다는 거예요. 어느 나라 출신이고 어느 민족 출신이고 나이 관계없이 그 꽃은 다 떼버리고 다 쇠하지만 오직 뭐는 영원히 서리라?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결국은 말씀이 우리보다 우선 이예요. 우리 존재보다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을 이사야 40장에 그렇게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철학자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어요. 상처가 존재보다 우선이다. 라는 말을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십자가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다. 이게 십자가 새 언약, 십자가 지기 위해서 예수님 오셨지, 예수님이 어떻게 하다가 실수해서 십자가 진 게 아니고 애초부터 십자가란 상처를 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활동해야 됐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구원하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알았던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아요. 사도바울이 이거 알고 사도가 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아요. 십자가가 구원하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와 아들 둘 만의 일이 구원하지,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저쪽에서 일을 안 했는데 내가 백날 믿어도 이거는 초월적이 아니고 초월론적이 되죠. 내가 상상한 예수, 상상한 천국 상상한 지옥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 맘대로 시나리오 짜고 자기 맘대로 구원 받았다. 안 받았다. 천국 간다. 지옥 간다. 혼자 울었다. 웃었다. 자기 맘대로. 이건 괜히 시간낭비고 소용없는 짓 이예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할당이 되고 배급이 돼야 돼요.
제가 대구 강의했을 때 그런 이야기 했는가, 고린도전서 13장의 예를 들었는데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다 했잖아요.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는 이곳이 천국인데 사람은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는데 사람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다 두 가지를 보탠다 했죠. 믿음 소망 사랑만 항상 있지 않고 자기의 자존심도 있고 돈도 가져가야 돼요. 자존심과 돈과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을 생각하고 사람들은 교회 나갑니다.
진짜 복음 앞에 나가면 항상 있지 않아야 될 것을 빼는 작업을 해야 돼요. 뭐냐 하면 아까 집어넣은 게 뭡니까? 돈과 자존심은 이게 들어갈 자리도 아닌데 멋도 모르고 들어갔죠. 그러면 목사님 설교 중에서 두 개를 뭐를 빼야 돼요? 자존심을 빼면 자기 명예, 명성 자기체면 다 빼는 거예요. 자기 자랑 질, 자기 간증, 어디 가서 은혜 받은 거 다 빼야 돼요. 자존심 빼야 되고 그 다음에 뭐 빼야 되고? 돈을 빼야 돼요. 왜? 믿음 소망 사랑이 영원하지, 이 두 개는 같이 섞일 요소가 아니잖아요. 이 두 개를 빼버리자 말이죠. 이거 빼는 걸 자기 부인이라 하거든요. 잠시만요. 이거 빼시고 가실게요. 하고 설교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교회 아무도 안 가죠. 그 교회 아무도 안 옵니다. 교회 형광등 전기도 안 들어오고 교회 문 닫죠. 목사들이 교회가 문 닫아야 비로소 그 목사들이 예수님이 보입니다.
교회가 잘 되면 교회가 보여서 예수님은 안 보이게 됩니다. 그 교회는 아까 이야기한 자기 자존심이고, 그 교회에 복음 아는 사람이 들어오면 핍박해서 죽여 버리죠. 그냥 내쫓아버리죠. 자기가 들통 나니까. 그래서 교회는 결국은 교회 자체가 마귀를 섬기는 삼위일체 마귀를 섬기는 그러한 마귀가 자리에 앉아있는 데살로니가 후서에 나오는 사단이 보좌에 앉아 있는 곳이 교회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지난주일 낮 설교에 그걸 가지고 뭐라 했느냐 하면 교회를 보이스 피싱이라 했죠. ‘고객님, 많이 당황하셨어요?’ 하고 돈을 빼먹는, ‘하늘나라 확장해야 돼.’ 하면서 돈을 빼먹고, ‘주의 나라를 섬겨야죠.‘ 하고 돈을 빼먹고, ’너희 집은 잘 살면서 교회는 엉망이다.‘ 하면서 돈을 빼먹고 보이스 피싱 하는 곳이라고 보면 되죠.
그러면 그 교회 다니지 말까요? 아니죠. 다녀야 되죠. 왜 무엇이 보이스 피싱 하는 데니까. 그 모습이 바로 다니는 내 모습을 내 거울처럼 봐야죠. 그들이 하는 짓이 내가 나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물 위에 자기 얼굴 보듯이 교회 다니면서 그 모습을 봐야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 없으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는 이 모습들이 서로 모여 있어서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을 서로 발견해야죠.
그러면 그런 식으로 하면 구원 못 받잖아요. 맞습니다. 구원 못 받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이 와야 그리스도 영이예요. 성령이 없으면 아무리 칭찬받아도 그 사람은 그리스도 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에요. 로마서 8장 9절,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십자가 지신 상황을 날마다 되풀이 해줘요. 그리고 찔리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면 바로 내가 가해자로서 피해 입은 그분이 피해자가 가해자인 나를 용서하는 식으로 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모든 공로를 오직 주님께만 돌리게 됩니다. 그걸 가지고 믿음 소망 사랑이라 합니다.
그래서 241 페이지를 다시 정리하면 초월론적인 그 세계가 뭐로 바뀐다? 초월적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것은 바깥이 이미 있다고 생각한다면 초월론적이 돼요. 초월적이 안 돼요. 초월론적은 그야말로 바깥은 있는지 없는지 몰라야 돼요. 그래야 초월적이 되니까. 결국은 초월적이 되려면 낯선 분이 와야 돼요. ‘당신 어디서 왔어요?’ 마노아란 분 아시죠? 누구 아버지입니까? 삼손 아버지에요. 삼손 아버지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 그 부모가 하는 말이 뭡니까? ‘실례지만 누구시죠?’
그래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진짜 초월론적 말고 종교 말고 교회 일 말고 초월적, 그야말로 바깥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데 누군가 나타났을 때는 어떻게 확인되느냐 하면 그분으로 인하여 나에게 뭐가 유발되느냐 질문이 유발되는 경우가 바로 하나님이 직접 찾아온 겁니다.
우리교인들 보고 오후 예배 때 기도하라 하면 우리교인들 스트레스 돼요. 그런데 그분들이 다른 교회에서는 기도하라면 한 기도 했던 사람들 이예요. 유창하게 기도했었는데 어느 날 우리교회 와서는 기도발이 다 떨어졌어요. 전부 다 사양을 해요. 더 이상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기도할 수 있는데 그 기도는 내가 나에게 질문을 해서 내가 익히 아는 질문에서 난 해답을 이미 알고 있는 가운데 하는 기도기 때문에 다른 교회에서는 자랑 질 하면서 기도한 거예요.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줄~줄~줄~ 나오고 남북통일부터 온갖 것 확장해 주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해주시고 빛과 소금이 되게 해주시고 날마다 거룩하게 해서 주께 영광이 되게 하시고 온갖 성경구절을 다 동원해서 한 시간, 두 시간 안 말리면 어디까지 갈지 몰라요.
그런데 우리교인들은 논리적으로는 모르지만 직감적으로 아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해답을 아는 상태에서 내가 질문한 거 말고, 내가 도대체 뭐를 질문해야 될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우리 주님 앞에서! 그런데 진짜 기도할 때가 있어요. 뭐냐 하면 주님께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어 버려요. 인생을 살면서.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어떻게 이 사태를 대난난감, 어떻게 처치할 수가 없어요. 완전히 길이 막힐 때 ‘어쩌란 말입니까?’하면서 나올 때 그 질문은 주께서 던진 질문입니다. 그 해답은 뭔지 몰라요. 그럴 때 기도를 하게 되는데, 결국 내 말은 뭐냐 기도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기도하게 하시는 기도가 있어요. 이때는 그 기도는 말릴 수는 없어요. 어떻게 대책이 없어요. 대책 없을 때는 일을 주님이 저질러 놨으니까 나는 그냥 붕 떠 있는 상태에서 그냥 내 몸을 주님이 일 저질러 놓은 대로 그냥 내맡길 수밖에 없어요. 떡이 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던질 수밖에 없죠. 그 기도, 그 기도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도가 아니고 정말 앞이 하얘지면서 하는 기도에요.
응답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럴 때 그 기도 응답을 제가 알고 있거든요. 궁금해요? 궁금하면 알려드릴게요. 자식 잃었습니다. 부모 잃었습니다. 지금 결혼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날 잡아놨는데 다 깨졌습니다. 교회에 불이 났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남편이 지금 혈액 암에 걸려서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6개월밖에 못 산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이럴 때 정답을 제가 알려드릴게요. ‘네가 왜 그걸 걱정하느냐?’ 주께서 물으시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걱정 안 될 수 없어서 걱정합니다.‘ 이럴 거예요. 그 밑바닥에 뭐냐 하면 아직도 내가 근사하게 더 살아야 된다는 것이 밑에 깔려있어서 그래요. 분명히 성경에서는 자기를 죽이는 자가 산다 했는데 우리는 성경 말씀에 있는 그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지를 않았어요. 이왕 사는 거 좀 복음으로 믿음 좋다는 소리 듣고 근사하게 하나님 살아있는 걸 본때를 보이면서 야! 믿음 좋다는 소리 들어가면서 이렇게 살고 싶은데 ‘왜 하나님은 내 일에 왜 횡포를 놓습니까? 왜 내가 건전하고 고귀하고 경건 되게 살고자 하는데 주님께서 나한테 도움이 안 됩니까?’라는 그러한 인간의 내면적인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그게 있었어요.
그래서 주께서 사태를 일으켜서 기도 다시 하라.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기 때문에 너도 죽은 자니까 네 인생 앞으로 네가 가꾸지 마, 네가 관리하지 마. 일부러 내가 일으켰어. 네 속에 마귀 들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너는 죄인이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너는 바로 그래서 너는 죄인이야, 나는 그 죄를 용서하러 왔는데 너는 용서만 알고 네 죄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용서가 너에게 먹히지 않았던 거예요. 다시 한 번 용서가 먹히기 위해서는 용서를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자기 본성의 죄를 알 수 있는 그런 아주 특별한 기회를 하나님께서는 앞이 캄캄한 사태로서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10분 쉽시다.
가락-70이레 논문(계시 공백)131107-29강b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242 페이지에서 인자에 대해서 거기 나옵니다.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인자라고 하는데 인자에 대해서 알 때는 242 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뭐라고 돼 있죠? 『그렇게 해서 계시 공백₍구멍₎을 메우려 한다.』계시 공백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인자가 나와요. 인자란 분은 어디 나타나느냐? 공백, 블랙홀에서 구멍 속에서 나와요. 구멍 속에서 나오려면 인자가 먼저 자신의 자리가 구멍에서 나온다면 그 자리가 먼저 우리를 통해서 구멍을 뚫어야 되겠죠. 우리를 구멍을 뚫는 거예요.
우리가 의인이고 싶어 해요. 왜냐 하면 의가 있어야 복이 오니까 착한 짓했을 때는 복이 오고 나쁜 짓하면 벌 받잖아요. 그래서 복을 계속 부여받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착한 것을 편집해서 ‘요거 착합니다.’ 요거 기억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건 인자가 안 와요. 인자는 계시 공백을 통해서 오거든요. 그러면 뭘 받아야 하느냐 하면 우리보고 인자가 임하려면 인자 임할 장소를 구멍을 파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제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나이다.’ 하잖아요. 주님은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합니까? 구멍을 뚫죠. 그 십계명 지켰다는 그 화려한 과거, 멋들어진 과거, 그걸 구멍을 뚫습니다.
그 뚫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라요. 부자 청년은 부자기 때문에 구멍을 어떻게 뚫느냐 하면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아무것도 없이 되고서 나를 따라 오너라.’ 우리 같이 돈도 없는 인간은 그런 소리 안 합니다. 만약에 공부를 잘한다면 ‘너는 꼴찌가 돼서 오너라. 반에서 제일 꼴찌가 돼서 오너라.’ 이렇게 하겠죠. 만약에 몸이 건강하다면 ‘당뇨 걸려서 오너라.’
왜냐 하면 사람이 ‘선한 선생이여’ 할 때 사람은 이렇게 돼요. 선하다는 것을 출발을 어디서 출발하느냐 하면 나의 선함에서 출발합니다. 나의 선함이, 선함이, 선함이, 선함이 있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완전하게 선하지를 않죠. 인간은, 자기가 알잖아요. 지금도 강원도의 할머니가 눈과 심장 달라 하면 우리가 떼어 줍니까? 그 정도 선하지는 않죠. 그러나 내 자식이 아프다 하면 얼른 떼어주죠. 왜, 내 자식이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선하다고 하지만 항상 나와 가까운 사람한테는 선하고 남들한테는 그렇게 냉정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죠. 완전하지 않을 때는 아까 첫째 시간에 빈 공터가 있다고 했죠. 요거는 앞으로 내가 더 선해져야 될 그러한 미진하게 남아있는 거예요. 그것마저 채우면 내가 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선한 선생님이여’ 하면서 예수님 바라볼 때 신의 이름입니다. 신의 영역과 이 선함을 여기서 연못에 돌 던지면 뭐가 일어납니까? 파장이 일어나죠. 물결 따라 가보세요. 물결 따라 가보면 저 호숫가 맞은편에 딱 도착되죠. 그 물결이 있는 그곳이 뭐냐, 선중에서 최고의 선, 진리의 최고의 진리, 아름다움 중에 최고의 진, 미, 진선미, 모든 궁극적인 모든 최고의 귀한 고귀한 가치, 그것을 인간들은 무슨 세계로 봅니까? 바로 신의 세계로 봅니다. 착함의 극함, 아름다움의 극함, 모든 황홀함의 극함, 이것을 중세 때는 이걸 무한이라고 이야기했고, 이 무한을 칸토르란 수학자는 19세기지만 그전에 수학에서 이게 칸토르는 수학에서 집합론에 나오는데 그 전의 수학자들은 이 하늘에 있는 무한을 지상의 무한으로 내렸어요.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치가 이렇게 했어요. 거기서 나온 게 둘 다 미분을 만들었습니다.
미분이 뭐하냐 하면 흐르는 운동을 정지시켜서 해석하는 겁니다. 그걸 분석하는 방법 이예요. 자르는 거예요. 이렇게 가잖아요. 이걸 잘라 보세요. 자르면 이렇게 나오겠죠. 더 잘라보면 거의 직선 되죠. 직선 된 것을 그냥 무한대로 자르면 그 값이 나온다 이렇게 생각 하는 겁니다. 이것이 나중에 현대 기계에 들어오면 파동을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파동(소리)을 수식으로 표현하게 되면 그때부터 우주가 계속 발달하고 하지만, 이 미분이라 하는 것은 원래 우주가 넓은데, 여러분 우주가 넓습니까? 내 안에 있는 세포 안에 있는 그 전자가 무한합니까? 둘 다 무한하겠죠.
그래서 바깥의 신의 세계를 세속에 가져오게 되면 이제는 천문학이 발달합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 천문학, 무한의 세계를 통해서 신이 남긴 작품을 통해서 신에게 접근해 가는 거예요. 이게 무한을 벗어나는 겁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나는 요거 십계명까지 지켰는데 어떻게 더하게 되면 신의 세계, 진짜 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할 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조금만 더해라. 아유, 착하네. 이만큼 한 사람 별로 없었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선함이라는 것은 네가 선하다. 신약과 연결해서 결속되고 너의 선함의 확장으로서 신의 세계라 했던 그 잘못된 선함이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네가 부자기 때문에. 네가 돈이 많기 때문에 그렇다. 정말 네가 선하다면 그 모든 것을 팔아버려라. 네가 나한테 선한 선생님이여, 할 때는 너 가진 것 다 팔고 나한테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는가, 한번 보자, 하니까 그 부자 청년이 어떻게 됐습니까? 그거 다 팔고 예수님 따라 갔습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근심했죠. 왜 근심할까요? 그럼 근심 안 할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돈이 있었을 때는 근심 안 했는데 돈이 없어지면 근심하죠. 결국 그 인간은 결국은 선함이 목적이 아니었고 돈을 목적으로 살았던 거예요.
그럼 제가 퀴즈 하나 낼게요. 어떤 사람이 돈도 없고 건강도 잃었는데 착하기만 해요. 착한 짓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이야기하겠습니까? 너는 죄인이다. 그리고 난 뒤에 날 따라 오라 하면 그 사람 따라 가겠습니까? 안 따라가겠습니까? 안 따라가죠. 마지막 자아가 그나마도 자존심이라고 걸치고 있는 게 돈도 없고 건강도 잃었지만 남한테 해코지 안한 자아, 선함만 있었는데 그나마 그것마저 건드려버리니까 그 사람도 근심하고 돌아갔을 거예요.
그러니 사람마다 다 달라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착함, 선함, 천국 이 계시가 뻥! 하고 구멍을 뚫어버려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대전에서 강의했던 건데 요한복음 9장에서 그 소경을 낫게 하죠. 소경이 눈 뜨고 난 뒤에 비로소 자기가 소경인 걸 알았어요. 소경일 때는 소경인 줄 몰랐는데 소경에서 눈을 뜨게 해주니까 ‘내가 진짜 주님 앞에 소경이었습니다.’라는 것을 이미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았기에 ‘내가 소경입니다.’ 하는 거예요. 그걸 듣고 주께서 하는 말이 ‘자기가 소경이란 사람은 나를 본 자요. 자기가 소경 아니란 사람은 아직도 나를 못 본 자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그게 있어요. 그것도 핵심부분입니다. 그걸 놓치고 무슨 성경을 해석을 합니까?
사도바울은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라 해서 사도바울은 지옥 갔습니까? 아니잖아요.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란 말을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구멍을 안파서 그래요. ‘아직도 주님 없이 요거 힘으로 살지,’라는 게 따로 있어요. ‘아이고, 주님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주님 없으면 이것으로 살지, 이빨 아프면 잇몸으로 살지. 주님 없으면 딴 거 가지고 버티지, 뭐.’라고 얹을 수 있는 게 아직 있어요. 그걸 깨주신다면 그건 복 받은 사람이고 그게 축복이고 그게 남아있으면 그걸 저주받은 사람 이예요.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는 자로다” 했죠? 그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모든 게 채석장에 돌 깨죠. 우리 딱딱한 돌이 말씀이 정이 돼서 말씀이 모든 걸 다 깨버리고 우리를 벌거벗게 만들어요. 참, 아파요. 정말 아파요. 아프지만 원래 청춘은 아파야 돼요. 아프니까 청춘이죠. 아프니까 아직도 우리가 살아있는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정으로 우리를 톡! 톡! 우리의 두껍게 쌓인 고드름 같은 우리의 위선을 말씀으로 탁 깨줍니다. 우리가 굳은살이 너무 많이 끼었어요. 나이만큼 많이 꼈어요. 그걸 다 때려서 거할 때 그 자리는 우리 자리 아닙니다. 그 자리는 인자가 안착하는, 하늘에서 우주선이 내려오는 자리 있잖아요. 결국 주님이 자기 자리를 만든 거예요. 그걸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전! 성전이 만남의 장소에요.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시내 산에 갔잖아요. 그거 왜 갔습니까? 놀러갔습니까? 쓸데없이 4번이나 왔다 갔다 했어요? 시내 산을 왜 올라갔습니까? 올라오라 해서 올라갔죠. 다이어트 하려고 등산 간 게 아니잖아요. 결국 올라갔다는 말은 누굴 만났다고 하잖아요. 만날 때 그냥 만나기만 했습니까? 뭔가 보고 듣고 받은 게 있죠. 받은 건 십계명이고 들은 게 뭐냐 하면 바로 그 외의 많은 율법을 받았지 않습니까?
율법! 그 율법 속에 뭐냐 하면 놀라운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만남의 장소를 받아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만남의 장소는 인간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만남의 장소를 정했다는 이 말은 그동안 인간들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아무리 고상하게 아주 유난 떨어도 그건 아무 짝도 소용없는 거죠. 만남의 장소는 누가 정하고 누가 만드신다? 주께서 정하시고 주께서 만드시는 거예요.
그럼 만남의 장소면 휴식이 있을 게 아니냐? 제가 십자가마을에 답변한 게 있죠. 추도예배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할 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인간의 어떤 형식과 제도로도 영적 예배를 그냥 재현할 수 없습니다. 구현할 수 없어요. 11시에 예배드리려 하면 10시 50분에 오면 주님이 아직 안 오시는 겁니까? 안 되거든요. 아무리 인간이 반듯하게 해도 철저하게 형식을 갖춰도 그것은 영적 예배가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적 예배가 되지 않아요.
만남의 장소라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 수 없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줄 때만 만나는 거예요. 꼭 유괴범 같아요. ‘당신 딸이 지금 내 손에 있는 것 알죠? 5천만 원 준비해서 나와라.’ ‘그러면 5천만 원 가지고 어디로 나갈까요?’ ‘경찰에 알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어디로 나갈까요?’ ‘만남의 장소는 내가 정해.’
만남의 장소는 누가 정해요? 주님이 정하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만남의 장소만 ‘주께서 그러면 어디서 만날까? 송파구청 있는 데서 만날까?’ 이러고 있는데 뭔가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나서 보니까 내 구멍을 뚫고 있잖아요. 만남의 장소가 구약 율법에서 만남의 장소가 어떻게 형성된다는 걸 알게 되면 이미 만남의 장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게 출애굽기에 보면 만남의 장소의 요건이 있어요. 요건이 뭐냐 할 때 출애굽기 20장 25절에 보면 나오죠. 정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단을 쌓고 그 다음에 흠 없는 제물로서 화목제와 번제를 드리게 되면 누가 오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오셔요. 주의 이름이 계신 그곳이 하나님이 전에 약속했던 만남의 자리입니다.
지금 오늘 두 번째 강의 주제가 뭐냐, 인자죠. 인자를 설명하는데 제가 초반에 이야기했는데 인자라 할 때는 반드시 인자가 자기 자리를 구멍을 파야 한다 했죠. 그걸 뭐라 했습니까? 성전이라 하죠. 성전이 만남의 장소인데 성전이 만남의 장소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전 이전에 먼저 있었던 게 있어요. 그게 회막입니다. 그때는 천막이라 했는데, 성전은 건물이지만 회막, 천막은 그냥 텐트 아닙니까? 텐트는 이동성이 있어요. 이동성이 있다는 말은 이 자리가 다가 아니다. 또 어디로 훌쩍 떠나야 되는 자리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성전이 이 땅에 다윗 때 예루살렘에 있었거든요.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난 뒤에 예루살렘이 어디로 갔습니까? 바벨론에 갔죠. 바벨론 갔던 예루살렘이 어디로 갔죠? 다시 예루살렘으로 왔죠. 예루살렘 와서 예루살렘이 어디 갔죠? 예루살렘이 죽어버렸어요. 사흘 만에 주님께서 예루살렘이 살아났어요. 그 예루살렘이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요한계시록 21장에 예루살렘이 위에서 내려옵니다. 재림하시거든요. 강림하시죠. 예루살렘에 가는 길을 추적해 보자.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추적입니다. 그게 곧 구원의 유일한 만남의 장소에요.
그러면 지금은 예루살렘이 어디 있느냐? 예루살렘이 지금 하늘에 있죠. 하늘에 있으면 죽어야 가는데 죽어도 못 가요. 하늘나라는. 그래서 신약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늘나라가 이 지상에 있는 하늘나라가 아니고 주님이 계신 그곳이 하늘나라가 되는 거예요. 이 보잘 것 없는 우리의 몸이라 할지라도,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곧 하늘나라가 되는 거예요. 이거는 찬송가에 나오기 때문에 계시가 아니기 때문에 못 믿겠다 한다면 믿을 만한 거 이야기할게요.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래서 관건은 뭐냐, 주의 이름이죠.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함께 있겠다, 하잖아요.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되겠네요. 그러면 주의 이름을 뭐라고 부를까요? 지저스로 부를까요? 예수라 부를까요? 뭐라고 부를까요? 소프라노로 부를까요? 바리톤으로 부를까요? 뭐로 부를까요? 저같이 발음 안 좋은 사람은 예수가 될지 사투리가 돼서 사투리를 어느 사투리로 할까요? 어떻게 톤을 딱 맞춰서 예수~ 예수~♫ 예수~♬ 예수~~ 하고 사중창으로 할까요? 아카펠라로 할 일 있습니까? 어떻게 불러야 주님 오십니까? ‘그냥 불러라 내가 올게.’ 되려면 어떤 톤으로 불러야 ‘그래 날 불렀지.’ 하고 쫓아오십니까? 어떻게 기도원에서 부르듯이 성부 성자 부르면 오십니까? 고함지르듯이. 자기 목만 아프지. 목 아픈 게 아니고 마귀가 오죠.
그래서 성경은 해답 다 주고도 여전히 비밀이라는 겁니다. 해답 다 줬는데 이게 해답이 왜 해답이 안 되느냐 하면 아까 첫째 시간 끝에 이야기했습니다. 질문을 그 해답에 맞춤 질문을 우리가 할 능력이 없어 그래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해답은 준비해 놨는데 우리가 뭐가 안 된다? 질문이 안 되니까 우리로 하여금 질문 하게끔 주님께서 말씀으로 사태를 그렇게 몰아넣어버려요. ‘어찌합니까?’ 이런 식으로.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부르기도 하고요. 임 재범은 아니지만. ‘어떻게 할까요? 저 보거 어쩌란 말입니까? 그 여인만 주시면 내가 모든 걸 드리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죠.
‘이거는 제가 예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면 저는 어쩌란 말입니까?’ 라고 하는 그때 멀리 있던 주님이 바짝 가까운 정도가 아니고 아예 내 속까지 완전히 와 버리면 그때 일어난 전환의 분위기가 바뀌게 돼요. 전에는 우리가 있잖아요. 그러면 주님이 여기 오게 되면 우리는 주님과 악수하고 주님과 나하고 하나이고 싶어 합니다.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 이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질문케 한 질문이 있잖아요. 너무 난감할 때 질문 같으면 주께서 오시면 이미 오신 순간 우리는 내가 주님을 믿는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 주님을 소망한다. 이 모든 것은 다 묵살되고 주님이 우리를 가져가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고린도후서 6장처럼 ‘내가 가난한 자 같으나 부한 자요. 내가 너희들 보기에는 곧 굶어 죽지, 사실은 내가 살았고 너희들이 죽은 자고, 내가 슬픈 자 같으나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자요. 이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6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이 성령에 충만할 때 나오는 그 고백인데 그거는 성령님의 고백입니다. 이용하기는 사도바울의 혀를 이용하는 거죠.
주께서 우리 몸을 충분히 이용해서 튀어나오기는 주님 자기가 튀어나와 버려요. 그러한 경우가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용서해 주세요.’라는 말이 나온 것은 이거는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주의 능력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한번 살아보시렵니까? 그거는 할 수 있어요. ‘주여 이 떡이 먹고 싶은 떡이 아니고 주신 것이니 감사합니다.’ 그래서 떡이 안 먹고 싶은데 떡을 주게 되면 그런 난감한 사태가 일어나는데 ‘아, 어디 떡 없나?’ 할 때 갑자기 떡이 생겨버리면 그건 자신도 모르게 뭐가 튀어나옵니까? ‘주여 감사드립니다.’
우리 애가 분명히 반에서 30명 중에 15등인데 어느 날 보니까 ‘엄마, 나 100점 맞았어.’ 하고 들고 돌아다니더란 말이죠. 그럴 때 기쁘기도 하지만 그때는 애가 무섭죠. ‘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애가 이제는 무서운 거예요. 사람이 언제 무서우냐 하면 예상 밖에 벗어날 때는 항상 무서워요. 주님 찾아온 순간입니다. 그래서 진짜 주님이 찾아오시면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아, 고기 잡아야 되는데, 고기 잡아야 되는데.’ 막상 고기를 딱 잡게 해주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뭡니까? 무서운 거예요. ‘주여, 저 같은 인간하고 상종하지 마시고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이게 바로, 이 자리가 무슨 자리냐? 주님이 그 자리에 실제로 있는 자리다. 그러니까 그 순간만큼은 베드로 여기 있고 몇 발자국 바깥에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아예 베드로자리에서 완전히 장악해 버렸어요. 그게 바로 예수 안이라고 하고 그걸 성령 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 서신에서. 이게 늘 상 그런 게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엇길로 샐 때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서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암담하고 앞이 캄캄하더라도 주님이 훤하다면 주님이 훤하지, 내가 왜 내가 운전사도 아닌데 내가 왜 뒤에 탄 승객이 왜 요동치느냐 말이죠. 앞에 운전사는 끄떡없는데, 터널 속에 들어갔다고 우리가 자살해야 됩니까? 터널 밖에 튀어나오면 난데없이 설국이 나오는데. 설국열차 영화 첫 장면이 그렇잖아요. 차타고 터널 나가니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죠. 삿보로의 하얀 눈 덮인 산이 나오죠. 터널 끝나고 난 뒤에.
그처럼 모든 것이 한 순간의 꿈인 것처럼 아는 그 순간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라는 것을 우리 속에 탕, 탕 십자가를 우리한테 박아서 우리들 옆구리에 창 자국 생기도록 그렇게 조치합니다.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자랑하지 않도록 그렇게 합니다. 돌아서면 마찬가지지만, 돌아서면 모기 약 뿌리고 난 뒤에 1분도 안 돼서 윙 하고 모기가 냄새 없다고 달려드는데. 하지만 우리 옆에 또 모기가 있다는 거, 그러면 또 뿌리면 된다는 걸 알죠.
영적 예배라 하는 것은 우리한테 포착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필요할 때마다 영적 예배를 드리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산 제자 드리게 하게 할 때 우리는 말씀 안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12장 안에 놓여있는 거예요.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말씀이 스스로 말씀됨을 드러내는데 우리를 활용하죠. 그게 바로 계시의 구멍을 뚫는 겁니다.
유대인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말씀 지키려고 했어요. 건전한 내가 또 십계명까지 지키고 안식일 지킨다고 안식일 지키려고 질문을 ‘안식일 날 어떻게 지키면 돼요? 가만히 있어봐, 세칙,’ 세부 사항까지 만들어요. 그래서 이렇게 지키면 된다 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는 말이 엉뚱한 소리 했죠.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 하는데 주님은 하시는 말씀이 “지킬 것 없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니까 안식일 발생 자가 주님 이예요.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니까 이건 지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내가 지켜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의 주인이 안식일에 그 원리를 그냥 적용시키면 자비가 주어지고 그 자비 받았음 자체가 안식일 완성이 되는 거예요.
안식일을 주일로 바꿔서 지키는 게, 지키는 게 아니고 용서받으면 그게 안식일이 덮친 게 된다니까요. 용서 받으면! 이 이야기를 참 많이 했습니다. 도무지 안 믿어요. 도무지 믿지를 않아요. 안 생겨요, 가 아니라 도무지 안 믿어요. 믿지를 안 해요. 사람들이. 돈 10% 내는 게 십일조가 아니고 예수님 만난 게 그게 예수님이 우리한테 십일조를 하셔서 ‘십일조 내가 다 냈다.’라고 통보해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일조를 누구한테 내는 게 아니에요. 십일조를 받아먹는 그 인간들은 뭐예요? 웃기는 인간들 이예요. 자기가 뭔데 받아요? 하나님도 안 받는데 자기가 왜 받아요? 무슨 하나님이 십일조를 받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받죠. 히브리서 7장에 보세요. 예수님이 십일조인데요.
그것도 모르고 옛날에는 십일조만 했는데 지금은 신약이니까 말씀을 더 키우기 위해서 십에 2조, 십에 3조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아까 이야기한 인간의 선함을 확장시키기 위한 보다 완벽하면 그게 신의 세계가 된다는 그 사고방식과 똑같은 사고방식입니다.
242 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봅시다. 『70년 포로 기간은, 7일이라는 원래 창조완료 시간과, 70이레라는 확정된 종말의 날의 시간대 가운데 끼어서 그 창조성을 종말까지 전달하는 매개구실을 하게 되고』무슨 이야기냐 하면 처음에 7이라는 말이 언제 나옵니까? 창세기에 나오죠. 70이레는 언제 나옵니까? 다니엘에 나오죠.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는 어디 나옵니까? 신약 요한복음 19장에 나오죠. 그러니까 70이레는 그 중에 끼어 있다 이 말입니다.
7, 7 할 때 천지창조 했잖아요. 이번 수련회 할 거 미리 해볼까요? 창조할 때, 붕어빵 안에 뭐가 들어있어야 됩니까? 앙꼬 있어야 되죠. 앙꼬 없으면 그건 붕어빵이 아니죠. 그냥 풀빵이죠. 그러니까 안에 앙꼬 있어야 되잖아요. 모든 창조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하셨다는 정보가 내장돼 있어요. 7에 예수님이 하셨다는 사실이 내장돼 있어요.
그런데 막상 창조된 자들은 창조됐으니까 있음이죠. 있음이 한자로 하면 뭡니까? 有죠. 있음에서 창조를 파악하다 보니까 ‘어떻게 창조됐지? 아! 없음에서 창조됐다.’ 없음에서 있음이 됐다. 이걸 창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뭐가 빠졌죠? 아까 앙꼬 빠졌죠. 없었는데 있었다, 가 누가 있었는가? 하나님이 하셨다. 이건 창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날 없었는데 있게 했다. 이것이 창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있게 했는데 내 안에 뭘 집어넣은 걸 이야기해야 돼요. 집어넣은 걸 창세기 1장 26절 우리의 형상대로, 뭔가 형상을 집어넣은 거예요.
형상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인간은 깨져도, 피조물은 깨져도 뭐는 깨질 수 없다? 형상은 깨질 수 없어요. 그러면 왜 깨지느냐, 인간의 껍데기를, 풀빵 껍데기가 깨져야, 앙꼬의 가치가 도드라지게 돋아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 자체가, 창조물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거예요.
말은 어렵지 않은데 이거 믿는데 어떤 사람은 수십 년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우리 허 운석 선교사님 같은 경우 저한테 이야기해요. 돌아 돌아왔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왜 몰랐느냐 이 말이죠. 그동안 예수님을 위해서 있다는 걸 모르고 뭐냐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한 거예요. 그게 얼~마나 엄청난 반대의 생각입니까? 사나 안사나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있는데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것뿐이겠습니까? 한국교회 전체가 그래요. 주를 위해서 기쁘게 해야 주의 사람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교회서 다 그렇게 가르쳐요. 그렇게 훈육하고 그렇게 세례 주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심지어 죄짓고 있으면서도 주님이 내 안에 있다는 생각을 왜 못할까요? 좀 하면 안 됩니까? 그 얼마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한순간에 다 날라 가 버립니다. 내가 병들었다. 암에 걸렸다. 내일 모래 죽는다. 내일 모래 죽더라도 그게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왜 그렇게 생각할 줄 왜 모르느냐 이 말이죠.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인데 우리는 바락바락 대들잖아요. ‘왜 아프게 하십니까? 하필이면 왜 엄마입니까? 그렇게 늙은 70대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은데 왜 나에게?’ 하잖아요. 하필이면 왜 나에게, why me? 가 왜 하필이 왜 들어가요? 하필이면 왜 머리가 희어졌어요? 다른 사람은 안 희어졌는데. 왜 하필이면.
주님께서는 ‘그걸 질문이라고 했나?’ ‘정답 이야기해줄까?’ ‘예’ 이미 네 안에 내가 있어서 너로 하여금 하필이면, 이란 죄를 유발시켰느니라. 됐나? 이게 기도의 응답이다.‘ 그 기도 응답 받고 우리가 그 다음부터는 뭐냐 ‘제가 입이 열 개라도 욥처럼 재를 뒤집어쓰고 제가 유구무언입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욥에 나오죠.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만듭니까?’ 할 때 하나님의 하신 방법은 ‘네가 황무지에 비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사람들은 항상 비라 하는 것은 자기가 경작하는 채소밭에 비가 와야 되고.
그런데 제가 어느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죠. 내가 있는 곳에 가물면 안 되고 내가 있는 곳에는 늘 촉촉해야 되고, 내가 있는 곳에는 날씨가 너무 추우면 안 되고 날씨가 포근해야 된다 할 때 항상 앞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내가 있다 했죠. 욥도 마찬가지에요. 하필이면 왜 내가 아프게 합니까? ‘나라는 자리에’ 아까 계시 공백, 그걸 구멍을 뚫어버리고 나라는 자리에 뭐를 집어넣는다? 인자를 집어넣으면 거기 인자와 우리의 만남이 그렇게 성사되는 거예요.
흉측한 예지만 이게 무슨 그림입니까? 물고기 그림이죠. 고기가 입을 벌리면서 ‘왜 하필이면 물고기입니까?’라고 하니까 주께서 계시에 의해서 이걸(입) 잘라버리고 여기다 여자 얼굴을 붙여주면서 ‘이제 됐나?’ 인어공주. 내가, 나는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필이면 나라는 말을 하지 말라 이 말 이예요. 네가 없는데 왜 자꾸 나라는 말을 붙이냐 이 말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4장 8절,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그 말 들으면 ‘사도바울은 좋겠다. 믿음 좋아서.’ 우리는 그냥 남의 이야기에요. ‘지는 좋겠다. 저렇게 멋들어진 소리 하고’ 그런데 성령이 와서 그걸 사도바울의 현실이 아니고 나의 현실로 바꿀 때 우리는 눈물 쏟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주 극렬한 반항 뒤에, 애들이 막 울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뭡니까? 조용해서 보면 자고 있죠. 우리는 극렬한 반항 뒤에 잠자고 있는 순간 이예요. 주께서 우리를 자신의 복음 전파에 우리를 활용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이발소에서 잠자고 있을 때 이발 다 깎고 있잖아요. 자고 있으니까 이발 다 하고, 우리로 하여금 까부니까 잠재워서 주께서 구원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내고 보니까 머리 다 깎였어요. ‘오, 내 머리 누가 했어?’ ‘내가 했다. 왜? 내 건강한 세포 누가 했어? 내가 했다. 내가 암세포로 다 바꿔 놨어.’ 왜, 구원받기 위해서. 구원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그 사람은 나중에 암 걸려 죽었다. 아니에요. 그랬던 그 사람이 사흘 뒤에 암이 깨끗하게 나았다. 이렇게 할 경우에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병이 나았습니까?’ 물으니까 ‘내가 참, 내가 믿음은 좋은 모양이다.’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아주 엉터리거든요.
나는 절대로 암에서 나을 사람도 아니고 살고자 하는 마음도 일체 없었고 나는 내 계획도 그게 아니었는데 예수님이 지 맘대로 낫게 하게 된 거예요. 여러분 그런 마음 준비 돼 있죠? 앞으로 여러분들이 260억 재산 가지거든 나는 부자 될 마음 없었고 나는 차를 4대 가질 그것도 없었고 아주 화를 내듯이 주님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부자 되게 했으니까 나는 짜증나 죽겠다. 나는 이렇게 할 마음도 없었고 서울대 법대 합격할 줄 몰랐는데 이건 주님께서 자기 맘대로 했는데 장난질 쳐서 됐는데 나는 화가 나도 보통 화가 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걔가 왜 변호사가 왜 되는데? 수석으로 왜 되는데? 그렇게 되게 만들어요.
질문: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쌓아올린 것들이 무너지는 거 아닙니까? 아까 부자청년도…
그것도 문제가 있어요. 자기가 무너질 것을 미리 예상하면 절대로 안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이 요거 무너뜨려서 나를 구원하죠? 하면 그걸 피해 갑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자기 공로를 우리하고 동업을 안 해요. 일방적으로 우리를 세리와 창기로 만들기 때문에,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에, 죄인하고 동업하고 협력하지 않습니다.
질문: 그러니까 자기가 나라는 걸 의지, 아까 부자 청년은 돈을 의지해서 돈으로 쌓은 선이 아닙니까? 그 돈을 무너뜨리라고 하니까 근심하고 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만남으로서 자기가 부서지는 거 아닙니까? 십자가 앞에서.
부서지는 그 결과에 대해서 우리가 미리 점칠 수 없죠. 어떤 사람은 부자 되는 식으로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차를 좋은 차타고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애가 공부 잘하므로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갑자기 국회의원 돼서 많은 사람이 자기한테 권력을 쥐는 식으로 무너지고 무너지는 방법도 여러 가지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지금 창조 이야기했거든요. 7일 간의 창조라 할 때 반드시 앙꼬가 들어간다 했죠? 고 앙꼬가 70이레로 전달됩니다. 전달, 전달, 전달, 전달, 전달되면 그 전달하는 매체가 뭐냐? 언약이라는 거예요. 창조와 그 다음에 70이레 다니엘 사이에 무수한 언약이 개입됩니다. 그 언약 하나마다 전달, 전달하는 거예요.
뭘 전달하느냐? 요걸 전달해요. 우리말로 ‘피’ 뭐죠? 피를 전달합니다. 창세기 4장에서 전달 요인을 흘린 사람이 누굽니까? 가인이 아니고 누구죠? 아벨! 아벨이 피 흘려 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벨의 피에서 스가랴까지. 스가랴는 선지자거든요. 요아스 왕 때 선지자인데 바른 소리 했다고 맞아죽었어요.
그거 생각하면 예레미야 같은 사람은 바른 소리해도 하나님이 살려두죠. 만약에 죽은 스가랴 같은 사람이 그걸 보면 ‘누구는 바른 소리 했다고 죽이고 누구는 살려두고 아이 씨, 나는 손해 봤다.’ 이런 생각 들 수도 있지만 진짜 영적 세계 들어가게 되면 살리기 위해서 태어나게 했고, 이쪽은 애초부터 죽이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 죽을 인간은 그거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그 시점에 죽게 돼 있습니다. 괜히 자기가 더 생각해서 할 생각 없어요.
히스기아가 15년 더 살았잖아요. 원래부터 15년 더 살게 돼 있어요. 그런데 왜 애초에 죽을 뻔 했느냐? 히스기아가 왕으로서 인간의 한계성을 드러낸 겁니다. 왕으로서 그런 식밖에 안 된다는 말은 히스기아는 아무리 해도 메시야는 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메시야와 대비시켜서, 예수님과 대비시켜서 왜 다윗 왕도 아니고 왜 솔로몬도 아니고 왜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이 없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앞에 쫙, 쫙 미리 많은 사람들을 깔아놓는 거예요.
솔로몬 지혜도 있겠다. 부자 됐겠다. 우리 같으면 솔로몬 같으면 믿겠는데 솔로몬도 아니에요. 솔로몬 입은 옷도 들풀보다 못하다 했잖아요. 우리 눈에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느냐 하면 많은 사람 만나지만 메사야는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다 정 주고 정 받고 좋은데 우리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은 그분은 아닌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지,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 강의에서 앞으로 해야 될 것은 뭐냐? 7이레에서 70이레에 공통점을 찾아내는 작업을 해야 되겠죠. 그걸 제가 죽 해놨습니다. 해놨는데 워낙 어려워요. 그 흐르는 노선이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이게 언약이 개입되기 때문에 중간, 중간에 언약이 개입되면서 7이레에서 70이레로 가는 그 노선이 방향이 완전히 사다리 타기 이상입니다. 이 길이라 생각하면 저 길로 가고 저 길이라 생각하면 이 길로 가고 항상 사람들의 예상 밖을 벗어나면서 죽죽 이어지거든요.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244 페이지 봅시다. 그런데 형상대로 했는데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왔죠. 아까 그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형상대로 했는데 여러분 한번 물어봅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했는데 형상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했는데 그 형상이 어디 있죠? 없죠. 죄 짓고 난 뒤에 형상이 없습니다. 형상이 없는데 죄 지어서 형상은 없는 껍데기는 있죠. 그게 창세기 5장에 보면 나옵니다.
껍데기! 형상이 없는데 형상이 빠져나간 껍데기는 나와요. 여기 창세기 5장 4절 봅시다.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삽십세를 향수하고 죽었어라” 죽었더라. 구백 삼십년 살았으니까 많이 산 것 같죠? 아담한테 구백 삼십년 산 아담한테 물어보세요. ‘할아버지 참 오래 살았네요.’ 하면 귀때기 맞습니다. 왜 ‘내일 되면 나 더 살고 싶어.’ 내일 되면 죽어야지. 백년이고 천년을 살아도 내일 되면 또 살고 싶어요. 결국은 ‘죽었더라.’ 하면 백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죽었으면 살아있으면 하고 똑같아요.
우리 몸이 있잖아요. 가고 나면 똑같아요. 여기 아무도 없잖아요. 여기 풍경 사진 찍어보면 똑같아요. 카메라 보면 훤해. 그러니까 아담이 있을 때만 아담이 있고 아담이 없을 때는 아담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바른 소리 하고 있죠? 그렇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말 이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있을 때나 써먹는 것이지, 내가 죽고 난 뒤에는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을 못하잖아요.
결국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없는 존재가 잠시 여기 있을 뿐이고 난 아마 곧 없어질 거야. 없어지니까 나한테 너무 기대하지 마.’ 이렇게 나와야지. 그런데 그 껍데기가 뭘 남기느냐? 자식을 남겨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없는데 형상이 빠져나간 그 껍데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십니다. 왜, 나중에 형상이 그 껍데기를 타야 되니까. 차고 들어와야 되니까. 그걸 로마서 8장 3절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 아들이 육신대로 오셔서 육신에 죄를 정하사” 우리가 보기에도 허접스러운 이 껍데기를 주님께서는 그 껍데기를 하나 버리지 아니하고 주가 되시는데 활용하시는 거예요. 우리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더 이상 죽지 않고 영원히 부활하는 육신으로 만들어내는 하나의 재료로서 충분하게 우리를 활용하신 겁니다. 거기에 걸려든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주님 되기 위해서 천국에 집합해야 될 사람으로서 이 껍데기를 활용당한 사람들, 성령이 임하면 누구든지 성령이 있으면 그리스도 사람이라.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껍데기로 사용하도록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하는 겁니다.
여러분, 지하철에 보면 요새도 그런 사람 있는지 모르지만 지하철에 보면 자리가 남아 있잖아요. 이런 게 있어요. 지하철을 타고 있는데 자기 친구가(50대 이상 아줌마) 지하철 바깥에 있거든요. 그러면 그동안 그 자리에 앉으려고 그렇게 사당에서 잠실까지 서서 와서 앉으려고 하는데 보니까 저 바깥에 친구가 전철 타려고 있으니까 들으라는 듯이 ‘야, 야 빨리 와, 자리 마련 해놨어.’ 얼마나 화가 나는지 몰라요. 지금 거기 앉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오지도 않은 사람을 불러서 자리 마련해놓으니, 화나죠. 주님이 꼭 그런 일을 해요. ‘빨리 와. 빨리 와. 네 자리 마련해 놨어.’ 하고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임하게 만들어요. 태어나게 해서.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 사람 되어서 천국에 합류시킵니다. 로마서 8장 이야기에요. 이런 말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지 마세요. 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육신대로 왔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인 것을 알고 육신의 운명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된다는 운명을 우리가 인정을 해줘야 됩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7이레 창조에서, 첫 번째 창조에서 70이레 가는 그 노선에는 뭐가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주께서 언약을 실은 구르마라 하죠. 소달구지에다 인자를 싣듯이 인자를 실은 소달구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주변사람한테 핍박을 많이 받습니다.
시편 23편 유명한 말씀, 교회 좀 다니는 사람들은 알고 더 다니는 사람들은 액자 만드는 유명한 구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구절이 뭐냐 하면 바로 주님이 자기를 마차로 사용했다는 겁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게 뭐냐 하면 ‘네 자리 마련해 놨어. 빨리 와.’ 하는 것처럼 다윗의 자리에다 주님이 거기 싣기 위해서 성령께서 자리를 마련해 놓은 거나 똑같은 거예요.
다윗이 애기 낳아도 죽고, 우리는 왜 껍데기냐? 낳아 봐야 죽고 우리는 잠시 있다 사라지고 또 내 자식이 장가가서 또 애 낳아야 또 죽고 그냥 고리가 죽음의 연쇄고리에요. 죽음의 연쇄고리인데 내 아담의 노선, 에녹의 노선, 노아의 노선은 지금 어디 가 있습니까? 엘리야, 모세 지금 어디 가 있습니까? 지금 하늘나라 가 있잖아요. 그거 누가 갈아탔어요? 바로 예수님의 영이 먼저 올라탔기 때문에 지금 하늘나라 가 있는 겁니다. 그게 구약에서는 언약의 모습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설명되는 거예요.
다음시간부터 이 7이레부터 70이레의 그 여정을 진도 죽 나가면서 그 여정을 어떤 식으로 다니엘까지 되는가. 그걸 살펴볼 겁니다. 그래야 성경이 하나의 통으로 쫙 연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저희들 남하고 비교하지 말고 주님 십자가 앞에 저희를 세워주옵소서. 그렇게 될 때 먹고 마시는 것도 다 은혜인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고 생생하게 현실화 시키면서 이제는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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