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70이레논문22-포함과 종속

아빠와 함께 2023. 7. 7. 17:06

가락-다니엘 10장(포함과 종속)140127-34강a-이 근호 목사

 다니엘 10장 할 차례입니다. 지금까지 다니엘 70이레에 대해서 언급을 했죠. 70이레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하니까 제가 걱정이 되네요. 왜냐 하면 언급을 했는데 돌아서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할까봐 약간 걱정이 되죠. 70이레라 하는 것은 전체 인간 역사에 두 개 사건이 개입해서 그 사건으로 끊어줌으로 말미암아 그 사건 속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한 일을 그 사건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시고 살아나시고, 성전으로서 오셨다가 성전으로 깨지고 성전으로 다시 사시는 그래서 성전 있을 때 이스라엘 됩니다.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접점 지점이 유일하게 있는 민족이 이스라엘 이예요. 다른 민족은 접점 지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성전에서만 만나요. 그런데 이스라엘 성전 깨졌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성전 깨졌으니까 이스라엘하고는 안 만나죠. 이스라엘하고 안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을 했다 이 말이죠.

약속은 있는데 약속된 민족이라고 우겼던 자들은 공중분해해서 날라 가 버렸으니까 그 나라를 대신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생산될 필요가 있겠죠. 그런데 그 생산되는 그 자리가 뭐냐 하면 그 깨어진 것들을 주워서 거기에 새로운 성전을 만들어서 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만들었다는 것을 담보로 해서 고 자리에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따라서 70이레라는 것은 이스라엘 깨어진 자들을 다시 모아서 성전 짓게 하고 그렇게 지었던 성전 다시 깨지게 만들고 깨어지게 만들어 놓고 깨어진 현장에 다시 “너희가 46년 간 지은 성전 치워라, 내가 삼일 만에 짓겠다.” 해서 주님이 성전 되시고 주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다시 이스라엘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방해 공작에도 구애치 않고 완성됐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시간적 스케줄로 보여주는 것이 70이레입니다.

너무 길었습니까? 그럼 더 간단하게 하죠. 시간에 두 개의 관절이 있었다. 관절 하나, 하나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고 왜 죽으셨고 왜 부활된 것을 미리 담아주셨다. 됐죠?

그런데 그렇게 70이레라 하게 되면 그 다음에 무엇이 다시 중요하냐 하면 ‘아! 묵시 앞에 역사가 소용없는 게 아니었군요.‘ 하는 사실이 이해돼야 돼요. 왜냐 하면 성전을 지어야 되고 파괴되고 다시 예수님 오셔서 성전 짓겠다는 인간한테 맞아죽는 그런 실제 역사 있잖아요. 역사가 어떻게 돼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져야 되겠죠? 거기에 동원되는 조연급들이 뭐냐 이스라엘, 짐승 요거는 악한 쪽이고 좋은 편에는 다니엘 선지자 또 세례요한, 성도 다 뭐냐 하면 하나의 하나님의 드라마의 조연급들입니다. 주인공이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역사라 하는 상식적으로 뭐냐 하면 한 인간의 노동의 산물 이예요. 이걸 civilization, 문명이라 하는데 문명이라는 것은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걸 문명이라 합니다. 문화하고 약간 차이가 나는데 그런 건 따질 필요 없고요.

그래서 인간의 최초의 문명은 도시입니다. 도시! 도시의 창안자가 누구입니까? 아벨이 아니고 가인입니다. 인간의 모든 게 도시 중심으로, 도시가 있어야 왕이 생겨요. 왕이 커줘야 짐승이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큰 성 뭡니까? 큰 성 바벨론이죠. 그 바벨론을 뭐라 하느냐 하면 바벨론의 역할이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조소, 조롱, 또는 무시, 깔봄, 이런 게 그들의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벨론 전체가 음녀니까 전체가 조소, 조롱한다는 말은 이미 바벨론은 의견일치가 끝났다? 토론하고 있는 중이다? 이미 의견이 끝나버렸어요. 마감됐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역사, 인간의 문화, 문명이 아닌 것은 어떻게 하기? 조롱하기.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내지 않은 것은 전부 다 조롱하기, 깔보기, 무시하기. 우리는 그런 식으로 우리 몸들이, 우리의 이 모든 환경들이 이미 굳어졌어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복 받았습니까? 요거는 우리는 존경하되 ‘아무것도 아닌데 복 받았어요.‘ 요거는 무시하기. 무슨 말인지 이해되죠?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이거는 존중해 주기. 그러나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구원받기.’ 요거는 짓밟고 조롱하고 조소하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의 정체입니다.

구원은 어린양 홀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린양이 이미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는 어떤 수를 해도 구원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구원 되고 안 되고의 요구는 우리 쪽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곁에 있다가 떠나버린 그분에 의해서 결정할 문제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야기에 대해서 모독하기. 조롱하기, 침 뱉기, 죽여 버리기, 그런 속성이 바로 역사입니다.

또 역사란 뭐냐 하면 핍박받는 역사, 또는 깨어지는 역사, 또는 낮아지는 역사, 약해지는 역사, 약해지는 역사 이런 예는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약할 때에 강함이라” 왜냐 하면 내가 약함으로써 내가 비로소 가려버리고 놓쳐버렸던 주의 은혜가 이만큼 크구나. 를 아는 거예요. 이런 사도바울의 말씀을 누가 모독하겠어요?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힘이 모여지고 그 모아진 것을 찬양해야 되기 때문에 강한 것이 축복이고 강한 것이 행복이고 강한 것이 진리라 하는 이쪽에서는 약한 것은 어떻게 돼요? 무시하고 모독할 만하죠.

왜 거지 나사로가 구원된 줄 알아요? 거지 나사로 앞집에 누가 있기 때문에? 부자가 있잖아요. 부자가 거지 나사로, 왜 예수님이 그런 비유를 듭니까? 거지 나사로의 표징이 뭐냐, 상징하는 것은 아무도 거기에 관심 두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심지어 개도 무시할 정도가 됐으니까. 그런데 부자는 날마다 뭘 했어요? 파티, 날마다 파티 했다고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약한데서 오히려 온전하여진다는 이스라엘 온전 개념은 숫자 개념이 아니고 견딤의 개념이라고 주일 낮에 했죠. 나는 백두산 노래가 기억나요. 여자야, 여자야 약해지면 안 돼. 그러니 얼마나 바벨론 적입니까? 여자야 약해지면 안 돼, 그 소리 들으면 박 집사님한테 얼마나 용기가 납니까? ‘그래, 쓰러지면 안 돼. 내가 일어서야 돼. 내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서야지. 약해지면 안 돼.’ 그런데 성경은 뭐라 합니까? ‘약해져.’ 약해지라는 거예요.

70이레라는 것이 분명히 역사입니다. 역사인데 시루떡 이예요. 시루떡이 위에서 보면 그냥 빨갛게 돼 있지만 옆에서 보면 뭐로 돼 있어요? 층으로 돼 있죠. 흰 떡 위에 팥고물, 역사는 우리는 강자의 역사만 보입니다. 항상 기록도 그렇게 돼 있고, 역사에 의해서 핍박받는 사람 많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약자입니까? 강자에요? 강자입니다. 왜냐 하면 ‘나도 언제 힘 생기면 두고 봐라.’ 힘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자기가 패배당해도 강자고 지배해도 강자고 그래요.

장 성택이 약자에요? 강자에요? 강자죠. 잠시 약자 됐을 뿐인데 장 성택 사돈의 팔촌이 와서 뒤집을 수가 있어요. 모든 게 반란이고 혁명이고 하니까,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고 이런 힘 중심의 역사가 아니고 지금 핍박받은 예수님 중심으로 ‘일부러 너희들이 나쁜 역할 한다고 힘이 있는 거야.‘라고 하는 자들의 역사, 이건 힘을 추구한 게 아니잖아요. 오로지 힘 쥔 자들이 활개 칠 때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역사야.‘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나쁜 놈들이 활개 치는 역사이어야 해.‘ 라고 펭귄박수 치는 거예요. ’그렇지, 그렇지. 그래 이겨야 돼.‘ 마치 거지 나사로 앞에 부자가 날로 부자 되는 거 보고 거지 나사로가 펭귄 박수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조금 더 부자 돼. 자칫하면 천국에 오면 안 되지, 부자 돼야 돼. 옳지, 부자 되는구나.‘ 그게 뭐냐 주께서 이루어나가는 역사의 진면목이라는 겁니다. 연변 말로 ’돌았니? 신입이 그래서 밥 빌어먹고 살겠니?‘ 이러면 그런 소리 듣겠죠.

목사는 교인 수가 많아야 되고, 어디 직장에 가면 승진해야 되고 사업하면 돈 많이 벌어야 되고 그게 찬란한 너 자신들의 각자 역사 아닙니까? 머리만 희어지면 역사라 할 수 있습니까? 찬란한 역사, 뭔가 여전히 꿈 없으면 일부러 꿈이라도 만들어내잖아요.

그런데 바로 이런 힘 중심의 역사가 있어줘야 그 다음에 그 힘에 대해서 무시당하면서 주의 약속은 바로 요런 식으로만 주의 약속이 된다고 그것을 확정짓는 사람의 이어짐, 그것이 바로 역사의 본류입니다. 원래 핵심.

그러면 그게 9장까지면 10장 11장의 그 내용을 여러분들이 10장, 11장은 비어있다고 보고 괄호, 텅텅 비었다고 보고 여러분들이 10장, 11장을 채운다면 어떻게 채우겠습니까? 힌트 드릴게요. 12장에는 종말이다. 자, 9장 그렇게 계획 세웠습니다. 10장, 11장 빠졌습니다. 빈칸 채우게 하는 겁니다. 주관식입니다. 12장은 드디어 마지막 인류는 끝났다. 1290일로 끝났다. 그러면 고 10장, 11장은 구분하세요. 10장 내용 따로이고 11장 내용 따로인데 그 내용에 어떤 내용을 채우게 되면 12장에 종말이 오겠습니까?

우선 머리 좋은 사람부터. 어떤 내용을 채워야 되겠습니까? 이 70이레 역사를 이루려면 다니엘이 등장해야 되겠죠. 지금 70이레는 묵시잖아요.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 했습니까? 묵시라 하는 것은 반드시 역사로 증명된다 했죠? 하여튼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 묵시라는 것이 비구체화가 아닙니다. 실체가 없는 게 아니에요. 묵시라는 것은 실체가 있어요. 70이레를 설명해 드렸잖아요. 70이레가 역사로 구체화되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70이레 계시를 누가 받았습니까? 다니엘이 받았죠. 그럼 다니엘이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다니엘이 뭔가 받아야 되겠죠? 10장에서는. 제가 9장 해놓고 10장, 11장 비워놓으라 했잖아요. 그 다음에 12장은 마지막 종말이다 말이죠.

그러면 10장에서는 뭐냐 하면 다니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았다. 요게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다니엘은 힘 있는 역사를 믿는 게 아니고 반드시 이 말씀대로 고난 받는 자가 있어야 된다고 그걸 하겠죠. 11장에는 뭐냐, 고난 받는 자를 고난 받게 하려면 힘자랑하는 자들이 있어야 되겠죠. 그 내용이 11장이예요. 그리고 난 뒤에 12장 되면 게임 오버. 끝나버리는 거예요. 주께서 나타나서 힘자랑하는 자들을 모조리 전부 다 싹 쓸어버림으로써 드디어 세상 역사는 70이레대로 끝,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야기 들어보니 다니엘 쉽네요.

10장 한번 봅시다. 10장 5절에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을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요게 인간의 육신적인 그러한 연결이나 인간의 노동에서 이런 인종은 어떤 인종, 이런 인종 봤습니까? 안 봤습니까? 이거는 인간이 아니고 기괴함. 언캐니라고 기괴함. 아주 흉물스러운. 사람이 아름답다 하는 경우는 대칭구조가 돼야 됩니다. 그리스 로마의 미술을 보면 항상 완벽한 아름다움은 이게 비율이 있어요. 이걸 황금 율이라 하는데 좌우가 대칭이 되는 이유가 인간 본인이 아침마다 거울을 보기 때문에 그래요. 내 몸을 기준으로 해서 내 몸은 무조건 아름다워요. 그래서 아름다움의 출발은 이미 자기 몸이 개시가 되었어요. 내 몸이 아름답게 보는 그 기준에 부합될 때만 아름다워요.

영화배우들이 아름답다. 영화배우는 아름다운데 나는 아름답지 못하면 뭘 해야 따라 붙이죠? 성형해야 되죠. 결국 그 영화배우는 내가 되고 싶은 아름다움의 모델의표준이 돼 버리는 거예요.

그처럼 이 세상은 모든 게 인간의 몸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역사란 뭐라 했죠? 역사란 인간의 몸에 의한 자기적인 것. 인간의 인공적인 것, 그걸 문명이라 했죠. 그 조상이 누구라 했습니까? 가인이죠. 그럼 아벨은? 아벨의 역사는 없어요. 아벨의 역사는 없고 가인의 역사에 파묻혀 가죠. 좀 흉측한 예가 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큰 트럭이 가는데 어린애가 멋도 모르고 기어가다가 트럭 바퀴에 끼었어요. 그런데 트럭 운전사는 그것도 모르고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그 바퀴가 돌아가게 되면 누가 끼어서 울고 있어요? 어린애가 끼어서 울죠. 그 끼어서 피 흘리고 우는 게 아벨 이예요. 아벨 역사 따로 없다니까요. 따로 없고 아벨 역사 만들려면 가인 역사가 강해야 되고 커져야 되고 힘세야 돼요. 그래야 순교의 피가 생생하게 된다고요. 우리끼리 없어요. 있는 사람끼리 안 돼요.

세상 큰 바퀴 축에 끼어야 돼요. 끼어서 욕을 덤터기로 얻어먹어야 돼요. 그렇게 해 야 된다니까요. 그것이 바로 지극히 작은 형제한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 되지, 만약에 예수 믿는 사람끼리 와버리면 전부 다 저희들끼리라면 저희들이 강자가 돼 버려요. 그래서는 안 돼요. 그래서는 이 지극히 작은 자가 안 되고 큰 자가 다 돼 있는데요, 뭐.

예수님의 12제자가 그거 실패 했잖아요. 자기들끼리 있으니까 자기들끼리 또 베틀(경쟁)에 나서는 거예요. 누가 높으냐고. 준결승, 결승 뽑고. 항상 인간은 그래요. 세 사람만 있으면 시합을 하는 모양이라. 가위 바위 보를 하든지.

천사가 나타났다고 해서 다니엘의 형편이 나아집니까? 오히려 천사 보여줬으니까 ‘이제 너는 망가져도 괜찮아.‘ 망가져도 괜찮아요. 왜? 본 게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누굴 봤어요? 예수님 봤죠. 이제는 주님께서 가물치처럼 이리 팽개치고 저리 팽개쳐도 사도바울은 감사해야 돼요.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필요 없어요. 이미 자기는 구원받았기에 주께서 간 십자가를 되풀이한다면 ’더 이상 영광은 없소이다.’ 이렇게 돼야 된다고요.

그런데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시몬이란 사람이 있어요. 빌립이 성령 받아서 기적도 행하고 복음 전하니까 그게 좋았던 모양이죠. 사람들에게 인기 있으니까. 그래서 시몬이 뭐라 합니까? ‘성령 얼마면 돼?’ 이러거든요. 지금 관심사가 어디 있습니까? 남들이 날 어떻게 보느냐에 관심이 있죠. 왜, 그게 역사가 가르쳐 준 우리의 교훈이기 때문에.

역사란 남이 원하는 존재가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역사에서 추방당합니다. 못 살아요. 그래서 제가 아까 유튜브 동영상 할 때 그런 이야기했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자신에게 요구하는 게 있어요. ‘제발 나한테 거짓말을 해 달라.’ 거짓말이라고 좋으니까 ‘믿음 좋습니다. 아유, 왜 이리 착합니까?’ 거짓말을 해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임한 사람은 누구만 쳐다보고 오냐 하면, 성령이 임한 사람이 거짓말을 안 한다는 게 아닙니다. 이거 오해하시면 안 돼요. 이런 게 어려워요. 성령이 임한 사람이 거짓말을 안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거짓말 하라.’ 시키면 거짓말해야 되고, ‘거짓말 하지 마라.’ 하면 거짓말 하지 말아야 되고. 내 선에서 거짓말 하냐. 안 하냐를 내가 결정할 권한이 없는 게 성령 받은 사람 특징입니다. 맨날 쳐다보고 있어요. ‘거짓말 할까요? 말까요?’ ‘해라.’ 하면 ‘예, 하겠습니다.’

자기의 착함이나 거짓말 안 하는 착함 이런 게 성령 받은 사람은 해당이 안 됩니다. 죄 안 짓는 사람 되기, 이런 것도 없어요. 나는 이미 이리 치고 저리 치면 거짓말 하게 되면 거짓말 할 때는 거짓말해야 되고 어떤 짓도 해야 되고, 이건 어쩔 수가 없어요. 왜, 시킨 대로 해야 되니까.

거기에 비해서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누구 안면을 계속 생각해요? 누굴 의식합니까?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나? 역사가 날 어떻게 평가해 줄 것인가? 그걸 생각해요.

여기서 다니엘 6절에서 모습이 나오는데 이 모습은 가만히 보니 안면이 있죠. 이 모습이 어디 나옵니까? 요한계시록 1장에 보니까 누가 누굴 볼 때 이 모습 나왔죠? 사도요한이 자기에게 등장한 예수님의 모습이 나왔죠. 그러면 다니엘 10장에 나오는 분이 예수님이십니까? 천사에요? 예수님 이예요? 이게 천사에요.

아브라함 찾아온 사람이 천사입니까? 삼위일체입니까? 천사 세 명이죠. 그런데 믿음이 아주 좋다 여기는 사람들이 삼위일체라 여기거든요. 그게 성경 해석에 오해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너무 충성심이 많아서. 삼위일체 다 집어넣으면 다 되는 줄 아는 게 어거스틴의 주장이고요.

사람은 존재거든요. 사람이 자기 스스로 존재로 보기 때문에 누굴 파악할 때는 그 사람의 사건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 사람의 존재를 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갑자기 A라는 어떤 지점에 있다가 총을 빵! 쐈어요. 그런데 죽을 줄 알았는데 안 죽고 사라져 버렸어요. 그리고 2초 뒤에 자기 뒤에 B라는 지점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총 쏜 사람이 어디에 굴복해야 되느냐 하면 A도 아니고 B란 존재도 아니고 A에서 B에서의 과정, 요 사건, 과정, 여기에 굴복해야 되는데 인간은 자기를 존재와 공구리, 콘크리트에 물 넣어서 딱딱하게 하는 것, 자기를 딱딱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보는 방식으로 남을 봐요. 그러니까 ‘당신은 여기 있다가 언제 거기 갔어?’라고 하거든요. 그럼 뭘 놓친 게 돼요? 어떻게 생성된 자체를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생성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변화는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말하기를 그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라고 해요. 또 사도바울이 예수님 보고 뭐랍니까? ‘누구십니까?’라고 하죠. 주님은 뭐라고 답변합니까? 그냥 ‘나는 예수다.’ 하지 않고 앞에 사건을 붙이죠.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세 명의 천사는 그게 예수님이냐, 천사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세 명의 천사가 장차 예수님과 연결이 돼요. 연결과정을 주목하라는 겁니다. 그 연결과정의 첫 그림이 뭐냐 하면  ‘네 아내가 임신 될 것이다. 그러면 네가 내년 이맘 때 쯤에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삭이 예수님입니까? 아니죠. 그러면 사람들이 뭡니까? ‘야, 이삭 믿으면 구원받겠다.’ 이삭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또 이삭을 뭐로 봅니까? 하나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뭐로 봐요? 또 존재로 보는 거예요. 왜, 본인이 평소에 본인이란 존재만 어떻게 해보려고 했기 때문에 자기가 예수님의 사건인 걸 모르고 내가 예수님한테 뭘 갖다 바치면 복을 받느냐 생각하는 겁니다.

마르다가 예수님한테 잡채 해주고 뭐 해주고 하는데 자꾸 뭔가 잘해주고 잘 해드리면 다시 받는 것처럼, 평소에 우리가 인간 대 인간에서 남이 나에게 잘해주면 그 사람에게 간 쓸개 다 빼주지는 않죠. 그냥 고맙다 하죠. 왜냐 하면 아무리 잘해줘도 그 사람 존재가 되고 싶지 않잖아요.

그런데 구원은 그게 아니고 내가 내 존재를 포기하고 주님의 몸에 붙어있는 주님의 존재가 되는 게 구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내 존재를 생각해버리면 예수님 믿으면 믿을수록 누가 훌륭해져버려요? 예수까지 믿는 내가 더 훌륭해져버려요. 내 존재가 너무 잘 믿기 때문에 내 존재가 너무 아까워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원대로 복이 안 온 것은 아마 다음에 큰 복을 주시려고 미리 작은 복은 빼려고 안 주시나, 이렇게 혼자서 자꾸 생각한다니까요. 존재를 존재로 생각하는 그 버릇 때문에 중간의 그 변화 과정을 다 놓쳐버리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은 그냥 천사에요. 천사지만 그냥 천사라 하면 안 되고 예수님과 연관된 천사, 오실 예수님이 하실 기능을 보여줄 천사, 그렇다면 다니엘 10장에 나오는 이 모습은 천사인데 그냥 천사가 아니고 장차 요한계시록에 나타날 그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천사, 해결됐죠?

인간은 자기를 단단한 존재를 대상으로 자기를 분석하려하는데 주께서 보낸 것은 어떤 기능, 어떤 역할, 어떤 액션을 보라. 그렇다면 그 몸은 황옥 같고 얼굴은 번갯불 같고 눈은 횃불 같고 팔은 빛난 놋 같고 말소리는 무리 소리 같고, 놀라겠죠. 놀라면 패션쇼 합니다. ‘어때? 내 스타일 어때? 찰칵, 찰칵.’ 이렇게 폼 재는 겁니까? 요게 기능이 되면서 그 다음에 바사나라, 그리고 헬라나라 작살내는 21절에 미가엘의 기능, 전쟁하는 천사, 그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 하나님, 미가엘의 전쟁은 언약에서 도출된 것이고 언약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근거해서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시 묻습니다. 묵시라 하는 것은 묵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뭐로 구체화된다 했죠? 역사로 구체화된다. 역사 필요 없는 거 아니죠. 그런데 역사가 둘로 돼 있다 했죠? 자꾸 모른다 하니까 되풀이하는 겁니다. 역사가 시루떡처럼 둘로 돼 있죠. 우리가 아는 역사는 뭐냐 하면 역사는 누가 꾸려나간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꾸려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택한 백성은 따로 있습니까? 그 안에 끼어있습니까? 끼어있는 거예요. 힘을 부리는 그 힘 때문에 숨도 못 쉬고 무시당하고 조롱당하고 모독당하고 참람한 욕설을 당하는 모습, 그런 모습으로 같은 바벨론 성에서 같이 사는 거예요. 짐승의 인 맞은 사람이나 그리스도 인 맞은 사람이나 다 같이 어디 살고 있습니까? 다 같이 바벨론에 살고 있잖아요. 한쪽은 바벨론에서 떵떵거리고 살고 한쪽은 바벨론에서 순교당하고 모욕 받으면서 살고 사는 주소지는 맨 바벨론, 팔공 길, 맨 주소는 바벨론 주소라니까요. 우리가 어딜 가요? 기도원에 갑니까? 어딜 갑니까? 따로 뭐하겠다고. 이 세상에서 섞여서 살아야죠.

섞여서 사는데 어떤 땐 기분 나쁘죠. 화나죠. 화내지 마세요. 이미 봤잖아요. 십자가를 봤잖아요. 눈앞에 십자가가 보이잖아요. 이미 다니엘은 뭘 봤다? 다니엘은 이미 이상하게 생긴 천사를 봤잖아요. 기괴한 천사. 사람은 아닌데 찾아온 어느 분, 그러면 사람 속에 속하지 않죠.

그러면 사람 속에 속하지 않은 천사를 만났다는 것은 다니엘은 비록 사람의 모양새, 사람 육체를 갖고 있어도 소속은 기괴한 쪽에 속하죠. 내 모습이 이렇게 됩니까? 네 모습 걱정하지 마라. 다니엘 자체도 하나의 사건이니까. 다니엘이 인간의 몸으로 이런 계시 받고 이렇게 전도하는 그것도 다니엘 내가 한다고 하면 안 돼요. 너한테 찾아온 기괴한 천사나 다니엘이나 다 같은 입장 이예요. 전부 다 주님 앞에서는 한 사건일 뿐 이예요.

천사가 그리스도 사건을 증거 하듯이 다니엘은 인생 살아가면서 풀어 나오는 것은 다니엘 자기 사건이 아니고 자기를 구원해 준 주님의 사건이 날마다 터져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세상 역사 보고 놀라고 이런 거 없죠. 다만 천사 보고 기절하고 혼절이 나는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무서운 사람도 다 있다니. 평소에 안 보던 인상이다 말이죠.

그래서 7절에 봅시다.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느니라.” 분명히 역사적 사건인데 이게 기존에 있는 인간의 노동의 결과로서의 역사는 아니고 그 역사에게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그 역사에 포함되는 역사, 내가 말을 하면서도 어렵게 이야기하네요. 종속되지는 않아도 포함된 역사.

인간은 유한하죠. 인간의 역사도 유한하죠. 그런데 여기 예수님 오셔버리면 예수님은 무한입니까? 유한입니까? 무한이죠. 하나님이니까 무한한 분이죠. 유한에 종속되지 않아도 포함돼 있는 분, 이해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이게 회색인데 제가 회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제가 회색 옷을 입고 있을 뿐이지 이 세상의 모든 회색을 내가 다 갖고 있지는 않죠. 일부를 내가 입고 있죠. 그러니까 나는 회색에 포함돼 있지만 회색에 종속되지는 않습니다. 왜, 안에 까만 거 나오니까.

우리 성도는 포함돼 있는 건 맞아요. 그렇지만 이 세상에 종속되지 않아요. 그럼 종속됐나. 포함됐나를 알려면 지금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위 단계로 올라가야 되겠죠. 위 단계 올라가서 이야기하신 분이 예수님이고 신약성경입니다. ‘너는 마귀에 속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다.’ “아버지께서 보낸 자는 다 내게로 온다.” 분명히 하나님께 속했죠. 저쪽은 어디 속했습니까? “그중에 하나는 마귀니라“ 사단에 속했죠.

이걸 논리에서 메타라 하는데 우리는 아래 대상이 되는 거예요. 메타에서 보면 종속관계가 확실한데 메타가 안 보이니까 이건 종속된 끼리 비교하니까 서로, 서로가 잘났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는 말이 “네가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못 본다고 하니 소경이 아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메타 말고 인간의 밑에 있는 대상 선에서 이야기해버리는데 사실 이 말은 뭐냐 하면 메타, 위쪽에서 이야기하는 걸 아래쪽에서 못 알아듣는 거예요.

제가 어제 말고 지난주일 설교에 홀로그램 이야기한 거 기억납니까? 입체사진, 입체사진 보면 아무형상 안 보이죠. 그런데 이걸 백색광에 보이면 입체가 나오죠. 왜냐 하면 직접적인 대상 체, 사과나 꽃을 통과한 레이저 광선의 필름과 직접 그냥 쏘였던 레이저 광선 두 개를 놓으니까 이게 한번 거치고 온 게 불순물 이예요. 그걸 파동에서의 간섭효과라 해요. 간섭효과 때문에 얼룩이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얼룩인데 모든 인간도 얼룩이지만 어떤 얼룩이냐 하면 분명히 인간은 인간인데 자꾸 복음을 이야기하니까 이게 얼룩인 거예요. 인간은 인간인데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사도행전 1장 8절,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뭐가 되리라? 사람이 되리라? 네가 네 자신의 증인이 되리라? 아니잖아요. 사람은 자기가 있으면 자기 증인이 최종적 이예요.

그런데 우리는 나의 증인이 최종적이 아니고 이게 얼룩이기 때문에 뭘 보여줍니까? 입체를 보니까 그게 사과가 나오네. 우리 보기에는 어설픈 내가 보이는데 우리를 주의 성령의 빛으로 보니까 뭐가 보여요? 우리 안에 누가 계시는 걸로 보여요? 예수님이 계시는 걸로 보이는 거예요. 이게 쉬운 얘기에요? ‘내 안에 누구 있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내 안에 누가 있다? 내 안에 또 내가 있다? 내 안에 누가 있다 이 말이죠.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들어온 누가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내 안에 마귀 있다.’라는 말을 하란 말이죠. 그런데 그런 소리 사람들이 안 하죠. 그때는 복음을 전하면 그 소리 고백 안 해도 ‘어, 네 안에 마귀 들었구나.’ 알아채는 그런 즐거움이 있습니다. 집에 가서 아내한테 물어보세요. 아내한테 마귀들은 즐거움을 누려~

사람이 뭔가 노동을 해서 그 대가로 천국을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뭔가 그게 역사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신들린 것처럼 찾아와서 구원한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이 계룡산에서 내려온 인간아. 하는 것처럼, 다니엘 10장 6절에 보면 다니엘이 계룡산에서 내려왔는지 자기가 봤다는데, 참 미치겠어. 정말.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그의 신학이 바뀌었다 할 때에 성경에 있는 말이니까 일단 인정해주지만 사실 말이 안 되는 게 그렇게 되면 신학의 보편성이 떨어져 버려요.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야 좋겠죠. 자기가 예수님 만나서 신학이 바뀐 건 좋은데 안 만난 사람은 어쩌자는 겁니까? 안 만난 사람은 척! 하는 수밖에 없죠. 예수님 믿는 척! 만난 척하는 수밖에 없죠. 그렇잖아요. 사도바울 자체를 흉내 낸다고 구원받습니까? 사도바울을 흉내 낸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여기 디모데전서 1장을 의존교회에서 강의하면서 내가 깜짝 놀랐어요. 뭐냐 하면 1장 20절에 보면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갑자가 사단이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그러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하는 일은 사단과 관련성이 있는 일이다? 아니다? 사단의 정체를 폭로하는 일과 관련돼 있죠. 그러면 더 나아가서 그걸 줄여서 사도바울이 하는 일은 사단에 속한 자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일이다? 맞죠.

우리는 단순히 사도바울이 하는 일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로 알았잖아요. 그런데 그걸 더 들어가 보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일은 복음만 전하는 일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뭐하는 일이다? 사단에 속한 자를 ‘속했다.’고 분류하는 일도 사도바울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놀란 거죠.

보험회사 영업사원 같으면 대번 쫓겨날 일입니다. 그냥 ‘한 구찌 드세요.’ 하면 될 일인데 ‘당신 한 구찌 안 들면 지옥 간다.’ 이런 소리 하면 안 되죠. 기분 나빠서 들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보험 든 사람이 아니에요. 꼬시는 사람이 아니에요. 있는 걸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뿐 이예요. 왜, 주님을 봤기 때문에. 만났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맘대로 할 수가 없어요.

살고 죽는 것도 자기 맘대로 못하고 로마 가는 것도 놀러 가는 게 아닙니다. 놀러 가는 거면 그렇게 잡혀서 가는 이게 연출도 아니고 뭡니까? 주님께서 십자가 가는 길을 주께서 연출했죠. 믿는 사람이 이렇게 고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주께서 연출하는데 세상에 연기하는 사도바울 옆에 주께서 딱 들어붙어서 연기지도를 하네요. 환장할 지경  이예요.

자, 풍랑이 인다. ‘주여 어찌합니까?’ ‘짐 다 버리고 배를 포기해라.’ ‘그럼 안 되는데…’ 연기, 연출은 내가 연출한다니까. 너는 내 곁에 있으니 염려하지 마라. 너는 반드시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게 돼 있어. 그러니까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음향효과와 더불어서 실제로 파도를 거세게 흔드시네요. 배는 다 부서지고 멜리데 섬에 가서 추장 아들 만나서 병 낫게 하고 그전에 이벤트로 놀라게 하는 뱀이 와서, 무슨 전도하는데 ’여러분, 애들은 가라, 자, 뱀이다 뱀, 물어도 안 죽습니다.‘ 라고 사도바울이 이런 걸 상상도 못 했습니다. 뱀이 와서 물었고 하나의 사건이고 ’이건 뭐야, 파리야 뭐야? 뱀이야?‘ 하니까 그것도 독사한테 물렸는데 독사 발이 안 듣는 모양이라. 다니엘 같아.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는데 사자가 먹고 싶은데 입에 지퍼를 채워놓으니까 사자 입이 안 벌어지네요. 사자가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음, 음, 음, 말은 못하고 입이 벌어지지 않는 거예요. 다니엘이 가고 난 뒤에 입이 벌어지네. 와, 그 다음부터는 그동안 굶었던 식욕을 채우는데 완전히 사람을 뜯어먹는데 뼈까지 다 뜯어먹었어요.

역사입니다. 분명히 다 역사인데 사자 굴 들어가고 다 역사인데 역사가 이상해. 남한테는 이상하지 않은데 성도한테는 역사가 이상해. 뭔가 역사가 정돈이 안 돼요. 정돈이 안 된다는 말은 내가 원인이 되어서 딱 거기에 예상된 결과가 나와야 되는데 이게 안 돼요. 그건 왜냐, 이 역사 밑에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은 이미 시간의 정돈은 주님의 70이레에 대해서 해야 되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몸에서 나온 시간은 이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자, 그 다음에 봅시다. 그래서 봤기 때문에 신이 났는데 그 다음부터 일이 복잡하게 되었어요. 역사가 복잡합니다. 그런데 13절에 “그런데 바사 국군이…” 한글로 돼 있어서 모르죠. 제 책을 한 자로 돼 있는데 “바사 國(나라)君(임금) 나라의 임금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라고 돼 있어요. 그러면 바사나라의 임금이 고레스인데 고레스가 왜 막아요? 이건 뭐냐 하면 바사나라 임금 역할 할 천사가 나를 이십일일 동안 막은 거예요. 그러니까 바사나라든 헬라나라든 여기 뒤에 보면 20절에 “바사군과 헬라군이 싸우려니와” 하는 것은 각 나라마다  담당하는 천사들이 있어요.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담당 짐승, 담당 마귀.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이건 껍데기에 불과하다니까요. 모든 민족의 흥망성쇠는 그건 주님의 스케줄대로 될 뿐 이예요. 이사야에 보면 나오는데 앗수르 군대가 185.000명이잖아요.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몇 명이 살아 돌아갔습니까? 다 죽었는데 그 앗수르 군대를 누가 죽였습니까? 천사가 죽였죠. 앗수르 군대가 올 때 천사하고 싸우려고 왔습니까? 유다 히스기아 왕하고 싸우려고 왔습니까? 유다하고 싸우려고 왔지, 천사와 싸우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천사하고 싸우려고 왔다가 죽은 건 할 말 없죠. 저쪽은 신이고 이쪽은 인간이니까 안 되는 건 아는데. 유다하고 싸우려고 왔잖아요. 그러면 누가 죽였습니까? 유다를 지키는 신이 누굴 죽인 거예요? 지금 앗수르 군대를 지킨다는 그 우상을 완전히 작살낸 거예요.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합시다. 애굽에 신이 있죠? 애굽의 신을 누가 심판하고 멸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으로 했죠. 그래서 출애굽 할 때 뭐냐 “애굽의 신들을 멸하려 함이라.” 그게 출애굽에 보면 여러 번 나와요. 그러니까 도대체 이 성경 자체가 분명히 우리는 내가 있는 곳이 역사인데, 우리가 만드는 게 역사인데 주께서는 우리가 만드는 것을 허락하면서도 네가 너의 뜻에 따라서 역사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널 종속시키는, 다른 세력에 의해서 역사가 진행되는 겁니다.

아까 종속, 포함 이야기했죠? 우리는 포함될 뿐이지 종속되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첫째 시간하면서 어려운 거 해봅시다. 하나님이 인간이 만든 신에게 종속됩니까? 포함됩니까? 둘 다 아닙니다. 자, 이런 거예요. 아까 질문하고 비슷한데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잖아요. 만들어진 인간은 묻습니다. 실례지만 하나님,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라고 했을 때 그 하나님은 종속된 하나님입니까? 인간에게 포함된 하나님입니까? 인간에게 포함된 하나님인데 인간은 그걸 종속된 하나님, 자기 밑의 수하에 있는 하나님이라고, 말 상대되는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질문이 나온 거예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자, 선악과는 인간에게 종속됩니까? 포함됩니까? 마귀는 선악과가 종속되었다고 했어요. ’네가 따먹으면 따먹힐 것이다.‘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선악과는 인간에게 따먹혀 버렸어요. 따 먹혀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간을 더욱 더 선악과에 종속시키게 되는 거예요.

더 알게 쉬운 게 뭐냐 하면 내가 지나가는데 누가 도박하고 화투치고 있어요. 그럼 내가 거기다가 판돈을 걸었습니다. ‘자, 컵 세 개 중에 어느 쪽에 있습니까? 내가 거기 돈을 한 것은 내가 선택한 거예요? 거기에 포함된 겁니까? 종속된 겁니까? 내가 참여한 것은 잠시만 참여하고 돈만 따면 튀려고 했는데 나는 포함으로 그냥 ’참여해볼까. 포함으로 봤는데 그쪽에서는 뭡니까? 요거는 완전히 밥이 된 거예요. 종속시킨 거예요.

인간이 악마한테 꼬임에 빠져서 선악과 따먹을 때 선악과가 보통 나무 열매인 줄 알았어요. 따먹으면 따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도리어 인간이 따먹혔다고 보면 돼요. 선악과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선악과 노예로서 종속돼 버린 거예요. 같이 마귀와 더불어서 같이. 그 선악과에  종속된 순간 선악과의 정체는 뭐냐 하면 생명나무와 연계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선악과 따먹히는 동시에 생명나무 길은 차단됐으니까 사실 인간은 그 연줄을 못 봤지, 볼 수가 없는데 배후에 삐삐선, 케이블로 연결돼 있어서 저쪽 따먹으면 이쪽 못 따먹게 돼 있어요.

결국은 이게 뭐냐, 하나님의 엄위와 자비의 속성 이예요. 인간은 말려든 거예요. 그렇게 성경해석 해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가락-다니엘 10장(포함과 종속)140127-34강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바사나라, 그리고 헬라나라, 바사나라는 페르샤. 헬라는 그 다음 나라, 그러니까 이 두 나라가 움직이는 것이 몸통이 아니고 꼬리가 한 겁니다. 몸통은 어디 있는가? 숨어있어요. 숨어있는 걸 어떻게 찾아내지? 바사나라와 헬라나라와 다른 식으로 존재하고 다른 식으로 기능을 보여주는 그걸 찾아내면 그건 복음 찾아내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헬라, 바사가 독자적으로 있는 나라가 아니고 뭐를 겨냥하고 뭔가 쏘고 있어요. 그게 주의 원수로 돼 있어요. 주의 원수란 말은 주님 입장에서 여기 원수가 있잖아요. 주님입장에서도 원수가 보이는데 우리는 주님이 안 보이니까 이러한 방법으로, 세상을 무조건 원수라고 보고 이 세상이 공격하는 쪽이 누가 계시다? 주님 쪽이죠. 이렇게 찾는 방법밖에 없어요. 세상 나라가 이단이라고 한 그분이 누구다? 주님이다. 그렇게 갈 수밖에 없어요.

이단인 이유가 뭐냐, 우리가 뭔가 섬기고 바치고 전도하고 착한 일해야 복 받지, 어떻게 죄인인데, 죄가 날마다 나오는데 어떻게 죄인이 죄 없는 나라에 갈 수 있느냐? 이런 거. 이런 식으로 공격할 때 바로 이쪽이 뭡니까? 이쪽이 주님이 계신 곳 이예요. 내가 지금 남자가 다섯 명이고 지금 사귀는 남자가 여섯 번째 남자입니다. 나 같은 여자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나중이 되니까 “네 몸에서 영생이 나올 것이라.“ 이게 바로 주님 이예요.

그래서 주님의 원수 쪽에서 찾아야 되는데 찾으려면 어떻게 찾느냐 하면 ‘내가 원수 맞습니다.’ 하고 스스로 자기가 원수임을 인정을 해주는 사태가 일어나야 됩니다. 하나 예를 들게요.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중풍 들린 사람이 오죠. 친구들이 침상을 메고 오는데 번호표가 너무 많아요. 기다릴 수가 없어서 지붕을 뚫었어요. 수리비 아마 많아 나왔을 거예요. 지붕 뚫어서 바로 직접 했죠. 새치기 중에서 그런 새치기 세계 신기록, 멀쩡한 지붕 뚫고 들어갔을 때 뭐 하러 왔습니까? 병 나으러 왔죠. 그들은 뭐냐, 병 나으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제가 주일 날 한 것처럼 귀신이 붙어있을 때 귀신 떨어지면 자기는 정상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이게 해석이 잘못됐다 이 말입니다. 귀신이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내가 왜 귀신이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귀신을 떼어놓은 거예요. 딱 내 몸이 귀신 좋아하는 몸, 귀신을 얼씨구나 할 그런 육신을 갖고 태어난 겁니다. 주께서 귀신을 떼어놓음으로 말미암아 일곱 귀신이 온다 해도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귀신 떼어놓는 것은 우리 희망이지만 주께서는 귀신이 안 오는 몸이 돼야 돼요. 뭐냐 하면 이 죄를 안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죄를 의라고 해버리면 귀신이 더 이상 깐죽거릴 수가 없잖아요. 주께서도 죄인이라고 한 자를 주께서 분명히 죄인이라고 언급을 하면서도 그래서 내가 너를 용서해서 의인됐다. 판정을 주님이 죄인이라고 판정한 그분이 의인이라고 했는데 누가 뒤에서 깐죽거려서 ‘쟤, 의인이라고 꼬질러 봐야 그 꼬지름이 통하겠습니까? 안 통하겠습니까? 안 통하죠. 이게 복음이잖아요.

로마서 9장에서 “누가 정죄하리요” 그 다음에 뭡니까? “죄 없는 사람을 누가 정죄하리요” 이게 아니에요. 죄도 안 짓고 있는 사람을, 죄 그만 짓는 사람을 정죄하리요. 이게 아니고 아들을 주신 이가 정죄하지 않아요. 아브라함이 죄 없습니까? 아브라함이 왜 죄가 없어요? 아브라함이 죄인으로서 구원받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죄 없이 구원받은 게 아니고 죄 있어서 구원받은 거예요. 우리 같으면 아들을 바칠 거 같으면 잘 믿는 자 맞죠. 믿음은 있는데 죄는 있다니까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게 아니고 죄인은 맞는데 믿음도 있더란 말이죠. 믿음이 있어서 죄가 사라지는 게 아니고 죄가 본격적으로 있죠. 믿음이 있음으로서 본격적으로 그동안 자기를 봤던 거 말고 주님이 보신 모습으로 볼 때 나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되는 겁니다. 그게 복음이다 말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복음을, 이걸 제가 복음이라 했죠. 그러면 여러분한테 한번 일임해 보겠습니다. 그걸 한번 역사적으로 만들어보세요.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죄인을 용서해서 의인되게 한다. 그걸 역사적으로 여러분들이 주님이라면 한번 만들어보세요. 방금 들었으니까 만들 수 있죠. 어떤 사람이 병 고치러 왔는데 병만 고치면 안 되고 뭐라 합니까? ‘너는 병 고치러 왔을지언정 나는 너의 죄를 사한다.’ 마태복음 9장에 나와요. 이제 이해되죠.

분명히 귀신을 쫓으려고 병을 고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뭘 부르러 왔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인을 불러서 사하러 왔죠. 그러면 진작 그렇게 하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은 왜 고쳐주느냐? 그들이 병을 고쳐야 우리가 멀쩡하다는 그런 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걸 고쳐주면서,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면서, 다시 말해서 첫째 시간에 한 것처럼 포함되면서 종속은 안 되는 거예요. 허름한 우리 집에 오시면서 절대로 우리 집 사람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야 그게 뭐냐 하면 구출이 돼요.

제가 최근에 했던 출애굽기 해석 다시 해봅시다. 모세가 애굽에 들어왔습니다. 뭐 하러 왔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출애굽 하기 위해서 왔죠. 그러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애굽에서 벌어질 재앙과 상황은 어떻게 돼요? 종속될 자와 그냥 포함만 될 자를
가려내는 작업을 하겠죠. 종속이 되지 않은 사람은 애굽에는 종속되지 않았지만 다른 데는 종속된다 말이죠. 출애굽에서 그들은 어디에 종속된다고 합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피에 종속되죠. 그걸 출애굽기 나중에 보여주잖아요. 초반에는 처음부터 보여주지 않고 초반에는 어떻게 됩니까? 이상하게 이쪽에는 메뚜기가 오는데 저쪽에는 메뚜기가 없고, 이상하게 저쪽에는 깜깜한데 히브리 사람이 사는 동네는 훤하지? 뭔가 분류는 하는데 분류하면서도 ‘우리에게는 왜 이런 혜택이 오지?’ 구원받은 본인들도 몰라요.

모세가 와서 처음에 지팡이로 할 때는 모세가 하는 줄 알았는데 모세가 하는 지팡이 하는 걸 애굽의 술사도 해버렸다 말이죠. 나중에는 모세의 지팡이가 뭘 잡아먹습니까? 모세의 지팡이에서 나온 뱀이 애굽의 지팡이 뱀을 잡아먹음으로 말미암아 ‘너 나하고 같이 놀지 마라. 너 보기에 똑같은 뱀이지만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이 말이죠. 뱀이 뱀을 잡아 먹는 뱀, 최초의 뱀. 주의 지팡이가 뱀이 된다는 것은 마귀한테 종속되는 게 아니고 마귀를 포함하는 거예요.

예수님 오실 때 바리새인들이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을 이단이라 했죠. 예수님이 이단으로 오신 것은 이단 되고자 함이 아니라 이단 됨에 허용하고 그걸 포함하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지팡이하고 그 다음부터는 분류가 되는데 제가 하고 싶은 어려운 건 뭐냐 하면 모세는 어디 속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 뒤에 읽어보면 모세가 출애굽 했던 백성들 속에 속합니까? 하나님께 속합니까? 답변해 보세요. 하나님께 속하잖아요. 그래서 맨날 모세 원망하잖아요. ‘저 지도자 안 하렵니다.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 백성들이 원망을 누구보고 합니까? 자꾸 모세보고 하는 겁니다. 모세는 자기에게 소속된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 속한 거잖아요.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당신의 하나님, 당신의 하나님. 당신의 하나님께 기도해서 우리에게서 뱀이 물러가게 해 달라. 당신의 하나님께 물을 달라 해라. 당신의 하나님께 고기를 달라 해라. 당신의 하나님께 약식을 달라.’ 맨날 당신의 하나님.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모세마저 하나님 소속이 아니네요. 그래서 모세는 뭡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매개체. 그 매개체가 보여주는 것은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피입니다. 모세하고 엘리야하고 예수님 만나서 피에 대해서 이야기하죠. 엘리야 이야기해봅시다. 엘리야가 바알과 850 대 1로 붙었어요. 70대 1이 아닙니다. 말죽거리 잔학사가 아닙니다. 이거는 850 대 1 붙는데 뭐로 붙느냐 하면 ‘잠시만요. 물 붓고 가실게요.’ 하는 거예요. 물이 불이 됐다. 그런데 물이 불이 된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부었는데 물이 뭐 됐어요? 포도주 됐죠. 물이 포도주 되고 물이 불이 되는 것은 중간에 죽음, 제물의 죽음뿐이죠.

그러니까 죽음의 형식으로만 나타나는 분이 누구다? 장차 오실 하나님이다. 구원의 하나님은 같이 죽게 함으로써 비로소 살게 하는 방식이외는 다른 방식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너, 나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이제 네 안에 사는 것은 네가 아니다. 한 알의 밀알이 안 죽으면 그대로 있고, 주일날 내가 왜 그리 그대로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몰라. 안 죽어. 15년 동안 해도 안 죽어요. 안 죽고 흉내만 낸다고요. 죽으면 죄인인 걸 아는데 아무개 목사처럼 자살한 사람이 있죠.

자살 한번 봅시다. 자살은 궁지에 몰리면 자살해요. 쥐새끼라고 몰리면 자살한다니까요. 물다가 이빨 빠지면 자살한다니까요. 궁지에 몰리면 자살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치고 궁지에 안 몰리는 사람 어디 있어요? 주님께서 필드에서 하키처럼 전부다 자기 공을 몰듯이 모는데 주께선 신자든 신자 아니든 전부 다 궁지로 몰아버려요. 다 자살해야 돼요. 궁지에 몰려서 자살하는 사람 성도밖에 없는데 성도는 왜 자살하느냐 하면 궁지에 몰리는 그 자체가 뭐냐 하면 감사기 때문에.

그 자살했다는 그 목사가 궁지에 몰린 건 이해해요. 계속 설교 대려고 하니 밑천도 없는데 도대체 궁지에 몰리죠. 가정 문제 있을 거고 한데 그렇게 궁지에 몰린 것이 자기가 잘못해서도 아니고 자기가 게을러서도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몰리게 하시니까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애초부터 성령이 없었던 거예요. 믿음이 없으니까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을 감사할 줄을 모른다니까요.

저는 개그 콘서트에 나오는 제목 왕비뎐이라고 있어요. 거기 보면 못 생긴 명나라 기..이 전부 다 못생겼다고 놀리잖아요. 못 생겼다는데 그걸 못 알아듣고 그걸 아주 기뻐하죠. 아~! 저게 바로 복음 아닙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 거야? ‘하지 마시옵소서.‘ 너무 좋아서. 이건 미친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못 생겼으면 죽어버린다.‘ 하니까 좋아서 ‘하지 마.’ 하잖아요. 그게 뭐냐, 궁지에 몰린 자체가 이게 웬 은혜냐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게 약한 데서 뭐다? 강함이라.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진짜로 그 목사가 자살했다면 그동안 누구 설교 듣고 흉내 내서 지식으로 전한 거밖에 안 돼요. 매일같이 주께서 궁지로 몰릴 때마다 우리는 ‘하지 마시옵소서.’ 오히려 좋아서, 너무 황송스러워서. 그걸 과분이라 해요. 집사님 이야기한 것처럼 이 형편이 애가 손가락 부러진 게 너무 과분한 거예요. 과분하니까 생각지도 않는 딸이 임신까지 하는 또 보너스까지 상금 주시잖아요.

세상에 범사에 감사하라, 한 이 말이 괜히 그냥 흉내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주께서 성도에게 범사에 감사하는 상황을 말씀인 고로 만들어냅니다. 감사해야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주님은 우리 구원에 신경 쓰지도 않아요. 말씀이 말씀대로 되면 그게 주님께서 관심사입니다. 우리 하나 뽑아서 ‘그거 봐, 궁지에 몰려도 누구는 자살할 지경에도 바로 감사가 나오잖아.’ 라고 감사를 뽑아내시는데 기어이 성공하시는 우리 주님. 그 솜씨, 그 대단한 솜씨에 찬양 안 할 수가 없어요. 에스더는 혼났어요.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는 에스더의 자살 방식이 있어요. ‘전하’ 이게 자살 방식이라. 예쁘게 차려입고 ‘전하, 오시옵소서.’ 이게 자살 방식이고, 우리는 우리 방식이 있어요. 사람은 각자 자리가 궁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막다른 길 이예요. 앞  날이 깜깜합니다.

자, 이게 다니엘 본문 봅시다. 다니엘이 이런 계시 받을 때 객관식 ①번, 신났다. ②번, 깜깜했다. 깜깜하죠. 왜, 이렇게 바사 왕 군, 헬라 군에 대해서 자기가 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책이 없죠. 주께서 그냥 한다는데 대해서 대책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미국 영화 SF 공상과학 영화에 외계인들이 쳐들어오는 영화의 첫 장면에 지구인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없죠. 너무 강력한 무기가 쏴대니까 나중에 영웅 하나 등장해서 간신히 뉴욕 반 깨지고 간신히 살지만, 처음에 외계인 나타났을 때는 속수무책이죠. 이 심정이 다니엘 심정이고 사울이란 사람이 주님 만날 때 심정입니다. 눈은 감겨서 눈도 못 뜨지, 그리고 이방인의 뭐가 돼라? 사도가 되라 하지, 대책이 안서요. 뭐 어쩌라고?

성령이 임하기 전에 사도행전 1장 요건 꼭 찾아봐야 됩니다. 요건 참 어렵지만 성경에 있기 때문에 어렵지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이야기 안 하려하는데 너무 난해해서, 1장 6절에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까 하니” 여기 질문 자체에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때가 포함돼 있죠. 이 때는, 이 시간은 누구 몸에서 나온 겁니까? 제자들 몸에서 나왔죠. 지금 7등 하겠다는 거예요. 1990년 10월 18일인지 계산하겠다는 거예요. 해서 뭐하는데? 해서 구원받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구원관이 뭐에요? 자기 몸의 구원이죠. 주의 몸에서 나온 구원관이 아니죠. 그러니까 자기가 사는 때, 시간을 언급한 거예요. ‘주여, 우리 다 아는 이야기합시다. 주께서 며칠, 하면 우리가 알아차리니까 우리가 아는 식으로만 합시다. 언젠데요? 언젠데?’ 그렇게 답변해달라는 거예요. ‘어느 때입니까?’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주님은 뭐라 합니까? “그 때는 너희가 알 바 아니요.” 그때는 누구 때다? 아버지가 알죠. 그러면 주님이 말하는 때는 주님께서 다루어지는, 주님이 누구 시간 때에 다루어집니까? 제자들 요구 사항에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때에 따라서 다루어지죠. 그러면 주님도 모른다가 아니라 이미 주님은 아버지 때에 따라서 지금 움직이고 있는 그 자체가 때인 줄 제자들이 알아채야죠.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이 바로 회복이란 그 때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왜 이걸 인간들이 제대로 모르느냐 하면 자기들이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사건 되면 되는데. 그러면 존재를 사건으로 어떻게 바꾸느냐?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 증인이 되죠.

그러면 빌립 집사가 이디오피아 내시를 누구의 소개로 만났습니까? 사도행전 8장에서 주의 천사가 와서 이야기했고 나중에 헤어질 때 누구 힘으로 헤어졌습니까? 여기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성령께서 바짝, 포크레인 가지고 바짝 들어서 갔습니다. 성령께서 빌립을 이끌어서. 어떻게? 홀연히 소리 없이 가버렸다.

자, 요게 우리 보기에는 공간 이동이죠? 그런데 여기 사도행전 1장 6절에는 그게 바로 때에요. 어! 그게 공간인데 왜 시간이지? 이게 사건이 되게 되면 시간이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 이예요.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묵시의 공간이고 곧 묵시의 순간이기도 하고, 성령 안에서는 내가 주와 함께 있고 이 육체 있잖아요. 이건 옛 구닥다리 구제품 이예요. 그냥 후다닥 벗었으면 좋겠어요. 어서 이 몸을, 이 천막을, 이 장막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고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것이 나의 소망이라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하잖아요. 고린도후서 5장에서.

고린도후서 5장을 우리가 잊어버리고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몇 명? 몇 명? 몇 명’ 맨 날 몇 명, 왜, 우리는 존재기 때문에. 그러면 또 이야기해봅시다. 사도행전 7장 끝에 보면 스데반 집사 나오죠. 스데반 집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죠. 스데반 집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그가 누굴 봤습니까? 예수님을 보았죠. 보면서 하는 이야기가 ‘예수님 저 아파요.’ 했습니까? 자기는 신경 안 쓴다니까요. 자기는 죽는지, 아픈지 짱돌이 날라 오는지 자기는 자기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자기 존재는 신경 안 쓰고 저쪽을 신경 쓴다고요. ‘저들이 하는 일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저는 저들이 하는 일을 제가 아니까 용서해 주옵소서.’ 느낌 아니까. 돌을 던지는 그 느낌 아니까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성령 받았다는 것은 결국은 나를 잊되 나는 누구한테 종속된 상태로 있다는 것을 늘 확인시켜주는 것이 성령 충만함 받은 상태입니다. 내가 열매를 맺겠다. 성령 받은 거 아니에요. ‘내가 무슨 열매를 맺어? 나 같은 인간이 죄 짓는 일 밖에 없지.’ 성령의 열매입니다. ‘내가 별을 따리라’ 미쳤나. 내가 따기는 뭘 따? 안 따도 되는데.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이게 성령 이예요. ‘내가 기어이 장로 되련다. 내가 기어이 목사 되련다. 내가 기어이 박사 따련다.’ 주면 받지. 그런데 기어이 딸 이유가 없어요. 만약에 따려고 했는데 못 따면 궁지에 몰립니다. 궁지에 몰리면 자살해요.

그래서 가끔은 생각하세요. 내가 자살할 만큼의 궁지가 뭔지를 미리 당겨서 한번 생각해 두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안 돼. 안 돼. 안 돼.’ 하는 그 순간 그거 자기를 존재로 생각하는 순간입니다. 그 존재를 뭐로 바꾸느냐, 사건의 다발로 바꿔야죠. 사건의 다발 어렵죠. 그냥 천리 표 국수, 말 표 국수 있잖아요. 국수 다발 있죠. 그거 이름을 ‘나’ 국수 다발. 국수 가락 하나 빼 보니까 누구지? 어느 학교 출신, 키기 몇 센티, 요게 모여서 나에요. 그런데 그 국수의 특징이 있어요. 날마다 그게 부서져요. 그러니까 창세기 3장의 저주가 더 세요. 날마다 부서지고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이걸 알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새로운 사건으로 변화되는 주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는 새로운 사건이 되는 거예요. 천국 가서 주님을 섬기는 그런 기능이 되는 거예요. 새로운 국수가 되는 거예요. 예를 드니까 허황된 느낌 안 들어요? 예, 그만 들어야겠어요.

자, 어쨌든 간에 오늘 11장까지 다 하려 하니까 욕심이지 싶은데 하는데 까지 해봅시다. 10장 15절에 보면 “그가 이런 말로 내게 이를 때에 내가 곧 얼굴을 땅에 향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벙벙하였죠. ‘야! 이거 새로운 미션이 주어졌구나. 좋다 해야지.‘ 이게 아니고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모세가 50만 대군 이끌 때 모세 특징이 뭔지 알아요?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이거였어요. 누가 어쩌래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자기 존재를 생각하게 되면, 평소에 존재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어떤 결실을 맺을 때는 ‘나의 존재가 특별히 내가 뭔가 행동의 지시를 해서 내가 지시대로 움직일 때만 요런 결과가 나온다.’ 라는 것을 같이 묶어서 현재 나를 생각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저보고 이 백성을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하면서 모세가 출애굽기 33장에서 기도하기를 나만 보내지 마시고 누구도 같이 보내 달라? ‘주의 사자도 함께 해주시면 비로소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주의 사자가 동행합니다. 그럼 점선이 되겠죠. 점선이 된다면 백성들이 말썽을 일으킬 때는 모세가 누구보고 이 백성보고 닦달내면 안 되죠. 왜냐 하면 이 이스라엘은 누가 인도합니까? 본인이 인도하는 게 아니고 본인은 인도하는 척만 할 뿐 이예요. ‘내가 지팡이를 한번 들어볼까? 이기나?’ 이렇게 생각했습니까? 지팡이 들면 승리하고 내리면 지는 건 누구 아이디어에요? 자기 아이디어가 아니잖아요.

이런 겁니다. 하나님 지팡이 들면 승리하고 내려오면 진다. 이게 아니고 어느 정도로 모세가 종속되느냐 하면 ‘아이 간지러워라.‘ 하면서 손을 드니까 승리하더라 말이죠. 이 종속이 타협과 협상이 아니에요. ‘너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줄게.’ 가 아니라 ‘저 어쩌면 좋아요? 왜 이렇게 간지럽지?’ 하면서 손을 올리니까 승리하더라 말이죠. 긁고 나서 손을 내리니까 지더란 말이죠. 그 정도로 종속이라니까요.

범사에 감사하란 말이 감사할 게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고 뭔가 했는데 그게 보조 맡아서 그게 감사가 나오도록 조치를 하는 거예요. 이렇게 했는데 주의 사자가 보면 ‘주여 저들이 목마르다고 원망합니다.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네가 그냥 바위를 가리켜라.‘ 했잖아요. 참 이런 문제 어려운데 질문 던지니까 답변하셔야 됩니다. 내가 맨날 정답 이야기했는데, 모세가 지팡이 가지고 반석을 가리키면 물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안 나온다고요. 모세가 가리키면서 모세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자기는 가리켰습니다. 생각했을 거 아니냐 말이죠. 그거는 모세의 자기 존재를 생각한 거고 물이 나오는 것은 사인 맞춰서 주께서 물이 나오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가 해보니 물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한테 사명을 맡겼다고 생각한 거예요. 오늘날 목사들이 오해한 것처럼. 이 교회를 자기한테 맡겼다고 생각하는 오해처럼. 백성들이 원망하잖아요. 처음에는 물을 그냥 쳤고 그 다음에는 물을 가리키라 했는데 자기 입장에서 보니까 성질이 나서 물을 쳐버렸죠. 어차피 하나님은 날 통해서 일 할 것이고 내가 치나 뭐하나 물 나오게 돼 있는데 물이 나왔습니까? 안 나왔습니까? 물은 나오는데 그 순간 모세는 주님께 종속이 아니고 포함이 돼 버렸습니다. 모세가 따로 자기 살림 따로 챙겨버린 거예요. 모세는 가나안 땅에 못 갔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는데, 다 왔는데, 고지가 바로 저긴데, 다 왔는데 못 들어갔어요.

왜 끝까지 종속이 아니고 왜 갑자기 객기를 부리느냐 말이죠. 너하고 내가 동업자인 것처럼 왜 행세하느냐 말이죠. 그래서 백성들 앞에서 누구 영광을 가렸다? 하나님 영광을 가렸다. 그러면 영광을 높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주여 나는 뭘 해도 일이 안 되는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이라 해도 구원 못 받고 예수 믿어도 구원 못 받고 예수 피 믿어도 구원 못 받습니다.’ 할 때 이게 구원 된 자에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손 무성 목사 말하기를 이 근호 목사는 때려죽여도 ‘예수 믿습니다.’라는 말을 못하고 어떤 사람은 이 근호 목사는 ‘사랑한다.’는 말을 못한다고. 왜 사랑한다는 말을 못해요? 내가 한글 알고 있는데 하죠. 그것 가지고 주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이 말이죠. 주님이 들었다 놨다 해야지, 남녀 호랑개교도 아니고 주문 외운다고 들었다 놨다 합니까? 누가 종속되고 누가 주인 이예요? 그들은 그렇게 사는 모양이라. 내가 ‘주여 믿습니다.’ 했는데 ‘구원 안 해주면 두고 보라.’ 이런 식으로 사는 모양이라. 믿음은 선물이지, 그것도 한번 받은 믿음이 아니고 늘 주는 선물이지. 한번 했다고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거든요.

어쨌든 오늘 본문에서 다니엘은 대략난감입니다. 어쩌라고? 자,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주의 먹구름이 지금 밀려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비 맞으면 되죠. 간단한 문제를. 지금 다니엘이 처음에는 원한 게 저 먹구름을 스톱, 오라이, 이 짓 하려고 생각했는데 그게 될 수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내가 예수를 믿었다. 예수님 보고 ‘요거 까지만.’ 그 다음부터는 내가. 오라이.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려 했는데, 그게 아니고 먹구름이라는 것은 우리가 감당이 안 됩니다. 먹구름을 우리가 훅! 분다고 갑니까? 비 맞을 때 그냥 비 맞으면 돼요. 그러면 비 맞으면 좋은데 그 먹구름 맞으면 추워요. 그리고 추우면 아파요. 감기 걸려요. 저도 감기 걸렸어요. 이거 딸 치운다고 먹구름이 밀려와서 신경 쓴다고 몸이 약해서 바이러스 땜에 감기 걸렸는데.

자, 먹구름이 밀려옵니다. 이거는 먹구름이 우리를 피해서 가는 게 아니에요. 우다다닥 하고 치는데 춥습니다. 오돌오돌 떨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픕니다. 그러면 그게 결국 뭐냐 하면 고난이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한테 한 것이다. 이 주의 형제들이 출세하고 땅땅 거리고 대단한 재벌이고 재벌 3세 그런 게 아닙니다. 그냥 세상이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같이 어려움을 당하고 세상이 날씨 추우면 감기 걸리고 세상이 그렇게 군에 오라 하면 군대 가야 되고, 민방위 하라 하면 해야 되고 예비군 오라 하면 와야 되고, 뭐 저항하고 ‘나 예수 믿기 때문에 안 간다.’ 그런 것도 없어요.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서 전쟁터에 나가서 수류탄 터지면 통일교 인이든 여호와 증인이든 다 죽는데 자기만 안 죽고 그런 거 없어요. 수류탄이 통일교를 아십니까? 수류탄이 뭘 기억해요? 개혁주의 통합 측을 기억해요? 없어요. 그냥 살다 그냥 죽어요.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처럼.

그러니까 이게 그 뒤에 제가 한 게 11장 이야깁니다. 지금 10장하고 11장 이야기하는 거예요. 11장 내용이 뭐냐 하면 헬라 나라끼리 싸움을 하는데 그 싸움 와중에서 누가 치이냐 하면 가만히 있는 유대 나라가 분풀이용으로 이놈한테 다 빼앗기고 저놈한테 다 빼앗기고 올라가면서 완전히 짓밟고 내려가고 또 올라가면서 짓밟고 내려가고, 졌다고 때리고 이겼다고 좋다고 때리고, 혹부리가 한 두 개가 아니라. 반에서 꼭 그런 애들 있어요. 맞아도 말 못해서 늘 얻어터지는 마음 약한 애가 있다니까요. 누가 놀려도 반발할 줄 모르고 애들이 더욱 더 놀리게 만드는 그런 요인들이 있어요. 우리 클 때도 있었는데 나중에 걔들이 잘 되면 동창회에 나와요. 너희들이 때린 덕분에 나 잘됐다고 자랑하려고 나오는데.

지금 유다 입장이, 다시 이야기합니다. 지금 탱크, 트럭의 바퀴에, 거대한 역사의 트럭에 진짜 택한 백성은 어린애처럼 끼어있습니다.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이건 누가 봐도 사도바울 네가 그렇게 변변한 일을 하려 하면 나 같으면 때려치운다. 네가 뭐 실적이 있나,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나.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나는 선한 사람을 살리고 나는 면류관…’ ‘아이구, 놀고 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어이 참 혼자 착각해서 혼자 삶에 도취해서 계룡산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이건 뭐지? 치워라. 네가 죽는다고 누가 알아주는 사람 없다.’ 이미 사도는 알았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뭘 더 원해요? 뭐가 더 필요합니까?

이미 십자가로 구원받아버렸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의 나머지 편지는 뭐냐 하면 이미 피로 구원받았기에 어떤 수모도 범사에 감사하라. 빌립보서 3장, 4장,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모든 일에 감사하고 기뻐하라.”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아무도 너를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하지만 너희들이 이미 죽었고 너의 생명이 어디에 있다? 하늘나라에 있는데 이건 부도도 안 나는 은행, 하늘나라 은행. 아르헨티나에 백날 해도 소용없고 이미 하늘 은행 비밀금고에 너의 생명은 이미 있다. 이 땅에서 이미 죽은 몸이니까 이 땅에서는 탐심내지 말고 그 나라 의를 위해서 가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3장 봅시다. 이 대목이 참 좋은 대목인데요. 우리가 자꾸 잊어버려요. 3장 20절, 이걸 주례로 했으면 좋았을 건데요.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베드로가 누구의 것이라 했습니까? 베드로가 주의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입니까? 너희의 것이다. 성도가 베드로의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도리어 성도의 것이다. 맞죠? 목사가 누구의 것입니까? 목사가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목사가 성도의 것 이예요. 모든 게 바뀌어져야 돼요.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보다 더 짜릿하고 더 아프게 찌르는 말은 뭐냐 하면 사람한테 비교해서 떨어진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울고불고 하지 마라. 이 말이죠. 남들이 너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그것 때문에 낙담하지 마라. 궁지에 몰리지 마라. 매사가 궁지인데 따로 또 궁지가 있습니까? 매일 아슬아슬한데.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너를 위한 파티, 진수성찬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 마귀든 천사든 전부 다 너희를 위해서 있고 너희는 누구의 것이다? 너희와 연결된 것은 오직 목사도 아니고 집사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만 너희와 연결돼 있다. 그 그리스도는 누구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매개물로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바치기 위해서 주께서 오신 거예요.

이걸 대단한 분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런 행색을 하신 김삿갓 같은 본명은 김병연, 그런 김삿갓 같은 문전박대 당하는 그런 분이 이걸 이야기할 때 누가 이걸 믿겠습니까? 대단한 분도 아닌데. 그런데 성령은 바로 일을 그렇게 한다 말이죠. 성령은 지극히 작은 소자를 통해서 일한다 말이죠.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 대단한 사람은 어디 갔느냐 하면 바벨론에 가 있어요. 바벨론에 전부 다 인류의 역사를 논하는 사람들 가 있어요.

이제 슬슬 11장에 가야 되는데 설명이 어렵기 때문에 지금 객소리를 많이 했는데 다 쓸데없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래서 10장 20절 봅시다. “그가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네게 나아온 것을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군과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군이 이를 것이라” 보세요. ‘다니엘아 이건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미가엘) 이렇게 장기 알을 마, 차, 내 맘대로 옮기듯이 옮길 거야. 옮겨서 70이레 이룰 거야. 너는 그거만 증거 하면 되는 거야.’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주님의 일하심을 증거 하면 되지, 우리보고 하늘의 별을 따라 합니까? 달을 따라 합니까? 뭘 하라 해요? 몸이 건강 하라 합니까? 뭘 하라 해요? 그냥 검사 맡으면 되지, 도대체 우리는 할 게 없어요. 할 게. 이제는 놀기도 지겨워. 노는 것도 재미없어. 빨리 떠나서 하늘로 보냈으면 좋겠어요. 남편하고 싸우는 것도 지겹고.

드디어 11장에 미가엘이 일을 벌려놨네요. 이건 다니엘이 벌려 놓은 게 아니고. 이 11장의 일이 바로 여러분 나눠드린 5절부터 나오는데 20 몇 절까지 죽~ 나옵니다. 어떤 왕이 어떤 걸 쳤는데 공주가 다가와서 꼬시다 실패했느니 어떠니, 다시 로마의 어떤 장군이 했더니 그런 이야기, 역사가 나오죠. 복습하는 의미에서 한번 정리해 봅시다.

묵시는 역사가 필요하다? 안하다? 그것도 어려워. X. O로 합시다. 문답식으로. 묵시는 역사가 필요하다? 필요 안하다? 필요하다. 그러면 묵시가 역사 어디 속에 들어있습니까? 번쩍, 번쩍 빛난다. 안 그러면 짓밟혀 있다. 짓밟혀 있다. 그걸 유한 속에 무한이라 하죠.

유한 속에 무한! 자, 이 사각형 안에 요러한 짧은 직선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직선은 이 둘러싼 사각형보다 작습니까? 큽니까? 작죠. 요게(사각형) 만약에 무한이라면 직선은 유한이 되겠죠. 요 사각형을 셋으로 3등분 합니다. 그리고 양쪽을 빼냅니다. 그러면 한번 했죠. 또 세 등분하고 양쪽을 잘라냅니다. 또 자를 수 있죠. 또 자를 수 있죠. 그러면 뭡니까? 무한 속에 뭐가 들어있어요? 무한이 들어있죠.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님은 하나의 개인, 인간입니다. 부분이죠.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에게 나왔거든요. 모든 피조물을 창조했으니까. 천사도. 예수님이 커요? 모든 이 큽니까? 예수님이 크죠.

따라서 온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숫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 앞에 용납되는 사람만 온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이거 말장난 하는 거 아니에요. 수학에서 무한 개념에 이런 게 나와요. 칸토어의 집합론에 보면 나온다고요.

작다고 해서 유한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무시하죠. 지극히 작은 형제를 무시하죠. 하지만 그 안에 주님 계시면 나에게 대접 안 한 것이 지옥가게 되고 나한테 안 도와 준 것이 지옥 가는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 하잖아요.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것은 십자가 이후고 십자가 전에는 지금까지는 예수님을 못 알아보면 그게 바로 지옥 가는 거예요. 심지어 예수님을 비난해도 좋아요. 그러나 성령을 욕하게 되면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에서 영원히 지옥 갑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때가 나왔기 때문에. 모든 세대가 나왔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모든 시간이 이미 예수님 안에 다 응축돼 있어요. 그것을 환등기 필름처럼 펼쳐버리면 이게 인류의 마지막 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 속에 미가엘이 있고 미가엘 계시가 있고 70이레가 있고 70이레가 v펴지면서 모든 역사는 이젠 미가엘 천사에 의해서 이제는 장기 알처럼 70이레를 위하여 진행되는 겁니다. 70이레 중에서 뭐냐 지었던 성전이 앞, 뒤로 돌아다니면서 전부 다 완전 파괴가 돼야 돼요. 그러면 파괴된 그 성전 말고 성전 세워지니까 파괴된 성전 위에 성전이 세워집니까? 위에 세워지죠. 그래서 이게 뭐냐 사람에 의해서 죽어봐야 내 공로로 구원받았다 소리를 두 번 다시 못하게 하는 겁니다. ‘저 주님한테 좀 했잖아요. 일요일 날 헌금 했잖아요.’ 이런 소리 일체 못하는 방법, 그게 천국이거든요. 천국은 어린양의 피만 증거 하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하는 이러한 즐거움을 우리한테 누려~, 죄 짓는 즐거움을 누려~ 누리게 하시는 겁니다. 뭐로? 성경을 보게 되면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죄가 되는 사실을 알고, 그 죄를 누려~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아무리 작은 거라도 주의 말씀대로 살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는 것을 오후 2시 47분에 잊어버리면 그게 죄가 돼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죽어도 주를 위해 죽고, 이걸 저녁 7시 35분에 잊어버리면 그 순간에 죄가 돼 버려요. 항상 우리는 말씀에 비춰보면 죄인이죠. 죄인도 이런 혜택 받아보면 이건 완전히 주님의 십자가 피 때문에 주어진 선물, 설 선물 이예요. 그냥 공짜로 온 거예요. 공짜로 온 이걸 어디서 왔는가는 알아야 돼요. 어디서 왔습니까? 그냥 긍휼하심, 긍휼과 자비, 그것이 구체화되면 십자가, 십자가에서 온 자비를 그냥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니엘이 보았습니다. 할 건 없었습니다. 그냥 증거 할 뿐이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모든 것이 계획 잡힌 대로 십자가 증거 하는 일로 일어난 줄로 저희들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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