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사항

70이레논문18-시간의 층

아빠와 함께 2023. 7. 7. 16:58

가락-70이레 논문(시간의 층)131128-30강a -이 근호 목사

242 페이지 할 차례지만 233 페이지 언급하고 242 페이지 넘어갈게요. 233 페이지 밑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인간에게 있어 과거란 다시 되돌아갈 수 없고, 수정시킬 수 없는  불가역적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묵시적 미래는 현재를 누리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바로 그 현재가 미래에 의해서 미리 불가역적 영역으로 지정받은 상태인 것을 통보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아까 집사님이 나한테 쉬는 시간에 질문했을 때 그 질문의 답이 여기 나와 있네요. 여기에 미래가 과거를 잠식한다고 제가 썼잖아요. 그걸 여기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미리 불가역적인 영역으로 지정받은 상태』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불가역이라 하는 것은 한번 돼 버리면 되돌아올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항상 되돌아올 수 없는 사태를 이미 지정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지금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하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잘 되면 자기 탓이고 못 되면 다 조상 탓이고.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고 우리는 매일 하루치의 내 힘으로 되돌릴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을 지정 받고 있는 거예요. ‘누구야? 나를 오늘 이렇게 살도록.’ 하면서 찾아가 보면 그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계시죠.

미래가 지금을 배당을 해준다 할까, 분배를 한다. 더 적절한 예를 들면 영화제 할 때  스타들이 오는 길은 뭐를 깝니까? 붉은 카펫을 쫙 깔죠. 카펫의 제일 끝부분에 리무진 차에서 내려서 걸으면 그 도착 지점은 어디입니까? 식장 안으로 들어가겠죠. 그럼 카펫은 어디에서 깔리느냐 하면 식장에서 리무진으로 깔리지 리무진에서 식장으로 깔리는 건 아니에요. 그게 보게 되면 분간이 안 되니까 사람들은 ‘내가 행동을 똑바로 해야 내가 구원받는다.’고 우리가 분간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소리 하는데 사실은 성경적으로 보면 그 분간 안 되는 것을 분간해 주십니다.

미래 이 지점에 오라고 미리 우리에게 이런 상태를 지정해 주신 겁니다. 그래서 그 밑에 보면 『현재에다 해석기준을 갖고 싶어 하나 이것은 자기 신체가 느끼는 미래적 방향성과도 맞지 않는다.』이게 또 중요한데요. 이게 뭐냐 하면 미래적 방향성하고 미래하고 달라요. 미래적 방향성은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내가 바라보는 것은 내 몸에서 나온 미래적 방향성이고 여전히 방향은 리무진에서 식장까지 방향인데 그런데 미래라 하는 것은 바로 그 방향을 반대로 주님이 우리에게 뭔가 지정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오는 미래와 우리가 기다리는 미래의 차이점은 뭐냐, 내가 지금 지정받은 걸 알면 미래서 온 것이고, 내가 내 하기 나름의 내 역사를 따로 개발해 나갈 수 있다. ‘역사라 하는 것은 내 하기 나름이야, 인간의 창조력과 인간의 개발하게 되면 나는 내 원하는 내 역사를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인간의 몸에서 나온 일종의 환상이죠.

역사학자가 있거든요. 아까 딜타이란 논문을 죽 보고 왔는데요. 딜타이란 사람은 쉽게 가면 최초로 역사학에 대해서 언급한 사람이라 보면 됩니다. 뭐냐 하면 역사가 등장함으로써 이제 모든 진리는 해답을 얻었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 이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역사라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가 역사를 어떻게 할까, 자기가 하기 나름이다. 자기가 마음먹기 나름이라서 자기마음 먹은 대로 역사가 펼쳐지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 창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봤거든요.

그렇다면 해답이 뭐냐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해답을 찾지 말고 네가 원하는 역사를 만들어 가. 그러면 해답은 네 손안에 있소이다. 해답은 네가 하기 나름이다. 이 딜타이의 역사관은 오늘날 모든 기업, 국가, 학교, 교육, 모든 학문, 과학, 모든 분야에 거기 밑바탕을 이룹니다. 특히 기업 같은 데에. 공기업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 딜타이란 사람이 유명한 거죠.

그럼 딜타이가 그런 이야기하기 전에 그전에는 뭐였나? 그전에는 역사라는 것은 신에 의해서 주어진 거기 때문에 우리가 할 것은 신이 남겨준 비밀을 우리가 캐치하고 알아채느냐, 알아채서 합당하게 맞춰서 살면 그게 진리다, 라고 했던 것이 딜타이 이전에 모든 진리관이라면, 딜타이는 용감하게 진리는 없다. 내가 만들면 그게 진리다. 그래서 딜타이란 것이 중요한 인물이 됐어요.

이 딜타이에 이어서 영향을 받은 사람이 하이테크부터 니체부터 그 다음에는 용기를 갖죠. 니체는 인간의 의지가 힘을 만든다. 의지에서 힘대로 사는 사람을 초인, 이 초인은 어떤 것도 구애 받지 않는다. 왜 본인이 신이기 때문에. 니체가 그런 이야기했을 때 감히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니체처럼 흉내는 못 내지만 은근히 얼마나 즐거워하고 기뻐했는지 몰라요.

‘군주? 왕? 귀족? 다 없애버려. 내가 귀족이고 내가 신이고 내 역사는 내가 알아서 해, 지금은 내가 이렇게 신분은 몰라도 내가 노력하는 것에 따라서 내가 돈을 벌면 내가 귀족이야.’ 라는 그러한 사고방식이 민주주의 이름으로 퍼지게 만들게 니체입니다.

그래서 여기 233 페이지 아래 자기 몸에서 나온 방향성은 성경에서의 방향성과 다릅니다. 그래서 자꾸 인간들은  미래로 여기서 자꾸 가니까 그런데 뭐가 문제냐 하면 자꾸 자기 미래를 개발하는데 개발하니까 성이 안 차죠. 어디까지 돈을 벌어야 되고 어디까지 똑똑해야 되고 어디까지 승진해야 되고 어디까지 내가 인기가 높아야 ‘아! 이제 내 인기가 여기까지구나.‘ 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욕구, 욕망은 한도 끝도 없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게 답답하니까 뭐를 만드느냐, 영혼이란 걸 들고 나오죠. 아예 자기 속에 불멸의 존재가 영혼이란 이름으로 자기 속에 있다고 상정해 버렸습니다. 그게 문제 있다고 그 이야기한 거예요.

그렇게 하시고 242 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서 또 난해한 용어가 나와서 여러분들에게 죄송합니다만 난해한 용어를 썼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네 번째 줄에『그 창조성을 종말까지 전달하는 매개구실을…』매개라는 것, 매개라는 말은 잘 안 쓰는 말 이예요. 상당히 철학적으로 함축된 용어라서 잘 안 쓰는 용어인데 흔히 잘 쓰는 용어가 중매쟁이 할 때 매, 매매, 거래인 할 때 매, 하여튼 중간에 들어가서 끊어진 관계를 이어주는 기능, 이게 매개라고 하는 겁니다. 매개하고 유사한 용어가 뭐냐, 화학에서 나오는데 촉매, 화학에서 촉매라 하는 것은 일은 성사시키고 본인은 변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매개와는 달라요. 매개는 일은 성사시키면서 본인도 같이 변해 버리는 그게 매개가 돼요. 중매쟁이와는 다르죠. 중매쟁이는 중매했다고 해서 자기가 달라지는 거 있습니까? 중매해서 돈 약간 더 벌었다 뿐이지, 딴 거는 달라진 게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중보자는 그게 아니었잖아요. 말씀이 육신까지 되었다 말이죠. 보통 변한 게 아니잖아요. 말씀이 육신 됐다는 말은 의인이 죄인 됐다는 말인데 엄청 된 변화죠. 쉽게 말해서 자기는 엉망 되고 남 좋은 일 할 때 나서겠나, 안 나서겠나, 우리보고 물어보세요. 왜 남만 좋은 일 생기고 나는 고생만 해야 되겠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그걸 예수님이 하신 거예요. 그게 복음입니다. 복음으로 구원받아요.

사람들의 심보는 자기한테 이익이 없는 한 희생 안 나서려고 합니다. 사실 말이 희생이지, 희생이 아니고 거래지만, 반드시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거예요. 지금 구세군 냄비에 크리스마스 앞두고 보통 돈을 넣잖아요. 만약에 돈을 넣을 때 돈을 넣은 사람 명단이 공개된다면 우리는 돈 잘 안 넣으려 해요. 왜냐 하면 돈을 내가 여기 구제비를 얼마 하던 간에 그걸 남들이 몰라 줄 때 남모르게 희생했다는 그러한 의로움이 나한테 생겨나죠. 그게 바로 내 희생의 대가입니다. 그래서 그 희생의 대가를 공개해버리면 우리는 ‘네가 남한테 유명하려고 헌금했잖아.’ 라고 하게 되면 나의 고상함이 손상을 입을 테니까 우리는 성금을 안 내죠. 아주 사람들이 머리를 써요.

남들은 티내려고 하지만 나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고 싶어. 왜 그 정도로 나는 대단한 낮아준 인품이니까 고걸 챙기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금식할 때 찡그리죠. 뭔가 금식했다는 티,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금식하면서 티 안 내기 위해서 무슨 기름을 바르잖아요. 기름 바른 그게 더 미워.

매개라 하는 것은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중매자, 중보자, 중개자가 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아이디어 100단을 써보세요. 예수님 매개를 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안 된다면 우리는 예수님만 믿고 구원받아야 돼요. 내 힘으로 구원받으면 안 돼요. 왜 실패하니까. 구원에 실패합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내가 할 것 같으면, 내가 성사해서 될 것 같으면 주께서 오실 필요가 없었죠.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그 자체, 아기 예수가 태어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그 자체가, 이 말은 뭐냐 하면 ‘너 안 돼.‘ 이런 뜻 이예요. 네가 아무리 도 닦고 계 기성 선생님 친구 생각할 때마다 그 생각나는데 네가 아무리 도 닦고 공부 많이 해봤자 예수님이 온 이상은 안 되는 거예요.

심지어 예수 믿어도 안 돼요. 왜, 구원은 예수 믿어서 구원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되기 때문에. 아까 사후 개념이란 참 좋은 말 하셨는데 이 믿음 자체가 사후 개념 이예요. 믿는다는 내가 원인이 되어서 구원이란 결과가 나온 게 아니고 구원은 이미 예수님이 하셨고 돌아보니까 내가 지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아까 배정받은 거라 했죠. 아까 처음에 했죠. 미래가 이미 우리에게 배정을 해줬잖아요. 배정받은 그것이 바로 믿음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믿음마저도 그 원인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한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믿지 않음으로 구원을 받은 거예요.

성경에는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돼 있지만 해석하려면 우리가 믿지 않음으로 구원이 된 겁니다. 아브라함이 구원이 된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구원된 거예요. 왜냐 하면 믿지 않는 자를 주께서는 구원하시기 때문에. 믿지 않는 아브람을 믿는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내서 구원받기 때문에 이 아브라함 만들기는 절대로 아브람이 아브라함 될 수가 없어요. 아브람은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백날 뛰어봐야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낳아야 영인데 영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누구도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습니다.

우리 오랜만에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오늘 새로운 계시가 하나 또 나와 버렸네요. 예수 믿지 않으면 구원받읍시다. 갈라디아서 6장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라고 돼 있죠. 칼빈은 말하기를 사람이 갖고 있는 직업은 그 직업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라고 보고 교회서도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그 달란트를 잘 활용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나 갈라디아서 6장 8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직업이 문제가 아니에요. 백수가 되든지 상관없이 직업이 없어도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게 돼 있습니다. 직업이 뭐든 상관없이 있든지 없던 상관없이 달란트가 몇 % 건 관계없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위해서 심지 않는 자가 영생을 얻는데, 그러니까 육체를 위해서 심지 않는 자가 되려면 뭐를 부정해야 됩니까? 자기가 ‘나는 이 직업으로 내가 산다는 자체를 이것을 죄악된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에게만 그 사람은 육체에 속하지 않고 성령을 위하여 살아가는 영생을 거둘 사람이라고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목회하는 것은 이것은 썩어진 것이라고 자백하고 고백하는 목사만이 영생을 거두는 사람 이예요. 이 목회가 ‘이것도 썩어진 겁니다. 이것도 썩어질 육신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자백하는 사람만이 영생을 거두고 있는 사람 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고맙죠. 이 땅에서 직업을 준 걸 고맙죠. 직업을 왜 줬어요? 아까 말씀대로 왜 배정을 했습니까? 왜 미래가 우리에게 이런 배정을 했어요? 왜 어떤 사람은 농사를 져요? 농사 지면서 ‘이 농사 지면서 내가 백날 농사짓는 것도 썩어질 똥밖에 안 돼.’라고 그걸 확인하라 이 말이죠. ‘해설 해봐야 이 화상이 백날 해봐야 밥 먹어 봐야 똥밖에 안 될 거야.’라고 그걸 인정하란 말이죠. 인정하면 그게 영생 이예요. 영생이란 그냥 영생을 주는 게 아니고 육으로 해보고 난 뒤에 그 흔적에서 발휘되는 게 영생입니다.

한 가지 추잡한 이야기를 예를 든다면 어떤 공주가 키우는 거위가 있었는데 공주가 서랍에 보니까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요. 그래서 공주 다이아 반지 훔쳐갔다고 신하들 작살내고 사흘까지 못 찾으면 너희들 다 죽인다, 했는데 거위가 똥을 쌌는데 그 안에 다이아 반지가 있네요. 어떻게 알았는가? 다이아가 반짝반짝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똥이라면 주님은 뭡니까? 우리 속에 있는 다이아에요. 웬 다이아? 다이아몬드가 그냥 나온 게 아니고 거위의 배설물 속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 3장에 뭡니까?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걸 뭐로 버린다? 모든 걸 배설물로 분류하겠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말고 나머지는 다 배설물로 분류하겠다 이 말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 이것도 다 배설물, 똥이고, 더러운 육신으로 섬기는 것이고, 왜  똥일 수밖에 없는가? 다 육신을 위해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하는 것은 다 남 좋아라 하는 게 아닙니다. 희생?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우리가 희생을 해요? 뭐 구세군의 냄비? 그거 다 자기 착함을 확인하고 싶어 그 짓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어떤 짓을 해도 매개가 아니면, 다시 말해서 매개자 되신 예수님 아니면 어떤 인간도 구원 못 받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구원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부처? 팔만대장경 손상됐다고 정부보조금으로 수리하고 백날 해인사에서 하라 해요. 그거 다 썩어진 것이라니까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 이 자리에서 강의시간만 하지 말고 슬슬 길에 다니면서 육신? ‘ 저 사람은 어떤 육신을 위해서 심는가?’ 한번 보시라 이 말이죠. 골프장에도 가서 보시고 ‘나이스 샷’ ‘저것도 육신이구나.’

세상에서 주부들이 설거지하는 것도 육신이고 김장 스무 포기 했다면서요? 스무 포기 하니까 영생의 열매를 거두던가요? 배정받은 거예요. 김장하면서 그래 이렇게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열심히 했는데 영생은 이래서 얻어지는 게 아니고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우리에게 영생을 할당받은 거예요. 배설물 속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라고.

그게 바로 매개라는 겁니다. 그래서 매개 알죠. 중보자 아닙니까? 그러면 말이 안 되고 매개가 되기 위해서 왜 우리는 매개일 수가 없는가? 하는 그걸 동반해서 알아야 돼요. 그걸 쉬운 말로 뭐라 하느냐 하면 ‘짝’이라 해요. 쉽죠? 장갑의 짝, 양말의 짝.

하나님은 짝을 통해서 일하시거든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거 요번에 대전 시민대학에서 할 때 설명할 겁니다. 이미 교재 다 써놨어요.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게 아닙니다. 그 교재에 나와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그 생각은 어디서 나온 생각이냐 하면 유에서 나온 생각 이예요. ‘내가 여기 없었는데 내가 왜 있지? 내가 처음에는 없었지, 없었는데 누가 했지? 하나님이 창조했구나.’ 이게 바로 이미 유인 인간이 기껏 생각하는 창조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무에서 유의 창조가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의 자기표현입니다. 무가 아니에요. 이미 있어요. 형상이 먼저 있고,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이 주가 되기 위한 표현과정이 바로 창조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있음, 나 있다는 유를 먼저 생각해서 무에서 했다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놨는데 그것도 책임지겠지.’ 하고 항상 누구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 생각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자기 생각하는 창조는 원래 하나님이 원하는 복음적인 창조가 아닙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세요. 뭐라고 돼 있던가요? 모든 것은 누굴 위해 창조했다?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했다는 골로새서 1장 16절이 되려면 내가 생각하는 내 위주의 창조 이거는 부정돼야 돼요. 이것도 아까 이야기한 육신을 위해 심는 것밖에 안 돼요.

창조부터 다시, 그래서 교재 제목이 ‘창세기 세척하기’에요. 때 벗기기. 창세기를 볼 때 너무 인간들이 자기 있음 위주로 내 좋아라고 봤는데 그 때를 ‘잠시만요, 벗기고 가실게요. 때 벗기고 가실게요.’ 때를 벗기면 그게 뭐가 나옵니까? 짝인데 그 짝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항상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는 곳에는 뱀의 후손이 등장하고, 뱀의 후손이 등장했다 싶으면 여기에 반드시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고, 둘이 등장하면서 나머지는 다 들러리, 인간들은 모두 들러리에요.

그동안 들러리가 주인행세 한 것은 배후에서 마귀가 그렇게 사주를 해서 그래요. 아까 딜타이 했죠? ‘역사는 네가 만들기 나름이다. 역사는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신께서 예정했다? 웃기지 마, 네가 역사의 창조자야. 네가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역사는 그렇게 펼쳐질 거야. 하면 된다.’라고 딜타이가 그렇게 언급한 거죠.

그런데 사실은 창세기 세척하기, 강의를 하게 되면 이것보다 더 깊이 있는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반전의 반전 있는 이야기가 계속 나올 겁니다. 안 바쁘시거든 참석하면 좋겠죠. 물론 나중에 책으로 내겠지만 책 내면 한 페이지 읽고 어렵습니다. 할 수가 있어요.

자. 매개라 하는 것을 설명할 때는 반드시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 매개라는 뱀의 후손도 같이 등장하죠. 그렇다면 여기에 그 뒤에 242 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봅시다. 『그 몸은 ‘포로로 잡혀 있는 백성들과 함께 의로운』여기의 백성이 어떤 상태에 있는 백성입니까? 뭐하는 백성? 포로 잡혀 있을 때.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남들은 고사하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있는 하나님을 오인했어요. 이방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 본 백성들이, 구약을 읽어보세요. 읽어보면 가까이 있는 자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오인하고 오해를 해요. 그러면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죠. 다른 사람은 더욱 더 멀리 있는 이방인들은 오해할 수밖에 없죠.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몰라요.

그런데 그들이 언제 하나님이 인자 되신다는 것을 언제 아느냐 하면 그러니까 말이 어렵지만 참으세요.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해도 그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해했다? 이해 못했다? 이해 못해요. 이해했으면 선지자를 구박하지 않습니다. 미가가 그렇게 할 때 미가를 죽이고 이사야를 톱으로 죽이고 그렇게 하지를 않아요. 선지자를 그렇게 구박하지 않아요. 몰랐다는 이야깁니다. 가인이 아벨 죽이듯이 그렇게 죽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계속 오해하는 가운데서, 오해가 쌓이고 쌓여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인자가 됩니다. 인자! 사람의 아들이 돼요.

그러면 사람의 아들은 말만 다니엘이나 에스겔에서는 인자라는 용어만 던져놨을 뿐이지, ■용어가 실체가 되려면 하나님 이름과 함께 동행 했던 이들이 뭐를 받게 되느냐 하면 이들이 포로 잡혀야 됩니다. 포로 돼야 돼요. 유다가 어느 나라에 포로 잡히죠? BC 586 년에 바벨론에 잡혔었죠. 요 바벨론이 요한계시록에 보게 되면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모든 나라를 총체해서 일컫는 용어가 바 벨 론!

이 바벨론은 구약 적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을 삼킨 제국 이름이 바 벨 론! 그렇잖아요. 아까 여자의 후손은 뭣과 도모한다? 뱀의 후손. 뱀은 짐승이죠. 짐승과 함께 짐승을 드러내면서 아까 더러운 소리지만 거위 똥 속에 있는 다이아! 더러운 배설물 속에 다이아가 빛나는 것처럼 바벨론 나라가 짐승의 나라가 되면서 인자가 인자의 제 모습을 죄 속에서 드디어 쏘옥 올라옵니다. 마치 물거품 속에서 비너스 올라오듯이, 또 마술사의 검은 보자기 속에서 비둘기 올라오듯이. 그리고 방금 동남아 순회공연 마치고 방금 나이트클럽 오신 박 마리아 가수 등장할 때 갑자기 밑에서 조명발 쫙 비추고, 상상 되십니까? 그런 데 한 번도 안 가봤지만. 그처럼 조명발 확 받고 올라온 것처럼.

포로 잡혔을 때 땅도 없어요. 왕도 없어요. 그리고 지도자도 없어요. 그리고 놀라운 건 선지자도 없어요. 이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밖에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때 드디어 마지막 때 인자가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빰빠바바빰~♬ 빰빠바바빰~♬ 하면서 제일먼저 등장한 것은 바로 세례요한 등장했죠. 그 다음에 하늘의 별이 등장했잖아요. 줄기차게 누가 따라옵니까? 사진기자들 따라오죠. 동방박사. 요새 같으면 언론사 기자 따라오죠. 메사야, 하나님 아들 찍어보겠다고 특종 내겠다고, 유황과 몰약과 황금을 들고 따라왔습니다. 따라오면서 그들이 우리보기에 참 대단한 게 분명히 그들이 헤롯을 봤고 다 봤을 건데 그건 안중에 없어요.

중요한 것은 아기예수! 죽으나 사나 아기예수! 그거면 보고 가겠다는 거예요. 보세요. 얼마나 믿음 대낄 아닙니까? 참 좋죠? 세상의 모든 권력과 이런 걸 만나고 전혀 눈 돌리지 않고 오직 누구만 보면 만족이다? 아기예수께 와서 경배하면, 아기예수 경배하는 그 타이밍이 천국에서 우리의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 면류관 도로 드리는 게 천국이죠. 그 천국을 미리 짧은 타이밍으로 동방박사가 아기예수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겁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 딴따라딴따 딴따~♫ 고요한밤 거룩한 밤 캐롤이 더한 줄을 모르겠지만 아마 그쪽에는 아무 소리가 안 났을 거예요. 아무 소리도 없어요. 캐롤도 없고 바깥에 눈 온다고 까부는 애들 소리도 안 들리고 그냥 고요한데 동방박사, 아기예수 있고, 가족 있고, 동방박사 엎드리고 선물 드리고 천사 지시받고 다른 길로 드디어 은퇴했습니다.

그 동방박사 나중에 총회장 했습니까? 당회장 했습니까? 그런 거 없어요. 그런 건 아예 관심도 없어요. 오직 아기예수만! 시므온이라는 그 선지자가 오직 누구만 보고 기뻐했습니까? 아기예수! 안나라는 그 과부된 지 84년 된 선지자가 누굴 봤습니까? 아기예수!

인자가 모든 것이 바벨론에 점령당한 상태거든요. 그러니 뱀의 속한, 밤중처럼,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 아직도 어두운 밤처럼 깜깜한 이 바벨론 세계에 있음으로써 지금도 예수님은 보석처럼 빛납니다. 돈도 없어, 가진 것도 없어,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을 때 가장 믿음이 돈독하죠. 20억 나눠드리고 50억 나눠드리고, ‘이제 돈 받았으니까 예수 섬깁시다.’ 하면 예수 이야기하면서 돈 세고…ㅎ

그러니까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성도에게는 가장 예수 믿기에 적합한 상황을 아까 배정했다 했죠? 가장 적합한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때로는 돈도 안 주고 때로는 딸도 시집가게 만드시고 때로는 아프게도 하시고 때로는 교인도 사라지게 만들고 때로는 진짜 부끄러운 짓도 하게 만들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좁을 길로 가기 적당한 거예요. 우리는 그게 싫거든요. 좀 더 잘 믿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면 좋겠는데 근거 없이 아기예수만 쳐다본다면.
그래서 여기서 제가 한 마디 하겠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십자가)이 보일만한 상황은 우리가 만들어 내지를 못합니다. 이 말은 뭐냐 우리는 매일같이 내가 만들지 않는 상황 속에서 매일 성도입니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성도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상황을 그리워한다면 그건 성도 아니고 현재 이 상황이 주께서 적합한 상황이라고 인정하신다면 성도입니다.

자, 예수님이 중보자라 했죠? 진도 나갑시다.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 전에 다니엘이 중보자가 돼요. 그리고 예수님 오시기 전에 바벨론에 포로 잡힌 그들이 중보자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중보자가 왜 이리 많습니까?’ 하는데 숫자 따지지 마시고 동일한 동질의 상황이 있으면 숫자가 많더라도 그건 같은 중보자의 성질을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데 너희가 미워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미워서 너희들을 미워한다. 이것으로 너희들이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러니까 제자들 숫자가 몇 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제자가 전부 다 하나의 동질이다. 그래서 성경 요한복음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너희와 나는 뭐가 된다? 하나가 된다. 하나! 숫자로 치면 1이 돼요. 전에 강의 했어요. 1이라는 숫자. 1은 쪼갤 수도 없고 나눌 수도 없어요. 그냥 1일 뿐 이예요. 이 1이 1이레라는 표시로 연결됩니다. 70이레 중에서 1이레로.

그 다음에 243 페이지 중간에 봅시다.『시간이란 몸을 따라붙는…』그 다음에 뭐죠? 『그림자 같아서』라고 돼 있죠. 그림자 색깔이 어떻습니까? 어둡죠. 그래서 누가 이야기했더라? 셸링이란 철학자가 이런 이야기 했어요. 뭐라 했느냐 하면 ‘어둠 속에는 모든 소가 다 검다.‘ 고 이야기했습니다. 젖소든지 누렁 소든지 관계없이 다 검다. 이건 뭐냐 하면 보편적이 것이 우선이다. 이런 말이거든요.

개별성과 보편성 나눠서 생각해 봅시다. 개별성은 하나의 개체, 하나, 하나는 개성이 있어서 하나, 하나는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게 돼 있어서 다 달라요. 다 다른데 사람이 이렇게 다섯 명이 있다면 사람이 다섯 명이죠.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전부 다 사람이죠. 그래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사람은 다섯 명의 사람은 있지만 사람은 하나밖에 없죠. 사람 있고 소 있고 멧돼지 있고 그렇지 않죠? 오! 여기는 사람뿐이네. 이러면 사람은 하나죠. 그걸 숫자로 나눈다면 다섯 명이나 있죠. 그걸 구분을 지어줘야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를 원합니까? 다섯을 원합니까? 이 땅에서는 다섯이라는 숫자를 좋아하죠. 왜냐 하면 나부터 출발하니까 개체로부터 출발하니까 우리는 개체에서 보편으로 나가려고 하고, 하나님은 보편으로 해서 보편으로 귀환하려고 하는 거예요. 복귀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이 몇 명이죠? 한 명이죠. 예수님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붙어있는 사람은 한명이 아니고 여러 명이죠. 그 여러 명을 예수님은 여러 명이라 하지 않고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숫자로 할 때는 12로 해요. 12는 어디로 복귀되느냐 하면 하나로 복귀됩니다. 12가 12로 계속 가시게 되면 이게 뭐냐 요한계시록에 144.000이 돼요. 이스라엘의 언약의 숫자라 할 수 있는데, 어쨌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더불어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하나 있을 때는 좋았어요. 이스라엘이 남한테 안 졌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임을 포기하고 각각 하나라고 여길 때, 이게 숫자를 셀 때, 숫자 셀 때 마귀 시험 들었죠. 다윗처럼. 숫자를 세 버리면 이것은 바로 개개인으로 숫자를 세는 다른 이방민족과 보편화가 돼 버렸어요.

하나님 나라와 동질화 돼 버려야 되는데 가나안 땅에 있는 이방민족과 동질화 됐기 때문에 다른 민족 화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으로부터 침공을 받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언제 협박을 느낍니까? 협박을 당할 수도 있고 협박을 예상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예상해 봅시다. 우리가 언제 협박을 받을 것을 예상합니까? 협박이란 말이 어려우면 언제 두렵습니까? 어떤 게 두려워요? 요새 이런 일이 생기면 참 두렵겠다. 갑자기 아내가 돌아가신다든지, 갑자기 자식이 차사고 나면 겁나죠. 협박입니다. 마귀로부터 협박 이예요.

그러니 협박 받는다. 사랑 안에는 뭐가 없다 했습니까?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했는데 우리는 아예 두려운 상황을 계속 내가 만들어내고 있어요. ‘하나님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이러면 나는 못 살아요. 정말 이거만큼은 피해주세요.’ 우리나라 유명한 가수 임 재범이란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이 불렀던 ‘고해’라는 노래 가사에 보면 ‘이 여자만 허락해 주소서.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딴 거는 바라지 않고 이 여자만 주시면 모든 걸 감당하겠습니다.’하고 나오죠. ‘이 여자만 주시면’ 이 자체가 뭐냐 하면 마귀로부터 협박과 공갈과 두려움을 아예 자기가 불러일으킨 셈이 돼요. ‘제발 이것만큼은’

그러면 기도의 응답이란 딴 게 아니고 그 협박의 주체를 없애주는 게 기도의 응답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걸 응답해주는 그건 마귀가 오라 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귀신 1, 귀신 2, 귀신 3 앉고 아예 귀신하고 같이, 그런 원리의 응답을 기대하세요.

진짜 기도 응답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뭔가 무섭게 된다는 것을 간파하시고 그 무서움 자체가 어디서 나왔는가를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모든 되어 진 상황이 우리가 미리 미래로부터 주님한테 배정받은 상황이지, 내가 다룰 상황이 아니고 다루어도 주님이 다룰 상황이거든요. 예수님만 바라보기 위해서 적합한 상황이라 말이죠.

구약에서 기도하는 순간이 어떤 순간이었습니까?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기도했죠. 구약에 보면 많은 기도 나오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군한테 포위될 때 기도하고 했잖아요. 다윗도 기도했잖아요. 기도 응답이 뭐였던가요? 바로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잊어버린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기 위한 그것이 응답 이예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 안 하고는 못 배기도록 답답한 마음을 주시는데, 한국교회는 그걸 컬컬한 마음, 컬컬하고 답답한 마음을 주시는데 컬컬하고 답답할 때는 코카콜라나 사이다 마시면 끝나요.

그런데 주께서 주시는 응답은 회개하게 하는 거예요. 도대체 그동안 컬컬했고 답답했던 원인이 주님한테 있었던 게 아니고 문제 꺼리가, 문제아가 누굽니까? 기도하는 내가 그동안 욕심내다가 마귀한테 협박 공갈 받아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이 동일한 편지를 일곱 군데 보내지 않으면 너는 저주 받는다.‘ 하는 이런 거. 죽음의 편지. 행운의 편지 이런 것처럼.

항상 아침에 눈만 뜨면 우리는 벌벌 떨고 있어요. 오늘도 치과에 손님 안 오면 월급도 깎이고… 벌벌 떨잖아요. 그게 기도에요. 우리는 떨면서 기도하고 있어요. 다섯 시까지 오라 했는데 오자마자 차 떠나버리고, 주께서 편하게 응답하십니다. ‘그래, 네가 그런 기도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는 이유도 모르죠. 그냥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다 너 살자고 하는 짓이야.‘ ’알았습니다.‘ ’죽어라. 네가 안 죽으니까 내가(주님) 살았다 하는 것이 안 느껴지거든요. 느낌 알죠?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우리가 못 느끼는 이유가 내가 살아있어도 행복하고자 두려움 갖고 벌벌 떨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그게 매개에요. 매개! 매개라는 말은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처참하게 꼴아 박고 망가지게 만들어요. 그걸 제가 뭐라 했느냐, 설교 시간에 뭘 쳤다? 바닥을 쳤다. 한 거예요. 바닥을 쳐야 돼요. 주식 시장 객장의 아저씨들이 앉아서 ‘아마 오늘은 바닥을 쳤을 거야. 이제 무조건 사기만 하면 돼’ 하잖아요. 그 바닥 치는 거. 우리는 늘 바닥 쳐야 돼요. 그 밑바닥, 십자가 죽는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바닥을 칠 그때 예수님이 보내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그런 것을 시간은 우리의 그림자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감추고 싶은데 시커멓게 나오는 그림자, 그림자의 색깔은 그냥 뭘 해도 시커먼 거예요. 시간이란 우리 몸에 붙어있는 귀신같은 거, 이게 시간 이예요.

그래서 뒤에 보면 『시간은 몸을 따라붙는 그림자 같아서』다른 말로 하면 귀신같은데, 악마 같은데, 『몸의 속성에 따라 그 시간적 속성을 드러낸다. 몸이 없는 곳에는 시간도 없고, 시간이란 오직 몸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시간이란 몸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시간이란 내용은 우리가 어떤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가고 어떤 때는 빠르게 가죠.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나의 욕망과 욕심을 그대로 그림자로 표현한 거예요. 빠르게 가면 오늘 신나는 일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늦게 가는 것은 올 사람이 안 와서 초조해서 그런 겁니다. 이것은 뭐냐 내가 기대하고 고대하는 게 따로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겁니다.

이것은 곧 시간이 길어지면 그걸 뭐라 하죠? 역사라고 하죠. 주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어두운 긴 그림자, 역사를 만들어 내서 역사가 있는 곳에 아까 뭐라 했습니까? 뱀의 후손은 뭐가 등장한다? 여자의 후손, 이 역사가 있는 곳에 여기 예수님이 나타나죠. 예수님의 묵시가 나타나죠.

인간은 역사에 충실하면 할수록 덩달아서 묵시도 충실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드디어 충돌이 일어납니다. 내 뜻과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같이 나와서 꽝! 하는 그 충돌의 현장에서 우리는 뭘 만나는가? 하나님의 언약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이 한 구절 찾아서 설명하고 잠시 쉽시다. 시편 50편 5절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뭐로 언약했다 했습니까? 제사! 제사는 뭐에요? 죽음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을 받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그림자 같은데 받으면 뭐합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뭐냐? 제사에 우리가 합류하는 거죠. 우리의 죽음을 받는 거예요. 우리의 죽으심을 받으시는 하나님도 이 죽음에 같이 죽었어요. 하나님도 죽고 우리도 죽고 완전히 전주비빔밥 이예요. 둘의 죽음이 하나로 춤을 출 때 군무가 될 때 나의 죽음과 주의 죽음이 함께 있을 때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이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는 십자가 사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그걸 받아요. 하나님께서 진짜 받는 건.

가인은 뭘 드렸습니까? 자기의 농사한 걸 드렸잖아요. 안 받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뭘 받았습니까? 아벨의 제사를 받으면서 아벨의 제사 받는 것은 하나의 소극적인 결과였고 원인은 뭐냐 하면 그 뒤에 아벨이 가인에게 맞아죽죠. 맞아죽는 그것이 하나의 원인으로서의 결과가 제사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제사 받을 때 이미 아벨은 죽어야 됐어요. 우리 보기에는 순서가 과거, 현재, 미래기 때문에 아벨은 제사 드리고 죽고, 가 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미래, 현재, 과거기 때문에 이미 아벨은 죽으라고 태어난 아들, 그래서 아벨 이름이 뭐죠? 허무에요. 허무하게 살다가 허무하게 죽는 거예요. 그런데 그 허무라는 그 똥 안에서 다이아가 나온 거예요. 이게 진짜 하나님 이예요. 그래서 나를 보지 않고서는 아버지는 없다. 진짜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죽음에 같이 죽음으로 합류될 때만 비로소 거기 아버지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인간의 하나님은 우상 이예요. 모든 인간의 신은 우상 이예요. 왜, 자기가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자기는 시간에 둘둘 감겨있어요. 지금 낼 할 일이 많아서 미리 생각해요. 아침에 눈만 뜨면 손님 몇 명 와야 되고… 우리는 시간의 그림자를 둘둘 감고 다녀요. 나의 역사, 모든 나의 관심사는 나의 역사와 나의 세월과 내 몸에서 나온 카펫, 이것밖에 없어요. 이것과 주님의 예정된 시간과 충돌될 때, 내 뜻대로 안 될 때, 그래서 탄식하면서 기도할 때 그 응답으로써 주님께서는 ‘뭐, 뭐, 뭔데? 뭐 고민거리 있어?’라는 여유만만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모든 것이 아니요. 가 아니라 돼 가는 모든 것이 우리가 배정받은 Yes, 가 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 보시기에 멋진 건데 우리는 자기 신세보고 ‘머리는 왜 이리 시어지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매사가 우리 모든 것에 대한 불만 덩어리, 매사가 불만 덩어리에요. 그래서 우리는 매개자인 예수님 이름 아니면 우리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가락-70이레 논문(시간의 층)131128-30강b -이 근호 목사

243 페이지 제일 밑 끝에 『하나님께서는 ‘이레’라는 창조를 다루는 묵시적 해석 단위에 준해서 짐승과 짐승, 뿔과 뿔의 등장의 예와 같이 불연속적 경계면을 묵시적 스케줄에 맞게 조성해 나감으로서, 유비적으로 대자연의 영속성을, 내부적으로 유지시켜 왔음을 보이신다.』지금 여기 이 문장에 있어서 용어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온 용어가 『불연속적 경계면』‘불연속적 경계면’ 나오고 그 밑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대자연의 영속성’ 나왔죠? 이것이 어떻게 같이 결합이 안 되는 단어인데 결합이 되느냐 하면 첫 번째 짐승이 바벨론이고 두 번째 짐승이 뭡니까? 바사나라죠. 메대 바사, 페르샤죠. 첫 번째 바벨론, 두 번째 바사, 세 번째 헬라, 또는 헬라 마케도니아, 네 번째가 로마거든요.

이 자체가 의미가 네 마리 짐승이거든요. 짐승! 짐승과 짐승 사이에 어떻게 곱게 정권을 이양해 줍니까? 전쟁이 일어납니까? 전쟁이 일어나죠. 그러니까 이건 뭡니까? 불연속적인 경계면이거든요. 이 불연속적인 경계면에 동원되기 위해서는 이들이 뭐가 돼야 되느냐 하면 짐승이 돼야 돼요. 짐승과 짐승, 뿔과 뿔 사이에 불연속적인 경계면이 되려면 여기에 동원되는 시간 개념이 뭐냐 하면 ‘이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레를 여기서 집어넣는 순간 이들은 똑같은 짐승의 나열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속성을 갖추고 내부적으로 있다 말이죠. 그래야 돼요. 설명하니까 이걸 알겠는데 이걸 다 쓰려고 하면 페이지가 몇 페이지 돼야 돼요? 이걸 달리 축약해 보세요.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본인이 한 문장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짐승과 짐승, 뿔과 뿔의 등장』이렇게 보시고 다시 봅시다.『‘이레’라는 창조를 다루는 묵시적 해석 단위에 준해서 짐승과 짐승, 뿔과 뿔의 등장의 예와 같이 불연속적 경계면을 묵시적 스케줄에 맞게 조성해 나감으로서』이것이 역사로서는 연결돼 있지만 묵시로서는 다 끊어지게 된 것은 바로 이레 자체가 7이레, 62이레, 1이레로 끊어진 걸로 이것을 유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현재 박 근혜 대통령 이전 대통령이 누굽니까? 이 명박, 박 근혜, 분명히 역사적으로는 분명히 연결됐잖아요. 구데타 일으키고 전쟁 일으킨 게 아니고 연결돼 있죠.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뭐든지 연결되면 안 돼요. 왜냐 하면 역사와 묵시 세계 자체가 불연속적으로 돼 있기 때문에 불연속적으로 천국하고 지상은 연결이 안 되잖아요. 지상에서 천국으로 올라올 수가 없죠. 끊어져 있으니까. 요 끊어져 있는 것을 바로 세워봅시다. 바로 세워버리면 짐승과 짐승 사이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묵시를 집어넣으면 이건 단절되고 끊어져야 된다 말이죠.

이 사이, 사이 바벨론과 바사, 헬라마케도니아, 로마, 요 끊어진 요 사이에 누가 관여해서 끊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레, 시간 스케줄을 조절하시는 우리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이제 이해되시죠? 70이레가.

그럼 70이레가 7 + 62 + 1 , 로 끊어졌잖아요. 두 개의 관절로 끊어졌어요. 이 끊어진 이 위에 누가 관여합니까? 묵시적인 의미가 여기서 개입을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만약에 시간적으로, 시간에 어느 역사가 일어났고, 이렇게 해버리면 이거는 묵시적 표현이 될까요? 안 될까요? 되지 않기 때문에 237 페이지 셋째 줄에 『칼빈은 처음 7이레를 49년으로 여겨서 고레스의 칙령에서부터 다리오 6년까지로 보았다.』이렇게 돼 있죠. 이게 틀렸다 이 말입니다. 이 유명한 칼빈의 해석이 나는 틀렸다고 본 거예요. 왜, 묵시적 절단을 이야기 안 하고 역사로서 표현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잘못됐다 이 말입니다.

이뿐만 아니에요. 유명한 사람들 다 틀린 거죠. 역사적으로 어떤 시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 틀린 거예요. 그러면 이걸 역사적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되느냐, 묵시적으로 설명해야 된다. 묵시적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되느냐, 묵시적으로 설명하기 이전에 그 7이레 단위부터 원역사로, 원창조로 가야 된다 했어요. 여기 어디 나오느냐 하면 243 페이지 밑에서 11번 째 줄에 『그런데 그 시간은 날(日)이나 년(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레에 따른다.』날이나 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레에 따르죠. 70이레를 490년이라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된다니까요. 490년하고 70이레는 달라요. 490년 돼 버리면 이미 차원이 역사적 차원이 돼 버리고 70이레는 그대로 살려놔야 돼요.

70이레를 490년으로 바꾸어서 기존의 역사에 따라서 이렇게 사건을 찾아내려 하니까 틀려버린 거예요. 그거는 인간에게 달라붙은 그림자 같은 몸에 붙어있는 귀신  같은 시간적인 관념에 불과한 겁니다. 신약에 보면 베드로후서 3장에 천년이 뭐 같다 했습니까?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것을 그 사람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설명이 안 되잖아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그러면 예수님 재림하신 지 이틀 됐네. 천년이 하루 같으니까.

그런 식으로 번역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이미 짐승에게 소속됐기 때문에 그 70이레를 이해하려면 ‘내가 바로 짐승에게 소속된 짐승의 몸입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게 그게 우선 이예요. 먼저 그것부터 나와야 돼요. ‘짐승이기 때문에,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기껏 70이레를 490년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그런 되지도 않는 해석을 해왔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해야죠.

그러니까 이 논문은 결국은 회개하라는 거예요. 그동안 70이레를 어떻게 해석했던 당신들 회개하라 이 말입니다. 그게 짐승의 짓인 것을 알아라, 이 말입니다. ‘모르겠다.’하는데 모르겠다, 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바로 마귀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라 이 말이죠.

그래서 거기 보면 밑에서 열한 번째 줄에 『날(日)이나 년(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레에 따른다.』그렇다면 천지창조 몇 일만에 창조했습니까? 7일 만에 창조할 때 7이라는 것도 묵시적 개념의 일이 되겠죠. 왜냐 하면 제일 마지막 일이 뭐냐 하면 안식일이 돼요. 안식일이 될 때 안식일이 어디서 어디까지냐? 라고 물을 때 두 가지 답변이 있어요.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가 안식일이다. 그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이고, 그게 답변 하나일 수 있고, 또 안식일은 어디서 어디까지 입니까? 천지창조로부터 예수님까지입니다. 이게 안식일의 묵시적 해석이 되겠죠. 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니까.

그러면 그전에 천지창조부터 예수님 사이는 안식일이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카펫의 역할이죠. 그러면 유대인들이 지키는 7일만 지켰던 것은 카펫에 깔린 수놓은 무늬가 되는 거예요. 무늬의 특징은 납작하죠. 깊이가 없어요. 이스라엘도 납작하고 꼭 빈대떡 같아요. 전 부침 같이 납작해요. 납작한 이것이 종이로 만들 때 종이를 오려서 세워보면 이렇게 되는 거 봤죠? 이렇게 드러나니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이렇게 붙어있는 걸로 밑바닥에 카펫이 예수그리스도와 관계된 카펫인 줄 모르고 자기는 독자적으로 뭔가 이스라엘 역사를 자기가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디를 겨냥합니까? 그들의 바닥을 겨냥하죠. 이 바닥은 천지창조부터 예수님까지 연결돼 있죠. 그걸 243 페이지 밑에서 여덟 번째 줄에『원 창조』라 해요. 원 창조, 원래 창조했던 원 창조에 대해서 묵시적 시간개념을 가지고 전체를 다 해석한 것이 70이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바닥에도 뭐가 있습니까? 원 창조가 있겠죠. 그러면 창세기는 지나갔어요? 안 지나갔어요? 아직도 우리바닥에 창세기 있죠. 창세기를 우리가 세척을 안 하고, 창세기를 우리 시간적 개념으로 보면 창세기는 옛날이야기 돼 버려요. 그러면 선악과도 옛날이야기 돼 버려요. 그러면 선악과 따먹은 그 당사자, 아담과 하와만 범죄인 되고, 우리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어요.

지금 집사님이 떡을 잡쉈는데 집에 있는 자녀가 배부르다 하면 말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말이 안 되죠. 말이 안 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보고. 주님께서는 그게 옳다는 거예요. 당신이 떡을 먹으면 집에 있는 자녀가 같이 배부르게 돼 있다는 겁니다.

자, 예를 들게요. 왕의 신하가 예수님한테 아들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한테 낫게 해달라고 왔잖아요. 요한복음 4장에 왕의 신하가 가버나움에 있는 아들이 죽어간다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누구보고 이야기를 했습니까? 이 시점에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했잖아요. 분명히 아버지보고 했는데 나중에 집에 가보니까 ’나았다.’ 할 그때 이미 아들이 나아버렸어요.

그러면 예수님한테는 인간적인 시간 개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죠. 십자가라는 것은 그래서 반복이 가능한 거예요. 십자가는 묵시적 사건이기 때문에 아무리 앞으로 5천 년, 6천 년이 지나도 십자가만으로 구원받습니다. 이것은 미래뿐만 아니고 과거에 소급해서 아담도 십자가 때문에, 엘리야도 십자가 때문에, 그래서 엘리야하고 모세가 주님이 십자가 죽기 전에 변화 산에 계실 때 같이 이야기했잖아요. ‘주님 언제 별세하십니까?’ 그 이야기했다고요.

그러니 예수님 안에서 원 창조가 본래의 의미를 발산하게 돼 있어요. 그것을 인간들은 모르죠. 모르니까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완성 지으려 왔는데.

그래서 이레라는 것은 이레 안에 이미 천지 창조의 완료성이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234 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이 완료성을 적용시켜 나가는 내용이다. 인간이 죄 지었다고 이 완료성이…』무효화 돼요? 무효가 안 돼요? 무효가 안 됩니다. 인간이 죄 지었다고 ‘아! 일 못하겠네. 나 안할래.’ 이런 일 없다 이 말이죠. 오히려 인간이 죄 지어야 되죠. 그래야 이미 있는 완성이, 완성되죠. 인간이 죄 진다고 이레가, 이레의 계획이 파괴되거나 취소되거나 이런 게 없습니다.

그 다음에 244 페이지 밑에서 아홉 번째 줄에 봅시다.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이 대자연의 구조가 완료적인 것이라서 보완이 필요 없다. 문제는 ‘이레’라는 특별한 창조단위를 왜 다니엘이라는 실존에게 적용했느냐 하는 점이다.』왜 그럼 이 이레라는 이것을 왜 아브라함한테 먼저 이야기 안 해주고 모세한테 왜 이레라고 이야기 안 했죠? 모세한테는 자꾸 ‘안식일 지켜라,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은 죽여라.’ 하고 그때는 안식일이 이레라는 소리를 안 하고 ‘안식일도 원래 이레에 속해.’ 이렇게 언질을 주지 않고 그냥 어떤 특정 날을 지켜라, 했는데 다니엘에 와서 왜 70이레를 이제 와서 다니엘에게 했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아까 했잖아요.

인자가 어디에 구체화 된다 했습니까? 뭐가 있을 때? 백성들이 뭐 됐을 때? 포로 잡혀 있을 때, 다니엘이 어떤 경우입니까? 백성들이 포로 잡혀 있을 경우에. 포로 잡혀 있으니까 땅도 없고 임금도 없고 선지자도 없고, 포로 잡혀 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짐승의 나라에 사로잡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나라가 짐승의 나라라고 등장하게 된 것도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지배했기 때문에 그렇죠. 본래 그것도 밝혀지지 않을 내용이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짝이라 하는 것은 뭡니까? 여자의 후손 등장하면 그 안에 뭐가 있고? 뱀의 후손 나오고, 뱀의 후손 등장했다 하면 그 안에 뭐가 있고? 여자의 후손 나오고, 이미 바벨론을 짐승의 나라라고 했다는 말은 이제는 여기는 이스라엘은 사라져도 누구는 살아있으면 돼요? 인자만 살아있으면 이스라엘은 다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있는 그 장소가 짐승이 짐승 됨을 충분하게 그 속성을 발휘돼야 돼요.

짐승과 인자의 나라에 단절이 있어요. 단절성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70이레라는 묵시적 시간개념이 여기에 들어갑니다. 이 이레라 하는 것은 일종의 칼, 자르는 칼 ‘에이, 너하고 나하고는 이제 남이야.’ 하고 자르는 칼, 성전을 짓는 게 7이레, 성전 짓는 거하고 잘라버려요. 그 다음에 성전은 깨져요. 지었던 성전 다 깨집니다. 성전 지었던 것도 날라 가 버리고 깨어진 것도 날라 가고 이제는 성전은 일종의 폼이었고 아까 여기 종이 공작처럼, 여기에 진짜 등장하는 나라와 정작 등장하는 성전은 이제 1이레에서 마무리 집니다. 진짜 성전은 누구십니까? 예수님, 진짜 백성은 누굽니까? 예수님에 속한 인자의 나라의 백성. 그러니까 인자의 나라라 하는 것은 기존의 짐승의 나라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짐승의 나라라 하는 자체가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역사적으로 봐서, 인간적으로 봐서. 없죠. 대한민국, 필리핀, 중화인민 공화국, 북조선 인민 공화국, 이런 게 있지만 자진해서 짐승의 나라? 그런 건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없다는 게  그게 반칙이라는 게 하나님의 뜻이다 이 말이죠. ‘어디서 짐승의 나라 아닌 척들 하고 있어?’ 월드컵에 196개국 참여하거든요. 자기는 196개국 나라인데 주님 보시기는 다 무슨 나라입니까? 짐승의 나라에서 벌리는 월드컵 이예요. 올림픽도 마찬가지고, 짐승의 올림픽 이예요. 완전히 동물의 왕국이죠. 그래서 금메달 딴 사람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짐승 운동회에서 금메달 딴 거예요. 금메달 땄다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면 어떻게 돼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주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 때 그게 영광 이예요. 아까 시편 50편의 말씀처럼 제사로 말미암은 언약, 나의 죽음이 현실, 실제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영광입니다. 누구든지 살려고 하면 영광이 아니에요. 살려고 하면 협박 받아요. ‘이래서 밥 빌어먹고 살겠니?’ 보이스 피싱이 이게 다 살려고 하는 거예요.

이야기 좀 더 해봅시다. 정리해 봅시다. 이레라는 거, 짐승의 나라가 먼저 있어줘야 되고 이 세상 어떤 나라도 자진해서 자기가 짐승의 나라가 되겠다, 하는 나라가 아무도 없죠. 아무도 없는 이유는 그들은 그림자 같은 시간개념에 둘둘 휘말려서 그런 거예요. 시간이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역사가 있다는 말이고 역사가 있다는 말은 계획이 있다는 말이고, 계획이 있다는 말은 그들의 자기들 종교가 되고 그들의 낙이 돼요. 사람이 낙이 없이는 못 살잖아요. 지금은 고생고생해도 희망이 있다면 고생을 견딜 수 있습니다. 군대가 힘들지만 제대할 날이 있으니까 살아갑니다. 말뚝 박은 사람은 뭐예요? 승진할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말뚝 박는 거죠. 군에 장기 복무하는 것도.

자, 이레라는 것은 모든 것을 짐승으로 만들고, 그리고 그 가운데서 인자가 나오게 만드는 그러한 묵시적 시간 단위가 이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됐죠. 이레 앞에서는 모든 게 짐승입니다. 원 창조를 가야 거기 창조주 되신 주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44 페이지 제일 밑에 봅시다. 『다니엘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본향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상에 있는 본향은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예요. 이레 차원이 본향입니다. 자기가 만약에 돌아간다면 옛날 이레에서 벗어나서 어디로 갑니까? 시간이 적용되는 기존의 역사가 적용되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셈이 되기 때문에 돌아갈 필요가 없죠. 70년이라는 개념이 70년을 잊어버리고 이제는 뭘 기다립니까? 70이레를 기다리죠. 70년을 버리고 70이레 기다리는 겁니다.

70년이라 하는 것은 자기 몸 위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그건 끔찍해요. 그건 짐승에게 속한 그런 인생이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마음이 괴롭고 진짜 컬컬하고 답답할 때는 주님의 몸에서 다시 세상 몸으로 바뀌게 되면 우리는 답답하고 컬컬합니다. ‘이래 가지고 네가 밥 빌어먹고 살겠니? 밥 먹기 싫으니?’ 이러잖아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돼 있죠. 특히 마태복음 11장 그 대목은 좋은 대목이 있잖아요. “ 이 모든 비밀을 똑똑하고 지혜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시니 감사합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어린아이가 구원받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 소급해서 어린아이가 된 사람들이 어른이라 할지라도 아버지로 말미암아 됐다는 걸 믿는 사람만이 주님 보시기에 귀여운 어린아이가 되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구원받으면 그 사람이 곧 어린아이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뜻을 모르는 사람은 소위 지적 받는 똑똑한 지혜로운 자들이 자칭 그런 자들이 되는 거죠.

자, 245 페이지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이거 해보려고 그동안 수십 시간 했습니다. 『70이레는 두 개의 관절을 가진다.』관절이 있죠. 인간의 몸의 핏줄이라 하는 것은 소시지 고리처럼 이렇게 돼 있어요. 근육 덩어리하고 줄로 연결돼서 이 줄 잡아당기면 이쪽에서 다 잡아당기죠. 그래서 팔 여기가 안 좋다 싶으면 경락으로 여기를 누르면 다 같이 당겨져서 시원하답니다. 관절을 갖고 있는 거예요. 관절을 갖고 있다는 것은 열차에 객차와 객차를 이어주는 이음새처럼 그렇게 이레로 연결돼 있어요.

70이레는 7이레, 62이레, 1이레로 돼 있죠. 그러면 7 빼버리고 62 빼버리고 1 빼버리면 남는 게 뭡니까? 이레만 남죠. 이레가 중요한 거예요. 묵시적 시간 단위가 중요한 거예요. 이레만 남는 거예요.

도마에 노란 단무지를 세 토막 낸다고 보세요. 탁! 탁! 또는 고등어를 탁 탁 잘라서 머리 떼 내고 꼬리 떼 낼 때 몸통 남듯이 세 등분하잖아요. 주께서 이렇게 세 등분 나누신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걸 볼 때 두 가지만 생각하면 돼요. 하나는 이레를 생각해야 되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해서 두 개의 관절을, 두 개의 토막을 세 토막으로 나누기 위해서 두 개의 끊어짐이 있었는가? 왜 이게 끊어져야 되는가? 끊어짐에 대해서 이해하면 70이레는 깔끔하게 이해된 거죠.

논리적으로 따지면 굉장히 힘드니까 그때는 먼저 결론부터 이야기하게 되면 앞으로 논리가 쉽게 될 겁니다.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역사적인 시간개념을 이야기할 때는 역사적인 시간개념을 사용해서 했습니다. 그래서 7 + 62 + 1 해서 토막을 이렇게 낸 건데 이걸 다시 묵시로 원역사로, 원창조로 되돌려 보면 이렇게 돼요. 창세기부터 마지막 요한계시록까지 여기가 7이레고 그 다음에 중간에 까지 62이레가 되고 그리고 끝에 있는 게 1이레가 돼요.

그러면 이것이 마치 시루떡처럼, 케이크처럼 7이레 층, 62이레 층, 1이레 층, 이게 나란히 같이 가게 돼 있습니다. 이 전체가 70이레라고 보시면 돼요. 그것은 이레라는 단어 자체가 역사적인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 단위로 들어오게 되면 어디를 쑤셔도 전부 이레가 돼요. 1962년을 쑤셔도 이레가 되고, 1945년을 쑤셔도 이레가 되고, 집사님 태어날 그때도 이레 속에서 태어나고, 이레 속에서 살다가 돌아가실 때도 이레 속에서 돌아가시는 겁니다. 다니엘은 이걸 안 거예요. 그전까지는 몰랐었는데 이레를 몰랐을 때는 ‘아이고, 우리가 70년만 지나면 가는데.’ 자꾸 시간의 차원에서만 몰랐었는데 이것이 이레로 바뀌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시간의 차원 같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 돌아가기 위해서 저 적들 바벨론 나라를 쳐부숴야 되는데’ 했는데 이레가 오니까 바벨론 나라는 이거는 쳐부수는 게 아니고 계속 연속 이어져야 돼요. 바벨론 이름의 바벨론, 바사 나라 이름의 바벨론, 헬라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의 바벨론, 그리고 로마라는 이름의 바벨론, 그리고 러시아 이름의 바벨론, 대한민국 이름이라는 바벨론, 북조선 인민공화국 이름의 바벨론, 요한계시록에서는 서울이라는 이름의 바벨론, 대구라는 이름의 바벨론, 이레가 모든 데를 쑤셔도 이레가 되는 것처럼, 이제는 모든 데 쑤셔도 바벨론이 되는 거예요. 짐승 판! 모든 짐승의 개판. 어느 교회를 들어가도 바벨론, 우리교회 들어가도 바벨론, 우리 집구석도 바벨론.

질문: 이레라는 게 묵시적인 시간 표현이 아닙니까?
그렇죠. 시간 표현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시간적인 표현이 속성, 뱀에 속했다는 속성을 드러내는 여자의 후손에 속한 시간 개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짝이 돼서 항상 같이 등장하니까, 이레가 따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이레가 쑤실 수 있는 부정할 수 있는 역사적인 밑바탕을 깔아야 되거든요.

그래서 이레라 하는 것은 이렇게 역사적 바탕 위에 깔아보면 이렇게 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 말이죠. 63번째도 마찬가지, 45번째도 마찬가지, 하지만 끊는 것이 7 + 62 + 1 이렇게 세 층으로 언급한 겁니다.

질문: 왜 62 + 7 + 1 로 안 하고 7 + 62 + 1로 합니까?
그거는 요 끊어짐, 7과 1을 드러내기 위해서, 끊어지기 위해서 나머지 부분이 62이기 때문에, 62는 의미가 없어요. 끊어진다는 게 의미 있기 때문에 이렇게 끊고 이렇게 끊어 보니까 나머지가 62이레라. 62에 의미 있는 게 아니고. 그럴 때 제가 그래서 설명하는 거예요.

그래서 7로부터 62로 해서 1로 간다면 7이라 하는 것은 우리 역사 같으면 7이 있으면 7이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1에서, 7이 아니고 원 역사, 묵시에서 일으킨 사건이 있어요. 이 사건이 뭐냐? 성전 짓기, 2층에는 뭐냐, 성전 깨어지기, 1이레는 뭐냐, 메시야 오시기, 고 사건은 묵시적 사건 이예요.

역사의 시간은 묵시적 사건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없어요. 이 대목이 어렵기 때문에
우선 결론부터 먼저 빨리 드리고 천천히 반복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설명을 드리면 묵시라 하는 것은 창세부터 전체를 다 내려다 봐요. 예를 들어 지도 같은 경우에 지금 대전에서 차타고 열나게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은 평평한 2차원 지평을 달리지만 지도 보고 있는 사람은 다 보고 있어요. 대전에서 서울까지 다 본다고요. 전체를 보는 거예요. 그걸 원창조라 했죠? 전체를 보는 거예요.

전체를 다 보게 되면 천지창조부터 전체를 본다는 말은 만들어진 피조물이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만드신 분이 다 보는 거예요. 알파요 오메가 되신 예수님이 전체를 다 보고 있다는 거죠. 전체를 다 보고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건을 일으켜요.

두 가지 사건이 뭐냐, 성전을 짓는 사건과 성전이 깨지는 사건과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는 사건,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는 사건도 반으로 나눠요. 오셔서 죽는 사건,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두 조각이 나눠지거든요.

그렇다면 주께서 오시는 이 사건을 이루기 위해서 뭔가 밑바탕이 준비돼야 되는데 밑바탕 준비해주는 그것이 바로 역사에 속한 사람들이 준비합니다. 누구냐? 그게 바벨론! 짐승에 속한 사람. 바벨론 나라가 짐승이라 했죠. 그러면 바벨론 왕하고 그 신하들은 생김새가 원숭이 같겠어요? 아니면 멧돼지 같겠어요? 우리하고 똑같아요. 얼굴 생김새보고 너는 짐승이니, 아니다, 구분을 못합니다.

인자에 속한 백성은 천사고 그 외는 다 짐승이거든요. 인자에 속한 사람과 짐승에 속한 사람하고 생김새 차이가 어떻습니까? 쌍꺼풀 있고 없고 그 차이 아니죠. 차이가 안 나죠. 그 차이 안 나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마에 도장을 박아요. 이마에 도장은 성도에게는 이마에 도장이 있다는데 하나님의 인이 있다는데 백날 들여다봐도 도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하나님의 성도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은 도장이 안 보인다면 짐승에 속한 사람의 짐승의 도장이 보이겠어요? 안 보이겠어요? 역시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666해서 보인다는 겁니다.

그 인이 뭐냐, 성령을 말해요. 성령! 고린도후서 1장 22절,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 성령 받은 사람은 겉모습이 똑같아요. 왜냐 하면 다 육(흙)에 속했기 때문에 모습 가지고 분간이 안 됩니다.
차이는 어디서 차이가 나는가?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 나는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 짐승에 속한 사람 이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나오는 사람 이예요.

그래서 앉은뱅이가 병 낫고 안 낫고는 아무 상관없어요. 병 낫든 안 낫든 간에 성도면 성도지, 똑 병이 나아야 성도가 아니에요. 가난하다 부자 됐다고 해서 성도 되는 게 아니고 또 부자가 가난하게 됐다고 성도 아닌 게 아니고 세상적인 어떤 기준을 내세울 수가 없어요. 왜 그 기준은 이레기 때문에, 묵시적 기준이기 때문에. 묵시적 사건이 일으킨 사건만이 기준이지, 인간이 기대하는 사건은 묵시적 사건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거 맞죠? 그게 묵시적 사건입니까? 그게 역사적 사건이죠. 묵시적에 의해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 되죠. 그런데 베드로 당사자가 물 위를 걸으면서 언제 빠졌어요? 주님 바라볼 때는 안 빠졌거든요. 주님 바라볼 때는 자기가 역사적 사건이라는 걸 생각 안 할 때 자기 자신을 생각 안 하고 주님만 바라볼 때는 안 빠졌는데 뭘 보고? ‘내가 미쳤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어.’ 하고 자기를 바라볼 때 물에 빠졌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가 늘 물에 빠져있어요. 그런데 성도가 물에 안 빠질 경우가 있어요. 그때는 주님만 생각하게 되면 ‘내가 지금 어떤 실패라도’ 부도가 나도 그건 부도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에요. 성도한테는 실패라는 것이 적용이 안 돼요. 성도 뒤에는, 참 이런 게 어려운데 성도는 성공, 실패 안 보는 이유가 성도 자체가 이게 소유용이 아니고 이게 자리에요. 주님께서 마련한 자리에요. 이게 주일 낮 설교에 나오거든요. 미리 보내심을 입어서 된 사람들, 이 자린데 이 자리는 내가 만든 자리가 아니고 주님이 만든 자리에 ‘내가 앉았다.’가 되기 때문에 실패, 성공이 없습니다.

제가 주일 낮에 설교했습니다. 왕이 자기가 왕이라고 해서 왕입니까? 남들이 왕이라고 해주니까 왕입니까? 남들이 해준 자리에요. 그런데 그 왕이 ‘내가 왕이다.’ 한 순간 쫓겨나야 돼요. ‘백성이 주인인 왕입니다.’ 이게 유지될 때만 왕이 그 자리에 있지, ‘내가 왕이다.’ 이 말은 뭡니까? ‘너희들이 나를 왕이라 하던 안 하든 나는 못 들은 체 하겠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럼 백성들이 ‘미쳤나? 저게. 네가 왕다운 재주가 있었어? 우리가 뽑아줘서 왕 된 거지, 이게 어디? 다시 내려와.’하고 잡아당기거든요.

성도라는 것이 주님께서 주님이 십자가로 주님이 만든 자리에요. 주님이 만든 자리에 우리가 염치도 없이 왕도 아닌 게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기 앉아 있는 거예요. 거기에 무슨 성공, 실패가 있습니까? 무슨 성공이 있고 무슨 실패가 있어요? 성도됨 그 자체로 주님께 속했는데. 우리가 판정하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미안하죠. 그저 미안하죠.

옛날에 한국에 쌀을 동그란 쇠판에다 홈을 파서 쌀을 부어요. 여기에 사카린을 넣고 뜨끈뜨끈할 때 위에서 압력으로 눌러버리면 먹기 좋게 바삭바삭한 쌀가루가 되죠. 요게 성도의 자리입니다. 성도의 자리에다 우리를 집어넣고 주께서 묵시적 압력을, 이레로 눌러버리면 우리는 창세전부터 예정된 사람 이예요. 우리가 창세전에 가봤습니까? 안 가봤습니까? 나이 얼만데 가보겠어요? 우리는 아담도 못 만났는데. 하지만 우리는 이미 창세전부터 이 자리가 예수 안에 있는 성도의 자리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이 쇠 덩어리 이 자리를 ‘성공했다. 실패했다.’ 고 말할 대상도 아니에요. 그냥 염치없이 머리 긁적이며 ‘고맙습니다.’하고 그냥 앉으면 될 자리에요.

세상의 자리는 자기가 승진하고 해야 앉을 자리지만 주님의 자리는 내쫓지 않는 자리입니다. 주께서 성령을 주신 자리기 때문에 성공, 실패 없습니다. 성도가 성공, 실패 없다는 말은 성도된 사람도 인생의 실패가 없다는 말 이예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하루하루가 다 성공입니다. 주님이 성공한 자리! 우리의 뜻은 늘 실패하면서도 싱글벙글 할 자리! 실패한 것을 즐거워 할 자리! 내가 실패하지 않으면 주님이 안 보이기 때문에!

주님 보이라고 늘 우리로 하여금 매일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돈 좀 벌리니까 좀 좋다고 헤~ 좋아하는 실패, 애 공부 잘하니까 애 공부 잘한다고 자랑 질하는 그 실패, 나이 서른 넘어 시집간다고 좋아하는 그 실패, 우리가 자랑 질 하는 모든 것이 그게 사실은 우리의 그런 실패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자리 들어갔다는 거, 그걸 증거 하라고 주께서 일부러 만남을 그렇게, 자식도 시집가게 만들고 돈도 벌게 하고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그거 좋아하는 그런 인간밖에 안 된다는 것을 뻥튀기가 그런 인간을 가지고 쌀 집어넣어서 튀기게 한 거예요.

자 이렇게 됐으면 객소리 좀 했습니다만 여러분이 70이레에 대해서 대충 알겠죠. 층으로 돼 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다. 그래서 70이레는 우리가 따질 게 아니고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 그것에 유념해야 된다. 그런데 그 사건을 이해하려면 우리부터 신분이 바뀌어져야 돼요. 멀쩡한 인간에서 짐승에게 속한 인간으로 바뀌어야 된다. 우리가 묵시적인 입장으로 되돌아가야 돼요. 되돌아가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전부 다 마귀가 아담을 꼬일 때 했던 그것에 맛이 들여졌어요. 핫쵸코, 너무 맛있어요.

질문: 7이레, 62이레, 1이레, 저것을 1이레라는 것은 신약이 1이레에 속한 게 아닙니까? 62이레는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까?

사건이 그렇게 만들죠. 그 사건 안에 전체가 다 들어있죠. 역사 + 성전이 깨질 때 자진해서 깨진 게 아니거든요. 짐승의 나라가 깨줍니다. 그 짐승의 나라의 정체가 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붙어있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사건이 중요하려면 우리가 묵시적 존재로 달라지게 되면 우리는 짐승에게 속해야 되겠죠. 그러면 짐승에게 속하려면 어디로 가야 되느냐? 창세기 3장으로 가야 되죠. 거기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죠. 그러면 제가 어제 수요일 날 설교 내용에 봅시다. 오홀라와 오홀리바, 이게 에스겔 23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오홀라라 하는 것은 그녀 안에 있는 그녀의 장막이란 뜻이고 호홀리바는 그녀 안에 있는 나의 장막이란 뜻 이예요. 이 두 인물이 등장할 때 이걸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보게 되면 이쪽은 북쪽 이스라엘이고 이쪽은 남쪽 예루살렘이 되죠.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이건 사마리아고 이건 예루살렘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예루살렘은 이 오홀라, 오홀리바가 아니고 하나님하고 결혼해서 낳은 자식 이름이 사마리아고 예루살렘이거든요. 하나님께서 호홀라와 오홀리바와 결혼했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바로 이러한 범죄, 이러한 타락을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으로 접수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겁니다. 우리보고 묵시라고 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역사적 인물이 되셨다는 것에 우리가 모든 해석을 거기 두자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먼저 육신의 몸이 되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묵시가 되신 분이 어디 속에 들어왔다? 역사 속에 들어온 거예요. 묵시와 역사의 만남이니까 주위 사람들이 예수님 말을 알아먹습니까? 못 알아먹습니까? 알아먹지를 못하는 거예요. 심지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까지,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좋다. 아니다.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좋다.’ 하는데 ‘어느 장소에서 예배드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라고 물을 때 지금 장소를 이야기해요.

장소! 철학적으로 토포스라 하는데 이 말은 어떤 논리를 전개할 때 딱 지정된 공간을 점유할 때 그걸 토포스라 합니다. 지정된 장소를 토포스라 하거든요. 항상 지정된 장소가 있어야 그걸 근거로 해서 전 세계를 해석을 하는데, 지금 토포스, 사마리아 여인의 토포스는 뭐냐 하면 이 예루살렘입니까? 아니면 그리심 산입니까? 라는 자기네 세상을 보는 기준점이 있는 거예요.

요즘 이 세상에 잘 사는 나라는 어느 나라만큼 잘 산다고 할 때 어느 나라가 기준입니까? 미국이죠. 미국이 우리의 정신적인 토포스가 되는 겁니다. 미국 손님 오면 잘 대해주고 콩고나 우간다 오면 무시해서 가버리고. ‘또 손 벌리러 왔구나. 이렇게 되고 하죠.

그런데 예수님의 토포스는 뭐냐 하면 지상에 없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때가 곧  이때니라.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그러면 예수님 자신이 모든 해석의 중심, 토포스가 되는 겁니다. 누가 봐도 인물, 아저씨인데 서른 세 살 밖에 안 된 아저씨인데 본인이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돼요? 이해 안 되겠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마리아 여인이 이걸 이해를 했다는 거예요. 이해가 안 되는 게 정상인데 이해했다는 거잖아요.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가 십자가라는 그 토포스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이해 안 돼요. ‘아이구, 나중에 보면 믿겠지만, 나타나겠지.’ 나중이 아니고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중심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지금! 내가 서울, 대전 찍고 부산 어디 가도 주께서는 나를, 성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중심지로 포토스로 핵심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이해를 하는 거예요.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함께 만들어 가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아듣는 거예요. 느낌 아니까. 다 듣는 거예요.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속했지만 하나님 영광을 포기하시고 육신으로 오셨어요. 육신으로 오셔서 세상적인 시간과 같이 하면서 뭐가 발생됐느냐 하면 이겁니다. 카이로스! 우리말로 뭐냐 하면 때! 이때, 저때, 때가 되매, 그래서 성경에서는 뭐라 하느냐 “양을 치니 목자가 흩어지리라” 하는 것은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제는 자다가 깰 때가 되었나니” 이때. 이때가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는 계속 그 때가 주어져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이. 그때,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지는 그때. 내가 어떻게 온다? “도적같이 오리라.” 역시 때!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해놓고 아직까지 안 왔죠? 구름타고 안 오죠? 그때. ”인자가 구름타고 오는 것을 너희들이 볼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때.

그 모든 때를 역사적인 입장에서는 그때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역사적인 상황으로 그 날짜 스케줄을 짤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가 때를 알아채버리면 우리는 몸을 갖고 있습니다. 몸은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역사가 나와요. 이 시간 가지고는 주님의 때를 포착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방법이 간단해요. 저쪽의 ‘때’한테 이렇게 뒤집어 씌워서 파묻히면 되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그 사마리아 여인이 고백한 거예요. “그때가 이때다.” 하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 갖다 버리고 하는 말이, 자기가 물 길러 왔으면 물 길어 와야지. 물동이 버려두고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니까 예수님이 그걸 보고 찰칵, 찰칵’ 찍어서 ”이게 바로 추수할 때니라“ 그걸 저는 지금이 뭐냐 지금이 심판 때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지금이 심판 때에요.

따라서 성도는 ‘지금이 심판이다.’ 생각하고 하루하루 살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그게 성도의 삶이예요. 핫쵸코, 맛있어서 먹어보면 뭐하겠노, 이런 거예요. 떡이 맛있어서 하나 먹어보니 뭐하겠노. 그럼 안 먹고 버티면 뭐하겠노, 이런 거.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 책에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오죠? 모든 것이 헛되다. 허무에서 심판, 그것이 예수님 십자가로 말미암아 전도서가 이루어진 겁니다.

‘아빠 오늘도 성적 내려갔어.’ ‘그래 성적 오르면 뭐하겠노. 걱정하지 마. 그거 가지고 낙심하지 마. 그냥 예수만 믿어.’ ‘아빠 성적 올랐어.’ ‘오른들 뭐하겠노. 올라봐야 의사나 더 하겠나. 좋아해도 소용없는 기라.’ ‘엄마 깨졌어.’ ‘깨져도 관계 없고.’ ‘엄마, 나 결혼할래.’ ‘해도 아무 상관없고.’ ‘엄마 결혼하면 언제 행복할 건데?’ ‘행복할 필요도 없고 행복 찾지도 말고’ 지금은 심판 때에요.

재판관 앞에서 피고가 하는 말이 건방지게 ‘판사님’ ‘ 물 한 그릇 주세요.’ 판사 하는 말이 ‘지금 네가 사형 당하는데 물 한 컵 먹으면 뭐하겠노. 그냥 물마시지 말고 그냥 죽어. 너 사형이야. 이 괴씸한 거.’ 이렇게 하듯이.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이미 우리에게서 의미가 이미 철수했습니다.

열심히 시험치고 있는데 시험관은 이미 시험지 거두고 가버렸어요. 지금 앉아서 시험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거 3번 답 맞습니까?’ 우리는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어요. 문제 정답도 없고 정답 아닌 것도 없고, 우리 사는 존재가 뭐냐, ‘아이고, 세상은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심판이다. 재판중이다.’ 이걸 증거 하는 이것이 오늘날 성도의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레를 봤습니다. 다니엘이 느꼈던 거, 다니엘이 보았던 거, 다니엘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이미 자기가 인자를 보았고 이레를 알았으니 그는 안심 놓고 죽었던 것처럼 저희들도 이 세상 유혹, 협박 받지 말고 위협 당하지 말고 편안히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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