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13a 부산강의 : [시편]56(40:7)-두 개의 나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40편 1절부터 보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다윗이 하는 40편 1절부터도 우리가 생각을 깊이 해야 되겠지요.
인간에게는 어마어마한 책임성이 덮쳐집니다. 책임성이란 인간에게 뭐가 있기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 인간에게 하나님의 것을 가져갔기 때문에 훔쳐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 선악을 아는 지식은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은 거거든요. 허락하지 않은 것을 인간이 낚아챘잖아요. 마귀 시험에 의해서.
그러면 선악은 하나님께 속한 겁니다. 선악을 하는 지식은 우리들만 안다고 돼 있어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이 왜 끼어드느냐 이 말이에요. 그러면 선악을 안다는 것은 판단을 해야 되는데 여기에 책임성이 같이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내부적으로 어마어마한 책임,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책임성에 인간은 짓눌려 산다. 이게 인생입니다. 그 책임감.
그 책임성을 인간이 감당할 수 있겠어요? 하나의 일이 끝난다고 책임이 다 끝나는 건 아니거든요. 또 주어지는 책임, 주어지는 책임. 엄마로서의 책임, 아빠로서의 책임, 자녀로서의 책임 그걸 어떻게 인간이 다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지요. 그래서 여기에 40편 1절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로 시작하지요. 이것은 다윗은 이 책임성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하느냐?
다윗은 이 책임성에 대해서 하나님을 소환합니다. 하나님을 소환한다는 것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께 되돌려주는 거예요. “이것 제 것 아니고 하나님 건데 어떻게 돼서 저한테 와 있네요. 하나님, 이것 도로 가져가세요.” 도로 가져가려면 내 자리에 하나님이 이걸 빼내가는 방법밖에 없겠지요.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줘야 되니까. 하나님을 소환합니다.
그 소환하는 방법이 이 많은 책임, 선악을 아는 지식에 짓눌려 살거든요. 사는 이것은 여기 뭐라고 보느냐 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이 우리 것이 아니니까 하나님이 것이니까 인간이 남의 것을 뺏어왔잖아요. 책임감에 짓눌렸다는 말은 죄에 짓눌려 산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는 자체가 죄기 때문에. 죄라는 것은 내 것도 아닌데 하나님을 것을 빼앗아 올 때 생기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다윗을 하나님을 소환함으로써 하나님이 빼가는 조치에 대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어떤 식으로 나를 빼 가는가? 그 조치가 어디 있는가 하면 책에 나와 있습니다. 40편 7절, 그 책의 내용이 나와 있는데, 그 책의 내용이 뭐냐 하면 이거에요.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이렇게 돼 있어요.
책에 무슨 내용이 있느냐 하면 여기 누가 등장하느냐? ‘나’가 등장하지요. 책에 기록된 나, 책에 예언된 나. 하나님을 소환했는데 다윗에게 찾아온 것은 뭐냐 하면 책에 기록된 또 다른 나가 찾아온 거예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 또 다른 나가 찾아오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책임성을 다윗에게 해제/면제시켜버려요.
그럼 면제시키는 것이 어디 나오느냐? 6절에 나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됐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드린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건 뭐냐? 방금 6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그다음에 뭡니까? 요구치 않는다. 어떤 선악을 아는 지식에 대한 책임감에 대해서 다윗이 면제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요구하지 않는 이유는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요구하지 않아요. 그러면 기뻐하지 않는 대신 기뻐하는 게 뭐냐? 7절에 나옵니다. 7절에 뭐라고 돼 있던가요? 책에 누가 있다고요? 책에 새로운 나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의 나가 있고, 책에 새롭게 등장한 나가 있으니 다윗은 뭐가 되느냐? 다윗은 하나님의 소환에 의해서 쌍둥이가 되는 거예요. 이게 야곱언약이에요.
이삭이 애 못 낳는 상태에서 리브가가 잉태하지 못한 가운데서, 리브가는 불임여성이에요. 육으로서는 이삭의 육의 자녀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삭의 자녀는 이삭이 갖고 있던 속성, 계시의 속성, 또는 약속의 속성대로 자녀가 주어지게 됩니다. 이삭은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그렇지요. 그 반면에 이스마엘은 인간의 혈육에 의해서 태어난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준해서 이삭이 태어난 겁니다.
벌써 여기서 이스마엘과 이삭은 같은 아버지, 같은 어머니를 갖고 있어도 일종의 쌍둥이 같은 그런 관계에 있지요. 아브라함의 자식이 하나인 게 아니고 둘로 등장해서 하나가 제거되는 방식으로 하나를 부각시키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합니다. 쌍둥이를 줘놓고, 하나를 줘놓고 이게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둘을 줘놓고 하나를 제거하면서 남아 있는 하나를 구원시키는 방식, 이게 하나님의 쌍둥이 방식이에요.
따라서 이삭의 리브가는 아기를 못 낳아요.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의 자녀는 없는데 이삭에 있는 약속에 준해서 새로운 자식을 낳는데 하나가 아니고 둘을 낳고 그 둘 사이에는 태아, 그러니까 자궁에 있을 때부터 그 둘 사이는 뭐가 되느냐? 투쟁관계에 있지요. 다투는 관계에요. 싸우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나가 한쪽의 원수가 되고 상호 원수가 되는 관계에 속하지요.
이 말은 지금 다윗이 책임성 때문에 하나님 것을 본인이 갖고 있다는 것 때문에 짓눌려 살고, 그것을 본인이 해결 못하니까 이게 뭐가 된다고요? 죄가 되겠지요. 그러면 다윗에게 두 가지 요소, 또는 이삭에게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돼요. 죄에 짓눌려 있는 나와 거기서 죄에서 꺼내주는 나, 두 나가 같은 하나의 육체, 다윗을 통해서 두 개의 나가 등장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삭언약 속에 쌍둥이 자식을 낳는 이삭언약의 법칙이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에 비로소 나타나는 기이한 법칙이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할 때 하나를 두고 “너, 와” 이렇게 하지 않고 인간을 두 개를 줘버려요. 두 개를 줘놓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선택이 죄에 눌려 사는 선택으로 간주해버려요. 선택을 잘못하게 만든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이 최악의 선택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선택의 기회를 주는 거예요. 모든 인생사가 다 그렇습니다. 최악의 선택. “아하, 그 주식 팔아야 되는 건데.” 이런 것. “아파트 그때 사야 되는데…….” 안 사려했는데 뭐 네 배 올랐다. 나의 죄를 이용해서 의를 보여주는 거예요. 죄라는 건 최악의 선택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선택을 안 하면 되지 왜 선택을 하느냐? 이것 때문이에요. 인간에게 주어진 선악체제에 관련된 책임성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한시라도 머리가 책임감 없이 행동한 적 없고 책임감 없이 생각한 적이 없어요. “내가 여기 왔으면 손자는 어떻게? 손자는 탈 없이 안 다쳐야 되는데…….” 이게 뭐예요? 마음은 여기 있어도 집에 있는 손자 걱정하잖아요. 이게 책임성이잖아요.
심지어 바람피우는 남편도 “내가 이 시간에 혹시 아내한테 들키면 아내가 기분 나빠할 텐데.” 이게 아내에 대한 책임성이에요. 요새는 남편만 아니고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그 책임성이 뭐라 했습니까? 그 책임성이 죄에요. 그 책임성을 없애는 방식이 시편 31편에 뭘 한다 했습니까? 이야기했는데 다윗의 방식은 뭐라 했지요? 하나님을 소환한다. “하나님이여,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여기 기다린다는 말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40편 1절, 하나님을 기다린 거예요. “어서 와주세요.” 어서 와주세요란 말은,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없나이다. 여호와를 소환하니까 여호와께서 넌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라 그런 지시를 내린 게 아니에요. 그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이상 지시를 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와 예물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않는 거예요.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우리는 짓눌린 죄에서 우리의 어마어마한 막대한 책임성에서 우리 힘으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거예요. ‘책임성=죄’거든요. 우리가 책임성 또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나의 선택에 의해서 내가 구원될 여지는 없다. 책임성 때문에 우리는 맨날 선택을 하는데 그 선택은 항상 최악의 선택이 돼요. 인간이 하는 일은 최악의 선택이 됩니다. 이미 죄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책임성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최악의 선택이 돼요.
이삭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쌍둥이를 낳아버리고 그 쌍둥이를 투쟁하는 관계로 만들었어요. 심지어 리브가 뱃속에서부터 이미 싸웠어요. 싸웠다는 말은,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서 본인들이 승자다, 패자다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싸우는 관계를 하나님이 허락했다는 것은 이 싸움에서 누가 최종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되는 것은 인간의 선택을 벗어난다 이 말이에요.
인간의 선택을 벗어나도 선택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이삭은 누굴 선택했습니까? 싸우는 애 중에서 싸우고 있구나. 그럼 나는 어느 편에 투표할까, 어느 편을 내 장자로 삼을까? 그 당시는 언약을 받은 대표자가 이삭이기 때문에 이삭이 언약의 대표자가 돼요. 인간의 대표자가 되니까 이삭이 선택하는 것은 누구였습니까? 맏이, 맏이에요. 먼저 태어난 자에요.
물론 에서를 선택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만 이게 의미 없는 거예요. 에서를 선택했다가 아니고 맏이를 선택했다가 옳은 거예요. 에서를 선택한 게 아니고 맏이를 선택했다. 자, 인간의 선택이 맏이입니다. 이것은 왜 맏이를 선택했어요? 맏이가 맏이니까요. 그건 이유를 따질 필요 없지요. 둘 중에 누가 맏이야? 맏이가 맏이지요. 맏이란 먼저 태어난 자에요. 너희 중에 누가 먼저 태어났어? 얘가. 그게 인간의 선택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인간이 책임성을 감당 못한 이유를 쌍둥이를 통해서 밝혀내시는 겁니다. 왜 인간은 책임성 있게 하나님 일을 못하고 죄에 눌려 사는가? 인간이 선택하는 족족 인간의 입장에서는 맏이니까 맏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한계 없는 앎, 앎이란 지식이죠. 한계 없는 앎/지식을 요구하는 게 아니고 한계 있는 지식/앎을 하나님께선 원하고 있습니다. 한계 자체에 대한 지식이에요.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진도 상 보조 맞추기 위해서 다시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시편 40편 1절하고 있습니다.
시편 40편 1절에 다윗이 누굴 소환한다 했지요? 하나님을 소환하지요. 하나님을 소환하는 이유는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성을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래요. 왜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성을 감당하지 못하느냐? 짓눌려 사는가? 선악을 아는 지식은 이게 인간 자기 것이 아니고 훔쳐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했지만 따먹게 된 하나님 것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소환해서 다시 주인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소환한 거예요. 하나님이 오셔서 내 속에 있는 하나님 것을 되가져 가시기 바랍니다. 그게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급하는 겁니다.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자, 기다리겠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선택, 내 행위로서 나로 하여금 이 죄에 눌려있는, 책임성이 죄라 했지요. “죄에 눌려있는 상태에서 내 식대로 구원하겠다는 의사를 저는 포기했습니다. 와서 데려가주세요. 제가 기다릴게요.” 그래서 막상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온 게 아니고 내가 온 거예요. 그게 시편 40편 7절에 있지요.
그런데 그 나와 새로운 하나님 보내신 나의 차이점은 그 안에 있는 두 번째 등장하는 하나님 보내신 나는 어디 안의 나라 했습니까? 7절에 책 안에 있지요. 하나님의 책 안에 있는 나가 온 거예요. 이것은 히브리서를 아는 사람은 낯설지 않을 거예요. 히브리서 10장 5절에서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여기 두루마리 책에 누굴 기록했는가? 나를 기록한 거예요. 그러면 히브리서 10장에서 나란 누굽니까? 예수님 이야기죠. 그런데 시편에서는 나는 누굽니까? 다윗이란 또 다른 나, 다윗이란 이름의 또 다른 나, 그럼 나가 몇 명이에요? 두 명. 나가 두 명 되지 못하면 구원되지 못한 사람이에요. 쌍둥이에요.
이삭이 쌍둥이 낳았을 때 거기서 맏이가 몇 명입니까? 맏이가 하나가 아니고 맏이가 둘인데 서로 싸우고 있으니까 맏이 전쟁이 종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둘이 리브가 배 밖에 튀어나와버린 거예요. 싸우다가 나온 거예요. 싸우다가 나온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인간에게서 떼어내기 위해서 나에게서 나를 떼어내기 위해서 인간의 선택 여지를 주는 거예요. 이삭 보고 둘 중에 누가 맏이냐고 물으니까 이삭이 맏이가 맏이라고 했지요. 먼저 난 자가 맏이지요.
인간으로선 그게 자기로선 한계 없는 지식의 전부지만 주님께서 그걸 뭐냐? 인간 자기 한계에 대한 지식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래? 먼저 난 자가 맏이라고? 그게 너희 인간사회에서 맏이란 뜻의 개념이지.” 맏이란 먼저 태어난 자가 맏이다. 한계에 대한 지식을 이것은 전에 있던 나에게서 나온 한계고요.
새로운 나는 기존의 한계에서 새로운 나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고 기존의 나를 부정하면서 그걸 거절하면 부정하면서 네가 먼저 너의 선택을 알아보고 그걸 엎어버리는 식으로 주님께서 맏이를 결정하는 겁니다. 이삭이 한 결정을 하나님은 거짓말로(거짓말이라고?) 대항해버리죠. 인간이 아는 한계 자체가 이게 거짓이며 이것이 죄입니다, 라고 거짓에 대해서 거짓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할 때 비로소 그게 진실이 되는 거예요. 이게 오늘 시편 40편에 똑같이 마찬가지로 그렇게 돼 있어요.
야곱이 에서를 선택한 것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역량 것 다 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내 한계가 어느 정도냐? 나는 이것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까지란 것을 분명히 다짐을 해놓으시고 그 외에 바깥쪽으로 새로운 맏이를 제공해버리면 그 맏이는 나와 쌍둥이 맏이지요. 쌍둥이 맏이, 내 복을 인수인계할 그 맏이는 인간의 손을 떠났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이 말이에요.
시편 40편 7절에 두루마리 책이 사람이 그분이 나오지요. 어떤 나가 나오지요. 다시 보면 7절에,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내가 왔나이다, 하고 있어요. 책이 오지 아니하면 다시 왔다는 말도 성립 안 되지요. 책이 온 동시에 책 속에 나 말고 나와 똑 닮은 쌍둥이 나가 새롭게 등장한 거예요.
그 쌍둥이 나는 나와 교체될 새로운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나에서 나로 옮겨가는 거예요. 그래야 구원받는 거예요. 나에서 나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일단 나는 죽어야 되고, 나는 죽고 죽은 나를 대신하는 나가 새로운 구원받은 나가 되는 겁니다. 이러면 나와 나 사이에는 연속성이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연속성이 성립 안 되지요.
내가 예수 믿음으로 구원되는 게 성립되지 않지요.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나를 대신한 분이 아버지를 믿음으로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분이 나한테 찾아온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찾아와서 구원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둘이 되지 아니하면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없으면 그건 구원된 사람이 아니에요. 내 안에 내가 없다, 내가 쌍둥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보내준 새로운 쌍둥이 없다면 나는 어디까지나 어떻게 됩니까? 하나로 살지, 하나로. 하나로 사는 그게 바로 종교라는 것 아닙니까, 나로.
하나로 사는 것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이슬람. 이슬람은 천국 가는 방법을 다섯 가지만 제공했어요. 아주 간편해요.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간편해요. 뭐냐 하면 일단 언어로 형성될 수 없는 최고의 신, 알라 신과 유일한 선지자 마호메트를 믿으면 돼요. 그 한 가지. 그런데 이것만 믿으면 안 되고 네 가지가 더 있어요. 알라 신과 그 유일한 선지자 마호메트를 믿어야 되고, 그다음에 하루 다섯 차례 메카를 향하여 기도해야 돼요. 그다음에 타인을 돌봐야 돼요. 자선.
믿음, 기도, 자선, 그다음에 금식을 해야 돼요. 라마단 기간에 여름 한 달 동안 낮에만 금식해요. 다이어트 하기 멋진 시기라니까. 다섯 번째, 일생에 평생에 한 번은 카바 신전을 순례한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천국 가기 힘들어요. 계속 살려고 생각했는데 다음에 2년 뒤에 갈게, 했는데 2년 안에 죽으면 곤란하죠.
이게 바로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하는 거예요, 내가. 내가 선택한 것으로 신에 대한 내 책임을 지는 겁니다. 그러나 내게 속해 있는 선악체제는 원래 내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속한 지식이 선악지식이기 때문에 주제넘게 피조물이 그 선악지식을 온전하게 이룰 수가 없어요. 책임감만 어마어마하게 부여하고 짓누르고 있고 그 책임에 제대로 화답을 하지 못하니 계속 뭐만 쌓입니까? 죄만 쌓이죠. 양심의 가책만 쌓이죠. 내가 어미로서 제대로 못했구나, 이런 것.
또 한 가지 다른 종교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이 아까 제가 했지요. 책임성. 인간이 있다면 인간이 세상 속에 살잖아요.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 전체에 어떤 책임성을 인간을 갖게 돼 있어요. 책임성이란 이 세상 전체를 커버하는,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걸 내 책임성으로 내 선택으로 내 결정으로 전부 다 커버해서 나한테 유리하게 하고 싶은 생각, 유리하다는 것은 선이죠. 나한테 불리한 건 아니고 나한테 유리한 건 선이라 해요, 인간들은.
선이 하고 싶어서 모두를 커버하는데 그러면 인간사 커버하는데 어떤 종류가 있는가? 가난하면 안 되고, 병들면 안 되고, 가정불화하면 안 되고, 사업실패하면 안 되고, 원인모를 병 있으면 안 되고, 미리 사주를 받아서 대책을 해야 되고, 궁합도 보고 택일도 해야 되고, 신수해야 되고, 이름 짓는 것도 제대로 지어야 되고, 부부의 화목한 관계, 결혼문제, 사업문제, 그다음에 우환, 그리고 불행, 우울증, 자살충동 이런 것까지 다 커버하면 얼추 다 커버된 거죠.
다시 할까요. 가난하고 병들고 가정불화, 사업실패, 원인모를 병, 사주, 궁합, 택일, 신수 보는 것, 이름 짓는 것, 부부, 결혼, 사업, 그리고 우환, 질병, 불행, 우울증, 자살충동 이런 것 있거든 스님 친견상담, 스님을 직접 상담할 수 있다는 거예요. 금당선원(2층), 010-9889-9598, 이 밑에 점집 이야기죠. 방금 이걸 보게 되면 여기 안 걸린 사람 없지요. 다 상담거리가 되지요.
이게 뭐냐? 세상 살면서 인간이 공포스럽고 무서운 것이 다 기재한 거예요. 이게 세상 커버에요. 아까 이슬람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왜 그럽니까? 이유가 뭡니까? 나가 몇 명이어서 그래요? 하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하나기 때문에 나 손해 보면 나만 탈나는 거예요.
그런데 시편 40편 1절에서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누굴 소환하지요, 누굴 기다립니까? “여호와여, 찾아오소서.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뭐냐 하면 내가 폐기대상이란 사실을 주께서 새로 마련하신 새로운 나로 인하여 어서 속히 바꿔치기 해주세요. 체인지 해주세요, 이 말이에요. 체인지 하려면 내가 폐기대상인 것을 인정해야 되지요.
왜 내가 폐기대상이 됩니까? 내가 평소에 내가 책임지려하고 내가 선택했던 목표물이 누구기 때문에? 나기 때문에. 내가 바로 삶의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되기 때문에 이거는 폐기대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성경의 진리에서는 뭐냐? 그 어떤 목표와 목적과 기대가 뭐로 이어진다? 죄로 이어진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목표와 목적과 기대가 결국 어디로 돌아오기 때문에? 나를 지켜내고 나를 버티려는 하나의 시도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죠. 내 안에 누구 것이 들어있습니까? 선악체제라는 이건 내 것이 아니라 누구 것이라 하죠? 하나님 것이 들어있는 데 왜 남의 것을 갖고서 내가 완성하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이건 반칙이잖아요. 다윗처럼 가져가라고 해야지요. 제 게 아니니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래 해야지요. 돌려드리려면 여호와께서 오셔야 되지요.
오셔서 빼 갈 때 돌리는 방법은 뭐냐? 여기 책이 오지요. 시편 40편 7절, 지금 몇 번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책이 오잖아요. 책이 오니까 그 책에 누가 들어있어요? 누군가 들어있는 데 그게 나의 쌍둥이였습니다. 그래서 책 안에 나가 왔나이다. 기다렸는데 누가 왔나? 책 안에 쌍둥이가 여기 온 거예요. 택배로. 왜 왔습니까? 대신 처리하기 위해서, 대신 죽기 위해서 오셨지요.
그러면 다윗에게는 다윗이 몇 명이에요? 두 명.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 몇 명입니까? 두 명. 하나의 육체 안에 두 명 들어있어요. 그걸 성령 받았다고 해요. 주님의 영이 들어와 계신 거예요. 주의 영이. 주의 영의 입장에서는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주께서는 죄인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어제 오후예배 때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건강한 자는, 간단한 거예요. 건강한 자는 하나님 앞에 쓸데없다. 스스로 괜찮은 자는 주 앞에 쓸데가 없어요. 스스로 괜찮을 것 같으면 알라 신 믿든지 안 그러면 밑에 2층에 가서 스님 직접 접견해서 하시든지.
지금 불교계에선 무슨 철이냐 하면,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라 하는 게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생전에 나중에 죽고 난 뒤의 생활을 미리 당겨서 하는 걸 생전예수재라 합니다. 극락생활을 미리 실습하는 것. 실습할 때 절이나 스님한테 돈을 내요. 돈을 뽑아내기 위해서 계속 이런 갈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생전에 있는 나가 극락에 있는 나와 불교에서는 같은 나에요, 다른 나에요? 같은 나에요. 나의 연속성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부지런히 뭘 행해야 돼요. 계속해서 행해야 된다고. 누굴 이용해서든지 내가 질적으로 나를 고급지게 만드는 작업을 게을리 해버리면 나는 극락에서 탈락이 된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악을 버리고, 그들은 악이 뭔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해야 되지요. 그러면 선악체제는 원래 누구 거라 했습니까? 하나님 건데 남의 것으로 지 것이라고 자기가 자기한테 책임지는 삶이에요. 내가 나한테 책임지는 삶을 살면서 이걸 구원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생전예수재, 불교에서 하는 거죠. 거기 상담료 내고 하는 거예요.
제가 방금 불교에서 하는 거라 했는데 불교에서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날 교회 보세요. 교회가 무슨 짓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지금 불교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다니고 있는 게 참. 절에 가는 것과 교회 가는 게 차이점이 전혀 없어요. 본인이 하나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손대서 우수한 나로 생산해내겠다, 뽑아내겠다, 이런 의식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고, 원인모를 병, 사업실패, 가정불화 있으면 이건 십일조 안 내서 그런 것, 이거는 헌금 떼먹어서. 궁합, 신수, 택일, 부부, 결혼, 사업, 전부 다 자기에게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는 거예요. 왜? 귀한 것은 내가 가장 귀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더 진도 나가서 그러면 주님께서 책에 나오는 새로운 내가 왔을 때 그다음에 나온 행보가 뭐냐? 그걸 제가 일곱 단계로 적어봤어요. 미리 정리해봤습니다.
①쌍둥이 →
②주체균열(분열) 선악과 빼앗아 가심 =텅 빈 자리=없음=미지의 X가 나의 한계를 알게 하심→주님의 일로 받아들임→나의 나된 것은 하나니의 은혜 시편 40편 11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이것은 분명히 앞에서 말하는 다윗이 자기의 주변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상황을 한꺼번에 일괄해서 해석하는 설명하는 모습이에요. “그동안 나한테 일어났던 모든 일은 사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었고 사랑이었습니다, 진리였습니다.”고 고백해버려요. 진리를 진리 되게 펼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저를 사용하셨습니다.→
③거세(할례) →
④소환 →
⑤자기폭력(희생) →
⑥결박(내 속에 있는 악마를 결박) →
⑦해방(구원), 죄에서 벗어나는 것.
여기 하나님 소환이라 하는 것은 거세하고 난 뒤에 이제 본격적으로 인식한다는 거예요. 소환하면서 하나님께서 오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일찍부터 택한 백성에게는 오셔서 일을 하시는 데 이제는 거세당하고 난 뒤에 할례하고 난 뒤에 할례/거세는 출애굽기 4장에서 발생되는 게 뭐냐 하면 피가 나오지요. 그러니까 기존의 하나를 죽어야 주님이 만드신 준비해놓은 나가 그 죽음과 대비되어서 하나님의 오심에 의해서 하나님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할 수 있는 거예요.
이런 예는 뭐냐 하면 어떤 경우냐? 야곱에서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어서 활동한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하나님이 네 안에서 활동할게. 너는 거세당했으니까 할례 당했으니까. 할례언약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그냥 남성 생식기를 잘라내면 그걸로 끝나는 것 같지만 한평생이 거세당한 평생이 되는 거예요.
거세란 말은 나의 책임성에 대해서 내가 가만있을 수 없어 내가 어떤 행동에 나서잖아요. 행동이라 하는 것은 선택하고 결정하잖아요. 행동하고 선택할 때마다 족족 전부 다 그것을 주께서는 거세했다, 거부해버리는 거예요. 내 뜻대로 되지 않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런 아주 결정적 예가 뭐냐 하면 에스더 같은 경우에.
왕비 되게 해놓고 쭉 그어버리죠. 왕비를 쭉 그어버려요. 그러니까 에스더가 뭐라 합니까? 왕비가 어떤 자리다? 나의 마지막 죽는 자리다. 죽는 자리로 인식하게 된 거예요. 살아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권력을 행사하는 그 왕비 자리가 이게 자신의 최후의 자리인 죽음 직전에 그래서 문만 열면 죽어요.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라. 죽는데 왕비의 입장에서 죽는 거예요. 왕비가 되지 않는 입장에서는 내가 죽는 방법이 없다 이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모든 성도들은 공평해요. 그 사람의 어떤 직업이든 그 직업은 어떤 자리냐? 내가 자기 최후의 자리로서 부여받는 겁니다. 죽는다는 말은 나의 기대와 목적과 목표가 사정없이 잘라지는 거예요. 그 이유는 우리 안에 마귀와 연계된 결탁된 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를 따먹을 때 아담이 그냥 따먹었습니까, 뒤에 조종자가 있었습니까? 배후 조종자가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게 해놓고 인간을 떠나지 않았어요. 악마가 계속 인간과 결탁돼 있다 이 말이죠. 결탁돼 있으니까 결탁된 나를 제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새로운 나로 구원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전쟁은 내가 나설 수 없는 전쟁이고 누구와의 전쟁이다? 나는 빠지고 마귀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마귀와 예수님과의 전쟁이에요. 하나님과 전쟁이 아니고 예수님과 전쟁한다는 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시편 110편 1절과 2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전쟁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내 주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가 둘 되는 거예요.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40편도. 여호와 해놓고 주의 생각이 많다. 그러니까 시편 40편이 중첩이 되니까 무슨 뜻인지 몰라요. 주인공이 하나 인듯하지만 하나가 아니고 둘이 나와요. 주인공에서. 나의 하나님, 다윗과 하나님 관계 속에 책이 등장하면서 제3자가 등장하는 거예요. 제3자가 등장하면서 내가 나한테 뭘 실시해서 내가 구원되는 게 아니고 오시는 그분이 다 이뤘기 때문에 나는 거세니까, 내가 제거되는 즐거움을 주는 거예요.
제거되는 즐거움이 여기에 16절에 보면,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왜? 주 안에 새로운 내가 들어있기 때문에. 지금 나에 대해서 더 이상 애착이나 미련 둘 필요 없는 것, 그러면 나에 대한 내 책임성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책임성이 없어요. 내가 하는 책임감, 성취성, 목적, 목표 그 무게 때문에 내가 마귀에서 못 벗어나고 마귀와 못 떨어지고 같이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그 지옥에 있는 나를 그냥 보내세요. 마귀야 네 껍데기나 가져가라, 그냥 보내시고 새로운 주님으로 옮겨 타기, 갈아타기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하나하나 이야기했는데 아까 초반에 이야기했기 때문에 쌍둥이 이야기했다 치고, 두 번째, 주체균열 이것 이야기하겠습니다. 균열이란 뭐냐? 균열, 분열 같은 말로 되는데 내 안이 비워있다. 하나님이 주신 선악과를 하나님이 도로 빼앗아 가버리면 선악과 있던 자리가 텅 비게 되겠지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 없음이죠. 무가 되지요. 없음인데 없음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미지의 X가 돼요.
내 안에 나는 아무것도 없다가 돼버리면 이건 불교가 돼버려요. 나는 무아다, 나는 내가 없다. 내가 없는 게 아니고 누가 들어와 있어요. 미지의 암호 같은 하나님의 암호가 주님의 암호가 들어와 있어요. 미지의 X에요. 그리고 그 X는 나의 한계를 알게 합니다. 너는 이것까지, 이게 네 한계까지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는 나한테 유리하도록 주변의 상황을 이용하려고 하는데 주변에 있는 모든 일은 미지의 X와 관련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내가 가꾸어온 내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내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깔아놓은 주님이 찾아온 자기의 징검다리였어요. 주님이 찾아드는 그러한 노선 또는 카펫, 미리 깔아놓은 양탄자. 나의 과거사가 제거돼버려요.
제거되고 미지의 X, 그러니까 이게 뭐냐? 주님의 일로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서 10절에 나와요. 그것도 디모데전서에도 나오고 디모데후서에도 나와요.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에는 창세전부터 이미 나 같은 인간을 아시고 그동안 은혜로 왔습니다.
여기 시편 40편 11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이것은 분명히 앞에서 말하는 다윗이 자기의 주변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상황을 한꺼번에 일괄해서 해석하는 설명하는 모습이에요. “그동안 나한테 일어났던 모든 일은 사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었고 사랑이었습니다, 진리였습니다.”고 고백해버려요. 진리를 진리 되게 펼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저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표현은 전에 있는 다윗이 아니고 책 안에 들어있는 새로운 다윗의 입장에서 고백하는 거예요. 이걸 고린도전서 찾아봅시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뭐라고 돼 있지요?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디모데후서 1장 9절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찾아왔던 하나님 주 말고 하나님이 주라고 부르는 또 다른 하나님, 주가 주께서 오셔서 우리가 결탁돼 있는 악마를 원수를 이김으로써 만들어낸 주님의 자신 안에 창세전부터 예상해놓은 그 나, 나로 옮겨 타기, 바꿔치기 되는 겁니다. 로마서 9장에도 그게 나오지요. 야곱과 에서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뭔가 행하기 전부터 이미 창세전에 하나는 사랑받기로 작정돼 있고, 하나는 미움 받기로 작정돼 있고. 우리는 10분 쉬기로 예정돼 있고.
20230313b 부산강의 : [시편]56(40:7)-두 개의 나
(강의:이근호 목사)
6절에 보면,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첫 번째 나, 기존의 나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말은 그러면 번제와 속죄제, 제사와 예물, 율법 준 것은 장난친 거냐? 쓸데없는 걸 했느냐? 아니죠. 율법과 번제와 속죄제를 두 번째 나로 오실 그분이 대신 다 완성을 시켜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희생이에요. 희생이란 주체 안의 심연에서 희생이 일어나요. 심연이란 깊은 연못, 깊은 연못에서 희생이 일어납니다. 이 심연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알 수 없는 대칭성이 있어요. 대칭성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바로 선과 악의 대칭성이죠. 선과 악은 누구만 감당할 수 있어요? 하나님만 감당할 수 있지요.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감당할 수 있느냐? 선과 악이 하나의 출제문제라면 선과 악을 해결하지 못하면 선과 악에 대해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그 선과 악에 대해서 심판하는 심판주가 선도 알아야 되고 악도 알아야 되고, 둘 다 알아야 선과 악에 대해서 심판할 권한을 갖게 됩니다. 심판주가 돼요.
주라는 것은 심판주를 말합니다. 그리고 구원주를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오셔서 선도 알뿐만 아니고 뭐고 알아야 돼요? 악도 체험해야 돼요. 악도 체험해서 이 대칭성, 양쪽 다 체험해서 그다음부터는 예수님이 행하신 그것에 대해서 인정치 못한 자는 악이 되고 그걸 인정해버리면 이것은 구원이 되고 선이 되는 그러한 토대를 주님께서 마련하신 거예요. 선과 악, 악에서부터 선으로 가는 이 과정이 바로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로 이뤄지는 그 과정입니다.
이 말은 선악과 자체를 따먹은 인간세상이 악이거든요. 거기 배후에 악마가 있고 악마가 통치하는 세상에 주께서 들어왔어요. 그럼 그 자체가 악이에요. 선은 없어요. 전체가 악입니다. 이 악 속에서 주님이 같이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왔기 때문에 어떤 공식이 나오느냐 하면 구원은 악 또는 타락이죠. 타락 속에 들어있다. 타락을 피해서 구원되는 방식은 없습니다. 그 근거가 뭐냐? 예수님의 구원,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를 경유해야 부활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 영생은. 악을 피해서 구원되는 방법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인간의 방법은 자기 자신이 하나밖에 없는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이상 악을 피하면 그게 곧 선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인간이 선악의 대칭성에서 못 벗어나는 게 악인데 아무리 선을 행해도 자기의 악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가 악이 같이 물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같은 막대기란 말이죠. 막대기 있다면 여기 선이 있다면 여긴 악, 같은 막대기에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거예요.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좀 양심에 가책 있으면 악에 갔다가, 착한 일 많이 하면 악에서 선에 왔다가 이걸 도중에 끊을 수 없는 거예요. 끊는 것은 둘 다를 궁극적으로 궁극적인 선, 궁극적인 악을 다 경험한 사람만이 끊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나가 오셔서 첫 번째 나를 끊어버리는 거예요. 끊어버리면 우리는 거기서 나 자신에 대해서 이것이 주님의 희생에 참여하는 바가 되는 겁니다.
희생이란 말에 두 가지의 서로 반대되는 현상이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주님께 희생. 주님께 희생은 코스가 예수님이 아버지께 한 희생에 참여하는 것이 주님께 희생이겠지요. 또 희생이 뭐냐 하면 이 희생은 악마에게 희생하는 거예요. 희생이란 것은 더 이상 내 의지, 내 뜻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것이 희생이거든요. 나에게 폭력이 가해지는 것, 이게 희생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스스로 나를 해치는 것, 이게 희생이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뭐였습니까? 희생이죠. 이삭이 누구 아들입니까? 아브라함 본인 아들이죠. 아브라함이 본인의 것을 본인이 해치는 것, 바치는 것, 죽이는 거예요.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바침으로써 이삭의 희생물이 아브라함 자신이 그냥 죽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를 믿느냐, 라고 하신 겁니다. 이 말은 내가 한 약속을 구현할 수 있겠느냐, 라고 거기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는 행위는 아버지아브라함과 아들이삭과의 관계잖아요. 그것이 하나님아버지와 아들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관계를 아브라함과 이삭이 미리 보여준 거예요. 미리 보여준 그 관계, 희생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로마서에서 이걸 ‘믿음’이라 해요. ‘믿습니다’하는 건 믿음이 아니고 어떤 일이 있어야 돼요. 그 안에. 실제적인 일이 벌어져야 되지, 믿습니다, 이건 믿음이 아니에요.
아까 제가 2층에 절간에서 했던 것 중에서 빠뜨린 게 있어요. 궁합, 택일, 신수, 이름, 부부, 결혼, 사업, 그다음에 하나 빠뜨렸어요. 소송. 야아 이 소송문제 골치 아파요. 이거 골치 아프거든요. <검정고무신> 작가가 얼마 전에 자살했잖아요. 소송에 말려서 짜증나서 죽어버렸는데. 소송문제는 가만있는 나를 누가 건드리는 게 소송문제에요. 과태료 나는 이런 것.
그러니까 희생이란 것은 결국 여기서 내릴 것은, 외부 요소가 강요하고 요구하는 것이 희생이라는 거예요. “제가 뭐 드리겠습니다.” “아니. 네가 죽어야 돼.” 이거거든요. “내가 뭘 바치겠습니다.” “아니, 아니. 네가 죽어야 돼.”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아니, 내가 요구하는 건 그게 아니야. 네가 죽어야 된다.” “속죄제, 번제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것 말고 네가 죽어.”
그것을 속죄제, 번제 다윗에게 요구하지 않고 책 속에 있는 두 번째 다윗, 또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 요구를 혼자서 다윗을 위해서다 이뤘습니다. 다윗은 거기에 믿음으로 참여한 거예요. 믿음이라 하는 건 실제 내용이 있어야 돼요. 어떤 내용? 내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내용이 들어있어야 그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매사 안 될 때 그거는 주께서 지금 믿음이냐, 라고 압박을 가하는 순간이에요. 또 내 뜻대로 안 되네. 또 떨어졌나, 이런 식으로 안 될 때 주께서 죽으려면 아직, 다른 경우 많이 있으니까 기다려봐 내가 더 죽여줄게. 압박을 가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이거에요. 복대, 졸라대는. 배 아플 때 복대 하잖아요. 압박붕대 하듯이 꽉 조이는 거예요. 나의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 주님 중심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악마의 희생이라는 게 좀 복잡해요. 지금부터 그 복잡한 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악마가 예수님 시험하러 오지요. 시험 또는 테스트, 사실은 정확한 말은 악마의 유혹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이미 자기 하수인에 속한 자기 통제 안에 있는 인간에게 계속해서 내 밑에 있으라고 악마가 그렇게 조종하는 거예요. 그 유혹을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악마의 유혹의 목적은 뭐냐? 너는 나처럼 되라. 그러면 세상 권세가 현재 제일 꼭대기에 누가 있습니까? 악마가 있지요. 그 밑에 악마의 시다바리들, 하수인들이 꼬물꼬물 많은 인간들이 거기에 다 속해져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표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악마의 자식이라 했지요. 자식이니까 유난히도 악마와 가장 근접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자리에 있겠지요. 바리새인들이.
바리새인이 보여주는 모습은 뭡니까? 이거거든요. 율법을 행함으로써 우리가 복도 받고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아가 두 개가 아니고 하나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에서 나오지요. 네가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 했어요. 본문에도 그게 하나님의 의가 여기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악마와 가장 근접한 모양새를 보여주지요. 너는 나처럼 되라. 너는 악마처럼 되는 것이 이미 너의 성격이고 속성이고, 그 속성에서 네가 벗어날 길은 없다. 매일같이 부지런히 노력해서 나처럼, 악마와 보다 더 닮은 악마, 돈 챙기고 인기 챙기고 권력 챙기는 이 본성이 우리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악마만 살아 있는 게 되고 나머지 것을 죽은 자로 할 수 있지만 다른 말로 하면 사물체라 해요. 지금부터 좀 어렵습니다. 어렵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성경 제치고 세상 것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방법은, 인간이 사물화 돼 있다는 거예요. 물건, 사물체. 인간이 물건으로 되는 거예요. 사람이 인격이라 하지만 그 인격이 돈 앞에서는 아무짝도 소용없지요. 하나의 돈에 매여 있는 인격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개인이잖아요. 개인이 사물로, 하나의 물건으로 또는 물체로 바뀌게 하는 여기에 작용하는 게 뭐냐 하면 권력이에요. 악마의 권력입니다. 그리고 악마의 권력이 실제로 펼쳐진 이 광경을 뭐냐 하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있으면 인간 같지요. 그러나 권력 있는 자 앞에서 우리는 갑자기 뭐가 돼버려요? 하나의 물건 취급받는 거예요.
물건 취급받는 가장 정확한 증거는 뭐냐? 인간이 숫자화 된다는 것, 카운트된다는 것. 1, 2, 3, 4 이렇게 카운트되는 것. 전에 대구강의에서 숫자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666 설명하면서 언급했는데 다시 한 번 설명하게 되면, 숫자란 카운트 헤아린다. 헤아리는 사람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기 위해서 실시하는 행동이 숫자에요.
사과가 한 개 있는 것을 뭐라 하느냐? 1이라 하지요. 왜냐하면 내가 너를 1이라고 이렇게 불러주는 나의 의미를 살려주기 위해서 1로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 1로 불러놓고 사과가 없으면 뭐라 하느냐? 0인 거예요. 사과가 두 개 있으면 2가 되고. 이렇게 뭐든지 숫자화 된다는 것은 그 안에 누가 살아 있다? 헤아림으로써 의미 있다고 자부하는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럼 이 카운트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 666 봅시다. 13장 18절. 요한계시록에 카운트하는 자가 누구를 보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13장 16절에 나오지요. 666. 세상 인간을 누가 카운트하고 있느냐고 요한계시록은 이야기하느냐 하면 악마가 짐승이 카운트하는 거예요. 카운트한 사람은 짐승이고 카운트 당한 사람은 누굽니까? 인간이 되는 겁니다. 짐승에 속한 자가 돼요.
왜 카운트하느냐? 여기 보면 매매하는 것, 경제활동 전부 다 뭐로 이뤄진다? 전부 다 숫자화 되어서 숫자화 된 상태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럼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 666이라 하는 것은, 숫자화 되었다는 말은 이건 곧 하나님 보시기에 제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1000이라고 하는 인간의 헤아림을 능가하는 너머의 숫자, 그 경계선에 있는 1000 그 숫자 밑에서 인간은 기껏 해봐야 666이라는 악마가 헤아리는 대상으로밖에 안 되는 것이 현재 인간 군상들의 실정이고 처지고 환경이라는 거예요.
사람을 볼 때 뭐로 본다? 666 숫자 안으로 보는 거예요. 숫자 안의 특징, 숫자로 헤아림을 당한 인간들의 특징은 뭐냐? 이렇습니다.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이야기인데, 제가 아까 좀 어렵다 했지요. 여러분 그걸 감당하셔야 되는 거예요. 적어불게요. [인간 中心주의는 인간 中心이 없음을 기본교리로 한다.]
이것 하나의 예를 들면 [유럽인들에게 유럽의 중심이 없다는 것이 유럽중심주의의 핵심이다.] 뭔 뜻인지 감이 오지요. 이걸 네 자로 하면 결국 ‘민주주의’지요. 민주주의에 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민주주의에 왕이 없지요.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왕을 단두대에서 없애버리고 민중들이, 그때는 국민이 없으니까 국민이란 민주주의 나라에서나 국민이라 하는 거예요. 왕이 있으면 국민이 아니고 백성입니다. 그 중간에 있는 걸 민중이라 해요. 백성이 될 것이냐, 국민이 될 것이냐 그 중간에 있는 걸 민중이라 하는 거예요.
계급이론에 의하면 민중이란 그것은 잠재력이 있어서 스스로 주체, 스스로 주인이 되기 이전에 어떤 억압적인 어떤 개인이 억압한 상태에서 그 중간의 과정을 민중이라 해요. 그래서 이거는 기존의 모든 계급을 철폐하면 민중이 되는데 그 민중을 위한 하나님, 그걸 민중 신학이라고 하는 거예요. 남미에서 유행한, 지금의 감신, 한신, 감리교신학대학, 장로교신학대학에서 주장하는 게 그거에요. 성공회에서 특히 주장하는 게 그거에요. 민중 신학이에요. 연세대신학대에서 주장하는 이런 것.
민중노래 알지요. 혀 잘린 하나님. 그런 것 알려면 518에 광주에서 늘 나오는 노래 있어요. 천주교 정의사제 구현단, 전부 다 민중 신학이에요. 뭘 없애단 말입니까? 중심이 없이 민중의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그러한 나라가 하늘나라라는 거예요.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악마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악마가. 왜 악마냐 하면 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악마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악마의 속성이 뭐라 했습니까? 악마는 자기 속에 있는 인간들을 뭐로 만든다? 자기처럼 만들죠, 자기처럼. 악마는 뭘 표방합니까? 자율성을 표방하지요. 인간 중심이 없음을 기본교리로 하는 집단, 그 집단은 결국각자 누굴 모방하고 닮아가고 있는 거예요? 중심이 없다는 말은 신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뭡니까? 믿을 건 네 자신을 믿으면 된다는 누가 퍼뜨린 성질이고 성깔이에요? 악마지요. 지금의 젊은 세대, 지금 손자 아들세대 여러분들이 키워봤으니 알잖아요. 누구 말도 듣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회는 갈수록 몰락하고 있기 때문에 진화하는 게 아니고 퇴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갈수록 짐승을 닮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사회에 나가면 본인들이 뭐가 되느냐? 하나의 숫자화로 다뤄지지요. 어디 가도 숫자화로 다뤄져요. 어느 직장에 가도. 실적하고 숫자에요. 숫자란 말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 인간이 아니고 뭐냐? 그냥 개체에요, 개체. 개체고 사물체에요.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인격으로 보지 않습니다. 숫자로 계산하잖아요. 계산의 대상이 돼요. 서로가. 한 주에 몇 시간 노동하고 몇 시간에 임금은 얼마 받고 전부 다 계산에 의해 하는 거예요. 그 계산이 요한계시록 666에 보면 누가 한단 말입니까? 그 계산을 마귀가 하지요. 요한계시록 13장에서.
그런데 주님한테는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그 계산을 사용하면서 99마리 양을 놔두고 누굴 찾아갑니까?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가지요. 주님은 계산을 보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그 코스, 과정을 그대로 집어넣는 대상이에요, 성도는. 주님의 코스, 주님이 이 땅에 왔다가 올라가는 그 코스가 그대로 적용되는 대상이 바로 성도에요. 그래서 한 마리 양도 귀한 거예요. 왜? 그 안에 누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 안에 예수님 자신의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귀한 거예요. 숫자로 보지 않습니다. 그냥 귀한 것으로 봐요. 그래서 적은 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주님도 생명책에서 왔듯이 성도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로서 구원받습니다. 생명책을 먼저 성취한 분이 예수님이고 예수님 자기희생이고요. 자기 폭력이죠. 따라서 자기희생에 의해서 책에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그대로 복제될 사람들을 찾으러 가는 것, 그게 요한계시록의 생명책에 있어요. 그래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들은 전부 다 어디에 있다? 인간의 숫자에 대상이 되는 거예요. 666에 포함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짐승에 있어서 중심 없음이 이게 문제가 아니고 더 큰 문제가 있어요. 더 큰 문제가 뭐냐? 악마가 인간을 사물로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하면서 무엇과 같이 동반시키느냐 하면 돈과 동반시켜요. 그게 요한계시록 13장에 매매하는 것과 관련돼 있어요. 화폐가 통용하잖아요. 화폐 통용하듯이 인간 하나하나를 몇 푼짜리 돈이냐로 통용시키는 그 시대가 악마의 시대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것은 악마가 살아 있어야 돼요. 인간은 살아 있으면 안 돼요. 악마 본인이 살아 있기 위해서 나머지는 하나의 동전, 하나의 물체이어야 하는 거예요. 악마는 인간을 그렇게 다루는 거예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이렇게 중심 없는 뭉치를 만들어버려요. 근데 중심 없는 뭉치를 만드는 데 이건 보이지 않는 중심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악마라는 중심이 인간을 자체적으로 중심 없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어떤 관계냐? 악마와 인간과의 권력으로 그렇게 만들어버려요. 인간이 하나하나가 악마의 새끼처럼 악마를 닮은 인간처럼 만들어놓으면서 인간 자체에선 아무런 해결책이 없게 만들어버려요. 저희끼리 우르르 모였다. 여러분 모래를 한줌 쥐었다고 모래가 하나 됩니까? 절대로 모래가 하나 안 돼요. 손 펴버리면 모래가 다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버리죠. 서로 어떤 사물체로 권력에 의해서 모였다 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모이게 한 보이지 않는 권력을 사모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권력을 미치게 만드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할 때 세상 이야기하지만 여러분들은 그걸 생각해줘야 돼요. 사울 왕의 이스라엘 통치. 딱 사울 왕이 악신 들렸지요. 악신이 들린 사울 왕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통치했습니까? 자기 밑에 하나로 모았지요. 그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어떤 대우받았어요? 요나단은 지금 블레셋과 전쟁할 전쟁 이겼잖아요. 하나님이 도와줬잖아요. 그러면 백성들이, 백성들이 아니고 군인들이 친다고 목말라했고 허기졌다 이 말이죠. 그래서 꿀을 찍어먹었어요, 본인이.
그런데 꿀을 찍어먹었다고 누가 시비 겁니까? 사울 왕이, “누구야? 전쟁 중에 꿀을 찍어먹다니, 내 허락 없이.” 자기 허락을 왜 받습니까? 요나단이 반격하지요. “승리는 주님이 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전쟁 승리한 중심부는 아버지, 당신이 아니고 하나님이 승리케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걸 인정하지 않아요. “내가 왕이야. 내가 권력자야. 네가 내 권력을 무시한다면 권력의 맛을 봐야 돼. 죽여 버리겠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백성들이 말렸어요. “이번 전쟁을 하나님이 했는데 전쟁의 공로자를 왜 죽이십니까?” 그래서 요나단이 겨우 살아났어요. 사울이 악신 걸려서 미쳤어요. 사울 안에 악마 들어있어요. 본인이 본인 위주가 아닙니다. 사울은 누구의 희생물이다? 악마의 희생물이에요. 모든 이 세상의 인간들은 전부 다 악마의 희생물입니다. 그래서 희생에 두 가지 있다 했지요.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한 사람 있지만 또 하나는 예수님의 희생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에요. 악마의 희생물입니다.
악마의 희생물 된 사람들 제가 스무 명을 뽑아봤습니다. 호르케 비올라, 아르헨티나 독재자인데 몇 명을 죽였는가? 만 삼천 명 죽였어요. 지 권력 잡기 위해서. 피델 카스트로, 쿠바의 유명한 독재자 삼만 명 죽였습니다. 라파엘 트루히요, 도미니카공화국 독재자인데 오만 명 죽였습니다. 바샤르 알 아사드, 현재 살아 있는 시리아 대통령인데 몇 명 죽였는가? 십만 명 죽였어요. 지금 숫자 많이 봐준 거예요. 소문은 더하지만.
이디 아민, 아프리카 우간다 대통령 몇 명 죽였는가? 이십이만 삼천 육백 명 죽였습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스페인의 파시스트 대통령 몇 명 죽였는가? 내란이 일어나서 이십일만 칠천 삼백 명 죽였어요. 그다음에 전부 다 독재한 사람들이에요. 수하르토,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구십만 육천 육백 명 죽였어요. 그다음에 여러분 잘 아는 사람 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백오십칠만 명 죽였습니다.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독재자 백육십사만 명 죽였어요. 폴 포트, 캄보디아의 유명한 독재자 이백십칠만 명 죽였어요.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파시스트 독재자 삼십일만 오천 명이 죽었어요. 호치민 베트남 독재자, 공산주의자 삼십구만 육천 사백 명. 사담 후세인, 육십삼만 육천 사백 명. 에티오피아의 독재자, 멩기스트 하일레 마리암 육십칠만 팔백 명 죽였어요.
레오폴드2세, 벨기에 국왕인데 콩고의 사람들 잔인하게 죽였는데 육백이십오만 명 죽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팔백만, 구백만 더 돼요. 레오폴드2세 벨기에 국왕이 콩고사람 죽일 때 이걸 아주 극도로 공격하고 분노를 일으킨 사람이 누구냐 하면 히틀러에요. “사람이 우에 저럴 수 있어?”
도조 히데키, 2차 대전 때 일본의 천황이죠. 육백사십팔만 명 죽였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독재자 팔백구십구만, 사실은 수천만인데 줄여서 한 거예요. 그리고 장제스, 대만의 국민당, 장제스가 천오십만 명 죽였습니다. 2등과 1등 남았어요. 2등이 뭐냐? 아돌프 히틀러, 천팔백오십육만 명 죽였습니다. 대망의 1등, 공산당 모택동 삼천팔십오만 명 죽였습니다.
이게 역사적으로 다 나온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중심이 없는 데 왜 남을 죽입니까? 중심이 없잖아요. 민주주의는 중심이 없지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지요. 왜 죽입니까? 인간은 이미 다 죽었어요. 왜? 하나의 사물체기 때문에, 숫자기 때문에.
집에 있는데 본인이 어릴 때부터 착하게 살았어요. 갑자기 비밀경찰 와서 잡아가서 죽입니다. 그때 비밀경찰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왜 죽입니까, 하면 독재자들에게 지금도 미얀마도 그렇게 왜 우리 남편을 죽입니까,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이렇게 이야기해요. ‘국가와 인민의 적’이기 때문에 죽인다는 거예요.
그럼 국가는 어디 있고, 인민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이게. 여러분 국가라는 게 없어요. 왜? 국가라는 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서로 중심 없이 만나겠다는 그냥 허구적 약속에 불과하거든요. 여러분 국가가 중요합니까, 내가 중요합니까? 내가 중요하지요. 우린 평소에 그렇게 그걸 분명히 믿고 있잖아요. 그런데 어떤 자가 와서 나를 잡아간다면 반항하면 경찰이 군인이 감옥소 가기 전에 개머리판으로 맞고 거리에서 죽지요.
왜 때리느냐고 물어보세요. 뭐라고 답변합니까? 국가와 인민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럼 나는? 나는 뭐예요? 나는 악마에 의하면 하나의 물건입니다. 하나의 사물이에요. 하나님께서 악마를 보내서 인간세계가 이미 죽은 사물체에 불과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거예요. 그만큼 인간들은 허구와 허상에 빠진 거예요. 무슨 허구? 국가란 허구, 사이좋은 우리 가정, 가족이란 허구.
그 가족이 국가의 권력을 막아낼 수 있습니까? 이 사람 내 남편이니까 살려달라는 게 있습니까? 살려주는 경우는 있지요. 그 사람이 대통령 아들이거나 국무총리 조카라든지 이럴 경우에는 경찰이 봐주지요. 왜 봐줍니까? 경찰이 죽이려면 다 죽여야지 왜 봐줍니까? 무엇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권력과 관련돼 있어요.
그럼 권력은 어디서 오는 거예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권력은 보이지 않는 데서 와요. 보이지 않으면서 실재해요. 보이지는 않는데 실제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국가가 돌아가는 거예요. 법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런 말 합니다. 서로가 약속해서 그렇다고. 약속했는데 오천만 명, 삼천만 명 죽이는 약속을 언제 했습니까? 백만 명 죽이는 약속을 언제 했어요? 수십만 명 죽이는 약속을 언제 했습니까? 독재자에게 사람 죽이라는 권한을 누가 준 적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나 현실은 뭡니까? 지금도 미얀마 현실은 뭐예요? 북한 현실은 뭡니까? 중국 현실은 뭡니까? 지금 시리아 현실은 뭐예요? 우크라이나 현실, 러시아 현실은 뭡니까? 그게 지금 우리의 꿈속에 있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러시아가 러시아 국민을 죽이는 건가요, 안 그러면 우크라이나 국민을 죽이겠다는 겁니까? 우크라이나 국민을 죽이죠. 그런데 죽이면서 누가 동원됐어요? 러시아의 젊은 사람들이 전쟁터에 죽지요.
전쟁 왜 일어난 거예요? 여러분들이 전쟁하라고 동의한 적 있습니까? 나, 전쟁터에 죽게 해달라고 우리가 사정하고 부탁한 적 있습니까? 그러면 전쟁이 와서 나를 군대에 나오라 하지요. 안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안 그러면 뭐가 동원되지요? 뭐에 동원돼서 법에 처단됩니까? 국가법. 국가가 있어요, 없어요? 국가가 누가 만들었으며 법은 누가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개인은 개인이 제일 중요해요. 이게 실제에요. 내가 제일 중요해요.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한 게 실제인데 이 실제와 현재 현실은 뭡니까? 나를 뭐로 본다? 하나의 물건으로 보는 현실 속에서 나는 무슨 꿈을 꾸느냐 하면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망상을 꾸는 거예요,
지금. 내가 제일 중요해요. 그런데 어느 날 청첩장 날아옵니다. 잘 모르는데 결혼식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래저래 따져보니까 사돈의 팔촌이에요.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갑자기 뭐냐? 오만 원 내야 될지 삼만 원 내야 될지 고민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참석 안 하고 부조 안 하면 다른 친척들이 얼마나 나를 욕하겠느냐. 그러니까 내가 제일 중요한 데 나를 둘러싼 현실의 환경, 조건이 나를 가만두질 않고 있어요.
그럼 나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원하는 나는 있어요, 없어요? 그런 인간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내가 환상이에요. 우리는 악마의 희생물입니다. 이게 결론이에요. 나는 악마의 희생물이에요. 버티고 있는 거예요, 버티고 있는 것. 지금 아직까지 나를 죽이는 권력이 안 찾아왔기 때문에 나는 올 봄에는 제주도 놀러가야지, 내 인생을 즐길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어요. 아직 권력이 나한테 방해 놓기 전까지는. 그러나 우리가 노닥거리는 그 세계는 이미 악마가 접수한 세계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런 이야기는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시달리지 않는 주체성은 없다. 이 땅에 산다는 것은 시달릴 수밖에 없는데 그 악마 배후에 누가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왜? 주님이 다녀갔거든요.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코스를 고대로 밟게 해요. 어느 누구도 악마의 권력을 못 벗어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단 한 분 벗어난 자 있어요. 예수님만 모든 악마의 협박과 공갈에 벗어났습니다. 악마는 주님에게 이야기했어요. “너, 죽는다.” 주님은, “죽여라.” 이게 네가 나를 죽이는 게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내가 죽는다. 그게 희생과 희생 사이에서 내가 사물이 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냐? 거기에 대해서 성공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왜 성공했는가? 시편 40편 말씀대로 됐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자기 자신을 믿지 마세요. 환상을 믿으면 안 됩니다. 내 힘으로 내가 구원 생활하면 안 돼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자아에게 의도적으로 시달리게 만들어서 기존의 내 자아를 믿는 그 믿음을 떨어내기 위해서 그걸 전부 다 화해시키기 위해서 마귀를 붙여준 거예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환상 속에 빠지지 말라고. 내가 스스로 지금껏 내 힘으로 살아왔다는 그 말도 안 되는 객기를 부리지 말라고요. 주께서 봐줘서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이게 뭐냐? 기쁜 소식이 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고. 9절 봅시다. “내가 대회 중에서” 무슨 기쁜 소식? “의의 기쁜 소식” 의라는 것은 이 땅에 없어요. 악마가 무슨 의롭습니까. 그러니까 여기 투입된 것, 이 죄밖에 없는 세상에 의가 투입됐는데 그게 기쁜 소식이에요.
기쁜 소식이 나를 대신할 쌍둥이로 와서 나를 제거하는 작업을 주께서 마귀를 통해서 하게 하시는 이것이 나에게 기쁜 소식이에요.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기쁜 소식이고, 나에 대한 기대와 목표를 제거해준 게 기쁜 소식이고, 내가 내 힘으로 살려하는 그것이 신앙이 아님을 알게 해준 게 기쁜 소식이 된다 말이죠.
12절에 보면,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지금 다윗이 속해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잖아요. 내가 어디에 속해 있다? 마치 수족관에 금붕어 하나 들어있듯이 금붕어가 어디에 둘러싸여 있습니까? 수족관의 물 안에 들어있지요. 우리는 이미 죄 안에 들어있어요. 거기서 파닥거려봐야 죄에서 못 벗어나요.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40편 12절. 그러니까 이거는 내가 뭐 죄 짓느냐, 죄 지은 게 뭐냐고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죄 지은 게 아니고 죄라는 수족관 안에 내가 들어있는 것을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 내가 노력한다. 그래도 내가 죄 속에서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지 않습니까? 노력해봤자 그거는 누구의 먹잇감이에요? 권력의 먹잇감이죠. 악마의 권력의 먹잇감입니다.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마지막에 ⑥번, ⑦번 했지요. 순서에 쌍둥이, 주체, 거세, 소환,자기폭력(희생) 그다음에 ⑥번이 뭐였느냐 하면 ‘결박’입니다. ⑦번이 ‘해방’이었지요.
결박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 14절, 성경에서 악마의 결박을 왜 하는지, 그거는 보다 넓게 세상을 보라고 성경말씀 이야기하는 거죠. 누가 읽어볼까요.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사람들을 공격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요한계시록 20장 2절, 누가 읽어보세요.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자, 이 말씀의 뉘앙스가 어떤 겁니까? 위에서 누가 조종하고 있단 느낌 들지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 힘으로 어떻게 됩니까? 구원될 수 없는 상황을 요한계시록에 분명히 이야기해줘요. 결박된 상태 안에서 네가 놓여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결박했던 결박한 그것을 누가 하나님이 보내서 체포를 해버리면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처럼 하나님에게서 결박된 그러한 악마에 의해서 구애받을 필요 없지요.
이 말은 결국 뭐냐? 내가 나의 성공, 나의 출세, 나의 희망에 내가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나의 소망에 내가 구애받을 필요 없어요. 나는 5년 후에 이렇게 될게, 나는 앞으로 이렇게 성공할 겁니다. 그 희망에 본인이 결박되지 마세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결박되지 마세요.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 있는 것도 하나님 은혜로 살아 있는데 주제넘게 남한테 근사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의 각오와 결심을 보여주는 것은 다 해봐야 마귀의 세력을 벗어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없으면 오늘 40편처럼 차라리 기쁜 소식에 즐기세요. 내가 죄 속에 있다는 걸 즐기고, 그 죄 속에 있으면서 이러한 버려져야 될 나를 나는 스스로 못 버리고 있었는데 예수 안에서 주님께서 새로운 나를 마련하셔서 현재 나와 바꿔치기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구원에 근거한 겁니다. 내가 그렇게 된다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주께서 이 땅에 실제로 오셔서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한 그 코스를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적용시키는 방법은 우리에게 뭘 적용시키느냐? 말씀을 주시면서 하는 거예요. 말씀 안에는 책이 들어있고 그 책 속에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우리가 책대로 그러니까 예수님 코스대로 가게 하시는 그 절차를 하나님의 긍휼로 은혜로 실시해주시는 겁니다.
40편 14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이거는 본인이 하는 게 아니고 당케 하소서, 하는 거니까 준비된 하나님이, 책에 오신 예수님이 현재 우리에게 이런 일을 벌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치와 낭패라 하는 것은 기존의 권력 속에 있는 인간들로서 제일 감당하기 힘든 시험이죠. “너, 그렇게 살다 인생 망한다. 낭패 당해.” 스탈린이 와서, “너, 말 안 들으면 죽어.” 너 죽으면 낭패잖아. 인생, 독재자의 말 들을래, 안 그러면 내가 보낸 비밀경찰의 총에 맞아 사형 당해 죽을래? 이건 뭘 의미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아, 니 말 들을래? 안 그러면 로마 황제 말 들을래, 안 그러면 네가 믿는 예수 말 들을래? 이렇게 협박, 공갈하는 이유가 뭐예요? 너, 잘못하면 인생 낭패 당한다, 그 협박이잖아요. 그런데 시편 40편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게 되면 그렇게 낭패케 하시는 것이 주님이라면 그 낭패케 하시는 타락과 죄 속에서 뭐가 있다? 하나님의 의가 있고 구원이 있고 그게 바로 영생이 있는 거예요.
우리의 고집, 우리의 자존심 때문에 싸우란 말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것 때문에 우리가 그것과 타협할 필요가 없다는 것. 가난하고 병들고 가정불화, 사업실패, 소송, 이런 협박, 원인불명, 사주, 궁합, 결혼, 우환, 질병과 불행, 우울증, 자살충동, 이거는 폐기돼야 될 것이기 때문에 생긴 거예요. 차라리 “주여, 이참에 데려가주세요.” 이러면 되는 거예요. 주의 복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어떤 경우가 오더라도 시편 40편대로 그대로 자알 진행되고 있는 증거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말씀에서 말씀대로 되는데 우리가 지식으로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가 뭘 그렇게 무서워하고 뭘 그렇게 떨었고 겁냈는지 생각해보면 그것이 다 버려야 될 우리 자아 때문에 생긴 현상인 줄 알고 이제는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자아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가감 없이 버릴 수 있는 그런 자유 함을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