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20.사라진 분

아빠와 함께 2023. 5. 1. 19:26

광주강의20230428a 마태복음6장 3절(사라진 분)-이 근호 목사

p.240 중간에 “70이레”에 관한 거죠. 70이레, 지난번에 설명했듯이 이 ‘이레’라는 것에 초역사적(超歷史的)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70×7=490년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490년이 아니에요. ×7에서, 7이 이레거든요, 이레 안에 역사도 있고 역사를 초월한 묵시도 있고 그렇습니다.

묵시는 시간의 변화가 없습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가는 게 역사겠죠.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이 7을 역사 빼고 왜 묵시라고 하지 않느냐? 그것은 7 안에 역사에서 묵시로 바꾸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p.240 중간에 보면 “70이레에 일어난다는 모든 역사적 내용들, 즉 예루살렘(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명령) 하달, 기름부음 받은 왕의 등장, 기름부음 받은 자의 끊어짐, 성읍과 성소 훼파, 언약 굳게 함, 제사와 예물 금지” 이런 것들이 있죠. 이것은 역사적으로 그대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역사적인 것과 묵시적인 것을 도출해야 되는데, 일단은 역사라는 게 있어야 되겠죠. 역사적인 것을 신약에서 육이라 보고 묵시적인 것을 영이라 본다면, ‘역사’에서 ‘역사적’과 ‘묵시적’으로 쪼개져야 영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냥 영이 나타나질 않아요. 그냥 영이 나타난다면 이것은 신비주의가 되겠죠.

역사가 있는데 역사가 육으로 되고 영으로 갈라지려면 이 역사가 심판받아야 돼요. 역사 자체에 대해서 심판받는 거예요. 역사라는 한 덩어리가 있고 이 역사 자체가 심판을 받게 되면, 이것은 종말로서 사라지는 거예요. 역사가 이제 끝장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영적(靈的)이라 할 때 바로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영적이라고 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신약에서 영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구약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되거든요.

‘나 은혜 받았다’ 라고 어떤 사람이 주장한다고 할 때, ‘그럼 이스라엘 역사하고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그 사람이 답변하겠어요? 이스라엘 역사하고 무슨 관련 있습니까? 이스라엘 역사와 관계성이 없으면 그건 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역사가 심판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어떤 사람이 ‘역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왜 심판받는가?’ 그렇게 생각하겠죠. 역사가 심판받는 그 표본, 샘플로서 이스라엘 역사가 있는 거예요. 인류의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의 확대입니다. 그 압축한 게 이스라엘 역사에요.

70이레가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 거예요. 70이레라 하는 것은 1부터 쭉 나가다가 70까지 나오겠죠. 시작이 있고 끝이 있잖아요. 끝이 있다는 것은 이미 그건 끝 다음에는 심판이고. 심판 대상이라는 뜻이죠, 끝이 있다는 것은. 끝장 보겠다는 말은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는 그런 뜻이 아주 강렬한 겁니다.

그래서 70이레에 이스라엘 역사와 더불어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역사가 심판받는다는 말은… 큰 동그라미가 인류라면 인류 중간(가운데 동그라미)에 이스라엘이 있고 그 주변에는 이방민족이 있어요. 이스라엘 이 땅을 약속의 땅이라 했죠. 약속의 땅 주변에 이방민족들이 배치가 되어 있었잖아요, 구약 때.

그럼 구약은 옛날 언약이에요. 언약을 벗어난 영적 세계는 없습니다. 언약을 벗어난 영적 세계는 없어요. 그리고 영적 세계라 하는 것은 그 언약이 완성되면서 주어지는 거예요.

약속의 땅 주변에 이방민족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심판받았잖아요. 심판받았으면 그다음에 심판이 여기(중심)서 여파가 일어나겠죠. 진동이 일어난다 이 말이에요, 진동이. 그러면 이 지진의 진원지가 이스라엘이라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머지는 지진의 여파로 인해서 와장창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서 마지막에 지구가 불탑니다. 지구가 불탈 때, ‘야 지구 불탄다.’ 생각하지 말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탈 때는 이미 지구 불탄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이 있던 자리가 불타기 때문에 언약이 없으면 항상 불탈 수밖에 없는 그런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영적이라 할 때 자꾸 모호하게 신비체험이나 짜릿한 그런 것 찾지 마시고 영적이라 하는 것은 ‘언약 자체가 영적이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 영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고 ‘역사 속에서 육과 영이 나누어진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요약하게 되면, 영적인 것은 어디 있느냐? 영적인 것은 구약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성이 있어야 되고 이게 연속성을 갖춰야 돼요. 구약 때 이스라엘. 실제 이스라엘 역사가 있잖아요.

보통 기도원에서 “은혜 받았습니다. 목사님 감사해요. 은혜 받았어요.” 막 이렇게 한다면, 방금 이걸 안다면, 그 ‘은혜 받았다, 안 받았다’에서 확인 작업은 뭐냐? “그렇다면 구약 이스라엘 역사와 어떤 관련성이 있습니까?” 물으면 뭐라고 답변하겠어요? “내가 기도해서 은혜 받았는데. 뜨겁던데. 구약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어? 상관없어.”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면 그건 자기 피부의 신경조직이 흥분한 거예요. 은혜 받은 게 아니고. 피부세포가 신경조직이 흥분한 거예요. 팔 아플 때 막 두드리면 뜨거워지거든요. 그러면 마비됐던 팔이 은혜 받아서 녹취 막 하고… 그렇게 될 수가 없죠.

사람들이 ‘나는 성경을 모릅니다.’ 라는 대표적인 말이 뭐냐? ‘나 기도 열심히 해요.’ 하는 그런 말입니다. 기도 열심히 한다는 말은 ‘난 성경에 대해서는 완전히 백지입니다’와 완전히 같은 뜻이에요. 목사가 설교하면서 ‘여러분 성경도 많이 알아야 되지만 기도 열심히 하세요.’ 라는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무슨 뜻이냐 하면 ‘목사 나는 성경에 대해서 아는 바 없습니다.’와 똑같은 거예요.

자, 그럼 다시 p.240 중간에 나오는 제가 나열했던 것, 실제로 역사성으로 있던 일을 하나님께선 거기서 영을 뽑아낸다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인데. (요 3:6) 맞죠? 육은 육이고 영은 영 맞죠. 분류 되는 것 맞죠. 하지만 그 영은 육을 심판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생기는 것이지, 육 말고 따로 영이 오는 건 아니다 이 말이죠.

마태복음 6장 3절에 보면 거기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말씀을 언급해드리겠습니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인간을 완전히 두 조각내는 거죠. 우리는 오른손이나 왼손이나 다 내 손이라서 차별을 안 두잖아요. 오른손, 왼손 나눈다는 것은 ‘내가 내 몸을 보는 것을 주께서 심판하신다’ 이 말입니다. 내가 내 몸을 보는 것.

주님께서 우리 몸을 관찰하고 평가해버리면 내가 내 몸을 봤던 것이 심판받아요. 벌써 이 말씀 자체가 뭐냐? 이게 영적이잖아요. 오른손, 여기 오른손 있죠. 왼손 있죠. 누가 봐도 이건 아주 신비로운 게 아니잖아요. 실제로 있잖아요. 있는데 이 실제적으로 사물체로 실체로 이렇게 역사적으로 분명히 있는 손이지만 그 손 속에서 주의 말씀이 와닿아버리면 여기서 영적인 말씀이 나와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일상이라든지 성도가 속해있는 모든 세상 속에서 주님께서는 날마다 부지런히 영적인 것을 계속 뽑아먹는, 뽑아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 방법은 말씀이 여기에 도달해서 말씀 안목에서 내 해석을 부정하고 주님의 해석으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라는 것, 내 몸이라는 실체을 다시금 해석하게 만들어버리죠. 성령이 와서 해석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신기한 것 찾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내가 아는 것과 주님이 아는 것의 차이를 한번 볼게요. 내가 아는 것과 주님이 아시는 것. 어떤 차이가 있느냐?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속해있는 주변, 이걸 공동체라 하죠, 국가라 해도 좋고 가정이라 해도 좋고, 이 공동체가 공히 같이 아는 것을 내가 알게 돼요. 내가 아는 것은 내 주변에 있는 공동체가 나에게 알려준 겁니다. 말해준 겁니다.

따라서 주님이 아신다는 것은 이 공동체에서 알려준 그 공동체 내에 없는 것을 주께서 알려주죠. 왜 그러느냐 하면 주님이 이 인간 공동체에서 추방됐기 때문이에요. 추방될 때는 추방된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말이 안 통하니까 추방된 거죠.

그러나 인간들이 공동체에서는 예수님을 추방했지만 인간들은 뭐는 추방 못하느냐 하면 해와 달과 별들은 인간세계에서 추방 못하고 있죠. 문짝 떼가지고 쑤신다고 별이 없어지고 그렇지 않죠. 추방 못하고 있어요.

인간들은 해, 달, 별들을 왜 추방하지 않는 겁니까? 해와 달과 별은 인간 공동체에서 통하는 그러한 언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해와 달과 별은 인간이 사용하지 않는 다른 언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시편 19편, 전에 설교할 때 한번 한 것 같은데요.

시편 19편,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절에, “언어가 없고” 언어가 없다는 거예요.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다음 4절에,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해와 하나님 사이에, 달과 하나님 사이에, 별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로 통하는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통하는 언어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인간의 공동체가 알고 있던 그 언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해와 달과 별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데 왜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거예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를 사용해서 공동체가 서로 통하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말은 생각들이 단일화 되었다는 뜻이에요. 생각들이 똑같은 거예요. 생각들이 하나로 집결하고 단합되어버리면 공동체가 인정하지 않는 언어를 쓰는 사람은 도태대상이 되는 겁니다. 살해대상이 돼요. 바벨탑이 그런 거죠. 똑같은 언어를 썼기 때문에 탑을 쌓고자 했다.

해와 달은 주님을 추방하지 않았지만 인간들이 추방한 이유는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그 언어, 그 언어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그 의미와 매 이야기할 때마다 충돌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당신과 내가 다르다, 이렇게 할 게 아니고 철저하게 예수님을 안다면, ‘당신과 내가 다르다’ 이러면 안돼요. ‘당신이 속해있는 세계와 내가 속해있는 세계가 이렇게 다르다’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이야기해요. 18장 36절에 보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이렇게 나오죠.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이야기하지 말고 인간들이 이야기해야 돼요. 그러나 인간들은 그 이야기를 못해요. 왜냐하면 예수님도 자기들 세계에 속했다고 여기고 다만 예수님이 귀신들려서 우리끼리 진리로 구축해놓은 이 의미를 예수님이 정신이상이 돼서 안 받아준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소속자체가 환경자체가 다른 환경이라는 생각은 도저히 안 해요. 안하고 자기들의 세계, 그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제가 아까 이야기한 역사에요, 역사. 역사 자체가 심판받는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도저히 성립 안돼요. 왜? 역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심판을 받아요. 다 끝나야 평가를 받을 거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역사가 진행되는 이 인간세계 대해서 이미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언약세계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 의미로 인하여 인간의 세계 모든 것은 이미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지금 제 이야기가 아까부터 하면 ‘공동체가 보는 것과 내(예수님)가 보는 것이 다르다’ 그 입장을 제가 지금 견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더 나가서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주님을 식별할 수 있느냐? 주님을 식별할 수 있느냐. 식별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가능치 못하죠.

왜 예수님을 식별하지 못하느냐 하면 공동체에 있는 모든 같은 의미를 사용하다보면 여기서 동일의식이 발생돼요. 너와 나, 우리는 하나이다. 잠시 의견 다르더라도 이야기해보면 합의점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동일의식을 갖고 있는 겁니다. 동일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단하게 결집되어 있고 단결되어 있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신학적으로 논쟁을 많이 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모두를 한통속으로 유도해버린 겁니다. 주님께서 만들어버린 거예요.

지금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역사를 주님께서 어떻게 심판해서 육에 속한 세계와 영에 속한 세계를 어떻게 분류해내느냐, 그 작업과 관련되어 있는 겁니다. 역사를 어떤 식으로 심판할 것인가?

역사는 심판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죠. 그러면 ‘역사를 어떻게 심판할 것인가’라는 그 방식은 주님께서 일찍이 먼저 역사에 찾아오셔서 독생자 예수님이 이 땅 역사 속에 들어왔다는 자체가 역사가 이미 심판받은 거예요. 모세가, 나를 믿지 않음으로 이미 너희는 심판을 받았느니라. 요한복음 3장에 나오죠. (요 3:12-18)

우리가 그러면 예수님이 쓰는 언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아는 그 의미를 우리가 알아채면 되지 않겠는가? 그걸 우리가 캐치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걸 캐치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가 쓸 테니까 이 질문에 답변해보세요. 질문은 두 개입니다.

첫째, 지금의 나와 천국의 나와 같은가, 다른가? 두 번째, 천국 갔을 때 나 말고 다른 이와 나와 같은가, 다른가? 천국 갔을 때. 집사님이 천국 갔을 때 저하고 같은가, 다른가? 이 질문. 같다면 어떤 점이 같고 다르다면 어떤 점이 다른가? 그 질문.

제가 일부러 질문을 끄집어내서 그렇지, 사실은 마음 속에 이 질문하고 싶어서 환장을 했죠. 또 질문 잘못했다고 꾸중 듣지 않을까 그게 겁나서 그렇지, 사실은 되게 궁금했던 겁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 질문 자체가 우리를 둘러싼 인간 공동체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 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지금의 나, 나와 다른 이, 그러니까 이것은 나와 타인, 지금의 나와 천국 갔을 때 나와 과연 내가 다른 타인이냐, 아니면 지금 그대로 나의 동일성을 유지하느냐 그 질문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인간 공동체에서 나라는 것은 남들이, 특히 가까운 부모가 되겠죠, 삶의 환경이니까, 부모가 나에게 알려준 그것이 나를 구성합니다. 그러면 나라 하는 것은 이미 나라는 의식이 있기 전부터 타인이 관여했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가 70, 80, 90이 돼도 계속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어 있어요. 남들의 평가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와 천국의 나라고 했을 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지금의 나라 할 때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나답게 만드는 타인들을 같이 동반하고 있죠. 그러면 천국에 갔을 때, 지금의 나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죽고 난 뒤에 부활해서 무덤에서 나와서 주님과 함께 있다 할 때 사람들은 자기만 달랑 함께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이 나가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남들의 제작품이에요. 내 속에 타인의 요소가 가득 들어있는 거예요.

일종의 고로케? 안에 감자도 들어있고 양파도 들어있고 으깬 게 들어있죠. 고로케를 쪼개보면 거기 고로케는 없어요. 양파 쪼가리, 감자 으깬 게 들어있지, 고로케는 없어요. 고로케라는 명칭은 그렇게 으깬 걸 가지고 추후에 그걸 요리제품 명칭을 고로케라고 붙인 것뿐이지, 이름 자체는 아무런 실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름과 그 실체가 동일하지 않아요.

지우개가 있는데 이 지우개 안에는 지우개 없어요. 지우개 안에는 털로 되어 있고 뭐 이렇게 되어 있지, 지우개는 없어요. 손잡이 떼버리면 이게 지우개입니까? 털 떼면 지우개입니까? 지우개 아니죠. 지우개 요소가 해체되어버리죠.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 보내면서 우리를 해체시키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미워! 못됐어! 그런 게 아니고 우리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싼 그 인간 공동체가 함께 있기 때문에 심판 차원에서 우리를 거기다가 분쇄해버리는 겁니다. 다 부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의 나는 천국의 나로 못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마치 이 세상 역사 속에 나는 타인이 없으면 내가 없는 것처럼. 성경에서 민수기 22장에 보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대목이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언어가 없다고 알려진 당나귀가 주인인 발람 선지자에게 막 대들고 반발하고 말을 해버려요.

발람 선지자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이거 무슨 귀신인가? 작대기가지고 막 때리죠. 당나귀가 좀 당나귀다워. 네가 왜 말을 해? 이 당나귀야. ‘주인님, 왜 때리십니까?’ 이게… 그냥 때릴 때 당나귀가 찡그릴 것 같으면 우리가 참아낼 수 있는데 그걸 말로 표현해버리면 기절해버려요. 기절하겠죠.

천국의 나는, 나를 되게 하신 분은 나보다 선제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만드신 거예요. 예수님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형상이 있어요. 예수님의 형상으로 나를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나와 예수님의 형상은 동질성이 돼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에베소서 1장 23절에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두 개의 몸이 아니고 하나의 몸이다. 하나의 몸이에요.

에베소서 1장 23절도 그렇고 4장 5절, 6절도 마찬가지죠.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6절,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하나 되기 위해서, 너희들은 둘이 아니고 그리스도 하나의 몸 안에서 있다는 걸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줬다고 되어 있어요. 에베소서 4장에 보면 6절에 나와 있죠. 7절 전부다 특히 13절까지.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인간세계 언어로서는 납득하기 곤란해요. 인간세계에서는 아무리 스승한테 뭘 받아도 나는 나고 너는 너에요. 인간세계에서는 타인의 것으로 교육받고 타인에게서 아무리 도움을 받아도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에요. 최종적으로 나의 절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질문이 바로 나의 절대성을 근거해서 이 질문이 나온 거예요. ‘천국 갔을 때 다른 이와 나와 같습니까, 다릅니까?’ 라는 질문이 여기 나는 나만의 고유성, 독보성. 나는 끝까지 나로 모든 것을 종결짓는 것을 나는 포기할 의사가 없다고 단호함을 갖고 있는 그 나. 그 나가 다른 사람하고 똑같이 됩니까? 라고 물은 거예요.

그러면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기초, 기반은 닦았다고 치고. 물론 일방적 생각입니다만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강의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해놓고 본격적으로. 벌써부터 어질어질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내 세계 내 나라 따로 있다. 나는 유대인의 왕인데 내 나라 따로 있다. 내 나라 따로 있다는 이 말씀은 이 세상과 차별된다는 뜻이거든요. 그냥 차별만 될 게 아니겠죠. 더 나아가서 이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겠다는 거예요. 지구 폭발이에요. 지구를 폭발시키겠다. 다 없애버리겠다. 해와 달과 별이고 뭐고 다 없애겠다. 다 폭발하겠다는 거죠.

그래서 이걸 거꾸로 다시 올라가게 되면, 지구를 폭발하겠다. 왜냐? 이 세상이 나의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그런데 그분이 누구라고요? 주님이라고요. 그분이 주님이거든요. 그러니 주님은 심판하시는 분. 인간세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 나라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심판하겠다는 말은 이 세상에 협조하겠다, 이 세상이 번영하도록 도와주겠다는 그것과는 정반대죠.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내가 놀아나지 않겠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 심판하시는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심판받을 요소로 가득 차있다’ 이걸 인정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심판받을 요소로 가득 차있다. 심판받을 거리만 계속해서 양산하고 있다’ 이걸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걸 이제 우리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굳이 알 필요 없다고 우기는 것이 이 세상이에요. 왜? 오른손이나 왼손이나 다 내 손이기 때문에. 나의 절대성, 독보성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굳이 오른손, 왼손으로 나눌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오른손하고 왼손, 다르지만 내 몸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걸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은 공격하는 거니까 공격하는 편이 주님이니까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주께서는 파쇄해버리죠. 균열, 그 안을 쪼개버려요. 그 안을 쪼개버린다고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거기에 대한 답변은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답변을 제공해줄 수가 없어요. 그건 당연한 거죠. 답변 못하기 때문에 심판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답변을 끄집어낼 수가 없죠.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왜, 왜 이 세상은 심판받을 요소가 계속 나오느냐?’ 이것을 우리들이 이 강의를 통해서 추적해봐야 됩니다. 왜 이 세상은 심판받을 것들이 계속 나오는가? 일단 그 절차를 제가 한번 쭉 써보겠어요.

다수→ 둘의 만남→관계 출현→ 공통점 찾아가기→ 빈 자리에서 주체 등장→ 빈 자리와 등장된 주체의 싸움→ 빈 자리(빈 무덤)의 승리.

다수부터 출발합니다. 둘의 만남→ 관계 출현→ 공통점 찾아가기→ 빈 자리에서 주체 등장→ 빈 자리와 등장된 주체의 싸움→ 빈 자리, 다른 말로 하면 빈 무덤의 승리. 이런 절차가 진행됩니다. 이 절차 하나하나 이동하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궁금했던 것, 고민거리가 다 담겨있어요, 전부 다.

첫째, 다수. 인간의 시각, 인간의 눈에는 다수가 있습니다. 다수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죠. 여럿. 예를 들면 대구의 시립 합창단에서 헨델의 합창을 공연하려고 했는데 대구시 종교자문연합체에서 합창 공연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그 마지막 악장에 신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한 거예요.

자, 종교협의체가 기독교만 있는 게 아니고 천주교만 있는 게 아니고 불교도 있고 여러 가지 다른 종교도 있겠죠. 그게 뭡니까? 단일한 겁니까, 다수입니까? 다수에요, 다수.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대구시에서 종교협의체 폐지시켰습니다. 간단하죠. 폐지시키죠. 폐지시키면 그게 뭐냐 하면 빈 자리가 등장하는 거예요. 공백. 공백이 등장해요. 공백이 등장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가 날아가버린 거예요, 존재 자체가.

다수입니다. 이것은 세 살, 네 살 누구라도 서른 살, 사십 살 누구라도 자기 눈에 자기만 있고 아무도 없는 게 아니고 여럿이 있어요. 여러 명이 있어요. 인간의 모든 의미와 의식은 이 다수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수하고 다 사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중에서 친밀도가 가까운 쪽에서 둘의 만남이 이루어져요. 이 둘의 만남,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 우정이라 해요. 사랑, 우정.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애가 있는데 어린 애가 태어났잖아요. 어린 애가 태어났을 때 아빠, 엄마에게서 어린 애가 태어나잖아요. 그럼 아빠, 엄마 보기에는 식구가 세 식구잖아요. 그런데 그 갓난애는 식구를 세 식구라고 보지 않습니다. 둘 중의 하나 후보감을 탈락시키고 우선 협상대상을 먼저 골라요. 그게 부모들은 궁금해가지고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렇게 묻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와 친밀도가 가는 사람과 둘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둘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관계라는 게 생겨요. 관계라는 게. 두 사람 사이에 관계가 되면 이것은 하나의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하나의 관계에 종속되면서 다수 중에 우리, 다수들 중에 우리가 따로 설정돼요. 우리가.

그런데 둘이 만나다가 삐쳤어요. 삐치면 뭡니까? 관계가 끊어지겠죠. 끊어지면서 인간은 전에 있던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 후보감을 학수고대하게 됩니다. 너 아니면 친구 없는 줄 아나? 나 다른 사람, 친구 있어. 기다리게 돼요. 자, 기다리는 이 자세, 이 태도를 한번 봐요. 자기 손해 봅니까, 자기 손해 안 봅니까? 절대 손해 안 봐요. 자기 절대성이죠.

그래서 인간은 다수 중에서 자기와 관계 맺기를 고대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외로움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번 이렇게 아는 관계라도 언젠가는 더 좋은 게 있으면 알아서 좀 떨어지고 다른 사람이 나한테 붙었으면 좋겠다는 것. 그러려면 항상 세 사람과 사귀든 네 사람과 사귀든 본인은 늘 외로워요. 외로움을 유지시켜줘요, 외로움을.

외롭다는 게 뭐에요? 손해 보기 싫다는 거예요. 내게 조금이라도 손해 보기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 다닐 때 그런 거 있었어요. ‘취미가 뭡니까?’ 그러면 ‘고독.’ 고독이 취미래요. 그것은 취미 아니라도 나이 들면 다 돼요. 나이 들면 다 고독해져요. 인간은 백날 변장해봐야 소용없어요. 결국 나이 들면 변장거리 다 떨어집니다.

부.무.떨.깨. 부서지고 무너지고 떨어지고 깨어지고. 나이 들면 다 떨어져요. 비듬만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머리카락만 떨어지는 게 아니고 다 떨어져요. 자식도 싫고 손자, 손녀 다 싫어. 다 떨어져나가요. 다 떨어져나갑니다. 나의 외로움을 찬양해주고 나의 외로운 절대성을 선한 일로 인정해주는 그런 사람하고 관계 작대기만 딱 쥐고 여기 붙어라, 누구든지 나의 고독의 위대함을 찬양해줄 사람은 붙으라고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럼 관계가 출현했잖아요. 그러면 사랑관계니까 둘이 이제 잘해보자고, 다수 가운데 또는 다자 가운데서 우리를 따로 한다고요. 그러면 우리라는 것이 만났다고 우리가 됩니까? 공통점을 찾아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혈액형은요?’ ‘A형.’ ‘아, 맞네.’ ‘그러면… 짬뽕?’ ‘나도 짬뽕.’ ‘아, 맞네.’ ‘놀러갈 때, 산? 바다?’ ‘바다.’ ‘맞네.’

계속 찾아가고 또 찾아가요. 언제까지? 틀어지는 게 나올 때까지. 계속. 틀어지는 게 나올 때까지. 왜냐하면 그래야 고독이 정당화되니까요. ‘저 사람하고 잘해보려고 그렇게 애썼지만 결국 안 맞는 게 있더라. 그래서 갈라섰어.’ 이게 나올 때까지. 그런데 이런 내 행동이 하등 이상하지 않아요. 왜? 다수가 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이.

교회 가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 뜻을 주님이 이루어줄 것을 내가 쥐었던 관계 작대기 옆에 예수님이 걸려들기를 바라는 거예요. 낚시 놓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건지기를 바라는 거예요. 공동체를 찾아가는데 공동체가 결국은 바닥납니다. 소진 다 했어요.

‘나 당신의 모든 면을 다 좋아해. 하지만 팔 아픈 것은 나 용서가 안 돼. 헤어져.’ 뭐 이런 거. 그러면 팔 고치고 다시 합류하면 안 되느냐? 한번 떨어진 건 딱 싫어. 고장 날 가능성이 더 심해. 우리 헤어져. 인간의 만남은 항상 헤어질 것을 단도리하면서 만나요. 너 아니면 내가 안 되는 줄 알아? 너한테 죽자고 붙들 타입이 아니거든. 이걸 모든 다수가 다 그래요.

그래서 가보면 둘 사이에 공통점이 결국은 없을 때까지 찾아요. 지독하죠. 결국은 우리 사이는 안 맞아. 세상에, 절대적인 존재하고 맞는 존재가 누가 있어요. 모든 인간이 절대자인데 모든 인간이 신인데 어떻게 신이 신을 모실 수가 있고 섬길 수가 있어요. 끝까지 가보면 안 맞아요.

그 안 맞는 빈 자리, 이걸 공백이라고 합니다. 결국 공백이 등장해요. ‘그래, 안 맞으면 나 혼자 살지.’ 그게 뭐냐 하면 주체에요. 그게 주체라고요. 주체라 하는 것은 처음부터 주체가 아니고 처음에는 자아가 돼요.

이 자아는 남들이 나한테 가르친 거예요. 아까 했죠. 내 주변의 상황에서 언어든지 뭐든지 의미를 다 나한테 고로케 내용물 채우듯이 꽉꽉 채운 거예요. 내 속에는 뭐만 있다? 남의 것만 있어요. 내 건 없어요. 창의적인 것은 하나도 없어요. 다 남들이 이야기한 거예요. 아이큐는 어느 정도 되어야 되고 대학은 어느 정도 나와야 되고 성깔은 이 정도 해야 되고 이건 양보해야 되고 그건 양보하면 안 되고. 전부다 남들이 다 한 거예요.

그런데 주체가 등장하려면, 주체는 내가 남들과 하나 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모든 것이 실패가 되고 좌절될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 등장하는 것. ‘나는 나다. 나는 나를 위해 살아야지 그 외에는 필요 없어.’ 할 때 남이 떨어져나간 그 빈 자리에서 비로소 주체가 등장합니다. 절대적 자아가 주체에요. 주체. 빈 자리에요.

그럼 빈 자리가 있으니까 그다음에 빈 자리를 그냥 두면 공허하잖아요. ‘외로워 못 살겠어요. 아무나 오세요.’ 이러고 있단 말이죠. ‘나하고 놀아줄 사람 없어요?’ 이런 거. 그럼 ‘아무도 나하고 놀아줄 사람 없으면 나는 책하고 놀지.’ 이러면 책도 뭐가 돼요? 책은 그냥 책입니까? 책 안에 누가 있어요? 저자가 있잖아요.

나는 뭐 나이 60되서 남하고 놀기 싫고 난 TV보고 싶어. TV드라마 보면 누가 나옵니까? 내가 관계하고 내가 마음 주고받고 싶었던, 내 조건에 맞는 사람이 등장하는 거예요, 드라마에. 내 인물에는 저 정도 인물 되어야 되고 내 학력은 저 정도 학력 되어야 되고 내가 가는 카페는 이 정도 호텔 카페여야 되고. 그게 드라마에 다 나온다고요, 드라마에. 그리고 나를 괴롭히는 거 누가 패주면 좋겠다. 그 패주는 건 <모범택시2>에서 다 해주잖아요. 이름 뭐고? 김도기가 다 해주잖아요. 드라마 보면 거기에 푹 빠지는 거예요. 내 타입에 맞는 사람을 골라잡을 수 있기 때문에. 푹 빠지는 거예요. 내 빈 자리를 채우는 거예요. 내 빈 자리를. 빈 시간을.

그럼 <모범택시2>가 끝나고 <모범택시3> 안 나오나? 모범택시2하고 3나올 때까지 빈 공간이 있죠. 빈 공간 있으면 허전하잖아요. 허전하면 뭐 다른 드라마 또 찾아봐야 되죠. <조선시대 변호사> 찾아보든지 뭐 이렇게 또 찾아보는 거예요.

둘의 만남이 없으면 여기서 사랑관계가 형성이 안돼요. 내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못 받아요, 혼자 있을 때는. 뭐 현빈이 있든지 누가 있든지 가상적으로 하든지 이렇게 해야 돼요.

꿈 이야기하고 첫째 시간 쉽시다.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아주 생생한 꿈을 꿨어요. 우리 집에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는데 우리 집에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아가씨가 세 들어 있어요. 세 들어 있었는데 꿈속에 보니까 1970년대에요. 전화기 하나 당첨되기 힘든 거예요.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딱 울리는 거예요. 성경공부에 방해되니까 받았죠. ‘여보세요?’ 하니까 ‘저 문간방에 누구 있죠?’ 그 누구 이름도 어떻게 꿈인데 그대로 기억나요. 여자 아가씬데 이름이 남자 이름 같이 일산이에요, 일산. ‘거기 일산이 있죠? 전화 좀 바꿔주세요.’ 옛날 70년대에는 전화기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성경공부 하다가 전화 받는 거예요. ‘그래, 야야.’ 뭐라 하면서 ‘다음에 만나자. 나 지금 우리 주인집에서 받는 거야.’ 그러고 가버려요.

그러니까 성경공부 하는 그 세계와 성경공부 세계에 그 일산이라는 아가씨가 참석은 했지만 자기 세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오늘 공부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녹취할 때 정신없이 아무 생각 없이 녹취하는 그 이야기 들으려고 내가 이 꿈을 꿨는가? 성경공부 하는데 완전히 전혀 상관이 없어요. 전혀 상이한 이질적인 두 세계가 성경공부라는 역사적 현장에 같이 있는 거예요.

걔는 자기 친구하고 만났죠. 둘의 만남. 외로우니까 빈 칸이 있으니까 그걸 채우는 걸 사랑이라 하고 우정이라 여기는 거예요. 내 마음에 드는 사람 없을까 계속 찾고 있으면서 자기는 주체로서 더욱더 단단해지겠죠.

그러면 이 빈 자리와 주체의 싸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다음 시간에 10분 뒤에 봅시다.

 

 

광주강의20230428b 마태복음6장 3절(사라진 분)-이 근호 목사

왜 인간은 타인과의 공통점을 가질 수 없는가? 그것은 그림을 그려보면 되죠. 분명히 정사각형 환경 속에 있는 정사각형 물건을 여기(정면)에 있는 내가 쳐다봐요. 똑바로 쳐다보죠. 폭이 얼마고 길이가 얼마라고 보죠.

이것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 수학적 직선이라 하는데 수학적 직선 거리 안에 포함되는 것을, 나는 그 안의 걸 포착했다. 난 정확하게 이 정사각형을 본다. 이걸, ‘함수로 지배한다. 수학 함수로 지배한다.’ 고 어려운 말로 이렇게 할 수 있는데요.

이 지점(정면)에서 보는 게 A라면 B라는 사람이 정면이 아닌 옆에서 이 정사각형을 보게 될 때, 정사각형이 하나의 물건이고 사물이고 그림이라면 이 그림을 지탱하고 있는 환경조차도 삐딱하고 안의 물체도 삐딱하게 이렇게 보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옆에서 보니까. 옆에서 사선으로 보니까 자기 눈에는 뭐든지 삐딱하게 이렇게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둘(A와 B) 사이에 만나서 공통점이 있을 리 없죠. 똑같은 사물, 똑같은 사건, 똑같은 인물을 대할 때 내가 속해있는 그 모습과 남이 보는 것하고는 차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성장과정이 다르고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차이나요.

그러면 인간은 똑같은 게 아니냐? 똑같은 것만 골라서 채집해서 담았죠, 본인이. 그 사람을 만날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맞춰주려고 똑같은 것, 이해하려고 애썼던 요소들만 급조해가지고 ‘나 당신하고 생각이 똑같아요.’ 이런 식으로 담아오는 거예요.

인간은 같을 수가 없죠. 같을 수가 없는 자들이 다수 모여 있으니까 이게 지옥인 거예요. 달리 지옥이 아니고 이게 지옥이에요. 불이 뜨거워서 지옥이 아니라 ‘세상에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왜 이리 없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되는데 인간이 그러면 외롭잖아요.

나의 외로움을 들어줘야 내가 주체로서 절대적 주체로 유지가 가능합니다. 신하가 있어야 왕질을 하죠. 자기 혼자 왕질합니까? 나 하는 일에 ‘아휴, 맞습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해줘야 자기가 이 땅에 살맛이 난다 이 말이죠.

아무리 많은 사람을 사귀고, 어떤 사람은 선을 100번 본 사람이 있는데, 100번 만나서 맞다, 맞다, 맞다, 맞다,… 아니구나. 마지막의 공백. 건너갈 수 없는. 공백이 뭐냐 하면 공백이란, 동일성이 누락된 것. 동일성이 끊어진 거예요. 동일성이 누락된 걸 말합니다.

‘정도껏 비슷하면 대충 하자. 그래, 서로 비슷한 거 많으면 그렇게 싫지 않으면 결혼하지.’ 이게 1990년도까지의 20대들이 가진 결혼인식이었습니다. 2000년 들어와서 완벽하게 맞아야 결혼해요. 완벽하게. ‘집안에서 대충 맞으면 살다보면 맞춰지는 거야. 그래, 살면서 맞춰가겠다.’ 1990년 정도에 결혼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본인이 주체가 된 거예요. 집안 어른이 주체가 아니고 본인이 결혼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하자를 줄이는 쪽으로 보다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드디어 만났다, 완벽한 사람.’ 만났는데 사실은 완벽한 사람을 만난 게 아니고 완벽해주기 위해서 저쪽에서 연출을 했죠. ‘결혼하면 보자. 너 죽여 버린다. 결혼하면 봐주는 거 없어.’ 속으로 감추고 ‘그래 그래. 당신은 이렇게 해. 당신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손에 물 안 묻히고…’ 연출을 한 거죠. 어떤 인간도 결국은 공백 빠지고 둘 사이가 하나 되는 방법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 다음에, 빈 자리 생겼죠. 그 빈 자리는 뭡니까? 자기의 동일성이 없죠. 거기서 하는 말이 ‘내가 그 사람하고 결혼하려고 한 3년 사귀었는데 나중에 말이 안 통하더라.’ 이러죠. 말이 안 통한다.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은 내 자리가 내민 육지와 저쪽 육지에 다리가 없다, 건널 수 있는 브릿지가 없다는 말이에요. 이게 빈 자리, 공백이에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이.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고 모든 인간이 그래요. 자기와 똑같은 인간은 없어요. 그러면 이 세상에 다수의 세계, 다자의 세계가 한통속이라는 말은 빈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아요. 전부다 각자 자기가 작은 신으로 작은 god로 행세한다는 점에서 똑같아요. 그런 점에서 동일한 거예요.

이 빈 공백을 겨냥해서 누가 오시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와버려요, 말씀이. 이 빈 공간에. 주님이 여기 빈 공간에서 출몰해버려요. 그럼 주님이 오셨다는 말은 예수를 믿을 수 있다, 없다? 없죠. 끊어졌음을, 끊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또는 사도의 말이, 성경말씀이 이 빈 공간에 출몰합니다. 공백이 있다, 가 아니라 공백의 출몰. 출현 정도가 아니고 출몰. 아예 어떤 인격이 등장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기 p.241에도 나옵니다만 히브리서 10장 29절이요. 이것은 약간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9절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8절부터 29절을 보면,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생각 안합니다.

왜 생각 안할까요?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할 때는 내가 통해야 말을 해요. 주님의 모든 성경말씀은, 나의 자아가 아니라 나의 주체를 주체되게 하기 위해서 형성된 모든 의미와 이게 끊어져 있어요. 단절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을 보고 ‘아이고, 지옥 형벌이 무섭구나.’ 이러면 통하는 사람이죠. 그게 아니고, ‘뭐야 이거? 내가 굳이 이걸 꼭 알아야 돼? 언약의 피를 알아야 돼? 하나님 아들을 밟고, 밟고 안 밟고 그건 내 마음대로지. 내가 좀 밟았다고 그게 뭐 어때서?’ 이렇게 된다니까요.

28절,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이렇게 되어 있죠. 28절, 29절 무슨 뜻인지 여러분들 아시죠? 이 이야기를 이방민족에게 한 겁니까, 이스라엘에게 한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한 거예요.

아까 첫 번째 시간에 강의 첫 번째에 한 게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샘플 삼은 거예요. 샘플로 잡고 그들이 원치 않는데 율법을 줘버려요. 율법을 줬을 때 그 이스라엘 사람이랑 똑같은 사람이에요. 지금 여기 이야기하는 다수의 세계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들은 모세 율법을 이렇게 대하고 했지만 결국 그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멸망했습니다. 심판받았어요.

그러니까 선지자들은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율법을 준 거예요, 모세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잖아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는데 수요일에 자세히 못했지만, 민수기 바로 앞에 있는 레위기 26장 17절 같은 경우에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나오죠. 그리고 16절에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그렇게 되어 있죠.

31절에 보면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36절에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대적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같이 서로 천답하여 넘어지리니 너희가 대적을 당할 힘이 없을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레위기 26장에서는 조건이 들어있어요. 만약에 네가 율법을 어길 경우엔 이렇게 된다 했는데 가만 보게 되면 ‘율법은 어기라고 준 거야’ 라는 뜻으로 준 거예요. 주고 내가 약속한 대로 율법을 어겼을 때 반드시 이런 결과라는 것을 너희를 샘플로 해서 내가 보여주는 용도로 너희들에게 역할을 맡겼다는 거예요, 역할을. 역할을 맡겼다는 거예요.

아까 제 꿈속에서 성경공부 하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려가지고 문간방에 있는 아가씨한테 전화 바꿔줬을 때 우리의 역할은 뭡니까? 성경공부 못하고 멀뚱하니 저 사람들 사적인 이야기 들어야 되는 역할. 그 역할 한 거예요, 그 역할.

그게 바로 성경공부에요. 아하, 다르구나. 저 아가씨 나라하고 내가 속한 나라가 저렇게 다르다는, 요한복음 18장 이야기가 실제로 그대로 확인되잖아요, 그 속에서. 아이고, 꿈 고마워라. 꿈 아니었으면 설명 못할 뻔했다.

주님께선 아까 그 절차 있죠. 다수에서 둘의 만남, 관계 출현, 공통점 찾아가기, 빈 자리의 주체 등장, 빈 자리에서 공백의 출몰. 이것이 공백 주체의 출몰. 주체가 두 명 돼버렸어요, 두 명. 인간세계에 속하지 않는, 인간과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과 말이 섞이지도 않는 그분이 출몰해버린 거예요.

마치 구약 때는 율법이라는 돌판을 줬듯이 신약에는 아예 돌판 정도가 아니고 말씀이 육신이 돼서 출몰해버린 거예요. 두 종류의 주체가 등장해요, 두 종류의 주체가. 두 주체가 등장하니까 인간들과 안 싸울래야 안 싸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뭡니까? 아까 처음에 역사가 먼저 있고 역사가 둘로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가 나올 때 역사 내부에 이 둘이 싸움을 통해서 전쟁을 통해서 둘이 분류가 된다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역사 안에 이미 묵시가 들어있었던 거예요. 잠복되어 있었던 거예요. 특히 이스라엘에게는. 이스라엘 다니엘서 이런 이야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율법이고 말씀이고 선지서이고 하나님의 계시잖아요. 계시 안에 영적 세계와 육적 세계 둘 다를 포함하고 있어요. 우리는 육적인 것은 태우고 영적인 것만 자꾸 탐을 내는데 그러면 안돼요. 우리 주체가 내가 다른 주체와 싸움의 대상이 되어야 됩니다.

다시 히브리서 10장 29절을 보면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이 대목 설명하는데 전화벨 울린 거예요. 그 문간방 아가씨 온 거예요.

“아줌마, 아저씨들 뭐하고 있으세요? 전화 이렇게 바꿔줘서 감사해요.” “아가씨, 잠깐만. 히브리서 10장 29절 무슨 말인지 좀 들어볼래?” “싫어요. 나 지금 바빠요.” 그럼 그 아가씨는 뭐냐? 전화 받고 자기 방에 가서 잠자는 역할 한 거예요. 자는 역할 한 거예요.

우리가 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습니까? 못하죠. 왜? 그 사람은 그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온 환경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갇혀있는 거예요. 말씀이 씨도 안 먹히죠. 막혔으니까. 공백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조용하게 이 땅에 살다 조용하게 가시는 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시비 거는 쪽으로 가버려요. 그게 뭐냐 하면 빈 자리에 주체의 등장과 싸움, 그다음 제일 마지막 절차가 뭐라 했습니까?

‘빈 자리’ 그다음에 여기 아까 설명을 놓쳤네요. 자리의 출몰이고 이게 빈 자리가 돼요. 인간에게 빈 자리에요. 끊어진 자리. 출몰인데 ‘빈 자리의 승리’라 하면서 이 빈 자리에 괄호로 뭐라 했습니까? 빈 무덤이죠. 빈 무덤이 승리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공백으로 오셨다 이 말이에요. 오셨을 때 어떤 일을 하셨느냐 하면… 다수의 인간들이, 예를 들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 사회, 유대인 국가라 합시다. 그 사람들도 따져보니까 모든 인간에게 기대하기는 글렀다는 사실을 자기들도 알고 있죠. 그럼 이걸 뭐로 덮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으로 덮어요.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이니까. 하나님의 약속으로 우리는 하나라고 이렇게 해요. 하나라고. 이게 뭐냐 하면 종교입니다.

종교란 빈 공백의 허전함을 덮기 위한 겁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살고 내 멋대로 살았을 때 신을 상정한다면 신을 염두에 둔다면 신의 절대적인 원하는 기준 있잖아요. 그 기준, 표준에 자기가 미흡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죠. 그럼 그 빈칸을 그냥 두게 되면 죄책감이 발생하잖아요. 그럼 그 사이를 뭔가 메워야 돼요. 메워야 되는데 그 메우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메우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과의 관계죠.

흔히 목사들이 이런 이야기하죠. 십자가가 왜 이렇게 cross되어 더 수직적인 줄 아나? 하나는 인간 사랑이고 위에서 내려오는 수직적인 것은 하나님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하라고 이렇게 된 거다. 이런 구라를 떨고 있잖아요.

바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이건 자기의 허전함을 성경말씀, 율법화 된 성경말씀으로 자기가 할 도리는 하되 미흡하게 남아있는 빈 공백의 자리를 하나님 것으로 마저 채우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다치지 않죠. 자기는 날마다 회개하면 되니까. 반성하면 되니까요. 반성하는 자기는 귀한 거니까. 나에게 반성한 나는 귀하고 그걸 용서해주는 하나님의 사랑도 귀하고. 두 개의 귀함이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룬다. 그런 것들로 그 유대사회는 민중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종교 했을 때 이 주체는 부정됩니까, 엄연히 살아있습니까? 살아있죠. 기존의 주체들의 다수와 하나님의 사랑이 결합해서 자기들을 구원받은 택한 민족이라고, 선택받은 택한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거예요.

주님께서는 여기에 하나의 주체로서 쓱 끼어듭니다. 끼어드니까 이쪽(유대사회)에서 예수님을 내쳤습니다. 여기서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았던가요? 몰아넣는 이유가 뭐였던가요? 무엇이 그렇게 했습니까? 왜 밀쳤죠? 이미 이들이 유대라는 종교 자체에서 의미화 되어가지고 서로들끼리는 언어가 소통되고 있었던 거예요. 통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참 신기하죠. 어떤 점이 신기하냐 하면, 나는 나밖에 모르잖아요. 나밖에 모르는데 유대신학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유대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힘들게 인도해주셨다는 것이 이 절대적인 나한테 와닿는다는 것, 통한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거 굉장히 신기한 거예요.

주님은 그 유대인 지도자보고, 너희 아비는 악마다. 여기서 주님은 인간하고 너희들하고 싸우지 않겠다고 천명해버려요. 나의 싸움은 악마지, 악마의 하수인 인간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날 성도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돼요. 우리가 사람하고 싸우면 안돼요. 왜냐하면 각각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전화 받은 일산 아가씨, 그건 자기 역할이에요. 우리는 우리 역할이에요. 내 역할이 낫다고 윽박지르면 안돼요. 그냥 역할이에요. 우리의 싸움은 문간방에서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걔가 우리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싸움의 대상이 아니에요. 내가 나한테 목 조르고 벽에 부딪치면서 ‘똑바로 하란 말이야. 똑바로! 팔도 아프지 말고 똑바로 해! 주의 일하는데 똑바로 해.’ 흔들어대지 마세요. 나를 닦달내지 말라고요. 우리의 싸움은 내가 아니에요.

주님은 악마의 일을 멸하러 오신 거예요. 요한일서 3장의 말씀처럼. (요일 3:8) 마귀를 겨냥하는 거예요. 마귀는 인간들을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시어서 그들로 하여금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이 그들의 주체와 붙어있도록 조치를 해준 겁니다. 딱 들어붙을 수 있도록.

독일의 환경 데모하는 사람들이 떼지 말라고 아예 아스팔트에다 본드 붙여서 죽어도 이 아스팔트에서 데모하는 걸 중단 못하겠다 하니까 경찰들이 와서 아스팔트 뜯어내버렸어요. 뜯어내서 그대로 경찰서 집어넣었어요.

인간은 절대로 우리가 살아온 이 아스팔트 같은 세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고대로 뜯어내요. 마치 야곱이 복 받고 난 뒤에 환도뼈 그대로 위골된 채 그냥 사는 것처럼. 야곱도 위골됐어요, 야곱도. 위골된 채. 영생 얻은 거 생각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죠.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인 그대로 유지하게 해요. 우리보고 죄인하지 말고 이제는 의인되란 말이야. 은혜를 받아놓고 보답을 해야지. 이렇게 우리보고 닦달내는 것은 마귀가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복음 알았으면 이젠 복음 값을 해야지,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 안합니다. 우리는 아스팔트에 본드 붙여서 이렇게 딱 붙어있어요, 이렇게.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0절 말씀. 여러분 이거 찾지 마시고 외우는 분이 이야기하시죠. 간단한 건데.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한번 생각해보세요. 왜 굳이, 사람을 왜 굳이 안 좋게 하려고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왜 굳이. 인간은 자기 주체를 잃어버리지 않고 부정하지 않고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인간은 이미 악마가 조성해놓은 환경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를 다치지 않고 나를 화나게 하지 않는 괜찮은 단어와 의미들은 어떤 게 있을까 찾아서 내 것으로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은 좋아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널 죽이려고 작정했다는 말은 싫어한다니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작정해버리면 내가 남은 세월 동안에 노력한 것이 의미 없이 되잖아요.

“그러면 나는 의미 없는데?” “너는 원래 의미 없어, 원래! 원래 의미 없는 거야.” “왜요?” “그건 성경 히브리서 10장 29절에 나오지. 하나님 아들을 밟았으니까.” “제가 안 죽였는데요?”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 내가 아버지에 의해서 죽게 했다니까요. 내가.

인간들은 예수님을 밀쳐서 무덤에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꼴좋다. 까불다가 우리한테 대들면 이런 꼴 난다.’ 라고 무덤에 집어넣었어요. 그럼 무덤에는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은 채로 있어야 되죠. 예수님이 죽은 채로.

예수님이 여기 무덤에 있다. 무덤에 죽은 채로 있다. 구약 에스겔 37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예수님 자체가, 요한복음 1장에도 마찬가지지만, 이스라엘이에요. 인자가 머리 위로 오르락 내리락. 예수님 자체가 이스라엘이에요. 왜냐하면 유일한 참 아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들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 무덤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무덤에서 끄집어냈다는 말은 죽은 이스라엘이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난 거죠. 살아나게 되면 그러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자기가 ‘나는 살아있다’고 우겼거든요. 살아있고 예수님은 죽어 마땅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죽어 마땅하다는 이 분을, 이스라엘 또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려버리면 ‘살았다’가 두 개의 상충되는 세계에서 다른 의미로 적용되는 거예요. 예수님 나라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죽은 적이 있었다는 말이고. 죽은 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살았다’이고. 여기 인간세계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죽은 적이 없은 경우를 살았다고 보는 거예요.

근원적으로 말이 안 통해요. 근원적으로 말이 통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기(인간세계) 있는 백성들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그 말을 사도 바울도 성령을 통해서 말할 수밖에 없어요. 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까 절차 다시 하면, ①다수→ ②둘의 만남→ ③관계 출현, 왜? 외로우니까. → ④공통점 찾기. TV예능 <솔로> 막 들어가는 거예요. 예능프로, 인기죠. 너 커서 뭐 될래? 가수 될래. 방탄소년단 될래. 전부다 이거 뭡니까? 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의미에 섞여 들어가기. 그들이 원하는 의미에 합류하기. 이게 애들의 장래 소망이잖아요. 나 거지 될래요, 이런 건 없다 이 말이죠.

→ ⑤빈 자리에서 주체 출몰. 빈 자리에서 주체 출몰하면→ ⑥기존의 주체와 싸움. 기존의 주체와 싸우니까 승부가 나야 될 게 아닙니까? 누가 승리합니까? → ⑦빈 무덤으로 승리하죠. 절차에서.

그러면 말씀은 뭡니까? 말씀은 절차의 처음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성경말씀은. ①우리는 눈에 ‘다수’가 보이네요: 다수가 아니야. 단수야. 하나하나 시비 다 걸어요. 하나하나.

②둘이 만날래요: 둘이 만나봤자 그것은 제대로 된 만남이 아니라는 거예요. 좋다고 만나봐야 같이 따로 놀 거야, 아마. 관계 출현. 전부다 이 절차마다 말씀이 다 들어가는 거예요. 둘의 만남. 이거 말씀 한번 찾아볼게요. 로마서 14장 1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죠.

성도와 성도가 만났는데 내 원대로 만나는 게 아니고, 내게 주어진 말씀에 입각해서 상대를 내 품으로 악수를 해야 되고 받아들여야 돼요. 내가 원하는 타입이라든지 내 스타일, 그걸 주께서 일체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말씀이 훼방꾼입니까?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행동 하나, 생각 하나에 하나하나 다 누가 끼어드는가? 말씀이 난입해서 다 끼어드는 거예요. 완전히 우리의 내 주체되는 자리에 대해 시비 안 거는 순간이 없어요. 전부다 시비 걸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말씀을 안 보잖아요. 안 보든지 아예 따먹어서 구겨가지고 입에 집어 넣어버려요. 선악과 따먹듯이.

③관계 출현. 여기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5장, 이건 사도 바울의 경험이니까요, 5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육체로 알았으나. 역사적인 인물, 육체에서 육과 영이 분류되는 것을 사도 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눈치 챈 거예요. 주님이 나한테 뭘 해줄까, 가 아니라 내가 애초부터 주님을 오해부터 시작해서 주님을 알았던 거예요. 나한테 이런 오해가 있는 줄 나도 몰랐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고 난 뒤에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이 보는 관점과 내 보는 관점이 달랐다는 겁니다.

여기 벽에 있는 사각형이 내가 보기에는 반듯한 사각형이지만 옆에 주님 보시기에 ‘그거 삐딱한데?’ 이렇게 보는 거예요. 우리는 내 자리에서 주님 자리로 갈 수가 없었기에 내가 삐딱한 존재라는 사실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내가 죄인인 것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이건 주님 생각하고 너무 터무니없이 삐딱하고 다 다르고 틀어졌다는 사실을 예전에 미처 몰랐던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④공통점 찾아가기. 공통점 찾아가는 이것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옵니다. 6장 14절, 굳이 안 찾아봐도 여러분들이 다 아는 건데.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주님 보기에 나는 죽어 마땅함이 나의 공통점이 되는 거예요. 주님과 나 사이의 공통점은, 주님은 날 죽이는 것이 정당하고 나는 죽는 것이 당연하다,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말씀 자체가 일찍 찾아온 나에 대한 심판이었어요. 심판을 미리 받은 거예요.

그러면 타인들, 남들은 다른 관계에 있을 때 너와 같은 친구 사이에서 그때는 어떻게 보는가? 고린도후서 5장 14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자에요.

‘다수가 눈에 보이네’에서 거기 앞에다 괄호열고 뭘 하나 집어넣는데 ‘모두 다 죽은 자들이 보이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안 죽은 자들이 안 보이고 죽은 자들만 자꾸 눈에 띄는 거예요, 죽은 자들.

이걸 정확하게 말해서 전부다 죽어갈 수밖에 없는 자들. 나중에 전부다 요양병원에 갈 자들이란 뜻이 아니고 분명히 오늘 있다가 내일 음주운전 걸려가지고 죽어버린 친구. 우리 십 년간 앞으로 계속 살자, 하다가 그 다음 날에 그 친구는 먼저 죽어버린 것. 언제 내일 돼서 없어진다 할지라도 이것은 죽어야 될 것을 미리 먼저 보여준 사례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의 다수. 그런 사람들만 간호법 바꾸라고 데모하고 있어요. 의사는 반대해서 파업한다고 엄포 놓고 있고.

그다음에, ⑥주체와 주체의 싸움. 아까 첫 번째 시간에 한 것 다시 하면 달과 별과 해는 주님과 어떤 관계였어요? 사이좋죠. 사이좋은데 그들은 주님과 그들끼리 통하는 언어가 따로 있어요.

그러면 인간에게 있는 언어를 결국 누가 장악했단 말입니까? 언어에 지식이 들어가는데 선악 지식이 언어를 통제하고 다스리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결과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네가 신처럼 되리라.

‘신처럼 되리라’와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와. ‘죽는다’와 ‘신이 된다’는 것,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것. 안 죽는다는 건 악마의 생각이고 죽는다는 것은 주님 생각이죠. 그럼 어떻게 되느냐? 인간들은 ‘죽기야 죽겠지.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살면 되잖아.’ 이게 악마가 만든 종교로 종교적으로 그렇게 위로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 부활했더니, ‘우리도 부활하면 되잖아.’ 이게 마귀가 기독교 형식의 마귀가 이렇게 인간들을 세뇌시킨 거예요. 위로한 겁니다. 누구 좋으라고? 사람을 좋게 하기 위해서.

빈 무덤은 요한복음 19장이나 20장에 보면 부활 나오잖아요.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는데, 없어. 없어요. 누워있던 사람이 없어요. 누워있던 시체가 없는 게 아니고 사람이 없어요. 사람이. 예수님이 없어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죽은 시체라도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시체가 없는 거예요. 그럼 산 사람은? 산 사람도 없어요. 양쪽 다 없어요. 살았든 죽었든 양쪽 다 없어요.

부활은 나타내줘야 돼요. 부활은 우리가 ‘아이고, 여기 있네.’ 붙잡는 게 아니고 이미 주님의 세계와 인간 사이는 처음부터 공백으로 단절된 관계이기 때문에 저쪽에서 붙잡아도 주님 계신 곳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하고 3년 동안 붙어있었잖아요. 붙어있는 게 아니고 떨어져 있었던 것을 베드로가 몰랐던 거예요. 열두 제자가 몰랐던 거예요. 같이 밥 먹고 잠잔다고 너하고 같은 세계에 있는 줄 아냐? 같은 세계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그것을 인간들이 어떤 점에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를 그림으로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주님은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주시했습니다. (삼각형의 꼭짓점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어요. 바라보고 계셨다. 이걸 응시라 하는데요. 바라보고 있었잖아요. 우리는 여기(꼭짓점에 대응하는 밑변 자리) 있죠. 여기 있었죠.

바라보고 있으니까 어떤 말씀을 가지고 계속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이스라엘이 샘플이 되는 거예요, 샘플. 이스라엘이 샘플이 되어서 하늘나라 계신 주님이 율법을 보냈잖아요.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에서 만났잖아요. 이 말은 율법을 계속 주신 거예요. 온 거예요. 오니까 인간들에게 율법이 계속 추가됩니다. 추가되는 이유를 아시겠죠? 우리로 하여금 완벽에 완벽을 기해도 점점 더 틈이, 공백이 생기는 거예요. 일치점이 없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했잖아요. 그럼 우리는 어떤 사람이 평생 살인 안 했으면 자기는 살인 안한 걸로 여겼는데 산상설교 와서 주어진 율법의 완성 차원에서는 형제를 미워한 것도 뭐가 된다? 살인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벌써 건널 수 없죠. 아까 했잖아요.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건 구약에 나오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서(꼭짓점과 밑변 사이에 변) 내가 이룰 수 있는 것만 소복이 여기 다 집결시켜요, 집결. 집결시켜서 하나님을 내 행함으로 상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아버려요. 이것을.

그런데 주님 쪽도 만만치 않아요. 집결시킨 여기서 자기들의 의미로 이것 체크, 체크하면서 이것 지키고 저것 지키고 했는데 주님께서 여기서(꼭짓점과 밑변 사이에 변) 사건을 일으켜요.

사건을 일으켜버리면 내가 체크한 그 법에 의하면 이 사건은 해답이 없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다고요. 오른손이 한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거는 때려죽여도 못해요. 그런 내용이 성경에 차고 넘칩니다. 차고 넘쳐요.

분을 품되 해지도록 품지 마라. 왈왈 막 달려들고 하는데 시계를 딱 보는 거예요. 보니까 해가 지금 3cm 남았어요. ‘아…, 끝!’ ‘방금 우리가 뭐했지?’ ‘으음, 아무 일 없었어.’ 이렇게 됩니까, 사람이?

에스컬레이터 올라타는데 에스컬레이터 법이 있어요. 막 달리다가 에스컬레이터 타니까 잡는 형사도 가만 있고 범인도 가만 서서 가는 거예요. 그리고 끝나자마자 범인 잡는다고 뛰는 그런 공익광고가 있어요. 기차 타보면 나와요. 그게 말이 돼요? 에스컬레이터 그게 뭐라고? 둘이 가만 있고, 점잖게. 끝나자마자 ‘서!’ ‘미쳤나, 내가 서게?’ 막 달려가고 해요.

모든 이 세상의 상황 속에서는 항상 돌발적이고 예상 밖의 상황으로, 우리로 하여금 내가 단단히 스킬, 기술적으로 나를 의롭게 만들 모든 기술이 헛수고, 헛것으로 만드는 사건들이 일어나게 만들죠.

이 틈을 뚫고 들어와요. 틈을 뚫고 들어오죠. 뚫고 들어오면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새로운 말씀으로 여기에 토치카, 장벽을 더 쌓아버려요. 장벽을 더 쌓아버리죠. 하나님은 계속 추궁하고. 이 장벽이 실제가 아니고 바로 인간들의 종교적 이미지로 만드는 거예요. 이게 악마의 할 일입니다. 악마의 할 일이에요.

그리고 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은 인간이 다룰 만한 대상으로 (종교적 이미지에) 딱 달라붙어 있는 거죠. 이게 유대교잖아요. 하나님을 다룰 때는 하나님 이거 번제 받으시고 십일조 받으시고 이렇게 다룰 만한 대상으로 삼는 거예요. 이 바깥(주님 쪽)으로 벗어나는 건 없죠.

그러다가 자기가 몸이 아프다. 그러면 도대체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몸이 아픕니까? 몸 아픈 것도 하나의 역할인데 이걸 생각 못한 거예요. 사탄의 가시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역할에 불과한데 우리는 내 인생을 내가 조절하고 내가 관리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지고 자기를 부정하라고 하죠. 안됩니다. 자기 부정 안돼요. 부정을 해버리면 이게 어디 가요? 이미지에 들어붙어요. 이 이미지에 보면, 나는 나를 부정한 사람. 나 부인한 사람. 십자가 믿는 사람. 여기 다 들어붙어 있어요. 이건 이미지에 불과해요. 허구에요. 가상이에요.

실제로 구원하시는 것은 주님이 마귀를 이기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자기 관리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나는요? 나는 죽이죠. 나의 죽음이 여기(장벽, 종교적 이미지에) 있어요. 그러니까 죽는다는 말이 숨 끊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이 상태(밑변과, 밑변~꼭짓점 사이 장벽까지의 범위)가 이게 바로 나의 죽어가는 모습이죠. 이런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죠.

성령께서는 바로 이걸 우리에게 알려주니 성령 받은 사람의 복이 어떻겠어요? 대단해요~! 정말 대단해요. 내가 하는 그 짓거리가 나의 구원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나의 육적인 옛 모습을 그대로 매일같이 반복해 쏟아내고 있다는 것.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일만 쏟아내고 있다는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어야 하는 겁니다. 감격이어야 돼요.

그래서 여기 p.240에 뭐가 무너지는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 해놓고는 그 예루살렘이 성읍과 성소가 어떻게 돼요? 훼파, 무너집니다. 무너지고 난 뒤에 그다음 ‘언약을 굳게 함’ 할 때 여기 누가 등장합니까? 바로 마지막 한 이레에 누가 등장하느냐? 우리 주님이 그 자리를 치고 들어오죠.

그동안 계시로만 예언으로만 율법으로만 말씀하신 그 말씀이 하나의 주체로 등장해요, 주체로. 주체로 등장해서 너희들이 나에게 잘해라, 가 아니라 잘하나 못하나 너희들 인간하고 상대할 게 아니기 때문에 아예 악마가 예수님을 죽이도록 부추기도록 예수님 자기 몸을 내맡기죠. 그 사탄이 누구냐? 주님이 일부러 선택했어요. 자기 제자군에다가 가룟 유다에다 악마를 심어놨어요.

그러니까 역할을 맡은 거예요. 가룟 유다는 자기 역할을 해가지고 예수님을 구차없이 팔아먹지 않고서는 안 되게 만들었어요. 그냥 팔아넘겨서 결국은 총체적으로 예수님이 하나의 중심이 되게…

이 삼각형에서 밑변과 꼭짓점 사이의 변을 스크린이라고 합니다. 라캉이라는 철학자는 ‘스크린’이라고 하는데 스크린 말고 하나의 무덤이라고 하는 게 좋아요. 예수님을 죽도록 한, 이 무덤은 나의 무덤이 아니고 예수님의 무덤이에요, 무덤이라 할 때 무덤에서 일어나서 다 이루었습니까? 무덤 돌아가실 때 다 이루신 겁니까? 십자가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죠.

그러면 이 무덤, 블랙홀 같은 이 무덤 바깥이 뭐냐? 이게 바로 인간 현실이에요. 악마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의 현실. 무덤을 중심으로 해서 이걸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디서 나오는가? 이 무덤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서 이 현실세계에 역할을 맡아서 파견근무하고 있는 거예요.

무덤 바깥으로 나가면서 ‘나 죽었는데 주님이 찾아오니까 내가 죽어 마땅한 걸 알았다. 나는 이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라는 이야기를 하죠. 당연히 세상은 못 알아듣죠. 알아들을 수가 없죠.

그러나 성도가 ‘내가 이러하다’ 가 아니라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을 전하면 성도를 봐서가 아니라, 이 말씀을 보고 말씀의 능력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바로 주께서 마음 두고 있었던 주께서 생각해둔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게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p.240~241 걸쳐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음에는 쭉 한번 나가봅시다. p.246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돌아가셨는지,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 왜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해야만 하는지를 이제는 밝히 알게 된 그 사실을 저희들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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