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30324a 다니엘8장 27절(도살장에 합류)-이 근호 목사
p.236부터 할 차례입니다. 제목 “70이레의 의미” 이렇게 되어 있죠. 70이레의 의미를 아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70이레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럼 70이레가 뭐냐는 우리가 알 수 없는데 70이레에 대해서 그 시작점, 70이레의 뜻을 아는 시작점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십자가죠.
십자가는 말씀의 완성입니다. 말씀이 수백페이지가 넘고 많은 말씀이 있지만 모든 여러 가지 말씀의 끝은 어디로 끝나야 정답이다? 십자가로 끝났을 때 정답입니다. 왜? 거기서 다 이루었으니까요. 다 이루었다.
성경은 내(예수님)게 대해서 증거한다 했으니까 (요 5:39) 예수님 자신이 모든 성경을 자기가 떠안고 그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다 이룬 모습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그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될 수 있어요. [말씀의 완성은 예수님의 죽음이다] 자, 이미 우리가 해답을 알고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이다,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예수 믿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 하는 그 문제도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되겠어요? 예수님의 죽음부터 시작하면 되겠죠. 예수님 죽음부터. 예수님의 죽음이 다 이루었으니까.
그럼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인가를 보게 되면 이것은 이사야 53장 7절에 나옵니다. 이사야 53장 7절을 읽어볼게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도수장 또는 도살장.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린 양이 자살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양이 자살하진 않겠죠. 도살할 양은 외부에서 타격을 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서 마구간에 태어나서 십자가 갈 때까지 무엇을 끌고 가는가? 계속해서 자기를 타격할 그 세력의 실체를 들추어내는 용도로 살아가시겠죠. 그런데 그게 뭐라고요? 그게 ‘모든 말씀의 완성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켈로그 콘 프레이크, 아침에 우유 타먹는 그런 거죠. 시리얼 같은 이런 거. 그럼 콘 프레이크를 타먹으면 거기에 알갱이들이 있죠. 알갱이들을 그냥 먹습니까, 우유에 타먹습니까? 우유에 타먹죠. 말씀 하나하나가 시리얼 알갱이라면 그 알갱이는 어디 안에 담겨야 완성이 되는 겁니까? 예수님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의 죽음에 담겨야 완성을 보는 거예요. 푹 담겨야 되겠죠, 콘 프레이크 같은 경우. 푹 담겨야 돼요.
말씀을 완성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푹 잠긴다,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도살할 양 같다 했으니까 이 대목을 이렇게 현실적으로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기에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이 바로 도살장 입구라 합시다. 그럼 예수님이 여기 입구 밖에 계시다 이 말이죠. 그럼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이 어두운 도살장 입구로 그냥 들어가는 거죠.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런데 이게 너무 무서워서 그 앞을 얼쩡거린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말씀 완성 안 되겠죠.
오랜만에 휴가 나온 군인들이 저녁 6시까지 부대에 복귀해야 되는데 부대 복귀 안하고 자꾸 입구 앞에서 얼쩡거리고 그 동네 돌아다니면서 시간 때우며 놀고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위병소(guard house)에 있는 같은 부대원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드루와 드루와!” 하겠죠. 원래 ‘들어와’ 이래야 맞는데 <신세계>라는 영화 때문에 이 말이 유행했어요. 들어오라는 거죠. 빨리 들어와.
뭐 하러 들어와요? 도살장에 가면 그 짐승의 몸체를 사정없이 아작 내는, 요새 같으면 기계로 된 톱니바퀴가 있겠죠. 톱니바퀴가 휙휙 돌아가는데 거기 들어가면 자기 몸이고 뭐고 다 찢어지겠죠. 어느 누구라도 겁이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겁나죠.
성도의 삶이 뭐냐 하면 어린 양을 따르는 삶이라고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계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럼 성도의 삶은 이 땅에서 주님 가신 그 코스로 들어가야 돼요. 왜냐하면 그 코스만이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다 이루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다음에 뭡니까? 십자가 지고 그냥 도 닦으면 되는 거예요? 아니죠. “나를 따라오라” (막 8:34, 마 16:24) 너 자신을 아작 내는 그곳으로 네가 함몰되어 버려라. 지금 이게 성도의 삶이거든요.
이 세상에서 예수 믿고 어디 소풍 왔습니까? 소풍을 옛날 말로 원족(遠足)이라 하는데 예수 믿고 노닥거리고 부대 안 들어가고 계속 놀러 다니는 그런 식으로는 아니죠. 빨려 들어가듯이 도살장으로 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작용을 하느냐? 지금부터 좀 지루하시지만 같이 봐야 돼요. 요한계시록에서 쭉 찾아볼게요. 이리저리 찾으면 귀찮으니까 요한계시록만 찾아볼게요. 요한계시록 5장 6절부터 시작합니다. 한 10개 될 거예요.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그다음에 뭡니까? “어린 양”이 있죠. 어린 양이라 할 때는 반드시 이사야 53장 7절의 말씀을 생각해야 돼요. 그냥 어린 양이 멀쩡히 가는 게 아니고 도살당한 어린 양이 보좌의 중심에 있는 거예요.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러니까 우리가 그동안의 신앙생활에서 오해가 컸던 것은 ‘내가 예수님을 따른다’ 라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아니고, ‘내가 예수님의 죽음을 따른다’ 이게 맞단 말이죠. 이게 맞는 거예요.
누가 누구를 따를 때는 상대방도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고 둘이 다 살아있다는 것을 구성요소로 해서 ‘따른다’가 돼요. 그런데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이 도살장으로 가 죽었잖아요. 그러면 여기 나라고 하는 것은 내가 멀쩡하게 산 채로 따르면 안 되고 주님을 빨아 당긴 그 도살장의 죽음의 위력에 나도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식의 삶이 성도의 삶이 되는 거예요.
이걸 어려운 말로 하면 ‘내가 여기 있다’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 또는 ‘내가 살아남았다. 휴우, 다행이다.’ 이런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쓰여지는가’가 중요한 거예요. 이 복음의 세계에서.
아이고, 살아남았다. 코로나 다 걸려도 나는 안 걸렸다든지 예를 들어서 우크라이나 전쟁 때 폭격 맞았는데 다른 사람은 죽었는데 우리 삼촌은 역시 기도를 많이 해서 살아남았다, 지금 그런 것을 간증이라고 하면 안 되죠.
살아남은 것이 신앙의 증표가 되질 못한다 이 말입니다. ‘어떻게 쓰여졌는가’ 하는 거예요. 어떻게 쓰여졌는가? 물음이죠. 물음에는 반드시 해답이 있어야 물음이 완성되니까요. [나는 어떻게 쓰여졌는가? 비로소 도살장으로 가는 양의 운명을 알았다] 이렇게 되는 거죠.
나는 도살장으로 가는 양의 운명을 알았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도살장 가는 것으로 확정이 된 겁니다. 왜 도살장으로 가야 되는가? 보좌에 들어가실 때,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의 중심에 들어설 수가 있고 그 주변에는 천사들, 최고class의 천사들로부터 영원히 찬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찬양에 합류하려면 우리도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우리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그 위력을 오히려 반겨야 되겠죠.
한 열 군데 찾아봐야 되니까 계속 찾아봅시다. 요한계시록 7장 10절,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그다음에 뭐죠?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그냥 어린 양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도살장에 끌려갔던 그 어린 양. 도살장 안에 비로소 거기서 기다리는 천국. 도살장 바깥에는 천국이 없고 도살장 안에서만 있는 그 천국.
그다음 7장 11절, 12절에 다 나오죠. 다 거기 있는 겁니다. 천사들이 또 장로들이. (11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장로들은 순교자들이죠. 도살장으로 예수님과 더불어서 예수님이 도살장으로 갔던 그 코스대로 들어왔던 순교자들.
12절,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같이 찬양하는 거예요. 13절,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세상 바깥에 있다가 도살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죠.
14절, “...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그 환난은 예수님께서 먼저 솔선수범해서 맞이했던 환난. 그 동일한 환난에 같이 합류된 자들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이 하얗게 되어서 그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보좌, 도살장에서 죽었던 양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는 그런 구조의 나라,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거기서 행복하게 산다는 그런 건 없어요. 17절에,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이러라”
왜 도살장에 끌려간 어린 양 중심으로 비로소 그들의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수 있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도살장으로 가는 죽음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완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의가 성사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죠. 그리고 14장 1절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그다음 4절에 보면 결정적인 게 나오죠. 14장 4절, “이 사람들은 여자(음녀)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어린 양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들을 어디로 데려가겠습니까? 보좌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겠죠. 어린 양이 보좌의 중심 센터에 앉아있으니까. 거기서만 모든 말씀을 이루었다는 효과, 하나님의 영생이 거기서 흘러나오니까 자기 어린 양을 영생 없는 곳으로 데려갈 리 만무할 것 아니겠어요.
주님이 지상에서 들어갔던 그 장소, 지상과 천상, 천국의 경계선에 쳐져있는 것은 바로 도살장입니다. 도살장으로 들어갔던 자들에게만 천국이 허용된 겁니다. 도살장은 왜 만들어놨는가? 말씀을 다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도살장이 있어야 되는 거죠. 도살장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도살장에 안 들어가겠다고 발악하는 거예요. ‘이걸로 대충 때웁시다. 내가 예수 잘 믿을게요. 이걸로 퉁 칩시다. 나한테 아직 시집도 안간 딸이 있는데 이럴 수 없습니다. 장가도 안간 애도 있는데. 지금은 안산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기서 내가 가면 안 됩니다. 장가가는 거 보고 가야됩니다. 그 대신 예수 잘 믿을게요.’
그러면 철모 쓴 위병이, ‘들어와 들어와! 얼쩡거리지 말고 빨리 들어와. 그런 걱정 네가 하지 말고 들어와, 이리로!’ ‘제가 이 땅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할 일 하지 마. 그냥 들어와. 어차피 들어와야 돼, 이 도살장으로.’
주님이 가신 그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꼭 굳이 노래 부르라 하면 부르죠. ‘다른 길은~ 다른 길은~ 다른 길은 없.어.요!’
‘도살장 가면 우리 죽잖아요. 그것도 참혹하게 찢겨서 죽지 않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14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럼 뭐 다른 대안이 있냐?’ 왜 그러냐 하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나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용납이 안돼요. 내가 도살장에 가든지 아니면 짐승한테 매여서 이마에 손에 표를 받든지. 그래서 어린 양 앞에서 쏟아내는 불과 유황으로 영원히 진노를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주님 가신 도살장으로 가든지. 다른 길은,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여기서 슬슬 좀더 어려운 걸 이제 시작하게 되겠죠. 인생이 무엇이냐? 인간이 무엇이냐?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방법은 이렇게 알면 돼요. 의견과 현실을 구분 짓는 거예요. 인간이 무엇인가.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내가 지금 몸이 아프다’ 자, 이게 나의 의견입니까, 안 그러면 현실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현실.) 그러니까 틀린 거예요. 이것은 나의 의견에 불과해요. 이것은 내가 제시한 이론에 불과한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이 있는 이상 나의 의견은 반드시 여기서 선악지식이 표출되게 되어 있어요. 드디어 감추지 못하고 이게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느냐 하면, 세상의 현실은 뭐냐? 선악지식을 부정해서 이걸 지워버리고 예수님이 도살장으로 가 다 이루었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고 도배하는 식의 현실인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몸이 아파버리니까 그 순간 현실을 잃어버리고 내가 몸이 아프니까 진짜 아프니까 진짜 진짜 아프니까 이것은 현실 그대로라고 우기게 되는 겁니다.
나의 의견의 특징은 나에게 이익이냐, 나에게 손해냐를 생각하면서 내놓은 의견, 내놓은 뜻이 바로 현실이 아닌 거예요. 이게 가짜인 겁니다. 이 가짜를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 있음부터 출발할 것인가, 아니면 말씀으로부터 출발할 것인가]
‘나 있음’부터 출발해버리면 그 인간은 그냥 곱게 순수하게 출발하는 게 아니에요. ‘이래서 나는 이익 봤다, 이래서 나는 손해 봤다. 이래서 난 천국 가니까 나한테 이익이었다, 이렇게 했더니만 이래서 나는 내가 잘못 선택해서 지옥 갔다. 나한테 손해니까 그건 지옥이다.’ 그런 현실은 이 땅에 없는 현실이에요. 그런 현실을 하나님께서는 주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또 하나의 예시를 줄 테니까 여러분들이 맞춰보세요. ‘내가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 둘 중에 어느 게 틀리고 어느 게 맞고, 어떻게 됩니까?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 내가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둘다 틀렸죠.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 자체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이것은 비(非)-현실이에요. 내 속에 있는 선악체제, 나한테 어떤 것이 이익이냐, 손해냐를 두고서 지옥까지 가면서도 지옥 가는 것이 내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지옥이라는 그러한 나 중심의 현실관을 지금 못 버리고 있는 거예요. ‘아, 예수 믿을 걸. 괜히 안 믿어서 지옥 간다.’ 지금 아직도 착각에 빠진 거예요.
현실은 뭐냐? 진짜 현실은 뭐냐? 이런 선악체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어린 양과 무관한 것은 지옥이고 어린 양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천국이고. 이것이 현실로 십자가에서 이미 확정나버렸어요. 확정나버렸다고요.
자기가 행동하는 것,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내 운명을 바꿀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제가 수요일에 그런 말씀드렸죠. 그 사람의 자리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요, 자리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천국이고 바깥에 있는 사람은 지옥인 거예요.
수요일 설교 예를 들면 그 바깥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좀비 아쿠아리움이에요. 손 뻗어서 유리판에 붙어가지고 빨아먹으려 하고 있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팔짱 딱 끼고 ‘지금 유리판 밖에서 무슨 짓 하는 거야?’ 쭉 보는 거예요. 아쿠아리움 안에 보니까 상어도 윙~ 상어 나올 때 음악 있죠, 빰빰빰 죠스~에 나오는 음악 깔리고 있고. 큰 거는 작은 걸 삼키려 하고. 대기업은 중소기업 기술 빼먹어 살려고 하면서 쾅쾅쾅 죠스 있고, 한쪽에는 피라미가 으악, 살려주세요! 하고 있고. 그게 다 보이는 거예요. 예수 바깥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전부다 자기의 만족과 행복에 목말라 하는 자니까 그걸 저는 좀비라고 표현한 거예요, 좀비. 뭔가 갈급해. 갈급한 거예요. 좀비란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 이미 죽어버린 자들의 집합이고 그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들인 거예요.
얼마 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강도 6.5 지진이 일어났어요. 며칠 전입니다. 사람들은 뭐했느냐? 집 바깥에 나와서 코란 외우고 있어요. 코란. 꾸란(Koran). 경전을 외우고 있더란 말이죠. 왜 그런 짓합니까? 도살장에 안 끌려 갈라고 그래요. 도살장에 어떻게 하면 안 끌려갈까 싶어서 평소에 얼마나 힘들었냐 이 말죠.
그러면 시작을 뭐로 하느냐? 예수님의 시작은 십자가부터 시작하게 만들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버려요. 그렇게 되면 이 나, ‘내가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 하는 이 ‘내’ 자리에 무덤이 들어가요. ‘무덤’이라는 자리. 우리는 무덤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무덤에서.
그럼 무덤에 들어가려고 하면 나로부터 출발해서는 절대로 무덤에 안 들어갑니다. 막 모가지 밀면서 들어가라고 하면 딱 버티고 안 들어갑니다. 그럼 뭐냐? 무덤을 겨냥했던 것이 예수님의 말씀 성취적 행적이잖아요. 그러니까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이미 그 안에서 무덤 속에 들어온 게 돼요.
말씀 시작이 나의 시작을 바꾼 거예요. 말씀 시작으로 나의 시작을 바꿔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뭘 해도 전부다 말씀이 스스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식으로 우리 주님 만날 때까지 평생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적이(꽤 어지간한 정도로) 안심이 되죠.
이 대목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옵니다. 아쿠아리움이라는 표현은 안 나오는데 똑같은 취지의 말씀이 나와요. 세상은 내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갈 6:14).
성도로 하여금 말씀 속에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네가 천국 가기위해서는 이거 챙겨야 되고 예수 믿어야 되고 성경대로 삶을 살아야 되고 육의 열매 고만 맺고 이제는 성령의 열매 있잖아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 양선 그런 거 열심히 추구해야 되고 완벽하진 않겠지만 최선의 노력을 하면 그만큼 보너스 상급 주어지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헤엄을 칠 때 물에 들어가기 전에 헤엄은 이렇게 해야 되고 물에 들어갔을 때 팔 젓고 이렇게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물에 집어넣고 물에 뛰어들게 한 다음에 헤엄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의견, 나의 이론 -나는 몸이 아프다. 감기 들렸다. 며칠 더 못살지 싶다. 이제 마지막 인사를 고하여야 되나- 이건 어디까지나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어요? 나한테 있죠. 50년 믿었는데 이제 와서 예수님이 희미해졌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아무리 봐도 나는 불신자 같아요. 어떡하면 좋아요.
본인이 대책을 세우겠다는 그 자체가 지금 물에 들어가기 전에 헤엄치는 요령을 익히려고 아주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거예요.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의견이에요. 제가 말한 자기 의견이라 하는 것은 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환상이에요. 환각. 환각이에요.
주님께서는 성도를 일깨우기 위해서…… 성도도 인간인지라 맨날 환상을 꾸잖아요, 자기 의견 또는 자기중심의 현실관. 우크라이나 전쟁 어떻게 될 건지는 관심 없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손에 습진이 있지? 설거지를 했더니만. 우크라이나 전쟁보다 이게 더 관심 있어요. 왜? 모든 것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꿈속에서 꿈을 깨버리죠. 꿈속의 꿈. 인간의 꿈을, 꿈이라고 여긴 것을 꿈으로 공격해서 꿈꾼 나 자체가 이게 꿈이라고 여기게 하는 거예요. 제가 왜 꿈이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예상 못한 것이 우리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예상한다는 것은 예상한 내용이 어디서 나왔다는 뜻이에요? 내 의견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내 의견에서 어떤 좋은 이야기가 나와도 그것은 꿈에 불과합니다. 그 꿈은 꿈속의 다른 꿈이에요. 꿈이라는 말로 표현한 이유는, 내가 예상했는데 꿈은 예상대로 됩니까, 안됩니까? 꿈은 예상대로 안 되잖아요.
그래서 꿈꾸고 난 뒤에 땀 흘리면서 큰일 날 뻔했다 하는 이유가 꿈속에서 완전히 자기가 망칠 때 난처할 때 본인한테 이익이 된다, 손해가 된다? 큰 손해, 낭패가 될 때 꿈 깨고 난 뒤에 아이고, 다행이다. 꿈이었으니 다행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평소에 얼마나 성도 아닌 모습으로 살았느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꿈속에서 자기가 도살장으로 끌려갔을 때 깨고 나면 ‘아이고 다행이다. 자칫하면 오늘부로 인생 끝날 뻔했네. 아이고. 꿈이니까 다행이다, 휴우. 주여, 감사합니다.’하면서 소녀의 기도를 하죠. 옥색 원피스 입고 꿇어 앉아서, 감사합니다.
인간이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것, 하나의 자기 견해에 불과하고 하나의 개인의 이론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하나님께서 구원할 때는 반드시 예상 밖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예상한 것의 밖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전에도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지만, 네가 왜 원하는 것이 굳이 있어야 하는지 어디 대답해봐라. 네가 왜 원하는 것이 굳이 있어야 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왜 굳이 있어야 됩니까?
무덤 속이거든요. 십자가가 무덤입니다. 안 보고 제가 말로 요약하려고 했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지금 어떤 아쿠아리움에 세상이 들어있다 이 말이죠. 서로가 아쿠아리움이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해서 못 박혔다. 못 박혔으니까 못 박혀 죽은 사람은 어디에 들어가야 돼요? 무덤에 들어가잖아요. ‘나는 세상 너희들이 따라올 수 없는 무덤에 이미 들어와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죠. 무덤 속에 왜 있어야 된다 했죠? 무덤 속은 모든 말씀을 완성한 거고 모든 말씀을 완성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의를 인정해요. 완벽한 거룩과 의를 인정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안에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로마서 같은 경우에 나오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이삭을 생각할 때 처음에는 자기 아들, 대를 이을 아들로 생각했죠. 그러나 이삭이 죽고 난 뒤에 또 자기 손으로 이삭을 죽일 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알았던 거예요. 나에게서 이삭이 나온 게 아니고 이삭 안에 내가 먼저 출현되었다, 등장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시간의 역전(逆轉)이죠, 시간의 역전.
로마서 4장에서 이삭을 예수님으로 보죠. 예수님이 죽은 것은 네 죄 때문에 죽었고.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 죄 지었구나. 에라이, 이리 와서 벌 받아라.’ 이게 인간에게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의견이에요. ‘내가 죄 지었으니까 하나님 때려주세요.’ 이것은 자기 의견이에요. 전혀 현실이 아니에요.
현실은 뭐냐? 내가 죄 있는 일을 했던 착한 일을 했던 상관없이 몽땅 그것을 죄로 규정할 만한 최종 규정된 일이 벌써 십자가에서 일어났다는 거예요. 왜냐?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우리는 졸지에 어떤 행동, 어떤 생각을 하든 죄가 된 거예요. 개를 한 마리 키우든 두 마리 키우든 뭘 하든 관계없이 그냥 죄인된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걸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굉장히 강조하고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분이 살아남으로써 우리가 졸지에 뭐가 되었어요? 한 것도 없는데 값없이 의가 된 거예요.
그러면 값없이 의가 되려면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어야 돼요? 나의 자리에 있으면 안돼요. 내가 죽은 자리에 있어야 돼요. 주님의 도살장 자리에 합류해야 그다음에 예수님의 살아남이 우리에게 의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가 평소에 육체로 갖고 있으면서 개진하는 의견이나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 우리가 생각하는 견해나 이론 같은 게 현실이 아니고 전부다 가짜라는 거예요. 망상에 불과합니다. 나의 생존에 대한 기대와 이해와 이익이 그것들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 자체가 죄 덩어리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은 우리가 무덤에 있을 때뿐이에요.
다시 봅시다. 방금 설명한 대로 우리는 죄뿐이죠. 죄뿐인데 죄에서 굳이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야 됩니까? 원하는 자체가 무엇의 연속입니까? 죄죠. 내가 원하는 건 뭘 원하든 간에 죄가 되죠. 우리 남편이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죄에요. 하나님의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죄에요. 죄 아닌 게 없어요. 주는 대로 먹어라. 주는 대로 먹어야지, 뭐 내가 원하는 게 따로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무덤의 출발점 의미는 그다음부터 나의 인생관을 모조리 무효화시키는 능력이 충만하다]. 무덤이란 나의 인생을 모조리 무효화시킨다. 내 중심의 인생관을 모조리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내가 주의 것이라는, 그 무덤 속에 같이 완성되어 있는 로마서 14장 8절을 우리에게 수시로 각인시키고 확인시키는 그 일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요한계시록 계속 봅시다. 15장 3절,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이렇게 되어 있죠. ‘어린 양’이라 할 때 앞에 뭘 집어넣어야 돼요. 이 땅에 와서 도살당한 그 양의 노래를 부른다 이 말이에요.
이게 모세의 노래니까 모세가 유월절 이후에 홍해를 건너잖아요. 그러면 홍해를 왜 건너야 하는가? 유월절 어린 양과 동행했기 때문에 동행하는 인간들의 사정을 고려하는 게 아니고 ‘너희들 힘드냐? 불편하냐?’가 아니라, 어린 양의 그 취지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을 죽음 속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무덤 속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집단 무덤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이게 세례 아닙니까(고전 10:2). 죽음 속으로 같이 가는 거예요.
어린 양만 당할 수는 없다, 이 땅에서. 어린 양이 당했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의 운명을 천국에 합류할 자도 같이 이 땅에서 필히 그 코스로 가도록 이미 확정이 되어있는 거예요. 이미 확정되어 있어요. 다른 길은 없어요. 오직 그 길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에 끝으로 하나만 더 보죠. 요한계시록 17장 14절,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여기 보면 저희가 알아서 어린 양 따른 게 아니고 부르심을 입었고 불러냄을 당하고 빼내심을 얻은 자들. 누가 같이 가자고. 어디로? 도살장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빼내심을 얻은 자들만이 이 발목 잡는 악마의 세계,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일말의 틈이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갑옷이라면 틈이 없는 갑옷이에요. 옴팍 뒤집어 씌였으니까요. 주물 공장에서 같은 제품들, 옹기 류나 그릇 류 만들 때 주형틀 안에 내용물 집어넣어서 그대로 만들잖아요. 그 주형틀에 틈이 있습니까? 균열이 있습니까? 일말의 균열이 있습니까? 없죠. 있으면 제품이 안 되죠. 하자품 나오죠.
악마가 죄 있는 아담을 계속 복제시키는 데에 있어서 갑옷과 같이 주형틀처럼 집어넣을 때, 일말의 빠져나갈 균열점은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거기서 이런 현상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신의 관찰(경험)에 의해서 형성된 그 세계관 뒤편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종교와 철학과 학문의 딜레마입니다. 내가 관찰했다고 해도 되고 하나 더하면 내가 경험한 그 뒤편으로 갈 수가 없어요. 종교적 경험까지 포함해서. 신비로운 경험.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해같이 빛나는 것을 봤죠. 또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죠. 베드로가 기적을 행했잖아요. 그러면 베드로가 그것가지고 자기가 생각한 자기 세계 밖으로 나갔습니까, 못 나갔습니까? 못 나갔죠. 나갈 수가 없어요.
주섬주섬 자기가 경험한 것, 자기가 획득한 지식 정보가지고 어디를 뚫으려고 했습니까? 천국까지 가려고 했죠. 그런데 베드로에게 악마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삼키죠. 왜냐하면 악마는 자신 있는 거예요. 인간들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거예요. 왜? 균열이 없으니까. 이 세상은 인간이 만든, 자기가 생각한 하나의 <트루먼쇼>에 나오는 거대한 돔(dome) 같은 세트장이에요. 돔 같은 세트장.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애들이 서로 말다툼하고 싸우는 거 여러분들 보신 적 있습니까? 길거리에서나 안 그러면 드라마에서 보게 되면 그들이 싸우는 게 세계 평화를 위해서 싸우던가요, 뭐로 싸우던가요? ‘너 왜 내 친구한테 나쁜 소리했어, 응? 나는 그런 말 한적 없는데 왜 그런 말했어?’ 이것가지고 싸우고요. 그보다 더 어린 애는 ‘어제 너 반칙으로 구슬 3개 더 땄잖아.’ 이런 거 있잖아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걔들 수준에 있어서… 이걸 이렇게 정리하면 쉬워요. 나의 게임이죠. 내가 벌이는 나의 게임 수준을 못 벗어나요. 이 어린아이가 하고 있는 게임이 나중에 어른이 되면 뭐 세상을 돌파합니까? 아니죠. 어른은 어른 나름대로의 게임이 되는 거예요.
이 게임에 나의 게임, 너의 게임 공통점이 있어요. 나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겁니다. 나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그 이익을 조사해보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뭐냐 하면 살아남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다면 그걸로 마지막 챙길 수 있는 나의 인생 승리라고 여기는 겁니다.
살기 위해서 인간은 게임하고 게임에 지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노력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철저한 악마의 하수인으로 그동안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30324b 다니엘8장 27절(도살장에 합류)-이 근호 목사
다니엘 8장 27절 보겠습니다. 다니엘 8장 27절에 나오는 다니엘에게 일어난 일, 아까 우리가 공부한 바와 같이 다니엘이 아프다는 것은 그냥 개인적인 의견이죠. 개인적인 의견은 그다음에는 이렇게 또 수정이 돼요. ‘아팠는데 나았어요. 뭔가 나았는데 아팠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게 한결같지 않죠. 왔다갔다 하죠. 그렇죠?
그러니까 ‘다 이루었다’가 아니죠, 개인적인 의견은. ‘내가 아팠는데 병이 나았어요.’ ‘너 아픈 거야, 안 아픈 거야?’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다 이루었다’를) 설명할 수 없죠.
그래서 지금 다니엘 8장 27절에 나오는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할 때, ‘다니엘이 혼절하여서 수일을 앓다가 잃어났다’ 이것은 이제 다니엘에게 계시가 주어졌죠. 다니엘이 계시 받을 때 예상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예상 못했습니다.
항상 하나님 일은 어떻게 한다고요? 우리의 관찰할 수 있는 그 관찰을 부수고 쳐들어오죠. 내가 관찰해서 얻었던 획득된 내 인생관을 가만 두지 않고 그걸 부수면서 오죠. 왜 부숴야 되는가? 그것은 온전한 의가 아니기 때문에.
계시를 안다는 것은 이미 계시 아는 내가 계시를 품고 있어버리면, 말씀으로 시작해야 될 걸 갑자기 계시를 아는 복음을 아는 내가 스타트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완전히 가짜죠.
방금 이 이야기가요. 그동안 십자가 마을이나 우리 교회나 소위 ‘복음에 대해서 안다’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뭐냐 하면 복음에 의해서 ‘나’가 잃어버려져야 될 텐데 복음을 모르던 나가 복음 듣고 복음 아는 나가 된 거예요. 그럼 나는 어떻게 됩니까? 나는 멀쩡해요.
그릇이 이렇게 있다면 다른 건 좀 채워졌는데 복음 이 부분이 모자라다는 거예요. ‘이걸 마저 채우고 마저 채우면 온전한 나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이걸 노리고, 아까 말한 대로라면 이걸 원한 거예요. 복음을 모르는 내가 복음을 알게 되면 나는 온전하게 이제는 마지막 심판대를 통과한다, 이걸 노리고 온 사람이 이제 복음 아니까 헤헤거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아니다’ 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다 떠나니라. 이걸 설교시간에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는데 쉽게 말해서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자는 말씀에서 멀어진다].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자는 말씀에서 멀어지고 반대로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벌써 말씀에게 끌리고 있는 상태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왜 다니엘에게서 아픈 대목을 끄집어냈느냐 하면 역사라는 것을 인간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역사라는 것을. 인간이 만들어냈는데 ‘인간이 만들어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여기에 p.238에 이렇게 아주 쉽게? 이야기했어요. p.238 밑에서 6번째 줄에, 어느 정도로 쉬운가 한번 들어보세요.
“흐름의 연속성을 관찰자가 정지시킬 수가 없는데 이럴 경우에 윤곽만 포착된다.” 아~주 쉽죠. “윤곽 면에 포착되지 않는 유동성은 우리 인간 손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물처럼 사라져버린다.” 아주 쉽죠. “동사로서 포착한 것은 운동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윤곽이다. 곧 잠정적 계기이다.” 쉽지 않습니까.
“항상 일치를 고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변화되어지는 주체는, 자기가 벌이고 있지 않는 변화 속에서 다른 주체가 벌이는 변화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시도하며, 그 변화에 이미 말려든 셈이 된다. 고정된 주체가 빠져나가는 주체를 포착해낼 수가 없는 동시에, 그 변화의 주체에 의해 도리어 진위를 판단 받게 된다. 곧 계시에 접근하는 순간이 곧 계시로부터 심판받는 순간이다.” 하아. 아~주 쉽습니다, 이야기가.
이 이야기가 p.236부터 p.238 중간까지 나오는, ‘70이레가 뭐냐’에 대해서 세계 대가들, 소위 히브리어 헬라어에 능통한 대가들, 성경 원문에 능통한 대가들이 이 70이레를, 이레란 7이니까 곱하기를 하는 거예요. 70×7=490이잖아요. 490년을 어디서 어디까지 잡아서 490년이라고 할 것인가 견해를 쭉 소개한 거예요, 견해를.
최만수, 칼빈, 카일(C. F. Keil)과 몽고메리(J. A. Montgomery), 헹스텐베르그(E. W. Hengstenberg), 하젤(G. F. Hasel), 에드워드 영(E. J. Young), 최영헌, 간하배, 옛날 선교사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견해를 뽑아서 제가 쭉 올려놨어요. 이게 다 틀렸다는 거예요. 이게 다 틀린 거예요. 왜? 흐름의 연속성은 관찰자가 정지시킬 수 없기 때문에.
흐름의 연속성을 관찰자가 정지시킬 수 없어요. ‘잠깐만 스톱! 잠깐만 기다려줘요!’ 이럴 수가 없어요. 흐름 속을 파악하려면 같이 흘러가야 되는데 인간의 주체는 같이 흐를 수가 없어요. 흐르면 자기가 어지러워서 자기가 스톱이 안돼요. 정지를 할 수 없어요.
그럼 인간은 뭐냐? 흘러가는 것을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딱 스톱을 시켜버리는데 이렇게 스톱을 시켜버리면 뭐가 되는가? p.239 위에서 4번째 줄에, “사건과 사건 사이에는 무한히 매개하는 사건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 사건들의” 그다음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이 사건들의 평균치” 평균치.
평균치란 뭐냐 하면 가운데가 볼록한 종 모양 그래프가 있다면 그래프를 그대로 보는 게 아니고 평균으로 나눠버리면 동일한 일직선(평균치) 안에 다 들어가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중산층 자산의 평균을 내보니까 올해 통계상 4.5억이에요. 4.5억 있으면 중산층 된다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평균치죠.
그런데 실제로는 10억 이상 가진 사람이 20%이고 나머지 80%가 4.5억 밑에 있어요. 4.5억이 순자산이거든요. 그것도 이게 목포에 집이 있느냐, 서울에 집이 있느냐, 대구 빌라에 사느냐, 이것 따라서 같은 평수의 아파트라도 가격차이가 확 납니다. 평균치가 이렇게 엉터리에요. 평균치라는 게. 평균치는 가상이에요. 실제로는 평균되는 사람 없어요. 가상이에요. 숫자에서 나온 거예요. 인간의 계산에서 나온 거예요.
p.238 중간에 봅시다. 간하배, 이희락 견해까지 해놓고 제가 그다음에 한 말, “이 중에 어떤 견해가 ‘역사적’으로 딱 떨어지는가 하는 것을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땅의 역사적 조건을 계시 이해의 바탕으로 삼는 것은, 신의 개입을 일종의 ‘초기 조건’으로 생각한 이신론적 전통에서, 세계는 정확히 시계태엽의 이미지를 따라가며 파악하는 것과 같다. 지속을 시차적 안목으로 잘라내는 것은, 사실상 평균치를 일방적으로 추정하여 포괄적으로 접근해 나가는 시도일 뿐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시간 속을 가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인데 시간 바깥에서 그걸 관찰하는 자가 누굽니까? 인간인 거예요. 인간은 시간 속이 어떤 내용으로 가고 있는가는 모르고 ‘내가 보기에는’ 이러고 끝내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이 하는 견해와 이론은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 이게 나의 생존에 유리하냐. 내가 의롭다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 하는 벌써 선입관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현실이라고 구성해서 자기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뭡니까? 변화죠. 계속 변화를 추정해야 되죠. 그러면 이 사람은 확정된, 모든 변화가 종식된, 확정된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은 아니죠. 무덤 속에 가야 모든 말씀을 다 이루잖아요.
그것도 어떤 무덤입니까? 도살할 양 같이. 세상에 의해서 ‘너 죽어!’ 라고 삼킴을 당한 자. 그리스도가 했던 어린 양 있잖아요. 당한 자이기 때문에 어린 양이죠. 도살할 양이기 때문에 어린 양인 거예요. 어린 양은 한두 마리가 아닙니다. 그거 말고 도살할 양으로서의 어린 양이 보좌의 중심에 있고 그 보좌의 중심이 확대된 그게 천국이고 거기에 참여한 사람만이 주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도살할 양이 갔던 코스대로 그대로 가야 우리는 그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아까 첫째 시간에 했잖아요. 말씀이 오게 되면 이미 우리는 말씀 완성에 저촉을 받는다고요.
그러면 예수님만 아는 도살할 양의 원리대로 시간을 보지 않고 달리 보면 어떻게 되느냐? 여러분, 식당에 가면 메뉴판에 스테이크 나오죠. 식당에 가면 메뉴판 쭉 있잖아요. 있는데 여기 ‘스테이크 80.’ 메뉴판 위쪽에는 ‘카푸치노 5.’ 이렇게 되어 있죠. 이 스테이크 80. 어디 있습니까, 메뉴판 안에? 스테이크 없죠. 스테이크는 지금 주방에 가있어요. 주방에.
하나님께서 어느 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네가 백날 찾아봐야 이미 언어를 알고 있는 인간은 이 8만원짜리 스테이크보고 인간이 동원하는 게 뭡니까? 상상하죠. 이것은 자기의 사적인 의견이고 이론이에요. 견해에 불과합니다. 실제 스테이크를 상상하는 거예요. 없어요.
그래서 도살할 양 자체가 굉장히 아주 살벌하죠. 도살할 양. 그렇게 하나님의 일이 상상을 넘어 예상을 능가하고 상당히 급진적이에요. 얼마나 급진적인지 우리가 마태복음 7장을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7장 6절 읽어보세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이걸 제가 글로 써서 풀이하겠습니다.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이죠. [돼지는 돼지다워야 하고 개는 개다워야 한다. 우수한 돼지, 우수한 개는 소용없다. 덕이 많은 돼지, 자애로운 개는 소용없다.] 주변에 자애로운 개, 덕이 많은 돼지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걸 더 급진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실험용 돼지에서 민첩성 여부는 부질없는 관찰항목이다] 실험용 돼지가 살쪘느냐, 야위었냐 그것만 구분할 목적으로 돼지를 키웠는데 ‘교수님’ ‘왜?’ ‘이 돼지가 굉장히 민첩합니다.’ ‘민첩한 거 빼. 리스트에서 빼. 그건 필요 없어.’
돼지가 덕이 많고 자애로운 것,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복음을 모르는데 수능 만점이다. 그거 어디다 써먹습니까? 그때는 그야말로 급진적인 말, 지옥에나 가라, 이렇게 하죠.
인간 자체가 메뉴판에 있는 거예요. 메뉴판에 적혀있는 그러한 언어에 종속된 자에요. 왜냐하면 자기 견해, 자기 의견을 버릴 생각을 아무것도 안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름이라는 것은 이마와 손에 악마의 인이 박혔다는 게 요한계시록에 나오잖아요. 아무리 봐도 인간에게는 666 그런 건 없어요. 마트에 갈 때 지지직 전자코드 그런 거나 있지 없단 말이에요. 없어요.
그러니까 메뉴판에는, 성경에 있는 현실성이 인간들의 세계에는, 관찰하는 세계에는 없어요. 세계 자체가 인간들의 견해이고 의견이기 때문에. 인간의 견해에 ‘나 돼지입니다. 나는 개입니다. 나한테는 덕도 소용없고 나의 자애로움과 사랑도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나는 지옥 가야 마땅합니다.’ 이게 인간들 세계에 학교 수업시간에 나오던가요? 초등학교 3학년 2반 교과서에 나오던가요, 이게? 안 나오죠.
그러면 우리가 아는 이 세상은 왜 이게 엉터리이냐? 그것은 이 세상에서 도살장에 끌려가서 죽어버린, 죽은 분을 중심에서 빼버리고 생각하는 것이 이 세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사야 53장 7절, 도살장에서 죽어가는 그 죽음을 빼고 모든 것을 설명하기 때문에 이게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제는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이미 죽어버린 이스라엘 속에서만 살아있는 이스라엘이 나온다] 이 말은 아까 이름과 관련해서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이름으로 말미암아 망했다. 이스라엘은 이름으로 망했다.
이스라엘은 자기가 현실이라고 우겼던 거예요. 그런데 이게 메뉴판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죠. 진짜 이스라엘 이름이 뭐냐? 주방에 있는 스테이크에요. 이스라엘 이름 누구입니까?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죠. 세상은 하나님 중심이지, 인간 중심이 아니었거든요. 이스라엘 이름 때문에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했던 겁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를 요 근래 스바냐 하면서 자주 언급했어요.
그러면 예수 이름이 우리한테 있다는 말은 우리가 다행이라는 말입니까, 슬프다는 말입니까? 다행이죠. 왜? 그 이름으로 인하여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진정한 인간, 진정한 사람은 주님밖에 없음을 주의 이름으로 비로소 알게 되는 거예요. 나는 이 땅에 그렇고 그런 인간들과 같이 한 메뉴판에 쓰여 있는, 그냥 불에 타 없어질 그 세계에 소속되어 있는 하나의 이름일 뿐이죠.
오늘 제목이 <70이레의 의미>에요. 70이레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70이레에 대해서 인간들은 역사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먼저 그것부터 해야 되니까 제가 다니엘 8장 27절을 언급한 겁니다. 다니엘이 하나의 사람으로서 계시를 받을 때 자기는 혼절하여 수일동안 앓았어요. 몸이 아팠어요. 그럼 몸이 아픈 것은 비로소 자기가 예상 못한, 상상 못한 새로운 현실이 계시와 더불어서 찾아온 거죠.
다니엘 10장 2절에서 3절에 보면 “그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세 이레(21일)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그 이유가 뭐냐? 전쟁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 때문에.
왜 전쟁이 일어나는데 밥맛이 하나도 없습니까? 전쟁이라는 것은 인간이 개인의 입장에서 내가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이 삶의 환경을 전쟁이 휩쓸어가죠. 전쟁이 거기에 대해서 내 의견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전쟁에 대해 네 가지 현실이 나와요. 하나는 전쟁, 또 하나는 죽음, 세 번째는 기근(흉년드는 것), 네 번째가 전염병.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네 마리의 천사가 오죠. 한 마리 거룩한 분 빼고 나머지 세 마리의 천사가 전쟁, 죽음, 흉년과 전염병으로 오는데 이 네 가지의 공통점이 뭐에요? 인간을 살리고자 하는 겁니까, 안 그러면 죽이고자 하는 거예요? 인간을 죽이는 거예요.
모아이 석상에서 이야기했듯이 모아이 석상의 상체는 흙밖에 나와 있지만 밑에는 흙속에 있다 했죠. 밑에는 흙속에 박혀 있어요. 흙속을 멸망당할 이 세상이라 한다면 멸망당할 세상에서 좀비들이 또는 악마가 이 아래 부분을 뜯어먹으면 뜯어먹을수록 윗부분의 다 이루심이 부각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도 똑같은 대우를 받는 거예요, 이 땅에서. 성도라 해서 전쟁에서 빠지고 죽음에서 빠지고 흉년에서 빠지고 전염병에서 코로나 안 걸리고 이런 거 없어요. 우크라이나 전쟁할 때 러시아 미사일이 드론 띄워서 왔다가 ‘아이고, 성도네. 빠져나가자.’ 이런 거 없거든요. 그냥 팡 터지면 성도가 되든 교회 기도를 얼마나 잘하든 헌금을 얼마 내든 교회생활 10년 했나, 20년 했나 그런 거 묻지도 않고 전쟁 자체가 파괴입니다.
스스로 파괴되어서 도살장으로 갈 위인들이 없잖아요. 이 땅에 위인들이. 그러니까 말씀이 오게 되면 말씀이 알아서 우리로 하여금 성도를 어디로 보낸다? 주님 가신 도살장으로 가서 천국에 가도록 이렇게 이끈다 이 말입니다. 반갑지 않습니까, 이 소식이?
그것을 신약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라 하지만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다니엘에게 이미 그 일이 터졌다 이겁니다. 다니엘에게. 다니엘이 계시 받고 난 뒤에 다니엘 10장 16절,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내가 곧 입을 열어 내 앞에 섰는 자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주여 이 이상을 인하여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내가 힘이 없어졌나이다” 힘이 없어졌다. 또 17절, “내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사오니 내 주의 이 종이 어찌 능히 내 주로 더불어 말씀할 수 있으리이까”
내가 어떻게 주와 함께 말씀할 수 있습니까. 이 다니엘 10장 16절, 17절의 특징은 뭐냐? 다니엘이 지금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아요. 주님 앞에 아랫도리가 허물어져버린 거예요, 완전히. 내 육신이 몸이 아파서 호흡이 남지 않고 몸에 힘이 없어질 정도에요.
이 말은 뭐냐? 내 의견을 개진하고 내 이론을 펼쳤던 그 나의 저력이 주님의 계시 앞에서 비로소 그것이 용납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개가 사람 되고 돼지가 사람 되는 순간이죠.
그렇다면 자신의 해석, 성경해석, 그것은 메뉴판에서 메뉴판으로 해석하는 이걸 다니엘이 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주방장이 되셔가지고 스테이크를 가지고 ‘아나, 먹어라.’ 하고 주니까 메뉴판에 자기가 상상한 스테이크하고 주방장이 가져온 스테이크의 차이가 너무 나니까 여기에 완전히 맥이 빠진 거예요. 마치 판콜 하나 먹은 것처럼. 감기약 먹고 퍼져 있는 것처럼 힘이 없는 거예요.
이것을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이 첫째시간, 둘째시간 여기까지 한 걸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정리가 같이 되어야지, 나 혼자 정리되는 건 소용없어요. [인간의 시간이 말씀의 시간으로 전환] 인간의 시간이니까 나라고 보면 돼요. 나 중심의 시간이 말씀 중심의 시간으로 전환돼요. 바뀌어버려요.
바뀌어버리면 바뀌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말씀의 시간에서는 ‘다 이루었다’가 되고 인간의 시간은 ‘따져보자.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내게 이익이 되겠는가.’ 이 이익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내가 구원 되겠는가’ 이것도 포함되죠.
그럼 그다음 이야기는 인간의 시간이 말씀의 시간으로 바뀔 때 여기다가 뭘 집어넣는가? 바뀌는 작용이 있어요. 바뀌는 작용을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피입니다. 피로 두 가지 경우가 발생돼요. 피 흘리게 하는 자, 그다음에 피 흘린 자. 피로 인하여 두 가지의 경우가 항상 생기겠죠. 발생되겠죠. 누가 죽였으니까 누가 피 흘리고 죽는 거예요. 피 흘리게 하는 자로부터 피 흘린 자가 될 때, 이것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이 되겠죠.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70이레가 뭐냐 하는 거예요. 70이레라는 것은 주님 중심의 역사관, 세계관이 이 땅의 인간들이 들고 있는 메뉴판에 낯선 70이레가 등장한 거예요, 메뉴판에. 인간들은 그 메뉴판을 보고 70×7=490년으로 계산해서 앞으로 어떻게 될 건가 미리 대비하겠죠. 이게 인간들이 얼마나 평소에 개, 돼지냐를 들춰내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거예요.
아까 p.238 참 쉽다고 한 대목을 다시 볼게요. p.238 밑에서 2번째 줄에, “하지만 변화되어지는 주체는, 자기가 벌이고 있지 않는 변화 속에서” 자기가 유발한 게 아닙니다. “다른 주체가 벌이는” 다른 주체, 누굽니까? 주님이죠. “다른 주체(주님)가 벌이는 변화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시도”하게 돼요.
왜? 모든 의견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어야 되니까. 자기가 더 살고 행복하게 살고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 한다는 어떤 이익, 보상 그걸 노리고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뭐든지 해석을 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 변화에 이미 말려든 셈이 된다.” 말려들었다는 거예요.
“고정된 주체가 빠져나가는 주체를 포착해 낼 수가 없는 동시에” 인간 본인을 고정적으로 관찰자로 보는 거예요. 나한테 뭐가 이익이 되나. “그 변화의 주체에 의해 도리어 진위(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판단 받게 된다. 곧 계시에 접근하는 순간이 곧 계시로부터 심판받는 순간이다.” 아까 이야기했고.
“사건과 사건 사이에는 무한히 매개하는 사건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 사건들의 평균치를 추정하는 것으로서 진리로 삼을 수는 없다.” 평균치 이야기했고요. “등질성(질이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주체 인식을 확립하기 위한 농간이요, (인간들이 날마다 벌이는 자기를 정당화하는) 전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호들의 연쇄가, 언표가 되기 위한 둘째 규정은, 그것이 주체와 어떤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게 아까 메뉴판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인간은 어떤 현실이 와도 자기 현실, 자기 이론을 포기 못해요.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라는 사람이 있어요. 오스트리아 공주이지만 프랑스 루이 16세와 혼인한 사람이에요. 합스부르크라는 왕가가 있는데 옛날에는 유럽이 쪼개진 게 아니고 하나였거든요. 대부분의 나라가 하나가 된 데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1792년 루이 16세 남편과 함께 같이 단두대에 죽습니다. 왕을 모가지 잘라요. 신이 주신 자리를 민중들이 죽여요.
사형집행관이 사형을 집행하면서 이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의 딸처럼 공주처럼 의연한 자세로 죽어갑니다. 그러다 처형 직전 사형집행관의 발을 실수로 밟았어요. 그때 프랑스말로 했겠지만 제가 영어로 한다면 “Pardon me, sir. I did not do it on purpose.” 죄송합니다. 제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너무 고상해서 품격, 품위를 지키는 거예요. 도대체 뭐하는 거예요. 아직도 현실을 감 못 잡고 있어요. 지금 앙투아네트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앙투아네트가 덕이 없어서 죽인 줄 알고 있어요. 앙투아네트 왕비와 루이 16세가 죽은 이유는 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치를 많이 해서가 아니에요. 시대가 바뀌어서 그래요.
시대는 우연적입니다. 시대는 내가 바꾸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돈 버는데 열심히 해서 돈 벌었다 하죠. 열심히 해서 돈 번 게 아닙니다. 열심히 못해서 돈 못 번 게 아니고 우연입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그래요. 그 시대는 내가 사전에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나의 시간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은 말씀의 시간이에요. 돈 못 벌어서 빨리 도살장 끌려가라 이 말이에요. 조기에. 그게 주의 뜻입니다. 그렇게 끌려가면서 뭘 보느냐? ‘누가 나 돈 못 벌게 했어?’가 아니라 ‘누가 예수님을 죽였느냐?’를 보게 하는 거예요. 관점이 내 관점이 아니고 말씀 완성의 관점에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이 우연에 대해서, 이 세상 모든 게 우연입니다. 자꾸 내 탓이라 하지 마세요. 전부 우연이에요. 내가 남자고 여자로 태어난 것, 전부 우연입니다. 이 우연을 자기의 내부로 받아들여야 돼요.
TV를 잘 안 보는데 얼마 전에 TV를 보다가 이 우연에 대해서 아주 멋들어지게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연을 아주 잘 설명해놨어요. 조세호라는 개그맨이 있고 유재석이라는 개그맨이 있는데 그 사이에 앉아있었어요. 이 사람 이름이 조성진입니다.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피아노 잘 치니까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하고 손을 맞춰보니까 조성진 손이 굉장히 크고 길었어요. 그래서 조세호라는 개그맨이 ‘손가락이 만약 짧았으면 굉장히 힘들었겠죠?’ 물으니까 ‘글쎄요. 제가 손가락 짧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자보고 ‘당신이 여자였으면 어땠겠습니까?’ 물었는데 ‘글쎄요. 제가 여자여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건 뭐냐 하면 ‘내가 지금 어떠냐’ 보다도 ‘이런 내가 어디에 쓰여지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손가락 길다고 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되는 게 아니에요. 손가락 크면 산적이 될 수도 있어요. 마님! 이러면서 도끼질하는 아주 훌륭한 머슴이 될 수도 있죠.
세상에 주어진 모든 것이 네 탓이라고 하면 안돼요. ‘네 탓’이라는 것은 ‘내 탓은 아니다’를 전제로 하거든요. ‘이 일은 내 탓은 아니고 내 탓이 아니면 누가 있지? 어? 네 탓이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 탓도 아니고 내 탓도 아니고 이것은 무슨 탓이냐? 불편한 진실 탓이에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예요. 악마와 더불어서 지옥 불에 가든지 아니면 예수님과 더불어서 도살장 속으로 들어가서 천국에 도착하든지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우연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예상 밖의 선택이에요. 우리가 미리 예상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이것은 나의 이익을 계산하는, 역사를 내가 만들고자 하는 그런 잘못이에요. 오늘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니엘이 계시 받고 아프다’ 이 말은 이 계시를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기대 있잖아요, 이렇게 계시 받으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원 받고 그럼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되고 이런 계산이 선지자한테는 없어요. 자기 이익에 대한 생각이 없다 이 말이죠.
그저 아플 때는 아프고 건강할 때는 그냥 건강한 거예요. 이게 뭐냐? 왜 아프냐? 아파서 아픈 거고. 왜 안 아프냐? 안 아파서 안 아픈 거예요. 그냥 손가락이 길어요. 짧다면? 그냥 짧은 거예요. 그래서 뭐? 뭐 어떤데? 그게 뭐가 문젠데? 내가 그것을 내 이익을 위해 판정할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70이레’가 딱 나오니까 사람들은 와락 달려들어서 이걸 역사적으로 해석을 하는데 그 목적이, 내가 어떻게 이 성경을 해석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여김을 받고 구원 받을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는 거예요. 그 당시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신학자들 전부다.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고요.
여기 p.239 봅시다. 위에서 8번째 줄에 “언표가 되기 위한 둘째 규정은, 그것이 주체와 어떤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기호들의 계열은 대상 세계만이 아니라 주체들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만 언표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메뉴판에 있는 그 스테이크는, 스테이크를 먹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한테는 메뉴판의 기호만 봐도 글자만 봐도 침을 흘려요. 그런데 같이 왔던 사람은 어제 스테이크 먹고 체했던 사람이에요. ‘제발 이 집 메뉴판에 스테이크 없어야 할 것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 메뉴판 보지도 않아요. 왜? 어제 자기한테 너무 손실이 왔기 때문에.
인간의 기분, 감정 이것은 본능적으로 자기 이익과 손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가 주일 낮에 잠시 설명했는데요. 설교 시간이기 때문에 길게 못했는데 여러분한테는 약간 길게 하겠습니다. 이 점에 대해 주일 낮에도 설명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 선악과 지식을 먹고 난 뒤에 그때부터 자립적 존재가 되죠. 자립적 존재라면 자립성, 이건 주관이고 이 자립성을 둘러싼 이 모든 것은 대상이니까 객관성이 돼요. 객관적인 환경이 되겠죠. 환경이 되면 이 자립성은 환경과 마주하면서 스스로 자립해야 되기 때문에 여기서 방어체제가 가동돼요. 가동되거든요.
우리 몸 전체가 자율신경으로 완전히 서로 통신체계가 갖춰져 있어요, 자율신경으로. 자율신경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죠.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어쨌든 간에 우리 장기라든지를 보호하는 거예요. 보호 방어하는 거예요. 뭘 보호합니까? 보호한다는 말은 그냥 가만히 놔두면 안 되고 뭔가 대책을 세웠다는 뜻 아닙니까.
그럼 가만 놔두면 왜 안 되는가? 여기서 기본적으로 두려움이 있어요. 두렵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나를 지키겠는가, 이 방어체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면역체계에요. 우리 속의 면역체계.
면역체계에 관여하는 그런 촉매라든지 생물학적 호르몬들 전부다 118가지 원소 중 하나씩으로 나오는데 그중에서 칼슘과 나트륨이 우리 몸에 굉장히 크게 작용해요. 혈액 속에 칼슘, 나트륨. 뼈에도 칼슘 있고. 그래서 뼈 안 좋다 하면 뭘 먹습니까? 칼슘 들이붓는데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다 소화되고 내려가서 없어요.
그냥 우리 몸에 칼슘 있다 하지 말고 달리 봐야 돼요. 아, 내가 나를 방어하는 것이 일상이구나. 이게 생리고 본능이구나, 나를 방어하는 게. 그 말은 오늘 말씀에 의하면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피 흘리게 만든 당사자란 뜻이에요.
본인이 살겠다는 것은 내 방어체제의 목적은 오직 나만 살리는 데 방향이 그쪽으로 쏠려있다는 뜻이고 거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그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판정합니까? 내게 이익이냐, 손해냐로 판정하겠죠. 그럼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한테 이익 되는 게 뭐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내쫓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동안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우리 몸이 방어체제기 때문에요. 어느 정도 우리 몸이 뭐 그럴싸하게 그럴만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하면 여유가 있으면 그때는 ‘말씀 배워야지. 성경공부 참석해야지. 그래서 천국 가야지.’ 이러고 있지만 지금 당장에 자기 가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고 자기 재정적인 문제가 있고 돈 버는 일이 있다면 말씀에 관심 없어요.
어떤 사람이 ‘돈 10만원 벌 시간에 나는 10만원 벌지 않고 성경공부 참석하겠다’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방어체제가 중지된 거예요?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콜!’ 악마 쪽에서 올리죠. ‘20만원은?’ ‘난 돈 보기를 돌 같이 본다.’ ‘옳지. 2000만원은?’ ‘그건 좀 생각해봐야겠는데.’ ‘20억 줄게.’ 후딱! 넘어가죠.
자기 방어체제 자기 손으로 어떻게 됩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말씀이 와버려요. 말씀이 오게 되면 내가 나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그게 다니엘 8장에서 자기 몸이 아픈 거예요. 자기가 아프고 싶어 아픈 게 아니고 계시로 인하여 몸이 아픈 겁니다.
이건 다니엘 뿐 아니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할 때 그냥 점잖게 기도하면 되는데 기도하면서 땀방울이 핏방울 돼요. 어떤 인간도 뚫어낼 수 없는 아까 그 형틀, 쇠뭉치 형틀, 완벽하게 가두어놓은 거푸집에서 예수님만이 그걸 뚫고 지나가잖아요. 다른 사람은 못 뚫습니다. 자기 방어체제를 벗어던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를 구원해놓고 헤엄은 나중에 배우게 하죠. 이 세상에 탁 던져놓고… 복음 알 땐 기뻤는데 ‘다 압니다. 압니다.’ 해놓고는 조금만 무슨 일 있으면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이런 식으로.
그다음 봅시다. 여기 70이레라는 말씀이요. 그 말씀은 바로 혼절해서 수일동안 앓았던 다니엘처럼 이 말씀자체가 우리를 파괴시킵니다. 파괴시킬 때 그냥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고 “너 돼지잖아. 너 개잖아. 네가 언제 말씀을 좋아해? 날 속일 생각하지 마. 너는 너 자신도 지금 안 속고 있잖아. 네가 복음보다 돈 좋아하는 거 네가 먼저 알고 있잖아.” 이것을 우리에게 지적함으로써 내가 말씀 지키겠다는 나를 파괴시키고 말씀이 나에게 다른 시작점을 주셨다는 점을 깨닫게 만들죠.
지키는 게 아니에요. 말씀이 와서 우리를 지배하죠. 그러면 우리 내부에서 나의 싸움은 아니고 주님과 마귀의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로서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할 게 뭐가 있습니까.
10만원 주는 걸 거부하고 내가 성경공부 참석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20만원은? 그건 좀 생각해보자. 절대로 우리는 한 순간에 우리의 바른 선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이 p.240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권력의 장”
첫 번째 줄에, “인간의 주체는 악마가 장악하고 있는 권력의 장에서, 인간은 그 실천성을 나타내는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형식의 양상이나 제도를 붙들고 실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게 뭡니까? 성경말씀을 사람들에게 많이 전파하고 복음 전한다는 핑계 하에 사람들이 만든 것은 교회였습니다. 교회를 그냥 만듭니까? 형식을 만들죠. 제도를 만들죠. 형식과 제도 있으면 거기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게 역사죠. 또 역사 나오잖아요, 벌써. 역사.
조직의 역사가 나오니까 나의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다가 그다음부터는 어떤 직분을 맡게 되게 되면 그 조직의 이익이 뭐냐, 조직에 손실되는 게 뭐냐가 그 사람에게 새롭게 확장된 진리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학교에 있는 교목.
내가 나한테 직분을 준 거예요. 나는 이런 사람이다. 도살장 양으로 끌려가야 되는데 자기가 양으로 안 끌려가고 나는 이 땅에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거예요.
‘나는 노래하는 목사다. 나는 노래해서 전도하는 목사다.’ 지금 노래자체도 문제고 전도하는 것도 문제고 목사도 문제에요. 이 세 가지 다 엉터리거든요. 이름은 뭐냐? 구자억이다. 구자억이 뭐하나 보니까 중들 노래 부르는데 원불교, 신부, 거기다가 여자 중이 노래 부르는데 같이 구례 화엄사 가서 거기서 무슨 노래 부르더라? 상당히 신나는 트롯트 불렀는데.
이게 뭐냐 하면 종교보다 더 월등한 게 자기 음악이 된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이 자기 종교보다 더 월등한 거예요. 그럼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 (고전 16:22).
그런데 그것을 공간 시간 따라서 하라? 아니에요. 시도 때도 없이 어느 자리든 주와 함께 있는 자리라면 주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것이 하나의 행동으로 나와야 되잖아요. 그렇다면 거기서 노래 부른다는 말은 ‘나 저주받을래.’ 하고 똑같은 거예요. ‘나 이제 저주받는 사람 되겠습니다.’하고 똑같은 짓밖에 안되죠.
주께서 주신 목숨가지고 주께서 주신 시간가지고 주께서 주신 공간가지고. 이게 무슨 시간? 말씀의 시간이죠. 말씀의 시간에서 자기 변명과 자기 정당성을 왜 집어넣습니까? ‘이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 잘 융화해서 그 사람들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서 제가 판을 깐 겁니다.’ 판을 왜 자기가 까는데요? 죽으라고 하는데 판을 왜 깔아요? ‘내가 죽으면 안 됩니다. 판을 깔아야 됩니다.’ 이게 말씀의 시간이 아니고 자기 시간이 되는 거예요.
물론 하나의 예를 든 거니까요. 구자억이 이런 사람이라는 게 다니엘처럼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그냥 하나의 예를 든 건데. 그렇게 하면서 나도 불국사 가가지고 노래 부를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잊으라 했는데~’ 해놓고 찬송가라고 우길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이거는 누구도 모르는데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한 가지, 주께서는 이미 확정했다는 것, 도살장으로 끊임없이 당기고 있다는 거예요. 구자억 목사도 화엄사가서 도살당하라고 할 수도 있는 문제기 때문에 내가 누구 인생에 대해서 관여할 하나님 자리가 아니니까 알 수 없지만 매순간이 주님의 죽으심에 관심 두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한테 이익이냐 손실이냐. 도저히 지워낼 수 없고 빼낼 수 없는 본성으로 가득차서 살아가는 엉터리 현실관에 매여 사는 우리 자신을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십자가에 완성된 어린 양의 하나님 은혜를 한시도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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