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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제 1강 (이 근호목사, 2009년 8월 14일(1), 서울의존교회)
빌립보서 1:5,6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여기 둥근 원통이 있다고 칩시다. 어릴 때 동네 하수구공사 할 때 많이 보셨지요? 거기서 논 기억도 있을 거예요. 그 안에 들어앉아서 ‘너는 아빠, 나는 엄마’ 이러면서 소꿉놀이도 하곤 했잖아요. 여기서 시작을 복음으로 시작해서 이 끝이 ‘예수의 날’ 이 되면 우리는 이 원통 안에 있는 겁니다.
‘예수의 날’ 이라는 이 말이 매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2009년 10월 2일’ 이런 식으로 날짜를 정해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면 이것은 인간의 날입니다. 인간의 날이라는 것은 이 원통 안에 들어 있어요. 그 안에서 인간들끼리 계산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날이라는 것은 인간의 날과 별개로 있다는 말이지요.
‘예수의 날’ 이라는 이 날이 언제입니까? 이게 언제지? ‘예수의 날까지’ 라고 하는데 이게 언제지? 그리고 시작을 ‘복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이것도 이상해요. 사람 같으면 ‘우리 집에서’ 라든지 또는 ‘내 몸에서’ 라고 하겠는데 혹은 ‘처음 태어난 장소인 산부인과에서’ 라든지 혹은 ‘처음 개척한 교회에서’ 이렇게 시작이 있는데 ‘복음에서 시작?’ 이 말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여기 원통이 있고 우리는 원통 안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이 안에는 힘이 있어요. 복음이 주는 미는 힘에 의해서 쫙 쫙 계속해서 밀려가는 거예요. 밀려가다 가다 보니까 ‘어?’ 하고 예수의 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날이 날짜가 아니라면 우리가 예수의 날짜라는 것에 맞출 필요가 있겠습니까? 안 그러면 그냥 복음의 힘에 밀리겠습니까?
예수의 날을 지키겠습니까? 안 그러면 복음의 힘에 밀리겠습니까? 지키겠습니까, 그냥 밀려 살겠습니까? 둘 중에 어느 쪽입니까? 그냥 복음의 힘에 밀려 살지요. 그냥 밀려 살면 돼요.‘당신 요즘 어떻게 살아?’ ‘나 요즘 술기운으로 살아.’ 이러면 참 곤란합니다. ‘당신 요즘 어떻게 살아?’ ‘나는 돈 버는 재미에 휩쓸려서 살아’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당신은 어떻게 살아?’ ‘나는 뒤에서 밀어주는 힘으로 살아’ 이렇게 됩니다.
‘뭐가 미는데?’ 복음이 뒤에서 쫙쫙 밀어주는 힘으로 살면 결국 그 사람은 예수의 날에 도달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하고 의논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밀면 밀리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총알이 왜 그렇게 빨리 나가지요? 저보고 성질 급하다고 하지만 총알은 저보다 성질이 더 급해요. 총알이 나갈 때는 밑에 있는 방아쇠만 살짝 당겼을 뿐인데 위에 있는 총알이 ‘준비 됐나?’ ‘준비 됐다’ 하고 무지 성질 급하게 ‘나, 간다’ 하고 쫙 나가잖아요.
이게 권총이라면 복음이 방아쇠고 우리는 총탄입니다. 복음이 잡아당기면 권총에서 총알이 튕겨 나가서 도달되고 보니까 예수의 날에 도달되는 겁니다. 어린이들에게 이것을 쉽게 가르치기가 참 어렵지만 될 수 있는대로 쉽게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 집에서 시작한다, 내 몸에서 시작한다, 어떤 체육관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시작이 바로 장소인데 이것은 우리 생각이고 성경은 ‘복음에서 시작한다’ 라고 되어 있거든요.
권총이다, 원통이다, 이 그림을 다 여러분이 기억한다 치고 그렇다면 인간의 원래자리, 처음자리가 어디냐 하는 겁니다. 인간은 어디서부터 시작했느냐 하는 겁니다. 길에 가는 사람보고 물어보는 겁니다. ‘당신은 원래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우리 어머니께서 나를 낳았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그 엄마의 어머니가 낳았겠죠.’ ‘그러면 그분은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계속 그렇게 가면 그 사람이 짜증이 나서 ‘꺼져’ 라고 하겠지요. 처음에 인간이 시작된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를 알려 드릴게요. 처음의 그 자리를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생명나무와 선악과’ 라고 되어 있는데 줄여서 하면 ‘생명과 죽음’입니다. 생명의 법칙과 죽음의 법칙이 짜여져 있는 이 복판에서 인간은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죽을 수도 있고 살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뭐냐 하면 생명이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이거 어려운 말입니다. 사람은 왜 있는가? ‘아, 저런 것이 생명이구나’ ‘아, 저런 것이 죽는다는 것이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에 혹시 성냥개비나 빨대 같은 것이 있을까요?
이쑤시개도 좋습니다. 여기 이쑤시개가 있습니다. 이게 사람이라고 치면 이쑤시개가 왜 있느냐 하면 ‘이것(허리가 부러진 이쑤시개)은 죽은 것이구나. 그리고 이것(멀쩡한 이쑤시개)은 아직 안 죽은 거구나’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멀쩡한 이것이 사는 것인데 이렇게 부러지면 죽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이 있어야 되고 또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것은 됩니까, 안됩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은 없어요. 여러분,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선택했거든요. 내가 이 학생을 선택했다고 하면 그 때부터 이 학생은 자기선택이 없어요. 자기선택은 날아가 버렸어요.
‘학생은 이제 3초 후에 잠을 잔다. 얍!’ 보세요. 지금 자고 있잖아요. 이렇게 딱딱 맞아야 연기가 되잖아요. ‘자, 3초 후에 깨어난다. 합!’ 보세요. 또 깨어나잖아요. 이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했다, 성도를 선택했다, 하게 되면 ‘하나님, 저는 뭘 선택할까요?’ 라는 말도 하지 마세요. 이미 선택 당했어요. 선택 당했고 선택하신분이 알아서 여러분의 미래까지 보장해줍니다.
그래서 선택이 좋은 거예요. 만약에 아버지가 의사인데 그 아들이 공부를 되게 못해요. ‘아빠, 나는 고등학교졸업하고 어느 대학을 선택하면 될까요?’ 아버지가 하는 말이 ‘선택하지 마’ ‘왜 선택하지 마?’ ‘이 병원 네꺼야’ ‘왜 그런데?’ ‘내가 선택한 것이 네 선택이야’ ‘내가 의사면 너도 의사고 내가 부자면 너도 부자야. 너는 내 안에 그냥 머물러 있으면 돼. 내 것에 네 것이고 네 것이 내꺼야.’
이것을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하거든요. 여호와에게 선택되었습니까? 그러면 여호와께서 이루시는 천국도 여러분의 것입니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여러분이 고민의 길로 빠지면서 ‘나는 어느 길로 가야 구원의 길로 가는가?’ 이것은 쓸데없는 고민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고민하지 마시고 누가 나를 선택했는가, 그것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께서 나를 선택했으면 주의 것이 우리 것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제가 안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지 말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요 14:9) 그러니까 예수님 있는 곳에만 하나님이 있고 없는 곳에는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 선택 당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것이 전부 다 하나님의 것이고 예수님에게 선택당한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 전부다 자기 것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구태여 인생에 대해서 ‘어느 길로 갈까요’ 라고 고민할 필요 없어요. 그것은 그럴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계시잖아요. 아버지가 여러분의 모든 인생을 다 책임질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 마, 오늘 시험 또 0점 맞았어.’ 아버지가 그것을 듣고 있다가 ‘걱정마라.’ 아들이 ‘공부하기 싫어 죽겠는데….’ ‘하지 마. 하지 마.’ ‘나 그냥 놀거야.’ ‘그래 맘껏 놀아라.’ ‘그러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데?’ ‘아버지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자녀를 하나만 낳아야 돼요. 자식을 하나만 낳으면 형제간에 싸울 일이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괜히 쌍둥이를 낳아서 서로 싸우기 바빴는데 애가 하나만 있으면 아버지 어머니의 것이 다 자기 것이 되어서 그 애가 인생을 얼마나 편하게 사는지 몰라요. 아버지가 돈을 벌어오면 괜히 자기가 좋아해요. 왜? ‘아버지 죽으면 다 내꺼.’ 엄마가 다이아반지를 사면 괜히 자기가 기분이 덩달아 좋아요. 왜? ‘엄마 다이아반지 내 꺼. 웬 다이아? 다 내 다이아!’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는 말은 ‘네가 네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선택할 그런 권한이 없으니까 이제는 걱정 뚝! 우는 것 뚝! 짜증내는 것 뚝! 염려하는 것 뚝!’ 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선택하신 분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생명’ 이라고 해요. 요한복음 1장 앞부분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여호와께 선택받은 사람은 생명과 죽음가운데서 어느 쪽으로 선택받았다? 생명 쪽을 선택받았어요. 생명 쪽을 선택받은 그 성도들은 지금 뭐하고 있습니까? 조상의 죄 때문에 죽어가고 있거든요. 연세 많은 분들은 죽는 것을 굉장히 아쉬워해요. 젊은 분들은 죽는 것이 남의 일이지만 늙은 분들은 점점 죽음을 가까이 느끼기 때문에 남의 일이 아니고 내일이 되어서 공포심을 갖고 있습니다.
자식들한테 전화해서 ‘얘야 나 죽는다. 얘야, 나 죽고 난 뒤에 오지 말고 빨리 와 봐라. 죽고 나서 이틀이나 되면 그 시체가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죽기 전에 자주 전화해라.’ ‘왜요?’ ‘죽은 뒤에 시체 그냥 놔둔 채 썩어버리면 그게 어떻게 되겠노.’ ‘어떻게 되기는요. 그냥 썩는거죠.’ ‘얘야, 그렇게 되면 너희들이 얼마나 욕을 얻어 먹겠느냐?’ ‘우리가 욕을 얻어먹는 것은 돌아가신 분들이 걱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욕얻어 먹는 것은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죠.’
걱정할 것이 없으니까 자기 죽고 나서의 일까지 걱정을 해요. ‘시체 치워 줄 테니 그냥 돌아가세요.’ 죽어가는 사람에게 안 죽고 생명으로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기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덜렁 우리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것은 우리보고 좋으라고 선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 솜씨를 맘껏 발휘하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예수거든.’ ‘나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거든.’ ‘그런데요?’ ‘내 실력한번 보여줄까?’ ‘보여주세요.’ ‘에라, 죽어라 이놈아.’ ‘놔라! 놔라!’ ‘죽어라!’ ‘왜 갑자기 이러시는 겁니까?’ ‘내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죽어야 된다.’ 그게 빌립보서의 주장입니다. ‘네가 환란을 당하나 기뻐하라.’
‘네가 이 땅에서 죽으나 나중에 영화롭게 네 몸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하죠. ‘예수님, 부담되거든요.’ ‘너희들이 부담되고 안 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 예수님의 실력 복음의 실력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를 난 너희를 가지고 이 우주, 전 세계에 한번 뽐내고 싶다. 너희들은 박수치고 찬미하고 할렐루야, 찬양하며 되는 거야. 우리 예수님 멋쟁이, 최고! 이거만 하면 된다.’
옛날에 목사님 어렸을 때 대구 달성공원 근처에 살았는데 그 때는 바위가 없었어요. 학교 마치고 달성공원에 가면 전국에서 몰려온 온갖 약장사들이 다 있어요. 나무 막대기 하나를 세워놓고 기합을 이얍, 이압, 주면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원숭이 데리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또 뱀 장사는 ‘비암, 비얌이 왔어요. 애들은 가라’ 하고 떠드는 사람도 있고 재주넘는 사람 등 여러 가지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데리고 온 원숭이, 곰, 이런 짐승들은 참 불쌍해요. 하루종일 까불고 사람들이 즐겁게 웃고 하지만 하루 종일 그러면 그 원숭이도 지칩니다. 그래도 그 원숭이 인격 없습니다. 원숭이 의료보험도 없고 원숭이 노후대책 같은 것도 없습니다. 주인이 약장사 하려고 약 팔아 먹기 위해서 그냥 부리는 것 뿐입니다. 그게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할 때는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났거든요.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켜서 ‘너희는 창세전부터 생명이었는데 그 생명이 얼마나 멋있는 생명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를 죽음 에 몰아넣는다. 죽음 속에 몰아넣더라도 결국 너희들만큼은 죽음과 생명가운데 생명에 속하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죽지만 영원한 심판, 지옥 불에서 죽음이고 이 생명은 나중에 천국의 행복까지 이어지는 것이 원래의 원판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에 보면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기로 작정된 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미움 받기로 작정되어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또 로마서 9장에 보면 두 종류의 그릇이 있는데 하나는 자비의 그릇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또 하나님의 진노를 담기 위해서 태어난 그릇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원천, 우리의 원래의 자리, 우리는 어디서 태어났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이 방법은 뭐냐? 창세기 9장에 무지개가 나오는데 무지개가 왜 생기지요? 무지개는 ‘얼마 전에 비 왔다’ 그것을 보여주려고 무지개가 생겼어요. 무지개가 비가 오고 생깁니까, 비가 오기 전에 생깁니까?
비오고 나서 생겨요. 그러니까 무지개가 생기는 것은 얼마 전에 비가 왔다, 그 말입니다. 처음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방주에 탄 사람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다 죽었어요.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여줬는데 그게 뭐냐 하면 ‘비가 왔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죽음이다’ 그런데 비가 안 왔다는 것은 ‘야, 이제 살았구나’ 비가 오면 ‘야, 이제 죽었어’ 비가 그치면 ‘야, 이제 살았어.’
비 내림과 비 그침의 가운데 서 있는 것이 무지개에요. 무지개는 ‘이처럼 너희가 비가 오는 죽음의 심판에서 비가 그치는 생명의 세계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옮겼다. 죽음과 생명사이에 무지개가 버티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죽어도 마땅한 인간을 봐줘서 무지개덕분으로 살려주고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지개언약, 무지개약속이라고 한 겁니다.
생명과 죽음(원래의 자리, 모판처럼 짜여진 구조), 이 생명에서 생명을 보여줄 사람들이 태어나고, 태어나고 죽음에서 죽음을 보여줄 사람들이 또 태어나고 태어나요. 이 사람들은 다 모여서 지옥에 들어가고 이 사람들은 다 천국에 가는데 사람을 왜 만들었느냐 하면 생명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만든 거예요.
이 사람에게는 무엇이 담겨 있겠어요? 생명이 담겨 있고 이 사람에게는 무엇이 담겨 있겠어요? 죽음이 담겨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생명이 담겨 있기에 죽어도 살아요. 또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또 죽어도 또 살아요. 또 죽이면? 또 죽여도 또 살아요. 10번 죽이며 10번 다 살아요. 백번 죽이면 백번 살아요.
여러분, 오뚜기 알아요? 오뚜기는 그 밑바닥에 무거운 쇠뭉치가 들어 있어서 아무리 넘어져도 계속 일어서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요. 생명이 있는 사람은 생명의 길로 가게 되어 있어요. 천국에서 지남철로 잡아당기면 생명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지옥이 있더라도 ‘어? 어?’ 하고 딸려가요. 누가 당기는데? 생명이 있는 사람은 복음으로 당겨요. 그 복음이 뭐냐 하면 바로 무지개입니다. 옛날에 목사님이 본 재미있는 소설이 있는데 그게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라는 책입니다. 쌍둥이 소녀가 있는데 그것도 막장드라마에요. 엄마가 쌍둥이를 다 못 키우니까 하나는 부잣집 대문에 놓고 하나는 가난한 대문에 놓고 왔지요.
그러니까 하나는 부잣집 딸이 되고 하나는 가난한 집 딸이 되었어요. 둘이 피아노 콩쿨에서 1등을 겨루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 이겼는가? 가난한 집 애가 이겨서 부잣집 애 콧대를 꺽어 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둘이 형제간인 거예요. 아직도 그 내용이 기억이 나요. 인생 참 기구하죠. 우리는 무지개가 떠도 그냥 별 생각이 없이 보지요.
그런데 노아홍수 당시의 사람들은 무지개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요. ‘다시는 너희를 물로서 안 죽일게’ 라는 말이 무지개모양으로 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 무지개가 뭐냐하면 십자가가 되지요. 십자가는 ‘다시는 너희의 죄를 묻지 않을게’ 이렇게 써 있다고요. ‘너희의 죄를 용서할게’ 그러면 우리는 이걸 보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여, 하고 이 십자가를 붙들어야 되지요. 이 무지개하고 십자가사이에 무엇이 있느냐 하면 그게 놋 뱀입니다. 놋으로 만든 뱀이 있어서 모세가 하는 말이 ‘여러분, 아픕니까?’ ‘아픕니다.’ ‘죽어가고 있습니까?’ ‘죽어가고 있습니다.’ ‘복창소리 봐라. 그것밖에 안되나?’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놋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고 안쳐다보는 사람은 죽는다. 셋까지 세겠다. 하나, 둘, 둘 반, 셋!’ 그리고는 놋 뱀을 높이 쳐들었어요.
쳐다보는 사람은 ‘어, 몸이 이상하다’ 하면서 일어서는데 또 어떤 사람은 ‘내 죄는 내가 안다. 나는 벌 받아도 마땅해. 나는 내가 착해서 구원 받을거야.’ 이러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은 ‘어이, 아저씨! 여기 놋 뱀이요’ 하면 그 사람 반응이 ‘뭐? 나보고 어쩌라고’ 합니다. ‘이 놋 뱀을 쳐다보시라고요.’ 그러면 또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미쳤나? 내가 그걸 쳐다보게. 나 그거 안쳐다봐. 나도 자존심이 있지.’
그 사람은 안쳐다보다가 죽었어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그 놋 뱀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어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한번 보세요.’ ‘안 봐.’ ‘당신의 죄를 용서한다고 했는데 안쳐다 볼 거요?’ ‘안 쳐다봐.’ ‘왜 안쳐다 봅니까?’ ‘난 불교신자거든.’ ‘아저씨 여기 지금 불교신자니 기독교 신자니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 쳐다보세요.’ ‘나는 무식해서 못 쳐다봐.’
‘아저씨, 무식해도 괜찮으니까 쳐다보세요.’ ‘쳐다보려고 하는데 나를 안쳐다보잖아요.’ ‘신경 쓰지 말고 이 놋 뱀만 쳐다보라니까요.’ ‘안 봐,’ ‘왜 안쳐다보는데?’ ‘나도 고집이 있어. 난 남이 하라고 하면 안 해.’ ‘그럼 하지 마!!’
하나님께서 우리 천국 보내는데 수학시험 안칩니다. 영어시험 안쳐요. 산수시험 안치고 받아쓰기 안 해요. 수능시험 안칩니다. 뭘 가지고 여러분을 구원하느냐 하면 한번 ‘쳐다 봐!’ ‘잡솨 봐!’ 하는 식으로 ‘쳐다 봐.’ 자기가 지금 대학을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 한 달 수입이 얼마냐, 교회 교인 수가 몇 명이냐, 교회 헌금이 얼마가 나오느냐 키가 몇 센티냐, 내가 부모가 있느냐, 고아냐, 남자냐, 여자냐, 장애자냐, 세리냐, 창녀냐, 그런 것 일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어떤 보험회사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고 해서 진짜 그런 줄 알고서 보니까 그게 엉터리였대요. 왜? 이름은 묻는다고 하더래요. 여기는 이름도 안 물어요.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아무것도 안 물어요. ‘너 죽었다고 생각하고 쳐다보기만 하면 살아.’ 이게 십자가입니다. 참 쉽죠 잉? 정말 쉽죠.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한 목적이 영어를 잘하고 수학 잘하고 큰 목회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네 안에 생명 있다. 생명 있는 사람은 생명 쳐다보게 되어 있어.’ 생명이 있느냐, 아니면 죽음이 있느냐,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생명이 있는 사람만 쳐다보게 되어 있는 그 방법을 사용하게 된 겁니다.
‘너 대신 누가 죄 담당해서 죽었다. 그것이 생명이다’ 라고 생명을 쳐다보게 하는 거예요. 그게 놋 뱀이고 그게 무지개고 십자가인데 특징이 뭐냐 하면 십자가 보면 생명이고 안보면 지옥이고 놋 뱀 보면 생명이고 안보면 죽음이고 무지개 믿으면 살고 무지개 안 믿으면 죽고, 우리를 구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죽음 그 둘 사이에서 일을 해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반드시 어떤 일이냐 하면 ‘너 살래, 죽을래?’ 제가 가끔 제 아내하고 무슨 일을 해요. 사실 제가 한다고 보다는 제가 운전만 해주고 일은 제 아내가 하는데 멀리 촌에 들어가게 되면 한식은 별로 먹을 것이 못되는 것 같아서 주로 중국집에 가게 됩니다. 중국집에 갈 때마다 갈등을 일으키죠. ‘짬뽕이냐, 짜장면이냐?’
그래서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짜장면은 보통으로 시키고 짬뽕은 곱빼기로 시켜서 저는 짜장면 저 혼자 다 먹고 아내의 짬뽕면 절반 또 먹게 되면 양이 어느 정도 맞아요. 둘 다 먹을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항상 ‘짬뽕 먹을래, 짜장 먹을래’ 항상 이 둘 중에 하나예요. ‘벌건 피(짬뽕) 먹을래 아니면 지옥(시커먼 짜장면)갈래?’
항상 둘 중에 하나에요. 짬,짜장 안 됩니다. 둘 다를 먹을 수는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실 때 항상 하나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짬뽕이냐 짜장면이냐.’ 하나님이 모든 말씀을 통해서 묻는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어요. ‘지옥갈래. 천당 갈래?’ 그것만 물어요. ‘하나님,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나한테 그런 것 묻지 마.’
‘하나님 헌금을 할 때 어떤 선택을 홥니까?’ ‘너는 이미 선택 받았어. 그러니 나에게 어떤 선택이라든지 행위를 해서 나오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마. 하지 말고 이미 선택되었기 때문에 너는 내 사람 맞아. 너는 다른 사람이야’ 라고 합니다. 그 것을 묻는 방법이 뭐냐? ‘너, 죽을래, 살래?’ 그겁니다. ‘살고 싶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럼 살아라.’ ‘죽고 싶습니다’ ‘그럼 죽어라.’
그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빌립보서 참 쉽지요? 원래의 자리가 보여주는 그대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빌립보서입니다. 원래의 자리로부터 시작해서 원래의 자리로 귀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이 약간 고생스러워요. 영어로 하면 'a litttle', ‘약간’입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왜 고생을 해야 하는가?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왜 고생을 한다고 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누구의 실력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아슬아슬하게 초죽음이 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집어넣어요. 죽여가면서도 ‘어때? 내 실력이’ 라고 하시는 거예요.
초죽음이 되어서 ‘아이고, 진짜 못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 네가 죽더라도 너는 살게 되어 있어.’ 그러면 우리는 ‘주님, 너무 장난이 심합니다.’ ‘너는 이게 장난으로 보이나? 나는 현실이다.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이것이 너는 농담이고 장난이란 말이냐? 이것은 실제사건이야 이제 그 실제사건 속에 너를 집어넣겠어. 너도 나의 실제 사건 속에 들어와 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빌립보서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여기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 지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저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러니까 이게 아까 이야기한 무지개고 놋 뱀이에요. 십자가 믿으면 살고, 십자가 원수 되면 죽고. 아주 깔끔해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제부터 교장선생님이 훈시를 하겠다. 내가 누구지? 내가 교장선생님이다. 내가 교장선생님인 것을 믿는 사람 손들어봐.’ (몇몇이 손을 든다) ‘어이 선생님들! 저 애들 오늘부로 무조건 졸업입니다. 그리고 내가 교장선생님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저 나머지 애들은 전부 다 소년원에 집어넣으세요.’ 그게 선생님의 방식입니다.
‘선생님, 저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왔는데요.’ ‘공부하지 마.’ ‘저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요.’ ‘똑똑하지 마! 안 똑똑해도 괜찮아.’ 그게 바로 인생을 걱정하는 거예요. 한국인의 인생은 서울대학 나와야 되고 아이큐가 높아야 되고 돈도 벌어야 되지만 하늘나라는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십자가 알면 합격이고 모르면 불합격, 지옥가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 아는 목사님들은 매일같이 설교할 때 십자가를 증거 하지요. 그러면 교인들은 ‘아이고, 반갑다. 한 주만에 반갑다. 나를 구원해 준 십자가를 또 이야기하는구나.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러면서 은혜 받지요. ‘여름철이기도 하고 나 잡니다.’ 이러면 보통 교회 같으면 강대상을 땅땅 치면서 ‘마귀야 물러가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 ‘대구우리교회’ 교인들은 제가 설교를 40분정도 하고 길게 할 때는 50분까지도 하는데 ‘좀 더 해주세요’ 라는 느낌입니다. 제가 더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빨리 마치고 예식장 갈 사람들 배려합니다. 제가 우리교회교인들에게 감사하지요. 그 교인들이 저에게 ‘십자가만 증거 하라’ 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십자가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예 안 나오고.
이제 아시겠지요? 무지개도 생명과 죽음사이의 무지개고 놋 뱀도 죽음과 생명사이의 놋 뱀, 그리고 십자가도 죽느냐, 사느냐, 그 중간의 십자가, 따라서 ‘아하, 십자가를 믿으면 사는 쪽이구나, 놋 뱀 바라보면 사는 쪽이구나, 무지개 믿으면 사는 쪽이구나.’ 이것은 전부 다 죽음과 생명 중간에 끼어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오늘 빌립보서 1장을 시작하면서 죽음과 생명 이 사이에다가 빌립보서 전체를 집어넣자 이 말입니다. 빌립보서를 집어넣어서 빌립보서를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는거예요. 그러면 빌립보서에서 무엇이 나오느냐 하면 여기서 복음의 실력, 복음의 능력이 나와요. 아까 제가 권총에서 우리는 뭐에 해당된다고 했습니까? 총알, 그러면 우리는 총알 탄 사람들이 되겠지요.
방아쇠는 누가 당기죠? 처음에 예수님이 방아쇠를 당기면 그 추진력에 의해서 우리는 총알 탄 사람들이 되어서 퓽, 하고 날아가서 나중에 꽂히는 곳이 어디다? 예수님의 나라, 천국에 도착되는 거예요. 뒤에서 떠미니까 떠밀리는 거예요. 제가 뽀빠이라는 만화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좀 과장이 심해요. 뽀빠이가 좋아하는 아가씨 이름이 올리브에요.
뽀빠이는 평소에는 힘이 별로 없다가도 부르투스(짐승)라는 괴한이 나타나서 자기 애인 올리브를 괴롭히면 약이 오르는데 힘은 없지요. 힘이 없을 때 어떻게 채우는가 하면 시금치를 먹어서 채웁니다. 시금치깡통을 따서 들어붓듯이 먹고 나면 ‘빵빠라 빵~!’ 하면서 근육이 불거지면서 힘이 솟는데 그 힘으로 부르투스를 데리고 수풀이고 어디고 막 끌고 다니는데 거기에 있는 나무고 뭐고 다 초토화되면서 그 괴한은 아예 초죽음이 되고 말지요.
‘이놈, 이리와’ 하면서 뽀빠이가 부르투스를 데리고 가는데 뽀빠이가 앞장서서 가는 좋은 길인데 딸려가는 부르투스는 나뭇가지에 걸리고 돌멩이에 걸리고 심지어 길가의 상점천막에 걸리고 전부 다 거치면서 부러지고 망가뜨리면서 가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를 끌고 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낙방케 하기도 하고 이혼케 하기도 하고 별별 일이 다 일어나게 합니다.
모든 사건이 나뭇가지 부러지는 것처럼 막 통과하는 거예요. 힘들어 죽겠지요. 이상한 사람들이 사이트에 들어오게 되면 리플 달기 바쁘고 온갖 거치는 것, 껄끄러운 것, 힘든 것, 구조조정 당하는 것, 집에 불나는 것, 상가가 날아가는 것, 마누라 도망가는 것, 교회 깨지는 것, 교인들끼리 싸우는 것, 주님께서 손목잡고 끌고 가면서 온갖 것을 경험케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약간의 어려움을 당하는데 그런 가운데서 뭘 배우고 뭘 익히느냐 하면 ‘야, 주님의 능력은 환란가운데서도 너끈하게 이겨내시니 못 하는 게 없구나. 안 되는 것이 없네’ 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빌립보서 4장을 봅시다.
빌립보서 4:4-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빌립보서 4장 11절도 봅시다.
빌립보서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왜? 나는 선택 당했으니까. 여기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정한 목표가 아니고 주님이 정한 것은 안 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한테는 안 된다고 여긴 것도 이미 된 것입니다. 실패라고 여기는 것도 이미 성공입니다. 도대체 실패라는 것이 없어요.
실패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아무리 실패했다 한들 죽는 것보다 더한 실패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죽어도 너끈하게 건지니까. 빌립보서의 주제가 뭐냐? ‘환란가운데서도 기뻐하라’ 이것이 주제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 한 것처럼 힘센 뽀빠이가 딱 붙잡고 있듯이 주님께서 꽉 붙잡고 있으면 그 잡힌 인간은 어디에 가도 못 빠져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 그렸던 원통을 다시 그려봅시다. 이 원통 안에 머무르고 있으면 처음에 복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디로 끝난다? ‘예수의 날까지’ 그대로 가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무슨 험한 것을 거치든 간에 결국 우리는 예수의 날에 도달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시간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장을 보고 약간 쉽시다.
요한복음 1:3-5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매우 어려운 말인데 무슨 뜻이냐 하면 처음 창세기에서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심었지요? 생명나무는 생명을 말하고 선악과는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으니까 죽음을 말하는데 창세기 3장에서는 그냥 모판이었어요. 이 모판에 있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 못하는 아담, 하와가 ‘이거 따먹을까 말까’ 이러고 살고 있는데 요한복음 1장에서는 웬 천사 같은 분이, 꼭 동화 속에 나오는 피터팬처럼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움직이는 생명이에요.
우리는 꼼짝 못하고 그냥 가만있어요. 창세기에서 인간은 그냥 모판,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하고 죽은 것처럼 꼼짝 못하고 있을 때 ‘짠, 나는 생명이지 롱’ 하면서 세례요한부터 시작해서 피터팬 처럼 움직이고 날아다니는 생명이 우리에게 와서 생명을 주게 되면 우리도 독수리에 채이듯이 그 생명에 채여서 하늘나라 가는 겁니다.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는 ‘어떻게 역사에서 묵시로 날아가는가’ 그 과정을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마을수련회에 참석을 못하셨기 때문에 둘째 시간 초반부에 그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