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091009빌1장21절a
빌립보서 제 5강 (이 근호목사, 2009년 10월 09일(1), 서울의존교회)
빌립보서 1장 21-24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여기서 ‘두 사이에 끼었’다, 고 하는데 어디와 어디 사이에 끼었다는 말인가? 죽고 사는데 끼었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는 죽고 싶고 자기가 죽는 것이 본인한테는 유익인데 성도들입장에서는 자신이 살아 있는 그것이 더 이익이다, 그런 뜻입니다. 둘 사이에 끼었다는 말은 나와 너희 가운데서 나의 이익은 ‘내가 죽는 것’ 이것이 나의 유익이고 너희의 이익은 ‘내가 더 사는 것’ 이것이 너희한테는 이익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둘 사이에 현재 끼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나 자리에 여러분의 이름을 집어 넣어 보세요. ‘내가 죽는 것이 나한테는 유익이지만 내가 더 사는 것이 너희(아무개와 아무개)한테는 이익이다’ 라고 하면 누구한테는 손해가 됩니까? 내가 살면 살수록 나는 괴롭고 손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 겁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시골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돈을 잘 벌어서 고급 아파트 100평짜리를 샀습니다. 아직은 시골에서 너무나 불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허름한 집에서 벗어나서 어서 좋은 집에 사는 그것이 자기한테 유익인데 그 며느리로 인해서 시어머니는 큰 유익을 보고 있습니다. 살림을 다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시어머니에게는 유익이 되지만 그 며느리에게는 살면 살수록 더욱 힘들고 고생이 되는 겁니다. 그처럼 그런 관계로서 둘 사이에 끼어 있다고 사도가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살면 살수록 나에게 이익이 될 것은 없고 살면 살수록 나에게 손해만 될 뿐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봉사를 해야 되기에.
사도바울의 이 이야기를 흉내를 낼 수 있는 것일까요? 사도가 이것을 이야기함으로써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하면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늘나라가 이런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려 함입니다. 첫째시간에는 하늘나라, 천국이 뭐냐, 이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았으면 빨리 죽어서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천국이 어느 정도 좋은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천국은 사람이 없는 곳에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한 둘 있으면 그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지옥입니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그것도 천국 아니고 지옥입니다. 사람 없는 곳에 천국이 있어요. 그래서 천국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피해서 빨리 죽고 싶어요. 보통 길에서 등산을 하는 중에 산중에서 사람을 만나면 반갑습니까, 아닙니까?
반갑지요. 사람을 피해서 홀로 산에 갔는데 막상 가보면 또 외롭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죠. 그런데 맞은편에서 누군가 벌써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올라가니 좋던가요?’ ‘좋지요.’ 이렇게 반가워요. 사람이 여럿 있을 때는 혼자 있고 싶지만 막상 혼자 있으면 사람이 그리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천국에 가기 싫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사람이 없는 곳에 있어요. 제가 그림으로 그려보지요. 여기에 사람이 네 명 정도 있다. A, B, C, D가 있다고 칩시다. 천국은 A가 생각하는 자기의 세계, B가 생각하는 자기세계, C가 생각하는 자기세계, D가 생각하는 자기세계가 이렇게 있다고 친다면 천국은 그 사이에 있습니다. 여기도(각자의 세계영역) 여기도 다 없습니다.
천국은 사람이 없는 곳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냐 하면 사람보다 더 좋아하는 분이 있을 때 그 때는 사람이 별로 안 좋아지게 되겠고 그 사람만이 천국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안와도 좋아. 아무도 안와도 좋고 나 혼자 갈게’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은 뭔가는 천국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교회 시작했더니 처음에 50명인데 한 1년쯤 지나니 30명 남아 있더라. 그런데 2년 지나니까 10 명 남고 4년쯤 지나니까 아내와 애 둘 합해서 교인수가 총 4명 남았다.’ 주위에서 이야기 합니다. ‘목회 망했구나.’ 그럴 때 천국을 진짜 아는 목사님은 속이 다 시원합니다. ‘다 가라고 해라. 당신도 갈래? 나 혼자 가지 뭐.’
천국은 구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사람이 없는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꾸 얼쩡거리면 천국가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게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사람이 자꾸 있으면 그것을 돌보아준다고 자꾸 힘이 들어요.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아무도 나를 인정하지 않을 때 ‘행복한줄 알아라, 이것들아. 다행인줄 알아라, 이것들아’입니다. ‘너 왔어? 거기 있었어?’ 할 정도로 아무도 나를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정도가 될 때.
제 어릴 때 집안 식구가 13명이었습니다. 언제 섭하냐 하면 공부하고 있는데 자기들끼리 저녁 다 먹은 거예요. 저녁 먹으려고 하니까 다 먹고 치웠잖아요. ‘엄마, 나는?’ ‘어? 너 집에 있었냐? 나는 네가 학교에서 안온 줄 알았다.’ 그럴 때 섭하지 않겠습니까? 무지 섭하죠.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존재를 누군가 무시할 때 그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요. 눈에 뵈는게 없습니다. 칼이든 뭐든 손에 쥐어지면 다 살인의 도구가 됩니다.
심지어 강아지라도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이 느껴지면 그 강아지를 죽이고 싶어요. 부부생활 잘 하다가 어느 날 아내가 나를 무시하고 남편이 나를 무시할 때 언제 부부였냐 싶을 정도로 죽이고 싶고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그 정도로 사람은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나 어때요? 나 쓸만하지요?’ 라는 보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누구 나 알아주는 사람 없어요? 누구 나 사랑해줄 사람 없어요?’ 그걸 찾기 위하여 살아가는 겁니다. 사람이 아무리 힘들어도 견딥니다. 그러나 언제 못 견디느냐 하면 누군가 날 무시하면 못 견딥니다. 힘들어도 ‘잘한다. 그래, 조금만 더 하면 성공하겠어’ 라고 누군가 나를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면서 현재 나의 있음을 알아줄 때 교회 올 맛도 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춘다고 하는 거짓말도 있습니다만. 교회 왔는데 누구십니까, 왜 오셨습니까, 라고 관심 가져 주는 사람도 없고 아예 분위기 썰렁할 때 그 사람은 그 교회 발 끊습니다. 교회 처음 나왔을 때 ‘어디서 오셨습니까? 어떻게 해서 오셨습니까? 다른 교회 다니다가 오셨습니까? 아니면 교회는 처음이십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음, 이 교회도 사람 하나 오니 반갑다고 붙드시는 모양인데 제가 그리 쉬운 사람은 아니거든요’ 라고 속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일단 붙들어주면 고마워요. 그런데 아무도 관심도 없고 쳐다보지 않을 때 사람은 존재감을 못 느껴요. ‘내가 여기 왜 있어야 하는가? 내가 이 바닥에서 계속 존재해야 되는가?’ 그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사람이라 하는 것은 나를 알아주는 그곳에서 아낌없이 충성을 다 합니다. 그것을 자기정체성이라고 합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주위에서 그들이 나를 알아줄 때 그런 것들을 수집해서 모아서 ‘아, 나는 이런 인간이구나’ 라고 새삼 파악이 되는 거예요. 자기 딴에는 열심히 했는데 ‘너는 공부도 지질이도 못하는구나. 너는 죽어도 마땅한 인간이야. 나가 죽어라’ 라고 하면 공부할 맘이 안 나지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데 여자는 남자를 안 좋아해요. 그러니까 다이아목걸이를 사줘도 별 시답지 않다는 듯이 픽 던져버리고 차를 새것으로 바꿔준다고 해도 우습게 여기고 괜찮은 아파트도 던져버리고 전화 자꾸 한다고 전원도 꺼버린다면 그 남자가 여자를 좋아 하겠습니까? 안 좋아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 보낼 때 이 사회하고 천국하고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철저하게 이 사회에서 냉대를 받는 입장에서 쓴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빌립보서입니다. 빌립보서가 뭐냐 라는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려요. 빌립보서는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누군가 너를 알아줄 것이라고 아예 기대조차 하지 말라’ 하는 겁니다.
‘믿음 좋습니다. 천국가시겠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이 땅을 떠나기가 싫어요. 신앙을 더 폼 내기 위해서. 의존교회는 오후예배시간에 기도를 누가 하십니까? 대표기도를 돌아가면서 합니까? 오후에는 목사님이 하시고 오전에는 집사님이 하십니까? 오전에 집사님이 기도를 했는데 ‘집사님, 그 따위로 기도하려면 하지 마세요’ 라고 했다면 그 집사님은 복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없겠습니다만 ‘아하, 내가 교회를 보지 말고 천국을 가야 겠구나’ 하게 된 그것이 복 받은 겁니다. 사람이 교회에서 인정을 받는 순간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교회가 더 좋은데 뭐 때문에 천국을 믿고 예수를 믿습니까?
제가 지난주에도 이야기했지만 목사가 되어서 자기가 목사가 되었다는 그 목사의 가치와 존재의미를 매겨서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 믿지 않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사람을 목사로 인정하지 않고 교인도 한 사람도 없고 복음 전하면 다 도망가면서 듣기 싫다고 도망갈 때 비로소 그 목사는 처음으로 예수 믿는 목사가 되는 겁니다.
생전 처음으로 예수를 한 번 믿어 보는 겁니다. 왜? 기댈 언덕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아무 기댈 언덕이 없기에. 그게 빌립보서입니다. 그게 아니면 빌립보서가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제가 잘 믿을테니 남들이 저를 잘 믿는다고 칭찬 좀 해주세요. 하나님! 내가 예수 잘 믿을테니 주위 사람들이 나를 우대할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런 식으로 한다면 그 사람은 아까 말한 빌립보서 1장 21절이하에 나오는 말씀과 전혀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외로움을 견디지 마시고 외로움을 즐기세요. 청상과부가 은장도 가지고 자기허벅지 찌르면서 ‘참아야 되느니라’ 하는 식으로 나는 어찌되었든지 이 외로움을 견디겠다 하지 마시고, 남이 나를 알아줘야 즐겁지, 라고 하지 마시고 그냥 혼자 즐겁고 혼자 재미나게 사세요.
오늘 강의 결론 다 나왔습니다. 더 할 것도 없어요. 혼자 재미나게 사시면 돼요. 남들이 나를 칭찬하는 재미로 살지 마시고 본인이 나 혼자뿐이라는 그 사실 만으로 기분 좋아서 어쩔 줄 몰라야 돼요. ‘아, 복음 아는 사람이 나 뿐이로구나’ 이렇게 혼자 기분에 도취되어서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취했다고 합니다.
취했다고 하는데 성경에서 취한 것이 두 종류가 나옵니다. 하나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술에 취한 것이 있습니다. 애들은 잘 모르지요. 한순간에 짐승 되고 괴물 되는 이것을 잘 모를 겁니다. 또 하나는 성령에 취하는 것인데 둘 다 공통점이 뭐냐 하면 취했다는 말입니다. 취하면 공통점이 자기밖에 몰라요.
문제는 사람들이 성령에 취하지는 않고 술에 취해서 자기 기분 좋다고 술집에서 수백만원씩 날리잖아요. 술에 취할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하면 술 백병 먹는 것보다 훨씬 더 홀가분합니다. 기분 참 좋-습니다. ‘가라, 가! 다 가라. 나 혼자 천국 갈 게’ 얼마나 기분 좋습니까? 왜? 천국은 사람이 없는 곳에 있기 때문에.
천국은 두 세 사람이 모이면 골치 아파요. 자기 자랑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셋만 모이면 고스톱을 칩니다. 왜 고스톱을 치느냐 하면 이 셋 중에서 대장을 세우고 서열을 세우기 위함인데 그렇게 대장 세워서 서열을 만들어 놔야 안심이 됩니다. 셋만 모여도 대장 나오고 서열 생깁니다. 3등은 기분 안 좋지요.
왜 3등 했다고 기분 나쁩니까? 1등도 2등도 없다고 보면 되잖아요. 고스톱 치다가 권총 가지고 첫째 둘째 사람 죽여 버리고 나면 자기혼자 남잖아요. 지금 예를 들고 있습니다. 곧이곧대로 듣는 어린이들이 있으면 곤란하겠습니다. 내가 만약 40등 같으면 1등부터 39등까지 다 죽어버리면 자기혼자 1등 된다는 거죠.
천국은 그렇게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여러 사람이 함께 있어도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듭니다. 기죽지 말라고 누가 일등, 이등 했다고 기죽을 필요 없다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왜? 100명 속에 있어도 너는 혼자라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성령에 취하면 그렇게 됩니다. 원래 술 취한 사람은 자기밖에 몰라요. 밤늦게 술 취해서 와서는 자는 사람 다 깨워서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옛날 제가 어린 시절에 주위 어른들이 다 술을 먹는 사람들이어서 많이 힘들었어요. 술 먹고 와서는 잠들어 있는 조카들을 다 깨워서 자기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거죠. 남 잠 다 깨워놓고는 자기는 잠들어버리고. 여러분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어서 참 다행입니다.
천국에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지금 다짐을 받아 놔야 되겠습니다. 정말 천국을 본 사람은 여러분 주위에서 친구가 다 떠나고 가족이 다 떠난다고 할지라도 속 시원하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 남은 몸마저 나를 떠나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 죽는 수밖에 없잖아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고 어떻게 천국이 그렇게 되는가? 이제부터 약간 어려운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왜 천국이 사람 없는 곳에서 생기는가 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남아 있는 지역은 천국이 되고 예수님의 공로를 갉아먹는 지역 같으면 이곳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이라는 것은 어떤 지점에 있어서 거기에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을 누가 막아서고 있느냐 하면 바로 우리 자신이 우리 자랑한다고 막아서고 있는 거예요. 이 비타 500이 천국이라 합시다. 천국이 여기 있으면 ‘야, 비타 500(천국) 참 예쁘다’ 이렇게 되는데 비타 500을 내 등 뒤에 이렇게 숨겨놓으면 ‘어? 천국이 어디 있지? 없구나. 그럼 나 어떻게 살지? 그럼 내 자랑하고 살아야지.’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앞에 딱 나오게 되면 ‘아, 여기 있었던 걸!’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어떤 보석장수가 어떤 귀한 보석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좋아서 자기가 갖고 있던 모든 보석을 다 팔아서 그 귀한 보석 하나를 샀습니다. 그 보석을 살 때 자기 재산 얼마 남았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사람이 없는 곳에, 내가 없는 곳에 천국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천국을 누가 가렸어요. 내가 가린 거예요. 내가. ‘나는 좀 잘 살고 싶은데, 나는 좀 인기를 얻고 싶은데,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은데, 내 행복은 내가 한평생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지?’ 라고 하면서 자기행복 생각하고 자기가 잘되는 것을 생각하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는 그 순간은 내 자신이 귀하게 되기에 상대적으로 천국은 전혀 귀하지 않는 곳으로 내가 가리우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좀 비켜라.’ ‘왜요?’ “너는 죄인이니까 좀 비켜줘. 너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등장해야 되지 너의 죄가 자꾸 등장하면 천국 값을 자꾸 낮춘다. ‘나도 천국 간다’ 하면 남들이 웃는다. 왜? 죄인주제에 천국가면 천국 물 다 버려놓았다는 소리 듣는다. 남들이 ‘너 같은 인간이 갈 정도로 요새 천국 그것밖에 안되나’ 라고 욕을 하니까 네가 천국 간다, 하지 말고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라고 이야기를 해 다오.”
그 대신 나는 가기는 가는데 죽어서 가야 됩니다. 그냥은 못가고 죽어서 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목사니 집사나 장로가 의사나 박사나 모두 죽어서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여기에 서서 웅성거리면서 천국에 간다, 이렇게 나올 때 천국에서 능력이 옵니다.
여기에 관이 있습니다. 이 관은 A, 이 관은 B, 이 관은 C, 이런 식으로 관이 다섯 개가 있습니다. 이렇게 죽여서 끌고 갑니다. 우리는 산채로 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죽여서 데리고 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관속에 의사가 있든 박사가 있든 집사가 있든 목사든 장로든 어른이든 할머니든 다 관계없이 뭐만 봅니까?
‘너 죽었어? 들어와. 너도 죽었네. 들어와.’ 이렇게 죽어서 간다는 말이죠. 이렇게 가려면 A라는 사람은 천국으로 바로 못가고 어디로 가야됩니까? 자기의 죽을 자리로 가서 천국가야 되고 B라는 사람도 바로 간다는 생각은 오해였고 관이 되어서 그 관속에서 관이 끌려가면 그냥 끌려가는 식으로 갑니다. 그러면 관안에서 어떻게 끌려갑니까? 그 속에서 자기가 막 밉니까?
그게 아니고 관은 누가 당겨주잖아요. 그래서 천국은 예수님의 공로로 당겨줄 때 예수님의 나라에 입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산채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죽어만 있으면 당겨주는 것은 주님이 당겨줘서 가게 되는 겁니다. 오늘 강의가 약간 섬뜩합니다. 이안에 뭐가 들었든 관계없어요. 어린애든 할머니든 관계없습니다.
그냥 죽죽 잡아당깁니다. 한 50년 살다 보니까 제가 이제 좀 아는 것이 뭐냐 하면 ‘제가 서른 살 때 한 50쯤 되면 인간 안 되겠나’ 라고 생각했던 것이 엄청난 착각이었다는 것을 50되고서 알았습니다. 서른 살 때는 그걸 몰랐어요. 나이가 50살이든 10살이든 애들 맘과 똑같아요. 다만 체면 때문에 애들처럼 못한다는 것뿐입니다.
나이가 50이든 60이든 사람이 다급하면 애들 행세 그대로 나옵니다. 사회적 위신과 체면 때문에 자기품위를 지키는 자리에서는 교양이 나오지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을 때 성질대로 본성대로 해보라고 하면 나이가 몇이든 애가 되어 버립니다. 어리광하고 떼쓰고 자기밖에 모르고, 이것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애들이 하는 소리가 ‘우리 선생님은 청초해요. 이슬만 먹고 사시는 분이세요. 화장실도 안가고.’ ‘과연 그럴까? 소주 한 병 먹고 노래방에서도 그럴까?’ 사회적 체면 때문에 모범을 보여야 되기 때문에 그렇지만 막상 자기와 허물없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애들하고 다를 바 없는 행동이 나와요.
그래서 인간은 늙지 않습니다. 태어난 그대로에요. 그러니 일찍 죽었다고 서러워할 것도 없고 오래 살았다고 해서 좋아할 것도 없어요. 인간이 늙지 않는다는 말은 한 번도 산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50년, 100년을 살아도 살아본 적이 없어요. 내일 아침되면 과거가 다 날아가고 또 새로운 하루를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하루살이 하루살이가 이어져서 50년되고 100년 되었을 뿐입니다.
긴 인생을 몽땅 알아서 산 적이 없어요. 그냥 하루치씩 사는 거예요. 이렇게 하루씩 끊어져 있기 때문에 태어날 때 그대로입니다. 태어날 때의 그 본성이 취향이 유전자가 똑같습니다. 사람은 일생을 그래프로 그리면 세월 따라 뭔가가 들쑥날쑥 할 것 같지만 먼 위에서 한 번 보세요.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생은 아무리 살아도 결국 손바닥 넓이만큼’이라고 합니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말이고 시작과 끝이 있다는 말은 손바닥을 오므려 버리면 이 시작과 끝의 그 거리조차 훅 불면 날아가는 것처럼 한방에 갑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죽을 때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연세 많은 분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한 80년쯤 살았나?’ 합니다. ‘그동안 오래 오래 사셨으니 그만 사시죠’ 하면 화냅니다. ‘내가 얼마나 살았다고.’
그 말이 맞아요. 어제까지 산 것은 다 없어졌고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기억만 남고 어제까지의 것들은 다 허무하게 사라지고 없어져 버렸어요. 내일 되면 내일 또 하루를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상식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달라요. 사도바울은 자기 인생을 태어나서 길게 이렇게 늘어뜨리면서 살았다고 수평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봐요.
‘바로 이 순간 빨리 죽고 싶다, 하지만 살아가는 것은 너희들 때문이다.’ 항상 지금이라도 바로 위로, 이러한 짧은 순간을 벗어나고 싶고 탈출하고 싶다고 합니다. 왜? 천국이 있으니까. 예수님의 공로가 주어진 곳이 있으니까 그곳에 가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천국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 보게 되느냐 하면, 내 자신이 사나 안사나 있어도 없는 것이 된다는 것, 나는 아예 없다고 여기는 것, 나는 산적도 없고 그냥 하나님께서 살려줄 때만 산다는 것을 알 때 그것이 이미 천국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한테는 그야말로 죽는 것이 무섭지 않고 두렵지 않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나’ 라는 것을 쪼개야 됩니다. 칼 가지고 쪼개면 그 쪼개진 사이사이에서 죄가 나옵니다. 여러분 멜론이나 수박을 쪼개면 뭐가 나오던가요? 즙이 나오지요. 그처럼 우리 속에는 껍데기는 멀쩡한데 속에는 죄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세포는 다 암세포입니다.
암세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세포가 발암물질을 만나면 언제든지 모든 세포가 다 암세포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항상 암세포가 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사람이 죄 값으로 죽기 때문에 죄가 나와요. 인간이라는 껍데기를 쪼개니까 그럴싸 하게 보이지요. 그런데 시비를 걸어보세요. 그러면 죄가 나오지요.
어떻게 건드리든지 건드리면 죄가 나와요. 인간 자체가 죄 덩어리인 것을 아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나의 존재가치, 존재의미, ‘오래 살아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이 안들고 빨리 예수님의 공로가 있는 그곳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사람이 제일 행복을 때는 자기 죄를 아는 때입니다. 그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언제 죄를 안 짓는가 하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 때 죄를 안 져요. 더 보내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에. 언제 죄를 짓느냐 하면 내가 착해지려고 할 때 죄를 져요. ‘나는 착해져야 돼. 나는 나쁜 짓을 안해야 돼.’ 그럴 때 계속해서 죄를 더 짓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초등학생이 깜빡 하고 숙제를 안 해 왔어요.
선생님이 회초리를 들고 손바닥을 펴라고 할 때 ‘맞아 나는 맞아도 싸, 숙제를 안했으니 맞아야지’ 하면 되는데, 어떤 학생은 ‘선생님, 어제 우리 집에 손님이 많이 와서 숙제 못했고 어제 우리 할아버지 제삿날 이었습니다’ 라고 변명하면서 하고 싶은데 못했다고 핑계를 대면 선생님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 맞아야 된다고 하면서 더 때려버립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짓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죄짓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면 그 때 죄를 안 짓게 되는데 ‘나는 착해야 돼, 나는 착해야 죽어서 좋은데 가거든’ 이라고 하면서 자꾸 착해지려고 하면 아예 매를 벌고 있는 셈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착함을 인정해주는 그런 나를 자꾸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지옥에 가면 자기공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이 죽 와 있어요. 누가복음 18장에서 자기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한다던 그 사람도 와 있을 겁니다. 남 구제하는 그것이 얼마나 착한 일입니까? 금식한다는 말은 밥을 먹지 않음으로써 깨달음에 도달하겠다는 이것이 얼마나 착한 겁니까? 거기다가 십일조까지. 그 귀한 돈을 교회에 바치는 그것이 얼마나 착한 겁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어이 그 잘난 인간들아, 다 가라.’ ‘어디로요?’ ‘지옥으로 가라’ 그래서 그 잘난 인간들이 다 지옥으로 가고 ‘저는 원래 나쁜 놈입니다.’ 하는 사람보고 ‘어이, 너 이리와. 천국가라.’ 천국 가는 사람은 자기를 알아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무슨 선한 일을 해도 전혀 나는 안 바뀐다는 것을 알아요.’
얼마나 편합니까? 히말라야 가서 도 닦아 보세요. 그걸 아는가? 계룡산에서 도 닦는다고 그것이 알아지지 않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평생 동안 목회를 하는 것 같은데 왜 그걸 모릅니까? 언제 여러분 보고 착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까. 금식을 하라고 했습니까? 구제를 하라고 했습니까? 자기 분수를 알면 돼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상한 심령을 알려면 간단합니다. 더운 날에 음식을 냉장고에 넣지 말고 바깥에 그냥 둬 보세요. 그러면 상하지요. 그 상한 자리에 여러분의 이름을 적어 놓으세요. ‘이 근호.’ 접시에 곰팡이가 하얗게 필 때, 접시에 이름표를 붙여두세요. ‘이 근호 = 상한 심령.’ 주께서 맛있게 드십니다.
그렇게 우리 공로를 인정안할 때, 그래야 예수님의 공로만으로 100퍼센트 구원한다는 것이 천국에서 빛이 나기 때문입니다. 정리해봅시다. 천국은 어떻게 간다고요? 내가 상한 음식이다. 성경에서는 부패한 심령(렘 17:9)이라고 되어 있지요. ‘나는 상하고 부패한 인간, 처음부터 나쁜 자이기 때문에 새삼 착해질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 하는 것을 아신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받으십니다.
‘네가 이것을 알 때까지 참 고생을 많이 했다. 평생 교회 가서 목사 말 잘 들어서 착한 사람 되어서 착한 행동 많이 하면 복줄까 싶어서 근신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면 복줄까 싶어서, 그렇게 하면 복 준다는 그 사기에 넘어가서 참 고생 많이 했다.’ 세상에 그런 사기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안 죽으려고 하는 그것이 무슨 복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 죽어도 좋다는 그것이 복이지.
‘내가 돈 벌어서 더 살아야지’ 이것이 무슨 복입니까? 그것은 저주입니다. 여러분, 저주 받으려거든 복을 달라 하세요. 다행스럽게도 우리 의존교회 교인들은 아무도 그런 저주를 받을 사람이 없어서 다들 형편들이 별로 좋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천국, 천국 그래도 돈 한 500억이 생겨보세요. 죽을 맛이 나는가?
다 쓰고 죽겠다고 나서면서 당장 천국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지금 결혼을 앞두고 있는 분도 계시지만 사람이 좋아하는 남자가 안 생겨보세요. 천국이 크게 보이지요.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고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천국가고 싶겠습니까? 한 10년 더 살고 천국은 그때 간다고 하지요. 제가 지금 악담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 15글자를 줄이면 이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면 이 어린양에서 딱 끊지 마시고 세상 죄가 뭔지를 알아야 어린양의 의미가 생긴다는 말이지요.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자기가 자기 노선을 깔아 놔요.
자기가 자기노선 깔아 놓고서 여기에 교회 다녀서 교회 다니기 전에 몰랐던 지식이나 정보를 더 추가하면 자기의 삶의 질이 더 나아지고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거죠.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할 때 ‘아하, 내가 내 노선을 까는 이것이 세상 죄에 해당되는구나.’
그러면 믿는다는 것은 내 노선을 철폐시키고 예수님의 노선에 옮겨 타는 이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노선에 옮겨 타면 우리는 처음부터 그냥은 못가고 애초부터 죄인으로 들어가서 결국은 천국에 골인하는 거예요. 왜 여기 법칙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의 법칙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들어가냐 하면 ‘세상 죄’라는 그 항목에 우리가 고맙게도 들어가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 세상 죄가 뭔지를 평생 보여주면서 삽시다.
세상 죄가 이런 것이 세상 죄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평생토록 맘 놓고 발산합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려고 들면 모든 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살려고 하니까 죄짓는 거예요. 이미 내 안에 있는 죄만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데 거기에 무슨 추가적인 죄를 또 짓겠습니까? 가만 있어도 세상 죄가 막 나오는데.
지하철이나 극장이나 백화점같이 사람들이 마구 몰려올 때 몰려오는 그쪽으로 가려고 하면 들어갈 틈이 없어요. 지금 죄가 마구 몰려나오는데 내가 새삼스럽게 죄를 지으려고 하니가 거기에 들어갈 틈이 없다니까요. 나오는 죄도 감당 못하는데. 시기, 질투, 미움, 탐욕,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세상의 자랑거리를 얻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고 수고하는 것, 그게 다 이 세상에 대한 탐욕이 아닙니까?
그게 우상 숭배잖아요. 죄지을 필요 없어요. 가만있어도 세상에 대한 탐욕이 다 나와요. 엄마가 되면 자녀에게 ‘얘야, 너는 공부 열심히 해서 성적 올려야 된다.’ ‘왜요?’ ‘그래야 출세하니까.’ 보세요. 가만있어도 자연스럽게 술술 나옵니다. ‘여보, 승진 좀 하세요.’ ‘왜?’ ‘우리 계모임에서 좀 자랑하게.’ 가만있어도 나와요.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어요. 기도는 편집하지 마세요. 속에 있는 그대로 내놓으면 됩니다. ‘하나님, 부자 되게 해주시고 우리 교회 부흥되게 해주시고 안 아프게 해주시고 내 자식 건강하게 해주시고 잘되게 해주시고, 그저 남산위의 노루 새끼처럼 뛰놀게 해주시고’ 라고 옛날에 삼신할매에게 물 떠놓고 빌던 것처럼 그대로 빌면 됩니다.
빌고 그 다음에 성경과 비교해 보는 겁니다. ‘내가 이런 인간밖에 안 되는 것을 기도를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구나.’ 예수님께서 ‘봐라.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장사하라고 했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지? 그런데 네가 기도한 것을 봐라. 너하고 성경하고 안 맞잖아.’ ‘예, 맞네요. 제가 성경하고 참 안 맞네요.’ 그게 우리 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힘들게 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지으면서 살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됩니다. ‘저런 인간도 천국에 간다’ 는 것을 보여주는 참 좋은 계기가 됩니다. 그게 빌립보서 1장 24절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너희들 유익이고 하지만 나의 소원이 있는데 지금 죽으면 예수님계시는 천국에 가니까 내가 얼마나 좋을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데 단 조건이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책임이 아닙니다. ‘내가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냥 죄인일 따름이다.’ 자기 가슴 때리면서 그러지 마세요. 날 때부터 그랬기에 가슴치고 회개한다고 해서 더 좋은 인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 이렇구나. 이런 것이 인간이구나.’
그러면 교도소에 들락거리는 인간들은 왜 그렇게 나쁩니까? 그것은 그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기가 착한 사람이라고 위장을 하고 위선을 떨기 때문에 그래요. 예를 들면 배고프면 그냥 죽으면 되는데, ‘배고프니까 어디 가서 돈을 훔쳤다.’ 돈을 왜 훔칩니까? 돈을 훔치게 되면 나는 도둑질 안할 수도 있는 사람으로 남에게 비치게 됩니다.
‘내가 돈이 없어서 남에게 나쁜 짓을 했지 나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착한 사람 될 수 있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돈을 훔친 거예요. 그러니 돈이 문제가 아니고 도둑질도 문제가 아니고 뭐가 문제인가 하면 자기 주제파악이 안 되는 거예요. 어떤 식당에 가니까 자기는 돈이 없어 라면 먹고 있는데 옆 사람은 영덕대게 먹고 있더라.
그런데 그 사람이 지나가면서 라면, 슬쩍 보고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아까 말한 것처럼 누구든지 나를 무시하면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게다리로 그 사람을 쳤다. 경찰서에 갔다. 경찰이 ‘왜 사람 칩니까?’ ‘라면이나 먹는 주제라고 날 무시했기 때문에.’ 결국 뭐가 잘못입니까?
‘주여, 이 라면도 저에게는 고맙습니다.’ 이렇게 자기분수를 알면 되는데 왜 자꾸 남들하고 비교해서 마치 자기가 죄인 아닌 것처럼 행세하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오늘 첫 시간 강의는 간단합니다. 성경에서 죄인이라고 하면 그냥 죄인인줄 아시고 그동안의 모든 것에 대해서 그냥 감사하시면 우리가 지금 안 죽고 살아가는 인생에서 이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운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잘난 척하고 착한척하고 좀 더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시도할 때 그 때부터 여러분은 위선자가 되면서 그 위선을 감추기 위해서 세배, 네 배 더 죄를 짓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자녀를 키운다면 이렇게 하세요. ‘엄마가 너 공부 못하는 것을 보면 참 꼴 보기 싫거든. 그러니까 공부 좀 해.’
그냥 그러면 되는데 ‘주여, 제가 또 죄를 지었군요.’ 그 토를 왜 답니까? 그 토를 안 달면 죄 안 짓습니까? 토 달지 말고 ‘주여, 저 이런 인간입니다. 아시지요? 그만 죽이소서.’ 이렇게 자기 속에 있는 것을 편하게 내어놓으시고 지금 죽어도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늘 증거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10분 쉬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