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빌립보서3,4강-복음을 위한 복음에 난처한 상황들

아빠와 함께 2013. 12. 18. 14:16

090911 빌1:9 복음을 위한 복음에 난처한 상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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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제 3강 (이 근호목사, 2009년 9월 11일(1), 서울의존교회)


빌립보서의 핵심이 뭐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든지 하신다고 할 때에 그 ‘뭐든지’ 안에는 사람들이 예상 못할, 복음을 가로막는, 복음이 중지되는, 복음전파가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는 난처한 상황조차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감옥에 집어넣으면 복음이 가로막히고 제대로 전파되지 못합니다’ 라고 생각하기들 쉬운데 하나님께서는 ‘그러니까 너희들 수준이 내 수준보다는 못하지’ 가 되는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복음이 전파되면 그 복음에 의해서 사람들이 천국에 보내지는데 사람들이 복음을 따로 생각해서 ‘압니다. 제가 십자가를 알아요’ 라고 복음은 따로 있고 전파는 ‘우리가 알아서 잘 전합니다’ 라는 식으로 전파된다고 보고 있어요.

복음 따로,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 따로, 그래서 복음전파해서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방법 따로따로 해서 사람들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뭘 집어넣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전해야 잘 전해진다’ 라는 그들의 생각에 장애가 되고 방해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 이렇게 나오시면 우리가 복음전파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라는 소리가 서슴없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집어넣어 버려요.

집어넣게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 복음 좋은 것은 알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오시면 한사람에게도 복음전파 못해요. 하나님, 이 방식은 철수하세요. 이 방법으로는 복음전파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거예요. 복음전파는 우리한테 맡겨야 됩니다’ 라고 하는 그 사람들이 바로 틀렸다는 겁니다. 복음전파 하는데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전파 하는데 천사들이 지켜줘서 복음이 잘 증거 될 때, ‘복음이 잘도 증거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복음 잘 전하는 사도바울을 덜렁 체포해서 복음 못전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때부터 의심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알았던 그 복음이 복음이 맞기는 맞는건가?’

우선 그것을 의심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저 사도바울이 가짜가 아닐까? 하나님께서 복음전하는 자를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도록 내버려두실 리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안도와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옥에 가둔 것이 분명해’ 라는 이 두 가지의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오해입니다.

복음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제 복음 압니다. 이제 제대로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오해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회사 정수기는 아주 특수한 정수기입니다’ 라고 해도 정수기판매원이 ‘정수기의 특수한 장치라든지 기계의 구조같은 것은 다 생략하고 정수기를 어떻게 팔것인지 그것만 이야기 해주세요’ 라고 하는 거예요.

정수기제조회사측에서 말합니다. ‘그것이 아니고 정수기의 구조를 제대로 알아야 팔지 그 구조를 모르고서는 못 팝니다.’ 정수기판매원이 또 대꾸하기를 ‘아니 그런 것은 다 빼고 다만 정수기를 몇 대  팔면 수당을 얼마 주는지 그것만 이야기 하세요’ 라고 해서 말 들어보지도 않고 정수기를 팔겠다고 덜렁 가지고 갔네요.

정수기를 시범보인다고 ‘우리 정수기는 맑은 물이 나옵니다’ 하고 스위치를 누르니까 시뻘건 흙탕물 같은 물이 나오더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손님들이 기겁해서 ‘이거 완전히 사기꾼이네. 큰일날 뻔 했잖아’ 라고 된 거예요. 판매원들이 사장한테 가서 ‘사장님, 정수기에서 흙탕물이 나와서 못 먹을 판인데 이 정수기가 어떻게 된 겁니까?’

사장님의 답변입니다. ‘그러니까 이 좋은 정수기를 판매할 때는 제대로 된 구조를 알고 가야지 그것도 모르고 가니까 실수를 하게 되잖아요. 흙탕물이 나오고 그 흙탕물을 마셔야 3년씩 오래 사는 정수기가 바로 우리 회사가 특허 낸 정수기입니다. 다른 회사에서 만든 정수기는 그냥 맑은 물이 나오지만 우리 회사 정수기는 흙탕물이 나오고 그걸 마실 때마다 3년씩, 6년, 12년 이렇게 늘어나는 겁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생각할 때 천국과 아예 직통으로 연결시켜 놓고 중간과정을 생략시켜 놓았어요. 지난 수요일에 설교를 들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하나님께서 ‘너, 축복받을래, 저주 받을래’ 하면 백이면 백 다 ‘저 축복 받을래요’ 한다 이 말이죠. 그런 사람 지옥 갑니다. ‘너 저주받을래, 축복받을래?’ 하면 ‘저는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라는 사람만 천국 갑니다.

지난 수요일에 에발산과 그리심산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상세한 것은 수요설교를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이게 뭐냐하면 자기 주제파악을 못한 채 ‘복음’ 하니까 자기가 평소에 생각한 기쁜 소식을 생각해서 ‘복음이 어떻다’ 하는 그것은 모르겠고 ‘천국? 거기는 가야지’ 이런다는 말이지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천국 갔는지가 나옵니다.

제가 물어봅시다. 예수님께서 천국 갈 때 곱게 나서 곱게 자라서 곱게 살다가 천국 갔습니까? 예수님께서 청정가정에서 태어나서 청정지역에서 곱게곱게 사시다가 천사처럼 나풀 나풀 그렇게 하늘나라 올라갔습니까? ‘목사님, 저 그런 것은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천국만 넣어주세요’라고 할 것인데 주님께서는 그 과정을 대단히 중요시해서 이렇게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그리고 부자청년에게 말하기를 ‘네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줘버리고 빈털터리가 된 채 나를 따라 오너라.’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어떤 사람이 ‘예수님, 아버지 장례식 치르고 다시 오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의 말이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고 하십니다.

여러분, 각자각자 집에서 살다가 죽어서 천국 갈 것 같으면 뭐하려고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가는 길과 사람들이 가는 길이 분명히 다르다는 뜻이에요. 길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은 좁은 길이고 우리가 가는 길은 완전히 고속도로, 큰 도로 아닙니까? 여기서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넣어준다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한 그 때에 사람들이 느낀 것이 뭐냐 하면 ‘너 뭐야?’ 라는 겁니다.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 한통 떼주세요’ 라고 했을 때에 동사무소 직원이 하는 말이 ‘아저씨, 저를 따라오세요’ 라고 하면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당신 뭐야? 당신이 뭔데? 내가 요구하는대로 등본이나 떼어 달란말야’ 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여, 내가 천국가고 싶으니 천국갈수 있는 증이나 하나 끊어달란말야.’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세요.’ ‘뭔데? 네가 뭔데 당신을 따라가라고 하는데?’ ‘나도 내가 공들여서 설계한 내 인생이 있다고. 당신이 뭔데 내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당신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는 내(예수)가 누군지 모르지?’ ‘모르지요.’ ‘그러면 당신이 아는 것은 뭔데?’ ‘나는 죽어서 천국가고 싶은 것 그것만 알고 싶습니다.’

‘그러면 나(예수)는 몰라도 그만이란 소리야?’ ‘몰라도 되지요. 내가 궁금한 것은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 그게 궁금하지 내가 예수 아는 것은 내 취미가 아닙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특징입니다. 목사가 그렇게 가르쳤고, 가르친 것도 그렇지만 원래부터 인간은 자기일 아니면 남의 일에 관심도 없어요.

‘예수님이 천국갔다.’ 별로 안좋아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 별로 안좋아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영 안좋아요. ‘내가 부활된다.’ 기분 좋습니다. ‘내가 천국간다.’ 기분 째집니다. ‘내가 영원히 산다.’ 바로 그것 때문에 교회 왔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이 중간과정을 생략해 버리게 되니까 교회 와서 지옥 가는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교회 오면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이제는 나에 대한 신경 끊어버리고 ‘주님 누구십니까?’ ‘아하, 이런 분이구나’ 하면서 좋아서 졸졸 따라다니면 그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여러분이 영 안믿는 인상들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천국에 가려고 이 시간에 나와 있습니다.’ 글쎄 그런 천국은 우리가 만들어낸 가짜 천국이라니까요.

제가 칠판에 크게 쓰겠습니다. “천국은 ‘나를 잊어주세요.’ 나를 잃어버린 그 자리에 예수님을 세우면 그것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나를 세우면 그것이 천국을 방해해요. 내가 가야될 천국을 내가 방해한다니까요. 이전까지 나를 생각했던 그 자리에다가 예수님으로 바꾸시면…. ‘목사님, 바꾸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바꾸시면 의문점이 생겨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당신이 누구신데 내 자리를 차고 들어왔습니까? 당신이 누구시길래 당신의 공로로 구원받습니까? 나도 착한일 꽤나 하는데 왜 당신의 공로로만 구원받고 당신의 피와 내피가 뭐가 다르기에 당신의 피로만 죄가 용서되고 내피는 한바가지를 흘려도 용서가 안 됩니까? 당신의 피는 무슨 피 길래 한 방울만 있어도 내 죄가 용서받는다면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것이 빌립보서의 본문에 나옵니다. 빌립보서 1장 8절부터 다같이 읽어봅시다.

빌립보서 1:8,9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지금 사도바울의 심장은 누구의 심장입니까? 자기심장입니까? 예수의 심장입니까? 지금 사도바울내의 주인이 바뀌었지요. 자기는 부도났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인수인계했어요. 예수님이 인수인계해서 심장도 예수님의 심장입니다. 심장도 예수님의 심장이니까 자기가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심정으로 교인들을 사모하는거예요.

자기의 심정으로 사모하게 되면 자기한테 잘해준 사람,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만 구원시켜 주는 것이 돼요. 그런데 예수님의 심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되면 비록 자기에게 소홀하게 해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같으면 누구나 같은 형제가 되는 겁니다. 그게 또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에 나와요.

빌립보서 1:15-17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니라.”

좀 복잡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저 사람이 비록 나를 싫어해도 예수 전파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 말입니다. 누가복음 9장 49절에서 요한이 예수님에게 고자질을 합니다. ‘저 사람은 우리하고 함께 안다니면서 우리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냅니다.’ 참 못됐지요. ‘저 사람은 십자가마을 사람도 아니면서 복음 전해요. 저거 이단이라고 하면서 몰매를 줄까요?’

‘십자가마을에 가입도 안하면서 우리 것을 가지고 가서 예수 증거 하는데 저거 이단 맞지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를 해치지 않는 것이 너희를 위하는 것이다.’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9:49,50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이 비슷한 이야기가 빌립보서 1장 16절 17절에 죽 나옵니다. ‘다투거나 시기하거나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그것으로 되었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해 봅시다.

‘저는 죽어서 천당 가고 싶어서 교회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우리가 예수가 누군지를 알아야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날 건지면 되었지 왜 예수에 대해서 우리가 구태여 알아야 됩니까? 나는 그 예수라는 아저씨를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데요? 나는 지금 우리 집 이런 저런 사정도 급합니다. 우리집 애가 고 3이라 그 애 뒷바라지도 바쁜데 언제 우리가 성경 펴들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런 것을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런 일에 맘 빼앗기는 것도 싫은데 그런데 자꾸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내가 안 좋아하는 예수를 말하니까 내가 짜증납니다.’

여러분, 그럴 때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이렇게 답변해주세요. 오늘 참 좋은 것을 배웁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놀라게 됩니다. 첫 번째, 자신이 그동안 헛다리짚었고 헛수고한 것을 가지고 놀란다. 지금까지 몽땅 다 헛수고, 교회 다닌 것을 포함해서 다 헛수고. 두 번째 놀라운 것이 뭐냐 하면 ‘헛수고해도 구원되더라.’ 이게 놀라운 거예요.

‘내가 헛짓, 헛수고 했다. 그런데도 구원되더라.’ 누구 능력으로? 바로 예수님의 능력으로. 그러니까 예수님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에게 무슨 재주가 있어서? 예수님이 뭘 어떻게 했기에? 예전에 치킨 CF를 보는데 그 CF모델이 치킨을 뜯어먹다가 치킨을 보면서 놀라서 하는 소리가 있어요. ‘도대체 이 닭다리에 무슨 짓을 한거야?’

왜 이렇게 맛있는거야, 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알게 되면 첫 번째 우리가 교회 와서 한 짓이 전부 다 헛짓이었다는 것에 놀라고 두 번째, 헛짓해도 구원된다는 그 사실을 보고 두 번째 놀라고. 놀래야 됩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안 놀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안 놀래는 이유가 ‘나는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예배참석 꼬박꼬박 하고 있고 이것 저것 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라고 자꾸 자기는 헛짓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금요일에 이렇게 예배 참석하는 그것조차 헛짓입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참석 안하면요?’ 참석 안하는 그것도 헛짓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금요일에 참석해서 이 말씀을 들어야 되는 이유가 ‘헛짓을 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수로 구원받느냐, 헛짓을 해도 구원을 받더라’ 하는 겁니다.

TV프로그램중에 ‘이것이 인생이다’ 류의 프로그램이 있어서 거기에 제일 재수 없는 사람들의 총집합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지난번에 울산 MBC의 어느 프로에서 한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와요. 그 동안 <이것이 인생이다>에 나왔던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사람들의 총집합 한 것은 게임도 안 될 정도로 그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성공한 것은 한 번도 없고 실패만 서른 번을 했답니다.

지금 개 한 마리 키우고 있고 한 달 수입이 십만원인데 집은 농협에 차압당해 있는 판국이랍니다. 평생 동안 헛짓을 했습니다. 어망 사서 울산앞바다에 쳐놓으니까 태풍 불어와서 다 날아가 버린다든지 해서 그런 식으로 사업실패만 서른 번을 했어요. 자살 안하는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죠. 손대면 톡, 하고 터지면서 실패만 합니다.

주식이면 주식, 개장사면 개장사, 뭐든지 손대면 실패했습니다. 저도 뭘 손대면 손대는 대로 다 부서지고 책도 잘 찢어지고 제 손도 책장 넘기다가 베이기 일쑤고 후시딘 팬입니다. 그런데 그런 헛짓과 헛수고의 최고가 바로 예수님이란 말이죠. 예수님이 헛짓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사히 가도록 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인간들이 보기에 아무 쓸모 짝도 없는 일들의 나열 입니다.

백날 해도 욕 얻어먹고 착한 일 해도 비난받고 남 도와주면서 배신당했습니다. 울산 할아버지는 서른 번 실패했는데 예수님은 평생이 실패입니다. 평생 실패하고 결국 마지막도 실패로 끝나지요.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니까 주님의 일생이란 ‘아버지에게 이렇게 버림 받는다’ 하는 것을 시범으로 버림받는 거예요.

천국은 예수님의 아버지나라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예수님처럼 버림받아야 돼’라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배운 사람이라면 절대로 내 힘으로 천국 간다는 소리가 내 입에서 두 번 다시 나올 수가 없어요. ‘내 힘으로 천국은 절대로 못 간다. 왜냐? 내 본성은 예수님이 알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내 자식일도 바쁘고 내 아내(남편)일도 버겁고, 사업일도 버거운데 언제 짬을 내서 이미 죽은 타인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기에.’

그럴 시간 있으면 동장 만나고 시장 만나서 이 지역 재개발 되고 있는데 보상이나 빨리 제대로 해내라고 독촉이나 하지, 이 현대 특히 도시사회에서 예수한테 신경 쓸 여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없어요. 예수님한테 성령 받아서 예수님한테 미친 사람 같으면 ‘어이, 직원들 모이라고 하지.’ ‘사장님, 지금 회의가 급한데요.’ ‘회의가 문젠가 예수님 이야기부터 들어야지.’ 아마 진짜 성령 받아서 예수님한테 미쳤을 때는 그렇게 할 거예요.

직원들 여럿 퇴직한다고 할 거예요. 예수 소리 듣기 싫어서 이 회사 못 다니겠다고 할 겁니다. 직원들이 딴 생각 안하고 열심히 일해야 경쟁사를 이기는데 왜 사장이 바쁜 직원들을 모아놓고 예수 이야기를 합니까? 그것은 아까 말한 대로 놀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한테 놀란 순간 우리에게 무엇이 성립되는가? ‘나를 잊어라’ 가 성립됩니다.

이것을 줄여봅시다. 여기서 첫째시간 공식 하나 나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 수능에 나올지 싶습니다. 공식, ‘놀라라. 그리고 잊어라.’ 예수님 보고 놀라서 나를 잊어라, 그 말입니다. 주님보고 놀래고 그리고 잊어라. 왜 놀라야 되는데요? 예수님이 그렇게 가신 것은 우리 인생이 헛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일은 우리 죄를 대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신 길은 바로 우리가 죄가 있고 그렇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대신 사신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인생은 뭐냐? 우리는 저렇게 해서 버림받는구나, 라는 것을 몽땅 다 보여준 거예요. 그 다음에는 뭐냐? 그 다음에는 잊어야죠. 누구를 잊는다? 나를 잊어야죠. 조금 늦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이래서 이 모임이 참 좋은 거예요.

빌립보서 1장을 하는데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사람들은 ‘목사님, 제가 교회 나온 이유는 죽어서 좋은데, 천국에 가고자 함입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예수님한테 관심은 있고요?’ ‘예수님한테 관심 없습니다. 나는 내가 천국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사도바울이 ‘당신 예수를 알면 놀랠 건데 ….’

‘놀래기는 뭘, 하나님도 믿고 예수도 믿으면 되지 뭘 그걸 놀랩니까?’ ‘당신이 성경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예수님께서 어떤 길을 가셨는지 가시면서 뭐라고 하셨는지 그걸 압니까?’ ‘몰라. 난 관심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천국 갈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런 말을? 아니 가만있으면 주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은 ‘나를 따라 오너라’ 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 따라가보자’ 하면서 따라가니까 주님이 점점 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시네요. 주님이 점점 망하는 길로 간다고요. 그렇게 따라가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그 유명한 열두 제자입니다.

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일 때 여러 사람들이 비행기 날개위에 앉아서 ‘야, 이제 비행기 타고 난다’ 하고 재미있어 하는데 비행기가 속도를 내버리니까 그 사람들이 다 어떻게 됩니까? 비행기에서 다 떨어져 나가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따르면 천국간다고 해서 따르고 보니까 막상 자기 실상이 드러나지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두제자 몽땅 예수님과 안녕, 했고 베드로 같은 경우는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당신을 저주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설교하면서 사람이 환경 다르면 본색 드러낸다고 했잖아요. 좋은 환경일 때 예수 믿었지요. 그런데 그 환경이 예수님을 안 좋아 할 그런 환경 속에 들어가 버리면 과연 그때에도 예수 믿을까?

불도가 심한 집안, 한 달에 두 번꼴로 제사 드리는 그런 집에 예수 믿는 처녀가 시집을 왔을 때 과연 그 경우에도 예수 믿을까요? 그런 경우에도 ‘저는 예수 믿어요. 그래서 저는 제사 못 합니다’ 라는 그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 말 했다가는 시아버지 유산 한 푼도 못 받을 건데. 결국 돈 문젠데. 남편 죽어버리면 애들 비싼 과외비며 학교납부금 시댁에서 못 대주는데 어떻게 할 겁니까?

다 머리 굴려서 계산에 들어가지요. 결국은 ‘예수님은 몰라도 나만 구원받으면 되지 않겠느냐’ 라는 그 생각이 예수님과는 다른 길로 가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자기가 구원받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지옥가고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항상 반대로 생각하면 맞아요. ‘나 같은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뭘 했다고 천국 갑니까?’ 라고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구원받고 있는 중입니다. 구원의 작용이 작렬해서 그런 고백이 나와요. 왜냐하면 그러 사람만이 충분하게 예수님을 따를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 고 할 때 예수님 가신 그 A라는 포인트, 그 지점이 천국이거든요.

예수님이 따라 오라고 할 때 ‘맞습니다. 저는 개 입니다’ 라고 개가 되어서 졸졸 따라올 때, ‘주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라고 한 사람만 따라 갈수가 있어요. 왜? 따라갈 때 자기를 잊었지요. 나를 잊은 거예요. 왜? 예수님이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공짜로 넣어준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워서.

아까 이야기했지요. 내 피는 안 되고 주님 피는 되고, 내 노력은 안 되고 주님의 노력은 되고 내가 성경 지키는 것은 안 되고 주님이 지키는 것은 되고, 이 점이 너무 놀라워서 주님한테 반하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나를 잊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를 잊은 사람’입니다.

나를 잊었어요. 너무나 잊어버렸어요. ‘내가 누구지?’ 이렇게 할 정도로. 그것을 오늘 빌립보서 1장에서는 누구의 심장이라고 했습니까? 예수의 심장이라고 했습니다. 심장이라는 것은 오장육부 중에서 제일 대표가 되는 내부기관입니다. 그 심장이 예수 심장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몽땅 예수님이 주도권을 쥐고 예수님이 지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여튼 사도바울이 미쳤어요. 빌립보서 1장 22절에 보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 다음에 빈칸을 친다면 거기에 누구를 넣겠습니까?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 중에 “내게 사는 것이” 다음에 들어갈 말로 적당한 것은? 1) 하나님 2) 내 애인 3) 우리 아버지 4) 그리스도. 몇 번입니까?

특히 여자들에게는 내게 사는 것이 내 자식입니다. 자식은 죽으면 땅에 묻지 못하고 자기가 항상 품고 살기 때문에 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요. 최 진실 엄마는 아직도 그 딸을 못 묻고 자기 가슴에 묻고 있겠지요. 내가 이렇게 한이 맺혔는데 그 젊은 영혼이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나겠는가, 하겠지요. 그러면 장 진영은 최 진실 선배가 못 떠나고 있기 때문에 순서를 지켜서 ‘언니 먼저 가고 그 다음에 내가 떠날게’ 라고 되어야겠지요.

그래서 돈 5백 들여서 천도제지내서 빨리 보낸다는 둥 하지 않습니까? 밤중에 귀신이 나와서 ‘젊은 나이에 죽어서 너무나 억울하다’ 하니까 무당 불러서 ‘자, 이거 먹고 빨리 가라’ 하고 보내버린다는거죠. 우리는 귀신정도가 아니고 부활하신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아무도 안거한다는 눈치신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거하는지 안거하는지 어떻게 확인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도 거하고 싶은데 거하는지 안거하는지 감을 못잡겠습니다’ 하지요.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으로 천국간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이 중간과정, 예수님을 다 생략해 버리고 복음 믿으면 끝에 천국간다는 식으로 바로 연결시킨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해서 천국간다는 이 중간자체가 그리스도가 생각하는 그 노선이 아니고 인간들이 자기가 살고 싶어서 자기 맘대로 착각하고 오해한 그 방법들을 여기에 집어 넣었다는 말이죠.

잘 들어보세요. 지금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목사님, 제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지를 어떻게 판정합니까?’ 그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복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이 중간에 여러분이 상상한 시나리오가 분명히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목사가 복음 믿고 그 복음 전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떤 집사가 와서 ‘목사님, 복음 전파하는데 쓰시라’고 한 700억을 헌금했다. 그래서 그 돈 가지고 서울에 신학교도 세웠는데 자기 집도 있어야 되고 챙길 것은 챙겨야 되니까 몇 억 들여서 내 집도 마련했다.” 이런 것이 내가 상상해서 쓰는 시나리오입니다.

또 어떤 아가씨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불도가 심한 집안으로 시집간다고 그렇게 말렸다. 시집에 들어간 첫날밤 시어머니, 시아버지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예수 믿는 며느리인데 그 며느리처럼 너희도 예수 안 믿으면 다 죽는다’ 하니까 이튿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며늘아, 내가 잘못했다. 예수 믿으마’ 해서 온 집안에 며느리 하나 잘 들어오는 바람에 다 천국가게 되었다”는 이런 시나리오.

꿈 깨세요. 이런 것은 다 마귀의 역사입니다. 반드시 복음으로 천국 갈 때 우리가 이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주님께서 만든 이 파이프에 집어넣어 버리면 우리는 나를 잊게 되고 여기는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주님가신 그 공생애, 십자가의 길을 되풀이하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는 식으로 천국에 골인시킵니다. 우리는 상상이 안돼요. 내일 무슨 난리가 날지 몰라요.

저는 오늘 아침에 복음전하겠다고 집을 나서서 서울로 오는데 전화가 왔는데 우리교회에 복음 잘 듣는 집의 애가 눈을 다쳐서 눈동자가 안돌아간다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듣고는 다 그만두고 병원에 가 보고 싶었어요. 만일에 우리 교회 좀 나오다가 삐져서 안 나오는 사람 집안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것 좀 봐. 복음 잘 듣다가 삐지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이 근호 무시하면 그렇게 되는거야’ 라고, 물론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만, 얼마나 내 권위가 먹어주겠습니까?

그게 아니고 우리 교회의 아주 성실한 집안의 애가 눈 수술을 했다고 하니 제가 걱정이 되어서 ‘주여, 하필이면….’ 그러면 주님께서 응답하기를 ‘뭐! 뭔데! 내가 뭘 어쨌다는건데! 네가 네 맘대로 시나리오 짜고 연출 다 해놓고 네 연출대로 시나리오 안 된다고 뭐, 뭐, 뭐, 뭐? 내가 어쨌다고? 혼자 연출해서 삐져놓고는 뭐가 하필이면인데 뭐가?’

주님께서 큰소리를 더 쳐버립니다. ‘지금까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도 영광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뭔데? 하나님이 뭘 잘못했는데?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고? 천국 가려면 날 따라와.’ 못 따라오니까 그냥 집어 넣어버려요. 집어 넣어버리면 나의 시나리오는 사라지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그리스도의 십자가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게 빌립보서에서는 뭐냐? 사도바울이 옥에 갇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에요.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복음전파의 선봉주자입니다. 선봉주자가 옥에 갇혀 버리면 뭐가 중단된다? 복음전파가 올 스톱이 되잖아요. 공장의 기술자가 몸이 아파서 출근을 못하면 공장 가동이 안 되잖아요. 외국에서 들여온 그 기계의 작동방법을 모르면 제품 생산이 안 되지요.

마찬가지로 ‘나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할 정도로 완벽한 사도중의 사도인 이 바울이 옥에 갇혀서 복음을 전파 못할 경우라면 주님 보시에게 다른 사람은 다 다친다고 해도 누구는 다치지 말아야 됩니까? 사도바울만큼은 손대지 말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그 방법이 아닙니다.

그게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라고 하니까 ‘하이고, 얼씨구나’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는데 내가 고난 받고 죽어야 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다쳐도 우리가 다쳐야지 주님이 다치면 안 됩니다’ 하니까 주님께서 베드로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저리 꺼져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합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러니까 사람의 일, 우리들의 일이 악마의 일입니다. 평소에 상상하는 모든 비전이 무슨 노선이다? 평소에 주님가신 노선과 다른 노선만 자꾸만 죽을 때까지 생산해 내는 거예요. 우리는 상상의 천재에요. 상상을 철학계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창조성이라고 합니다. 창조성을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지난 화요일 강의에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일하실 때 그냥 맹탕으로 일했는지, 아니면 뭔가를 받아서 일하셨습니까? 받았지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하늘에 구멍이 뚫려야 성령이 옵니다. 하늘에 구멍이 안 뚫리게 되면 이 아래는 성령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령이 없지요.

성령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성령이 없다. 사람들만 있으면 돼지.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4천 8백만 대한민국 사람들만 있으면 돼지’ 하면서 우리 말고 다른 누가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잖아요. 그런데 하늘에 구멍이 뚫리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렸잖아요. 이제 묻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오고 난 뒤에 그 성령이 한 것이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누구를 만나게 한 겁니까?

악마를 만나게 했지요.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고만고만한 사람들만 모여서 마을구성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이것이 인간사회라는 것을 사회학자, 철학자, 모든 교육학자들까지 다 같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고난 뒤에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만난 것이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고 악마를 만났어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을 누가 쥐고 있었다? 악마가 쥐고 있었던 거예요. 세 가지 방법으로 쥐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돌이 떡 되게 해라.’ 쉬운 말로 하면 ‘돌이 돈 되게 하라.’ 두 번째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메시아다.’ 세 번째 ‘결국은 사람의 영광이 뭐냐, 눈에 보이는 세상 영광을 독차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목표를 두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동안 악마가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인간들을 확실하게 군기 잡아 놓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회사 취직해서 ‘나는 바르게 한다. 나는 정직하게 한다. 나는 올곧게 산다’ 백날 해도 아내가 임신만 해 보세요. ‘애가 발로 차나?’ ‘봐라. 찬다.’ 그 때부터, 애가 엄마 배를 차는 그 때부터 아빠는 더 이상 사표는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나 한 사람 올곧게 살기 위해서 사표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아기를 먹여 살리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그게 왜 그런 식으로 되는가? 히브리서 2장 16절에 보니까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여 악마의 종이 된 사람들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악마의 종에서 풀어낸다’는 그것을 ‘구원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복잡한 것 다 생략하고 ‘하나님!’ ‘왜?’ ‘저 죽습니다. 이제 천국 보내주세요.’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죽어서 좋은데 가는 그것만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 과정 속에서 ‘네가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고 예수님 덕분에 이미 구원받은 것을 알았으면 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구원 받았다’ 라고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좋게 좋게 조용 조용히 죽어서 천국가기를 원하지만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경로를 밟지 아니하면, 다시 말씀드려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러면 놀라게 되지요. 놀라는 것이 뭘까요? 우리는 만 날 쓸데없는 헛짓, 만 날 상상하는 것이 쓸데없는 것만 상상하면서 헛짓했다는 점과, 두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 날 헛짓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 공로로만 천국에 가더라는 사실.

평생 헛짓만 했는데 도착해 보니 어디다? 천국이다. 그게 누구공로입니까?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이 잡혀 왔을 때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묻습니다. ‘간음한 여인아! 분명히 죄 지었지?’ ‘예, 분명히 죄 지었습니다.’ ‘너를 정죄한 사람이 어디에 갔지?’ 뻔히 알면서 묻는 거예요.

그런데 여자가 하는 말이 ‘정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얼마나 신나요. 정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아가씨가 불도가 심한 집안에 시집을 갔다.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덤비듯이 ‘너 교회만 가게 되면 죽는다. 우리 집이 불도집안에다가 종가집인데 너는 이제 교회는 끝이다’라고 마구 달려들 때, 그 때 색씨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으면 그 새댁하고 주님하고 대화하는 거예요.

‘새댁아!’ ‘예’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어디 있지?’ 지금 온 집안이 뒤집혀서 시끄러운 판입니다. ‘네가 교회 가면 죽는다’고 집안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다 하는 판인데 주님이 그걸 알면서도 묻습니다. ‘너를 정죄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지?’ 새댁이 답변합니다. ‘아무도 없나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니 않는다.’

그게 바로 구원이잖아요. 불도가 심한 정도가 아니라 무당집에 시집을 가도 관계없어요. 안에 그리스도가 없고 그리스도의 심장이 없다면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뭘 듣습니까? 그 불도가 심한 집안의 음성 때문에 골치가 아픈 거예요. ‘어머니, 석 달 만에 한번 가지요. 그것도 안 되면 일 년에 한번 그것도 안 되면 3년에 한번 나갈게요.’

자꾸 사람들과 정치적인 타협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헛짓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아가야, 너 교회 갈거야, 말거야?’ 그 때는 이렇게 하세요. ‘어머니, 제가 제 안에 있는 주님께 물어보겠습니다.’ ‘주님! 제가 갈까요? 정죄함이 없다고요? 잘 알겠습니다.’ ‘어머니, 어떤 사람도 나보고 죄 있다고 할 사람이 없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제 맘대로 하겠습니다. 가든지 말든지 그것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어머니가 하는 말이 ‘네가 미쳤구나.’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저는 즐겁습니다. 누가 나를 정죄하리오, 그런 소리를 어머니도 들어봐야 됩니다. 나만 들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욕을 얻어먹었잖아요. 이단소리 들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한테도 예수님이 이단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 가신 길이 어떤 길이냐, 바로 우리가 가는 길이에요. 예수님 가신 길에 하나님 아버지가 도와주시고 아버지가 인정했다면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믿음은 끄떡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가 예수님 따라가면서 같이 가야 할 길이 뭐냐하면 주위에서 길길이 우리를 비난하고 정죄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오케스트라가 있어줘야 우리는 뭐가 실감나는가 하면 ‘아하, 그래서 내 안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계셔서 저 모든 정죄함을 그리스도께서 정죄함이 없는 것으로 바꾸어놓는 그 도구, 기계가 바로 나 자신이군요’라고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 (IP:220.♡.41.193) 09-10-04 17:16 
서울090911빌1장9절b

빌립보서 제 4강 (이 근호목사, 2009년 9월 11일(2), 서울의존교회)


두 번째 시간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 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라고 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사도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인지 아니면 어제 처음 교회 나온, 흔히들 사람들이 말하는 신앙의 초짜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인지, 10년 혹은 20년을 믿거나 혹은 목사쯤 되어야 해당되는 것인지,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특수한 부류에 해당되는 사람에게만 이러한 특별한 은혜를 받는 것인지, 이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겁니다.

정답을 말씀드리면 빌립보서 1장 9,10절에 보면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침투한 예수님이라는 바이러스, 그 DNA가 우리를 만들어버려요.

내 인생을 내가 가꾸고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우리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내버려 두세요. 여러분, 우리가 잘하는 것이 세 가지 있어요. 제가 점쟁이처럼 100프로 맞출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첫 번째 뭐든지 돈 되는 것과 두 번째 남에게 인기 얻는 것과 세 번째 세상의 부귀영화 얻고 싶어서 환장한 것, 이것 백프로입니다.

모든 인생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향하여 줄기차게 갑니다. 교회를 다니고 안다니고 목사고 집사고 뭐고 모든 인간이 차별이 없이 이 세 가지를 놓지를 못합니다. 여자가 시집가든 남자가 장가를 가든 혼자 살든 상관없이 항상 생각하는 것은 ‘왜 나는 인기가 없을까’ 그것 때문에 짜증나고 ‘왜 우리집안에 돈이 없을까’ 그것 때문에 짜증나고 ‘왜 나는 사람들이 즐기는 세상 즐거움을 같이 누리지 못할까’ 그것 때문에 하루 하루 짜증내고 신경질 나고 때로는 자살하고 싶어요.

‘내가 이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 뒤에 뭐 하나 붙이면 좋겠어요.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산다’고 이렇게 나오면 참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냐. 나는 그냥 한강에서 투신하고 싶어. 왜 나는 남들처럼 못 사는가? 대충 중간쯤이라도 왜 안 되는가?’ 그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 본성을 여러분들이 고칠 생각을 하지 마시고 그냥 내버려두세요. 내버려 두시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허락도 없이 여러분 속에 침투해서, 신종플루같은 것은 이유도 아닌 그리스도바이러스를 여러분 속에 퍼뜨려 버립니다. 퍼뜨리게 되면 여러분 속에 뭐가 자생하느냐 하면 빌립보서 1장 10, 11절의 말씀이 자생하지요.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첫 번째가 뭐다? 내버려 둬. 여러분의 인생에서 손을 떼세요. 여러분의 인생을 자꾸 여러분이 간을 보면서 짜니 마니 하면서 간맞추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이 자꾸 간을 맞추면 여러분의 인생이 피곤해서 안돼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어차피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어떻게 인도하는지 한번 관찰해 보세요. 어떻게 인도하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공식은 ‘주님보고 놀라라. 그리고 나를 잊어라.’

왜? 무엇을 보고 놀라는가? 내 평생 헛수고 한 것을 보고 놀라고 헛수고해도 구원받는 것을 보고 놀래라는 겁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스케치 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을 근접이라고 하는데 근접스케치 하는 방법입니다. 지금부터 그림을 그리는데 어떤 여자를 그리겠습니다. 여자얼굴을 그리는데 처음에는 대충 대충 윤곽을 그려요.

제가 분명히 이야기 했습니다. 내버려두라고요. 그냥 내버려 두면 주님께서 이것을 스케치 하면서 이걸 칼 가지고 도려내요. 그럼 여기서 뜯겨 나가는 것이 있을 겁니다. 뭐가 뜯겨 나가는가 하면 ‘나는 무조건 돈 벌어야 돼. 이번에 들어간 브라질펀드에서 한건 올려야 돼’라는 이런 것이 내 뜻대로 안되고 주식이든 뭐든 폭락한다든지 해서 뜯겨 나가는 것이 있어요.

‘나는 무조건 인기 있는 목사여야 돼’ 그런 것도 뜯겨 나가요. 그 다음에 ‘나는 세상 부귀영화를 못 놓겠어’ 라는 것. 우리는 이것을 절대로 못 놓기 때문에 내버려둬요. 내버려두면 돈 좋아하고 세상 좋아하는 이것이 마구 발산됩니다. 교회 나와서 ‘주여, 돈 주옵소서’ 하고 노골적으로 기도 막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껍데기를 하나하나 뜯어나가면 뜯기고 뜯기고 남는 것이 있어요.

그 남는 것이 ‘나 죄인 맞습니다. 그런데 이 죄인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용서로서 저를 구원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내 죄를 용서했습니다’ 라는 성경말씀, 십자가복음이 안에 남게 되면 이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됩니다. 지금 제 딴에는 안 어렵게 하고 있다고 장담하고 있는데 여러분의 눈빛이 ‘지금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데? 그거 다 아는 이야기인데’ 라는 투 같아요.

시편의 주제가 찬송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찬송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다윗을 아주 혼쭐나도록 하면서 아예 죽는 구석으로 몰아가요. 그러니까 다윗이 믿을 사람이 없거든요. 믿을 사람이 없으니까 다윗이 하는 말이 ‘여호와는 나의 요새시요 반석이시요 피난처시오’ 라고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안 몰아넣으면 ‘외삼촌은 나의 반석이시고 청와대는 나의 구세주요’ 라는 식으로 전부 다 아는 사람이 요새 되고 피난처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주변 모든 사람을 다 끊어 버리니까 비로소 다윗에게서 ‘여호와께 찬송하리로다 할렐루야,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나의 찬양이요 나의 도피처라.’ 이것이 뜯겨 나가는 사건이에요. 이렇게 됩니다.

아침에 눈뜨면 ‘오늘도 돈 버는 날 되게 하옵소서’ 하고 마음껏 원 없이 상상하세요. ‘주여, 오늘도 나에게 욕하는 놈은 반드시 뒤지게 하시고 내 차보다 더 빨리 달리는 추월차량들 펑크 나게 해주시고 내 뒤에서 수군거리면서 내 욕하는 인간들 졸지 남고 다 떨어지게 하시고 고스란히 그 애들 우리학원으로 오게 하시고 개척교회 같으면 두 달 만에 우리교회로 500명이 몰려오게 해주시고…’ 마음껏 하세요.

그걸 숨기면 위선자가 되고 또 스트레스 받아서 안 됩니다. 몽땅 다 하는데 그렇게 하시고 그날 하루 중에 그 중에서 몇 개가 뜯겨 나가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뜯겨 나가거든 구원받은 것 100프로입니다. 저녁때 되어서 ‘주여,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것은 십자가 공로뿐입니다. 하지만 내일 아침 되면 또 상상해야지!’

그러면 주께서 ‘네 맘대로 해라. 오늘 게임은 오늘로 끝났고 내일은 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그래서 이튿날이 되면 ‘오늘 애 수능 치는 날인데 400점 만점에 399점 되게 해주시고 경찰대학 수석합격 하게 해주시고 우리 조카 이번에 사법시험 치는데 일차 이차 한방에 합격하게 해주시고 이번에 회사에서 과장승진이 있는데 미운 놈들 다 떨어지게 하시고 나 혼자 승진하게 하시고 몸무게가 좀 나가는데 내일 아침이면 5킬로 빠지게 하시고…’ 이렇게 원 없이 해 보세요.

다음 날 아침에 5킬로그램 더 쪘어요. 아침에 장 보러 갈 때도 ‘오늘도 싱싱한 계란을 고르게 하시고 우유 고를 때 제발 유통기한 제일 긴 놈으로 고르게 하옵소서’ 라고 해 보면 꼭 제일 짧은 것 골랐어요. 계란도 상하기 일보직전인 것 골랐어요. 하여튼 주와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마운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전부 다 아버지의 뜻대로만 되는 이 놀라운 체험을 경험하시면 구원받은 사람 백 프로입니다.

그게 주기도문에 나와요.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 뜻이 어느 정도냐 하면 “내가 매일같이 먹는 그 양식도 ‘하나님이 주셔서 먹게 되었습니다’ 하는 것을 깨닫는 지점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몰아넣게 하옵소서.” ‘내가 돈이 많아서 양식을 산 것이 아니고 정말 주님이 양식을 주시지 않았으면 오늘 밤 굶어 죽을 뻔 했다’는 것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밥맛이 없는 거예요. ‘돈이 없어서 못 먹는 것도 아니고 반찬이 맛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입맛이 떨어지니까 뭘 먹어도 모래 씹는 것처럼 되는구나.’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김치하고 단무지만 있어도 밥맛이 꿀맛이더라는 겁니다. 그냥 밥에 물 말아서 먹어도 맛있어요. ‘주여,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로소 모든 배후에 하나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 느끼는 시간이 한 1초 내지 2초인데 그 순간 영광입니다. 2초 지나고 난 뒤에 내 몸에서 또 악마의 주특기가 발산되지요. 딱 2초 지나고 나서 마구 발산됩니다. ‘주여, 이 정도로 영광을 돌렸으면 슬슬 이제 복 좀 주실 때가 안 되었습니까? 제가 이렇게까지 예수를 믿는데 왜 복을 안주십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뭐? 뭐? 뭐라고? 소원대로 아뢰라. 무슨 복이냐?’ ‘남편 보너스 타게 하옵소서.’ ‘그래. 알았다. 해 주마.’ 잠시 뒤에 집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내가 지금 병원에 있다. 오늘 보너스를 받아서 기분 좋아서 까불면서 운전하다가 나는 다치고 차도 부서지고 150만원 물어주게 생겼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유익함이라.’

사도바울에 의하면 그것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합니까? 빌립보서 1장 21절에 의하면 ‘죽는 것도 괜찮다’ 할 정도입니다. ‘죽는 것도 괜찮습니다’ 하는 수준까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도바울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죽는 것도 괜찮다’ 하는 거죠. ‘목사님, 사도바울이야 죽는것도 괜찮은 수준이지만 우리 수준은 아직 그 수준까지는 안 되잖아요.’

분명히 제가 정답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죽는 것도 괜찮다’ 하는 수준이 사도바울이 도 닦아서 얻은 수준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사용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하게 죽는 경험들을 하게 하니까 사도바울은 서슴없이 나오는 거예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죽는 경험까지 갈 이유는 없겠지요.

물론 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맘대로 인데 여기서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고 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한강 물에 일부러 빠져본다든지 그럴 필요는 없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할 때 우리는 성경 보면서 뭘로 바꾸냐 하면 ‘아하, 담배 끊는 것도 유익하구나’ 하는 이 정도 수준, ‘도박을 그만 하는 것도 내게 유익하구나’ 라는 이정도 수준, 그것만 해도 본인에게는 대단한 수준이에요. 어느 수준인가? 사도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고 같은 수준입니다.

담배 하나 끊는 것도 아무나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아야 끊을 수 있으니까. 어떤 사람은 반대로 성령 받아서 안 피우던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때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담배 피우는 것도 유익함이라’가 되겠지요.

어찌되었든 담배 피우는 것도 헛수고, 끊는 것도 헛수고 우리는 평생 동안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장악해서 구원되지 내가 무슨 폼을 내고 흉내를 내서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산다 할지라도 다 헛짓이다 이 말이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집어넣으신 파이프를 통과하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사도의 편지를 사도의 편지만 보지 않고 마태복음 마가복음을 자꾸 왔다 갔다 하는 이유는 사도 안에는 그 앞에 예수님이 살았던 인생이 다 들어 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도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냐 하면 마태, 마가, 누가가 경험했던 그 그리스도가 그대로 사도 안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2장에 보면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너희들의 고생을 못 알아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고생한 그 고생을 몽땅 다 했다.’ 예수님께서 이 죄 많은 세상에 오셔서 했던 일이 그대로 우리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사도도 자기 욕망이 있으면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욕망과 예수님의 노선과 그 안에서 만남으로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죽는것도 유익함이라’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내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공로고 나는 죄인중의 괴수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1장 6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면 복이 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실족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이 오늘 강의 중에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에 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지금 이 미아선생이 라면 끓여서 김치 놓고 혼자서 맛있게 먹으려고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제가 들이닥쳐서 라면그릇에 젓가락 집어넣어서 휘휘 면발을 말아 올려서 맛있게 먹는거죠. 그러면 이 미아선생이 ‘목사님, 이건 제 라면인데요’ 할 때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자는 복이 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예수님이 오게 되면 우리 인생은 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애초에 각오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이야기 할까요? ‘예수님이 오게 되면 우리가 우리의 원하는 인생을 갈 수 없고 자꾸 예수님에 의해서 밀리고 쫓기게 되어 있다는 것을 고맙게 여기고 감사히 여기는 자가 진짜 복 받은 사람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내 인생, 내 젓가락, 내 라면’ 하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 이제 말씀하옵소서. 이제 내가 지키겠습니다.’ 자꾸 우리가, 내가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는 말이죠. 사람이 말씀을 자기가 지키게 되면 실족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장하다. 나여! 훌륭하다. 나여! 전에는 교회도 안 나오더니 이제는 교회도 다 나오고. 전에는 성경도 안 보던 내가 이제 성경도 보고.’

이게 무슨 실족입니까? 오히려 자랑스럽지요. 우리가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서 구원될 것 같으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너는 안 지켰지. 나는 지켰다. 너는 이것도 모르지. 나는 안다.’ 이런 식으로 만날 자기 잘남에 도취되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옥 가는 방법입니다.

천국 가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지금 잘 지키고 있는데 뭐가 하나 날아들었지요. 날아들게 되니까 ‘어? 당신 누구야! 이것은 내영역이야. 당신이 왜 내 영역에 침범을 해. 이 젓가락은 내 것이고 라면도 내가 끓여서 내 라면이야.’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라면에다 손가락을 막 집어넣어서 ‘아, 라면 참 맛있겠다. 왜? 아니꼽나? 나로 인해서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이렇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 가져다 드세요.’ 그러면 주님께서 ‘왜, 너는 안 먹고?’ 그러면 우리는 ‘제가 이것 먹는다고 구원되겠습니까?’ 주께서 이렇게 주도할 때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고백하는 것 같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그러니까 죽는 것도 주님 쪽에 유익이다, 라는 그것이 바로 주님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까 우리 교인 중의 애 가 눈을 다쳤는데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아서 수술을 했대요. 그래서 제가 전화를 했습니다. 제가 너무 초조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주님 죽으심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애 아픈 쪽으로 눈이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의존교회 사람이 아니고 대구우리교회 교인이고 그 교인은 내 소유라는 의식이 강하게 있어서 그 교인의 애가 다쳤으니까 그 애 다친 것이 나를 아프게 하는 거예요.

제가 전화로 ‘수술 잘 되었습니까?’ 하니까 ‘수술 잘 되어서 나중에 경과를 보자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의 쉼을 얻고 ‘휴, 이제 편안하게 안산강의 할 수 있겠구나’ 했습니다. ‘자기교회 식구 다쳤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뭘 잘났다고 안산까지 가서 강의하나? 네 식구도 제대로 못 챙기는 주제에. 목사가 되어서 기도를 얼마나 안했으면 목사가 되어서 교인의 애가 다치겠는가? 똑바로 해라! 네가 똑바로 했으면 네 교인식구들이 안 아플것이 아니냐?’

결국 이것은 아무리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도 누구 찬양입니까? 이것은 내가 알아서 내가 실족하지 않겠다는 자기의 치밀한 계획이 아닙니까? 남들 보기에는 아주 멋있어 보이지요. ‘와, 목사님께서 교인들을 그렇게도 사랑하는구나. 주 기철 목사님이 양들에게 모범 보인다고 신사참배도 안한 것 보면 참 훌륭한 목사님!’ 이라고 합니다.

그런 게 바로 이단이거든요. 주님께서 어떤 사태를 일으켜도 ‘저 사람은 주님의 아이다’ 라는 사실을 확인받는 겁니다. 제가 전화를 해서 ‘제가 애 아픈 소식을 듣고는 복음 전하기도 싫고 당장 내려가고 싶습니다’ 하니까 그 집사님이 ‘복음 맘껏 전하이소. 우리 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집사님은 자기 애 일인데도 불구하고 실족 지 않았어요.

괜히 제가 걱정해주는 척 하면서 괜찮은 목사라는 인상을 가지도록 해 보려고, 목사 근처도 못가면서 완벽한 목사 티내려고 촐랑대고 호들갑을 떤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것을 가지고 저를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의 본성이고 다 헛수고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지금 웃고 있지만 집에 애가 아프다고 하면 대번에 다 집어치우고 튀어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예 우리한테 어떤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뭘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뭐만 요구합니까? ‘내가 너한테 들어갈 때 네가 실족하지 말아다오.’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내가 죽는것도 유익함이라” 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한 말씀 한 말씀이 이렇게 힘듭니다. 이제 빌립보서 1장의 중요한 것을 막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빌립보서 1장 1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을 제가 써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여기서 뭘 빠뜨리냐 하면 ‘그리스도’를 빠뜨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네가 천국간다’ 는 말인데 그리스도를 빠트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라고 되어 버리면 우리가 우리 쪽에서 예수를 믿어야 되는 줄로 알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 버리면 이 그리스도의 특징은 우리가 우리 죄를 위해서 다시 드릴 제사가 필요치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그리스도는 우리가 해야 될 것을 다 채워주시는 그런 기능을 발휘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기능해 버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어이 우리는 가기 싫어도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기능성 때문입니다. 그러며 그 그리스도의 기능성이 뭐냐? 오늘 강의의 핵심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그리스도의 기능성이란 양으로 갔던 우리를 그냥 잘가라는 식으로 해 놓고 그 다음에 우리가 세상으로 간 빈자리,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리스도가 대신 서심으로 아버지로부터 대신 저주의 소낙비를 다 받아요.

우리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우리는 있지 않고 세상이 좋아서 가버리고 그 자리에 희생양으로 주님이 서심으로 몽땅 저주를 다 받게 될 때 그것을 가지고 빌립보서 2장 8절에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이라’ 고 합니다.

이사야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빌립보서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기능이 결국 뭐였습니까? ‘죽으심’ 이죠.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다른 것은 다 의심해도 내가 생각한다는 그것만큼은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생각한다는 그 나는 있잖아’ 라고 봤어요. 그러면 내가 생각하는 그 순간은 하나님도 있지요. 반대로 내가 생각하지 않는 순간, 치매가 걸렸다든지 해서 생각을 제대로 못하는 순간이 오게 되면 하나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도 없겠지요.

내가 60년 동안 교회를 다니고도 치매가 걸려서 하나님 생각이라는 그 개념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님이 있어요, 없어요? 없다는 말이죠. 내가 있음에 하나님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이 인간의 약점인줄을 알고 아예 그리스도를 죽여 버렸습니다. 내가 죽어버리면 하나님도 소용없는데 죽으심, 그 자리에서 천국이 나온다면 우리는 현재 살아있는 나에게 기대를 걸어야 됩니까, 아니면 죽으신 예수님한테 기대를 걸면 됩니까?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부활된 천국이 나온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 있는 나에게 더 이상 기대를 걸 필요가 있다, 없다? 나에게 기대를 걸 필요가 없으면, 구원받는데 있어서 내가 나에게 기대를 걸지 않으면 나는 구원 문제에 대해서 어떤 스트레스를 받을 하등의 염려가 없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죽어 가시면서 ‘근호야, 너는 십일조를 해야 된다’ 했으면 우리가 십일조를 하면 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죽어 가시면서 ‘근호야, 나의 무덤을 부탁한다’ 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죽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 죽으심에 손댈 수가 없습니다. 임진강에 애가 빠져서 죽었는데 시체밖에 없어요. 보상금이 5억 나왔다고 하죠.

보상금 5억을 받고나서 집에서 자고 있는데 임진강에서 아빠가 살아나서 ‘나, 여기 살아났다. 나 여기 있다.’ ‘귀신이네요.’ ‘내가 귀신이 아니다. 내 못 박힌 손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봐라.’ 그 때부터 우리는 인생을 살 때 눈에 보이는 인생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인생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그리스도의 기능입니다.

제가 말을 좀 어렵게 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기능이란 것은 밥 먹고 사는 것만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아예 믿음이 없는 우리를 예수님의 죽으심 그 자리에서 다시 세상을 볼 수 있는 그런 눈까지 제공하시는 분이 누구다? 바로 그리스도의 기능인 겁니다. ‘주는 나의 그리스도십니다’ 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나부터 어떻게 살까, 그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어떤 식으로 이끌고 가고 있느냐, 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자신의 구원을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보니까 ‘내가 하는 모든 것은 헛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 덕분에 우리가 사는구나’ 라는 것을 주님의 죽으신 자리에서 세상을 다시 볼 때 새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빌립보서 1장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뭐도 유익하다? ‘죽는것도 유익하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관점은 어떤 관점인가? 22절부터 봅시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죽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까, 사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까?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바울이 그런 고백을 합니까? 관점이 살아 있는 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죽은 빈 무덤이라는 관점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그리스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도 같이 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얼굴과 사도바울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 죽은 무덤에서 누구를 봅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죽었던 상태에서 보니까 ‘쟤(사도바울) 보이나?’ ‘예, 그게 바로 저 아닙니까? 예수님, 쟤 좀 고생 그만 시키고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좀 해주세요.’ ‘그렇게 해줄까?’ ‘예. 정말 소원입니다.’ ‘그래. 그런데 넌 좀 오래 오래 살아야 되겠다. 네 입장에서는 죽어서 나와 함께 있는 그것이 참 좋겠는데 너의 복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조금 더 고생을 해야 되겠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지난 주일에 어떤 집사님이 제 설교를 듣고 난 뒤에 심각하게 이야기해요. ‘목사님, 제가 지금 당장 죽으면 안 됩니까?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듭니다.’ 그것은 무슨 관점이냐 하면 예수님관점이 아니고 지금 본인이 사는 관점에서 본인이 힘드니까 자살은 하면 안 되겠고 자살은 자살인데 그걸 주님 쪽에서 그걸 해주면 고맙겠다는 의식으로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관점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여전히 자기 편한 쪽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집사님, 제대는 함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군복무기간 다 채워야 제대가 되지 아무나 제대시켜주지 않습니다. 고참이 되어야 제대를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아직 집사님은 고참이 아니니까 군대생활 좀 더 하셔야 되겠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관점이 살아 있는 내 관점이 아니고 예수님의 무덤에 얼굴 맞대고 보는 관점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미 뭐가 됩니까? 죽은 자가 되지요. 그 이야기를 써 놓았더니 사람들이, 특히 우리 노회 말고 다른 노회의 목사님들이 자꾸 오해를 하는 거예요. ‘이 근호 목사는 인간이 죽었대. 저 인간이 미친놈 아냐!’ 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린도후서 4:10-12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린도후서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분명히 고린도후서에 나오고 갈라디아에도 분명히 나오는데 그 사람들은 관점이 자기가 살아 있어야 된다는 관점 때문에 그것을 해석을 못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평수가 넓어요. 거기에 예수님만 계신 것이 아니고 성도도 같이 들어 있어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있는 대로 세상은 나에게 죽은 자고 세상은 나를 볼 때 죽은 자로 보일 것이고.

내가 이미 죽은 귀신이라는 이것이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몰라요. 내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 무엇이 부끄럽고 뭐가 두렵고 뭐가 겁나는 것이 있겠어요. 그래서 ‘사랑은 두려움을 쫓느니라’ 하잖아요. 여러분이 꼭 90살 되어서 죽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열 몇살 쯤 되었어도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홉 살도 덤으로 살고 열 살도 덤으로 사는 것이고 다 축복이고 열 한 살 되어도 감사하고 그래서 한 95살까지 살면 끝까지 감사합니다. 사람이 술이나 마약 같은 것이 의존하는 이유가 본인이 살았다고 여기고 더 살려고 하니까 그렇게 괴로운 거예요.

‘주여, 죽었는데 무슨 짓을 할까요?’ 이러면 편한 것을 가지고 ‘지금 살아 있는 이 몸을 어떻게 굴려서 또 살게 합니까?’ 하고 나오니까 살려고 하는 본인도 괴롭고 ‘내 안에 내가 들어 있어서 죽으려고 하니까 그것도 미치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빌립보서 1장은 달라요. ‘내 안에 사는 것은 나니 내가 더 살려니 괴로워죽겠다.’ 이것하고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하고는 완전히 정 반대입니다.

그러니까 내버려두세요. 내버려두시면 허락 없이 주께서 여러분을 침투하실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껍데기를 벗기고 벗겨서 결국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피만 출렁출렁 담겨 있을 것을 본인이 보게 할 것이고 그리되면 ‘아하, 나는 죽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The others' 이라는 영화에 보면 엄마와 애 둘이 나와요.

관객들은 그 들이 처음에는 산사람들인 줄 압니다. 그런데 영화 끝날 때 보면 그 세 사람이 귀신들이었어요. 귀신이 서로 귀신인줄 몰랐던 겁니다. 나중에 보니까 ‘아하, 우리가 귀신이구나.’ 영화 끝에서 알아요. 귀신이 자기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산 사람 흉내를 내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자와 네가 산다는 것은 네가 사는 것이 아니고 네 안에 그리스도의 것으로 산다’라는 놀라운 이야기가 이 성경에 바울의 편지속에, 로마서 6장에 세례부분에 나옵니다.

로마서 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안 놀래요. 전혀 무슨 뜻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뜻을 모르기 때문에 놀라야 될 대목에서 놀라지를 않는 거예요. 놀라는 대신 뭘 하고 있느냐 하면 신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살아 있는 나에다가 신학을 덧대기 합니다. 삽겹살처럼 신학으로 덧대기를 합니다. 그 신학이라는 껍데기를 다 벗겨내야 됩니다.

앞으로 의존교회 여러분들이 이야기를 할 때는 평소에 보는 산 사람들처럼 이야기하지 말고 바이브레이션을 넣어서 하세요. ‘여러분~~~! 우리는~~~ 귀신들입니다~~~.’ ‘엄마~~~ 포도 좀 주세요~~~.’ ‘아들(귀신)아~~~, 내가 주마~~~, 공부나 해라~~~공부해야 돈 벌어 온다~~~.’ ‘엄마는 귀신이라면서 돈 좋아해~~~?’ ‘내 성질이 그렇다~~~이 귀신성질이 돈 밖에 모른다~~~.’

성도는 자기가 죽은 줄 아는 것이 성도고 불신자는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산채 하는 것이 불신자입니다.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더 살아보려고 축복을 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된 인생, 그런 인생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뭐가 된다? 복음의 진보가 되지요.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믿어서 천국간다’고 하니까 이 복음의 중간과정에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서 ‘야, 복음은 널리 전파되어야 해. 그래야 천국 많이 가’ 라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 이런 인간의 생각을 묵살해 버리고 여기다가 뭘 집어넣습니까?

사도바울의 체포당함을 집어넣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어?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려나, 말려는 것인가? 복음 전하는 사람을 체포시켜 버렸어?’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것이 아니라 “체포되고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바로 그것이 인간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인간들의 생각을 능가해서 ‘진짜 복음의 진수인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에게 덮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로서 하나님이 나를 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복음의 진수를 알았으니 복음의 진보가 되었습니다.” 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고 복음 알아서 출세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일이 안되어 버리니까 그것이 복음의 진보입니다. ‘아하, 복음이 나를 출세시키는 것이 아니고 나의 그러한 세상적인 껍데기를 벗기고 나는 죽은 자요 내 안에 산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 덕분에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구나’ 라고 깨닫는 복음의 진보를 드러내기 위해서 여러분의 의도대로 안 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힘들게 한 거예요.

빌립보서 1장 29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빌립보서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고난을 왜 줍니까? 고난 없는 복음은 십자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옴으로 말미암아 ‘아하, 우리가 복음을 잘못 오해하고 착각하고 있었구나’ 라는 관점에서 고난을 주는 겁니다. 1장 28절에 보면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똑같은 말을 했는데 멸망 받을 사람한테는 멸망 받을 이유가 되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구원받은 이유가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 예수님의 죽으심은 믿는 자 에게는 부활의 능력이고 안 믿는 자에게는 저주받을 증거로서 작용으로서 그리스도가 기능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목사님, 딱 깨놓고 이야기 합시다. 내 안에 그리스도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여러분들의 뜻대로 안되거든 주께서 여러분들의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여러분들은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도 산 자가 아니라 이 몸이 해체되어야 하며 죽을 자 인 것을 아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뜻이 무엇입니까? 그 뜻은 간단해요. 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누가 너를 정죄하느뇨.’ ‘없습니다.’ 할 정도로 이 더러운 죄인이 용서받는다는 것을 짧은 순간이나마 알게 되거든 그 순간이나마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의의 열매가 되는 그런 도구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앞으로 뭐든지 우리 뜻대로 안 될 때 마다 그래도 예수님 덕분에 죽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더욱더 감사할 수 있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10-03 20:13:34   녹취 : 오용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