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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제 3강 (이 근호목사, 2009년 9월 11일(1), 서울의존교회)
빌립보서의 핵심이 뭐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든지 하신다고 할 때에 그 ‘뭐든지’ 안에는 사람들이 예상 못할, 복음을 가로막는, 복음이 중지되는, 복음전파가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는 난처한 상황조차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감옥에 집어넣으면 복음이 가로막히고 제대로 전파되지 못합니다’ 라고 생각하기들 쉬운데 하나님께서는 ‘그러니까 너희들 수준이 내 수준보다는 못하지’ 가 되는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복음이 전파되면 그 복음에 의해서 사람들이 천국에 보내지는데 사람들이 복음을 따로 생각해서 ‘압니다. 제가 십자가를 알아요’ 라고 복음은 따로 있고 전파는 ‘우리가 알아서 잘 전합니다’ 라는 식으로 전파된다고 보고 있어요.
복음 따로,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 따로, 그래서 복음전파해서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방법 따로따로 해서 사람들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뭘 집어넣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전해야 잘 전해진다’ 라는 그들의 생각에 장애가 되고 방해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 이렇게 나오시면 우리가 복음전파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라는 소리가 서슴없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집어넣어 버려요.
집어넣게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 복음 좋은 것은 알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오시면 한사람에게도 복음전파 못해요. 하나님, 이 방식은 철수하세요. 이 방법으로는 복음전파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거예요. 복음전파는 우리한테 맡겨야 됩니다’ 라고 하는 그 사람들이 바로 틀렸다는 겁니다. 복음전파 하는데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전파 하는데 천사들이 지켜줘서 복음이 잘 증거 될 때, ‘복음이 잘도 증거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복음 잘 전하는 사도바울을 덜렁 체포해서 복음 못전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때부터 의심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알았던 그 복음이 복음이 맞기는 맞는건가?’
우선 그것을 의심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저 사도바울이 가짜가 아닐까? 하나님께서 복음전하는 자를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도록 내버려두실 리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안도와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옥에 가둔 것이 분명해’ 라는 이 두 가지의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오해입니다.
복음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제 복음 압니다. 이제 제대로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오해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회사 정수기는 아주 특수한 정수기입니다’ 라고 해도 정수기판매원이 ‘정수기의 특수한 장치라든지 기계의 구조같은 것은 다 생략하고 정수기를 어떻게 팔것인지 그것만 이야기 해주세요’ 라고 하는 거예요.
정수기제조회사측에서 말합니다. ‘그것이 아니고 정수기의 구조를 제대로 알아야 팔지 그 구조를 모르고서는 못 팝니다.’ 정수기판매원이 또 대꾸하기를 ‘아니 그런 것은 다 빼고 다만 정수기를 몇 대 팔면 수당을 얼마 주는지 그것만 이야기 하세요’ 라고 해서 말 들어보지도 않고 정수기를 팔겠다고 덜렁 가지고 갔네요.
정수기를 시범보인다고 ‘우리 정수기는 맑은 물이 나옵니다’ 하고 스위치를 누르니까 시뻘건 흙탕물 같은 물이 나오더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손님들이 기겁해서 ‘이거 완전히 사기꾼이네. 큰일날 뻔 했잖아’ 라고 된 거예요. 판매원들이 사장한테 가서 ‘사장님, 정수기에서 흙탕물이 나와서 못 먹을 판인데 이 정수기가 어떻게 된 겁니까?’
사장님의 답변입니다. ‘그러니까 이 좋은 정수기를 판매할 때는 제대로 된 구조를 알고 가야지 그것도 모르고 가니까 실수를 하게 되잖아요. 흙탕물이 나오고 그 흙탕물을 마셔야 3년씩 오래 사는 정수기가 바로 우리 회사가 특허 낸 정수기입니다. 다른 회사에서 만든 정수기는 그냥 맑은 물이 나오지만 우리 회사 정수기는 흙탕물이 나오고 그걸 마실 때마다 3년씩, 6년, 12년 이렇게 늘어나는 겁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생각할 때 천국과 아예 직통으로 연결시켜 놓고 중간과정을 생략시켜 놓았어요. 지난 수요일에 설교를 들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하나님께서 ‘너, 축복받을래, 저주 받을래’ 하면 백이면 백 다 ‘저 축복 받을래요’ 한다 이 말이죠. 그런 사람 지옥 갑니다. ‘너 저주받을래, 축복받을래?’ 하면 ‘저는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라는 사람만 천국 갑니다.
지난 수요일에 에발산과 그리심산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상세한 것은 수요설교를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이게 뭐냐하면 자기 주제파악을 못한 채 ‘복음’ 하니까 자기가 평소에 생각한 기쁜 소식을 생각해서 ‘복음이 어떻다’ 하는 그것은 모르겠고 ‘천국? 거기는 가야지’ 이런다는 말이지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천국 갔는지가 나옵니다.
제가 물어봅시다. 예수님께서 천국 갈 때 곱게 나서 곱게 자라서 곱게 살다가 천국 갔습니까? 예수님께서 청정가정에서 태어나서 청정지역에서 곱게곱게 사시다가 천사처럼 나풀 나풀 그렇게 하늘나라 올라갔습니까? ‘목사님, 저 그런 것은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천국만 넣어주세요’라고 할 것인데 주님께서는 그 과정을 대단히 중요시해서 이렇게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그리고 부자청년에게 말하기를 ‘네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줘버리고 빈털터리가 된 채 나를 따라 오너라.’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어떤 사람이 ‘예수님, 아버지 장례식 치르고 다시 오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의 말이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고 하십니다.
여러분, 각자각자 집에서 살다가 죽어서 천국 갈 것 같으면 뭐하려고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가는 길과 사람들이 가는 길이 분명히 다르다는 뜻이에요. 길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은 좁은 길이고 우리가 가는 길은 완전히 고속도로, 큰 도로 아닙니까? 여기서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넣어준다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한 그 때에 사람들이 느낀 것이 뭐냐 하면 ‘너 뭐야?’ 라는 겁니다.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 한통 떼주세요’ 라고 했을 때에 동사무소 직원이 하는 말이 ‘아저씨, 저를 따라오세요’ 라고 하면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당신 뭐야? 당신이 뭔데? 내가 요구하는대로 등본이나 떼어 달란말야’ 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여, 내가 천국가고 싶으니 천국갈수 있는 증이나 하나 끊어달란말야.’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세요.’ ‘뭔데? 네가 뭔데 당신을 따라가라고 하는데?’ ‘나도 내가 공들여서 설계한 내 인생이 있다고. 당신이 뭔데 내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당신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는 내(예수)가 누군지 모르지?’ ‘모르지요.’ ‘그러면 당신이 아는 것은 뭔데?’ ‘나는 죽어서 천국가고 싶은 것 그것만 알고 싶습니다.’
‘그러면 나(예수)는 몰라도 그만이란 소리야?’ ‘몰라도 되지요. 내가 궁금한 것은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 그게 궁금하지 내가 예수 아는 것은 내 취미가 아닙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특징입니다. 목사가 그렇게 가르쳤고, 가르친 것도 그렇지만 원래부터 인간은 자기일 아니면 남의 일에 관심도 없어요.
‘예수님이 천국갔다.’ 별로 안좋아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 별로 안좋아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영 안좋아요. ‘내가 부활된다.’ 기분 좋습니다. ‘내가 천국간다.’ 기분 째집니다. ‘내가 영원히 산다.’ 바로 그것 때문에 교회 왔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이 중간과정을 생략해 버리게 되니까 교회 와서 지옥 가는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교회 오면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이제는 나에 대한 신경 끊어버리고 ‘주님 누구십니까?’ ‘아하, 이런 분이구나’ 하면서 좋아서 졸졸 따라다니면 그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여러분이 영 안믿는 인상들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천국에 가려고 이 시간에 나와 있습니다.’ 글쎄 그런 천국은 우리가 만들어낸 가짜 천국이라니까요.
제가 칠판에 크게 쓰겠습니다. “천국은 ‘나를 잊어주세요.’ 나를 잃어버린 그 자리에 예수님을 세우면 그것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나를 세우면 그것이 천국을 방해해요. 내가 가야될 천국을 내가 방해한다니까요. 이전까지 나를 생각했던 그 자리에다가 예수님으로 바꾸시면…. ‘목사님, 바꾸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바꾸시면 의문점이 생겨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당신이 누구신데 내 자리를 차고 들어왔습니까? 당신이 누구시길래 당신의 공로로 구원받습니까? 나도 착한일 꽤나 하는데 왜 당신의 공로로만 구원받고 당신의 피와 내피가 뭐가 다르기에 당신의 피로만 죄가 용서되고 내피는 한바가지를 흘려도 용서가 안 됩니까? 당신의 피는 무슨 피 길래 한 방울만 있어도 내 죄가 용서받는다면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것이 빌립보서의 본문에 나옵니다. 빌립보서 1장 8절부터 다같이 읽어봅시다.
빌립보서 1:8,9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지금 사도바울의 심장은 누구의 심장입니까? 자기심장입니까? 예수의 심장입니까? 지금 사도바울내의 주인이 바뀌었지요. 자기는 부도났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인수인계했어요. 예수님이 인수인계해서 심장도 예수님의 심장입니다. 심장도 예수님의 심장이니까 자기가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심정으로 교인들을 사모하는거예요.
자기의 심정으로 사모하게 되면 자기한테 잘해준 사람,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만 구원시켜 주는 것이 돼요. 그런데 예수님의 심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되면 비록 자기에게 소홀하게 해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같으면 누구나 같은 형제가 되는 겁니다. 그게 또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에 나와요.
빌립보서 1:15-17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니라.”
좀 복잡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저 사람이 비록 나를 싫어해도 예수 전파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 말입니다. 누가복음 9장 49절에서 요한이 예수님에게 고자질을 합니다. ‘저 사람은 우리하고 함께 안다니면서 우리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냅니다.’ 참 못됐지요. ‘저 사람은 십자가마을 사람도 아니면서 복음 전해요. 저거 이단이라고 하면서 몰매를 줄까요?’
‘십자가마을에 가입도 안하면서 우리 것을 가지고 가서 예수 증거 하는데 저거 이단 맞지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를 해치지 않는 것이 너희를 위하는 것이다.’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9:49,50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이 비슷한 이야기가 빌립보서 1장 16절 17절에 죽 나옵니다. ‘다투거나 시기하거나 그리스도가 전파되면 그것으로 되었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해 봅시다.
‘저는 죽어서 천당 가고 싶어서 교회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우리가 예수가 누군지를 알아야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날 건지면 되었지 왜 예수에 대해서 우리가 구태여 알아야 됩니까? 나는 그 예수라는 아저씨를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데요? 나는 지금 우리 집 이런 저런 사정도 급합니다. 우리집 애가 고 3이라 그 애 뒷바라지도 바쁜데 언제 우리가 성경 펴들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런 것을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런 일에 맘 빼앗기는 것도 싫은데 그런데 자꾸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내가 안 좋아하는 예수를 말하니까 내가 짜증납니다.’
여러분, 그럴 때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이렇게 답변해주세요. 오늘 참 좋은 것을 배웁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놀라게 됩니다. 첫 번째, 자신이 그동안 헛다리짚었고 헛수고한 것을 가지고 놀란다. 지금까지 몽땅 다 헛수고, 교회 다닌 것을 포함해서 다 헛수고. 두 번째 놀라운 것이 뭐냐 하면 ‘헛수고해도 구원되더라.’ 이게 놀라운 거예요.
‘내가 헛짓, 헛수고 했다. 그런데도 구원되더라.’ 누구 능력으로? 바로 예수님의 능력으로. 그러니까 예수님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에게 무슨 재주가 있어서? 예수님이 뭘 어떻게 했기에? 예전에 치킨 CF를 보는데 그 CF모델이 치킨을 뜯어먹다가 치킨을 보면서 놀라서 하는 소리가 있어요. ‘도대체 이 닭다리에 무슨 짓을 한거야?’
왜 이렇게 맛있는거야, 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알게 되면 첫 번째 우리가 교회 와서 한 짓이 전부 다 헛짓이었다는 것에 놀라고 두 번째, 헛짓해도 구원된다는 그 사실을 보고 두 번째 놀라고. 놀래야 됩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안 놀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안 놀래는 이유가 ‘나는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예배참석 꼬박꼬박 하고 있고 이것 저것 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라고 자꾸 자기는 헛짓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금요일에 이렇게 예배 참석하는 그것조차 헛짓입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참석 안하면요?’ 참석 안하는 그것도 헛짓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금요일에 참석해서 이 말씀을 들어야 되는 이유가 ‘헛짓을 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수로 구원받느냐, 헛짓을 해도 구원을 받더라’ 하는 겁니다.
TV프로그램중에 ‘이것이 인생이다’ 류의 프로그램이 있어서 거기에 제일 재수 없는 사람들의 총집합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지난번에 울산 MBC의 어느 프로에서 한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와요. 그 동안 <이것이 인생이다>에 나왔던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사람들의 총집합 한 것은 게임도 안 될 정도로 그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성공한 것은 한 번도 없고 실패만 서른 번을 했답니다.
지금 개 한 마리 키우고 있고 한 달 수입이 십만원인데 집은 농협에 차압당해 있는 판국이랍니다. 평생 동안 헛짓을 했습니다. 어망 사서 울산앞바다에 쳐놓으니까 태풍 불어와서 다 날아가 버린다든지 해서 그런 식으로 사업실패만 서른 번을 했어요. 자살 안하는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죠. 손대면 톡, 하고 터지면서 실패만 합니다.
주식이면 주식, 개장사면 개장사, 뭐든지 손대면 실패했습니다. 저도 뭘 손대면 손대는 대로 다 부서지고 책도 잘 찢어지고 제 손도 책장 넘기다가 베이기 일쑤고 후시딘 팬입니다. 그런데 그런 헛짓과 헛수고의 최고가 바로 예수님이란 말이죠. 예수님이 헛짓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사히 가도록 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인간들이 보기에 아무 쓸모 짝도 없는 일들의 나열 입니다.
백날 해도 욕 얻어먹고 착한 일 해도 비난받고 남 도와주면서 배신당했습니다. 울산 할아버지는 서른 번 실패했는데 예수님은 평생이 실패입니다. 평생 실패하고 결국 마지막도 실패로 끝나지요.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니까 주님의 일생이란 ‘아버지에게 이렇게 버림 받는다’ 하는 것을 시범으로 버림받는 거예요.
천국은 예수님의 아버지나라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예수님처럼 버림받아야 돼’라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배운 사람이라면 절대로 내 힘으로 천국 간다는 소리가 내 입에서 두 번 다시 나올 수가 없어요. ‘내 힘으로 천국은 절대로 못 간다. 왜냐? 내 본성은 예수님이 알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내 자식일도 바쁘고 내 아내(남편)일도 버겁고, 사업일도 버거운데 언제 짬을 내서 이미 죽은 타인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기에.’
그럴 시간 있으면 동장 만나고 시장 만나서 이 지역 재개발 되고 있는데 보상이나 빨리 제대로 해내라고 독촉이나 하지, 이 현대 특히 도시사회에서 예수한테 신경 쓸 여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없어요. 예수님한테 성령 받아서 예수님한테 미친 사람 같으면 ‘어이, 직원들 모이라고 하지.’ ‘사장님, 지금 회의가 급한데요.’ ‘회의가 문젠가 예수님 이야기부터 들어야지.’ 아마 진짜 성령 받아서 예수님한테 미쳤을 때는 그렇게 할 거예요.
직원들 여럿 퇴직한다고 할 거예요. 예수 소리 듣기 싫어서 이 회사 못 다니겠다고 할 겁니다. 직원들이 딴 생각 안하고 열심히 일해야 경쟁사를 이기는데 왜 사장이 바쁜 직원들을 모아놓고 예수 이야기를 합니까? 그것은 아까 말한 대로 놀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한테 놀란 순간 우리에게 무엇이 성립되는가? ‘나를 잊어라’ 가 성립됩니다.
이것을 줄여봅시다. 여기서 첫째시간 공식 하나 나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 수능에 나올지 싶습니다. 공식, ‘놀라라. 그리고 잊어라.’ 예수님 보고 놀라서 나를 잊어라, 그 말입니다. 주님보고 놀래고 그리고 잊어라. 왜 놀라야 되는데요? 예수님이 그렇게 가신 것은 우리 인생이 헛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일은 우리 죄를 대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신 길은 바로 우리가 죄가 있고 그렇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대신 사신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인생은 뭐냐? 우리는 저렇게 해서 버림받는구나, 라는 것을 몽땅 다 보여준 거예요. 그 다음에는 뭐냐? 그 다음에는 잊어야죠. 누구를 잊는다? 나를 잊어야죠. 조금 늦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이래서 이 모임이 참 좋은 거예요.
빌립보서 1장을 하는데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사람들은 ‘목사님, 제가 교회 나온 이유는 죽어서 좋은데, 천국에 가고자 함입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예수님한테 관심은 있고요?’ ‘예수님한테 관심 없습니다. 나는 내가 천국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사도바울이 ‘당신 예수를 알면 놀랠 건데 ….’
‘놀래기는 뭘, 하나님도 믿고 예수도 믿으면 되지 뭘 그걸 놀랩니까?’ ‘당신이 성경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예수님께서 어떤 길을 가셨는지 가시면서 뭐라고 하셨는지 그걸 압니까?’ ‘몰라. 난 관심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천국 갈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런 말을? 아니 가만있으면 주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은 ‘나를 따라 오너라’ 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 따라가보자’ 하면서 따라가니까 주님이 점점 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시네요. 주님이 점점 망하는 길로 간다고요. 그렇게 따라가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그 유명한 열두 제자입니다.
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일 때 여러 사람들이 비행기 날개위에 앉아서 ‘야, 이제 비행기 타고 난다’ 하고 재미있어 하는데 비행기가 속도를 내버리니까 그 사람들이 다 어떻게 됩니까? 비행기에서 다 떨어져 나가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따르면 천국간다고 해서 따르고 보니까 막상 자기 실상이 드러나지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두제자 몽땅 예수님과 안녕, 했고 베드로 같은 경우는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당신을 저주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설교하면서 사람이 환경 다르면 본색 드러낸다고 했잖아요. 좋은 환경일 때 예수 믿었지요. 그런데 그 환경이 예수님을 안 좋아 할 그런 환경 속에 들어가 버리면 과연 그때에도 예수 믿을까?
불도가 심한 집안, 한 달에 두 번꼴로 제사 드리는 그런 집에 예수 믿는 처녀가 시집을 왔을 때 과연 그 경우에도 예수 믿을까요? 그런 경우에도 ‘저는 예수 믿어요. 그래서 저는 제사 못 합니다’ 라는 그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 말 했다가는 시아버지 유산 한 푼도 못 받을 건데. 결국 돈 문젠데. 남편 죽어버리면 애들 비싼 과외비며 학교납부금 시댁에서 못 대주는데 어떻게 할 겁니까?
다 머리 굴려서 계산에 들어가지요. 결국은 ‘예수님은 몰라도 나만 구원받으면 되지 않겠느냐’ 라는 그 생각이 예수님과는 다른 길로 가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자기가 구원받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지옥가고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항상 반대로 생각하면 맞아요. ‘나 같은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뭘 했다고 천국 갑니까?’ 라고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구원받고 있는 중입니다. 구원의 작용이 작렬해서 그런 고백이 나와요. 왜냐하면 그러 사람만이 충분하게 예수님을 따를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라’ 고 할 때 예수님 가신 그 A라는 포인트, 그 지점이 천국이거든요.
예수님이 따라 오라고 할 때 ‘맞습니다. 저는 개 입니다’ 라고 개가 되어서 졸졸 따라올 때, ‘주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라고 한 사람만 따라 갈수가 있어요. 왜? 따라갈 때 자기를 잊었지요. 나를 잊은 거예요. 왜? 예수님이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공짜로 넣어준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워서.
아까 이야기했지요. 내 피는 안 되고 주님 피는 되고, 내 노력은 안 되고 주님의 노력은 되고 내가 성경 지키는 것은 안 되고 주님이 지키는 것은 되고, 이 점이 너무 놀라워서 주님한테 반하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나를 잊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를 잊은 사람’입니다.
나를 잊었어요. 너무나 잊어버렸어요. ‘내가 누구지?’ 이렇게 할 정도로. 그것을 오늘 빌립보서 1장에서는 누구의 심장이라고 했습니까? 예수의 심장이라고 했습니다. 심장이라는 것은 오장육부 중에서 제일 대표가 되는 내부기관입니다. 그 심장이 예수 심장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몽땅 예수님이 주도권을 쥐고 예수님이 지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여튼 사도바울이 미쳤어요. 빌립보서 1장 22절에 보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 다음에 빈칸을 친다면 거기에 누구를 넣겠습니까?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 중에 “내게 사는 것이” 다음에 들어갈 말로 적당한 것은? 1) 하나님 2) 내 애인 3) 우리 아버지 4) 그리스도. 몇 번입니까?
특히 여자들에게는 내게 사는 것이 내 자식입니다. 자식은 죽으면 땅에 묻지 못하고 자기가 항상 품고 살기 때문에 내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요. 최 진실 엄마는 아직도 그 딸을 못 묻고 자기 가슴에 묻고 있겠지요. 내가 이렇게 한이 맺혔는데 그 젊은 영혼이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나겠는가, 하겠지요. 그러면 장 진영은 최 진실 선배가 못 떠나고 있기 때문에 순서를 지켜서 ‘언니 먼저 가고 그 다음에 내가 떠날게’ 라고 되어야겠지요.
그래서 돈 5백 들여서 천도제지내서 빨리 보낸다는 둥 하지 않습니까? 밤중에 귀신이 나와서 ‘젊은 나이에 죽어서 너무나 억울하다’ 하니까 무당 불러서 ‘자, 이거 먹고 빨리 가라’ 하고 보내버린다는거죠. 우리는 귀신정도가 아니고 부활하신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아무도 안거한다는 눈치신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거하는지 안거하는지 어떻게 확인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도 거하고 싶은데 거하는지 안거하는지 감을 못잡겠습니다’ 하지요.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으로 천국간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이 중간과정, 예수님을 다 생략해 버리고 복음 믿으면 끝에 천국간다는 식으로 바로 연결시킨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해서 천국간다는 이 중간자체가 그리스도가 생각하는 그 노선이 아니고 인간들이 자기가 살고 싶어서 자기 맘대로 착각하고 오해한 그 방법들을 여기에 집어 넣었다는 말이죠.
잘 들어보세요. 지금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목사님, 제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지를 어떻게 판정합니까?’ 그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복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이 중간에 여러분이 상상한 시나리오가 분명히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목사가 복음 믿고 그 복음 전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떤 집사가 와서 ‘목사님, 복음 전파하는데 쓰시라’고 한 700억을 헌금했다. 그래서 그 돈 가지고 서울에 신학교도 세웠는데 자기 집도 있어야 되고 챙길 것은 챙겨야 되니까 몇 억 들여서 내 집도 마련했다.” 이런 것이 내가 상상해서 쓰는 시나리오입니다.
또 어떤 아가씨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불도가 심한 집안으로 시집간다고 그렇게 말렸다. 시집에 들어간 첫날밤 시어머니, 시아버지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예수 믿는 며느리인데 그 며느리처럼 너희도 예수 안 믿으면 다 죽는다’ 하니까 이튿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며늘아, 내가 잘못했다. 예수 믿으마’ 해서 온 집안에 며느리 하나 잘 들어오는 바람에 다 천국가게 되었다”는 이런 시나리오.
꿈 깨세요. 이런 것은 다 마귀의 역사입니다. 반드시 복음으로 천국 갈 때 우리가 이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주님께서 만든 이 파이프에 집어넣어 버리면 우리는 나를 잊게 되고 여기는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주님가신 그 공생애, 십자가의 길을 되풀이하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는 식으로 천국에 골인시킵니다. 우리는 상상이 안돼요. 내일 무슨 난리가 날지 몰라요.
저는 오늘 아침에 복음전하겠다고 집을 나서서 서울로 오는데 전화가 왔는데 우리교회에 복음 잘 듣는 집의 애가 눈을 다쳐서 눈동자가 안돌아간다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듣고는 다 그만두고 병원에 가 보고 싶었어요. 만일에 우리 교회 좀 나오다가 삐져서 안 나오는 사람 집안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것 좀 봐. 복음 잘 듣다가 삐지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이 근호 무시하면 그렇게 되는거야’ 라고, 물론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만, 얼마나 내 권위가 먹어주겠습니까?
그게 아니고 우리 교회의 아주 성실한 집안의 애가 눈 수술을 했다고 하니 제가 걱정이 되어서 ‘주여, 하필이면….’ 그러면 주님께서 응답하기를 ‘뭐! 뭔데! 내가 뭘 어쨌다는건데! 네가 네 맘대로 시나리오 짜고 연출 다 해놓고 네 연출대로 시나리오 안 된다고 뭐, 뭐, 뭐, 뭐? 내가 어쨌다고? 혼자 연출해서 삐져놓고는 뭐가 하필이면인데 뭐가?’
주님께서 큰소리를 더 쳐버립니다. ‘지금까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도 영광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뭔데? 하나님이 뭘 잘못했는데?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고? 천국 가려면 날 따라와.’ 못 따라오니까 그냥 집어 넣어버려요. 집어 넣어버리면 나의 시나리오는 사라지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그리스도의 십자가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게 빌립보서에서는 뭐냐? 사도바울이 옥에 갇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에요.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복음전파의 선봉주자입니다. 선봉주자가 옥에 갇혀 버리면 뭐가 중단된다? 복음전파가 올 스톱이 되잖아요. 공장의 기술자가 몸이 아파서 출근을 못하면 공장 가동이 안 되잖아요. 외국에서 들여온 그 기계의 작동방법을 모르면 제품 생산이 안 되지요.
마찬가지로 ‘나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할 정도로 완벽한 사도중의 사도인 이 바울이 옥에 갇혀서 복음을 전파 못할 경우라면 주님 보시에게 다른 사람은 다 다친다고 해도 누구는 다치지 말아야 됩니까? 사도바울만큼은 손대지 말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그 방법이 아닙니다.
그게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라고 하니까 ‘하이고, 얼씨구나’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는데 내가 고난 받고 죽어야 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다쳐도 우리가 다쳐야지 주님이 다치면 안 됩니다’ 하니까 주님께서 베드로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저리 꺼져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합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러니까 사람의 일, 우리들의 일이 악마의 일입니다. 평소에 상상하는 모든 비전이 무슨 노선이다? 평소에 주님가신 노선과 다른 노선만 자꾸만 죽을 때까지 생산해 내는 거예요. 우리는 상상의 천재에요. 상상을 철학계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창조성이라고 합니다. 창조성을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지난 화요일 강의에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일하실 때 그냥 맹탕으로 일했는지, 아니면 뭔가를 받아서 일하셨습니까? 받았지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하늘에 구멍이 뚫려야 성령이 옵니다. 하늘에 구멍이 안 뚫리게 되면 이 아래는 성령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령이 없지요.
성령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성령이 없다. 사람들만 있으면 돼지.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4천 8백만 대한민국 사람들만 있으면 돼지’ 하면서 우리 말고 다른 누가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잖아요. 그런데 하늘에 구멍이 뚫리면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렸잖아요. 이제 묻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오고 난 뒤에 그 성령이 한 것이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누구를 만나게 한 겁니까?
악마를 만나게 했지요.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고만고만한 사람들만 모여서 마을구성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이것이 인간사회라는 것을 사회학자, 철학자, 모든 교육학자들까지 다 같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고난 뒤에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만난 것이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고 악마를 만났어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을 누가 쥐고 있었다? 악마가 쥐고 있었던 거예요. 세 가지 방법으로 쥐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돌이 떡 되게 해라.’ 쉬운 말로 하면 ‘돌이 돈 되게 하라.’ 두 번째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메시아다.’ 세 번째 ‘결국은 사람의 영광이 뭐냐, 눈에 보이는 세상 영광을 독차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목표를 두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동안 악마가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인간들을 확실하게 군기 잡아 놓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회사 취직해서 ‘나는 바르게 한다. 나는 정직하게 한다. 나는 올곧게 산다’ 백날 해도 아내가 임신만 해 보세요. ‘애가 발로 차나?’ ‘봐라. 찬다.’ 그 때부터, 애가 엄마 배를 차는 그 때부터 아빠는 더 이상 사표는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나 한 사람 올곧게 살기 위해서 사표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아기를 먹여 살리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그게 왜 그런 식으로 되는가? 히브리서 2장 16절에 보니까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여 악마의 종이 된 사람들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악마의 종에서 풀어낸다’는 그것을 ‘구원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복잡한 것 다 생략하고 ‘하나님!’ ‘왜?’ ‘저 죽습니다. 이제 천국 보내주세요.’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죽어서 좋은데 가는 그것만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 과정 속에서 ‘네가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고 예수님 덕분에 이미 구원받은 것을 알았으면 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구원 받았다’ 라고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좋게 좋게 조용 조용히 죽어서 천국가기를 원하지만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경로를 밟지 아니하면, 다시 말씀드려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러면 놀라게 되지요. 놀라는 것이 뭘까요? 우리는 만 날 쓸데없는 헛짓, 만 날 상상하는 것이 쓸데없는 것만 상상하면서 헛짓했다는 점과, 두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 날 헛짓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 공로로만 천국에 가더라는 사실.
평생 헛짓만 했는데 도착해 보니 어디다? 천국이다. 그게 누구공로입니까?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이 잡혀 왔을 때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묻습니다. ‘간음한 여인아! 분명히 죄 지었지?’ ‘예, 분명히 죄 지었습니다.’ ‘너를 정죄한 사람이 어디에 갔지?’ 뻔히 알면서 묻는 거예요.
그런데 여자가 하는 말이 ‘정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얼마나 신나요. 정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아가씨가 불도가 심한 집안에 시집을 갔다.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덤비듯이 ‘너 교회만 가게 되면 죽는다. 우리 집이 불도집안에다가 종가집인데 너는 이제 교회는 끝이다’라고 마구 달려들 때, 그 때 색씨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으면 그 새댁하고 주님하고 대화하는 거예요.
‘새댁아!’ ‘예’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어디 있지?’ 지금 온 집안이 뒤집혀서 시끄러운 판입니다. ‘네가 교회 가면 죽는다’고 집안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다 하는 판인데 주님이 그걸 알면서도 묻습니다. ‘너를 정죄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지?’ 새댁이 답변합니다. ‘아무도 없나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니 않는다.’
그게 바로 구원이잖아요. 불도가 심한 정도가 아니라 무당집에 시집을 가도 관계없어요. 안에 그리스도가 없고 그리스도의 심장이 없다면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뭘 듣습니까? 그 불도가 심한 집안의 음성 때문에 골치가 아픈 거예요. ‘어머니, 석 달 만에 한번 가지요. 그것도 안 되면 일 년에 한번 그것도 안 되면 3년에 한번 나갈게요.’
자꾸 사람들과 정치적인 타협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헛짓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아가야, 너 교회 갈거야, 말거야?’ 그 때는 이렇게 하세요. ‘어머니, 제가 제 안에 있는 주님께 물어보겠습니다.’ ‘주님! 제가 갈까요? 정죄함이 없다고요? 잘 알겠습니다.’ ‘어머니, 어떤 사람도 나보고 죄 있다고 할 사람이 없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제 맘대로 하겠습니다. 가든지 말든지 그것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어머니가 하는 말이 ‘네가 미쳤구나.’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저는 즐겁습니다. 누가 나를 정죄하리오, 그런 소리를 어머니도 들어봐야 됩니다. 나만 들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욕을 얻어먹었잖아요. 이단소리 들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한테도 예수님이 이단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 가신 길이 어떤 길이냐, 바로 우리가 가는 길이에요. 예수님 가신 길에 하나님 아버지가 도와주시고 아버지가 인정했다면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믿음은 끄떡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가 예수님 따라가면서 같이 가야 할 길이 뭐냐하면 주위에서 길길이 우리를 비난하고 정죄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오케스트라가 있어줘야 우리는 뭐가 실감나는가 하면 ‘아하, 그래서 내 안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계셔서 저 모든 정죄함을 그리스도께서 정죄함이 없는 것으로 바꾸어놓는 그 도구, 기계가 바로 나 자신이군요’라고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