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4a 부산강의 : [시편]53(37:1)-창조자의 리듬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37편 하겠습니다.
1. {[A Psalm] of David.} Do not fret because of evildoers, Be not envious toward wrongdoers.
2. For they will wither quickly like the grass, And fade like the green herb.
3. Trust in the LORD, and do good; Dwell in the land and cultivate faithfulness.
4. Delight yourself in the LORD; And He will give you the desires of your heart.
5. Commit your way to the LORD, Trust also in Him, and He will do it.
6. And He will bring forth your righteousness as the light, And your judgment as the noonday.
7. Rest in the LORD and wait patiently for Him; Do not fret because of him who prospers in his way, Because of the man who carries out wicked schemes.
8. Cease from anger, and forsake wrath; Do not fret, [it leads] only to evildoing.
9. For evildoers will be cut off, But those who wait for the LORD, they will inherit the land.
10. Yet a little while and the wicked man will be no more; And you will look carefully for his place, and he will not be [there.]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행악자, 악이죠. 악에 대해서 시기하지 말라. 이것은 왜 그러냐 하면 여기 형벌이 준비돼 있어요.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받는다. 물론 율법대로 살면 복을 받지만 살지 않았을 경우에는 저주받는다는 말은 모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이유가 네가 잘될 것이라는 걸 생각나게 하는 게 아니고 네가 법을 어겼을 경우에는 저주받는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그래서 형벌은 뭐냐 하면 기억나게 하는 게 형벌입니다. 형벌은 때리는 거예요. 때림으로서 내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나게 하고, 형벌이니까 맞는 거죠. 얻어맞는 것. 고통을 얻어맞는 것을 또 다시 기억나게 만들어요. 맞았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만들어요. 그래서 모세 율법에 무엇이 따르느냐 하면 여기에 플러스 되느냐 하면 제사법이 따르게 돼 있어요. 십계명 같은 제사법이다.
제사법은 뭐냐 하면 희생에 관한 겁니다. 희생을 기억나게 하는 거예요. 우리 삶에다 희생을 집어넣고 그 희생을 새록새록 모든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서 기억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우리를 인간 자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악인으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되는 겁니다. 인간을 악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희생도 여기 같이 결합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왜 악인인가? 인간에게 선인이 있고 악인이 있는 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악인이 되는 이유가 뭐냐? 사람들은 마귀의 정기라 하지요. 귀신이죠, 그냥. 악마에 사로잡혀서, 이것은 히브리서 2장 15절에 나오고, 디모데후서 2장 26절에도 사로잡힌다고 나오는데 인간은 이미 사탄에 사로잡혀있어요. 마태복음 12장에도 나와 있고요.
인간은 악마에, 귀신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구분해볼게요. 살고 싶어 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 이게 정반대에요. 애들은 살고 싶어 합니까, 살아갑니까? 그냥 까불고 웃고 배고프면 살아가지요. 요양병원의 노인네들은 살고자 합니까, 살아갑니까? 그냥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정반대에요. 살고 싶은 것은 죽음의 귀신을 더 가까이 온 몸으로 느낀다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은 죽음의 귀신을 사태파악이 안 된, 못 느끼는 거죠. 대표적인 것이 이태원이죠. 이태원 핼러윈 파티. 놀러가서 죽은 거예요. 놀다 죽고 싶어서 죽은 거예요. 그냥 자기 집에서 노는 게 아니고 같이 뭉쳐서 이렇게 놀다 죽을래, 하다가 죽은 거예요. 이들이. 그들은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노인네들은 이미 귀신에 사로잡혀있지 죽음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냥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게 당연한 걸로 여깁니다. 10대, 20대 살아 있는 걸 당연하게 여겼어요. 철이 없는 거죠.
다시 이야기해서 인간이 철이 없는 것은 바로 자신이 살던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는 고통, 그런데 그 고통에 대해서 무엇이 누락이 됐느냐 하면, 자기가 만든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키는 하나님 자신의 고통을 인간은 망각해버린 겁니다. 그러며 하나님의 고통이 인간 속에 들어오는 방법은 뭐냐 하면 약속을 통해서 들어오게 돼 있어요.
여자의 후손(메시아)과 뱀의 후손의 만남에서 곱게 만납니까, 고통이 있습니까? 고통이 있지요. 둘 다 인간으로 나타나요. 여자의 후손도 인간으로, 그러니까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을 집어넣습니다. 사람의 요소를 집어넣으면 여자라는 후손으로 오시는 거예요, 메시아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요. 사람의 요소를 집어넣는 거예요. 왜냐하면 악마가 인간 요소 속에 이미 들어있기 때문에 인간 대 인간의 만남입니다.
정리하면, 악은 뭐냐? 악은 인간과 상대하는 것. 오늘 시편 37편 7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라고 돼 있지요. 여기 3절에 봐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라고 돼 있지요. 지금 시편은 뭐를 권고하고 있느냐 하면 사람과 사귀란 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사귀란 말입니까? 하나님과 사귀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은 사람과 사귀지 말라는. 사람 중에서 의인과 사귀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이 들지요.
시편 37편에 사람 치고 의인은 없어요. 사람과 사귄다는 것은 바로 같은 인간이 같은 악인이 악인과 사귀는 거예요. 교회 왜 옵니까? 사람과 사귀려고 옵니까? 아니지요. 사람과 상대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교회는 병원입니다. 내가 정신적으로 뭐가 문제 있는지 아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를 병원으로 간주하지 않고 제가 보기에는 교회를 화장실로 봐요. 싸는 데. 오줌 싸고, 변 싸고, 그리고 술 먹고 토하고. 자기의 분노를 배설하는 곳으로 여기고 있어요, 사람들이 교회를. 자기의 분노를 배설하는 거예요.
누구 붙들어서 싸움질해서 자기 분노 터뜨리는 곳이 교회입니까?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악과 악의 만남에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분통과 원통과 절통이 발생이 돼요. 저 인간 죽여야 되는데 내가 성질 좋아서 참는다. 이걸 갖고 있다가 교회 와서 애꿎은 주님 붙들고 대듭니다. 대들고 같은 교인들 붙들고 월화수목금토, 6일 동안 친구한테 당했고 가족한테 당했고 손자한테 당했고 남편/아내한테 당한 걸 교인, 집사 붙들고 드디어 분풀이를 해댑니다.
옷 꼬라지하고는, 머린 어느 미장원에서 했는지 몰라, 이런 식으로 그냥 교회가 사람 멱살 쥐고 내부적으로 싸움하는 곳이 돼버렸어요. 자기의 분노를 배설하는 곳이 되고 말았단 말이죠. 물론 그래줘야 복음이라는 의사가 있어서 말씀으로 진단을 내리죠. “아주 썩었어. 지독하게 썩었구나. 지난 한 주 동안 뭐했어요? 왜 이리 썩었어요?” 그런 진단을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받아야 돼요. 왜? 병원이니까요. 참고로 병원에도 화장실 있습니다. 진단받고 토하고.
사람들이 놓치는 것은 이미 악마에 귀신들려서 자기 아픔, 자기 고통, 자기 힘들게 살아가는 것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것, 하나님이 자기 고통을 자기 창조한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데서 오는 고통을 담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잊어버리죠. 인간들은 인간과 상대해서 자기 어떤 것과 좋게 하느냐 하면, “내가 벌 받을 이유 없다. 내가 이 땅에 고생할 이유는 없어.”
이것 과시하는데 급급하다면 아벨 같은 경우에 희생자잖아요. 창세기 4장에, 아벨의 특징이 뭐냐? 하나님이 아벨은 자기 사람으로 거둬들였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벨의 운명은 홀로 자기가 만들어가는 운명이 아니고 누가 지배하는 운명이에요? 하나님이 지배하는 운명이고, 하나님이 지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을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누굴 포섭했다고 보시면 돼요. 아벨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아픔을 그 인생에 그대로 담는 겁니다.
담아버리면 아벨은 자기 인생을 자기 원대로 소원대로 갈 수 없어요. 주님의 뜻대로 이끌려가는 거예요. 그 함께하심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걸 믿음이라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음은 혼자서 믿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나 성립되는 관계가 믿음이에요. 아벨은 믿었지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함께하지요.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과 함께합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듣지 않음으로써 나는 너와 함께 있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가인을 통해서 뭘 보여주느냐?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을 때 그 가인의 운명을 보라는 거예요. 그 하는 짓거리를 보라. 무슨 짓을 하는지. 그래서 여기서 하나 정리할 수 있어요. 이것 하나 정리만 되도 성경 전체를 꿰뚫을 수 있습니다. 악은 드러나고 의는 숨어 있고. 세상에 눈에 띠는 인간들은 다 악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악은 드러나요. 그래서 사람과 사귄다는 것은 악한 인간과 사귄다는 거예요. 사람을 의식한다는 것은 악한 인간을 의식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과 사귄다는 것과 시편 37편에서 반대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다. 또는 하나님 앞에 있다. 하나님과 사귄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에 3절 봤지요.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 그리고 7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그다음에 9절에,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 그리고 23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24절에는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계속해서 시편 37편은 여호와와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는 거예요. 여호와와 함께한다는 말은 뭐냐? 사람과 사귈 생각이 없는 것, 사람과 상대할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과 상대하게 되면 누가 잘났나, 시합할 거잖아요.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37편 1절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그냥 내비 둬, 이런 뜻이거든요. 그냥 내비 두라는 거예요. 어차피 혼자 살겠다는 데.
혼자 살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거기에 귀신과 함께, 여긴 귀신이 아니고 악이지만, 악과 함께 있는 거예요. 악과 함께 있는 상태를 그걸 부러워한다는 것은 그 마음가짐이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랑하기를 나는 벤츠 탄다. 그 벤츠에 무거운 골프장비 있다. 이걸 만약이 어떤 사람이 자랑한다면 내비 둬요. 벤츠 타고 골프 하든 말든 그냥 내비 둬요.
이걸 자랑한다는 것은 그걸 최우선으로 자랑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무엇이 없는 거예요? 나는 이것보다 더 귀한 건, 인생 성공한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걸 벤츠의 증인, 골프의 증인. 왜 이걸 자랑하느냐 하면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하려고 사람을 의식하고.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희생이 체화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체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몸에 배기지 않았다.
옛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한 게 있어요. 경건훈련 같은 것을 지금도 수도원이나 기도원에서 하고 있고요. 경건훈련은 하나님의 계명을 체화시키는 훈련이에요. 이 원리는 뭐냐 하면 남자가 군에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그 원리와 똑같아요. 육신의 훈련을 하게 되면 인간이 말씀에 스며들지 않겠느냐 기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원이나 수련회하게 되면 어떤 마음에 남는 구절이 자기에게 남는다고요. 보통 몇 개냐 하면 인간은 기억력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다섯 개에서 여섯 개 정도입니다. 대여섯 개 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을 하지 않겠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수도원들, 쿰란공동체 전부 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버틴 거예요.
나는 ~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겠습니다, 라는 말은 인간은 계명대로 산다고 표현한 게 아니고 다시는 이런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는 부정적인 요소로서 이걸 받아들이게 돼 있어요, 인간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 사람은 노리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그 공동체와 사회가 주는 이점, 그리고 혜택을 나도 좀 같이 누릴 수 있겠습니까, 라는 기대감을 갖고 나는 앞으로 이런 짓들은 하지 않겠습니다. 마약하지 않겠습니다. 나쁜 동영상 보지 않겠습니다. 일종에 반성문 쓰듯이 스스로 갖고 있어요.
이게 체화입니까? 말씀이 그 사람 속에 합치된 거예요? 합치된 게 아니에요. 군에 갔다 오면 인간 되는데 병장 달면 다 날아가죠. 제대만 앞두면 다 날아가요.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37편에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체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계명을 내가 지켜서, 그걸 내가 훈련해서 체화시키면 굳이 메시아가 이 땅에 올 이유가 없습니다. 율법 자체도 잔소리고요 하늘에서 돌 판으로 준 것도 잔소리지만 직접 사람이 되셔서 해도 잔소리 밖에 들리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인간은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데 이런 계명이나 율법, 또 예수님의 산상설교 같은 잔소리 들어버리면 인간이 살고 싶어 하는 것이 바뀝니까? “나 안 살고 싶어. 나는 죽고 싶어.” 이래 바뀌겠어요? 나는 더 추가적인 새로운 하늘나라 정보, 지혜를 더 획득해서 내가 살고 싶어 하는데 보다 더 유리하도록 조치하겠다는 그런 각오와 결심뿐이죠.
그걸 제가 주일 설교에서 오기라고 한 거예요. 그냥 오기만 더 늘어날 뿐이에요. 자기 마음속으로 오기 안 되니까 아예 복장부터 바꿔서 오기부리는 것, 이게 바로 수녀, 신부, 그리고 땡중. 머리 홀라당 깎아버려요. 남자는 머리 깎을 수 있어요. 심지어 여자가 얼마나 오기가 심했으면 여승 된다고 머릴 다 깎습니까? 여자의 머리카락은 아름다움의 전분데 그 머릴 깎는다는 것은 얼마나 독합니까? 그런 식으로 뭐하고 싶어요? 그런 식으로 깨끗하고 살고 싶은 거예요. 왜? 깨끗하게 살면 죽음의 공포가 사라질 줄 알고. 뒤에서 마귀는 박수를 치지요. 걸려들었다고. 아주 철저하게 걸려들었다고.
악은 인간을 놔주질 않습니다. 절대로 한 번 문 미끼를 악마가 놔주질 않아요.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은. 살고 싶다고 해서 사는 게 아니에요. 살고 싶다는 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나 예수 믿고 천국 갈래.”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나 살고 싶어. 보세요, 앞에 누가 있습니까? ‘나’가 있잖아요. 성경에서 이 나를 부인하라 했거든요. 나를 비워놔야 돼요. 나를 빈 칸으로 비워놔야 돼요.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은 아벨처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거둬들인 자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내 소원 살고 싶다는 그 소원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찾아오시면 그 소원을 삭제시켜버리지요. 살고 싶다가 하나님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살고 싶다가 돼버리면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하나님의 그 조치가 모독 받게 돼요.
“하나님, 행정처리 잘못됐습니다. 너무 심한 일이 아닙니까?” 이런 어떤 악마적인 하나님에 대한 악마의 반발심을 그대로 지닌 채 어딜 간다고요? 천국 간다고요? 천국에서 데모할 일입니까? 천국에서 시위할 일입니까? 심심해서 못 살겠다. 이게 무슨 천국이냐. 손흥민이 살려내라. 영국 프리미어리그 살려내라. 롯데 야구팀 살려내라. 부산 갈매기~ 하면서 거기서 야구 즐기고 싶은 거예요.
아마 진짜 이런 살고 싶다는 심정으로 천국을 생각한다면 천국 가서도, “짜장면 시키신 분?” 분명히 나올 거예요. “탕수육, 나 부먹 할게. 찍먹 말고 부먹입니다.” 이것 주장할 거예요. 근본적으로 인간이 달라지지 않는 한 천국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37편에 나오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제가 1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이런 인간으로 달라져야 된다는 거예요. 이 계명 마음속에 새긴다고 우리가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이것 볼 때는 앞으로 투기 안 해야지, 불평하지 말아야지 하지요. 그런데 옆에 있는 집에서 살살 약을 올리면, 이번에 우리 애 검사 됐다. 네 아이는 지금 어디서 뭐하며 어떻게 지내노? 자기 방에 들어가서 음악 듣고 벌써 폐인 된 지 삼 년이고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있고.
자폐증으로 있는데 그때 불현 듯 시편 37편이 기억나서 불평하지 말고 투기하지 말지어다, 이것이 기억난다면 성경책 집어던져버려요. “나한테 안 맞아. 성경 너무 안 맞아요.” 성경책 집어던지는 대신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이 집에 개 키우는 거예요. 성질 풀 때 만만하거든요. 자기의 온화함과 단아함과 자비가 넘침을 만만한 개를 다루는 거죠.
그래서 주께서는 개 키우지 말고 행악자를 키우라는 거예요. 내 성질만 돋우는 행악자를 키워보지요. 그래서 부부가 되신 거예요. 축하드립니다. 왜? 하는 족족 내 성질만 돋우는 인간들과 희로애락喜怒哀樂, 희가 없어요. 락만 있지요. 살아봐야 혼자 살고 싶은 본성이, 이것이 나한테 떠나지 않았다는 걸 발견합니다. 일찍 그걸 깨달은 사람은 일찍 각 방 쓰고 육십 넘어도 같이 있으면, 가난해서 원룸에 있으면 할 수 없지만.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병들었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이라 하니까 너무 식상하니까 다른 말로 바꿔서 환자를 부른 거예요. 죄인보다 더 독한 말이 환자에요. 환자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고치지 못하는 환자.
그런데 교회마다 고칠 수 있다면 나오라고 하니까 이게 말이 안 되지요. 못 고치는 데. 못 고친다는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교회가 있어야 돼요. 고치지 못합니다.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럼 내가 환자라는 것을 아는 것만 해도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죠. 고칠 필요 없지요. 그것을 계속 유지해야 되니까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37편 내용이 시작됩니다. 시작을 하나로 묶는 원리를 이야기할게요. 악은 모든 것에 대해서 움직이지 않는 것, 이게 악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우리에게 일어났던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걸 이야기했는데 성경은 악을 이야기하면서 악의 뿌리까지 이야기해요. 그래서 시편 37편에 국한되는 게 아니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운동회 때 만국기 펄럭이는 것처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줄 달아놓고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전부 다 거기의 내용들이 한 줄에 담기게 만들어요.
악이라 하는 것은 지금 그 시대의 악이 아니라 악의 시작부터 끝까지 고드름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그 악이 우리 시대에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악의 계통 발생이 악의 개체 발생 속에 반복된다. phylogeny계통 발생이라 하고, 개체 발생은 ontogeny. 이게 뭐냐 하면 개인이기 때문에 전체를 모르잖아요. 우리는 내 인생이 구십 밖에 안 되니까 전체를 모르잖아요. 성경은 전체를 이야기하는데 계통을 이야기해요. 뱀의 후손부터 해서 요한계시록까지.
악이 숨겨진 계통 발생이 인간의 개인을 통해서 개별자를 통해서 그때그때 그 시대에 반복해서 드러나는 거예요. 반복해서 드러나는데 악의 특징이 뭐냐? 모든 것에 대해서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요지부동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까운 친구나 식구들한테 복음 전하면 요지부동인 사람 있지요. 변함이 없어. 뭐가 변함이 없느냐 하면 본인의 이익을 위하여 변함이 없어. 요지부동이에요. 기도를 하던 교회 다니던 뭘 하든 항상 끝은 뭡니까?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는 나를 더욱더 움직이지 않게 하는 기도, 그러한 선교와 헌신과 봉사에요.
악의 특징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은 이것을 성경에서는 계통 발생적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둘로 나눴어요. 인간의 땅의 세계와 따로 분리해서, 땅이란 이스라엘 땅을 말합니다. 땅에 대해서 해볼게요. 오늘 본문 9절 보겠습니다.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뭘 차지한다? ‘땅’을 차지한다고 돼 있지요. 29절에 의인은 뭘 차지함이요?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34절에 보면,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뭘 차지한다? ‘땅’을 차지한다고 돼 있어요.
그러면 시편 74편 13에서 14절 누가 읽어보세요.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됐습니다.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땅에는 하나님의 창조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 연발되는 겁니다. 계속 이어져요. 창조를 하실 때 뭘 뽑아내는가? 창조의 원리를 창조에 담아놨어요. 그것이 안식일입니다.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창조가 어떤 형식을 갖고 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자와 리듬이에요. 비트와 리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곧 날이라 했지요. 창세기 1장에. 박자라 하는 것은 시간을 딱딱 끊는 거예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한 날, 한 날. 거기서 한 날과 다른 날을 혼동하지 않아요. 딴 날로 간주해요. 염려하지 말라. 오늘 염려는 그 날에 족하니라.
하나님의 때를 날부터 시작해서 영원으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하루를 해서 영원으로 이어지게 하는 거예요. 날이라는 것이 때에서 확장이 되어서 영원한 때가 돼버려요. 출발은 뭐냐 하면 처음에 시간의 끊어짐을 마디를 비트, 박자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예요. 창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괜히 끊어진 게 아니에요. 무슨 날을 목표로 했느냐? 창세기 2장에 보면 특별한 한 날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됐는데 그 날은 보통 날이 아니에요. 특별한 날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안식의 날입니다. 에스겔에 보면 안식의 날이 영원한 계약으로 돼 있어요.
음악에서 ³/₄박자, ²/₄박자, ⁴/₄박자 악보에 이런 것 있잖아요. 쿵짝짝 쿵짝짝,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쿵짝짝 ³/₄박자에요. 왈츠에 이런 것 있지요. 이거는 박자를 정해요. 그런데 음이 <반달>이란 노래에 ‘쿵짝짝 쿵짝짝’은 있는데 내용은 없어요. 올라가고 내려감은 있어요. 그게 리듬이에요.
나를 뭐로 채우느냐? 리듬으로 채우는 겁니다. 그 리듬도 하나님의 창조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19편에 보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날과 밤은 이미 박자에요. 하지만 그들이 날이란 박자가 뭘 전하느냐? 리듬을 전한다고요. 창조의 리듬을 전달해요. 전달, 전달. 그 창조의 리듬이 뭐냐? 히브리서 4장에 보면 언젠가는 무슨 때가 온다? 안식의 때가 온다. 예수님은 이 안식의 때가 이미 왔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것이 어디서 이루나? 땅 위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여러 가지 땅이 있는데 그중에서 약속의 땅에서 가장 진리에 근접하고 구체화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안식이 뭔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명기 12장에 보면 안식은 뭐냐? 하나님과 함께 있음,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있음.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있음, 하나님이 아니고 주와, 주가 이름이거든요. 주와 함께 있음. 그 주는 마지막 때에 안식의 때에 드디어 주님이 독생자 예수로써 주로써 등장하면 모든 것은 게임오버, 끝났어요. 모든 게임은 끝난 거예요.
인간은 뭐냐? 리듬의 노리개. 인간은 타악기뿐만 아니고 관현악기도 될 수 있고 바이올린도 될 수 있고 피아노도 될 수 있어요. 인간을 통해서 소리가 나오고 언약이 나오고 주님의 창조의 리듬이 인간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날과 밤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러하듯이. 시편 103편에 보면 피조물들은 성신과 함께 있기 때문에 주의 영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있어요.
그러면 그 목적이 있을 거예요. 목적은 응축인데 응축은 뭐냐? 성령 받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생애의 모든 일이 모든 세상을 보이지 않게 있는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가 구체적으로 하나의 소리로 응축이 되는 겁니다. 세례요한도 그중에 하나고요.
리듬이라 하는 것은 파도 타듯이 타야 되는 거예요. 파도가 있으면 보드 타지요. 하와이 해변에. 파도를 지가 만듭니까? 아니지요. 자기가 만들면 안 돼요. 거기에 타기만 하면 돼요. 올라갈 때 올라가주고 내려갈 때 내려가 주면 되고. 때가 있으매 사랑할 때가 있으며 그다음에 미워할 때 있고,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고. 억지 부리지 마라. 아플 때가 있으면 나을 때도 있고, 태어났으면 죽을 때도 있고. 죽음에 대해서 겁내지 마라. 그것도 하나의 삶의 리듬이다. 창조의 리듬이에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인간도 주의 리듬을 탈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게 구약적 안목이에요. 구약적 안목에서는 우리도 그 정도는 태어나고 헤어질 때 헤어지고 좋아할 땐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구약적 안목에서는 이게 한계가 있어요. 육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온전한 리듬 타기는 신약에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셔야 가능해요.
그 차이점이 뭐냐? 구약적의 땅은 평지에요. 편평한 평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했잖아요. 광야에 산악도 있지만 편평했거든요. 홍해를 보세요. 홍해를 건너왔을 때에 아까 이야기한 요지부동, 어떤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바다가 가로막았습니다. 바다에는 뭐가 살고 있는가? 악마가 요지부동 살고 있어요. 악은 변하지 않아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땅은 창조로 인하여 계속 변화가 모색되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그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계속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나 악마에 묶인 사람은 악에서 못 빠져나온 사람은 어떤 복음의 말을 해도 요지부동, 변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합리적이 아니고 이치가 어긋나서가 아니라 바윗돌 같은 있어요. 뭐냐 하면 귀신 들린 내가 내 안에 변하지 않는 악마가 들어있으니까 악마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람도 변하는 게 뭔지를 몰라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데, 아프데.
제가 어제 낮 설교에서 느부갓네살 꿈 이야기했잖아요. 느부갓네살이 꿈을 꿨는데 꿈 내용은 모르지요. 그래서 다니엘 통해서 꿈의 내용을 보니까 나는 신상이었다. 그것도 금 신상이었다고 드러나요. 나라는 인간이 사물체다. 요즘으로 번역하면 요샌 신상은 안 섬기니까 나는 트로피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하나의 트로피가 되는 거예요.
트로피는 1등할 때 상 탈 때 영광스럽게 될 때 남한테 자랑거리가 될 때 트로피 받잖아요. 나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트로피였어요. 내가 나를 우상화, 우상의 특징이 사물체거든요. 나는 나를 변하지 않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트로피가 되고 싶어라, 이거에요. 자식들 교육시킬 때도, 너 나중에 상 못 탄다, 이게 뭐냐 하면 그 자식을 하나의 딱딱한 사물체로 만드는 거예요.
아빠가 말합니다. “너는 영원한 나의 트로피가 돼야 된다. 우리 가문을 위해서. 내가 그것 때문에 고생고생하면서 너를 키웠다.” 엄마아빠도 자식에게 함부로 말을 하지요. 내가 못다 한 이 한을 네가 이뤄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삼수했는데 서울대학 떨어졌다. 너는 서울대학 가야 돼. 우리 집안에서 의사 하나는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 트로피 이름이 뭐냐? 닥터, 라는 이름이 붙어요.
여러분들 트로피한테 맞아봤습니까? 트로피란 딱딱한 사물체에 맞아봐야 머리에 구멍 나봐야 아아, 모두가 악인이고 영원히 고정되지 않음에서 못 빠져나오는 나만의 고정되지 않음을 추구하는 그런 마음상태로 교회 나오고 세상 살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돼요. 나는 고정되지 않을래, 이건 뭐냐 하면 자기가 최종적 사물체란 뜻이에요. 자기가 최종적이에요, 가인처럼.
그런데 아벨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해요. 주님께서 주물럭거려요. 마음대로 다뤄요. 아픈 것도 내 마음대로 못 아프고 건강한 것도 내 마음대로 건강 못해요. 아내나 남편 만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해요. 육십 대 여자분들 그런 이야기하지요. “내가 이십 대에 너무 예뻐서 선을 백 번도 넘게 봤는데 꼴랑 만난 게 네 아버지다. 그때 내가 얼마나 인기 좋았는데 내가 고르다 고른 게 네 아버지라 이 모양 이 꼴 되었다.” 아주 복음적이죠.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는.
편평한 평지에서 구약은 한계가 있어요. 모든 것이 수평적이에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특히 요한복음에 그런 게 많은데 주님께서 땅을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이 땅에서 의인은 뭐와 살 수 없다? 악인과 함께 살 수 없다. 이게 시편 37편의 주제에요. 핵심입니다. 의인은 악인과 함께 살 수 없다. 왜냐하면 땅을 차지하는 것은 의인이고, 시편 37편 10절, 이건 다 같이 읽어봐야 돼요.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수평적인 편평한 평지에서 돌아보니까 의인만 남았고 악인은 없게 하시는 거예요. 조건이 있어요. 내가 의인과 함께 살 수 없다는 뭐냐 하면 의인의 특징은 하나님과 함께 산다가 돼요. 악인이 내게서 떨어진 걸 속시원해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 돼야 되지, 어이구 지긋지긋한 저 인간 속이 시원하네, 이건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 비슷한 이야기가 잠언에 보면 나옵니다. 잠언 24장 1절, 제가 할게요.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찌어다” 잠언 24장 20절,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그런데 17절을 보세요. 17절이 중요해요. 잠언서 24장 17절,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이 말이 하나님도 귀찮고 악인도 귀찮고 나는 나 혼자 있고 싶다, 라는 그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딱 꼬집는 거예요. “나는 저 인간과 살기도 싫어. 너도 싫어. 만사 귀찮아. 나 혼자 있고 싶어.” 이거는 마귀가 노리는 거예요. 기도원에 혼자 기도하든지 지리산 자연인 되어 살든지 하여튼 자기밖에 몰라요.
비행기를 타고 같이 갈 때 제일 힘든 게 뭐냐? 떠드는 사람이 근처에 있을 때, “오 신이시여, 저 인간과 제주도 갈 때까지 계속 타야 됩니까?” 촌사람 오랜만에 비행기 탔다고 친구와 막 떠드는 거예요. 물론 스튜어디스에게 이야기하면 돼요. 조용히 해달라고. 지 집 안방 아니라고. 그런데 비행기 처음 타는 사람은 그 감격을 잊을 수 없어서 막 고함질러요. 아이고, 저 인간과……, 비행기는 내릴 수나 있지요. 부부는? 부부는 둘 중에 하나 죽어야 되는 거예요. 내릴 수도 없고요.
구약적인 한계는 아직까지 안식의 때가 다 되지 않았어요. 주님의 창조의 리듬이 아직 계속 되고 있는 중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뭔가 한 가지 방향을 향하여 안식의 완성됨을 향하여 계속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같은 인간과 인간을 비교시켜요. 의인은 이래야 되고, 의인은 여호와 말씀의 도를 지키는 사람이고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같은 인간과 인간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안식의 때가 끝나고 이스라엘 역사가 멸망하고 율법과 시편이나 잠언이 끝나고 보면 인간 같은 인간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 그 말은 뭐냐? 모든 사람이 의인이고자 했던 그들이 실은 악인이었다는 것, 악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예수님 오셔야 알아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인간은 영원한 고정한 귀신이 들어있어서 귀신이 자기 부정이 안 돼요.
귀신의 특징은 뭐냐? 악의 특징은 어떤 것에서라도 요지부동, 심지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게 달라지지 않는 것, 바뀌지 않는 것 그게 악마입니다. 그 악마가 인간 속에 박혀있으니까 인간이 모든 것에도 움직이지 않지요. 자, 그러면 이 땅이……, 3분 지났어요. 10분 쉽시다.
20221114b 부산강의 : [시편]53(37:1)-창조자의 리듬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합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땅이 어떻게 오는가? 인간들은 자기 신체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신경체제가 있고, 거기서 인간들의 방법은 뭐냐? 내 육을 죽이고 영이 되려고 해요. 모든 교회에서 시도하는 것 아닙니까. 육을 죽이고 내 영혼을 맑게 만들고 순결하게 한다. 이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다 했던 거거든요.
신경체제를 통해서 자기 정신체제를 결합시키려하는 거예요. 정신체제는 관념이에요. 관념체제. 하나님의 계명, 말씀, 율법을 관념이라 여기고 나의 신경체제, 신체가 갖고 있는 신경체제를 여기와 연동해서 같이 움직일 수 있는 방안이 없는가를 그들은 훈련하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들도 다 경험이 있을걸요.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막 때리고 해서 신경체제, 그냥하면 은혜가 안 되는데 꿇어앉아하면 신경조직 꿇어지잖아요. 손바닥에 신경이 몰려있거든요. 박수치고, 해병대 박수 이래서 벌거니 열이 났을 때는 신경체제와 자기의 정신체제와 일치된 것처럼 느낌을 주는 거예요. 불 받았다, 오순절 불이다 이러잖아요.
이게 문제점이 뭐냐 하면 전부 다 개별적이라는 거예요. 개별적이라도 그들은 받아들이는 이유가, 그들은 요지부동 어떤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것 악마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뭐냐? 개인구원입니다. 나만 천당 가면 끝나는 거죠. 그래서 도를 아십니까, 하는 것처럼 구원파가 와서 꼬시는 거예요. 구원 받았습니까? 왜 그게 먹히느냐 하면 우리가 모든 인간이 악마에 속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개인구원이거든요. 나만 천당 가면 끝났지, 이 의식이에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구원이 개인구원이 아니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무에서 열린 열매, 이 구원이에요. 나무가 오고 그 나무가 왔음에 비로소 열리는 열매. 요한복음 15장 1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내 가지니 열매가 없을 경우는 잘린다. 나무로 오는 거예요. 나무가 있고 숱한 열매는 그 나무에 소속된 열매여야 내가 붙지 아니하면 열매가 없다는 그 원리에 의해서 오는 거예요. 개인구원 아닙니다. 개인구원이 굳이 있다면 예수님만이 개인구원 받아요. 나머지 개인구원 없습니다. 소속구원이죠.
우리가 의인 될 수 없어요. 의인에 소속되어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의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거죠. 고린도후서 5장 21절.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된 거예요. 예수님을 의인이라고 인정하는 그 관계가, 나무와 열매 관계 안에서 우리가 의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알지만 다시 정리합시다.
죄라는 것은 죄 지어서 죄인이 아니에요. 맨날 네 죄를 고하라, 고하라 하는데 십오 년 전에 부흥회할 때 죄 다 고했거든요. 그런데 또 죄 고하라 하니까 찌꺼기 또 끄집어내야 돼. 죄는 죄를 지어서 아니라 죄에 이미 종속돼 있는 상태에요. 죄라는 나무에 우리는 이미 열매가 죄의 열매가 되는 거예요. 그걸 로마서 6장에서 죄의 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죄의 종이 되었다가 우리는 사적으로 의인 되는 게 아니고 의의 종이 되는 거죠.
하여튼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구원관은 아예 성경에 없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건 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열심히 자기 몸을 때려서 자기가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하겠다는 신경체제와 정신체제의 이러한 결합은 성사될 수 없습니다. 있을 수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 방법은 뭐냐? 땅은 어떻게 되느냐? 이런 개별적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구약 때 이스라엘이 갔던 그 이야기, 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은 메시아의 구원을 원한 게 아니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원했던 겁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의 구원보다 우리 교회가 구원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왜? 우리는 마음이 하나니까. 그게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우기는데 항상 마음에는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을 본인이 원치 않아요. 천국에서 주님이 짜장면 시켜서 얻어먹는 짜장면은 싫어요. 내가 짜장면 시켜야 돼. 내가 시켜서 시킨 나로 인하여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그 짜장면을 원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시켜서 얻어먹는 것, 이거는 자존심 상해. 내가 그것밖에 안 됩니까, 그렇게 나온다면 그건 뭐 여전히 개인구원에 빠진 사람이에요. 본인이 나무가 되고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포기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만이 구원이란 말은 뭐냐? 네 자신을 포기하라는 뜻이에요. 어제 낮 설교에서는 네 자신을 포기하라는 말 하지 않고 우리의 살아온 인생이 뭐가 된다 했어요? 무효화된다는 거예요. delete 삭제당하니까 무효가 되는 거예요.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니까. 우리가 어디서 뭘 하는지 기억치 않으니까 삭제된 거예요. 우리의 신체도 안개가 되어 없어져버렸지요. 아담에 속한 신체가 없어져도 괜찮아요. 겉은 후패해서 없어지지만 속은 날로 새로운 주님의 나무의 열매로서 새로운 신체를 부여받게 됩니다.
옛날에 그때 초등학교 없었고 국민학교 때 학급 올라가면 나라에서 새 필통과 새 책받침을 내주잖아요. 새 책 내주고. 그때 사실은 돈 주고 샀습니다. 굉장히 기쁘지요. 군에 가도 새로운 군복이 나와요. 철 따라. 물론 제가 군대 생활할 때는 그런 혜택 없었어요. 인사계가 사병들 것 다 팔아먹고 그저 몇 개 떨어진 것만 맞지도 않는 것……. 그 인사계 참.
주께서 방법은 뭐냐? 평지를 수직으로 세워버려요. 수직으로 세우면 중력이 작용하겠지요. 밑에 줄줄 다 떨어져버려요. 편평한 땅이 아니라 수직적 땅이 되는 거예요. 수직적 땅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생애로 보여줍니다. 그게 요한복음에 가득 들어있어요. 이번에 수련회 가야산에서 하는데 요한복음 합니다.
요한복음 3장 봅시다. 3장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의도를 가지고 내려왔어야 된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안 내려오고 하늘에 계시면 안 돼요. 내려와야 드리워진 천, 올라간 천이 새로운 땅, 수직적으로 걸쳐있던 땅이 새롭게 마련되는 겁니다. 왔다가 올라가야 돼요. 그냥 내려왔다가 들려야 돼요. 그냥 하늘에서 낚시하면 안 됩니다.
내려왔다 올라감으로써 그 내려오는 과정 속에서 시편 37편에 있는 땅 개념, 신명기에 나오는 약속의 땅 개념, 그리고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 개념 이것이 예수님이 홀로 그 말씀을 친히 모든 것을 새롭게 완성시킬 임무를 가지고 이 땅에 내려왔다 올라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생애가 있음으로써 이스라엘이 했던 일,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무효가 되는 겁니다. 그거는 하늘나라에서 안 받습니다. 주께서 하신 일만 받아요.
복습해봅시다. 악은 뭐라 했습니까? 모든 것에 대해서 움직이지 않는 게 악이죠. 의는 뭐냐? 주님이 하신 일이 의에요. 우리는 아니에요. 빠져주세요. 우리가 하는 일은 의가 아닙니다. 뭘 시켜먹든 빠지세요. 주님이 하신 일만 의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 의만 증거 하면 돼요. 주님이 하신 일만 증거 하면 돼요. 평생을 걸쳐서. 비록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하루 더 사는 일이 있더라도 내 덕분이 아니고 이것도 주의 일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 그게 바로 요한복음 제일 마지막 21장 24절에 나와요.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하고, 기록한다는 것, 몸에 문신을 새기듯이 기록한다는 것, 이스라엘 남자들도 문신을 했지요. 그게 뭐냐? 할례입니다. 몸에다가 율법을 새겨버렸습니다. 새긴다는 것, 기록한다는 것은 지적할 수 있는 근거를 이동시킨다, 종말까지. 기록된 그 기록이 완성될 때까지 기록된 자를 끌고 가는 거예요. 할례를. 끝까지 끌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선지자들,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항상 이스라엘을 닦달 내는 것은 너희들 몸에는 문신 있는데, 할례 있는데 왜 마음에는 할례를 안 했느냐고 끝까지 닦달 내셔요. 심지어 로마서 2장에도 사도 바울이 그 이야기하지요. 몸에 할례 한 게 무슨 소용 있느냐? 몸의 할례는 완성을 내다봐야 되는데 완성되지 못한 할례는 소용없지요. 완성이 뭐냐? 마음의 할례에요.
할례라는 것은 제거하는 겁니다. 마음에 할례 받았다는 말은 내 마음 없어, 이런 뜻이에요. 내가 지킬 내 마음이 이제는 없어졌어요, 라는 뜻이에요. 내 마음이 없어지면 여기에 뭐가 생기겠습니까? 허한 구멍이 생기겠지요. 그 허한 중심 자리, 구멍 자리에 주님의 마음이 들어온 거죠. 주님의 마음을 성령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주님은 깊은 곳도 통과하신다(10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 깊은 곳이 주님의 깊은 곳, 곧 주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과 바턴터치, 교체를 해버립니다.
교체를 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성도는 어떻게 증거 하는가? 전도지 돌리고, 그런 것 좀 하지 마세요. 하지 말래도 주께서 시키면 해야 되지만. 그게 증거가 아니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세상일을 어느 관점에서 평하고 시선을 바라보느냐 하면 주님이 십자가 지신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들 가운데 부모한테 한 일들 많이 있지요. “엄마, 또 내가 부장으로 승진했어. 엄마, 이번에 또 사업 성공해서 엄마 드리려고 2억 마련했어.” 그런 이야기 자주 듣지요. “엄마, 드디어 남자친구 생겨서 결혼할 거예요.” 이런 식으로 집은 50평짜리 마련했다는데 좁아서 살겠나, 모르겠어. 그런 이야기, “엄마 힘들었는데 차 벤츠로 바꿔드릴까요?” 그런 이야기 자주 듣지요.
그럴 때 주님의 아픔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게 증인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증인이에요. 가만있어 보세요. 증인 돌아다니지 않고, 관절도 안 좋은데 돌아다니지 말고 가만있어도 전부 다 증거 할 게 계속해서 쏟아져 나옵니다. 연속극 봐도 쏟아져 나오고, 윤석열 정부 보고 다 쏟아져 나와요. 정치를 어떻게, 전부 다 예수님의 안목으로 볼 줄 알아야 돼요.
기록한다는 것은 지적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거예요. 이미 예수님은 죽어서 피를 흘렸습니다. 이 피 안에 피라는 것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면 마음의 할례가 있으면 그 사람은 그 자체로 예수님의 증인이에요. 성령이 있으니 그 자체로 증인입니다. 아아, 주님이 이것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이게 바로 죄구나, 라는 것을 아는 거죠.
그럼 그 증인이 뭐냐? 증인이 바로 주의 일이에요. 성도는 가만있는 데 주의 일을 하는 거예요. 세상 보는 관점이 다르니까 이게 주의 일이 돼버린 겁니다. 그러면 시편 37편 모든 내용이 예수님의 내려왔다 올라가는 가운데, 그분이 나무라 했지요. 시편 37편이 완성이 되면서 거기에 시편 37편에 나오는 백성들, 의인들, 악인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는 자의 등장, 이건 뭐로 등장하는 겁니까? 나무의 열매로 등장하는 거예요.
이 사이는 뭐냐? 주의 일이 관여하고 있지요. 주께서 열매 아닌 자를 열매 되게 하시는 그것이 반복해서 매일 삶속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시편 37편을 매일같이 우리에게 실현시키는 거예요. 그중의 예를 봅시다. 땅에 내려왔다 올라가는 건 조금 있다 보고요 이것 먼저 볼게요. 여기 시편 37편 17절,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붙드신다고 돼 있지요. 그걸 아시고 잠언 16장에 나오는 새 구절을 보겠습니다.
잠언 16장 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어디서 나온다고 했어요? 여호와께로서. 맞지요. 맞거든요. 이것 지켜야지. 앞으로 이것 지키는 게 아니고 그냥 맞지요, 그럼 끝나는 문제에요. 지금 내 모습이 이 모습이니까. 내 모습이 이 모습이라는 건 마음에 할례를 해버리면 주님이 장악해요. 자, 악은 어떤 것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지만 주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요동시켜버립니다. 왜냐? 창조의 리듬 때문에. 이건 좀 약간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어제 낮 설교를 했는데요. 좀 난해했던 게 뭐냐 하면 비교할게요. 주님이 살아계신다. 이건 안 돼요. 주님이 살아계심이 안 되는 이유가 살아 있다는 이 표현 자체가 여기 인간도 포함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주님 살아 있다면 이건 유대교입니다. 구약을 잘못 오해한 사람의 해석이 돼요.
그러면 뭐냐? 언약이 살아 있어야 되지요. 내가 살아 있지 말고 주님이 하신 일이 살려면 주님이 죽었다, 이것도 아니에요. 왜? 주님이 죽었다는 것은 이순신 장군 죽은 것과 똑같이 돼요. “이순신 장군 죽었는데 참 훌륭한 분이야. 그럼 우리 제사 드려주자.” 부활절이 제사 드리는 날 아닙니까. 주님 제삿날이에요? 아니잖아요. 주님이 죽은 게 아니에요. 산 것도 아니에요.
주님의 죽음이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죽음이 살아 있다면 주님이 살았는지 내가 살았는지 둘 중에 하나는 포기돼야 돼요. 내가 살아 있으면 주님은 죽었고, 주님의 죽음이 살아 있으면 나는 그 앞에서 죽은 자에요. 살아도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왜냐? 내가 살아버리면 궁극적으로 나는 내 잘남을 보여주는 증인 되고 내가 죽어버리면 더 이상 죽은 놈은 만질 것도 없으니까 죽은 놈을 증인 할 필요 없거든요. 죽으면 아무것도 못하거든요.
죽은 자가 되지 아니하면 살아 있는 분을 증거 못하는데 뭘 증거 하느냐?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는 것,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 십자가 안의 삶이잖아요. 내가 자랑할 것은 이제 주님의 죽은 십자가밖에 없다, 할 때 이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럼 너는?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나는 죄인 중의 괴수지, 뭐. 죄와 허물로 죽었지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이, 십자가에 달렸던 그 십자가가 계속 살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설교 마지막에 이랬지요.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옛날 우리의 살던 삶 있잖아요. 나를 위해 사는 내 위주의 삶, 계획 세우고 계획 잡고 그것 이뤄야 될 텐데 기도 열심히 빡세게 해서 주의 뜻이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후원해주시고 도와주셔서 열심히 할 테니까, 하는 그 버릇 있잖아요. 그걸 그대로 하게 해요. 왜냐? 내 계획이 있고 목적이 있을 때는 마치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우리가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으면 그냥 눈 뜨면 안 되지요. 오늘 스케줄, 누굴 만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스케줄이 있다는 것, 계획이 있다는 것은 이건 뭔 뜻이에요? 내가 안 죽고 살아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거예요. 살아 있다고 전제로 열심히 자기 뜻대로 하니까 매사가 내 뜻대로 되지도 않고 되더라도 됐다고 까부는 것도 우리가 좀 싫고, 어쨌든 간에 내가 살아 있으니까 뭔가 좋든 나쁘든 업적이 결과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실패하든 성공하든 뭐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실패하면 낙담하고 성공하면 까불고 자랑질하고.
그런데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쓱 하고 주님의 죽으심이 들어와 버리면 묻는 거예요. 네가 살아 있는지 내가 살아 있는지 묻는 거예요. 아하, 주님이 살아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내가 오늘 아침부터 계획에 바빴구나. 구두 닦고 모자 쓰고 오늘 상견례 하는데 뭐 입고 나가나? 신경 쓰는 것, 특히 사돈 만날 때는 주님 생각 안 나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에요.
사돈이 옷 꼬라지 보고 힘들 게 사는 것 들통 다 나고, 또 머리 모양 보고 동네 이발소에서 했구나. 촌스럽기는. 아이고, 내 아들이 아깝다. 촌 집안 여자라니. 내 아들이 아깝지만 어쩌겠나, 지들 좋다는데 참고 지내지, 뭐. 당신 딸 시집오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둔다. 이렇게 나올 수 있단 말이죠.
그런 것을 미리 당겨서 한다는 것은 뭐냐? 미리 예비하고 대비하는 거예요. 예비, 대비한다는 것은 내가 죽었다, 살았다? 내가 살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주께서 쑥 들어와 버리면 그게 다 의미 없고 무의미하고 상견례 어떻게 했는지 상견례하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팔보채 그런 것 기억치도 않아요. 그냥 폼 내는 거고 인간한테 기죽지 않으려고 하는 지 과시고.
괴시라 하는 것은 과시, 체면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좋은 것만 기억하는 이 기억에서 비롯된 거예요. 좋은 나를, 좋은 이미지를 인상을 계속하려면 기억에서 온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서 손자 키우는 할머니 같으면 오늘도 손자 잘 키워서 아들한테 사랑받아야지, 할 때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주님이 들어와 버리면 내가 손자 잘 키우고, 얼마나 의미 없고 무의미한 것을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 무의미한 것을 하게 하시죠. 아무 의미 없는 걸 신경 쓸 필요 없는 걸 하게 하시는 이유가 십자가만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제가 북한에 있는 신자가 굳이 남한에 탈출할 필요 없다 이 말이에요. 북한에 있는 기억이나 남쪽에 있는 기억이나 둘 다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남쪽에 왔다 심심하다고 북쪽에 기어 올라가고, 참.
인생 자체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십 분 뒤에 죽는다면 결국 이 말 한 마디만이 진리가 돼요. “공연히 왔다”에요. 오 분 뒤에 죽는다면 세월이 구십 살든 그냥 공연히 왔다가 그냥 사라지는 이게 인생입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우당퉁탕 요란 떨 뿐이죠.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복잡해지는데 예수님의 모든 시편에 있는 말씀이나 모든 말씀을 혼자 다 이루실 때에 그 환경이 뭐냐? 그게 요한복음, 요한복음 하기 전에 아까 한 것 마저 해봅시다.
잠언 16장 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그다음에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이게 구약적 눈에 보이는 세상을 무대로 삼았다는 걸 감안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앞으로 볼 요한복음은 이것과 달라요.
하여튼 구약에서는 비교대상들이 있어요. 과연 확인대상들이 있다고요. 내가 모든 걸 맡길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줄까? 구약적인 거예요, 구약에서는. 그다음에 잠언 16장 33절,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누구한테 있다? 여호와께 있다. 계속해서 뭐냐 하면 여호와와 함께 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다시 시편 37편 16절 봅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다시 잠언 17장 1절,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어떻습니까? 시편이나 잠언이나 무대를 보세요. 말씀하는 무대가 같은 땅에 같이 있으니까 서로가 눈에 보이는 거예요. 보이는 그런 관계를 뽑아서 하나님이 그 시대에 합당한 말씀으로 주시는 겁니다.
창조, 시작부터 마지막 종말까지 악은 여기 매달려 있는 악들이 움직이죠. 여기에 악을 바탕으로 해서 주님께서 언약적 창조의 리듬을 실어버려요. 그러면 요지부동 변하지 않는 것과 늘 주께서 뭔가 마지막 목표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변화, 이 변화를 계속해서 구약 때부터 주고 있습니다.
구약이니까 우리는 시편, 잠언 구약이잖아요. 이 말씀은 나한테 적합하도록 시험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죠. “그래 맡기자. 맡기면 뭐가 된다? 주께선 맡기면 불교신자보다 더 잘될 것이고 많은 재산을 얻을 것이다. 만사형통할 것이다.” 해보니 됩니까? 맡겨도 망하고 안 맡겨도 망하고. 왜냐? 시대가 이미 언약적으로 말씀이 완성돼버렸어요. 남 이웃집과 비교하지 말고 누구와 비교해야 되느냐 하면 피 흘리신 주님과 비교해보세요. 주님의 피가 모든 일의 맡김에 최종 완성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구약적 요소의 차이를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기도할 때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해야 되고 내 원이 따로 있었음을 알고 있어요. 그럼 자기 원이 뭐냐? 어떻게 이 고통을 그냥 면제하고 넘어갈 순 없겠습니까, 이 잔을 안 마실 순 없겠습니까? 그런데 주께서는 기도를 통해서 이미 아버지의 뜻과 불일치를 일치로 만들어버렸지요. 땀이 핏방울처럼. 주님의 신체만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지금 땀이 핏방울처럼 한다고 땀이 피가 되지도 않고, 해도 우리 무릎만 아프고, 하다 배고프고 밥 먹으러 가고. 되질 않아요. 주님만 홀로 하신다니까요. 그게 의에요. 시편에 나오는 의를 다 뽑아보세요. 다윗도 아니에요. 다윗을 앞장세운 배후에 계신 언약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그걸 다 이루시는 겁니다. 다윗도 이루질 못했어요. 책을 쓸 때 저자가 책을 잘 썼다고 해서 저자를 존경하지도 않고 존경받지도 못합니다. 책은 잘 썼는데 행동은 왜 그 모양이냐.
요한복음 7장 33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환경을 비교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지금 바리새인들은 평지를 생각해요. 평지의 땅, 약속의 땅 그러니까 가나안 땅은 영원히 약속의 땅이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유대인들이 평했어요. 어떻게 평했느냐 하면 유대인들은 이 땅이 전분데 이 땅 말고 다른 땅이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어디로 간다 했습니까? 땅에서 멀리 간다는 뜻입니까, 위로 간다는 거예요?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만약에 유대인들이 이걸 인정해버리면 그들은 뭘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기존에 약속의 땅 위주로 성경을 해석했던 모든 걸 포기해야 됩니다. 그걸 포기한다는 것은 그 땅의 출신되는 자신의 육체와 신체도 포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신체 위해서 자기 신체를 맞바꿔야 되고 포기해야 돼요.
이 이야기가 오늘날 이 시대에 왜 중요하냐? 성경을 안 보는 게 아니고 보잖아요. 보게 되면 요지부동 자신의 신체와 자기가 살던 동네, 자기 것, 이것 인간들은 요지부동 포기 못합니다. 그다음에 포기 못한 채 뭘 본다? 성경을 보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아까 잠언 보지요, 그다음에 시편 봤지요. 특히 잠언 본 사람이 모든 계획은 우리가 하지만 이루시는 것을 주께서 이루신다. 그게 대기업의 사장실, 회장실에 액자로 안 걸리겠습니까? 내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십일조 드릴 테니까 이번 사업만큼은 성사되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 안 나오겠어요? 그리고 목사 불러다가 축복 안 하겠습니까?
만약에 목사 불렀는데 재수 없게도 복음을 아는 목사가 왔다. “주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회사도 부인하고 이딴 게 무의미한 것을 이 회사를 운영하는 자체가 의미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면 손가락 부러뜨릴 거예요. 내가 이러려고 봉투 준비하고 점심대접한 게 아니다. 회사 축복하러 온 목사도 그 정도인데 병원목사 원목, 군대목사 군목, 그다음에 학교 교목, 그리고 사목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준비된 용어가 있어요. 생계형 목사.
생계형 목사만 있는 줄 알아요? 생계형 전도사도 있는데. 특히 생계형 목사 가운데서 들키지 않는 것이 회목, 교회라는 업체의 목사 이거는 정당한 것처럼 느껴지지요. 목회라는 이름으로 복음 전하고 주의 증인 되라 하니까 교회의 증인 돼요. 내가 이만큼 키워놨다고 자기 교회의 증인 되고 있다고.
그렇다면 주님께서 구약 잠언, 시편 그럼 왜 마지막에 예수님 일찍 와서 혼자 다 이루면 될 건데 어차피 주님이 의인이고 이루는 것도 주께서 한다면 미리 당겨오면 되는데 뭐 때문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런 말씀 줘서 헷갈리게 만들고 허황되게 만들어서 결국 그들이 스스로 자기 손으로 자기 메시아를 찔러 죽이는 그런 사태가 벌어지게 하고 왜 그런 일을 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신명기 5장 3절에 보면 벌써 예언돼 있습니다. 2절부터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하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할 때 그때 동원됐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분명히 있어요. 그리고 누가 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고,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언약이 지금 여기 있는 너희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모세 율법으로 너희에게 계명을 세웠다는 거예요.
아까 배운 것 다시 해봅시다. 기록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빼도 박도 못한 지적할 수 있는 증거를 주는 거예요. 기록은 뭘 유발하느냐? 내가 미처 모르는 숨어있는 죄에요. 내가 아는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반성하거나 회개할 수 있는 죄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숨어있는 죄에요. 숨어있기 때문에 회개 안 돼요. 이스라엘은 회개가 안 돼요.
회개가 안 되는데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계속 예수님 시대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몰아넣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 사도 바울의 명령 보면 하라가 많지요. 술 취하지 마라. 성령에 취하라. 할 수 있거든 늘 쉬지 말고 기도하라. 무시로 기도해라. 하라 많지요. 하라가 되는 이유가 이게 기록됐잖아요. 기록된 것은 우리를 어디로 몰아넣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다 이뤘다, 로 몰아세우는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몰아세움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자꾸 요지부동 나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내가 구원한다는 생각이 이 육신이 있기 때문에 마귀가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나를 믿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나를 믿는가?” 이것 때문에 <십자가마을>이 도중에 둘로 깨졌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했지요. 예수님을 믿는 그 주인공이 누구냐 했지요. 너잖아, 너.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거예요. 이게 어디서 잘못됐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은 숨어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예수님의 비유도 그거에요. 숨어있는 것이 나타날 때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깨닫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깨닫지 못해야 내가 내 구원에 거들지 않잖아요. 거둘 필요가 없다.
내가 만약에 내 구원에 거들면 그건 무효 됩니다. 이거는 구원이 안 돼요. 구원은 주님 홀로 이루신 의가 돼야지 내가 끼어든 내 행위가 들어간 의와 거룩은 하나님이 더러워서 안 받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나무가 있고 열매는 주께서 그 나무에게만 나온 열매에요. 우리가 바친 열매는 주께서 받질 않습니다. 왜 그러냐? 우리의 기억이 들어가기 때문에.
기억 이야기 나왔으니까 기록한다는 것은 주님의 기억입니다. 주님의 기억이 기록된 거예요. 그럼 주님의 기억이 뭐냐? 주님의 기억은 어렵지 않아요. 간단하지요. 너희들이 내가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따먹었다. 이것 주님께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이미 죽었다.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지? 이거는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관계가 끊어지면 주께서 계속 유입하는 생명이 끊어져버려요. 파이프가 막힌 거예요. 이걸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이 드린 것은 안 받고 주께서 드린 것도 인간에게 도달하지 못한 관계가 죽음의 관계에요. 숨 쉬느냐, 지금 이것 따지지 마세요. 이거는 구약적 안목입니다. 살아도 죽은 것이고 죽어도 산 사람이 예수님의 신약시대에는 등장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살았다고 할 때 앞에 뭘 붙이느냐 하면 네가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1장에(25절), 죽어도 산다는.
자, 마지막 남은 어려운 것 해봅시다. 수직으로 드리워졌지요. 주께서 오지 않았으면 생성되지 않는 땅, 수직적으로 펼쳐진 천, 이걸 뭐라고 하느냐? 요한복음 14장에서 이걸 길이라 하고, 이걸 진리라 하고, 이걸 생명이라 하는 겁니다. 길, 혓바닥 같이 내려진 길. 이 길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을 떠나야 된다는 거예요. 이번에 교재 올렸잖아요. 교재 결론 부분에 나와요. 주께서 베드로에게 한 말씀이에요.
“너는 거기 있으면 안 돼!” 네가 아는 이 세상에 네가 있으면 안 돼. 거기 있지 말고 내가 처소를 마련할 테니까 너는 거기 있어야 될 사람이 아니야. 내가 마련한 처소에 있어야 될 사람이야. 그게 제자들은 몰랐어요. 성령이 오기 전까진 몰랐어요. 오고 나니까 우리가 붙들고 우리가 못 놓는 부동산 말고 다른 부동산, 주님의 길과 생명의 세계가 주님이 다녀감으로 이뤄지는 거예요.
하나님 계신 곳이 천국이 아니고 주님이 다녀가신 이곳이 하늘나라에요. 그 하늘나라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움직일 때 유대인들은 저 하늘에 있는 고정된 땅을 봤지요. 천국은 그게 아니야. 천국은 이와 같으니, 라고 하면서 비유로 이야기하지요. 포도원 아침 일찍 놀고 있는 사람 왔는데 전부 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뭐냐? 창조의 리듬이 계속 움직일 때 그 장소가 예수님의 활동 장소고, 활동 장소가 바로 천국입니다. 그걸 아들의 나라라고 하지요. 골로새서 1장에(13절).
세상에 있는 땅에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악마까지 주를 위하여 만들어졌어요. 이거는 주님을 믿고, 안 믿고 문제가 아니고 오늘 말씀처럼 그냥 맡길 문제지요. 믿겠습니다, 팔짱 끼고 그러지 말고 우리 자신을 그냥 내비 두세요. 내비 두셔서 주님이 어떻게 이끄는지를 증거 하면 되는 겁니다. 뭘 싸매고 주의 말씀 지키고 영광 돌리고 고민하지 마세요. 고민하면 자꾸 주변의 이단들이 꼬시잖아요. “십일조 했어? 올해 전도 몇 명했어?” 맨날 꼬신다고. 신경체제와 정신체제가 결합하라고. 말씀이 네 안에 살아 움직여야지, 이런 식으로.
말씀은 주님이 다 이뤘는데 왜 우리가 살아 있어야 돼요? 우린 잘려야 되지요. 우리는 마음의 할례 받아 잘려버려야지요. 내가 한다니? 내가 없는데 뭘 내가 해요. 그럼 니가 없는데 밥은 왜 먹느냐? 주께서 먹게 하셨지요. 주께서 먹으라 했는데 안 먹을 수가 있어요? 감사함으로 먹으면 다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감사함이 영광이 돼요. 어디서 뭘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감사하면 돼요. 다방에 앉아도 노래방에 가도 감사하면 된다니까요. 이 소리 듣고 오늘 저녁 노래방 가는 게 아닌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37편 돌아옵시다. 요한복음 더 보고 싶지만 이 정도면 여러분 아신다 치고. 그만큼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 찾아온 유대인들은 그저 육신으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였어요. 그게 유대인들뿐이겠어요? 오늘날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 육신 앞에 주님께서 매일같이 성령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입장 바꾸도록 그렇게 쑥 들어오시는 거예요.
맨날 생각하는 게 예수 믿었는데 나한테 돌아온 이익은 뭐고? 끊임없이 용암 올라오듯이 눈만 뜨면 “예수 믿었는데 주님이 해준 게 뭐가 있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것 같아. 주님 대충 믿을래, 앞으로. 열심히 믿어도 소용없는 걸.” 맨날 이 생각 끓어오르는 거예요. “그럼 나는요? 나한테 오는 이익은 뭡니까? 우리 자식은요? 열심히 기도했는데 내 자식 왜 아파요?” 맨날 이런 식이에요.
분노와 원망, 이걸 유발시켜놓고 주께서는 희생물 앞에 데려옵니다. 이게 아주 과격한 폭력이거든요. 하나님의 과격한 폭력에 어린양이 죽습니다. 이걸 되풀이하는 것이 뭐냐 하면 구약의 절기였습니다. 날짜 정해서. 절기의 핵심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이 어떻게 이뤄지는가? 누군가 하늘에서 오신 분이 희생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구약 때부터 절기를 통해서 절기 또는 다른 말로 축제지요. 축제를 통해서 그 일을 하는 겁니다.
희생이라 하는 것은 악에 대한 단호함. 내 아들까지 나는 악은 싫다, 이게 하나님의 의사표시에요. 그러니까 피 외에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마라. 이게 하나님의 단호함입니다. 시편을 통해서 역시 하나님의 단호함이 나타나지요. “그 악인들 까부는 것, 그거 부러워하지 마.” 이게 단호함이에요. 나중에 내가 사는 땅에는 그들이 없을 것이다.
또 그 땅이라 해서 넓은 땅 생각하지 마세요. 무슨 땅? 아래 내려왔다 위에 펼쳐진 그 땅, 주께서 다녀가심으로써 없는 데서 새로 생긴 그 땅에서 악인들은 중력에 의해서 다 떨어지지요. 지옥으로. 그래서 지옥은 떨어지는 곳이에요. 다 떨어지고 열매로서 붙어있는 것은 주께서 함께하심으로 나를 생각한다는 조건 하에 나 같은 것 드린 것은 필요치 않는다는 것을 아는 조건 하에 주님께서 자신의 사람으로 백성으로 만든 겁니다.
그러면 그 조건을 우리가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느냐? 내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유지해요? 성령이 오셔서 일방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지옥 가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는 이유가 네가 없기에 두 번 다시 너의 증인 될 이유도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일상을 통해서 내 위주로 살다가 성령이 와서 희생물, 십자가 앞에 동원시키면 이것조차도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활용해주시는 주의 반복적이고 연속적인 살아 계시는 주의 죽음의 일이라는 사실을 그 짧은 순간에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면 인생사는 것이 세상사는 것이 이미 주와 함께하는 가벼운 천국생활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행악자로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우리가 무슨 능력으로 이걸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지키지도 못한 자아를 귀하다고 붙들고 있는 한심스러운 우리를 향하여 주께서 대신 큰 희생을 하셨기에 이제는 그 희생만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