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말씀의 환경

아빠와 함께 2022. 10. 12. 08:09

20221010a 부산강의 : [시편]52(36:1)-말씀의 환경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36편(표준새번역)

1.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주의 종 다윗의 노래) 악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죄의 속삭임만 있어,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습니다.
2.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의기양양 하고, 제 잘못을 찾아서 버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3.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란 사기와 속임수뿐이니, 슬기를 짜내어서 좋은 일을 하기는 이미 틀렸습니다.
4.  잠자리에 들어서도 남 속일 궁리나 하고, 스스로 좋지 않은 길에 버티고 서서, 한사코 악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5.  주님, 주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닿아 있고, 주의 미쁘심은 구름에 닿아 있습니다.
6.  주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을 구하시듯 짐승도 구하여 주십니다.
7.  하나님,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어찌 그리 값집니까?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습니다.
8.  주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주의 시내에서 단물을 마시게 하시니,
9.  주께는 생명 샘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
10.  주님을 알아뵙는 사람들에게는, 주께서 친히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의를 심어 주십시오.
11.  오만한 자들이 그 발로 나를 짓밟지 못하게 하시고, 악한 자들이 그 손으로 이 몸을 끌어내지 못하게 하여 주십시오.
12.  악을 일삼는 자들은 넘어지고,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시편 36편 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악인’ 나오지요. 그리고 제일 마지막 12절에 ‘죄악을 행하는 자’ 나옵니다. 성경에서 이런 단어들이 등장한다는 것이 상당히 섭섭하지요. 우리에게 위기를 초래합니다. 성경에서 악을 지적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에 대해서 주목을 유도하는 것, 이것은 악인이라고, 죄악을 행하는 자라고 규정한 하나님의 규정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인간은 악인 되기 싫어하는 다 알잖아요. 인간들도 그렇고 하나님도 아시고. 인간은 누구나 죄악을 행하는 자 그래서 처벌받기 원하는 자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런 단어가 있는 겁니다. 이런 내용이 있는 게 성경에서 아무도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세계라 하는 것은 인간에겐 기피대상의 세계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좋은 사람이기를 확인하기 위해서 좋은 사람들만 모이고 싶지요. 그러나 성경은 좋은 세계다, 그런데 이게 왜 나옵니까? 좋은 세곈데 악인이 등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가 왜 등장하느냐 말이죠. 그것도 이스라엘 내에요.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들이 이 땅에서 어떤 인간과도 차별되는 특별한 존재라고 보거든요.

그러나 특별한 존재에서 악인이 등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악, 죄악 이것은 하나님의 성경세계, 또는 말씀세계로 이끌림을 받아야 그 최종적인 진가로 비로소 밝혀지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은 좋은 것 알고, 자기가 복 된 것 알고 이러면 이것은 진리 안다, 라고 생각하고 싶어 해요.
인간은 좋은 것, 복 된 것, 괜찮은 것, 그런데 성경은 이런 인간의 의도를 좌절시키고 악한 것, 죄악된 것 이것까지 함께 알아서 이게 뭘 안다? 진리를 안다고 될 수 있어요.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악이고 죄고 다 치워버리고 괜찮은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복 된 것 이것만 알면 우리한테는 내가 아는 것이 내게 보탬이 된다고 생각되겠지요. 나쁜 것은 걷어내고 좋은 것만 골라서 이렇게 알게 되면 나는 그걸로 얼추 우리 만족에 합당하잖아요.
우리는 앞에 이런 쓰레기까지 알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예요. 좋은 것만 보고 선한 것만 보고 싶을 때 진리를 확보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그런데 성경은 우리 의도완 달리 악한 것, 죄악된 것 빠뜨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의도 자체가 성경세계 앞에서 결국 뭐냐? 머뭇거리게 만든다. 뭐가? 이 성경이 말씀이 우리는 머뭇거리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안 보는 거예요. 말씀을 잘 안 보는 거예요.

국민의 힘 국회의원들이 민주당 국회의원들과 섞이고 싶어 하겠어요? 아니지요. 머뭇거리지요. 초대해도 머뭇거리지요. 그건 왜 그러냐? 나는 좋은 편과 함께 있음으로서 내가 좋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자각하고 스스로 그걸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나는 여전히 좋은 쪽에 있고 오른 쪽에 바른 쪽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니 생각이고 사적인 생각이고. 주님이 만든 세계는 나의 세계가 아니고 성경세계에요.
이렇게 되면 눈치 빠른 사람은 생각할 거예요. 악이 뭐냐? 악은 성경세계 속에 들어오지 않는 게 악입니다. 뭔가 주저하는 것, 머뭇거리는 것 이게 악이에요. 제가 설명했지요. 왜 머뭇거립니까? 내가 원하는 세상 그것을 깨지기 싫고 그것을 무너지기 싫어서 내가 내 안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 이게 뭡니까? 악이 되고 이것이 죄악이 되는 겁니다.

이걸 크게 생각하면 아담의 세계와 그리고 장차 마지막 아담 예수님의 세계 둘을 이야기하는데 인간은 예수님 세계를 빼버리고 아담 세계, 우리 인간의 세계만 거기다만 몰입하고 몰두하고 있고 있습니다. 인간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라면 이 질문 하나로 시작이 될 수 있어요.
“뭐가 있지? 뭐가 있는데?” 이것을 굉장히 집중적으로 연구한 학문이 있어요. 현대에 들어와서 이걸 과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과학 중에는 자연과학, 그리고 인문과학, 사회과학. 사회과학은 경제학 이런 것, 인문과학은 언어학, 인류학, 고고학. 심리학은 어디 속하는가? 심리학은 자연과학에 속하지요.
과학에는 자연과학, 의학, 생물학 같은 것 다 포함되지요. 심리학. 그다음에 인문과학은 언어학, 고고학, 문학 같은 것. 그다음에 사회과학,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대학에서 이것 빼놓고 딴 과 있습니까? 예술 하나 보태면 돼요. 지금 예술도 과학으로 포함되죠. 교육학은 어디 속하지요? 인문과학 속하지요. 유아교육 여기 속합니다. 모든 게 과학이죠.
과학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뭐가 있지’를 탐구하는 것, 뭐가 있는가, 뭐가 있는데? 여기서 빠진 게 있지요. 정답은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 이게 이미 정답으로 내려져있어요. 천문학 같은 것, 별.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갈라디아서뿐만 아니고 에베소서 같은 경우에, 마태, 마가도 마찬가지지만 에베소서 2장 2절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나오지요. 자, 공중 권세 잡은 자는 어느 과학에 속하지요? 속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과학에서는 성경 자체에 대해서 제가 처음에는 머뭇거린다 했는데 아예 머뭇거리는 게 아니고 배타시해버리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에 몰두하고 있는 나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내가 왜 굳이 그것을 봐야 되느냐? 눈에 보이는 것이 결국 우리에게 돈과 힘과 권력을 가져다준다 이 말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예수님을 공격했던 존재가 있어요. 그게 마태복음 4장에서 악마가 광야에서 주님과 일대일로 만났거든요. 일대일로 만났다는 것은 거기서 뭐가 다 빠집니까? 인간들은 가, 인간들은 가! 인간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것과 인간이 봐도 모르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 일대일 매치를 한 장소가 광야였습니다. 그때는 놀랍게도 세례 요한도 빠졌어요.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악마를 이길 수 있다, 없다? 못 이기죠. 세례 요한도 예수님 보고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례 요한의 한계에요. 악마의 역량에 대해선 세례 요한도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세례 요한의 한계는 곧 인간의 한계며 인간은 자기 한계를 넘어서 악마를 쥐락펴락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괴기영화 전부 엉터리에요. 마귀 영화, 그거는 인간이 그렇게 이쪽에서 있음을 근거로 해서 없음을 파악하는 것은 악마가 웃지요. 그거는 악마가 아닙니다. 악마의 세계는 인간이 손댈 수 없습니다. 관여할 수가 없어요. 왜 관여할 수 없느냐 하면 인간은 주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종은 함부로 주인의 금고에 손을 대는 게 아닙니다. 회사 직원이 사장님 금고 비밀번호를 알아서는 안 되겠지요.

뭐가 있지? 내가 있다. 따라서 뭐는 없다? 귀신, 마귀, 예수님, 신 이거는 어떻게 됩니까? 이거는 없는 겁니다. 그들이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만 뭉쳐진 세계, 그걸 아담의 세계라 합니다. 아담의 세계는 끝이 있어요. 시작도 있지만 끝이 있는데, 인간의 세계의 시작은 없는 데서 있게 하죠. 없음이 되겠지요. 없는 데서 태어나니까. 아담은 없는 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태어남에 대해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어요. “엄마, 아빠 나 이렇게 만들어줘” 이게 안 돼요. 엄마, 아빠가 결혼할 때는 자식은 없지요. “엄마, 아빠 이래야 돼” 요구할 순 없어요.
은 뭐냐? 창세기 5장에 나옵니다. 아담의 계보가 나오지요. 끝은 동일하게 끝나요. 이게 뭐냐 하면 끝도 없음인데 그냥 없음이 아니라 내용을 담고 있는 없음이에요. 이게 죽음입니다. 창세기 초반에는 그냥 죽음으로 끝나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가게 되면 이 죽음의 내용이 더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왜 죽느냐? 죽음이 어떤 고통이냐?

죽음이란 실제는 인간의 죽음이란 외형적 외피적인 모습이고 숨 끊어지는 것은 외피적인 모습이고 그 실제 죽음세계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진행되면서 그 내용을 채우게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저주였고, 심판이었고,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불바다죠. 이게 지옥 불이죠.

혼돈 또는 없음의 세계에서 인간이 등장했다. 그러면 인간의 시작은 없음, 끝은 지옥 불. 예수님께서 넓은 길, 좁은 길 이야기한 것처럼 없지요. 그렇다면 이 두 개를 시작과 끝을 하나로 합쳐보겠습니다. 합쳐보면 이렇게 돼요. 동그라미 안에 인간은 없는 데서 태어나고 다시 끝은 뭐냐 하면 없어지는 게 아니고, 여기 없는 데서 태어났다는 것은 계시가 초반일 때는 “내가 없는데 부모가 나를 낳았네. 어, 있네.” 이 정도밖에 안 돼요.
그러나 끝부분에는 죽음의 없음이 아니고 이건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의 학문에서, 옛날에는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음은 없는 것이 아니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거예요. 살아 있는데 둘 중에 하나에요. 어디서? 환경. 이게 지옥 환경이냐, 아니면 천국 환경이냐에 따라서 이게 내가 그냥 없음이 아니고 내가 결국 없음이 되죠.
내가 여기 있어요. 있는데 내가 주목받는 것이 아니고 지옥이란 게 주목받으니까 주목받는 그 지옥 앞에서 나는 뭡니까? 있으나마나 지옥을 지옥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의 재료로 거기에 가미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피조물의 운명이죠.

 

그러니까 성경의 세계란 나의 세계 아니고, 무슨 세계? 환경의 세계. 나를 죽여 놓은 환경의 세계가 성경의 세계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환경이 주인공이다. 이 환경이 말씀의 환경, 계시의 환경, 또는 이스라엘 같으면 언약의 환경. 성경의 환경입니다. 내 세계가 주인공이 아니고.
그러면 이 환경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걸 뭐라고 했습니까, 그 입구에 머뭇거리는 걸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바로 악이 되고 죄악이 되는 거예요. 잘못 생각했단 말이죠. 환경이 우선인데 너는 너만 우선으로 생각한 자체가 잘못 생각한 거예요.

 

나의 세계에서 그다음 환경의 세계로 이동돼야 되겠지요. 이동되는 그 시범케이스로 채택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나의 세계에서 환경의 세계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들을 강제로 이끌 때에 나의 세계가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다 끄집어내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선택권, 결심, 오기 이런 거예요. 선택이에요, 선택. 인간은 날마다 자기를 위해 선택하지요. 선택할 때 인간이 선택을 합니까, 선택을 강요합니까? 환경이 우리 삶이 선택을 강요하게 하는 환경의 차가움.

그래서 인간사는 지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이유가, 분명히 우리는 내 마음대로 하는데 내 마음대로 안 돼요. 얼굴의 알레르기 내 마음대로 되는가요? 그냥 찾아오지요. 여러분 인간이 새장에 갇혔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그나마 새장 안에서는 자유로워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인간은 새장이 아니고 인간은 새장 안의 곳곳에 힘의 역선, 힘의 망. 인터넷 세계에는 인터넷 망이 형성돼 있지요. 이 세상에는 말씀의 망으로 엮여져서 우리는 나를 위해 살기 때문에 뭔가 선택을 하는 거예요. 선택을 하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부딪치는 게 있도록 주님께서 그렇게 사전에 구조를 만든 거예요. 우리는 선택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뭐든지 선택해요. 오늘 공휴일인데 성경공부 참석할까, 말까? 뭐든지 선택하기 마련이에요.
그 선택은 누가 하느냐? 나의 세계가 하는 거죠. 자, 방금 우리가 공부했기 때문에 복습해봅시다. 나의 세계가 나를 선택한 이유가 뭡니까? 나는 좋은 것만, 나한테 유익이 되는 것만, 내게 행복이 되는 것만, 나한테 손해되지 않는 것, 내가 원하는 깨끗하고 나는 순수하며 거룩하며 착하며 의로우며 정당하고 합법적이고 합리적이고 누구한테 지적받을 일 없는 존재가 나라는 것을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는 거예요.
뭘 빠뜨렸다 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악과 죄악 그런 것은 보지도 않아요. 나는 좋은 것만 보기 때문에. 나는 착한 것만 보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에는 의도를 갖고 있어요. 동기를 갖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훌륭한지 증명하기 위해서 우린 선택하는 거예요. 우리 가정이 얼마나 옳은가 증명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인정하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우리는 그 안에 갇혀있는 게 행복해.

문제는 새장으로 여긴다는 거예요. 새장이 아니고 그 새장 안에 촘촘히 가시가 있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가 있어서 새장 비유가 적절치 않아요. 험난한 가시밭길이에요. 보이지 않는 게 나를 공격하고 예상 못한 것이 나를 힘들게 만들고. 우리는 착하고 싶은데 생각도 못한 사태가 벌어져서 착한 나를 아주 못된 나를 전환시키는 그런 사건들이 벌어져버리죠. 내가 이렇게 성질 더러운 인간이 아닌데, 이런 갑자기 본인에 대해서 수정이 가해지는 내가 누군지를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거예요.
그걸 가정에서 할 때 사자성어로 ‘부부싸움’이라 하는 겁니다. “니가 뭔데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니가 뭔데? 내가 얼마나 착한데 네 말 한 마디에 아침부터 성질 다 버렸다. 니가 뭔데 나를 오늘도 나쁜 사람 만드느냐?” 본인이 나쁘다는 생각 안 들어요. 착해지려고 애쓰는데 니가 내 성질 긁었다는. 그럼 뒤에 붙는 말이, “니가 내 마음을 알아?” “그걸 왜 알아야 되는데. 내 마음 나도 모르는데 니 마음을 왜 알아야 돼?”
“이게 부부야?” 부부가 뭔데? 이게 부부야, 할 때 여기 뭐가 빠졌어요? 악과 죄악이 빠진 상태에서 사용하는 거예요. 내가 악한 부부일 수 있다는 개념을 아예 지 마음대로 삭제시켜버린 거예요. 이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성경 속에 들어가면 나의 세계가 아무 의미가 없고 거기에 내가 모르는 예수님의 세계, 두 번째 아담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뭘 해도 악과 죄악을 발췌시키면서 악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없던 뭐가 생겨요. 죄가 발생되면서 없던 게 생겨요. 그게 뭐냐 하면 여기에 생명이 나오고 의가 비로소 나오고 거룩이 나오는 거예요. 우리는 악과 죄를 모르고 나는 당연히 의롭고, 당연히 생명을 얻고, 당연히 거룩하다고 성질 급하게 직접 알려하는데 주께선 그 방법을 사용하시는 게 아니고 악과 죄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내가 알던 생명 말고, 내가 알던 의, 거룩 말고 새로운 거룩이 등장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세계, 두 번째 아담의 세계, 말씀이 세계는 뭘 해도 그게 뭐가 되느냐? 뭘 해도 의가 되게 해요. 내가 분명히 이건 죄진 건데 그걸 의로 쳐주는 겁니다. 이게 무슨 종이냐? 의가 주도권을 가지기 때문에 의의 종이라고 합니다.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 많은 너를 사용하는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의를 드러내가 위해서 생명을 드러내고 거룩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밖에 없는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이고 묘수입니다. 이게 시편 36편이 품고 있는 환경이라고 보시면 돼요. 별로 안 기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내가 뭘 잘못됐나 싶네. 그럼 시편 36편 들어가 봐야 되겠지요. 머뭇거리지 마시고

 

이미 우리는 죄와 악을 알지 못하면 의와 거룩도 전부 다 구라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돼요. 내가 이해하는 의와 거룩은 거기에 나도 잘났잖아, 라는 결부되지 말아야 될 게 막 섞여 들어가는 거예요. 나 잘났어, 그걸 떼놓고 의와 거룩을 생각해야 되는데 나 당연히 잘났지, 이것 들어가서는 이거는 성경세계의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신약에 보면 십자가 안에 들어가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우상의 신으로 들어가거든요, 인간은,우상의 신은 환상입니다. 왜 환상이냐 하면 나의 이상형이기 때문에. 신은 나의 이상형이에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거대하게 돼버린 상황, 그걸 우린 신이라고 부릅니다.
인도에는 삼억 삼천 개의 신이 있어요. 그걸 19세기 이후에 영국 사람이 ‘힌두교’라 불렀어요. 전엔 힌두교란 단어 자체가 없었어요. 그전에는 브라만교인데 이거는 신을 인정한 민간신앙을 전부 다 하나로 묶어버린 것이 힌두교에요. 힌두교는 신이 많아요. 지금 힌두교가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라오스 돈 없으면서 해외여행 가고 싶은 사람들 많이 가는 곳 있지요. 돈 얼마 들지 않는. 유럽은 너무 비싸서 안 되고. 그 인도네시아 등 유적들이 다 힌두교에요.
내가 되고 싶은 신, 그리고 나는 미흡하고 그 미흡함을 복으로 그 간격을 채워달라고 비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칠성신, 북두칠성에게 옛날 할머니들이 집 뒤뜰에 정화수 떠놓고 북두칠성을 섬겼어요. 그걸 불교가 흡수했거든요. 불교가 그냥 흡수한 게 아니에요. 날짜를 정해서 흡수한 거예요. 왜냐하면 절에 가서 돈을 내는 날이 정해지기 때문에 그래요. 헌금할 날짜가 정해졌어요.
이건 기독교도 마찬가지지요. 맥추절, 유월절 절기는 계속해서 종교단체에 돈을 내는 그 날짜를 정해줘야, 어제 낮 설교처럼 형식을 갖추어야 나를 그 안에 숨길 수가 있습니다. 나를 숨기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죠. 그러나 형식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형식이란 여러분 생각하기에 종교의례, 그런 절차를 떠올리면 그건 작게 생각한 거예요. 더 크게 생각하면 이 형식은 종교 교리도 포함돼요. 주권사상,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난 믿습니다, 이게 전부 다 형식이에요.

시편 36편에 들어가 봅시다. 여기서 어떻게 시작하느냐 하면 1절에 보면,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20장 11절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 만날 때 당신은 왜 당신 부인을 누이동생이라 속였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어요. 당신 때문에 우리 가문이 신의 저주를 받아 난처하게 됐는데 그 원인제공자가 당신이잖아. 당신이 아내라 하면 되는데 누이동생이라고 왜 속였습니까, 라고 할 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답변하는 거예요.
우리끼리 있을 때는 아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동네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내가 만약에 속이지 아니하면 내 아내를 온전하게 지킬 방도가 없다는 거예요. 자, 질문 들어갑니다. 지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브라함입니까, 아비멜렉입니까? 아니면 둘 다 입니까?

지금 누가 안 두려워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기 동네에선 두려워했다고 하죠. 자기 동네에선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자기 집에서 하나님 잘 믿는 것 왜 바깥에선 안 써먹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 나와바리, 자기가 관여하는 동네에선 하나님 영광 해놓고는 바깥에 나가서는 하나님 안 믿기 때문에 우리 동네에서 써먹던 방식으로서는 더 이상 우릴 지킬 방도가 없기 때문에 여기선 이쪽 방도대로 우리가 하나님 믿는다 하지 말자, 라고 선제해서 그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쪽에선 하나님 있지만 저쪽에선 하나님 없다고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나님을 무시하는 거죠. 누가? 아브라함이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누가 부딪칩니까? 아비멜렉이 하나님을 모르는 그쪽에서 오히려 누굴 질책하고 있어요? 아브라함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까 했잖아요.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환경의 문제인 거예요. 환경 자체가 촘촘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약속의 사람 되게 하도록 아브라함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선택 당함의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란 집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집합체라고 해서 저거들이 결속을 다지는 겁니다. 우리 이스라엘은 이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만 모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다 알잖아.” 인간의 심보가 이래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안에서 뭐가 피어났다? 시편 36편에 의하면 죄악,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비로소 제대로 된 죄가 발생되는 거예요. 아예 하나님을 몰랐으면 죄도 몰랐을 건데 두려워하지 않는 게 죄라는 걸 몰랐을 건데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그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에게만 등장하는 특징이 돼버렸지요.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단체로 자연스럽게 모이게 된 겁니다. 한 시간 동안 찬양했는데 그게 찬양이 아니고, 두 시간 동안 기도했는데 기도가 아닌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찬양하고 기도했다고 우기기 때문에 비로소 시편 36편의 죄가 구현되는 거예요. 그것도 감사해야 할 일이죠.

그러면 이렇게 정리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악인(1절)과 죄악을 행하는 자(12절), 이 말씀의 세계는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세계, 불가능한 세계에요. 12절 읽어볼게요.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이것 인간이 관여합니까, 관여 못합니까? 이 일 관여 못하지요. 만약에 인간이 관여한다면, “죄악을 행했구나. 내가 죄구나.” 일어서면 돼요. 그러나 죄인이 엎드러지면 다시는 못 일어서도록 하기 때문에 이건 인간의 선을 넘어선 거예요. 인간의 손댐을 능가한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죄가 발생되었어요. 다윗의 시니까 다윗 시대에 이미 엎어지면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죄악 된 사람이 발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발생될 때 우린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죄진 사람 다시 일어나지 못하니 안 됐다, 불쌍하다. 인간 팔자 저렇게 끝나네.” 오히려 우린 측은해 하고 이러잖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건 관여할 수 없어요. 인간들은 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자꾸 안 된 사람에게 미래가 불행한 사람에게 동정하고 위로하려는 버릇 같은 게 있어요. 감정이입 돼서. 내가 저 사람 같으면 남들이 위로해줬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는 것처럼 내가 저 사람 엎어졌을 때 위로해주면 저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도움 돼서 뭐하는데? 도움 되면 안 되지요. 죄악을 행한 자는 두 번 다시 일어서면 안 돼요. 이게 시편 36편 12절입니다. 그러나 인간세계는 이게 없어요. 엎어진 사람 도와줘야 돼요. 그러나 하나님세계는 엎어진 사람은 도와주면 안 돼요. 엎어지면 밟아야 돼요.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우리가 밟는다고 해서 또 안 일어서는 건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못 일어서는 건 아니지만 밟아줘야 된다고.

우리 평소의 인식이 항상 자기를 선한 쪽에 서서 선한 행위를 하려는 의도가 굉장히 강렬해요. 강렬하다보니까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세계까지 지가 오지랖을 떨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지만 나는 용서한다. 이게 천주교 성자들의 일대기에요. 완전히 뒤집어놨어요. 하나님도 포기한 자, 어떤 성녀가 나서서 건졌다, 이런 이야기. 그것 왜 건집니까? 경상도 말로 지가 뭔데? 서울말로 자기가 뭔데 왜 관여합니까. 왜 하나님의 세계를 인간이 관여해요.
그건 하나님세계와 자기세계가 이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 이어진 것을 잘라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에 시편 36편 이전에 주신 율법이 있어요. 그 율법이 뭐냐? 할례입니다. 죄가 뭐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이건 아브라함 때 그렇게 돼 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시대로 계속 이어지면서 죄의 개념이 점점 더 깊어진다 하지요. 그러면 할례를 행하지 않는 것이 악이 돼요.
할례는 뭐냐 하면 제거됨이에요. 인간의 육신을 제거하는 게 할례입니다. 네가 속해있는 세계는 육신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끊어진 세계다, 라는 그것을 네 육신에다 표식을 해라. 그래서 할례는 이스라엘의 시그니처signature에요. 대표적 표시에요. 문제는 이스라엘이 육체에만 표시했지 할례가 왜 하나님께서 내 육체에다 인간의 생식능력을 잘랐는지 하면서도 몰라요.

그런데 그걸 알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계속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되면서 벌어지는 사태들로 그 내용이 깊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깊어지게 되면 할례를 행한 자만이 뭘 행하느냐 하면 제사를 행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악은 뭐냐? 제사세계에 들어오지 못한 악,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악, 할례를 행하지 않는 것이 악.

그래서 이스라엘은 제사 드려요. 제사 드리는데 제사의 형식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미 하는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제사 드릴 때 초반에 기본이 유월절이거든요. 유월절은 무엇과의 격리조치냐 하면 애굽과의 격리조치가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다음 애굽 떠나고 난 뒤에 끝났습니까? 아니죠. 그들이 어떤 공간을 통과하지요? 광야지요. 광야에서 사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이스라엘밖에 없지요. 광야에선 사람으로선 이스라엘밖에 없어요.
이스라엘 외에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사람 말고 다른 존재와 관계를 갖습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만 상대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했던 그 시절이 애굽 시절이었지요. 애굽과 분리시켜놨어요. 사람 대 사람으로 분리시켜놨어요. 그런데 사람밖에 없잖아요. 사람밖에 없는데 광야라. 그럼 묻는 거예요. “사람아?” “왜?” “대책 있나?” 대책 없어요.
사람 같으면 절대로 광야를 통과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면 광야에서 생계 할 생각을 사전에 못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누가 우리를 단일화시켜서(단일화가 중요해요) 우리를 광야에다 밀어 넣었느냐? 누구냐, 어떤 인간이냐? 어떤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럼 누구냐? 자연적으로 어떻게 돼요? 하나님이 요청되겠지요.
그래서 진짜 하나님과 만남은 뭐부터 정리돼야 돼요? 인간과 인간이 대화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과학, 인문과학, 과학 눈에 보이는 전부 이것부터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비로소 자기 정체를 드러내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 ‘인간의 이름+인간의 이름’으로 형성된 것이 사회입니다. 인간사회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인간의 이름+‘주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이게 출애굽기 15장에 나와요.
주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인간이란 먹구름 다 걷어지고 바로 주의 이름과 같이 연결이 되는 그 집단, 이스라엘입니다. 그때 인간과 인간이 마주했던 그 성질과 성격, 그러한 습관, 생활방식 밖에 몰랐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할지 깜깜한 거예요. 어떻게 대할지 모르는 거예요. 그럴 때 이들은 생존해야 돼요. 그래야 가나안 땅 백성이 되니까.

하나님의 이름 쪽에서 먼저 인간과 하나님이 관계 맺을 수 있는 방안과 방도를 주의 이름 쪽에서 제시한 이것이 뭐냐? 이게 바로 제사법입니다. 제사란 거룩의 이동이에요. 거룩이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보여줍니다. 제사법 안에 있어요. 제사하는 공간은 이걸 성소라 하지요. 성막에 보면 지성소, 성소 돼 있고, 그 앞에 뜰, 제단은 바깥에 있지요. 제단은 놋 제단이에요. 성소 안에 제단이 있어요. 이건 놋 제단이 아니고 금 제단입니다.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가? 놋 제단에서 들어와요. 일반인들도 출애굽기 29장인가 보게 되면 놋 제단까진 갈 수 있어요. 그러나 금 제단은 일반인은 못 들어가고 특별하게 거룩으로 완전히 덮어버린 제사장만이 금 제단으로 갈 수 있어요. 놋 제단으로 금 제단으로 이동하는 방법, 이게 뭐냐? 인간의 이름, 사람의 이름이 또는 아담의 이름이 주의 이름과 결합될 수 있는 방식을 하나님 쪽에서 그 방안을 제시했다는 거죠.

제사장이 이동하지만 사실은 제사장이 들고 있는 게 있어요. 뭘 들고 있겠습니까? 제물이죠, 피. 이동하면서 다섯 가지 제사가 동원됩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이것부터 레위기에 언급돼 있고 그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속죄제, 속건제 돼 있어요. 번제, 소제, 화목제의 특징은 놋 제단에서 다 태우고 들어가는 거예요. 다 태우고 피만 들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 피만. 속죄제, 속건제는 제단에서 기름만 태우고 나머지는 진 밖에 쓰레기장에서 태워요.

순서는 번제, 소제 해놓고 진짜 순서는 속죄제, 속건제 먼저 드리고 그다음에 번제, 소제 마지막에 화목제 드리게 돼 있어요. 화목제 드리게 되면 제사 끝나는 겁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으나 친히 무슨 제물 됐다? 친히 화목제물 됐다는 것은 그 안에 이미 속죄제, 번제 다 포함이 됐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제사 드리는 행위의 주재자가 누구냐 하면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의 모습 안에서 제사장이 이동을 하고 있다는 말은 전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무슨 나라라 합니까? 제사장 나라. 왕이란 인간사회에서 인간들이 만든 거예요. 왕이 필요 없어요. 왕이 필요 없다는 건 인간세계 필요 없다는 거예요.

왕이 필요 없다는 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존재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힘을 모으는 그런 세계는 악의 세계고 죄악의 세계가 돼요. 어디에 못 들어오기 때문에? 인간세계 왜 나쁜 짓합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나쁜 짓하는 게 아니고 나쁘다, 안 나쁘다는 어디서 결정해요? 제사에서 결정해요. 제사에서 말하는 거룩에, 하나님의 이동, 제사장의 이동에 참여 못하면 무조건 그게 뭐가 되느냐? 악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의 성경세계에 못 들어오면 뭘 몰라요? 자기가 왜 죄악인 줄 몰라요. 왜 죄인이고 악인지 알 수가 없어, 이게.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만 하고 있다고요. “양심상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5장에서 뭐로 시작해서 뭐로 끝난다? 시작은 뭡니까? 없지요. 없는 게 왜 말이 많아. 애초부터 없었던 게 말을 해도 없음을 있게 하신 분의 말이 인간에 실려야 되지 왜 없는 인간이 왜 말을 많이 하느냐.
여러 가지 말 많은 것 있지만 티비에서 내가 보기에 제일 말 많은 게 <동치미>란 프로에요. 왜 그리 말이 많아. 쓸데없는 말이. 또 말이 많은 게 <미운 우리 새끼>죠. 또 말이 많은 프로가 <무엇이든 물어보살> 왜 말이 많습니까? 이 있음을 지켜내기 위해서 악을 쓰고 있는 거예요. 그 악이 그 악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발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프로에 친근감을 느끼고 거기에 몰입하지요. 내 심정을 우에 그렇게 잘 이야기하느냐? 같은 아담이니까 그렇지요. 그럴 때 우리는 환경을 지금 나를 지켜주는 환경으로 착각하지만 우리는 새장 안에 있는 게 아닙니다. 무서운 가시밭길 위에 촘촘히 꽂혀있는 그런 세계를 왜 주께서 만드는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알려면 10분 쉬어야 되겠지요.

 

 

20221010b 부산강의 : [시편]52(36:1)-말씀의 환경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제사에 참여 못합니다. 할례 없으면 이스라엘 자체가 될 수 없어요. 그렇다면 할례와 제사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제사제도 내부에서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번제, 다 태운다는 뜻이에요. 소제, 식물을 예물로 드리는 거예요. 화목제, 하나님께서 이 제사에 대해서 즐겁게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는 향기로운 냄새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에 반해 속죄제와 속건제는 내다버려요.

제사가 속죄제, 속건제부터 먼저 드리거든요. 내다버릴 것은 내다버리면서 받을 것은 받으신다는 다섯 가지 제사 내부의 이 구분을 할례 행한 인격체에 그대로 심어버려요. 버릴 것은 버리고 버렸다는 것을 조건으로 받아주는 이 제사과정을 할례 행한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각인을 시켜버리죠.

그러면 할례는 뭐냐 하면 도려내는 거예요. 도려내면 여기서 빈 공간이 마련돼요. 잘라내 버렸으니까. 육신 때문에 가로막혔던 인간을 받아줄 수 없는 그 인간을 도려냄을 통해서 육신의 고리를 잘라냄으로써 받아줌이 성사될 수 있도록 빈 공간을 마련하는 거예요. 앙꼬 집어넣기 전에 밀가루부터 붓는 거예요. 붕어빵에. 죄로 붕어빵 만들고 앙꼬는 제사의 이동로로 거기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여기서 성립되는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 나옵니다. ‘동질성’이에요. 왜 이게 어려우냐 하면 사오십 년 교회 다니고 복음 알면서도 매일같이 떠오르는 의문점은 내 몸 따로, 예수님 몸 따로 인데 어떻게 예수님과 내 몸이 하나가 될 수 있느냐, 그 문제. 이거는 성경을 백독을 하고 아무리 심도 있게 읽어도 계속해서 막히는 게 주님 참 좋으신 분이고 훌륭한 분이고 우리를 위해 대신 희생한 분인데 내가 어떻게 그분에게 다가갈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분이 나한테 다가왔을 때 내가 어떻게 인지할 수 있느냐, 알 수 있느냐, 그걸 받아줄 수 있는가, 나의 오기 섞인 착각이 아닌가, 내가 구원 받기 위한 욕망 때문에 주님 오지도 않았는데 왔다고 스스로 조작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 문제, 이게 바로 동일성 문제에요. 그리고 에베소서에 보면 주님은 머리고 우리는 지체라는데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그렇다는데 그걸 현실로 우리가 받아주기에는 내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성경만 있을 뿐이지 나는 결국 버림받는 자인가? 이런 생각 들지요.

동질성의 반대가 이질성이죠. 같지 않다. 이질성을 시편 36편에서 죄악을 행하는 자에요. 죄악을 행하는 자가 12절에 보면 뭐라고 돼 있지요? 넘어지면 두 번 다시 일어날 수가 없다. 이왕 어렵게 한 것 더 어렵게 가봅니다. 할 수 없어요. 쉽게 한다고 이해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제사는 뭐냐? 시간의 축소에요. 다른 말로 역사의 축소, 과정의 축소. 시간이 관여하는 것을 제사 안에 전부 다 압축을 시켜놓은 겁니다. 그러면 제사가 완성되면 그 안에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지요. 그 의미 없음의 대표적인 것이 12절입니다. 한 번 엎어지면 끝, 끝이에요. 악인은 엎어지면 그다음 몇 년 뒤에 일어섰다, 그런 시간이 없어요. 시간요소가 없기 때문에 ‘그 뒤에’란 말이 없어요. 엎어지면 그걸로 끝이에요.
동질성과 이질성을 나눌 때에 제사를 여기다 집어넣음으로서 인간 쪽에서 본인이 본인한테 어떤 일을 벌이거나 용기를 내거나 어떤 신앙적인 노력을 해서 이질성을 동질성으로 바꾸는 그런 것을 어디서 차단하느냐? 제사가 차단시켜버렸습니다. 인간이 자기 인생에 손대서 개과천선하는 경우는 언약세계에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밖에 있는데 나는 소원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데 내가 나한테 어떻게 손대서 노력해서 이질성 위치에서 동질성에 참여할 수 있을까? 이게 성경에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없는데 교회에는 있어요. 교회가 엉터리죠. 성경에는 없는데 교회는 그걸 만들었어요. 왜? 교회는 사람 위로 못해서 환장한 동네거든요. 동정을 못해서 환장한 동네에요.
지금은 못하지만 앞으로 몇 년 뒤에는 됩니다. 몇 년 뒤가 뭐예요? 이게 시간이죠. 시간과 역사를 자꾸 마감을 안 시키고 그걸 계속해서 어떤 여지로 남겨두는 거예요. 지금은 안 되지만 노력하면 됩니다. 자꾸 노력하는 시간 텀을 부여해서 희망을 갖게 만들어요. 하나님과 끊어졌지만 노력하시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럼 하나가 뭔데요? “목사님, 하나가 뭡니까?” 교인들이 물으면, “하나요? 주님과 하나 되는 겁니다.” “그게 어떤 상태인지 본인이 아십니까?” 알 턱이 있어요. 인간의 동질성,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어떻게 알아요.

제사에서는 이 동질성이 풀립니다. 일단 도려낸다는 거예요. 도려내서 빈 공간을 만드는 자체가 주님께선 이미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겁니다. “네가 손대지 말고 내가 손댈게. 네가 하나의 대리석원석이라면 그걸 깎아서 작품 만드는 것은 내가 할게.”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자인 동시에 창작자가 되는 거예요. 창조자도 되고 창작자도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깎아 만드는 거예요. 도려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깎아내면 우리 주위에 뭐가 됩니까? 나에게서 떨어져나간 부스러기 파편들이 인생에 쭉 깔리겠지요. 그게 인생입니다. 인생이란 주께서 제거시킨 쓰레기들이 주변에 쌓여 있는 거예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이 주께서 깎아주니까 저게 이생의 자랑이고 욕심이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눈을 가지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주님과 동질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깎아내는 작업이 무슨 과정이냐 하면 이게 바로 광야시절, 광야 통과 과정. 그래서 레위기의 제사법과 민수기의 제사법이 달라요. 레위기의 제사법은 이렇습니다. 생활공간과 격리되어 제사공간을 부각하는 것, 이게 레위기 제사법입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핵심이죠. 민수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레위기에서 확정된 제사공간이 어디를 공격하느냐? 생활공간을 공격하는 것, 거꾸로 공격하는 것 이게 민수기에 나오는 추가적인 제물에 대한 세부사항. 이것이 어디서 이뤄지는가? 이스라엘 안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 끝부분 다시 할게요. 이스라엘이 광야 할 때 다른 민족, 아말렉 말고, 다른 종족 같은 것, 인간 말고 다른 인간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인간은 그 광야에서 누구와 협의하고 누구와 의논하고 누구로부터 대책이 있어야 앞으로 진전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아니면 진전 못하지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뭔가 어떤 방향을 정해주는 것도 일방적이죠. 뭔가 장애가 등장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장애를 주시는 거예요. 깎아내기 위해서.
여기에서는 제사공간만 남기는 거예요. 제사공간만 남기기 때문에 여기는 할례의 의미가 제사법으로 표현했다면 여기 민수기에서는 할례 의미를 일상생활에서 만나게 해요. 내가 잘렸다, 깎여나가야 된다, 라는 것을 제사 이렇게 드리고 양은 이렇게 드리고, 그것 알지요. 저는 동일성 됐습니다, 라는 말을 함부로 못하게 만들어요. 네가 실제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제사공간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발휘되는가를 직접 마주치게 하고 체험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공간이 산 위에 있다면 산 아래까지 내려오는 겁니다. 민수기에 그런 사례가 굉장히 많은데 시간관계상 다 못하지만 여러분 아시는 고라 자손이 모세에게 대드는 사건, 그리고 광야에서 그들이 너무 피곤하니까 불평분자들이 진의 행렬에서 점점 뒤로 가요. 원래 은혜 없으면 뒷자리 앉잖아요. 처음엔 앞에 앉다가. 처음에 교회 올 때 양복 입고 오거든요. 일주일도 안 돼서 사복 입고 나중엔 쓰레빠 신고 뒤에 앉고. 형식은 벗어났는데 본인의 이질성은 못 벗어난 거예요.
교회 와서 예배 어떻게 드리고 복음 어떻게 듣나 그건 아는데 하나님이 자기의 일상생활 속에 하나님의 거룩이 침투되진 않은 거예요. 그저 지 편한 대로 사는 겁니다. 그건 아까 아브라함이 자기들끼리는 두려워했는데 밖에 나가선 나만 손해될까 싶어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으로 속이는 행위와 동일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요. 우리끼리 하나님 찬양합시다, 이렇게 한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 없다고 여기는 일상사람 만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같이 계신 줄은 상상도 못하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동질성이란 내가 아는 동질성과 실제로 실생활에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동질성이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스스로 도 닦고 회개하고 반성한다고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게 아니고 하나 되는 그 작업의 주도권이 주님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일상생활 속에서 아프지만 이질성이 깎여나가는 것, 다시 동질성이란 주의 이름과 나의 이름이 함께 하기가 동질성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나의 이름 중심으로 타인의 이름과 함께 하기에요. 나 중심을 인간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남들 만나서 나한테 어떤 이익을 줄까? 인간은 포기할 수 없어요. 항상 집에 가서 수입 계산할 때 누구 중심으로 계산합니까? 오늘도 얼마나 벌었는지 보자, 내 중심이잖아요, 내 중심. 그런데 주님이 내가 보기에는 주의 이름으로 왔다는 타인의 이름으로 나한테 쳐들어오면 결국 우리는 내 이름 중심이 주의 이름을 핍박하는 방식이 돼버려요.
주님 복음 안다고 해서 나한테 도움 준 게 뭐가 있습니까, 내가 복음 알아도 이익 본 게 뭐가 있습니까? 이런 말이 서슴없이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말이 어디서 나쁘냐 하면 계속 주님을 내 바깥에 세워놓은 주님과 나는 이질적이라는 것을 본인 입으로 자백하는 바가 돼버렸어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고, 내 집에 있는 그릇 하나도 주의 것입니다.” 교회 있을 때는 이야기하는데 바깥에 나왔을 때는 이야기를 못하는 거예요. 모든 일어난 일이 내 것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막상 사회에 나가서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 만날 때는 그 이야기를 못하는 거예요. 동질성을 유지하려다보니까 어느새 자기가 주님과 이질성이 된다 말이죠.
이질성이 되니까 미안하잖아요. 미안해서 억지로 기도하고 헌금해서 회개한다고 이게 이질성이 동질성 됩니까? 기도 두 시간 반했는데 문제는 기도응답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다. 두 시간 반 동안 해도 결국 마지막 결론은 뭐냐 하면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 본성이 뭐냐 하면 애매한데서 확실성을 갖출 때 그제야 나는 믿겠다는 의도가 육신 속에 계속 남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모호한 것,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표적, 놀라운 하나님의 일 애매하지 말고 확실하게 넘어가고 싶은 거예요. 인간의 심보가 확실해야 믿음이 더 가고 모호하면 믿음이 못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확실한 하나님의 일을 모든 걸 수집하기 위해서 만든 단체가 이걸 교회라 하는 거예요. 교회는 하나님의 일의 센터로서 우리가 믿을만한 건 다 갖고 와, 집에서 은혜 받은 것 다 갖고 와. 그래서 확실성의 집합체로서 교회를 설정한 거예요.

사람들이 집에서 예배드리지 않고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뜻이 뭡니까? 애매모호해서 확실한 것을 체험하고 싶은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이질성이란 것은 본인이 그걸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동질성 되기 위해서 나름 노력하고 있다는 노력하는 모습을 교회 중심의 생활로 보여주고 싶은 겁니다.
이 사태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이게 뭔가 해결돼야 오늘 강의 끝나죠. 어떤 수단을 해도 교회 일로 귀결돼요. 근데 유대인 교회가 누굴 죽였습니까? 메시아를 죽였잖아요. 예수님을 죽을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 너희들의 수고의 결집이 점점 더 나와 말씀과 이질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너는 땅에 속해서 땅의 일만 생각하지. 이렇게 주님께서 그 말씀을 안 하면 좋겠는데 의도적으로 그 말씀을 끄집어내서 차이성과 결별돼 있음을 계속 차이를 강조하고 있으니까 그 차이성을 인간들은 견딜 수 없는 거예요.
이질성과 차이를 메워 동일성 될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그들은 분노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 있잖아.” 제사 드리는 게 동질성입니까?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 내부에서 아까 할례 했지요. 할례는 도려내는 것, 파내는 것. 그런데 육신의 생식기 끝을 파내는 게 아니고 사도 바울에 의하면 뭘 파내야 돼요? 우리의 마음 자체를 파내야 돼요. 마음 파내버리면 내 마음자리가 어떻게 됩니까? 인간의 시작은 없음이죠. 마지막은 저주지요, 지옥 불이죠. 이걸 파내게 되면 없음이 되려면 있음이 파내져야 가능해요.
인간 마음에 원래 마음에 생긴 그 없음의 자리를 만들고 그 없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둘 중에 하나, 다시 말해서 하나는 복이고, 하나는 저주인 계획도 같이 여기서 주님이 개시하고 있음을 알아야 돼요. 그리고 동질성이 딴 게 아니고 주님의 계획이 내 안에서 작동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작업하는 것. 이게 여러분들의 잘 아시는 마태복음 13장이에요.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다 걷어내 버리고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말씀의 밭으로 만들어버려요. 말씀의 밭이 있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농부가 되어 씨를 뿌릴 때에 밭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열매 맺는 데 있어서. 그리고 반대로 밭은 몰랐던 그 밭의 실정과 속성을 씨와 만남으로서 노출되고 발각되는 거죠.
어느 인간이 자기가 길가에 떨어진 밭이 되고 싶고, 어느 인간이 나는 돌이 박힌 밭이 되고 싶어, 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 누가 있겠어요. 어느 인간이 열매를 숨 막히게 만드는 가시덤불 밭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모든 인간이 전부 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그런 밭을 원하잖아요. 그거는 네 안에서 네 자체적인 나와 나의 동질성이에요. 그러니까 나와 헤어지질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헤어지질 못하지요.

패티 김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 길옥윤 작사, 작곡 <이별>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요. 냉정한 사람이지만. 내가 나보고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돼요. “안녕 나, 잘 가 나. 전에는 내가 주인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어제 낮 설교처럼 나는 누구누구의 집사. 집사가 뭐냐 하면 누구의 종이란 뜻이에요. 자기 일이 전혀 없어요. 누구의 집사에요.
그래서 설교시간에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집사가 된 사람은 자기의 모든 난제가 해소된 사람을 말합니다. 인생문제, 자기 문제가 다 해결된 사람이 집사에요. 왜냐하면 자기 선에서 해결된 게 아니고 주인이 자기의 골치 아픈 문제를 다 해결해줬으니까. 그게 제사 안에선 어떻게 되나? 안수에요, 안수.
제사 할 때 속죄제, 속건제 양을 몰고 오잖아요. 본인이 안수해요. 잡는 것도 본인이 해요. 제사장이 다 못해요. 피 바르고 제단 올리는 건 제사장이 해요. 안수를 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와의 이별입니다. 자기와 이별이면서 자기 앞에 안수하고 그 양이든 염소든 안수하는 그 순간 헤어져야 돼요. 엄마가 아들 데리고 논산훈련소 앞에서 안수해야 돼. 머리 깎은 아들보고 안수해서 “너는 국가의 자식이지 내 자식 아니다. 뒤돌아보지 마. 앞을 봐. 조교 손짓하는 것 보이지, 빨리 가. 이제 엄마 품을 떠나서 조국을 위해서 살아라.”

개인의 존재에서 환경을 표현하는 존재로 그 환경 속에 집어던져버리죠. 나의 세계가 여기서 도려지고 와해되고 붕괴되고 그 제사의 환경 속에 들어갈 때 그게 바로 할례의 원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만 할 줄 알았지 할례의 뜻도 몰랐어요. 그래서 예레미야나 신약의 로마서에 보면,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 너희들은 할례를 행하면서도 그 의미가 인간의 힘으로 할례가 안 된다는 것을 왜 몰랐는가?
기도를 하면서 인간의 힘으로 기도가 안 된다는 걸 왜 몰랐는가? 기도할 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지 왜 몰랐는가? 내가 내 이름으로 하거든요. 나의 이름과 주의 이름이 인간의 힘으로서는 동질성이 안 돼요. 주께서 주의 이름으로 하라는 말은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을 부정하란 뜻이에요. 내 이름이 없는 이상은 주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 다시 할까요? 죄가 죄답게 등장하지 않으면 숨어있는 실제 의가 되질 못해요. 더러움이 있지 아니하면 더러움이 규정이 돼야 이게 거룩함이 된다고요. 할례를 행한 것은 네가 더럽다는 겁니다. 그것도 네가 잘못해서 더러운 게 아니고 대대로 더럽다. 부모가 더러워서 네가 더럽다는 거예요. 더러움의 자식이다. 그걸 신약에선 어두움의 자식이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딴 게 아니에요. 아이디어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개인을 버리고 환경에 속하면 돼요. 참 쉽지요. 환경이 만들어낸 거예요. 내 인생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고 주변의 환경이 만들어낸 거예요. 그 환경이 어디 나오느냐? 오늘 본문 5절부터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하늘이 환경이죠.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뭐라 했습니까? 큰 바다지요.
하늘 나오지요, 산 나오지요, 바다 나오지요. 다 누구 것입니까? 여호와의 것이죠. 여기 여호와의 것이라 돼 있지요. 이것이 신약시대에 어떻게 성취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환경이 되면 동질성이 저절로 되는 거예요. 하나의 환경 속에 들어와 있으면, 개인적인 동질성은 개인이 죽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아니라 누가 와도 나와 똑같지 않아요.
그걸 여러분들 결혼한 내내 체험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오십 년 살았는데 내 마음을 몰라? 내가 짬뽕 좋아하는데 맨날 짜장면 두 그릇, 내가 짬뽕 좋아하는 줄 왜 몰라? 개인이 살아 있으면 개인은 아무리 내 마음 알아주고 짬뽕 사줘도 딴 것 없나, 해서 남이 내 마음 같지 않아요. 자식도 마찬가지고.
자식 키우면서 그것 모르던가요. 자식이 이기적입니다. 잃어버렸던 나의 이기성을 자식을 낳으면서 다시 재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저렇게 못됐었구나. 네가 어디서 이런 게 나왔나, 이러지 마시고요. 내가 잃어버렸던 나의 죄를 아주 실감나게 생생하게 재방송해주는 거예요. 자기 과거의 모습을. 물론 반만 그렇게 하죠. 반은 네 탓이고 이렇게 하고 반만 챙기는 거죠. 좋은 것은 지가 챙기고 나쁜 건 딴 사람한테 넘기고.

개인이 있으면 동질성이 안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 개인을 죽이고 환경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게 할례입니다. “가만있어 봐. 내가 파먹을 테니까. 내가 다 파줄게.” 속속들이 네 마음을 파주겠다는 거예요. 파주고 거기서 뭐냐? 제사 속에 나타난 제사장의 이동경로를 거기다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면 하나의 개인이 육신이 뭐가 되느냐? 환경이 돼버려요. 전에는 몸이라 했는데 이 몸이 확장돼버립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성전이 돼버리죠. 본인도 본인을 무시할 수 없어요. 전에는 나 혼자 있던 몸인데 이제는 주님의 작업장이 되고 말았으니까 내가 내 몸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겁니다.

자, 신약에 있어서 환경이 어떻게 되느냐, 그게 궁금할 건데 궁금해 미치겠지요. 에베소서 3장 18절, 19절에 나옵니다. 그 환경이 나옵니다. 17절부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주님이 들어오면 그냥 들어오는 게 아니고 내 마음을 파헤치기 때문에 주님이 들어온 이상은 이질성 같은 건 성립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파헤쳤기 때문에 그래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절 보세요.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게 구약에서는 뭐냐? 하늘과 바다와 땅과 산들을 대체하고 완성시키는 모습니다. 왜? 구약에 나오는 하늘과 바다와 땅과 산은 불에 타버리기 때문에.
잘 못 믿겠다는 표시를 보내고 있는데 못 믿으시면 로마서 14장 보겠습니다.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먹는 것 마시는 것을 여러분들의 개인적으로 하지요. 먹을 때 마실 때 개인이 다시 살아나요. 왜냐하면 내가 먹는데 옆에 사람이 배부르다,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먹으면 내가 배불러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이에요, 사적이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요, 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내 개인이 살아 있는 그걸로 끝장내고 그걸로 마감하는 것은 뭐가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희락, 기쁨이에요. 자, 오늘 강의 제일 중요한 문제를 던질 테니까 여러분 답변을 해보세요. 기쁨이 복음의 최종적, 그러니까 성도의 최종적입니까, 아니면 온전함이 최종적입니까? 온전한 쪽이에요, 기쁨이에요? ①기쁨, ②온전함. 거수합시다, 말할 필요 없어요. 아무 의미 없기 때문에.

온전함은 무엇이 살아 있느냐 하면 내가 주님 덕분에 온전했다, 내가 살아 있게 돼요. 그래서 개혁주의신학 같은 기존 교회에서는 목표가 뭐냐? 성도를 온전하게 만드는 게 목표에요. “말씀을 받은 자는 신이라 했으니까 당신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하는 말이, “제가 당신을 신처럼 만들어드릴 테니까 교회 온 보람 느끼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교회 힘들게 와야 되고 봉사해야 될 여러분 목표가 생겼지요.” 이렇게 돼 버려요. 왜? 나한테 유익이 되기 때문에, 나한테 유리하기 때문에, 나를 잃어버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의 동질성입니까? 결국은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동질성이 되죠. 이게 브라만교에요. 이게 불교입니다. 불교의 해탈이 이런 거예요. 모든 종교는 본인의 온전함이에요. 천주교 수도원의 목표가 뭐냐 하면 기도하고 노동하는 것, 한 가지 더 보태면 침묵하라, 이런 것. 기도하고 노동하고 침묵하라. 한 가지 더 보태면 남과 절대 만나지 말고. 보통 두 가지로 기도하고 노동하라. 이게 모든 수도원의 목표에요.
자, 그렇게 하는 이유를 이야기해보세요. 자기는 복음대로 성경대로 한다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내가 신을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본성 이건 어디서 나온 거예요? 첫 번째 아담이 몰랐던 아담을 둘러싼 환경이 있었지요. 거기에는 무엇의 힘이 작동해요? 선악과 따먹을 때 아담에게 작동하는 힘이 무슨 힘입니까? 악마의 힘이죠. 온전함의 모든 시도를 최극단까지 올렸던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의 누구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누구의 자식이다? 악마의 자식이다. 수도원들이 악마의 자식인 줄 모르고 그 짓하고 있어요.
우리 내부는 매일같이 올라오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주님의 거룩의 공간이 우리를 계속 파헤치고 그걸 파괴시키는 거예요. 우리의 생활공간 속에서. 예를 들면 야구장에 간다고 칩시다. 생활공간이죠. 어제 복음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노는 날 야구장에 갔습니다. 야구장의 생활공간에서 주의 일은 뭡니까? 실습 돼야지요.
오늘 배운 걸 그대로 적용하면, 야구장엔 주의 이름이 없지요. 인간의 이름만 있지요. 롯데, 이러고 있는데 여기서 삼성, 하면 안 되죠. 가만있어야. 인간의 이름이니까 눈치를 보지요. 나는 삼성하고 싶지만 저들이 롯데가 하나님을 경외치 않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자칫하면 맞는 수가 있어. 욕 얻어먹을 수가 있어요. 눈치껏 해야 돼요. 그래서 9회 말까지 응원했다. 목쉬는 이상현상이 일어나죠. 삼성이 롯데를 7:8 케네디스코어로 이겼다. 기분 좋지요. 그 기분 좋은 것 얼마나 갑니까? 다음에 칠 때까지 가는 거예요. 이게 사적인 공간입니다.

그러면 야구장에 누가 가게 하셨습니까? 주님 가게 하셨지요. 어젠 교회 갔거든요. 예배공간이었잖아요. 오늘은 실습해야지요. 생활의 공간 내려왔잖아요. 야구장에 가서 아브라함이 부인을 동생이라 했던 그 체험을 실제로 하게 되죠. 그런데 이기고 난 뒤에 기분은 좋았는데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이게 뭐라고 내 목이 쉬었느냐? 왜 내 기분이 야구 한 게임, 한 게임마다 왔다 갔다 하느냐? 그렇게 되겠지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동질성 와해현상. 내가 종잡을 수 없음을 현장에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나는 굳게, 굳게 다짐하고 나는 이렇게 살겠다고 다짐했던 것을 다 허사로 만들어버리죠. 그러면 동질성이 와해되게 되면 여기는 비동질성이 돼요. 내가 누군지 본인이 몰라요. 이게 정상입니다. 만약에 내가 누군지 알아버리면 나는 외부에서 오는 것에 강력하게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반발하게 돼 있어요. “주님께서 야구장 보냈잖아요. 주님께서 삼성 이기게 했으니까 나는 찬양 드립니다. 됐잖아요.”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동질성이 와해되면서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허탈과 허무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이 아프다는 것은 내 신체가 아프죠. 아프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운 거예요. 아프다는 것은 고통이 살고 싶은 내 심정을 내 마음욕구를 이겨버린 거예요, 지배하는 거예요. 몸이 아프니까 지배하는 거잖아요.
그럼 나는 안 아프고 싶은데 내 주변의 환경이 어떤 환경이다? 나를 아프게 하는 환경이죠. 아담치고 고생 안 한 사람 있습니까? 잠시잠깐 기쁠 수는 있어요. 마약 같이. 야구장 가는 것도 마약이거든요. 당구내기, 그것도 마약이라고. 마약 같이 잠시 기쁠 수 있어요. “엄마, 나 사법고시 합격했어.” 사법고시 요새 없어졌구나. 변호사 돼서 좋아요, 이런 것 있잖아요. 그런 것 다 마약 같은 거예요. 나한테.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의 몸이라는 환경은 내 게 아니고 주님이 만든 환경은 나를 찌부러뜨려서 나를 점점 더 손을 쓸 수 없게 죽음에 가까이 접근하게 나를 뭉개버리는 환경이란 말이죠. 그 환경 속에서 애초부터 우리는 허탈하고 허무를 감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기쁨의 모든 노력이 나의 허무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이게 할례 받은 상태입니다.
나의 허함, 빵구 난 인간, 망쳐버린 내 인생. 내가 좋아하는 일이 나를 망하게 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 그 야구 때문에 망하고, 손흥민 좋아하면 축구 때문에 망해버려라. 축구 본다고 새벽 두 시까지 잠도 안 자고. 축구 때문에 망하고, 야구 때문에, 목사는 목사 때문에 설교한다고 망하고, 판사는 판사 한다고 망하고. 전부 다 각자 망하는 방식이 다 달라요.
그러나 공통점은 뭐냐? 사적인 기쁨, 망하게 하신 그 환경을 새로운 기쁨으로 맞이하는 거예요. 그럼 안 망하겠다는 기쁨에 반발하는 건 뭡니까? 나의 온전함에 대한 나의 목표지요. 온전함을 기뻐하는 게 아니고 온전함은 새로운 부정성을 낳아요. 나의 동일성은 온전 하자, 온전 하자, 오분 동안. 온전 하자, 십분 지났어요. 십분 지나고 온전함의 기쁨 있습니까? 벌써 없어졌어요. 나의 온전함의 기쁨은 십분, 이십분 지나가면 새로운 사태가 벌어진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누가 차를 긁어놓는다든지, 이러면 온전함 다 깨져버립니다. 상견례하려고 가는데 옷이 찢어졌어. 사돈 만나야 되는데 칠칠치 못하게 어떡해. 핀으로 임시조치하고. 누구 만난다고 머리했는데 누가 만져서, 사람이 제일 자기 본모습 드러날 때가 여자분들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 전체가 망가져서 뻥 뚫렸을 때 손으로 이리저리 만져도 수습이 안 돼요. 아직 머리 고칠 때는 정신 좋은 줄 알았지요. 치매 걸리면 이걸 할 줄도 몰라요. 인간은 찌부러집니다. 무너지고 있어요.

<런던은 무너졌다>(London Has Fallen)는 영화도 있잖아요. 런던만 무너진 게 아닙니다. 이 세상 전체가 무너집니다. 생활공간은 기존에 네가 사적으로 알던 환경은 제사환경으로 거룩의 환경으로 내가 교체해버릴 거야. 무너지게 할 때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서 새로운 나의 죄인과 여기서 계약이 맺어졌어요. 주님의 일방적인 계약, 이 계약, 이 언약을 뭐라고 하느냐? 오늘 본문에서 이걸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생명을 소유해버리면 누가 살아 있어요? 내가 또 살아 있잖아요. 생명은 나를 파괴시키고 없애버리는 게 생명인데 나를 없애버리면 주님 쪽에서 계약만 드러나죠. 약속만 드러나죠. 그런데 그 약속을 누가 믿으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믿씁니다, 믿씁니다 쌍시옷 해가면서. 그런데 믿을 게 너무 많아요. 창세기 1장도 믿씁니다. 2장도 믿씁니다. 주께서 답답해서 도대체 네가 몇 번 믿어? 하여튼 족족 다 믿습니다.
인간의 믿음은 주께서 파괴할 대상이에요. 인간이 파괴되기 때문에 인간에서 나온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파괴되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은 뭐냐? 주의 믿음을 뭐로 받느냐? 선물로 받지요. 선물로 선물답게 되려면 어떤 경우입니까? 내 믿음이 파괴됐다는 것을 기쁘게 인정하는 거예요. 나에게 나오는 것은 믿음도 아니고 소망도 아니고 사랑도 아님을 감사히 받는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구절 여기서 등장해야 되겠지요. 한 달 전에 여기서 한 것 같은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누가복음 2장 28절, 29절 읽어보세요.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지금 시므온이 자기를 쳐다봅니까, 자기는 모르고 뭘 바라보고 있어요. 뭘 바라보고 있습니까? 시므온 눈앞에 누가 있습니까? 아기 예수죠. 지는 어른이죠. 이 세상에 아기가 한둘이 아니잖아요.
아기 예수를 보면서 시므온은 뭐냐? 다른 사람은 아기 예수에요. 시므온은 뭐가 없습니까? 본인 자기 자신은 아기 예수한테 녹아져버린 거예요. 그동안 내가 수고하고 애쓰고 행하고 내 믿음, 소망, 사랑 그걸 묵사발 만들어주신 분이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는 무의미함이 주는 여기 기쁨인데, 이 기쁨은 어떤 기쁨이냐? 나의 무의미함, 나의 의미 없음이 주는 기쁨이에요. 이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기쁨을 소유한 게 아니고 그 관계, 주님께서 내민 관계에서 기쁨이 계속 쏟아지는 거예요. 이래봐야 기쁨이 돌아서면 또 삼성이 이번에 들어가야 되는데,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런데 이 기쁨의 주님이 어떻게 됩니까? 세상에 느끼는 모든 것이 허탈하고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작용해주십니다. 어떻게 작용하는가? 이미 압축된 시간, 압축된 역사 이게 뭐라 했습니까? 제사지요. 제사 안에는 뭐가 있다? 거룩이 어디까지 미친다, 거룩이 어디까지 파고들어옵니까? 우리의 일상생활까지 파고들어오지요.
확정된 압축된 것 시간, 묵시지요. 그 묵시의 확정된 사태가 관계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역사를 무시해버리고 확정된 것만 우리 안에 계속 드러나도록 하나님께서는 야구장도 가게 하고 축구도 보게 하고 사돈도 만나게 하고 일상생활 하는 거예요. 사돈 앞에선 그런 말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오면서 기쁨이 생겨요. 사돈이 뭐데, 내가 뭔데 누가 주선했는데? 중요한 것은 생명이란 계약이 중요하지, 사돈 보고 지옥 가려하나, 이런 식으로.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환경이에요. 내가 생각한 환경이 아니고 새로운 환경에서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다시 드리겠습니다. 마음 그 카펫 걷어내고 무슨 밭? 말씀의 밭. 다윗의 인생은 무엇으로 깔아버리느냐? 시편 36편으로 완전히 새롭게 인테리어 새로 해버려요. 말씀으로 깔아요. 그 말씀 안에 누가 일하시는가? 주의 이름이 다윗이란 죄인을 통해서 시편 36편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깔아버리는 겁니다. 움직이는 말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오셨을 때 누가 알아봤습니까? 자기 온전함과 완전함, 자기 위대함, 자기 거룩에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오신 거룩한 주님을 못 알아봤습니다. 이제 새로운 환경, 성령이 주는 환경으로 말미암아 주와 하나가 된 환경을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시므온 같은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부산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자 관계  (0) 2022.12.15
창조자의 리듬  (0) 2022.11.16
  (1) 2022.09.15
꺾이지 않는 의b  (0) 2022.07.13
꺾이지 않는 의a  (0) 2022.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