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일

180114 이미아님 글 '수련회요약' 댓글

아빠와 함께 2023. 2. 9. 09:47

이근호 180114 

성도는 진공 속에서도 등장하는 싸워야 될 상대가 있다. '악마'다. 그런데 그 악마는 마치 붕어빵 구울 때 앙꼬 한 덩어리씩 순서대로 집어넣은 것처럼 모든 아담에 속한 자들에게 '자기 의로움' 심보를 심어주었다. 그래서 인간은 악마는 자력으로 이길 수가 없다. '자기 정당성', '자기 합리화', '자기 변명', '자기 존재증명' 빼고 인간의 입에서 더이상 나올 것은 없다.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사력을 다하여 글을 남겨주신 성도님께 감사하고 이 어두운 세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알리고 싶다. "저주를 요청할 수 있는 자만이 자유 속에 있는 자입니다! "

임청일 180116

"독감에 걸린 외손녀가 아무리 안쓰럽고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볼 수 없으셨다. 왜? 선지자시기 때문이다.
역사와 예언이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그 자리의 깊이가 울컥하도록 전해져왔습니다."
이미아님의 글은 항상 마지막 멘트가 여운으로 오래 남게 되네요.
왕하7장9절의 "잠잠하고 있도다"라는 말에 찔려서 10절-20절까지 말씀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올려주시는 글들이 많이 도전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감사해요.

 

 

수련회요약

 

시공간이 허물어진 마당에 무엇을 그리워한단 말인가. 다 의미 없다. 주님께만 의미 있을 뿐. 질량에 의해 텅텅 빈 우주마저 휘어짐을 증명해내고 더 놀라운 것은 무게로 인해 질량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세상은 나를 호명했고 자리를 정해줬다. 착각했다. 그것이 내 자리인줄로. 눌러앉아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이 세상만이 전부인 것처럼 보였을 때, 그때는 주님의 호명이 달갑지 않았다. 그저 세상 호명에 목숨 걸고 그것에 종이 되어 빌빌 기다시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호명을 기뻐했다. 그러나 이제 알게 되었다. 주님의 호명을 위한 세상의 호명이 먼저 있었음을. 세상의 호명이 없이 주님의 호명의 기쁨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알 수 없다. 죄의 보편성에 놓여있는 우리는 무엇의 옳고 그름을 논할 자격이 조차도 될 수 없고, 이 죄의 보편성에서 그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하면 무리인 것인가? 죄다. 이 세상은 죄의 보편성으로 인해 죽음의 보편성은 확정된 것이다. 전부 다 죽은 자들의 집합이다. 죽은 자들의 일상이다. 그 어디나 불안한 눈빛들만이 난무한다. 차디 찬 바람에 눈동자는 흔들린다.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무서운 것이다. 주체는 실체와 일치될 수 없음에도 자아는 늘 어디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걸까.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가마솥이 박혀 있는 아궁이엔 시뻘건 장작들이 서로 다투어 숯이 되겠다고 소리 내어 타고 있었다. 한편의 영화처럼 길었던 인생임에도, 그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한 컷이 그리워 매일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때로 돌아가는 꿈을. 그러나 실체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데올로기다. 내가 그려놓은 패턴에 변수가 생기면 본색이 드러난다. 이 패턴! 다 필요 없게 만드신다. 주님께서는 이러려고 그렇게 무진 애를 써서 패턴을 만들도록 도와주신 것이었다. 패턴은 내가 만들었을지 몰라도 변수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복음은 내가 믿었을지 몰라도 구원은 없다.

 

<제 1강> 패턴

 

우리에게 구원도 주지 못할 이 세상 왕이 있음 자체가 바로 죄다. 이 땅에 왕을 등장시킨 이유는 왕에게 의지하여 이 땅에서 편하게 살고자 하는 것뿐이다. 하나님보다 정치 잘하는 왕을 추앙하게 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왕, 실제로는 우주만물의 중심이신 만왕의 왕이 있음에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 왕을 의지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숨겨져 있는 죄의 원천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한다. 제2의, 제3의 다윗과 솔로몬 왕 같은 지도자들만을 원하는 것이다. 바로 죄라는 것은 이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왜곡되게 해석하게 만드는 모든 요인들,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떠나야 할 곳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게 바로 죄가 되는 것이다. 그 일에 왕이 나서고 영웅들이 나선다. 그렇다고 우리가 투명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산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은 바로 우상이다. 진짜 하나님은 얼굴이 뜯겨져나가야 공개되는,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금 150조가 들었다. 화려하게 성전 잘 지었다고, 그 보상으로 성전에 계신 하나님이 직접 전쟁에 나가 싸우고 승리해서 얻어온 전리품을 백성에게 돌려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신 것이다. 성전 덕분임에도 백성은 왕 덕분으로 여겼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왕을 준다. 왕이라는 위상이, 지위가 죄를 실어 나르고 죄의 원천을 찾기까지 인도한다. 왕과 백성은 떨어질 수 없다. 나는 무조건 행복해야 되고 영생 얻고 천국가야 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능력이 주어지게 되면, 하나님이 보내신 왕 덕분에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유대교다. 이 유대종교에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을 때, 볼품없고 초라하고 더럽고 역겹고 힘없는 그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서는 화병과 우울증에 걸려 자살할 수밖에 없는, 유대교의 실체를 드러나게 만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유대교인들이었다. 인간은 무작위적인 자연세계 속에서 의미와 질서를 부여해서 패턴화 시키고 질서화 시킨다. 살면 살수록 복잡해지고 더 많은 변수를 끄집어내고 패턴화 시킨 이쪽 세계에서 단절된 복음세계로 넘어가고자 한다.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왕이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로 성전을 대체한다. 남쪽에 있는 성전을 찾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가 이렇다. 우리교회는 우리가 지킨다는 식이다. 다른 교회로 가지 말라는 것이다. 왕이 됨으로서 새롭게 등장하는 죄. 그 죄의 개입으로 죄의 원천을 찾아간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확보된 내 권력의 자리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왕과 백성이 한통속이 되었다 할지라도 선지자는 저주받아 마땅함을 선포하고 죄를 지적한다. “그렇게 지적질 하는 니가 하던지! 일 벌어지기 전에 알려 주던지!”라는 조롱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죽으면 죽으리라. 죽자!

 

<제 2강> 왕과 죄

 

이 세상에서 의미 있게 살자고 뽑아내는 패턴이다. 세상을 주신 배후에 신이 있을 것이고 신이 주신 세상에서 할 도리를 다하며 살자는 그것이 죄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 신조차도 자기가 만든 연장선이기에 결국 자기가 신인 것이다. 신이 주신 자연 만물을 누리다가 죽어 자연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것이 죄라는 것을. 이렇게 자연 속에서 패턴을 뽑아내어 신을 거론한다. 이때 이런 인간들에 대해서 초를 친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들이다. 아히야 선지자(왕상14:15)는 북이스라엘 첫 번째 왕 여로보암에게 바벨론으로 쫓겨난다는 것을 예언한다. 그 예언이 있은 후에도 왕들을 주시고 이스라엘을 그 땅에 살게 하신 이유는 오직 언약의 법칙, 언약이 담고 있는 내용을 드러내어 언약의 성과를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몰락하도록 주님이 쓰신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우리는 몰락당하기 싫어서 말씀이 어렵다고 한다. 몰락당하는 그 입장에 있기 싫어서, 늘 관찰자의 입장에서, 타인의 시선으로만 보길 원한다. 늘 자기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한 패턴을 찾고 변수를 줄여나가는 방법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는 아들만 사랑한다는 것은 첫 번째 아담에 속한 자들은 다 몰락해야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여! 라고 불러야 한다. 교체작업이 일어나야 한다. 육에서 영으로??? 아, 니고데모처럼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라고 말하고 싶은 절망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서 할 수 없다. 일방적인 주님의 은혜만이 가능한 것이다. 언약의 당사자가 한다. 다윗언약은 다윗이란 죄인과 언약의 만남이다. 다윗이 다윗언약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다윗언약이다. 이것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언약의 들러리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장면에서 감독되시는 주님의 지시대로 연기를 잘해서 승리했던 것처럼. 언약을 주신 것은 언약 당사자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리시고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사탄은 만만한 인간을 찾아와서 신처럼 되리라고 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만 잘되면 그것만이 영원한 진리라는 그 세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구스인이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거기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윗에게서 나오는 속성은 두 가지인데, 육적인 다윗은 왕이 담당하고 영적인 다윗은 선지자가 담당한다. 육의 다윗은 살려달라고 하고, 영의 선지자는 죽는 것조차 주님의 계획 속에 있기에 죽어도 괜찮다고 한다.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왕은 성전을 종교로 봤다. 백성들의 성향을 만족시키면 그걸로 나라가 잘 되는 줄로 알았다. 그 후세의 왕들이 이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버리지 않고 따른 죄를 범한다. 결국 남유다나 북이스라엘 둘 다 망한다. 남유다는 성전이 있어서 망하고 북이스라엘은 성전이 없어서 망한다. 그 본질에 있어서 자기를 위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제 3강> 역사와 예언

 

선지자들은 인간을 도와주지 않는다. 선지자들의 특징은 지적하는 것이다. 정신 차리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네 인생에 대해서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선점해서 손 댄 분이 계시다는 것이다. 네가 손대게 되면 훼방과 방해만 될 뿐이라는 것이다. 신앙이란 뭘 하는 것이 아니라 소급해서 주님의 주신 의미를 거꾸로 부여받는 것이다. ‘주께서 이렇게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구나!’ 북이스라엘에게서 육과 영의 속성이 다 나온다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북이스라엘의 육의 속성이 나온다는 것이다. 왕과 결탁된 백성은 왕이 잘 되면 백성도 잘 되고 왕이 잘못하면 백성도 어려움에 빠진다. 그만큼 백성은 왕한테 의존적이다. 단지 선지자만 자유로운 영혼이다. 엘리야 예언대로 유다 왕 여호람은 창자가 터져 죽는 역할을 해야 하듯이, 교회는 망해야 하기 때문에 망하는 짓거리를 해주게 되면 주님의 성공작이 되는 것이다. 주께서 손댔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자. ‘인생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 엘리사는 죽은 엘리야의 긴긴 그림자로 움직인다. 엘리야에게 종속된 엘리사의 시체대용이 엘리사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죽은 모세의 정신이 여호수아를 지배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분신으로 움직인다. 분신의 특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엘리사의 기적은 엘리야의 기적의 연속성 안에 있다. 이스라엘이 처음 약속의 땅으로 올 때 요단, 여리고, 벧엘로 왔다. 요단을 건널 때 언약궤를 메고 앞장세워 건넜다. 언약궤 앞에서 어린양의 피를 뿌렸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은 어린양의 희생덕분이다. 언약은 희생의 모습으로 진행된다. 희생정신이 사라지게 되면 엘리야가 자진 철수한 것처럼 언약은 철수하게 되고 심판이 주어진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이방민족과 동일하다. 언약이 없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왔던 길을 역으로, 벧엘, 여리고, 요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떠나게 된다. 엘리야는 아람 왕 하사엘과 북이스라엘 예후, 엘리사에게 심판의 기능을 하도록 지목한다. 어린양의 희생을 어떻게 놓쳤는지 깨우치는 작업에 나선다. 엘리야는 불말을 타고 승천함으로 엘리사와 헤어지게 된다. 요단에서 헤어질 때, “엘리야의 하나님이시여! 엘리야에게 주어진 기능이 나에게 연속되게 하옵소서.” 능력이 두 배가 된다. 그래서 심판도 두 배가 된다. 엘리사는 자기 소유를 유지하고 자기 존재하는 것만 신경 쓰는 자들에게 더 큰 사랑을 베푼다. 사랑보다 깊은 상처다. 엘리야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엘리사는 상처를 입혀야 한다. 하늘에 계신 분이 지상에서 고난 받는 모습이다. 천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살기 힘들다고, 쉬고 싶다고, 도피처나 피난처처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창기로, 세리로, 노숙자로, 강도로, 병든 자로...세팅된 인생이구나! 마음껏 감사할 수 있는 나라가 천국이다. 왕은 언제 왕다운가 하면 선지자의 쫄따구가 될 때이다. 그때 백성은 자기가 책임질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책임져야 할 백성인줄 알 때, 어린양과 결집돼있는 백성임을 왕은 증언만 할뿐이다. 흔적과 증언, 우리는 이 땅의 흔적이다. 예수님을 증거 해야 한다. 역사는 흔적들의 집합이고, 흔적만 있으면 사진첩에 가득 들어있는 사진적인 기능을 하지만 그 속에서 스토리를 꺼내놓으면 개인사가 된다. 이 개인사는 항상 예수님의 공생애의 서사적 구조와 충돌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주님을 증거 하는 증언자로서 역사의 일부를 살았다고 고백하도록 한다. 철없는 아이들이 엘리사를 향해 대머리라고 놀렸을 때 어디선가 곰이 나타나서 어린애 42명을 찢어 죽였다. 이렇게 열왕기는 팩트다. 필연이다. 엘리사가 죽을병에 있을 때에 요아스 왕이 찾아온다. 아람군대를 물리칠 도움을 얻고자 온 것이다. 엘리사는 왕의 손에 안찰하고 활을 쏘라고 한다. 쏘고 난 후에 또 살을 땅에 치라고 한다. 그런데 요아스 왕은 세 번만 치고 그친다. 엘리사는 오륙 번 쳤으면 아람을 완전히 진멸할 수 있었는데, 세 번만 쳤기에 세 번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진작 이야기 해주지! 진작! 이게 선지자다. 우리의 행함은 일체 섞이지 않는다.

 

<제 4강> 엘리야의 기적

 

하나님의 의는 죄 속에서 나온다. 진정한 의, 진정한 죄는 그 원천에서 같이 나와야 한다. 인간보다 먼저 있는 것들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인간이 같이 나와야 한다. 인간보다 먼저 있는 것들을 증거 하기 위해서 피조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로 덮치도록 유도하신 것이다. 엘리사는 왕이 한 그 일의 독소를 제거하고, 그 제거하는 방식은 기존의 어떤 방식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적은 다양했다. 독소가 있는 채소를 밀가루로 제거하는 방법, 도끼가 빠졌을 때 나뭇가지 하나 던져서 떠오르게 하는 방법, 선지생도들이 기거하는 기숙사에서 백인분의 음식이 모자랐을 때 만드는 방법, 남편이 선지자 생도였는데 죽어 애 둘이나 있는 과부가 된 그 가족에게 있는 대로 빈 그릇을 가져오라고 해서 빈 그릇에 참기름을 다 채우는 방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지자와 마음이 잘 통했던 수넴 여인에게 아이를 생기게 하는 방법. 부부에게 아이가 없었는데 선지자는 아이를 주겠다고 한다. 아기를 가질 수 있겠다는 기대와 더불어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를 잘 키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죽어버렸다. 누가 언제 아이를 달라고 했느냐고 화를 낸다. 부부는 없다가 아들이 생겨서 좋았는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죽여 버린 것이다. 인간의 더러운 속성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시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은 쉬운데 한번 죽은 것이 살아난다는 것은 천하의 엘리사라고 할지라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이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는 이 원칙을 몰라서 그렇다. 선지자는 난감한 것이다. 애매한 고난, 고통, 억울함을 한 몸에 받아야 될 역할을 선지자가 하는 것이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연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애가 죽었을 때 그 방식 그대로를 사용한다. 죽었던 아이 위에 자기 몸을 세 번 얹었더니 애가 숨을 쉬면서 살아났다. 애가 없었는데 생겼다. 좋아하다가 죽었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우리를 천국 갈 수밖에 없는 과정 속에 우리가 죄인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상처가 많은 곳에 사랑이 확대가 되는 것이다. 상처는 내가 남에게 준 것이 아니고 주님께 퍼부은 분노와 분통이다. 예수님은 상처받은 자리에 우리를 초청한다. 우리가 저지른 일을 끌어안아버리고 죽은 자로 간주해서 덮쳐버린다. 선지자의 온기가 애한테 덮쳐서 살아날 때, 애가 살아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부모들이 새로운 선지자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다 이루었다. 네 인생 손대지 마라. 네 것이 아니고 이젠 내거다.”라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엘리야, 엘리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자들이 장례를 치르는데, 모압 도적떼가 오니까 급하게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졌는데 엘리사의 시체에 접촉된 시체가 살아났다. 죽은 자만이 살릴 수 있다는 원칙이다(왕하13:21).

 

<제 5강> 나아만 장군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도와줘서 멸망했다고 이스라엘 입장에서 생각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이방인이다. 언약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방민족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이방민족은 성전이 없다. 성전이 없다는 것은 건물 하나 없다는 것인지, 그 차이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냥 성전이 없다는 것은 건물 하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자체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성전 자체가 세상의 모든 숨겨진 배후의 원천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귀한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본인들이 모르는 것이다. 성전 없는, 공백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현재라는 것이 발생된다. 성전 없는 이방민족의 특성은 자신의 신체, 몸이 있고, 신체에서 시간의식이 나오면서 사건을 시간의식을 가지고 덮어버린다. 이 시간 의식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전이 있어버리면 성전에서 날마다 원천적인 사건이 터지고, 사건에서 현재가 발생되며 그 현재 속에서 새로운 신체가 만들어진다. 두 개의 시간 층이다. 하나의 현재는 내 몸이 편하고 내 몸이 행복하면 진리라고 한다. 내 몸과 다른 몸들, 가족이 잘 되면 그게 행복이고 보람이다. 또 하나의 현재는 새로운 신체가 발생되고 하나님의 언약상대자로서 언약관계가 형성된다. 성전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라는 말이다. 여기에 반전이 있다. 반전은, 하나님에 의해 성전에 맞는 신체는 예수님 빼고 전부 다 아람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람민족답게 처신할 수밖에 없다. 주님과 한패 먹으려고 하면 안 된다. 끝까지 우리는 못돼 처먹은 인간이 돼야 된다. 구약에 이방나라가 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다.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자였다. 아람나라에 속한 나아만이 문둥병자라는 것은 아람나라 전체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나아만은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찾아온다. 이게 벌써 이방적인 사고방식이다. 문둥병 걸려서 저주받고 죽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아만은 문둥병 걸린 시커먼 나에서 문둥병에서 깨끗하게 된 나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상자아라고 한다. 그리고 남들이 강요하는 것은 자아이상이라고 한다. 주변의 힘이 이렇게 살라고 하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은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 내가 깨끗해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성전은 새로운 신체를 만든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은 현재 자신의 신체를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내가 상상하는 이상자아과 하나님의 이름을 힘입어 자아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주체와 실체는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만나주지도 않고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한다. 성전 없는 사고방식은 기존의 신체가 깨끗해지도록 병이나 고치는 의사정도로 엘리사 선지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성전의 존재를 개입시켜서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요단강에 가서 씻는다. 문둥병이 낫는다. 저주에서 풀린다. 그 저주는 죄에서 나왔다. 죄는 성전에서 나오는 원초적인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죄다. 결국에 모든 인간은 자기의 결심으로는 도저히 안 믿어지는 그 조건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피는 모든 인간의 주관에 공통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는 성전의 언약궤에서 출발한다.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아람적인 신체를 갖고 있고, 그 신체로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신체로 바꿔지도록 실시하신다는 것이다. 나아만은 몸이 깨끗해졌는데, 막상 깨끗한 이 몸은 내가 상상했던 그 몸이 아니었다. 이제 돌아서서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다.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된다. 늘 죄인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죄인 주제에, 구원받은 죄인 주제에 뭔들 못하겠느냐. 나아만이 림몬의 당에 들어가 경배한다는 것을 사유해달라고 한 것처럼(왕하5:18). 나아만은 이스라엘 땅의 흙을 가지고 돌아가기를 원한다. “나는 성전 없는 아람 땅으로 돌아가지만 이스라엘 성전에서 나온 땅을 아람 땅에다 섞어버리면 비록 아람 땅에 살고 있어도 은혜 받은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그 약속의 땅에서 살고 있다.”라는 고백이다. 위에서 보면 흙이 섞여 있지만 이스라엘 땅의 흙은 층으로 따로 떨어져 있다. 땅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약속의 혜택을 입은 자만이 참여할 수 있는 천국 같은 곳이다. 죄라는 알맹이를 이불호청이라는 의로 덮어버리면 아름다운 주님의 이불이 되는 것이다. 현찰 묶은 고무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현찰이 중요한 것이다. 나아만 장군과 엘리사는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형제가 되어 버렸다. 동시에 사환 게하시는 엉뚱한 아람나라 사람이 되어 버렸다. 시키지도 않은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스승이 받아오라고 거짓말했다가 문둥병에 걸렸다. ‘문둥병 보존의 법칙’이라고,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는 욕망은 항상 보존되어 있다.

 

<제 6강> 이방나라

 

하나님이 이방민족을 가지고 이방민족을 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친다. 성전 있음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전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성전이 있다는 것은 약속의 땅을 구현함이고 다윗언약의 구현이다. 성전이 있음을 통해서 땅이 있다. 약속의 땅이다. 성전이 없으면, 보기에는 땅은 있지만 이 땅은 파괴되어야 할 땅이고, 없어도 되는 땅이고,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은 죽어 마땅한 백성들이 되는 것이다. 성전 없이 서로 다독거리며 행복할 수 있다는 육적인 사고방식은 새로운 성전의, 이스라엘 언약의 등장으로 저주의 대상이 된다. 구약은 윤리도덕책이 아니다.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싸움이다. 성전에는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셔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겠다고 하나님 쪽에서 지정한 곳이다. 열왕기상 8장에 보면 백성들이 어디에 있더라도 성전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어서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면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했던 요나 선지자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했는데 어느 방향으로 했을까? 죽음 속에서 성전의 의미를 몸소 체험했다. 살아있는 자가 산자가 아니라 성전의 의미와 함께 할 때, 하나님 보시기에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은 변함이 없이 꾸준히 이어진다는 것을 마음껏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은 실패했지만 언약은 실패하지 않았다. 40일이 지나면 심판받는다고 했는데, 니느웨 백성들은 회개를 한다. 요나 입장에서는 ‘자기나라밖에 모르는 너희들은 다 죽었어.’라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 죽고 오히려 잘 되고 있었다. 이것은 자기나라만 주장하는 이방적인 요소가 이미 요나에게도 있음을 깨우쳐,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제대로 된 언약위주, 성전위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것이다.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했다(왕하1:1, 3:4).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전을 무시했기에 모압이나 이스라엘이나 같은 성질의 나라다. 모압 입장에서는 바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둘 다 특징은 성전 없는 자기를 위한 힘의 싸움이다. 모압, 에돔, 암몬, 아람, 앗수르 바벨론...등등의 이방나라 정신이나, 북이스라엘이나 성전 빼앗기고 불타버린 남유다나 성전의 정신에서 끊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에 의해 성전이 이동한다. 성전이 없지만 성전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존재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기능이다. 존재에서 의논된 약속, 그 언약을 지상에 실현하는 실무자의 기능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다. 우상의 특징은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어 인간이 찾아가면 된다. 그러나 주의 이름은 기능적이기 때문에 계속 활동을 하게 되어 있다. 성전이 옮겨진다는 말은 주의 이름이 자기 백성들과 옮겨지는 것이다. 옮겨지면서 약속이 바뀐다. 언약이 바뀐다. 옛날에는 율법을 지키면 복 받고 율법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는 조건을 주의 이름으로 했는데, 이미 모든 인간은 주의 말씀을 절대로 지킬 재주가 없음을 확인시키고 난 뒤에, 아예 이 죄 속에 주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이 안까지 허락 없이 그냥 파고들어 와버린다. 하나의 칩처럼 장착이 된다. 이걸 가지고 새 언약이라고 한다. 나름대로 지켜봤자, 주의 이름의 기능이 아니라 자기 죄의 기능이다. 결론은 결국 멸망이기 때문이다. 멸망시키는데 있어 그 기여자는 바벨론이다. 모든 나라는 바벨론 나라로 통합이 된다. 오직 하나의 나라, 아담이었고, 동일한 인간들이었다. 예수님 빼놓고 다 이방민족이다. 모든 나라는 백날 해봐야 바벨론 제국, 우상나라의 긴 그림자다. 이것을 들통 내는 그 사건은 바로 성전이 완공되면서 새로운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영원히 이 세상은 시간이 흘러가도 영원한 바벨론의 현재가 되는 것이다. 공백에서 사건이 터지면 현재를 만들어내고 의도적으로 바벨론에 잡혀가도록 주의 이름으로 자기 백성을 데려가시는 것이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대하36:21). 여기 토지는 세상, 지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을 말한다. 그 땅은 새 언약의 입장이 되면, 그 원천이, 성전이 완성을 보게 되면 새로운 공간, 시간이 출현된다.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성전이 완성되는 그 세계와 멸망해야 될 그 세계를 같이 묶어버린다. 바벨론과 하나님의 천국, 바벨론 세상은 음녀가 된다. 주님의 교회에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음녀 쪽은 일괄처리해서 유황불로 들어가는 것이다. 열왕기하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도대체 언약이 바뀌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쫓겨나는 그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왕을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하나님이 왕이었으면 왕은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것은, 왕이라고 하는 것은 인물이 아니고 자리이다. 언약을 실현할 수 있는 그 자리, 지위기 때문에 그 기능에 합한, 주의 이름의 기능에 합한 사람이 와서 자리에 앉아야 한다. 이 자리에 적합한 분이 누구냐를 계속해서 보는데, 그것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만이 합한 존재가 되게 되면 왕의 기능은 완성이 되면서 언약의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것이다. 예수님 빼놓고 이스라엘과 모든 나라가 이방민족이 될 수밖에 없다. 이방민족의 특징은 성전이 없다. 공백이다. 그 공백을 신체로 메우고, 그 신체는 힘을 요구하고, 힘은 왕을 찾았던 것이다. ‘일상이라는 말의 왜곡’, 이 세상 자체가 수용소인데, 수용소는 안 보이고 수용소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인간들만 자기 자리를 찾아 지내면서 그 자리에 잘도 적응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일상은 처음에는 충격이어도 어느덧 차분하게 일상생활로 돌아간다. 독일군이 미운 것이 아니다. 독일군에게 이쁨을 받는 동료를 시기하고 질투한다. 갓 시집간 새댁의 일상이나, 갓 입대한 군인들의 일상이나 이 모든 것들이 공백을 메우는 신체성이다. 결국 왕을 원한 이유는 자기 신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돈을 일단 벌어놓고 소비를 결정한다. 그 소비는 새로운 투자를 위한 소비다. 이윤과 재생산을 위한 투자다. 돈을 계속 모으는 것이다. 자본네트워크를 부정하고는 이 세상에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네트워크 자체가 신이다. 이 네트워크에서 못 벗어난다. 모든 인간은 노동자다. 몸 팔아서 사는 창녀라는 이 말이다. 몸 팔아서 사유재산을 확보한다. 좁은 패턴에서 넓은 패턴으로 나가게 되면 나 스스로는 가치가 있어보여도 한 물 간 존재가 되고, 쓸모없는 소모품이었다. 그렇다고 어디다 하소연하거나 고발하거나 데모하거나 할 수 없다. 네트워크 신에 충성하고 복종해서 그 신의 백성으로 살아온 것이다. 이 자본네트워크가 하나의 괴물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괴물이다. 데이터로 인간 모두는 분석당하고 분해 당한다. 그 데이터가 요구하는 사회에 부응하지 못하면 갈수록 우울증 환자만 늘어나는 것이다. 본인을 본인이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웠던 별, 바람, 햇살, 그리고 이 사랑마저 전부 다 자본주의의 수레바퀴에 통용되는 것이다. 결론은 자신을 놓아주면 된다. 자본주의든, 개인주의든, 무슨주의든 전부 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다. “너 없지? 성전 없지? 이방인이지? 너는 죽어도 마땅한 거야.”

 

<제 7강> 핏줄과 성전

 

엘리사는 길르앗 라못으로 선지생도를 보낸다. 거기서 예후를 찾아 기름을 붓고 엘리사의 예언을 전하라고 한다. 이 예언은 예후가 하는 것이 아니다. 엘리사가 하는 것이고 엘리사 배후에는 죽은 엘리야가 있고 그 배후에는 엘리야의 하나님이 있는 것이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세상이라는 것이다. 죄의 보편성이다. 전부 다 죽은 자이다. 그 죄의 보편성의 원천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갈라진 틈에서 발생된 차이에서 드러나게 된다. 핏줄과 성전, 유다와 이스라엘의 차이를 말해준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바알을 제거하는 데 차이가 나면서 죄의 보편성의 근거가 밝혀진다.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의 정의와 성전이 있는 상태에서의 정의가 다르다.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새로운 악이 등장하는 것이다. 예후가 아합가의 바알을 척결하면서 유다와 차이 나는 진정한 악함의 근거가 나온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최종적인 근거는 핏줄이었다. 개인위주다. 바알종교 라는 것은 개개인의 핏줄이 그 땅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다. 농업의 생산성이 늘어나기 위함이다. 풍속과 문화 풍습을 관장하는 신이 바알신이다. 바알 신을 섬기는 것이 핏줄이다. 토착민을 쫓아내고 정주한 이스라엘은 자연스럽게 여호와를 바알로 둔갑시켰다. 형식과 용어와 단어선정은 여호와인데 그 내용은 바알이었다. 여호와+바알이었다. 껍데기는 여호와인데 알맹이는 내 핏줄위주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가족, 내 핏줄, 개인의 집합체가 중요하게 된 것이다. 집단인데, 하나의 개인으로 행사하는 주체적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후는 이런 바알종교에는 관심도 없다. 바알척결에 있어서 바알이 뭔지 모르겠고 오로지 자기는 자기의 새로운 핏줄이 중요하기에 아합을 친 그 자리에 자기 가문, 자기 가족이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만 있을 뿐이다. 예후가 바알을 구실로 해서 다 죽인 이유가 나온다.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10: 28-29). 결국 예후는 바알을 섬긴다는 구실로 바알을 치고 결국 자기는 금송아지만은 버리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먼지를 터니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먼지를 터는 그 일로 인해 예후와 더불어 북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왜 죄의 보편성일 수밖에 없는지가 드러난 것이다. 오늘날 교회처럼 개혁하자고 해놓고 결국은 돈이었고 부동산이었다. 이게 핏줄 중심, 정주민 중심의 바알종교다. 바알종교. 한국교회가 바알종교라니까! 그러나 유다는 핏줄이 아니다. 삼하 24장에 보면 인구조사가 나온다. 왕이 잘해서 부흥됐다는 착각에 빠지도록 하나님은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시킨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 다윗 자기가 잘해서 이만큼 부흥됐다는 것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결국 이것도 죄의 보편성이다. 다윗에게 인구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핏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왕은 바로 성전의 의미, 성전의 취지를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그런 역할을 해야 된다. 왕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성전이 있으면 이스라엘은 변하지 않는다는 취지를 잘 알려준 왕은 솔로몬이었다. 유다의 바알척결은 요아스를 빼돌리고 아달랴를 작살낸 제사장 여호야다로 말미암아서다. 여호야다는 성전을 다시 회복시켰다. 그러했기에 왕도 아니면서 왕실의 묘실에 묻힌다. 유다는 성전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에만 유대나라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다 이루신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흐르고 있는 새로운 핏줄은 계속 나오게 하신다. 성령이 계신 곳 성전이기 때문이다(고전3:16).

 

<제 8강> 기쁜 소식

 

약속의 땅은 아무나 못 들어간다. 언약에 부합된 자들만 들어간다. 그래서 열왕기하 6장에서 아람이 사마리아를 포위함으로 말미암아 양식이 떨어지는 그 죄를 통해서 천국기준이 정립된다. 그래서 천국은 아무도 갈 수 없다. 예수님만 들어가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했던 자들이 들어간다. 새 언약 관계다. 새 언약이 천국이기 때문에. 이것이 아람과 이스라엘 전쟁에서 잘 나와 있다. 천국백성을 모집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게 없다. 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천국 가니까. 약속의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라. 자식을 잡아먹는다. 이 배고픔... 당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식을 서로 잡아먹기 위해서 두 아줌마가 약속을 했다. 오늘은 내 자식을 잡아먹고 내일은 네 자식을 잡아먹자고, 201동, 202동 아줌마끼리 약속을 했는데, 한쪽이 계약을 위반했다. 아람이 처음에는 무서웠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식 내놓으라는 201동 아줌마가 더 무섭다. 나를 지켜야 한다는 이 생존의지, 이 의지가 괴물이다. 복음이 형성되는 현장은 편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러운 본색을 다 토해내고, 토해내는 그 마지막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기쁜 소식, 아름다운 소식이다. 그렇게 복음에 걸맞은 현장성를 조성하시기 위해서 아람군대를 보내셨다. 백성은 왕을 탓하고 왕은 하나님을 탓한다. 결국 그 시대에 하나님과 연관된 선지자 엘리사는 죽음에 몰아붙여진다. 사랑보다 깊은 상처의 기능을 해야만 하는 엘리사다. 인간이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은 사랑도 아니고, 상처 없는 사람은 사랑도 아니다. 상처에는 희생이 따른다. 희생자를 알고서도 알려주진 않는다. 그 희생자는 “하늘에 창을 내신을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랴” 그렇게 솔직하게 말했던 북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었다. 열왕기상하는 우연이 아니고 필수적이고 이 상황은 반복된다. 우리 자체가 하나의 변수다. 궁지에 몰아넣는 주님의 방법 앞에 우리는 해결책이 없다. 아람군대가 도망친 것을 누가 알려주느냐 하면 문둥이들이 알려준다. 문둥이들이 왜 성 밖으로 나갔는가. 성문 어귀에서 굶어죽으나 성 밖 아람군대에게 잡혀죽으나 매한가지니 차라리 잡혀죽자 하고 나간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듣는 자세다. 욕심 채울 것 다 채운 후 성안을 생각하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러 간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욕망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바보등신 하나만 걸리기만 해봐. 등쳐먹고 빼먹고 나만 살면 그만이다. 이 실용주의적인, 권위주의적인, 이 세상 자체가 바로 지옥이다. 여기서 우리가 더 살겠다고? 선지자들은 미련 없이 떠나고자 했다. 바울은 재산, 아내, 이 세상 형적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고 빠져나오라고 한다. 세상은 곧 끝나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은 성전을 개무시하면서도 약속에 땅에 살 권리가 있는 것처럼 우긴다. 희생자가 불신앙을 했던 북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었다면, 그 북이스라엘 나라 자체도 불신앙적인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북이스라엘이 아람의 포위에서 벗어나 굶어죽는 것을 피하고 배불리 밥 먹었어도 엘리사는 이제 그 나라를 포기한다. 이 나라는 이제 끝장났다는 것이다. 엘리사의 후계자가 없다는 것은, 그동안 나라를 일으켜보려고 했던 엘리야나 엘리사의 기능이 빠진다는 것이다. 빠지게 되면 자체적인 붕괴가 일어난다. 내부적인 붕괴와 더불어 이제 바깥에서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가 압박한다. 망하라고! 망해버리라고! 엘리야와 엘리사가 빠져나온 그 자리에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들어간다. 선지자가 아닌 왕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정직히 다윗의 길로 행하고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는 그 원칙을 고수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자기 한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이 나라는 없어져야 한다. 이처럼 성도에게는 나라가 어울리지 않는다. 괜찮은 나라, 괜찮은 교회 찾아 나설 생각을 하지 마라. 뜨인 돌이 날아와 세상을 넘어뜨릴 때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 성도는 이 세상 나라가, 대한민국이 왜 망해야만 하는지를 증거 해야 한다. 그 증거 쉽다. 우리의 본성상 나만 망하기를 원치 않기에, 같이 망하면 된다.

 

<제 9강> 하늘의 징조

 

열왕기하 17장 30-33절을 보면 북이스라엘을 제거하고 맨 얼굴이 나타났다. 그동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그 땅을 차지했었는데, 이제 그들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고 난 뒤에는 앗수르 정책에 의해서 그 땅에 이주민들을 심은 것이다. 눈이 쌓였을 때는 안 보이던 땅이 눈이 녹으면 맨 땅이 보이는 것처럼, 원래 땅이라는 것이 원위치한 것이다. 그걸 인권이라고 한다. 인권. 인권이라는 것은 내가 무슨 종교를 믿든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신을 믿어도 다 용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성상 관용을 베풀 존재가 아니다. 자기의 절대성을 교묘히 감추면서 남들에게 그 감춘 것을 설명하는 방식으로서의 인권이었을 뿐이다. 인간은 각자 자기를 위해서 살 뿐이다. 열왕기하 18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은 성전중심으로 산다는 이유 때문에 혜택을 입는다. 왕이 혜택을 입으면 백성도 덩달아 입는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이기에 지켜주는 것이다. 약속의 땅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윗 시대에는 왕과 성전 체계였지만, 솔로몬 때는 왕과 성전 사이에 선지자가 개입한다. 강의에서 계속 이야기했다. 왕은 “살려주세요!”라고 하지만 선지자는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다고. 엘리사 다음 후계자가 없다는 것은 이제 왕의 철폐를 의미한다. 그동안 엘리야나 엘리사는 왕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나님의 주신 기회를 부지런히 흔적으로 남겼지만, 이제는 선지자 교체가 일어난다. 기적선지자였던 엘리야나 엘리사는 이사야나 예레미야 등등의 문서선지자에게 이동한다. 왕 체제는 멸망해도 당연하다는 것을 문서로 확고하게 정립해놓은 것이다. 다 망해야 한다. 인수인계와 함께 왕 체제의 자체적인 한계성이 드러난다. 역부족이다. 히스기야가 성전중심으로 제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이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물리쳐주지 않는다. 왕 체제에서 선지자체제로 전환된다. 왕도 필요가 없다. 왕도 없고 나라도 없고 백성도 없는 나라,, 선지자가 꿈꾸는 세계다. 예수님이 왕이시고 백성은 예수님이 새로 만들어내시고, 시공간, 하늘과 땅도 예수님 중심으로 새롭게 조성된다. 바벨론은 메시야적 기능을 보여준다.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 메시야다. 선지자 교체가 일어나면서 지금 모든 계시는 선지자 쪽에서 미래 쪽으로 바뀌었는데 아직도 자기는 현재에서 살고 있다. 미래에서 메시야가 오게 되면 기존의 시공간에 갇혀있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성, 왕, 하나님(성전)에 엮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다 잘라버리시는 것이다. 히스기야는 15년을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15년을 더 살게 해달라는 것은 사태파악이 안 된 것이다. 나중에 바벨론에게 성전의 기명들, 기둥의 금까지 벗겨 다 빼앗기게 된다. 이사야에 37장에 보면 앗수르 왕이 쳐들어올 때 히스기야는 적군의 조롱의 편지를 앞에 두고 기도를 한다. 그 기도응답으로 185,000명을 하나님이 치신다. 시체뿐. 시체의 보편성은 죄의 보편성이요 죽음의 보편성이다. 하나의 시체로 보신다.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상대할 때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아직도 본인이 본인을 상대로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전히 자기는 왕의 지위를 놓지 않고 백성을 지도해보겠다는 고집스런 육적인 모습을. 이 살게 해달라는 이 기도가 왜 죄가 되는지를 이사야7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사야는 7장 이전 6장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성전을 보았기 때문이다. 망하는 백성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나라는 망해야 된다는 것은 성전의 원칙이고 언약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잘 살면서 이 땅에서 생존하겠다는,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그 의식조차 화로다 망하는 대상임을 이사야가 알려주는 것이다. 이사야 7장에 보면 유다의 멸망의 이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아람 왕 르신, 북이스라엘 왕 베가, 앗수르 왕까지 보내어 유다를 사면초가에 빠지게 한다. 이사야는 아하스 왕에게 하늘의 징조를 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의 징조를 구하라는 말에도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시험치 않기 위해서 징조를 구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곧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그렇게 할 때 눈에 보이는 식으로 하늘의 징조가 내려온다. 하늘에서 왕이 내려오는 것이다. 아브라함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마지막에 새 언약으로 구체화되어 우리 눈에 보이는데, 그게 예수그리스도고,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것이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것이다. 다윗의 교체다. 과거지향적인 다윗은 끝나고,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다윗은 처녀가 잉태한 자식이라야 다윗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하늘의 징조라는 것은 하늘의 징조가 모든 것을 일관되게 다 해버린 것이다. 바벨론은 폐기물업자, 쓰레기처리업자, 진공청소기다. 어차피 눈에 보이는 세상은 하나로 뭉쳐져서 전부 다 바벨론에게 처리되는 것이다. 히스기야 만만치 않게 요시야 왕도 악한 길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윗의 길로 행했지만 결국 후손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간다. 하나님의 성소마저 포로 되어 간다. 그럼에도 망하는 나라에 요시야 왕이 마지막에 나왔다는 것은 말씀발견이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언약은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육은 풀이요 그 영광은 들의 꽃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설 것이다”(사40:6-8). 끝났다. 바벨론에 모든 나라를 응집시키고 예수님에게 하늘의 모든 징조를 몰아넣으신다. 일대일이다. 바벨론과 예수님이다. 바벨론이냐, 하늘나라냐. 주님께서 하늘에서 왔다가 땅을 경유해서 올라가므로 말미암아 길을 만들었다. 홈이 파인 길은 이 세상에서는 없는 길인데 성령을 통해서 보여줄 때만 나타나게 되어 있다.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세계에 오직 예수님의 피가 흙먼지가 되어 뿌려질 때 그 길이 곧 천국 길이었다. 흔적은 증언이 되어야 한다. 흔적이 흔적으로 끝나면 역사에 파묻힌다. 이게 증언이 되어야 한다. 증언이 될 때, 성령께서 와서 증언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늘에 속한 백성으로서 아직도 이 세상에서 같이 살고 있다. 오직 죽을 때까지 자기밖에 모르는 그 모습 앞에서 이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받기만 했을 뿐. 그래서 미안해. 나 같은 존재(여자)를 왜 사랑했는지...”

 

흩어진 시간도 모으시고 널브러진 공간도 모으신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 되었을 때 하나님마저 포로 되신다. 이 세상 나라를 바벨론에 모으시고, 하늘로 인해 잉태된 것들은 예수님에게 모으신다. 꽁꽁 언 강을 해머로 내려치면 구멍이 뚫리고 물이 솟구친다. 덩달아 동면하고 있는 물고기들도 놀라서 움직인다. 주님께서 흔적을 증언으로 바꾸시기 위한 방법이시다. 왕 체제에서 선지자체제로 옮기시기 위한 작전이시다. 이방나라를 보내시어 유다를 치고 이스라엘을 치실 때 왕도 놀라고 백성도 놀라지만, 밥 먹고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시기 위함이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왔는데, 이왕 들어왔으니 농사나 짓고 정착하며 자식들 낳고 화목한 가정이나 이루며 살면 그만이었다. 주님은 끝없이 전쟁을 일으킨다. 머무르고자 하지 못하도록 날마다 죽음에 넘기신다. 바알이라는 우상숭배로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것을 교인들은 안다. 그러나 그 바알을 왜 섬길 수밖에 없었는지의 그 과정은 모른다. 그만큼 신앙과 믿음에 있어서 맹목적이다. 토착민을 쫓아내고 가나안 땅에 거주하게 되니 당연히 농사를 짓게 되고 농사가 잘 되기 위해서는 토착민의 노하우를 전수받아야 했고, 자연스럽게 그 문화와 풍습을 흡수하게 되고, 그 풍요의 신마저 살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받아들였다. 땅에 집착한 것이 우상숭배였다. 우리의 우상이라는 것이 딴 게 아니다. 땅이다. 땅. 보이는 이 땅만이 자기를 인정해주고 자기가 신으로서 군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땅의 멸망은 곧 우상숭배의 그 원천을 드러낸 것이다. 왜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주셔놓고 그 땅을 멸망시켜야 하셨는가. 그 약속의 땅이 그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계획해놓으신 땅이 있었다. 단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약속의 땅을 주시고 왕들을 주신 이유는 언약(성전) 때문이었다.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케 하고 통일시키기 위함이셨다. 우리는 구원받아놓고 새로운 시공간에 의해서 아달랴가 되고 예후가 되고 아하스가 되고 히스기야가 되고 요시야가 된다. 그리고 증언할 수밖에 없는 선지자가 된다.

 

각자의 생략된 일상을 말로 풀어내기란 역부족이다. 오롯이 들어줄 리도 없다. 성도에게 있어 그 어떤 일상도 변수뿐이다. 일상에 자기만의 패턴이 있다 할지라도 십자가 외에 자랑치 못하도록 성령께서는 성령의 패턴을 들이대신다. 우리에겐 생략되었지만, 눈 내리는 그 밤에 떠나야 했던 어떤 이에게는 사랑보다 깊은 상처다. 십여 년이 지나서 만난 첫 사랑의 남자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는데 대머리였을 때, 어떤 이에게는 사랑보다 깊은 상처다. 한 잔에 오 만원 하는 커피를 마셔야 하는 어떤 이에게는 사랑보다 깊은 상처다. 단 하나의 이유, 단 하나의 존재, 단 하나의 이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서이다. 상처를 없애기 위해서 종교를 찾고 몰두한 흔적들은 사랑의 증언이 된다. 이미 그 모든 상처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 흘리신 예수님께서는 옆구리의 창자국과 못 박히신 손자국의 상처로 덮으신다. 하얀 눈이 쌓였다. 볼 것이 없는 주변 환경으로 인해 건물에만 갇혀 지내게 했던 청소년수련회관 그곳에... 눈 쌓인 운동장은 보고만 있어도 화장품 케이스처럼 예뻤다. 눈길을 운전해야 하는 그 심정도 모르고, 눈밭을 좋다고 뛰어다니며 까불거리고 촐랑대는 강아지처럼 행복했다. 흩날리는 눈발을 뒤로, 뒤로 날려 보내며 달렸다. 혹시 큰 차에 밀려서 죽지는 않을까? “끝났다!”는 선지자의 외침은 온데간데없이 잠시의 걱정마저 아름다운 길이었다. 독감에 걸린 외손녀가 아무리 안쓰럽고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볼 수 없으셨다. 왜? 선지자시기 때문이다. 역사와 예언이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그 자리의 깊이가 울컥하도록 전해져왔습니다.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왕하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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