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빚 청산

아빠와 함께 2022. 5. 31. 15:54

[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7 - 빚 청산

22,05,23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야곱의 전쟁 !!

오늘은 교재 4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야곱의 전쟁'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전쟁을 할 때 무기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언약' 이란 겁니다. 군사들이 각자 자기의 무기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는데, 빈손으로 나가는 것은 곤란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위생병의 경우에도 자기를 지켜주는 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구급약통만 달랑 가지고 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무전병의 경우라고 해도, 반드시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전쟁이라는 겁니다.

전쟁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주적이 있고, 그리고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군대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무기는 무엇입니까? 언약인데, 그러면 주적은 무엇입니까? 이게 하늘의 전쟁이니, 그 대상은 타락한 천사라는 말이죠. 물론 악마라고 할 수도 있는데, 즉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라는 겁니다. 이렇게 표현하니 매우 부드러운데 말이죠.

* 하나님의 군대 !!

그렇다면 하나님의 군대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들이 바로 천사인데, 야곱에게 떼거리로 몰려온 천사, 즉 '마하나임' 이라는 겁니다. 야곱이 꿈속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사닥다리를 보았는데, 그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던 천사들이 있었다는 말이죠.

(창 32: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창 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엘리사와 아람나라가 전쟁을 할 때, 엘리사 편에 수많은 천사들이 있었는데, 그런데 엘리사의 종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아람나라의 군대에 눌려서, "우리는 두 명밖에 없는데 무슨 전쟁을 합니까?"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기도해서 눈을 뜨게 되어서 쳐다보니, 주위에 병풍처럼 든든하게 천사들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들이 전쟁을 수행했다는 겁니다.

(왕하 6:15)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왕하 6: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왕하 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 천사들의 활동으로 !!

베드로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그만 감옥에 집어넣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러면 누가 풀어주었습니까? 간수가 풀어준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천사들이었다는 겁니다. 천사들이 옥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경우와 아예 감옥에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하면, 그렇다면 이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 암에 걸려서 기적적으로 낫는 것, 그리고 처음부터 걸리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암에 걸리지 않는 경우가 더 낫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게 "평소에 천사가 여러분을 도와주고 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평소에 운동을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고, 물론 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실 이유가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천사가 동원해서 지켜주어서 아프게 않게 해주셨다는 겁니다.

물론 허리가 좀 아프기는 해도 암에 걸리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주님의 스케줄에 따라서, 그 스케줄을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천사가 지켜주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천사만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도 지켜주시고 주님이 지켜주신다는 겁니다.

*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야 !!

그것을 미처 모르는 것은 영적인 인식에 눈을 뜨지 않있기 때문인데, 눈을 뜬다는 것이 사도바울에게 아주 잘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는 과거에 "예수를 믿는 자는 이단이다" 라는 안목을 가지고 살았던 자인데, 그러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만 장님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물론 그게 강한 빛의 영향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눈이 보이지 않다가 눈에서 비늘과 같은 것이 떨어지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이전은 어떻다는 겁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의 눈에 항상 비늘과 같은 것이 덮여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비늘이 떨어졌다는 것이죠.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무슨 말인고 하니, 본다고 하는 것이 보는 것이 아니다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잠시 장님이 되었다가,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다시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그때 바라본 세상은 어떻다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이 활동하는 세상이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모든 것이 다 박살났어" 라고 하면서 탄식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남은 것은 한강에 가는 것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인생이 무너지고 말았는데, 회사도 부도가 나고 아내와는 이혼을 했다는 말이죠.

* 그러면 해결책은?

그러면 여기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해결책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 해결책이 과연 무엇이냐는 겁니다. 다들 응용문제에 약한데(ㅋㅋ), 그래도 우리 장로님이 답변을 해보세요. 하늘을 쳐다보면 됩니까? 물론 그 사람도 하늘을 쳐다보았지 싶은데, 그러면 새가 날아가고 전봇대가 보이고 한다는 말이죠.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그 앞에 '나' 라는 것이 붙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너진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데, 평소에 우리도 '나' 라는 것이 붙어있게 되면, 비록 무너지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럴 가능성 때문에 항상 공포스럽고 두려운 인생을 살게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나' 중심을 '예수님' 중심으로 !!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한데, '나' 중심을 '예수님' 중심으로 바꾸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해서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느냐는 말이죠.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죽음의 길로 가셨는데, 그리고는 사흘만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혹은 부활로, 그렇게 영원히 사시는 길로 가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망쳐졌다고 탄식하는 '나' 라는 것에다가 예수님을 넣게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망쳐진 것이 무슨 일이 되는고 하니, 주님이 가신 길에 동행하고 동참하는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거에는 자기 것이 무너졌다고 탄식을 했는데, 그런데 주님과 바꿔치기를 하고 보니, 주님의 일을 망쳐진 것이 아니고, 주님은 아주 정상적인 길로 가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것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생명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탄식이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완벽한 해결책이 제기가 되었는데, 그렇지요? 굳이 이렇게 망한 경우가 아니고 일상을 살아가는 자들도 자기 자리에 예수님을 대입해보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어떤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즉 인생의 굴곡이 있어도 그 파동의 방향은 천국이라는 겁니다.

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또한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그것이 생명이 주는, 즉 부활의 나라에 가는 기쁨보다는 약하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이 땅에서는 파동이 되지만, 그런 파동을 오랫동안 겪다가보면, 그리고 오랜 세월 뒤에 멀리서 보면 그 파동이 어떻다는 겁니까?

우리가 더욱 더 인생을 많이 살아보면, 인생이란 것이 여러 가지 개인적으로 파동이 심했다고 하지만, 거의 직선이라는 겁니다. 12살 때는 자기 생일 때 케이크의 촛불을 모두 끄지 못하고 하나를 남겨서 고민을 했는데, 그런데 20살 때가 되면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리고 20살 때 군대에 가서 사고를 친 것도, 30살이 되면 그것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 아무 것도 아니야 !!

나이 40살에 부도를 만난 것도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아무 것도 아니고, 70살에 그만 넘어져서 고관절을 다친 것도 송해처럼 나이 97살이 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사람아, 지금 당장 죽을 마당에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우리 인간은 죽게 되면, 모든 과거지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생명의 문 앞에 도달했는데, 그 천국 문 앞에서 뒤돌아보면, 평생 살아온 것이 누구의 은혜였다는 겁니까? "나는 망했다" 라고 여겼던 것조차도, 주님이 이 코스로 이끌기 위해서 관여하시고 조정하셨다는 말이죠.

* 존재론과 인식론 !!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여기에 '나' 라는 것이 있는데, 이 '나' 중심으로 보게 되면 두 종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나는 '과거정리' 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 이 순간 보기' 라는 말이죠. 여기서 과거정리를 기억이라고 하고 지금 이 순간 보는 것을 생존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철학에서는 앞의 것은 '존재론' 이라고 하고, 뒤의 것을 '인식론'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이 나오니 짜증이 올라오지 싶은데, 굳이 이런 것을 알아야 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알아야 하는데, 그래도 여러분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 빨리 하겠습니다(ㅋㅋ).

'존재론' 이라는 것은 자기가 한 평생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항상 정리하는 버릇이 있다는 말이죠. 바쁘지 않으면 정리하는 것이 "내 존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라는 것인데, 그렇게 계속해서 과거정리를 한다는 겁니다.

주부의 경우에는, 신랑을 회사에 보내고 서랍을 열어서 철이 지난 옷을 정리하곤 하는데, 그렇게 하다가보면 점심시간이 된다는 것이죠. "지난번에 이사를 하면서 이 옷을 버린다고 했는데, 아직도 버리지 않았네. 이것도 그만 버려야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정리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과거정리' 라는 것은,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잘 살아야지" 라고 하면서 미래를 생각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하나로 꿍치는 것을 존재론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나' 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합쳐서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하게 되면,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당신이 알아?" 라고 하면서 자기 과거를 들먹이는데, "내가 과거에 청와대에서 말이야, 그래도 잔디를 깎았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이 나름 먹혀드는 시절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의 경우에는, 지금 현재만 눈에 보이는데, 즉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라는 것이죠. 즉 어제는 없고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는데, 그래서 이것을 '인식론' 이라고 하는데, 인식이라는 것은 '안다' 라는 의미로, 즉 "내가 아는 것은 보이는 것이 전부다" 라는 겁니다.

* 아줌마, 빨리빨리 접시를 닦으세요 !!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인데, 예를 들어서, 50대 아주머니가 식당에서 일을 할 때, 그러면 이때 존재론을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은데, 일이 밀려서 빨리빨리 해치워야 한다는 말이죠. 눈에 보이는 접시를 하나라도 더 닦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현실에서는 과거를 생각할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은 하나의 낭만이고, 지금은 당장 주어진 일에 집중을 해야한다는 것이죠.

과거에 아무리 깡패짓을 했더라도 지금은 씽크대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 그러면 열심히 합판을 자르고 하면서 일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과거에 같이 일을 했던 동료 깡패들이 공장에 찾아오곤 하는데,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그런 내용의 '나의 해방일지' 라는 드라마가 있다는 말이죠(ㅋㅋ).

아무튼 직장이라는 것은 과거를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데,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겁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는 과거를 생각하지만, 손자와 손녀들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청소기를 들고 다녀야하고, 또 먹을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과거는 고사하고 내일 일도 생각할 겨를이 없는데,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죠.

그러니 존재론과 인식론, 이 두 가지가 우리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지금 일이 좀 없다 싶으면 과거를 정리하고, 또한 미래를 구상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지금 당장에 일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데, 즉 어제는 그냥 어제로 끝나고 만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의 어제의 삶, 즉 인간 자아의 존재론, 그리고 현실의 삶인 인식론, 이런 두 가지를 모두 다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은 오직 무엇만 인정합니까? "지금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라는 것인데, 이게 성경말씀이라는 겁니다. 그것 이외에 다른 것은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과거에 제가 이렇게 잘나갔습니다. 제발 좀 알아주세요" 라고 한다든지,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그런 개인적인 일은 주님은 고려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자기가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인데, 그런데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이 도마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그런데 인간의 인식론은 무엇인고 하니까, 즉 자기가 아는 일에 열중하게 되면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일이 없으면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고, 우리 인간의 할 일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주님은 무엇인고 하니, 진리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즉 "예수님은 지금 무슨 일을 하십니까?" 라는 겁니다.

* 나이야가라 !!

이 세상에 하는 말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는데, 즉 "지금 일을 할 때가 당신의 전성기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전성기라는 것이 "내가 옛날에 잘나갔어" 라고 하면서, 그런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주어진 자기의 일에 충실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자기의 전성기라는 겁니다.

여기에 나오는 유명한 멘트가 "나이가 대수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라는 것인데, 이것을 합치면 '나이야가라'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 지금이 전성기라는 것인데,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까? 전성기를 따진다는 것은, 지금은 자기에게 전성기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세상적인 인식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빠트렸다는 것인데, 아까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죠. '나' 라는 것이 주인공이 되어서, 즉 "내가 한가한가? 내가 바쁜가?" 라는 것이 아니고, "지금 주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라는 것에 관심이 가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라는 존재이지, 자기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전혀 존재론이 아닌데, 그리고 주님은 눈에 보입니까? 보이지를 않는데, 그러니 인식론도 아니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인데, 바로 그것을 우리가 한다는 말이죠.

* 빚 청산 !!

이제부터 오늘강의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겠는데, 즉 "주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라는 겁니다. 바로 그것은 '빚 청산'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은 빚을 청산하는 일을 하신다는 말이죠. 쉽게 말하면, "어떤 점심도 공짜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는데, 그냥 자기 존재론과 인식론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즉 눈에 보이는 것이 열중하고, 시간이 나면 과거를 떠올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의 문제점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죠. 그냥 자기 살 것만 챙기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길을 걸어가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의 문제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해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완전히 생까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시간도 없고 해서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 공짜 점심은 없다 !!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의 사고방식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의 은혜도 받아본 적이 없고, 지금껏 나는 내 힘으로 살아왔다" 라고,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로마서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짜가 없다는 겁니다.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무슨 말인고 하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는데 있어서, 햇빛과 공기와 비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나님은 그 값을 받아내신다는 말이죠. 공짜점심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옥이 있고 심판이 있는데, 하나님은 자비로워서 공짜로 주시는 게 아니고, 그것은 인간의 희망사항이란 겁니다.

반드시 그 값이 있는데, 주님은 햇빛과 공기와 물, 그 모든 것을 값을 치르고 창조를 하셨는데, 그게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주님은 값을 치르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셨는데, 그것을 아는 모임을 두고 '교회' 라고 한다는 겁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값을 치르고 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창조 안에는 주님의 값이 다 녹아져 있다는 겁니다. 왜 피자를 보면 치즈가 빵에 다 녹아있는데, 눈에 잘 보이지 않아도 빵 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천지창조를 할 때는 그냥 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모두 다 스며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동물 한 마리 한 마리,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그 모든 것에 주님의 공로가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우리가 욥기를 살펴보면서 다 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실 때, 하마에 대해서 낙타에 대해서, 그리고 황무지에 대해서, 즉 황무지에 비가 오는 것에 대해서 욥에게 자꾸 들이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는 이미 값을 다 치르고 창조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생까는데, 즉 "나는 내 힘으로 살아왔다" 라고 하면서 버틴다는 것이죠. 윤석열을 비롯해서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서 이 세상을 바라볼 때는, "주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라고 하는 주님의 활동성,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사도바울과 동일한 안목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더불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러니 이 세상만물에는 예수님의 요소가 모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나오는데, 처소를 떠난 천사의 경우에는, 그게 곧 악마인데, 그 천사는 왜 자기 처소를 떠났느냐는 말이죠. 즉 왜 하나님께 반발을 했느냐는 겁니다.

* 다시 하면 !!

듣지 못한 분이 있어서 다시 하면, 이 세상의 불신자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산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하실 때, 그만한 값을 매겨서 하셨다는 겁니다. 그 값이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그냥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창조를 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그 값이 하나님의 피, 즉 예수님의 피로 그 값을 치르고 교회를 샀다는 겁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무리 자기가 교회에 다니면서 성도라고 우겨도, 그 안에 피 이야기, 즉 주님의 값을 치른 이야기가 들어있지 않다면, 그 피로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성도가 아니라는 것이죠.

흔히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첫 번째로 "구원이 있다. 하나님을 믿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믿어라' 라고 하면 주인공이 자기가 되는데, 즉 '나' 라는 게 살아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나'는 어떻게 사는고 하니, 두 가지로 사는데, 그게 존재론이고 인식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먼저 과거정리를 하는데, 즉 "내가 옛날에는 교회에 다니지를 않았지만 지금은 다닌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존재론이라는 말이죠. 두 번째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하지?" 라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것만 하면 된다고 하는 인식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믿어라" 라고 하니까, 어떻게 나옵니까? '나' 라고 하는 존재론에 의해서, 여기에 '하나님 믿기' 라는 것을 하나 더 더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자기는 완전에 더 가깝게 발전했다고 자부를 한다는 겁니다.

*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

하지만 이것은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이고, 성경말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오셨다. 구원은 없다" 라는 것인데, 즉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의 행함으로 하나님께 받았던 은혜에 대한 값을 치를 수 있는, 그런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공짜 점심은 없는데, 이 땅에 태어났으면 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값을 치를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고, 그 방법도 모르고, 그런 역량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치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대로 살아야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실제로는 구원이란 것은 없는데, 이것은 기존교회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들은 아예 사기를 치고 있다는 말이죠. 복음이 그만 종교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자기 목숨과 바꾸어야하는 복음이, 자기 목숨을 보다 잘 유지하게 해주는 오락으로 바뀌고 말았다는 것이죠. 교회가 그만 놀이마당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면 더 좋은 것으로 말이죠.

어제 오후시간에 기도제목을 "무엇이 가깝고 무엇이 멉니까?" 라고 했는데,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해야하는데, 그런데 말씀이 아닌 무엇을 가까이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이번에 손흥민이 유럽의 프리미어리에서 골을 제일 많이 넣은 축구선수가 되었는데, 그런 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가까운지, 그게 아니면 보이지 않는 주님이 가까우냐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값을 치를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구원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사기인데,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 빚 청산을 받은 자 !!

이제 세 번째가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없는 것에서 값을 치러주는, 즉 빚을 대신 청산해주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주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구원은 당연히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에게 당연하게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도저히 청산할 수 없는, 그렇게 하나님에게 진 빚을 대신해서 갚아주는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이 빚에 대해서 청산을 받았다고 하면, "많이 용서를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사랑은 끝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생에 대해서 불평불만을 한다는 것은 자기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것인데, 손자가 와서 괴롭혀도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ㅋㅋ).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갚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눅 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제가 몇 번이나 남을 용서해주면 됩니까?" 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인식론이라는 겁니다. 즉 "눈에 보이는 내가 눈에 보이는 남을 몇 번이나 용서하면, 그러면 내가 괜찮은 인간이 되겠습니까?" 라고 예수님에게 물었다는 말이죠.

베드로는 일곱 번을 언급했는데,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을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490번을 용서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또 다시 일곱 번을 곱하실 것이 분명하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선악체제에 놓인 인간에게 빚을 청산할 정도의 착함과 선함은 없다는 겁니다.

(마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 악마는 왜 자기 자리를 벗어났는가?

그렇다고 하면 악마가 왜 전쟁을 벌입니까? 악마는 피조물로서, 이게 힌트인데, 그런데 왜 하나님에게 대드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빚 청산을 하지 않아도 나는 나로 살고 싶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게 빚 청산의 문제라는 겁니다. (녹취 구 - 목사님, 그러면 선악과의 문제가 천사에게도 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가요?)

그러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예수님을 동참시킨 것, 거기에 대해서 악마는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이죠. 악마가 싫어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 인데, 이 악마가 하나님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욥기를 보면, 악마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말이죠.

그런데 스가랴서에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 악마가 여호수아가 입은 시커먼 옷을 지적하자,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혔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죄가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네가 왜 시비야?" 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런 악마의 입을 다물어버리게 하신다는 말이죠.

악마가 자꾸만 사람을 정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피조물은 주님께서 창조할 때 집어넣었던 그 빚을 청산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내가 책임을 져야하는구나" 라고 하는, 거기에 대한 책임감만 무겁게 다가온다는 겁니다.

여기서 스가랴서 3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5절입니다.

(슥 3: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슥 3: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 3: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슥 3: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슥 3: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

여기에 하나님과 사단과 여호수아가 나오는데, 그런데 사단이 여호수를 보고 시비를 걸자 하나님이 사단을 책망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더러운 것을 입었는데,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즉 그 죄과를 없애버리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게 하신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의 빚이 청산되지 않은 상태, 즉 더러운 죄만 노출이 되어있는 옷을 벗기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혀주시는데, 그런데 이 일을 이 땅에서 누가 하셨다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하셨는데, 그것이 로마서 3장 24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

여기에 보면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라고 하는데, 우리 입장에서 보면 값없이 의롭다함을 입었다는 말이죠.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우리도 하는 행세가 있고 자아가 있어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겁니다. 죄를 지은 것을 기억하는데, 남들에게 욕하고 속이고 사기를 친 것을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의로 바꾸었는데, 그러자 악마도 놀랄뿐더러 의인이 된 우리 자신도 놀라자빠진다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죠.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십일조를 하더라도 자기 빚을 청산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래서 지금 교회가 사기집단이라는 겁니다. 어떤 노력을 해도, 심지어 순교를 해도 그 빚을 청산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청산한 다음에는 우리가 해야할 율법은 전혀 남아있지를 않다는 겁니다. 자기가 토하고 다시 먹을 수는 없는데, 우리가 율법을 다시 먹어야 더러워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죄를 짓고 싶어도 다시는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말이죠.

* 예수님의 피로 뭉개버리는 하나님 !!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성도가 아니라고 욕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구원을 받은 우리 자신이, 자기 자신의 바뀌어진 그 신분, 즉 예수님의 피가 묻은 그 신분을, 다른 사람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모독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생명으로 말미암아서 용서를 받았는데, 아직도 우리는 무엇을 가동시키는고 하니, 선악체제를 그대로 유지해서 자기가 조금이라도 착한 일을 하면 기분이 좋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 우울해진다는 말이죠. 빚을 졌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뿐더러, 그러한 생각을 하더라도, "내가 빚을 졌으면 노력해서 갚으면 되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즉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분간도 안 되는 상태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자아와 자아의 삶인데, 자아는 존재론이고 자아의 삶은 눈에 보이는 인식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로 뭉개버린다는 것이죠. "이 인간들아, 내가 다 갚았어"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그것도 값없이 갚아주셨다는 겁니다.

*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과 7장에 보면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라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란 말이죠. 대통령의 인수위원회나 장관이 되면 출세를 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거기서 일을 하는 것은 좋은데, 그게 인식론인데,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여기 7장 23절에 보면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교회에서 헌금을 좀 하고 봉사를 좀 하니, 목사가 장로로 만들려고 안수집사 직분을 주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안수집사를 해도 되는데, 그러면 그 사람에게 "절대로 목사의 종이 되지 말라" 라고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하나님의 빚을 청산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죠.

여기서 고린도전서 1장을 보겠는데, 12절에서 13절입니다.

(고전 1:12)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전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여기 12절에 보면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라고 하는데, 그렇게 교회가 나뉘어져있다는 겁니다. 잠시 노인개그를 해보면, 최불암이 제일 좋아하는 채소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이 '파' 라는 것인데(ㅋㅋ),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그렇게 교회에 파가 왜 있느냐는 말이죠. 누가 빚을 갚아주었는데 파가 생기느냐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쫓겨다니다가 그래도 좀 오래 머문 시골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는 파가 두 개라는 말이죠. 그게 토착민파와 외부인파라는 겁니다. 그들의 암투가 12년 동안 멈춘 적이 없었는데,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하면서 말이죠. 도대체 복음을 믿는 것인지 교회를 믿는 것인지, 그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피를 토하는 설교 !!

그래서 피를 토하는 설교를 해도 전혀 소용이 없었는데, 물론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소위 터주대감이라는 것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것이 존재론 때문에 그러한데, 즉 "내가 이 교회를 세울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과거를 생각한다는 것이죠.

과거에 자기가 무엇을 했던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던지, 그러한 것은 전혀 소용이 없는데, 중요한 것은 "지금 주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라는 겁니다. 주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우리의 빚을 갚아주신다는 말이죠. 우리가 빚을 갚을 수는 없는데, 갚아주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살아야, 그게 빚을 청산한 자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 주님의 빚을 갚아주시는 전쟁 !!

바로 그 전쟁인데, 즉 주님이 빚을 갚아주시는 전쟁에 대해서, 즉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정죄함이 없이, 과거에 있었던 것을 깡그리 다 무시해버리고, 그런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기 피로 의롭다함을 입은 것, 그 사실에 대해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로 의인이 되는 것을 누가 반대합니까? 악마가 반대를 한다는 말이죠.

제가 골로새서를 설교할 때 상당히 불만을 가진 자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까, "율법을 찢어버린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거룩한 율법을 당신이 뭔데 찢어?" 라는 시선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제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골로새서 2장 14절과 15절에 보면 나오는데, 사도바울이 계시를 받아서 기록했다는 겁니다.

(골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4절에 보면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도말' 이라는 것은 '제하여버린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찢는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무엇으로 승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까? 15절에 보면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위력, 십자가의 능력, 그 십자가만을 남기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에게 또 다시 죄를 죄가 되게 하는 율법을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찢어버린다는 말이죠. 과거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런 것을 일체 묻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32절에서 34절입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여기 32절에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고 하는데, 그 은사가 마태복음 13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여기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송사가 바로 고소라는 말이죠. "얼레리 꼴레리, 저 사람이 지난 여름에 한 짓을 내가 안다" 라고 하면서 송사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다는 겁니다.

* 야곱언약의 주인공은 예수님 !!

야곱의 전쟁이 바로 그 전쟁인데, 왜냐하면 야곱은 언약을 가지고 한다는 말이죠. 언약을 이루신 분은 오직 예수님 이외에는 없는데, 야곱이 야곱언약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야곱이 언약을 이룬다고 해서 야곱언약이 아니고, 야곱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이라는 말이죠.

이스라엘은 없는 이름인데, 그런 없는 이름에 야곱의 이름도 이스라엘, 그리고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이름도 이스라엘, 그렇게 하나로 합쳐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통합된 이름을 가진 나라가 등장하는데,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 안에는 죄인이 된 히브리인들도 들어가고, 그런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제사법까지 주신 하나님의 이름도 그 안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이스라엘이 구체화가 되면,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 되시고 또한 제물이 되셔서, 그렇게 해서 제사법을 다 이루게 되면, 그것에 대해서 적용을 받은, 그것이 은사, 즉 선물인데, 그런 혜택을 입게 되면, 그것이 최종적으로 완성이 되는 이스라엘이 된다는 겁니다.

이제 좀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용서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목사님, 제가 지난번에 그만 목사님을 욕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욕을 하든지 말든지 간에 그것은 다 주님께서 하게 하셨다는 겁니다(ㅋㅋ).

이미 다 끝난 문제인데, 그런데 우리는 자기 존재론, 즉 계속해서 자아를 끌고 간다는 말이죠. 과거정리인데,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되지" 라고 하는 인식론, 즉 자기의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활동은 무시하고 말이죠.

그래서 그게 잘못되니, 아까 "나는 모든 것이 무너졌고 망했다" 라고 했는데, 그 해결책은 자기 자리에 예수님을 집어넣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망하게 해서 우리의 빚을 예수님이 청산하게 했다는 것을, 그렇게 해서 복음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만든다는 것이죠.

* 새로운 인식론 !!

이것이 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알게 된 새로운 인식론이라는 겁니다. 인식론은 안다는 것인데, 즉 세상을 새롭게 안다는 말이죠. 자기가 용서를 받은 입장에서 세상을 다시 본다는 겁니다. 그러면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줄 알았던 것이, 이제는 예수님이 시켰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영화를 보면 사채업자들이 종종 나오는데,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 그들이 하는 짓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도 빚을 받을 때 그 사채업자들 못지 않게, 아니 오려 더욱 잔인한데, 즉 "지옥에나 가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지옥을 만든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호와증인들의 경우에는 지옥이 없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이 그런 무시무시한 지옥을 만들 리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빚, 즉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을 보지 않아서 그러한데, 그래서 그들은 지옥이나 심판을 없다고 본다는 것이죠.

그리고 기존 교회에서도 지옥을 입에 담지 않는데, 손님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얼마나 비겁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지옥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목사를 욕하면 지옥에 간다" 라고 할 때인데, 그 이외에는 지옥이란 것이 없다는 말이죠(ㅋㅋ).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생각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지금 바깥에 그야말로 비바람이 불든지 눈보라가 휘날리든지 간에, 지진이 일어나든지 말든지 간에, 그리고 집에 가스를 잘 잠구었든지 말았든지 간에, 그러한 것들이 모두 다 시시하게 여겨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3장을 보겠는데, 44절에서 46절입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 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팔아서 !!

여기 44절에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하실 수가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팔아서 빚을 갚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설교로 갚은 것이 아니고, 기적으로 갚은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살과 피로 빚을 갚았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러니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오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닌데, 그런 사람은 영생도 없고, 천국과는 무관한 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의 노력과 자기가 애쓴 것만 튀어나온다는 것이죠.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라고 하는데, 이게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인데, 오죽 했으면 그런 이야기를 했겠느냐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그게 라오디게아 교회인데 말이죠. 너무나 더러워서 도저히 함께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계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교회라고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야, 그 언약의 완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다른 것들이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우리교회가 이번에 교육관을 증축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제 아무리 증축해도 부동산이라는 겁니다. 그런 것들은 다 없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가 소유건물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 교회는 전쟁 피난처가 아니고 !!

이번에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났을 때, 그 피난민들이 그 근처의 폴란드와 같은 나라에 갔다는 말이죠. 거기에는 천주교나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들이 있는데, 그들이 아주 잘 지은 교회건물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곳을 피난처로 사용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에 예배당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하면, 오직 말씀으로, 그렇게 해서 십자가를 믿는 그 자체가 교회가 되면 되는데 말이죠.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건물이 있어서, "이것은 우리의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착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예배당을 피난처로 내어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복음에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방해가 될까요? 제가 장담하는데, 백퍼센트 방해가 되는데, 그러면 교회가 하나의 복지단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로부터 착한 일을 많이 한다는 소리를 들어서, 도대체 그런 것으로 무엇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저기 서울의 청량리에 가면 아직도 밥을 퍼주고 있는데, 그렇게 밥을 퍼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말이죠. 사회적인 인식이 좋아져서 교회에 교인들이 늘어난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교인들은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고 자기가 뭉개져야 하는데, 즉 교회가 교회 아님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는 죄인인 것을, 도저히 빚을 청산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 천국은 바꿔치기를 해주어야 !!

다시 마태복음 13장으로 돌아와서, 이 농부를 농사를 짓다가 밭에서 무엇을 발견하고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해서 밭을 샀는데, 즉 자기를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진주장사가 나오는데, 그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바꿔치기를 하는 것인데, 얼마나 좋은지 자기 소유를 다 팔아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갚을 수 없는 빚을 누군가가 대신해서 모두 갚아준 것이 천국이기에 말이죠. 그렇게 값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너는 너의 것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닌데, 다만 주님이 빌려주셔서 필요할 때까지만 사용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주님의 돈을 쓰고 있는데, 왜냐하면 주님은 복음이 아니라면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이 하신 일, 피를 흘린 그 스토리, 그것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목숨을 유지하게 해주시고, 돈도 빌려주신다는 말이죠. 그 빚을 청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피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 주님에게 "우리 가정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우리 자식이 성공하게 해주세요"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네가 복음을 알아?"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도 그 고집이 보통이 아닌데, 그래서 "복음을 전파할 테니, 우리 자식이 잘 되게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오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복음이란 것은 자기 것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소유를 모두 팔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자식이든 무엇이든 간에 다 팔아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복음을 안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 이제 정리하면 !!

이제 정리하면,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은 예수님의 하신 일, 즉 빚을 갚는 것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여기 교재 51페이지에 보면 신명기 5장 24절과 25절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신 5: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신 5: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이것은 시내산에서 있었든 일을 회상하는 것인데, 전쟁을 함에 있어서 빚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이고, 그렇게 거룩이 될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이죠. 사채업자는 그 빚을 아주 잔인하게 받아낸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어떠한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에 보면 신체포기각서까지 받아내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욱 심한데, 빚을 갚지 않으면 불로 싸질러 버리는데, 지옥에 가면 없애지고 않고 계속해서 불에 태운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만든 이 창조에 대해서, 감히 피조물인 주제에 그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의와 그 영광을 훼손한 값어치는 어느 정도인고 하니, 영원히 지옥에서 저주를 받는 벌칙을 받아야, 그래야 그 균형이 맞다는 겁니다.

* 아, 시원하다 !!

구더기도 타지 않는 지옥불에 계속해서 있어주어야 주님의 속이 시원한데, 그게 에스겔서에 나온다는 말이죠. 이번 수련회에 에스겔서를 할 것인데, 그렇게 되어야 주님이 만족해하신다는 말이죠. 이렇게 조폭보다 더 심한 저주를 퍼붓는 하나님을 인간들이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겔 5:13)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악마는 이런 하나님의 잔인성이 싫어서 자기 처소를 떠났고, 그래서 싸움을 벌이고 패배에서 이 땅에 내려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서 귀신들은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잡으려고 이 땅에까지 오셨군요. 사채업자보다 더 심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땅에는 구원받을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3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8절입니다.

(마 13: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마 13: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마 13: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 13: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마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마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 농부가 씨를 뿌림으로서 !!

여기 1절에 바닷가가 나오는데, 제가 이 바닷가를 실제로 가보았는데 말이죠. 물론 진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쪽에서 예수님이 설교를 하셨던 곳이라고 소개를 한다는 겁니다. 이런 곳에 가면 예수님의 말씀이 더 실감이 나지 싶은데, 물론 존재론인데 말이죠(ㅋㅋ).

그런데 여기에 3절에 보면, 씨를 뿌린다는 겁니다. 이게 천국의 씨앗인데, 이렇게 농부가 씨를 뿌리지 아니하면 이 밭에는 그 어떤 열매도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농부가 씨를 뿌림으로서 이 밭의 상태가 어떠한지, 즉 이 세상이 얼마나 저주를 받을 곳인지, 그게 비로소 노출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씨를 뿌려서 없던 씨가 존재감을 드러내니, 눈에 보이지 않던 악마가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말이죠. 어디선가 드론이 날아와서 길가에 뿌려진 그 씨를 그만 먹어버린다는 겁니다. 악마는 아는데, 이 씨가 나중에 열매가 된다는 것을 말이죠. 그러니 악마는 복음이 없는 세계가 계속해서 유지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과학의 이상이고 희망인데, 과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힘으로 인류가 먼 미래에까지 번영을 이루려는 기술을 확보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과학자들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과학, 즉 기술의 진보가 인간을 먹여 살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과, 천국의 씨앗을 뿌려서 빚을 청산했다고 하는 것, 즉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 복음으로 천국의 백성을 만드는 것과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영적전쟁은 계속해서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성도를 통해서 말이죠.

처음에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는데, 그 다음에는 그것을 피해서 씨가 땅 속으로 들어가서 싹을 틔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온전한 열매가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바위가 존재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바위에 막혀서 결국은 자라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그렇게 바위가 있어서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날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왔는데, 그런데 갑자기 하는 일과 집안에 힘든 일들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것을 종교를 바꾸어서 그렇다고 여기고, 그래서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고 과거처럼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환난이 오니 유턴을 하는데, 그러면 그것을 우리 인간의 힘으로 견디면서 유턴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 환난을 통과할 수가 있습니까? 바윗돌은 이미 있는데, 연약한 싹이 그 바윗돌을 드러내고 자라날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냥 그것으로 탈락이라는 겁니다.

그 다음의 경우에는, 바윗돌은 어떻게 통과했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보니 가시덤불이 있다는 말이죠. 어제 오후시간에 기도한 것처럼, 이제 복음은 좀 알았다고 하면서, 이제는 이 세상의 쾌락과 출세에 올인을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만났던 그 시험에 그만 홀라당 넘어갔다는 말이죠.

그렇게 가시덤불이 덮쳤는데,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나이야가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가시야가라' 라고 해야합니까? (ㅋㅋ) 만약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면, 그것은 유혹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기에, 그래서 유혹이라는 말이죠.

* 예수님 자신의 과업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설교의 내용에 나오는, 즉 바위를 피하고 가시덤불을 피하고 하는, 그 모든 빚은 오직 예수님만이 청산하실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의 과업, 그것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이제는 네 번째인데, 드디어 열매가 맺혔다는 말이죠. 30배, 60배, 100배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새가 와서 먹고 바윗돌에 막히고 가시덤불에 막히고 해서 씨앗이 허비가 된 것 같지만, 그 이상으로 충분하게 다 채워졌다는 말이죠. 5,000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이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들아, 이 세상이 그렇게 좋은가?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 이 세상의 전부를 다 합친 것보다 더 좋은 것, 그게 바로 영생이고 천국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 빚을 모두 다 청산해주셨기에, 우리가 갚을 우리의 빚은 이제 없다는 말이죠.

* 없나이다 !!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누가 너를 정죄하더냐?" 라고 하셨는데, 정죄하는 자가 이 현장에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자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네 글자로 "없나이다" 라고 했는데, 가능하다면 여러분의 손자손녀의 이름으로 이것으로 지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김없나이다', '최없나이다' 라고 말이죠.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우리가 천국에 가서 주님 앞에서 주님과 대화할 것은 오직 이것 하나밖에 없는데, 예수님께서 "누가 너를 정죄하더냐?" 라고 하시면, 우리는 뭐라고 하면 됩니까? "없나이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게 천국생활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전쟁이 우리가 전혀 갚을 수 없는 빚 청산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언약에 의해서 불로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왜 잔인하게 여겨졌는지, 이제는 우리의 눈에 있던 비늘이 떨어져서,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복음중심으로 움직이게 하신다는 것을 매일 실감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5,31 오전 11시에 마침.

(돈이) 없나이다 !!


영화를 보면 사채업자들이 종종 나오는데,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 그들이 하는 짓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도 빚을 받을 때 그 사채업자들 못지 않게, 아니 오려 더욱 잔인한데, 즉 "지옥에나 가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지옥을 만든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호와증인들의 경우에는 지옥이 없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이 그런 무시무시한 지옥을 만들 리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빚, 즉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을 보지 않아서 그러한데, 그래서 그들은 지옥이나 심판을 없다고 본다는 것이죠.

그리고 기존 교회에서도 지옥을 입에 담지 않는데, 손님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얼마나 비겁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지옥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목사를 욕하면 지옥에 간다" 라고 할 때인데, 그 이외에는 지옥이란 것이 없다는 말이죠(ㅋㅋ).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생각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지금 바깥에 그야말로 비바람이 불든지 눈보라가 휘날리든지 간에, 지진이 일어나든지 말든지 간에, 그리고 집에 가스를 잘 잠구었든지 말았든지 간에, 그러한 것들이 모두 다 시시하게 여겨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3장을 보겠는데, 44절에서 46절입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 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 13: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팔아서 !!

여기 44절에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하실 수가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팔아서 빚을 갚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설교로 갚은 것이 아니고, 기적으로 갚은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살과 피로 빚을 갚았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러니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나오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닌데, 그런 사람은 영생도 없고, 천국과는 무관한 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의 노력과 자기가 애쓴 것만 튀어나온다는 것이죠.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라고 하는데, 이게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인데, 오죽 했으면 그런 이야기를 했겠느냐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그게 라오디게아 교회인데 말이죠. 너무나 더러워서 도저히 함께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계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교회라고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야, 그 언약의 완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다른 것들이 튀어나온다는 말이죠. "우리교회가 이번에 교육관을 증축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제 아무리 증축해도 부동산이라는 겁니다. 그런 것들은 다 없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가 소유건물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 교회는 전쟁 피난처가 아니고 !!

이번에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났을 때, 그 피난민들이 그 근처의 폴란드와 같은 나라에 갔다는 말이죠. 거기에는 천주교나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들이 있는데, 그들이 아주 잘 지은 교회건물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곳을 피난처로 사용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만약에 예배당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하면, 오직 말씀으로, 그렇게 해서 십자가를 믿는 그 자체가 교회가 되면 되는데 말이죠.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건물이 있어서, "이것은 우리의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착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예배당을 피난처로 내어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복음에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방해가 될까요? 제가 장담하는데, 백퍼센트 방해가 되는데, 그러면 교회가 하나의 복지단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로부터 착한 일을 많이 한다는 소리를 들어서, 도대체 그런 것으로 무엇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저기 서울의 청량리에 가면 아직도 밥을 퍼주고 있는데, 그렇게 밥을 퍼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말이죠. 사회적인 인식이 좋아져서 교회에 교인들이 늘어난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교인들은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고 자기가 뭉개져야 하는데, 즉 교회가 교회 아님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는 죄인인 것을, 도저히 빚을 청산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 천국은 바꿔치기를 해주어야 !!

다시 마태복음 13장으로 돌아와서, 이 농부를 농사를 짓다가 밭에서 무엇을 발견하고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해서 밭을 샀는데, 즉 자기를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진주장사가 나오는데, 그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는 말이죠.

그러니 천국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바꿔치기를 하는 것인데, 얼마나 좋은지 자기 소유를 다 팔아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갚을 수 없는 빚을 누군가가 대신해서 모두 갚아준 것이 천국이기에 말이죠. 그렇게 값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너는 너의 것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닌데, 다만 주님이 빌려주셔서 필요할 때까지만 사용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주님의 돈을 쓰고 있는데, 왜냐하면 주님은 복음이 아니라면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이 하신 일, 피를 흘린 그 스토리, 그것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목숨을 유지하게 해주시고, 돈도 빌려주신다는 말이죠. 그 빚을 청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피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 주님에게 "우리 가정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우리 자식이 성공하게 해주세요"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네가 복음을 알아?"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도 그 고집이 보통이 아닌데, 그래서 "복음을 전파할 테니, 우리 자식이 잘 되게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오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복음이란 것은 자기 것을 챙기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 소유를 모두 팔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자식이든 무엇이든 간에 다 팔아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복음을 안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 이제 정리하면 !!

이제 정리하면,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은 예수님의 하신 일, 즉 빚을 갚는 것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여기 교재 51페이지에 보면 신명기 5장 24절과 25절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신 5: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신 5: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이것은 시내산에서 있었든 일을 회상하는 것인데, 전쟁을 함에 있어서 빚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이고, 그렇게 거룩이 될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이죠. 사채업자는 그 빚을 아주 잔인하게 받아낸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어떠한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에 보면 신체포기각서까지 받아내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욱 심한데, 빚을 갚지 않으면 불로 싸질러 버리는데, 지옥에 가면 없애지고 않고 계속해서 불에 태운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만든 이 창조에 대해서, 감히 피조물인 주제에 그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의와 그 영광을 훼손한 값어치는 어느 정도인고 하니, 영원히 지옥에서 저주를 받는 벌칙을 받아야, 그래야 그 균형이 맞다는 겁니다.

* 아, 시원하다 !!

구더기도 타지 않는 지옥불에 계속해서 있어주어야 주님의 속이 시원한데, 그게 에스겔서에 나온다는 말이죠. 이번 수련회에 에스겔서를 할 것인데, 그렇게 되어야 주님이 만족해하신다는 말이죠. 이렇게 조폭보다 더 심한 저주를 퍼붓는 하나님을 인간들이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겔 5:13)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내 분이 그들에게 다한즉 나 여호와가 열심으로 말한 줄을 그들이 알리라

악마는 이런 하나님의 잔인성이 싫어서 자기 처소를 떠났고, 그래서 싸움을 벌이고 패배에서 이 땅에 내려왔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서 귀신들은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잡으려고 이 땅에까지 오셨군요. 사채업자보다 더 심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땅에는 구원받을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13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8절입니다.

(마 13: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마 13: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마 13: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 13: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마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마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 농부가 씨를 뿌림으로서 !!

여기 1절에 바닷가가 나오는데, 제가 이 바닷가를 실제로 가보았는데 말이죠. 물론 진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쪽에서 예수님이 설교를 하셨던 곳이라고 소개를 한다는 겁니다. 이런 곳에 가면 예수님의 말씀이 더 실감이 나지 싶은데, 물론 존재론인데 말이죠(ㅋㅋ).

그런데 여기에 3절에 보면, 씨를 뿌린다는 겁니다. 이게 천국의 씨앗인데, 이렇게 농부가 씨를 뿌리지 아니하면 이 밭에는 그 어떤 열매도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농부가 씨를 뿌림으로서 이 밭의 상태가 어떠한지, 즉 이 세상이 얼마나 저주를 받을 곳인지, 그게 비로소 노출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씨를 뿌려서 없던 씨가 존재감을 드러내니, 눈에 보이지 않던 악마가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말이죠. 어디선가 드론이 날아와서 길가에 뿌려진 그 씨를 그만 먹어버린다는 겁니다. 악마는 아는데, 이 씨가 나중에 열매가 된다는 것을 말이죠. 그러니 악마는 복음이 없는 세계가 계속해서 유지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과학의 이상이고 희망인데, 과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힘으로 인류가 먼 미래에까지 번영을 이루려는 기술을 확보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과학자들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과학, 즉 기술의 진보가 인간을 먹여 살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과, 천국의 씨앗을 뿌려서 빚을 청산했다고 하는 것, 즉 예수님의 말씀으로, 그 복음으로 천국의 백성을 만드는 것과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영적전쟁은 계속해서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성도를 통해서 말이죠.

처음에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는데, 그 다음에는 그것을 피해서 씨가 땅 속으로 들어가서 싹을 틔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온전한 열매가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바위가 존재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바위에 막혀서 결국은 자라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그렇게 바위가 있어서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날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왔는데, 그런데 갑자기 하는 일과 집안에 힘든 일들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것을 종교를 바꾸어서 그렇다고 여기고, 그래서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고 과거처럼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환난이 오니 유턴을 하는데, 그러면 그것을 우리 인간의 힘으로 견디면서 유턴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 환난을 통과할 수가 있습니까? 바윗돌은 이미 있는데, 연약한 싹이 그 바윗돌을 드러내고 자라날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냥 그것으로 탈락이라는 겁니다.

그 다음의 경우에는, 바윗돌은 어떻게 통과했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보니 가시덤불이 있다는 말이죠. 어제 오후시간에 기도한 것처럼, 이제 복음은 좀 알았다고 하면서, 이제는 이 세상의 쾌락과 출세에 올인을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만났던 그 시험에 그만 홀라당 넘어갔다는 말이죠.

그렇게 가시덤불이 덮쳤는데,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나이야가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가시야가라' 라고 해야합니까? (ㅋㅋ) 만약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면, 그것은 유혹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기에, 그래서 유혹이라는 말이죠.

* 예수님 자신의 과업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설교의 내용에 나오는, 즉 바위를 피하고 가시덤불을 피하고 하는, 그 모든 빚은 오직 예수님만이 청산하실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의 과업, 그것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이제는 네 번째인데, 드디어 열매가 맺혔다는 말이죠. 30배, 60배, 100배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새가 와서 먹고 바윗돌에 막히고 가시덤불에 막히고 해서 씨앗이 허비가 된 것 같지만, 그 이상으로 충분하게 다 채워졌다는 말이죠. 5,000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이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들아, 이 세상이 그렇게 좋은가?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 이 세상의 전부를 다 합친 것보다 더 좋은 것, 그게 바로 영생이고 천국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 빚을 모두 다 청산해주셨기에, 우리가 갚을 우리의 빚은 이제 없다는 말이죠.

* 없나이다 !!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누가 너를 정죄하더냐?" 라고 하셨는데, 정죄하는 자가 이 현장에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자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네 글자로 "없나이다" 라고 했는데, 가능하다면 여러분의 손자손녀의 이름으로 이것으로 지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김없나이다', '최없나이다' 라고 말이죠.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우리가 천국에 가서 주님 앞에서 주님과 대화할 것은 오직 이것 하나밖에 없는데, 예수님께서 "누가 너를 정죄하더냐?" 라고 하시면, 우리는 뭐라고 하면 됩니까? "없나이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게 천국생활이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전쟁이 우리가 전혀 갚을 수 없는 빚 청산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언약에 의해서 불로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왜 잔인하게 여겨졌는지, 이제는 우리의 눈에 있던 비늘이 떨어져서,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복음중심으로 움직이게 하신다는 것을 매일 실감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5,31 오전 11시에 마침.

(돈이) 없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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