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번
다섯 번째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것은 인간들의 시간 개념에 대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동의를 해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의 어떤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순서를 정하든 그것 하고 하나님 일하시는 것 하고는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주도권이에요. 부활이라는 것은 일종의 권력입니다. 부활 상태는 권력 상태고, 권력 상태는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느냐 하는 세상의 모든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느냐 이렇게 합니다. 성경말씀은 이 주도권이 말씀에게 있다. 기록된 말씀, 하나님의 말씀 다 되는데 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말씀의 존재가 여기에 다 매달려 있다. 이거에요.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일이 벌어졌다, 그 말씀에 의해서 벌어져야만 했던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이. 따라서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고 묻어버려라 이 말이죠. 왜냐하면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니까. 그 새로운 사건은 어디서 발생되는가? 그 말씀에 이미 내장돼 있는 하나의 권력이 세상에 발휘되면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돌발적인 사태가 우리 앞에 또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는데 그 사태가 뭐냐? 부활하신 원리원칙이 부활로 말미암아 발현된 그 법칙이 권력을 가지고 어떤 강한 힘을 가지고 세상의 주도권을 가지고 말씀대로 그렇게 응하는 새로운 사건을 여러분들이 만나게 될 것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베드로전서에 나오지만 풀에 꽃 같고 사라지기 때문에 제가 아까 처음에 사라진다고 했지요. 연기성이라는 것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에 연연하고 과거를 이렇게 연연한다면 새로운 사건에 대하여서 거기에 대해서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또 독자적인 자기 주도권을 발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원치 않는 사건입니다. 라는 말을 왜 건방지게 하느냐 말이죠. 네가 뭔데. 네가 말씀이야. 아닙니다. 네가 그러면 영원하냐? 그런데 네가 왜해? 새로운 사태가 나타난 것에 대해서 아, 하나님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눈이 이렇게 많이 와서는 안 됩니다. 왜 자꾸 이렇게 반발하느냔 말이에요. 우리 애가 정박아 되면 안 된다 라든지, 왜 그렇게 반발하느냐 이 말이에요. 내가 벌이는 사업은 다른 집의 치킨집은 망해도 내가 하는 치킨집은 잘 돼야 됩니다. 대박 터뜨려야 됩니다. 라는 그런 주도권, 권력 상태를 자꾸 우리 나름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노골적으로 묻지요, 하나님께서 네가 스스로 죽고, 스스로 부활할 수 있어? 없습니다. 부활된 힘이 있어?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활된 힘에 대해서 의존해야지 이미 예수님이 죽었다가 예수님만이 부활했다면 모든 세상의 주도권은 부활하신 분이 갖고 있는 거예요. 그분이 그냥 부활이기 때문에 그냥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으로 권력상태로 살아있단 말이에요. 그것은 바로 말씀에 의해서 주도권을, 이 세상을 쥐고 있는 겁니다.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이것은 인간의 모든 나름대로의 계산에 대한 부딪침이 발생되지요. 첫 번째 강의에 항상 10분 뒤에 다 조신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중요한 것을 빨리 해치워야죠.
모든 것이 구명 속으로 사라져요. 왜 풀의 꽃 같기 때문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여기 미워하지 마라, 미워해서는 안 돼, 불상한 사람을 도와줘, 미워하지 말라는 이런 발상은 무에서 발생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거쳐서 나와야 되는데 내가 여기 살아있으니까 미워하지마, 살인하지마 그러면 난 이것을 지켜야지 하고 바로 들어와 버려요.
현재 모든 신학의 기독교 윤리라든지, 성화론이라든지 그리스도인의 삶, 이것이 거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주도권을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아이, 씨, 나도 부활했잖아요. 주님 덕분에 나도 부활됐잖아요. 나도 힘께 나 행사하겠습니다. 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잘했으니까 과거에 잘한 것 가지고 미래까지 보장해 주소서. 그것은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그 법칙과 위배되는 겁니다. 말씀에 응한다는 것과 위배되는 거예요. 자기는 말씀이 아니거든요. 말씀에 의하면 자기는 없어져야 되고 사라지고 훼파되고 날아가 버려야 되는데 자기는 이것을 무의 상태를 안 거치고 바로 눈에 띤다고 해서 바로 들어가 버려요. 그래 나는 이제 하지 않을 거야, 바르게 살 거야. 여기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바로 들어와 버리니까 내가 이렇게 남을 미워하지 않으니까 나의 존재는 영원토록 가치를 인정해 달라고 우기는 그런 발상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잠시 한 번 봅시다. 예수님의 기도제목인데 예수님이 기도할 때 다른 제자들은 잤다는 것, 여러분들은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 다른 제자들과 사전에 상의하거나 의논한 바가 없습니다. 타협한 것도 없고, 정치적 협상을 한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 기도를 고치려고 해서는 안 되고, 이것은 예수님 혼자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한 대목이에요. 따라서 그 기도한 대목은 나중에 기도가 그대로 실천이 될 때에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우리가 거부해선 안 되지요.
요한복음 17장 12절에 보면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다같이 시작, “성경을 응하게 하리라”
왜 가룟 유다만이 탈락되어야 되는가? 정답은, 객관식 1번, 가룟 유다가 돈을 횡령했다. 2번, 가룟 유다는 인간성이 못됐다. 모든 인간이 다 못됐죠. 아담의 자식이니까. 3번, 가룟 유다는 평소에 불만이 있었다. 4번, 가룟 유다는 믿음이 없었다. 5번, 가룟 유다는 본인도 모른다. 다만 성경에 짤리도록 되어 있었다. 몇 번입니까? 5번이에요. 이것이 주도권입니다. 이것이 신만이, 하나님만 갖고 있는 주도권이에요.
베드로전후서의 주제는 뭐냐? 주도권은 주인한테 있다는 그것이 베드로전후서의 주도권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알았어요. 어디서, 변화산에서 알았습니다. 그 변화산에서 알았던 그것을 이젠 샛별처럼 너희 차례다. 너희 속에 마음속에 그 주님의 주도권이 피어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겁니다. 베드로전후서에서. 그래서 택한 자만 이 성경 베드로전후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무에서 나왔다고 철학에서 이야기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왔다, 이것이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에서 나온 것이 말씀을 지키겠다고 덤벼드니까 이것은 독자적인 자기 주체를 또 발휘하겠다는 그러한 일종의 시위문화, 또는 반발, 이런 것이죠. 그 반발이 이제 철야기도로 나옵니다. 철야기도 해가지고 눈물, 콧물 짜내면서 낙타무릎 되면서 기도하면서 주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하시면. 다 줬는데, 왜. 뭐 줬습니까? 이미 새로운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 걸. 새로운 사건. 새로운 사건 싫습니다. 제가 원하는 사건하겠습니다. 네가 뭔데, 네 사건을 따져, 거기다 개입시키려고 하느냐. 네가 원하는 사건은 이미 나는 아는바 없어.
모든 것은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말씀대로 응하게 돼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말씀의 위력이 뭡니까? 아까 애기했지요. 지워버렸네. 부활의 위력이에요. 죽어도 죄인 돼도 용서되고, 죽어도 다시 사는 이 부활의 위력이 이제는 사건으로 쪼개져서 네 코 앞에, 눈앞에 살아가면서 탁탁 부딪치게 될 거란 이 말이에요. 부딪칠 때마다 이것은 아아, 나는 이미 영생 얻었구나, 나는 천국의 사람이구나, 빛의 자녀구나, 나는 이미 거룩된 사람이구나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 사건을 맞이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은 뭐가 있습니까? 우리가 할 것은 그것을 맛보면서 이 땅에서 슬슬 은퇴하는 일이에요. 사라져가는 일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저는 그 다음에 순서로 나가서 버림받은 삶.
여기에 요한복음 17장 이왕 폈으니까 15절에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이 어려워요. 왜 어렵냐 하면 지금 뭐하고 다투냐 하면 경건하면 우리가 평소에 경험적으로 알았던 경건, 이것을 칸트는 감각적이라고 하고 그 감각적보다 더 나간 예지적인 것과 구분했어요. 인간의 경험이나 감각에서 나오는 그런 세계 말고 예지적 세계, 신적 세계, 신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그런 했는데.
예를 들어 경건이 뭐냐 할 때 우리는 우리가 알았던 경건, 훌륭한 사람들 테레사 수녀라든지 안 그러면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라든지, 인도의 간디라든지 공자나 맹자, 석가모니 또는 예수 하여튼 내노라 하는 위대한 착한 일에 대해서는 한 가닥씩 하시는 분, 신장 떼 주고, 재산 사회 기부하고 김밥 말아서 40억 주는 불교 보살들, 뭔가 그런 사람들을 이상화, 표준화 삼아, 그것을 플라톤의 이데아라 하는데, 이상화 삼고,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거리를 얼마나 좁히나 그 간격을 얼마나 좁혀나가느냐는 거죠. 저 강원도에 있는 어떤 할머니가 신장이 나쁘다고 해서 대구에 있는 내가 떼 주기보다는 그보다 간격을 줄여서 내 친척 가운데 신장 나쁜 사람은 내 신장을 떼 드리겠습니다. 비록 멀리 있는 사람은 못 도와줘도 가까이 있는 사람은 도와주었으니까 멀리 있는 사람까지 도와주는 고귀한 사랑은 안 되더라도 가까운 사람까지 도와줄 때에 나는 내가 설정한 선의 기준에 비해서 그 내신 성적이 남보다 우수하지 않느냐, 1등급은 안 되도 2등급 정도는 된다 이 말지요.
탤런트 김혜자씨가 아프리카에 가서 유니세프라든지 활동을 많이 합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아주 관념적인 제목을 걸면서 선언을 하고, 뭐 400원이면 북한 어린이가 한끼 보장이 됩니다. 여러 가지 해가지고 호소를 하는데 아프리카, 인도의 문제는 간단합니다. 왜 아이를 많이 났느냐 말입니다. 맬더스의 법칙에 의하면 아무리 식량을 증산해도 인구를 따라 잡을 수가 없다고 되어있습니다. 기하급수가 산술급수를 이기지 못한다고 했어요. 경제문제는 선이냐, 착함이냐 위대한 그런 문제가 아니고, 악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수효를 채우느냐 효율적인 문제에요. 그러니까 기능이고 기술적이에요.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사람은, 정치가라 하는 것은 선한 자가 아니라 기술자라 했습니다. 어떤 누구 하나는 대장이 있어야 되니까 머리가 없는 백성은, 국가는 성립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한 군주가 머리가 되고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그 사람이 선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큰 오산이라는 겁니다. 선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그분은 그런 일을 하는 기술자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보는 겁니다. 기술자가 둘 되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엉뚱한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따라서 군주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야지, 착한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특징입니다. 두려움 사람이 되어야지 착한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남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 되지 말고 남에게 공포심을 유발하는 사람이어야 참된 군주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성격이 맞는 사람이 더러 있을 거예요. 딱이다 하는 사람 더러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소위 사회적 지도자급이라 하는데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요구하려면 뭣 때문에 학교에는 교장 세워놓고, 왜 나라에는 대통령 세워놓고, 왜 교회는 목사 세워놨냐 말이죠. 자기들이 권력을 이양해 놓고 그 이양된 권력 가지고 마음대로 자기를 통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까지 수용을 해 주어야 되지 나라를 다스려주옵소서 해놓고서는 왜 밑에서 흔들어가지고는 내려오라고 난리냔 말이죠. 그러려면 처음부터 권력을 이양하지 말든지.
이러한 군주록은 근대의 국가를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에른스트 갓시러라는 사람이 [국가의 신화]라는 글을 썼는데 모든 것을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나중에 이것이 군주, 독재 이것이 나오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하지만 상징으로 만들어났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국가라 하는 것은 우리의 영웅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의 분업화됐어요.
사람은 농사짓는 사람보다 농사 행정을 지도하는 사람이 더 높다는 그러한 봉건주의 사회에서의 계급제도 있었다는 것이 고대 봉건 사회라면 근대사회에 와서는 하나의 행정하는 사람이라면 분업이죠. 그러니까 안경을 만들 때 안경테를 만드는 파트 따로 있고, 안경알 집어넣는 파트 있듯이 각 파트가 있을 뿐이지 더 위대하고 더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정이라는 것을 관료고 자기의 전문적이고. 그런 사람에게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너나 잘하세요. 그럼 나는 못 사니까, 나는 농사지으니까 빛 어둡도록 살아도 용납이 되고 잘사는 사람은 그것은 용납이 안 되고 이것은 현재 기능적이고 분업화된 관료체제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거지요.
그런데 윤리도덕이 없어지지 않느냐? 이 세상이 완전히 그야말로 지옥이고 힘 있는 자가 행패부리는 세상이 될 것인데 그런 질서는 누가 잡느냐? 그런 질서 잡는 것 걱정하지 마시란 이말 이죠. 왜냐하면 아담 스미스가 등장해서 모든 질서 잡기는, 칸트는 아주 순진하게 인간의 도덕성이나 이런 것 가지고 세상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아직도 낭만적인 생각을 했지만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윤리와 도덕을 질서 잡는 것은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한 자, 돈이에요. 돈.
착하면 돈 될 때 사람 착합니다. 착하기 위한 착함이 아니라 돈만 된다면 언제든지 착해질 수 있는 거예요. 망나니 같은 자식 기업체 한 번 넣어 보세요. 인간 다 됩니다. 인간 다 돼버려요. 직업 없이 빙빙 놀면서 새벽 2시에 자가지고 아침 10시에 일어나가지고, 형인데 말 놔도 되겠지. 응. 백수 생활해 가면서 단무지 안 되겠나. 이렇게 하면서. 그렇게 하다가 막상 회사에 들어가 보세요. 영업사원 들어가 보세요. 어디서 그런 교양이 생기는지 빳빳한 그런 와이셔츠 위에 잠그고, 양복 착 입고, 머리 깍두기, 둥글게 올려가지고, 어디서 나왔어요? 알리안츠에서 나왔습니다. 사모님, 언제 옛날에 사모님 말 했어요, 가시나가 이렇게 하다가 사모님, 이것 드시면 이런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 직업도 마찬가지에요. 추리닝 벗어가지고 턱 던져가지고 천하 방에 어질러 놓고 하더니만 아침에 출근한다고 찍어 발라가지고 회사 가서는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말 높이다가 저녁에 피곤해 가지고 스트레스 받쳐가지고, 엄마아, 라면 끓어줘. 뒤집어 가지고. 빨래도 한 편에 휙 벗어던지고. 빨래도 올케 다 빨아, 나 못하겠다. 아침 되면 댕기머리 해 가지고 또 어서오세요.
돈이 윤리를 생산하는 거예요.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모든 인격가치는 시장에서 결정돼요. 이것이 신자유주의에요. 이것이 오늘날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입니다. 돈이 결정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양심에 호소했습니다. 요새는 돈이 인간의 인품을 결정하는 겁니다. 왜 지도자들이 바르게 살아야 하는가? 안 하면 그 자리가 보통 돈이 생기는 자리가 아니고, 권력이 생기는 자리이기 때문에 권력과 돈이 무서워서 품위 있는 척이라도 그 직장을 버티고 있어야 됩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어지고 흩어지고 허무하게 날아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렇게 죽음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살아있으니까 내가 고생해야 감추고 있지만 돈이 생긴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가는 겁니다. 거쳐서 가지 않고 바로 갑니다. 바로 가니까 자기는 절대자가 되고 진짜 아담처럼 이것을 따먹고 신처럼 행사하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이 호락호락 가만 두질 않지요. 뭐냐 하면 우리는 허무하며 우리는 쇠폐해야 되며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 사건이 뭐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말씀이라는 그러한 문자의 표현에 담겨서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전달하게 되면 그 말씀을 대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인생을 결정시키는 것이 아니고 매달려 있구나.
요한복음 17장 17절에 보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니" 이 말이 세상 사람들한테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습니다. 뭐가 네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어? 예수님이 말한 경건과 우리가 방금 제가 돈 때문에 경건과 경건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성경에서 경건해라 할 때는 주도권을 쥐고 있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살아왔던 그 모습을 경건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뭐라고 우기냐 하면은 한경직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위대한 성자들 그것과 근접된 그것을 모델로 삼아서 그것과 몇 미터 떨어졌을까? 조금만 노력하면 따라 붙을 걸. 이런 가능성을 내포한 그런 걸 경건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아침에 문 목사님이 일찍 오셔가지고 잠시 대화를 나눴습니다. 문 목사님이 여기 계십니다만 서산에 있습니다. 문 목사님을 만나자마자 제가 안 좋은 소리를 했습니다. 어떤 안 좋은 소리를 했냐면 참 외롭겠다. 10년째 아직 버티고 있어요. 이제는 거기서 탈출할 수 있는데 보수주의 성향이 있는 그러한 마을에서 복음에 대해서 관심도 없는 죽음의 도시에서 10년째 거기에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왜 오래 계시냐 하니까 갈 데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혹시 좋은 자리 있으면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베드로전후서하고 오늘 요한복음 17장하고 똑같아요. 왜 우리를 안 데려가느냐 말이죠. 그것은 그 서산 마을에 하나라도 있어라. 하나라도. 그것은 뭘 느끼느냐하면 왜 내가 있어야 됩니까? 라는 정답은 성경에 응하여야 하는 것, 그것이 정답이에요. 왜 이 세상은 복음에 관심이 없습니까? 복음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누구라도 이야기를 해야 된다 말이죠.
여러분들은 복음에 정말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을 잘못 보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거기에서는 해야 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라고 그냥 박혀 있는 거예요. 옛날의 구약의 선자지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파수군 역할한 거예요. 그냥 아무리 가만있을 때 혼자 사자가 울듯이 울었고, 나팔을 불듯이 부르는 겁니다. 남들은 거기에 대해서 나팔을 저 사람은 왜 부느냐 조롱하지만, 조롱하든 말든 자기 혼자 나팔 불었어요. 불고 바른 소리하고 순교당하고, 그것이 오늘날 성도에요.
여기 17절에 보면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여기에 거룩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거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진리가 그 사람을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진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누구와 같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았던 그 모습과 동일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거룩은 어디서 찾아야 됩니까? 위대한 성자, 위대한 성녀, 훌륭한 목회자 거기서 찾아야 됩니까? 아닙니다. 거룩의 진짜 진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발언하고 어떻게 살았나, 그것이 거룩이에요.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교회에 잘 되라고 비판하면 교회가 안 되니까 입 다물라, 그것이 거룩이 아니라 지금 잘못된 교회에 대해서 입을 벌려서 말해 주는 게 그것이 거룩이에요. 네가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느냐? 예수님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내세우는 것이 그것이 거룩이에요. 베드로전서에서 하나님이 주님이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는 말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삶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보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죽음을 거쳐서 모르고 현재 내가 상상하고 있는 착한 일은 다 동원해 가지고 이렇게 바로 거룩하다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개입하지 않으면 어느 놈이 거룩합니까? 돈 몇 푼이라도 쥐어줘야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행동을 하지요. 세상에 어떤 목사들 보고 이야기해 보세요. 돈 안 되는데 복음 전합니까? 미쳤다고. 돈 될 때 복음 전하지요.
저하고 같이 공부하는 사람이 얘기하는 것이 그것이에요. 왜 복음대로 하는데 돈이 안 생깁니까? 그 기준이 스데반 집사나 선지자를 모델로 삼지 않고 큰 교회의 여유만만하게 사는 당회장 목사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같은 목회자로서 기분 상하다 이 말이죠. 왜 같은 목회자인데 나보다 설교 못하는데 교인이 수천 명 모이고, 수만 명 모이고 나는 분명히 설교를 잘 하는데 작년에 10명 모였다, 올해는 5명. 이것이 하나님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분간이 안 된다 말이지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가 총회장입니까? 교단의 노회장이였습니까? 그 사람 바른 소리하다가 돌 맞아 죽었어요.
항상 거룩이 세상적인 거룩이 아니라 진리로 인하여 거룩된 기본적인 모델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입니다. 윤도현과 그 밴드가 아니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에요. 성경을 뭣 때문에 봅니까?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는 것 아닙니까? 제가 이런 소리하니까 목사님 성경대로 해서 어떻게 교회가 커집니까? 또 이런 소리하고. 그러니까 교회가 큰다는 조건하에만 성경을 펴셔야지 성경 펼쳐서 교회가 안 커진다면 성경 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사실 노골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뒤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어쨌든 저쨌든 복음대로 하니까 교회가 안 커지더라 이 말이죠. 저는 복음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쪽에선 복음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실적이 있어야 실적이 있음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싸움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한 발 양보해서 저도 목사님처럼 복음대로 외치는 그 자체가 선지자 역할이고 예수님의 삶인 줄 아는데 저는 그렇게 하고 싶은데 교인들이 그것을 이해 안 해 줘가지고 대충 타협해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이러거든요. 나는 그것을 인정하는데 교인들이 안 받아 줬기 때문에 교인들의 구미에 맞추다 보니까 그렇게 됐었다는. 그것은 하나의 전략가죠, 정치가죠.
그 모든 배후에는 결국 어제 오후에 마지막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어쨌든 나는 아직도 죽을 입장이 안 된다, 나는 살아야 될 가치가 넉넉히 남아있는 존재다, 그러한 자기가 말씀이 아니면서도 자기를 영원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죠.
이제 베드로전서 한 번 봅시다. 24절을 보면, 제가 24절을 읽고 여러분에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모든 육체는 풀 같고, 허무하다 이 말이죠. 모든 영광은 풀의 꽃같이 풀이 시들면 거기 달려 있는 꽃도 같이 시들기 때문에 다 쇠퇴하고 허무하다 이 말입니다.
자,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있기에 무엇이 주도권을 잡고 있기에 왜 우리는 풀과 같이 쇠잔해야만 하는 운명을 지니게 됐느냐 말입니다. 질문입니다. 누가 한 번 이야기 해보세요. 무엇이 잇기에,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잖아요. 나 쇠퇴할래. 요구하지는 않았을 거니까, 무엇이 먼저 있기에 우리는 후발 주자로서 그러한 영향을 받아서 우리 육체는 쇠잔해야 되고 우리 육체가 사라지면 우리가 아까 윤리 도덕도 같이 없어지는.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 무엇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것이 23절에 나오죠. 대답을 기대한 내가 잘못입니다. 씨앗 때문에. 씨앗이 이미 세상에 따로 투입 됐는데 그 씨앗이 뭐냐? 그 씨앗이 바로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 씨앗이 말씀입니다. 말씀이 떨어졌거든 납작 엎드려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말씀이 앞장서는데 주도권 쥐고 가는데 너는 그 앞에서 어디 감히 말씀을 가로막고 말씀이 내 영역에 들어오시면 안 되십니다, 여기는 내 영역입니다. 오줌 눠놨습니다. 이렇게 버틸 순 없다는 이 말이지요.
말씀은 우리가 거부하는 곳에서부터 침투합니다. 말씀이 침투하지 않는 곳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 일거수일투족 모든 사사건건 은밀한 곳까지 말씀이 다 침투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이러스처럼 나를 녹이고 부수고 깨고 사라지게 합니다. 수고했다. 이제 너는 없어져도 괜찮아. 말씀은 영원하면 됐지. 그것으로 족하지, 너는 죽어도 말씀은 살면 너는 박수칠 거지, 동의해 줄 거지.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할 적에 우리가 이런 착각해서 좋아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제 말씀이 들어와서 생명 얻었어. 나는 새 사람 되었다고 까불지들 말란 말이지요. 말씀이 들어오시면 순간 더 이상 나한테 기대할 것은 남아있지 않구나, 그렇게 이해해 주셔야 됩니다. 말씀이 침투하고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이제 내 것이라고 따로 챙길 만한 것들은 아무것도 없이 무장해제 당하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어렵게 해봅시다. 베드로전서 2장. 진도 안 나가는 것처럼 보여도 조금씩 나가고 있지요.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이것이 좀 어려운데 왜 그러냐 하면 '버림받은 돌'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버림받은 돌이 되어야 된다. 왜 버림받은 돌이 되어야 되는가? 그것은 말씀이 그렇게 성경에 응하기 위해서 버림받은 돌이 되어야 됩니다.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옵소서. 라고 하신다면 뭐 주옵소서까지, 주세요 하신다면 왜 버림받은 돌이 되어야 하냐면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동일하게 선택되었기 때문에 선택된 자는 버림받도록 그렇게 말씀에 응하게 되어 있어요.
누가 버립니까? 세상이 버립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버렸다고 우기는데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로 그런 운명으로 가도록 조치하십니다. 안타깝습니까, 아니면 속 시원하십니까?
배추 뿌리 먹으면 속이 그렇게 시원해진다면서요. 저는 이 세상에서 아예 버림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속이 다 시원합니다. 속청수, 까스명수 부채표가 아닌 것은 까스명수가 아니라고 하는 이 부채표 없어도 속이 시원해요. 왜냐하면 어제 안 오셔서 그런데 목회자의 문제가 자기가 성경 해석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이 있는 것처럼 설쳐대는 것, 그것 목회자한테 무거운 쇳덩어리입니다.
목회자의 모든 고민거리는 자기가 목회자라는 인식이 있다는 것이 문제에요. 나는 이 성경을 가르칠 가치도 없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고 가르치는 기회만 준다면 나는 황공무지로소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강단에 서면 이왕 버린 몸으로 서면 아무 문제없는데 대박 터뜨리겠다, 설교 대박 터뜨리겠다, 이렇게 나서면 거기에서 네가 뭔데 하고 나서는 부활의 주도권 쥐시는 부활과 충돌이 일어나요. 그러면 속상하지요. 약 먹어도 안 돼요. 잠 못 자지요.
그러면 나는 하나님 계속 목회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이 하든 안 하든 간에 너는 원래 쇠퇴하게 되어 있는데 안 해서 쇠퇴하든 해서 쇠퇴하든 마찬가지 아니냐 해야 됩니까, 안해야 되냐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자기가 자기를 주인공 만들 입법자로 됩니다. 이런 우리가 만든 법은 적용사항이 되질 안습니다. 호떡에 설탕을 얼마 넣을 거냐 말거냐 하는 그 문제는 호떡을 아예 안 먹겠다는 사람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지요. 붕어빵에 앙꼬를 많이 넣어드릴까요, 조금 넣어드릴까요? 저 붕어빵 싫은데요, 하면 그 짓이 아무것도 아니지요.
주님께서 받는 것은 우리를 용서해서 받지, 십자가 자기 피로 뿌려서 받지 우리가 받으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쓸데없는 고민에 빠져 있어요. 이래도 받고, 저래도 받으시는데 왜 자기를 광내고 번쩍거리게 만들고 반듯하게 하고 훌륭하게 다듬고 왜 그렇게 쓸데없는 짓들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가지고 점수를 더 자기에게 스프레이 뿌려가지고 하고. 이것이 자기 점수를 높이고자 하는 것밖에 더 됩니까?
이것을 카톨릭의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에 대해서 예리하게 지적했어요. 인간들이 뭔가 스스로 자기를 다듬자 하는 것은 어느 사상이냐 바로 개별자 사상에서 나온 겁니다. 개별자 사상이란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내가 앞에 잘되고 못 되는 것은 내 하기 나름이다. 어디 많이 듣던 것 아닙니까? 촌의 어머니한테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야야, 어디가도 너 하기 나름이데이. 니가 서울 가서 성공하려 하면 니만 열심히 하면 된다. 딴 것 생각하지 말고 너만 열심히 해라.
이 개별자 사상이 뭐냐 하면 너 공부한 것은 남 안 준다는 거예요. 너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뭐가 기쁘냐 하면은 남 안 준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기쁘게 해요. 남 안 준다는 게. 자기 노력의 누수가 없다 이 말이거든요. 이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몰라요.
라캉은 이것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면 주체라고 해요. 주체의 특징은 항상 폐쇄적입니다. 이 행동을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까를 결정하고 행동을 한다는 거예요. 사실은 그런 의지라는 것이 조사해보면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은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말고 간단하게 생각하면 선악과를 따먹을 때 다른 것도 아무것도 생각한 것 없어요. 따먹게 되면 과연 내가 신이 될 수 있는데 신이 된다는 것을 내가 포기할 이유가 없지. 내가 노동한 것은 남 안 주니까 결국은 나한테 돌아오니까 내가 따 먹고 나한테 돌아오는 거예요. 이것이 개별자 사고방식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가 한 의로운 행위가 자기만 구원시킨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택한 자에게 공급하고 나눠주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분배하는 개별자가 아니라 자기 사람들을 모든 것이 다 자기하고 똑같이 구원이 적용될 수 있도록 그렇게 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 이렇게 되는 겁니다.
개별자에 갇혀 있지 말고 개별자 그 자체를 부수어 버려라. 방법이 무엇입니까? 주님한테 물으면 방법은 뭐냐? 너는 너 자신의 어떤 행동도 너를 위한 너에게 도움 되는 쪽으로 돌아온다. 너는 무가치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상하게 너는 무가치한 존재란 이 말이 들으면 안 믿는 사람한테는 무가치한 존재가 하든 무슨 소용이 있느냐 차라리 안 해 버리지. 라는 생각이라든지 그렇다면 나만 해서 나한테 이렇게 생각할건데 진짜 성도한테는 내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말을 듣고부터는 나를 위해서 내가 일한다는 그런데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내가 설교 하는데 왜 몇 명이 안 알아줘. 이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내가 힘들여 했는데 내가 원하는 그런 결과가 나한테 안 주어진다, 이것도 개별자 그것이거든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이 개별적으로 생각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데 사람이 영혼이 있잖아요. 그 당시에 육과 영으로 되어있다 그렇게 봤거든요. 지금도 그렇게 많이 봅니다만 사람이 영혼이 있는데 영혼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 사람이 물으면 영혼은 영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이렇게 보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어요. 하나님이 두 분입니까, 세 분입니까? 하나님은 한 분 아닙니까?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영혼이 왔다면 이것이 개인 개인 속에 있다면 개개인은 개별자의식이 일어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똑같은 냉장고 공장에서 여기 계신 분들 냉장고 한 대씩 가져가세요. 라고 기부했는데 가장 먼저 사람들이 이름 쓰기 시작해요. 이근호, 내꺼. 똑같은 냉장고인데 자기 것이라 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공로를 인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줬는데 사람들은 받자마자 비교하는 거예요. 네게 많으냐, 내게 많으냐? 네 은사가 크냐, 내 은사가 크냐?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믿음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그리스도 한 몸이다. 너나 것이 없다. 눈이 귀하고, 발이 천하다 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지요. 자꾸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개별자의 장막, 장벽을 철폐하는 쪽으로 성경은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은 무엇을 들어도 내꺼라고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하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왜 하나님이 한 분이라면 왜 그것이 달라지는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해답을 못 내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이 가짜기 때문이죠. 사람은 자기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도 자기 자체 내에서 재구성을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칼 바르트에 의해서 비로소 제대로 정립되었어요. 사람은 우상 만드는데 천재다. 칼 바르트 이전에서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공통적으로 알고 다만 인간에게 문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 문제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은 자연 계시로 누구나 다 알게 되어있고 다만 하늘의 법을 따르지 못하는 능력이 없고 성령을 받지 못해서 특별계시적인 성령을 받지 못해서 못했다. 라는 이런 것이 대세를 이루었는데 칼 바르트에 와서는 그 하나님도 자기가 자기 좋아라고 만든 우상적인 신을 만들었다.
그러면 참된 신은 어디 있느냐 물으니까 참된 신은 감추어져있다, 어떻게 십자가 뒤에 감추어져 잇다. 그전에 루터는 더 예리하게 이야기했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연계시라 하는 것은 그 자연계시가 있기는 있는데 그 자연계시는 참된 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참된 신을 가리는 그러한 수단으로서 자연계시가 인간의 죄를 이야기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왜 사람들은 하나님은 하는데 우리가 한 형제처럼 살지 못하느냐? 그것은 전부다 가짜 하나님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철폐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모조리 다 우두둑 떨어져야 돼요. 떨어져 가지고 십자가에서 다시 이야기되면 십자가에서 이야기 될 때 우리는 네 것, 내 것이 없고 우리는 한 형제라는 것을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요. 그것이면 됐지, 십자가를 벗어나서 오, 신이시여. 그러면 그것은 다 한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지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개별적인 것을 내세우는 주체가 이미 복음, 십자가 사람에게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인정받지 못하지만 우리는 항상 새로운 또 우상들을 만들어내지요.
어제 제가 하나 빠진 것이 있는데요. 이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빠진 것이 있는데 기존의 신학자들이나 윤리학자들은 이렇게 봤어요. 칸트도 그렇게 봤어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갈등을 일으키는데 그 갈등을 일으켜 가면서도 점차점차 도덕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영원불멸, 영원토록 내 영혼이 이어져 가야 되고 그것이 완성되는 것은 목적적 나라라고 했어요. 칸트는 목적적 나라를 이야기해서 이상적 나라, 천국에 가서 유지된다고 이렇게 봤거든요.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선과 악 사이를 때로는 천사의 얼굴, 때로는 악마의 얼굴, 지킬과 하이드라는 것이 있지요. 같은 동일 한 인간인데 서로 다른 자아가 두 개 들어 있잖아요. 조성모가 불렀던 가시나무 새, 내 안에 또 내가 있다. 뭘 알아야지.
내 안에 내가 잇다, 선과 악에 대해서 이렇게 갈등을 일으킨다, 그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 이미 죽은 나와 아직 펄펄 살아서 나는 선해야 돼, 나는 악하면 안돼. 라고 분열을 일으키는 자아와 이미 십자가에 있는 나 사이의 갈등, 이것이 성도의 갈등입니다. 밑줄 쫙, 정말 중요한 게 있단 말입니다. 별표 두 개 치고. 선과 악의 갈등이 아니에요. 선과 악의 갈등은 불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착해야 되는데 악했구나, 회개하자. 아, 이 정도 악하면 안돼. 이젠 착하도록 나서야 돼. 선과 악의 갈등은 불신자들이 그렇게 살아가지만 진짜 신자는 선과 악의 갈등을 일으키는 그 자아와 또 이미 쓸모없다고 폐기 처분된 내가 왜 자꾸 내 생각하지, 또 내 나름대로 개별자 또 내꺼라고 주장하지. 그래서는 안 돼지. 라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이 자아 사이에 갈등이 평생토록 이어져 가는 거지요. 이것이 성도의 주체라는 겁니다.
조금만 하고 한 5분간 쉽시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버림받아야 될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 우리가 버림받아야 됩니다. 왜 그러냐하면 여기에 2장 6절에 보면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지요. 하나님께서 요긴한 돌처럼 사용하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약속인 메시아가 나타난다는 지정된 장소, 시온에다가 돌을 두었습니다. 거기서 둔 이유는 거기서 성전을 세우기 위해서 모퉁이 돌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돌이 7절에 의하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되었어요. 사람들에 의해서 버린 돌이 된 거예요.
그런데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줄 아시고 먼저 하나님께서 아들을 버림받는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그냥 던진 거예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자의 운명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던지시고 버리시고 다시 하나님 자신의 사람으로 건지는 과정을 통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독하게 악하냐를 완전히 증거할 수 있는 증거물이 확보가 되어 버려요.
그렇게 되면 주께서 지옥이라는 것이 지옥의 존재가 정당화되는 그러한 효력을 발생해요. 하나님의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정당했었다. 라는 것이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버림받는 생애를 통해서 분명히 확정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버림받은 자가 뭐냐? 9절에 보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대립된 영역이 나오지요. 하나는 뭡니까? 어두운 곳, 도대체 어두운 곳이 어디에요. 어두운 곳이 나오고 그 다음에 어두운 곳에 대립되는 빛된 곳, 빛의 자녀. 어두운 게 뭐며, 빛의 자녀가 뭡니까?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인간의 본성은 뭐냐? 이 세상은 뷰티플, 아름다운 거예요.
프로티누스라는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자들은 그 사람들은 악한 자라고 했습니다.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아름답고, 난이 피는 것을 보고 아름답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답고, 폭포의 웅장한 낙하의 광경이 그 물보라가 아름답고, 그리고 예쁜 여자가 아름답고, 예쁜 남자가 아름답고, 심지어 미물이 기어가는 모습이 아름답고, 눈의 발자국이 아름답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다움 천지인데 그런 아름다움을 어둡다고 표현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따져봐라 뭐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는지. 다 아름답잖아. 이것이 프로티누스가 강력하게 기독교에 반대하면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워야 된다. 거기에 대해서 성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그 조건이 있다. 그것은 뭐냐? 나는 스스로 내가 내 가치를 이야기할 때는 나는 아름답지 못하다고 할 때에 주어진 모든 것은 아름답지 못한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가 아름답다 이렇게 돼야 돼요. 내가 죄인의 괴수인 것을 깨달을 때 나는 살 가치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 이 모든 것이 그럼에도 살아있다는 놀라운 것이 환희와 감격과 기적으로 우리 가슴에 안긴다 이 말이죠.
공무원 시험 칠 때 한 번 떨어지고 두 번 떨어지고 시험 칠 때 그렇게 힘들 때 공무원 시험 되기만 되면 내가 소를 잡아 잔치를 하겠다. 그때는 공무원 세계가 모든 게 아름다워요. 과장님도 아름답고, 사무관님도 아름답고, 시청의 그 시장님도 아름다워요. 그런데 좀 승진되고 떴다 싶으면 시장님도 도둑놈이고, 순 돈 밖에 모르고 갑자기 아름답지 않게 된 거예요. 세상이 아름답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은 원래부터 아름답지 않지만 아름답지 않게 새삼 느끼는 것은 자기만이 아름답고 우기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가 아름답지 않겠다고 여기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할 것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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