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함평7강

아빠와 함께 2022. 3. 19. 12:20

제7번


여섯 번째 보충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12시까지 조금만 더하다가 마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8절 봅시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Servants, be subject to your masters with all fear; not only to the good and gentle, but also to the froward.

여기 보면 두려워함으로라는 말이 나와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따로 자기가 마지막 사수할 힘조차 나에게는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 같은 자존심 같은 것도 그것도 십자가 앞에서는 그것은 사실은 있으나마나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기로 작정했다는 겁니다. 몇 초? 2초 동안. 다 그렇지만.

이것을 경영적인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사람에게는 뭐냐 하면 약자한테는 긍휼을 베푸는 그런 습성이 있어요. 아무리 독한 인간이라도 약자라고 여겨질 때는 자비를 베풀어요. 레이디 퍼스트가 있잖아요. 여자한테는 폭력을 가하지 않듯이 여자도 여자 나름이겠습니다만은 해서는 안 되지요. 뭔가 자비를 베푸는 그런 것이 있어요. 그런 것을 호소해서 그런 소리하는 것 아니냐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 다음에 나오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왜 자꾸 우리가 이미 예수 믿었으면 십자가를 이미 통과했고 부활에 이르렀으면 이제 십자가는 버려도 될 건데 왜 자꾸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 베드로전서에서는 계속해서 거론하느냐 21절을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에 그리스도가 누굴 위해서 고난 받았습니까? 너희를 위하여.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까지는 얼마나 우리가 적당히 잘난 체했느냐. 예수님이 잘난 체하는 우리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버리고 전도해 버리면 우리는 잘난 체하는 것 때문에 징벌 받아야 마땅한데 잘난 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 잘나셨습니다. 하면서 이 잘난체하는 허풍마저도 용납을 해주었기에 우리가 구원되었잖아. 그렇다면 똑같은 사정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입장에 있다면 전에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 허풍떨던 인간들이 얼마나 수두룩하게 우리 주위에 상주하고 있을 것이 뻔하다 이 말이죠. 그런 사람들이.

그렇다면 저걸 그만 한 번 밟아. 이렇게 나오지 말고, 저거 한 번 해 봐. 이렇게 나오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전에 어떻게 대했는가 생각해 볼 때 참 똥이 더러워서 피하나, 아참, 더러워서 피하죠.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식으로, 그래 너 잘났어요, 잘났어. 하고 그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용납해주면 그게 좋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 주의할 것이 있어요. 뭐가 주의할 것이냐 하면 이것을 일반화시키면 문제가 생겨요. 어떤 문제냐 하면 어떤 남편이 잇는데 평소에는 괜찮아요. 술만 처먹었다 하면 밥상을 뒤엎고 잠자는 아이들 다 깨워가지고 하던 말 또 하고 술주정을 부리면서 남편을 우습게보고 말이야. 남편은 하늘이고 여자는 땅인데 어디 하늘인 나를 이렇게.. 그 대목이 나와요.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나오는데 있단 말이죠.

이럴 때 이것을 일반화시키면 예를 들어 이런 경우가 있어요. 남편이 나를 때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때리니까 나는 맞아주자. 나는 맞는 천사고, 저는 때리는 악마다.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 맞아주는 것을 예수님의 고난의 일에 동참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반화시켜서. 전부다 하나의 사건인데 사건을 이렇게 연결시키면 일반화 되잖아요. 남편이 때리면 후라이팬이 왜 있습니까? 같이 때리든지 고소하든지 이렇게 해야 될 텐데 남편이 때린다고 얻어맞는 것으로 젖먹이 입으로 뭐 목사님은 젖먹이 입으로 권능을 세워라, 얻어맞는 권능을 세워볼까? 이런 식으로 얻어맞는데, 자꾸 얻어맞게 되면요, 굳은 살 박히고 그것이 이력이 되서 안 때리면 잠이 안 올 수가 있어요. 하루도 안 맞고 하면 잠이 안 오는 경우가 생겨요. 이런 것은 성경말씀을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일반화를 시키면 엄청난 파국이 등장합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때는 예수님께서 뺨을 맞았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때리는 사람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배후의 하나님 뜻을 생각했습니다. 저 철없는 병사가 나를 하나의 정치적 죄수 취급해 때리는 것은 아버지의 그러한 뜻이다. 이렇게 보는데 남편이 폭력으로 자기 때리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왜 용납합니까? 그런 것을 위해서 경찰관이 있습니다. 고소해서 갇힌 자의 외로움을 느끼도록 만들어도 되고.

어떤 분이 저한테 한 4년 전에 찾아와 가지고 자기 가정문제에 대해서 상담했어요. 남편이 이래저래 하는데 이혼할까요? 이렇게 했어요. 이혼하세요. 라고 했어요. 왜 이혼하느냐? 이혼할 사유가 있어서 이혼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원하는 것이잖아요. 나는 본인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이혼하지 마세요. 한다면 그 사람은 나를 찾아온 보람이 없어요. 본인이 다 결정해 놓고 목사한테 확답 받으러 왔는데 동조해야지. 제가 그 여자 분 인생 책임질 것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예, 이혼하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이해해 줘야, 뭐냐 하면 그 여자 분은 지금 본인의 이혼이 심각하다고 보거든요. 저는 심각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혼하고 또 살면 되잖아요. 그러면 되잖아요.

사실은 뭐가 심각하냐 하면은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그 이유가 심각해요. 제가 보기에는. 그게 뭐냐 사회정의, 하나님의 법, 성경말씀, 아닙니다. 자존심이에요, 자존심. 자존심이 꺾이지 않겠다는 것, 그것이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목사로서 어떻게 자존심이 강하시군요. 이런 말 한다고 꺾일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때는 하나님께 일임하는 쪽에서 이혼하시기 바랍니다. 속으로는 이혼하고 난 뒤 자존심이 아직 살아있는지 두고 봅시다. 그런 뜻이에요.

그 사람은 이혼이 중요하다고 봤는데 제가 보기는 이혼을 결심하게 된 과정 속에 있었던 그 자존심이 오히려 자기한테는 더 독소조항이라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정말 이혼할 것 같으면 목사님 헤어졌습니다. 방긋 웃으면서, 헤어졌습니다. 나는 주의 뜻으로 받겠습니다. 아, 이분은 자존심이 없구나. 이혼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본 이렇게 되는데. 이혼할까요? 이렇게 왔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나, 자존심 포기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한테는 이혼을 안 한 상태에서도 이미 이혼한 상태로 볼 수밖에 없어요. 이혼 안 했더라도 이미 이혼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 이렇게 됐는데 그 말씀은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 짝진 것은 사람이 못 나눕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누라면 나눠야 되지. 하나님이 짝이 안 지어졌어요. 그것이. 처음부터 결혼할 때부터 자존심과 자존심이 이렇게 된 거지, 하나님이 짝지어준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궤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만히 보면 말이 맞아요. 처음부터 살지 말아야 될 사람이 산 거예요. 원상태로 된 겁니다.

문제는 바로 상대방의 허다한 죄를 덮을 용의가 없다는 거예요. 왜 자아가 너무 강하게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혼하는 것을 통해서 이혼이 문제가 아니라 이 자존심이 깨어지는 수단으로서 하나님께서 이혼이라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그 이혼하는 방법으로 자존심이 깨지는. 그런데 보통 이혼하는 여자들의 결정하는 것을 보면 자존심 깨어지기 위해서 이혼하는 것이 아니고 제발 이제는 거추장스러운 짐 같은 것 좀 없어지고 홀가분하게 한 번 살아보려고. 자식도 귀찮아, 만사가 다 귀찮아, 남편도 귀찮아. 이제는 오십에 바다를 찾았듯이 이제 내 인생 찾아 가겠다. 드디어 나는 자아를 발견했는데 만세. 자아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자아라 하는 것은 그것은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또 내용을 채워야 됩니다. 또 두리번거리면서 자기보다 높은 남자를 찾고는 또 채워야 돼요. 채우는데 결핍이 생기고. 다시 만난 남자가 옛날 남자고..

그 이야기가 사마리아 여인의 다섯 남자와 사귀고, 다섯 남편을 가졌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사귀는 요새 같으면 아주 이상적인 여인의 길이죠. 무슨 좋은 팔자가 여섯 명이나 갈아치우는 보통 여자가 아니에요. 미모가 뛰어나든지 수완이 있든지 해야 돼요. 부럽지요. 어떻게 다섯 남자와 사니 재주도 좋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여자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생수를 주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얻었으면 그 여섯 남자하고 헤어져야 합니까? 필요 없어요. 헤어지든 상관없이 주어지는 거예요. 땅의 원리는 하늘의 원리를 가릴 뿐이지 하늘의 원리를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하늘의 원리가 들어온 사람 같으면 땅의 원리에 의해서 구애받지 말라는 것이 베드로전서 3장의 내용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늘의 원리, 예수님의 속죄, 십자가로 말미암아 피 뿌림으로서 이미 용서되었음, 나한테 앞으로 어떤 일이 있고 앞으로, 앞으로 10년 뒤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상관없이 이미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았음은 그것은 앞으로 부활의 사건들을 통해서 그것이 다 용납이 되는 거지요. 이것을 가지고 고난이라고 합니다. 코난이 아닙니다. 고난의 특징은 이것이 마냥 슬프지만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에 보면 항상 기뻐하고 항상 즐거워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몇 초? 2초요. 항상 2초라. 참 24시간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약효가, 약발이 안 좋아요. 항상 기뻐하고 항상 즐거워하라. 이 말은 늘 기뻐하라는 말도 되지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기뻐하라, 어떠한 사태가 벌어져도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쌍꺼풀 수술하고 이런 것 안 했습니다. 주어진 그 모든 일에 대해서 그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충분히 증거할 수 있다. 어떤 사태가 와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방해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이에요.

빌레몬서에 보면 오네시모라는 종이 나와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고대의 경제구조에서 이 노예가 차지하는 사회적인 위치에 대해서 좀 알아야 돼요. 로마시에 85퍼센트가 노예입니다. 요새 노예라 하면 그냥 밭일이나 하고, 연탄이나 갈아 넣고, 쓰레기나 치우고, 그냥 음식이나 하는 그것을 노예라 하는데 그것이 노예가 아니에요. 로마시의 노예라 하면 의사, 상담원, 학교교사, 다 노옙니다. 노예십니다. 귀족들은 뭣 하느냐? 귀족들은 시와 춤과 예술과 철학을 논하지요.

이것은 로마까지 멀리 갈 것도 없이 17세기 영정조 시대 때에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이 노는 것들 한 번 보세요. 뭐 난을 치고, 음악을 가락을 튕기고, 기생하고 같이 노닥거리는 것, 누굽니까? 농사짓는 사람입니까? 사대부들이에요. 지주들이에요. 지주들은 원래는 경국대전에 보면 세습되지 않게 되어 있어요. 토지가 제한되어 있는데 좋은 요지 땅, 씨 뿌리면 너무나 풍작을 이루는 요지 땅은 그것은 국가재산이 돼야 되서 국력을 키우는 그런 경제력으로 동원되어야 될 토지를 소위 충성되고 임금을 옹립하는데 있어서 큰 공헌을 했다 싶으면 거기다 그 땅을 하사하고, 하사하면 되는데 이것이 그 집의 땅으로 대대로 세습이 되니까 그때부터 왕이 바뀌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쿠데타가 일어나니까 충성된 사람이 너무 많아가지고 국가의 봉록을 받는 ( )가 요지 땅을 다 차지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농민들은 임대차 계약할 수밖에 없고 결국은 농노로 전락하고, 노라 하는 것이 노예 아닙니까? 이것이 봉건주의 사회의 특징이죠.

이것이 뒤집어지고 엎어지고 남아진 것은 무역에 의한 자본이 축적되면서 자본에 의해서 나온 생산이 토지에 의해서 나온 생산보다 더 증가할 때는 이제는 이 사람들이 토지에 있지 않고 도시로 와서 도시의 부르주아들 도시의 그러한 매뉴팩처 수공업에 종사하면서 도시인구가 많아지면서 이쪽은 날아가 버립니다. 농촌인구가 줄어들면서 이러한 양반계급은 날아가 버립니다. 상공이 발달하면 그만큼 에너지 자원이 지하에서 나오니까 그렇게 된 건데..

그러면 어떤 사람이 물어요. 목사님 왜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하나님의 정신이고 예수님이 그렇게 아들이라면 왜 노예제도를 인정합니까? 그게 불만입니다. 이렇게 나와요. 노예제도를 왜 인정합니까? 그래서 이것은 뭐냐 노예제도를 그대로 인정했다는 이 말은 결국은 뭔 뜻이냐 하면은 아직 신약성경에서는 오늘날 현대인처럼 윤리적 도덕적으로 수준이 높지 않았다는 뜻이고 노예제도를 그대로 용인한다는 말은 보통 수준이 오늘날보다 낮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성경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성경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옛날보다 더 하나님의 뜻답게 바르게 천국을 이루고 있다는 뜻으로 봐야 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성경에서 더 보태거나 빼지 말라는 말은 다 없던 일이 되고 성경은 그냥 옛날에 이렇게 살았었다 참고도서에 불과하고 성경은 본인이 거룩하다고 여기는 것을 알아서 살면 그것이 곧 성경적 삶이 되는 거예요. 왜냐 사도 바울은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안 했다는 거예요. 어떻게 인권이 유린되는데 그것을 가만 보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노예제도를 본격적으로 외친 사람들은 16세기 때 종교개혁 때 그때 퀘이커 교도와 재세례파에서 처음으로 주장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북쪽에 피츠버그 그 근방에 오대호 근방에 그때에 자동차공업, 기계공업이 발달할 때 흑인노예들이 필요해서 남쪽의 면화농장에 있는 노예들을 해방시켜서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승리해 가지고 그것이 헌법조항에 들어가지요. 모든 인권은 동등하다고, 피부색깔에 의해서 차별당할 이유가 없다고.

그런데 노예를 처음으로 하나의 상품화시켜서 팔아먹은 노예를 무역화시킨 것은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영국이 아니고, 미국이 아니에요. 유럽이 아닙니다. 이슬람입니다. 오슬람들. 모하메트 족들이 아프리카 노예들을 팔아먹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것을 알아야 돼요. 그 당시 경제와 지금 경제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노예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일종의 일용근로자라고 보면 돼요. 이 사람들은 살 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죽은 목숨입니다.

옛날에 못사는 촌에 있는 친척들이 도시에 있는 잘 사는 친척들에게 식모살이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저 밥 먹여 주고 잠재워주면 고마워하는 겁니다. 인권을 부르짖고 뭐 노조처럼 외치고 그러할 필요 없어요. 옛날에는 농사를 짓더라도 농사를 지을 인력이 부족해서 전쟁을 통해서 주변에 있는 가족들과 군인들을 노예로 삼아서 그 중에 하나가 글래디에이터 아닙니까? 검투사들 아닙니까? 해 가지고 귀족들은 콜로세움에 앉아서 즐기고 있었고 하나의 오락, 요새에는 연예인, 엔터테이너, 연예인들이에요. 그것도 노예들이 하는 겁니다. 춤추고 노래하고 가수들 나오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사회경제의 모든 경제기반의 노동력을 노예가 85퍼센트 노예가 다 충당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노예는 뭘로 취급되는가? 사서 올 때 돈 주고 사왔기 때문에 팔 때는 돈 주고 파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가구에요. 보루네오 가구처럼 되어있는 겁니다. 마치 다방아가씨들을 살 때 인권으로 생각하지 않고 처음에 다방아가씨가 올 때 돈 받고 들어오지요. 도망쳐 가지고 주인이 찾아오고 그러잖아요.

그때 빌레몬에 보면 빌레몬서를 좀 실감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다방아가씨로 봅시다. 남자지만 여자로 보고 오네시모가 장미다방에서 일했는데 보증금 오천만원 받고 했는데 그럼 오천만원 받고 2년을 계획했으면 장미다방에서 배달을 하면서 일해야 되는데 어디서 복음을 전하는 소리를 듣고 함평수련회까지 좇아 온 거야. 근무시간에. 그러니까 어이, 오네시모 어디서 왔나? 오늘 내 마음대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띠리링 전화가 온 거예요. 누구십니까? 나, 장미다방 마담인데요. 거기 우리 아 가있지요. 와 있습니다. 그전에 진작 사도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저 장미다방 마담, 우리 다 복음 안에서 식구지요. 예. 그런데 지금 아가씨가 보증금 오천만원 받고 일 안하고 여기 왔는데 제가 돌려보내고 싶어요. 그것이 빌레몬서에 나와요. 돌려보내야 돼요. 왜냐하면 돈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돌려보내고 싶은데 이 돌려보내고 싶지만 사실은 돌려보내고 내 돈으로 오천만원 갚고 얘를 복음 전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에 제가 쓰고 싶습니다. 형제라고 내 마음대로 하긴 싫고, 한 번 물어봅니다. 어떻게 허락하십니까? 하니까 아이고, 사도님 좋은 대로 하세요. 그래서 오네시모를 안 돌려 보내고 다방아가씨 안 하고 계속 복음 전하는데 사용한 겁니다. 그것이 노예에요. 그 당시 경제구조가 그 정도 배경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겁니다. 일용노동자지요. 그것을 가지고 노예해방으로 시대가 바뀌고 경제구조가 바뀐 상태에서는 인권보다는 돈권이 재물권이 더 세잖아요. 그런 입장에서는 그것을 노예해방을 부르짖고 할 필요가 없다 이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노예들아, 사람들아 주인을 두려워하면서 충실히 일해라. 하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 보면 이런 게 나와요. 노예들아 네가 노예거든 자유인 되려고 하지 말고 노예인 채로 구원받으니까 노예를 직업을 바꾼다고 인권한다고 구원 더 되는 것은 아니니까 노예이면 노예인 채로 살아가면서도 얼마든지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복음 받을 수 있다 이렇게 권면하지요.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부활의 속죄함을 받았느냐 이것이 문제되니까 땅에 있는 그런 형식 같은 것에 구애받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라. 하는 것이 베드로전서에서 이야기하는 자유의 개념입니다. 이해하십니까?

이것으로 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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