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함평겨울수련회
(강사:이근호 목사)
베드로전후서 강의
제6번
여섯 번째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이미 차별해서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서 차별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차별화시키고 구분시키는 주도권을 쥐고 계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분의 영력에 의해서 구분되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이 개념들이 무슨 개념인지 이 세상에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능력에서는 이 개념이 통하고 이 지상에서는 이 개념은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택하신 족속인데요, 혹시 소주 하나 주세요, 이것 안 통합니다. 그런 것은 전혀 통하지 않는 거예요. 통하지 않는 원칙에 따라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냐?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원리를 그런 게임의 룰을 세상에서 그것 따라 산다는 것은 약간 정신병자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요. 그 뒤의 얘기입니다.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기이한(이상하다 말이죠, 괴상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심이라" 덕이라는 말이 나오고 아름다운 덕을 선전, 증거하기 위함이라. 이 아름다운 덕을 선전한다, 기이한 빛의 세계에 들어간 그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때 이 아름다운 덕이 바로 어디서 드러나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버림받은 삶이 아름다운 덕과 일치되는 겁니다.
항상 성도라면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세상을 봤느냐, 예수님 같으면 어떤 식으로 국가 권력자들에 대해서 어떤 관점에서 봤느냐, 예수님 같으면 보통 인간들에 대해서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봤느냐? 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두운 세상에서 빼내졌다,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빼내졌다는 겁니다.
이러한 것이 이것을 한 번 규정해 보자, 골치 아픈 이야기할 것 없이, 이렇게, 이렇게 사시면 이 말씀에 합당한 현실적인 자태입니다. 라고 딱딱 끊어서 이야기하자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그것인데 우리가 사실은 궁금하거든요. 그 점에 대해선 크게 염려 안하셔도 되는 것이 이 바로 거룩한 택하신 백성, 왕 같은 제사장 이것이 어디에 먼저 나왔냐면 십자가를 중심해서 그전에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운명이 이러한 법칙이 적용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십자가를 중심해서 전 세계는 이렇게 대칭적으로 둘로 양분됩니다. 창세기는 십자가와 초점이 모아지고 이 십자가에서는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배분되게 되어 있어요. 구약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고, 신약은 이미 그리스도가 어떤 부활의 능력으로 통치하고 지배하고 있느냐 주도권을 쥐었느냐 확인시키는 확인작업에 들어가고 마지막에는 세상에 끝이 납니다. 끝나는 대목에 대해서는 감사하게도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상세하냐 하면은 멸망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옛날에는 물로서 심판받은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물은 하나의 상징이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물이 상징이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이 세상이 잘나서 심판 안 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지금 봐주고 있다는. 물이니까 불보다는 약하잖아요. 강도가 약하잖아요. 한 번 맛보기로 안 아프도록 살짝 해준 것이 그 정도로 한 것이 또 물이에요. 그런데 나중에는 물의 심판은 왔지만 근본까지 망하지는, 지구가 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구가 깰 수 없어서 안 깬 것이 아니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다 깨진다는 것을 미리 통보하기 위한 예비 조치로서 그 표면을 물로서 살짝 죽인 거지요. 그 다음부터는 물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실체가 드러나는데 불로서 등장하게 되면 이 불은 표면만 살짝 껍데기 벗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체질 자체가 우주 자체가 완전히 녹아버리는 끝장내는 그러한 공격으로서 불 심판이 있게 된다, 물은 불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예비조치였다, 그렇게 구약 성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 소유됐는데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으로 살라는 것이 이 본문에 합당한 삶입니까? 물으신다면 구약의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나라가 있었어요. 그 나라는 이스라엘 나라는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나라는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없었던 나라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서는 발생될래야 될 수가 없었던 나라에요. 뿌리가 없는 나라에요. 뿌리가 없어요.
마치 연극무대라면 배우가 무대 뒤에서 나타난다든지 무대 전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관객들이 배우가 어디서 나타나지 뒤에 없는 것 같은데 갑자기 위에서 완전히 개입하듯이 위에서 내려오지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지요. 위에서 예루살렘이 내려오지요. 예상치도 않은 나라가 툭 튀어나와 버린 거지요.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항상 이렇게 우리의 예상을 빗겨가면서 돌발적으로 나타나세요. 툭 튀어나오지요. 원래 구원의 사건이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를 할 때에 항상 염두에 둘 것이 뭐냐 하면 뿌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뭐라 하면 나그네라 해요. 나그네면 나그네 설움이 있겠지요. 오늘도 뭐 걷는다. 나그네 같은 뭔가 타향에 잠간 나타났다가 얼른 본향으로 쫓아 돌아가야 될 그런 파견근무자 같은 신세가 이스라엘 나라의 특징을 이룹니다. 뿌리가 없는 거예요. 자, 이 땅에 뿌리가 없는 나라와 이 땅에 뿌리가 박힌 나라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이 땅에 뿌리가 없는 나라와 이 땅에 뿌리가 있는 나라의 싸움은 결국 뭐냐 하면 땅이 옳으냐, 하늘이 옳으냐의 누가 더 정당하고 누가 더 신의 뜻에 합하느냐는 하늘과 땅의 싸움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주변에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음과 양이 대비를 이루고, 흑과 백이 대비되어 이루듯이 뭔가 대비를 이룰 때에 주제가 전면에 화악~ 들어나는 게쉬탈트의 심리학에서 배경이 그 주제가 되는 주제를 더욱 더 부각시키는 효과를 거두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자친구를 만나러 갈 때는 꼭 못난 여자친구를 데리고 가서 비교시켜가지고 자기가 돋보이는 효과를 줘라 이 말이지요. 그것이 인간의 심리학적으로 맞다 이 말이지요. 주위에 있는 선들이 구부려지면 비록 그 선이 똑바로 된다 할지라도 구부려져 보이는 것이 시각적 착란이죠. 인간이 시각적 착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적 착란도 있단 말이죠. 기존에 있는 선입관으로 인하여 그 사람에 대해서 잘못된 평가를 내리는 수가 참 많아요.
제가 대학교 다닐 때 대구 성일교회에 갔었는데 그때 제 아내를 만났는데 제 아내가 하는 말이 뭐냐? 처음 볼 때에 자전차방 점원인 줄 알았다 해요. 자전차방 점원. 노래방 이런 것이 아니라 자전차방. 옛날에 자전거 고치는 수리점의 보조 기술자인 줄 알았다는. 나와 결혼하면 당신은 백설공주인 줄 알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그 뿌리가 하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간접적인 효과로서 이스라엘을 이 땅에 보냄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거예요. 이것을 아까 이야기한 선전하기 위해서 증거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자, 이렇게 가만있으면 증거가 안 되겠지요. 누가 더 세냐를 붙어야겠지요. 이것을 성경에서는 붙이심의 전쟁, 항상 붙이시매. 전쟁을 유발시켜서 이쪽이 갖고 있는 무기의 리스트를 보게 합니다. 세상 국가가 갖고 있는. 물론 사물적으로 그 당시의 무기는 공정타라든지, 여러 가지의 칼과 활, 달리는 전차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것이 청동기 문화에서 철기 문화로 전환하면서 무기가 발달합니다.
세계 최초의 철기 문화는 힛타이트라는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그 지역에 강대국이 있었어요. 메소포타미아는 강과 강 사이에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 마치 두 강 사이에, 현재 이라크.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그 지역에 있던 그것이 세계 4대 문명지역의 하나입니다. 세계 4대 문명지역 이것 수능까지는 안 나오겠다. 4가지 인더스, 갠지스 강, 그리고 나일강, 항상 강 유역에 있지요. 황하강. 이것이 4대 문화지역이라고 우깁니다마는 안 믿습니다. 저는. 성경 보면 에덴동산이 있지요.
무기가 철도 되지만 이것이 이런 사물적인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철기문화가 성립되려면 철기라 하는 것은 청동기문화는 같이 부딪치면 한 쪽은 구부려지고 하지만 이것은 안 구부려지고 단단해진다 이 말이에요. 하나는 무 들고 싸우고 한 쪽은 칼 들고 싸우는 식이 되니까 이것은 전쟁 하나마나, 힘과 힘이 겨룸에 있어서 강한 것이 더 세잖아요. 강한 것이 승리할 확률이 많잖아요.
그런데 이런 무기와 문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 다음에는 고대 정치적인 기술이 동원됩니다. 정략결혼, 외교정책, 그리고 같은 신을 믿는 사람끼리의 동맹, 부족간의 동맹. 그렇지 않으면 1+1이 2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1+1이 3이 되고 4가 될 수가 있어요. 항상 이것을 노리고 동맹하는 거예요. 동맹하는 전보다 2가 되는 것이 아니고 2가 되면 동맹하나마나죠. 가만있어도 하난데 2해서 나눠줘 버리면 반. 2가 3이 되니까 만약에 둘로 나누면 1.5가 되잖아요. 동맹할 때는 1이었는데 동맹하고 난 다음에는 자기 몫의 분야는 1.5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업합병도 되고 이런 식으로 다 되죠.
이것이 우리나라의 신라시대, 백제 이렇게 할 때 삼한 시대 이후에 삼국이 구분될 때 고대 부족국가들의 성립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걸 거부했던 것이 가야고, 가야는 그래서 신라한테 망한 거예요. 믿든지 말든지 모르겠어요. 내 마음대로 이야기하는데 알아서 하세요. AD 600년경에 망해버렸는데 그 신라가 뭉칠 때 뭉치는 무기가 뭐냐 하면 관념적이었어요. 그 당시 가야는 철기문화였어요. 가야문화에 대해서 빠삭한 사람이 제 처제인데 귀동냥 많이 들었어요. 가야문화 전공자이기 때문에 가야문양이 어떻게 성립되고 어떻게 회피되고. 가야의 철기문화는 그 당시 중국에서 입수한 최고의 철기. 그 철기문화가 왜 망했느냐? 가야에는 불교문화가 없어요. 이데올로기, 그 모든 귀족들을 하나로 얽어매는 불교가 없어요. 이차돈에 의해서 불교가 처음 들어왔거든요. 신라시대에. 신라는 불교가 고구려에서 들어왔어요. 불교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고. 불교뿐만 아니고 신라에서는 바로 최고의 부족이 등장하는 부족 중심의 신화를 만듭니다. 그것이 무슨 신화냐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 신화가 나와요. 그 신화가 등장한 다음부터는 왕이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세습제가 되는 겁니다. 세습제가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왕이 아니라 그 왕이 속한 가문 전체가 앞으로 영원토록 계속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왕가된다는 겁니다. 미국의 대통령 했던 케네디 왕가라고 했잖아요. 현재 북한의 김일성이도 왕가잖아요.
이것은 뭐냐 하면 바로 일반 땅의 원리가 뭐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말이죠. 이것이 땅의 원리입니다. 지금 21세기 되도 이 원칙은 변함이 없어요. 그렇다면 악한데서 건져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적인 아이디어에서 힘 될 만한 것, 힘쓸 수 있는 것 다 동원해서 덤벼라. 그것 가지고 부활의 능력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한 번 붙어봐, 붙어봐, 붙어봐, 붙어보라고 전쟁을 벌이고 붙인 것이 바로 베드로전서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버린 자로 이 땅에 악한 세상에 데려감이 아니고 버려두는 거예요. 한 번 붙어보라고. 아이, 하나님 밉지요. 고생을 시키려고 작정을 했어. 작정을 했어.
이 세상에서는 힘 되는 것을 빼먹기 위해서 우르르 모였다가 빼먹을 것이 없으면 우르르 흩어지는 겁니다. 니, 내 친구아이가. 할 때 언제 친구냐 하면 학교 때 어떤 때 친구 많으냐하면 공짜로 떡볶이 잘 사주고 콜라 잘 사주고 김밥 사줄 때 친구 많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 부도날 때 친구 다 떨어져 버립니다. 또 다른 친구 뜯어 먹기 위해서 우르르 몰리지요. 아무 소리 안하는 것 보니까 많이 했어. 깍쟁이들은 친구가 없어요. 그런데 씀씀이가 좋은 아이들,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하냐면 철이 없는 아이지요. 아주 시건 없는 아이들. 철이 없는 아이들. 철이 없는 얘들한테 많이 달라붙어요. 철나면 자기 단도리한다고 바빠서 친구 하나 둘씩 떨어지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힘이 있는 곳에 형님요. 하면서 붙어가지고 그래서 그 힘 다 빼먹고 힘 떨어졌다하면 토사구팽. 사냥개를 사냥할 때 써먹곤 잡아먹는. 그래놓고 딴 데로 우르르 몰려가지고 또 뜯어 먹고. 당신은 나의 지도자이십니다, 형님. 하고 갈 때도 우우 가가지고 떨어지면 또 주욱 딴 데 가는 거예요. 이것이 땅의 원리입니다. 힘 따라 가요. 힘이 있는 곳에 가는 겁니다. 내가 뜯어먹을 것이 있는 곳에 가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나오니까 이상하게 분위기가 숙연해지네.
이 원리 이외에 다른 삶의 요령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땅에 산다는 것은 힘이 있어야 사는 것이고 힘이 있어야 산다는 것은 힘 있는 사람을 만나야 돼요. 돈이 돈 먹는 거예요. 힘이 힘을 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학교 친구해도 꼭 공부 잘하는 얘들 붙어서 친구하라고 하지요. 부모들이 그렇게 신신당부합니다. 꼭 있는 집 아이들, 있는 집 아이들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친구돼지. 못사는 애들하고 놀지 마라. 참 그런 설움과 학대를 얼마나 많이 받고 살았는지. 그래서 힘이 안 되는 이야기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습니다. 방위 나왔다든지. 이런 것. 현역출신이 아니라는 이런 것.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그런 이야기. 내 부모가 알면 놀지 마라 하지요.
그래서 이 땅의 원리가 이스라엘 내부에 이미 잠식하고 나중에 통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이스라엘의 특징은 이 땅의 원리가 아닌 하늘의 원리로서만 존재하는 가능한 나라인데 그 땅에서 지도자, 왕이라고 등장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땅의 원리를 흡수해서 그것으로 이스라엘을 지탱하고 보전하려다 보니까 이것은 어느 것이 하늘인지 땅인지 구분이 안 되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이 이스라엘이라는 사기꾼, 엉터리 같은 가짜 하나님 나라에 고난 받는 선지자를 보내서 이 선지자 중심으로 따로 모이는 새로운 택한 나라를 여기서 새록새록 만들어내요.
이것을 가지고 유명한 석 자로 말하면, 영어로는 remnant, 이것을 '남은 자'라 합니다. 레지스탕스. 항상 다수가 아니라, 주류가 아니라 소수, 아웃사이더, 뭔가 소외 받는.
그런데 이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에게 공격할 때 뭘 어떻게 공격하느냐 하면 하늘의 법칙을 가지고 땅의 법칙을 공격합니다. 어떻게 공격하는가? 이사야 같은 경우는 이렇게 공격합니다. 왜 이 땅에서 계급이 발생하느냐? 계급발생 가지고 문제 삼아요. 분명히 우리가 출애굽할 때는 가진 자, 안 가진 자 계급 없이 공평하게 된 나라인데 그리고 땅이 있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품꾼에 지나지 않았고 하나의 임대차계약을 했을 뿐인데 왜 갑자기 땅에 땅을 더하고 자기의 소유가 능가하고 이래서 그 소유가 어디서 나왔겠는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힘없는 자를 강제로 빼앗았기 때문에 그 토지가 이쪽에서 넘어가서 저쪽은 과대하게 많아지고 이쪽은 줄어든다 말이에요.
사람이 토지가 많아지면, 다시 이야기합니다. 1+1이 2가 아닙니다. 1+1이 되면 3이 되고, 4가 되고, 5가 되버립니다. 되버리면 이 세상의 경제라는 것이 이상해 가지고 이쪽이 3, 5가 되면 없는 쪽이 0.5가 되고, 0.2가 되고, 0이 되버려요. 이 세상이 그래요. 이 세상이. 그레샴 법칙이라고 해가지고 더하면 0인데, 안 더하기 전까지는 저쪽은 과대하게 많고, 이쪽은 과대하게 적고 그래요. 소득의 불균형이지요. 소득의 불균형이 그것이 너무나 지당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스스로 변명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칼빈주의란 것이 있습니다. 들어봤습니까? 루터의 제자로 볼 수 있지요.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하고 난 뒤에 30년 후에 칼빈이 외쳤는데 칼빈주의에 의하면 잘살고 못사는 것은 팔자가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근검절약하고 노력여하에 따라서 노력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가지고 잘 살게 하고, 못사는 자는 노력을 게을러서 못산다. 따라서 잘사는 것을 뭔가 범죄 취급하지 말고, 오히려 장려해야 될 요소라고 칼빈에서는 소명론에서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칼빈의 주의가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그 시대에 새로 등장하는 자본주의의 씨앗, 중공상인들에게 대히트를 쳤어요. 히트쳐서 그들이 의회를 조직하고 국가의 왕에 대해서 제안을 걸고 명예혁명이라든지 이런 것을 통해서 근대국가의 기초를 놓습니다. 그 정도에 끝이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이런 칼빈주의에 기초해서 새로운 우리끼리 종교자유를 얻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 한 나라가 네덜란드, 스위스, 그리고 북쪽 독일,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이런 새로운 근대국가가 새로 생겨요. 원래는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없어요. 그 나라는 원래 스페인에 속한 나라입니다. 스페인과 독일에서 그때는 독일이라는 나라는 없었지만 그 보헤미안 사이 보헤미안 말고, 프러시아 그 근처에서 계속 공터로 남아 있었는데 러시아가 지배했을 때인데 필립 5세 때 이것이 새로운 종교가 등장해 가지고 우리 상공인들끼리 그런 종교, 우리 가진 재산을 방해하는 것은 그런 영주한테 지배받기 싫다, 우리는 우리 가진 재산을 인정하는 영주로부터 새로운 국가를 만들겠다. 해서 네덜란드부터 나옵니다. 거기에 반대하는 것이 룩셈부르크나 벨기에는 반대해서 지금도 벨기에는 천주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에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새로운 이념이 등장한 것이 뭐냐 하면 국가라는 것은 상징이며 허상이다. 그러면 국가는 뭐냐? 국가는 소위 관료와 그 위에 있는 가진 자 사이에 계약에 의해서 된다. 루소의 계약설이고, 존 로크의 계약설이 나옵니다. 지금도 이 계약설에 의해서 근대국가가 성립돼요.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금을 뗄 수 있는 권리를 당신에게 주겠다, 일임하겠다. 다만 조건이 우리 사유재산에 방해된다면 우린 용납하지 않겠다.
그래서 한나라가 지금 장외투쟁하고 있잖아요. 왜 사학의 재산을 건들이냐 말이죠.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다, 자본의 축적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국가에서 왜 사학의 재산에 대해서 관여하느냐? 국가는 뭐냐?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왜 불로소득을 챙기느냐? 국가에서 세금을 받아먹고 그래서 사학을 국민의 세금에서 해놓고 마치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국가가 주인인데 왜 네가 주인이라고 그렇게 불로소득을 챙겨 가지고 자기 잇속을 채우느냐? 그것 때문에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이 땅의 원리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느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학교에서 어릴 때부터 교육받고부터 쭉 쌓아오면서 땅의 원리만 배웠기 때문에 땅의 원리에서 살아남느냐, 도태되느냐 그것만 배웠지, 이 땅의 원리 자체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렇게 문제 삼지 않는 인간들이 교회를 만드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도 세상에서 어떻게 벌든지 관계없이 십일조만 내면 서리 집사에서 장립집사로, 장립집사에서 장로로 고속 승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에 충성하고 30, 40년 다녀도 돈이 없는 돈 안 되는 사람은 잡사로서 정년퇴직해야 돼요. 서리 집사로서. 여기 안 되는 사람 많지요. 장로 희망 없어요.
그런데 그걸 간판을 뭐라 했습니까? 그들은 베드로전서 2장을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겨냥해서 교회가 돼야 되고 십자가를 겨냥해서 십자가 정신이 하늘의 정신이 있는 것이 이스라엘인데 십자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있기는 있어요, 예배당 꼭대기에. 커다란 기업화된 교회를 겨냥해서 여기에 얼마나 자본의 힘을 끌어 모을 것이냐를 가지고 그 공과행적, 얼마나 공로를 세웠느냐 라는 것을 따진다면 이것은 십자가라 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고 절을 해야 돼요. 나무아미타불해야. 십자가가 아니고 절이죠. 도발적인 예수꾼이다 말이에요. 이것은 인간의 축복을 가지고 현혹하는 것밖에 안되죠. 이것은 바로 땅의 원리죠.
이스라엘이 타락하게 된 이유는 뿌리가 없는 것을 세상 원리로 뿌리를 만들어 준데 있어요. 뿌리가 항상 없어야 돼요. 그러니까 목회자들께 당부하고 싶은 것은 교인이 하나 오면 배후에서 주님께서 은총으로 밀어 넣었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저 사람은 내 설교 듣기 위해서 왔다고 그 원인을 땅의 힘에 의해서, 뿌리에 의해서, 기술에 의해서 저 사람을 유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는 그 교회에 땅의 원리가 스며들고 그 반대로 하늘의 원리가 추방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나중에 그 교회는 세상하고 다를 바 없는 지옥나라가 되지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구약을 볼 때 항상 뿌리는 하나님이 갖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시편 8편을 한 번 봅시다. 저는 시편 8편을 아주 좋아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2절 다시 읽겠습니다. 주의 대적, 주의 대적이니까 방금 제 설명을 들으시면 무슨 특징입니까? 땅의 원리를 집착하는 사람, 땅의 원리 가지고 무기로 삼는 사람, 땅의 원리로서 이 땅에서 영원히 존재하려고 애쓰는 사람, 그것이 주의 대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적이라고 하면 안 되지요. 이스라엘 자체가 뭐가 돼요? 시편에 보면 이스라엘 자체가 누구 적이에요. 주의 적이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여기 이스라엘 속에서 누가 하나님 편입니까? 다윗이 하나의 택한, 다윗이 버림받은 자로 쫓겨 다니고 있고, 다윗만이 주의 백성이고, 나머지 사울 쪽은 잡으라, 저 놈! 적을 향하여 싸울 것을 자기 내부에 있는 다윗보고 공격해대는 거예요. 거기에서 다윗이 시편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아아~. 지금 얘들 숙소에 다 넣었지요. 가서 뭐하나 모르겠다만. 어린아이 하나 데려 와 가지고 이 어린아이를 강한 힘으로 치라 하면 누구나 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어린아이 여기 하나 계시네. 여기선 제일 어린아이다. 이 어린아이하고 누구하고 싸움을 하면 어린아이 져요. 그런데 지는데 얘가 지면서 아이고, 어른님 잘못됐습니다. 이것이 아니라 어른님, 아무리 때려도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힘이 뭘 보여줍니까? 어린아이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하늘의 원칙을 원리를 뺄 수 없지요. 지울 수가 없지요. 그러면 그것이 승리가 되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승리한 거예요.
참 이 말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제가 왜 곤란하냐면 지금 우린 땅의 원리도 제대로 못 따라가서 아주 그런데, 완전히 방향을 반대로 다 틀어라 하니 곤란한데 말씀만 드리기가 미안합니다만. 어린아이가 젖먹이 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이 말이에요. 창녀가 구원받아요. 창녀가 법학자, 신학자보다 하늘나라 먼저 간다고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자신의 뿌리를 땅에서 찾으려고 안하면 된다는 거예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이렇게 생각합시다, 말이죠. 자꾸 남 흉내 내려고 하지 말고.
자, 이제부터는 나온 거룩, 선한 행위. 선한 행위라는 것은 반드시 뭐가 선한 행위냐? 중요합니다. 적어 놓으세요. 베드로전후서에서 선한 행동이라고 할 때에 여러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명확하게 결정짓고 그 다음에 진도가 나가야 돼요. 뭐가 선한 행위냐 하면은 하늘의 원칙을 증거할 때만 선한 행위입니다. 말씀의 원칙을 증거할 때만 선한 행위에요. 그래서 착한 행위를 했다, 그래서? 고아원을 돌봤다, 그래서. 그래서 뭐라 말이야? 그래서 나 잘났잖아. 그것은 악한 행위죠. 나는 고아원을 돌봤다, 그래서? 노숙자를 돌봤다, 그래서? 나도 하기 싫은데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 그러면 그것은 선한 행위가 되는 거예요.
선한 행위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왜 나 같은, 지금 이 세상에 하늘의 원칙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그 존재를 확인케 하는 것이 선한 행위입니다. 참 이것이 어렵지요. 선한 행위가. 우리가 너무나 이렇게 요새 윤리 도덕도 힘이 되잖아요. 윤리 도덕도 힘이 되는 시대에 힘을 위해서 윤리 도덕적으로 나설 경향이 많아요. 심지어 교회가 땅의 원리이기 때문에 착한 일을 하면 복 받는다 하니까 착한 일을 많이 축적해서 남보다 옆에 있는 김 집사, 이 집사보다 더 많은 행운을 따 내려고 그렇게 애쓰는 사람이 많아요.
하루는 제 아내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나는 진담으로고 보는데 뭐라 하냐면 지금 사람 숫자가 많으니까 로또복권 한 번 사 볼까? 그러니까 10억 되면 땅 사가지고 교회 예배당 지면 안 좋으냐? 농담처럼 이야기하는데 저는 농담처럼 안 들리는 이유가 뭘까요?
사지 말라가 아니라 로또복권 당첨을 거부하란 말이 아니에요. 이렇게 할 수 있을 거예요. 빨리 걷다가 돌 뿌리에 넘어져 가지고 코피나 닦으려고 보니까 누가 바람에 주머니에 넣다가 날려버린 로또복권 하나 떨어져있다, 그런데 그것이 1등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마다합니까? 부활의 능력인데 예배당 짓든지 해야지요. 이것은 젖먹이의 입으로 코피난 입으로 권능을 세웠는데.
그러면 우연이라는 것은 사실은 우연은 없는데요. 마음만 낮추면 모든 것이 우연이에요. 자기 마음만 비우면 모든 것이 우연이고, 모든 것이 축복이고, 모든 것이 감사인데 이상하게 감사거리를 현재 있는데서 덜 쓸려고 꾸며내 버리면 인위적인 조작이 있는데 그 조작하는데 윤리 도덕이라는 땅의 원리가 동원되니까 문제라. 윤리도덕은 일종의 노동입니다.
칸트도 그런 얘기했어요. 사람이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것은 감각적이다. 하늘의 법은 희생과 억지가 동원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이점이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정언명령과 가언명령이라는 아주 어려운 용어를 썼어요. 정언명령이라는 것은 단박되면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고, 가언명령은 이것은 미완성이라서 훈련과 숙련, 수련과정을 거쳐서 억지로라도 그 목표지점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방법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훈련과 숙련과 수련을 쌓으면 교회에서 생각나는 것이 뭡니까? 무슨 훈련? 영성훈련. 트레스디아스. 이 영성훈련의 기초는 바로 고대 천주교의 수도사들. 스케줄이 있어요. 성무일도. 하루의 스케줄이 있어요. 노동은 몇 시간, 기도는 몇 시간, 성경읽기는 몇 시간, 착한 일은 몇 시간, 가난한 이웃 돌보기는 몇 시간, 채소밭 가꾸기는 몇 시간, 이 수도원에서 최초로 자본주의가 발달됩니다. 영성훈련이에요. 피정이에요. 피정. 사사로운 정을 피하는 기간을 두어요. 침묵의 시간. 안녕하십니까? ㅇㅇㅇ. 이와 동일한 것이 불교에서는 뭐냐 하면 겨울에 하는 동안거. 양산 통도사 들어가면 가만있어요. 점하나 찍어놓고 그것 쳐다보고 뒤통수 때려도 가만있고 장군죽비 들고 자고 있으면 탁탁하면 철썩철썩하면 또 퍼뜩 깨고. 영성훈련입니다.
이것이 무슨 원리냐? 땅의 원리죠. 교회 말아먹는 원리죠. 우연을 가장한 필연 만들기. 이것이 왜 땅의 원리냐 하면은 현재 있는 내 모습이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거룩의 목표점을 현재 있는데서 차이를 두면서 현재 있는 것에 기초를 해서 약간 간격을 벌리면서 거룩의 수위를 따로 설정하고, 환상이죠. 거룩의 수위를 그 빈만큼은 나의 잠재력과 선한 가능성으로 그것을 다른 말로 성령의 도움으로 그들은 이야기해요, 성령의 도움으로 신의 도움으로 은혜로서 그것을 메우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현재 있는 내 모습에 대해서 불만이라는 뜻이에요. 결핍을 느낀다는 겁니다. 현재 내 모습은 싫다는 것에요. 나는 다른 자아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한 것이 아니고 이대로는 싫다는 겁니다. 왜 싫은지 물으면 내 주제에 이 정도 인생은 나한테는 가당치도 않다. 나한테 모자란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뭣을 증거합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증거됩니까? 예수님의 삶은 어느 정도냐 하면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그분이 하늘에서 오신 분이지만 땅의 사람들에게 뺨까지 얻어맞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정도냐 하면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요새는 오른 뺨을 때리려고 폼만 잡아도 그 사람 손목아지를 다 부셔버리죠.
부활의 능력 속에 있는 사람은 어떠한 말씀 성취도 인간의 개인적인 자질이나 역량으로서 거기에 합치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안 된다고 자기를 물러설 때 포기할 때 그 자리에 이미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 새삼 파악되고 발견됩니다. 아니라고 하는데 계속 얘기해봐야 소용없다. 진도 넘어갑시다. 아니라고 하는데 뭐.
베드로전서 2장에서 자유가 나오는데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나 넉넉하게 충분하게 다 주어졌습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이 바로 선한 행동이라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4장 한 번 잠시 봅시다. 이것을 읽어보면 아, 할 것입니다.
4장 10절 보고 4장 8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4장 10절부터 보면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직접 우리의 행동으로 영광 받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누가 끼어든다는 겁니다. 누가 끼어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끼어들 자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끼어들 자리를 하려면 우리는 그 자리를 양보해야 돼지요.
누구한테 양보합니까? 예수님께 양보합니다. 어떤 식으로 양보하느냐 하면은 제가 이 교회 봉사하는 것은, 제가 설교하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지 내 힘으로 아무리해도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안 됩니다. 라는 고백이 입에서 나와야 돼요. 내가 착해지기 위해서 내가 지금보다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내가 훌륭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한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고 현재 지금 어떤 힘이 있든지 간에 얼마만큼 돈이 없든 간에 이것마저도 주님 주시는 은혜라고 느낄 때 그 순간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는단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봉사할 때 에이고, 당신 돈도 없는 게 무슨 봉사해, 힘도 없는 게 무슨 봉사해 그런 말에 결함을 얻을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것도 주님께서 주신 건데 내 것도 아닌데 봉사해야 마땅하지 그런 마음으로 봉사한다면 은혜의 양에 따라서 은혜 맡은 선한 어떤 은혜든 은사를 받은 대로 은혜를 받은 대로 각각 어느 처소에든지 간에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당신 누구 힘으로 눈을 다 치웠습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신 힘으로 했습니다. 이럴 때 그 예수님을 증거하는 선한 행위가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 하셨다는 은혜를 증거한 거죠. 그러면 그렇게 되려면 자아는 어디서 찾는가? 자아는 날아가 버리죠. 자아는 항상 없는 거죠.
미리 당부합니다만 이 모든 베드로전서 1장, 2장, 3장, 4장, 베드로후서 이야기는 몇 초, 2초 동안의 생각입니다. 24시간 가운데 달랑 2초 동안의 생각입니다. 이것을 연장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는데 큰일 납니다. 안 됩니다. 2초 내지 1초, 주일날은 3초. 이것이 지금 이 이야기는 1초속에 다 담아서 주어진다, 은혜로 이 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그럼 나는 어디서 찾는가? 나란 게 없고 부활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이미 우리는 속죄 받은 입장이기 때문에 주체자가 내가 아니라 주님이에요. 그 상태를 가지고 두 자로 뭐라 하느냐 이것을 사랑이라. 그래서 8절에 보면 사랑은 허다한 죄, 모든 죄를 다 덮느니라 당신이나 나나 같은 입장입니다.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입장에서 나는 은혜 받았고 당신도 은혜 받은 겁니다. 모든 허다한 죄가 덮어지므로 말미암아 없어지는 거예요.
저 눈 덮인 마당을 보세요. 저 안에 티끌이 있는가? 없잖아요. 있을 거예요. 있지만 그것은 위에 한 층으로 몰아 덮지요. 하얀 눈으로 덮어버렸잖아요. 그럼 보이는 것은 티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덮인 게 보이지요. 뭐가 덮였습니까? 이것이 지금 눈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눈으로 바꿔서 사랑으로 바꿔보자 말입니다. 사랑으로 다 덮어버린 거예요. 덮인 사랑으로 보는 거예요. 같은 교인들끼리.
그러니까 이것을 실습해 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이고, 키가 작으시군요, 주님의 사랑인 줄 믿습니다. 아이고, 얼굴이 이렇게 못생겼을 수가, 당신에게 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인 줄 압니다. 못사시는군요. 밥도 못 먹는군요. 사랑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아마 발길로 차일 걸요. 이것은 약간 과도하게 제가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그런 마음으로 다 약 올리려고 한 이야기가 아니고요.
사랑이라는 것은 자아가 날아갈 때 비로소 사랑이에요. 자아가 없어질 때 땅의 원리가 아니라 하늘의 원리에요. 몇 초? 2초에요. 하루 2초에요. 하루 2초 동안 만큼은 자아가 사라져요. 자아가 있게 되면 자아가 타인과 비교하니까 그 이야기는 여러 번 했는데 여기서 정리하면 왜 자아가 있으면 사랑이 날아갈 버리느냐 하면 자아가 이렇게 신경 쓰게 되면 자아가 그림이라면 이 자아에는 항상 타인의 그것들이 이 안에 채워서 내가 타인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 있어요. 이것을 가지고 타인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내속에는 타인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어요. 남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내 속에 담기기를 원하는 거예요. 어이, 자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해? 이렇게 돼라. 알았어.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게. 타인의 욕망이 나한테 담기는 거예요.
심지어 라캉은 교회에서 신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욕망이 그 대속의 신자에게 담겨서 신자는 가당치도 않는 신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이 교회라 이렇게 봤어요. 신학자보다 더 예리해요. 교회 허상을 아주 예리하게 분석합니다. 그러니까 전부 위선자다 이 말이에요. 되지도 않는 것을 마치 들어온 것을 신처럼 가장하는 것이 교회다 이 말입니다.
어쨌든 간에 자아가 성립되면 타인이 이렇게 들어오지요. 그렇게 되면 골라잡아야 될 것 아닙니까? 이미 한 달 수입이 백만 원인데 오십만 원을 부러워하는 그런 바보는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한 달 수입이 백만 원일 것 같으면 어떤 사람이 타인의 욕망이 되겠습니까? 결핍을 느끼게 되지요. 오백만원 버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그럼 나는 어떻게 오백만원 얻을 수 있을까? 방법은 아까 제가 얘기했지요. 있는 사람에게 빌붙어라! 이것이 방법 아닙니까? 알랑방귀 뀌어가지고 우리교회 교인되게 해 주십시오. 복 받습니다 해 가지고 꼬여 가지고 오백만원 꼬셔가지고 내 사백만원 채우면 되는 거지요. 다 떨어지면 딴 데 가면 되니까.
우 집사님 어디 갔어요? 우 집사님 있어야 되는데. 아아, 다행이다. 아까 우 집사님 식사하실 때 우연히 탁 내뱉었어요. 뭐냐 하면은 보건소장이나 양호교사는 남자가 찾는 일 순위라는 거지요. 남자가 찾는 일 순위라는 것은 자기가 놀아도 아내가 벌면 산다는 조건 하에 그렇지요. 이것은 국가가 장래보장까지 다 되니까. 그러면 일 순위 같으면 이 보건소장하는 여자 분이나 이 양호교사 이분들이 노는 백수를 원하겠습니까? 일단은 일순위인데 이 사람은 이것은 아예 대상도, 리스트도 올리지 않고 나보다 수입이 더 많은 남자를 또 찾을 거다 이 말이죠. 고위공직자나 판사나 의사나 찾을 거다 이 말이죠. 의사도 방사선과 해가지고 방사선에 찔려 죽는 사람 싫고 오래 사는 사람 내과나 찾을 거란 말입니다. 목사들이 이것을 원하는데 목사가 준 백수인데 뭘 이 사람들이 원하겠어요. 안되지. 목사는 준 백수 아닙니까? 어림도 없지요. 그러니까 피아노레슨 이나 해가지고 살지요. 학원 강사나 피아노레슨. 안 그러면 모니터.
이 사람들이 비록 원한다 할지라도 본인이 이미 자아가 성립되면 본인에 또 타인의 욕망이 들어오는 거예요. 이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자꾸 비교하게 되면 정신분석학에서는 사람이 모든 정신증세, 정신병의 원인이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처음에 항상 왜 비교를 하느냐 말이에요. 다른 여자와 내 여자와 비교하고 남자와 비교하고 집안은 콩가루 집안 되고 엉망진창 되죠. 제발 비교하지 마라. 다른 집안 애들 하고 비교하지 마라.
그런데 비교하는 이유가 자아가 비교해 버리면 거기서 사랑이 아니죠, 사랑으로 맺어야 될 가정이 비교 돼버리면 사랑이, 사랑이 뭐라고요? 사랑은 그냥 덮는 것. 뭐로 덮는 것, 허다한 죄를 덮는 것. 어떤 경우가 그렇다? 비교가 없이 자아가 없어 버리면 있는 그대로가 다 사랑으로 보이지요. 이럴 경우에는 바로 인간적으로는 안 되고 주님의 용서받은 자아에 한해서 이미 용서가 다 된 한해서는 넉넉하게 다 되는데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하면 베드로전서는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자유가 우선 확보될 때 그 다음부터는 왕에게도 지배하고 못난 사람에게도 복종당해도 괜찮고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고 하는 것이 베드로전서 3장, 4장 이야기에 쭉 나오는 네가 죄지어 고난 받아도 무슨 자격이 되냐. 착해도 안 알아줘도 노동자들이여, 사업자에게 복종해. 노동자로 안 되어있고 노예로 되어 있는데 노예들이여 그냥 복종해, 복종해. 너는 이미 자유잖아. 허다한 사랑을 덮잖아. 왜 자꾸 자아가 자극을 주느냐 말이지요. 자꾸 비교하려고 하느냐. 너는 사용자고 나는 노동자, 누가 세냐? 그러지 말란 말이죠. 자유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택한 백성이니까 하늘의 원리를 담아라. 라는 것이 베드로전서 3장, 4장 이야기입니다.
상세한 이야기는 식사하고 난 뒤에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