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함평4강

아빠와 함께 2022. 3. 19. 12:17

제4번


네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다시 쉽게 말씀드리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생각하게 하느냐 하면 나는 속죄되어야 될 나는 죄인이다. 라는 것을 우리 보고 규정하게 하는 겁니다. 아무리 착하고 잘났던 상관없이 너는 용서되어야 될 자야. 라는 것을 규정하는 거죠.

십자가에서 피가 나오고 피 뿌림으로 용서받는다고 했으니까. 첫 번째는 속죄되어야 될 대상이다, 이 점에 대해서 동의를 해야 되는데 이것 동의하기도 상당히 힘들죠. 힘들 땐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가 재밌죠. 사람이 성경 말씀이 있으면 그 성경 말씀대로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그것을 비스무리하게 지키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면 너는 죄인이야. 라고 했을 때 스스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기가 임의로 골라잡아요. 찾아냅니다. 자기의 경험상 모든 자기 행동, 이런 것을 남하고 비교해서 합니다. 하게 되면 어떤 오류에 빠지냐 하면은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일방적으로 자기가 이것은 나쁜 것 아니냐, 이것은 나쁜 짓이야. 자기가 다 추려냅니다. 자기가 추려낼 것은 추려내고, 자기가 정말 이것은 나쁘다 싶은 것은 남겨두고 추리거든요.

그렇게 추려내는 작업을 뭐라 그랬습니까? 성경 재편성,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가 임의로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어디서 잠시 멈추느냐 하면 부활의 영이 오면 잠시 멈춥니다. 왜 잠시 멈추느냐 하면 부활의 영이 오게 되면 부활의 영은 이미 용서받았잖아요. 죄냐, 죄가 아니냐 하는 분류하는 작업이 의미가 없지요.

아, 이것 또 실현해 보이겠는데 여기 지금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은 착하고, 이것은 선하고 라고 이야기하시면서 너는 도둑질하는 것은 나쁘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훌륭한 복 받는 짓이다. 라고 시편에 나왔더란 말이지요. 나왔던 시편 말씀과 도둑질하면 나쁜 짓이라는 것을 가지고 자기가 정리하는 것이에요. 나는 도둑질을 몇 번 했기 때문에 나쁜 짓, 나는 찬양대에 봉사하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착한 짓, 분류하고 있는데 이렇게 분류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 하고 분류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만약에 그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갔다고 한다면, 그러면 지금 분류를 하고 있는 이 작업은 자기가 천국가는 것하고 관계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상관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가고 있으면서도 분류는 하고 있단 이 말이지요.

방금 비참한 말로 죽었다 하지만, 안 죽고도 천국의 맛을 보게 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의 영이 오게 되면 순간적으로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내가 이것 도둑질은 나쁜 짓, 이것, 이것 분류한 것 하고 내 구원받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지? 쓰잘떼기 없는 소리하고. 집어치우자. ( ) 라고 그 하는 것에 대해서 무의미하게 느끼고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죠. 몇 초? 2초. 2초 동안에. 그런데 그 2초 나머지는 뭐냐 하면 이 분류 작업을 하기 위한 성경의 구조의 나름대로의 재편성에 들어갑니다. 히브리서 어느 대목은 못 지켰고, 마태복음의 이것은 지켰고 이렇게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베드로전서 1장 10을 보시면 아, 이것이 어떤 뜻에서 그런가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절은, 이제는 아예 보기도 싫지요.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성경말씀을 보는가 안 보는가. 그런데 그걸 아시고 보라고 안 하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좋지요. 편하죠. 우리 편하게 삽시다.

선지자들은 구약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그 말입니다. 선지자들의 구약해석과 인간들의 구약해석과 어떻게 다른가? 다릅니다. 목사님 왜 다르다고 함부로 이야기합니까? 다르기 때문에 속죄의 대상이 됩니다. 이들이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속죄의 대상이 된다고 단정을 하느냐? 단정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 또 이야기할까요? 십자가 사건은 뭐라고요? 첫 번째, 어떤 인간이든 속죄의 대상이다. 그것을 그대로 여기다 대입시키는 겁니다. 어떤 인간이든 성경을 해석하든, 성경을 분석하든, 성경을 통째로 다 외우든 간에 그것은 뭡니까? 죄인이 되는 겁니다. 죄인 같으면 죄인 나름대로의 가만있지 않고 뭔가를 발동을 하지요. 발동한 것이 뭐냐면 나름대로의 구약보기, 나름대로의 구약해석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선지들도 마찬가지냐, 아니냐? 마찬가지죠.

그런데 1장 10절에 보시면, 진짜 한 번 봐야 돼요. 선지자 속에 이미 부활의 영이 들어가 있어요. 아까 부활의 영이 뭐라 했습니까? 안 죽어도 무슨 맛을 보는, 천국의 맛을 보는 영이 부활의 영이죠. 장차 일어날 부활의 영이 미리 앞당겨서 선지자의 속에 들어오니까 선지자들도 우리하고 똑같이 바보 등신들이고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한 그 순간, 몇 초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2촌데 아마 2분 더 될 거예요. 그 순간만큼은 부활의 입장에서 성경해석을 해댔더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구약성경이지만 역시 그것을 볼 때는 우리의 일방적인 선악구조 가지고 또 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이 점에 대해서 따로 이야기하면 몇 시간해야 되는데 언어학에서, 다른 말로 하면 기호학에서, 기호와 언어가 다릅니다. 기호학은 하나의 기호가지고 그것에서 변별, 차이성을 이야기한다면, 언어학은 기호학의 한 분야, 또 어떤 사람은 언어학이 기호학보다 더 높다며 의견이 다르지만 의미를 찾아내는 거예요. 의미를 찾아내는데 기호학적으로 의미라는 것은 두 단어 사이의 서로 차이가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소쉬르라는 언어학자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어떤 방에 가는데 '남'이라고 써놨어요. 남쪽에 있는 방인가, 이것이 뭐 하는 줄 몰랐는데 그 옆에 보니까 '여'라고 써놨어요. 아아, 이것이 화장실이구나. 또는 화장실내지는 목욕탕이지요. 남녀 구분되는 것은 화장실 밖에 없잖아요. 남여를 통해서 그냥 남이라는 것을 분석하면 수컷이고, 여자 암컷 이렇게 되는데 남자 여자 함께 붙어 나오니까 여기선 하나의 목욕탕, 또는 화장실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등장하는 거예요.

소쉬르라 하는 것은, 의미라는 것은 단어가 의미를 대신할 수 없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회적인 랭귀지, 언어적인 법칙이 언어를,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한 거예요. 그러데 소쉬르의 이론을 일단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반발했던 후배 언어학자, 기호학자들이 많이 나왔어요.

그 사람들은 뭐냐 하면 기호와 한 단어가 다른 것이 아니고 텍스트, 처음으로 영어 썼지요. 텍스트, 하나의 문헌, 또한 재료, 성경 같으면 원자료, 이런 것이 그러니까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 아니라, 문맥 정도가 아니라 더 넓은 하나의 통째로 한 권의 책, 단절된 하나의 폐쇄적인 지식들 내에서의 하나의 긴긴 스토리들, 그것 전체를 파악해서 의미가 나온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생각은 성경해석학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었는데요. 그것이 뭐냐 프리셉트 성경해석학 하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목적어, 주어, 동사 따져서 성경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앞뒤 문맥을 봐야 진짜 그 근원적인 의미가 나온다. 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언어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베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더 발전된 해석학이 리꾀르인데, 리꾀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언어란 문맥을 통해서 알아,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그래서는 몰라. 어떻게 아느냐, 모든 언어라는 것은 은유와 환유로 되기 때문에 은유와 환유로 되어있다는 말은 합쳐서 비유죠. 비유로 되어있다는 말은 실체는 없다는 거죠. 실체는 없는데 의미를 어떻게 아느냐? 누가 이것을 어떤 식으로 의미를 푸느냐? 그 독자가 주시하는, 자기가 주입하는 선입견에 의해서 그것이 예술적으로, 언어적으로 다시 은유적, 비유적으로 파악될 때 독자가 보는 개별적인 본인만의 개성적인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황우석 교수였죠. 이것이 놀랍게도 그 텍스트가, 본문이 본문을 텍스트라고 하는데, 이것이 제가 이렇게 하면 문학적인 인문과학에만 해당되는 줄 알았죠. 과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배아가 배양되기 이전에 그것을 원천기술로 보느냐, 안 보느냐의 문제에요. 그 텍스트를 황우석 교수는 원천기술이 있다고 보고, 서울대학교 조사팀은 없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은 실제 있는 상황을 똑같은, 동일한 상황을 두고서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또 한 예를 들면, 달이 초승달되고 그믐달 되니까 그것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하면 내 인생도 지는구나, 달아 같이 따라 죽을게. 똑같은 달인데 의미를 그렇게 두는 겁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창가에 가을이 되서 나뭇잎이 지는데 이상한 나뭇잎이 하나 있어서 겨울이 다 되도 안 떨어져, 눈 와도 안 떨어져. 이 무슨 고집이 그런 고집이 있나.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논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창가에 있던 환자는 희망을 갖는 거예요, 희망을. 그래 저 나뭇잎에 자기를 투영해서 니 팔자나 내 팔자가 같은데 이제 나는 저것 떨어지면 죽는다. 자자, 내일 되면 떨어지면 나도 죽어야지. 모레 떨어지면. 그래가지고 희망 생겨서 퇴원했다는 것 아닙니까?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그 단편소설이지요.

그런게 또 있어요. 노벨 문학상을 받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있지요. 고도가 없어요. 그것이 프로이드의 미지의 X에요. 우리는 알 수 없는 미지의 X로부터 자꾸 초청받아요. 첫째 강의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첫째 강의가 너무 어려워서 또 늦게 온 사람들이 있어서, 선생님이 늦게 오셔서 안 들었잖아요.

첫째 강의는 이렇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신이 어떻다, 창조가 어떻다 이런 것들이 다 결국은 혼자 노는 게임일 수 있는 지워버릴 수 있다는 거예요. 서른 두 살때 믿다가 사십 때 안 믿을 수 있고. 그러면 지워지는 것은 어디로 사라질 때에 있다가 사라졌다면 그 사라진 것은 어디에 모이느냐 말이죠. 그것이 바로 구멍이죠. 어두운 구멍.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자꾸 잡아당기는 거예요. 똑같이 해놓고 또 추가했죠, 제가. 알 수 없는 구멍으로 사라지는 이것을 무, 심연, 무로 사라지는 모든 인간은 다 인간이든, 코끼리든, 코스모스든 어떤 것도 전부 다 알 수 없는 무로 사라지는 거예요. 사라지면 허무하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알 수 없이 생겨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뭐라 했습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이러한 이상한 도덕적인 것은, 이것은 내가 그것이 옳고 그르다 내가 모르기 전에 내 마음속에 살인해서는 안 돼, 어떤 경우에도 살인해서는 안 돼. 라는 새로운 양심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실천이성이 또 생기더란 말이죠. 그것은 어디서 생기느냐? 그것은 알 수 없는 데에서 생기는 거죠. 그래서 인간은 진정 인간으로 하여금 조정하는 것은 알 수 없는 미지의 라지 X, 라캉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알 수 없는 X가 나를 현혹하고 유혹하고 내가 생판 예상치도 않는 것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을 유비쿼터스라고 하지요.

유비쿼터스는 뭐예요? 예상치도 않은 공간에 돌연 등장하는 거예요. 이것은 붙잡을 수가 없어요. 붙잡으려면 여기서 튀어나오고 저기서 튀어나오고 랜덤, 임의대로 튀어나와 버려요. 유비쿼터스가 상업적으로, 과학적으로 되게 되면 뭐냐 하면 원하는 지점에 원하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터져라, 휴대폰' 이런 것. 어떤 것 지점에도 가능한, 원하는 이것을 유비쿼터스라 하는데 이것은 옛날에는 붙잡아서 훈련시켜서 유용한 기술로 삼자는 그런 시대라면, 이제는 인식이 바꿔서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 무자유적인 것이 결국 하나로 모여지면 하나의 유용할 수 있다는 인식이 바뀌는 카오스 이론이죠. 게오 사다끼의.

정확한 대류가 세탁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렇게나 한 그런 대류가 정확한 대류보다 2.5배 더 세탁 효과가 더 큰 혜택이 있다는. 지금 여러분 이 이야기 믿습니까? 하여튼 대충 비슷하니까.

항상 우발적인 요소가 등장하면 기대했던 2배가 아니라 3배, 4배도 할 수 있는 그것이 있단 말이에요. 모험이 기대하라가 아니라 모험을 즐기라. 대체 무슨 이야기하다 이렇게 되었었습니다만.

알 수 없는 미지의 X가 내 운명의 사슬을 쥐고 있다면 결국은 내가 예수 믿는다고 붙잡고 있다 할지라도 내일 되어서 스스로 취소할 수 있는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진정한 진리라는 것은 현재 나타난 현상, 진짜 뭔가 있음, 그 있음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 있음이 현재 우리를 있게 한 것이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라는 것이 제가 이야기한 것을 다시 설명해도 또 모르겠지요. 어쨌든 헛갈리지요. 이것이. 지금 무슨 이야기하다 자꾸 ㅎㅎㅎ

그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 번 봅시다. 언어학, 해석학 문제인데,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다머라는 사람은 자신의 선입감이 개입되지 않는 해석은 없다, 이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선입감, 불트만은 선이해라고 했는데 자기의 선이해가 개입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선 이해가 뭐냐 했을 때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인간의 모든 선이해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죽음의 충동에서 나온다. 죽음의 충동이란 뭐냐 하면 안 죽으려고 발버둥치는 그것이 과학을 하든, 예술을 하든, 만화책을 읽든. 성경을 읽든 그것이 다 튀어나온다는 것에요. 안 죽으려고.

지금 철학자들이 제일 풀 수 없는 것이 뭐냐 하면 지금 살아있는 내가 몇 십 년 후에 내가 꼭 죽어야 되느냐 이 문제입니다. 그것에 대해 누가 속 시원하게 해답을 안 해 준다 말이죠. 아무리 건강해도 내가 없는 순간이 오잖아요, 그때 왜 내가 없어져야 되느냐 말이죠. 왜 내가 없어져야 되는지 모르지요. 여러분 모르지요. 안다하면 안 됩니다. 모르잖아요.

그 모르는 것이 뜨개질로 나오는 거예요. 모르는 것이 겨울 63 과학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 모르는 것이 부동산 투기로 나오고, 그 모르는 것이 애들 가르치는 교사로 나오고. 그런 행동이 어떤 사물을 보든 어떤 인생 전체가 본문이라 할 때 그것을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해석으로 튀어나온다 이 말이에요.

그것을 노리는 것이 보험회사이죠. 알리안츠, 생명보험 하나 드시지요. 또 보험회사, 벌서 3가지나 넣었습니다. 그것과는 다릅니다. 5630가지 모든 각종 질병을 하루에 300원, 한달에 이만 육천백 얼마하면 환급받는 것도 있습니다. 건강보조금 오백만원 줍니다. 여성 병원까지 다 해결됩니다. 전부 다 이렇게 할 때 그 보험회사는 그것을 왜 하느냐 하면 보험이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한 건수 올려야 집에 있는 가족들이 살아요.

보험을 들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동안 내가 잊어 버렸던 것을 보험회사가 일깨워 주는 겁니다. 그렇지. 이것이 나의 문제점이었는데 그 문제점을 다소나마 완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안심책이 될 거라는 그동안 잠자고 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몸부림을 다소 해결하는 쪽으로 만다는 겁니다. 그것이 둘 다 같이 세상을 죽음이라는 바탕에서 봤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존재자의 이론이에요. 그 어려운 책의 애기가 이겁니다. 죽음이 왜 죽는지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에 대한 몸부림들이 우리 인생의 기반을 이룬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은요. 그런데 선지자들은 달랐더라 이 말이죠. 선지자들 속에 다른 주체자들이 들어와 버려요. 방금 하이데거나, 방금 유식한 척하면서 가다머나 여러 가지 라캉이나 프로이드 이야기했습니다만 그 모든 것은 내가 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내가 진리를 알아서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고 싶다. 라는 그런 뜻에서 이야기했다면 이 선지자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요청하지도 않고, 초대하지도 않은 장차 오실 어떤 미지의 X되시는 분, 이것이 헬라어 유사하게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그리스도네. 크리스마스인데 어떤 사람은 엑스마스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 엑스, 그리스도가 앞당겨서 미리 와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 선지자들의 입을 벌려서 이야기하고 액션, 삶을 살게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십자가 이전에도 그렇다면 십자가 이후에 오신 성령은 바로 십자가 이전에 선지자에게 적용됐던 그 적용의 원칙을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 적용된다. 라는 것이 베드로전후서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편지가. 옛날의 선지자에게 일어났던 그것을 이제는 오늘날 이 편지를 읽는 택한 백성하게 동일하게 적용되니까 기다리세요, 이런 뜻이에요.

이 새로운 주체가 오게 되면 뭐를 아느냐 하면 아까 하이데거 이야기를 해봅시다. 다시 되풀이해야 자꾸 기억이나요. 헤이데거는 뭐라고 했어요. 하이데거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어디서 나온다고요. 안 죽으려고 몸부림치는 이유도 없이 죽을 수 없다는 것. 나는 이유없이 죽을 수 없어. 나는 왜 죽는지 싫어. 싫어. 라는 No, Nein. 그러한 아니야, 아니야, 이것은 안돼. 라는 그것이 움츠리지 못하고 발산되는 식으로 나온 것이지요.

거기에 동의한 사람이 하이데거, 니체, 드바이 배웠지만 니체는 여기서 두 가지 허무주의를 이야기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소극적 허무주의를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적극적 허무주의를 이야기했습니다. 니체는 적극적 허무주의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소극적 허무주의가 뭐냐 하면 쇼펜하우어예요. 자살, 자살이 가장 큰 행복이다. 자살보다 더 좋은 행복은 없다 해놓고 자기는 자살 안했어요. 아이, 사람이 배반, 야, 얍삽한 사람이에요. 자기는 자살하라 해 놓고. 쇼펜하우어 책보고 많은 젊은이들이 자살했거든요. 우리나라도 자살 많이 했어요. 우리나라도 1930년대, 40년대 모더니즘 나올 때에 이상의 날개, 오감도 그것이 전부 다 폐쇄적인, 염세주의적인 모더니즘에서 나온 것이거든요. 그 작품들이 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심지어 제가 어렸을 때에 형뻘 되는 사람들이 쇼펜하우어의 책보고 전부 다 고민에 잠겨가지고 인생이 무엇이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지요.

이것이 소극적 허무주의라면, 적극적 허무주의가 뭐냐 하면 허무하기에 초인이 되어라. 초인이 뭐냐? 초인은, 인간은 자기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이죠. 다른 말로 하면 긍정적 사고방식. 이것이 놀랍게도 허무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에라, 나중에 어떻게 될지라도 즐기고 보자. 라는 데서 예상치도 못하는 놀라운 능력이 발휘된다는 겁니다.

제가 tv를 거의 안 보는데 옛날에 금요일날 한국을 살리는 기업들의 신화, 뭡니까? 성공시대 아니고, 신화창조라는 것을 봤어요. 그 음악이 누가 부른 음악입니까? 행진 부르는 것 있잖아요. 그 사람들 한 번 큰 건수 건진 사람들은요 깊은 회의에 빠지고, 허무에 빠진다는 것을 다 감추고 있어요. 사람이 큰 건수 터뜨리면 생애에 환희를 느끼죠. 아, 나는 살아야 될 가치가 있구나 느끼지만,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런데 현실은 뭡니까? 죽잖아요. 자기가 쓸데없는 데 죽으면 아깝지 않습니다. 쓸데 있는데 죽으면 아까워 미칩니다. 나 같은 고귀한 인간을 왜 죽여? 그 폭이 길어지니까 허무가 길죠. 자기가 높아지면 수면제 아니고서는, 술 안 먹고는 잠을 이루질 없죠. 시애틀의 잠 못 드는 밤. 허무의 폭이 넓어지면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목회자들 몇 명 안 됩니다만 없으니 하는 소리이지만, 목회자가 언제 잠 못 이루냐 하면은 설교 잘하고 싶을 때 잠이 안 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설교 왜 잘하려고 하는데요. 죽기 싫다는 거예요. 오늘밤 죽기 싫고 내일 설교하고, 죽어도 설교하고 죽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의 가치를 너무 과대평가한 거예요. 우리는 성경을 보고 하면서 나에게는 설교할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철저하게 나는 성경을 해석할 자격도 없는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해석을 하다니, 나에게는 황공스러운 사실이야. 라고 이렇게 마음을 낮춰야 되는데 이 해석을 누가해, 나 아니면 누가 하겠어? 이러면 잠 못 이룹니다. 내일 멋진 설교를 터트린다. 한 번 똑똑히 보라! 내가 화려한 제2의 부흥이 일어날 거야! 꼭 누구 이야기하는 것처럼, 남의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주 어색하지요. 그러면 그렇게 설교 준비해 놨는데 김 집사, 최 집사 다 빠져버리면 닭 쫓던 개처럼 짜증나서 설교 못하는데 그것이 녹음돼 보세요. 듣는 사람도 짜증나죠. 그래서 목사님들 녹음 안 하려고 해요. 자기 성격 나온다고. 또 무슨 이야기하다 이렇게.

허무주의에 있어서 절대적인 성공은, 선이 있는 것에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을 그는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절재적인 성공이 있을 때에는 그 성공을 완전히 일시에 잊어버리고 그 성공을 무가치하게 봐 버리고, 당장 당기는 죽음의 무서운 세력에 그 성공했다는 그 업적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용서 안 되니까 정기적으로 술을 마시는데 그 알콜 중독이 바로 정기적인데서 나옵니다. 맞지요. 많이 먹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정기적으로. 여기 한꺼번에 많이 먹는 사람은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정기적으로 조금씩 먹으면 거기에 내성이 발현되어가지고 나중에는 어지간히 먹어도 잠이 안 오죠. 마약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담배도 마찬가지고. 담배 꼬나 피면서 하는 이야기, 생각이 뭐예요. 왜 나는 가치 있는데 가치를 남들이 안 알아주느냐 이 말이에요. 왜 사회는 나 같은 인간을 자꾸 놓치는가, 바보들. 그렇게 하면서 한다는 거지요. 가만 조용한 것 보니까 다 그렇게 사시는 것 같아요. 뉘앙스 같은데.

선지자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야지요. 선지자들, 몇 번 해놓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선지자들은 어떤 점이냐 하면 마찬가지에요. 나는 선지자기 때문에 훌륭해야 돼, 남보다 덕 스러워야 되고, 모범적 신앙생활을 해야 돼. 라고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서 십자가의 절망적인 상태로 꼴아 박아 버립니다. 완전히. 그런데 여기에 자기 선지자들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일에 동원되는 것이 누구냐 하면 비복음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사람들이 둘러서서 선지자를 억울하게 조지는 거지요. 억울하게 모함하고, 고난 받게 하고. 그 고난의 주제가 베드로전후서입니다.

베드로전후서의 주제는 고난입니다. 그것도 이유 없이 받는 고난. 만약에 예수님 때문에 이유 없이 고난 받거든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물러 있는 줄 알라. 베드로 전서 4장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진 것은 너희로 본을 따라 그 십자가를 따라 오게 하심이라 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베드로전서 2장.

왕 같은 제사장의 뜻이 뭐냐 하면 그냥 제사장이 아니라 왕족입니다. 왕족 중에서 너 제사장해 볼래. 해서 된 것이 왕 같은 제사장이에요. 왕족이니까 통치자에요, 지배자에요. 정말 12고을 다스릴 수 있는 그런 신분에 이미 도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왕족이 애매하게 고난을 받지요. 왜 그래야 됩니까? 그것은 나에게 묻지 말고 과거의 선지자들한테 물어봐라. 선지자들도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이미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산 것 같은 사는 사람, 부활의 천국을 맛본 사람이지만 그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런 고난을 받는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기뻐해야 할 것은 어지간해서는 부활의 영이 없으면 그런 고난 받으면 왜 고난을 주십니까? 나 이제 예수 안 믿는다, 나자빠질 건데 영광이 그들 절망 가운데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영광, 이것 참 어려워요. 십자가 속에 있기에 비로소 부활이 보이는, 다른 장소에 있으면 부활을 느낄 수 없는 깊은 절망 속에 있기에 그것도 이유 없이 절망 속에 있기에 비로소 처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소망이 뭔지를 제대로 맛봤기에 주위에서 어떠한 애매한 고난이 와도 그것은 고난 취급도 않고 웃으면서 넘길 수 있었다 말이에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 가지 선지자가 있습니다만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친구들과 이 네 사람이 무슨 주제를 가지고 얘기했느냐 하면은 하나님은 정의롭다는 주제를 가지고 싸우는 겁니다. 좋겠다 말씀도 안 듣고. 욥은 신은 정의롭다는 겁니다. 네 사람 다 공통점이에요. 그런데 네 사람 다 공통점이 뭐냐면 신은 정의롭다를 나는 안 죽어야 돼. 라는 그러한 하이데거적인 밑바탕 위에서 신의 정의를 논했습니다.

세 명의 친구가 뭐냐 하면 나는 정의로워.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처럼 죽어야 되는 고난을 안 주신거야. 왜 나는 욥, 너보다 더 착하기 때문에. 이것이 친구들의 이야기에요. 욥은 나는 사실은 너보다 더 착한데도 불구하고 이유를 모르겠어. 왜 죽음에 가까이 와 있는지. 차라리 나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차라리 하나님, 날 죽여주옵소서. 태어나게 말아야 될 것을. 참 만삭되지 못하게 그때 엄마 태중에 있을 때 안 태어나고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우사를 당하지 않고. 왜 하나님은 내가 정의롭고, 정의롭다면 나는 안 아퍼야 되고, 안 다쳐야 되고, 아무 병도 없어야 되는데, 왜 자식 열 명이 한꺼번에 다 한 날에 다 죽어버리고, 또 그 많은 재산이 한꺼번에 다 날아가 버리는가? 도대체 나는 하나님의 어떤 정의로움을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나 이제 따지고 싶다. 곧 죽는데 내가 죽고 난 뒤에 내 몸을 벗은 후에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서 내가 한 번 따져보겠다. 도대체 왜 나에게 고난줍니까? 라고. 이것이 욥기의 전반부와 중반부에 흐르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철딱서니 없는 빌닷이 뭐라고 합니까? 네가 나쁜 짓 했기 때문에 벌 받았다, 착한 일 해 봐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완전히 출산드라예요. 이런 시건 없는 소리를 해대요. 이런 시건 없는 소리를 주의 복음이라고 간판 걸어가지고, 액자해 가지고 팔아먹고. 차라리 네가 신처럼 되리라는 그것을 적어 놓으라고. 선악과를 따 먹으면 신처럼 되리라 이런 것을 적어 놓지 아예. 아마 그것을 적어 놓으면 많이 팔릴 거예요.

정의롭다는 것을 하나님이 출발점이라는 것을 모르고 나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정의로움 했기 때문에 결국은 해답 없이 논쟁은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친구 엘리바스와 다섯 번째 등장하는 하나님은 인간에서 출발한 정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에서 출발한 정의로움이 있어요.

그 정의로움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네가 묘성, 그러니까 행성이죠. 은하계 만들 때 욥아, 네가 얼굴 들고 나한테 이야기해봐. 은하계 만들 때 나의 정의로움을 아느냐? 네가 하마가 애 낳을 때 어떤 정의로움으로써 애 낳는지 아느냐? 그러면 광야에 비 오는 이유를 아느냐? 광야에 왜 비를 내립니까? 밭에 비를 내려야지. 농사 안 되는 광야에 왜 비가 옵니까? 여기 밭에 눈 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밭 아닌데 눈 오는 이유를. 제가 설교 예화 들 때 전라도 눈 왔을 때 걱정은 많이 했지만 전화는 안 했습니다. 잘 감당할 줄 믿고 안 했는데. 이랬어요. 눈이 한 5센티미터 오면 사람은 기분이 참 실제적으로 좋습니다. 라라라라, 날 잡아봐라. 기분 죽인다. 엎어져가지고, 눈이 내리네. 이것이 30센티미터 쯤 오면, 교회를 가기가. 주여, 이것은 자비가 좀 지나치십니다. 아름다운 꽃도 과하면. 1미터쯤 오면 주여, 왜 이러십니까? 우리가 뭘 잘못을 했는데. 1미터 30센티미터 쯤 오면, 에이, 네 마음대로 해라. 나 당신 포기했다. 기도해도 안 되고. 일본은 4미터 왔거든요. 4미터 온 것은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묻습니다. 왜 4미터 왔습니까? 그 4미터 오게 하신 이유를 아십니까? 누구든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욥에게 눈이 4미터 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은 욥으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뭐냐? 우리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하는 겁니다. 입을 다물게 하고 그 뒤에 욥이 있던 이유는 욥은 입을 다물어야 될 입을 다물어서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주어야 될 증거물로 삼기 위해서 욥에게 그런 힘든 절차를 이끌고 오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계속 욥은 노홍철처럼 입을 나불댔어요. 왜 아픕니까? 왜 죽습니까? 자꾸 물었던 거예요. 모든 기호학과 언어학은 밑바탕에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나는 죽어선 안돼. 나는 아직도 죽을 시간이 안 되었어. 나는 더 살아야 될 가치가 있는 거야. 그것을 홍보하기 위해서 대저 알리기 위해서 심지어 신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피알하기 위해서 억지를 쓰면서 기도하는 것이 기도에요. 하나님 절 죽이면 안 됩니다. 인재 하나 버리는 겁니다.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똑 같은데 선지자 속에는 이유 없이 난데없이 주위에 둘러 싸여서 심한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아아, 나의 고난은 내가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의 세 친구 같은 경우에 다니엘의 세 친구가 왜 갑자기 불 속에 들어갑니까? 찜질방에 들어간다면 견딜 만한데 찜질방 정도가 아니에요. 다니엘의 세 친구를 붙들었던 그 사람 불에 타 죽었습니다. 들어갈 때 붙들고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까 불에 타 죽었어요. 자기는 뭔데 자기 세포는 단백질 아닙니까? 세포는 단백질로 되어있고,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되어있고 아미노산이 한 250도면 다 탈걸요. 다 타버려요. 머리카락 대 보세요. 지독한 냄새나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다니엘의 친구들은 머리카락도 안 탔어요. 어디 헐크닙까, 슈퍼맨입니까? 지 머리카락은 무슨 머리타락인지 안 타는 머리카락이에요? 그것 있으면 돈 벌겠다?

아까 얘기했습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안 먹고, 안 마시고, 40일 잠도 안 자고 건강한 모습으로 내려왔습니다. 이것을 인간의 물질을 연구해서 그것을 규명해서 차츰차츰 올라가서 그것을 모방한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방법으로서 나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산이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 것처럼 인간은 예상 못하는 거예요.

오병이어. 떡을 뗐는데 또 생기고, 떡을 떼도 또 생겨요. 이것을 해 보세요 되는가? 안 되지요. 용돈 줬는데 또 생기고, 용돈 줬는데 또 생기고. 안 되잖아요. 주님은 그렇게 하셨단 말이에요. 이것은 주님께서 돈줄 능력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아예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 말이죠. 죽은 나사로를 건져냈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죽기 싫어, 죽기 싫어는 선지자도 마찬가진데 막상 그 절망 속에서 죽음 속에서 당겨가지고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미리 맛보게 하니까 이제는 살고 죽는다는 것이 나를 인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주님의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서 산 자도 살고, 죽은 자도 죽고, 죽었다 산 자도 주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등장합니다.

주님에 의해서 가능하다면 나의 주체 분열, 내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하고 라는 이러한 분열된 간격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잖아요. 물론 선지자가 늘상 이렇게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지만 선지자가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구나, 이미 나는 죽어도 살았고, 지금 살아있어도 사는 거구나 라는 것을 그들이 고백했기 때문에 그 고백이 주위의 어떤 모함과 비난이 와도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에 들어갔더니만 거기에 네 번째 사나이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함께 춤추고 있었던 말이지요. 그것을 보고 놀랜 사람은 누구냐 바깥에 있는 느부갓네살 왕이 놀래 자빠졌지요. 뭐 이런 것이 있느냐? 느부갓네살 아들이 다리우스 왕이라고 유명한 왕이 있어요. 메대 파사. 완전히 너무 놀랐어요. 그것을 장, 필드. 어떤 새로운 영역이, 부활의 영역이 앞당겨 왔다는 말이죠.

지금 여러분이 과거의 이야기 신나게 듣고 있습니다. 지금 묻는 것은 과거 이야기로 끝이냐 그것은 하나의 십자가 부활의 영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떻게요? 바로 십자가로 다 이루어었음이 새록새록 그것이 느껴지고 믿어진다는 겁니다. 어떻게 살았든 간에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든 상관없이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죽어가면서도 사실은 산 채로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는 것이 느껴지겠지요.

그렇다면 주위에서 남 비난하고 남 그것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잠도 안 자고, 술 먹고, 고민 있다고 담배피우고 인간적으로 행위로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몇 초 동안. 2초 동안. 2초 끝나고 술 먹고. 오래 안 가니까. 오래 가질 않아요. 왜 그것이 오래 안 갈 수밖에 없느냐 하면은 그것이 오래 가면 내가 신이 돼야 돼요. 내가 너무 위대해져. 그러면 신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또 죽으면 또 안돼. 다른 사람이 죽으면 나는 살아남아야 돼. 항상 이런 일이 반복되는 고요한 화이트의 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보면서 낯선 세계를 우리가 보게 됩니다. 부활을 통해서 실제로 이것이 현실인 것을 우리가 믿어지게 하여 주시고 그 현실에 이미 우리가 초대받은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베드로전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평6강  (0) 2022.03.19
함평5강  (0) 2022.03.19
함평3강  (0) 2022.03.19
함평2강  (0) 2022.03.19
함평수련회1강-2006-주께 맡겨라  (0) 2022.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