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

함평3강

아빠와 함께 2022. 3. 19. 12:16

함평겨울수련회-베드로전후서강의 녹취 3,4번
한윤범 2006-01-22 21:55:22, 조회 : 2, 추천 : 0

2006 함평겨울수련회
(강사:이근호 목사)

베드로전후서 강의

제3번


세 번째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보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성경말씀은 문자해독력이 있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문자해독력이 있든 없든 간에 선택된 자가 누구냐를 골라서 찾아가는 식으로 성령께서 뒤따라가면서 이해케 한다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택한 자만 이해되도록 하는 식으로 성령이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작용하게 되면 뭘 아느냐 하면, 그 뒤에 희한한 말씀이 나와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라고 돼 있거든요. 여기 피 뿌린다는 말을 이걸 제가 실현해 보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자기가 잘못을 회개했을 때, 앞으론 잘해. 잘하란 말이야, 한 번 봐 줄게. 이러면 될 일을, 이리 나오세요, 해 놓고 뿌리는 거예요. 사람에다 면전에 뿌리는 거예요. 이것 물이거든요. 물 뿌리면 아, 물로 씻으란 말이다. 이해되는데 이것이 물이 아니고, 피단 말입니다. 피를 뿌리는 거예요. 한 번 뿌려볼까요? 기분 얼마나 더러운지. 물을 뿌리면 아, 이발하는 모양이구나. 이발할 때 원래 머리에 물을 뿌리는데, 1.피를 뿌리면 얼마나 기분 더러운지, 피를 뿌린다 말이죠.

2.그 피가 뭐냐면 예수님의 생명이거든요. 예수님의 생명을 사람에게 줘 버린다는 말은, 3.네 생명은 생명도 아니야. 이런 뜻이에요. 너는 갔어, 죽었어. 그런 뜻이에요. 예수님의 생명을 외부적으로 뿌려서 덧입혀지지 아니하면 너는 죽은 자야.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뿌린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의 피 뿌림을 당한거든요. 예수님의 피 뿌림을 당할 때 그 사람이 비로소 의인되고 영생 얻는다는 말은 인간의 법의 실천력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법 지키는 것을 모독하는 거예요. 해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잘해, 내 한 번 봐줬어. 사람이 알아먹어야지. 이런 식이 아니라 그래 또 기회를 줄께. 이런 것이 아니라 아예 얼굴에다 피를 뿌린다는 것은 백날해도 안 되는 거야 너는. 백날 법, 다음에 잘할게요. 또 잘할 게요. 다시는 두 번 다시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라는 그것이 주제 파악이 안 되어서 나올 수 있는 유예기간, 또는 기회 더 받기, 발악 내지는 어떤 살기위한 몸부림, 착하기 위한 몸부림, 더 숭고하기 위한 기회부여잡기, 시간벌기 위한 작전, 그런 것을 일소하는 것이 뭐냐 끝난 거야. 끝났어. 됀 거야. 이거란 말이에요. 이것은 영화, 무대연극에 보면 관객모독이라는 것이 있어요. 사람한테는 모독당하는 쾌감 같은 게 메조키스트의 쾌감을 그리워하는 모양이에요. 매 맞을 때 기분이 좋다든지 약간 변태적이지만 그런 게 있는 모양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왜 우리의 법 지키기, 선한 일하기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모독당해야 되는가를 알기 위해서 여기서 주체가 둘로 분열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시간, 둘째 시간 약간 난해했습니다만 세 번째는 더 난해합니다. 난해해 가지고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난해한데 그냥 들어나 보세요.

인간의 주체가 둘로 분열된 것에 대해서 현대 프로이드학파에 있는 라캉이라는 철학자가 약간의 뉘앙스를 준 적이 있는데 주체분열이죠. 그걸 s라 하고 s, 이렇게 철학자는 이야기합니다마는.

성경에서 어떻게 이해되느냐 하면은 이렇게 이해됩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에게 법은 지켜야 돼. 다른 말로 하면 선해야 인간다워라는 것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이 주어지면 탐내지 말라하면 아, 이것은 탐 안 내야 하나님의 피조물다워. 그럼 당연하지. 바르게 살아, 바르게 살아야지. 선을 추구해야 되고, 악을 버려야 돼,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돼. 라는 그러한 자아가 있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런 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 나 말고 다른 나가 있어요. 법을 절대로 악에 대한 호기심, 친밀성, 뭔가 애들이 담이 있으면 담 뒤에 뭐가 있는가를 반드시 봐야 속이 풀리듯이 가리면 금지하는 선을 넘어보고 싶은 충동을 오히려 벽이 유발시키죠. 하지 말라할 때는 뭐요, 방금 뭐 하지 말라고 했지요,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하지 말라고 금지한 그것이 갑자기 땡기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아가 둘로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 하면은 십자가의 속죄 때문이었습니다. 속죄는 두 가지의 양상을 줍니다. 속죄 되어야 될 대상/이유, 그 다음에 속죄되고 난 결과, 이 두 가지를 유발시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한단 말이죠. 우리의 죄를 다 씻어 없애버리는 겁니다. 죄 없잖아. 없는 거야. 죄를 없애버리는 그것이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 사건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왜 속죄되어야 할 존재인가, 그걸 밝히고, 속죄되고 난 뒤에 어떤 결과, 어떤 양상이 되었는가? 속죄 효과를 받고 난 뒤에 어떤 존재로 달라졌는가? 두 가지의 자아로 등장하게 되지요. 너는 속죄되어야 돼, 너는 죄가 있기 때문에 죄를 씻어야 돼. 라고 이야기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비로소 어떤 점이 우리에게 죄가 되는 거야. 라고 죄가 된 자아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허락받지 않고 이미 2천년 전에 벌어졌습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를 속죄해주는 사건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 땅에 나타나지도 않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씻어주기 위해서, 없애기 위해서 미리 앞당겨서 귀한 피를 흘리고 그 피를 다시 한번 그냥 뿌려줌으로써 용서가 된다는 것은, 만약에 저 의자가 인간이라면 이걸 뿌릴 때는 너는 죄인이야. 이래서 뿌리는 거야. 뿌림을 당할 때마다 죄인이라고 느끼는 거지요. 그리고 죄인이라고 느끼는 것만 아니고 뿌림을 당했습니다, 나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달라진 것, 동시에 생각하지요. 두 개의 자아를 생각하지요. 속죄현상 때문에.

그러데 어떤 것이 죄냐 할 때 어려워요. 성경적으로 어려운데. 무엇이 죄냐 할 적에 우리의 상식은 뭐냐, 학교에서 배운 것은 뭐냐 하면 나쁜 짓 한 게 죄라 하잖아요. 사도 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고, 선해야 돼, 착해야 돼. 라고 여기는 자아와 나에게는 악에 대해서 더 선하고, 악을 찾고자 하고, 악이 있으면 악이 있는 곳에 미치듯이 달려가는 자아 사이의 균열, 이 균열을 죄라고 본 겁니다. 균열이 메워지지 않는 것, 이걸 사도 바울은 죄라고 본 겁니다. 쉽게 말해서 왜 나는 선해야 함을 알면서도 나는 왜 선보다 악을 더 좋아하는 그러한 분열된 두 개의 자아를 갖고 있는가, 미치겠다. 라는 자체를 사도 바울은 인간이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로 보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성령받고 난 뒤에 새롭게 본 인간의 실존의 모습이에요.

인간의 악에 대한 친밀성, 호기심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평생토록 일어나지요. 목사가 설교를 하게 되면 악에 대한 친밀성은 사정없이 발휘됩니다. 말씀이 들어온다, 전군한테 지시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단속해라 명령을 내리죠. 안 들은 걸로 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설교하면 딴 짓하는데 그것도 심심하면 창가를 바라봅니다. 제발 들리지 않기를, 목사가 설교해도 들리지 않기를, 내가 안 들은 걸로 하기를.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인지 유아실에 있던 애가 톡 튀어나와가지고 엄마 뭐하는데 하고 뛰어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까르르 웃으면서 전부 다 목사 설교 안 듣고 전부 노는 거야. 목사가 설교하다 당황스러워 가지고 여러분, 저 애 엄마 누구입니까? 설교 시간에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이것이 뭡니까? 김달원 목사 같으면 저거 사탄이다, 아 이거 악마다, 어딜 설교시간에 튀어 들어오노. 그런데 고객들 하면 안 되지만 교인들은 좋아가지고. 아이~씨 또 설교 듣나 하는 입장인데 아이구, 야야 귀엽다, 유아실 들어가려는데 붙잡아 가지고 할머니들은, 나이 많은 권사님들은 아이구, 내 새끼 많이 컸다, 많이 컸다. 설교시간 분위기 엉망진창 되고. 그런 또 좋은 기회가 주어지면 설교시간이 덜 지루하잖아요. 또 그렇게 하고 난 뒤에 적막해지면서 설교하기만 해봐라 내가 듣는가. 전군한테 지시한다,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한테 못 들어오게 하라. 말씀이 들어오기만 해 봐라 나는 좇아낸다. 이런 강력한 악에 대한 친밀성이 있다가 저 또 2층에서 누가 밑에 예배당이 있는 줄도 모르고 공사한다고 두두두두. 이때다. 이것이 뭔 소리고? 목사는, 오늘 왜 이럽니까? 사탄이 역사했나, 오늘 진도 안 나간다, 정말. 한 10분 있다가 조생감 사이소, 조생감. 교인들은 신나지 뭐, 듣기 싫은 설교를 방해하는 꾼들이 많이 나타나니까.

이것이 교인들께 평생 동안 죽을 때까지 이런 현상이 계속 일어나요. 말씀이 들어오는 것을 내가 용납을 하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말씀이 들어오시면 또 다른 자아가 이왕 들었는 것 이걸 지켜야 될 칸트적인 어떤 책임성을 부여받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오늘 목사님이 잠언서를 설교하면서 뇌물을 받지 말라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뇌물을 받지 말라하는 그 시간에 애가 빽빽 울어서 아니면 갑자기 띠링띠링 핸드폰 와서, 그래서 제 말은 뇌물을 받지 말라 이것이 잠언서의 뜻입니다. 라고 하고 있는데 띠링띠링 핸드폰이 와 가지고 예예하며 (핸드폰 받으며) 나간 사람은 이번 주에 회사의 일에 마음의 부담이 없어요. 뇌물을 받지 말라는 말을 안 들었기 때문에 전처럼 챙길 수가 있는데 같은 직장의 동료가 휴대폰이 안 와서 뇌물 받지 말란 말입니다. 이것이 잠언서의 뜻입니다. 하니까 에이고, 목사 네가 세상 생활해봐 뇌물을 안 받아서 되는가. 라는 말은 하지만 이미 말씀이 쑥 들어와 버렸어. 들어오니까 뇌물을 안 받는데 얼마짜리까지 안 받느냐 자기가 법을 만들어요. 얼마짜리는 되는데 주술은 되는데 십만 원짜리 봉투 10장은 안 되느냐 이런 것, 자기가 계산을 해야 되요. 계산을 한다고요. 그런데 너 요새 왜 이번 주 안색이 안 좋으냐? 그때 너 핸드폰 갖고 나갈 때 목사님이 뭐라고 했는 줄 아나, 뇌물 받지 말라 했다. 꼭 우리보고 한 소리 같더라. 누구 보고 한 소리 아닌데 한 쪽은 그때 예배 시간인데 나중에 전화합시다하고 나간 사람은 마음 편하게 일주일 동안 살고, 괜히 그 시간에 휴대폰 안 와서 뇌물받지 말라는 한 소리 들은 사람은 갈등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런 갈등을 느껴 가지고, 그래 성도라면 뇌물을 받지 말아야지 목사님 옳은 이야기지. 라는 말을 하지만 또 다른 마음이 있어서 뇌물을 받았다 치자. 그럼 어쩔 것인데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이 신인가. 내가 예수인가. 인간이 죄인이라며, 죄인이면 죄 짓는 것이 당연하지. 뭐 어쩔 건데. 아이~ 씨. 그런데 왜 이 두 간격이 좁혀지질 않아. 아아, 곤고한 자로다 내가. 이것이 이 두 개가 그러니까 여기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속죄되어야 될 대상이다. 뭐냐 이 두 사이가 간격이 좁혀지질 않아요. 모든 인간은 다 이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예수 믿고 착하다는 쪽, 이 쪽은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고, 날이 갈수록 더 성숙에 착해져야지 하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것은 바로 이것이 내부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회생활에 걸침돌이 되는 것은 이드와 초자아와 자아 사이에 정치적인 흥정이 생겨서 상황 봐서 분위기 파악해서 내가 초자아, 양심이 어느 정도까지 인간의 리비도, 인간의 기본적인 성욕과 탐욕과 죄악된 것을 약간 제거하고 절제할 것이냐 하는 것은 분위기 파악해서 하는 것입니다. 분위기 파악해서 나온 결론이 뭐냐 이드, 자아라는 거예요. 자아라는 것은 쉴 새 없이 통박을 굴리는데 어떤 통박이냐 하면 저 사람 앞에서는 내가 어떠한 예의범절을 지켜야 되고, 저 사람 앞에서는 내가 약간 느슨해도 괜찮고, 저 사람 앞에서는 꼼짝 마라 해야 되고, 저 사람 앞에서는 막말을 해도 괜찮고, 이것은 자아가 수시로 자아가 정치적인 흥정을 하는 거예요. 선과 악 사이에서.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것을 조절해서 그것이 윤리라는 이름으로 툭 튀어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사라지지 않고 모양만 바뀌죠. 모양만 바꿔서 잠잘 때 그때는 신나게 그동안 낮에 억제했던 억제된 모든 것을 풀어냅니다. 풀어내면 스트레스가 풀리는데. 이것이 만약에 안 풀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쌓이고 쌓여서 교회 다니는 사람을 싸이코라고 하는 거예요. 위선자에요, 위선자. 목사만 되도 인간이 지키지도 못하는 것을 가지고 뇌물받지 말라 자기는 월급받으니까 뇌물받지 말라는 것이지 자기는 아무 죄도 안 짓지. 자기가 사회 생활해봐 뇌물 다 받지. 뇌물받지 말라고 강조하고, 교인들은 실제로 살지 못하면서도 사는 척이라도 해야 되고 여기서 모든 스트레스는 인간 내부로 쌓이면서 가만있다가 드디어 폭발한다든지 정신 분열증, 결벽증, 편집증, 한 곳에 집착하는 편집증 같은 경우에 항상 뭔가 나쁜 짓을 했을 때는 착한 일로 대체하려고 하는 심보, 심리 이런 것들이 그 다음부터는 점점 병이 되면서 아주 고도의 아주 기술 좋은 위선자로 전락하고 마는 겁니다. 참 안타깝죠. 참 안타까운 형국입니다. 이것이.

그래서 여기서 좀 더 어렵게 해 봅시다.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절에 보면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 이렇게 되어 있지요.

받으실 고난과 영광을 같은 개념이면 달리 표현하겠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표현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대단히 어려워요. 사실은 이번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잘 들어보세요. 십자가와 부활이 어렵기 때문에 십자가를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십자가는 뭐라고요? 너는 속죄되어야 될 대상이야. 라고 이유도 설명해 주고, 속죄되고 난 뒤에 결과가 뭐냐, 죄가 없는 상태, 이것 양쪽을 다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하나의 허풍일까요? 이것이 허풍이라고 주장하는 20세기의 라이마르스부터 시작해서 19세기말 20세기 초까지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은 허풍이었다, 기독교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조작한 것이다, 부활한 것이 아니고 시체는 돈 주고 뇌물 줘가지고 훔쳤다, 여러 가지 이론들이 나옵니다. 나오는데 그것을 일소화시키는 것이 사도 바울이 내가 만났다, 30년 후에 실제로 내가 만났다. 내가 너희보다 예수를 반대했지만 실제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고 나만 만난 것이 아니라 500여명 사람에게 만났고, 마지막에 만삭되지 못한 그러니까 죠다같는 나에게도 주께서 찾아오셨더라, 이것이 고린도 전서 15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자, 십자가가 다음에 부활이 나옵니다. 여기서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이 부활이 어떤 상태냐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을 얻고자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어려워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속죄되어야 할 결과입니다. 그 결과가 뭐냐, 결과가 허풍으로만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증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그냥 부활되지 않으면 예수님이 그냥 큰 소리 친 거예요. 나는 세상 죄를 진 어린양이다. 나를 믿는 자는 너희는 이미 의인이 되고, 나를 믿는 자는 영생 얻는다. 말로만 누구든 나도 그렇게 이야기하겠다. 이근호 믿는 자는 부활 얻는다. 나도 하겠다. 말해서 손해 볼 것 없는데 이익인데. 미친 놈 몇 놈 따를 수 있지 않아요? 사람이 말로만 무슨 소리 못해요. 말론 다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내가 신이다. 자기의 터진 입으로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한단 말이죠.

죽고 난 뒤에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 라는 이 예언은 실제로 부활로 이루어졌고, 그것도 40일 동안이나 제자들과 함께 부활된 채로 40일 동안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이 보는데 앞에서 구름에 쌓여서 하늘로 올라갔고, 거기에 대해서 천사들이 왜 멍청하게 쳐다보느냐? 주께서는 다시 오시리라. 라고 재림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부활을 믿지 않고, 십자가가 속죄되어야 된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일으킨 그 사건 안에는 사람이 간섭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단독행위입니다. 예수님이 남과 다 폐쇄시키고 오로지 혼자만의 이룬 업적 가운데서 속죄가 되고난 결과까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증거가 바로 부활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활만 붙들고 있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가 무엇이냐, 과연 그것이 허풍이냐, 하나의 큰 소리 친 것이냐. 아니면 진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말이 빈 말이 아니라 정말 다 이루는 것이냐?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부활사건이에요. 부활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속죄가 끝났음, 속죄가 다 되었음의 결과가 막연한 기구사항, 마지막 기대사항이 아니라 실제로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렇다면 속죄의 결과가 뭐냐? 이것은 예수님한테는 부활이지만 우리한테는 뭐냐 하면 바로 속죄가 된 상태의 성도죠. 속죄가 된 상태를 어떻게 압니까? 예수의 부활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속죄가 된 결과죠. 그러면 아까 제가 속죄되어야 될 이유가 뭐냐 죄 때문에 그렇다는데, 죄가 무엇이죠? 죄라는 것은 나는 착해, 나는 안 착할 거야, 이것이 죄가 아니라, 왜 착하고자 하는 내가 실제로 왜 착해지지 않느냐 하는 그 분열이 죄라고 했죠.

그것이 죄라면 죄가 해결되고 난 뒤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내가 어떻게 되는가가 아니라 현재에 내가 존재하는 것은 예수님의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2초, 한 3초가요. 이것이 오래 안갑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내가 어떤 일을 저지르고 어떻게 하든 그 모든 것은 이런 행동을 통해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십자가 사건의 효력 때문에 내가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나는 피 뿌림 때문에 용서받았음. 아, 나는 곤고한 사람이었는데 내가 예수님 안에서 찬송하리로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두 번 다시 정죄함이 없는 죄라고 지적하는 정죄함이 없는데, 그 이유는 뭐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나 같은 죄 있는 모양으로 보내서 나한테 있는 그 모든 죄를 죄 있는 모양으로 오신 예수님께 대납시켜서, 그분한테 다 넘겨서 그분이 앞서서 처리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는 그런 상태가 나임을, 그 증거물이 나임을 주님께서는 나로부터 지금 존재하고 있다. 라고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극장에 가는데 앞에 서서 어른이, 여기 애 두 명에다, 어른 하나, 나하고 네 사람 얼마입니까? 예, 만 팔천 원입니다. 그래서 입장료를 냈는데, 저 뒤에 있는 자기 딸이 여기 애 하난데 얼마죠? 앞에 있는 분이 다 냈습니다. 글쎄, 나 돈 있단 말입니다. 나 돈 있는데 얼맙니까? 앞에 분이 냈다니까? 글쎄, 나도 돈 있어요. 누구 인격을 모독하나? 나의 법 실천력을 무시하나? 돈 있단 말이야.

그것은 무엇입니까? 앞에 분, 아버지의 뒤통수를 발로 차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 아버지 쓸데없는 소리합니까? 내가 착해질 수 있는데 왜 앞에서 대속을 다 해가지고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의인이 되고, 아무것도 안 해도 왜 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 씨 되게 무시하나? 뒤에서 발로 차는 거예요.

그 모독이 뭐냐? 성화해야 구원 받고, 십일조 해야 구원 받고, 주일 성수해야 구원받고, 교회지어야 구원받고, 목사한테 순종해야 구원받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는 적그리스도적인 발언입니다. 십자가를 가리는 적그리스도, 비복음적인, 반복음적인 아예 악마가 외치는 소리죠.

왜 그런 짓이 나오느냐 하면은, 왜 복음을 모르는 목사들이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면은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이용하자는 거예요. 당신들은 왜 교회에 왔어요? 나쁜 짓을 해서 가정에 우환이 생겼습니까? 아아, 착한 일을 하면 복줄 거야라고 계산했죠? 그러니까 그 계산을 제가 아니까 여러분의 심보를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절에 다녔습니다. 이제 교회로 바꿔보세요. 교회를 바꾸시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여러분들은 교회를 다녔다, 예수 믿었다는 착한 일했기 때문에 착한 일에 대한 후한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고부간의 갈등, 애가 성적이 갑자기 떨어진다, 이유없이 머리가 아프다, 열 가지의 모든 어려움, 이사 날자는 언제냐, 혼인빨은 되느냐 이런 문제들을 여러분들이 복 받게 될 겁니다. 간증집회, 차범근이 나오고, 김제동의 엄마 나오고, 이 사람은 김제동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나, 김제동이 떴잖아요. 에에에 웃으면서 떴잖아요. 김제동의 엄마 나오고, 간증집회하고, 한일전 기도해서 한 골 넣고, 그런 인간들 쭉 해가지고, 아, 나도 목사 시키는 대로 법 지키면 복 받겠구나.

이 전부가 뭐냐 하면 속죄 되어야 할 이유를 십자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악적인 개념에서 찾고자 하기 때문에 목사는 그걸 이용해서 돈 뜯어먹고. 죽이 맞지요. 잘 맞지요, 죽이. 그러면 왜 그 교인들이 십자가 복음 이해 못하느냐?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그 부활의 증거물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남아 있는 것은 이 두 가지가 남아 있거든요. 이 두 가지는 아까 프로이드 이론에 사용되지요. 그러니까 프로이드에 의하면 사람은 착해야 되는데 착한 자에게는 상이 주어지고, 나쁜 짓 한 자에게는 벌이 주어진다 이 말이죠. 지금 내 가정환경이나 내 성장과정에서 내 뜻대로 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꼬이니까 이걸 벌 받은 걸로 보는 겁니다. 벌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니까 이 벌 받은 것은 착하면 이것이 상쇄가 되겠지요. 상쇄가 되기 때문에 이왕 착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종교가들에게 자문을 받아서 이제부터는 나쁜 행동을 버리고, 술, 담배를 끊어버리고 착한 사람이 될 때는 따라서 그동안 놓쳐버린 모든 축복을 한꺼번에 회수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을 칸트는 엄청나게 공격한 것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순수한 실천이성에서 바르게 살아야 될 것을 자기 이기적인 야망과 행복과 어떤 이득을 위해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의 경험상 자기 일방적으로 착하다, 그르다를 자기 살아온 경험상 재조립하는, 재구성하는 일방적인 착오의 착각들의 연속일 뿐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칸트한테 박수 한 번 쳐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남들 보기에 악한데 본인은 이 정도만 해도 선하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선과 악이 어떻게 구분되느냐 하면, 자기가 살아온 자기 나름대로의 폐쇄된 성장과정에서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것에요. 범죄 재구성이 아니고 선과 악의 재구성입니다. 지난 여름에 김광석의 노래 한 번 들었지요. 김광석이 1월 6일 돌아가셨습니다. 10주년 되었어요. 그립다 김광석, 보고 싶다 김광석, 김광석은 살아있다. 뭐, 온갖 것이 다 나오는데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왜 자꾸 서른 살에서 멀어지느냐, 그 사람은 서른 살에서 정체되었어요. 서른 살을 고비로 보고 서른 살에서 내려가면, 실제로 죽은 것은 서른 살에 죽었는가, 서른두 살에 죽었어요. 서른 살에서 멀어지는 것을 마치 행복을 놓친 것으로 보는 거예요. 그 사람의 인식관은 뭐냐, 서른 살에서 스톱된 겁니다.

몇 십 년 전에 독일 사람인지 세계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이 있어요.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 사람이 지은 책 중에 착은 북이라고 있어요. 애가 크지를 않아요. 예~ 양철북? 계시가 또 달라지는데. 양철북인데 애가 크지를 않아요. 크지를 않고, 항상 어린아이인데 그 어린아이가 이 세상 모든 권력자들의 위선과 기만을 지적할 수 있는 살아있는 천사처럼 그렇게 묘사하는 것이 그 소설의 테마입니다. 소위 기성세대의 오만과 가식적인 모습들, 정략적인 행동을 하면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는 핑계되는 그 모습. 귄터 그라스

서른 살이 이상적이에요. 뭔가 이상적인 것, 환타지한 이상적인 것이 있다는 자체가 이 사람은 자기 본색을 지금 숨기고 있다는 겁니다. 공중에 나는 새가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것을 손에다가 쥐어 보세요. 똥 싸지요, 더럽지요. 그것이 공중에 멀찍이 있을 때는 그렇게 아름다워요. 눈 오면 생각나는 동화 가운데서 성냥팔이 소녀 있잖아요.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어떤 집에 케이크에 불 켜 놓고, 하하 웃고 그런다고요. 그런데 애는 벌벌 떨고 있잖아요. 왜 나는 무슨 팔자로 태어나서 저처럼 웃음이 없고 나는 슬프냐.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막상 그 아이가 그 집에 살아보지, 그 웃음이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가정이 웃은 것은 그때 곗돈 타가지고 그래요.

어떤 집에도 웃음이란 계속되지 않습니다. 물론 코미디할 때는 자꾸 웃겠지만. 놀랍게도 웃음은 깊은 절망이 있었기에 비로소 나올 수 있는 것이 웃음이에요. 깊은 절망. 그래도 목사님, 우리는 절망이 있는데 웃음이 없어요. 아직 절망을 덜해서 그래요. 더 깊은 절망이 있어야 웃음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상적인 것을 나의 본질로 보는 거예요. 이상적인 것을 그리워하고, 참된 선을 그리워한다고 내가 곧 참된 선한 자라고 일치시키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인간은.

그런데 이것이 언제 깨지냐 하면 배고플 때, 집안에 돈 없을 때. 집안에 돈 없을 때에요, 음악, 예술 다 사치스런 거예요. 음악, 예술, 함평수련회 다 배부른 소리에요. 집에 부도나 보세요, 여기 오는가? 안 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자기의 한 쪽 면을, 한 쪽 면이란, 말이 안돼요. 두 개의 자아에요, 숨기면서 골치 아픈 게 뭐냐 하면 자아가 분열되어서, 주체가 분열되어서 선을 향하는 선 주체와 악 주체가 있는데, 더 골치 아픈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의 주체가 등장하면 다른 주체는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주체가 마치 나와 일치되는 줄 압니다.

그때 어떤 예상치 못한 사건이 나면 이 주체가 깨져버리죠. 깨질 때 분열을 일으키면서 그동안 잠자고 잇던 제2의 주체가 대신해서 등장하지요. IMF가 터지고 나서 자살하려다가 그래도 가족이 있다면 나는 아직 살 만한 능력이 있어. 라고 다른 주체를 대체하지요, 그럼 IMF 터지기 전에 진작 그렇게 하지, 꼭 터지고 난 다음에 그렇게 한다니까요. 그리고 난 뒤 좀 장사 잘 되면 갑자기 가족만 있어도 좋지, 그것 버립니다. 역시 나라는 것은 그 정도로 만족 안 해. 나는 더 큰 사업을 벌이도록 주께서 역사해 주셨어. 이것이 또 다른 것을 삼아요. 가족이 어떻다는 것, 치워버리고.

얼마 전에 kbs2에서 저는 TV 많이 안 봅니다만, 역도산이라는 영화를 했어요. 역도산할 때 리끼도산 그 인간이 어려울 때 일본 아내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습니까? 나중에 미국 가서 성공하고 난 뒤에 자기 아내를 헌 개 취급해서 버렸잖아요. 끝까지 자기의 수준에 맞는 여자를 내가 지금 와서 선택하고 싶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인간성이 사실은 어려울 때도 이미 잠재돼 있었어요. 있었는데 성공이라는 그 계기를 맞이하니까 그 무성진 껍데기가 벗겨지면서 자기의 본래의 악성이 도출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나는 때려 죽여도 도둑질 안한다하는 것은 그것은 뭐냐 도둑질하는 기회를 못 만났기 때문에 도둑질 할 수밖에 없는 자아가 아직 생색을 낼 때가 안 돼서 그래요. 육이오사변과 같은 전쟁이 터지고 하면 그때는 짐승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짐승입니다. 우린 친구아이가라고 좋아하다가. 우리는 서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해놓고는 그런데 보증 서 달라면 다 도망가 버리죠. 동창회 나오는 것은 전부 다 보증 설 사람 대상 구하려고.

그래서 이제 어려운 것 해봅시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증거가 부활인데 부활은 이미 십자가 사건을 떠날 수 없고 여기에 한 파트로서 부활이 삐져나온 거예요. 십자가 상황이 부활의 면면으로 떨어져 나오는데 십자가 사건은 눈에 보이는 사건이고, 부활은 눈에 안 보입니다. 눈에 보이질 않기 때문에 십자가의 의미를 바라보고 아, 내가 죄인이구나 알았다고 해서 성도가 아닙니다.

이것이 어려워요. 나는 십자가가 내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나는 피 뿌림을 구원받는 것을 믿어. 라고 해서 그 사람이 성도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부활의 영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십자가를 이해해 버리면 이 십자가를 알았다는 것이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 아까 두개의 주체 가운데서 선한 주체에 하나의 업적으로 실적으로 저축이 돼요. 나, 하나님, 저 착하지요. 하나님께서 너 뭐 착한데. 십자가 믿어 줬잖아요. 십자가 믿고 예수 이름 부르면 구원 얻는다면서요. 내 친구는 안 믿는데 교회 나와서 오늘부터 나 십자가 믿기로 했어요. 저 착하지요. 그러니까 이 주체가 봉합되고 없어 사라진 것이 아니고, 이 새로운 착한 일을 쭉 해왔는데 그 중에 하나가 더 예수님 믿어주고, 하나님 믿어주고, 하나님은 창조자십니다, 사도신경 다 외우고, 주기도문 다 외우고, 학습세례 받고, 집사되고, 장로되고, 목사되고 이것이 선한 실적 가운데 하나 들어갑니다.

그래서 위선적인 것은 여전히 있지요. 그리고 하는 말이 이렇게 가정 경제상태가 나아지면 아무 일 없는데 갑자기 불교에서 기독교로 바꿔가지고 예수 믿었는데 갑자기 집안에 우환이 들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예수 믿고, 목사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집안에 우환이 생깁니까? 라고 대들지요. 예수 믿어주는 착한 일을 했는데 왜 착한 일을 한 보상이 약속대로 안 나타납니까? 주님은 부도수표입니까? 왜 간증하는 다른 집사님은 복 받았다는데 왜 그런 복이 우리 집에는 안 옵니까? 나 이제 교회 그만 다닐까보다. 나는 이제 그만 속을래.

경기도지사 있지요? 이름이 뭡니까? 손학규,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황우석 교수한테 끝까지 속아볼 랍니다. 그 말 하기 전에 제가 사석에 이런 말을 했죠. 지금 돈이 있다면 황우석 교수에게 투자해라. 1000억 있다면 1000억만 투자해라. 황우석이 밟힐 때 지금이 호기니 지금 투자해라. 내 말 들었는지 2000명 더 증가했다 하지요. 손학규 지사는 황우석 교수에게 끝까지 속아 볼랍니다. 끝까지. 그것 경기도에서 투자했거든요. 해소 절대 안한 답니다. 투자 더 할 거예요. 그 사람은 과학이 뭔질 아는 거예요. 과학은 천 번의 시행착오가 없으면 과학이 결정될 수가 없습니다. 시행착오 중에 하나가 이런 사건이에요. 앞으로 999번 더 해야 돼요. 황우석 교수는. 이것이 과학이에요. 지난 과학의 발전이 다 그렇게 해서 된 겁니다. 다 미친 소리 듣고, 발명가들 보세요. 집안 다 말아 먹었어요. 발명가들 중에 돈 번 사람들 없습니다. 에디슨 있잖아요? 에디슨의 논문의 2/3가 남의 겁니다. 컨닝한 거예요. 자기 건 몇 개 안돼. 에디슨이 천 몇 개 했는데 그중에 2/3가 남의 거예요. 고소당하고, 고발당하고, 우사 당했습니다. 나중에 죽을 때 돈 다 날려 버렸어요. 그 위대한 에디슨이.

교회 다니고, 목사 말 듣고, 하나님 앞에 예수 믿고 창조주인 것을 고백하고 요한 계시록까지 몽땅 믿었다, 이것이 선한 실적 가운데 포함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만약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항상 이걸 근거로 들이댑니다.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날 배반했습니다. 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는데 주님은 날 배반했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렇게 있다는 것은 아직도 부활이라는 것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놀랍게도 십자가 믿고, 믿었지, 이젠 부활을 믿어야지. 라고 부활에 대해서 부활이 주어지는 이런 갭이 사라지고 예수님 때문에 존재한다는 그것은 인간적인 힘으로 절대로 부활을 그것을 그대로 현실화시킬 수 없다는, 이것이. 그래서 부활다운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택한 자에게만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제 십자가 믿었으니까 부활까지 믿어야지, 이것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인식론에서 지나간 사건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가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난중일기에 나왔다, 나는 믿습니다, 언제든지 믿습니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지금도 살아있다, 미쳤나, 지금 살아? 죽었는데.

부활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을 잡아, 믿어라 이것이 아니고 지금 살아있어서 너에게 이 두 가지의 갭을 죽이는 일을 실제로 줬음을 네가 믿어라. 이렇게 되거든요. 이것은 실제로 살아있단 말이죠. 십자가 사건은 하나의 과거의 단회적 사건이지만 그 증거는 역사 끝날 때까지 계속 가요.

미리 이야기합니다만 베드로후서 3장 한 번 봅시다. 아까 몇 시부터 시작했지요, 전 시간을 지킵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시간을 지켜요.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산 것 같이 살라는 겁니다.

우리 집사님 ( )이와 몇 년 살았습니까? 20년 살았지요. 그럼 계산을 해야 돼요. 하루가 천년이니까 365*1000=365000년이지요. 365000*20년, 이건 엄청납니다. 이제 헤어져도 괜찮습니다. 이제 그만 사셔도 무리 없어요.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산 것 다 한꺼번에 사는 것처럼 살아라.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도에게 하루라 하는 것은 천년에서 일어난 일을 한꺼번에 하루에 다 일어나게 할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런데 집사님이 이혼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그 다음에 나옵니다. 천년을 하루같이, 그러니까 20년을 살았으니까 불과 15분 어치 산거예요. 더 사세요. 하루 정도 살고 헤어져야지. 15분 정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아무리 길게 살아도 주님 앞에서는 길게 산 게 아니에요. 하루치, 어느 인간이 천년을 삽니까? 최고 장수하는 것도 천년을 못 넘기는데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하루살이에 불과해요. 하루살이가 자기가 뭐 진리를 안다고, 인간에 대해서 안다고, 자기가 뭐 안다고. 샛별이 떠올라야 알지 자기 능력으로 어떻게 남의 사정 다 알고, 자기 사정 다 압니까? 기껏 하루밖에 못살 인간이.

그러니까 베드로전후서의 이 신학 실력은 사도 바울을 능가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피 뿌림 받아서 한다는 것이 어디서 나오냐면 바로 히브리서에 나오잖아요. 히브리서 7장에 보면 "피뿌림이 없은즉 사함이 용서함이 없다" 이 말이죠. 베드로가 이미 그 정도는 꿰뚫고 다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의 편지들도 나의 이 편지처럼 영적으로 풀어야 풀리지, 사사로이 풀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이미 베드로가 사도 바울이 어떤 이야기한 것을 다 알고, 다 동의하고 있고 그 정도는 기존 교회에서 성도라면 다 알아 먹는다고 생각하고, 그 위에다가 이 험악한 환난의 시대에서 그럼 어떻게 또 살아야 하는가를 추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책이냐 말이죠. 우리의 기본 모든 것을 모두 초월하자.

조금만 더하고 쉽시다.

부활이라는 것은 나는 왜 악하냐, 나는 왜 선하냐, 곤고하냐? 라고 고백할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위치에 있던지, 어떤 자세에 있던지 간에 어떤 것도 다 예수님의 부활했음, 그것도 그냥 부활했음이 아니라 아까 십자가에서 두 번째 한 것이 뭡니까? 속죄 끝냈음, 속죄 완료했음, 피 뿌림으로써 죄 없어졌음을 증거하는 증거용으로 지금 살아있다. 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능력은 부활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길어요. 그런데 안 길어도 너무 섭섭해 하지 마세요. 1초라도 백년이니. 1초해도 백년짜리고, 10년 해도 1초짜리가 될 수 있어요.

어떤 분이 이런 애기해요. 한경직 목사, 그 유명한 목사가 죽을 때 그 옆에 수종드는 권사님이 목사님 성경보시고, 찬송가 한 번 해보세요. 한경직 목사가 아직도 그런 것 믿나, 아직도 그런 것 믿어. 갖다 버려. 아주 훌륭한 고백을 했어요.

글쎄요. 그걸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연세가 많아 가지고, 인간은 어떤 본성이 있다, 하나님이 말씀 들어오기만 해봐라, 내가 차 버린다는 악한 감정, 신에 대한 반발성,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 하나님이라면 진짜 자다가도 듣기 싫은 귀 막고 싶은 그러한 충동, 그 충동이 그동안 잘 걸러 냈었는데 그동안 윤리, 도덕 훌륭한 성격 때문에 잘 억누르고 있었는데 그 억누름이 노후 되어가지고 스프링이 고장나 버려서 아직 그런 것 아직도 믿나, 미쳤나 집어쳐라. 그래서 내팽겨 칠 수 있는데 그것 가지고 천당갔다, 지옥갔다 할 수 없고 평소에 그분의 그 됨됨이를 봐야 되는데 저는 평소의 됨됨이를 봐도 믿지를 못하겠어요. 도대체 신자인지 구분이 잘 안돼요.

저도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많이 듣고 하지만 설교 들을 때마다 이 사람 신자아닐 것 같은 느낌이 오히려 더 많이 들어요. 돌아가신 분이지만.

저도 내가 죽고 난 뒤 이근호, 그 사람 신자 아니지 싶어. ㅎㅎㅎㅎ.
마찬가지로 할 수 있잖아요. 이상한 소리했는데 쓸데없이.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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