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6강

아빠와 함께 2013. 8. 6. 16:21

6강

인간은 장래의 일을 모르지요. 그러면 끊어진 거예요. 끊어졌으면 규격화 된 것이고, 사물화 된 것입니다. 사물화 된 인간이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면, 신비로운 힘을 은근히 기대합니다. 비록 나는 인간이지만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는데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면, 하나님은 “벌써 너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시겠지요.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인간에 대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인간을 통해서’라고 하면, 인간이 하나님 일에 파트너로 가담이 되었기에 천하의 하나님도 인간 없이는 일 못한다는 식이 됩니다. 이 논리에 의하면 가룟 유다는 천국의 1등 공신입니다. 왜냐? 주님 십자가 지시는데 가룟 유다만큼 적극적으로 봉사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임해서 주님을 팔았다.’는 말은 쉽습니다. 가룟 유다는 인간이고, 이 인간에게 사단이 임할 때 사람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하면, 사단은 영물인데 영물이 인간에게 임할 때 어떤 논리적 과정을 거쳐서 되는지 그것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임해서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겼다고 합니다.

영물(사단)이 인간에게 접촉해서 작용하는 논리적 방식을 안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접촉해서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기에 내가 주님을 소유할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되지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나를 안 도와주고는 못 배기게 만든 그 메커니즘의 아이디어는 구약에서 이미 실험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사울 왕이 무당을 찾아 간 거예요.

그리고 사울 왕 이전에 에봇 입은 제사장을 찾아갔고, 제사장 복장에 주머니가 있는데 우림과 둠밈이라는 두 물체로 주사위처럼 던져서 “내일이면 비가 내릴 것입니다.” 라든지 “이번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이런 이야기를 제사장이 한단 말이지요. 이것은 제사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정리를 해 봅시다. ‘우리나라에 제사장이 있다는 말은 에봇이 있다는 말이고, 우림과 둠밈이 있다는 말이고, 이것이 있으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어 있고, 언약궤도 우리에게 있으니까 승리한다.’ 이 말은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틀렸지요.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믿을 구석은 이것밖에 없어요.

맞고 안 맞고는 뒷전이고 있는 것을 활용해야 되지 않습니까? 야고보서 5장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그러면 교회에서 최고 의인은 누굽니까? 목사는 교인들의 추천으로 최고 의롭다는 평가를 받고 그 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교회 내에서는 목사가 제일 기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고 하니까 교회 문제가 생길 때 다른 사람이 나서는 것보다는 목사가 나서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더 잘 문제가 해결 되겠지요?

여기에서 ‘의인’은 누구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믿는 자에게 핍박받는 자가 의인입니다. 인간은 물질화 된 자기 자신에게 어떤 신비로운 힘이 주어질 것을 원하는 것은 구약 때부터 내려오는 우상 숭배의 전형적인 양상입니다. 내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져야 되고,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신앙적인 영웅으로 받들게 되고, 그러면 나는 그 단체에서 권력자의 위치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권력을 쥐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능력은 지배권을 가진 나로 인하여 자동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자로 머무는 것.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울 왕으로 하여금 다윗을 쫓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미 사무엘 이후에 하나님의 언약은 사울에서 다윗 쪽으로 넘어간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요구하는 순간부터 모세 율법의 영향력은 사라진 거예요. 제사장이 있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늘 승리했습니까? 아니죠. 그러나 그들은 승리할 것이라고 착각했어요. 왜 이런 착각을 했는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았기에 자신들은 그 언약에 따라 복을 받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언약은 복만 오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오는데(순종하면 복, 불순종은 저주인데) 그들은 저주를 지워버려요. 언약에 복종할 생각은 않고 언약을 자신들을 위해 이용할 생각을 했기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잘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이 의식구조가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미가,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등의 선지자들이 그 당시 거짓 선지자를 고발할 때 고발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이라고 믿는 이 거짓 선지자들아,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면 축복만 신비로운 것입니까? 축복만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망하게 한다는 것도 신비로운 거죠. 하여튼 신비로운 것이 등장한다면 우리는 감지덕지해야지요. 그러면 결론을 맺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하시는데 기쁘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해야 언약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이지요. 이런 발상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내가 이 교회에 있기에 다른 교회는 다 망해도 우리교회는 부흥해야 돼요. 권력의 속성이 뭐냐 하면, 남아도는 힘은 반드시 남을 정복하는데 소비합니다. 모든 기업체, 학교, 교회, 국가 등 모든 존재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멈추지 않고 정복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거예요. 자전거는 달려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속성에 의해서 핍박 받고 억눌린 모습으로 언약이 오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 언약의 진수입니다. 고통, 희생, 핍박, 죽음 이런 것으로 이 지상에 카이로스를 양탄자처럼 깔아놓고 다윗 언약의 진수를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 언약의 진수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저주의 능력’입니다.

왜 저주 받는가?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바탕이기 때문에 ‘정녕 죽으리라.’는 그 죽음을 실천에 옮기는 실천 의지가 언약을 통해서 저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시편 22편 1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누구에게 당할 때 이런 고백이 나왔습니까? 사울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다윗 편을 들지 말고 사울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사울은 왜 다윗을 핍박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사울을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울을 욕할 입장이 못 됩니다. 언약이 왔으면 이 언약은 축복을 남길 것이라는 오해가 실제로 언약의 중심체인 다윗을 핍박하게 만든 거예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누가 제일 핍박합니까? 구원 받는 우리가 제일 핍박하고 있어요. 그런 모습은 시장터에서 볼 수 있는데, 엄마가 아이와 함께 시장에 가면 아이는 몸에 해로운 불량식품이나 조잡한 장난감을 사달라고 엄마에게 조르고, 엄마가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엄마의 치마를 잡아당기고 떼를 쓰고 우는데, 그 모습이 우리가 주님께 끌려가면서 보이는 반응입니다.

우리가 “주여, 축복 주시옵소서.”하고 악을 쓰면, 주님은 “너 천국 가서 보자. 그 때는 면류관도 반납해야 돼.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제가 전하는 복음에 반감을 가진 자들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주님의 형상을 본받자’는 것은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의 주장인데 개혁주의를 이단시하는 십자가마을에서도 이런 주장을 하나?”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면, 구배라는 것이 있습니다. 수정체가 자궁 속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형성될 때 어느 자리에서 두뇌가 자라면서 귀의 자리, 코의 자리가 정해지는 것처럼, 혹은 습곡(지층이 물결 모양으로 주름이 지는 현상)처럼 사막이 꿈틀거리듯이 스스로 주름이 잡혀서 엉겨 붙고 내부적으로 감기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개혁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내가 있고 하나님의 형상이 모델로 있는데, 내가 그 하나님의 형상을 열심히 본받으면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모습 자체가 형상화 되는데, 내부적으로 감기고 스스로 잉태되는데 그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외부에 믿은 좋은 사람을 모방하면 그것이 형상인줄 알아요.

주님을 본받고 주님의 형상을 닮는 것은 우리를 뭉개버린다는 뜻입니다. “주님, 코는 이 자리고, 귀는 이 자리입니다.”라고 하면, 주님은 “나는 네 말 안 들어. 내가 알아서 만들 거야.”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묵살하고 주님이 스스로 꿈틀거리다보면 그것이 주님의 소자가 됩니다.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고 하실 때 누가 의아해 합니까? 주의 오른 편에 선 사람들이죠. “제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했습니까?”라는 반응이 주님의 형상에 합당한, 구배되는, 주름 잡히고 형상이 잡히는 그런 과정 속에 있는 겁니다.

성도: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 네가 했어!

성도: 저는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네가 했다니까.

남들이 들으면 정말 이상한 말다툼입니다. 괴상망측한 갈등이지요. 자신이 봉사했다고 생색을 내는 마당에서 “저는 봉사한 적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싫어한 바 되었습니다.” 이런 싫어한 바 된 자가 구배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다니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가는 모습.

그런데 당사자는 십자가 질 의향도 없고, 남들처럼 살고 싶고, 돈 많이 주는 회사에 다니고 싶고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은데, 그것들이 스스로 감기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조치하십니다. 여기에는 인력이 가미되지 않습니다. 교육과 양육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꾸중하시는 과정에서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형상으로 되어가는 중입니다.

민수기 15장 32~35절을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안식에 나무를 한 사람에 대해서 전도서 5장 12절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전도서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까? 없지요. 전도서에는 언약이 없습니다. 언약이 없다는 말은 구원의 통로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 허무에 갇혀 있습니다.

왜 언약이 없는가 하면, 전도서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아요.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면 사람은 스냅 사진처럼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마음껏 자신을 뽐내지요. 그런 흐름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는 반면 또 어떤 흐름이 있는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등장해서 집어넣는 심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율법, 언약이죠.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왕의 의미가 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제사장이 있었잖아요. 제사장이 있으므로 충분했습니다. 율법이 있으므로 충분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을 지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킵니까? 안식일 날 하루 쉬면서 제사 드리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의 취지를 알려면 반드시 안식일을 위반하는 사람이 출현해야 합니다. 위반하는 자가 생겨서 다른 사람들이 위반한 자에 대해서 어떻게 그 사람을 처리하는가를 분명히 하지 아니하면 자신이 안식일 지켰다고 믿는 사람들이 제대로 안식일을 지킨 것인지 아닌지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진리는 반드시 위반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진리라고 우기는 것은 지식인지 진리인지 분간이 안 돼요. 위반하는 자가 있어야 돼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는 우리가 예수 믿지 않는 경우의 현장에 자신이 예수 믿지 않는 태도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동안 믿는 것이 아니었음을 파악하는 가운데서 예수 믿게 하는 거예요.

말이 좀 이상하지요? ‘예수 믿지 않는 것을 통해서 예수 믿는다.’ 그러면 믿지 않는 주체는 누구며, 나중에 믿는다고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둘이 같은 사람이면 믿든지 안 믿든지 한 가지를 택해야 할 텐데 같은 사람인데 한 번은 믿는다고 하고 또 한 번은 믿지 않는다고 할 때 그러면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

이게 뭔가 하면, 존재가 아니고 발생입니다. 우리는 과정 속에 들어가는 거죠. 방앗간 기계에 고추를 넣습니다. 중간 과정에서 가루가 됩니다. 처음 들어갈 때 고추였지요? 그러면 중간 과정은 고추입니까, 고추 아닙니까? 고추지요. 기계를 통과해서 나중에는 고추입니까, 아닙니까? 고추지요. 같은 질의 고추가 통과하면서 형태가 가루로 바뀌지요.

이처럼 우리는 언약 안에 쥐포처럼 말려들어갑니다. 그리고 까불다가 물질화 되지요. 물질화 되면서 우상의 속성을 발휘합니다. 나는 비록 물질이지만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에 나에게서 놀라운 것이 나올 것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주의 일을 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결국 우상 숭배로 드러나면서 우리는 허무에 속하고 피의 용서가 우리를 통과하므로 우리는 천국 가는 백성이 된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런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율법은 어김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취지가 드러납니다. 안식일을 어긴 한 사람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안식일 어긴 사람이 2명 정도면 돌로 쳐 죽일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안식일 어긴 사람이 여러 명이면 그 사람들을 다 죽일 겁니까? 더 나가 봅시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50만 명인데 49만 명이 안식일에 나무를 했다면 1만 명이 49만 명을 다 죽일 겁니까? 죽이려 들다가 도로 죽임 당할 수 있습니다. 소수가 어떻게 다수를 공격합니까?

그래서 이 다수가 왕을 구하고, 왕이 등장하면 이것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긴다는 속성이 드러나고, 그 첫 번째 왕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사울이고, 이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과 비언약의 대변자로 등장한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 정신도 모르고 무조건 이스라엘 나라 잘되면 그것으로 흡족해 합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는 승리하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비참하게 깨어지지요. 언약은 인간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 소관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믿음 없다고 해서 언약이 중단되거나 왜곡 될 수 없지요. 따라서 언약을 마음껏 위반하게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진짜 언약적인 사람(다윗)을 등장시켜서 언약도 모르고 언약을 위반하는 자에게 학대받고 핍박받고 죽임 당하게 해서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런 탄식을 하면서 도망치는데, 이런 과정 전부가 주님이 언약을 진행시키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교회에 적용시켜 봅시다. 당회장 목사가 복음만 성실히 전했습니다. 교인들도 목사의 성실함을 다 인정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부목사가 복음만 전하는 설교를 하면서도 그 깊이가 담임목사보다 더 깊고 좋은 설교를 합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담임목사가 부목사를 조용히 부릅니다. “설교 참 좋습니다. 우리 같이 교회를 위해 봉사합시다.” 그런데 이런 말 자체가 잘못입니다. 왜냐? 성경에 보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했기에 부목사가 교회에서 설교하면 되는데 왜 담임목사가 부목사에게 회유책을 씁니까? 서로 자가 역할을 하면서 더 깊이 복음을 설교하는 분이 설교하면 되지 뭐가 필요합니까?

담임 목사가 부목사에게 ‘같이 잘해보자’는 말은 새겨들어야 합니다. “너는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내 말 들어야 해.” 이런 뜻인데, 바보같이 ‘함께 잘해보자’고 한 줄 착각했지요. 나중에 보니까 담임 목사는 천천이고, 부목사는 만만이라. 그 이후 담임목사의 태도는 어떤 것입니까? 부목사를 짓밟는 것이지요. 설교 기회도 빼앗고, 교인들과 접촉할 기회도 줄이고, 뒤에서 흠담하고 --

성경이 이런 생생한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갑(甲)이 되고, 내가 주인공이 된 이 현장이 내가 사울임을 폭로시키는 현장이고, 우리는 다시 누비이불,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그 은혜를 다시 한 번 보여주는 현장으로 일부러 그렇게 하나님이 깔아놓은 거예요.

“네가 복음을 알아? 네보다 더 깊이 복음을 아는 사람이 나타나면 너의 악마적인 본성이 드러나고 네는 사울이 되어 그 사람을 핍박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주님이 준비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다윗이죠.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구원 받지요? 핍박 받아서 구원 받습니까? 핍박 받는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부목사가 담임목사에게 핍박 받으면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너무 의로운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 내 편이고 담임목사를 원수로 취급한다고 잘못 생각하도록 부목사를 유도해요. 복잡합니다. 그 부목사가 나중에 담임목사가 되어 자기보다 더 똑똑한 부목사가 오면 자신이 당한 일을 부목사에게 가합니다.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 됩니다. 핍박 받는다고, 악인에게 쫓겨 다닌다고 그것을 근거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허구에서 탈출하려는 육적 본능의 발산일 뿐입니다. 건전하고 괜찮은 것, 복음적인 것을 내가 소유함으로써 그것으로 구원 받겠다고 나섭니다.

다윗은 상대를 핍박하는 정도가 아니고 죽였어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장군을 죽였지요. 그러면서 드디어 다윗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악한 일을 했지만 죄라는 것을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어요. 우리 인생은 변곡점들의 연속입니다. 그 인생이 어떻게 구원 받는가? 다음에 무슨 변곡점 사건이 일어나야 구원 받는가? 주님의 방법은 변곡점의 연속인 우리 인생에 구멍을 뚫습니다.

구멍을 뚫어서 우리 인생 자체가 헛된 것임을 폭로시킵니다. “내가 이런 고생을 했습니다.”라는 이것이 3차원이 아니라 2차원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고생했으니까 점수 좀 후하게 주세요.”라고 할 때, 여기에 구멍을 뚫는데, 구멍 뚫는 방법이 뭔가 하면, 우리로 인하여 핍박받는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바로 예수님을 죽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지요.

우리는 구멍을 통해서 비로소 ‘나쁜 사람’에서 ‘죄’가 되는 거예요. 전도서에는 ‘악’은 있지만 ‘죄’는 없어요. 죄를 모르면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죄를 알려면 율법이 와야 되는데, 율법은 사울 왕 시대에 이미 그 시효가 끝났습니다. 이제 에봇을 가진 자가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로 자리 잡게 됩니다. 왜 그런가? 안식일에 나무 한 사람을 죽였잖아요. 그것이 계속 발전되면 그 후부터는 그런 사람들을 죽일 수 없고, 그 후에는 권력 싸움에 말려듭니다.

누가 안식일을 어겼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힘을 갖고 있는가? 힘 싸움에 말려듭니다. 다윗이 핍박 받고 쫓겨 다닌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었지요. 겨우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부랑인들 400명 정도였어요. 그런데 에봇은 가진 아비아달이 다윗을 따릅니다. 그러면 사울은 에봇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어요.

제가 빨리 지나가서 어리둥절한 것 같은데 다시 해 봅시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주시는데, 율법 중심에 제사장이 있어요. 이 제사장에 제사를 드리면서 피를 냅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면 제사장 있으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나라가 든든하잖아요. 그런데 이 제사장 나라가 이방 나라에 언약궤를 빼앗깁니다. 이유가 뭡니까?

언약궤 있고, 제사 드리면 그것으로 된 것이잖아요. 이게 제사장 나라의 모습이고 아무 문제없는데 하나님이 언약궤를 빼앗기게 했어요. 그럼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히브리서에 보면 이 제사장이 죄인이라고 했어요. 악인이 아니고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는 먼저 자기 죄를 위해서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제사장이 제사 드리기 전에 먼저 속죄제를 드린 제사장은 죄인입니까, 죄인 아닙니까? 역시 죄인이에요. 왜 죄인입니까? 성전에 주의 이름이 있잖아요. 주의 이름은 그 순간에 주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은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어요. 성전에서 ‘주의 이름을 믿습니다.’라는 말은 “내가 주님 이름을 믿으면 나에게 행운이 온다.”는 뜻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에 내가 참여해서 주의 이름의 변화와 더불어 변화하겠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미래에 등장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예수님과 제사장 중 누가 구세주입니까? 속죄제를 잘 드린 제사장이 구세주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구세주입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면 제사장이 제사 드린 것마저 죄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죄의 영역과 범위가 확대되는 효과를 모세 율법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아, 제사장이 제사 드리는 것도 죄구나. 제사장 자신이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속죄제를 드렸는데 드려도 그것이 죄구나.” 계속 죄라고 밀어붙여야 구체적으로 주의 이름이 등장할 때까지 이 땅에서는 죄가 유발됩니다. 유발되면서 제사장 임무와 왕의 임무가 실행되면서 사울 왕이 죄인 되고, 죄인에 의해서 핍박 받는 다윗이 등장하고, 다윗도 ‘주께만 범죄했다’고 시편 51편 4절에 나오지요.

주께만 범죄했다고 함으로써 다윗이 왕이 아니고 처음부터 왕은 하늘에 있었지요. 하늘에 있으면 사울이나 다윗이 필요 없지 않은가? 하늘의 왕은 죄가 무르익어 숙성되면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참여되는 그분이 진정한 왕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뭐가 되는가? 바로 허무의 절정. 진정한 허무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어요.

인간이 허무하다는 것은 헛되다는 정도가 아니고 진짜 허무는 죄와 결합되면서 죄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저주 받을 때 그것이 허무의 절정이고, 그것은 바로 무(無)고, 죽음인데 어떤 인간도 그 무와 죽음을 극복해서 구원으로 빠져나갈 자는 없습니다. 이제는 통로가 막힌 거예요.

막혔기 때문에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은 완전히 막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의 이름 앞에 설 때 우리는 그 앞에서 내 이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이 말은 어떤 신비로운 영험, 기적을 기대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입니다.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은 요구했습니다. “당신은 귀신을 쫓아내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데 우리 앞에서 시범을 보여 주세요.”라고. 그 때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요나의 이적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꼭 집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일어난다.” 이 말씀은 ‘따라오려면 따라와!’ 이런 뜻입니다.

‘내가 죽는데 내 죽음을 이해한 사람만이 진정한 기적을 맛본 사람이다.’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기도하실 때 따라온 제자들은 다 잤어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마음이 아무리 원하면 뭣합니까? 마음이 육신을 다스리지도 못하는데. 육신 약하면 전부 약한 거예요.

이 약한 육신을 가진 것은 제자들도 그렇지만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육신이 약해요. 안 아픈 곳이 없습니다. 온유와 화평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려해도 치통이 심하면 어쩔 수 없습니다. 이웃사랑을 하려 해도 두통이 심하면 안 됩니다. 몸이 안 따라주는데 무슨 온유와 화평이 나옵니까? 억지로 웃음 지으면 썩소(썩은 미소)가 나올 뿐입니다.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신비는 뭔가? “주여,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신비로움입니다. “저는 도저히 안 되는 구제불능의 존재입니다.” 이 고백,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것이 가장 영험한 고백이에요. “주여, 죽여주시옵소서.”

문제가 뭔가 하면 허무하기 때문에 신비로움과 신기함이 없습니다. 그것을 전도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에는 손톱만큼도 신비로운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약품을 사용했는지 완전히 탈색되어서 창백해 졌습니다. 전도서의 이야기가 다 창백합니다. 뭘 좀 했다 싶은데 헛되다고 합니다.

“네가 장래 일도 모른다. 부자 된 것도 헛된 거야.” 그러면 우리에게 어쩌란 것인가? ‘예루살렘 왕’이라는 개념은 유일하게 하나님과 통하는 개념입니다. 다윗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다윗이 있어야 다윗 언약이 성립됩니다. 다윗 언약이 성립되기 위해서 다윗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면 “내가 주께만 범죄했습니다.”고 해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 죄인을 누비이불처럼 언약이 와서 꿰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후 제사를 드리지요. 다윗이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모세 율법의 죄인의 대변자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왕이 백성의 대표자로 등장합니다. 이 왕이 죄인이 된 거예요.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온 나라가 죄인 된 것처럼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함으로 무려 7만 명이 죽지요. 그런데 다윗이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이 백성들이 공짜로 은혜를 받아서 구원을 받아요.

그러니까 다윗은 다윗 언약의 자리, 아이온에 숨겨져 있던 창세전의 사건 다윗의 자리를 만들면서 카이로스, 때가 형성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자리가 전도서에서는 예루살렘의 왕이라는 자리입니다. 그 예루살렘 왕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뭔가? 전도서, 잠언, 아가. 이것을 총괄해서 지혜라고 했고, 이 지혜를 누가 받아주는가 하면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받아주고 ‘내가 바로 그 지혜자다.’하면서 오신 거예요.

“내가 보여줄 기적은 죽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자가 볼 때 신비로운 능력인 것입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을 유지했던 세대 자체가 다 바람 잡는 것이고, 헛된 것이고, 죄악뿐이고,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헛되고 헛된 세상이다. 그 세상에 내가 투입했잖아. 내가 투입되었기에 내가 말한 헛되다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은 나와 더불어 헛되지 않는 영원한 나라에 간다.’는 것을 예수님이 인용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이 세상 자체가 전도서의 말씀처럼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라고 하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9:62).”고 하셨어요.

가족과 작별 인사하겠다는데 주님은 너무 인색한 것 같아요. 그러면 작별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만약 작별 인사도 안 하고 따르면 어떻습니까? 그것도 역시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왜냐? 작별 인사를 안 하고 오면 항상 마음속에 앙금이 남아요. “그 때 부모님께 인사정도는 했어야 하는 건데.” 이 마음이 늘 있어서 주님을 온전하게 따를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허무를 택하사 구원시키신다고 보면 됩니다. 그 작별 인사,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그 모습을 품고 있는 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가수 안치환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꿈을 품는 자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멘트를 치고 노래를 하는데, 그 사람은 이 세상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몰라요. 꿈을 품는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심판을 품은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전도서가 이야기하는 ‘허무를 품은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노래를 불렀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아저씨, 배는 왜 만듭니까?”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을 품고 살아가는, 십자가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 이 세대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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