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8강-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아빠와 함께 2013. 8. 6. 16:23

 

8강

 

전도서에서 되풀이해서 나오는 한 구절에 대해서 이 시간을 통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1장 9절에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라는 말씀입니다. 전도서 전체가 이 원리에 준해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해 아래는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한다면 새로운 것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미래에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새 것이 아니라면 옛것이 되겠는데, 옛것이라는 말은 새것이 있을 경우에만 성립되는 개념입니다. 전도서 12장 2절에 보면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라는 말씀이 있어요. ‘어둡기 전에’라는 말은 주님이 우리를 창고에 가두었다는 의미입니다. 곧 철거에 나설 창고 같은 곳에 우리를 집어넣고 “네가 그곳에서 한 번 몸부림 쳐봐라. 자식 낳아 키우면서 낙을 누리면서 살아봐라. 안 돼지? 그래 안 될 줄 알았어. 해 아래서는 안 되게 되어 있어.”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 오면 ‘복음’입니다.

 

그럼 전도서는 왜 필요합니까? 인류는 결국 해 아래서 실험 대상인데, 병원 실험실의 하얀 쥐와 같습니다. 암 치료 약을 실험하기 위해 한 쥐는 피부가 퉁퉁 붓게 만들어서 약물을 투입해 보고, 다른 쥐는 그냥 두고 실험이 끝나면 폐기처분합니다. 이처럼 우리를 특정 장소에 집어넣어 이곳에서 인간들의 반응을 관찰하는데, 하나님이 흰 가운을 입으시고 차트를 들고 기록하시는 겁니다.

 

열심히 공부한 인간이 있습니다. “공부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 줬나? 예, 알려 줬습니다. 공부하다 이제 과수원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농사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라. 예, 알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측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된 만남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착각으로 시작하는데, 교재에서는 이것을 ‘오해’라고 했어요. 교재 4페이지에 있네요. “인간은 평생 오해하면서 오해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해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해 아래 있다는 개념 자체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해를 우리가 있는 하늘에 영원히 변치 않는 것처럼 빛나게 만드는지 그 취지에 대해서 우리는 까맣게 몰랐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해를 봐라. 아, 눈부시네. 저 해는 대단하지? 예, 해 없이는 못살겠네요. 해를 섬기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집트는 BC 3000년경부터 태양신을 섬겼고, 태양신을 섬기는 풍습이 유럽의 문명 발상지인 그레타까지 이어져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보면 태양신이 아폴로입니다. 이것을 그리스에서는 제우스라고 합니다.

 

이처럼 신화들이 새끼를 까고 또 새끼를 까도 그 출발점에는 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해를 숭상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자라고 늙어 죽습니다. 내가 죽는 것처럼 해도 같이 죽으면 좋겠는데 해는 늘 청춘입니다. 1,000년을 지나도 해는 그대로에요.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에 ‘만약 신이 있다면 저와 같이 늘 젊음을 유지할 것인데, 저것이 바로 신이다.’

 

그런데 신께서 태양을 왜 만들었는가? 옛날 사람들은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은 전부 신의 영역에 속했다고 여깁니다. 자신이 다룰 수 없는 것. 해, 달, 별 등의 자연을 배치해놓고, 가뭄이나 태풍을 배치해놓고 자연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고 좋은 것인데 우리가 이 땅에서 살려면 자연의 말을 잘 듣고 순응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선조들도 이사할 때나 농사를 위해 씨를 뿌릴 때도 하늘에 절하고 하는 모든 것이 태양을 섬기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태양을 중심으로 4계절을 나누고 시간을 측정합니다. 대자연의 질서를 여기에서 뽑아내서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이 자연과 보조를 맞춰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이 대자연을 태극이라고 보고, 태극에서는 음과 양이 나왔고, 남자는 양, 여자는 음, 인간의 몸을 전부 음양의 구조 속에 집어넣어서 몸의 병은 자연과의 부조화에서 생긴 것이라고 여겨요. 여기에서 허준의 동의보감도 나오고 했지요. 자연과 조화를 맞추면 그나마 신에게 피해를 들보고 살아간다고 믿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러한 생각들을 했는데, 이에 대해 하나님은 “아니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 너희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몸으로 태어났어.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이것이 한계라는 거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가 자연과 조화롭게 살면 되지 무슨 한계가 있습니까?” 라고 반문할 때, 하나님이 “해 아래서”라 하셨어요.

 

그러면 태양의 운명과 같이 소멸되라고 실험실의 쥐처럼 하나님이 가두어 두신 거예요. 가두어 놓고 그들의 반응을 통해서 헛됨을 끄집어냅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했을까요? 우리를 약 올리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괴롭히면서 쾌감을 맛보는 성격을 소유하신 분입니까?

 

이런 환경이 조성되어야 여기서 준비된 진짜 십자가 지혜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철거하는 거예요. 해와 달도 철거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계시니까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습니다. 물을 퍼내고 힘껏 노를 저으며 살기 위해 애를 썼어요. 해 아래서.

 

풍랑과 폭풍 이 모두는 해 아래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도리는 뭡니까? 자연에 복종하고 순응해서 적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을 달래기 위해서 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섬깁니다. 폭풍의 신 이름은 ‘바알’입니다. 각 지역마다 신의 이름이 달라요. 북쪽에서는 바알이 폭풍의 신인데 남쪽 이스라엘로 오면 바알은 곡물의 신입니다.

 

모든 민족의 신은 ‘엘’입니다. ‘엘’ 밑에 실무자가 있는데 그것 바알이고, 그 바알이 아스다롯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데 이 자식들에 의해서 대지와 화합하는 겁니다. 이 바알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거예요. 이시스라는 이집트 신을 수입해서 명칭만 바꾸어서 신을 섬기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자꾸 우상들이 나오니까 현대인들이 보면서 “우리가 고대 신의 이름을 꼭 알아야 합니까? 이런 것 몰라도 구원 받는데, 그리고 우리는 그런 우상 안 섬기는데 왜 이런 이름을 자꾸 거론합니까?” 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우상 섬기는 것이 남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상의 명칭이 무엇으로 바뀌는가 하면 예수, 삼위일체로 바뀌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살기 위해서.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아부하고 적응하고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 이것은 구약 사람들이 바알 신을 섬기는 것과 똑같은 인식에서 나온 겁니다. 옛날 사람이나 오늘 우리나 같은 사람인데 다를 것이 뭐가 있겠어요. 신의 명칭을 바꾼다고 해서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들이 여기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전도서에서는 한 마디로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해 아래서’라고 되어 있어요. 로마서 8장 20절에 보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을 주님은 밥 먹고 살려고 머리 숙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굴복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대 자연에 순응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굴복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러면 이제 굴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이것은 너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누구의 뜻인가 하면, 굴복하라고 하나님이 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이마에서 땀이 흘러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고문 기계들. 제가 어느 날 설교 하면서 인생살이는 고문이라고 했는데, 사실 고문입니다. “네 죄를 알렸다!”하면서 주리를 트는 거예요. “제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입니까? 더 이상 어쩌란 말입니까? 교회에 헌금 했잖아요.” “네 죄를 깨달아라. 이놈아!” 하고 주리를 트는 거예요.

 

지금 저에게도 주님이 주리를 틀고 있습니다. 7개월째 우리 집 천장에서 쥐가 안 나가고 있어요. 미칠 지경입니다. 쥐약 값으로 5만원이 들어갔습니다. 제 아내가 시장에 갈 때마다 좋다는 쥐약은 다 사옵니다. 쥐약 종합 백화점입니다. 쥐가 웃고 있습니다. 쥐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내가 이 집에 들어온 것은 너희로 굴복케 하려 함이라.” 사단의 가시 같아요.

 

주께서 그렇게 굴복케 하시는 겁니다. 세상살이가 고문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고문 경관 같아요. 지리산에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제일 편한데 그곳에서는 돈이 안 생깁니다. 텃밭 가꾸면 1년에 30만원 소득정도 밖에 안 되는데 그것으로 어떻게 삽니까? 그렇다고 대도시에서 살려 하니까 주차문제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골치 아파요. 만날 보험 가입하라고 조르고, 초인종 눌러서 “도를 아십니까?”하고 시비를 걸고.

 

주님은 우리를 실험쥐로 사용하면서 주리를 틉니다. 이것이 자기의 뜻이 아니고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뜨거운 태양을 내리쪼이게 하신 하나님이 주리를 트는 거예요. 이게 언제 끝나는가 하면, 주님 재림하실 때 고문 기계 태양도 사라집니다. 다 같이 망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있어요.

 

천사가 와서 손을 보면 태양이고 별이고 달이고 다 떨어져요. 그동안 우리에게 주리를 틀었던 것이 다 떨어집니다. 그와 함께 우리는 폭삭 망하는 거예요. 풍선을 밟으면 빵 터지잖아요. 모든 것이 응축되면서 폭발하듯이 터집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준비된 일괄적인 심판에 대해서 먼저 하나님이 정보를 흘리지요. 그 정보를 왜 흘리는가 하면, 이스라엘에는 하늘나라와 아는 사람이 있어요. 인맥이 있다고요.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의 이름으로 오는 것은, 어떤 기능을 내포하기 위해서 이름이라고 했고, 이 기능은 하나님의 준비된 언약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숨어 계시고 드러나는 하나님으로써 ‘주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0편 1절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라고 하면서 주님을 두 분으로 세우시면서 둘 사이에 언약적인 관계의 효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또는 심판하시는 기능을 한 겁니다.

 

그러면 언약의 기능이 이스라엘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아니고 이스라엘 배후에 뭐가 있느냐 하면, 주님의 원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이걸 뱀이라고 이야기했고, 출애굽기 4장에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니까 그것이 뱀이 되었지요. 다시 잡으라고 해서 잡으니까 뱀이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팡이의 역할이 뭔가 하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과 관련된 기능을 위하여 모세는 자기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애굽에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으로 등장한 모세가 어느 날 반석을 침으로 말미암아 백성들 앞에 주의 이름보다도 자기의 이름을 ---

 

인간이 행동하게 되면 여기서 반드시 동질성이 생기고, 행동이 마감되면 여기서 시간이 생기면서 이것이 균질화 되면서 동질성이 생기고, 동질성은 행동하는 본인의 자아를 표현한다고 했지요. “내가 했어!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를 믿고 따라와.” 하는 순간 주의 이름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이름이 갖고 있는 기능입니다. 그러면 이 기능이 어떻게 실시되는가 하면, 백성들이 하나님의 원수와 싸워야 하는데 원수가 눈에 보이지를 않아요. 마귀는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원수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눈에 보이는 적군들을 하나님이 마주치도록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원수인 적군들을 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어요. ‘네피림’이란 말 들어봤습니까? 가나안 땅에 사는 거인족입니다. 그 네피림에 비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메뚜기 같아요. 이렇게 되면 게임은 끝났습니다. 동네 야구팀과 LA 다저스가 게임이 될 수가 없지요.

 

안 되는데 주님은 싸우라고 하십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안 되는 줄 알면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 “주의 이름이 알아서 처리하십니다.” 왜? 이 전쟁은 우리가 싸우는 전쟁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싸우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나의 원수와 사적인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만이 아시는 주의 원수, 세상 권세 잡은 자, 공중 권세 잡은 자와의 전쟁에 우리를 동원하신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하는 말이 “나의 씨름(전쟁)은 혈과 육이 아니고 공중 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이다.” 그래서 우리의 무기는 돈이나 권력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복음으로 무장하면서 이 세상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전쟁에 나서는 전사는 자기 생활에 매이지 않고, 일을 해도 할 바를 했을 뿐이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면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될 것이다.

 

사도바울은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야기를 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원수로 작용하는 국가가 오는 것을 모르고 지상의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해서 조공을 바치고 결혼 전략을 쓰면서 평화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결혼 전략은 한 마디로 인질 교환입니다.

 

솔로몬를 비롯한 많은 왕들이 주의 이름으로 전쟁해야 될 것을 본인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시도했고, 그 때마다 선지자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지자의 편이 얼마 안 되는데, 그가 외치는 것이 있습니다. “대 자연은 무너진다.” 천상회의에 참석한 선지자는 어떤 안목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부터 실험실의 쥐처럼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도록 자연에 갇혀 있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주의 이름이 우리를 방문했기에 주의 이름으로 원수를 처단하게 되면 우리는 주의 이름의 혜택을 입으면서 영원한 죄가 사라지고 복락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이사야에 나와요.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치며” 이런 구절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원수를 처단할 때 가능하단 말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돼요. 우리가 대 자연을 생각할 때는 에너지의 집합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가 다섯 가지의 힘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강력, 양력, 중력 등등. 그러기에 그 힘만 풀면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과 주의 원수가 전쟁하는 장으로 이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해와 달과 별은 어디에 종속되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언약, 주의 이름이 벌이는 전쟁과 보조를 맞추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주무시고 제자들은 항해를 하는데 갑자기 풍랑이 임합니다. 제자들은 자기 방식대로 열심히 노를 젓는데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어요.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다를 먼저 꾸짖었을까요, 제자들을 먼저 꾸짖었을까요? 진짜 주님이 제자를 사랑하신다면 바다를 먼저 꾸짖어야 해요. “어디 감히 내 제자들을 넘봐!” 제자들에게는 “너희들 많이 놀랐지? 내가 잠잔다고 몰랐다. 진작 깨우지. 이제는 걱정하지 마.” 이렇게 했을 텐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제자들을 먼저 꾸짖습니다.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 그 다음에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잠잠해 졌어요.

 

그 때 제자들이 하는 말이 “후유, 이제 살았다. 역시 주님은 최고야.”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저분이 누구신데 바다와 바람이 순종하지?”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바람과 바다가 잠잠케 되지? 이렇게 나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운 입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왼손에 차트를 들고 오른 손에 볼펜이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른 거예요.

 

예수님은 가운입고 차트 들고, “아버지 하나님, 폭풍 왔을 때 반응 F학점.” 그 다음 실험 작동. 오병이어. 예수님은 바빠요. 계속해서 실험을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해 아래 갇혀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 줍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대자연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대자연에 굴복하기 위해서 집단적 저항이 나옵니다. 집단적 저항을 위해 권력 구조를 만듭니다. 권력 구조를 만드는 것은 나를 대신해서 대자연의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겁니다. 세계최초의 문명국가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도 그렇지만,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수메르 국가가 있습니다. 수메르 국가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언어가 등장하고 숫자가 등장합니다. 그 다음 나온 것이 법입니다.

 

BC 4000년 경에 수메르 국가, BC 1830년 구바벨론, BC1220년 앗수르, BC 626년 에는 신 바벨론 제국이 세워지고, BC 539년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바벨론 제국이 무너집니다. 이 제국들이 등장하는 것은 언약 즉,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되는 것과 더불어 등장합니다. 이 제국들은 이스라엘에게는 큰 위협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전체가 언약의 효과를 보여주는 실험실이 됩니다. 그러면 이 국가들이 강대국이 될 때 아브라함의 소수민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국가가 없어요. 국가가 없으니 그들이 믿을 분은 누가밖에 없습니까? 하나님의 언약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으면서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야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이 국가입니다.

 

‘국가 부럽지?’ ‘부럽습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거룩한 제사장 나라, 곧 언약의 나라로 만들어 줄게.’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에게 언약의 나라를 만들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곳을 경유하면서 나라가 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함의 땅)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런데 국가 만들 장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느 한 곳도 “국가 만드세요.” 라고 하면서 장소를 비워주는 곳은 없습니다. 서울에서 총신 다닐 때 부러웠던 것은, 그 넓은 서울에 수많은 아파트가 있고, 집들이 있지만 머리 둘 곳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세요.” 라는 사람, 한 사람도 없었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의 계획하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장8-10).”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주어집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렇게 이스라엘을 만드실 때, 이스라엘은 언약의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언약의 나라가 되는 것이 대자연에 대한 보호책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실험실이라는 취지에 맞지 않습니다. 개인이 국가 속에 들어가면 국가가 개인을 지배하는 것이, 평소에 지배했던 악마의 얼굴로 드러납니다. 악마가 국가라는 짐승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처럼.

 

따라서 우리가 국가 없이 못산다는 말은 마귀의 돌봄과 지배 없이는 이 땅에서 살수 없다는 조건은, 주님께서는 이전에 피조물에게 허무하게 굴복하는 것을, 이제는 국가라는 것에 굴복하도록 우리에게 주리를 트는 겁니다. “네 죄를 알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너희 나라는 따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로마제국이 분열되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어거스틴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했습니다. 분열된 로마제국을 하나의 신앙으로 묶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비록 정치적으로 분열이 되어도 정신적으로 통합하는 것에 기여를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쓴 하나님의 도성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 성도에게는 두 개의 나라가 있기에 그 두 개의 나라 모두 충성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무슨 수로 그렇게 합니까? 이 정신은 오늘날 선교단체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선교단체가 무엇인고 하면 너무 열심히 교회일 하다 보니 학점은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취직하고, 결혼하고 싶은 정신들이 밑에 깔려 있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런 곳에서 간사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속해 있는 이 나라에도 충성과 봉사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존경하는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고, 어거스틴의 정신은 곧 사도바울의 정신입니다.”라고 가르칩니다. 저도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어요.

 

두 도성이 있다는 말은 사기입니다. 어떻게 가이사와 하나님을, 두 주인을 섬길 수 있습니까?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어떻게 두 태양을 섬깁니까?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선교단체는 말하기를 디모데전서2장1-3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도 기도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 모시고 조찬기도회 하잖아요. 그때 대통령이 한마디 하잖아요. “막말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이것은 코미디입니다. 대통령이 “예수님, 막말하지 말도록 해주세요.”라고 하고, 예수님은 “네 알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똑 같은 거예요.

 

우리에겐 임금이 있습니다. 우리의 임금님은 5년 마다 투표해서 뽑는, 5년마다 교체되는 그런 임금이 아닙니다. 영원한 임금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양 앞에서 눈이 부시면 더 이상 자기를 위한 신전을 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서 내가 따로 만들 신전은 필요치 않습니다.

 

주님께서 피조물을 굴복케 하시는 것은 ‘네가 무너지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해방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1).” 너의 신분은 영광의 자유가 기다리고 있기에 이까짓 하꼬방같은 해운대에 있는 84평, 시가가 25억 하는 그런 아파트 부러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영광이라 하는 것은 현재 태양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 태양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실컷 고통하고, 실컷 굴복하고 주께서 허락 하에 실컷 실험당하고, 실컷 고통 받아라. 그러면 그럴수록 로마서 8장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라는 말씀이 점점 더 실감날 것입니다.

 

깨어지고, 고문당하고, 세상 것 좋아하지 않는다고 설움당하고, 그렇게 살아라. 왜? 그것이 우리가 실험용 쥐로서 우리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서 우리가 나의 원수를 발견하지 마시고, 주님의 원수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얼마나 조작해 왔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평생 오해 속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부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전도서 앞의 내용은 소용 없다로 끝났습니다. 전도서12장 3절입니다.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서가 참으로 이상하지요. 사회 공동체 구조를 개인 신체구조로 변화시켜서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해 아래서 한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이 모든 인간에게 차별 없이 다 같이 주어지는, 허물어지는 마지막 광경이라는 겁니다. 이 말의 뜻은 자연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공평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해 아래 있는 인간을 누구나 죽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카락이 조금 희거나, 많이 희거나, 조금 빠지거나 빠지지 않아도 결국 다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최후는 그동안 우리를 지켜주려고 하든 공동체, 우리의 국가, 우리가 그렇게 정겹게 느끼고, 서로 의지하고, 회비거두고, 우리는 형제니, 친구니 하면서 그렇게 잘했던 모든 것이 해 아래서 모두 무너집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너지면 어떻게 삽니까?

 

그러나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뜻입니다. 무너지는 그 과정 속에서 이 세상은 심판을 위한 하나의 틀인 것을 주님께서 이미 확정지어 놓았습니다. 확정짓게 되면 우리 인간에겐 어떠한 융통성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제가 앞선 강의에서 예를 들었지요. 크리스마스 추리에 인형처럼 매달려 고정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주인공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크리스마스 추리를 장식한 하나의 장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매달려 놓은 대로 매달려 있습니다. 융통성이 없습니다. 융통성이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너질 터에다 텐트를 치고 못으로 고정하고, 해운대 아파트 84평에서 평생 살리라 하면서,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낙이고 보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마에 땀이 적게 흐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짓을 할 때 주님께서는 가운을 입으시고 오른손에 볼펜, 왼쪽에는 차트를 들고 “7번 쥐가 아파트 샀다고 좋다고 하고 있습니다.” “저것도 헛되다. 빨리 죽여라.” “네 알겠습니다. 빨리 죽이겠습니다.”

 

모든 것을 무너지게 하십니다. 그 원인은 우리가 이미 허무한데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20-23절에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탄식 하세요. 탄식하라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함께 고통합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전도서에는 무엇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러워 할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방, 구원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서 절대적인 좌절과 실망을 유도하는 그런 실험실 속에서의 쥐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인간들은 서로 모방한다고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하고.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땅에 어떤 것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같은 해 아래, 망해야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해 아래서’ 라는 뜻은 무엇인가? 해 아래서는 시간과 공간이 나오지만 이 시간과 공간은 우리를 괴롭히고 탄식하게 하고 고통하게 주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다루십니다.

 

그러면 우리만 고생합니까? 아닙니다. 이 시간과 공간속에 누가 뛰어들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시간과 공간속에 뛰어 들었습니다. 함께 탄식하시고 함께 고생하시고, 마귀가 주는 모든 괴로움을 다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끝이었습니까?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해 아래서는 죽음이 인간의 마지막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본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해 아래서는 모든 것이 한시적이고 일시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 20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된다면 여기에서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덮쳐 버리시면 우리는 이 땅의 시간과 공간에 살면서도 주님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혜택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성령 받은 사람은 고생합니다. 고생 조금 합시다. 그러나 주 안에서 죽는 것은 휴식이고 쉬는 시간이고 잠자는 것입니다. 먼저 제대한 사람에게는 축하를 하고, 선배님 먼저 가셨는데 곧 따라 갑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늙은 사람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무슨 빽을 사용했기에 먼저 돌 맞아 죽었습니다. 무슨 빽이 있기에 저런 혜택이 있습니까? 이런 혜택 아무나 주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이 말을 들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1:6)”

 

고린도후서 8장 2절에서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장 7절에서는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편지 이야기가 마치 이쪽 시간 속에 있으면서 저쪽 시간세계와 공간을 보는 것처럼 “조금만 참고 고통 받아라. 주님께서 곧 오신다.” 라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내용을 바울서신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이 편지는 특별한 편지, 성령이 아니면 읽을 수 없는 편지, 이 편지가 여러분에게 배달된 편지이기를 바랍니다.

 

 

 

 

 

 

 

 

(녹취 서경수 정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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