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3강 (강의:이근호 목사)
전도서 내용을 보게 되면 연결고리가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제가 교재를 썼습니다만 여러분 보시기에 교재가 전도서보다 더 어렵게 느껴질 겁니다. 그런데 교재 내용이 어려운데 전도서를 다시 보게 되면 전도서도 만만치 않아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도서를 그냥 들어가 버리면 무슨 내용인지 모르기 때문에 전도서가 허무가 중심이 돼있는 이유, 우리 보기에는 전혀 허무하지 않아요. 우리는 세상사는 것을 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녀 교육할 때도 “얘야. 세상은 허무한 거야. 우리 같이 죽자.” 이렇게 교육하는 사람 없습니다. 다 살만 하기 때문에 노력하게 되면 결과가 나온다고 하는데 모든 것을 연구하고 탐구해보니까 역시 결론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 어린아이한테 이야기하든 노인네한테 이야기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헛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이런 결론을 하는 그 세상이나 지금 우리가 헛되지 않다고 우기고 사는 세상이나 똑같은 세상이거든요. 똑같은 세상인데 전도서의 지혜, 예수그리스도의 지혜는 말하기를 헛되다고 이야기하고 우리는 헛되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둘 중에 하나는 틀린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헛되다는 결론을 수용한다 할지라도 그 과정에 있어 이렇게 해서 헛되다는 과정을 내놓을 만한 의사나 마음가짐은 전혀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헛될 것 같으면 살 이유가 없잖아요. 헛되지 않다는 조건 하체 우리는 삶에 매진하는 겁니다.
번지점프나 자유낙하 하면서 짜장면 시켜먹는 사람 없을 거예요. 언제 짜장면 시켜서 먹어가면서 떨어지겠습니까. 허무에 떨어지는 입장이라면 우리는 거기서 본능적으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더욱 더 살아야겠다. 이 의지가 더 강렬하게 충천하죠. 더 살아야겠다는 게 나오지 “그래. 성경에서 허무하다니까 살아서 뭐 하겠노. 일찍 포기하자.” 이런 마음을 먹는다면 애초부터 우리가 죄인이 아닙니다. 죄인은 죄인 값을 하거든요. 우리 고집도 만만치 않다 이 말이죠. 허무하다면 오히려 자극을 받아서 “그렇다. 성경은 허무하지만 뭔가 허무한 것에서도 탈출구가 있을 것이고 나는 그걸 발견하고야 말리라. 그래 허무해. 하지만 나는 허무에서 탈출했다는 위대한 영웅으로 탈바꿈하고 싶어.” 그러한 의지와 충동이 오히려 자극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전도서가 이야기하는 허무하다는 것을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못돼먹은 마음가짐도 가질 수 있고. 그래서 전도서를 해석하면서 지혜자가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를 추적해야 돼요. 그런데 힌트, 흔적들이 있어요. 허무한 흔적들이 있는데 3장에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그래서 저는 이 때라는 것을 왜 이 세상을 탈출하는 건 너무 주제 넘는 짓이고요. 왜 세상을 허무하게 봤느냐는 그 이유에 동조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때라는 것이 쓰이는가? 그걸 제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때라는 것은 시간에 속하는데 시간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그 시간, 과거-현재-미래로 가는 시간이 있어요. 유명하니까 여러 번 강조합니다만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때문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 심수봉이 불렀던 [사랑밖에 난 몰라]에 나오는 가사에요. 이게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걸 크로노스라 합니다. 크로노스는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인간의 행동으로 시간이 나와요. 그러니까 행동이 우선이고 시간은 나중에 나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산책을 했다. 산책을 시작했고 내가 발걸음을 옮겼고 산책이 끝난 지점에서 걸린 시간은 10분. 그럼 10분이란 시간은 행동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야기된 시간, 10분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시간은 어디 있느냐 하면, 행동이 끝나면 시간도 없어져요. 그 다음에 다시 산책을 하게 되면 또 산책을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크로노스의 특징이 뭐냐 하면 행동이 먼저고 시간은 내가 행동함에 따라서 시간이 나중에 생겨나는 그런 입장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게 행동 아닙니까. 그 기다림이 10분 같으면 굉장히 길어요. 분명히 8시인데 8시 10분 되도 안 와. 7시 50분부터 계속 기다리는데 언제쯤 올까, 나타날 때 어떤 모습일까? 그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게 그렇게 지루해. 이것은 옆 사람은 몰라요. 본인만 알아요. 그러면 이 시간은 누가 만들었어요? 기다리고 있는 내가 만든 거예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 기다리는 것은 주님 재림보다 더 지루해요. 주님 재림은 하나도 안 기다려져요. 오려면 오고 말려면 말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기다려져요. 기다려놓고 이야기할 때 두 시간은 후딱 가버려요. 두 시간 이야기한 그 시간이 앞에 기다린 시간은 10분이지만 그 감에 영 미치지 못해요. 적어도 기다림의 아픔을 생각한다면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이야기해도 모자란 정도에요. 그처럼 이런 시간은 내 행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시간을 크로노스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온이란 시간이 있는데 시간이 세 종류거든요. 크로노스, 아이온, 카이로스. 이 크로노스 시간에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산책을 해서 끝났어. 산책하기. 이걸 문법적으로 부정법이라 하는데 영어로는 to부정사라 하죠. 이 to부정사는 ‘~하기’가 돼버려요. ~하기가 되면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산책하기가 아이온이라는 어떤 보이지 않는 창고 속에 산책하기가 들어있어요. 이게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반복이 가능합니다. “나는 오늘 산책했어. 그런데 내일 또 산책할 거야.” 그러면 그걸 합치면 산책하기가 되풀이 되는 거예요. 산책하기라고 부정사로 된 이것이 왜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하느냐 하면, 믿기, 영광되기, 하늘에 앉히시니, 이 모든 것이 부정사로 돼있어요. 부정사는 반복이 가능하죠.
그래서 이 아이온의 시간은 이걸 순수사건이라 하는데, 사건들이 집합돼 있다가 필요에 따라서 뽑아내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한 번 일어났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때 사도 바울은 그 근처에도 없었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그 십자가는 어디 박혀 있던 십자가인데 튀어나왔느냐는 말이죠. 이미 예수님은 옛날 사람인데.
이것은 크로노스라는 시간이 가능하도록 뭔가 센터 역할을 하고 있는 영원한 시간대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온을 ‘세대’라고 번역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대는 이미 십자가에 의해서 심판 받기로 작정한 세대에요.
제가 방금 심판이라는 이야기했는데 전도서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잖아요. 심판을 할 때 한국교회, 한국교회뿐만 아니고 이천 년 교회사에서 제일 문제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심판을 몰라요. 내가 나쁜 짓하면 심판 받는다고 하는데 그건 심판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은 집단 심판이지 개인 심판 아니에요. 나쁜 짓했으니까 하나님이 심판할 것이다. 주께서는 그런 심판 안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은 개인적인 죄 때문에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아담의 죄 때문에 심판하는 겁니다. 로마서 5장에 나오는데 왜 사람들은 그게 눈에 안 띠는지 몰라요. 그것은 너무나 인간들이 종교적인 습성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런 면이 안 보이는 거예요. 나쁜 짓해서 심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 때문에 심판받는 것이 아니고 아담의 죄 때문에 심판받게 돼있습니다. 이래나 저래나 심판받는 건 마찬가지지만. 괜히 쫄았어.
[투갑스] 영화 보세요. 경찰관이 뇌물 받고 난 뒤에 마누라 다니는 교회에 억지로 끌려가서 뭐라고 합니까? 길거리에서는 삥땅 뜯고 가서는 “할렐루야. 아멘. 주여.” 하잖아요. 그런다 조사 나오니까 비밀통로로 빠져나오고. 요즘 그런 경찰관은 가끔 있습니다만.
자기가 하는 잘못에 대해서 심판이 주어질 것이라고 상상하는 겁니다. 그것 전도서 하면서 깨져야 돼요. 그런 심판 없습니다. 일괄 심판이고 아담의 죄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에 남 등쳐먹지 않아도 모든 인간은 같이 심판받게 돼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한 강도는 구원받았고 같이 십자가 달려도 개인행동으로 심판받는다고 우기는 인간들은 주님과 함께 낙원에 못 갔고 일괄 심판을 믿는 강도는 그날 밤에 주와 함께 영원히 거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 단출한 문장으로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이 범죄 함으로 모든 것이 죄 아래 심판 아래 있다. 그리고 뒤에 우리한테 묻는 것 같아요. 이걸 믿습니까? 만약에 그걸 믿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포기하는 걸 믿어야 되느냐 하면, 내 잘못으로 내가 심판받는다는 그 사실을 저는 이제부터 포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상응해야 되고 반응을 나타내야 돼요.
믿기로 작정하십니까? 이것 한다고 세례주고 영세 주는 건 아니지만 다시는 내 행동으로 내가 심판받는다는 걸 이제는 생각하지 않기로 작심하십니까?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묻는 경우가 언제냐 하면, 목사 위임식 할 때 교인들은 이제부터 의례히 목사에게 생활비와 사모한테 한복 한 벌 주기로 작정하십니까? 그때 묻고 별로 안 물어요.
심판이라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났어요. 그러니까 심판을 면제받을 요량으로 착한 일하지 마세요. 빛과 소금의 역할하지 마세요. 그런다고 여러분한테 행운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상대 안 해요. 어디 상대할 자가 없어서 우리 같은 인간과 상대해요. 우리가 행함으로 심판받는다고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돼있고 전도서에도 행함이 심판받는데 그 행함은 우리가 지어낸 행함이 아니고 우리에게 가중된 우리에게 운명으로 짊어진 행동에 대해서 심판하는 거예요.
자기 책임을 너무 강하게 가지지 마세요. 옆 사람이 미니까 넘어지는 것이에요. 인생이란 상호 간에 서로 떠미는 것이기 때문에 떠밀면 떠밀려야지 지가 뭔데 안 밀립니까? 하나 부도나면 다 부도 나게 돼있는데. 이것을 신의 저주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세상은 같은 지하철에 같이 타고 있기 때문에 덜커덩, 덜커덩 하면 다같이 움직이게 돼있어요. 가끔가다 술 먹고 개판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예외고, 사람들이 같이 밀리게 돼있어요.
이 세상은 공동 운명체입니다. 거기서 특출하게 테레사 수녀 나타났다고 착하다고 생각합니까? 테레사 수녀는 덜커덩 안 하는 줄 알아요? 아담의 죄에서 제외될 사람은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아브라함은 덜커덩거리면서 주께서 하셨다고 믿기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칠 때도 덜커덩의 일종이에요.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아이온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되풀이하는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육신이 갖고 있는 시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때문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라는 이런 시간대에 아이온에서는 사건만 있어요. ~하기. 어제는 울었지만 하지 말고 어제는 울기,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하기. 부정사가 동원되어서 우리는 그렇게 어제는 울었고 오늘은 당신 생각하다가 내일은 울 일만 있는 거예요. 이렇게 사건과 크로노스 시간대에 만나는 지점을 카이로스라 하는데 이게 바로 성경에 나오는 ‘때’라는 것. “때가 되매”
성경말씀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냥 가시지 않지요.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의 동생들이, “주님이여, 지금 명절인데 당신이 메시아임을 PR해야 되지 않습니까? 추종자가 많아야 나라 뒤집어집니다. 이제는 당신의 세상입니다. 어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소서.” 이렇게 동생들이 부추기죠. 하여튼 동생들이 문제라. 제자들이 문제고. 주변인물들이 문제에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그 때는 아버지가 지시한 대로 움직이거든요.
로마서 5장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질문을 하든지 간에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다그치지 않아요. 우리는 상대할 대상도 안 되고 우리한테 뭔가 오면, 중간에 대신 받아서 답변해주고 대신 변호해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왜 믿습니까? 예수님은 주님이잖아요. 주님이란 개념이 구약에는 후견인, 양부모 또는 god father. 너무 어리기 때문에 자기 삶을 일어서지도 못하는 걸 대신 키워주는 거예요. 그걸 히브리말로 고엘이라 해서 후견인이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후견자가 누구냐?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일반종교에서 절대적인 신의 이름이 아니고 후견자로 파견 근무하는 신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인데 그분은 우리를 도와주되 우리가 원하는 대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언약대로 우리를 도와주는 겁니다. 지금 점점 더 윤곽이 드러나지요. 졸음 운전하시는 분 빼놓고 윤곽이 잡힐 겁니다.
지금 제가 자꾸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내 행동 잘못으로 벌 받고 지옥 간다는 생각을 계속 하지 말란 말이죠. 내 행동 잘해야 구원받고 못 하면 지옥 간다는 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이방종교에서 상식적인 신을 그런 식으로 느끼고 그런 식으로 섬기고 하는 거예요. 물론 한국교회가 상식적인 신을 전했기 때문에 숫자가 이만큼 많은 거예요. 하지만 예배당 등록했다고 해서 구원받고, 천국 가고 부동산이 결정하는 건 아니잖아요. 건물 문턱이 결정하는 게 아니고 등록했다는 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거든요.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결정하는 겁니다. 구원받기로 작정하면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탈락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후견자기 때문에 자기 자식은 아는 겁니다.
어느 자식치고 부모 없는 자식이 누가 있습니까? 다 자식 앞에는 부모가 있잖아요. 그래서 그 부모를 섬겨야 돼. 하면, 이건 우상숭배가 되는 거예요. 부모 없는 자식 없기 때문에 나는 부모를 섬기리라. 하면 우상숭배가 된다고요. 그럼 우상숭배가 안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 부모를 섬기되 언약 안에서 섬겨야 된다. 상당히 복잡해요.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주 안에서 섬기라 하는데 그 주라는 개념이 구약의 언약 개념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주 개념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 개념으로 바꿔서 그래 하나님 믿듯이 부모를 섬겨야 돼. 교인들에게 5월초에 어버이주일에 설교할 때 맨날 그런 식으로 설교하니까 하나님을 섬기듯이 부모를 섬겨라.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하나님과 부모 둘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부모가 우선이냐? 하나님이 우선이냐? 부모가 말하기를 오늘은 제발 교회 안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말하기를 교회 가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부모를 택할 것인가? 목사 설교에서는 부모를 하나님 섬기듯이 섬기라 했는데 그러면 거기에 대한 결론은 뭐냐? 목사는 어떻게 섬기는가? 목사는 둘 다 안 하지요. 말만 그렇게 할 뿐이지. 실천 하지도 못할 말을 내뱉고 지는 자기 볼 일 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께 헌금하면 부모한테 용돈 줄 걸로 대체된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는 말이, “너희들은 하나님을 잘도 섬기는구나.” 조롱조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통을 더 섬기느냐. 십계명에 부모를 섬기라 돼있어요. 5계명이죠. “그 말씀을 하나님 섬기는 걸로 대체했구나.”라고 이야기하니까 그 뒤에 후유증이 더 심해요. 교회 목사들이 하는 말이 여러분 하나님 섬겼다고 부모에 대한 효를 면제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 섬기면 더욱 더 효도해야 됩니다.
그 소리를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들었으면 정말 화가 났을 거예요. 너희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 섬김과 부모 섬김의 갈등에서 기껏 끄집어낸 아이디어는 자기들이 수천 년 동안 끄집어낸 아이디어에요. 유대인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부모를 섬길 것인가, 하나님 섬길 것인가 이 갈등에서 마지막 맺은 결론은 뭐냐 하면, 하나님 섬기면 그걸로 부모 섬긴 것으로 하나님이 쳐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그걸로 이미 결론이 났는데 초보자가 어디서 거기 끼어드느냐 말이죠. 웃기죠. 세금을 가이사에게 낼 것인가, 하나님께 낼 것인가? 이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너는 하나님 섬겼다고 부모 섬기는 것을 면제했다는 그 말은, 부모를 안 섬겼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섬기는 것은 평소에 부모 섬기는 방식으로 하나님 섬기는 것을 대체해서 부모 섬기듯이 하나님 섬김으로써 이쪽이 면제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모든 말씀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직접 말씀을 매개로 해서 섬기려 하는 자체가 주체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나온 그것이 거짓된 것입니다.
정말 부모를 섬기는 것은 부모 앞에서 내가 용돈을 아무리 드리고 전화를 하루에 열 번씩 하더라도 내가 5계명을 지킬 수가 없는 자식이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이래도 반응 없네. 십자가 앞에서는 이미 모든 것이 죄인으로 들통 난 상태기 때문에 어째서 죄인이냐? 실제로 실험해보는 거예요. 부모를 섬겨보는 거예요. 용돈 드려보고 전화해보고 요양병원 보내보고 자주 찾아뵙고. 그러나 하면 할수록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이것이 결코 십계명에 나오는 부모 섬김을 온전하게 완성할 수 없는 그런 행동인 것을 본인이 너무나도 절실하게 느낍니다.
자식을 양육하되 주 안에서 양육하고, 남편을 봉양하기를 주 안에서 봉양하고, 아내를 사랑하기를 주 안에서 사랑하라. 이 모든 말씀은 결국은 주 안에서 때문에 우리가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자식을 양육하고 어떻게 하고 맹자 어머니처럼 교회 가까운데 학교 가까운 데로 이사를 열두 번, 열네 번 해도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것은 진짜 전도서 말씀대로 헛되고 헛짓만 할 뿐이다. 이런다고 해서 내가 지혜자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전도서 2장 16절 봅시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라” 일반이라. 똑같다, 차이가 없다.
이게 뭐냐 하면 죽음이라는 것이 일종의 블랙홀이에요. 블랙홀을 사상의 경계선이라 하는데 지금 전도서에서는 허무를 영과 육이 맞닥뜨리는 경계선입니다. 경계선으로 들이미니까 우리는 영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어요. 육신이기 때문에. 그냥 허무로 끝날 뿐입니다. 사람이 경계선 때문에 나오는 딜레마가 뭐냐 하면, 과연 죽을 때도 정보가 유지되느냐, 유지되지 않느냐의 문제가 생깁니다.
물리학계도 서스킨드라는 사람과 스티븐 호킹의 사상적 논쟁이 뭐냐 하면 블랙홀에 들어가게 되면 그동안 알고 있던 정보를 완전히 깨지게 되느냐? 블랙홀을 설명해야 돼요. 블랙홀이란 강한 중력이 있어서 옆에 있는 모든 별들이 쏟아져서 여기는 빛조차도 나오지 않는, 어두운 구멍이라 해서 블랙홀이라 합니다.
이 블랙홀에 우물처럼 사람이 빠졌다고 봅시다. 여기는 강한 중력 때문에 모든 것이 찢어지기 때문에 정보라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이라는 것은 다 깨지고 없어진다고 이야기한 것은 스티븐 호킹이고, 서스킨드란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했어요. 오늘 강의 내용과 관련돼있는데 세상에 있는 정보가 3차원에서 2차원으로 필름 화되기 때문에 영화 촬영할 때 배우들의 활동은 3차원이잖아요. 그걸 찍으면 필름이라는 2차원 속에 정보로 담기게 됩니다. 3차원에서 2차원으로 하기 때문에 3차원 입장에서는 찌그러져 없어지는 것 같지만 그대로 그 정보가 남는다는 거예요.
이러한 물리학의 논쟁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일반적이니 호기심에서 우리가 죽을 때도 우리가 갖고 있던 기억이 하늘나라에서 그대로 유지됩니까, 안 됩니까? 하는 그 질문과 같은 맥락이거든요. 만약에 우리의 정보가 남는다고 합시다.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교도소에서 예수를 믿어서 만약에 그 사람이 천국 가게 된다면, 살해당한 아이 어머니도 예수 믿어서 천국 가서 우연히 광장에 만났을 때 “어! 아저씨.” “어! 아줌마. 어디서 많이 봤는데. 아. 밀양.” “밀양에서 피아노 레슨 할 때 내 아이 죽였지요.” “맞다. 내가 밀양에서 아이 유괴해서 살해했는데 주께서 십자가 피로 용서해주셔서 오게 됐습니다.” 하면 그 순간에 철썩하면서 “이 아저씨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 그 철썩 소리가 하늘나라 보좌까지 들릴 것 아닙니까. 천국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났네. 옛날에 서로 감정 있었던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이게 천국입니까, 개판입니까?
이런 문제를 제가 우스개 소리로 했지만 실제로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어떤 여자가 있는데 남편이 일곱이었습니다. 그때 천국에 갔을 때 여자가 막차로 죽어서 올라왔을 때 미리 천국 가서 자기 마누라 보고 싶어서 지상에서 천국 올라오는 블랙홀 위에 전부 다 둘러 서 있는데 늙은 아줌마 하나 올라오더란 말이죠. 전부 다 “여보” 하고 달려들 때 장미꽃을 들고 왔을 때 누구한테 장미꽃을 건네줄 것이냐는 그 문제 생기는 거예요. 장미를 주다가는 장미 다 찢어지고 천국에서 길렀던 머리 다 뽑히고. 결투하자고 나오면 그게 천국이겠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이 지상의 정보가 하늘까지 이어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어진다면 만약에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천국 가 있다면 그 인간 꼴보기 싫어서 차라리 지옥을 택한단 말이죠. 합류하기 싫어서. 그러니 뭔가 단절이 있어줘야 돼요. 그 단절 중에 하나를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겁니다. 나에게 나오는 모든 것은 헛되다. 지워지는 게 문제가 아니고 헛된 거예요. 왜 헛되냐 하면 내가 했다고 여기는 그것조차도 아이온에서 이미 그 짓하도록 내가 산보했다가 아니라 산보하기의 반복되는 그러한 아이온의 사건들의 집합장소에서 시켰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야곱을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했고 에서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저주받기로 작정이 된 상태에서 둘은 싸우는 채로 세상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야곱이 장자권, 장자권이란 요새말로 집문서에요. 상속권이에요. 아버지 재산 문서 이런 것. 나는 야곱에서 모든 재산을 남기노라. 그것 등기 이전했으니까 나중에 뒤늦게 와서 아버지 좋아하는 것 가져왔습니다. 누구세요? 저, 아들 에서. 다 줘버렸는데. 남은 것은? 동생한데 얻어먹어라.
그 다음 이야기가 야곱 너, 죽었다. 엄마가 피해라. 야곱 야반도주, 야곱 잠자다가 꿈꿨다. 천사왕림, 언약완성, 형 또 만났다. 살려주세요. 둘 다 주께서 하신 일이다. 각자 헤어짐. 끝. 이게 창세기 27장부터 하는 이야기에요. 야곱이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다 예정하신 거구나.” 그게 바로 야곱은 살아가면서 야곱보다 야곱언약이 더 우선이고. 야곱언약은 사건이거든요. 야곱언약의 반복된 사건으로서 자기 아들 요셉이 죽습니다. 요셉이 죽었을 때 얼마나 울었을까요.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기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하여튼 언약 속의 아버지는 자식을 무조건 잃어버려야 돼요. 왜냐하면 언약의 원래 원형이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를 버리는 사건이 그 안에 내장돼있기 때문에. 이미 세상은 돌아가는 거거든요. 제과점에서 밀가루 반죽할 때 보면 큰 기계가 빙빙 돌면 소용돌이가 생기잖아요. 그 소용돌이 한 복판에 아버지께서 아들을 버리는 십자가 사건이 있다면, 그 주변에 놓여있는 모든 일어나는 일들은 소용돌이, 십자가 사건으로 수렴되는 보여주는 그러한 때라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그 모든 것의 수렴은 뭐냐? 무슨 때가 있더라도 그 모든 때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그걸 논증하고 증명하는 그런 사건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시간을 안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지요. 그런데 여기서 반복되는 행동을 했다고 했잖아요. 보통 시간은 인간의 행동으로 만든다 했지요. 사랑하는 사람 기다릴 때는 길어지는데 만나서 이야기할 때는 짧아지지요. 이것은 각자 행동에 의해서 시간이 정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늘에 있는 사건이 지상의 사건으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때가 있어야 돼요. 때가 주어지게 되면 이 때가 이 시간을 잘라버려요. 토막 내버리면 하나하나가 사건화 되는 겁니다. 인간은 이런 저런 행동을 하다가도 사건으로 잘라버리면 이게 조각, 조각나는 거예요.
어제 제가 인생이란 무엇이냐? y=x에서 어쨌든 간에 직선이에요. 지금 이 지점에 내가 있다면 b지점에 대해서는 동일한 비율로서 이게 원인이 된다면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거거든요. a는 b를 유발하고 따라서 b를 얻기 위해서 차분히 노력해야 된다. 그런데 여기는 변곡점, 이것이 어디로 꺾일지 모르는 거예요. 이게 사건입니다. 내가 행동하면서 예상한 사건이 아니고 카이로스, 때가 되매 벌어진 사건이 되어서 이것은 끊어져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y=-x가 돼요. 이렇게 간다면 y=3이라든지 y=5가 돼요. x가 어떻게 변하든지 y는 일정하다는 그래프거든요.
그러니까 인생이란 한 번 꺾이는 것이 아니고 갈 때마다 꺾이고 꺾이니까 인생은 이런 거라니까. 꺾일 때마다 변곡점, 사건이 있는 거예요. 이게 인생이네. 이게 이미 주어져있는 “허무해야 돼.”라는 허무하기 사건 속에 이 전체가 허무가 되니까 허무는 이 전체를 사건화 시키는 겁니다. 전도서에서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헛되고 헛되다. 네가 공부를 해도 헛되고 헛되다.
전도서 1장 13절에 봅시다.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내가 이런 이야기하면 욕을 많이 얻어먹었을 거예요. 당신은 인생을 너무 부정적으로 봅니다. 긍정적으로 볼 수 있어야지. 성경에 이렇게 하니까 저에게 욕하지 마세요. 저는 책임추궁 당하기 싫습니다.
17절에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이미 결론 났는데 알기는 뭘 알아. 이런 식이에요.
십자가 옆에 구원받은 강도 인생을 조사해보면 그래프가 이렇게 나올 거예요. 어릴 때 조실부모하고 보육원에 들어가고 어떤 친구라고 만났는데 보증 잘못 서서 망하고 사기 당해서 다 날리고 사기 당한 사람이 사기 친다고 어설프게 사기 치다 걸려서 3년 살고 나와서 할 게 없어서 다시 가스관 타고 올라가다 떨어져 잡혀서 수갑 찼는데 수갑 풀고 도망치고 지명수배 당해서 부산에서 잡히고.
모든 인생이 그래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만 고생한데. 남들은 고생 하나도 안 하는 줄 알고 있어요. 정말 답답해요. 성냥팔이 소녀가 눈 오는데 길 가다가 마치 크리스마스 전날이라 단란한 식구가 둘러앉아서 케이크 놓고 크리스마스 노래 부르는 걸 보면서 “나도 부모가 있었으면 저렇게 행복할 건데.”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막상 그 집에 들어가 보세요. 그 집이 CJ 회장 집인데 비자금 만들다 걸려서. 막상 그 집에 들어가면 그 집의 과거가 어떤지 남들이 부러워할 게 없어요. 남의 인생을 왜 그렇게 커닝해요. 자기 문제나 풀어.
주께서는 야곱과 에서가 아무리 쌍둥이로 태어나도 야곱 인생 따로 있고, 에서 인생 따로 있어요. 그것은 언약이 없으면 둘 다 아담의 죄로 죽습니다. 그런데 언약이 투입됨으로 말미암아 야곱은 구원받기로 작정돼있고, 에서는 지옥 가도록 돼있는 거예요. 언약은 사람을 살리는 언약일 뿐 아니라 죽이는 언약도 되는 거예요. 양쪽 다 축복과 저주를 다 보여주는 언약이 오는데 이 전도서는 언약이 없습니다. 언약의 준비단계로 까불지 말라는 말이거든요. 네가 많이 안다고 자랑하지 말라 이 말이죠.
지금까지 행복했으니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왜냐하면 인간의 크로노스라는 시간은 항상 수동성이 있어서 아이온에서 준비된 순수사건이 내일은 준비된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그냥 받기만하고 부딪치기만 할 뿐이에요. 멀쩡하게 고속도로 가는데 화물차가 졸음 운전해서 두 바퀴 반 돌고 쳐버리면 온 가족 죽게 돼있어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2장 16절,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라” 할 때에 과연 살아있을 때 정보가 죽을 때도 가느냐? 안 갑니다. 안 가면 살아있을 때 인간은 돌멩이냐? 언약에 준한 새로운 정보가 그 사람에게 옷처럼 입혀질 것입니다. 이근호가 죽으면 이근호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이 돼요. 그러면 나의 개성은 어디 있느냐? 이미 그리스도 것의 안에서 이근호가 있어야 될 역할을 언약적 정보로써 우리에게 입혀져서 이 땅에 출생했거든요. 1953년도에.
우리가 언약을 모르면서 시간의 의미를 크로노스, 나는 이렇게 살았다. 내 인생은 이렇다. 이 중에 나쁜 것은 다 빼고 좋은 것만 추려서 이게 나야. 이 코스를 잘라봅시다. 이걸 잘라보는 거예요. 잘라보면 이것이 직선이 돼요. 이 직선을 동질성, 주체성, 자아성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조금이라도 숨통 트이면 그게 나라는 거예요. 제가 너무 빨리 말해서 뭔 뜻인지 모르겠습니까. 어떤 변화를 겪더라도 좀 숨통이 트인다 싶으면 다시 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이번에 집안에 큰일이 있지만 나는 기어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서리라. 하고 새롭게 y=x라는 그래프가 또 등장합니다. 그건 직선이에요. 곡선이 들어가도 어쨌든 간에 짧은 기회지만 직선 찾아내서 이것이 나라고 우기고 싶은 겁니다.
곡선 가운데서 직선 찾아내는 이걸 수학에서 미분이라고 해요. 참 미분까지 나와야 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dy/dx=-3. d는 모든 쪼개는 거예요. 쪼개진 하나를 ⊿x라고 하는 거예요. 극한으로 쪼갠 걸 dx라 합니다. dx가 극한으로 쪼개질 때 거기에 따라서 쪼개진 분량만큼 그때그때 동일성을 갖고 있는 dy가 있어요. 이게 원인이 되면 결과가 여기 있거든요. 그것이 -3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1:3의 비율로 결과가 생기는데 마이너스 비율로 감소한다는 뜻이에요.
이 미분이 좋은 점이 뭐냐 하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끊어진 하나하나를 자기와 동질화시켜서 확대시킵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자기를 자랑하는 간증이 된다니까. “나, 이런 놈이야. 나, 이 정도 믿음이야.” 성경은 헛되다는데. 그래서 이런 것들을 전부 다 일소에 붙이는 방법이 뭐냐 하면, 개인적으로 조각난 이런 세계 속에 밑바탕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증기 기운 같은 게 있어요. 이게 바로 죽음의 힘인데 이 죽음의 힘은 10분 쉬고 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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