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5강

아빠와 함께 2013. 8. 6. 16:19

 

제 5강

 

아까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졌을 때 그 죽음을 부활로 교환시키는 장치가 없으면 인간은 그냥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죽음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마중 나와서 죽어가는 그 인간을 교환을 해요. 영생의 사람, 언약의 사람으로 교환할 때는 더 이상 그 사람의 개성 같은 것은 일체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개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허무’라고 지칭합니다. 허무야, 오너라. 너는 너 자신으로서는 허무한테 하나님이 너를 마중 나가서 받아주게 되면 언약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언약의 사람으로 바뀌는데 그 사람이 바뀌게 되는 원리원칙은 이스라엘 역사, 구약역사가운데 죽 펼쳐지는 그 언약의 원리에 준해서 그 사람을 언약체계 안에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언약대로 축복이 주어지게 되는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를 허무화 시키는데 전도서 같은 경우입니다. 그 허무가 무엇인가? 모든 것이 헛되다는 이야기거든요. 모든 것이 헛되다, 하는 이야기를 왜 우리한테 꼭 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는 질문을 해야 되지요. 지난 시간에 죽음 이야기를 했는데 그 죽음이야기를 조금 더 진척시켜 보겠습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언약을 빼놓고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사라지는 거예요. 내가 사라지게 되면 내가 없어지잖아요. ‘까짓 거 내가 없어지지.’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없어지게 되면 우린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사라지면 괜찮은데 사라지기 직전에 내가 사라진다는 그 공포와 두려움에 대해서는 우리가 도저히 감당을 못하지요. 그러면 내가 사라지면 안 되니까 우리는 어떤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느냐 하면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어떤 식으로 변형됩니까?’라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마지막 발악을 할 수밖에 없어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사라지는 것인데 내가 사라지면 ‘나는 어떤 식으로 변형됩니까?’라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면 이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서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기에 주님께서는 이런 망발을 하나님께서는 용납을 할 수가 없지요. “곱게 사라져!” “아닙니다. 사라지고 난 뒤에는 어떤 식으로 생생하게 살아남습니까?” “왜 이래! 왜 갑자기 끝에 와서 이런 고집을 부리는 거야? 사라져 줘.”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버티는 거예요. 왜? 사라진다는 생각, 자기가 자기한테 죽음의 애도를 해야 하는데 죽는 사람도 사라지고 애도하는 사람도 사라지면 내 죽음을 기념하는 것은 남들이 할 수 있겠지만 기념을 받을 내가 없잖아요.

 

너무 황당하지 않습니까? 나만 황당한가? 죽는다는 것이 이처럼 기가 꽉 막힐 일이에요. 살려고 그렇게도 애썼는데 그것이 전부 다 헛되고 헛된 짓이었다는 말이지요. 다만 살려고 한 것이 남 살리려고 한 것이 아니고 기어이 날 살려야 하겠는데 살리려고 봤자 살려고 하는 자체가 살고자 하는 나도 사라지고 그래서 살아남은 나도 사라지고 이것도 저것도 다 사라진다면 결국은 나는 대체 이 땅에서 뭐냐는 거지요.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표현하느냐하면, ‘바람’이라고 해요. 바람은 흔적, 또는 발생입니다. 뭐는 아니라는 말이냐 하면, 존재는 아니니까 이 존재를 유지하거나 지속하거나 붙잡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너는 바람 같으니까 바람이 아니고 계속 연속해야 될 존재라고 간주한다면 성경에서 바람이라는 표현을 쓴 그 하나님의 취지가 우리한테는 상당히 거부감을 나타내지요. 흔적과 발생이니까 그냥 바람이 바람을 붙잡을 수 없는 거예요.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계속 바람인 거예요. 바람이기에 바람을 잡을 수 없고 바람이 일어났다, 지나가게 되면 거기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예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이것을 언약 속에 들어가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라고 이야기하고 이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이것이 바로 창조지요. ‘죽은데서 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이지요. 그렇다면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이것이 무엇과 차이가 나느냐하면 기존의 우상과 차이나는 겁니다. 기존의 우상의 특징은 뭐냐, 바람도 아니고 흔적도 아니고 나의 존재가 신의 도움으로 어떻게 계속 존속하느냐, 어떤 다른 형태로라도 계속 존속하느냐, 와 결부되면서 등장하는 신이 우상입니다. 우상이 뭐가 빠졌느냐, 무의 상태와 죽음의 상태를 경유하지 않습니다. “죽어서도 부활한다는 것이 모든 종교의 공통점인데요?” 라고 한다면 제가 말하는 이 죽음이라는 것은 그냥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죽음이고 이 없음은 언약 적으로 모든 것이 없음을 이야기하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포함되지 않는 신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전도서를 지혜문서라 하는데 하나님의 지혜의 세계 말고 율법적 세계, 또는 언약세계에 있어서의 허무라 하는 것은 조사를 해 보니까 우상숭배에서 나옵니다. 그냥 듣기만 하세요. 찾는 시간이 아까우니까요. 대략 성경에서 보면 이런 겁니다. 성경에서 허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너희들은 왜 허무한 것에 대해서 전하느냐는 조로 선지자들이 하는데 아모스 5장 5절의 경우에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이사야 41장 29절에 보면 “과연 그들의 모든 행사는 공허하며 허무하며 그들의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이요 허탄한 것뿐이니라.”

 

우상 자체가 허탄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우상 숭배하는 사람에게 물어봅시다. “당신의 신은 허무합니다.” 하면 우상 섬기는 사람들이 “그러면 네 신은 허무하지 않다는 증거를 대라.” 이렇게 나올 때 이스라엘 여호와는 뭐라고 합니까? “네 쪽에는 언약이 없고 우리 쪽에는 언약이 있으니 언약이 있는 하나님은 허무하지 않고 언약이 빠져 있는 너희들이 신은 허무한 것이다.” 그러면 그 쪽에서 하는 말이 “언약이 뭔데?” “언약은 바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것이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언약완성에서 일체 인간의 개인적인 협조나 의견이나 공로나 간절함 같은 것은 여기에 스미거나 포함되지를 않습니다. 일방적 구원이에요. 그것도 창세전에 이미 예정한 사람만 건져내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인간이 포함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언약이 빠진 신은 뭐냐 하면, 인간이 빌면 응답되고 인간이 열심히 하게 되면 그 정성을 받고 인간이 헌신하면 그 헌신을 인정해주고 인간이 노력하게 되면 그 노력한 것을 가상히 여기고, 이런 것이 포함될 때 그 신은 언약을 모독하는 신이기 때문에 언약의 하나님에 의해서 우상이라고 평가를 받게 되는 겁니다.

 

가인의 자기의 제사를 하나님께 바쳐서 어떤 효과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신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자신이 그만큼 기여한 적이 있는, 신이 하는 작업 속에 인간도 파트너로서 가담되었다는 흔적이라도 있을 때 그것은 신을 접수하면서 사실은 신을 접수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만큼 구원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하는 자기 노동에 대한 대가와 보상을 자기가 도로 회수하는 식이 되어버려요.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신도 감동한다. 한국교회에서 그 논리와 신학 빼버리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정성을 다해서 신을 섬겼던, 그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그것도 누구 보다 정성을 다해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지요, 그 귀한 돈 아낌없이 십일조 냈지요, 하나님께서 나쁜 나라라고 지칭할까 싶어서 구제도 열심히 했지요. 더 이상 뭘 어떻게, 뭘 더 어떻게 충성을 합니까? 성전에 서서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 “너는 잘렸다.”라는 답변밖에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반면 어떤 죄인은 말합니다. “주여, 제가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하고 엎드렸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네가 진정 의인이었다.”

 

듣는 죄인이 낯 뜨겁고 부끄러울 정도로 “네가 정녕 의인이다.” 성경에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이걸 또 어떤 사람이 그 옆에서 들었다면 자기도 똑같이 엎드려서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맞다. 네가 죄인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요. 인간의 모든 것은 다 모방, 베끼는 거니까. 남 뒤꽁무니 따라다니면서 다 베끼는 것으로 되어 있거든요. 엎드려서 이래가지고(절에서 하는 기도처럼) 절하고 정성을 다하고. 절에 가서 백팔 번을 절했잖아요.

 

아까 한 것을 복습해 봅시다. 자꾸 복습을 해야 돼요. 강의하고 나면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인간의 행동은 뭘 남긴다? 크로노스, 시간을 남긴다. 백팔 번 절을 할 때 1번부터 합니다. 1번부터 백팔 번 까지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 시간동안 자기가 부처에게 절했다는 이것은 자기한테 고이 간직하지요. 아주 고이 간직합니다. 만약에 부처가 우상이니까 이것을 근거로 해서 나도 부처한테 복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여기서 마련되지요. 이렇게 되면 이것이 바로 헛되지 않은 거예요. 왜, 자기의 노동이 여기에 들어갔으니까.

 

그런데 전도서에 보면 인간이 하는 모든 노동도 실적이나 업적도 다 헛것이라고 했거든요. 전도서 7장에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보라고 했으니 봅시다. 그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차력사가 되어가지고 쇠막대기를 굽게 했다 이 말이지요. 굽게 하니까 사람들이 그 굽은 쇠막대기는 사용하기에 안 맞거든요. 그러니까 얼굴을 찡그리면서 “누구야? 이렇게 내 인생을 굽게 한 거야? 내가 펴고 말리라.” 하고 야, 하고 펴 보세요. 그것이 펴지는가.

 

그 때 지나가는 이스라엘 왕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네가 펴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내 인생을 이렇게 굽게 합니까?” “너는 허무해야 되기에 네 행함이 여기에 섞이면 안 된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허무한 인간에 있어서 죽음이고 뭐건 간에 항상 “내가 누구입니까?”라고 하지 말고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를 질문해야 돼요. “하나님이여, 제가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지 말고 “하나님이여, 저라는 존재에서 지금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해야 돼요.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이 곧 그 일이다. 주께서 하신 일이다. 네가 보기에는 굽은 것으로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희에게는 마땅한 조치”가 되는 거예요.

 

이번시간에 한 것을 간단하게 결론내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죽은데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이삭 같은 경우거든요. 야곱도 요셉이 죽었어요. 이미 요셉은 죽은 자식입니다. 나중에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서 돌아왔을 때 야곱은 자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동안 자기표면위에 언약을 놓고 자기에다 어떤 일을 발생시킨 거예요. 내 사랑하는 자식이 죽었다는 그 일을 발생시킨 겁니다. 그럴 때 그것은 야곱이 아니고 야곱언약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서 그 언약 속에 집어넣는 조치가 계속해서 단행되고 지금도 단행되고 있습니다.

 

전도서 7장 14절에 보면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장래 일을 좀 알면 어떻습니까? 알게 되면 왜 안 되는가? 알게 되면 미리 대비하게 되고 대비하게 되면 우리의 그 착한 행함이 우리 구원에 삽입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언약적인 하나님의 조치가 모독을 받게 되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항상 우상의 하나님을 채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허무하기에 허무한 신을 만드는 겁니다.

 

언약 같은 것은 다 빼버리고 내가 선택해서 내가 골라잡은 하나님이 나는 좋은 하나님이다, 라는 식으로 끼고 도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이 작업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허무하게 만들어서 여기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집어넣어 버리면 여기서 나의 종속성은 사라집니다. 나의 종속성이 뭐냐, 아까 이야기한 죽음이라 하는 것은 나의 사라짐이죠. 이것을 요한복음 13장이나 14장, 15장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뭐든지 다 이루겠다.’고 합니다.

 

예수 이름이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 14) 그러니까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말은 무엇을 중첩하느냐 하면 “이미 너의 이름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무의 상태에 있기에 사라졌다.” 이름이 삭제되었다는 것은 중첩이 된 거예요. 삭제된 이름, 허무한 이름, 뭘 해도 허무해야 될 이름위에 주의 이름이 덮쳐서 성령이라는 바느질이 일해요. 성령이라는 바느질로 누빕니다.

 

누비이불 알지요? 바늘이 들어갔다 올라왔다 들어갔다가 올라왔다 하면서 누비는 겁니다. 성령의 바늘로 뽑아서 올리고 뽑아서 올리고 뽑아서 올려버리면 이것이 바로 언약체가 되는 겁니다. “너는 죽었어. 나는 살았어. 너는 죽었어. 나는 살았어.” 이것이 하나의 사건이 되면, 이것이 아이온속의 하나의 사건이 되어버리면 평생 우리에게 반복해서 날마다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난다는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이 현실화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모든 사태는 “그 입 다물라.”고 이야기하고 거기에 대한 조치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조치로서 내려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입 다물라.”고 하는 것은 “너는 허무한 존재다.” 너는 허무한 존재거든요.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하게 되면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바뀝니다. 이 3차원이 예를 들어 조각이라면 2차원은 회화, 그림이에요. 그림이나 아니면 사진이 돼요. 사진의 특징은 뭐가 없느냐 하면 깊이가 없어요. 상처 난 딱지처럼. 전도서에 있는 모든 사건의 나열은 일종의 스냅사진이에요.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스타일……, 계속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전부 사진 찍어서 “그것은 헛되고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러면 기쁠 때는요?” “기쁠 때는 기뻐해.” “그러면 슬플 때는?” “슬플 때는 슬퍼해.”

 

“그러면 슬픔을 어떻게 회복합니까?” “그 장래일은 너에게 허락 안했어. 그냥 기쁘면 기쁘다고 좋다고 소고기 사먹고 슬프면 또 슬퍼하면서 낙담하고 설쳐. 어찌되었든 너는 사진관에 있는 하나의 스냅사진에 불과한 것”입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스타일! 이 정도 해야 스타일의 완성이에요. 능히 헤아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상이 아니고 언약 적으로 와버리면 누비이불처럼 성령께서 와서 바늘처럼 누벼버리면 야곱이 아니고 야곱언약처럼 우리는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언약 속에 편입생으로 들어온 겁니다.

 

일종의 영훈 중학교라고 보면 돼요. 시험도 안치고 그냥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되면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 선교단체에서 인용하는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누구 증인 되리라? “내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너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내가 일체 용납하지 않고 내 이름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언약적인 것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마음껏 우리가 하도록 허락을 하시고 완전히 그것을 뭉개버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싶을 때는, 기도가 당기고 끌릴 때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시기 바랍니다. 해도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기도할 때는 그 기도에 대한 응답까지 스스로 조작해내기에 그렇습니다. 헛된 사람이 헛된 기도하면서 그 기도에 대한 응답도 헛되게 조작해 내거든요. 그러니까 마음껏 우리가 헛되게 살게 만들고 그것과 전혀 예상 밖의 결과를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과 함께 동행한다는 사실을 외부에 증거케 하시는 겁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 구경하고 싶어서 갔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로마 구경 못해서 한 맺힌 것도 아닌데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그럴 때 로마 황제가 마차 보낼 줄 알았지요. 로마에 갈 때도 곱게 보내지를 않습니다. 폭풍이 일어나서 죽는지 알았어요. 죽는지 알았지만 그 와중에 얼토당토않게 멜리데의 추장을 구원하잖아요. 뱀, 그것도 준비된 뱀, 그 뱀이 아이온에서 나온 사건으로서 지상과 접촉이 되니까 때가 되매 독사가 나타났고 때가 되매 물었고 때가 되매 독이 퍼지지 않았고 때가 되매 추장은 화들짝 놀랐고 때가 되매 사도바울보고 신의 아들인줄 알고 착각했고 때가 되매 사도바울은 그 추장에게 복음을 전했고 때가 되매 사도바울은 로마에서 목 베임을 당해 죽었고, 사도바울은 그냥 죽었잖아요.

 

죽었다고 하지 말고 아까 우리가 생각한 그 의미대로 합시다. 사라진 거예요. 사라졌으면 어디 갔는가? 사라진 사람보고 어디 갔느냐고 하는 것은 실례의 말씀입니다.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사라졌다면 아브라함은 없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 아브라함, 그 이삭, 그 야곱은 웬 존재인가? 그 사람은 웬 일인가? 언약이 인간이 믿을 때만 언약이 개시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이미 언약이 아브라함을 이 땅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생각한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사라졌어요.

 

사라졌는데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아브라함은 본인도 몰랐지요. 내가 누군지 몰랐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름으로, 그것은 신약에는 주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은 창세전부터 하나님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이미 이야기가 끝났어요. 두 분이 주니까 “주께서 내 주에게” 이렇게 두 분 사이에 다 이야기가 끝났는데 그 끝난 것이 언약으로 실제 화되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가 되는데 그 두 분이 의도한 바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선택받기로 되어 있어요. 베드로가 까불고 설칠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베드로야, 까불지 말라. 마귀가 너를 청구하기 위해서 청구서 내놨다.” 마귀가 “하나님, 베드로만큼은 지옥에서 참하게 모시겠습니다.” 이미 결재 판이 올라갔는데 주님께서 사인을 안 하고 “주여, 베드로는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마귀하고 예수님하고 이야기한 것도 베드로는 모르고 “죽기까지 제가 주님에게 충성하겠습니다.” 하고 되도 않는 소리를 한 거예요. 이미 베드로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께서 언약 적으로 관여를 했었습니다. 했는데 베드로가 그것을 알 리가 없지요. 철도 없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베드로가 철이 없지요. 하지만 나중에 베드로가 예수 믿고 소급해서 보니까 창세전부터 베드로는 베드로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그동안 보살핌을 받아 온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임시적인 이름이고 처음부터 베드로의 이마에 박혀 있는 이름이 뭐냐,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리스도이름이 박혀 있는 셈으로서 잠시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그 이름도 자기가 지은 이름이 아니고 누가 지어줬어요?

 

주의 이름으로, 주께서 “너는 이제부터 이름을 베드로라고 해라.” 해서 특별히 언약 적으로 그 기능을 부여받은 거예요. 그러니 그 베드로는 빼도 박도 못해요. 모래사장 되려고 해도 안돼요. 반석이 돼야 돼요. 언약 적 차원에서 이름을 받아놨기에 가차 없이 언약 적으로 시행하다 보니 베드로는 반석이 돼야 되는데 이 반석이라는 그 이름가지고 베드로 나름대로 우상 적인 요소가 발휘되어서 “이 사탄아, 물러가라.” 이런 잔소리를 들었지요.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반석 되게 하셨잖아요. 베드로가 그 사실을 알 때 “처음부터 내가 나 된 것은 주의 이름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피조물로 태어나야 했었군요.”라고 고백을 할 수밖에 없어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하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이렇게 만들어졌다는 말씀을 하게 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누비이불, 밑에는 허무한 것을 받치고 위에는 주의 이름이 있어서 친히 성령을 통해서, 또는 구약은 언약을 통해서 이것을 누벼버리면 이 바늘이 통과할 때마다 피가 튑니다. 왜 피가 튀느냐, 모세율법에 의하면 언약은 제사가 있어야 되고 제사는 피 있는 제물이 포함되어야 되기에 구약부터 이미 짐승이 피를 흘렸다는 말은 피를 흘려야 이것이 결합이 된다는 말입니다.

 

결합이 되니까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이 말은 피가 있은즉 용서가 된다는 말이죠. 용서하시는 피가 흘러서 이 존재를 처음부터 생각했던 그 주의 이름으로 영광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소, 하나의 집합체인 천국을 구성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이 이것을 알았으면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지금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 때문에 우리가 하루하루 살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 앞에 또는 주님께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그럼 너는 뭐냐?” “나? 바람? 나는 바람.” “나의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바람. 김 범용이가 전도서를 알았는지는 모르겠어요. 바람이니까 제발 바람 티를 좀 내 주세요. 바람피우라는 말이 아니고요. 꼭 이렇게 잘난 척을 해. 주님께서는 허무와 심판 사이에서, 아까 이야기했지요, 잔챙이들 다 떨어내게 하는 겁니다. “공부 좀 했어? 허무해. 돈 벌었어? 허무해. 네가 예술 한다고? 허무해. 노력했다고? 허무해.” 전부 다 떨어내는 거예요. 우수수 다 떨어지게 하는 거예요. 잘난 것 다 떨어지게 해요. “오래 살았어? 허무해. 네가 열심히 살았어? 허무해. 네가 착해? 허무해. 네가 어느 마을의 왕궁에서 큰 도움이 되었어? 그래서 너로 인해서 그 왕이 잘 되었어? 다 소용없어. 왕은 네가 한 모든 일들을 잊을 거야.”

 

그러니까 제가 두 번째 시간에 이야기를 했던가요? 육신의 즐거움을 영적으로 해결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육신으로 해결하세요. 이 땅에서. 남는 것은 이것밖에 남는 것이 없다는 거예요. 육과 영의 경계선으로 밀어붙이는데 육과 영의 경계선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하면 허무로 되어 있어요. 허무인데 이게 상처딱지처럼 딱 들러붙어 있어요. 나중에 이 3차원이 2차원으로 바뀌면서 하나의 표면처럼 되는데 이게 무슨 효과냐 하면 표면효과에요. 딱 붙어 있어요. 여러분, 옛날에는 수박 속을 보기 위해서 삼각형모양으로 파보잖아요. 표면은 파랗잖아요. 파란데 삼각형으로 파서 뽑아내면 그 속이 빨갛게 나타나요. “익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파보니까 익었잖아요. 파보면 허무가 우리 육신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이것은 스냅사진이니 표면이 딱딱하니까 이것이 아니라 어디를 치느냐 하면 이 표면의 속을 팝니다. 네가 잘난 체한 것 말고 너를 잘난 체하도록 만든 이 허무한 것에 대해서 주님의 용서가 주어지게 됩니다. 주어지게 되면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게 하고,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아야 될 사람을 기어이 구원하는 이 작업에 나서시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복습했다고 치고 이제는 전도서에 있어서 언약으로 통하는……, 제일 중요한 부분이 이제 시작되네요. 이 허무에서 하나님의 천국까지 이어지는 그 통로를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어내시는가? 그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전도서 8장 7절에 보면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크로노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래에서 찾아오는 일을 인간은 알 수가 없지요. 8절에 계속 보면 “생기를 주장하여 생기로 머무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고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악이 행악 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 이렇게 해서 인간은 바짝 말라붙은 하나의 스냅사진같이 깊이도 없고 그런 모양으로 된 거예요. 저는 이것을 가지고 ‘응고 화’라고 합니다. 응고가 무슨 뜻이지요? 딱딱하게 굳은 것이 응고지요.

 

제가 아까 인생이라 하는 것은 변곡점이 있어서 한 두 번이 아니고 온갖 것을 다 거치면서 변화가 무쌍합니다. 참 복잡해요.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 냉동보관 시켜버립니다. 그러면 응고, 딱딱하게 굳어버립니다. 이 전체가 허무하니까. 그런데 인간은 나름대로 이 틈새에서 이 수평선(전체 그래프상의 곡선의 부분을 잘게 자르는 미분같이), 이 동일성을 유지하는 이것을 인간은 자아라고 해서 이 허무 속에 응고된 이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를 펼치려고 그렇게도 애를 쓰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주의 이름이 아니고 누구의 이름을 증거 합니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살기에 이것이 뭐냐, 이게 바로 우상 신을 섬길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응고화 작업을 하는데 이 응고화는 다른 말로 하면 물질화,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을 사물화라고 해서 이것이 굳어버리면 칸을 지울 수 있어요. 칸을 지울 수 있기에 이것을 가지고 규격화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을 하나하나 떼어내면 이것은 양적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이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뭐가 되느냐하면, 결국 인간이라 하는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거리의 시장에 내놓는 하나의 상품이 되는 겁니다. 오늘도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거리에 내다 파는 괜찮은 상품, 수박이나 참외로 혹은 자두로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스펙을 쌓는데 돈 번 것 다 때려놓고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지요.

 

컴퓨터, 영어, 해외연수. 이런 것은 다 뭐냐 하면 시장에 내놓을 때 양질의 상품으로 내 놓기 위함이지요. 수능만 끝나면 성형외과 찾아가서 딸애 얼굴 견적 내서 김 태희처럼 해 달라는 식으로 하는 것은 하나의 좋은 상품이 되어야 되거든요. 좋은 상품,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좋은 신붓감, 좋은 신랑감 만들겠다는 거지요. 이것이 상품규격화인데 이게 다 허무하게 딱딱하게 응고화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약간 어려운 것, 중요한 것이 있는데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면 언약밖에는 뭐가 있다? 우상이 있지요. 제 강의는 주로 성경을 제가 혼자 찾아서 읽습니다. 왜냐하면 이것 보는 것도 여러분들이 피곤하실까 염려되어서 그래요. 사무엘상 5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갔습니다. 언약궤를 빼앗아 갔으니 이미 소유한 거지요. 그러면 소유권은 블레셋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 언약궤를 다곤이라는 신상이 있는 신당에 두었어요. 첫날에는 다곤 신상이 엎어져 있었습니다.

 

누가 건드렸나, 싶어서 다곤 신상을 일으켜 세웠어요. 세웠는데 그 다음날에 보니 손모가지, 발모가지, 모가지, 마디마디 모가지란 모가지는 다 부서졌습니다. 인간은 빠지고 누구와 누가 밤새 붙었는가 하면 언약궤란 아카시아 나무로 되어 있는 그 상자와 다곤이라는 그 신상, 돌인지 나무인지 하여튼 그 신상과 밤새도록 한 판 붙었는데 그 다곤 신상이 맞아도 너무 많이 맞았어요. 이것은 전치 8주? 8주가 뭡니까? 엄청나게 얻어맞아서 마디마디가 다 부서졌으니까. 처음에는 한 방 맞아서 그냥 엎어진 상태였는데 두 번째는 아예 아 부서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에 권투글로브를 끼워놓았습니까? “언약궤 아저씨, 우리가 없더라도 혼자서 쳐부숴보세요.” 해서 언약궤에 권투 글로브를 얹어 놓으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해서 다곤 신상을 라이트, 레프트, 훅, 펀치를 날려서 2회전에 때려눕힌 겁니까? 만약에 이 언약궤가, 만약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 언약의 완성이 우리 몸에 들어왔다면 우리 눈에는 뭐가 보여야 되는 겁니까? 무엇이 헛되다는 것이 보여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 당시 블레셋 사람의 입장에서 봅시다. 블레셋 입장에서 볼 때는 언약궤가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영웅적 인물도 아닙니다.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니에요.

 

그럼 뭡니까? 아카시아 나무로 금박 입힌 거예요. 하나의 사물에 불과해요. 물질화, 사물화, 경계가 있고 응고되어 있는 딱딱한 상자가 언약궤입니다. 그런 언약궤인데 다곤 신상을 때려 부수려면 도대체 어지간한 어퍼컷을 날려서는 안 무너지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묻고 싶습니다. 누가 다곤 신상의 안면을 쳤습니까? 지금 이 문제가 풀려야 언약으로 통하는 그것이 연결돼요. 지금 그냥 그 다곤 신상 앞에 언약궤를 놓기만 했다니까요? 언약궤 놓고 다곤 신상 놓고 이렇게 마주보게 놓았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한 이유가 뭐냐 하면, ‘역시 우리 다곤 신이 이스라엘 언약궤의 신을 이겼다.’ 하는 식으로 놓았는데 아침에 가서 보니 그 전세가 역전되어서 다곤 신상이 깨졌습니다. 그러면 그 다곤 신상을 누가 때린 겁니까? 하나의 물체가 깨진다는 것은 그 물체의 분자구조가 깨진다는 말이고 분자구조가 깨진다는 말은 그 분자구조 사이사이의 강력, 에너지가 해체되는 것을 말하거든요. 이렇게 복잡하게 안 해도 쉽게 해도 그냥 깨지는 거잖아요. 그 말은 더 큰 에너지가 들어왔기에 깨졌잖아요. 그러면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1번, 언약궤에서 자동으로 나왔다. 2번, 사실은 언약궤에 이스라엘이 비밀병기를 숨겼다. 3번, 언약궤는 있는데 언약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비밀요원을 보내서 마치 딱딱한 나무상자가 신비적으로 신상을 깬 것으로 위장해서 다곤 신상을 깨버렸다. 4번, 4번은 할 수가 없네요. 인간 쪽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다 했어요. 그 해답은 이렇습니다. 사실은 블레셋이 언약궤를 향하여 시비를 건거예요. “언약궤야 아무리 까불어도 우리 다곤 신상 못 이기지?” 블레셋 사고방식은 “다곤 신은 그냥 하나의 나무나 돌덩어리가 아니고 신비로운, 요새 말로는 팔레스타인이죠, 우리 팔레스타인을 지켜주는 신비로운 힘이 발산되는 신임을 언약궤야, 이제야 똑바로 알았느냐?” 하고 먼저 배틀, 전쟁을 걸어 왔다는 말이지요.

 

가인이 먼저 제사를 드렸잖아요. 개시하는 것이 인간이 그냥 물질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신비한 영험이 함께 있다는 그 아이디어, 마치 그것이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디어를 인간 쪽에서 먼저 내미니 주님께서는 그것을 거부한 거예요. 거부하면서 인간과 같은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주는 겁니다. “그래? 다곤 신이 단순히 나무가 아니고 실제로 영험한 것이 나온다고? 그러면 너희가 제대로 영험한 것을 한 번 맛볼래?” 그래서 언약궤 앞에서 다곤 신상이 부서지니까 블레셋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다곤 신상에서 나오는 그 영험적인 기운보다 언약궤에서 나온 영험적인 기운이 더 세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옳은 생각입니까, 틀린 생각입니까? 당연히 틀린 생각이지요. 왜냐, 언약궤는 그냥 나무고 다곤 신상도 그냥 나무나 돌이에요. 둘 다 물질화 되어 있어요. 물질화 되어 있지만 여기에 의미를 둔 것은 뭐냐, 다곤 신을 섬기는 자가 다곤 신에 의미를 주니까 거기에 맞받아쳐서 언약궤가 여호와 하나님도 그것 못지않은 영험이 있음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너희의 물질에 영험이 있다는 그 미신적인 요소들을 미신적인 방법으로 내리치시는 거예요. 그 언약궤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디아나 존스> 제 3편에 보면 언약궤가 독일군 죽이고 파괴되었어요. 그러나 실제로 성경에서 보면 BC 586년에 성전이 불탈 때 언약궤도 같이 불타버렸습니다.

 

왜 불탔습니까? 불타야 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웃사가 언약궤 만지다가 죽는다든지 언약궤 잘못 다루다가 죽는 것이 그 만큼 의미가 있잖아, 하는데 그것은 그 당시에 언약궤에 대한 종결적인 의미, 마지막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언약궤 자체에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니까 그것에 맞받아서 “그래, 의미 있다. 한 번 죽어봐라.” 그 당시 그 인간들을 죽여서 무로 돌리고 흙으로 돌리는 하나의 방식, 인간이 사용하는 그 방식 그대로 다시 되갚아 주는 식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그것이 이스라엘역사였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꿈으로 계시한다. 맞지요. 하나님이 꿈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야곱에게 꿈으로 계시했습니다. 하나님이 꿈으로도 계시한다. 따라서 내가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다. 그것 개꿈입니다. 왜냐, 꿈으로 계시한다는 그 의미를 내가 성경말씀에다 부여했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허무로 돌리기 위해서 “그래, 개꿈이야.” 하면서 그 꿈대로 이루어주면서 그 인간을 조져버리지요. “하나님이여, 제가 예수 이름 빠트리지 않고 붙였으니 이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랍니다.” 주께서는 그 응답대로 해 주면서 그 인간을 제거해 버리고 말아요.

 

왜냐, 이미 내 기도에 무슨 효험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허무하지 않은, 무가 될 수 없고 죽지도 않아야 될, 아직 존속해야 될 나 자신을 아직도 아끼고 살아가는 것이 다 내 이름을 위해, 다른 이름을 절대로 거론하지 않고 오직 내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는 허무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사용해서 그 인간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려요.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일이 우상이니까. 아직까지 통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수련회 한참 지나가는데 아직도 언급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언급하겠습니다. 사무엘상 23장 9절, 이것은 찾아봐야 됩니다. 제가 찾아보라고 한 것은 시험에 나오는 것이니까요. 23장 9절을 누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사울의 자기를 해하려 하는 계교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참 재미있는 현상이 제사장 아비아달이 에봇을 입고 있는데 에봇은 제사장 유니폼입니다. 제가 삼성 야구장에 가서 뛰는 선수한테, 채 태인한테 유니폼 좀 벗어달라고 하면 말이 안 되거든요. 제가 LA다저스투수 류 현진한테 야구유니폼 벗어달라고 하면 안 되거든요.

 

여기 제사장은 모세언약, 율법언약에 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쫓겨 가는 입장이거든요. 그 입장에서 에봇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모세 율법에 의해서 적용되는 그것이 드디어 뭐로 이동하는가하면 다윗언약으로 이동하는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는 방식이 율법에서 드디어 하나의 인격으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에봇을 가져오라고 한 겁니다. 그리고 에봇을 가지고 온 뒤에 다윗이 묻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도망갈까요, 아니면 말까요? 사울이 저를 찾겠습니까, 아닙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응답을 하지요.

 

그렇다면 응답의 통로가 둘이 될 수 없거든요. 하늘의 태양이 둘이 될 수가 없듯이. 그러면 응답의 통로가 다윗의 존재로 주어지면서 이제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그 모든 경우들이 모여서 다윗 언약을 형성합니다. 언약이 형성되게 되면……아까 언급을 했습니다만 듣고 돌아서면 백프로 잊어버렸을 것이고. 아까 누비이불을 했지요? 언약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과 더불어 그 밑바닥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허무한 이름이 있어줘야 이게 언약이 돼요. 달랑 예수님의 이름만 언약이 아니고 예수님의 언약이 드러나면 우리가 왜 허무하냐를 같이 봐야 돼요.

 

언약궤가 무엇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곤 신상 앞에 보관이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그 다곤 신상에 대해서 얼마나 큰 효과를 그동안 봤고 다곤 신상을 얼마나 신앙 했는가가 명확해진 가운데 언약궤가 투입되어서 이 신상의 손모가지 발모가지 다 부숴버릴 때 비로소 언약은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이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시키고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거예요. 우리의 육신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허무를 허무답게 드러내는 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쫓겨 다니게 하잖아요. 추적자는 누구인가, 사울입니다. 사울로 하여금 추적하게 함으로써 누가 언약이고 누가 언약이 아닌지 다른 사람들이 보도록 조치를 하는데 그 구체적인 것은 십분 쉬고 하겠습니다.

 첨부파일 : 2013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제5강).hwp (38.0K), Down: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