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4강

아빠와 함께 2013. 8. 6. 16:18

제 4강

죽음이라는 것이 내가 죽는 것, 내가 죽는 것은 개인의 죽음이지요. 내가 죽는 것, 네가 죽는 것, 할아버지가 죽는 것, 아버지가 죽는 것을 다 끌어 모으면 죽음을 묘사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해도 죽음이라는 것이 표현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죽음이 왜 있어야 되는가, 라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이 있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살아 있기에 죽음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죽음직전에 있다고 한다면, 죽음이 바로 코앞에 있다고 한다면 기껏 살아온 것이 무엇 때문에 살아온 것이 되느냐하면 죽기 위해서, 이 죽음이라는 끝장이 나기 위해서, 그동안 우리는 죽음을 코앞에 맞대기 위해서 살아온 셈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 순간 느끼느냐, 어떤 힘을 느끼는데 그 힘은 내가 살고자 하는 힘이 있고 그 힘보다 훨씬 센 힘이 그동안 따로 나를 추적해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기어이 나를 잡아먹은 거예요. 버틴다고 버텨봤자, 때로는 웃기도 하고 때로는 캠핑도 가고 때로는 행복에 겨워했지만 이미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는 그것이 전부다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아쉬운 거예요. 원래 후원군이 많으면 대장 앞에서도 ‘우리 편이 몇 명?’ 하고 달려들 수 있는데 사람은 죽음 앞에 딱 서게 되면 그 동안 우리가 살아오면서 행한 그 모든 노력들이 뒤돌아보면 ‘다 어디 갔지?’ 다 사라져버렸어요. 머리도 하얗게 쇄버리고.

자기에게 용기를 북돋아줄 후원자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홀로 죽음에 눌려서 기침도 나고, 심장도 아프고, 온 몸이 아프면서, 슬슬 눈도 감기면서, 모든 것이 주저되면서 결국 자기가 ‘사라진다.’ 사라지는 거예요. 사라진다는 것을 죽음 직전에 비로소 느끼지요. 내가 사라진다, 이것은 내가 없어지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내가 없어지는 마당에 좀 전에 있었다는 그 있음은 있음이 아니고 없어지기 위해서 잠시 등장한 것뿐이니 결국 없어지지요. 그렇다면 논리가 어떻게 되느냐하면 처음부터 나는 있었다, 없었다? 없었다, 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흔적’이라고 합니다. 그냥 흔적만 남기고 살아가는 거예요. 현대예술에서 보면 그냥 선만 죽죽 긋는 거지요. 폴록이라는 미국의 현대추상 화가는 페인트를 막 뿌리고 흘리면서 그리지요. 그냥 흔적만 남기는 거예요. 내가 여기에서 액션, 움직였다는 흔적만 보여주는 겁니다. 왜 그런가, 예술은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구원할 때만 예술이 된다는 거예요. 인간의 이성은 모든 것을 따지는 법인데 아무리 따져도 못 따라올 지경까지 내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이 시대의 구원자 노릇을 하겠다고 한 것이 뭐냐, 모든 것을 다 무로 돌리는 입장에서 모든 흔적을 지우는데 그 흔적을 지우면서 빠져나가는 흔적만 보여주는 것.

그렇다면 그래서 결국 남는 것은 무덤의 십자가만 달랑 남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추석 때나 명절에 무덤에 소주 뿌리고 절하지요. 젊을 때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그 앞에서 하루 종일 울다가 “아이고, 이 자식아! 변산반도까지 가기는 왜 가서 장가도 못가고 죽었느냐?” 하면서 때마다 정기적으로 울 거예요. 너는 흙에 묻는 것이 아니고 내 가슴에 묻는다, 해서 어떤 위로도 소용없더라고 마태복음 2장에 나오잖아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갓난애들을 헤롯이 죽일 때에 너무나 가슴 아픈데 누가 위로해 줍니까?

그 원인자가 누구냐 면 바로 헤롯이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아기예수의 출현이지요. 아기예수, 예수가 이 땅에 왔다 간 것은 그냥 평화롭게 살던 이 땅 빌리지, 크로스빌리지는 아닙니다, 이 마을을 완전히 속과 겉을 뒤집어놓는, 그동안 인간들에 의해서 발각되지 않았던 그 어두운 세력과 인간에게 찾아오지도 않았던 그 빛의 세력의 전쟁터로 돌변하는 겁니다. 이것이 종말에나 일어날 현상입니다. 청일전쟁 때 청나라와 일본군이 싸운 그 장소가 어디냐 하면 한국 땅이잖아요. 그러니 이것은 남의 땅에서 저희들끼리 개싸움 하는 거예요.

동네개가 우리 집 마당에서 싸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영화 <활>에 보면 그게 나와요. 어디서 남의 땅에 들어와서 싸움을 하느냐는 거지요. 죽음이 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겁니다. 이것을, 이러한 흔적들을 방금 개인적인 죽음으로 이야기했는데 이것을 집단으로 확대를 시켜보자는 겁니다. 아까 스티븐 호킹 이야기를 했는데 블랙홀이라고 있거든요. 중력의 구멍이죠. 어느 경계선까지는 기존의 물리학법칙이 적용되다가 그 너머 블랙홀 안에서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물리학에서는 ‘사상의 경계선’이라고 합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모든 것은 사상의 경계선까지만 오고 여기부터는 그 정보가 남느냐는 그 문제를 가지고 다퉜습니다. 서스킨드(Leonard Susskind, 1940~) 교수는 사상의 경계선을 지나도 정보가 남는다고 주장했고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1942~) 박사는 모든 정보가 다 찢어진다고 주장하면서 둘 사이에 논쟁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죽음의 경계선은 어떻게 되는가, 이 죽음의 경계선은 올 때 우리 인간이 나오게 되면 여기서 뭐가 결합이 되느냐, 언약이 결합이 됩니다. 언약이 결합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그것을 언약이 마주하면서 지금부터 사는 것은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언약의 힘으로 이 죽음을 극복하고 하늘의 형상을 입고 부활로 등극시키는 위력이 언약 완성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능력이 ‘내가 산다’가 아니라 나를 죽일 때 제대로 죽이는 거예요. 그냥 죽여 버리면 ‘나는 사라진다. 그러면 내가 그동안 왜 살았지?’ 허무주의에 빠지는데 여기서 그동안 살아온 사실을 소급해서 보면 그동안 살아온 것도 내 힘으로 살아온 것도 아니고 주께서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동안 계속 살게 하신 거예요.

살게 했다가 결정적인 완성은 뭐냐, 언약을 마주쳤을 때 결정적으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살았어요. 요한복음 11장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고 합니다. 안 믿으니 예수님께서 우시고 마리아의 오빠가 이 세상에서 제대했는데 그것을 또 불러내잖아요. 군에서 제대했는데도 또 불러내요. <진짜 사나이> 프로 같아요. 나이 40넘어 늙수그레해 가지고 젊은 조교한테 반말 들어가면서 그러고 있어요. 물론 돈 번다고 하겠지만.

군 제대했는데 다시 군대 가는 식으로 다시 불려나왔다가 다시 죽었어요. 군대생활 두 번 한 거예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얘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말합니다. “잔다.” “죽었습니다.” “잔다.” 이것은 같은 현상을 다른 차원에서 본 거예요. 언약에서 보게 되면 이 사람은 자는 것이고 언약을 모르는 입장에서 이 사람은 죽은 겁니다. 그래서 언약을 모르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기에 웁니다. 그런데 언약을 아는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울지 말라.” Don’t cry for me…, 이런 노래도 있지요. 울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은 울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는 놈은 다 나가!” 그렇게 하고 난 뒤에 “계속 자고 있기는. 그만 자라.” 하고 손을 잡아당기니까 그 소녀는 “아우, 잘 잤다.” 하고 일어났거든요. “어디 갔다 왔어?” 하니까 “잠 좀 잤는데요. 왜 이렇게 호들갑?” 이렇게 나왔을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봐도 ‘주안에서 자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주 안”입니다. 여기서 ‘주’가 뭐냐, 언약을 완성하신 분을 ‘주’라고 해요. 복음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제일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뭐냐, 언약으로 설명하는데 사람들이 존재로 알아들어요. 예수라는 존재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예수라는 존재를 믿으면 구원받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믿는다, 그러면 구원받지 못해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믿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고 그것이 언약의 완성입니다.

예수님마저도 언약완성을 이루려고 한 것인데 예수님 믿는다고 해서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 사람들이 누구냐, 열두 제자들이었고 그 외에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제자들이 예수님 잡힐 때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 잡힐 때는 때가 되매,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로 인하여 숨겨져 있던 사건이 이 지상과 만날 때 십자가라는 비극으로 만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보기에는 비극인데 주님은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온전하게 하옵소서.’가 이 지상에서 분명하게 완전히 드러난 거예요.

누가 이해했는가? 예수님 빼놓고 누가 이해했습니까? 아무도 이해 못했어요. 심지어 막달라 마리아나 그 밖의 사람들도 예수님이 시신이나 어떻게 좀 수습하려고 했지요. 날짐승에게 뜯기지 않게 하려고. 아리마대 요셉, 이 사람이 교회에서 좀 부자였던 모양이지요. 하여튼 돈 좀 있다 하면 잊지를 못해요. 로마병사에게 돈 좀 먹여서 시신 챙겨서 무덤에 안장을 했죠. 막달라 마리아가 사흘 만에 예수님 찾아간 것도 시체가 훼손되지 않고 잘 있는가 보려고 찾아갔지 부활을 믿었기에 간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부활 믿은 사람 없고 예수님 죽은 십자가도 믿은 사람 아무도 없으니 안심하소서!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좀 즐깁시다. 우리가 좀 만족스럽게 여깁시다. 제발 믿는 사람한테 기죽지 말고 쫄지 말고. 믿음 없어도 주께서 구원하면 구원된다는 것을 믿읍시다. 사람이 믿어봐야 치매 걸리면 다 헛것이라니까요. 평생 믿어도 치매 걸려서 요양병원에서 판정 받아버리면 나 훈아 노래나 틀고 있다니까요. 그렇게 유행가 틀지 말라고 하면서 나를 무시하느냐, 했던 권사들도 치매 걸리면 “청춘을 돌려다오.” 그 노래나 좋아하고 있어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많은 기대를 걸지 마세요. 우리는 벌써 변곡점에서 꺾였다니까요. 아까 한 것 다시 해볼게요. 이렇게 변곡선이 꺾이니까 꺾일 때마다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포기를 안 해요. 이 평평한 부분을 잘라서 이것이 바로 나라고 자기 일기장에 쓴다니까요. “오늘도 아침은 청명했다. 섭씨 30도라지만 왠지 기분 좋은 아침이다.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했다.” 이렇게 썼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당신은 왜 시베리아 추운 이야기는 안하는가?” 라고 시비 걸면 뭐라고 하겠어요? “이 일기는 내 일기이기에 내가 느낀 것만 씁니다.”라고 했을 때 그 사람 말이 “당신이 여기서 여기까지 나라고 하게 만든 주변의 인과관계로 연관된 그 모든 사태를 고려하지 않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끊었습니다.”라고 한다면 이 일기를 쓴 사람은 그 사람에게 뭐라고 답변할 수 있을까요? “너무 치밀하게 살지 맙시다. 그냥 편하게 좀 보세요.”

“왜 당신은 이것을 나의 일기장으로 보느냐는 말이지요. 당신은 이런 감정이 들고 이런 글을 쓰게 될 때까지의 주변영광을 다 감안해야 당신의 백 프로 옳은 일기장이 될 수 있는데, 백 프로 옳은 역사를 쓸 수 있는데.” 이렇게 나온다면? “그것은 내가 그걸 못하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전도서 1장 12절을 모르는 거예요. “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내가 모든 것을 연구해서 그것이 정답이라고 여겼는데 돌아서니 그것이 정답이 아니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일기를 쓸 때 아까 말한 것처럼 쓰면 안돼요. “오늘도 해는 떴지만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그 다음에 7월 29일, “오늘도 헛되다.” 그 다음에 7월 30일 “오늘도 백날 해 봐야 헛되다.” 취직해 봐야 헛되고 북한에 쌀 보내봐야 헛되고. KBS 뉴스 시간에 “오늘도 헛된 날이었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죽음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어려운가, 내가 죽는다고 해서, 세상이 헛되다고 해서 우리가 죽음을 취소시키지 않습니다. 헛되다고 이야기한 그것도 죽음에다 집어넣어버려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 헛되다는 정보를 입력했다고 해서, 헛되다는 정보를 갖고 있기에 설마 나만은 헛되지 않겠지, 라고 한다면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아까 목욕탕에서 질문을 하셨어요. 뭐냐, “내가 죄를 깨닫는 그것도 죄입니까?”라는 질문을 하셨어요. 그것도 목욕탕에서! 장소가 문제겠습니까? 크로노스에서는 이것이 해결이 안돼요. 왜냐, 크로노스에서는 시간이 있는데 이미 현재라고 할 때 그 현재는 과거를 재편집합니다. 왜, 현재의 나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왜 동일성을 유지하려고 하는가, 그 동일성이 나의 자아기 때문에 그래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하면 “나는 하루에 물을 일 리터 먹습니다.”라고 답변하는 것도 사실은 맞는 이야기거든요.

“아니요. 그거 말고 당신의 직업이 뭐냐를 물은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당신은 왜 직업을 통해서 나를 알려고 합니까? 당신은 하루에 물을 몇 리터나 마시는지 그것을 통해서 나를 알려고 하지 않는 당신의 저의가 뭡니까?”라고 나온다면 그 말이 맞거든요? 결국 질문자는 그 사람이 진짜 누구냐가 궁금한 것이 아니고 자기하고 비교해보려고 질문한 거예요. ‘나의 직업은 이것인데 너의 직업을 꺼내봐라. 누가 더 센가?’ 시합하고 비교경쟁하려고 그런 질문을 해댄다 그 말이지요.

여자가 남자를 사귄다. 그러면 묻는 사람이 “그 남자가 뭐하는 사람인데?” “내가 사귀는 남자의 신발 사이즈가 275랍니다.” “그런 것을 물은 것이 아니고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버느냐, 그 말이야.” “엄마가 그런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평소에 엄마가 돈 버는 것만 신경 썼기 때문에 돈 버는 남자를 원했고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맞잖아요.” 하면 엄마가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신발 사이즈 큰 애가 너를 살리는 것이냐?” 하면 “나는 신발 사이즈 큰 애가 좋은데 어떻게 합니까?”

이런 단편적인 질문들이 이스라엘 왕의 입장에서는 결국 죽음의 힘에 의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음을 야기 시킨 허무라고 보는 겁니다. 모든 우리의 질문이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냥 연구하지 않고 질문 던지고 나름대로 해답 얻고 질문 던지고 나름대로 해답 얻잖아요. 그 모든 연구들이 다 해보니까 헛되더라는 말입니다. 교재를 오랜만에 봅시다. 교재 2페이지를 봅시다. 교재 2페이지 “(1) 율법의 투입으로 야기되는 지혜와의 충돌”이라고 되어 있는데 왜 이런 글을 썼느냐 하면, 지금 모든 것이 허무에 갇혀 있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해서 언약과 통할 수 있는 숨통이라도 틀 수 있는 그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여기 보면 민수기 15:27-28절에 보면 “만일 한 사람이 그릇 범죄 하거든 일 년 된 암염소로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 그릇 범죄 한 사람이 그릇하여 여호와 앞에 얻은 죄를 위하여 속죄하여 그 죄를 속할찌니 그리하면 사함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무슨 단어가 나오느냐하면 죄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만일 한 사람이 그릇 범죄 하거든.” 범죄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전도서에는 범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도서에는 범죄가 없어요. 왜 죄가 없느냐하면 언약을 모를 때는 죄가 없어요. 여러분, 처음 듣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죄, “목사님,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말은 “저의 나머지는 괜찮은 존재입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일종의 반성하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대견스럽고 아름답게 보였기에 목사 앞에서 자랑 질을 하는 겁니다. “목사님, 저는 반성할 줄 아는 훌륭한 인간입니다. 저에게 칭찬의 박수를 보내주세요.” 그걸 회개라고 해요. 아예 회개라는 이름의 자랑 질을 해요. 그것도 기간 정해서 해요. 꼭 부활절 앞두고 일 년 할 자랑 질을 다 하는 겁니다. 굶어가면서 자랑 질 하면서 고난주일 지킨다고 하는 거예요.

금식 끝나는 날은 기다렸다는 듯이 팔보채 시켜서 그동안 못 먹은 것 실컷 먹으면서. 사실은 금식하는 것이 회개하는 날이 아니고 살 빼는 날, 다이어트 했다가 금요일에 끝나면 기름지게 먹으면서 원상 복귀하는 거예요. 금요일 마지막이 하이라이트 아닙니까? 주께서 고난당한 것을 생각해서 6.25때 고생하면서 먹은 떡을 생각해서 쌀 걷어서 떡 해먹으면서 없는 사람들도 생각하고 도와주기도 한다는 것인데 그 6.25 떡 먹으려면 그 때 쳤던 더러운 텐트도 치고 거기서 먹어야 돼요. 어디서 감히 연출을? 타고난 연기력을 보이려고 합니까?

죄라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인간은 죄를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세상 못된 죄란 죄는 다 지어도 그것은 죄 아니거든요! 그것은 죄가 아니에요. 결론은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인 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했어요. 어떻게? 타고나면서 죄인 되는 그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가 죄를 지어서 그 죄를 아는 방식에 대해서 주께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극도로 달려드는 사람들은 소위 죄인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고 누구였습니까?

자칭 의인이라고 여긴 사람들, 최고의 의인, 천하에 그런 의인이 없을 정도의 최고의인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가장 근접해서 살해했고 주님이 거기서 작전성공이라는 신호를 아버지께 보낸 겁니다. “아버지!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마귀가 자기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구원이 되려면 바리새인을 목사로 앉혀야 돼요. 앉히고 싶지 않더라도 교인들이 이미 앉혀놓고 있습니다. 앉혀놓고 그 바리새인들이 이야기한 그것이 자신들의 목표, 자신들의 선한행동의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계기를 줘야 돼요.

이 정도 돼야 여러분은 성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는 숙제를 목사로부터 부여받게 되고 교인들은 그 숙제를 해 가면서 ‘목사, 기다려. 언젠가는 너를 따라 붙일 거야.’ 목사가 좀 시원찮다 싶으면 가끔은 목사가 아닌 안 이숙 여사 같은 분, 혹은 아마존에서 선교하는 분들 초청해서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하면 그 중에서 미친 여자 분들은 “까짓 거 아마존에는 못 들어가랴.” 해서 아마존 들어갈 계획 세웁니다. 하여튼 교회가 가관이에요, 가관. 먹을 거 안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고 아껴서 모아놓은 자기 집 재산을 교회 교육관 짓는 일에 내 놓으면 혹자는 ‘저 사람이 미쳤다.’ 하겠지만 특히 교회에서 달리 취미가 없는 사람들, 꺾꽂이 같은 것 잘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나도 그거 못하나.’ 해서 대번에 교회에 가져다 바칩니다.

그것을 보고 목사는 싱긋 웃으면서 ‘작전성공! 부흥사와 갈라먹기.’ 성공한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천하에 똑똑한 대학교수들 다 넘어갑니다. 특히 제일 어리석은 것이 의사들. 모든 게 자존심과 자기 의를 어떻게 교묘하게 위장해서, 겸손의 티를 내고 온유하면서 자기자랑도 안하고 주께만 영광을 돌리는 형태로 교묘하게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은밀한 그 영역, 그런 교회들이 이 지상에 꼭 필요합니다. 제 말은 항상 반전이 있어요. 꼭 필요합니다.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회개, 모든 범죄, 그것은 범죄축도 못 들어가고 회개한 것도 아니고 회개한 것 자랑 질 한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범죄는 뭐냐, 언약적 카이로스, 사건이 떨어져야 돼요. 그 사건을 민수기 15장에서 뭐냐,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통해서 윗동네와 아랫동네의 구멍을 뚫어요. 이 구멍 뚫기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기 난해한 것은 이 구멍을 뚫는데 이 구멍이 일방적으로 뚫어지는 것이 아니고 밑에서 하나님과 접촉하겠다고 시도하는 모든 제사와 경건 된 종교의 지점을 주님께서는 구멍 뚫는 지점으로 사용하신다는 점이 굉장히 난해합니다. 뭔가 하면, 가인이라는 사람이 제사를 드리지요. 하나님께서 위와 아랫동네를 뚫는 그 통로는 가인의 제사 드리는 그 지점을 사용합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림으로써 한 참 올라오지요. 가인은 “하나님이시여, 주의 뜻에 의해서 이렇게 추수가 잘 되었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바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마주치면서 이걸 거부하시면서 따로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다른 제사를 하나님께서 시켰습니다. 그것이 뭐냐, 기름부위와 몸통부위를 따로 떼어놓는 제사를 드렸지요. 기름부위를 따로 떼어놓음으로써 기름이라는 이 새로운 제사의 부분을 신과 인간과 만나는 핵심요소로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이 언약으로서 이 땅과 통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다윗은 고백합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나닐 때 일어나는 사건들이 있는데 항상 다윗이 부하들에게 강조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사울 왕을 죽이지 말라. 왜, 기름부음이 그에게 있기에.”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냐 하는 거예요. 얼른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살려놓으면 오히려 다윗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잠자고 있을 때 그냥 요압이나 아비새를 시켜서 죽여 버리든지 해야 되는데 오히려 자고 있는 사이에 물병 가지고 온 그것이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사울 임금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감히 당신의 물병을 가져왔습니다. 다시 돌려보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요.

그리고 적들과의 전쟁 통에 죽어가는 사울왕의 목을 자신이 베어서 사울의 요구대로 죽게 했다고 소식을 전하니까 “너 누구야?” “아말렉 소년입니다.” 하니까 “이게 어디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나.” 하고 죽이고 국장을 열어서 노골적으로 통곡하면서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가 죽었으니 산천도 슬퍼할 것입니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사무엘하 1장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가인이 제사를 드리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죄가 올라온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가인의 입장은 뭐냐 하면, 평소에 자기도 알지요, 자신이 완벽한 인간이 아닌 것을. 하지만 제사만큼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을 것이라고 여긴 겁니다. 이것이 재미있는 대목인데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선도 알고 죄도 아니 선은 취하고 악은 버리고 그 따로 모아놓은 선의 집합체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의라고 여기는 것을 가져올 때 그 찬사를 하나님께서 놓치지 않으시고 그것이 바로 소위 의를 빙자한, 선을 빙자한 선의 극치라고 간주하고 그 지점을 주께서 놓치지 않고 그 제사를 거부해버리는 겁니다.

거기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거부하는 하나님, 인간의 의와 인간의 선을 거부하는 하나님이에요. 거부를 함으로써 그 다음의 반응을 살피는 거예요. 화를 내는지 안내는지 보는 겁니다. 백프로 화를 냅니다. 백프로 화를 냈다는 말은 제사 드리는 처음부터 ‘신이시여, 내가 드린 제사를 안 받으면 당신은 알아서 하라.’ 하는 음흉한 마음이 가인 본인도 모르는 채 이미 잠재되어 있어요. 이것을 잠재태, 잠재상태라고 하는데 인간은 현실로 나타나기 이전에 본인도 예측 못하는 잠재태가 있어요. 인간 본인이 잠재태를 예측 못하지요.

왜냐하면 자아라 하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진짜는 육신이기 때문에 육신이 하는 짓을 자아가 파악을 못해요. 실컷 나쁜 짓 하고 왜 그러냐고 하면 술김에 그랬다, 필름이 끊어졌다, 이런 소리 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술 먹으면 다시 그 짓 또 하는데요? ‘내가 왜 그 짓을 했지?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런 일을 했지?’ 원래 너의 정신은 없는 거예요. 그냥 정신이 너야! 자꾸 내 정신, 내 정신, 하니까 내 관리 하에 있는 정신이라고 여기는데 내 정신은 없어요. 그냥 정신이에요. 정신이 사태에 따라서 이렇게 튀어나오고 저렇게 튀어나오는 거예요.

술 먹으면 술김에 뭐가 튀어나오고 술 안 먹으면 딴 짓 하고, 그게 인간이에요. 어린애들 보고 순진하다 하지요. 어린애들이 순진한데 어린애들이 가장 나쁘다고 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부모 말대로 할 그 때 가장 악한 모습이 등장해요. 부모 말대로 할 때. 캄보디아나 아프가니스탄이나 아프리카의 내전에서 싸우는 군사들이 누굽니까? 열 살이나 열 서너 살 먹은 어린애들이에요. 어린애들은 집체훈련에 아무소리 안하고 그대로 따라갑니다. 이미 훈련은 끝나는데 “바닷물에 들어가.”해서 다섯 명 죽었잖아요. 그렇게 죽었는데 여섯 번째 사람이 살았다고 자랑 질을 하고 있어요.

애들은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해요. 애들은 꼭 동물 실험하는 것과 똑같아요. 단것만 주면 돼요. 그러면 개와 원숭이처럼 다를 바가 없어요. 사육이 된다니까요. 애들은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육하는 겁니다. 애들한테 좋은 소리 하는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에요. 애들은 단것만 주고 시키면 아무 이유도 원인도 목적도 모르는 채 무조건 부모 말에 기계처럼 따릅니다. 처음에는 되풀이하지만 그것을 기계처럼 되풀이해버리면 애는 완전히 기계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악의 절정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정리하면 ‘부모 말 잘 듣는 애는 악한 아이다.’ 그렇게 되겠습니다.

그게 악하다면 선한 애는 어떤 아이입니까? 선한 아이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악을 조절해서 악이 나올 때와 안 나올 때를 알아서 부모가 교육을 통해서 조절해야 돼요. “네가 손님 올 때 조용하게 있으면 돈 천원주마.” 이렇게 조절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 악은 조정의 대상이지 애를 보고 개과천선을 요구한다는 이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애들도 못할뿐더러 어른도 개과천선 못해요. 그래서 오직 성령 받은 사람만 구원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을 교육시켜서 구원시킬 수가 없어요. 오직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인간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성령 받으면 사람 됩니까? 성령 받으면 사람 안 됩니다. 그냥 구원 받는 사람은 되지만 ‘사람은 아니므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안 돼요. 그러면 구원 받고 난 뒤에는 누가 조정하느냐, 성령께서 조종해요. 성령께서 조종하고 조절하기에 그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그것을 남들에게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남들이 못 알아듣습니다.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마시고 주님한테만 이야기하세요. ‘난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 소리를 목사 앞에서 하지 마세요. 목사는 “말만 죄인, 죄인, 하지 헌금도 안 하면서?”

목사는 오직 돈 밖에 안보이거든요. 어떤 인간이 돈 얼마 냈는지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게 자기 목회의 역량과 관계되어 있거든요. 역량은 자기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목사는 교회 올 때 단 것을 가지고 나옵니다. 칭찬해줄 때 돈 나온다, 그 논리 외에 아무 논리도 없어요. 이런 소리 하니 왜 이리 속이 시원한지 몰라. 교인들은 칭찬을 받기 위해서 돈을 내는 거예요. 돈이 일종의 비용, 사회에서 무시당했는데 교회에서 칭찬받기 위해서 돈 좀 내고 봉사만 한다면 칭찬을 주니 그 칭찬 덕으로 교회에 매진해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윈윈, 서로가 승리해서 사는 거예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목사도 좋고 교인도 좋고, 그렇게 훈련을 받고 교회에서 사육을 받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 새삼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거부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거부하는 하나님이라 할 때 가인은 가인 본인을 조절할 수가 없어요. 그 내용이 창세기 4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압니다. 다 알고 이렇게 했어요. 창세기 4장 6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참, 하나님께서 정말 어려운 이야기를 했어요. 안색이 변하는 것에 대해서 어쩌라고?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손톱이 자라는 것이 뭘 줘서 자라는 겁니까? 손톱은 저절로 자라나요. 마찬가지로 안색이 변하는 것은 그냥 저절로 변해요.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냥 꼴 보기 싫어서 성질나요. 이것을 의학에서는 호르몬작용이라고 하는데 호르몬 작용으로도 설명이 안돼요. 성질이 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나는데. 아니, 미운 것을 어떻게 합니까? 미운데 미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화를 더 돋우는 거예요. 보기만 해도 미운 것을 어떻게 합니까?

“네가 왜 안색이 변하느냐?” 이 말을 이렇게 하면 돼요. ‘안색변하기’라는 사건이 그 순간에 주어진 거예요. “너는 이렇게 지금 안색이 변해야 돼. 봐라, 변하잖아.”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지요. 죄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누가 하는가, 창세기 4장에 보니 여호와하나님이 언급합니다. 전도서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없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없기에 뭐가 없는가? 죄가 없어요. 전도서는 죄를 거론하지 않습니다.

죄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으로 비로소 그 현장에서 발생되는 것이 죄에요. 주께서 질문하고 주께서 응답을 요구할 때 죄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보고 질문한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들어있는 마귀보고 질문하는 거예요. “마귀야, 너는 왜 가인의 안색을 변하게 했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마귀가 “아, 들켰군요. 그러면 마귀는 마귀 노릇을 하겠습니다.” 하고 누구를 죽이는가? 아벨을 죽이는 거예요. 죽일 때 가인이 ‘오늘 참 내가 잘했어.’ 이런 생각이 들었겠어요? 마귀에서 다시 가인으로 돌아오게 되면 ‘내가 왜 그런 짓을?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 동생을! 그동안 얼마나 내가 동생을 사랑했는데?’

가인이 동생 아벨을 그동안 사랑했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처음부터 동생을 죽이려고 작정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이 응답을 안했다는 이것이 하나의 원인제공이었지 평소에 동생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그런 나쁜 형은 아니에요. 다만 하나님이 나의 제사를 안 받으니 그것이 성질이 나는데 하나님이 동생의 제사마저 안 받았으면 구태여 동생을 죽일 이유가 없는 겁니다. 결국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 허무한 세상의 인간과 소통을 할 때 소통의 방식은 뭐냐 하면, 이 땅에서 낯선 죽음을 사건으로 양산시키는 방식으로 하늘과 땅이 통하는 유일한 통로로 그 지점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그 장소가 통하는 장소가 아니고, 요단강 물 위를 걸었던 그 장소가 통하는 장소가 아니고, 오병이어 떡을 먹었던 그 장소가 아니고 진짜 하나님과 인간이 유일하게 통하는 장소는 바로 십자가에 죽는 장소에요. 물 위를 걸었다고 해서 베드로가 그 다음에는 주님을 배반 안한 것이 아니고 배반 했잖아요.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보고 주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그런 소리를 했다고요. 그때까지는 아직도 물위를 걸었거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소개할 만한 자리가 마련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원하는 자는 어떤 죄인이라도 하늘나라 처소에 도달될 수 있는 그 힘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살려내는 둘만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그 지점, 그 지점이 모든 때, 모든 시간의 종결상태에요. 그 때부터는 시간이 묵시로 바뀝니다. 묵시로 바뀌면서 이제 남아 있는 시간은 의미가 없어요. 어떤 의미인가? 그냥 오늘도 종말이고 내일도 종말이고 모레도 종말이고, 오늘은 종말로 울었고 내일은 종말로 행복하고, 모든 것이 종말이 주인공이 되는 입장, 그렇게 종말에 오는 영이 뭐냐, 성령입니다. 성신은 종말이 아니에요. 성령이 돼야 종말이 옵니다.

아벨 이야기를 다시 해 봅시다. 가인이 안색이 변하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창세기 4장 7절에 “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게 다스려지겠습니까? 결국 동생을 죽였고 동생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늘로 호소한 겁니다. 가인이 전도서와 매치가 되는 유명한 단어가 나와요. 아벨의 의미가 뭐냐, 허무입니다. 아벨이 하벨(Havel, הבל)과 같은 뜻인데 ‘허무’입니다. 하나님은 지상에 허무를 남겨서 허무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전략을 짜신 겁니다.

아담은 흙이 되지요. 하지만 그 허무를 하나님은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허무를 모아서 천국에 이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 허무를 이해 못하는 사람은, 그 허무를 이해하면서도 성공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은 이미 어느 족속에 속하느냐 하면 가인의 부류에 속하는 겁니다. ‘내가 왜 허무해? 지금까지 나한테 투자한 것이 얼마인데 내가 왜 허무해? 이만큼 되기까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왜 내가 허무해?’ 그 점을 말씀드리고 이번 시간 마치겠습니다. ‘내가 투자한 것이 얼마인데 이게 왜 허무해?’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지금 무슨 단어를 잘못 사용했느냐 하면, 허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투자한 것이 많은데 그것이 헛되이 되면 어떻게 하는가, 라고 하는 그 헛됨은 니체나 쇼펜아우어에서 말하는 그 허무주의의 허무를 표현한 거예요. 세상의 허무주의는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고 20세기 초반에 나왔는데 19세기까지는 이성에 대한 찬양과 환호입니다. 인간이 깨닫고 문명이 발달하는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가, 스스로 자기에게 찬양을 한 겁니다. 인간이 따지는 이 이성, 이 똑똑함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아까 제가 칠판에 쓸 때마다 삐걱거렸지요? 집사님이 오셔서 만지니까 금방 소리가 안 나잖아요. 문명, 기술에 대한 찬양 아닙니까? 이 놀라움.

이게 왜 헛됩니까? “다 헛된데 하지 말지. 집사님, 하지 마세요. 다 헛된 건데. 삐걱삐걱! 헛될 거야, 다 헛될 거야. 삐걱삐걱!” 이러면 좋겠다! 헛되다면서 교회는 왜 가고 헛되다면서 학교에는 뭐 하러 가고 헛되다면서 돈은 왜 버는데? 자살하고 말지. 자살해도 헛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생각하는 허무라 하는 것은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 ‘내가 허무하다’는 거예요. 이것을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내가 허무하다고 하는데 ‘내가’가 들어가면 안돼요. 주님의 허무는 일괄허무이기에 나만이 허무한 것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모든 인간이 다 허무한데 유별나게 자기가 허무하다 하니 네가 뭔데 유별나게 허무합니까? “나는 죽어야 해.” 이럴 때는 “왜 너만 죽어야 해? 이 교만한 인간아! 다들 죽어야 돼. 왜 너만 죽어야 되는데?” 자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셉니까? 자기만 죽어야 된대요. 내가 허무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허무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겁니다. 태어났으니 이렇게 허무를 느끼게 되면 감사해야지요. ‘그동안 쓸데없는 나의 장식품들이 떨어져 나가고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는구나.’ 그렇게 하면 되지 비탄에 잠겨서 절망에 이르면 안 되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허무라 하는 것은 뭐냐, 죄의 결과로 심판에 이르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허무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가 하면 마지막에 심판으로 끝납니다. 이 가운데서 인간잔챙이들은 다 떨어져 나갑니다. 인간들이 “나는 뭘 연구했습니다, 나는 이번에 신제품을 개발했습니다, 나는 돈을 벌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힘들어서 못살겠습니다, ……” 이렇게 하면 “노동자나 돈 버는 자나 다 헛되고 헛된 거야.” 전부 다 헛됨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야 이 심판이 집단심판 이거든요. 개인 심판이 아닙니다.

떨어져 가면서 결국 허무에서 출발해서 심판으로 나아가는 이것이 언약으로 나아가게 되면 죄로 말미암아 제사로 연결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도서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 모세언약, 그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참고서, 또는 보조자료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범인의 얼굴이 몽타주만 나와 있어요. 이것은 율법입니다. 아까 민수기를 봤지요? 민수기 15장에 보면 ‘범죄 하거든 양을 바치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몽타주에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모자라고 그 밑에 보니까 “이 사람은 전과 16범인데 천안에서 이런 짓을 했고 서산에서 이런 짓을 했고 대구에서 이런 짓을 했습니다.” 죽 나올 때 참고보조 자료입니다. 그게 전도서입니다.

‘이 사람이 박사인데 박사면 뭐하겠나? 소고기나 사먹겠지. 박사하다 죽었고 이 사람은 의사하다 죽었고 이 사람은 목사하다 죽었고 …….’ 이게 참고서거든요. 몽타주는 죄인으로 그냥 들어 있고. 이 전도서, 참고도서를 받음으로써 소위 ‘그래도 나름대로 뭔가 나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는 그 모든 것을 다 무장해제 시켜서 털게 만들고 자기에 대해서 기대하거나 희망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y는 이 x에 대해서 기대하지 말고 이 변곡점이라는, 이 카이로스라는 새로운 사태가 마련되어 있고 이 사건과 사건에서 잠시 휴식시간으로 줬던 것이 바로 나의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태어난 것도 카이로스고 죽는 것도 카이로스라면 그 때를 우리한테 맡겨서 흡수하지 말고 그 때를 어디에 맡기는가, 언약에 맡기자는 말입니다. 언약에 맡기면 거기 누가 기다리는가? 예수님이 기다립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야곱처럼 이 땅에 태어나고 이 땅에 이렇게 살고 이 땅에 야곱처럼 죽고 주와 함께 합류되어야 할 그 언약적인 장정에 있어서 전도서는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겁니다. 식사합시다.

 첨부파일 : 2013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4강).hwp (80.0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