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7강

아빠와 함께 2013. 8. 6. 16:22

제 7강

명색이 전도서를 공부했으면 전도서가 어떤 내용인가, 이렇게 물어보면 답변할 것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도서를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공부해도 소용없다.’ 그 다음에 ‘과수원 농사지어도 소용없다.’ 그 다음에 2장 8절에 보면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어도 소용없다. 그 뒤에 ‘자식을 많이 낳아도 소용없다.’ 그리고 ‘사회에 공헌을 해도 소용없다. 낙을 누려도 소용없고 지위가 높아도 소용없고 착실한 계획을 잡아도 소용없고 착해도 소용없고 장수해도 소용없고 자녀를 백 명이나 둬도 소용없고 여자를 많이 둬도 소용없고 특히 여자한테 어떤 지혜가 있는가를 찾아봐도 그것도 소용없고.’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전도서 7:28) 이것은 첩 이야기죠. 그리고 ‘빨리 경주하는 자도 소용없고 유력한 권력자도 소용없고 기능인이 되어서 재주를 부려도 그것도 소용없고’ 그래서 전도서 수련회를 했는데 그 내용이 뭐던가요, 라고 물으면 ‘소용없는’ 거예요. 그래서 소용없다는 것을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인테리어 시공을 해 봅시다. 이 공간을 인테리어시공을 하게 되면 공부해도 소용없다, 또는 장수해도 소용없다, 사회 기여해도 소용없다, 여자 많아도 소용없다, 왕이 되고 권력자가 되어도 소용없다, 빠르게 승진해도 소용없다, 이 소용없다는 이것을 타일로 만들어서 실내 장식을 해요.

이렇게 장식을 하게 되면 이것 자체는 하나의 오케스트라지요. 그리고 이 공간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둔다면 거기에 ‘공부해도 소용없다’를 달게 되면 아름다운 장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의 트리가 되게 되면 이 전체가 우주의 공간이 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작품화 시키는 거예요. 전도서의 내용이 뭐냐 하면, ‘소용없다.’ 베토벤교향곡 제 5번 <운명>이죠. “빠빠빠 방, 소! 용! 없! 다~! 소! 용! 없! 다~! 소! 용! 없! 다~! 소! 용! 없! 다~! 소! 용! 없! 다~!” 이게 전도서 내용입니다. 모든 것이 소용없는 거예요.

소용이 없는 것이 뭐냐 하면, 지혜에요. 그래서 항상 이 공간을 ‘소용없다’의 인테리어로 가득 채워나가는 거지요. 그러면 지금 이 시대에서 우리가 할 것은 이 타일의 숫자를 계속해서 보충하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컴퓨터 기술이 없기 때문에 이 전도서에 기술이 안 되었을 거예요. ‘컴퓨터 기술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다. 국세청장 해도 뇌물 받고 소용없다. 개성공단 열려서 소용없고 금강산 관광을 해도 소용없고…….’ 그것을 계속 채우는 몫이 우리의 남은여생입니다. 간단하지요. 그러면 채워서 뭐하는데? 베토벤의 소용없다, 교향악을 만드는 겁니다. 금 이 시대에. “빠빠빠 방, 소! 용! 없! 다~! 너도 소용없어! 나도 소용없어! 제설! 제설!” 하는 것처럼.

이것을 하나의 뮤지컬로 만드는 거예요. 이것이 전도서 내용입니다. 소용없다, 이것이 지혜란 말이지요. 이 소용없음을 어디까지 몰아넣어야 되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1장 20절까지 계속 밀어붙이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장 20절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이게 소용없다,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이 ‘소용없다’는 것을 배치를 해놓고 소용 있는 것, 정말 구원되는 것 하나를 유독 탑처럼, 바벨탑처럼 쭉 뽑아냅니다.

그것은 성령이 임해야 알 수 있지요. 모든 인간의 지혜는 ‘소용없다’에 갇혀 있는 반면에 이것만큼은 소용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존재? 아닙니다. 삼위일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 아닙니다. 그런 것은 하나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리고성 무너짐? 그런 것도 아니에요. 오병이어? 그것도 아닙니다. 산상설교?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뭐냐?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이 십자가는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비밀로 되어 있고 그냥 비밀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감춰둔 비밀인데 이 비밀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새 개나 소나 십자가 다 알아버렸어요. 성령으로 아는 십자가와 육으로 아는 십자가의 차이에 눈이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더 나가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 그 다음에 “부활이 있어. 성령의 열매가 있는 거야. 성경엔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도 있으니 골고루 영양섭취를 해야 돼. 이것도 있어야 균형이 잡힌 신앙이야.” 이러면 신앙 없는 사람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렇다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라든지 예수의 재림, 부활, 이 모든 것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하면, 바로 지혜,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진짜 소용 있는 십자가가 사건화 되어서 그것이 아이온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 되는데 그 안에 이것이 다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전도서 9장 1절을 통해서 봅시다. 전도서 9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라고 해서 하나님의 손에서 뭐가 뿜어져 나오는가, 무슨 광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나오는 거예요.

미래를 소용없고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손에 의해서 미래가 나오기에 이것이 어디를 거쳐야 되느냐 하면 주님의 손을 거쳐서 이 소용없다,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것, 고린도전서 1장 20절의 그 헛됨이 어디에 기준해서 헛된지를 분명히 알 수 있거든요. 무엇에 기준해서 헛된가, 그냥 헛되다고 할 것이 아니라 무엇에 기준해서 그런가? 전도서엔 그 해답이 없어요. 왜냐하면 미래로 미뤄놨기에. 미래로 미뤄놓은 그 기준에 의하면 인간을 둘러싼 타일, ‘소용없다’고 되어 있는 모든 것이 그야말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서 십자가만이 지혜가 되게 되면 십자가외의 모든 것은 소용없는 인간의 지혜로 치부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전도서에서 미래라고 하는 것은 종말, 전도서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심판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전도서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라 여기는 이 심판이 무엇이냐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어렵기에 먼저 언질을 한 적이 있어요. 심판은 무슨 심판은 아니라고 했습니까? 개별적인 심판은 없습니다. 왜냐, 너는 못났고 나는 잘났고, 이것이 소용이 없거든요.

“네가 끝의 심판주야?” “아니야.” “아니면 말을 하지 마. 서로가 서로의 미래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내가 너를 평하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할 수가 있느냐?” 끝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우리가 입을 다물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최종적인 지혜가 등장하기 이 전에 우리는 지혜를 안다고 하지 말자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심판에 대해서 언급을 하겠습니다. 심판이라는 것은 그 기준이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도서 12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죽 나오는 대목이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사라지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우리도 사라지는 대목이죠. 지난 시간에 했던 것 중 제가 생각해도 난해한 것이 뭐냐, 우리가 구원받을 때 내 이름으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 되느냐는 문제에요. 구원되지 않습니다. 내 이름으로 예수를 믿고 부르짖으면 구원이 안돼요. 그러면 어떻게 구원되는가? 주의 이름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무엇이 필히 찾아져야 됩니까? 내 이름이라는 것, 내 이름이 사라져야 되는데 왜 사라져야 되느냐 하면 지혜를 위해서 우리 이름을 양보해주세요.

우리가 십자가 안 졌잖아요. 사도바울도 안 졌어요. 십자가 안 진 사람이 마치 지혜 자 인양 행세하는 것을 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지혜 자 노릇을 하면 안돼요. 우리가 얻은 지혜는 성령이 우리보고 주신 지혜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영이 우리에게 지혜가 되기에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항상 내 이름으로 행세하는 그 더러운 행세를 뭐로 바꾸는가, 주의 이름으로 살도록 소급 적용시키는 겁니다. 전두환 때문에 소급적용이 요새 유명해졌지요? 그렇게 소급 적용시키는 거예요.

전 두환 한테 뇌물 받은 것이 5천만 원이었는데 그 돈이 50억이 된다면 5천만 원만 회수하는 것이 아니죠. 새로 바뀐 전두환 법이 있는데 50억 전부 회수하는 법이 통과되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내가 죄를 지을 때 내 죄를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 죄의 원인을 제공했던 아담의 죄를 용서하시는 차원에서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담, 너 나와!” “저는요?” “너는 빠지고! 아담 너 나와.” 마지막 아담은 첫 번째 아담하고만 상대하는 거예요. 두 번째 아담은 첫 번째 아담만 상대하는 겁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롬 5:16-17)

‘한 사람이 범죄 함으로 모든 사람이 범죄자가 된 것처럼 한 사람의 의 때문에 모든 사람이,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직업이나 성별이나 나이 이런 것에 관계없다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될 것이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1, 21) 죄가 있는 곳에는 뭐가 넘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은 우리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기능으로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증거 하는 차원으로서 이 우주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나 구원 받아요, 안 받아요?” 그런 질문은 옳지 않아요. 이미 개인으로 다루지 않고 집단으로 다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상대할 때 우리가 주님께 나오는 그 관계, 주님은 우리를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아담 안으로 규격화 시키고 아담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된 것을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겁니다. 우리를 이렇게 아담으로 묶는 것, 노끈으로 꽁꽁 묶어서 “요 아담, 요 못된 아담.” 이렇게 묶는 이것이 바로 언약인 거예요, 언약.

이스라엘 나라는 인구가 50만이 되어도 그것을 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것은 언약이 하나이기에 그래요. 각자에게 언약을 주는 것이 아니고 한 언약의 효과를 각자 누리기에 개인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언약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을 인정하게 되면 언약 안에 있는 것으로 혜택을 주고 만약 언약을 인정 안한다면 언약 밖에 나온 것으로 해서 저주해버리지요. 이것이 언약 하나님의 독특한 방법이에요. 거기에 비해서 언약이 없는 우상은 뭐냐 하면, 직접 하나님과 상대합니다.

중간에 나를 포함해서 묶는 노끈이 없어요. 그런 노끈이 없고 내가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한만큼 복이 오고 내가 열심히 안하면 그만큼 벌이 온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상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우상섬기는 것이 어떤 점이 편리한가 하면, 평소에 착한 일을 많이 해 놓으면 나중에 나쁜 짓을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그것에 대해서 저축된 착한 일을 솔솔 빼먹는다는 식이에요. 착한 일을 너무 많이 해 놨기에 나쁜 짓을 좀 해도 여분의 착한 것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벌 안 받는다는 선악적인 대차대조표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를 어기면 어떻게 됩니까?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더 심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를 어기면 모든 것을 어긴 정도가 아니고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이걸 간추려서 하면 뭐냐, “저주아래 있다.” 더 나아가면 “너를 구원하는 주님도 저주아래 있다.” 더 나가면 “우리 저주에서 만나자.” 더 나가면 “저주를 믿는 사람은 구원받는다. 저주아래 있으면 저주를 아는 너로 인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너를 아담으로 묶어버린 마지막 아담, 예수님의 저주받음으로 인하여 너는 구원받는다. 네 이름이 아니고 누구 이름으로? 우리 이름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제 너는 행세하게 될 것이고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의 이름을 믿습니다, 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필히 우리 자신의 이름을 포기해야 됩니다. 아브람이 뭐로 바뀝니까? 아브라함으로 바뀌죠. 야곱은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누구 허락을 받고 바뀝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이름이 바뀌어야 돼요. 그러면 여러분 이름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또 다 잊었어요. 우리의 모든 이름은 아담의 이름입니다. 아담의 이름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아담의 이름에서 두 번째 아담인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아요. 예수 이름으로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이름은 전부 다 아담에서 파생된 이름이에요. 세상 모든 족보는 하나뿐이니까.

아담의 이름으로 사는 것을 주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두 번째 아담의 이름으로 바꾸어서 조치를 내려주십니다. 그 조치를 내릴 때 어떤 조치가 내려오는가? 지혜와 어리석음을 십자가에 준해서 구분하는 조치를 내리게 되는 겁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심판에 대해서 강의할 때마다 이걸 사람들이 이해를 할까, 못할까, 하는데 제가 조마조마할 이유가 없지요. 가만 보니까 좀 이상하지요. 이것은 하나의 예의? 관심? 이 정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있는 그대로 돌 직구 던지듯이 하겠습니다. 봐주는 것 없습니다.

심판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에서 우리가 미리 그 심판을 접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것만 하면 끝나는 거예요. 언약궤가 뭐냐, 바로 세상 끝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나라에 뭐가 보이는가하면, 언약궤가 보입니다. 언약궤가 세상 중심으로 보였다는 말은 그동안 세상은 모두 언약궤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거예요. 끝이라는 말은 뭐냐, 언약궤가 언약궤 본 자리로 올라가면 자동적으로 세상은 끝나는 겁니다.

“목사님은 지금 구약 때도 아닌데 왜 언약궤를 합니까?” 요한계시록에 그 언약궤가 보이게 되어 있어요. 그 언약궤가 미리 역사 속에 들어옵니다. 이 심판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이 어떻게 짜였는가를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그렇다면 언약궤는 무슨 용도입니까? 번개내린 것이 고등어 구워 먹으라고 내린 겁니까? 지진, 우박, 이것이 왜 오는 겁니까? 조지겠다는 거지요.

모든 것을 없애버리겠다, 파괴하겠다는 의도잖아요. 그러면 이 언약궤가 옛날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있을 때 그 언약궤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을 위해서 그 동안 주변에 배치된 것은 무너지게 하기 위함이고 그 무너짐을 발생시키고 이끌었다고 보시면 돼요. 부수기 위해서 옆에 꿰차고 있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죽이기 위해서 계속해서 살려뒀다, 이렇게 보면 돼요. 개도 키우다가 잡아먹을 때 되면 잡아먹잖아요. 잡아먹기 위해서 살려 둔 거예요. 결국 그 용도가 다 할 때는 진짜 심판 내릴 때 비로소 언약궤는 만족스럽게 ‘역시 언약궤 값을 다 했구먼.’ 하고 심판을 해 버립니다.

왜 하나님께서 좋은 말로 “이렇게 구원을 위해서 하셨다.” 할 수도 있고 “나중에 여러분은 천국 간다.” 이런 좋은 말이 있는데 왜 자꾸 심판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처음부터 인간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부터 희망, 구원, 영생, 우리 인간이 입에서 그것을 발설할 자격이 못됩니다. 오죽했으면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했겠습니까? 왜 차단했겠어요? “먹지 마라. 근처도 오지 마라. 근처에 오면 발포한다.” 미군부대 철조망 쳐 있는 것처럼 “어딜 이 근처에 와? 이것은 네 몫이 아니야. 저리가!” 하고 에덴동산 생명나무 가는 길을 이미 차단했어요. 그 차단의 벽을 더욱더 공고히 하고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그 차단의 이미지가 언약궤에 그대로 오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나님의 심판이 다른 민족에서는 모르지만 택한 이스라엘 민족한테는 “따먹었지? 그러니까 죽는 것이 마땅해.”라는 하나님의 창조에 있었던 그 일관된 원칙이 다른 민족은 제쳐두고 오직 자기 민족, 언약의 민족 안에 분명하게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거예요. CF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여자 집에 가서 딩동, 하고 문을 열었는데 여자가 문을 열어주지만 문을 도로 닫았습니다. 그러니까 벽을 탁 치는 장면이지요. 남자 속옷 광고랍니다. 이런 것도 있고 또 어떤 드라마 장면에 보면, 드라마는 잘 안 봅니다만, 보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가 벽에 서 있는데 남자가 점점 다가가요. 여자가 “왜 이래요?” 하면서 미니까 남자가 더욱 바짝 벽에 밀어붙여서 꼼짝도 못하게 하지요. 자꾸 밀리잖아요. 이것이 언약입니다. “다른 민족은 몰라도 너희들은 하나님의 심판 의지와 취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돼.” 이것이 신명기 9장에 나오거든요.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다. 하지만 너희들을 대표로, 그러니까 인류의 대표죠, 살려주는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맹세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너 같은 인간도 구원하잖아.” 그러니 그 구원자체를 심판의 절정으로 보는 겁니다. 구원이 심판의 절정, 말을 바꿉시다. 심판의 절정이 뭐냐, 구원입니다. “에이 씨! 너 같은……, 그래, 참는다.” 이것이거든요. “에이, 이 강도! 아, 참는다.” 이거라니까요. “아, 성질나! 그래, 내가 불쌍히 여겨준다.” 이래서 구원받은 거예요. 저와 여러분들이. 많이 용서받은 자가 뭐한다고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밀어붙여서 코앞에 바짝 들이대야 돼요.

“이씨!” “왜 이러십니까?” “이 씨! 내가 용서해줄게.” 이렇게 돼야 된다고요. 그 때는 언약이 코앞에 보인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코앞에 보이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에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다른 것은 안 보이지?” 그런 뜻이거든요. “십자가가 코앞에 보이는데 다른 것은 안보이지?” 이게 긍휼이고 그게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뭘 어떻게 다 했지만 그것은 사도바울이나 사도요한이나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어요. “마지막은 뭐냐 하면 사랑인데 그 사랑은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버린 화목제물로 우리에게 이 사랑이 덮치듯이 오니까 사랑 안에 뭐가 없다? 두려움이 없고 이미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완전히 포위되어서 어디로 셀 틈이 없어요. 이 남자가 막 대시를 하니까. 물러 가다가 도리어 벽에 반동되어서 도로 튀어나와요. “왜 이러세요?” “와, 이거! 정말 미치겠다. 용서해주마.” 일관된 심판, 강한 심판의지, 그러니 이 말은 뭐냐, 일체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을 죄인을 가지고 표현하는 그것은 바로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네 죄를 내가 대신 가져갔다는 그것은 극단적인 심판의 마지막 때 모습은 죽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음 안에서 비로소 우리는 사랑을 봅니다. 우리 죽음은 마땅히 죽을 죽음이고 주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을 포함했기에 이 죽음 속에서 우리가 예상 못한 다른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이고 또는 하나님에 속한 형상을 입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받을 몫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얻는 축복인데 그 축복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이 다 장악한 축복에 우리를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받는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식으로 우리는 영광스럽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양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양자, 아들은 아니고 전에는 죄의 종이었던 자를 이제는 양자로 입양을 시켜서 예수님만 불러야 될 아버지를 양자라는 자격으로 성령 받아서 그들도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혜택을 줬다는 거지요.

이런 이야기는 혹시 구원받고 싶은 사람, 천국가고 싶은 사람은 이 이야기를 들으라고 한다고 해서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하게 되면 “나는 그런 하나님 말고 내가 원하는 식으로 구원 받겠다.” 이렇게 나올 거예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중에 혹시 성령 받은 사람이 계십니까?” 그런 뜻이에요. “혹시 성령 받으신 분이 계십니까?”

남자가 너무 군대 이야기를 많이 하면 실례입니다만 이런 일이 군에서 있었어요. 대구 50사단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74군번이에요. 되도 않는 정보입니다. 거기서 훈련 마치고 관물백 들고 죽 앉아 있어요. 제일 좋은 자리는 마산통합병원이 좋아요. 거기는 후방이거든요. 103보, 101보, 이러면 거기는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하다, 인제나 원통 같은 전방이거든요. 거기 가면 면회고 뭐고 끝났어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마산통합병원이라든지 대구에 있는 부대도 좋고 영천의 3사관학교에 가면 이것은 땡 잡은 거고요.

상식으로 군에 갈 애들 있는 집은 잘 알아놓으세요. 그런데 가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죽 앉아 있는데 담당관이 와서 “26번! 37번! 나와. 마산통합병원” 그 소리 할 때 같이 앉아 있는 우리들은 ‘아~! 우리는 뭐야.’ 그 다음에 “8번, 17번, 카투사.” 이건 미군부대 영어배울 수 있거든요. 씨레이션 먹지요, 영어 공짜로 배우지요, 외출 나오지요, 와, 이것은. 그 다음, 그 다음, “7번, 16번, 영천3사.” 좋은 데는 다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 다음에 103보! 거기서 나를 부르네요. ‘빨리 아버지한테 빽 써야겠다.’ “아버지,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치를 빨리 취해야 될 것 같습니다.” “가만 있어봐라. 보안부대에 내가 아는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조치 취할 거다.”

그래서 아버지가 보안부대에 있는 아는 사람을 통해서 조치를 취했어요. 그러니 어디고 힘없고 빽 없으면 제일 나쁜 데로 가야 돼요. 조치를 취해서 카투사는 아니고 앞에 형용사가 하나 붙어요. 보리카투사라고 했어요. 거기가 점호 없고, 훈련 없고, 철조망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야말로 카투사 빼놓고는 제일 좋은 데죠. 거기서 교회를 다녔잖아요. 지금 이것은 나의 동질성입니다. 변곡점들 사이의 어느 대목을 뽑아서 지금 간증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 교회 처음 다닌 거예요. 이것이 뭐냐 하면, 완전히 간택되는 것이고 선택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처소가 마련된 사람에게만 성령이 오는데 성령이 오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구원했기에 그 때부터 나의 주도권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라고 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게 되는 거지요. 저는 우리 교인들 가운데 혹시 그런 사람이 있는가를 찾고 있습니다, 지금.

혹시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 역시 제가 지혜가 많이 모자랐는지 잘 눈에 띄지를 않네요. 그것은 제 탓이지요. 다 그렇게 사시는데 제가 지혜가 모자라서 그런 거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사람,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을 위해서 사는 사람인가? 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면 주를 위해서 산다 할 때 주가 어디 있습니까? 주가 안 보이는데요? 마태복음 25장에 이 소자에게 한 것이 누구에게 한 것이라? 이 작은 아이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하죠.

주님이 좀 비겁해요. 본인이 나타나면 되는데 꼭 소자 뒤에 숨어 있어요. 아까 소자의 웃음소리가 막 났는데, 꼭 소자 뒤에 숨어서 “얘가 배고프다는데? 음, 얘한테 줬어? 그러면 나한테 주는 거야.”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이 소자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에게 유익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 어떤 대상들의 집합.’입니다. 그야말로 소자는 소자니까 갑이 나이고 을이거든요. 나한테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자, 그 소자에게 해 줌으로 말미암아 나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찬란한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 살지 않는 모습이 나오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러한 정신은 이 언약궤에서 나오니까 심판이 어떻게 되는지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보겠습니다. 계속 심판과 관련되어 있어요. 복잡하니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뭘 발생시키는가 하면, 구원받고 나서 가나안 땅에 안착한 이스라엘 내부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발생시킵니다. 고아를 발생시키는 방법은 자기 부모가 병이 들든지 전쟁터에 나가서 죽든지 하는 경우죠. 과부라 하는 것은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서 하나님의 전쟁을 하다가 죽는다든지 하는 것이고 나그네라 하는 것은 빚을 너무 져서 자신의 고향땅에서 빚 청산한다고 집 날리고 땅 날리고 그냥 얻어먹으면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발생시켜놓고 이 사람들을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놓습니다.

그러면 심판은 어떻게 되는가? 이 사람 배후에 고엘, 후견자가 있어요. 이 사람들이 그 당시의 소자노릇을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없는 사람이 도움을 요청할 때 귀찮잖아요. 가진 것도 별로 나도 없는데, 하죠. 그래서 이들이 이들의 요청을 거절할 때 이들이 누구에게 호소하는가 하면, “자비하신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건만 혼자 독차지 하고 있습니다. 같은 이스라엘의 언약 속에 있으면서 언약의 자비와 긍휼의 취지를 완전히 놓치고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여 주옵소서.”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고아를 돌보지 않는다면 너희 자식들을 고아로 만들고 너희 아내들을 과부로 만들고 너의 모든 식구들을 나그네로 만들고야 말리라.” 하는 심판 작용이 이스라엘 내에 퍼지게 되는 겁니다.

이런 부담을 지고 이스라엘이 꼭 돼야 되겠습니까? 무섭지요. 언약이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대처했는가? 그 대처방법이 재미있어요. 행정적인 대처방법을 쓰는 겁니다. 그게 요양사제도에요. 등급 매겨서 관리하는 겁니다. 19세기 말부터 복지국가가 성립됩니다. 1789년에 시민혁명이 일어나면서 귀족들이 누리던 재산과 문화를 이제는 중산층도 누리게 되는 거예요. 중산 부르주아가 새롭게 등장했지요. ‘귀족들, 너희만 잘 먹고 잘사나. 우리도 너희처럼 귀족으로 살아보자.’ 이래서 확산이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국가적으로 이웃사랑과 돌봄을 행정적으로 처리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복지국가가 성립됩니다.

그 복지국가의 성립을 두고 그들은 기독교 국가이기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국가적인 단위로 준수하고 있다고 자처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이웃사랑입니까? 그건 동냥이죠. 그것은 두레같은 거예요. 있을 때 돈 모아서 어려울 때 도와주자는 것, 이것은 자기 이익을 더 고수하고 챙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취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언약에서 하나님의 취지는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도움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왜 가난한가? 게을러서 가난해요. 가난을 가지고 마치 도움 받아야 될 어떤 권리라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임시적 가난이기에 진정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돈에 한 맺힌 인간이에요. 그것은 도와주면 안 돼요. 출애굽기 정신은 뭐냐? 이것은 출애굽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럴 때 누가 나서서 돌봐줬느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돌봐줬습니다. 자, 이게 어려워요.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돌봐줬다. 말은 굉장히 쉬운데 하나님 쪽에서 어떤 행정관, 어떤 공무원이 나왔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제가 하늘나라에서 왔는데요. 돌봐드리겠습니다.” 언제 그렇게 했어요? 모세? 모세는 그냥 인도만 했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노릇으로 애굽 땅에서 고생하던 불쌍한 히브리인들을 하나님께서 도와줬다는 거예요. 도와준 그것이 모세도 아니고 아론도 아니에요. 그게 뭐냐,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은 무엇을 품고 있느냐하면, 죽음을 품고 있어요. 간단히 해서 이런 겁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죽을 인간이고 살지도 못할 인간인데 하나님 앞에서 어린양 덕분에 내가 살려냈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죽을 뻔 했던 내가 어린양의 희생, 하나님의 자비로 살았다는 마음으로 찾아온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대변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헌금이라 하는 것은 돈을 주는 것이 헌금이 아니고 상대방 앞에서 “당신을 만나면서 나는 죄인인 것을 다시 한 번 깊게 느끼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그 관계, 나를 죄인으로 간주하게 되면 나와 헤어지지 맙시다, 하는 그 관계, 그것이 바로 양쪽 다 주 안에서 교제하는 관계입니다.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이미 가정에서부터 교회가 되었다고 봅니다. 남자는 주님역할, 여자는 신부역할, 일종의 정신치료를 위한 연극하는 것이라 보면 되지요. 가정에 문제 있어서 치료할 때 하는 심리연극이 있지요. 의자 놓고 몽둥이 하나 줘서 “당신의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하면 그 의자를 울면서 막 패는 거예요. 그걸 보고 남자는 ‘내 아내가 저렇게도 나를 싫어했구나.’를 느껴서 “여보, 잘못했어.” 이런 심리적인 효과를 본다는 거거든요.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4주간 조정기간 거쳐야 됩니다. 어쨌든 이런 저런 방법으로 풀곤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가겠어요. 에베소서는 가정에서부터 교회가 되었다고 보는데 “내가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그토록 이기적인지 몰랐는데 당신을 만나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데, 이건 운전을 해도 뒷자리에 앉지 않고 옆자리에 꼭 앉아서 갈 때부터 올 때까지 잔소리를 함으로 말미암아, 운전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부아가 넘치게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죽었다 살아난 그 자비를 평소에 놓치고 잊으면서 살았구나.” 그러니까 이것은 십자가에 비하면 지혜가 아니고 뭡니까? 소용없는 거예요.

소, 용, 없, 다, 제설! 소, 용, 없, 다, 소, 용, 없, 다, 빠빠빠 방, 소용없다. 우리는 ‘소용없다’를 또 잊은 거예요. 잊었는데 옆에 잔소리하는 아내가 탐으로 말미암아 내가 얼마나 이 땅에서 소용없는 운전을 하고 있는 인간인지 ……, 여러분이 지금 전혀 동감을 안하는듯한 눈치에요. 그럴 때 그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마치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 같이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어도 사실은……,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그런 남자가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아내도 남편을 만나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 줄 알아서 남편 없이는 자기가 죄인인 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자비로 구원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남편을 보내서 주님의 자비 없이는 안 되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임을 깨닫게 할 때 그 면면의 모습으로 인하여 남편을 섬길 때 주님같이 섬기는 그런 여자가 혹시나 나올까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실은 그렇거든요. 다만 그런 마음을 품는다는 자체가 순간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안 되는 겁니다. 나는 지혜 자가 아닌 것을, 나는 소용없는 존재라는 것을 순간적으로만 아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라 하는 것은 한번 알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것은 사건이니까 십자가사건을 우리에게 되풀이해서 줌으로써 주의 은혜와 자비를 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특별한 배려이지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덧붙여 주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에베소서에 보면 자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고 회사생활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사는 누군가를 부릴 때 자기 상전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공갈하지 말고 협박하지 말라고 하고 또 부하직원은 눈가림만 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주께 하듯 상사를 대하라고 하지요.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자비, 어린양의 희생에 의해서 다 같이 구원받았다면 그 자체가 바로교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의 몸 되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가 고집이 세다고 해서 포기할까요, 포기하지 않을까요? 주님은 절대로 포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망했잖아요. 이스라엘은 망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그 멤버를 교체시킨 겁니다. 어떤 멤버로 교체시켰느냐하면, 더 악독한 죄인으로 교체를 시킨 거예요. 그 가장 독한 구성원이 누구냐,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이지요.

“그 사람들 아버지가 악마인데 지옥가지 않았습니까?” 하는데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십자가를 들이대서 “어찌할꼬.” 하면서 성령의 세례를 받는 유대인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만 진짜 성령을 통해서 자기가 소용없는 존재인 것을 알고 성령을 통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떻게 하는가? 이방인들은 처음부터 개니까. 유대인들이 먹다가 맛없다고 집어던지면 그것을 잡아들면 그게 구원받는 거예요. 좀 더럽지만. 아버지의 아들에게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고서 우린 이만큼 자라났습니다. 유대인들이 안 먹으면 우리는 점점 더 먹을 것이 많아지지요. 유대인들이 안 먹으면 그런데 유대인들이 먹을 리가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배신하고 남아 있는 TO를 우리가 대타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온 이스라엘을 주님께서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시간 마지막으로 후견자가 어떤 모습이냐 하는 것을 욥을 통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욥기가 지혜문서죠. 욥은 무엇을 원하느냐? 후견자가 있다는 것을 욥이 언제 알았느냐 하면 자기의 모든 것이 다 날라 갈 때입니다. 후견자가 살아 계시니 그 분이 내 정결함과 순결함을 변호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욥의 생각은 올바른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가, 욥의 순수란 뭐냐, “나는 신앙인이다, 순진하다, 나는 옳았다.” 이 앞에 ‘나’가 붙어 있어요.

이 ‘나’를 뭐로 바꾸는가 하면, “주님은 옳았습니다. 고난 주시는 주님의 처신은 올바른 행위였습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그 조치도 주님의 합당한 조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고생한 것도 마땅하고 고생해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이 앞에 있는 ‘나’를 주께서는 ‘주’로 바꿔치기 할 때 결국은 내가 있고 후견자가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후견자가 먼저 있고 후견자를 증거하고 후견자를 증명하기 위해서 차후에 우리존재가 여기에 덧붙는다는 사실을 욥이 지혜로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게 되어도 우리부터 먼저 있는 겁니까, 아니면 뭐가 먼저 있습니까? 십자가부터 먼저 결정해 놓고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 지상에 우리도 아브라함도 야곱도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모든 사건의 비밀은 언약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겁니다. 십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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