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말씀 앞에 채우게 하시고 말씀이 우리를 보느냐 아니면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차이를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저희들이 이 말씀을 지배하지 말고 말씀이 우리를 영원토록 다스릴 수 있도록 이 시간 성령께서 줄곧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전도서가 구약에 있습니다. 구약에 있다는 말은 전도서마저도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에 전도서와 예수그리스도 사이, 그걸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금방 이어지질 못합니다. 전도서가 예수님과 이어지려면 이 전도서가 누구에게 이야기했는가를 알아야 되겠지요.
구약성경이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고 여기 신약성경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늘에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구약성경을 미리 던져주고 자기한테 회수하는 식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위에 실이 있다면 실을 지면에 닿아놓고 그 실을 잡아당기면 신약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겠지요. 여기 구약 중에 우리가 지금 하고자하는 전도서가 포함돼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서를 미리 던져놓고 회수하면서 어디서 만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지점이 있어요. 각별한 지점인데 이것을 place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은 space와 다릅니다. 특별한 장소, 특정한 역사적인 장소가 골고다 언덕,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스라엘이란 장소가 나중에 땅이 사라지게 되면 사건으로 바뀝니다. 장소로 바뀔 때보다 사건으로 바뀌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장소가 고정돼있으면 우리가 예수님 구원받으려면 비행기 타고 예루살렘에 가야 돼요. 먼 데까지 가야 됩니다.
그런데 사건화 되면 장소에서 사건으로 전이되는 힘이 있어요. 그 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힘이기 때문에 이 사건이 반복되게 되면 우리가 구태여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성지순례라는 것이 신약에는 성립이 되질 않습니다. 성지순례란 어느 장소를 찾아가잖아요. 성지순례라고 해봐야 게스트하우스나 올레길이나 장사되지 성지순례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자리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지면, 만약에 성지순례를 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감동을 받게 돼요. 감동을 받는 대신 받은 감동을 포기를 못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5년 전에 성지순례를 갔다 왔다. 그리고 난 뒤에 5년 뒤에 그 기억을 쥐고 있으니까 그것을 포기 못하지요. 그런데 진짜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건으로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돼요. 오늘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라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지요.
류현진은 공 던지고 추신수는 치는데 류현진이 공 던지면서 “주여, 죽여주옵소서.” 이러면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라니까요. 세상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 없지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그런 장소와 시간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니까 이것은 그 자체가 사건화 되질 않습니다. 사건화 되지 않으면 규격화돼요. 나 좋으라고 규격화돼요. 이러면 점점 더 자기 부인이 곤란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야 나 있는 곳에 너희가 있다고 했는데 전혀 이것이 점점 더 장애가 되고 방해가 돼버리죠.
그래서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키고 그 십자가 사건을 반복할 수 있게 하는데 그 반복은 우리의 몸, 우리 자아를 상대하지 않고 우리의 육신을 상대해서 여기에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우리는 자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쉽게 말해서 인간이 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육신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란 우리가 붙인 것이고 사실은 성경에서는 육신만 있을 뿐이에요. 육신 외에 다른 건 없습니다.
왜 우리가 인간이 아니고 육신이 돼야 하느냐 하면,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육신을 정하러 왔다고 돼있거든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룰 때 육신으로 다루는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자기 자신을 저도 인간이라고 품위, 존엄성, 이런 걸 들이대니까 모든 성경을 다 이루었다는 게 튕겨나갑니다. 우리한테는 적용이 되질 않으니까 불행이에요. 딱 깨놓고 말해서 인간의 품위나 품격이라는 것은 신앙 생활한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돈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돈이 없을 때 품위도 팍 떨어져요. 젊은 사람들은 앞으로 경험해봐야 돼. 돈 없으면 품위 떨어지고 돈 있으면 품위 생기고 그런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육신으로 다룰 때는 인간들이 이러한 수작에 주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저를 비롯해서 여러분들은 참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구약을 보고 있습니다. 구약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데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가 뭐냐? 전도서와 예수님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걸 풀면 되는 거죠. 푸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전도서에 가도록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마중을 나오죠.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고 이 지상에 성자 되신 하나님께서 예수란 이름으로 오게 돼요. 만나는 지점에서 구약과 신약이 만나는데 여기서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속에는 구약 전체가 다 포함돼있고 동시에 전도서 내용도 포함돼있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는 해석으로 전도서를 풀어내고 해석하면 이것은 옳은 거예요. 그런데 이렇다고 문제가 풀리는 게 아니고 다 이루었다와 전도서에의 의미가 어떤 의미냐 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육신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다 이룬 거예요. 우리를 육신으로 다뤄줘야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그 다루심과 일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일 때는 자아가 생생히 살아있는데 인간이 육신이 될 때는 죽기 위해서 육신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육신으로 만들어놨는데 우리는 이 육신으로 나도 인간이라고 나오니까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인생의 사상, 인생의 의식과 사고방식과 하나님의 의식과 다르니까 전도서 9장 3절에 보면, 사는 것이 미친 짓이라고 하는 거예요. 누가 결혼은 미친 짓이라 하는데 전도서는 그것보다 더 나갑니다. 결혼을 비롯해서 피아노 과외하는 것, 밥 먹고, 잠자는 것, 모든 것이 미친 짓이에요.
여기에 대해서 만약에 우리가 반항을 하든지 발악을 하게 되면 주님께서 “어, 인간 행세하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나는 너를 육신으로 보는데 입 있다고 인간으로 행세하는 거야?” 인간으로 행세하는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육신으로 바꾸는 그것이 다 이루었다 영,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그겁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육신으로 보고자하고 우리는 아직도 가치 있고 의미 있고 참하고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는 스스로 보기에도 괜찮은 하나의 인간으로 보려고 하고. 이런 충돌, 갈등 그걸 감사하게도 전도서를 맞이하면서 인간은 사는 것도 미친 짓이다. 네가 공부를 많이 했어? 다 헛소리야. 헛된 거야. 헛되지 않는 게 무엇입니까? 물으면, 헛되지 않은 것을 소망하는 게 헛된 거야.
그래서 제가 이것을 어떻게 정리하느냐 하면, 정리하는 방법을 공개하겠습니다. 처음에 전도서 1장에 보면,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다가 다섯 번 나오지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나오는데 ‘헛되다’를 같은 말로 허무니까 ‘허무가 있다’고 엿가락처럼 늘여보겠습니다. 그냥 헛되다고 하면 말이 안 되니까. 왜 늘였느냐? 헛됨이 있다고 늘임으로써 여기 ‘있다’에 반대가 성립되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아이디어를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다 이루었다는 사건이 예수님 혼자서 레고랜드 조립해서 다 이루었구나. 또는 로봇 태권브이 조립해서 다 이루었다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에 가해하고 예수님을 죽이고 핍박하는 활발한 사탄의 세력들이 작용을 하고 도와줘서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죽고 난 뒤에 부활하고 난 뒤에 다 이루었다가 아니고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죽어가고 있으면서. 우리 인간들 눈에는 최후에 자존심 세우는 것이고 발악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에 돌아 맞아 죽으면서 예수님 보인다. 어쩌라고? 진작 보지. 죽을 때 보느냐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 사건을 다 이루었다 할 때는 반드시 대립되는 요소를 배치해줘야 돼요.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이라면 상대방은 반 예수님, 반 복음이 되겠지요. 이 반 복음 세력이 예수님에 대해서 최후를 그런 식으로 배웅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는 것으로 되지 않고 십자가 지는데 있어서 부정적으로 협조한 그러한 반대세력을 노출시키는 데도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어느 쪽이냐 하면, 그 당시 인간들이 예수님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쪽에 인간들이 있습니다.
열두 제자의 대표자격인 베드로가 그렇게 물 위를 걷고, 자기 장모도 낫고, 오병이어도 맛보고 했지만 결국 예수님께서 체포될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예수님에 대해서 경호인도 아니면서 근접해서 말고의 귀를 베고, 온갖 멘트를 날리면서 제가 목숨을 다하여 주를 따르겠다고 아무리 언급을 해도 여전히 베드로는 어느 위치에 있느냐 하면, 예수를 반대하는 이쪽이 납득이 되고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답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다워야 되는데 베드로의 순수한 인간성, 손해 보면 언제든지 배반할 수 있는 너무나 인간다운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놓치지 않고 로마서 8장에서는 이걸 육신이라고 건지신단 말이죠. “아이고. 쓸모 있다. 이것 봐 육신이잖아.”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주님께서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육신으로 보는데 하나도 버릴 게 없이 다 유용하게 쓰시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말씀을 다 이루었다 할 때 예수님과 그 반 예수, 대비되는 요소가 있는 것처럼 헛되다고 그냥 할 것이 아니고 허무가 있다와 그 다음에 뭐가 있다. 그러니까 허무가 있다고 하고 반대편은 뭐, 뭐가 있다를 대비시킬 때 이 대비를 두고 끌고 가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 이 말이죠. 도저히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아요. 전도서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끌고 와서 십자가에 대립되는 세력으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 사건을 전도서에 미리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대립되는 구조를 이 안에서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허무가 있다는 말은, 여기 ‘있다’를 ‘없다’로 바뀌는 겁니다. 무엇이 없고, 무엇이 없고, 전도서를 통해서 다 찾아내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허무가 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없다고 하는데 여기 없다에 해당되는 이런 것들이 우리는 철석같이 없다가 아니고 있다고 간주하면서 인생들이 살아오기 때문에 그 인간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요인이 우리 안에 내장돼있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없음을 뽑아냈는데 몇 가지라고 정해진 건 아니고 제 나름대로 뽑았는데 첫째는 신의 지시가 없어요. 전도서에는 누가 신의 뜻에 따라 했다는 말이 하나도 없어요. 신의 지시가 없는 거예요. 신의 뜻에 따라 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전도서 입장에서는 너희들은 하고 싶은 대로 했지 절대로 하나님 시켜서 했다는 그런 비겁한 변명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뭐든지 해놓고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순교도, 전교도. 그걸 신의 뜻으로 헌금한다는 그런 되도 않은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게 전도서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시킨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이 시켜서 했다는 것을 우리가 유지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살해하는 동기로 이어집니다. 신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의 구세주를 죽이는 강력한 동기가 되는 거예요. 그럼 그 당시에 신의 지시를 따라서 성전 만들고, 이스라엘을 운영했던 유명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종교인들이지요. 종교란 인간의 사상의 극점입니다. 그 극점을 장악하게 되면 모든 걸 장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간질병 가진 사람 주께서 귀신 쫓아내도 마태, 마가, 누가복음 보세요. 간질병 걸린 사람을 쫓아낼 때 귀신 쫓아낸다고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진짜 오야봉, 진짜 귀신의 대장은 간질병 걸린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진짜 잔챙이들은 게거품 물고 나가지만 진짜 악마에 의해서 심하게 장악된 사람들은 아주 냉정하게 예수님을 재판으로 잘 처리하고 일을 깔끔하게 정리한 거예요. 한 사람 죽여서 나라가 살자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게거품 물고 귀신 나가지 않았어요. 그냥 그들은 할 도리를 했을 뿐이지요. 나중에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이 성령 받아서 십자가 끄집어내니까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어찌할꼬?” 이렇게 나오죠.
결국 이 말은 게거품 물고 병 낫고 해도 구원받은 뜻은 아니란 말이죠. 구원은 근원적인 것을 경과해야 되지 중심을 관통해야 되지 그냥 폼만 낸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첫 번째는 신의 지시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만남이 없어요. 만남이 없고 발생만 있는데 만남이 없다는 말은, 인간 대 인간의 상호교류나 서로에 대한 관심사, 돌봄 이게 전도서에는 일체 없어요. 현대인한테는 전도서가 멋집니다. 자기밖에 모르니까. 세 번째는 눈물이 없어요. “운다고 별 일 있나. 어디서 질질 짜고 그래.” 눈물이나 연민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아주 차갑고 냉정하고 냉혹해요. 울어? 우는 것 자체도 헛되고, 우는 걸 참는 것도 헛된 거고.
네 번째는 약속이나 보상이 없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미래가 없다. 희망이 없다. 전도서에서는 일체 희망이나 미래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살다 죽어. 좋은 나라 기대하지 마. 너는 좋은 나라 기대할 권리가 없어. 결국 그 동안 살아온 것이 미친 짓이라는 걸 깨닫게 하는 거죠. 얘 공부 못한다고 쥐어박았지만 쥐어박는 나나 너나 다 소용없는 짓이다.
다섯 번째가 놀라운 이야기인데 신앙이 없어요. “하나님 믿습니다.”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아요. “그냥 살아.” “주여,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괜히 오버하지 말고 그냥 살아. 그 말에 내가 안 속아 넘어가.” “주여,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전도서는 육신의 문제를 영으로 풀지 말고 육신의 문제는 육신으로 풀어. 뭐, 괴로워? 그러면 술 먹고 춤 춰. 그게 너한테 분복이고 축복이야. 이렇게 이야기해요.
표정들을 보니까 전도서를 한 번 읽어보지 않고 온 모습들이에요. 제발 신앙 생활하지 말라는 거예요. 신앙 생활한다고 사람 인격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점수 더 주는 것도 아니에요. 괜히 지가 켕기는 게 있어서 신앙생활하면 저주 적게 받고 벌 안 받을 줄 알고 깝죽대고 하는데 신앙 생활하나 안 하나 인간은 똑같으니까 신앙생활 접어라 이 말이에요. 신앙 생활하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란 말이죠. 덧붙여서 제발 성화 생활하지 마라. 이게 전도서입니다. 성경이야기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에요. 신앙 생활하는 건? 신앙생활 안 하면? 신앙생활 안 하는 게 미친 짓이라니까.
그 다음에 여섯 번째 기적이 없습니다. 전도서를 읽어보면 평범해도 너무 평범해요. 전도서에는 기적이 없는데 기적을 은근히 노린다는 것은 마음이 그만큼 음흉하다는 뜻이고 그것은 그만큼 지혜를 모른다는 뜻이고 어리석은 자고 악인으로 규정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적을 노린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데 이것은 처음에 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인간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볼 때는 육신으로 보기 때문에 자꾸 인간답게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할 줄 아는데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육신으로 돼야 될 목적이기 때문에 육신으로 끝나버리지 그 중간에 인간이란 것은 자기가 자기한테 치장, 화장을 한 거예요.
제가 하나 예를 들어볼게요. 인간은 육신이 먼저고 자아는 두 번째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을 나라고 지칭하는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기억 못하지요. 언제부터 나를 나라고 인정했는지 호칭했는지 기억 안 나지요. 우리는 내가 언제 나라고 했을까 하는 그 기억조차도 기억 못해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언제 내가 지금 나의 몸이 나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걸 놓치고 까맣게 망각할 그때가 온다는 거예요. 벌써 온 사람 있어요. 어떤 사람은 3급 받고, 어떤 사람은 2급 받은 사람 있는데. 인간은 육신이 먼저지 자아는 나중입니다. 육신이 인간을 장악하지 내가 인간을 조정하고 관리할 그럴 입장이 못 돼요. 말 뒤에 마차를 놓아야지 마차 위에 말을 두면 갑니까?
육신이 먼저고 그 뒤에 인간이 죄를 지어서 자기 품위 유지한다고 갖다 붙인 것이 자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육신으로 다루는데 우리는 뒤에 엉뚱하게 붙인, 사실은 마귀가 붙인 것이지만, 자아라는 걸 붙여놓고 그 다음부터 육신을 자아의 자존심과 자아의 영광과 명예와 이름을 위해서 주님의 육신을 활용하려고 애쓰다보니까 현실감이 떨어져요. 그러니까 누가 힘든가 하면, 본인이 힘들어요. 그런데 인간은 내 육신에서 내 자아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하겠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전부 다 마차 위에 말을 놓고, “이 몸은 내 거야.” 하니까 “그게 맞나?” 하고 서로 다 틀린 걸 모르고 같이 사니까 서로 맞다고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거기서 인간들이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본격적으로 중요한 대목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인간들이 지혜를 끄집어내요. 인간들끼리 자기 생활에 필요한 지혜를 끄집어내다보니까 진짜 지혜는 헐~ 뭐야 이거. 인간들 저희들끼리 이것이 인간답다. 이것이 인간의 고상함이다. 인간의 철학이다. 자기들끼리 어떻게 해놓고는 그걸 하나님에게 인정해달라고 결재를 해달라고 내미니 하나님께서 그걸 인정하시겠습니까? 거부해버리죠. 거부한 모습이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을 판단해서 죽이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하다고 그렇게 판정을 내리니까 뒤에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리라. 라는 것은 성령의 객관적 사역입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 11절.
자기 주제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아무리 지혜를 이야기하고 하나님, 예수님 이야기해도 붙어있는 자아를 자기 힘으로 살려내겠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거든요. 살아있을 때 행복하게 살고 죽어서 천당 가겠다. 이건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누구 생각이에요? 본인 생각이에요. 그 자체가 지혜가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은 뭐랍니까? “에라 인간아. 어디 미친 짓을.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 그런 짓하는 것도 헛된 거예요. 그러니까 전도서를 안 보잖아요.
인간들끼리 하는 지혜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싱크대에 물때가 있으면 식초로 닦아주면 됩니다. 그런 이야기하면 솔깃한 거예요. 제가 적어왔어요. 여자 분들은 어떤 것에 솔깃하냐 하면, 삼겹살 671, 삶은 계란 78, 양념치킨 219, 팥빙수 400~988, 프라이드치킨 268, 삼계탕 1030, 닭볶음탕 201, 순대국 114, 소갈비 찜 124, 자반고등어조림 207, 오징어 대친 것 60, 라면 525, 떡볶이 226, 김밥 484, 비빔냉면 405, 물냉면 445, 순대 235, 쫄면 458, 김치만두 34칼로리입니다.
이게 사는 지혜에요. 이것 하면 여러분 ‘아멘’ 해야 돼요. 우리는 여기에 매여 살아요. 이런 게 필요한 거예요. 이런 게 중요하지 무슨 헛되고, 헛되다는 소리를 왜 듣습니까? 우리 인간의 품격에 도움이 안 되는데. [최초 계약 7년 만기 후 5년마다 갱신되는 상품으로 갱신을 통해 최대 86세까지 보장 가능하며 갱신 계약의 보험료는 갱신일 현재 피보험자의 나이 및 보험료율에 의해서 인상 될 수 있습니다. ○○○ 무배당 OK 실버보험] 이게 지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성경이 왜 필요합니까? 이런 게 필요하지.
기적은 없습니다. 뭐가 기적이냐 하면, 내가 기적을 원하고 기적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헛된 것을 알 때 그게 기적입니다. 참 헛된 인간이 안 헛되려고 몸부림치는 꼴을 봐라. 그걸 어떻게 발견하나? 성령이 아니고서야 발견할 재주가 없잖아요. OK 실버보험, ○○○보험이나 쳐다보고 있고.
그 다음에 전도서에는 진리라는 게 없습니다. 진리가 없다는 말은, 전도서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인간이 신에게 묻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에게 질문할 권한이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아 어디 있느냐고 묻지요. 성경에 모든 시작은 질문자가 따로 있고 우리가 질문하면 안 돼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신에게 질문한 건 뭐냐? 그걸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왜 우상숭배가 되느냐 하면, 사람이 누구한테 질문할 때는 상대방을 위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고 질문자 본인을 위하여 질문하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우상숭배 앞에 반드시 붙는 게 있어요. 항상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위해서 신과 거래와 협상과 타협에 나서는 것. 이 정도 바치면 복 주겠습니까? 하고 노리는 것, 전부 다 우상숭배에요.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기 때문에 진리가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너는 진리를 알 필요도 없고, 진리냐 아니냐는 내가 정하는 것이지 네가 정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지 정해버리면 우리는 안 진리로 자기를 살려내는 데 요건으로 집어넣는 경향이 있어요.
예수님과 빌라도가 만났을 때 빌라도가 건방지게 예수님한데 질문했어요. 진리가 뭐냐? 예수님은 답변을 안 해줬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진리를 앞에 두고 진리가 뭐냐고 묻는 것은, 진리가 입을 열고 진리를 이야기해줘도 그 사람은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진리를 엉뚱한 데서 찾고 있단 말이죠. 이미 진리가 자기 앞에 있는데 새삼스럽게 진리가 뭐냐고 물으면 그건 답변 못하지요. 자기 아버지가 앞에 있는데 자식이, “아버지, 아버지가 누구십니까?” 이렇게 묻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것은 어떻게 답변을 못하지요.
팔 번은 도덕이 없다. 착하게 살기, 바르게 살기, 이런 게 없습니다. 그냥 네가 사는 자리에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 양태, 그 모습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 모습을 전도서가 너무나 잘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네가 아무리 착하고 바르게 살더라도 그 착함이 결국 자기한테 유리하도록 작용하는 그런 노림수로 착해봐야 그 착함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용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큰 교회에 얘들을 보내는 것은 큰 교회를 이용하는 거예요. 오다가 그 이야기 들었어요. 큰 교회에서 누굴 만나겠는가? 전도서에 만남이 없는데? 만남이 없으니까 이용만 있는 거예요. 어떻게 상대방을 나 유리한 쪽으로 이용할 것인가 그것만 있는 거예요. 친구? 전도서에는 친구가 없어요. 누구 좋으라고 친군데. 그 사람이 친구라고 언급할 때는 비로소 친구가 될 때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친구라는 말을 했을 거예요.
9번이 뭐냐 하면, 이상국가가 없어요. 하나님의 뜻대로 조찬기도회하면서 나라를 이렇게 하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독교국가 될 것이다. 복음적인 국가 될 것이다. 또는 교회를 이렇게 하면 온전하고 이상적인 교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꿈은 전도서에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지상에 어떤 희망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국가라든지 사회라든지 가족이든지 어떻게 보면 하나로 크게 모인 것 같지만, 인간들이 이상국가를 기대하지만 그 이상국가의 주인공은 본인 말고 다른 사람이 되게 되면 그 국가를 탈퇴하게 돼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단체도 마찬가지고. 십자가마을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고. 항상 주도권자 중심에 본인이 끼어든다. 그걸 어려운 말로 본인의 자리를 그런 식으로 확보하는데 만약에 지장이 있다면 탈퇴하게 돼있습니다. 나라가 내 원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민 갈 생각을 항상 갖게 돼있어요. 북한에서 인민들이 만족할 수 없으니까 탈북 했다. 탈북 했다가 남쪽에서 살기 어려우니까 다시 북으로 가고. 평양에서 기자회견하고. 그 사람 또 내려옵니다.
오랜만에 기쁜 소식 전합니다. 열 번째는 뭐가 없느냐 하면, 부러워할 사람이 없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지만 본인한테 물어보세요. 안 크거든요. 아무 부러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저 사람처럼 됐으면 좋겠다. 막상 돼보세요. 역시 내가 살아온 이것이 나한테 맞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전도서에는 신의 지시가 없어요. 두 번째, 만남이 없습니다. 세 번째는 눈물이 없어요. 네 번째는 약속이나 희망이 없어요. 보상도 없고. 다섯 번째는 신앙이 없습니다. 여섯 번째는 기적이 없어요. 일곱 번째는 진리가 없습니다. 여덟 번째는 도덕이 없습니다. 아홉 번째는 이상국가가 없습니다. 열 번째는 부러워할 사람, 모델로 삼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럴 것 같으면 하나님 말씀을 뭐 때문에 믿노? 안 믿지. 그래서 하나님 뜻은 뭐냐? 믿지 마. 지금 전도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서 읽어보지도 않고 지 마음대로 해석해서 하나님께서 보상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을 제발 좀 되도 않는 소리하지 마. 믿지 마. 누가 믿으래. 그래서 신약에 와서 구원받은 사람은 주께서 알아서 골라서 채택해서 천국 보내십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처소를 마련해놓고 통보가 가면 그 사람 처소가 하늘나라에 있고, 통보가 안 오면 맨날 통보 기다리다 지옥 가는 거예요. 그 통보가 뭐냐? 성령님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 갈 때 주님께서 오지 말라고 했어요. 가봤자 네 자리 없다. 내가 가서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그때 널 부를게. 만약 제가 베드로 같으면, 통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통보 없으면 네 자리도 없는 줄 알아라. 이렇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뭔 뜻이냐 하면, 자리가 마련돼 있다. 통보를 해준다. 할 때 제가 만약에 통보가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 그런 질문을 인간이 하나님께 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통지서가 왔다면 통지서 온 사람의 특징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 특징이 뭐냐? 성령 받은 사람인데 그게 “주여, 우리는 기껏해야 나밖에 모르는 육신이었습니다. 나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저 육신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으로 온다는 그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깨달을 때 내가 주님을 이용하고 믿고 할 입장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되기 위해서 우리를 철저하게 이용했는데 이렇게 이용당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성경이 이렇게 무섭고 겁나는 문제입니다. 상당히 우리가 생각하기에 말씀대로 지켜서 영광 돌리고 구원받겠다는 그런 시도는 다 우상숭배에서 나온 본성에서 나온 발상에 불과합니다.
그 다음에 전도서에 없는 것만 있느냐? 있는 것도 있습니다. 반갑지요. 첫 번째, 허무가 있어요. 두 번째, 죽음이 있습니다. 세 번째, 심판이 있습니다. 네 번째, 끝이 있습니다. 계속 들어봐야 우리 좋은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섯 번째, 흔적이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것은 미친 짓인데 그게 중요한 것은 육신의 흔적이기 때문에. 여섯 번째, 차이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 일곱 번째, 육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마지막 여덟 번째, 왕이 있습니다. 전도서 1장 1절만 봅시다. “다윗의아들 예루살렘 왕” 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그냥 궁예나 왕건, 이성계 그런 왕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왕입니다. 각별한 지점, 특별 지점의 왕입니다. 그 왕은 독점해 있습니다. 뭘 독점하느냐 하면, 헛되다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제대로 헛되다고 이야기해주신 그 분의 심정을 반영하는 거예요. 펼쳐 보이는 겁니다. 그 왕이 지혜를 주시고 그 지혜대로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그 지점이 하나님과 인간이 접선이 가능한 연결지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예수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바로 그냥 왕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왕이 외치는 지혜,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전도자, 전도자가 전하는 전도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본격적으로 이 예루살렘의 왕이 있음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든 없음은 반드시 그대로 진행됩니다. 허무하다면 허무한 거예요. 군말하지 맙시다. 다만 우리가 믿을 것은 남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왕 되신 분이 허무하다면 그것은 허무한 거야.”라고 그걸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왕이 주신 지혜를 증거하는 용도로서 우리는 이미 그 안에 편성돼있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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